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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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걸음 --> 

하은기가 컨택해 왔다는 소식에 번역사무소는 오랜만에 들끓어 올랐다. 여직원 몇은 소식을 듣고 친구들에게 알리기 바빴고, 수석은 내내 뚱하게 구시렁댔다. 

”직원 몇 되지도 않는 이런 데 걔가 왜?“

듣고 있던 소장이 멀리서 한 마디 날렸다. 

”우리 사무소 무시하니.“

묵직한 폭격에 수석은 식은땀을 흘리며 손을 내저었다. 

”아, 아뇨, 소장님. 그런 의미는 아니었고 그냥 이상하다는 거죠, 아하하. 이상하지 않냐, 피윤?“

도와달라는 듯 수석이 난감해 하며 윤수를 불렀다. 그는 오늘도 영락없이 글자 하나 적힌 회색 티에 청바지 차림이었다. 대각선으로 보이는 옆모습이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가느다랗고 마른 팔이 셔츠 밖으로 보이고 어깨 위를 파란 점퍼가 덮었다. 

”피윤?“

종종 농담처럼 부르는 애칭에도 윤수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물끄러미 서류를 내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갸웃하던 수석이 그의 책상에 가 똑똑 노크했다. 

”너 또 멍 때리냐? 요즘 심하다?“

흐린 눈빛으로 무언가를 생각하며 펜을 쥐고만 있던 윤수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수상한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보고 있는 수석이 보였다. 윤수는 침착하게 말했다. 

”미안. 뭐라고 했어? 못 들어서.“

”하은기 씨 포토 에세이 번역건 들어왔다고 난리잖아, 지금. 너는 뭐 보탤 말 없냐고.“

‘하은기’ 의 이름에 잠깐 움찔한 것도 잠시, 그는 차분한 태도로 번역해야 할 서류를 놓았다. 검수는 끝났고 컴퓨터로 작업을 옮겨서 할 생각으로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딱히?“ 

”넌 남자의 적을 앞에 두고 아무 생각이 없어? 개바람둥이처럼 생겨선, 분명 여자 여럿 후리고 다닐 거다.“

마우스를 이리저리 움직이던 윤수의 손이 완전히 멎는다. 

여직원들이 청소를 하겠다며 창문을 온통 열어두어 쌀쌀한 바람이 사무실 안으로 불어 왔다. 그의 메마른 손가락이 차갑게 곱아 오고, 마음까지 서늘해졌다. 

”그 눈, 뭐냐?“

윤수가 물끄러미 수석을 노려보고 있었다. 조용하던 윤수가 이리 날 세운 건 처음이라 수석이 눈을 동그랗게 떴고, 윤수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하은기 씨가 왜 남자의 적인데? 그리고, 바람둥이라는 증거는 있어?“

당황한 수석의 얼굴은 윤수에게도 아주 익숙한 표정이었다. 

편견이었다. 몇몇 이들은 겉만 보고 판단한다. 그 사람을 제대로 보려 하지 않고, 입맛대로 타인을 이미지화시킨다. 게다가 멋대로 판단한 이미지를 타인에게도 강요한다. 

윤수는 그게 싫었다. 은기의 ‘진짜’를 알려 하지도 않고 함부로 말하는 것이 싫었다. 사실은 자신도 그랬던 주제에, 다른 이가 그를 질시하자 화가 난다. 

그가 속삭이던 말들은, 하은기를 그저 그런 인간으로 치부하게 두기에 너무 자상했고 배려가 있었다. 

[어젯밤 일, 술김에 한 걸로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요.]

[그러다 도망치고 싶으면 나한테 도망치고.]

[이용하고 싶으면 나 이용하고. 이용 당해 줄게.]

[그리고 나 섬세한 사람 좋아해요. 그런 사람이 독점욕 가지면 더 짜릿하거든. 그러니까 오해 금지.]

독한 눈매도, 표독한 것도 아니었지만 윤수의 크고 검은 눈은 투명하게 그를 담아냈다. 왠지 꺼림칙한 느낌이 들어 수석은 윤수의 시선을 회피했다. 

”그, 그야….“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기에 윤수는 컴퓨터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평소처럼 입을 열었다. 

”나 메일 확인 좀.“

”어, 그래. 나도 일하러.“

줄행랑치며 제 자리로 사라지는 수석을 그가 다시 힐끔 바라보곤 컴퓨터로 시선을 향했다. 

타다닥, 단조롭게 이어지는 타자와 마우스 클릭 소리의 간격에 은기의 생각이 자꾸만 책갈피처럼 끼어든다. 점퍼 밑으로 움직이는 팔에 힘이 들어갔다. 

어젯밤 통화 마지막에 들렸던 여자 목소리가 환청 마냥 계속 그를 괴롭혔다. 어제 패션쇼가 있다고 했으니 끝나고 나서 회식이라도 한 것일 테지만 기분이 미적지근했다. 친근하게 들리는 하이톤의 목소리가 은기를 부르고 있었다. 

단순히 회식이겠지? 이걸 왜 신경쓰고 있을까. 

분위기 메이커이기도 한 수석이 자리에서 지치지 않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번역은 수석인 내가 하나? 으휴, 하여간 보는 눈은 있어서.”

하지만 소장이 그의 착각을 딱 잘랐다. 

”윤수 지명이다. 너 아냐.“

”엇, 그래요?“

”윤수 스타일이 마음에 든다더라. 홈페이지에서 작업물 죽 보고 컨택했나 보던데, 차분해서 마음에 든대. 에세이 컨셉과도 맞고.“

”그래, 그런 거면 뭐…. 잘해봐라, 피윤.“

데스크 가리대 위로 수석의 손이 하나 번쩍 올라왔다. 그를 본 윤수가 피식 웃으며 다시 일에 집중했다. 그러고 보니 점심 때 은기가 오면 어딜 가야 하나. 

‘맛있는 곳 어디 없나.’ 

윤수는 당연한 듯 인터넷으로 근처 맛집을 뒤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흠칫 놀랐다. 자각하고 뭔갈 더 생각하기 전에 다행히도 여직원들의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그의 상념을 끊어 주었다. 

“대박! 오면 사인해 달라고 해야지.”

“종이 미리 준비해두자. 친구들 것도 다 해놔야겠어.”

청소 도구를 꺼내느라 분주한 들뜸이 뒤에서 들렸다. 그도 얼른 급한 것부터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도구를 챙겼다. 

‘진짜 오긴 오는 구나.’ 

그의 행동력과 추진력이 경이로운 윤수였다. 

점심시간에 온다던 그는 정말 정확히, 12시가 되어서 도착했다. 패션에 각을 세운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복장이었다. 

튀지 않는 까만 캡모자 밖으로 그의 부드러운 갈색 머리칼이 곱게 삐져나와 있었고, 무르익은 가을 날씨임에도 반팔이었다. 

청록색 티에 크림색 면바지 차림의 하은기가 노크 뒤에 사무실 문을 열었다. 

“앗, 오셨네!”

“어서오세요~!”

따가운 하이톤의 격한 환영이 이어졌고, 소심한 몇은 꾸벅 인사만 한 뒤 일에 몰두하는 척했다. 짧은 인사 후 팬사인회를 방불케 하는 하얀 종이가 은기 앞으로 날아다녔다. 

수석이 그 옆을 감시하듯 서서 그들에게 잔소리했다. 

“너네들 적당히 해라. 대체 몇 장이야? 우리 은기 씨 팔 떨어지겠다!”

아까 남자의 적이니 어쩌니 했던 건 어딜 가고 수석은 아주 은기의 옆에 딱 붙어서 보디가드 행세를 하고 있었다. 

윤수는 그를 어이없다는 얼굴로 바라보다가 정식으로 은기에게 인사를 건넸다. 일터에서 이리 보니 또 느낌이 색다르다. 

아예 모르는 사람이어야 한다. 만난 적도 없는 거다. 윤수는 스스로를 세뇌하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이려 애썼다. 

“반갑습니다, 하은기 씨. 제가 피윤수입니다.”

이방인의 피가 섞인 듯 비현실적인 얼굴이 윤수를 보며 빙긋 웃었다. 모자 밑으로 보이는 얼굴은 정말 작은데 이목구비가 크고 균형감 있게 골고루 자리 잡은 것이 신기했다. 사인지를 정중하게 치우고 그는 윤수가 내민 손을 꽉 잡았다. 

“잘 부탁드립니다.”

윤수의 마르고 작은 손이 은기의 크고 긴 손에 한 번에 뒤덮였다. 차가운 윤수의 손에 온기가 전해졌다. 그 손이 떨어질 때 윤수의 손등을 사람들 모르게 진하게 훑었다. 노골적인 스킨십이었다. 

놀란 윤수가 눈을 들자 은기의 손이 이미 떨어져 있었고, 그는 능숙하게 다음 말을 던졌다. 

“분량이 많지는 않을 테니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아, 네.”

윤수가 얼떨떨하게 말했다. 방금 지나간 손길이 뭐였는지 생각하기도 전에 은기가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었다. 

“나가서 이야기해도 되겠죠? 일하시는 데 방해되는 것 같아서 좀.”

“그러세요. 아니면 회의실도 있는데 거기서 말씀하셔도 됩니다만.”

아쉬운 눈길들이 쏟아졌다. 하지만 은기는 이 역시도 자연스럽게 거절했다. 군더더기 없는 대화였다. 

“다음 일정 때문에 어차피 금방 가야 해서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사무실 대청소도 했건만, 고생이 무색하게 은기는 정말 형식적인 인사만 나누고 윤수를 데리고 나가 버렸다. 덕분에 윤수는 가방만 겨우 챙기고 정신없이 사무실을 나섰다. 사인지를 덜 챙겼다는 아쉬운 소리가 뒤에서 조곤조곤 들렸다. 

복도를 빠져나와 건물 밖으로 몸을 내밀자마자 은기는 큰 숨을 뱉었다. 아쉽다는 눈으로 그가 손목시계를 내려본다. 

“더 빨리 오려다가 매니저 형한테 붙들려서 그만.”

윤수가 얼른 고개를 젓는다. 

“아냐. 지금 시각이 좋았어. 더 빨리 왔으면 좀 그랬을 거야.”

“왜?”

“청소하느라 먼지 엄청났거든.”

“나 온다고 갑자기 대청소 한건가. 그건 좀 미안하네.”

멋쩍어 하는 은기를 위해 윤수가 선의의 거짓말을 했다. 

“괜찮아. 어차피 청소해야 할 날이었어.”

진짜인지 가늠하는 듯한 은기의 옅은 눈은 이내 하늘 위로 올라갔다. 가을 하늘이 높고 구름 한 점 없는 날씨였다. 햇빛도 따갑게 내리쬐고 있었다. 그래도 윤수의 기준에서는 조금 쌀쌀했는데 점퍼를 두고 와버렸다.

‘이런.’

윤수는 다시 들어가려다가 참았다. 한 번 들어갔다가는 요란하게 붙들려서 은기에 대한 감상이나 스케줄에 대한 것을 들볶일 것이다. 

그때 윤수의 옆얼굴이 따끔따끔하였다. 

‘뭐지?’

느껴진 출처를 확인해 보니 못 본 척 휙 고개를 돌리는 여고생 몇이 보였다. 그들은 자신과 은기를 보며 자기들끼리 숙덕대고 있었다. 정확히는 은기에게 향한 잡담이었다. 

‘적응 안되네….’

윤수는 쏟아지는 시선에 얼굴을 붉혔다. 벌건 대낮에 은기와 함께 건물 앞에 서 있으니 사람들의 시선이 감당이 안된다. 그런데 은기는 익숙한 듯 사람들의 눈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윤수에게만 신경 썼다. 그가 까만 캡모자를 벗었다가 다시 고쳐 쓰며 윤수에게 물었다. 

“우리 어디 가요?”

“예약해 둔 곳 있어. 식당가로 가자.”

태연하게 목에 걸어놨던 선글라스를 다시 낀 은기가 윤수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본다. 

“근데 손이 왜 이렇게 차? 잡았을 때 놀랐잖아. 너무 차서.”

흘러내리는 가방을 어깨로 끌어당긴 윤수가 행인들을 계속 힐끔댔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대화를 다 듣는 것 같아서 무섭다. 

“원래 그래. 냉증 있어.”

“어디 안 좋은 거 아닌가? 약이라도 지어줘?”

걱정스레 찌푸려진 갈색 눈썹에 윤수가 피식 웃어 버렸다.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다. 

‘우리 엄마 같은 소리하네.’

가슴 한 쪽이 푸근해졌다. 멀게만 느껴지던 은기가 갑자기 가까워진다. 직원들에게 둘러싸여 사인할 때는 다른 세계에 머물고 있는 별처럼 느껴졌건만. 따사로운 햇살을 공유하며 일상 이야기를 하는 지금 이 순간은 넉넉한 여유가 깃들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짧은 여유를 허락해 주지 않았다. 

“하은기 아냐?”

“맞는 것 같은데? 진짠가?”

“어디어디?”

모자와 선글라스로 가려 봤자 이 훤칠한 청년이 내뿜는 묘한 아우라가 가려질 리가 없었다. 당황한 윤수가 재빨리 은기를 식당가로 이끌었다. 

얼결에 손을 잡았는데 그것도 모를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은기가 선글라스 안에서 눈을 치켜 뜨고 윤수가 잡은 손을 내려보았다. 

빠른 걸음으로 식당가로 가며 윤수가 허겁지겁 말했다. 

“일식 좋아해?”

은기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폈다. 그는 윤수의 차가운 손끝을 보호하듯 제 손을 더 넓혀 잡았다. 하지만 윤수는 이마저도 인식하지 못한 채 떠오르는 대로 말을 주워 뱉고 있었다. 

“별로야?”

“좋아하죠. 사실 가리는 거 없어요.” 

“다행이네. 배고프지 않아?”

“체중 조절 중이라 어차피 먹고 싶어도 많이 못 먹어요.”

서글픔마저 느껴지는 목소리에 윤수가 안됐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언제부터 연예계에 뛰어든 걸까. 사람들이 찌라시 출처인 것들을 떠드는 것만 들어도 험하고 어려워 보였는데. 성격이 무난하고 말도 잘해서 잘 헤쳐나갔을 것 같긴 하지만, 말 못할 힘듦이 많았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는 사이 서서히 이성이 돌아오고, 윤수는 낯선 감각에 뭔가를 잡고 있는 제 손을 보았다. 은기의 손이었다. 어쩐지 손이 따뜻해졌다 싶었다. 

그가 화들짝 놀라며 은기의 손을 놓았다. 

“아, 미안. 급해서 나도 모르게….”

은기는 입맛을 다시며 아쉬운 듯 떨어진 손을 끈끈하게 응시했다. 

“더 잡고 있어도 되는데.”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잖아.”

“보통 손 잠깐 잡는 거 가지고 사귄다고까지 생각 안해.”

“조용히 말하자, 우리.”

윤수가 고개를 푹 숙이며 성큼성큼 앞서 걸었다. 다른 사람이 들어도 농담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말겠지만 그는 매우 심각했다. 뒤따르는 은기가 연신 피식거리며 웃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예약 걸어둔 것이라... 추가 감사 인사 답니다.

뇨뇽임 님, 꼬꼬마과학자 님, 1234577님 코멘트 감사합니다.

선작 주신 분들, 추천 눌러주신 분들, 읽어주시는 분들 모두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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