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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기는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허리를 숙이고 양 팔을 안고 있는 윤수를 보았다. 은기가 느끼기에도 며칠 사이 밤공기가 많이 싸늘해졌다. 자신도 그러한데 윤수는 더할 것이다. 

그가 미간을 모았다. 

‘추우면 어디 들어가 있으라니까.’ 

정말 말도 안 듣는다. 

탁!

차문 닫는 소리가 들렸다. 윤수가 움찔했다. 직감적으로 은기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한 자세로 오래 있었더니 굳어 버린건지 몸이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저벅저벅 

윤수는 멍한 시야로 다가오는 하얀 운동화를 발견했다. 코가 둥글고 사이즈가 컸다. 얼마나 급하게 왔는지 운동화 뒤를 구겨 신었다. 

‘키만큼 발도 크네.’ 

겨우 부스스 고개를 드니 정류장 뒤에 서 있는 가로등 불빛 아래 은기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서 있다. 작고 갸름한 맨얼굴이 위에서 쏟아 내린 가로등 빛으로 얼룩져 착잡해 보였다. 느낌 탓인지 뺨도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정말 바로 왔구나.’

낮에 입었던 청바지와 셔츠가 그대로였다. 

그가 윤수의 옆에 풀썩 앉고는 다짜고짜 끌어 안았다. 금방 달아나려는 윤수를 당기면서 이마를 그의 어깨에 댄 채 은기는 낮게 읊조렸다. 

”사람들 신경쓰지 마요. 어차피 별 생각 안할거야.“

윤수가 난감하게 주변을 둘러보다 떨어질 것 같은 은기의 머리를 반사적으로 잡아 제 어깨로 밀어올려 주었다. 어디선가 술냄새가 난다. 그는 염려스럽게 말했다. 

”별 생각 할 것 같은데….“

벌써부터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시선을 던지고 있는데 말이다. 그의 속도 모르고 은기는 칭얼대는 듯 윤수를 끌어당겼다. 

”아까 진짜 놀랐어. 헤어진다는 말 너무 쉽게 해서.“

뜨끔한 윤수는 강아지처럼 어깨에 얼굴을 비비고 있는 은기의 부드러운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입이 두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미안.“

”그 말, 이번엔 용서해 줄게요. 진짜 미안해야 돼. 어떻게 그런 말을 그렇게 쉽게 해? 충격이야.“

평소 은기답지 않은 애교에 설마 했는데 역시 술냄새가 강하게 난다. 윤수가 의심스럽게 그의 머리통에 대고 코를 가져다 대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숨길 수 없는 강렬한 알코올 향이 코 끝을 찌른다. 

”술 마셨어?“

”쪼-끔.“

혀도 꼬이는 걸 보니 많이 마신 모양이었다. 얼마나 마셨기에 말로는 절대 이길 수조차 없는 하은기가 유치원생 느낌의 꽐라가 되어 있다니. 

‘처음 술자리땐 그리 마셔도 취하지도 않던데.’ 

당황한 윤수가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어찌 해야 할까 고민하는 사이 은기는 아무런 방해물 없이 윤수에게 온 몸을 부대끼고 있었다. 

그는 윤수의 은은한 체향이 이리 그리워질 줄은 몰랐다. 앞으로 못 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막막해져서 순간 두뇌를 총동원했다. 

어떻게 하면 잃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다시 또 볼 수 있을까. 

다행히 지금 이렇게 그를 안고 있을 수 있다. 밀려 오는 안도를 속에 차곡차곡 채우며 은기는 그의 어깨에 이마를 비볐다. 

”힘들어서 그러니까 이대로 좀 있어줘요.“

”힘들었다고?“

”택시 안에서 내가 했던 말 하나하나 곱씹으면서 지옥같은 시간 보냈다고요. 엄청 반성하면서 왔다니까.“

윤수는 뭐라 중얼대는 은기의 등을 손으로 쓰는 것으로 죄책감을 대신했다. 사실 반성해야 할 것은 자신이다. 매번 관계에서 도망가기만 하고, 맞서지 않는다. 

”근데 많이 기다렸어요? 시간 얼마나 지났지?“

막히지 않아 빨리 왔는데도 1시간 가까이 흘러 있었다. 시간은 벌써 10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부스럭대던 윤수가 휴대폰 화면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너무 늦었는데 빨리 가야하는 거 아냐? 내일 스케줄 언제야?“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였다. 은기가 윤수에게 몸을 기댄 채 손목 시계를 습관처럼 만지작대며 대꾸했다. 

”병수 형인 줄 알았네. 스케줄 오전 아니라 괜찮아요.“

”혹여 지장 생기면 내가 마음이 안 편해서.“

은기는 윤수를 다시 잡아당겨 자신의 품에 가둬버렸다. 그리곤 술냄새를 잔뜩 풍기며 윤수의 뒤통수에 제 머리를 올려두었다. 

“온 김에 자고 가죠 뭐. 내일 병수 형한테 여기로 오라고 하고.”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윤수가 깜짝 놀라 그를 올려 보았다. 

“잔다고? 우리집에서?”

자고 간다는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며 은기가 뻔뻔하게 응수했다. 

“나 안 재워줄 거에요? 술 그렇게 마시고도 여기까지 택시 타고 달려왔는데?”

“그건 아니지만….”

“그럼 무슨 문제 있어요?”

문제는 은근슬쩍 셔츠 속으로 들어오려고 하는 은기의 손에 있었다. 이를 밀어내면서 윤수가 고갯짓했다. 

“아니.”

은기는 윤수의 머리에 쪽소리를 내며 키스를 하고는 웃었다. 

“그럼 됐네. 집 구경 좀 시켜줘요.”

오늘 아침에 집을 제대로 치우고 나왔던가. 윤수는 정신이 까마득해졌다. 이불 정리도 못하고 나온 것 같고 꽉 찬 쓰레기 봉투도 버리고 나오지 못했다. 당혹스러움에 그는 변명조로 말했다. 

“별로 볼 거 없는데.”

상관 않고 다시 나쁜 손이 셔츠 안으로 진입하려 한다. 

“사실 집보단 이쪽에 더 볼 게 많을 것 같지만.”

어디선가 중계 방송 소리가 환청처럼 들리는 듯 했다. 은기의 손이 점점 은밀해지고 가슴 쪽으로 슬금슬금 이동해 간다. 윤수의 호흡이 뜨거워진다. 

아~ 하은기 선수! 장외 홈런 가나요~! 

하지만 윤수는 익숙하게 그의 손을 멀리 밀어냈다. 

안타깝습니다! 불발로 그쳤군요! 

완벽한 방어에 점점 은기의 옅은 갈색 눈이 일그러지고 입술이 뿌루퉁해진다. 

“요즘 너무 혈기왕성해서 미칠 것 같다구요. 책임져요. 일할 때도 생각나서 일도 잘 안돼.”

윤수는 그가 말할 때마다 머리통에서 작은 진동이 전해져 와 움찔거렸다. 간지러웠다. 

불현듯 그는 은기가 첫 섹스에 그다지 만족하지 못했다는 것을 떠올리곤 가라앉은 목소리로 받아쳤다. 

“처음엔 별로 안 좋았다며.”

“누가 안 좋았다고 했어요? 그럭저럭이라고 했지.”

“그거나 그거나.”

은기의 주정에 대꾸해주던 윤수가 결심했다. 더 이상 여기 있었다간 정말 사진이나 동영상이라도 찍혀서 TV나 인터넷에 날지도 모른다. 

윤수는 그의 품에서 있는 힘껏 빠져나와 은기를 잡아끌었다. 하지만 도통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 자신에게 기대도록 하고 일으켜 세웠다. 갈수록 술기운이 도지는 듯했다. 

올라가는 골목에 드문드문 가로등이 서서 길목을 밝혔다. 가로등의 그림자가 길게 가뭇가뭇 그들의 발치에 놓였다. 

은기가 윤수에게 기대어 비척비척 걸으며 그 와중에도 거침없는 입담을 보여주고 있었다. 

“쏘쏘와 배드는 전혀 다른데? 할수록 좋아지는걸 어떡해. 감도도 좋아지고 반응도….”

윤수가 목소리가 커지는 은기의 입을 한 손으로 틀어막았다. 누가 들을까 무섭다. 

“제발….” 

“알았어요, 알았어. 부끄럽구나. 조심할게요. 우리 피윤수 씨는 섬세하니까?”

“부디 술주정은 집에 가서 하자.”

“뭐야, 내가 부끄러워요?”

왠지 하 수석과 오버랩되었다. 포차에서 쩌렁쩌렁 온갖 소음 공해에 술주정을 생중계하는 그와는 확연히, 아주 많이 다르긴 하지만 어쩐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그 시끌벅적한 현장이 떠올라서인지 윤수는 꽤 단호하게 말했다. 

“응. 부끄러워.”

“와, 너무해….”

은기가 워낙 길고 체격도 좋아서 부축해주는 것도 힘들었다. 등줄기에 땀을 흘리며 은기를 집 쪽으로 데려가던 윤수가 피식거리는 웃음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아무튼 이제 내가 좀 편해 졌나보네.“

”응?“

”만날 때마다 불편해 했잖아. 얼굴 피하고.“

”그건 네가 너무 잘생겨서….“

은기가 멀뚱멀뚱하게 부축해주고 있는 그를 쳐다보았다. 

촉촉하게 젖은 긴 속눈썹 아래 열기가 일렁이는 옅은 눈이 그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다. 취한 게 거짓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또렷하고 강렬한 눈빛이었다. 

윤수의 목울대가 한 번 길게 일렁였다. 마른침이 절로 넘어간다. 날렵한 턱선에 담긴 입술은 적당히 도톰해서 키스하면 기분 좋을 것 같다. 

‘취한 사람 두고 무슨 생각 하는 거야.’

뺨이 화끈거려서 윤수가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려버린다. 

”부, 부담스러워서 그랬던 거야.“

갑자기 은기가 시무룩해진다. 

”혹시 잘생긴 사람 싫어해요?“

잘생긴 거 싫어할 사람이 어딨겠는가. 잘생긴 이를 싫어한다고 했던 모 연예인은 반도에서 제일 잘생긴 모 배우와 결혼을 했다. 

그가 고개를 젓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부담스러운 거지 싫은 건 아니야.“

은기는 만족스럽게 활짝 웃었다. 치아가 대부분 보일 정도로 환한 웃음이었다. 주홍빛 가로등이 촬영장의 반사판처럼 은기의 웃음을 자동 보정하는 것 같았다. 

쿵, 쿵, 쿵 

보는 이마저 설레게 하는 미소에 윤수는 가슴이 요동쳤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린다. 은기의 귀에도 들릴까 두려웠다. 

”아, 진짜 다행이다.“

은기가 고개를 푹 숙이고는 이어 중얼거렸다. 

”나 싫어하지 마요. 그러면 안 돼. 내 마음 찢어져.“

너무나 솔직한 고백에 윤수의 마음도 정처 없이 흔들렸다. 어떻게 은기를 싫어할 수 있을까. 싫어하는 것이 가능할 리가 없다. 

그런데도 은기는 미간을 찌푸리고 불안해하고 있었다. 

”근데 난 당신에 대해서 아는 게 너무 없어. 화가 나.“

”…….“

”오늘은 이야기 전부 다 들으려고 왔어요. 빼지 말고 다 이야기해줘.“ 

은기가 낮게 속삭였다. 흔들대는 발걸음으로도 그의 속삭임은 빠짐없이 새어 나와 윤수의 귀를 빗줄기처럼 두들겼다. 

“알고 싶어, 당신에 대해서.“

그라면 들어도 이해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말해도 괜찮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은기만은 몰랐으면 하는 이중적인 생각이 깃든다. 

윤수는 어두운 얼굴로 애써 은기의 호기심을 밀어냈다.

”알아봤자 기분 나쁠 내용들 뿐이야. 들을 필요 없어.“

”그런 거면 더 들어야죠.“

”왜?“

은기가 당연하다는 듯 툭 내뱉었다. 너무 당연한 것이라 설명하는 것도 귀찮다는 무심한 태도였다. 

”기분 나쁠 내용, 앞으로 내가 다 잊게 해줘야 하니까.“

부축하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멈춘 걸음이 마음에 안 드는 듯 은기는 윤수의 걸음을 재촉했다. 

멈추지 말고 앞으로, 또 앞으로 나아가자. 

은기의 단단한 의지가 그의 마음속까지 깊이 스며든다. 정신 못 차리게 뒤흔드는 걸 뛰어넘어 이제 허락하지 않은 영역까지 침범한다. 하지만 그게 또 싫지 않다. 

사실 은기에게 마냥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윤수는 그가 내미는 마음의 행적을 자발적으로 쫓고 있었다. 그러다 보면 서서히 잠겨 있던 어둠 속에서 한 발 한 발 빠져나가고 있다. 

마음속 어딘가에서 뜨거운 물이 차오른다. 윤수가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기분 탓인지 안경에 김이 서린 것 같다. 

”넌 진짜 이상한 사람이야.“

은기가 코웃음 쳤다. 

”이상해도 어쩔 수 없어. 적응해요. 계속 만나야 할 사람이니까.“

윤수는 목이 꽉 잠겨왔다. 근거 없는 은기의 자신감이 언제부턴가 윤수에게도 옮아 오고 있었다. 그가 말하니 정말 그래야 할 것 같다. 

은기가 말하는 것은 윤수에게 와 진실이 되고, 설령 거짓을 말한다 해도 어떤 중요한 좌표가 되었다. 

문득 위화감을 느낀 윤수가 헛기침을 하고 잠긴 목소리로 의문을 표했다. 

”…근데 술 이미 다 깬 건 아니지?“

묘하게 정직하던 은기의 발걸음이 다시 흐트러졌다. 

***

집에 가서 번갈아 가며 뜨거운 물에 씻고 나오자마자 둘은 자연스럽게 몸을 섞었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모를 정도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뽀얗게 푹신 거리는 하얀 수건을 머리에 두른 은기가 장난스럽게 수건을 벗어 윤수의 머리 뒤에 걸고 자신 쪽으로 잡아당긴 뒤부터였다.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긴장이 끊어지며 분위기가 바뀌었다. 

가까워진 윤수를 물끄러미 보던 은기가 당겨온 그를 잡고 입술을 잡아먹듯 키스했다. 단단한 팔이 윤수의 목을 감고 반대편 손이 뒷머리를 강하게 눌렀다. 취기는 날아간 지 오래지만 은기는 취한 사람처럼 윤수의 입술을 정신없이 탐했다. 그의 고개가 비스듬하게 기울고 이리저리 꺾였다. 

”으음….“

윤수가 은기의 하얀 러닝셔츠를 잡고 까치발을 해 키를 높여 맞지 않는 균형을 맞추었다. 근처 편의점에서 급히 공수한 속옷과 러닝셔츠가 윤수의 손에서 구겨진다. 

툭!

수건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은 이미 논외였다. 

은기의 도톰한 입술에서 밀려 나온 뜨거운 혀가 윤수의 것을 얽고 자극했다. 입천장을 쓸고, 입술을 더욱 크게 움직여 윤수의 입술을 모조리 삼켰다. 

정신 차리고 보니 윤수는 어느새 등이 딱딱한 벽에 닿아 있었다. 그가 거친 호흡을 뱉으며 침으로 반들거리는 붉은 입술을 가만히 올려 보았다. 

은기의 러닝셔츠 밖으로 단단하고 굵은 가지처럼 뻗은 넓은 어깨와 윤곽이 뚜렷한 복부가 꿈틀댔다. 긴장된 얼굴로 윤수가 답이 나와 있는 의미 없는 물음을 던졌다. 

”여기서 서서 하게?“

이미 그의 손은 윤수의 속옷을 내리고 엉덩이 사이로 기어 들어가고 있었다. 윤수의 말투를 흉내내며 은기가 달아 오른 그의 귓불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럼 어디서 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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