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편 호텔에서 생긴 일 -->
“늦었다.”
윤수는 서둘러 은기가 언급한 호텔로 이동했다. 오늘따라 택시 파업, 교통 체증 등 그의 발목을 붙드는 것들이 많았다.
좀 전에는 갑작스런 일로 번역 마감을 못 지킬 것 같다는 직원이 생겨 그와 차분하게 업무 분담도 했다. 사무소에서 들러 그를 도와주다 오는 길이었다.
‘늦으려니까 별 일이 다 생기네.’
머피의 법칙처럼, 한꺼번에 일이 몰려오는 날에는 꼭 무슨 일이 생긴다. 늦겠다고 연락은 이미 넣어놨지만 미안함이 앞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겨우 잡은 택시에서 내린 윤수가 TR 호텔로 뛰어 들어갔다.
투명한 호텔 자동문이 좌우로 열린다. 유리에 도시의 밤길이 비쳤다. 현란한 불빛이 형형색색 섞여 도로 위에서 유유히 흘러간다. 예쁜 꽃들이 검은 장막 위로 펼쳐지는 것 같았다.
기분 탓인지 급한 데도 잠깐 비친 유리의 장면이 선명한 사진처럼 망막에 남았다. 은기를 보러 가는 길이라 그렇겠지. 그가 빙긋 웃고는 프런트로 달렸다.
“어?”
그때, 윤수를 비롯한 사람들의 시선이 어떤 여자에게 일시에 꽂힌다. 멀리서 봐도 멋진 실루엣과 육감적인 굴곡이 드러나는 하얀 원피스다. 길게 뻗은 하얀 다리가 적당히 허벅지를 덮은 원피스 아래로 우아하게 움직였다. 대충 묶은 듯한 까맣고 긴 머리도 시크해 보이는 상당한 미녀였다.
‘송예나?’
마침 오늘 김석과 은기의 대화에도 출연했던 사람인지라 관심이 더 갔다. 윤수는 정말 오늘 무슨 날이긴 한가보다 생각했다. 낮에 이야기한 연예인을 밤에 보다니.
‘가까이서 보니 더 예쁘네. 역시 TV보다 더 말랐고.’
물론 그는 게이인지라 성적인 관심은 솟지 않았다. 그저 잡지를 보며 아름다운 연예인이구나 생각하는 정도에 그쳤다. 그것보다는 은기가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 더 중요했다.
엘리베이터를 타려는데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들렸다. 옆을 보니 송예나였다.
마침 사람도 없고 둘만 있게 되어 어색해진 윤수는 말없이 조용히 내려오는 빨간 숫자만 올려보았다. 바로 옆에 서니 하이힐을 신은 그녀는 자신보다 더 커 보였다.
‘모델 출신이라더니 정말 크긴 크다.’
윤수가 슬그머니 한 발을 옮겨 그녀와 멀리 떨어졌다.
혹시나 해서 챙겨온 노트북 가방끈만 만지작대고 있자니 송예나가 활짝 웃으며 말을 걸었다. 얼굴 만큼이나 웃을 때 드러나는 이도 하얗게 예뻤다.
“안녕하세요. 좋은 밤이네요.”
“아, 안녕하세요.”
저도 모르게 꾸벅 고개까지 숙여 인사해 버렸다. 휙 숙인 바람에 안경이 스르륵 내려와 급히 챙겨 올렸다. 송예나는 윤수가 재밌는지 입을 막고 까르르 웃었다.
“애인이랑 좋은 밤 되시겠네요.”
보통 이런 과감한 멘트를 초면인 사람에게 직구로 던지나?
당황한 윤수가 뭐라 대답해야 할지 버벅대자 그녀는 찡긋 윙크를 했다. 들떠 보였다.
”제가 그쪽에는 눈치하면 척이거든요. 표정만 봐도 얼핏 보여요.“
”…그렇군요.“
엘리베이터가 왜 이렇게 느릴까. 윤수는 어쩔 줄 몰라하며 원망스럽게 숫자만 노려보았다. 은기가 빨리 보고 싶다.
엘리베이터에 같이 타고 층이 달라 더 올라가는 송예나를 배웅하고 나자 벌써부터 진이 빠졌다. 에너지가 넘치는 것이 어쩐지 은기와 비슷했다. 그녀는 윤수가 먼저 내리자 주먹을 불끈 쥐며 응원도 보냈다.
‘왜 응원까지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윤수는 은기가 문을 열어줄 때 안에서 그의 익숙한 얼굴이 보이자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캐릭터가 그려진 까맣고 헐렁대는 반팔 티셔츠에 회색 하의 트레이닝복이 보였다.
은기는 윤수가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양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눈썹을 한껏 찌푸렸다. 손이 크다보니 윤수의 얼굴이 손 안에 감겨 들어간다.
“얼굴이 왜 이래요? 무슨 일 있었어?”
은기에게 볼을 눌러 잡힌 채 윤수가 입을 부리처럼 내밀어 말했다.
“…혹시 내 표정에 뭔가 읽혀?”
그가 윤수의 얼굴을 세심하게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젓는다.
“그건 모르겠고, 지쳐보이는 건 알겠네.”
의문 가득한 눈으로 그를 내려보던 은기가 문득 웃더니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추었다. 윤수는 자연스럽게 눈을 감았다. 호텔방의 환한 불빛이 사라진다. 은기의 긴 속눈썹이 눈가에 닿아 가볍게 긁는 느낌이 좋다.
입술을 붙인 채 윤수가 속삭였다.
“기다리느라 힘들었지?”
은기도 입술을 맞닿은 자세로 피식 웃으며 말했다. 웃음에 나오는 작은 바람이 입술을 간질였다.
“무슨 플레이할지 고민하느라 시간 빨리 가던걸요.”
한 손이 슬금슬금 내려가 가슴을 더듬는다. 응큼한 손길에 윤수가 눈을 뜨고 그의 못된손을 움켜쥐었다.
“잠깐. 씻어야 돼.”
은기의 아쉬운 치댐이 목소리로 치환되어 흘러나온다.
“그냥 해도 되는데.”
“안 돼.”
기어이 그의 손을 잡아 떨구고는 윤수는 지체없이 몸 구석구석을 씻고 돌아왔다. 머리를 말리면서 안을 슬쩍 보니 은기는 너른 방 안의 하나 있는 킹 사이즈의 침대에서 양반다리로 앉아 뭔가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하의는 어디론가 실종되고 크고 두툼한 성기의 실루엣이 드러나는 붉은색의 열정적인 팬티만 남아 긴 다리를 보였다. 팔짱도 끼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듯 했다.
‘뭘 보는 거지?’
가만 보니 그는 콘돔 여러개를 펼쳐두고 어느 것을 쓸지 골몰해 있었다. 아래에 펼쳐진 상황을 보지 못했다면 수험생보다 더한 고뇌로 보였을 것이다.
‘은기야….’
귓불까지 화끈해진 윤수가 머리를 털던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곤 애써 다른 화제를 끄집어 냈다.
“여기 혹시 스위트룸이야?”
“그런데요?”
“보면 항상 너무 비싼 걸로 해. 뭐든. 씀씀이 줄여야겠어. 2인실이면 충분한데.”
은기가 화투패처럼 펼쳐놓은 콘돔에서 눈을 떼고 윤수와 눈을 마주했다.
허리를 펴자 자연스럽게 복부에 자리한 그림같은 그의 근육이 펼쳐졌다. 얼굴은 작고 갸름하면서 옅은 색소로 알맞게 자리잡은 이목구비가 선명한데, 여전히 말도 안되는 몸매다.
”내 재정상태 걱정해주는 거에요? 매력 쩐다, 피윤수. 나만 알아서 다행이야.“
은기가 소리 높여 물었다.
”다른 사람한테 이미 보여준 거 아니죠?“
”안 보여줬어. 보여줄 틈도 없었고.“
”형은?”
“진기는 알뜰하니까 그런 소리할 틈도 없었지.”
잔소리처럼 나가는 소리에 은기의 입이 삐죽댔다.
”하진기, 알고 보니까 구두쇠였나. 너무했네. 어떻게 저런 생명체를 두고 돈을 안 쓸 수가 있지?”
“네가 너무 쓰는 거야.”
진심으로 걱정하는 말투에 은기는 그제야 진지하게 대답했다.
“지금은 좀 써도 괜찮아요. 형처럼 월급쟁이도 아니고 믿는 구석도 있어서.”
이제 진기 이야기가 나와도 조금은 분위기가 편해졌다. 그와의 일에 대해 딱히 케묻지도 않아서 더 그랬다. 일부러 배려해주는 것이다.
위이이잉-
젖은 머리칼 사이로 불어 들어오는 헤어 드라이기의 거센 바람이 윤수의 마음까지 훈훈하게 불어온다. 함께 헤어샵에 가서 염색한 붉은기 도는 머리가 짧게 흩날린다.
“흐음.”
은기의 고개가 다시 아래로 내려가더니 큰 결심이라도 한 듯 콘돔 하나를 집어올렸다.
“감사한 마음 받들어서 특별히 이걸로 해야겠다.”
그는 남은 것들을 대충 휘어잡아 침대 옆 협탁에 올려두고 헤어드라이기 소리 낭낭한 곳으로 어슬렁 걸어왔다.
“나 급한데, 머리는 대충 말리죠? 하다 보면 마를텐데.”
윤수가 다가오는 입술을 손을 집게처럼 만들어서 쥐었다.
“이 입은 언제부터 이렇게 기름칠이 잘 된거지?”
손에 잡힌 채 은기의 입술만 웅얼댄다.
“날 때부터.”
입을 놓아주면서 윤수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능글맞은 아기였겠네.”
“몰랐어요? 동네에서 아주 힙한 아기였다고 하던데.”
“말이나 못하면.”
윤수는 얇은 한숨을 내쉬었다. 은기가 언제부터 이리 편해졌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분명 처음에는 말 붙이는 것도 어색하고 직진으로 밀고 들어오는 것에 당황하기도 부지기수였는데.
‘이젠 이런 것도 익숙해져서 문제지.’
하고 많은 문제 중에 이런 소소한 것이 문제가 된다면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다. 은기가 주는 평화에 젖은 몸이 흐늘흐늘 녹아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수건을 마저 내려놓기도 전에 은기가 윤수의 등을 떠밀어 침대까지 살살 밀었다.
“처음은 우선 평범하게 침대에서.”
양반다리로 앉아서 고민한 흔적이 하얀 이불 위로 적나라하게 나 있었다. 움푹 파인 곳으로 얼결에 눕게 된 윤수가 등에 바스락대는 것에 한 번 놀라고, 여기까지 올 때 멀었던 호텔방의 크기에 또 한 번 놀랐다.
도시의 야경이 보이는 유리창에 커튼이 처져 있고, 그 앞 테이블에 와인이나 치즈 같은 것들이 올라와 있었다.
은기가 머리를 긁적하더니 윤수의 등 밑으로 손을 집어넣고 미처 덜 치운 콘돔을 끄집어 냈다.
“이런, 덜 치웠네.”
윤수는 순간 은기의 아래 흉흉하게 부풀어 있는 것을 보고는 놀라 물었다.
“벌써 섰어? 왜?”
은기가 넓은 어깨를 으쓱했다.
“무슨 플레이할지 계속 상상했다고 했잖아요. 나도 부끄러움은 아는 사람이니까 그만.”
“그걸 아는 사람이….
윤수의 눈이 물끄러미 마구 벗겨지고 있는 가운을 내려보았다. 호텔에서 제공하는 하얀 가운이 급한 손길에 풀어진다.
은기가 허리끈까지 침대 밖으로 던진다. 윤수는 가운을 이불처럼 등 뒤로 깔고 누운 형색이 되었다. 바로 아래로 내려가려던 은기의 얼굴이 한 군데에 고정되어 정지했다.
”어차피 벗을건데 뭘 착실하게 속옷까지 입었어요?“
윤수가 고개를 돌려 그를 외면했다.
“이렇게 바로 할줄은 몰랐지.”
“오래 기다리게 해놓곤. 사람 피말려 죽일 일 있어요?”
은기는 엎드린 채 납작한 가슴에서 천천히 입술을 미끄러 내려뜨리며 유륜을 입에 담았다. 예민해진 옅은 갈색 봉우리가 금방 단단해진다. 윤수가 은기의 머리를 손으로 가볍게 움켜쥐었다.
“흐으….”
몇 번 혀를 굴려 음미하던 그는 버드 키스를 하더니 입술을 더 아래로 천천히 내렸다. 배꼽을 지나 속옷으로 가려진 것 위로 키스했다. 허리를 움찔대던 윤수가 애타는 숨을 참고 보채듯 말했다.
“오늘 이야기해준다고 했잖아.”
“뭐를?”
알면서 짓궂게 물어보는 은기의 팔을 그가 얄밉게 보다가 꽉 잡았다. 더 놀리려던 것을 그만두고 은기는 위로 올라와 그의 목에 입술을 묻었다. 벌써부터 숨이 뜨거워진다.
“아…. 당신의 어디의 어디가 마음에 드는지?”
“말해줘.”
그러면 조금 더 이 관계에 자신이 생길 것 같았다.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감각을 온 몸에 아로새기고, 잠자고 있는 그림자에게 똑똑히 알려줄 생각이었다.
넌 충분히 사랑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그 사랑을 되돌려 줄 수도 있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알고 싶어.”
은기는 그의 마른 육체의 목, 가슴을 부드러운 입술로 차례차례 훑었다. 때때로 입술, 그리고 귓 속에도 물컹한 혀가 뾰족하게 성기처럼 들어갔다가 나왔다. 윤수가 작은 비명을 질렀다.
“그, 그거 하지마. 느낌 이상해.”
“싫진 않죠?”
“그건 아닌데….”
아래 쪽에 피가 쏠려 괴로웠다. 윤수도 점점 몸이 달아올라 적극적으로 속옷을 벗어 던지고 그의 몸에 매달렸다.
은기는 젤을 꺼내 아프지 않게 듬뿍 손가락에 발라 구멍을 넓혔다.
“집어넣을 때 소리 참는 것도 좋고.”
부들부들 떨리던 다리를 은기가 잡아 옆으로 벌렸다. 손가락이 늘어나면서 이미 액으로 질척대는 안을 더 깊이 쑤신다. 구멍 속 주름이 손가락에 밀리고 쓸리기를 반복할수록 윤수의 신음이 높아진다.
기어이 느끼는 곳에 정확히 긴 손가락이 안착해 누르자 그의 허리가 퍼드득 튀어올랐다. 큰 소리를 지를 것 같아 반사적으로 윤수가 입술을 깨물려 하자 은기가 혀를 찼다.
“입술 찢어져. 그냥 소리 내라니까.”
입술을 깨물지 못하게 은기가 얼른 다른 쪽 손가락을 그의 입 안으로 밀어넣었다.
강 하단에서 상류로 올라오는 연어처럼 쾌감이 등줄기를 타고 펄쩍펄쩍 뛰어 머릿속까지 헤집는다. 이어지는 애무와 구멍을 공략한 손가락에 기어이 윤수의 성기에서 묽은 액이 나왔다.
그는 못참고 혓바닥을 누르는 길고 단단한 손가락을 가볍게 물었다.
“으으….”
그 와중에 행여 세게 물어 다칠까봐 눈물까지 흘리며 쾌감을 참고 있었다. 간지럽게 느껴지는 것에 은기가 더 세게 물어도 괜찮다며 달래도 아랑곳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