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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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벽에 세워놓고 은기는 거치적대는 옷들을 전부 탈의했다. 몸을 감싸던 것들이 툭툭 떨어졌다. 

잘근대던 귀에서 내려와 목에 키스마크를 남기던 그가 윤수를 돌려 세웠다. 

거울대 앞에 있는 로션을 발견하곤 그가 재빨리 가져와 손에 문대었다. 윤수는 매일 얼굴에 바르던 차가운 향이 엉덩이에 닿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은기가 로션을 치덕치덕 바른 손가락을 구멍 안에서 휘저었다. 그는 집중한 얼굴로 허락을 구했다. 

“로션 좀 쓸게요.”

“이미 써놓곤…으응!”

은기의 길고 단단한 손가락으로 휘저어 질 때마다 얇은 내벽에서 로션이 뜨거운 크림처럼 녹아내렸다. 

최근 여러 번 괴롭힘 당한 내벽은 은기를 반기듯 움찔대며 손가락을 잡아먹을 것처럼 강하게 조였다. 봉긋하고 하얀 엉덩이가 들썩대며 은기의 손가락을 야금야금 물었다가 풀기를 반복했다. 

그가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잘 먹네.”

지분대던 손가락이 떠나자 붉어진 구멍이 뻐끔대며 허전함을 토로했다. 

언제 샀는지 콘돔 찢는 소리가 윤수의 뒤에서 작게 들리더니 은기의 것이 한 번에 밀고 들어왔다. 편의점에서 은근슬쩍 산 것이 분명했다. 아까 전부터 참느라 흉흉하게 서 있던 것이 거침없이 구멍의 작은 벽을 뚫었다. 

퍽!

윤수가 하얀 시트지가 발린 벽을 손톱으로 긁었다. 어제 깎은 뭉툭하고 깨끗한 손톱이 벽지를 파고들 것처럼 눌렀다. 그는 엉덩이 사이로 뻐근하게 밀려든 것을 느끼며 신음했다. 

“하…아윽….”

미끌대는 액 사이로 파고든 성기가 뜨겁게 꿈틀댔다. 거의 다 들어간 것이 음모까지 닿아 까슬까슬했다. 

“아파요?”

그의 뒤에서 은기가 목에 입술을 내려 여러 군데 짧게 키스했다. 부드러운 손길과는 달리 눈에는 열이 가득하고, 납작한 윤수의 배를 문지르다 반쯤 일어난 성기를 손으로 주물렀다. 앞에서 서서히 이는 열기에 구멍이 조물거리며 은기의 것을 더 깊이 받아들였다. 

윤수가 벽에 머리를 박으며 헛숨을 내쉬었다.

“조금.”

“미안. 남은 인내심이 없어서.”

뜨거운 숨을 뱉으며 은기가 미간을 찌푸렸다. 참을 수가 없다. 언제부턴가 윤수를 앞에 두면 이성과 절제라는 단어가 훌훌 사라져 버린다. 그대로 살과 뼈째로 꼭꼭 씹어 먹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우악스런 생각을 할 때도 있었다. 

윤수는 깊이 박혀 오는 은기의 성기를 느끼며 신음을 흘렸다. 구멍 속이 젖어들어간다.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벽을 짚은 손에 힘이 빠진다. 그가 적응한다 싶자 강한 로션향과 함께 은기의 것이 빠르게 출입했다. 

“으으…아, 아, 아…!”

윤수의 발치에 걸린 옷이 거칠게 흔들림에 따라 파도처럼 밀려갔다가 돌아왔다. 이를 보곤 은기가 요령 좋게 발로 옷을 밀었다. 한 손으로는 윤수의 것을 훑고 반대편으로는 허리를 단단히 붙들었다. 

철퍽! 철퍽!

윤수가 비명을 참으며 머리를 자꾸만 숙였다. 끈끈하게 녹아 내린 하얀 로션이 정액처럼 주르륵 가랑이 사이를 흐른다. 그 느낌이 너무 적나라해서 소름이 돋았다. 

은기가 엉덩이 사이를 더 벌리고 가장 깊숙한 속까지 닿으려는 듯 강하게 밀어붙인다. 핏줄이 흉흉한 것이 들어갈 때부터 강렬한 기세로 윤수의 전립선을 찔렀다. 

퍽! 

윤수의 머릿 속에서 불꽃이 터졌다. 펑펑 터진 불꽃이 피를 타고 흘러 아래에서 꽃봉오리가 터지듯 액을 쏟아낸다. 몸이 부들부들 떨리더니 그는 한 차례 파정 했다. 

“흐윽…!”

은기의 손에 묽은 정액이 튀고 이마에서 내려오던 땀방울이 방바닥에 떨어졌다. 그가 입술을 세게 짓씹었다. 

허벅지가 경련을 일으키고 발가락이 바닥에 붙었다가 떨어진다. 새하얗던 벽지가 기어코 손톱에 자국을 허락했다. 

은기가 그의 뒤에서 작게 미소짓더니 목에 다시 여러 번 키스했다. 

그가 윤수의 엉덩이에서 성기를 뺐다. 천천히 밀려나오는 것에 연약한 구멍의 속살이 조개 마냥 붉게 드러냈다가도 금방 모습을 감춘다. 

“한 번 갔죠?”

차마 말도 잇지 못한 채 윤수가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데 은기가 이상한 자세를 시도했다. 사정한 여파로 눈에 초점이 없던 윤수가 수상함을 느끼고 바르작댔다. 

“뭐하려고?”

그의 팔을 잡아 앞 쪽으로 돌린 은기가 씨익 웃는다. 바둑판처럼 정갈하게 선으로 갈린 탄탄한 복근과 날씬하면서도 딱딱한 허벅지가 윤수의 시야로 들어왔다. 

“운동 미친 듯이 한 보람을 느껴보려고요.”

은기가 윤수의 엉덩이를 잡는다 싶더니 그를 번쩍 들어 올렸다. 깜짝 놀란 윤수가 반사적으로 양팔로 그의 목을 휘감았다. 

“엿차.”

은기는 별로 힘든 기색도 없이 윤수를 들어올린 채로 한 번 추어올렸다. 그 자세 그대로 성기를 다시 구멍에 넣는다. 결합된 부분이 찌걱대는 야한 소리를 내고 구멍은 미끄러져 내려가며 은기의 것을 물었다. 

은기의 페니스가 거의 끝까지 파묻혔을 때, 쾌감이 대번에 튀어 올라 윤수가 끄응, 신음을 흘린다. 

“그대로 계속 잡고 있어요.”

은기가 떨어질까 겁이 난 듯 제 목을 꽉 잡고 있는 윤수를 사랑스럽게 보았다. 그리고 당연한 듯 요구했다. 

”절대 놓지 말고.“

놓지 말라는 말이 묘한 여운을 남기고 윤수의 귓볼을 휘감았다. 자신을 놓지 말아달라는 부탁처럼, 혹은 작은 명령처럼 들리기도 했다. 

”잠깐…! 히익.”

딸꾹질과 신음의 중간에 있는 희안한 소리를 뱉은 윤수가 얼른 제 입을 닫았다. 처음 내보는 비음이었다. 

‘이게 뭐야.’

허공에 떠서 은기의 커다란 성기에 작살에 꽂힌 고기 마냥 꽂혀 있다. 너무 깊다. 윤수가 너무 놀라 생명줄이라도 되는 양 은기의 목을 붙들었다. 

“그만. 내려줘.”

다리가 빈 허공에서 흔들려 저도 모르게 은기의 허리를 감았다. 그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있는 것도 인식 못할 정도로 얼이 빠져 있었다. 지금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건가. 

은기는 그를 내려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엉덩이를 받친 은기의 양 손이 그를 위로 밀어 올렸다가 가라앉힌다. 잔뜩 발기된 윤수의 것이 은기의 단단한 배를 탁탁 쳤다. 

그가 달래듯 윤수를 다독였다. 관자놀이에서 땀줄기가 주륵 흘러내린다. 

“괜찮아, 안 떨어져. 꽉 잡고 있어요.”

구멍 속 느끼는 부위로 체중과 중력이 함께 실려 꽂히는 충격은 이미 상상의 범주를 넘어섰다. 

‘이게 뭐냐고.’

위아래로 윤수의 구멍을 머금은 은기의 성기가 드러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한 번 타올랐다 꺼진 쾌감이 다시 벌겋게 달아오른다. 

“흐윽, 으으…! 아!”

눈물이 줄줄 흘러 내린다. 윤수는 목적이 없는 말을 되는대로 주워 내뱉었다. 너무 강렬한 쾌감이 몰려와서 도망가고 싶었다. 

동시에 그 쾌감에 완전히 묻히고 싶은 이율배반적인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은기가 물었을 때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만 둘까요?”

은기의 손이 안전하게 받쳐주고 있음을 믿기에 온전히 그가 주는 쾌락을 맞는다. 

감고 있던 윤수의 다리에 힘이 들어간다. 발가락이 쉴새없이 움찔거렸다. 위로 올라갔다가 박히는 순간이 이어지며 그들은 빠르게 절정을 향해 달려간다. 

대답 대신 윤수는 은기를 안은 팔과 다리에 힘을 주어 더욱 꽉 끌어안았다. 

아무 말 없이 행위에 집중하던 은기가 기어코 씹어뱉듯 사납게 말했다. 숨이 거칠어져 있었다. 

“아- 미치겠네, 정말.”

곧 부르르 떨며 윤수가 사정했다. 절정이 끝나는 대로 은기는 그를 안은 채 침대로 이동했다. 

누워서 한 번 더 이어진 섹스는 윤수를 기어이 두 번 더 절정에 이르게 한 뒤 끝이 났다. 그에 비해 은기는 콘돔 한 개로 끝냈다는 것을 알고는 윤수가 절망했다. 

‘죽겠다.’

체력 차이가 이리 나다니. 

윤수는 축 늘어져 손하나 까딱할 수 없어 누워 버렸다. 은기와 있으면 늘 이랬다. 한계까지 몰리고 다 태워버린 다음, 재를 남기며 바스러진다. 하얀 재가 폴폴 날리고 사라진다 싶을 때쯤 은기가 슬그머니 제 몸을 밀고 들어온다. 허우적대며 사라지는 자신을 붙들고 또 몰아친다.

그 폭풍의 중심에 서 있는 자는 아무렇지 않은 생생한 얼굴로 생기 넘치는 말을 뱉는다. 

”좋았어요?“

거의 정신을 놓고 부끄러움도 잊은 채 뜨거운 관계에 빠져 있었다. 나른한 목소리로 윤수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응. 좋았어.“

은기는 결심한 듯 결연하게 중얼거렸다. 

”역시 익숙한 장소에서 하니까 더 감도가 좋은 건가. 자주 와야겠어.“ 

”또 오려고?“

윤수가 질린 얼굴로 되받아쳤다. 몸이 몇 개라도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오면 어때. 구실은 만들면 되고.“

은기가 좁은 침대에서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 한 팔을 관자놀이에 대었다. 땀이 식어 서늘해지고 있다. 

그는 절정의 여운에 젖어 윤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요즘 절제가 안 돼요. 미치겠어.“

집에서 몇 번이나 한걸까. 헤아리는 것을 포기한 윤수가 멍하게 중얼거렸다. 

”원래 그랬던 건 아니고?“

”이제 농담도 하네. 진짜 아니라고요. 이렇게 앞뒤 없는 망아지처럼 날뛴 적 없어.“

그런 것 치고는 만날 때마다 너무 해대지 않는가. 심지어 깨끗한 곳이긴 했지만 공중 화장실에서도 했다. 

스스로도 아는지 은기는 물끄러미 마주대오는 윤수의 눈길에 찔리는 얼굴을 했다. 

”물론 내가 한 전적을 생각하면 신빙성 없겠지만. 휴, 다른 이야기 해야겠다.“

”무슨 이야기?“

은기가 손을 뻗어 윤수의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장난스러 흐트러뜨렸다. 

까만 머리에 가려진 동그란 눈이 드러난다. 기분 좋게 풀려 있었다. 산책 후 나른하게 늘어진 강아지 같다. 

”모델 시작한 계기나 말해볼까.“

그는 후후 웃더니 업계에서 간간이 일어나는 일들을 먼저 언급했다. 

“우리 쪽 진짜 독해요. 동경하던 선배한테 일부러 접근해서 환심 사다가 조금씩 주변 사람들 뺏고, 애인도 뺏고, 그 자리까지 뺏고 결국 짓밟고 올라간 애들 종종 있어요. 뭐, 결국 그런 애들도 얼마 가지 않더라고요. 자기랑 똑같은 애들한테 똑같은 방법으로 당하고, 배신당하고 그러다가 추락하는 거 많이 봤어요.”

가장 환한 조명을 받는 자리일수록 어둡고 더럽다. 은기는 그 어둠에 물들지 않으려면 확고한 목표나 신념, 혹은 동기가 있어야 함을 이야기했다. 

윤수는 그런 곳에서 살아남은 은기가 대견하기도 하고, 걱정도 되었다. 

“네가 버틴 동기는 뭐였어?”

은기의 깍아진 얼굴에 희미한 고통이 스쳐 지나갔다. 윤수는 가슴이 철렁했다. 

“뭐였을 것 같아요?”

“글쎄….”

그는 자세를 바꿔 윤수를 끌어 안았다. 머리에서 기분 좋은 샴푸 향이 났다. 자신에게도 윤수와 같은 향이 나고 있을 것이다. 두근거리던 마음에 안정이 찾아 온다. 

“동생이었어요.”

윤수가 심장소리가 나는 은기의 가슴에 손을 대었다. 강하게 뛰는 생명의 소리가 손바닥으로 전해 진다. 

아프지 마라. 어떤 사연인지는 몰라도. 

불 켜진 방에서 침대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삐걱댄다. 백열등의 환한 빛이 은기의 선명하고 오뚝한 이목구비를 맞고 사방으로 번져나간다. 그는 윤수의 다정한 손길에 퍼지는 웃음을 막지 못했다. 심각한 이야기임에도 윤수가 가슴을 토닥거려주자 이상하게 무게가 덜어진다.

“지병으로 아팠던 녀석이었어요. 그 녀석은 내가 농구할 때마다 뒤에서 기다렸어.”

그의 동생은 심장이 좋지 않아 뛸 수가 없었다. 혈관과 호흡기에도 문제가 있었고, 타고나기를 약하게 타고 났다. 남자애였지만 부모님은 늘 노심초사했다. 의사들은 그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경고했다. 

과보호로 집에만 있게 하던 것을 데리고 나온 것은 은기였다. 같이 놀지 않고 구경만 하게 하겠다고 부모님을 설득해 동생을 세상 밖으로 이끌었다. 

듣고 있던 윤수는 이불을 끌어올려 속옷만 입은 은기를 덮어주었다. 그가 작게 미소짓는다. 

”한 날은 혼자 기다리는 게 심심해 보여서 큰 마음 먹고 카메라를 사줬어요. 덜렁거리던 녀석이라 튼튼한 미제 카메라를 사주었죠.“

동그란 바가지 머리로 열심히 뒤를 쫓던 동생이 생각나 은기가 빙긋 입꼬리를 올렸다. 한 마리 작은 병아리 같았다. 

윤수는 그의 집 진열대 끝에 있던 카메라와 사진 한 장을 떠올렸다. 바가지 머리의 소년이 카메라 옆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애가 지금 말하는 동생인가.’

은기가 그의 머리에 촉, 촉, 입술을 내려 키스하고는 더욱 꽉 끌어안았다. 

”사주니까 열심히 잘 찍더라고요. 어떤 사진사가 동생더러 찍는 재능이 있다고 했어요. 그대로 잘 될 것 같았는데….“

한 편의 반전 영화처럼 은기의 목소리가 급격히 낮아진다. 평화롭고 따사롭던 일상은 너무도 쉽게 끝나버리곤 한다. 연약한 유리처럼, 아주 쉽게 깨진다. 

아무 감정 없이 그는 그 날의 사고를 입에 담았다. 

”나를 기다리다가 차 사고를 당했어요.“

잔잔한 여운 속에서 듣고 있던 윤수가 벌떡 일어났다. 그의 반응을 아랑곳 않고 은기는 계속 말을 이었다. 

”카메라가 차도로 굴러 떨어지던 걸 쫓다가. 하필 내가 너무 좋은 걸 사줘서 그 빌어먹을 것이 부서지지도 않고 차도로 계속 굴러 가버려서, 주우러 가다가 그만….“

은기의 목소리는 허탈했다. 빈 껍데기가 후회에 젖어 허공에 나풀댔다. 

그는 윤수를 다시 끌어안았다. 이번엔 움직이지 않고 윤수는 얌전히 품에 안겨 있었다. 놀란 가슴이 연신 북처럼 둥둥 울렸다. 

”근데 동생 카메라는 기스만 나 있고 멀쩡했어요. 처음엔 어찌나 화가 나던지. 부숴버리려다가 형이 말려서 겨우 참았어.”

윤수는 간신히 대답했다. 옅은 분노가 그에게도 전해진다. 

“그랬구나….”

“나중에 남은 사진 보니까 나랑 진기 형 사진이 잔뜩 찍혀 있더라고요. 내 사진이 더 많긴 했지만…. 하하.”

은기의 동생은 그를 보면 플래시가 터지는 중심에 서 있는 사람 같다고 자주 말했다. 

[형은 플래시 터지는 곳이 어울려.]

그는 이상하게 그게 자꾸 생각났다. 

”장례식 이후로 한참 방황했어요. 내 책임이라고 생각했거든. 발 닿는대로 세계 각지를 돌아다녔어요.”

부모님께는 돌아오면 검정 고시를 치고 대학교를 가겠다고 약속했다. 보수적인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은 은기의 아픔을 이해했다. 그래서 그를 보내주었다. 

“사람들도 만나고, 미친 사람처럼 정말 계속 걷기만 했어요.”

은기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세계를 전전했다. 돈이 떨어지면 멈추고 일하고, 다시 돈이 모이면 또 여행하고. 그런 자유로운 나날들과 목적 없는 여행이 계속 되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을 대하는 법과 요령이 부쩍 늘었다. 그럴수록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관계에 선을 긋는 것도 익숙해졌다. 

그는 이대로 평생 돌아다니다 아무도 모를 장소에서 조용히 객사하면 좋겠다는 극단적인 생각도 했다. 

하지만 결국 돌아오게 되었다. 

거기서 은기의 이야기는 잠시 중단되었다. 긴 호흡이 필요한 이야기였다. 

윤수가 나직하게 물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왜?”

“동생한테 카메라에 찍히는 모습 보여주고 싶어서, 그래서 그냥 모델 일 시작한 거예요.”

독종으로 불리면서도 발버둥친 이유가 여기 있었다. 

“더 악착같이 빨리 성공하려고 한 건 더 나이 들어서 동생이 내 모습 못 알아볼까 봐 그런 거였고.” 

은기는 아무 것도 없는 천장을 올려 보았다. 침대가 협소하지만 좁지 않게 느껴졌다. 

”난 누군가의 기다림이 꼭 보상을 받았으면 좋겠어.“

기다리다 먼저 가버린 동생이 생각나서, 더욱 그랬을지도 몰랐다. 

은기는 윤수를 처음 봤을 때를 떠올렸다. 그는 늘 진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끝난 관계를 놓지 못해서. 미련을 푯대처럼 꽂아 두고 진기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형 기다리는 여자들한테 잘해준 적도 있었는데, 그래서 그랬나보죠.“

윤수가 움찔하다 겨우 입을 열었다. 저 얼굴과 말투로 상냥하게 대해주는 장면이 떠오르자 가슴 한 켠이 쥐어뜯기는 것처럼 괴롭고, 묘하게 짜증이 났다. 

”…그랬어?“

”나중엔 그 짓 금방 그만뒀어요.“

윤수에게서 금방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상함을 느낀 은기가 흘끗 밑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그는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을까.

”설마, 질투해요?“

입을 일자로 꾹 다물고 분한 듯 귓불까지 불그죽죽하다. 그런데도 침착하게 이리 말하고 있었다. 

”질투 같은 거 안 해.“

조금 더 솔직해지면 좋을텐데. 은기는 가벼운 농처럼 말을 툭툭 던졌다. 

”질투해줘요. 집착해 주고. 난 그거 좋아하니까. 다른 사람이면 모르겠지만 그쪽에게 받는 집착은 진짜 기분 좋아. 귀엽고.“

한 번 더 하고 싶을 정도로 윤수의 반응이 좋았다. 아래가 다시 꿈틀댄다. 맨몸에 닿는 부드러운 살의 자극도 더할나위 없이 행복하다. 

은기가 즐거이 말했다. 

”솔직히 말해봐요. 지금도 하잖아?“

”…….“

”질투.“

윤수는 말없이 더욱 입을 꽉 닫았다. 그를 놀리고 싶지만 이내 참았다. 

은기가 윤수의 턱을 가벼이 들어올렸다. 그리고 까맣게 빛나는 눈을 마주했다. 이 몸에 닿는 것이 자신 뿐이면 좋겠다. 

”내 이야기는 이제 다 했어. 나도 듣고 싶어요.“

”정말 재미 없는 이야기야.“

”재밌자고 들으려는 거 아니야.“

”그래도….“

윤수는 끝까지 머뭇댔다. 괜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는 반짝이고 환한 것들이 어울렸다. 비록 동생 이야기처럼 어두운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의 현재는 찬란하니까. 

“내가 선뜻 못 꺼내는 이유는….”

말하다 슬쩍 은기의 눈치를 본다. 은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재촉했다. 

“계속 말해요. 듣고 있어.”

“그 날만 생각하면 아직도 온 몸이 떨려. 이거 보이지?” 

윤수는 정말 떨고 있었다. 맨살 위로 우수수 닭살이 돋아 그의 공포를 대변하고 있다. 마른침을 삼킨 윤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학교 입학한 지 얼마 안됐을 때였을 거야. 그때….”

다시 망설임이 이어졌다. 검은 물 밑에서 그 날의 악몽이 귀신처럼 올라오려 한다. 

그때 은기가 번쩍거리는 제 휴대폰을 불쑥 쳐다보았다. 매니저에게서 온 전화다. 

“잠시만요. 병수 형 타이밍 참-.”

도움이 안되는 자신의 매니저를 탓하며 은기가 휴대폰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윤수는 안심했다. 굳이 불행의 바다에서 자신을 내내 쫓는 악몽이라는 상어를 소환하고 싶지 않았다. 뾰족한 상어 비늘이 수면 위로 솟아 공포감을 심어주듯 그 기억은 항상 그러했다. 생각하고 더듬는 것만으로도 고통을 주었다. 

은기는 윤수를 계속 살피면서 통화 했다. 스케줄에 대한 것을 공유하던 그가 휴대폰을 종료하고는 대략적인 것을 말해 주었다. 

“형 내일 여기로 온다고 했어요.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으니 걱정 마요.”

“잘됐네.”

은기가 한숨 짓더니 휴대폰을 멀리 치워둔다. 

“이야기 안하고 싶은 거죠?”

“…솔직히, 응.”

최대한 피하고 싶다. 피할 수 있으면 아주 멀리. 은기는 그런 그를 이해했다. 

“알았어요. 준비되면 나중에 이야기 해줘. 급할 건 없으니까.”

“고마워.”

“고마울 것 까지야. 참, 근데.”

은기는 품 안에서 어색하게 꿈지럭대던 윤수를 가만히 보았다. 문득 그가 눈살을 찌푸린다. 윤수가 몇 번이나 했던 말들이 느닷없이 머릿속을 스쳤기 때문이다. 

“잘생긴 사람한테 약한 타입인가?”

너무 뜬금없는 말이어서 윤수가 눈만 껌벅였다. 

“갑자기 그건 왜.”

“생각해보니 안되겠어. 방송 타는 거 다시 병수 형이랑 이야기 해봐야지.”

무슨 뜻이냐고 눈빛으로 묻자 은기는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방송가에 잘생긴 사람 수두룩 한데. 괜히 갔다가 반하면 어떡해.”

이상한 걱정을 다 한다. 윤수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풉, 그럴 일 없어.”

하지만 은기는 진심으로 걱정하는 모양새였다. 그의 단정한 이마가 일그러지고 늘 호선을 그리던 예쁜 입술이 긴장으로 굳는다. 

“그걸 어떻게 장담해. 나한테도 잘생겼다는 이야기 여러 번 했잖아. 설마 내 얼굴만 마음에 들었던 거 아니야?”

얼굴 뿐만이 아니라 잘 정돈된 단단한 몸도 좋지만. 차마 뒷이야기를 했다간 난리가 날 것 같아 조용히 묻었다. 

“병수 형 오기만 해봐. 절대 방송 못 타게 할거야.”

모든 사태의 원흉인 병수를 향해 은기가 원한의 칼날을 갈았다. 

“졸려요?”

그러다 피곤했던지 꾸벅거리며 조는 윤수를 발견하고는 그가 피식 웃었다. 은기는 이불을 끌어올려 덮어주며 그 위로 손을 토닥토닥 했다. 

“잘 자요.”

윤수가 졸린 눈으로 겨우 대답했다. 눈꺼풀이 너무 무겁다. 

“너도.”

별 것 아닌 말인데 이게 뭐라고 가슴 언저리가 간질거린다. 잘 자라는 말이 이토록 애틋하고 야릇한 것인지 윤수는 전혀 몰랐다. 

모르던 것을 알아간다. 하은기라는 한 사람을 통해서. 

‘고마워.’

중얼거린 그가 몸을 애벌레처럼 말고 따뜻하게 잠이 들었다. 은기의 단단한 팔이 어느 새 그를 얽어매고 있었다. 

달콤한 구속이었다. 

***

다음 날, 윤수는 자고 있는 은기를 두고 먼저 출근했다. 너무 곤히 자고 있어서 깨울 수가 없었다. 

근육이 알맞게 붙은 날씬하고 긴 팔이 이불을 끼고 있고 큰 키 때문에 다리가 침대 밖으로 삐져나올 것 같았다. 

밤새 몇 번이나 더운지 걷어차서 배로 끌어올려 주느라 윤수는 잠도 제대로 못 잤다. 

‘잠버릇은 별로네.’

그게 또 제 나이처럼 보여서 귀여웠다. 여전히 눈썹은 길고, 콧대는 높은 능선처럼 길고 곧게 솟아 있다. 갈색 머리칼이 잔뜩 흐트러져 부드럽게 이마를 덮고 색색 숨을 뱉는 혈색 좋은 입술이 반쯤 벌어져 하얀 치아를 드러내고 있었다. 턱선은 그림처럼 시원하게 떨어져 뒤척임에도 변함이 없다. 전체적으로 조화가 잘 이루어진 얼굴이다. 불쑥 은기가 불만스레 했던 말이 떠올라 윤수가 움찔했다.

[잘생긴 사람한테 약한 타입인가?]

그다지 의식 안했는데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진기도 클래식하게 잘생긴 편이었고, 여태 사귄 사람들도 다들 평균 이상이었다. 

급작스레 자신의 취향을 깨닫게 된 윤수가 은기에게 멍한 눈길을 던졌다. 

‘나 얼빠였나.’

자는 은기의 얼굴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던 윤수가 시간을 보고는 서둘러 챙겨 나갔다. 발이 떨어지질 않아 애먹었다. 급한대로 포스트잍에 챙겨 먹고 갈 것을 적어두고 냉장고에 붙이기도 했다. 

‘일어나서 잘 가겠지?’

걱정을 겨우 놓고 사무소로 향하는 내내 휴대폰을 계속 붙들고 있었다. 혹시나 은기가 연락을 할까봐. 하지만 자고 있는지 연락이 없다. 

‘많이 피곤했나.’

연락이 없으니 왠지 심심하다. 은기가 보내던 메시지가 출근길의 활력이 되었는데. 

다소 심심하게 도착한 사무소에서 윤수는 예능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던졌다. 애초 그의 예상대로 피디의 말을 전하자 사무소는 파티가 벌어졌다. 평소에 별로 표정 변화가 없는 소장도 헤벌쭉 웃었다. 직원들도 야단법석이다. 

“예능 출연이라니! 그것도 피디한테 직접 제안 받은 거라고?”

“네.”

“나갈 수 있겠어? 너 울렁증 있잖아. 사람 많은 곳 별로 안 좋아하고.”

눈치를 보던 하 수석이 들이민다. 

“아님 내가 대신 나갈까?”

이럴 것 같았다. 윤수는 딱딱하게 얼굴을 굳히고 대번에 거절했다.

“아니, 내가 나갈거야.”

“오올. 웬 일이냐? 너 완전 질색팔색하면서 싫어할 것 같았는데. 역시 방송물 먹는다니까 좀 다른가?”

도저히 고사할 분위기가 아니다. 윤수는 일찌감치 포기하고 TV에 나올 수 있다는 공포를 극복하기로 마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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