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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 때린 거, 너야?”
남승우가 아픈 팔을 돌아보다 기겁하여 사색이 되었다.
“이건 또 뭐…. 하, 하은기?”
“때린 거 너냐고 묻잖아.”
비죽하게 사람들 머리 사이로 솟은 하은기는 살벌한 살기가 가득 했다. 윤수는 부은 눈으로 간신히 서서 그를 올려 보았다.
모자로 다 가려지는 작은 얼굴이 분노로 차갑게 식어 있었다. 항상 그에게 듣고 싶은 말을 들려주던 입술이 사납게 떨리고 있었다. 도시의 불빛에 비친 갈색 눈은 쳐다보기도 힘들 정도로 바짝 독이 섰다. 평소의 그가 아니었다.
“네가 뭔데.”
복받치는 분노를 참기 힘든 듯 은기가 말을 고르더니 다시 씹어뱉는다. 너무 화가 나서 이성이 끊겨, 오히려 더 냉정해진 모습이었다.
그는 당황한 남승우의 매끈한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어떻게 이렇게 다르지.’
같은 까만 눈인데 이렇게 다르다. 윤수의 것은 부드럽고 깊은 애정과 배려가 담겼는데, 이 쪽은 더러운 욕망만 드글거린다. 역겨웠다.
“은기도 있었어?”
옆에서 중얼거리는 예나의 말에 윤수는 멍하게 그를 보았다. 맞은 얼굴에서 아픔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가 하는 말에서 한 자, 한 자 기억의 실을 따라 옛날 한 여자의 말이 소환된다. 경찰서에서 누군가에게 난장을 치던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하늘거리는 기억 속에서 그녀는 뼈아프게 외쳤다.
그 날의 윤수는 서에서 제 양 팔을 붙들고 잔뜩 움츠리고 있었다.
[네가 뭔데! 내 배 아파 나은 새끼보고 호로 자식이래, 이 금수만도 못한 호로자식이?]
삐이이이-
이명이 바람에 실려 윤수의 귓속으로 말려 들어온다.
‘말려야 하는데.’
그런데 몸이 완전히 굳어 버려 움직이지 않았다. 그 사이 서슬퍼런 은기는 이성이 완전히 끊긴 듯 거침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어어!”
“꺅!”
그는 남승우의 멱살을 한 손으로 잡아 올렸다. 세미 와이셔츠가 다 구겨지고 턱에 은기의 주먹이 세게 닿아 그는 숨도 못쉬고 부들거렸다.
앞으로 튀어나온 캡으로 그의 이마를 찍으며 은기가 그에게 밀착했다. 그는 얼굴을 가까이 대며 남승우에게 서늘히 말했다.
“말해보라고, 새끼야. 네가 뭔데 손대.”
둘 사이로 끼어들 틈도 없이 살벌한 분위기였다.
은기는 팔을 잡고 안쪽으로 파고들더니 영화처럼 바닥에 패대기쳤다. 큰 움직임에 은기의 캡모자가 멀리 날아가서 바닥을 뒹군다.
퍽!
엎어진 남승우를 향해 은기가 위에 올라탔다. 그는 남승우의 머리를 세게 움켜쥐고 들어올렸다. 그는 은기가 두려웠다. 갈색 앞머리 사이로 비친 눈이 섬뜩했다. 남승우가 아픔도 잊은 채 마른침을 삼킨다. 이건 사람의 눈이 아니다.
“경고했지. 누구 밑에서 따까리 짓 하든 내 눈에 밟히는 짓만 하지 말라고.”
저음의 경고가 오싹하게 파고들었다.
“크윽!”
자신이 왜 이런 일을 당하는지 이해못하는 눈치였다. 갈팡질팡하는 남승우의 까만 눈을 내려보며 은기가 느릿하게 말했다.
“아아, 네가 건드린 게 누군지 몰랐겠지. 모르는 것도 죄니까 똑똑해지라고 전에 말하지 않았나? 후배 새끼야. 기억 안나?”
느릿하고 낮은 목소리에 남승우는 그가 더 소름끼쳤다. 허공에서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이 금방이라도 남승우를 칠 것 같았다. 고도로 화가 난 은기는 가까이만 가도 진한 분노와 살기가 피부를 찔렀다. 주변 사람들조차 물러날 정도였다.
사람들이 말려도 꼼짝도 않는 은기를 향해 윤수가 손을 뻗었다. 안경을 끼고 나오지 않아 시야가 약간 흐릿했다.
‘막아야….’
하지만 사방에서 날카로운 바람처럼 여자의 목소리가 우루루 몰려온다. 윤수는 양 귀를 막았다.
더 독이 올라 처절하게 변하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녀가 어디선가 빗자루를 들고 와 ‘그 사람’을 마구 후려쳤다. 경찰들이 우루루 몰려와 말렸지만 힘이 넘쳐 말릴 수가 없었다.
[네가 뭔데, 내 금쪽같은 새끼 그 험한 데 끌고 가서 애를 엉망으로 만들어 놔! 이 천벌받을 놈아아아!]
악다구니치는 절규와 비명이 길어지고, 윤수는 번쩍 정신이 들었다.
사람을 치기 직전인 은기가 보였다.
”그만!“
윤수가 재빨리 다가가 은기를 남승우로부터 떼놓으려 했다. 어찌나 힘이 들어가있는지 꼼짝도 않는다. 반드시 이 자리에서 그를 결단내야 끝내겠다는 굳은 의지마저 보였다.
“좀 잡아주세요!”
윤수가 얼른 주변에 도움을 요청했다. 건장한 남자 몇이 붙고 나서야 겨우 은기의 손에서 남승우가 떨어져 나갔다.
화가 가라앉지 않아 어깨까지 들썩대는 은기를 엉망이 된 윤수가 달랬다. 피가 자꾸 입 속에 고여 발음하기가 힘들었다.
“치지마. 너만 괜히 불리해져.”
다행히 본격적으로 때리기 전에 막았다. 조금 이성이 돌아온 건지 윤수의 말이 들리는 듯, 그는 남승우를 죽일 듯이 노려보기만 하고 손을 대지는 않았다. 바닥에 패대기 치기는 했지만 자신이 맞은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폭행의 유무로 따지면 이 쪽이 우세다.
'다행이다.'
요란법석인 사람들 틈으로 윤수가 먼저 아직도 어지러운지 휘청대는 예나를 챙겼다.
"어디에요! 어디!"
제복을 입은 경찰들 몇이 달려왔다. 폭행 혐의 관련자라는 명목으로 우선은 다함께 서로 연행되는 형식이었다.
차에 타기 전, 윤수는 자꾸만 살벌한 눈으로 남승우만 쫓는 그를 붙들더니 휙 안아버렸다. 그제야 은기가 움찔하더니 멈춘다. 손으로 등을 토닥대며 윤수가 오히려 그를 달랬다.
“괜찮아. 이제 그만해. 다 끝났어.”
분노로 떨리던 은기의 커다란 몸에 진동이 잦아든다.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 내쉰 뒤 은기는 볼멘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맞았는데, 화나지도 않아?”
“화나. 근데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예나 씨부터 우선 집으로 보내고,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조금 누그러진 은기가 피식 댔다. 달래줘야 할 사람이 누군데 위로 받고 있는 상황이라니. 황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잘도 이성적이야.”
윤수가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내가 이성적이어야 네가 덜 다쳐. 정말 때리기라도 했어봐. 저 쪽에서 작정하고 걸면 쌍방 폭행이야, 이건.”
결국 은기가 졌다며 한숨만 길게 내쉬었다.
“누가 누굴 걱정해. 어이 없네, 진짜.”
다가온 경찰이 그들을 차 안으로 밀었다. 사람들이 연신 사진을 찍고 있었다.
“빨리 타세요!”
그들은 경찰차에 나눠서 탔다. 은기와 윤수는 한 차에 탔다.
은기는 가는 내내 극도로 차가워진 윤수의 손을 경찰 모르게 잡고, 차마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해 반대편을 쳐다봤다. 심하게 다친 것을 보니 지금 당장이라도 다시 남승우를 때려눕히고 싶은 충동이 들었기 때문이다.
윤수만 놀라 잡힌 손을 꿈지럭댔다. 그는 가까이 있는 은기의 귀에 얼굴을 가져다대고 속삭였다.
“이, 이거 다른 사람이 보면 어떡해.”
은기는 여전히 가라앉은 얼굴로 턱선만 보인 채 작게 답했다.
“괜찮아요. 안 봐. 우리한테 관심없어.”
경찰이 백미러를 흘끔 댈때마다 간이 쫄아들었지만 심장만은 기분좋게 뛰었다.
충실히 조사에 응대한 그들은 송예나가 싫다는 것을 억지로 남승우가 데려가려 했다고 주장했고, 그는 당연히 아니라고 반박했다. 예나가 술에 취해 아닌 것을 우긴다는 남승우의 주장은 그녀의 혈중 알코올 농도를 확인한 경찰에 의해 무산되었다. 극도로 낮았던 것이다.
폭행건은 윤수가 일방적으로 맞은 것으로 끝났다. 인터넷에서도 목격 사진이 떠돌고, 네 사람에 얽힌 이야기가 괴담처럼 번졌다. 송예나를 사이에 둔 두 남자의 혈투라느니, (윤수가 맞은 건 이미 논외가 되었다) 사랑 싸움의 말로라느니 하는 식의 우스갯소문이었다.
우후죽순처럼 번지던 것들이 각 소속사들의 노력으로 진화될 때까지 시간이 길었다. 예나를 도운 것이 된 은기는 방송 활동을 한 주 정도만 쉬기로 했고, 폭력을 휘두른 남승우의 경우는 아예 연예계 활동을 중단했다.
이후에 벌어질 파동도 모르고 윤수는 서에서 나오자마자 여기저기 걸려오는 전화와 달려온 매니저에게 시달리고 있는 은기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병원으로 데려다준다며 잠시만 기다리라는 말을 충실히 따르는 중이었다.
경찰서 간판의 파란빛이 그의 얼굴로 쏟아 내렸다. 서 안에서 흘러나오는, 밤에도 환한 조명등에 온 몸이 따끔댄다.
“스읍.”
그제야 아프다는 걸 인식한 그가 조금만 건드려도 아픈 볼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코피는 멎었고, 터진 입은 여전히 아프다. 이도 몇 개는 흔들거리는 기분이다.
‘최악이야.’
그런데 마음은 후련했다. 몸은 비록 엉망진창이지만 해결하지 못했던 큰 산을 넘긴 느낌이 들었다. 도움이 절실했던 사람을 도왔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마음 속에 풀리지 않던 차가운 앙금이 녹아 없어지는 기분이었다.
윤수가 빙긋 웃으며 휴대폰을 보자 그가 마지막에 보낸 메시지가 보였다.
-예나 선배 못 데려가게 잠깐 붙들고 있어요 할수있죠 내려갈게요
그는 멀리 통화를 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는 은기를 흘끔 보았다. 곰 같은 매니저는 눈에서 레이저빔을 쏴댈 기세로 뒤에서 흉흉하게 노려보고 있고, 총체적 난국이었다.
미안해진 윤수가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은기까지 말려서 일이 더 커진 건가…. 메시지 괜히 보냈어.’
늦으면 걱정할까봐 간략하게만 이야기한건데 저리 바로 뛰어올 줄은 몰랐다. 아니, 정말 몰랐을까? 은기 성격에 이야기하면 부리나케 달려올 줄, 정말 몰랐나?
만약의 사태에 대한 대비책으로 은기에게 연락을 넣어둔 것일테다. 윤수가 머리를 양 손으로 쥐었다.
‘결국 스스로 해결한 건 아닌건가.’
은기의 도움이 약간이나마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의혹과 좌절의 늪에 빠지는 대신 앞으로 나아가기로 했다. 한 발 나아간 것은 축하해야 할 일이다. 그래서 자신을 다독였다.
‘그래. 어쨌거나 의의는 있어.’
멈췄던 시간이 풀리고, 제대로 흘렀다. 이미 꼬여버린 많은 것들을 한 번에 풀기는 어려우니 조금씩 밀어올리면 된다.
그때, 윤수와 마찬가지로 온 몸에 먼지가 묻은 송예나가 하이힐을 질질 끌며 걸어왔다. 상태가 여전히 안 좋아보였지만 아까보다는 나아 보였다. 하얀 원피스가 온통 검게 얼룩져 있어 안타까웠다. 그녀가 미안한 듯 주저하며 물었다.
“몸은 좀 어떠세요?”
“괜찮습니다. 며칠 쉬면 다 나을 건데요.”
“며칠 쉴 정도로 나을 상처가 아닌 것 같은데….”
걱정스럽게 얼굴을 살피는 예나를 피해 그가 고개를 돌렸다. 괜히 어색한 윤수는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예나 씨 연기하시는 거 저희 어머니가 좋아하세요. 얼굴 다치셔서 스케줄에 문제가 생기거나 하진 않습니까?”
“이런 걸로, 뭘. 긁힌 수준도 안되는 걸요. 덕분에. 정말 감사합니다.”
쑥스러이 볼을 긁던 예나가 휴대폰을 만지작댔다.
“저기요. 고마워요. 이름 뭐에요? 연락처는? 꼭 답례하고 싶어서요.”
아까 조사할 때 다 들었을텐데. 그녀는 굳이 다시 윤수에게 물었다.
“아, 저는….”
말해주려 입을 뻐금대던 것은 어느샌가 온 은기의 큰 어깨에 막혔다. 바닥으로 날아갔던 모자는 다시 그의 머리 위로 얌전히 씌워져 있었고, 남색 셔츠에 먼지가 조금 묻어 있었다.
그는 예나를 노려보며 방어하듯 말했다.
“이 사람 이름 알 거 없고, 연락처는 없어. 답례는 소속사, 혹은 매니저 통해서 정식으로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