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편 윤수의 진심 -->
무슨 뜻인지 인지하기도 전에 그는 은기의 손에 이끌려 칸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잠금장치가 걸리고 나서야 윤수가 상황을 파악했다.
다행히 화장실에 사람은 아무도 없고 쾌적하며 윤이 나도록 깨끗했다. 어딘가에서 희미하게 라벤더 향마저 났다.
‘지금 그게 문제냐고!’
윤수는 태평한 스스로에게 놀랐다. 평소의 그라면 하지 못할 생각이다.
같은 안경을 끼고 미소를 띤 채 내려보는 은기가 테 너머로 보인다. 그와 어울리다 보니 느긋한 성격이 옮아온 듯 했다.
은기를 감싼 유연하고 따뜻한 공기는 함께 있는 짧은 시간 동안 윤수에게 조금씩 스며 들었다. 뜻 모를 활력과 생기마저 살아나 급하고 서둘러야 할 것 같은 일도 그에게 닿으면 여유롭고 넉넉하게 변할 것 같다.
윤수를 위아래로 훑은 은기가 만족스럽게 말했다.
”하여간 예쁜 짓만 해.“
정말 몰라서 윤수는 눈만 크게 떴다.
”내가 뭘?“
”준 거 바로 입고 나왔잖아요. 그거 입고 있으니까 더 작아 보이고, 좋네요.”
도수 맞는 안경을 끼니 은기가 더 선명하게 보였다. 투명한 렌즈에 비친 그는 평소와 조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안경을 낀 하은기는 차갑고 이지적인 분위기로 바뀌어 있다. 비슷한 건물숲 사이에서 우뚝 솟은 초고층 빌딩처럼 유달리 곧게 선 콧대 위로 금속성의 테가 가볍게 얹어져 있고, 테 속에 잠긴 특유의 연한 갈색 눈은 흥분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도톰하고 혈색 좋은 입매는 웃는 듯 하늘 위로 조금 뻗어 올랐다.
‘왜 익숙하지.’
어디서 많이 본 모습이다. 윤수의 머릿속이 이를 떠올리지 말라 적색경보를 보냈고, 그는 서둘러 어떤 말이든 끄집어냈다.
“잊고 있나 본데, 나 너보다 나이 많아.”
뜻밖의 반격에 은기는 즐거운 듯 더 진하게 미소지었다.
”나이만 많지 몸은 덜 큰 것 같은데?“
”네가 큰 거야. 내가 작은 게 아니라.“
오늘따라 하 수석도 그렇고, 얼마 남지도 않은 그의 자존심을 건드린다. 수석은 칙칙하다고 하질 않나 은기는 작다고 놀리고 있다.
은기가 달래는 것처럼 사근사근하게 말하며 은근슬쩍 윤수의 안경을 잡아 올렸다.
”작다고 해서 화났어요?“
코에 느껴지던 압력이 사라지고 막 장착했던 새로운 눈이 멀어진다. 윤수가 빠른 손으로 얌전히 접혀 가방 속으로 사라지는 안경을 흐릿한 시선으로 보았다. 새로운 환함에 금방 적응해버린 눈이 금방 불편함을 호소한다.
가방이 칸 내 걸이대에 걸리는 과정까지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은기는 그를 구석에 몰아넣고 본격적으로 손을 놀렸다. 바지 앞으로 큰 손이 윤수의 중심을 튕기고 짓눌렀다.
”허억….“
온 몸의 피가 하복부로 쏠려 윤수가 입술을 깨물고 허리를 숙였다. 미간도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댄다.
그가 반사적으로 은기의 셔츠를 부여잡았다. 멈췄으면 좋겠는데 은기는 들뜬 목소리로 손에 더 힘을 불어넣었다. 손길에 희롱당하고 있는 성기가 점점 부풀어 올랐다.
”그래도 그 몸에 비해선 이건 그렇게 안 작아, 걱정마요.“
”흐으…. 그렇게 누르지마.“
은기의 셔츠를 잡은 손가락이 작게 진동했다. 마디마디가 잘게 떨리고, 허리는 점점 접혀 들어갔다. 은기가 익숙하게 윤수의 바지 버클을 열고 지퍼를 내렸다. 스르륵 다리도 접혀 내려가자 그의 팔을 잡아 올리며 은기는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안경은 위험하니까 뺐어요.“
뭐가 위험한 거지. 머리의 피가 모조리 아래로 쏠린 탓일까. 아득히 멀어지는 정신 사이로 은기의 젖은 목소리가 천천히 끼어들었다.
“잘못하다간 부러지니까.”
설마.
“여기서? 진짜?”
깜짝 놀란 윤수가 그의 품 안에서 바르작댔다. 그리고 초인적인 힘으로 은기를 밀어냈다. 반쯤 내려간 바지를 붙들고 윤수가 경계 어린 눈빛을 보냈다. 그 모습이 꼭 회색 셔츠를 입은 작은 짐승이 움츠린 것 같아 은기가 어깨를 으쓱했다.
“못할 거 있어요?”
시야가 안개 낀 듯 흐려지자 은기가 다른 무엇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윤곽이 뭉글뭉글 경계를 잃고, 익숙한 남자의 얼굴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윤수는 그제야 비슷한 느낌의 정체를 깨달았다.
‘하진기.’
피는 못 속인다. 항상 안경을 쓰고 다니는 진기와 겹쳐 보여 윤수가 순간 뒷걸음질 쳤다. 가슴에 뭔가가 걸려 덜컥댔다. 그러다 가로놓은 화장실 벽에 발뒤꿈치가 닿았다.
‘빨리 잊어.’
본능적으로 지금 진기를 생각하면 은기가 기분 나빠할 것이란 예감이 들었지만 반사적인 반응까지 어찌할 수는 없었다. 그를 상처받게 하는 것이 점점 두려워진다. 문득 든 생각에 윤수가 자조했다.
‘상처? 내가 그럴 인간은 되는 건가.’
은기에게 상처 줄 만한 사람이라도 될까. 그의 태도가 워낙 적극적이라 이제 착각이 들 정도였다. 특별한 대우에 스스로를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여기고 있었다. 참으로 형편 없는 생각이다.
윤수가 주먹을 꽉 쥐었다.
“흐음.”
은기가 묘한 눈으로 그를 보더니 가느스름하게 입가를 휘었다.
“왜요. 형이랑 비슷해 보여요?”
씁쓸하게 떨어져 내리는 목소리에 윤수는 숨마저 멎었다. 몰랐으면 했는데.
“그걸 어, 어떻게….”
순식간에 달아올랐던 분위기가 싸하게 가라앉는다. 은기가 난감한 얼굴로 이마를 손가락으로 긁적거렸다.
“충동적으로 구매한 거라 잊고 있었네.”
“…….”
“어릴 때도 안경 쓰면 형이랑 닮아 보인다는 소리 많이 들었는데.”
그는 어린 반발심에 일부러 끼지 않기도 했던 치기도 떠올렸다. 나중엔 시력이 점점 좋아져서 정말 필요 없어지긴 했지만.
은기가 스스럼없이 안경을 뺐다.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냉랭해진 분위기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제 안경을 윤수의 것과 마찬가지로 안경집에 넣고 가방에 집어넣어 버렸다.
“흥이 확 식네.”
말과는 달리 은기는 그를 끌어당겨 안았다. 작고 검은 머리통에서 장미향이 났다. 그의 성향을 보면 향기까지 꼼꼼하게 골랐을 것 같지는 않고 바디 샴푸를 손에 잡히는 대로 잡아 카트에 밀어 넣었을 것이다.
그 와중에도 은기의 손이 꼼꼼하게 움직여 사그라들려는 윤수의 것을 어루만진다. 찔끔찔끔 새어나온 쿠퍼액을 은기가 손가락에 잔뜩 묻혔다.
비집고 올라오는 옅은 쾌감에 그가 허리를 비틀어 빠져나가려는 행색으로 헐떡였다.
“식었다면서 왜…. 흐윽….”
“아래까지 식기엔 그쪽이 너무 자극적이라.”
반쯤 떨어진 바지에 불룩 선 성기가 브리프를 찢을 것처럼 튀어나와 있다. 내려간 바지 사이로 하얗고 메마른 다리가 보이고, 붉어진 소년 같은 얼굴이 울상을 짓고 있다.
은기는 브리프까지 완전히 내리고는 엉덩이 골로 손을 대었다. 여전히 봉긋하고 탐스러운 엉덩이다. 짧은 감상을 끝낸 그는 액을 묻힌 긴 손가락으로 대번에 비문을 뚫고 들어갔다.
“윽!”
윤수는 은기의 팔을 황급히 붙들고 부르르 떨었다. 손가락이 들어갔다 나올수록 간신히 들고 있던 까만 머리도 점점 각도가 떨어진다.
“으읏….”
그가 이내 은기의 가슴팍에 머리를 완전히 기댔다. 질척대는 야한 소리가 화장실 내부에 작게 울렸다.
윤수가 입술을 씹어 신음을 참았다. 좁은 구멍이 금방 영역을 넓혀 은기의 손가락을 탐욕스럽게 빨아들인다. 주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구멍과 손가락 사이의 마찰 소리가 너무 찰지게 들려 윤수가 귀를 붉혔다. 은기도 느꼈는지 낮게 웃음 지었다.
“잘 먹네요. 많이 해서 그런가.”
은기의 가라앉은 저음에 그의 집에서 헐거워질 정도로 엄청나게 해댔던 기억이 소환되었다. 욕실에서, 그의 방에서, 심지어 벽 잡고 서서도 섹스를 했다. 부끄럽고도 열기 가득 찬 과거의 장면이 선명해지는 동시에 윤수의 페니스가 꼿꼿해진다. 자신의 쾌감을 숨기듯 그가 애원조로 말했다.
“사람 와. 그만….”
아직 바깥에 인기척은 없었다. 저녁 시간이라 식당가에 사람이 몰려 있을 것이다. 이쪽은 아직 한산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를 일이었다. 사람이 있다 해도 은기가 그만둘 것 같지 않았으니까.
그의 예상대로 은기는 아랑곳 않고 과감하게 윤수의 셔츠도 위로 올렸다. 서늘한 공기에 노출된 갈색 유두가 빳빳해져 솟아 있었다.
"이건 거치적거리니까 벗길게요."
은기가 허물 벗기듯 녹색 점퍼를 벗겨 걸이대에 걸어두었다. 티셔츠를 다시 걷어 올리자 유두가 마치 빨아달라는 것처럼 보였다. 은기는 피식 웃으며 한 팔로 그의 어깨를 안았다. 그리곤 구멍에 넣던 손가락 개수를 늘리며 윤수의 유두를 입에 넣었다. 콩알 같은 그것이 뜨거운 입 속에서 더욱 커지는 것 같았다.
“으응…!”
혀를 나른하게 굴리자 윤수가 못 참고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허벅지가 팽팽해지고 운동화 속에 숨은 발가락이 바닥을 긁듯 굽는다. 뒤와 가슴을 동시에 공략하자 윤수의 머릿속은 금세 엉망이 되었다. 은기는 어느 새 성감대를 다 파악한 것 같다. 부들부들 떨며 쾌감을 버티고 있는 윤수에게 은기가 부탁했다. 금테가 둘러진 잿빛 모자 아래 깎아지는 듯한 얼굴이 열에 겨워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이 들떠 있다.
“내 바지도 내려줘요.”
흥분으로 날 선 그가 구멍 속 전립선을 꽉 눌렀다.
정신없이 쾌감으로 인한 경련을 전신으로 보내며 윤수는 쏟아지는 비명을 간신히 안으로 삼켰다. 묽은 액이 성기에서 울컥 터져 나왔다.
정말 싫은 것은 아니었기에 망설이던 윤수가 떨리는 손으로 은기의 청바지 지퍼를 내리고 풀었다.
이제 이 정도 쾌감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다. 더 크고 익숙해진 열기를 느끼고 싶었다. 어딘가에 휩쓸려 가버릴 것 같은 거대한 절정을 맞고 싶다.
급한 손길로 몇 번이나 실패 끝에 거치적대던 옷을 다 벗겨내자 은기의 성기도 터질 것처럼 커져 있었다. 그가 끓어오른 흥분을 억누르며 차분하게 말했다.
“뒤돌아봐요.”
이제 이 좁은 공간이 화장실인지 어딘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서 이 간지럽고 방향을 잃어 힘든 어중간함을 끝내줬으면 하는 간절함만이 윤수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빨리 넣어줬으면 좋겠는데 은기는 지금 와서 느긋한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가 뱉는 따뜻함으로 채워지고 싶었다.
무심결에 윤수는 재촉하듯 은기의 팔을 잡고 끌어당겨 구멍 주변을 배회하는 성기를 채근했다. 엉덩이 주변이 액으로 미끈거렸다.
잡힌 팔이 윤수답게 차가웠지만 은기는 최대치의 자극점을 눌린 기분이었다. 그가 숨을 들이켰다.
못 참겠다는 듯 의지를 잃은 갈색 눈썹이 휙 일그러지고 난폭해진다.
그의 몸을 생각해서 천천히 하고 있었는데, 색소 옅은 눈에 서린 인내심이 조각조각 흩어져 사라진다. 은기가 억눌린 목소리로 정신없이 중얼거렸다.
“젠장…. 나중에 그만하라고 하지 마요.”
성난 페니스가 구멍을 비집고 억지로 열었다. 덜 풀린 것 같았지만 한 번에 끝까지 밀어 넣었다.
퍽!
윤수가 제 입을 틀어막고 부르르 떨었다. 허벅지에 걸려 내려간 바지가 떨림에 동조해 조금 더 내려갔다. 남은 손으론 벽을 붙들고 머리를 대면서 쿵 소리가 났다.
그때였다.
“무슨 소리지?”
마침 사람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굵직한 성인 남성 둘이었다.
“난 아무 소리 못 들었는데.”
“잘못 들었나?”
윤수의 머리가 벽에 더 이상 부딪치지 않도록 은기가 손을 집어넣어 막았다. 이마를 붙들고 자신 쪽으로 잡아당기는 동시에 그가 허리를 계속 움직였다.
질퍽질퍽-
뜨겁고 얇은 내벽이 은기의 페니스에 찔릴 때마다 발작하듯 움찔대며 강하게 조였다. 밀려드는 절정의 압박을 참느라 연신 미간을 구기는 은기도 은기지만 윤수도 고군분투 중이었다.
‘죽을 것 같아….’
긴장 때문인지 구멍에 박히는 은기의 것이 더 강렬하게 느껴졌다. 다시 한 번 은기가 강하게 밀어붙인다. 하필 느끼는 곳을 세게 비비며 스쳤다.
“으으….”
윤수가 필사적으로 입을 틀어막았지만 입술에서 잘게 떨어져 나간 신음이 밖으로 새어나갔다. 서로 이야기를 하느라 다행히 듣지는 못한 것 같았다.
‘쉿.’
은기가 도와주려는 듯 다른 손을 뻗어 입을 막은 윤수의 손 위를 덮었다. 더 빈틈없이 꽉 윤수의 신음을 봉인해 주었다. 사람이 밖에 있다는 스릴과 엉덩이 사이로 거침없이 박히는 성기의 콜라보에 윤수는 생리적인 눈물을 흘리며 흔들렸다.
바닥에서 지나치게 반들대는 깨끗하고 하얀 타일에 발이 미끌려 작게 끽끽대는 소리를 냈다. 그 뒤로 남자들은 수다를 이어가며 화장실을 나섰다. 다시 조용해진 틈에 은기가 박차를 가했다.
철퍽! 철퍽!
아까보다 속도는 조금 느리지만 치대는 힘이 더 강해졌다. 전립선을 뭉근하게 누르고 빠져나가는 거대한 성기에 윤수가 흐늘대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연신 떨었다. 절정을 한 번 맞아 터진 정액이 윤수의 얇은 허벅지로 야하게 흘러 내렸다.
입을 함께 막아주던 은기의 손이 이제 벽을 짚고 끝을 향해 달려간다.
퍽! 퍼억-!
열기에 들뜬 가운데 은기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사람 마음 금방 못 바뀌는 거 알아.”
입을 틀어막은 윤수의 손 사이로 흐느낌이 새었다. 파고드는 성기가 주는 쾌감과 밀폐된 공간이 주는 묘한 두려움에 머리가 이상해 진 것 같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잘 들리지 않았다.
“근데-.”
은기의 잿빛 모자가 투두둑 땅으로 떨어졌다. 그조차 인식 못할 정도로 은기는 몰두했고, 윤수는 타격음에 나갔던 정신이 돌아왔다. 격하게 흔들릴 때마다 신발이 기이한 소리를 내며 타일 위에서 마찰을 일으켰다.
하얀 타일 위로 땀이 뚝뚝 떨어진다. 갈색 머리칼이 온통 땀으로 젖은 은기가 강한 힘으로 페니스를 끝까지 치받았다.
퍽!
성감대를 노린 마무리였다. 윤수는 눈 앞이 하얗게 물들었다. 이명처럼 은기의 중얼거림이 아주 선명하게 날아와 꽂혔다.
“조금은 인정해 줬으면 해.”
열기로 흐려졌던 은기의 얼굴이 절정을 맞아 잔뜩 구겨지고, 그는 재빨리 성기를 빼냈다. 윤수의 붉게 물든 엉덩이 위로 하얀 액이 길게 튀었다. 은기가 그의 허리를 꽉 붙들었다. 동시에 윤수도 파정했다.
“윽.”
비릿한 향과 더불어 라벤더 향이 섞여 났다. 은기의 모자가 발에 채여 멀리 굴러 다녔다.
***
”근처에서 속옷이나 새로 사서 갈아 입을까요. 우리 둘 다.“
”마음대로….“
손을 씻고 반쯤 해탈한 몰골로 화장실을 나서는데 은기는 아주 개운하고 경쾌해 보였다. 뒷정리는 역시 힘이 넘치는 은기가 했다. 모자는 수돗물로 대충 헹구고 닦은 뒤 가방에 우선 구겨넣은 뒤였다.
윤수가 퀭한 얼굴로 가방을 고쳐맸다. 안경을 다시 빼서 쓰자 은기도 덩달아 안경집을 꺼내더니 다시 끼는 것이 보였다.
진기랑 닮아 보여서 싫어했던 것 아닌가.
의아하게 올려보자 은기는 먼지가 묻은 안경알을 부드러운 전용 천으로 닦아 냈다. 먼지 한 점 없이 조심스럽게 알을 다루던 은기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날렵한 턱선에 자리잡은 입술이 천천히 움직인다.
”형 많이 좋아했죠?“
갑자기 날아온 직구에 윤수는 당황했다.
”그게….“
”그런 것 쯤 잘 안다구요. 근데 아는 거랑 직접 맞는 거랑은 확실히 달라.“
그저 투덜대는 것 같기도 하고, 농담처럼 가볍게 말하니 의중을 알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윤수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화도 나고, 짜증나.“
”…….“
”초조하고. 시간 들여야 하는 거 아는데도, 마음처럼 잘 안 돼.“
그런 인간적인 고민을 은기도 하는구나.
윤수는 들을수록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그도 자신과 같은 사람이라는 묘한 동질감 때문인지도 몰랐다.
은기가 먼지가 이미 보이지 않는데도 천을 눌러 알을 밀었다. 모자가 없어져 여기저기 뻗은 갈색 머리조차 자연스럽게 샵에서 한 헤어 스타일처럼 보였다. 윤수는 모델의 소화력이란 이런 것인가 내심 감탄도 들었다.
상가 복도로 지나다니는 여자 두엇이 은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바삐 지나간다. 은기를 보곤 수군대며 지나치는 것에 마음이 불쾌하게 술렁였다.
윤수의 기분도 모르고 은기는 알에 입김을 불곤 말을 이었다.
”나한테 이런 기분 느끼게 하고 매일 편하게 발 뻗고 잘 거라 생각하면 억울하기도 해.“
”…그렇게 편하게 못 자.“
작게 항의했지만 은기는 못 들은 척 깨끗하게 먼지를 밀어낸 안경을 썼다. 그가 두 팔을 허공에 뻗으며 기지개를 켜곤 윤수에게 등을 보였다. 듬직하고 큰 어깨가 여과 없이 틈을 드러낸다. 일을 할 때는 누구보다 빈틈 없는 사람이면서, 윤수에게는 이런 식으로 빈 자리를 보이곤 했다. 뻗으면 금방 잡을 수 있게끔.
”그래서 가끔 얄미워요. 솔직히 진짜 미워해버릴까 싶은 적도 있었고. 나도 사람인데.“
윤수가 덜컥 제자리에 붙박이처럼 얼어붙었다. ‘미워해버릴까’ 라는 은기의 말이 마음을 부술 것처럼 강하게 밀고 들어와 따끔따끔하게 부서진 파편 조각인 듯 그의 여린 속을 찌르고 다녔다.
이 조각들이 다 부서지고 나면 간신히 느꼈던 따스함 마저 모조리 앗아가 버리고, 이제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은 무서운 생각마저 들었다. 훌쩍 왔던 것처럼 훌쩍 떠나버릴 것 같았다. 온기를 알게 해놓고, 더 이상 그를 붙잡을 기회도 주지 않은 채.
머리가 차갑게 식고 온 몸이 찬바람에 언다. 늘 추울 때 잡아주던 은기의 손이 멀게 느껴졌다. 그걸 인식하자마자 윤수는 비명처럼 그를 붙들었다.
”진기랑은!“
흔들흔들 멀어지던 은기가 멈춰 선다.
”증명하고 싶었어. 내가 조금이나마 극복한 것 같아서, 그 느낌을 못 잊어서…!“
”…….“
”그래서 더 못 잊었던 거야.“
그가 처음 보는 멍한 얼굴로 윤수를 돌아보았다. 어둑해진 저녁 풍경에 부유한 건물 특유의 부내가 세련된 향처럼 풀풀 그를 감쌌다. 이런 것들이 어울리는 사람이다.
그런데 보잘것없는 자신 때문에 소소한 고민들을 지속하고, 속상해 하는 것이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화려한 외모를 떠나 처음부터 담담하게 들려주던 그의 진정성이 와닿는 순간이었다.
윤수는 마른 침을 삼켰다. 하지만 용기를 내서 꾸깃꾸깃 접고 또 접어 가슴 아래 밀어넣고 밀봉해두었던 진심을 꺼냈다. 손끝이 또 차갑게 곱아들어 윤수가 손을 폈다가 쥐기를 반복했다.
”나도 이제 와선 헷갈려. 진기를 정말 좋아한건지.“
어느 정도 극복했다는 성취감을 계속 쫓고 싶어 사랑이란 감정으로 포장한 것인지. 아직 잘 모르겠다.
은기는 그의 말을 이해하려 듯 흩어지는 말꼬리를 붙들고 되뇌었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을 극복하고, 어떤 것을 증명하려 했단 말인가.
”…무슨 말이예요?“
더 물으려 윤수의 어깨를 잡는 순간, 건너편에서 뿔테를 쓴 낯선 남자가 은기에게 아는 척을 했다.
”어?! 이거, 은기 군 아냐?“
윤수와의 시간을 방해 받은 것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보지 못하던 사나움이 은기의 눈을 스쳤다. 하지만 그는 금방 프로처럼 돌아서서 자신을 부른 남자를 맞았다. 활짝 웃는 얼굴로 말이다.
”오! 정 PD님 이시구나! 안녕하세요.“
”그래. 동네 마실 나왔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