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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수가 헛기침을 하며 묘한 분위기를 일 이야기로 되돌렸다.
”근데 번역 기한은 정말 그렇게 오래 걸려도 상관없는 거야? 6개월이면 너무 길지 않아?“
”어차피 지금 바로 낼 거 아니고 여유 생길 때 낼거예요. 블로그나 SNS에 올렸던 거 정리해서 내는 거라 시간 오래 걸릴 것도 아니라서.“
”그럼 나중에 진행해도 상관없잖아.“
“나중에 진행하면 못 보잖아요. 이렇게라도 밀어붙여야 뭐든 얼굴도 보고 밥도 먹고 하지.”
기왕이면 다른 것도 먹고 싶지만. 은기는 애써 놀란 것 같은 윤수에게서 눈을 돌렸다. 저 작은 머리통으로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작업 분량 늘릴까.‘
속으로 번역할 글자를 더 많이 밀어 넣었어야 했는데 후회하는 은기였다. 작업이 길어질수록 윤수와의 접점도 커진다.
산들대는 스킨십이나 키스만 했더니 감질맛이 나서 은기는 약간 후회했다. 괜한 짓만 했다. 자신은 아래가 후끈거려서 죽을 지경인데, 저 사람은 그런 격한 키스 뒤에 바로 업무 분위기로 돌아갈 수 있다니.
’정말 나한테 관심이 없는 건가.‘
반응을 보면 싫은 것도 아닌데. 계속 묘한 거리가 보였다. 윤수가 했던 말이 그의 머릿속을 좀처럼 떠나질 않았다.
[진기랑 닮아서 끌렸던 건 사실이니까.]
자신 있게 엄포를 놓았고 잘 해내고 있지만 윤수는 지금 어디까지 선을 허락하고 있는 것일까. 당기면 당기는대로 오긴 하는데, 그 선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은기는 끊임없이 그의 표정과 반응, 하는 말들을 꼼꼼하게 주워 듣고 지켜보았다.
그 사이 주문했던 음식들이 차례차례 식탁에 놓였다.
어지러운 그의 속도 모르고 윤수는 각양각색의 초밥과 튀김, 우동이 나오는 것을 보고는 눈을 빛내고 있었다. 단촐해 보여도 하나하나 입에 살살 녹는 것들만 나와서 이 일대에서 유명한 맛집이었다.
젓가락을 들고 안 먹느냐는 눈빛을 보내는 윤수를 보자 은기는 복잡한 생각이고 뭐고 한 번에 증발되었다. 저 강아지같은 눈매가 어서 함께 하자는 눈빛을 하고 있지 않은가.
’졌다.‘
쏟아 부은 모든 수고와 노고가 물거품이 된 기분이었지만 은기는 오늘은 이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그런데 설레는 것처럼 보이던 윤수의 얼굴에 저녁 노을처럼 서서히 어둠이 짙게 깔리더니 그가 툭 내뱉었다.
“사귄다는 거, 정말이었어?”
연어 초밥 하나를 욱여넣던 은기는 입 안에서 헤엄치는 연어의 향취를 씹어 삼키곤 천천히, 신중하게 말했다.
“그럼 여기까지 일을 만들어 와서 이러고 있는 건 무슨 이유겠어요?”
윤수가 무용지물이 된 가방을 물끄러미 보았다. 노트북까지 챙겨왔는데 아무 소득이 없을 것 같다.
정말 은기는 데이트를 할 생각으로 온 것이다.
“아….”
저 자신 없어 보이는 애매한 대답과 태도는 여전했다. 하지만 은기는 이제 그 행동이 답답하기 보다는 제 딴에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것으로 자동 해석되었다.
피윤수는 어떻게든 느린 스스로를 납득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바로 지금처럼.
“어제….”
망설이던 윤수가 모처럼 직진으로 껄끄러움을 던져 버린다.
“옆에 여자 목소리가 들려서.”
“여자 목소리요? 통화할 때?”
“응.”
윤수와 마지막 통화 때 들렸던 여자 목소리라면 한 명 밖에 없다. 야구 선수와 사귀는 슈퍼 모델, 민성아.
은기가 그녀의 이름을 쉽게 꺼내들었다.
“아아. 성아?”
친근하게 이름이 쏟아져 나오자 윤수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그렇게 신경쓰였어요?“
”…좀.“
”사귀자고 해놓고 양다리 걸치고 있을까봐?“
다시 고개가 끄덕끄덕 거린다. 은기는 이것이 윤수가 용기 내어 한 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진도가 하나도 없을 것 같다가도 화끈하게 끝까지 갔던 것처럼, 윤수의 선은 좀처럼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망설이다가 내어주고, 조금 내어주다가도 물러서고. 지금도 그렇다.
사귐을 확인하자마자 사귀는 사이여야 물어볼 수 있는 것을 꺼내든다. 굉장히 조심스러웠다.
피식 웃은 은기는 성심성의껏 그의 걱정과 염려를 씻어냈다.
“걔 애인도 있는 애고, 서로 이성적인 감정 하나도 없어요. 데뷔 동기기도 하고.”
바람 피웠을까봐 걱정했냐는 소리가 목까지 올라왔지만 윤수가 대놓고 안심한다는 얼굴을 보이니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은기는 우동 국물을 한 번 들이키곤 식었던 입을 달구었다.
윤수는 가장 궁금했던 것 두 가지 중 하나를 성공적으로 해결했고, 다음 것을 꺼내들려는 준비를 했다.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그가 천장을 올려보곤 심호흡을 했다.
“근데..."
저렇게 뜸을 들이다니. 은기는 그가 이번엔 어떤 귀여운 질문을 할까 내심 기대했다. 하지만 기분 좋은 기다림 끝에 막상 돌아온 것은 핵폭탄급 찬물이었다.
"진기 결혼은 언제인 지 알아?”
기분 좋게 한껏 휘어 있던 눈꼬리가 냉정하게 변한다.
“형 결혼식은 왜요? 오게?”
윤수가 튀김 하나를 소스에 찍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가야지.”
은기는 식욕이 떨어져 젓가락을 놓아 버렸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 자신이 던졌던 수류탄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던 것인가, 자책이 들었다.
“식 전에 마음의 준비라도 해두려고?”
"......"
튀김이 차마 윤수의 입까지 올라오지 못하고 소스에 담겨버렸다. 그를 보니 못나게 삐죽대는 마음이 다시 올라오려 했지만 은기는 익숙하게 눌렀다. 정리 못하는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이해해 보기로 한 것도 다름아닌 자신이었다.
'그래도 오늘 자리에까지 형 이야기 꺼내는 건 너무하지 않나.'
애초에 자신이 결혼 소식을 알리지 않았더라면 나오지 않을 말이긴 했다. 고민하던 은기가 아닌 척 파장이 클 물음을 뱉는다. 이건 꼭 묻고 싶었다.
“나 정말 궁금한게 있는데, 형 왜 그렇게 좋아했어요? 그것도 안했으면서.”
벼락맞은 사람처럼 윤수가 굳어버렸다. 좋은 질문이 아니었다. 하지만 은기는 알고 싶었다. 그래서 그가 틈을 보이는 때에 찔렀다. 윤수는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표정이 사라져 있었다.
'이건 정말 안 좋았나.'
은기가 내심 후회하고 있을 무렵, 이내 그가 우물쭈물 하던 태도도 버리고 그로서는 꽤 단호한 대답을 던졌다.
“너 과거 묻는 사람 안 좋아한댔잖아. 나도 별로야.”
“…할 말 없게 만드네. 알았어요. 안 물어볼게.”
은기는 피식 웃더니 하얀 회로 덮인 초밥 하나를 더 집어 들었다.
“물렁한 줄만 알았더니, 반전도 있네.”
반전 있는 사람, 나쁘지 않다. 먼저 아픈 걸 찌른 건 자신이었으니 은기는 더 캐내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생각보다 피윤수가 파면 팔수록 뭔가 나오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더 알고 싶었다. 저 얌전해 보이는 사람의 속에 무엇이 자리잡고 있을지, 더 깊이 파고들고 싶다.
앞에서는 대범하게 굴었던 윤수가 소심하게 물었다.
“그래서, 싫어?”
역시 이건 아니었던 걸까. 하지만 그의 안에서 사라지지 않은 어둠을 은기에게 내보이기 싫었다. 거절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다.
“아니. 좋아서 하는 소리. 진짜로. 신경쓰지 마요. 내가 그때 괜한 소리 해서 그렇죠, 뭐.”
은기는 걱정말라는 듯 밝게 웃어주었다. 그리고 스스럼없이 진기의 결혼식 날짜를 알려 주었다.
"...고마워."
그의 배려가 눈물나게 고마웠다. 다른 말을 더 보태지 않는 그가 감사했다. 자신보다 어린데도, 마음이 넉넉하고 넓다. 만남만으로도 이상하게 가슴 어딘가가 따뜻해졌다.
윤수가 처음으로 그의 마음에 화답했다. 항상 굳게 내걸려 있던 윤수의 입가가 하늘로 향하고, 그가 소리없이 미소지었다.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웃음이었다. 늘 어둡던 얼굴에 구름이 말끔히 걷혀 희미한 빛을 내고 있었다.
"......"
은기가 멍하게 그의 미소를 마주한다. 알 수 없는 간질거림이 마음 속에서 파도처럼 일었다. 짧은 환상처럼 스쳐 지나간 윤수의 미소는 음식을 먹느라 금방 가려졌다. 기억할 수도 없이 빠르게.
고개 숙여 튀김을 조용히 먹고 있는 윤수의 하얀 목덜미가 은기의 눈에 클로즈업 되었다. 튀김을 씹으려 오물조물 거리는 작은 입술에도 시선이 꽂힌다. 피가 거꾸로 솟았다. 걸핏하면 저 몸에 눈길이 걸려 나풀댄다. 깃대에 묶여 벗어날 수 없는 깃발처럼 조그만 외풍에도 그의 마음이 일렁였다.
은기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음식은 안중에 들어오지 않았다.
“회사, 바로 돌아가야 되는 거 아니죠?”
“우리는 유동적이야.”
”그럼 이대로 퇴근해도 되는 건가?“
그건 왜 묻는 건지. 윤수가 처음에는 저돌적이었던 젓가락질을 점점 깨작깨작 놀렸다.
"스케줄따라 그렇긴 해. 연락만 넣으면 돼. 근데 왜?"
수상한 느낌에 고개를 드니 눈에 어떤 열이 빼곡히 들어찬 하은기가 보였다.
”우리 집 오라구요.“
번역 사무소 사람들에게는 스케줄 때문에 바쁘다고 하지 않았던가. 윤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스케줄 있다며.”
“밤 타임이라 괜찮아요.”
윤수가 미심쩍게 물었다.
"정말 괜찮은 거 맞아?"
“맞고. 내 집, 여기 근천데. 별로 안 멀어요.”
“근데?”
마무리로 나온 녹차를 한 번에 마신 은기가 나직하게 웃었다.
“잠깐 올래요? 고양이 구경 시켜준다고 했잖아.”
윤수의 눈이 커질만큼 커졌다.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지금?”
***
윤수는 낯선 천장이 흐릿하게 들어왔다. 자신의 집보다 훨씬 크고 격자 무늬가 보였다. 조명은 꺼져 있고, 어두워진 사위로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머리 뒤로 베개처럼 베고 있는 너른 어깨가 느껴졌다.
제 배 위로 얇은 이불이 덮여 있었다. 침대 아래로 다다닥 작은 짐승의 발소리가 돌아다녔다.
’어디지…?‘
윤수가 눈을 돌려 옆을 보았다. 옆자리에 반나신으로 누워 그에게 팔을 빌려주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얼핏 비치는 옆얼굴에 굴곡과 명암이 뚜렷한 미남이었다. 높은 코 위로 반듯한 이마를 반쯤 덮고 있는 갈색 머리칼도 눈에 들어왔다.
편안한 얼굴로 천사처럼 잠들어 있는 이 남자는, 하은기다. 그의 어깨 아래로 보이는 슬림하지만 단단한 근육이 쿠션처럼 작용해서 아주 꿀잠을 잤다. 조금 전에도 이 팔에 뜨겁게 안겼다.
윤수는 은기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손을 뻗어 협탁에 놓인 휴대폰을 만졌다. 잠든지 30분 정도 지나 있었다.
’미쳤어.‘
그는 기가 막혔다. 회사 일정을 빙자해서 고객과 데이트를 하고, 심지어 그의 집으로 와서 대낮에 섹스까지 했다. 그가 제 얼굴을 양 손으로 덮었다. 고양이를 빌미로 꾄 것은 은기지만 제 발로 선택해서 온 것은 피윤수, 자신이었다.
’제정신이 아냐.‘
소장을 무슨 낯짝으로 봐야 할까 얼굴이 뜨거웠다. 정신없이 내질렀던 절정의 비명이 환청처럼 돌아왔다.
이 집에 들어와서 보냈던 몇 시간이 꿈결처럼 그의 기억을 내달렸다.
========== 작품 후기 ==========
한편 더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