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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달한 기다림 --> 

막힘 없이 대답하던 진기는 이번엔 아주 길게 침묵했다. 잠긴 목소리로 그가 기간을 물었다. 

-…언제부터?

은기는 대번에 그 물음을 잘라냈다. 왠지 모를 유치한 호승심이 솟았다. 경계심도 묻어 났다. 

”알아서 뭐하게. 이제 상관도 없으면서.“

믿기지 않는 듯 헛웃음이 여러 번 들리더니 반대편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건너 온다. 

-피윤수, 능력 좋네. 

이를 비아냥 대는 것으로 생각해 은기가 날을 세웠다. 

”내가 먼저 손 내민거야. 함부로 말하지마.“

-진심으로 감탄해서 한 소리였다. 네가 먼저면, 이해는 가.

은기는 양주를 빈 잔에 따랐다. 투명한 잔 속에 황금빛 액체가 꼴꼴대며 차오른다. 윤수도 이 양주잔처럼 비었던 속을 채우며 차오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상처 입힌 거면 그 상처, 형이 꿰매. 난 못해줘.“

말하면서도 은기는 다시 한 번 사실을 확인했다. 자신은 그를 온전히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우리 사인 이미 예전에 다 끝났어. 남은 건 그 녀석 몫이야. 

”그런 말을 잘도…!“

듣고 있던 은기가 이를 악물고 화를 내려 했지만 진기가 냉정하게 끊었다. 

-그리고 네가 착각하는 게 있는데.

휴대폰을 고쳐 잡는지 목소리가 잠시 멀어졌다가 가까워진다. 

-계약 연애는 윤수가 시작하자고 한 거야. 

양주를 따르던 은기의 손이 멈칫한다. 

”…뭐?“

-물론 그걸 이용한 건 나지만. 당시엔 둘 다 힘들 때였고, 

은기는 들고 있던 양주병도 내려놓고 멍하게 되물었다. 

”그딴 걸 먼저 시작한 게…형이 아니라고?“

-윤수한테 직접 물어봐. 

진기의 주변으로 분주한 소리가 들렸다. 그는 의외의 말을 은기에게 던졌다. 

-그 녀석이 만나고 있는 게 너라서 다행이다. 

지금 놀리는 건가. 은기의 눈썹이 불쾌하게 꿈틀거렸다. 

”무슨 소리야.“

-넌 내가 못한 걸 할 수 있을 놈이니까. 

수수께끼 같은 말이었다. 은기가 이를 이해하기도 전에 진기는 최후의 조언을 했다. 

-이왕 시작한 거, 잘해봐라. 

”무슨 소리냐니까? 잠깐…!“

하지만 이미 전화는 끊겨 있었다. 은기는 통화가 끊어진 휴대폰을 쥐고 한참을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 오래 생각하던 그가 먹던 술도 내버려두고 벌떡 일어났다. 

당장 윤수에게 가봐야 할 것 같다. 그는 술을 먹은 자신을 탓하며 급한대로 택시를 불러 타려 했다. 

목적지를 잡으라는 휴대폰 화면을 내려보곤 은기는 윤수의 집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집이 뭔가. 피윤수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있었나? 

‘아는 게 뭐야, 대체.’

그는 서둘러 윤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

이별의 향은 항상 기가 막히게 잘 맡았다. 윤수는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차에서 내려줄 때까지 은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에서 이별 특유의 짠맛이 났다. 

운전대를 잡은 은기의 옆얼굴이 밤을 맞이한 도시의 빛을 머금은 채 생각에 잠기고, 다정한 말을 뱉던 예쁜 입술도 냉정하게 꽉 다물려 있었다. 

버스 정류장에 내려줄 때 한 번 돌아보지도 않고 차를 돌려 버렸다. 잘 가라는 인사는 한 것인 지 아닌지 기억을 더듬어도 흐릿했다. 

오늘따라 며칠 동안 정류장에서 잘 보이던 은기의 포스터가 한 장도 보이지 않았다. 멍하게 버스 운전수의 등을 보다가 생각나서 유리창을 바라보며 이미 스쳐 지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치익-!

버스문이 닫히는 것을 윤수가 마지막으로 돌아보았다. 집 근처 버스정류장에 도착한 것이다. 텅 빈 정류장용 긴 의자만 덩그러니 보였다. 

윤수는 집에 돌아갈 생각이 들지 않아 빈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끝인가.’

시작해 보지도 않고 다시 끝이다. 반복되던 것이라 익숙했지만 이번에는 정말 다를 것이라 여겼는데. 

‘그 지옥 같은 저주에서 벗어난 줄 알았는데.’

그가 양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었다. 아니, 쥐려 했다. 안경알이 손에 걸리지 않았다면 말이다. 

‘아, 오늘 안경 생겼지.’

오전만 해도 없었던 것이다. 은기가 사준 안경을 눈에서 뺀 윤수가 옆자리에 안경을 올려놓곤 물끄러미 보았다. 디자인을 잘 모르는 그가 봐도 모양도 예쁘고 세련되어 보였다. 

하지만 안경을 빼고 봐서인지 약간 윤곽이 흐릿해 보인다. 

안경점 주인에게 모르는 용어로 이것저것 신나게 주문을 넣던 은기의 얼굴이 불쑥 떠올랐다. 어린 애처럼 커플 안경 같다고 좋아하던 것도 생각났다. 

”하아….“

윤수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스스로가 너무 한심해서 돌아버릴 것 같았다. 아예 점이 되어 없어지고 싶다. 

‘내가 바보같이 굴어서….’

얼마 만나지도 않았는데 은기와의 일들이 벌써 기나긴 꿈처럼 느껴졌다. 그가 했던 말들, 속삭여주던 따뜻함, 뼈속까지 시리던 한기를 몰아내주던 목소리, 여러 번에 걸친 뜨거운 관계.

외딴 섬에 불쑥 기어 들어온 한줄기 따스한 빛. 

[난 축의금 낼 일 같은 건 절대 안 생기게 할거니까. 앞으론 그딴 소리 하지도 마요.]

[솔직히 살면서 괜찮다고 한 수많은 말 중에 ‘정말 괜찮은’ 게 여태 몇 개나 있었어요?]

네가 없어도 괜찮을까. 윤수는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그가 손을 내려보다 꽉 쥐었다. 손 안에 든 것은 늘 덧없는 모래처럼 금방 빠져나가 버린다. 소중함을 깨달으면 벌이라도 주듯. 

'안 괜찮아.'

그는 궁금했다. 은기는 어떻게 자신을 그리 잘 꿰뚫어 보았을까. 작게나마 이해받았다는 안도는 지친 마음에 위안을 주었다. 최근엔 목소리만 들어도, 얼굴만 봐도 좋았다. 

한 번 얻었던 온기는 너무 따뜻해서 게워낸 순간 그 빈자리를 더욱 크게 드러냈다. 

윤수는 습관처럼 등에 공간이 남아 있는 녹색 점퍼를 손으로 끌어당겼다. 끝없는 동굴 속에 갇힌 기분이었다. 공허하다. 

‘이제 못 보나.’

다시 못 보고 못 들을거라 생각하니 목울대가 꽉 잠겼다. 참을 수 없는 뜨거운 것이 눈에 몰리고 눈가가 서서히 달궈진다. 

윤수가 쏟아 내리려는 것을 막으려고 얼굴을 황급히 하늘로 들어 올렸다. 그런데도 막을 수 없었다. 기어이 뜨거운 물줄기가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왜 눈물이 나지. 

그는 멍한 머리로 생각했다. 내가 울 자격이나 있을까. 

그때였다. 영원히 잠들어 있을 것 같던 그의 휴대폰이 길게 진동했다. 윤수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의자 위에서 부르르 떠는 휴대폰을 본다. 은기의 이름이 화면에 가득 떠 있었다. 

그가 왜 전화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그것이 끊기기 전에 쥐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약간의 망설임이 있었지만 이걸 못 받으면 영원히 끝일 것이라는 두려움이 더 컸다. 

통화를 눌러 놓고 윤수는 침묵했다. 은기가 무슨 말을 할지 예측할 수 없는 만큼 무서웠다. 

-……

은기는 바로 운을 떼지 않았다. 그 침묵의 간격이 너무 무거웠다. 한참을 기다리자 침묵 속에 잠겨 있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생각해 봤는데.

은기가 피식 웃었다. 

-나 그 쪽 집도 몰라. 진짜 웃기지 않아? 

윤수는 생각이 사라진 머리로 생각하려 애썼다. 뭐가 웃기다는 걸까. 집을 모른다는 것이 왜 웃긴 일이 되는 걸까. 

-지금 어디에요?

”집 근처 버스 정류장.“

윤수에게서 정확한 정류장 명을 확인한 은기가 지명을 목적지로 넣고 택시를 불렀다. 

-바로 갈테니까 추우면 어디 들어가 있어요. 

”아니. 여기 있을게.“

평소 같은 평범한 대화에 이상해진 윤수가 그제야 되물었다. 

”근데 우리 끝인 거 아니었어?“

-뭐? 

당황스러운 은기의 목소리가 크게 윤수의 귀를 울렸다. 곧이어 윤수는 귀가 따가워 휴대폰을 멀찍이 떨어뜨렸다. 

-누구 맘대로 끝내요?! 난 그런 말 한 적도 없는데?

혹여 윤수가 전화를 끊기라도 할까봐 은기의 흥분한 목소리가 빠르게 쏟아졌다. 그 모습이 상상되어서 윤수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동시에 끝없는 안심과 안도가 찾아들었다. 윤수는 그제야 마음 놓을 수 있었다. 아직 그를 더 만날 기회가 남아 있다. 

‘끝이 아니구나.’

단단하게 굳어 있던 마음 속의 커다란 불안이 은기의 목소리에 녹아 사라진다. 

그는 휴대폰을 다시 귀에 가까이 대고 조용히 말했다. 경직되었던 온 몸의 근육들이 풀려 제 기능을 찾아간다. 얼어붙었던 그의 혀와 입도 제자리를 잡아 원활하게 굴러갔다. 

”아까 분위기 안 좋았잖아. 그래서 끝났다고 생각했어.“

할 말을 잃은 듯 은기 쪽에서 말이 없어졌다. 이윽고 정신 차린 그가 서운한 목소리를 냈다. 

-형은 사귈 때 한 번 싸웠다고 바로 헤어져요? 와, 무서운 사람이었네.

윤수가 뭐라고 말을 덧대기도 전에 그가 온갖 변명을 주워 담아 윤수에게 던졌다. 

-알았어요. 앞으론 조심할게. 아깐 정말 미안했어요. 요즘 쌓인 게 많아서 엉뚱하게 폭발했나 보죠. 

은기는 급히 집을 나서는 듯 부스럭대는 소리를 연신 들려주었다. 신발 신는 소리와 고양이가 우는 소리도 들렸다. 

-내가 다 잘못했어요. 그딴 말 하면 안되는 건데…. 하은기, 이 멍청한 새끼. 내가 대신 욕해줄게요. 병신같은 새끼, 머저리 새….

이러다가 더한 욕이 나올 것 같아 윤수는 얼른 그의 말허리를 끊었다. 그가 저도 모르게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미안.“

휴대폰을 꼭 쥐고 그가 버스 정류장 위로 휘영청 솟아 있는 보름달을 올려 보았다. 캄캄한 밤 속에 동그랗고 환한 것이 잠겨 있다. 

”널 잘 모르면서 함부로 말해서.“

그가 어떤 것을 겪고 시간을 건너왔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정작 하나도 모르면서 아는 척 으스댔다. 자신의 과거를 내밀며 내가 더 힘들게 살았다는 양 기묘한 우월감에 지껄였다. 그깟 지지부진한 과거 따위 뭐가 잘났다고. 

은기도 그제야 안심했는지 평소같은 웃음소리를 들려 주었다. 

-그럼 우리, 화해한 거죠? 

화해. 윤수에겐 생소한 단어였다. 

그가 맺었던 과거의 관계는 늘 화해가 이루어지기 전에 끝장 났다. 다툼 뒤에 다시 이어지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다투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그러다 보니 오히려 더 빨리 관계가 끝나는 역설이 반복되었다. 

이상했다. 다투지 않는데 왜 그럴수록 관계의 수명은 짧아지는 것일지. 

”응.“

윤수의 대답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던 은기가 그제야 활짝 웃었다. 신발을 마저 구겨 신으며 그는 집을 나섰다. 

-갈테니까 추우면 어디 꼭 들어가 있어요. 

윤수가 작게 미소짓더니 큰 점퍼를 끌어당겼다. 

”네가 준 옷 있어. 안 추워.“

은기는 헛숨을 들이키곤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듯 말했다. 

-밀당 은근히 잘한다니까. 갈수록 무섭다. 누가 그 매력 알까봐. 

눈가에 달릴 듯 말 듯 맺혀 있던 한심한 눈물을 옷 소매로 슥슥 닦아내면서 윤수가 웃었다. 말도 안되는 걱정이다. 이런 한심한 사람을 누가 좋아하려고. 

”아무도 몰라. 걱정하지마.“

그런데 건너편에서 착 가라앉은 은기의 낮은 목소리가 휴대폰을 타고 도착했다. 

-적어도 하진기는 아는 것 같아서.

”…….“

-아무튼 곧 가요. 춥지 않게 있어요. 

은기는 전화를 끊고 목소리가 잔뜩 잠겨 있던 윤수가 걱정 되어 서둘렀다. 

‘추워서 벌써 목소리까지 나간 것 아냐? 감기 든건가?’ 

그가 서두르는 동안 윤수는 후드를 뒤집어 쓰고 정류장 건너편을 보다가 안경을 다시 집어 들었다. 다시 끼니 새삼 환하다. 달빛도 더 밝게 느껴졌다. 

유리알 너머 세상은 차갑지 않았다. 아까 전 헤어진다고 생각했을 때 느꼈던 고통도 벌써 어디론가 멀리 사라져 버렸다. 짧은 시간 동안 이토록 기분이 널뛰는 것이 우스웠다. 

‘그러고 보니 은기랑 만나는 시간이 거의 밤 시간대네.’

어둠은 그에게 잊을 수 없는 악몽이었지만, 은기로 인해 어둠보다는 달빛이 더 크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낯선 사람들에게 억지로 무언가를 강요당하던 때, 그 곳은 항상 어둡고 추웠다. 용기는 아마 그때 다 써버려서 지금 쓸 것이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며 윤수는 은기를 기다렸다. 처음으로 기다림이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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