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편 은기의 집에서 -->
몇 시간 전만 해도 점심을 함께 먹고 있었다. 은기가 집이 가까우니 가서 고양이를 보여 주겠다는 소리를 했고 윤수는 망설였다.
그도 동물을 좋아하지만 키우는 건 엄두가 안나서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만족하곤 했다. 그런 그에게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는 솔깃한 제안이었다.
’그냥 갈까‘에 온 신경이 기울다가도 묘한 은기의 태도나 눈을 보니 또 망설임이 앞선다. 그의 의도는 명백했다. 고양이 자랑만이 진짜 목적이 아닐 것이다.
아찔하게 넘어갈 뻔한 정신을 겨우 수습하고 윤수가 마지막 남은 이성을 은기에게 내세웠다.
[아무리 자율 퇴근이 가능해도 그건 좀 그래.]
[형식적으로 거슬리는 거 없으면 하루쯤은 괜찮잖아요.]
그 이후로 교묘한 설득이 이어졌다. 흔들리던 윤수의 마음은 질끈 기울었다.
’어차피 일은 노트북으로 해도 되고 당장 급한 일은 없으니까.‘
윤수는 스스로의 양심에게 용서와 변명을 구했다.
은기의 말대로 정말 집이 가까워서 차로 20분 정도 가니 금방이었다. 연예인 빌딩으로 유명한 타워팰리스였고, 프런트를 지키고 있는 경비가 은기에게 인사를 했다.
윤수는 방문인 자격으로 들어가면서 집 구경에만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더불어 고양이 두 마리도 드디어 만났다.
[녹색 눈인 애는 일리야, 노란빛 도는 애는 투투예요.]
그가 어색하게 ’안녕‘을 읊조리며 고양이를 만져보려 했으나 경계심이 심한지 두 마리 다 쪼르르 도망가 버렸다. 고양이들은 윤수의 근처로 얼씬도 하지 않고 방 안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시무룩해 보이는 얼굴에 은기가 올라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았다. 쓰고 왔던 검은 캡모자를 벗어 신발장 옆의 걸이대에 걸어두며 그는 머리를 자연스럽게 손으로 흩뜨렸다.
[원래 낯선 사람 싫어해서 엄청 경계해요. 시간 지나면 먼저 다가올테니 편하게 다녀요.]
은기는 그가 귀여워서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고양이한테 버림받았다고 세상 잃은 표정이라니. 그의 속도 모르고 윤수가 고양이들이 도망친 쪽을 아쉽게 흘끔댔다.
[응.]
그 이후로는 집 구경을 했다. 혼자 사는 데 이렇게 넓은 집이 필요한가? 가구가 적고, 인테리어가 과하지 않아 집이 더 넓어 보이는 효과도 있었다. 연신 감탄하는 윤수를 보며 은기가 뿌듯한 얼굴로 집 안 곳곳을 안내해주었다.
[열심히 일한 보람이 있네요.]
[네가 벌어서 산 거야?]
[당연하죠.]
곳곳에 진열대가 있었고, 앨범들이 많았다. 음악 CD나 영화 DVD, 각종 패션쇼 관련 DVD가 굉장히 많았고, 그래서인지 거실에 음향 시설이나 홈씨어터가 잘 되어 있었다. 어떤 사진만 가득한 진열장에는 그가 참여했던 패션쇼나 가족 사진도 있었다.
’정말 다른 사람 같다니까.‘
패션쇼 무대에 선 하은기는 진한 메이크업 때문인지 지금과 또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팔색조였다.
그는 국제 무대에도 여러 번 선 것 같았다. 외국 모델들이 많이 보여 윤수가 묻자 그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에이전시 통해서 미국에서 1년 정도 일하고 왔어요.]
[그렇구나….]
이번엔 진열된 가족 사진을 찬찬히 보자 진기도 보였다. 순간 윤수의 눈이 가늘어졌지만 지켜보던 은기는 모른 척 해주었다.
가족 사진 속의 친척들이나 은기의 가족은 다들 미남, 미녀들이 즐비했다. 아버지를 비롯, 어머니로 보이는 사람도 이목구비가 토종 한국인이 아닌 듯 보여서 윤수가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근데 너 혼혈이야?]
이제야 자신이 좀 궁금한가 보다. 은기가 피식 웃었다.
[위쪽으로 독일인, 프랑스인이 각각 있죠. 고조부가 독일인, 외조모가 프랑스인. 아무래도 형은 독일 쪽이 들어간 것 같고 나는 프랑스인가? 되는대로 생각하고 있어요.]
확실히 선이 굵고 규격화된 딱딱한 느낌이 있는 진기에 비해 은기는 큰 키에 비해 색소가 옅은 눈, 머리칼 같은 것에서 느껴지는 자유분방함이 있었다.
윤수가 또 다른 사진을 발견하고 흥미롭게 눈을 빛냈다.
[이건 몇 살 때야?]
[이거요? 6살 땐가.]
아이들을 등지고 삽 하나를 든 채 흙투성이가 되어 장난스럽게 브이를 그리며 웃고 있는 어린 하은기도 있었다. 직모와 가까워 보이는 지금과 달리 반곱슬이었다.
[원래 곱슬이었어?]
은기가 제 머리 몇 가닥을 집어 들었다. 당겨서 제 머리를 보면서 그는 고개를 까딱였다.
[맞아요. 지금은 머리 해서 이런 거고.]
은기의 어린 시절 사진들을 보며 윤수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어릴 때부터 이목구비가 남달랐다. 반듯하게 잰 듯한 콧날이나 또렷하고 큰 눈, 흩날리는 결 좋은 진갈색 머리, 긴 팔다리, 또래보다 큰 키가 혈통 좋은 종마를 연상케 했다. 윤수의 눈이 또 옆으로 옮아갔다.
[다들 좋아 보이네.]
옆에 놓인 가족 사진을 보며 윤수가 중얼거렸다. 화목해 보였다. 그 무뚝뚝한 진기마저 가족 속에서는 조금은 평안한 것 같다.
은기는 팔짱을 끼고 옆에 서서 사진 구경을 하는 윤수를 가만히 살폈다. 까만 눈썹 아래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모를 흑빛의 눈동자가 카메라 셔터처럼 열리다 닫혔다.
사진 속에 보이는 진기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던 윤수가 담담하게 말했다.
[진기랑 약속을 한 게 있었어.]
갑자기 튀어나온 진기의 이름에 은기가 어깨에 긴장을 불어넣었다. 흐뭇함이 떠올라 있던 얼굴에도 미소가 사라진다.
[무슨 약속이요?]
윤수가 바스러질 것 같은 까만 눈길을 진기의 사진에 보냈다.
[결혼하면 가서 축의금 넣어주겠다고. 내 이름 적어서.]
그의 말에는 시절 지난 명화를 감상하듯 지나간 것에 대한 여운이 엿보였다.
결혼 날짜를 물어본 이유가 이거였나. 은기가 아연해졌다. 대체 형은 그와 무슨 관계였던가. 은기는 팔짱을 풀고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런 얼굴 할 거면 안 지켜도 돼요.]
은기가 거칠게 그의 팔을 잡았다. 팔목까지 오소소 솟은 소름과 냉기가 올라와 있었다. 이렇게 차가워진 몸을 하고 진기의 결혼식장까지 갈 생각이었을까. 둘 다 무슨 생각이었던건지 도무지 감도 오지 않았다. 정상적인 관계는 아닌 것 같다.
윤수는 뜨겁게 잡힌 팔목에 당황하며 그를 올려보았다.
[대체 그런 약속은 왜 한거고, 왜 지킨다고 하는 거지?]
[…….]
[아님 내가 대신 넣어줄게.]
그가 이를 악물었다.
[봉투에 이름도 제대로 적어 줄테니까, 안와도 돼. 됐어요?]
멍하게 그를 보던 윤수가 이내 작게 웃었다. 은기가 이리 정색해주자 정말 아무렇지 않은 일 같았다. 신기했다. 처음 진기의 결혼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마음 속에 웅크리고 있던 망설임이 한 번에 다림질 된다.
’이제 상관없으려나.’
윤수는 넓게 깔린 유리 창가로 들어오는 밝은 햇살을 보았다. 마음 한 구석이 은근하고 따숩게 데워진다. 청승 떨던 것이 부끄럽기도 하고 우스웠다. 윤수가 작게 웃었다.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괜찮다‘는 말이 정말 괜찮아질 것 같다.
[그렇게 해도 됐구나.]
허탈한 윤수의 웃음이 물결처럼 계속 번져나간다. 은기가 잡은 팔에 그의 뜨거운 온기가 붉은 염색물마냥 스며든다. 오랜만에 느끼는 기분 좋은 감각이었다.
얼마 뒤, 그는 조금은 털어낸 듯한 편안한 얼굴로 돌아왔다. 우울해하며 땅 팔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괜찮아져서 은기는 안심했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귀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단 말야? 형도 무슨 생각이었던 건지….]
은기의 못마땅한 혼잣말을 들은 윤수가 가족 사진들을 눈으로 훑었다. 솔직한 뒷이야기가 그의 입에서 나직하게 흘러나왔다.
[계약 연애 비슷한 거였어. 서로 사생활 터치하지 않고 그냥 만나보자고 했고. 진기는 기간 동안 훌륭하게 해냈는데 나만 역할극에 너무 빠졌던 거지. 헤어나오질 못 했어.]
[계약…연애?]
은기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진기는 애인이 자주 바뀌긴 해도, 한 번도 그런 식으로 관계를 시작한 적은 없었다. 아니면 자신이 형을 너무 몰랐던 것일까.
’솔직히 남자를 사귄 것도 놀랐는데. 계약 연애까지?‘
윤수는 놀란 반응을 힐끗 쳐다보고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너도 나중에 결혼하면 축의금 정도는 내줄 용의 있어.]
[…….]
은기는 할 말을 잃고 윤수를 응시했다. 이 사람은 자신을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지금껏 그에게 닿으려고 들였던 시간과 수고를 무엇이라 단정짓는 것일까.
그가 잡은 팔을 힘주어 들어올렸다. 팽팽하게 늘어난 활시위처럼 윤수의 팔과 어깨에 긴장이 흘렀다.
은기가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 쪽, 원래 그래요?]
윤수는 팔을 떼내려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끙끙대던 그를 보면서도 은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사귀는 도중에 끝 이야기하는 거. 사람 김 빠지게.]
잡힌 팔은 포기하고 윤수가 담담하게 말했다. 지나치게 차분했다.
[어쩔 수 없잖아. 결혼처럼 사회적인 약속으로 묶인 사이도 아니고, 보통 멀리 못 가.]
강제성을 띈 사이도 아닌데 멀리 갈 사람 찾는 것도 정말 어려운 일이다. 윤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생각 뿐만 아니라 그가 살고 있는 현실이 그러했다.
은기는 잡은 팔을 잡아당겨 윤수의 손등을 제 이마에 대고 한숨을 내쉬었다.
[엄청 현실적인 겁쟁이네.]
정확한 판정에 윤수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열이 올라서인지 은기의 이마도 뜨거웠다. 그가 윤수의 손등에 이마를 비비며 중얼거렸다.
[어린왕자에 나오는 머플러 두른 작은 애처럼 생겨선.]
장미꽃을 키우던 그 작은 행성의 주인 말인가. 어린왕자의 주인공과 삽화를 떠올린 윤수가 고개를 내저었다.
[하나도 안 닮았어.]
은기가 그의 손을 내려주며 말했다.
[닮았어요.]
당신은 외딴 행성에 혼자 사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말하잖아.
’이 사람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은기는 그의 팔에서 손을 미끄러져 내려 다시 차가워진 윤수의 손을 깍지껴 잡았다. 그리고 빈틈없이 그의 냉한 손끝을 감쌌다.
팔을 잡아도 미동 없던 윤수가 흠칫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본다. 그 투명한 눈 속을 들여다 보고 있자 은기는 확신이 들었다.
’역시…..‘
이유는 몰라도 이제 알았다. 이 남자는 정말 헤어져도 제 말대로 결혼식에 올 사람이라는 것을.
쓰게 웃는 얼굴로 식장에 찾아와 평소처럼 덤덤하게 제 이름을 봉투 위에 쓰고, 은기의 식구들에게 돈봉투를 내밀 것이다. 그런 뒤 떠들썩하고 행복이 남실대는 식을 지켜본 다음, 조용히 그의 인생에서 사라질 것이다. 진기를 기다리던 그 무색무취의 눈빛 그대로.
이렇게 차가온 몸을 하고서.
순간 식장 입구에서 하얗게 질린 얼굴로 등을 보인 채 떠나갈 피윤수가 아른댔다. 은기는 그 모습에 왜 화가 나는 지 알 수 없었다.
은기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진열대 옆 벽에 몰아붙였다.
쿵!
큰 소리가 나자 진열대가 약간 흔들렸고, 고양이들이 놀라 쪼르르 달려왔다. 제 주인이 낯선 사람에게 난폭한 짓을 하려는 것으로 착각했는지 주변을 맴돌았다.
윤수가 어깨를 벽에 찧어 신음을 흘렸다. 여전히 한 손은 깍지를 낀 채로 은기에게 잡혀 벽에 못처럼 박혔다. 머리 바로 옆에는 은기의 단단하고 긴 팔이 도망가지 못하게 진로를 막고 있다. 윤수가 눈을 어디 둘 줄 몰라 방황하며 입을 뻐끔댔다.
[뭐, 뭘 하려고.]
은기는 허둥대는 윤수를 잡아먹을 듯 바라보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끝이 무섭고 겁나면 이렇게 해요.]
그가 윤수의 얼굴 가까이 제 키를 맞추어 내렸다. 그리고 모른 척 면죄부를 내밀었다.
[잘 되면 피윤수, 당신 공인 거고, 안 되면 못난 하은기 탓이라고. 편하게 생각해. 뭐가 어려워.]
형인 진기와 했던 연애를 ’역할극‘이라고 했던가. 은기의 입가에 비스듬한 미소가 걸린다.
[내가 당신 인생에서 기꺼이 악역 해주겠다잖아.]
그가 고개 숙인 윤수의 드러난 하얀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걸로도 모자라?]
한꺼번에 흘러 들어오는 은기의 것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가 빛날 때마다 자신은 더 초라해진다. 은기는 두려움마저 모조리 자신이 가져가겠다며 선포하고 있었다. 윤수가 마른침을 삼켰다.
’난 네가 무서워.‘
윤수는 지금의 맥박 치는 심장 소리가 무언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 아니기를 바랐다.
좋았던 시간은 항상 너무 빨리 지나가 버린다.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벌이라도 주듯 그 반짝이는 시간은 화려한 행복을 순식간에 거둬가버린다. 이를 막을 수도 없기에 그는 늘 무력했다. 그래서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바짝바짝 식은땀이 난다.
’네가 알수록 정말 괜찮은 사람이라서, 그게 겁나.‘
밝게 부딪쳐오는 빛이 그의 비겁함과 아둔함까지 송두리째 드러내 버린다. 빛은 언제나 좋은 것이어야 하는 건데, 그에게는 가끔 독이었다. 적당히 가려주고, 적당히 숨겨주는 그늘이 좋았다. 진기는 그런 그늘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은기는…. 읏…!‘
은기에 대한 상념이 이어지기 전에 쾌감으로 끊겼다. 윤수는 목덜미에 여러 번 내려앉는 입술의 부드러움에 몸을 비틀었다. 혀가 닿았을 때는 움찔했다. 은기의 길게 뻗은 다리가 가랑이 사이로 들어오고, 중심부를 은근히 누른다.
뭉근하게 퍼지는 쾌감 사이로 윤수가 숨을 헐떡였다. 순식간에 야릇하고 비릿한 공기가 그들을 주변으로 빠르게 번져나갔다.
잡힌 한 손에서는 이제 달아오른 열기로 땀이 촉촉하게 배어나왔고 등에서도 흥분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은기는 표정이 사라진 얼굴로 벽을 짚었던 손을 들어 자꾸만 떨어지는 윤수의 고개를 잡아 올렸다.
키차이 때문에 자연스레 턱을 잡고 밀어 올린 은기가 얇고 작은 윤수의 입술 안으로 혀를 밀어넣었다. 까끌대는 혀의 돌기까지 소름끼치도록 잘 느껴졌다. 긴 속눈썹에 눈 아래가 찔려 윤수는 바르르 떨었다.
은기의 하체가 더 바짝 붙고 무릎으로 부풀기 시작하는 성기를 공략했다. 본능처럼 그의 손길이 가슴으로 옮아 간다. 회색 반팔 티셔츠 위로 솟아난 뾰족한 곳을 길고 단단한 손가락으로 훑었다.
가슴 돌기가 자극되자 더 이상 못 참고 윤수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으….]
제 소리에 놀라 그는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턱을 쥐고 있던 손이 떨어져 나가고, 정신 차린 듯한 은기의 옅은 눈동자가 보였다. 반성하는 듯 후회로 번들댔다.
[…너무 몰아붙였네. 미안해요.]
그가 윤수를 구속에서 풀어주었다. 어찌나 뜨겁게 압박했던지 윤수의 위아래가 젖어있었다.
[괜찮아.]
그는 애써 후들거리는 다리에 중심을 잡았다. 점심 때부터 계속 긴장의 연속으로 땀을 흘렸더니 온 몸이 끈적거린다. 지켜보던 은기가 제안했다.
[씻을래요?]
[지금?]
고개를 끄덕인 은기가 눈을 접어 웃었다.
[나도 같이.]
그 뒤로 기억이 뚝뚝 끊겼다. 늘 그렇듯 은기와 함께 하면 정신이 증발되었다. 결국 샤워실에서도 젖은 몸으로 욕실 한 구석에 구겨져서 섹스를 했다.
농담인 줄 알았는데 은기는 정말 옷을 벗고 함께 들어왔다. 비눗물을 낼 때까지만 해도 끝까지 가지는 않을 줄 알았다. 윤수는 물줄기를 반으로 나눠 등을 돌려서 비눗물을 묻혔다. 아래로 보이는 타일 바닥이 금빛으로 빛났다.
그는 흘끔대며 은기의 나신을 훔쳐 보았다. 마르고 빈약한 자신의 몸에 비해 은기는 지방 하나 없이 날렵하게 단련된 근육질의 몸이었다. 먹는 것을 그렇게 조절하더니, 깎아서 만든 것처럼 움푹 들어갈 곳은 들어가고 나올 곳은 착실하게 나와 있다. 구체적으로 보이는 몸이 저런데도 전체적으로 마르고 슬림해 보인다는 것이 신기했다.
시선은 또 한참 위로 올라가야 한다. 저 몸에 얼굴은 하얗고 기품이 넘치는 서구형 이목구비다. 얼굴도 작아서 키와 매치하면 9등신은 되려나.
은기가 샤워기의 물을 양 손으로 대야처럼 받아 얼굴에 끼얹었다. 목 뒤까지 꼼꼼하게 씻던 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 몸이 그렇게 좋아요?]
아까부터 윤수의 시선을 알고 있었던 그였다. 윤수는 보지 않은 척 돌아가던 눈길을 제자리로 돌렸다.
[내건 빈약해서.]
은기는 눈썹을 휙 찌푸리며 반박했다.
[전혀? 안기 딱 좋은데요. 살집 있는 거 좋아하긴 하지만 당신은 마른 게 더 잘 어울려.]
[말이라도 고맙다.]
[왜 이렇게 내 말을 잘 안 믿지.]
못마땅한 목소리 뒤에 손이 불쑥 윤수의 허리로 침범했다. 뜨거운 물줄기가 시냇물처럼 졸졸 윤수의 어깨에서 곧은 척추로 내렸다. 움찔 떠는 윤수를 지켜보던 은기가 살살 달래듯 엉덩이까지 손을 내렸다. 그리고 손가락을 구멍으로 밀어넣었다.
[!]
갑자기 들어온 이물질에 그의 구멍이 벌름대며 경련을 일으켰다. 은기가 그의 등에 대고 중얼거렸다.
[정말이라니까.]
[으읏...거짓말.]
[믿어줄 때까지 해야 하나. 기다려요.]
구멍에 들어온 은기의 손가락은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 때문에 수월하게 늘어났다. 커질만큼 커져있던 은기의 성기도 큰 장벽없이 구멍에 천천히 삽입되었다. 윤수가 입술을 짓씹으며 차가운 욕실벽에 이마를 대었다.
다치지 않도록 은기가 손을 내밀어 그의 머리칼을 어루만진다. 그는 한 번에 제 몸을 밀어넣었다. 발가락을 움찔움찔 떨면서 윤수는 벽에 뺨을 대고 숨만 쉬었다. 습기 찬 공기가 코와 입속으로 말려든다.
은기의 젖은 갈색 머리칼에서 흥분이 땀처럼 흘러내렸다. 벽을 짚은 윤수의 손 위를 은기의 큰 손이 덮는다. 은기가 몰려오는 열기를 밀어내며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움직일게요.]
뜨거운 증기가 물줄기 위로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윤수는 물길 때문에 매끄러운 욕실벽을 미친 듯이 손으로 부여 잡았다. 그럼에도 샤워기에서 따로 떨어져 나오는 물방울에 자꾸만 손이 미끌어졌다.
좁은 구멍을 활짝 열고 은기의 것이 거칠게 드나들었다. 윤수는 결국 물었던 입술을 떼고 뒤를 찌르는 감각에 온 몸을 맡겼다.
[윽! 으으…, 흑….]
집 크기 만큼이나 너른 욕실에서 윤수의 신음이 왕왕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