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턱수염이 아무렇게나 수북하게 나고 안경을 낀 깡마른 남자였다. 키는 비죽하게 커서 윤수의 시선이 여전히 위로 올라가야 했다.
정 피디의 눈이 빠르게 은기의 뒤에 있던 윤수를 훑었다. 날카롭고 사람을 재단하는 시선이었다. 그는 이런 류의 시선을 잘 알았다. 알리지 싶지 않은 속까지 샅샅이 살피는 거북한 시선이었다.
어떻게 인사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는 윤수에게 피디가 먼저 말을 걸었다.
”지인 분이신가?“
은기가 적절하게 끼어들어 중재했다.
”저랑 같이 번역 쪽 일하고 있는 분이세요. 이번에 포토 에세이랑 이것저것 부탁했다던-.“
자신이 있지 않은 곳에서 벌써 어느 이야기까지 오가고 있는 것인지 감도 잡히지 않는 윤수였다. 모르는 사람이 이미 알고 있다는 것에 당황한 윤수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피디가 유쾌하게 선뜻 말을 건넸다.
성공한 사람 특유의 여유로움을 풍기며 피디가 윤수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아, 그 분? 안녕하세요, ‘Living Alone’ 이라고 예능 프로그램 아시려나. 그거 연출하는 사람입니다.“
윤수도 그가 말하는 프로그램을 잘 알았다. 내민 손을 꽉 맞잡은 그가 머릿속으로 빠르게 은기가 출연했던 예능들을 되짚었다.
‘은기가 출연하는 것 중에 가장 인기 많은 예능 아니었던가?’
출연 연예인의 하루 동안 생기는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는 1인 관찰 예능이다. 몇 년 동안 국민 대세로 떠올라 국민 예능이라는 호칭까지 얻은 것이다.
정 피디는 뒷목을 긁적하더니 호기롭게 말했다.
”은기랑 동네 이웃이라 이런 일도 생기네요. 마침 잘 됐어.“
윤수는 어리둥절해서 뭐가 잘됐냐는 눈으로 피디를 보았다.
”혹시 밥 먹으러 가는 중? 심심한데 나도 좀 껴도 되나?“
거기까지는 은기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던 듯 힐끔 윤수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윤수의 성격이라면 낯선 사람이 갑자기 끼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할 것이다.
거절하기로 마음 먹은 은기가 정 피디를 보며 예의 바르면서도 어딘지 뼈가 있는 말을 던졌다. 얼핏 들으면 정중하기까지 했다.
”쉬시는 중 아니셨어요? 이번주 내내 바쁘셨을 텐데 사실 시간 뺏고 붙들고 있는 것도 죄송해서….“
정말 아쉽다는 말투였지만 정 피디는 강력했다. 그가 넉살 좋게 웃으며 은기의 거절을 에둘러 물리쳤다.
”에에이, 쉬고 있으니까 끼겠다는 거지. 그리고, 내가 뭐 그리 대단한 사람인가. 시간 뺏고 말고 하게?“
이 정도로 이야기하면 물러날 줄 알았던 은기는 속으로 놀랐지만 짐짓 표정을 감췄다. 슬슬 윤수가 걱정이 되었다.
”기왕 은기 군이랑 번역사 님까지 함께 만난 거, 재밌는 이야기도 좀 하려고.“
윤수도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긴장한 기색으로 아직 어색한 안경을 손등으로 치켜올렸다. 은기는 말하는 내내 입꼬리를 단 한번도 내리지 않고 피디를 응대했다.
”一설마, 일 이야기 하시게요?“
어쩌다 보니 셋 다 안경을 쓴 채였다. 정 피디가 재밌다는 듯 피식 웃더니 안경 속 날카로운 눈을 번뜩였다.
”오, 이제야 솔직한 반응.“
은기의 도수 없는 유리알 안에서 속을 알 수 없는 갈색 눈이 휘었다.
”정말 죄송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정 피디님 바쁜 거 방송가 사람들이면 모르지 않죠. 이번에 새 파일럿으로 하나 더 런칭하시잖아요.“
”은기 군 가끔 보면 너무 능수능란해서 어린 친구라는 거 잊는다니까. 그게 마음에 들지만. 어, 잠시만.“
정 피디가 지잉지잉 진동이 울리는 휴대폰을 내려보더니 손바닥을 보였다.
”조금만 시간 줘. 30분이면 돼. 괜찮지?“
”괜찮아요?“
윤수를 다시 돌아보며 은기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정 피디라는 사람이 억지로라도 꼭 밥을 같이 먹어야겠다는 의지를 보였고, 윤수는 은기에게 폐가 되기 싫었다.
‘어떡하지….’
거절했다간 은기가 출연하는 프로그램에서도 뭔가 불이익을 받지는 않을까 걱정도 되었다. 이를 본 눈치 빠른 은기가 정 피디가 잠시 휴대폰을 보는 사이 작게 속삭였다.
‘나는 걱정하지 말고, 정말 불편하면 거절할게요.’
하지만 윤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은기의 앞으로 불안할 요소는 심어두고 싶지 않았다.
‘괜찮아.’
되돌리는 속삭임에 은기가 못마땅한 듯 옅은 갈색 눈썹을 찌푸렸다. 정 피디 모르게 짧게 한숨을 내쉰 은기가 피디에게 저녁 메뉴를 물었다.
”정 피디님, 중식 좋아하세요?“
웃고는 있지만 은기에게서 묘하게 싸늘한 기운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
정 피디와의 대화는 은기보다 더 정신없이 흘러갔다. 그 결과로 둘은 피디와 자리를 파한 뒤 바로 약국에 들렀다. 은기가 윤수의 등을 쓸어내리곤 토닥였다.
”속은 좀 어때요?“
증상을 말한 뒤 약사가 등을 돌려 약을 준비하는 동안 윤수가 입을 틀어막았다. 먹었던 것들이 역류하는 기분이다. 분위기를 의식해서 평소보다 너무 많이 먹었다.
”우욱…. 참을 만해.“
은기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러게 적당히 먹고 남기라니까.“
”사주신 건데 어떻게 남겨. 다 먹어야지.“
윤수가 고개를 도리도리 젓더니 은기가 건네는 소화제를 받아 활명수를 뜯어 함께 마셨다. 먹을 때 신경 덜 쓰려고 일부러 면 요리가 아닌 볶음밥을 시켰는데도 기어이 체했다.
”이런 부분은 고집 있네요. 휴…. 내 잘못이죠. 피디님 합석 요구 뿌리쳤어야 했는데. 아니, 병수 형이 촬영 때 정 피디님한테 이야기 넣을 때부터 막았어야 했어.“
”그게 무슨 소리야?“
윤수가 입 주변을 손등으로 닦으며 물었다. 여전히 속 어딘가가 꽉 막힌 듯 갑갑하고 죽을 지경이었다.
”병수 형 알죠, 저번에 봤던 조폭같은 내 매니저.“
윤수가 덩치 크고 왠지 무서웠던 최병수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술자리 때 번역 사무소랑 같이 일하는 것도 넣자고 정 피디님한테 제안 넣었거든요. 사무소까지 가기 귀찮으면 집에서 일하는 모습이라도 넣자고.“
윤수는 멍하게 그의 말을 복기하며 되물었다.
”그거, 내 이야기지?“
”당연하죠.“
”그래서 자꾸 카메라 울렁증 이야기를 꺼내셨구나.“
정 피디가 카메라 울렁증 같은 게 없냐며 계속 집요하게 물었던 기억이 나 윤수가 다시 진땀을 뺐다.
-출연자들 일반인 친구들도 자주 나오는 판에 번역 스케줄로 등장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텐데. 매스컴 타면 주가도 올라갈테고. 좋은 기회 아닌가?
너무 경황없이 들었던 터라 농담인 줄로만 알았다. 은기가 팔짱을 끼며 걱정스러운 듯 유리에 달린 약국의 초록색 마크를 보았다.
”조만간 정 피디님이 연락 정말 넣을지도 몰라요. 번역 사무소로 넣으려나.“
중얼거리는 은기의 말에 윤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사색이 되었다.
”나더러 지금, 예능 출연하라고?“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은기를 올려보았다. 카메라 울렁증 뿐만 아니라 많은 스태프 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렌즈에 찍힌다는 사실에 공포감마저 들었다.
이는 은기도 이미 예상한 반응이었다. 그가 난감한 듯 한숨을 재차 내쉬며 마른 세수를 했다.
”싫으면 확실히 거절해요. 그 분, 집요한 데가 있어서 아마 거절해도 계속 이야기 할테니까.“
”으음….“
윤수는 우선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번역 사무소에까지 연락이 간다면 소장이 적극 찬성할 것이고, 만약 자신이 그 자리를 고사한다 하더라도 예능감 좋아 보이는 하 수석이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다. 하 수석은 넉살도 좋고 카메라가 있다 해도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며 은기와 함께 재미있게 시간을 채울 것이다.
윤수의 미간이 좁게 모여들었다.
‘그건 싫은데.’
하 수석이 껄껄대며 은기와 장난도 치고 친하게 지내는 모습이 연상되자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체한 곳이 더욱 욱신대며 옥죄어든다. 윤수가 배를 문지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생각해볼게.“
은기는 조금 전부터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의도치 않은 일에 매니저까지 나서서 자꾸 스케일을 키우고, 정 피디까지 합세해서 그들의 입맛에 맞게 자신을, 거기다 윤수까지 쥐고 흔들려는 것이 언짢았다.
그는 통제할 수 없는 순간들이 모여서 더욱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뻗어나는 것들을 수차례 목격했다. 자신만이면 상관없지만, 윤수가 그 알 수 없는 회오리 끝에 함께 걸렸다는 것이 싫었다.
”사실 나도 이런 식으로 엮이게 하는 거 마음에 안 들어요. 아니, 싫어.“
단순히 데이트 하자고 머리 써서 시작한 계획이다. 하지만 의도치 않게 점점 커져서 일 영역까지 침범하고 있다. 은기가 불만스럽게 속으로 투덜댔다.
‘이럼 둘이서만 보낼 시간도 줄잖아.’
뭔갈 생각하던 윤수는 마음을 조금씩 정했다. 은기에게 민폐가 될 수도 없고, 무조건 그가 좋아질 방향으로 결정을 하고 싶었다. 다른 사람이 둘 만의 일에 끼어드는 건 더욱 싫었다.
그가 다 마신 1회용 생수컵을 쓰레기통에 넣곤 결연하게 말했다.
”사무소에서는 무조건 하자고 할거야.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 같다.“
”왜 거절 못해요? 사무소에도 싫다고 하면 될텐데.“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은기가 따져 들었다. 체한 것이 내려가지 않고 여전히 가슴 어딘가에 걸려 있다.
‘정말, 은기는 어딜 가나 눈에 띄는구나.’
윤수는 약국 밖에서 안으로 점점 쏠리는 시선들을 애써 외면했다.
”정 피디님 말대로 우리 사무소도 이름을 알릴 기회야. 나 하나 때문에 그걸 포기할 수 없어.“
소심증에 시선 한두 개에도 울렁대는 새가슴을 지녔지만 그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사실 은기와 함께 일한다면 그토록 두렵던 카메라의 시선도 견뎌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조금은 들었다.
어쩌면 그 자신에게도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타인의 시선에 뺨 맞는 그 잔혹한 기억을 뒤엎고 새로이 태어날 수 있는 기회 말이다.
‘물론 은기처럼 아무렇지 않을 자신은 전혀 없지만.’
은기는 눈만 굴리는 윤수를 가만히 내려보았다. 나이에 맞지 않게 때가 덜 묻은 것은 좋지만 항상 매번, 자신의 위한 선택을 하지 못하는 그가 답답했다.
이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은기는 기어이 터져 나오는 속말을 참지 못했다. 이상하게 윤수와 함께 있으면 인내심이 늘 바닥난다.
”평생 그렇게 살거예요? 눈치 보면서, 하기 싫은 거 억지로 떠맡고 안 맞는 옷도 입어가면서 그렇게 살건가?“
은기의 차가운 비난이 뾰족한 화살이 되어 마음을 휘둘러 찌른다. 그가 던진 화살은 남들 것보다 배는 아팠다. 그래서 윤수는 처음으로 반발하여 고통을 튕겨내려 애썼다.
”모든 사람이 너처럼 하고 싶은 대로, 능동적으로 살 수는 없어. 난 정말 평범한 사람이고, 넌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어쩔 수 없이 수동적으로 살아야 할 때도 온다. 그러다 자신을 둘러싼 틀을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틀에 갇히기도 한다. 윤수는 어렵게 살았던 어머니를 통해 그런 감각을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은기는 그의 말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삐딱한 웃음을 지었다. 허탈함이 깃들기도 했다.
”하, 날 그렇게 봤구나. 의무는 하나 지지 않고 사는 생각 없는 사람으로.“
은기는 윤수와 만난다고 설레고 신경 쓰고 여러 가지를 고려했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그를 존중해 주었는데 결과는 항상 이런 식으로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이제 슬슬 인내심이 바닥나고 있었다.
은기가 억지로 격앙되는 목소리를 억눌렀다. 그는 안경을 빼고 눌린 자국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나, 그 쪽 생각대로 쉽게 안 살았어요.”
윤수는 상처 받은 듯한 은기를 보곤 뒷걸음질 쳤다. 가슴 속에 커다랗고 끝없는 구멍이 뚫린 느낌이었다. 그가 필사적으로 방금 자신이 뱉은 말을 전면 부정했다.
”그런 거 아니야.“
오해를 풀기 위해 윤수가 허겁지겁 뒷말을 붙이고 살을 더했다. 놀란 가슴이 펄떡펄떡 뛰었다.
“네가 쉽게 살았다고 생각 안했어. 나보다는 기회가 많았을 거라고 말하는 거야.”
다시 안경을 쓴 은기가 불현듯 잔인하게 비웃음을 머금었다. 안경 탓인지 더 차가워 보였다.
“아, 그래요? 하는 이야기가 우리 형이랑 아주 똑같네. 그래서 만난 건가, 잘 맞아서.”
갑자기 언급된 진기의 존재에 윤수의 가슴이 불에 덴 듯 펄쩍 뛰었다. 거대한 화기가 몰려와 그의 여린 구석을 한꺼번에 지지는 듯한 고통이 몰려왔다. 윤수가 어둡게, 하지만 그답지 않게 제법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마.”
자신이 사준 안경 너머 윤수의 까맣고 큰 눈이 상처받아 일렁인다. 은기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방금 한 말이 실수임도 알고 미안했지만 한 번 터진 입은 제멋대로 움직였다.
“차 안에 먼저 가있어요. 데려다 줄게.”
원래는 집으로 데려가서 더 시간을 함께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럴 생각조차 싹 사라졌다. 얼마간은 윤수를 보지 않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와 있으면 자꾸 자신을 잃었다.
“같이 가.”
윤수가 용기 내서 화가 난 은기의 팔을 붙들었다. 하지만 그는 윤수의 손길을 떨쳐 냈다. 은기가 지독하게 가라앉은 저음으로 말했다.
“나 지금 좀 열 받아서 상처주는 말 계속 할 거 같거든요. 머리 식히고 들어 갈테니까 먼저 가.”
은기가 그에게 강제로 차키를 떠밀었다. 거절 당한 윤수의 팔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슬슬 약이 돌아야 할텐데 속이 여전히 따끔따끔 아팠다.
성큼성큼 그를 버려두고 가면서 은기도 그가 상처받았음을 충분히 알았다.
‘젠장.’
하지만 평소처럼 보듬어 줄 마음도, 여유도, 자존감도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자리를 ‘하진기’ 에 대한 분노가 대신 자리 잡아 활활 타올랐다. 그가 분명 윤수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이다. 진기가 윤수를 머리 숙이게 하고, 주눅 들게 하고, 거절을 두려워하게 만든 것이다.
‘형, 오늘은 반드시 알아야 겠어.’
윤수가 진기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는 것만으로 미칠 듯한 질투가 들끓었다는 것은 스스로 인식도 하지 못했다. 비틀린 질투가 왜곡된 형태로 일그러졌다는 것도 알지 못한 채, 은기는 담배로 속을 달랬다. 하지만 전혀 달래지지 않았다.
결국 말없이 윤수를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 주고 나서 그는 곧장 집으로 돌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은기의 집은 술병이 굴러다녔다. 독한 알코올 향이 크고 깔끔하던 집 내부를 어지러이 휘젓고 다녔다.
고양이들이 주인이 걱정되는 듯 연신 안절부절 못하며 취한 은기의 주변으로 돌아다녔다. 병째로 술을 퍼마시던 은기가 문득 휴대폰으로 손을 뻗었다. 고민을 거듭하던 끝에 그는 붉어진 눈으로 전화를 걸었다. 수신호가 몇 번 가지 않아 끊기고 목소리가 들렸다.
“어, 형. 난데. 바빠?“
취한 은기의 목소리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반면 진기는 아주 차분했다.
-잠깐 쉬는 중이었다. 무슨 일인데.
멈칫하던 진기가 은기의 상태를 직감하곤 못마땅하게 물어 왔다.
-근데 취했어? 목소리가 왜 그래.
”잘됐네. 뭐 좀 물어보게.“
은기가 휴대폰을 어깨와 귀 사이에 끼고 새로운 술병을 뜯었다. 맥주에서 더 독한 양주로 갈아탔다.
”혹시 피윤수 그 상태로 만든 거, 형 짓이야? 계약 연애 같은 거 해서 사람 망가뜨린 거, 형 짓 맞아?“
-…왜 네 입에서 윤수가 나와.
진기의 목소리로 ‘윤수’가 언급되자 순간 머리끝까지 싸늘한 분노가 잠식했다. 친근하게 부르는 그 이름에 화가 났다. 목 뒤를 지탱하는 모든 근육이 일시에 선 기분이었다.
은기가 간신히 떨려 오는 몸을 가라앉혔다. 남은 취기마저 모조리 떨구어 낼 정도로 분기의 힘은 강력했다. 정신이 아주 또렷하다.
”내가 왜 전화로 묻는 줄 알아?“
-…….
”형 얼굴 보면서 이야기하면 주먹 나갈 수도 있어서. 그니까 똑바로 대답해.“
말 없던 건너편에서 낮은 헛웃음이 건너왔다.
-무슨 배짱으로 검사를 협박하는지 들어나 보자.
윤수가 겪어야 했을 고통, 슬픔, 화, 아픔까지 모두 담은 채 은기가 대신 물었다.
”대체 그 사람한테 무슨 짓 한 건데?“
왜 그랬어. 그 사람, 왜 아프게 했어. 안그래도 작은 사람 왜 더 작게 만들어.
차에 타고 내릴 때까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있던 윤수가 떠올라 은기가 목소리에 울분을 실었다. 그의 목울대가 길게 파도쳤다.
왜 나한테 그 사람에게 모진 말 하게 만들어.
모든 게 원망스러웠다.
”계약 연애는 왜 한 거야?“
-…….
”왜 3년이나 사귀면서 제대로 된 관계는 안한건데? 형이 가지고 논 거지? 그래서 저렇게 된 거 아니냐고.“
이 와중에도 진기는 침착했다.
-하은기. 그걸 물어보는 이유는?
침착한 반응이 더 얄밉고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진기는 어느 때든 이성을 잃지 않는다. 소중한 사람이 가는 순간에도 자신을 유지하며 잃지 않는다.
은기가 들고 있던 양주병을 식탁에 쾅 내려두었다. 뭔가가 속에서 터졌다. 그는 으르렁대며 외쳤다.
”지금 내가 사귀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