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과 눈 사이 -->
다음 날, 쌀쌀한 공기를 헤치고 윤수가 사무소로 들어섰다. 수석이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수염 난 턱을 문지르다 그를 발견하고 쪼르르 날아왔다. 반갑게 그를 부르던 수석이 멈칫하고는 윤수를 위아래로 훑었다.
”피윤. 중고 시장에서 가져온 옷이냐?“
뭔가 이상한가. 윤수가 어깨에 덮고 온 점퍼를 벗었다.
”이거?“
수석이 아무리 봐도 품이 지나치게 넉넉한 그것을 유심히 살폈다.
”아무리 중고 시장이라도…사이즈도 안 보고 사? 너한테 너무 크지 않나. 그렇게 그 옷이 마음에 들었냐.“
점퍼를 팔에 끼고 가져온 가방을 책상에 올려놓으며 윤수가 대꾸했다.
”색깔이 맘에 들더라고.“
”어차피 점퍼니까 상관없겠지. 그나마 네가 입고 온 것 중에는 제일 낫네.“
그는 의자 뒤로 큰 녹색 점퍼를 걸어놓다 익숙한 말에 고개를 돌렸다.
”어머니도 그러시더니. 패션 센스가 정말 최악이긴 했나.“
”최악이었지. 피윤하면 칙칙하고 어둡고 재미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인간이었잖아.“
예상은 했지만 직접 들으니 은근히 타격이 있었다. 아닌 척 컴퓨터 전원을 켠 윤수가 억울한 듯 물었다.
”내가 그런 이미지였어?“
”그래서 여자들한테 인기도 없잖아. 나 봐. 애인 맨날 바뀌는 거.“
회전 의자를 빼 자리에 앉은 윤수가 미간을 좁히곤 마우스를 손에 쥐었다. 환하게 켜진 파란 배경 화면을 보며 그가 중얼거렸다.
”맨날 차여서 바뀌었겠지.“
수석은 상처받은 듯 그를 원망스럽게 노려보았다.
”와, 팩트폭력도 아니라 폭격! 너무해, 피윤.“
“그래도 술 마시자는 거 안 빼고 어울려 줬잖아.”
“말 나온 김에 오늘도 요 근처 대포집 어때, 갈래?”
평소 같으면 눈 딱 감고 어울려 줬겠지만 오늘은 안 된다. 은기와 선약이 있었다. 윤수는 잘라 거절했다.
“안 돼. 약속 있어.”
“오올~. 무슨 약속? 여자?”
“아니, 남자.”
맥 빠져 늘어진 어깨를 하고 수석이 윤수를 졸랐다.
“내가 그깟 칙칙한 남자 놈한테 밀려난 거야? 좀 봐주라. 나 사실 그저께 또 깨졌단 말이다. 술동지! 어울려 주라.”
윤수가 기가 막힌 얼굴로 눈앞에 들이밀어 진 턱수염 난 남자를 밀었다. 기분 탓인지 눈이 조금 침침했다. 눈을 손으로 누르면서 윤수는 한심한 듯 말했다.
“넌 남자 아니야?”
“맞지. 그래도 너랑 좀 더 친밀하고 긴~밀한 남자 술동지 아니냐.”
반대편에서 듣고 있던 소장이 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어울려 줘?“
”…소장님은 됐고요. 뒤처리 제가 해야 하지 않습니까. 취하면 몸도 못 가누시면서.“
수석은 질색하며 소장의 제안을 거절했다. 실랑이를 지켜보던 여직원 둘이 키득대다가 끼어들었다.
”하 수석님, 우리가 가줘요? 콜?“
”오오! 나야 땡큐지. 콜!!“
냉큼 윤수를 버리고 여직원들에게 달려가던 수석은 따라붙은 조건에 멈칫했다.
”단, 윤수 씨 가면 갈게요. 저 분 우리하곤 거의 간 적 없잖아.“
생각지도 못한 호명에 윤수가 고개를 번쩍 들고 당혹스러워했다.
”저요?“
”회식은 거의 참석 안하고 그나마 소장님이나 수석님이랑 따로 갈 때만 가고. 우리도 말로만 들었던 윤수 씨 술주정이 궁금하다구요.“
어쩌다 보니 그가 단체 회식에는 대부분 간 적이 없었다. 사람 많은 자리는 불편하고, 정신이 없어서 피했던 탓이었다.
‘하 수석은 대체 무슨 이야길 한 거야. 술주정 부린 건 본인이면서.’
윤수는 딴청 피우는 수석을 노려보곤 그들에게 해명했다.
“저 술주정 없는데…. 그리고 선약이 있어서요. 다음엔 꼭 같이 가겠습니다.”
정작 여직원들은 수긍하고 깔끔하게 물러났지만 질척대는 건 하 수석 쪽이었다. 윤수는 그 뒤로도 술자리에 같이 어울려 달라고 들러붙는 수석을 떼어내느라 진땀을 뺐다.
저녁에 착실히 근처 헬스장에 가서 구석구석 깨끗하게 씻고 난 뒤 은기의 집으로 곧장 향할 때까지 하 수석의 구애 아닌 구애는 계속되었다.
“퇴근하겠습니다.”
어둑해지는 저녁 하늘을 바라보며 윤수가 사무소를 나섰다. 그런데 눈이 계속 흐린 것 같았다. 버스 문이 열리고 카드를 찍을 때도 그런 기분은 이어졌다.
‘왜 이러지.’
오늘도 유리창 쪽에 앉아 전봇대를 무심코 보았는데 줄이 흐릿해 보였다. 윤수가 눈을 비볐지만 여전히 까만 줄이 회색으로 말간 하늘에 번져 보였다.
‘안경을 맞춰야 할 때인가.’
마침 은기에게 전화가 와 받으니 낮은 목소리가 건너왔다. 언제 들어도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하는 밝은 기운이다.
-오고 있죠?
움직이는 버스 문이 사람을 품고 닫혔다가 다시 열린다. 우루루 빠져나가는 까만 머리들이 금방 다른 얼굴들로 꾸역꾸역 채워졌다.
그 사이 무언갈 믿으라며 중년 남자가 사납게 외쳤다. 그는 노란색에 까만 볼드체 글씨가 한가득 박힌 전단지도 여러 장 들었다.
보고 있던 윤수의 손끝이 차갑게 곱아들었다.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르려 하고 있었다.
‘보지마.’
그런데 눈을 뗄 수가 없다. 그 광경을 멍하게 바라보던 윤수가 무의식 중으로 품이 넉넉한 녹색 점퍼를 손으로 끌어당겼다.
-…듣고 있어요?
흐려지던 초점에 빛이 돌아온다. 윤수가 흠칫 반응했다.
”가는 중이야.“
늦은 대답이 수상한 듯 침음성을 내던 은기가 본론을 이야기했다.
-배고픈데 배달 음식은 싫고, 집에서 해먹는 게 어떨까 해서. 맛있는 거 해줄테니까 재료만 좀 사와줄래요?
은기와 일상적인 대화를 하고 있으니 잠깐 불안하게 수런대던 마음이 가라앉는다. 자신감 있는 목소리였다.
‘요리도 잘하는 걸까.’
윤수는 눈이 안 좋았다는 것을 떠올리고 중간 지점을 말했다.
”알았어. 근데 안경점에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은데. 들렀다 갈게.“
반대편에서 미심쩍은 목소리가 스멀스멀 다시 솟구쳤다.
-안경점은 왜요?
”눈이 안 좋은 것 같아서 시력 검사 겸. 정말 안 좋아졌으면 하나 맞추려고.“
-그럴 거면 같이 가. 일단 우리 집 쪽으로 와요. 정류장에 내리면 거기로 마중 나갈테니까.
”아니. 금방 끝날 거야.“
윤수가 당황해서 괜찮다고 했는데도 은기는 굳이 바로 외출 준비를 하는 듯 부스럭대는 소음과 동반해 제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나갈 게요. 집 근처에 좋은 안경점 있는데 거기 가죠. 나간 김에 외식해도 되고.
”괜찮은데….“
윤수의 눈이 쭈뻣쭈뻣 눈에 띄는 전단지를 잔뜩 들고 있는 중년 남자에게 향했다. 하지만 은기와 통화를 하는 사이 이미 내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가슴을 꽉 조이던 불안이 스르륵 사라진다. 이윽고 들린 불만스러운 은기의 목소리에 윤수가 다시 집중했다.
-내가 그쪽 말 중에 듣기 싫은 게 ‘미안’ 말고 더 있는 거 알아요?
”뭔데?“
-괜찮다는 소리.
윤수의 가슴이 덜컥댔다.
”정말 괜찮아서 그런 거야.“
건너편에서 대문 열고 닫히는 소리가 한숨 소리와 섞여 났다. 이어폰을 끼고 통화하는 듯 했다.
-솔직히 살면서 괜찮다고 한 수많은 말 중에 ‘정말 괜찮은’ 게 여태 몇 개나 있었어요?
윤수는 아무 말 못하고 찔린 얼굴로 휴대폰 화면만 쳐다봤다. ‘하은기’ 라는 다소 건조하게 저장된 이름이 삭막한 사람 그림 위로 떠 있었다.
”…....“
은기는 언제나 정곡을 찔렀다. 수년을 알고 지낸 사람처럼 그를 정확히 파악하고 핵심을 노렸다. 가끔 그의 통찰이 무서울 때가 있었다. 나이와 상관없이 눈에 보이는 것의 깊이는 다른 건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쯤되니 윤수는 궁금해졌다. 하은기가 살아온 길이 마냥 꽃밭은 아니었을 것 같다. 어쩌면 듬성듬성 야생초가 난 황량한 길, 혹은 풀 하나 없는 지옥길이었지도 모른다.
그가 본 지옥과는 다르겠지만, 묘한 동질감이 들었다. 다른 사람은 눈치채지 못한 것을 알아채 준다. 진기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아, 생각해보니 전에 준 점퍼 너무 컸죠? 예전에 자주 입던 건데 작아져서 그냥 옷장 속에 둔 거였거든요. 새로 줄게요.
”됐어. 그 정도 큰거야 점퍼라서 문제 없고.“
작아졌다고는 해도 윤수에겐 컸다. 그는 은기가 지금도 크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왠지 그의 성장판은 무한할 것 같다.
짧은 통화가 끝난 뒤 잠깐 졸았는데, 윤수는 걸리버의 거인처럼 엄청나게 커진 은기에게 붙들려 밤낮 성적으로 희롱당하는 야하고 무서운 꿈을 꿨다.
‘흐으….’
그 덕에 그는 내릴 때쯤 반쯤 녹초가 되었다. 꿈이지만 너무 생생해서 현실 같았다.
한적한 부촌에 버스가 서고, 윤수는 비틀대며 내렸다. 해가 아직 떨어지지 않아 시야가 넓었다. 내리자마자 정류장 근처에 은회색의 차에 기대 서 있는 현실의 하은기가 보였다.
굳이 찾으려 한 것도 아닌데 윤수의 온 몸은 방향을 찾는 나침반처럼 자연스럽게 그를 찾았다.
은기는 휴대폰을 확인하고 있는 지 금테가 둘러진 잿빛 모자를 쓴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은기를 바로 부를까 하다 순간 윤수가 망설였다.
‘아, 역시 눈에 띄어.’
사람들에게 눈길 받는 것을 싫어하는 윤수는 쏠린 시선에 뒷걸음질 쳤다.
은기는 오늘도 여전히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길쭉한 팔다리를 드러내고 있었다. 긴 팔을 입은 윤수와 달리 아직 더운지 반 팔 맨투맨 셔츠를 입고 달라붙은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탄탄하고 긴 허벅지가 청바지 속에서 슬쩍슬쩍 움직였다.
윤수가 저도 모르게 목울대를 일렁였다. 그 안에 존재한 것이 자신을 짓누를 때 얼마나 거칠어지는지, 혹은 부드럽게 쾌감을 불러오는 지 잘 알고 있기에.
”언제 왔어요?“
차체 위로 솟아 있는 길고 우아한 몸이 윤수를 발견하고는 바삐 움직였다. 그를 반갑게 맞이하려던 은기의 손이 천천히 내려가고, 얼굴에는 심각한 표정이 스쳤다.
”얼굴이 왜 이래요? 어디 아파?“
”버스에서 이상한 꿈 꿔서 그래.“
”무슨 꿈?“
차마 솔직히 말할 수 없어서 윤수는 말을 돌렸다.
”근데 안경점은 어디야?“
”차에 타요. 바로 근처예요.“
차 문을 열기 전 은기가 기습적으로 다시 물었다.
”진짜 무슨 꿈 꾼 거예요?“
대충 둘러댔어야 했는데 마음이 조여들던 윤수는 묘한 변명을 하고 말았다.
”네 꿈은 안 꿨어.“
말해놓고 윤수는 바보같은 말을 했다며 지극히 후회했다. 동시에 은기의 옅은 눈이 커졌다가 크게 휘었다.
”아~ 내 꿈 꿨구나.“
왠지 흡족한 얼굴로 은기가 운전석에 타고, 윤수는 터질 듯 붉어진 채 보조석에 얌전히 올라 탔다. 흥얼대는 은기의 휘파람이 기분 좋게 들려 왔다.
***
안경점에 도착해 도수 검사를 하니 시력이 떨어진 것이 맞았다. 어울리는 안경테를 찾는 것은 은기가 적극적으로 도와줬다. 모델이라 그런지 고르는 센스가 감각적이었다. 원래도 패션 센스는 꽝이라 생각했던 윤수는 그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시장에서 옷장사를 하는 어머니도 인정한 센스라면 괜찮을 것이다. 물론 어머니가 알록달록한 색을 주면 슬그머니 밑장 빼듯 빼두어서 정작 그의 옷장은 무채색으로 채워져 있긴 하지만.
”흐음….“
은기가 매끈한 턱을 매만지며 윤수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너무 가까이 다가와서 윤수가 안경점에 있는 몇 사람의 눈치를 봤지만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부촌이라 연예인에 크게 연연하지는 않는 분위기였다.
”윤수 형은 얼굴이 작고 마르고, 으음. 얼굴형은 계란형이니까 이게 어울리겠다.“
그는 마음에 드는 것이 생겼는지 안경 하나를 들고 윤수의 얼굴에 이리저리 대보고 직접 써보게 했다. 은기가 곧 직원을 불러 여러 주문을 넣었다.
”형, 이거 프론트 길이는 좀 짧게 해주고 렌즈 가로길이도 조절 가능하나?“
은기와 친분이 있는 건지 젊은 안경점 사장이 직접 나와 응대를 해주었다. 그가 은기가 건넨 안경을 들고 확인했다.
”가능해. 은색 맞지?“
”어, 그걸로 해줘. 투브릿지로.“
투명한 관 아래 각양각색의 안경들이 늘어져 있었다. 은기는 아쉬운 듯 그것들을 내려보더니 결연하게 시선을 돌렸다.
”마음 같아선 뿔테 안경도 씌우고 싶은데 그럼 너무 귀여워져서 안되겠어.“
사람들이 들었을까봐 놀란 윤수가 주변을 두리번 거렸지만 역시 신경쓰는 사람은 없었다. 직원도 그가 주문한 것을 포장하려는 지 들어가고 보이지 않는다.
은기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지갑을 챙겨 들었다.
”이건 내가 사요. 우리 집까지 와줬으니까 보답.“
”아니, 내가….“
윤수가 정색하며 팔을 뻗었지만 이미 은기는 계산대로 성큼성큼 가버리고 등만 보였다. 게다가 직원에게 주문 하나를 더 넣고 있었다.
”형, 이거랑 같은 거 도수 없이 하나 더 줘.“
윤수가 물끄러미 계산대 앞에 서 있는 은기를 바라본다.
도수 없는 안경이 왜 필요하지?
그 의문은 안경점을 나서자마자 풀렸다. 은기가 산 안경을 끼면서 개운하게 웃었다.
”이러니까 커플 같다.“
윤수의 고개가 다시 바삐 주변으로 이리저리 방황했다. 주변 신경 안 쓰고 툭툭 내뱉는 것에 식은땀마저 나는 윤수였다. 간신히 아무도 신경 안쓴다는 것을 재차 확인하고 나서야 윤수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저녁은? 배 안고파?“
고급스러운 상가 건물 안에 여러 상점들이 늘어져 있고 은기의 눈이 어떤 장소에 꽂혔다. 그가 씩 웃더니 윤수를 화장실로 이끌고 들어갔다.
”그전에 해결해야 할 게 생겨서요.“
”뭘?“
관리를 잘하는지 공중 화장실에 향기마저 났다. 깨끗한 거울과 반질거리는 개수대를 보면서 윤수는 방금 전까지 안경점에 있었는데 갑자기 왜 이런 풍경이 나올까 멍해졌다.
”화장실은 왜?“
그가 자신을 데리고 여기로 들어 온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은기의 은테 안경 뒤의 옅은 눈이 무언가를 참는 듯 열기를 띠고 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내가 어제 전화할 때 얼마나 미칠 뻔 했는 지 알아요? 당장 먹고 싶은데 눈 앞에 없어서 돌아버리는 줄 알았어.“
========== 작품 후기 ==========
1234577 님, 카프리와송, 뇨뇽임 님, 하사미 님, FullMoon15 님 코멘트 감사합니다!
오늘도 읽어주신 분들, 추천, 선작 주신 분들 모두모두 감사드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