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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은 배가 고프다며 주인의 허락 없이 냉장고에 손을 대다 가차없이 손등을 얻어맞았다. 투덜대긴 해도 은기의 집에서는 얌전히 그의 말을 듣는 눈치였다. 내심 긴장했던 윤수는 안도했다.
‘다행이다.’
통제 불가능한 인물 같으면 무슨 일이 터질까 불안했을 터였다. 적어도 김석은 그의 테두리 안에 있는 사람 같았다.
‘많이 친한가.’
그러고 보니 아까 둘이서 알 수 없는 수신호도 주고 받았다. 일적으로 엮인 친분은 사적인 친분과 다른 종류의 끈끈함이나 유대감이 생기기 마련이다.
윤수는 저도 모르게 부러움의 눈길을 김석에게 던졌다. 키도 훤칠하고 매력있는 모델이라 은기와 어울렸다. (은기가 들었다면 거품 물었을 말이지만.)
업계 사람 아니면 자신과 술 한 잔 하기도 힘들다던 은기의 말이 불쑥 떠올랐다. 그는 이런 사람과 종종 술자리를 하겠지.
한편, 윤수가 알고 있는 진실과는 사뭇 먼 모습으로 은기는 팔을 걷고 냉장고 속을 거칠게 뒤졌다. 속이 끓어오른다. 이놈을 어찌 처단해야할지 머릿속이 바삐 움직였다.
그는 냉장고를 뒤지다 말고 휙 뒤돌며 으르렁댔다.
“밥은 밖에 나가서 먹고, 간단히 해줄테니 거기 앉아 있어. 딴 짓, 쓸데없는 짓 전부 하지마. 안 준다.”
김석이 부엌 쪽의 길고 큰 테이블에 앉더니 뒤를 돌아보며 피식거렸다.
“네네, 굴러온 돌은 얌전히 있겠습니다.”
엄포를 놓은 은기가 재료 몇 개를 꺼내들었다. 그리곤 김석에게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른 상냥한 태도로 윤수를 향해 돌아보았다. 김석 맞은편에 앉아 바로 보이는 위치였다.
“몸에 안 맞는 재료 있으면 이야기해요. 뺄 테니까. 알러지 있는 거라든가.”
냉장고에서 나오는 인위적인 파란 빛에 은기의 미소가 반사되어 아른댔다. 차가운 김이 나오는 문을 잡고 쭈그리고 앉아 있는 것도 길고 다부진 체격 때문에 하나의 사진이 된다.
윤수는 이래도 되는 걸까 생각하며 김석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정작 그는 은기의 차별(?)이 한두번이 아닌지 별로 개의치 않아 했다.
“다 잘 먹어요. 알러지도 없고, 가리는 거 없습니다.”
“좋네.”
함박 눈웃음을 지은 은기가 재료를 찾아 더 뒤진다. 뒤에서 김석이 턱을 괴고 심드렁하게 야유했다.
“나한텐 안 물어봐주냐?”
싸늘한 대답이 돌아왔다. 윤수에게 답할 때와 온도차가 명확했다.
“넌 아무거나 먹어. 알러지도 없잖아.”
“그 사이 생겼으면 어쩌려고?”
“그런 거면 네가 미리 말했겠지. 엄청 시끄러운 목소리로.”
탕!
가볍게 냉장고 문이 닫히고 은기의 요리가 시작되었다. 입을 오리처럼 내밀고 삐죽대는 김석의 불평불만도 배경음처럼 흘려보내며 그는 여유로이 시작했다.
은기가 전문적으로 보이는 손길로 바닥이 움푹한 후라이팬을 쥐었다. 두어 번 손목스냅을 돌려보는데 그 모습에서 한두번 손목을 돌려본 솜씨가 아님이 보였다.
그의 머릿속에서 메뉴가 바뀐 것인지 후라이팬을 놓고 중얼거렸다.
“오븐으로 해야겠다.”
윤수는 눈을 빛내며 은기의 탄탄한 뒷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걷어 올린 팔에 알차고 슬림한 근육이 박혀 있다.
‘평소에도 많이 했을까?’
김석이 중간에 있지만 둘만 있는 느낌이었다. 계속 신경 쓰이던 카메라는 오히려 김석이 오자 더 편안해졌다. 은기나 김석이나 둘 다 카메라에 전혀 신경쓰지 않는 위인들이니 그 사이에 낀 윤수 자신도 한결 마음을 놓게 된 것이다. 긴장한 것과는 달리 해볼 만하다.
‘촬영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네.’
윤수의 하얀 얼굴에 은근슬쩍 웃음이 피었다. 걱정으로 밤잠 설치고 긴장 가득했던 살얼음 나날을 보냈던 것이 억울할 정도였다.
많이 좋아진 것일까. 의식하지 못한 사이 과거의 그림자가 제법 걷힌 것일까. 아니면 전부 은기 가 있어서 가능한 일인 걸까.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어도 이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차가운 카메라 렌즈들이 가득한 이 곳에서도 제대로 숨 쉴 수 있다는 것. 타인의 이목으로 주목 받아도 제대로 웃으며 걸을 수 있다는 것.
이 모든 것들이 ‘하은기’ 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거란 사실도.
기분 좋게 미소짓던 윤수가 슬쩍 미간을 구긴다.
‘근데 그 욕실의 카메라만큼은 정말 떼고 싶다.’
만지다가 실수인 척 고장내볼까. 그러다 이내 마음을 고쳐먹는다. 촬영하는 이들과 장비가 무슨 잘못인가, 은기의 샤워신 영상을 볼 익명의 다수에게 질투하는 자신이 문제지.
‘질투? 아…. 나 질투하는 구나.’
불현듯 떠오른 단어에 다른 것도 함께 떠오른다. 질투할 이유는 단 하나 밖에 없다.
소유욕.
그 사람이 내 것이라고 생각하니 남들이 눈독 들이는 것에 질투가 불붙는다.
진기가 결혼한다고 할 때 어땠지? 윤수는 자신을 돌아보았다. 물론 당시엔 충격이었다. 가슴도 아프고, 남은 미련이 날카롭고 작은 가시처럼 몸에 박혀서 통증을 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뿐이다. 그 이상은 없다.
윤수는 반대로 뒤집어 생각했다. 만약 은기가 다른 사람과 있다면?
그게 누구든 그와 어울리는 사람과 서 있을 것이다. 은기의 다정한 성격처럼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속삭여 줄 것이다. 마음을 헤아려주고, 거부해도 아프지 않게 밀려 들어갈 것이다.
그가 손을 꽉 쥐었다. 상상만으로도 피가 말랐다. 온 몸의 피가 한 방울 남지 않고 모조리 증발해 버린다. 지독한 갈증이 일었다. 그 얼굴 모를 은기의 상대에게 맹렬한 감정이 앞선다.
‘그건 안 돼.’
심란한 윤수의 속과 비슷하게 오븐을 점검하던 은기도 한숨을 길게 쉬었다.
윤수도 있는데 불청객이 껴서 그를 위한 요리를 해야 한다니.
물론 하면 윤수도 함께 먹겠지만 온전히 그를 위한 요리가 아니었다. 음식도 잘한다고 큰소리 쳤건만. 이 집에서 처음으로 해서 주는 요리에 다른 사람이 끼게 생겼다.
은기가 이를 갈며 김석에게 숟가락을 칼처럼 겨누었다.
“담엔 꼭 연락하고 와라.”
김석은 아랑곳 않고 어깨를 으쓱했다.
“촬영날인지 깜박했지. 그리고 이런 게 너한테 더 좋은 거 아냐? 서프라이즈~. 시청률도 서프라이즈~.”
저 능구렁이같은 친구가 설마 촬영 날을 깜박할 리가 없다. 은기는 그가 노리고 온 것임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자신의 주가까지 함께 올라가니 이런 좋은 기회를 마다할 김석이 아니었다.
‘누굴 속여.’
한탄한 은기가 이번엔 투명 장갑을 꺼내 끼고 찹쌀 가루를 반죽했다. 시나몬 가루나 우유, 꿀 등 여러 가지가 한꺼번에 들어가는 것을 흥미롭게 보던 김석이 못참고 물었다.
“뭐 하려고?”
“찹쌀꿀빵. 피칸이나 캐슈넛 같은 견과류도 좀 넣으려고.”
“대박. 이런거 있음 진작 해주지.”
“너한테 왜 해주냐? 손님 있을 때나 하는 거지.”
“나는 손님 아니냐?”
“어.”
불청객이지. 뒷말은 으레 씹어 삼켰다. 은기가 거품기를 꺼내려다 마음을 바꾸어 김석에게 볼을 건네었다.
“먹으려는 자, 노동을 하라.”
억울한 듯 김석이 건너편의 윤수를 노려보았다.
“왜 나만? 박힌 돌 씨도 있잖아.”
움찔한 윤수가 자신이 하겠다며 나서려 하자 은기가 단칼에 막았다.
“원래 노동은 굴러온 돌이 하는 거야.”
“젠장….”
저으라는 눈짓에 미간을 찌푸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집주인이 시키는데, 할 수 밖에. 김석이 팔이 빠지게 휘젓는 사이 은기는 여유를 즐기며 윤수에게 말을 걸었다.
“이미 시작해놓고 뒤늦게 묻긴 뭐하지만. 싫어하는 메뉴는 아니죠? 단 거 싫어한다거나.”
“전혀. 좋아합니다. 해주셔서 감사한데….”
윤수가 난감한 듯 얼굴이 벌게져서 볼 속을 마구 휘젓고 있는 김석을 흘끗 보았다.
“저, 시간 오래 걸리지 않습니까? 힘들면 쉬운 거 해도 될텐데.”
김석이 오지 않았더라면 자신이 해야 했을 일이다. 그리 생각하자 연신 김석에게 미안해지는 윤수였다.
하지만 김석의 유무와 상관없이 은기는 윤수에겐 어떤 일도 부탁하거나 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피윤수’ 였다. 은기는 달아올라 터질 것 같은 얼굴로 손목을 돌리는 김석은 모른 채 하고, 윤수에게만 걱정스러운 눈길을 던졌다.
“번역사님 몸 안 좋아 보여서요. 머리 아프거나 그럴 때 이거 해먹으니 좋더라고요.”
은기의 몸이 반쯤은 윤수에게 테이블 위에서 넘어가 있었다. 사실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것을 김석과 카메라, 스태프를 의식해 참고 있는 중이다.
온 힘을 다해 임무를 완수한 김석이 지친 얼굴로 볼을 은기에게 건넸다. 그가 손부채로 제 얼굴을 마구 부쳤다.
“누군 일 시켜놓고 둘이서 좋아 죽네. 아예 사귀시지? 땀난다, 와.”
대수롭지 않게 던진 말이지만 정작 찔리는 것이 있는 윤수와 은기가 차례로 눈빛을 달리 했다. 물론 은기는 프로 의식을 발휘해 바로 감추었지만 윤수는 카메라가 없어 보이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상하게 두근거리는 긴장이 전처럼 나쁘지 않다.
은기가 다 된 반죽을 틀에 맞춰 넣은 뒤 알맞은 온도로 예열한 오븐으로 넣었다.
“운동한거라 쳐. 지금 그걸로 50kcal는 소비했다.”
“눈물나게 고맙다. 빨리 해줘. 진짜 배고파.”
투덜대는 김석을 무시하며 은기는 윤수에게 친절히 설명 했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돼요.”
오븐 속의 것이 완성될 때까지 그들은 부엌의 테이블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했다. 주로 김석이 농담을 자주 던졌고, 은기의 뒷담화 같은 내용들이 많았다.
“저 자식, 데뷔 때 어땠는지 아세요?”
은기가 앉자마자 얼얼한 팔을 주무르던 김석이 눈을 빛내며 윤수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당황한 윤수가 달려드는 맹수를 보듯 주춤했다. 가까이서 보니 더 까맣고 작은 동양풍의 미남형 얼굴이다. 하얗고 서구적인 은기와는 대조적이었다.
“뭐, 뭘요?”
“눈에 힘을 못 빼서 카메라 감독님들한테 많이 깨졌어요. 카메라 잡아먹겠다면서.”
은기는 모른 척 시선을 피했다.
“그건 네 이야기겠지.”
“맞다니까? 방송 때 자료 화면 나갈텐데 뺄거야?”
의기양양한 김석의 말에 이대로 지나 했던 은기가 피식 웃으며 칼을 날린다.
”적어도 데뷔전 무대 위에서 넘어진 너보다는 낫지.”
“윽.”
진실인지 김석은 아무 말도 못 했다. 달달하고 고소한 향이 기분 좋게 그들 사이를 가른다.
이 승자 없는 흑역사 싸움의 승자는 과연 누가 될까.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던 윤수는 그들의 말이 길어질수록 계속 허전함도 느꼈다. 자신이 모르는 그들만의 세계. 그 간극이 크다. 은기는 말로는 김석을 타박하지만 업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즐거워 보였다.
‘은기는 지금 일이 좋다고 했으니까.’
그는 예전에 첫 외식 때 자부심 어린 얼굴로 일에 대해 이야기하던 은기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은 이유 같은 건 상관없이 정말로 이 일이 좋아졌지만.]
그의 자부심은 모델 일이다. 진심으로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을 사랑한다. 뭔가를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사람도 열정적으로 사랑할 줄 안다.
“예나 누나가 아직까지 그걸로 놀린다고.”
“그 분은 여전하지?”
김석이 놓치지 않고 껄렁하게 비아냥 댔다.
“뭐, 다시 관심 좀 생기고 있냐?”
“그럴 리가. 인간적인 차원의 안부였어.”
편하게 오가는 대화 중에 윤수가 처음 듣는 이름을 중얼거렸다.
“예나 누나?”
은기는 더 화제가 뻗어나가기 전에 끊으려 했다. 녹화 중에 이성인 동료 연예인 실명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큰 화제가 된다. 괜한 소리는 자제하자는 눈치를 김석에게 던졌다.
“그냥 좀 친했던 사람이에요.”
하지만 김석은 그치질 않고 신이 나 떠들어 댔다. 이런 것이 시청률 견인의 큰 요소라는 것을 잘 알기에 라면 스프 같은 자극적 요소를 던졌다.
더욱이 윤수가 업계 화제를 잘 모르는 눈치이고, 동시에 타인의 이야기를 잘 듣는 훌륭한 청자임을 것을 알자 더 어깨에 뽕이 들어가 으스대기도 했고 말이다.
“모델 업계에선 대선배 격. 송예나 모르세요?”
“아아, 압니다. 송예나 씨.”
윤수의 어머니가 좋아하는 여배우였다. 밝고 상냥하고, 현명한 이미지의 젊은 배우라 반듯해 보인다며 좋아하셨다.
‘같은 모델 출신이었구나.’
은기가 웃으며 그 이상의 대화를 자른다. 미세하게 눈썹이 일그러져 있었다.
“병아리 시절 때 많이 도와줘서 고마운 선배죠. 지금은 잘나가는 배우시지만.”
얼버무린 은기가 벌떡 일어나 오븐 쪽으로 갔다. 열어서 확인하니 갈색으로 잘 구워진 견과류 박힌 찹쌀꿀빵이 완성되어 있었다.
관심이 순식간에 그 쪽으로 쏠렸다. 탑모델 출신 배우 송예나의 존재도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것에 가려졌다.
“야, 빨리 꺼내. 빨리!”
김석이 정말 배고팠는지 은기가 접시에 놓아주자마자 입 속으로 마구 집어넣었다. 뜨거워서 난리가 난 김석은 예능의 희생자로 택한 것인지 별 신경도 쓰지 않던 은기가 이번에도 윤수에게만 관심을 쏟았다.
“어때요? 괜찮아요? 뜨거우니까 조심해요.”
눈빛이 다르다. 육안으로 봐도 보일 정도인데 카메라로 보면 어떨까. 렌즈 앞에서 연신 웃고 있지만 윤수는 알 수 있었다. 일할 때의 그는 자신 앞에서 짓는 미소와는 다른 사무적인 껍질이라는 것을.
허물 벗는 것처럼 스스럼없이 나타나는 은기의 원래 모습은 보다 열정적이고, 녹아내릴 듯 부드러우며 뜨겁다. 윤수 자신만 알고 있다. 이상한 자부심이 솟는다. 그가 빙긋 미소 짓는다.
“맛있어요.”
불안하게 묻던 은기가 그제야 마음을 놓고 마주 웃었다.
“정말?”
“정말로.”
윤수는 부모님 아닌 사람이 해주는 요리를, 개인적인 자리에서 먹는 것이 처음이었다. 식당에서 먹는 상업적인 맛이 아닌, 정감 가득하고 맛깔나는 단맛이었다.
‘어떡하지. 자꾸 욕심이 난다.’
처음 가져본 정체성에 대한 욕심은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 박살 났고, 두 번째 욕심인 진기는 그도 어쩌지 못한 채 손을 떠났다. 그래서 이제 욕심은 부리지 않으려 했다.
‘욕심 내고 싶어.’
어디 가지 않고 그 자리에 계속 있어줬으면 한다.
‘큰일났네…. 안되는데.’
욕심 내기 시작하면 대부분의 것들이 손 밖으로 덧없는 모래처럼 사라졌는데.
내면의 그림자에게 들키면 안 된다. 은기를 욕심내고 있다는 사실을, 끝까지 숨겨야 한다. 그래야 그를 조금 더 오래 가질 수 있다.
“잠시 점검이요!”
카메라 점검 때문에 스태프가 밖으로 잠깐 나가고,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편집으로 시간과 장면을 자르기 때문이었다. 이제 은기는 야외 촬영을 할 예정이었다.
김석을 포함한 셋은 함께 담배를 피러 밖으로 나갔다. 선선하게 떨어지는 가을 햇살이 머리 위로 따사롭다. 김석은 담배 한 대만 같이 피고 바로 스케줄이 있다며 손을 흔들대며 사라졌다.
“꿀떡 잘 먹었다!”
늘씬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은기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는다.
“꿀빵이라니까.”
곧잘 가는 줄 알던 김석이 휙 뒤돌더니 장난스럽게 새끼손가락을 흔들거렸다.
“참, 이거한테 잘해라~. 내가 기껏 빌려준 보람 좀 느끼자!”
“빨리 꺼져. 바쁘다며.”
처음에 경계한 것 치고는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았다. 윤수는 시트콤처럼 투닥대는 두 사람을 즐거운 듯 바라보았다.
“무슨 뜻이야?”
은기의 얼굴이 보기 드물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가 빈 손으로 얼굴을 훑어내렸다. 다른 손에서는 여전히 담배 연기가 피어 오르고 있다.
“신경쓰지 마요. 헛말 잘하는 놈이라. 그나마 용케 카메라 있는 곳에선 크게 티 안냈네.”
티내면 위험한 것이었던가. 김석이 그런 구분은 할 줄 아는 사람이라 다행이다. 뭐든 은기에게 불리할 상황은 오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 윤수의 마음이었다.
그가 맞담배를 피며 중얼거렸다. 기분좋은 울림이다.
“하루종일 찍는 건줄 알았는데.”
“다 편집의 힘이죠.”
생각해보니 은기와 함께 담배를 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처음. 그의 작업 공간 속으로 본격적으로 개입한 것도 처음.
윤수가 작게 웃었다.
“내가 모르는 게 많네.”
아직 김석의 마지막 말에 대한 여파가 큰 지 은기의 목까지 오른 붉은 기운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하늘을 올려보고 있었다. 길고 늘씬한 목에 박힌 굵은 목울대가 일렁였다.
“당연히 모르죠. 이쪽 일 해본것도 아니고.”
“그게 아니라, 너에 대해서도.”
“아.”
그제야 은기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간다. 손가락이 워낙 길어서 담배가 짧아 보였다. 그의 옅은 갈색 눈이 기쁘게 휘었다.
“그건 좀 반성해야겠다.”
윤수가 깊이 빨아들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성해야지, 아무렴.
그런 그가 귀여운지 은기가 그를 잡아끌고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늘이 지고 밖이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제대로 반성하려면 이쪽으로.”
CCTV나 사람의 눈이 없는 사각지대로 윤수를 몰더니 은기가 그의 턱을 잡고 키스했다. 불 붙은 담배가 양 옆으로 길게 연기를 피워 올린다.
혀가 밀쳐 들어오고 천장을 과격하게 긁었다. 부드러운 입술이 맞물리고 경쟁적으로 혀가 오간다.
윤수가 발을 밀어 올리고 은기의 목으로 담배를 쥔 팔을 걸쳤다. 바지 밑으로 뜨거운 성기가 비벼져서 잔뜩 성이 나 일어난다.
콧소리가 나왔지만 참았다. 밀도 높은 끈적한 타액이 입 안에서 뜨겁게 얽힌다. 혀가 여러 번 얽혔다가 풀어지기를 반복했다.
윤수가 저도 모르게 은기의 단단한 팔을 꽉 잡았다.
두 사람만 담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공간 속에서 찰랑찰랑 기분 좋은 물이 목까지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단전으로 뜨거운 것이 몰렸다.
숨이 벅찰 때쯤 은기가 놓아주었다. 그가 열기가 가득 찬 눈으로 속삭였다.
“오늘 고생했어요.”
마무리로 가벼운 키스를 도장처럼 찍으며 그가 유혹하듯 말했다.
“끝나고 갈테니까 TR호텔 12층 1209호실에서 봐요.”
윤수가 황당한 듯 대꾸했다.
“왜 이렇게 디테일 해. 예약은 언제 잡았어?”
“오늘 아침에.”
은기가 손가락을 위협하는 담배를 던져서 발로 비벼 꺼버렸다.
“철저하네.”
“각오해요. 오늘은 그만하고 싶다고 해도 안 놔줄 거니까.”
부디 그래줘. 하지만 윤수는 속내를 말로 뱉지 않았다. 그는 여느 때처럼 담담하게 말했다.
“그때 보자.”
속은 뜨겁게 휘몰아쳤지만, 그림자를 속이기 위해. 은기와 더 오래 함께 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