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음으로 -->
은기는 윤수가 잡아놓은 식당이 룸 형식이라는 데 굉장한 만족감을 보였다. 그가 앉아서 턱을 괴고 반대편에서 이것저것 부산한 윤수를 빤히 응시했다. 고립된 곳에 둘만 있으니 은기는 나쁜 마음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솔직히 말해봐요.”
습관처럼 수저를 뒤적거리며 세팅하고 있던 윤수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뒷걸음치다 쥐잡는 타입이죠?”
“무슨 소리야?”
“본인이 여우짓 하는것도 모르고 무심결에 하는 거. 그게 제일 무서운 사람인건데.”
윤수가 작게 거북이 문양이 그려진 단단한 나무젓가락을 마저 은기의 앞으로 놓아주며 눈가를 찡그렸다.
“뭐라는 건지 모르겠어.”
은기가 괴었던 턱을 바로 들며 생수통을 잡아 도자기 잔 두 개에 나눠 따른다.
“모르면 됐고.”
그가 따라진 냉수가 앞에 놓이고, 윤수의 손이 테이블에서 부산하게 움직이다 은기와 다시 손이 닿았다. 흐르듯 쏟아지는 눈길이 윤수를 강렬하게, 살뜰히 훑었다.
“…….”
그저 잠깐 본 것인데도 윤수는 색소마저 예쁜 아몬드형의 눈이 휘는 것에 알 수 없는 전율을 느꼈다. 그것은 앞으로의 예감과도 닮아 있었다.
묘한 긴장감이 윤수의 어깨를 움츠리게 했다. 윤수는 얼른 손을 치워 은기의 손이 지나갈 진로를 터 주었다.
은기의 눈이 그걸 발견하고 미묘해진다.
미모사처럼 닿으면 스르륵 사라질 것처럼 보이는 윤수가 답답하면서도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손도 작고, 섹스할 때 보니 발도 작았는데.
뭐든 작은 사람이 소심하게 말하고, 작게 행동하니 뭘 해도 귀여워 보였다.
그러다 은기는 금방 생각을 고쳐 먹었다. 회색 티 아래로 드러난 마르고 하얀 팔이 부지런히도 움직인다. 야무지게 곤약을 씹고 있는 입도 입술 표피가 얇고 전체적으로 모양이 작다.
‘작은 건 아니지. 그래도 170cm는 되어 보이니까. 아니, 안되려나?’
자신의 키가 너무 큰 것이다. 어릴 때부터 줄곧 농구를 해와서인지 공부만 하던 진기보다 훨씬 커버렸다. 진기는 180cm 정도였고, 동생인 은기는 190cm에 육박했다.
다른 생각 속에서 훨훨 날고 있던 은기를 현실로 붙들어 온 건 맞은편에서 빤히 그를 보고 있던 윤수였다.
“넌 안 먹어? 곤약은 살 안 찌지 않아?”
“먹을게요.”
사실 이딴 것보단 다른 걸 먹고 싶었다. 은기는 한숨 쉬며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이건 고문인가.’
곧 밥이 들어올 것이 아니면 그를 자리에 엎어두고 박고 싶다는 미친 생각이 들었다. 관계를 할 때 저 작은 몸이 뿜어내는 신음이나 뜨거움은 첫 번째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매혹적이었다. 그 기분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마른침이 은기의 목울대를 넘어가며 크게 일렁였다.
드륵, 드르륵-
그때, 은기의 휴대폰이 테이블에서 요란하게 진동음을 내며 떨었다. 발신자를 보니 매니저였다. 은밀한 상상을 꾸짖기라도 하듯 큰 진동 소리가 매니저의 호통소리와도 닮았다.
‘타이밍 한 번 기막히네.’
은기가 맞은편의 윤수에게 눈짓을 보내곤 전화를 받았다.
“왜, 형.”
받자마자 다짜고짜 격앙된 남자의 목소리가 쏟아져 나온다.
-그 번역사, 여자지?
은기는 무슨 일인가 눈만 깜박대고 있는 윤수를 힐끔 보고 다시 통화에 집중했다.
“남자.”
-진짜 여자 아니야?
“아니라니까. 바꿔 줘?”
건너편에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온다.
-날 굳이 떼놓고 혼자 가겠다길래 의심했지. 아니면 됐다.
이 형이 사람을 뭘로 보고. 은기가 골치아픈 듯 이마를 손가락으로 꾹꾹 밀었다.
“그냥 나혼자 해야 의미 있는 거라서 그랬던 거야. 계약서는 다 해결 됐지?”
-팩스로 해서 다 끝내버렸으니까 맘 편히 하고 와.
“땡큐.”
통화를 끊은 그를 보던 윤수가 이번엔 밑반찬으로 나온 샐러드를 젓가락으로 뒤적댔다.
“모델 일 힘들겠다.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몸도 계속 신경써야 하잖아.”
“힘들죠. 그래도 재미 있으니까 하는 거지. 해야 할 이유도 있었고.”
은기에게서 처음 보는 씁쓸함이 바람처럼 스쳐 지나갔다. 윤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지금은 이유 같은 건 상관없이 정말로 이 일이 좋아졌지만.”
“해야 할…이유?”
그게 뭘까. 그 이유가 뭐였길래 항상 밝기만 하던 그가 세상의 쓴 맛을 이미 본 사람처럼 웃을까. 메마른 나뭇가지 같은 버석버석함이 그 웃음에 묻어나올까.
윤수는 궁금해졌다. 하지만 저 얼굴에 대고 그게 뭐냐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궁금증은 젓가락에 닿은 소스의 달달함처럼 입 속에서 번지다 사라졌다.
은기가 아무렇지 않게 그에게 질문을 되돌렸다. 번역 사무소에서처럼 자연스러운 대화와 화법이었다.
“번역 일은 어때요? 재밌나?”
입은 말하면서 그의 손은 곤약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곤약이 자꾸만 젓가락에서 미끄러져 내렸다. 아예 찍어버릴까 고민하던 은기가 건너오는 젓가락을 보고 눈을 들었다.
반대편에서 윤수가 능숙하게 곤약을 젓가락으로 집어서 은기의 샐러드 그릇으로 건네주었다.
은기의 눈이 그의 작고 하얀 손, 그리고 얼굴을 따라간다. 표정을 보니 무의식 중에 한 행동 같았다. 배려가 몸에 밴 사람이다.
성공적인 곤약 배달을 해 준 윤수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모르겠어.”
번역 일에 특별히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뛰어든 것은 아니었다.
윤수는 망설이다 천천히 대답했다. 왠지 얼굴이 붉어진다.
“그냥 해야 할 일이니까….”
하은기는 동종업계 사람들에게 성실하고 독하다고 소문이 났다. 오늘 아침 출근길에 찾아본 인터뷰 기사에 그리 쓰여 있었다.
자신보다 어린 사람도 이리 열심히 생의 목적을 가지고 사는데. 혹 자신은 별 생각 없이 살아왔던 걸까.
그는 여태 살아온 족적이 조금 부끄러웠다. 부끄럽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은기와 비교하니 제가 가진 것이 많이 작아 보였다.
그와 함께 있으면 늘 이런 기분이 들었다. 못나게 쪼그라들고 만다. 기품 있는 고려 청자 앞에서 소박하고 이 빠진 모난 백자가 나불대는 것 같달까.
그런데 은기는 그의 마지막 말을 조용히 따라 읊조렸다.
“그냥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는 듯 잠시 은기에게서 다른 말이 더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퍼뜩 윤수의 어두운 얼굴을 보고 당황스러워 했다.
“괜한 거 물어봤네. 별 것도 아닌데 왜 또 칙칙해져?”
“미안.”
은기의 갈색 눈썹이 곱게 접혀들었다.
“그 미안하다는 소리 좀 안하면 안 돼요?”
“…미안.”
일할 때는 나름대로 똑 부러지던 사람이 사석에서만 보면 왜 이러는 걸까. 은기가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더니 자신의 손을 그에게 내밀었다.
“손 이리 줘봐요.”
“어?”
“아, 그 전에 곤약 하나 집고.”
얼떨결에 그는 은기가 시키는대로 했다. 손에 힘을 주어 미끄러지지 않게 곤약 하나를 잘 잡자 은기가 그 손을 휙 잡아 제 입에 곤약을 집어 넣었다.
그가 잡은 손이 너무 뜨겁다. 혹 젓가락에 목이 찔리기라도 할까봐 윤수가 움찔대며 손을 뒤로 얼른 물렸다. 그는 놀란 듯 은기를 타박했다.
“위험하잖아.”
은기는 상관 않고 뒤를 흘끔 보곤 이번엔 한 손을 책상 위로 짚었다. 그리곤 반대편 손으로 윤수의 목 뒤를 잡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타닷!
젓가락이 떨어져 식탁 위로 나뒹굴었다. 은기가 그의 머리 뒤를 잡고 입술을 격렬하게 밀어 넣었다.
따끔한 감각이 이어졌다. 은기가 입술을 물었다가 이번엔 부드럽게 짧고 강렬하게 혀가 입술 위를 소름끼치도록 훑고 지나갔다.
키스에서 곤약 맛이 났다. 윤수의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갔다.
동시에 은기는 당황한 윤수의 한 손을 잡아 손가락으로 손등을 문질렀다.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야릇한 감각으로 스쳐 지나가다 손가락 사이를 꾹꾹 눌렀다. 간질거리면서도 어딘지 성감과 닮은 촉감이 스멀스멀 번져나갔다.
‘읏….‘
윤수가 튀어나올뻔한 짧은 신음을 삼키고 움찔 떨었다. 이런 단순한 행위가 야하게 느껴질 수 있다니, 놀라웠다. 심장이 쿵쾅대고 온 몸의 피가 빠르게 돌았다.
은기는 입과 손을 천천히 떼어내면서 문지방 쪽을 훑었다. 눈이 사람이 들어오는 지를 계속 확인하고 있었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대듯 말했다.
“앞으로 미안하다는 소리 또 하면 아주 먹어 버릴 거니까. 그땐 사람들 눈이고 뭐고 없어요.”
윤수의 안색이 헬슥해진다. 은기라면 정말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저질러놓고 어떤 말이든 자연스럽게 핑계 삼아 넘길 것이다.
“담엔 젓가락으로 안 끝나. 지금 참고 있는 거 안 보여요? 정신 수양하는 것도 아니고.”
참고 있는다는 말이 맞는 듯 스친 은기의 체온이 지나치게 높았다.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킨 그가 소리나게 잔을 놓으며 손등으로 젖은 입술을 훔쳤다.
윤수가 더듬대며 맹세했다.
“알았어. 안 그럴게.”
은기는 아까전에 윤수가 무심결에 집어서 준 곤약을 젓가락 하나로 찔렀다. 미끌대는 곤약이 젓가락 하나에 꼬치처럼 꿰어 허공에 뜬다.
먹기 힘들다며 투덜댄 은기가 곤약이 미끄러지기 전에 입 안에 재빨리 넣었다. 특유의 단맛과 향이 배어 들었다.
“난 만날 때 미안할 사람이 아니라 즐거울 사람이 되고 싶거든요.”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말인데, 그 한마디로 마음이 놀랍도록 편안해지고 안식이 찾아든다. 윤수의 수런대던 마음이 조용히 가라앉는다. 그의 반응 하나하나를 살피던 은기가 한숨 지었다.
”그 쪽, 정말 힘들게 하는 사람인 거 알죠. 별로 웃지도 않고, 농담해도 별 반응 없고.“
”미….“
습관처럼 튀어나오던 ’미안‘이 은기의 눈길에 쏙 들어간다. 정말 먹어버리겠다는 그의 협박이 뒷말을 마저 잊지 못하게 했다. 입술을 물고 핥았던 것보다 더한 것이 돌아올 것 같았다.
========== 작품 후기 ==========
1234577 님 코멘트 감사합니다! 예약으로 올리니 달아주시는 분들 언급을 못해서 ...
이제 그냥 올려야겠네요 ㅎㅎ
선작 새로이 주시는 분들, 추천 찍어주시는 분들,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