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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다른 제안 --> (13/59)

<-- 또 다른 제안 --> 

윤수는 첩보 영화 속 액션 배우처럼 빠른 몸짓으로 가방을 뛰어가 잡고 허겁지겁 노트북과 필기구들을 꺼내 들었다. 이를 지켜보던 은기가 팔짱을 끼고 맞은편에 앉아 느긋하게 말했다. 

“매니저 형 그렇게 빨리 못 들어와. 천천히 해요.”

“화면은 작업용으로 틀어놔야 할 거 아냐.”

허둥지둥 노트북을 켜고 비밀번호를 치는데 손이 떨려서인지 연신 오류를 내고 있었다. 은기는 혀를 차며 머리의 남은 물기를 손으로 털어냈다. 

“비밀번호 계속 틀리잖아요. 천천히 하라니까.”

“왜 이렇게 틀리지. 아, 락인가?”

윤수가 울상으로 자판 이것저것을 건드리다가 Caps Lock키를 누르고 다시 비밀번호를 쳤다. 

“제발.”

발을 동동 구르는 윤수를 맞은편의 은기가 미소를 머금고 바라보았다. 사진으로 찍어서 저장해 두고 싶을 정도였다. 

‘저 사람은 자기가 귀여운 줄 모르겠지.’

드디어 노트북 화면이 기본 모드로 들어가고, 그는 전에 작업했던 문서를 켜두었다. 필기구도 몇 개 꺼내두고 아무것도 없는 백지에 괜히 몇 자 끄적대고 있자니 때마침 초인종이 울렸다. 

은기가 휘적휘적 걸어가며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딱 맞춰 왔네.”

조금 더 빨리 왔어도 몹시 당황하며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윤수를 볼 수 있었을 텐데. 은기는 그런 짓궂은 생각마저 들었다. 

문을 열어주자마자 은기보다 키는 작아도 덩치가 보통은 아닌 것 같은 험상궂은 남자가 불쑥 그를 밀고 들어왔다. 눈매는 부리부리하고 선도 전체적으로 굵으며 검은 반팔 셔츠에 청바지 차림이었다. 드러난 팔도 우락부락했다. 

은기가 피식 웃으며 밀쳐진 자세 그대로 인사했다. 

“뭐 하러 왔어?”

“시끄러. 거기서 딱 대기하고 있어라.”

신고 온 운동화도 거의 벗어 던지듯이 한 남자가 검은 양말로 쿵쾅대며 집 안에 들어섰다. 은기가 그를 따라 들어오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왜 이렇게 난폭해. 무슨 오해를 한거야?”

”너 이 자식, 곧 야간 촬영인 거 알면서 그 사이 집에 기어 들어와선…! 어?“

그가 거실에서 조용히 노트북 화면을 쳐다보고 있는 윤수를 발견하곤 멈칫했다. 고요한 분위기의 남자가 집중한 눈으로 화면을 들여다 보고 있다. 뭔가 착오가 있음이 분명하다. 

‘뭐야, 남자잖아?’

매니저는 은기네 타워팰리스 경비에게 은기가 혹시 사람을 데리고 집에 오면 꼭 연락 달라고 해놓은 상태였다. 인상착의도 알려달라고 했는데 ‘성별’을 말하는 것을 깜박한 모양이었다. 

-얼굴 하얗고 작고 귀여운 친구랑 들어가던데요?

안그래도 의심하던 차에 인상착의만 듣고 냅다 이 곳으로 쳐들어 온 것이었다. 매니저가 떨떠름하게 윤수를 살폈다. 짧은 반팔로 나온 하얀 팔이 하염없이 말랐지만 가슴도 평평하고 여자처럼 생긴 것도 전혀 아니었다. 

‘얼굴 하얗고 작고 귀여운 친구…는 맞네.’

열중하고 있는 듯 마우스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클릭 소리만 내던 그가 매니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순하고 앳되어 보이는 까만 눈이 어색하게 깜박이다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이게 아닌데. 매니저의 당혹스러운 눈길이 윤수의 몸을 훑었다. 어딜 봐도 ‘남자’다. 거기다 저 성실해 보이는 태도며 노트북 화면에 가득 찬 것은 영어 문서와 기획서였다. 

”안녕하세요. 혹시 누구신지…? 저는 은기 매니저 최병수입니다.“

당황해하는 매니저를 뒤에서 보며 은기가 입을 틀어막고 간신히 웃음을 참아냈다. 까딱하면 터질 뻔했다. 

윤수가 그런 은기를 흘끗 노려보더니 고개를 가볍게 숙이곤 점잖게 말했다. 

”저는 포토에세이 번역건을 맡은 피윤수라고 합니다.“

”어…그러시군요. 근데 어쩌다 은기 집에서 이렇게?“

여기서부터는 짜놓은 시나리오가 없었다. 윤수가 눈을 열심히 굴리며 묘안을 짜내려 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고 병수의 의심스러움만 잔뜩 키웠다. 

”그게…. 집에서 작업을….“

”네? 어쩌다가? 왜요?“

속사포같은 물음이 다다다 떨어졌다. 무섭게 생긴 사람이 위압적으로 묻는 질문에는 어서 대답하라는 압박이 실려 있었다. 몰아치는 사람에게 약한 윤수였기에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은기만을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도움을 청하는 가련한 눈빛에 은기는 더 버티려던 마음을 고쳐먹고 순순히 그를 도와주었다. 은기가 마치 준비해놓은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가상의 시나리오를 읊었다. 

”같이 밥먹으러 가다가 지나가던 차에 둘 다 흙탕물이 다 튀었거든. 집에 와서 옷 좀 갈아입자고 불렀어.“

윤수가 그의 순발력에 진심으로 감탄한 찰나였다. 집까지 와서 둘 다 씻고 일하고 있는 것에 대한 훌륭한 핑계였다. 

‘대단해. 그 짧은 순간에.’

은기는 초롱초롱한 윤수의 눈빛에 왠지 어깨가 으쓱해졌다. 이런 식으로 임기응변에도 강한 편이라 매니저가 늘 그를 의심하고 채근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은기는 싱글싱글 웃으며 매니저의 불신을 끝까지 녹였다. 

”고맙게도 여기까지 따라와 주셔서 대접 겸 일하고 있던 참이었어. 근데 왜 그렇게 흥분했어, 형?“

무서운 눈으로 은기를 보고 있던 매니저, 최병수는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리 봐도 자신이 오해한 상황이 맞았다. 게다가 많이 놀란 것처럼 보이는 번역사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그런 거였냐. 난 또…. 죄송합니다, 제가 성미가 급해서 오해했습니다.“

대체 무슨 오해를 했길래 집으로 곧장 날아와 이 난장을 벌인단 말인가. 윤수가 멍하게 그의 말을 복기했다. 

”무슨 오해를…?“

”은기 요 녀석이 잔머리만 발달해선 중요한 스케줄 앞두고 뻘짓 잘 하거든요. 혹시 여자랑 집에서 노닥거리고 있나 했습니다.“ 

뜨끔했지만 윤수는 얼른 노트북으로 고개를 돌려 성공적으로 제 표정을 감추었다. 여자는 아니지만 집에서 노닥거리며 은기와 여러 가지(?)를 한 것은 맞다. 은기와 장소까지 옮겨가며 했던 격렬한 섹스와 부대낌이 윤수의 귀까지 붉게 물들였다. 

그 광경을 보고도 못 본 척, 은기가 태연하게 자신의 매니저를 타박 주었다. 

”형은 늘 상상이 지나쳐. 적당히 끊어, 좀.“

그리고선 그는 윤수의 맞은 편으로 다시 와서 슬쩍 앉았다. 아직 제자리에 서 있는 매니저와 은기를 번갈아 보며 윤수가 멋쩍게 침음성을 내었다. 

”아…. 그러셨군요.“

우연의 일치인지 두 사람이 빤히 매니저를 올려보았다. 두 사람 분의 눈빛을 받고는 이번에는 곰 같이 덩치 큰 남자가 쩔쩔매었다. 

“어이쿠, 죄송합니다. 일하고 계신 차에 제가 방해했네.“

윤수는 적당히 눈치를 보더니 주변 필기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빠져주면 제일 좋은 그림이다. 

”아닙니다. 이제 끝났어요. 어떻게 할지 이야기도 대충 다 되었고,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하지만 매니저가 다가오더니 덮으려던 노트북을 꽉 잡았다. 얼굴선만큼 두텁고 진한 눈썹이 애매하게 휘어 있었다. 

”아뇨아뇨. 편하게 있다 가시죠. 주스라도 한 잔?“

넉살 좋은 매니저의 태도 전환에 이제 어이없어진 것은 은기 쪽이었다. 그가 코웃음을 치며 팔짱을 꼈다. 

”여기가 형 집이야? 자기 집처럼 이야기 하네.“

병수가 험악한 눈에 부드러운 빛을 가득 띠고 윤수의 덮으려던 노트북을 다시 올려 두었다. 

“너랑 같이 있다가 재수 옴 붙고 집까지 와서 일 해주셨는데 그럼, 대우해 드려야지.”

“그 재수 옴 붙은 일, 나도 같이 당했다고.”

옆에서 은기가 구시렁댔지만 그는 싹 무시하고 윤수만을 보며 이야기했다. 

“어쨌든 최악의 상황은 아니라 다행입니다. 이 인간이 집에 사람을 데려오면 보통 애인인지라. 저도 잘 못 오게 하거든요.”

너스레를 떠는 병수의 말에 윤수가 잠깐 동작을 멈췄다. 짧은 생각 끝에 그가 조용히 말했다.

“은기 씨한테 애인이 생기면…최악의 상황인 겁니까?”

허를 찔린 질문에 병수는 순간 당황했다. 얌전하고 조용하게 생겨선 예측할 수 없는 말을 던진다. 

‘묘한 사람이네.’

무슨 의도로 물은 건지 알 수 없어서 은기도 맞은편에서 물끄러미 윤수의 얼굴을 살폈다. 병수가 영업적인 미소를 지으며 은기의 옆자리에 앉았다. 

“말이 그렇지 최악의 상황까진 아니고요. 그냥 중요한 일정 앞두고 심기일전하자, 뭐 그런 셈입니다. 몸도 마음도 정갈히 해야 일도 잘되고 더 좋은 일도 불러오니까요.”

말을 하는 내내 매니저 최병수의 불꽃 같은 눈길이 은기의 잘생긴 옆얼굴에 꽂혀 있었다. 알아먹었냐는 명백한 의도가 담긴 눈빛에도 은기는 꼼짝 않고 마치 자신의 일이 아닌 것처럼 흘려 들었다. 윤수만이 병수의 말을 진지하게 들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죠.”

말이 잘 통하는 사람 같아 병수는 그가 고맙기까지 했다. 그러다 책상에 아무것도 없이 휑한 것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은기야, 음료수 좀 가져와 봐라. 이게 뭐냐, 목 마르시게. 한 잔도 안 가져왔어?”

기가 막힌 듯 자신의 매니저를 보던 은기가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도 대표인 줄 안다니까.”

병수는 규모가 작은 엔터테인먼트 대표였다가 쫄딱 망한 뒤 매니저로 전전하던 것이 은기와 만난 뒤부터 구겨졌던 신세가 조금 펴졌다. 은기가 사람 안 따지고 잘 대해주는 것도 한몫했고 손발이 잘 맞아 지금까지 함께 해오고 있었다.

투덜대도 착실하게 주방으로 가는 은기의 길쭉한 뒷모습에 대고 병수가 소리 쳤다. 

“나 다시 소속사 세울 거거든? 너 메인 주주 시켜준다고 했잖아!”

은기는 귀찮음이 역력한 목소리로 받아쳤다. 

“어련하시겠어.”

둘만 남으니 더 어색해져서 윤수는 괜히 은기의 진열장 쪽을 보았다. 제대로 끝까지 못 본 것도 있어서 진열장의 제일 끝부터 반대쪽까지 눈으로 훑었다. 그러자 진열장 제일 마지막 부분에 못 보던 카메라가 보였다.

‘저건 뭐지?’

반들반들하게 윤이 나는 것으로 보아 관리도 잘 해둔 카메라였다. 옆에는 누군가의 사진도 작은 액자에 담겨 놓여 있었다. 바가지 머리의 작고 귀엽게 생긴 남자아이가 브이를 그리고 해맑게 웃고 있었다. 

더 자세히 보려던 시도는 매니저의 물음으로 자연스럽게 끊겼다. 아직 주방에서 달각대는 소리가 여전히 들려오고 있었다. 

“그래서, 일은 좀 괜찮은 것 같습니까?”

맥락 없이 튀는 질문에 윤수가 머리를 가다듬고 되물었다.

“번역이요?”

“아, 네. 번역 일요.” 

맡기기가 불안했던 건가. 윤수는 자신이 믿음직해 보이지 않는 건가 반성하며 자세를 똑바로 하고 일부러 목소리를 더 굵게 내었다. 

“기간은 많이 길어서 전혀 문제 될 것도 없고, 괜찮을 것 같습니다. 작업량도 많지 않고.”

단단히 굳어 버린 윤수의 태도를 보고 그가 손사래를 쳤다. 

“못 믿어서 그런 건 아니고 더 맡길 수 있나 해서 물어본 겁니다. 오해 마세요.”

“뭘 더 맡기시게요?”

그 전에 아직 완성물을 보지도 않았는데 뭘 믿고 더 맡기겠다는 건지 이해가 안 갔다. 어리둥절한 윤수의 반응에 병수는 파란 노트북 배경을 바라보며 술술 썰을 풀어 놓았다. 

“포토 에세이 말고 더 급한 게 사실 있었거든요. 혹시 은기가 하는 예능 중에 ‘Living Alone’ 이라고 있는 거 아시려나.”

윤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나오는 예능은 거의 봤는데, 가장 인기 있는 예능은 연예인들이 혼자 사는 모습을 조명해주는 프로그램이었다.

“나중에 방송용으로 은기가 여태 무대에 섰던 사진들 모아서 상업 책자로 묶어서 내는 걸 찍히게 할 생각입니다. 언론에 노출되는 편이 홍보 효과도 있고 해서. 영어판으로 해두려고요.”

윤수가 생각 끝에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내놓았다. 

”기본적으로 포토 에세이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비슷하긴 한데, 포토 에세이는 팬들에게만 한정 수량으로 할거지만, 방금 말씀드린 건 해외 업체에도 프폴 형태로도 뿌릴 예정이라서요. 보다 전문적인 번역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만.“

해외 에이전시 측과도 연계해서 일 한 적이 있지만 더 큰 시장을 노리는 듯 했다. 윤수가 노트북 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푸른 바다가 넘실대고 배 한 대가 힘차게 앞으로 나아간다. 

그럼 은기는 또 해외로 나간단 말인가. 

그때 윤수와 매니저 앞으로 찰랑대는 오렌지 주스가 쾅 내리꽂혔다. 깜짝 놀란 두 사람 사이로 은기가 거칠게 파고들어 앉아버린다. 

”형은 나 없는 사이 판을 왜 이렇게 키워놔. 아직 이야기 중인 사안이었잖아. 급한 것도 아니고.“

덩치에 안 맞게 움찔했던 병수가 냉정한 은기의 얼굴을 흘끔댔다. 

”안 급하다니? 이게 제일 급해. 너 더 나이 들기 전에 경험 많이 쌓고 해야지.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란 말도 있는데.“

”물 아직 발목에도 안 찼는데 노 저어봐야 무슨 소용 있어? 서두르지마. 됐고, 이 건은 나중에 다 정리하고 이야기해.“

은기가 너무 칼같이 끊어버려서 매니저도 더는 말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대다 음료수만 연신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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