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개를 내미는 과거, 뻗어나가는 마음 -->
대학교 입학식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윤수는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홀연히 납치당했다.
창고 같은 곳이었을 것이다. 경찰들에게 발견됐을 당시에는 기절한 채로 나가서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납치한 자들이 한 번도 불을 켜준 적이 없었다.
어둡고 습했다. 양손과 발이 의자에 묶여 있고, 눈도 천으로 가렸다. 그나마 다행인 건 쥐나 벌레가 나오지는 않았다는 점이었다.
간단한 샤워시설과 변기가 창고 구석에 있었고, 음식은 하루에 1끼만 주어졌다. 아침 저녁으로 손발은 풀어 주었지만 사람이 들어와 감시했고, 탈출은 가능성조차 없었다.
윤수는 손발이 풀릴 때마다 몸을 씻었다. 뜨거운 물에 두려움으로 굳은 몸을 푸는 것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거의 매일 맞았다. 빗자루나 대걸레의 딱딱한 밀대나 가끔 야구 방망이도 등장했다. 폭력이 쏟아진 뒤에는 항상 똑같은 질문이 던져졌다.
[넌 남자야. 남자가 같은 남자를 좋아하는 건 병이고. 자, 이제 여자가 좋아, 남자가 좋아?]
처음엔 너무 무섭고 아파서 거짓말도 해봤다. 하지만 통하지 않았다. 이 사람들은 아마 죽을 때까지 이 곳에 가두고 같은 질문을 강요할지도 모른다.
그리 생각하자 윤수는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독기도 생겼다. 스스로에게까지 거짓말하기 싫었다. 이 사람들에게 절대 지기 싫었다.
[남자요.]
그러면 아직 병이 낫질 않았다며 매질은 더 가혹해졌다. 차라리 죽고 싶을 정도로 아팠는데, 이 사람들은 그러지도 못하게 치료해 주었다.
심지어 너무 심하게 맞은 뒤에는 며칠 동안 폭력에 유예를 두어 집중 치료를 해주기도 했다.
가끔 엉덩이나 가슴을 더듬는 손길도 있었다. 그런 식으로 억지로 욕정하게 만들고는 남자의 손에 흥분한다며 더 심한 폭력을 가했다.
이유 없는 행위와 폭력에 점점 몸도, 정신도 시들어 갔다.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할까. 이 사람들은 왜 자신에게 이런 짓을 하는 것일까. 이 몰상식한 행위에 정당성이란 게 존재하나.
무엇보다 제일 견디기 힘든 것은 그들이 끊임없이 주입하는 자기 부정이었다. 그들은 윤수가 스스로를 부정하게끔 강제했다.
그래도 윤수는 꺾이지 않았다. 이 사람들은 자신이 꺾이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니 절대 원하는 대로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후유증 탓이었을까. 지옥같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 몸이 급격히 안 좋아졌다. 추위도 타게 되었고, 몇 년간은 한여름에도 한기가 들어 긴 팔을 입고 다녔다.
오기로 버텼던 시간이 독이 되었다. 상대를 찾으며 윤수는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려 들었다.
하지만 그 시간을 버틴 것이 무색하게 상대가 성적인 것을 요구하면 거짓말같이 두려워졌다. 침대에서 달아난 적도 있었다. 게이인 것을 증명하려는 듯 남자들을 만났지만, 번번이 파투났다.
끝까지 가는 것이 두려웠던 것은 분명 그 날의 악몽 같은 기억이 족쇄가 되어서. 그래서일 것이다.
진기를 만난 건 슬슬 포기할 즈음이었다.
유난히 윤수에게 집착하던 연상의 남자가 학교 캠퍼스까지 쫓아왔다. 타학교 사람이었고 그는 인적 드문 법대 건물 사이에서 윤수를 덮치려 했다.
그때 두꺼운 법전이 날아와 남자의 등을 후려갈겼다. 덩치 큰 남자가 한 번에 쓰러지고, 법전을 가볍게 들곤 진기가 책을 털었다. 혐오스러운 눈빛이 남자에게 향해 있었다.
[더러운 새끼.]
아마 그게 진기에게서 들은 처음이자 마지막 욕일 것이다.
[거기, 괜찮아?]
냉정한 까만 눈이 일순 걱정스럽게 휘었다. 그가 쓰러져 엉망이 된 윤수에게 단단해 보이는 손을 내밀었다. 그의 등 뒤로 눈을 찌르는 날카로운 태양이 반짝였다.
윤수는 멍하게 그를 올려 보았다. 작게 깨지는 소리가 가슴 속에서 파사삭 울렸다. 속이 파도치고 눈이 역광에 어두워진다.
그때, 윤수를 현실로 건져 올린 건 서늘한 바람이었다.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밀려온 물냄새 가득한 바람에 갑갑하던 속이 한결 편해진다.
“진짜 어디 안 좋은 거 아니야?”
빛이 한순간에 걷혔다. 사라진 자리에 은은한 달빛만이 메웠다. 검은 실루엣이 달빛을 등지고 윤수에게 손을 내밀었다. 큰 손이 식은 이마에 뜨겁게 내렸다.
“괜찮아요?”
은기였다. 노란 달빛이 그의 훤칠한 키에 가려 사방으로 고요히 부서져 나갔다. 활짝 열린 차체의 보조석 앞에 그가 있었다. 비릿한 물냄새가 공기에 가득했다.
은기가 손을 거두며 중얼거렸다.
“열은 없는데.”
그는 허리를 굽힌 채 무릎에 손을 대고 윤수를 내려보았다. 자상한 눈동자가 염려로 조여든다.
“드라이브 괜히 하자고 했나. 속은 좀 어때요?”
목이 타들어가고 속은 누군가가 휘저어 놓은 것처럼 울렁거렸다. 차멀미였다. 하지만 그가 걱정할까봐 윤수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 괜찮아졌어.”
강 쪽으로 드라이브를 오자고 한 건 은기였지만 선선히 수락한 것은 윤수였다. 그는 보고 싶다는 말에 정말로 스케줄을 최대한 빨리 끝내고 윤수에게 달려 왔다. 다리가 아프다는 핑계가 잘 먹힌 것이다.
번역 사무소 앞에 차를 세워두고 반짝대는 눈으로 기다리던 은기가 생각나 윤수가 피식 웃었다.
은기는 그 웃음이 불안한지 허리를 곧추세우고 지갑을 쥐었다.
“거짓말한다, 또. 안색 완전 안 좋은데. 있어봐. 약이랑 마실 것 좀 사올게요.”
윤수는 허겁지겁 그를 붙들었다. 팔을 붙들린 은기가 돌아본다.
“진짜 괜찮아. 문 열어놓고 앉아 있으면 나아질거야.”
동그랗게 뜬 까만 눈이 애처롭다. 가지 말라는 것처럼 느껴져서 은기는 묘하게 기분이 들떴다. 하지만 걱정되는 건 걱정되는 거다.
“정말 보약이라도 지어 먹어야 하나. 몸이 왜 그리 허약해.”
윤수가 슬그머니 딴청을 피운다.
“넌 다리 다쳤잖아.”
은기는 열어놓은 차문 앞에 무릎을 접고 앉아 지지 않고 되받아쳤다. 날씬한 다리를 접고 팔을 늘어뜨리고 있는 모습이 길고 우아한 갈색 털의 외래종 성견 같았다.
“그건 핑계라니까. 약간 삐끗하긴 했지만 다쳤다고 말할 수준은 아니라구요. 하룻밤 자고 나면 멀쩡해질걸.”
윤수가 작게 웃었다. 그의 매니저를 상대로 펼친 사기극에 동참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툴툴대는 은기가 귀엽게 느껴졌다.
“너도 허세 부릴 줄 아는구나. 안 그런 것 같더니.”
“개폼 좀 잡으면 어때.”
은기는 아무렇지 않게 덧붙였다.
“좋아하는 사람 앞인데.”
투덜대는 목소리에 강한 확신이 깃들어 있다. 윤수는 또다시 파고드는 은기의 직설 화법에 어깨를 움찔 떨었다.
은기 앞에선 틈을 둘 수가 없다. 자그마한 틈도 귀신같이 알고 가득 메우니까. 당연한 것처럼 말이다.
그런 자신감이 부럽고, 그도 가지고 싶었다. 은기의 당당함이 옮아온 것일까.
윤수는 그답지 않은 질문을 툭 내뱉었다.
“내 어디의 어디가 좋은 거야?”
말해놓고 금방 쑥스러워졌지만 이왕 말한 거, 부끄러움은 눌렀다. 그의 역사상 이런 질문은 아마 은기가 처음일 것이다.
은기도 놀란 듯 눈썹을 치켜 들었다. 보기 좋은 도톰한 입술도 살짝 벌어졌다. 역시 너무 나간 것일까.
상대는 무려 ‘하은기’다. 공중파에 시시콜콜 나오고 그가 처음 말했던 것처럼 술 한잔 하기도 힘든 사람. 그런 사람에게 ‘날 왜 그렇게 좋아하냐’ 니.
지나친 자신감이었을까. 부풀었던 윤수의 가슴이 금방 쪼그라든다. 불안한 눈이 허공을 배회한다.
“이런 질문, 싫어?”
그가 몸을 일으키더니 기지개를 켰다. 가벼운 스트레칭을 한 은기는 밝게 미소지었다.
“아니, 좋아.”
막 샤워를 하고 나온 사람처럼 기분 좋은 상쾌함이 그의 목소리에 묻어 났다.
뿌듯한 얼굴로 은기가 운전석에 돌아가 앉는다. 그는 문을 닫았다.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안 쪽으로 윤수의 손을 끌어당긴 그가 손가락 사이사이 틈 없이 맞물리게 잡았다.
손가락이 아플 정도로 꽉 잡은 은기가 그를 마주보며 씨익 웃는다.
“악역한 보람이 느껴지네.”
악역이 뭐가 좋다고 웃는 건지.
윤수가 결 좋은 은기의 피부나 미끄러지듯 오똑 선 콧날 같은 것들을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그는 검지로 손등을 야릇하게 훑는 은기의 행위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입술로 뜨거운 숨이 나온다.
열어놓은 차체 안으로 혹여 사람들의 시선이 꽂힐까 두려워서 윤수는 손을 빼려 했다. 하지만 은기가 더 강하게 잡아당긴다.
거부할 수 없는 따뜻함이었다. 이 따스함에 너무 기대기만 할까봐 벌써부터 겁이 났다.
윤수가 작게 중얼거렸다.
“갈수록 이상해져. 내가 아닌 것 같아.”
웅얼대듯 뱉는 소리를 바로 주워들은 은기가 은밀한 손길을 더했다.
“이상해진다 싶으면 다 내 탓이라고 생각해요. 당신 인생에서 악역 해주겠다고 했잖아.”
그는 주변 사람을 악으로 물들이는 특기가 있다며 윤수를 겁주었다.
농으로 던진 말에 정말 흠칫하는 걸 보니 은기는 기분이 묘해졌다. 사회 생활 잘하는 것 같다가도 이런 모습 보면 때가 덜 탄 사람 특유의 순진함이 묻어난다.
“그리고 아까 한 거에 대한 답은-.”
은기는 자신을 물끄러미 보는 윤수의 강아지 같은 눈빛을 피했다. 이 눈이 그치지 않고 자신만 바라봐 주면 좋겠다.
“촬영날 알려줄까. 바로 알려주기 싫네.”
“…너무해. 그리고 왜 하필 촬영날이야.”
“그 날 왠지 다양한 얼굴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기념적인 날, 기념되는 말이 어울리잖아.”
한 쪽 눈을 찡긋하며 장난스레 말하는 은기에게 윤수가 기가 막힌 듯 말했다.
“그렇게 거창한 이유야?”
“음…. 그 날 꼭 거창하고 최대한 길게 지어서 올게요.”
그는 지금은 그리 거창하지 않지만 원한다면 애국가 4절 수준으로 지어올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침울해질 틈 없이 윤수가 바람 새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게 뭐야.”
웃는 것을 진지하게 보던 은기가 마주 미소지었다. 입가가 올라가고, 눈 끝이 살포시 접힌다.
“웃어요. 웃으니까 더 예쁘잖아.”
사소한 말들에 윤수의 가슴이 수없이 덜컹댄다. 이런 다정한 멘트들을 이전에 사귀던 사람들에게도 했겠지. 수상쩍은 자괴감과 불안이 마른 장작 위에 불씨처럼 튀어 연기를 피워낸다. 질식할 것 같았다.
하지만 부정적인 생각은 은기가 고개를 빼서 뒤를 보고는 눈짓 할 때 대번에 꺼져 버렸다.
“뒷좌석에 옷 사둔 거 있어요. 내릴 때 꼭 가져가.”
윤수가 놀라서 뒤로 휙 돌아보자 정말 뒷좌석에 쇼핑백 몇 개가 놓여 있었다. 비죽이 튀어나온 투명한 비닐도 보인다.
“뭐?”
그는 몹시 흔들리는 눈으로 쇼핑백을 훑었다. 명품 브랜드 잘 모르는 그조차 아는 이름 있는 메이커들이 줄지어 있었다. 저게 다 얼마일까.
“언제 산 거야? 비싼 거 아니지?”
“이왕 산 거, 받아줘요. 정말 싫음 안 받아도 되지만, 그래도 마음이니까.”
그는 난감한 듯 은기에게 잡힌 손을 꿈지럭댔다.
“싫은 건 아닌데….”
은기는 엄한 얼굴로 엄포를 놓았다.
“부담된다거나 그런 말 하는 거, 반칙이에요. 내가 부담된다는 거랑 같은 소리야.”
그렇게까지 말하자 거절할 수 없었다. 포기한 윤수가 다른 것을 물었다.
“사이즈는? 어떻게 알았어?”
음흉하게 웃은 은기가 앞을 보더니 핸들을 잡고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내 손이 다 기억하고 있어서.”
윤수의 얼굴이 순식간에 귀와 목까지 벌겋게 무르익었다. 폭탄을 던져 놓고 은기는 태연하게 주변을 살폈다. 그리곤 윤수를 잡은 손을 놓고 기어를 당겼다. 윤수는 온기가 떠난 손등이 금세 허전해졌다.
“슬슬 이동할까요? 사람 몰리는 것 같은데.”
한적하던 강가에 어느덧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고 있었다. 슈퍼모델 민성아와 열애설이 난 사람이 버젓이 얼굴 내놓고 돌아다니면 이목만 더 집중될 것이다.
게다가 성아와 사귀는 야구 선수 측에서 열받았는지 맞불 기사를 놓는 바람에 기사와 여론이 더욱 뜨거워지고 있는 참이었다.
정작 당사자인 은기는 윤수가 별로 개의치 않아 하자 아예 마음을 놓아버리고 관심을 끄고 있었지만.
은기의 휴대폰으로 전화가 몇 통 걸려오고 있었지만 그는 혀를 차곤 무시했다. 급한 건은 이미 다 처리했기에 지금 오는 건 대부분 하이에나같은 연예부 기자들일 것이다.
“이제 속은 좀 괜찮아졌어요?”
“응. 좋아졌어. 출발해도 돼.”
의욕에 가득 찬 은기가 카레이서처럼 눈을 빛내며 핸들을 꽉 쥐었다.
“좋아. 이번엔 천천히 직선 코스로 달릴게요.”
“잘 부탁해.”
긴 다리가 엑셀레이터를 힘껏 밟는다. 가속을 받은 은회색 차가 방향을 돌려 달려나갔다. 이어진 드라이브는 멀미 없이 쾌적했다.
열어 놓은 차창에서 시원한 바람이 길게 휘날리고, 은기의 들뜬 목소리도 함께 윤수를 휘감았다.
그리고, 며칠 뒤 예능 촬영도 바람처럼 빠르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