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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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기 --> 

한 번에 음료수를 마신 윤수는 노트북을 만지작대다 자리를 떨쳤다.

”더 할 말 없으시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순간 그가 으슬으슬한 기분이 들어 팔을 손으로 비볐다. 사무소에서 나올 때 못 챙겨 왔더니 몸에 드러난 팔에 한기가 들었다. 그걸 본 눈치 빠른 은기가 겉옷을 하나 챙겨 왔다. 녹색 계열에 회색 모자가 하나 달린 항공 점퍼였고 그가 빙긋 웃으며 윤수에게 옷을 건넸다. 

”이거 걸치고 가세요.“

윤수는 뒤에서 음료수를 홀짝대고 있는 병수의 눈치를 보며 극구 사양했다. 

”아, 아니. 괜찮습니다.“

혹 그가 이 친절을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걱정한 것이었지만 은기는 오히려 걱정스럽게 내려보며 윤수의 등에 점퍼를 직접 걸쳐주기까지 했다. 

”안 괜찮아 보여요. 추워 보여.“

닭살이 돋아 있는 팔을 은기가 잡았다가 천천히 놓았다. 흠칫 놀란 윤수가 병수 쪽을 다시 돌아보았다. 

다행히 매니저가 보는 것 같지 않아서 윤수는 안심하고 옷을 받아들었다. 

”다음에 만날 때 꼭 돌려 드리겠습니다.“

은기가 눈웃음을 치며 덮어준 점퍼의 구겨진 부분을 손바닥으로 펴주었다. 동시에 은근하게 윤수의 허리에 손을 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움찔 떨며 어쩔 줄 몰라 턱을 떠는 반응은 덤이었다. 

”마음에 들면 그냥 가지셔도 상관없는데.“

관심 없어 보이던 병수가 휙 고개를 들어 보았다. 몹시 묘한 눈빛이었다. 그 바람에 윤수는 식은땀을 흘리며 점퍼를 쥐고 은기의 집을 서둘러 빠져나갔다. 

”꼭! 돌려 드릴게요. 그럼 가보겠습니다.“

도망치듯 나간 윤수의 뒷모습을 병수가 한참 바라보더니 되돌아오는 은기에게 말을 걸었다. 

”저 사람, 마음에 들었나봐?“

손을 뻗어 남은 음료수를 마시던 은기가 한 쪽 눈을 치켜들었다. 무슨 의미냐는 눈빛에 병수가 목 뒤를 긁었다. 

”엄청 잘 챙겨주잖아. 친절하고.“

그는 주스가 묻은 입가를 손등으로 닦으며 피식 웃었다. 

”나 원래 모든 사람한테 친절해.“

”입에 침은 발랐냐? 웃기고 있네, 자식.“

병수가 어이없다는 듯 주먹으로 가볍게 은기를 어깨를 눌렀다. 은기는 업무상 얽힌 비즈니스라면 몰라도 과잉 친절은 절대 베풀지 않았다. 너무 차갑지도 않지만 적당선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었다. 

”이제 슬슬 일하러 가자. 일어나.“

”씻고 올게.“

일어난 은기가 진열대 옆을 스쳐 지나가다가 무심코 진열대 가장자리를 보았다. 아까 전 윤수가 지켜보던 카메라였다. 미제 카메라로 연식이 꽤 되어 보였다. 

카메라 옆에서 해맑게 웃고 있는 작은 소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은기가 샤워실로 향했다.

한편, 은기의 집에서 아무 일 없이 무사히 빠져나간 윤수는 점퍼를 연신 만지작댔다. 

‘이상하단 말이지.’

해가 떨어지고 빨간 석양이 반쯤 걸려 있는 하늘 아래를 천천히 걸었다. 윤수는 지하철에 타서도, 버스에 타서도 신기한 듯 점퍼를 손으로 잡았다. 팔 쪽을 잡아서 향을 맡아보기도 했다. 

은기가 평소에 입는 것인지 그의 몸에서 나던 살향이 은근하게 묻어났다. 독하지도 않지만 너무 풀어지지는 않게, 맡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다정한 향이었다. 

그는 버스 위에 올라탔을 때 어쩐지 창가 자리를 골라 앉았다. 버스로 달리면서 바깥 풍경 보는 취미는 없었는데 그냥 몸이 이끌리는 대로 행했다. 

끼익-!

버스가 정류장에 머물 때마다 윤수의 눈이 반사적으로 전광판으로 향했다. 이전 같으면 관심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은기가 찍은 버스 광고지를 한 번 보고 나니 자꾸 눈길이 갔다. 이번 정류장에는 그의 광고가 없었다. 왠지 아쉬웠다. 저저번 정류장에서는 봤는데. 

윤수는 은기가 덮어준 그대로 등에 걸치고만 있던 녹색 항공 점퍼를 꿰입었다. 확실히 많이 컸다. 회색 후드 모자까지 푹 눌러쓴 윤수가 흔들리며 이동하는 버스 차창에 턱을 괴었다. 품이 넉넉한 점퍼가 은기 같았다. 

그의 집에서 은기가 머리를 털어주며 들려주었던 낮고 듣기 좋은 목소리가 버스의 진동에 실려 흔들흔들 밀려 들어왔다. 

[생각해 봤는데, 이제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생각 안하기로 했어.] 

[뭐긴, 점점 그쪽한테 빠지고 있는 과정이지.]

조금씩 깔리던 붉은 유화 같은 하늘 위로 까만 밤이 내려앉고 있었다. 후드 모자 아래 드러난 윤수의 마른 옆얼굴에 미소가 피었다. 

‘이상해.’

은기가 뒤에서 안아주고 있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밤이 성큼 다가왔지만 마음이 이상하게 따뜻했다. 

***

집에 돌아온 윤수는 켜진 불과 인기척에 놀라 출처를 찾았다. 그러자 곧 거실을 걸레로 닦고 있는 쪼그라들고 작은 등이 보였다. 원룸 형태의 작은 빌라여서 거실보다는 이어진 통로 같은 개념이었다. 윤수가 여자를 조용히 불렀다. 

”언제 왔어?“

묵묵히 걸레질하던 여자가 뒤돌았다. 피윤수의 어머니인 서윤주 였다. 주름이 많이 져 고생이 한가득 저민 얼굴이었지만 고왔다. 

그녀가 코를 실룩거려 반가움을 표한 뒤 자신의 아들을 찬찬히 들여다 보았다. 

”그거 네 옷이야? 못 보던 옷이네.“

녹색 항공 점퍼를 벗으며 윤수가 얼버무렸다. 은기가 준 것이라고 아직 말할 수 없기에. 

”오다가 샀어. 추워서.“

그녀가 허리를 등으로 두들기더니 다시 걸레질을 시작했다. 

”추위도 많이 타는 애가 반팔로 돌아다닌 거야?“

”사무소에 깜박하고 두고 왔어.“

가방을 내려놓고 점퍼를 걸어두던 윤수의 손이 멈칫한 것은 그때였다. 

”진기랑은 계속 만나고 있어?“

아무렇지 않게 물어오는 진기의 안부에 목이 막혔다. 하지만 그는 티내지 않았다. 

”…곧 결혼해.“

누구와 결혼하는지도 묻지 않은 채 그녀는 애써 밝게 대꾸했다. 걸레질에 더 힘이 들어가고 유쾌해졌다. 

”잘됐네. 좋은 처자겠지?“

”그렇겠지.“

”그럼 넌 새로 만나는 사람은 있고?“

진기의 동생인 은기가 섬광처럼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시기상조라 여겨 윤수는 점퍼를 꾹 쥐고 일단 모른 척 했다. 

”없어.“

”…그래.“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대화가 오히려 껄끄러웠다. 윤수는 서둘러 화제를 바꾸었다. 

”이제 그만 와도 돼. 내가 집정리 못하는 성격도 아니고.“

”못하는 건 아니지만 나만큼 잘하지도 않잖아.“

틀린 소리는 아니지만 억지에 가까운 것을 윤수도, 그의 어머니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가만히 서서 어머니의 팔이 원룸의 먼지를 다 쓸어버릴 것처럼 놀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윤수가 담담하게 제 의견을 어머니에게 전했다. 오래전부터 생각하던 것이었다. 

”엄마도 이제 좋은 남자 만나.“

힘차던 걸레질이 완전히 멈췄다. 어깨도 경직되었다. 

”나 게이인거 절대 이야기 안할게.“

”…….“

숨 죽인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윤수는 언젠가 비통한 심정으로 썼던 일기장의 한 페이지를 어렵지 않게 떠올렸다. 

-우리 엄마는 나 때문에 ‘게이’ 라는 단어를 처음 알았다. 

그녀는 아들이 던진 제안을 온 몸을 떨며 몸서리치고는 떨쳐 냈다. 심지어 쥐고 있던 걸레도 방 구석으로 집어던졌다. 

“됐어. 이제 남자 놈들 꼴도 보기 싫어. 내가 보는 남자는 너 하나면 돼.” 

“엄마.”

아예 아들 쪽을 돌아보며 엉덩이를 깔고 바닥에 털썩 앉아버린 그녀였다. 서윤주 여사는 손을 탈탈 털며 근황을 풀어 놓았다. 

“그것보다 요즘 장사가 잘 안되서 걱정인데. 입에 풀칠이나 하고 뭐든 생각해야지. 안 그래, 아들?”

그 건에 대해선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강력한 의지에 윤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장단에 맞춰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서윤주의 눈이 아들이 입고 온 녹색 항공 점퍼로 향했다. 옷걸이에 걸린 옷 중에 유독 빛이 났다. 

“근데 진짜 옷 잘 샀다. 좀 크긴 해도 네가 산 옷 중에 제일 옷 같아 보이네.”

그럼 옷장에 널린 저 티셔츠와 겉옷들은 뭐란 말인가. 윤수가 이마를 긁으며 시무룩하게 말했다. 

“뭐야. 내 옷 고르는 센스가 그렇게 부족했어?”

“엄마는 센스가 차고 넘치는데 하나 있는 아들은 왜 이런다니? 옷장 보고 기절하는 줄 알았다. 칙칙하게 전부 회색, 검은색. 다 버려.”

“아깝게 왜 버려. 아직 몇 년은 더 입어.”

“엄마가 예쁜 걸로 새로 사줄까? 우리 아들 얼굴이 고와서 화려한 색도 잘 어울리는데, 확 질러줘?”

어느 어머니가 아들더러 곱다는 소리를 할까. 그가 마른 세수를 하곤 어머니의 맞은편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됐다니까.”

“돈도 못 버는 것도 아니면서 이제 정리할 건 정리하자.”

어머니의 말이 옳았다. 정리할 것은 정리해야 한다. 하지만 쉽게 정리할 수 없는 것들이 옷장 속의 무채색 옷들처럼 그의 속에도 늘어져 있었다. 

서윤주 여사의 잔소리 공격에 진땀을 빼고 있던 윤수는 마침 걸려온 은기의 전화에 반색했다. 

Rrrrrr

타이밍도 참 좋다. 눈치 빠른 은기다웠다. 

그가 휴대폰을 낚아채곤 냉큼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담배와 불도 하나씩 챙겼다. 아직 1절이 끝나지 않은 그의 어머니가 아쉬운 눈길로 올려보았다. 

“엄마, 잠깐 전화 좀.”

“여기서 받아. 나가서 받으려고? 내가 들으면 안되는 거니?” 

“업무용이라 옆에 사람 있으면 좀 신경쓰여.”

거짓말로 둘러댄 윤수는 어머니의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받으며 허겁지겁 은기가 준 항공 점퍼도 챙겼다. 슬리퍼를 구겨 신고 나서자마자 은기의 전화가 끊길새라 받았다. 

제법 쌀쌀한 밤공기라 점퍼를 챙긴 순발력이 고마웠다.

‘꼼짝없이 떨 뻔 했네.’

전화를 받자마자 은기가 걱정스럽게 물어왔다. 

-바빠요? 아직 집 아닌가. 늦게 받네요.

아까도 실컷 들은 목소리인데 왜 이렇게 반가운지 모르겠다 생각하며 윤수가 작게 미소지었다. 

“집인데, 어머니가 와 있어서.”

-아아. 집엔 잘 갔어요?

“잘 갔으니까 집에 있지.”

-난 촬영 들어가기 직전인데 쿨타임이라. 곧 끊어야 돼요.

오늘밤은 보름달이다. 휘영청 크게 머리 위를 고고하게 떠 있는 노란 달을 올려보며 윤수가 담배를 물었다. 하루에 하나만 피는데 이제 슬슬 끊을 수 있을 것도 같다. 

담벼락을 따라 걸으며 윤수가 연기를 뿜었다. 

“무슨 말 하려고 한거야?”

내리막길에 돌멩이 몇 개가 굴러다녔다. 그리고 까슬한 은기의 반응도 휴대폰 반대편에서 건너왔다. 

-꼭 용건 있어야 전화하나?

“그건 아니지만.”

감정 상한 건가. 조심스러워진 윤수에게 은기는 바로 활짝 핀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그는 언제나 솔직했다. 

-그냥 목소리 듣고 싶어서 한 거예요. 

“아….”

-할 말은 그것뿐? 

“그럼 뭘 더 말해야 돼?”

이번에는 은기조차 할 말을 잃었는지 짧은 침묵이 감돌았다. 침묵이 가시자 긴 한숨이 윤수의 귀에 내리꽂혔다. 

-멀었네, 멀었어. 뭐, 차차 나아지겠지.

뭔진 몰라도 잘못한 느낌에 윤수가 담배 끝을 잘근잘근 씹었다. 

“미안.”

-그 소리 한 번만 더하면 내가 어떻게 한다고 했죠?

밀폐된 식당에서 몰아치던 키스와 떨어지던 젓가락의 타음이 환영마냥 들려왔다. 흠칫한 윤수가 소리에서 벗어나려는 듯 서둘러 후드 모자를 뒤집어 썼다. 

딴청 피우며 담벼락에 새겨진 낙서들을 바라보던 윤수가 결연한 목소리에 다시 통화에 집중했다. 

-참, 아까 집에서 이 말 꼭 하려고 했는데. 잊고 있었네요. 

“무슨 말?”

-난 축의금 낼 일 같은 건 절대 안 생기게 할거니까. 

그의 몸과 마음처럼 단단하고 흔들림 없는 목소리였다. 윤수는 숨 쉬는 법도 잊고 은기의 말에 홀렸다. 

-앞으론 그딴 소리 하지도 마요.

쌀쌀하던 손끝이 따사로워 지고, 윤수가 피워 문 담배의 끝이 발갛게 달아 올랐다. 

“一….”

그는 말없이 연신 연기만 들이켰다. 하얀 담배 기둥이 빠르게 짧아진다. 

”…말이라도 고맙다.“

후에 짧은 추억의 일부로 남을지언정. 

-정말이라니까. 나 못 믿어?

은기의 주변이 시끌시끌했다. 촬영이 곧이라더니 시작할 때인 듯 했다. 통화의 끝을 예감한 윤수가 진심으로 말했다. 

”점퍼, 고마워. 잘 입고 있어.“

뜻 모를 따스함은 버스 정류장에서 저도 모르게 찾았던 은기의 광고판과 어떤 연계가 있음이 분명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어짐이 그가 준 녹색 항공 점퍼에도 걸려 있었다. 

윤수가 점퍼를 입은 팔을 꽉 쥐었다. 

”따뜻했어. 집 오는 내내.“

-…….

침묵은 이번에 꽤 길었다. 주변에서 ‘하은기!’ 하고 외쳐대는 목소리가 여러 번 들렸다. 들뜬 듯한 은기의 숨소리가 작게 울렸다. 몇 초가 지났을까. 

은기가 흥분이 어린 저음으로 운을 떼었다. 

-아, 왜 지금 밖이지. 왜 난 일해야 하지. 미치겠네. 

그는 전화를 끊을 때까지 열이 오른 목소리로 뭔가를 중얼거렸다. 누군가에 의해 일터로 끌려가 강제로 통화 종료 당할 때까지.

윤수는 끊긴 휴대폰을 오래 들고 있었다. 그러다 머쓱한 얼굴로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 넣곤 반대편에 아직 쥐고 있는 담배를 흔들어 재를 떨구어 냈다. 

”바쁜 사람한테 무슨 말 한거야.“

그의 얼굴이 붉게 일그러져 있었다. 전화를 끊을 때까지 차마 믿는다는 소리를 못했지만, 충분히 그의 마음은 전해졌을 것이다. 

윤수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하얀 얼굴에 이채가 서린다. 

”달 진짜 크다.“

마지막으로 뱉은 흐물대던 담배 연기가 충만한 보름달 위로 하얗게 뻗었다. 마치 닿을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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