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Living Alone 촬영 --> (24/59)

<-- Living Alone 촬영 --> 

은기의 집은 이미 가본 적이 있어서 낯설지 않았다. 프로그램의 취지에 따라 집에서 촬영이 이루어 졌다. 낯선 스태프들과 전에 한 번 보았던 피디가 윤수를 반겼다.

넓고 깨끗한 황금빛 복도에서 허공에 떠 있는 까맣고 털난 공처럼 생긴 것과 카메라를 보니 벌써부터 긴장이 되었다. 그가 들고 온 노트북 가방을 들어 보이며 스태프들에게 물었다. 

“안에서는 진행 중인가요?”

일찍 와버려서 근처 카페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 윤수는 떨렸다. 평소처럼 하면 된다고 하는데도 카메라가 있다는 사실이 머리에서 떨쳐지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눈들이 사방에서 지켜보는 기분일 것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 느낌은 끔찍했다.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은 감각을 떨쳐냈다. 안경 낀 피디가 빙긋 웃더니 윤수의 등을 가볍게 밀었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평소처럼 해주세요.”

얼결에 밀려 들어가며 그가 피디의 말을 중얼거렸다. 

“네. 평소처럼.”

문 사이로 삐죽 마중나온 짧은 고양이의 털이 보인다. 은기의 목소리도 들렸다. 윤수가 마른침을 삼켰다. 

‘평소라면….’

집에 들어가자마자 키스 세례와 격한 환영이 있을 것이다. 거실에 있는 보조 침대로도 쓰이는 커다란 소파에서 야한 짓을 할 수도 있다. 눈을 감아도 집안의 풍경과 은기의 모습이 그림이 그려졌다. 

상상으로 그려놓은 화폭 속으로 윤수가 성큼 걸어 들어간다. 상상과 비슷한 장면이 그의 머릿속에서 마법처럼 튀어나온다. 

“오셨어요?”

자연스러움을 강조하려는 듯 촬영치고는 부스스한 얼굴로 은기가 맞아 주었다. 머리를 감은 지 얼마 안된 듯 녹색 수건을 목에 감고 있었다. 촉촉하게 젖은 갈색 머리칼 아래 하얀 반팔 셔츠, 검은 트레이닝복의 긴 바지가 길게 뻗어 있다. 같이 맞춘 안경도 빠짐없이 끼고 있었다. 어제 같이 한 펌이 들어간 머리가 왠지 반가워서 윤수가 빙긋 웃었다. 은기도 마주 웃으며 그의 뒤로 문을 닫았다. 

“머리 스타일 바꾸셨네요. 옷도 그렇고. 어디서 하셨을까~.”

그가 신기한 듯 연기하며 윤수의 머리에 손을 올려 만지작댔다. 손이 스치자 윤수는 몸이 움찔 떨렸다. 옷을 만지는 손길도 은밀했다. 

‘읏.’

은근슬쩍 가슴이나 엉덩이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에 윤수가 눈가를 찌푸렸다. 싫어서가 아니라 흥분과 고양감을 참기 위해서였다. 

들어오기 직전에 야한 상상을 한 바람에 잔열이 있었는데, 은기의 손길에 대번에 몸이 열리는 것 같다. 시청자들이 보면 불쾌해서 찌푸린 것인 줄 알 것이지만. 

다 알면서 능청맞게 너스레를 떤 은기에게 윤수가 손길을 피하며 대꾸했다. 

“예약해 주신 헤어샵 좋던데요. 비싸긴 했지만.”

윤수가 솔직하게 말할 줄은 몰랐던 은기가 당황한 듯 눈을 굴렸다. 하지만 특유의 능수능란함을 발휘해 위기를 모면했다. 

“너무 좋아하셔서 한시름 놨죠. 욕 먹을까봐 걱정했는데.”

그의 발치로 고양이 두 마리가 부산스럽게 돌아다녔다. 이제 익숙한 사람이라 인지한 것인지 고양이들은 경계도 하지 않고 윤수를 반겼다. 

러시안블루 종의 날씬하고 긴 다리를 가진 고양이들이 그를 중심으로 뱅뱅 돌더니 그루밍을 했다. 윤수가 어색하게 쭈뼛대며 노트북 가방을 든 채 어쩔 줄 모르고 섰다. 낯 가린다더니 친근한 녀석들이다. 

은기가 피식 웃더니 허리를 숙여 고양이들 머리를 쓰다듬었다. 

“윤수 형 와서 좋지?”

“냐~”

대답하듯 눈을 살짝 감고 고양이가 작게 울었다. 

“밥은 먹고 왔어요?”

“먹고 왔습니다.”

“그럼 차나 커피?”

“커피로.”

카페에서 이미 마시고 왔지만 같은 것을 주문했다. 카페인의 힘으로 이 난관을 극복해야 한다. 

‘깜짝이야.’

들어오자마자 은기의 야릇한 손길을 맞느라 정신이 가출했다가 이제야 돌아온다. 거실에 있는 익숙한 탁자 앞에 앉고 나서 윤수는 주변을 휘휘 둘러 보았다. 

카메라를 들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방송상으로는 그저 카메라를 설치해 두고 지켜보는 것이 다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실제로 집안 곳곳에 설치된 카메라도 보여서 윤수는 더욱 조심하기로 마음먹었다. 은기는 공인이자 사람들에게 ‘보이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그 와중에 고양이들이 다리 위로 뛰어 올라오거나 팔에 머리를 대고 비벼서 윤수는 못 박힌 듯 시선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격한 환대에 몸 둘 바를 몰랐다. 그가 혼잣말로 고양이에게 말을 걸었다. 

“네가 일리야니?”

녹색 눈을 가진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자 기분 좋은 듯 눈을 감았다. 이름을 불러주자 고롱고롱목을 울리는 것이 맞는 것 같았다. 파란 눈의 고양이도 지기 싫은 듯 팔을 비비던 것을 관두고 윤수의 팔 안으로 폴짝 뛰어 들어왔다. 짧은 잿빛 고양이털이 긴 팔 셔츠 위로 묻어났지만 그것보다는 고양이의 천국에 파묻힌 것이 더 행복했다. 

‘촬영 중이 아니면 좋을텐데.’

고양이와도 더 느긋하게 놀고 은기와도….

방심한 사이 또 올라오는 야한 망상에 윤수는 자신을 책망했다. 어쩌다 이렇게 된걸까, 피윤수. 

“잘 기억하고 있네요.”

불쑥 끼어든 은기의 낮은 목소리에 윤수가 화들짝 망상을 날렸다. 

어느새 커피 원두를 갈아 직접 내려온 은기가 다가와 있었다. 파란 머그컵 위로 두 개의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난다. 하얀 티에 트레이닝 복이 다인데 커피잔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이 잘 깎아놓은 듯한 얼굴과 큰 키 때문에 CF 같았다. 

윤수는 은기의 시선을 피하며 고양이에게 눈길을 주었다. 팔 안에 안겨 있는 고양이를 내려보며 그가 말했다. 

“파란 눈이 투투고.”

커피를 탁자에 내려둔 은기가 고양이들을 향해 눈을 가벼이 부라렸다. 

“맞아요. 이 녀석들, 형 힘들게 하지 마라.”

은기가 손을 넣어 두 마리를 한 손으로 하나씩 잡더니 땅에 내려두었다. 항의하는 듯 두 마리가 발바닥 소리를 간지럽게 내며 배회하다가 고개를 홱 돌리더니 다른 곳으로 뛰어가 버린다. 

윤수가 커피를 받아들고는 고양이가 가버린 곳을 걱정스럽게 기웃댔다. 

“삐진 거 아냐?”

저도 모르게 평소에 하듯 은기에게 편안히 말하던 윤수가 흠칫했다. 존댓말을 하자. 지금은 일하는 것이다. 

막상 반대편에 앉은 은기는 심드렁하게 제 몫의 커피를 홀짝댔다. 도수 없는 안경에 하얀 김이 서렸다가 사라진다. 

“저러다 심심하면 금방 와요.”

그가 커피잔을 든 채 일어나더니 윤수의 옆자리에 가서 앉는다. 

“그래서, 오늘 뭐 할 거라구요?”

옆에 바짝 붙어서 빤히 얼굴을 보는 눈빛에 윤수는 버벅대다 노트북을 꺼내 들었다. 급히 놓느라 커피잔이 공회전하더니 쓰러질 뻔 했다. 저 커피가 다 쏟아지면 노트북으로 골인이다. 

‘헉.‘

그때 은기가 윤수의 등 뒤에서 손을 뻗어 흔들리는 잔을 꽉 쥐었다. 자세가 자세인지라 마치 은기가 그를 안은 것 같았다. 

뜨거운 체온이 등 뒤에 가득 했다. 단단한 팔과 가슴이 등에 닿는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여러 개의 카메라와 사람의 손에 들린 카메라가 이 쪽만 지켜본다. 윤수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가슴이 부서질 것처럼 쿵쾅대고, 은기의 존재만이 예민한 신경 사이로 가득 메워진다. 

목덜미로 은기의 뜨거운 숨이 닿고, 그의 반대편 손은 윤수의 팔을 잡고 있었다. 길고 탄탄한 손가락이 여물게 윤수의 마른 팔을 고정하고 지탱하고 있다. 

윤수가 고개를 들어 은기를 올려 보았다. 그는 걱정스러운 눈을 하고 윤수를 마주 보았다. 동시에 불이 붙은 옅은 갈색 눈동자가 투명하게 번뜩인다. 메마른 가뭄 같았다. 

은기가 억누르는 듯한 저음으로 천천히 말했다. 

“아직 뜨거우니까 조심해요.”

등에 닿은 은기의 가슴 속 무언가도 빠르게 뛰고 있었다. 진동이 되어 윤수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걸 안 순간, 윤수는 마음이 놓였다. 

나만 긴장하고 있는 게 아니구나. 그도 조금쯤은 같은 심정을 공유하고 있구나. 그런 안도감이 들었다. 

윤수의 얼굴 바로 옆에서 은기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방금까지 넘치던 열정적인 것은 이미 내면으로 들어간 뒤였다. 

“급하지도 않은데 천천히 하죠.”

귓가에 가까웠던 거리라서 속삭이는 것처럼 느껴져서 윤수가 얼굴을 붉혔다. 카메라에 잡힐까 봐 얼른 철회하기는 했지만. 

은기의 팔이 천천히 뒤로 물러나고 제자리로 돌아간다. 되돌아가는 것이 윤수의 기분 탓인지 유독 느렸다. 

노트북 화면이 밝아지고, 윤수는 옆에 앉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무표정한 얼굴로 커피만 마시고 있는 그를 흘끔 쳐다보았다.

“다리는 좀 괜찮아졌습니까?”

별것도 아니라고 하려던 은기가 멈칫하더니 말을 바꾸었다. 촬영 때 다리 핑계를 댄 것도 있어서 매스컴을 의식한 듯 했다. 

“멀쩡해졌습니다. 회복력이 좋은 편이라.”

“다행이네요.”

사무적인 어조에 은기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슬그머니 이마를 좁혔다. 그리곤 커피를 후룩 한 모금 마시고는 피식 웃었다. 

“다행이죠. 오늘 밤에 ‘파티’도 해야 하는데.”

손길이 멎은 것은 윤수 쪽이었다. 노트북 비번을 치려던 손가락이 완전히 멈춰버렸다. 

파티라면 어제 은기와 함께 갔던 헤어샵에서 나누었던 둘만의 은밀한 대화에서 나온 말이었다. 

[오늘 밤에 나한테 파티 열어 줘요.]

[파티? 무슨 파티?]

[내가 좋아하는 거. 알잖아.]

유혹하듯 길게 휘던 입술이 지금도 선명하다. 윤수는 그만 아찔해져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등받이에 팔을 기대고 있던 은기가 느긋하게 묻는다. 

“어디 가시게요?”

“화장실 좀.”

이대로 있다간 수상한 장면을 전국 방방곡곡으로 내보낼지 모르겠다. 편집팀도 촬영분을 편집하다가 이상함을 느낄지도. 

은기는 항상 괜찮다고, 사람들이 그렇게 남의 일에 관심이 없다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곤 하지만 윤수의 생각은 달랐다. 

‘남의 일에 관심이 없다고? 전혀.’

그는 만약 정말 그렇다면 이곳의 수많은 사회 문제 중 절반이 사라질 것이라는 극단적인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끌어들인 사람들도.’

몰려드는 먹구름을 훑어내며 그는 은기가 외국 생활을 많이 해서 둔감한 것이라 여겼다. 

‘여긴가.’

윤수는 욕실을 여는 데 약간의 용기가 필요했다. 

이 곳에서 은기와 몇 번일지 모를 관계를 했고, 수없이 절정에 치달아 갔다. 엄청난 섹스였다. 뒤에서 박으며 어깨에 미친 듯이 키스 마크를 남기고, 은기가 턱을 손으로 돌려 또 입술에 키스하고. 터지던 신음 소리가 그 키스에 묻히고. 그랬던 것이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어, 여기도….’

욕실에도 카메라가 있었다. 샤워시설 쪽에 부착되어 변기와 세면대까지는 사각지대인 것 같다. 카메라를 신기한 듯 보던 윤수가 불쑥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샤워하는 장면이 이렇게 나가는 건가.’

그도 은기가 출연하는 예능을 본 적이 있고, 종종 샤워하는 장면이 방송을 타는 것을 보았다. 윤수는 급격히 불쾌해졌다. 샤워 장면이 짤이나 클립 영상으로 돌아다니는 것도 봤다. 

탑모델답게 그의 몸매는 화제가 되어 기삿거리와 가쉽이 되곤 했다. 은기가 밖에선 공공재(?) 라는 걸 알고, 막을 권리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신경이 쓰인다. 

밀려오는 충동에 윤수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물끄러미 노려보았다. 

다른 곳도 아니고 은기와의 비밀스러운 일이 가득한 장소다. 그 몸을 온전하게 다 보는 것도 자신이다. 

‘떼버리고 싶다.’

윤수는 한참이나 카메라와 눈싸움을 하다가 손만 씻고 나와 버렸다. 누군가의 눈 같아서 감시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바닥나서 식어 버린 커피잔을 들고 은기가 타박을 주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 

그러다 윤수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눈이 왜 그래요?”

윤수가 안경을 벗고 눈을 손등으로 비볐다. 뭔가 들어간건가. 

“왜 그럽니까?”

“벌건데.”

은기가 휴대폰 카메라를 꺼내 얼굴이 보이도록 설정했다. 왜인지 은기가 웃음을 참으며 윤수의 얼굴에 휴대폰 셀프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어디서 눈싸움이라도 하고 왔어요?”

정말 귀신이다. 놀라서 보는 윤수에게 은기는 결국 못 참고 웃음을 터뜨렸다. 

느닷없이 터진 웃음에 윤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은기가 웃음 사이로 겨우 말을 이었다. 

“볼 일 보는 정도는 카메라에 잡혀도 안 나가요.”

허둥지둥 식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윤수가 당황스러워했다. 

“어, 어떻게 알았어, 알았습니까?”

실컷 웃은 은기가 눈물까지 맺힌 눈꼬리를 손가락으로 닦았다. 

“너무 안 오길래 걱정되서 슬쩍. 카메라를 엄청 무서운 얼굴로 보고 있길래요.”

제자리에 서서 팔짱을 끼고 카메라 이모저모를 살피다가 뜻 모르게 한참 노려보는 것을 은기가 고스란히 다 본 것이다. 

‘볼 일 보는 것까지 카메라에 잡힐까봐 그런 건가? 귀여워서 미치겠네.’

윤수를 그 자리에서 먹어버리고 싶은 걸 참느라 애썼다. 그의 속도 모르고 윤수는 차마 진실을 말하지 못한 채 고개를 돌렸다. 

“…이런 방송은 처음이라. 몰랐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은기가 차라리 그리 오해하는 쪽이 마음 편하다. 

어떻게 말한단 말인가. 네가 샤워하는 것이 방송 탈까봐 카메라를 떼버리고 싶었다는, 속없고 얄팍한 말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