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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수석이 말한 만큼 TV출연에 미련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나가지 않을 방법이 있다면 빼고 싶다. 하지만 나가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이유는 단 하나 뿐이었다. 

작업 화면에 불이 들어온다. 윤수의 눈에 파랗게 깜박대는 불빛이 비쳐든다. 

‘여러 사람이랑 부대끼는 것도 아니고, 은기랑만 있으면 되니까 괜찮겠지.’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기 싫었다. 적어도 그와 함께 시작한 일은 함께 끝맺고 싶었다. 

상념은 하 수석이 어깨에 팔을 턱 얹어놓는 바람에 이어지지 못했다. 

“방송 나간다고 안경 맞춘 거야? 원래 안끼면서.”

윤수는 소중한 안경알에 하 수석의 기름 낀 피부결이 닿을까봐 얼른 뒤로 피했다. 

“눈이 안 좋아져서, 새로 맞췄어.”

“요새 새로운 아이템이 자꾸 나온다? 연애하냐?”

이 심심한 하이에나에게 걸리면 몇 날 며칠 놀림감이다. 그것만은 사양이었다. 

“…안 해.”

하지만 냄새는 기가 막히게 잘 맡는 하이에나는 코를 들이 밀며 윤수의 이상 현상을 알아채듯 킁킁 댔다. 

“앞에 뜸은 왜 이렇게 들이실까? 얼굴은 왜 벌게지고? 응? 솔직히 말해봐. 누구야?”

“안한다니까?”

아웅다웅 실랑이를 하다 보니 윤수는 지쳐 제자리에 앉기도 전에 탈진할 뻔 했다. 은기와 밤 늦게까지 격렬한 섹스를 한 것도 모자라 아침엔 하 수석의 때아닌 공격….

‘아, 생각하지마.’

은기와의 관계가 떠오르자 아래에 묵직한 감각이 몰렸다. 위로도 귀와 목 뒤까지 열이 오른다.

[절대 놓지 말고.]

귓가에 대고 웃음 소리와 섞어 속삭이던 은기의 낮은 목소리가 뒷목을 스친다. 열린 창가로 들어온 차가운 바람이 그의 목소리 같아 윤수가 몸을 움츠렸다. 

생각만 했을 뿐인데 투명한 하은기가 뒤에서 목을 핥고 유두를 문지르는 기분이었다. 

‘그만.’

생리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100부터 1까지 거꾸로 세었다. 팔을 뻗어 책상을 붙들고 고개를 푹 숙였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것인지 생각해봐야 이미 늦었다. 집에 있을지, 매니저와 만나 벌써 일하러 나갔을지 모를 한 사람이 계속 신경 쓰인다. 

‘일하느라 바쁘려나.’

슬그머니 붉어진 얼굴은 든 윤수의 시선이 모니터 옆으로 머무른다. 

여직원 하나가 선물로 돌렸던 작은 화분이 있었다. 공기를 상쾌하게 한다던 녹색 이파리가 생생하게 살아 있다. 화분 너머 유리창으로는 건조한 모래만 휘날렸다. 

작은 씨앗이 이 속에 있었을 것이다. 그 작은 것이 움터 부드러운 생활권을 만들고, 파랗게 돋아난 새싹이 시원한 비를 기다린다. 

윤수는 떠놓은 물을 화분에 조금 부어 주었다. 익숙하지 않은 안경이 코에서 미끄러져 손가락으로 추어올렸다. 

‘뭔가 바뀔까.’

이제야 한 발, 앞으로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윤수가 미소 지으며 의자를 앞으로 바짝 당겼다. 

어느 샌가 진기 생각은 거의 나지 않았다. 

한편, 은기는 매니저에게 갖은 구박을 다 받는 중이었다. 약속대로 윤수의 집 앞에 찾아온 매니저는 패배자의 모습으로 고개를 떨구고 서 있는 은기를 발견했다. 

미안한 것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매니저 최병수는 불안함이 몰려왔다. 

‘무슨 일이지.’

그가 미적미적 좁은 차 안에 긴 팔과 다리를 밀어넣었을 때 병수는 불안의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오늘은 화보 촬영 스케줄이었는데 그가 포즈 조정을 해야겠다는 청을 넣은 것이다. 

전속력으로 예약한 샵을 향해 달려가는 차 안에서 매니저가 있는대로 미간을 구겼다. 

“다리가 아프다고? 뭐 했길래?”

윤수에게 허세를 부렸지만 사실 은기가 오전에 눈 뜨자마자 느낀 건 ‘뭔가 잘못되었다’ 였다. 

약간 남은 술기운과 분위기에 취해서 윤수를 번쩍 들어서 그 짓을 해댔으니, 거기다 천천히 다리 상태를 살피면서 한 것도 아니고 막무가내로 밀어 올렸으니 탈이 날 만 했다. 다행히 근육이 크게 다친 정도는 아닌 것 같지만 운동을 과하게 했을 때의 찢어진 느낌이 났다. 

은기가 시시각각 변하는 바깥을 뚱하게 보며 변명조로 말했다. 

“간밤에 술먹고 좀…. 길거리에서 좀…, 그랬어.”

매니저가 황당한 얼굴로 그를 다그쳤다. 

“뭘 그래? 뭘 했다는 거야, 대체?”

“비틀비틀 하다가 사고친거지 뭐.”

“죽을래? 중요한 일정 앞두고 조신하게 있으라 몇 번이나 이야기했냐, 엉?”

목소리를 높이던 매니저가 걱정스러운 듯 언성을 다시 낮춘다. 

”너 한 번도 스케줄 전에 몸 삐끗한 적 없잖아.”

“나도 사람이야, 형. 너무한 거 아냐?”

“너무한 건 네놈이지. 너는 어떻게 된 놈이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거래처 사람 집에서 자. 넉살 좋은 놈.”

병수가 기가 막혀 하는 것은 바로 이 점이었다. 곧 죽어도 잠은 제깍제깍 집으로 들어가 자던 은기가 면식이 얼마 안된 사람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다니. 

은기는 매니저의 날카로운 눈빛을 피해 에먼 창밖을 구경하는 척 했다. 

“그게 그렇게 됐어.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하은기가 술 많이 마셨다고 아무 집에서 퍼져 자고 그럴 인간이었냐? 놀랠 노자다. 요즘 많이 놀란다, 아주.”

듣기 싫은 잔소리가 따갑게 귀에 꽂힌다. 참고 참던 은기가 드디어 말을 끊었다.

“빨리 가자. 늦겠어.” 

“늦겠다는 놈이 얼굴은 아주 폈다? 참, 밥은 먹었어?”

“조금 먹었어.”

“그 번역 사무소 사람이 줬어? 마음도 좋다.”

은기는 대꾸하지 않고 창가에 머리를 기댄 채 웃기만 했다. 윤수가 해놓고 간 것이 떠오르자 마음이 꽉 찬 듯 뜨거운 물이 남실남실 차오른다. 

오늘 아침에 눈 뜨자마자 옆을 더듬었지만 휑한 빈자리에 마음까지 덩그라니 빈 느낌이었다. 어젯밤의 뜨거운 열기가 허무하다. 

게다가 휴대폰을 보니 배터리가 다 되어 꺼져 있었다. TV 근처에 보이는 충전기를 발견해 꽂고 나니 방 구조가 눈에 들어왔다. 거실 겸 침실, 그리고 부엌, 화장실과 그 옆에 작은 옷장 및 창고로 분리되어 있는 원룸이었다. 

부스스하게 일어나 습관처럼 옷장을 열자 회색과 검은색으로 가득 찬 칙칙한 내부가 한 눈에 들어온다. 은기가 눈가를 찡그렸다. 

‘예상은 했지만 심한걸.’

윤수는 이런 색 말고 파스텔톤의 연한 유채색 톤이 잘 어울린다. 

언젠가 이 안을 싹 갈아버리겠다는, 윤수의 어머니가 들으면 무척이나 좋아할 다짐을 한 그가 무심결에 뒤를 돌아 냉장고를 보았다.

‘응?’

그러다 문에 붙여진 쪽지를 봤을 때 거짓말처럼 기분이 역전되었다. 붙여 놓은 것을 떼서 읽는 은기의 눈이 즐거이 휘었다. 

‘글씨 쓴 것도 그 사람 답네.’

칸을 많이 남겨둔 채 급히 흘린 정갈한 글씨였다. 

-냉장실에 술 깨는 거 사놨어 죽도 사놨으니 먹고가 

더 옆으로 많이 써도 될텐데 구석에 구겨서 써놨다. 남에게 폐끼치는 걸 싫어하고 조용조용한 성격 다웠다. 이런 성격인데, 어디서 어떤 일을 당했던 것일까. 

은기가 쪽지를 든 채 다른 팔로 허리를 짚고는 이마를 좁혔다. 

‘무슨 일이었을까.’ 

말을 안하니 더 궁금해진다. 그렇다고 억지로 하기 싫은 이야기를 끄집어 내는 건 못할 짓이다. 자연스럽게 그가 말하고 싶을 때 들어주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출근 시간에 바쁠텐데 언제 근처 편의점까지 와서 이런 것까지 사뒀는지, 마음 씀씀이가 고마웟다. 

그가 사놓은 것을 먹고 전자레인지에 죽도 돌려서 먹고 나니 또 졸음이 몰려 왔다. 아직 매니저가 오려면 시간이 남았다. 

풀썩!

침대로 양 팔을 뻗고 눕자 윤수의 체향이 은은하게 이불 위에서 번졌다. 

‘아직 향이 남아 있네.’

뒹굴거리면서 윤수의 체향을 들이맡고 있자니 자신이 변태처럼 느껴졌지만 아랑곳 않고 마음껏 하고 싶은 것을 했다. 충전되고 있는 휴대폰을 켜서 메시지를 확인하니 윤수의 것이 와 있었다. 

-숙취는 없어? 괜찮아?

다정한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다. 귀엽기는. 

피식 웃으며 답장을 하려던 은기는 까무룩 꺼져버리는 휴대폰에 멈칫 했다. 급속 충전이 아니라 아주 느리게 충전되는 듯했다. 

결국 답장은 하지도 못하고 휴대폰을 얌전히 놓아둔 그가 불만스럽게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익숙한 윤수의 향이 불만족으로 가득 찬 마음을 진정시킨다. 이불을 마구 끌어당겨 한껏 껴안고 있으니 윤수를 안고 있는 듯한 착각도 들었다. 

순간 찌릿한 감각이 허벅지 안 쪽에 일었다. 근육 속에 작은 불이 붙는 느낌이었다. 

‘윽….’

느낌 탓인지 욱신욱신 거렸다. 불길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는 애써 무시했다. 

‘그랬던 게 결국….’

은기가 한숨을 내쉬었다. 눈치를 보던 매니저가 핸들을 조심스럽게 꺾는다. 

“병원 먼저 들를까?”

“아니, 그 정도 아니야. 뛰는 포즈만 좀 조정해 달라고 하면 될 것 같아.”

병원을 들르게 되면 왠지 오늘 촬영에 지장이 생길 것 같았다. 

그때, 샵으로 곧장 밟던 매니저가 은기의 옆모습을 흘끗 보았다. 못보던 안경이 높은 코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그보다 웬 안경?”

은기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패션.”

‘커플 안경’ 이라는 말은 밑바닥에 고이 묻어 두었다. 진실을 말했다간 매니저가 제 손으로 직접 관뚜껑을 짤지도 모른다. 

이를 당연히 모르고 있을 윤수는 오랜만에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치기, childish….’

막 영어 문장에 인용된 속담을 번역하던 차였다. 안경 속 집중한 두 눈이 모니터를 훑고 지나간다. 뒤에서는 휴식 타임에 ‘Living Alone’을 보고 있던 직원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윤수가 모처럼 동원한 집중력을 푼 것은 은기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을 때였다. 

지잉지잉 울리는 휴대폰을 무심코 내려본 윤수는 눈을 크게 뜨곤 재빨리 받았다. 그리고는 사무소 밖으로 당연한 듯 나갔다. 

은기였다. 받자마자 이제는 귀에 달라붙는 그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건너왔다. 평소보다 피곤하게 느껴졌다. 

-뭐해요?

“일하지. 넌 끝났어?”

-대충은?

은기답지 않았다. 일에 대해 시큰둥한 태도를 보인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그는 피하듯 다른 화제로 돌아갔다. 

-사무소에서는 뭐래요? 예능 나간다니까 좋아하나?

“당연히. 소장님은 입이 귀에 걸렸어.”

-다행이네. 3일 뒤에 찍어요. 자세한 건 우리 쪽에서 말 넣겠지만. 

놀란 윤수가 휴대폰을 고쳐 쥐었다. 복도에서 지나가던 다른 사무실 사람들이 그를 흘끗 바라본다. 

“잠깐만.”

윤수는 옥상으로 장소를 옮겼다. 탁 트인 파란 하늘에 구름이 몇 점 떠 있다. 누가 피고 버린 듯한 담배 꽁초가 여러 개 굴러 다녔다. 

“3일 뒤? 너무 빠른 거 아냐?”

-부담스러우면 캔슬해도 돼요. 우리 소속사도 홍보 차원에서 밀어붙이는 거니까. 

“아냐. 할거야. 생각했던 것보다 일정이 빨라서.”

건너편에서 은기가 한숨 쉬듯 긴 호흡을 뱉는다.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 같다. 윤수는 머뭇대다 결국 물었다. 

“근데 무슨 일 있어?”

긴 한숨처럼 담배를 뱉는 목소리가 다시 넉넉히 들려 왔다. 

-…나 믿죠? 

앞뒤 없이 튀어나온 심각한 말에 윤수는 멈칫 했다. 왔다갔다 움직이던 발 끝이 긴장으로 굳는다. 

-믿어요?

맨날 믿으라고 해놓곤. 윤수가 피식 웃었다. 여느 때처럼 그가 농담하는 줄 알았다. 

“왜 그래?”

-인터넷 기사 봐도 놀라지 말라고요. 그거 거짓말이니까. 

“무슨 기산데?”

-아무튼 그런 찌라시 믿지 말고, 날 믿어. 알았어요?

윤수는 그가 코 앞에 있기라도 한 듯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 더 확인시킨 은기는 윤수가 ‘알았다’ 는 말을 열 번 넘게 해서야 놓아주었다. 

-묘한 데서 상처 잘 받으니까 괜히 더 신경쓰여.

“누구? 내가?”

주어가 사라진 말을 확인하려 윤수가 의문을 표했지만 가뿐히 무시당했다. 은기는 빠르게 다음 말을 주워 그에게 던졌다. 

-민성아는 전에도 말했다시피 그냥 친구예요. 다른 사람들 말 절대 귀담아 듣지마. 

민성아.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이다. 출처를 떠올리려 하자 은기와 함께 했던 외식의 날이 송두리째 건져 올라온다. 

회사 일을 핑계로 고립된 곳에 둘이서만 있었던 그 날. 파닥거리는 생생한 기억 사이에서 은기의 목소리가 파도 소리처럼 밀려왔다. 

[걔 애인도 있는 애고, 서로 이성적인 감정 하나도 없어요. 데뷔 동기기도 하고.]

윤수는 곰곰이 그 기억을 되짚었다. 지금 은기는 필사적으로 찌라시를 믿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 ‘민성아’ 에 대해서 부정한다. 결론은 하나였다. 

“설마, 그 사람이랑 열애설이라도 난 거야?”

건너편에서 한순간 숨이 사라졌다. 두어 번 짧은 숨이 터지더니 은기가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 

-바로 설명하기는 힘든데, 그렇게 됐어요.

윤수는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침묵이 불안해서 은기의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기사도 확정은 아니고 추측성으로 올리긴 했는데, 소속사에서 바로 대응 들어갔고 곧 사실 무근이라고 입장문 올라갈 거예요. 단지….

뒷말이 금방 올라오지 않고 목구멍 밑에 걸렸다. 은기는 목에 가시가 걸린 사람처럼 머뭇댔다. 

-또 혼자 땅 파고 있을까봐. 자신만만하게 나만 믿으라 그랬는데. 

겨우 숨 좀 쉴 수 있게 되었는데 다시 그 맥을 끊게 될까봐. 그래서 소속사와 기사 대응 이야기가 오가자마자 윤수에게 연락했다. 

은기는 촬영 내내 따끔대는 다리가 불안했는데, 막상 촬영은 순조로웠다. 잘 끝났나 싶더니 슈퍼모델 민성아와 함께 회식을 하러 갈 때 둘이서 걸어가던 장면이나 이전에 여럿이서 함께 놀았던 장면 중 둘만 악의적으로 잘라서 편집한 사진들이 떠돌아 다닌다는 것을 알았다. 

기사로 뜨기 직전에 소속사와 말이 오갔다. 기사화 되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지만 대응은 다행히 빠른 편이었다. 

‘근데 그 사람이 걱정이지.’

오늘만 줄담배를 몇 개째 피우는지 모르겠다. 은기는 초조함에 새 것을 꺼내어 물었다. 그도 빌딩 옥상에 올라와 건조한 바람을 맞고 있었다. 번번이 불이 꺼져 다시 손을 오므리고 켜는데 이번에는 윤수가 그의 말을 끊었다. 

“스케줄 다 끝났어?”

-거의. 촬영만 하면 되어서. 

윤수가 하늘을 올려 보았다. 흔한 비둘기 몇 마리가 퍼득대며 날아간다. 평화의 상징이 도시에 와서는 살이 쪄 잘 날지도 못하지만, 어떻게든 적응해서 타고난 숙명을 펄럭인다. 

새는 날아야 하고,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윤수는 은기가 해준 이야기를 몸에 새겼다. 그도 소중한 것을 잃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나아가기 위해 되돌아 왔다. 아픔과 고통을 딛고,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슬픔을 맞섰다. 사랑하던 동생을 차가운 카메라와 맞바꾸게 된 그는 당당하게 렌즈 앞에 섰다. 

하은기는 관계에 있어서 한 번 도망갔지만, 그 이후로는 정면 대결을 택했다. 윤수는 맞섰다가 후유증으로 꺾여버린 사람이다. 

가슴이 이상하게 쿵쾅댔다. 심장이 떨어질 것처럼, 혹은 바스라질 것처럼 떨렸다. 기묘한 흥분이었다. 

윤수는 목을 가다듬고 흥분을 가라앉힌 채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걱정되서 전화한 거지?”

밀려오는 걱정에 이런저런 말을 덧붙이던 은기는 숨 죽인 듯 고요히 답했다. 

-…당연하죠. 

은기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이제 얼굴도 잘 모르는 사람과의 스캔들 따위는 윤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은기가 자신을 믿으라고 하는 점이다. 그리고 그런 그를 믿게 되었다. 

이 믿음이 또 어떤 결과를 가져온다 하더라도,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보고 싶다.”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의 안에서 거대한 파동이 마음 깊은 곳에서 서서히 일어 밖으로 밀려 나온다. 막혀 있던 둑이 터져 넘쳤다. 

“빨리 와.”

윤수는 휴대폰을 꽉 쥐었다. 절대 놓지 말라던 그의 말처럼, 확실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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