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편 -->
은기는 젤을 꺼내 아프지 않게 듬뿍 손가락에 발라 구멍을 넓혔다.
“집어넣을 때 소리 참는 것도 좋고.”
부들부들 떨리던 다리를 은기가 잡아 옆으로 벌렸다. 손가락이 늘어나면서 이미 액으로 질척대는 안을 더 깊이 쑤신다. 구멍 속 주름이 손가락에 밀리고 쓸리기를 반복할수록 윤수의 신음이 높아진다.
기어이 느끼는 곳에 정확히 긴 손가락이 안착해 누르자 그의 허리가 퍼드득 튀어올랐다. 큰 소리를 지를 것 같아 반사적으로 윤수가 입술을 깨물려 하자 은기가 혀를 찼다.
“입술 찢어져. 그냥 소리 내라니까.”
입술을 깨물지 못하게 은기가 얼른 다른 쪽 손가락을 그의 입 안으로 밀어넣었다.
강 하단에서 상류로 올라오는 연어처럼 쾌감이 등줄기를 타고 펄쩍펄쩍 뛰어 머릿속까지 헤집는다. 이어지는 애무와 구멍을 공략한 손가락에 기어이 윤수의 성기에서 묽은 액이 나왔다.
그는 못참고 혓바닥을 누르는 길고 단단한 손가락을 가볍게 물었다.
“으으….”
그 와중에 행여 세게 물어 다칠까봐 눈물까지 흘리며 쾌감을 참고 있었다. 간지럽게 느껴지는 것에 은기가 더 세게 물어도 괜찮다며 달래도 아랑곳 않았다.
“내가 상처입을까봐 끙끙대는 것도 좋고.”
윤수의 입에서 손가락을 빼니 가늘고 맑은 것이 주르륵 같이 딸려나왔다. 입술 위로 닿은 것이 궤적을 바꿔 끊겼다가 다시 이어진다. 사정의 여운을 담은 까만 눈빛은 풀려 있었다.
보기만 해도 아래가 오싹해지고 뜨거워지는 광경이었다. 은기는 이런 야한 몸이 자신에게만 열려 있다는 것이 만족스러웠다.
“나한테 닿으려고 노력하는 것도 좋아.”
그는 윤수의 눈가에 입술을 눌렀다. 좋을 이유는 셀 수 없다. 붙이는 순간 이유가 되니까.
“첨에 봤을 때 솔직하게 다 터놓는 귀여움도 좋았어요. 취해서 그랬겠지만.”
가물가물한 눈으로 날렵한 턱선이 뒤로 물러나는 것을 보던 윤수가 되물었다.
“첨에 봤을 때면, 술자리 때?”
은기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때 뭐라고 한지 정확히 다 기억나요?”
“…아니. 그 날 너무 취해서.”
“어떻게 하면 마음을 가질 수 있냐고 물었어요.”
자신은 그런 말을 했단 말인가. 처음 만난 사람에게? 윤수는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말해줬죠.”
알코올에 절여진 기억의 장막 속에서 희뿌연 것이 걷힌다. 은기의 붉은 입술이 매혹적으로 휘고, 그의 옅은 갈색 눈이 정면으로 취한 윤수를 응시하고 있었다.
[가지고 싶어요?]
윤수는 떨리는 눈으로 물었다. 그 날의 자신에게도 묻고 싶었다. 대체 무슨 대화를 한거냐고.
“뭐라고 했는데?”
술로 점철된 그 날이 회오리처럼 빙글대며 윤수의 머릿속으로 빨려들어왔다. 은기는 지금이나 그때나 여전히 자신감과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럼 가지라고.”
그 날의 은기가 말했다.
[형 건 모르겠지만, 내 건 어쩌면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윤수가 소주잔 건너로 보이는 은기를 멍하게 보았다. 마음을 가지라니. 이 잘생긴 만인의 연인을? 가지라는 건 훔쳐보기라도 하라는 건가.
그는 말도 안된다며 양 손을 내젓기까지 하며 격렬히 부인했다.
[나, 난! 그런 용기 없어. 그게 얼마나 어려운 건데. 난 못해. 불가능해. 절대 못해. 그럴 일을 겪었고, 난 계속 바뀌지 않을 거야.]
꼬인 목소리가 환청처럼 그들 사이를 돌았다. 부정적인 말이 연거푸 이어졌다.
침묵하던 은기는 곧 바다에서 사내들을 유혹하는 아름다운 세이렌처럼 매력적인 말을 읊조렸다.
[그럼 용기 날 때까지만 내가 도와줄게요.]
[그 다음은? 도와준 다음에도 내가 그대로면? 변하는 게 없으면? 또 혼자가 되면?]
두서없이 쏟아지는 두려움 섞인 물음표에 은기는 쉬이 답해주지 않았다. 그의 눈은 흔들리지 않는 돛대 같았다.
[하나씩 못했던 것들부터 변화시켜봐야죠. 뭘 못해봤어요?]
생각하는 듯 한참이나 말이 없던 윤수가 웅얼거렸다.
[섹스.]
이어지던 회상을 끊고 윤수가 벌개진 얼굴을 한 채 현실로 튀어나왔다. 원래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버전과 몹시 다르다. 분명 은기가 먼저 자자고 했는데. 술이 기억을 왜곡한 듯 했다.
“잠깐, 잠깐잠깐. 내가 진짜 그런 말을 했어?”
“그랬다니까. 기억하잖아요.”
“말도 안 돼….”
윤수는 본인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떠올려버린 기억은 이대로 호텔방에서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
윤수가 괴로움에 머리를 부여잡는 동안에도 물 흐르듯 이어지는 과거회상은 끊기지도 않았다.
[…네?]
은기의 입에 골인하려던 소주가 밑으로 주룩 흘렀다. 당시엔 은기조차도 당황한 듯 했다. 물론 술김에 한 말이라 여겨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다.
그가 술기운에 뱉은 사귄 남자만 해도 열 손가락은 되는 것 같은데, 한번도 그걸 안했다고?
심란한 은기의 속과 상관없이 윤수는 심각한 태도로 남은 소주를 쭉 들이켰다.
탕!
놓는 기세가 열렬할 것을 보니 거의 정신줄 놓고 가기 직전이다.
[진기 동생이니까, 너랑은 할 수 있을지도 몰라.]
슬슬 그만 마시게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고민하던 은기가 선전포고 같은 말에 피식 웃고 말았다.
[진짜, 진심으로 하는 소리 맞아? 후회 안할 자신 있어요?]
[응. 안해. 변하고 싶어. 도와준다며.]
애절한 강아지같은 까만 눈이 은기에게 매달려 있었다.
술 취한 취객이 귀여워 보이다니, 은기는 자신이 좀 어디가 이상해진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윤수와 말을 오래 섞다 보니 마음에 드는 것도 많았고,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서?
‘그것만으로 이런 생각이 든다고? 같이 자자고 하는데?’
진기가 일하는 곳에서 오래 지켜본 윤수의 그 메마른 나뭇가지 같은 황량한 눈빛이 계속 마음에 밟혔다. 버석대는 눈빛이 자신 앞에서 이지를 잃고 젖어드는 것도 좋았다.
미련을 토하며 인간적으로 우는 것이 꼴사납지 않았다. 진기라는 방패를 앞에 두르고 아직 놓고 있지 못함에도 변하고 싶어하는 그가 대견해 보였다.
은기가 보았던 수많은 사람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미련을 가진 사람들은 보통 대상에게 참견하고, 침범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는 그렇지 않다. 왜 그랬을까. 이유라도 있는 건가.
호기심이 생긴다. 피윤수라는 사람에 대해서. 그는 어떤 인간일까. 많은 사람을 사귀었으면서, 정작 섹스를 한 번도 못했다고 우기는 이 성인 남자는 침대에서 어떤 목소리로 울까.
첫 만남에 섹스라.
그는 잔에 소주를 들이붓던 윤수의 손을 잡았다. 취기에 떨리는 손이 차가웠다. 놀라서 보는 그를 무시하고 콸콸 부어진 소주를 은기가 대신 가져가 마셔버렸다.
그는 시원하게 들이키고 아까의 윤수처럼 테이블에 소리내어 빈 잔을 놓았다.
[이런 전개도 나쁘지 않네.]
[내 건데….]
윤수는 은기의 입 속으로 사라진 소주를 아쉬운 듯 웅얼댔다.
[좋아요. 우선 일어날까요?]
일어나는 은기를 따라 윤수가 테이블을 잡고 일어서려다 휘청거렸다. 은기가 얼른 다가가 그를 추슬렀다. 비틀대는 걸음을 똑바로 보정시켜 주면서, 은기는 술기운으로 벌겋게 달아오른 윤수에게 속삭였다.
[가요. 섹스하러.]
“다 기억났어요?”
“…응. 전부 다.”
기억을 삭제하고 싶다. 윤수가 처절한 얼굴로 은기를 외면했다.
“어때요?”
“쪽팔려….”
“왜? 난 귀여웠는데.”
싱글싱글 웃으며 하얀 건치를 보여주는 은기가 얄미웠다. 윤수는 울상을 하고, 은기는 제 성기를 잡은 채 그의 아랫입구에서 배회했다.
번들대는 액이 성기를 미끄러뜨리다 흘러내린다. 커질대로 커진 성기가 흉흉하게 입구를 찔렀다. 그가 고민 끝에 고른 콘돔이 터질 듯 팽팽하게 성기를 죄고 있다.
“흐읏…. 놀리지마.”
“놀리는 게 아니라 진심이라구요.”
“안 믿어.”
흥분에 들뜬 목소리에 비음이 조금씩 섞인다. 윤수는 삽입을 재촉하고 싶어서 엉덩이가 들썩거렸지만 차마 부끄러워서 말할 수가 없었다.
은기는 이내 한숨을 쉬며 쿡쿡 찌르던 성기를 뒤로 물렸다. 그러면서 고개를 내젓는다.
“안 믿는 사람이랑 섹스를 어떻게 해. 포기해야겠다.”
다급해진 윤수가 그의 허리를 다리로 붙든다. 예전에 비하면 놀라운 발전이었지만 본인은 인식하지 못하는 듯 했다. 은기가 즐겁게 눈을 휘었다.
“알았어. 믿어. 그러니까 빨리….”
“빨리, 뭐?”
마약같은 쾌감을 이미 알아버렸다. 얼른 쑤셔주고 근질거리는 아래를 뚫어줬으면 좋겠다. 느긋한 은기를 한 대 때리고 싶을 정도로 윤수의 몸은 달아올랐다. 평소보다 느끼는 지점이 빠르다. 비밀스러운 공간이라는 것 때문일까.
망설이던 윤수가 근질거림을 참지 못하고 드디어 말했다.
“너, 넣어줘.”
만족스럽게 웃은 은기가 애태우던 것을 그만두었다.
“금방 가게 해줄게요.”
입구 주변으로 난잡하게 퍼져있던 액 사이로 성기가 수월하게 들어간다. 은기는 한 번에 밀어넣었다. 배속까지 꽉 차는 질량감에 윤수가 헉, 숨을 들이켰다.
그 뒤론 은기는 말없이 몰아쳤다. 정신없이 성기가 엇박자로 들이닥치고, 불기둥처럼 그의 구멍 안을 쑤셨다가 빠져나갔다. 다리를 허리에 감아도 속도와 무게 때문에 자꾸만 풀려나갔다.
퍽! 퍼억!
“흐윽, 조금만 천천히. 흑, 흡!”
은기가 허리를 밀었다가 뒤로 뺄수록 말못할 쾌감이 화르륵 타오른다. 구멍 속에 뜨거운 불을 놓은 것 같았다. 성기에 성감대만을 쫓는 유도탄이라도 달아놓은 걸까.
은기의 부피 큰 성기가 드나들 때마다 구멍 안에서 시작된 불이 점점 엉덩이, 허리, 머리 위로 치고 올라간다. 그의 신음이 커진다.
“학! 으응…!”
윤수가 발끝을 휘고 허리를 허공에 띄웠다. 의식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몸이 그리 되었다.
찔끔찔끔 쿠퍼액이 윤수의 성기 끝에 맺히기 시작했다. 아양 떠는 것 같은 날카로운 비음이 새어나갔다. 놀란 윤수가 제 입을 틀어막는다.
“좋아요? 완전 빨아들이네.”
“왜, 왜 이러지.”
은기는 입술 끝을 말아올려 웃더니 더욱 밀어붙였다. 한 손으로 다리를 잡아 벌리며 동시에 다른 손으로는 윤수의 성기를 쥐었다.
“효과 좋네. 역시.”
넉넉하게 바른 윤활제가 물처럼 윤수의 엉덩이로 미끄러져 내린다. 연결된 구멍에서 거품이 잘게 일고 단단한 성기가 거칠게 드나들었다.
“뭐야, 이거. 느낌 너무…. 힛!”
이상한 신음이 또 튀어나갔다. 작고 뜨거운 뱀장어가 피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성감대를 찌르고 다니는 기분이었다. 쾌감이 머릿속에서 펑펑 터진다.
윤수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성기가 박힐 때마다 작은 비명을 질렀다. 그의 몸에는 온통 열꽃이 피어 붉었다.
“콘돔에 발린 거예요. 인체에 무해한 거.”
윤수가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상해…. 아윽!”
은기는 윤수의 양 팔을 잡고 성기를 박았다. 흔들리는 몸으로 밀고 들어가는 그것 위로 핏줄이 섰다.
콘돔도 뭔가 다른 재질인지 평소보다 더 느끼는 것 같다. 윤수는 정신없이 흔들렸다. 중간에 한 번 더 사정했는데 또 절정이 다가온다.
구멍을 긁는 성기의 격한 움직임에 윤수는 발가락을 일제히 움츠리고 허리를 더 높이 띄웠다. 발작처럼 온 몸에서 일어나는 간지러운 쾌감을 긁고 싶은데 은기의 손에 잡혀 그럴 수도 없다. 미칠 것 같았다.
“아, 아아아!”
박힐 때마다 윤수가 핏기 가신 손을 쥐었다가 폈다. 구멍도 그에 따라 조였다가 풀리는 것에 은기도 미칠 것 같았다. 참지 않으면 빨리 가버릴 것 같아서 극한의 인내심을 동원해야 했다. 윤수의 하얀 얼굴이 눈물로 얼룩져 있다.
‘돌겠네.’
오늘의 윤수는 여태껏 했던 관계 중에 제일 야했다. 더 야할 날도 있겠지. 생각만 했는데 성기가 크기를 더욱 키운다.
윤수가 구멍 입구에 밀착되는 성기가 커짐을 알고 놀라 고개를 들었다. 생리적인 눈물로 젖은 얼굴이 잘 보여서, 은기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변태인지 모르겠는데, 당신 우는 거 보면 짜릿한 게 있어.”
“변태 맞는 것 같…아윽!”
은기의 허리가 움직여 구멍 속을 한 번에 꽉 채웠다. 느끼는 지점을 꽂아버린 덕에 윤수의 허벅지가 덜덜 떨렸다. 그리고 기어이 세 번째 사정을 했다.
그의 다리를 잡아 벌리며 은기가 더욱 깊이 쑤셔넣는다.
“혼자만 변태되려니 좀 억울해지네.”
은기의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려 이불 위로 떨어진다. 그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반대로 물어볼게요. 내가 우는 거 보면 짜릿해질 것 같아?”
저 그림 같은 얼굴에 눈물 자국이 번진다니. 무표정하게 절제하는 가운데 떨어지는 눈물은 비극적이었다. 처절하게 우는 것도 마찬가지다. 윤수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죄어들었다. 그는 헐떡이면서도 꽤 단호히 말했다.
“아니, 안 보고 싶어.”
“왜요?”
은기가 우는 모습은 상상이 안 되었다. 그가 우는 상황이란 최악의 것일 때이지 않을까.
“잘 우는 성격도 아닌 것 같고.”
그가 연결된 채로 손을 뻗어 은기의 뺨에 대었다. 열이 오른 고운 피부에 차가운 손가락이 닿는다. 아몬드형으로 된 갈색 눈 아래 눈물 자욱이 없는데도, 마치 있는 것처럼 윤수가 그 아래를 손가락으로 닦았다.
“넌 울지마. 내가 대신 울게.”
은기의 얼굴이 이상해진다. 심장 어딘가가 추락한 기분이었다.
“…….”
말이 없어진 그를 응시하면서, 윤수는 자신에게 되뇌듯 말했다. 내가 대신 아픈게 낫다. 이 사람이 아픈 건 죽도록 싫다.
“나는 많이 울어본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괜찮아.”
담담한 말이 너무 처연해서 은기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뺨에 닿는 손이 너무 차가워서 심장이 꺼진다. 은기는 윤수의 손을 움켜쥐고 억지로 말을 끄집어냈다. 낮게 잠긴 목소리에 옅은 슬픔이 담겼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내가 안 괜찮아.”
눈물 흘리는 것에 익숙해질 리가 없다. 그건 위선이고, 스스로를 속이는 짓이었다. 윤수가 흘린 것이 눈물이었을지, 그가 모르는 고통이었을지. 은기는 묻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대체 당신을 끌어안고 바닥으로 잠기게 하는 그 검은 손이 무엇인지.
은기가 이를 갈며 박아넣었던 성기를 빼내고, 다시 밀어넣었다. 나가면서 펴지던 구멍 속의 주름이 다시 구겨진다. 호텔 침대가 열정적으로 삐걱댔다.
퍽!
“아…!”
윤수의 다리가 덜덜 떨리다 무의식중에 다시 그의 허리를 감았다.
“누가 당신 눈에 눈물 나게 하면-.”
퍽!
엉덩이가 은기의 손으로 허공으로 향한다. 윤수의 다리가 그의 허리에서 풀리고 경련했다. 위에서 아래로 성기를 짓누르며 은기는 다짐하듯 말했다.
“내가 가서 강제로 피눈물나게 할거야.”
은기는 허리를 숙여 그의 짭짤한 눈물을 핥아 먹었다. 소금맛이 나는 눈물이 안쓰럽고, 사랑스러웠다.
“알았어요? 다시는 그런 소리 하지마.”
윤수는 흔들리는 와중에 그의 팔을 꽉 잡았다. 어떻게든 제 마음을 헤아려주려고 애쓰는 이 사람이 너무 좋다. 온전치 못한 마음을 지켜주려고 노력하는 것이 예쁘다.
은기의 다정한 목소리가 과거에서 건너온다.
[그럼 용기 날 때까지만 내가 도와줄게요.]
술자리에서 한 의미 없는 말로 넘길 수도 있었는데. 은기는 그러지 않았다. 지칠텐데도, 상처 받았을 수도 있는데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 다음은? 도와준 다음에도 내가 그대로면? 변하는 게 없으면? 또 혼자가 되면?]
[하나씩 못했던 것들부터 변화시켜봐야죠. 뭘 못해봤어요?]
생리적인 눈물에 감정이 섞여 흐른다.
‘네가 너무 좋아.’
적당히 밀다가도 쫓아올 수 있게 기다려주는 은기가 좋다. 차오를만큼 차오른 감정이 밀물처럼 밀려와 수위를 높였다. 찰랑대던 것이 넘쳐흐른다. 이 말을 지금 너무 하고 싶다. 아니, 해야겠다.
가득 채워진 마음 속 고백이 해야 할 말을 바깥으로 밀어낸다. 그 언어들은 윤수의 안을 가득 채웠다.
나온 적이 없던 고백은 바깥 세상이 두려워 끝까지 가슴 속으로 버텼지만 윤수는 힘겹게 이를 밀었다.
이제는 나올 시간이다. 나와야 해.
그가 은기의 목을 끌어안고 필사적으로 말했다. 윤수의 목소리는 내면에서 폭포처럼 흘러나오는 감정에 연신 떨렸다.
“사랑해.”
일순, 은기의 모든 행위가 멈췄다. 번개맞은 것처럼 너른 어깨도, 구멍을 격렬하게 드나들던 것도 정지했다.
행여 못 들은걸까. 윤수는 쾌감으로 일그러진 눈을 감았다. 이상하게 눈물이 흘렀다. 넘치도록, 은기의 몫까지.
“하은기. 널 사랑해.”
은기의 눈이 커져 있었다. 목을 팔로 감은 윤수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막혔던 둑이 터지듯 한 번 빛을 본 고백은 거침없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부모님의 내리사랑말고 이토록 자신을 사랑해준 사람이 있었던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니 그 마음에 보답하고 싶다. 간절한 소망은 결국 해묵은 고백을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떨림이 은기에게 옮아간 것인지, 그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여러 번 달싹였다.
무슨 이야기를 들은 거지. 인식되지 않던 머리가 맹렬히 돌아간다. 윤수가 고백했다. 먼저 하려고 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그가 먼저 선수를 쳐버렸다.
웃고는 있지만 그의 입술이 진동으로 떨려 온다. 청산유수이던 입이 왜 지금은 움직이지 않는 건가. 움직여라, 제발 움직여.
“…나도.”
감정에 겨운 말이 불쑥 튀어나갔다. 은기는 제 역할을 못하는 입을 탓하며 머리를 거칠게 쓸어올렸다.
‘빌어먹을, 어째서 이딴 말밖에 못하는 거야.’
더 좋은 말들이 많을 텐데. 왜 ‘나도’ 같은 유치한 말밖에 나가지 않는 걸까.
단순한 윤수의 고백 앞에서 쌓아두었던 온갖 사치스러운 고백들이 와르르 사라진다.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났을 때 쥐고 당기던 그 강한 언어의 힘이 지금은 완전히 사라진 것 같다.
윤수는 언제나 놀라운 사람이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던 모종의 이끌림은 그를 거부할 수 없게 했다.
은기는 그를 끌어안고 두서없이 뱉었다.
“나도, 사랑해요. 정말, 내가 이렇게까지 좋아해 본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야. 진짜로.”
벅차오르는 감정에 말이 뚝뚝 끊기고, 은기는 처음 고백하는 사람처럼 서툴렀다. 정리가 되어 나오지 않는 언어들이 환희 속에서 마구 떠다녔다.
“나 지금 병신같은데, 아무튼 정말….”
은기는 목을 끌어안은 윤수의 팔을 벗어나 그의 눈을 마주보았다. 윤수는 울고 있었다. 투명한 두 줄기의 물길이 그의 까맣고 동그란 눈 아래로 나 있다.
우는 모습이 두 번째던가. 헤어지는 줄 알았을 때, 그리고 고백을 되돌려 받은 지금.
은기가 혀를 섞어 키스하고는 입술을 붙인 채 중얼거렸다.
“사랑해요.”
뜨겁게 연결된 아래가 움찔했다. 은기는 허리를 미친 듯이 움직였다. 그의 안을 뚫을 것처럼 격렬한 기세였다. 키스를 열정적으로 퍼부었다. 보이는 곳엔 모조리.
그는 어딘가 고장난 것처럼 섹스에 매달려 윤수를 밀어붙였다. 끝도 없이 내달렸다.
퍽!퍽! 퍽!
“흐윽…!”
“큿.”
둘은 동시에 절정을 맞았다. 감정의 폭이 밀려 올라가 머릿속을 들끓게 하여, 그 여운은 몹시 길었다. 서로가 닿았다는 기쁨, 마음이 교차되었다는 순수한 안도가 절정의 여운을 아주 오랫동안 끌고 갔다.
“헉, 흐윽, 학!”
땀이 흠뻑 날 정도로 격한 섹스가 두어 번 더 이어졌다. 미친 사람처럼 물고 뜯고, 쑤시고 흔들었다. 짐승 같이 끝도 없이 내달리다 쓰러졌을 때는 시간이 꽤 오래 흘러서였다. 키스마크와 거친 스킨쉽의 결과로 얼룩덜룩해진 몸으로 윤수가 은기 옆에 털썩 누웠다.
숨을 한참 고르던 그가 나직하게 고백했다.
“그거 알아? 네 욕실에 있던 카메라도 부수고 싶을 만큼 질투했다는 거.”
갈라진 목소리가 이렇게 섹시하다니. 은기는 다시 아래가 서는 것 같았다.
“네 몸 다른 사람이 보는거 싫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