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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솜사탕 일상 --> (23/59)

<-- 솜사탕 일상 --> 

프로그램 측에서 사무소로 미리 촬영 예정이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을 넣었다. 윤수도 마음의 준비를 했다. 이제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다. 

은기의 소속사에서 바라는 것은 그의 개인적인 포토 에세이 건보다는 해외 포트폴리오 용도로 나갈 홍보 번역물이었다. 그들은 일에 진척이 있는 것처럼 보이길 바랐고, 윤수는 그에 응하기로 했다. 

전날 헤어샵이라도 가야 하나 고민했던 그에게 은기가 손을 내밀었다. 마침 공휴일이기도 하고, 같이 가자고 제안한 것이다. 

알려준 샵에 먼저 도착한 그가 하늘색 수건을 머리에 두른 채 휴대폰을 만지고 있었다. 함께 맞췄던 안경은 쓰고 왔던 건지 거울대 앞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습관적으로 윤수는 새로 생긴 안경을 손가락으로 추어올렸다. 

‘벌써 와 있네.’

막 머리를 감은 건지 은기의 감은 수건 아래 물방울 몇 개가 콧잔등과 관자놀이에 달려 있었다. 훤히 드러난 반듯한 이마가 바삐 움직이는 손가락 방향에 따라 좁아졌다. 긴 속눈썹이 분한 듯 파르르 떨리기도 했다. 

‘게임이라도 하나.’

미소 지은 윤수가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 왔어

휴대폰에 오뚝한 코를 박을 것 같던 은기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휙휙 돌아가던 그의 시선이 윤수가 서 있는 문으로 향하던 찰나, 얼른 다가온 여직원이 윤수에게 친절히 물었다.

“예약 하셨어요?”

“어…. 피윤수입니다.”

예약은 은기가 해놨을 거라 당황하고 있는데 이름을 들은 여직원이 곧장 그를 은기 옆으로 안내했다. 

빛이 잘 들어오는 창가 자리였다. 조금씩 내리기 시작하는 빗방울이 투명한 창에 작고 둥근 막을 만들었다. 하늘은 밝은데 빗방울이 거짓처럼 내린다. 여우비였다. 

은기가 휴대폰을 내려 놓고 이마에 맺힌 물방울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올 때 안 막혔어요?”

“그럭저럭.”

일상적인 대화가 이제 자연스럽다. 섹스할 때는 몰아치며 절정으로 몇 번이나 밀어 올리면서, 평소에는 또 아닌 사람처럼 군다. 그 차이가 그를 더 종잡을 수 없게 만들었다. 

윤수는 지정된 의자에 앉았다. 가죽이 등까지 휘감기는 촉감으로 좋았다. 

“머리 뭐할 거에요?”

가져온 가방을 맡긴 윤수가 같은 디자인의 회색 가운을 입고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미용실은 오랜만이라 뭘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연예인으로 보이는 인형 같은 사람들이 몇몇 보였다. 

‘윽….’

긴장으로 윤수의 등줄기가 조여든다. 미용실 안에서 책을 보거나 뭔가를 먹고 마시거나, 걸어 다니는 자들이 전부 스타일 좋고 화보에서 튀어나온 사람들 같다. 

“글쎄. 직원한테 물어봐야 하나.”

“내가 추천해 줄게요. 누나, 여기 책자 좀.”

은기가 손을 번쩍 들자 긴 머리에 붉은 머리로 염색한 스타일리시한 직원이 다가와 얇은 책자 몇 권을 건네주었다. 손톱도 네일 아트로 화려했다. 

고급스럽고 깔끔한 내부에서 머리하는 소음이 간간이 기분 좋게 들린다. 

은기가 집중해서 책자를 넘기다가 이마를 덮는 가지런한 앞머리와 전체 스타일에 곱슬이 약간 들어가고 떠 있는 머리를 추천했다. 색은 갈색과 붉은색의 중간이었다.

그는 손을 뻗어 윤수의 머리칼을 진지한 얼굴로 만지작댔다. 

“이런 스타일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은기의 손이 닿은 곳에 불이 붙는 기분이었다. 윤수의 눈이 빠르게 주변을 스캔했다. 누구도 그들에게 신경 쓰지 않는다. 그리고 아무리 둘러봐도 이 곳은 이 쪽 업계 사람들이 주로 찾는 전문 업소 같다. 

이런 곳에 있어도 되는 걸까. 주눅 든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윤수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염색도?”

“이왕 온 김에 하죠 머리 상태 나쁘지 않으면 괜찮을지도. 여기 약도 좋은 거 써서 그리 상하지도 않아요.”

검은 머리로 살아온 것이 어언 29년째다. 고집할 생각은 없지만 선뜻 바꾸기는 망설여졌다. 하지만 은기가 괜찮다고, 잘 어울릴 거라고 하니 근거 없는 자신감이 솟기도 했다. 

망설이던 윤수가 자신을 빤히 보고 있는 은기를 향해 헛기침 했다. 

“해볼까?”

은기가 씩 웃더니 직원을 불러 해당 스타일로 해달라는 주문을 했다. 머리부터 한차례 감고 온 윤수는 곧 그와 같은 하늘색의 수건을 머리에 감고 다음 차례를 앉아 기다렸다. 

별 것 아닌 일에 그의 가슴이 두근거린다. 의자에서 나는 새 것 특유의 질감과 향, 잘생기고 예쁜 사람들이 가득한 마법의 공간, 다과를 담은 그릇을 가지고 돌아다니는 직원들, 그 옆에 하은기가 있다. 

잡지를 하나 들어 읽던 은기가 윤수와 눈이 마주치자 다정하게 웃었다. 

은기와 같은 미용실에서 함께 머리를 하다니. 이전 같으면 생각도 못할 일이다. 

TV나 버스 전광판, 잡지에서나 보던 사람과 일상을 공유하고 심지어 뜨겁게 몸도 섞게 되었다. 잡지를 뒤적이는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어떤 식으로 안을 휘젓는지, 잡지를 뚫어지게 보는 저 옅은 갈색 눈이 키스할 때 어떻게 휘는지. 그런 것들도 은밀히 알게 되었다. 

윤수가 생각한 순간 아래로 몰리는 열을 감지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제발….’

야한 상상이나 했던 자신이 바보 같아서 윤수는 퍼뜩 그에게 집중했다. 은기가 꼬았던 다리를 풀고 제대로 의자를 당겨 앉았다. 

“분위기 나쁘지 않죠?”

“여기? 좋지.”

나쁠 리가. 오히려 분에 넘쳤다. 동네 미용실, 그것도 비싸 보이는 곳은 일부러 넘겼던 윤수였다. 

“그럼 다행이고. 다음에 또 와요. 미리 말하지만, 비용은 다 내가 대. 허튼 생각 마요.”

윤수는 무엇부터 짚어야 할지 몰랐다. 다음에 또 같이? 비용을 또 은기가 다 부담하겠다는 것? 다음이 있는 건가. 그는 습관처럼 몰려드는 새까만 망상을 금방 밀어냈다. 이제 가라앉아 있을 이유도, 지난 것에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은기가 윤수가 입은 셔츠를 보더니 고개를 만족스럽게 끄덕였다. 베이지색의 굵은 선이 가로로 가지런히 나 있는 스프라이트 형태의 상의였다. 

“옷 색깔 잘 어울린다. 역시.”

그는 윤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치장하고 변화시킬 생각으로 보였다. 넉넉한 품의 점퍼가 시작이었고, 안경부터 옷, 그리고 머리까지. 

억지로 바꾼다기보다는 도망가고 싶고 잊고 싶은 과거로부터 은기가 멀찍이 떼어 주는 감각에 가까웠다. 그 검은 역사가 다시 찾아온다 하더라도 그때의 윤수가 아니도록. 그래서 그가 주는 것들이 고마웠다. 

‘널 만나지 못했으면 지금쯤 어떻게 됐을까.’

진기에 대한 미련을 돌아오지 않을 미련의 강에 떼어 조금씩 던지면서, 삶은 피폐해졌을 것이다. 관계의 끝은 결국 보지 못한 채 의심만 하다가 시간을 그저 흘려 보냈을지도 모른다. 

아늑한 공간에 어디선가 커피 향이 났다. 그가 두리번댔다. 커피가 먹여 살리는 매일이다. 카페인 부족인 몸이 본능적으로 커피를 찾았다. 

“여기 커피 한 잔 가져다 주세요.”

그를 살피고 있던 은기는 눈치 빠르게 커피도 부탁했다. 따뜻한 커피 머그잔이 손 안에 감기는 기분이 좋았다. 손 끝에 닿던 차가운 공기가 달아난다. 

윤수는 은기의 이런 배려가 좋았다. 형인 진기는 학교에서 사시 패스 기록을 세울 만큼 똑똑했지만 생활적인 센스는 부족했다. 

오랜만에 떠오른 진기 생각이 결혼으로 이어지면서 마음 한 구석이 아려왔다. 하지만 확실히 갈수록 느껴지는 고통의 크기가 희미해진다. 떨어진 상처에서 새 살이 돋듯 새로운 마음이 조금씩 메워지고 있었다. 덜 괴로웠다. 

그는 진기를 떠올리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은기에게 미안했다. 죄책감을 느끼며 은기를 흘끗 보았다. 은기는 직원이 뒤에 붙어 머리에 약을 바르고 있었다. 

“그 슈퍼모델 일 아직도 기사 계속 나던데. 괜찮아?”

안 보이던 다크써클이 눈 밑으로 길게 만년설처럼 내려앉아 있다. 은기는 눈두덩이를 손끝으로 꾹꾹 눌렀다. 

“안 괜찮아요. 피곤해 죽을 것 같아.”

특히 계속 의심하고 있던 매니저가 어찌나 들볶든지 수명이 주는 줄 알았다고 하소연했다. 여태 자기 눈 피해서 연애한 거 아니냐고 시시콜콜 붙어서 잔소리를 하고 있다고. 

뒤에서 말없이 대화를 들으며 직원이 끼어들었다. 

“은기 네가 헤로인 시크 스타일이라도 하는 줄 알았지 뭐야. 다크서클은 훅 내려와 있고 피곤해 보이고.” 

“헤로인 시크…?”

윤수가 슬그머니 끼어 의아함을 표하자 직원이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멍하고 퀭한 눈빛, 헝클어진 머리로 축약되는 개념이었다. 

이를 들은 윤수가 시선을 거울로 고정한 은기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듣고 보니 정말 그는 많이 지쳐 보였다. 

‘그만큼 힘든 일인가.’

안타까워진 윤수가 물었다. 

“내가 뭐 도와줄 건 없어?”

밝은 빛이 쏟아지는 창가 옆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비탄에 젖은 사람처럼 어두워 보였다. 

“있죠.”

“뭐?”

장난기가 발동한 눈이 반짝였다. 금방 전까지 우울해 보이던 것은 거짓말 같았다. 윤수는 왠지 속은 느낌이 들었다. 

“오늘 밤에 나한테 파티 열어 줘요.”

“파티? 무슨 파티?”

직원도 궁금한지 손질 하는 와중에 귀를 열어두고 있다. 은기가 여유롭게 적당히 도톰한 입술을 여닫았다. 

“내가 좋아하는 거. 알잖아.”

“…설마.”

윤수의 안색이 달라진다. 아마 파티는 맞을 것이다. ‘섹스 파티’ 라는 데에 문제가 조금 있지만. 내일을 위해 샵까지 왔건만, 망칠 수 없다. 윤수가 이를 악물었다. 

“내일 바로 촬영 날인데, 안 돼.”

“그럼 끝나고 해. 전에 못 들었던 말도 들어야죠.”

씨익 웃는 은기에게서 거부 못할 유혹이 건너온다. 윤수는 급격히 저항감이 사라졌다. 저 웃음만 보면 마음이 약해지고 홀랑 넘어가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승낙 비슷한 말을 뱉고 말았다. 

“아, 아무튼 알았어. 오늘 말고 다음에.”

승기를 잡은 은기가 투덜댔다. 

“보고 싶다고, 빨리 오라고 할 땐 언제고. 야박하네.”

윤수는 직원이 들을까 그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직원은 이제 대화에 관심이 없어졌는지 묵묵하게 손만 놀렸다. 은기의 이야기도 친한 형에게 하는 애교쯤으로 생각했다. 

은기가 볼에 흘러내리는 약의 위치를 직원에게 가르쳐 준 뒤 중얼거렸다. 

“그 말 정말 좋았는데. 또 듣고 싶다.”

그땐 정말 뭐에 씌었는지 드물게 솔직해졌다. 가슴이 시키는 말을 그대로 뱉고 말았다. 윤수는 화끈대는 얼굴을 반대편으로 돌렸다. 

“…다음에.”

짓궂은 물음이 뒤따른다.

“다음에 또 해주려고요?”

“언젠간.”

볼을 닦아 주는 직원의 섬세한 손길이 지나가고, 은기가 혀를 찼다. 

“짜다, 정말.”

윤수는 세상 최고의 자린고비라도 된 것 같았다. 시무룩한 은기의 반응에 안절부절 못하던 윤수가 머리를 다시 감으러 가자는 직원의 말에 일어섰다. 부드러운 갈색 뒤통수가 여느 때처럼 늠름하게 보인다. 그리고 조금, 외로워 보였다. 가슴이 알싸하다. 

은기의 머리를 내려보며 윤수가 조용히 말했다. 

“오늘도 그래서 왔잖아.”

“어?”

놀란 은기가 휙 돌아보았지만 이미 윤수는 총총 걸음으로 직원을 따라 머리를 감으러 간 뒤였다. 멍하게 있던 이내 그는 피식거리며 윤수가 남기고 간 말의 향을 음미했다. 여운이 길다. 

꼭 올 필요 없었는데, 널 보기 위해서 왔다는 말을 이렇게 사랑스럽게 해도 되는 걸까. 그것도 선물한 것들을 빠짐없이 몸에 걸치고 보란 듯이 와서 말이다. 

‘방심하면 꼭 치고 들어와. 누가 선수인지.’

은기는 흐느끼듯 내밀던 그의 진심을 또렷이 기억했다. 

[보고 싶다.]

가늘게 떨리던 목소리. 

[빨리 와.]

절박하게까지 느껴지던 음성을 듣자마자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지금 당장 그의 옆에 없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논리적인 사고의 수순이 아니지만 그땐 그럴 것 같았다. 

부랴부랴 다리 핑계까지 대가며 일을 서둘러 끝내고 그에게로 달려가는 길이 너무 멀었다. 사람에게는 왜 날개가 없는 걸까. 날아서 가면 바로 도착할 수 있을 텐데. 

그런 판타지스러운 망상에 뒤덮여 도착했을 때 그 큰 눈으로 놀라 보던 윤수가 선명했다. 

‘드라이브가 아니라 호텔로 갔어야 했나.’

때늦은 후회가 몰려왔지만 머리를 감으러 가자는 직원의 재촉에 은기의 망상은 스르륵 사라졌다. 

이 날, 성공적으로 머리를 한 두 사람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은기는 머릿결 복구와 촬영에 필요한 펌을 넣었고, 윤수는 이마를 가지런히 덮는 적갈색 머리칼에 약간 뜨는 펌을 넣어서 칙칙하던 이미지에서 탈피했다. 

밝고 몽글몽글해 보였다. 은기의 입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계산을 하는 내내 너무 웃어서 직원이 좋은 일이 있냐고 물을 정도였다. 

그는 바로 다음에 스케줄이 있어서 매니저가 몰고 온 차가 앞에 대기해 있었다. 

계단을 내려오면서 은기가 윤수를 위아래로 훑었다. 아직도 제 모습이 어색한 윤수는 자꾸만 머리를 만졌지만 은기가 만지지 못하게 했다. 

계단 끝에 서서 은기가 그를 끌어안았다. 넓은 품에 몸이 맞춘 듯 쏙 들어갔다. 

“이럴 줄 알았어. 진짜 잘 어울린다. 진작 이렇게 하죠.”

“이상하지 않아?”

“전혀.”

강력하게 부정한 은기가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 그의 턱을 잡고 짧게 키스했다. 입술에 닿는 촉감까지 뜨거웠다. 슬쩍 스친 성기의 부대낌에 아래에 또 반응이 와서 윤수가 눈을 질끈 감았다. 은기 또한 폭풍처럼 죽일 수 없는 열망이 그의 옅은 눈에 빼곡히 자리 잡고 있었다. 그가 가라앉은 저음으로 중얼거렸다. 

“너무 멋져서 지금이라도 ‘파티’ 하고 싶은데.”

“밑에 매니저 분 기다리잖아.”

“젠장….”

은기가 거칠게 머리를 훑어 올리려다 방금 한 머리란 것을 깨닫고 멈칫 굳었다. 대신 윤수의 볼에 버드 키스를 한 번 더 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그의 얼굴에 아쉬움이 떠나질 않았다. 

“가요.”

자켓에 양 손을 꽂은 은기가 긴긴 한숨을 쉬었다. 곧고 길게 뻗은 그의 진청색 바지가 불만스러운 듯 아주 느리게 계단을 걸었다. 

계단이 끝난 지점에 매니저가 담배를 피며 기다리고 있었다. 

윤수는 흠칫 놀랐지만 곧 안심했다. 사정거리나 시야를 고려하면 아래에서 보이지 않을 위치였다. 은기가 차갑게 식은 윤수의 손을 꽉 잡았다. 

“내일 봐요. 촬영은 너무 걱정 말고.”

“응. 그래. 일 조심히 해.”

이미 두 사람이 많이 친해진 사이인 것을 인식한 매니저는 인사를 하곤 심드렁하게 차 안으로 들어갔다. 그를 흘끗 본 은기가 정말 놓기 싫다는 얼굴로 손을 놓았다. 

“알았어요. 아, 오늘은 정말 가기 싫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매니저의 손에 질질 끌려가는 은기를 배웅하고 나서야 그 날의 일정은 끝이 났다. 

사라지는 차 뒤꽁무니를 보고 있자니 윤수는 가슴 한구석이 허전했다. 

사실은 잠시 함께했던 시간이 행복해서 끝이 나지 않기를 바랐다. 은기와 있으면 시간이 흘러가는지도 모른 채 정신없이 흘러가 버린다. 

‘내일도 그러려나.’

두려웠던 처음과는 달리, 이제는 기대마저 되었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세상이 그리 차갑지 않다. 윤수는 그것으로 만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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