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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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을 다시 쓴 윤수가 무럭무럭 피어나는 사감을 억누른 채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번엔 바로 옆자리가 아닌 맞은편에 앉았다. 

“포트폴리오 원본은 아직 못 받았는데, 진행은 어떤 식으로 하고 싶은 겁니까?”

사실 받았지만 은기네 소속사 측에서 상세한 과정이 방송을 타기를 바랐다. 

윤수는 깍지를 끼고 반듯하게 앉아 그를 가만히 올려보았다. 

“전략 대상부터 우선 듣고 싶습니다만.”

차분하면서도 맑은 목소리가 거실을 울린다. 은은한 종소리가 번지듯 퍼져나간 윤수의 말끝을 잡고, 은기가 날카로이 되묻는다. 

“전략 대상이라면, 포트폴리오 뿌릴 사람들 말하는 거죠?”

윤수가 옆 얼굴에 와닿는 따끔한 렌즈를 느끼며 마른침을 삼켰다. 

“네.” 

일에 집중한 은기는 평소 보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언제나 뜨겁게 넘치던 에너지가 차가운 기류로 바뀌고, 집중도가 올라갔다. 

집에 설치된 감정 없는 렌즈와 사람이 든 영상 카메라의 시선이 그에게 몰린다. 윤수의 눈도 언제 열릴지 모르는 그의 입술에 닿아 있었다. 

활달하고 유쾌하지만 그 속에 맺고끊음이 분명한 단호함도 입술 끝에 얼핏 보인다. 그 입이 뱉을 수 있는 말은 다양하다. 

윤수는 뜨거움도, 차가움도 모두 소화 가능한 그 입술이 조금 두려웠다. 

‘괜찮아.’

은기는 이유없이 상처주는 사람이 아니다. 안심해도 돼. 윤수는 긴장하는 자신의 그림자를 타일렀다. 사람들의 눈처럼 느껴지는 카메라 렌즈에 불안해하고 있다. 의지해도 돼. 이 곳은 은기의 일공간이자 그의 영역이다. 그의 장소에서 위험할 것은 아무것도 없어. 

그는 20살 언저리에 갇혀 있는 자신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너는 이 곳에서 안전하다고. 

은기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들겼다. 차분한 윤수의 태도에서 완전히 떨쳐내지 못한 것들이 보였다. 

‘아직 긴장 되는 건가.’

업무상으로 마주친 까만 눈은 냉정을 가장한 채 떨리고 있다. 그 떨림을 알아채는 것은 자신 뿐이다. 카메라도, 이를 지켜볼 무수한 사람들의 눈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발신자가 분명한 특별한 전송은 받는 자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여러 시선들이 섞여도 결국 살아남아 그의 가슴에 닿는 것은 피윤수의 시선 뿐이다. 

‘어?’

순간 드는 생각에 은기는 방금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이제야 안 것이다. 

‘그러고 보니….’

철저히 각자의 영역으로 분리되어 있던 일터 속에 윤수가 있고, 그와 말을 섞고 있다. 

갑자기 몸을 섞을 때보다 더한 긴장이 은기의 어깨와 등의 근육을 팽팽하게 당긴다. 윤수가 실질적인 생활의 일부가 되어가고 뿌리 내리는 과정 같아서. 

여태껏 은기는 모델을 시작한 동기가 명확했던 만큼 같은 업계 사람과 사귀더라도 일적인 영역 구분은 철두철미했다. 그 틀이 깨지고 있었다. 심지어 자신이 먼저 제안한 것이 커져서 여기까지 오지 않았나. 

갑작스레 찾아온 작은 깨달음이 물수제비처럼 통통 튀어 마음 속에 잔물결을 어지러이 흐트러뜨린다. 

‘기분 이상하네.’

생명을 얻은 심장이 그의 단단한 가슴 속에서 큰 울림을 빚는다. 어떤 카메라도, 렌즈도,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에도 이런 적이 거의 없던 것이었다. 어이없어서 웃음마저 나왔다. 

다소 길어지던 침묵을 깨고 은기가 말했다. 

“…대상은 에이전시, 디자이너들 위주로요.”

윤수는 문자를 통해 받은 요청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해외용 포트폴리오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시청자들이 진척 과정을 하나하나 알 수 있게끔 말이다. 

은기를 위한 것이라 생각하니 더욱 신중해진다. 그가 사전에 모의된 대로 뱉었다. 

“첫 미팅 때는 업계 사람들 말고도 책자로 만들어서 시중에도 내보낼 거라 들었는데….”

윤수가 입을 열면서도 은기의 눈치를 살폈다. 왠지 그가 조금 이상하다. 한 박자씩 대답이 늦었다. 집중도가 낮지도 않고 대화도 귀 기울여 듣는 것 같은데. 

“…그랬죠.”

또다.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것도 아니고 눈빛이 흐트러진 것도 아닌데. 

“시판될 것과 버전 차이는 없이 할 겁니까? 계약서 개수가 달라질 내용이라, 정확히 짚어야 합니다.”

윤수의 말이 길어질수록 은기의 욕망은 하나로 선명해진다. 

만지고 싶다. 

그가 여태껏 작업한 결과물들을 보여주며 가격 단가를 이야기해주는 담담한 목소리조차 신음으로 물들이고 싶다. 마우스와 내장 키보드를 만지는 손가락은 잡아서 입 맞추고 싶고, 화면만 보고 있는 매정한 까만 눈은 이 쪽만 바라보게 하고 싶다. 

‘미쳤구나.’

묘한 것은 집중력이 흩어지기는커녕 시야가 밝아지면서 윤수가 더 깨끗하게 보인다는 점이었다. 그가 막힌 숨을 끌어모아 한 번에 뱉고는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이제 긴장이 제법 풀린 건지 술술 잘도 내뱉는 윤수가 약간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자신은 이렇게 비일상적인 상황에 혼란스러워 하고 있건만. 

은기가 소파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꼰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일상과 비일상 사이에서 균형을 잃은 혼란이 삐딱함으로 바뀌어 나온다. 

“어차피 작업물을 다 드린 것도 아니고, 추가 작업 들어갈 텐데?”

윤수가 차갑게 들리는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화면에서 눈을 떼고 은기를 돌아보았다. 

“번역 목적에 따라 번역할 글자에 매겨지는 금액도 달라지거든요.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럼 두 가지 다 계약하죠. 추가 작업물은 그 계약서에 맞춰 나눠서 드리면 될 것 같으니까.”

잠깐 이상했던 것은 착각이었나. 평소와 다름없는 매끄러운 진행이다. 윤수는 속으로만 의문을 묻었다. 

은기는 대충 흘려 말하듯 해도 어차피 편집 때 설명 자막이 붙을 것을 알고 있어서 내내 여유로웠다. 

하지만 윤수는 이를 모르니 시청자들을 의식해 있는 그대로를 전부 차근차근 풀어 말하고 있었다. 당연히 업무 설명이 많이 늘어졌다. 신나게 말하다 윤수 본인도 묘한 정적이 감도는 실내 공기를 자각했다. 그가 뒷목을 손바닥으로 쓸면서 중얼거리듯 말했다. 

“근데 너무 지루하지 않아요?”

진지한 태도로 윤수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은기가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불안에 의아해했다. 

“지루하다니요?”

“예능인데 너무 일 이야기만 하는 것 같아서. TV에서 볼 땐 재밌던데 이거 방송 타면 재미 하나도 없지 않을까….”

자신감 없이 떨어지는 말꼬리가 그의 심정을 대변했다. 은기는 워낙 개인적으로 하는 것도 많고 취미도 많은데다 편당 나오는 지인들과의 궁합도 좋아서 재밌다는 호평이 많았다. 

그런데 말주변 없는 자신과 일 이야기나 잔뜩 하고 있다니, 괜히 나와서 시청률만 떨어뜨리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는 윤수였다. 

무슨 소리를 하나 팔짱을 끼고 듣던 은기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매번 그의 걱정은 예측 범위를 벗어난다. 

“그건 편집하시는 분들이 재밌게 잘 살려주실 거니까 걱정마요. 재미없으면 알아서….”

그의 눈이 슬쩍 윤수의 표정을 살핀다. 

‘자른다’ 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랐다가 스르륵 내려갔다. 시청률에 있어서 해가 될 것 같은 요소는 칼같이 잘라 보내는 사람들이다. 정말 재미없으면 아예 윤수가 나오는 장면이 통편집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특별히 피디에게 뒤로 부탁했기에 번역 건에 대한 내용은 나갈 것이다. 오디오만 따서 자막을 입혀 빠르게 진행되는 형식일지도. 

차마 은기는 그에게 비정한 업계의 진실을 알려주고 싶지는 않았다. 말하던 중에 급정거 하느라 혀를 씹을 뻔했다. 하지만 착실히 미소까지 얹는 여유를 보였다. 

“…자막 잘 입혀서 재밌게 내보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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