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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수는 찬물을 끼얹은 듯 얼어붙었다. 묵직하고 아릿한 아래의 감각은 현실이다. 완전히 은기의 페이스에 휘말려 들어갔다.
자신이 거부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이 더 절망적이었다. 분명 은기는 싫냐고 물었고, 그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온통 까맣고 속이 빈 혼돈이었다. 거절하려고 했던 것 같긴 한데, 몸은 솔직했다. 진기와 닮은 구석이 있어서인지, 정말 은기에게 끌리는 점이 있어서인지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난 대체 어떻게 하고 싶은 거지?’
그는 정돈되지 않은 어정쩡한 마음으로 진기의 동생을 마주 본다. 이목구비 중 웃는 모습이 확실히 닮았다. 진기는 거의 웃지 않지만 아주 가끔 지어주던 미소에서 입꼬리가 올라가고 눈꼬리가 휘곤 했다. 은기도 그렇다.
‘앞에 두고 무슨 생각 하는 거야.’
그의 동생을 상대로 후회 가득한 원나잇을 끝낼 것인가. 그러기에는 끝없는 주저함과 망설임이 윤수의 발목을 놓지 않고 있었다.
이 애매하고 경계 없는 관계가 이상하게 더욱 매력적이었다. 부담이 있는 듯 없는 묘한 관계. 진기와는 헤어진 지 오래고, 그리 미안해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한 채 그의 혈육과 또다른 관계를 구축해도 되는 건가.
애초에 시작이 불순한데.
윤수는 인간적으로 망설였다. 그래서 뚫을 것처럼 다가오는 은기의 시선을 피했다.
“날 앞에 두고 다른 사람 생각을 하다니, 용감하네요.”
은기는 웃는 듯 마는 듯 미묘한 표정을 머금고 그의 턱을 잡았다. 그리고 제 쪽으로 돌린 뒤 이번에도 정확히 윤수의 의중을 읽었다. 옅은 색소의 갈색 눈이 날카로이 빛난다. 진기는 아주 진하고 까만 눈이었다.
“형 생각 하죠?”
당연하다는 듯 물음에 한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런데도 불쾌한 기색은 전혀 없다. 그럴 줄 알았다는 눈빛이었다.
“…….”
“휩쓸렸으면, 그냥 휩쓸려 가요. 뒤는 돌아보지 말고.”
다른 생각 말라는 듯 그가 달콤하게 말했다. 그는 윤수가 듣고 싶은 말만 해주었다. 정답인지 오답인지를 판단하기 전에 끌려 갔다. 턱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어젯밤 일, 술김에 한 걸로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요.”
“…….”
“그러다 도망치고 싶으면 나한테 도망치고.”
앉은 채 허리와 배가 가까이 붙는다. 은기의 달아오른 성기가 터질 듯 가까이 붙자 윤수도 헛숨을 쉬며 허리를 뒤틀었다.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다. 은기가 그의 눈을 마주보며 속삭였다. 새까만 욕망이 은기의 눈 속에서 휘몰아쳤다.
“이용하고 싶으면 나 이용하고. 이용 당해 줄게.”
윤수는 당혹스럽게 말했다.
“은기야….”
“혹시 나로 형한테 복수하고 싶은 거면 그렇게 하든가. 그 형이 호락호락하지는 않겠지만.”
주홍 조명 속에서 은기의 눈만이 선명하게 빛난다. 웃음기 하나 없이 진지하고 또렷했다.
윤수는 지금 그의 동생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용? 복수? 마비되었던 머리가 독에서 풀려난 것처럼 서서히 제 기능을 찾는다. 그런 거창한 이유를 붙여가며 그와 두 번째 만남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은기는 아주 큰 착각을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윤수는 턱을 잡은 손을 손등으로 밀어 냈다.
“그럴 생각 없어.”
잡혔던 턱이 아려와 그가 천천히 문질렀다.
“내가 그렇게 저질도 아니고.”
헤어짐은 이미 오래 전이고, 동생을 통해 보복하거나 할 그런 미친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뭣보다 진기는 이제 내게 관심 없어. 너와 사귄다는 걸 알아도 별 생각 없을 거야.”
“…….”
“좀 놀랄 수는 있어도.”
이게 정답이다. 정말 은기의 말대로 복수라는 걸 하려면 하진기가 피윤수를 아직 사랑하고 있다는 전제가 깔려야 성립된다. 윤수는 허탈한 숨을 뱉었다.
“복수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그저 이 미련의 끝을 제 손으로 맺기 위해 찾아갔던 것일 뿐이고, 그 곳에서 하필 그의 동생과 만나 이 지경이 되었을 뿐이다. 나이도 3살이나 더 먹어놓고, 어른스럽지 못하게.
윤수가 제 이마를 손끝으로 문질렀다. 자괴감 섞인 어지러운 두통이 몰려왔다.
“진기 때문에 만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동생인 널 괴롭힐 생각은 전혀 없었어.”
“그럼 뭘 망설이는 건데요?”
“너한테 미안해서.”
윤수는 진심을 다 쏟아내었다. 그와 처음 마주했던 술자리처럼.
“진기랑 닮아서 끌렸던 건 사실이니까.”
공통점을 찾아내고 위안 삼는 자신이 끔찍했다. 윤수는 솔직해 지고 싶었다. 더 이상 자신을, 은기를 기만하고 싶지 않았다.
“너와 만나면 계속 생각할 거 아냐. 진기 때문에 미련 못 버려서 만나는 건 아닌가. 이런 애매한 마음으로 널 어떻게 만나. 미안해서 어떻게 만나냐고. 그래서 여기서 끝내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
은기에게는 놀랍도록 속내를 거침없이 이야기하게 된다. 그에게 그런 힘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복잡하고 힘든 시기에 이야기할 상대를 만나서 그런 것인지는 윤수도 알 수 없었다.
진심을 폭포처럼 쏟아낸 후유증으로 그는 숨이 찼다.
“…….”
은기는 말없이 그의 이야기를 빠짐없이 들었다. 윤수의 표정 하나하나를 진중하게 살폈다. 한 팔은 시트 헤드 위로 올린 채 길고 단단한 손가락을 제 허벅지 위로 툭툭 찍으면서.
윤수가 떨리는 눈으로 그런 그를 올려보았다. 말을 다 뱉은 것 까지는 좋았는데, 후폭풍은 예상하지도 못하겠다. 은기가 무어라고 할까. 침묵의 시간을 끊은 건 담담하고 낮은 은기의 목소리였다.
“그런 양심까지 챙기는 사람은 참 오랜만에 보네요.”
은기가 시트 위로 올렸던 팔을 내려놓으며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당신이 미안해 해야 할 건 그게 아니야.”
환기팬 돌아간다며 천장을 턱짓으로 가리키곤 은기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책상 위에 대충 던져뒀던 차키와 담배갑 사이로 손을 뻗은 그가 어둠이 깔린 얼굴로 라이터를 튕겨 올린다.
턱을 내려 그대로 끝에 불을 붙이려다 그가 눈만 들어 윤수에게 물었다.
“비흡연자 아니죠? 핍니다?”
윤수가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하루에 하나 정도만 금연 차원에서 피우고 있었다. 불을 붙이고 연기를 뿜으면서 은기가 연신 웃긴 듯 피식피식 웃는다.
“아, 어이 없어서.”
당혹스러워하는 윤수에게 그는 당당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긴 손가락에 끼워진 하얀 것이 아찔하게 허공을 까딱댄다.
“내 자존감에게 사과해요.”
은기의 볼이 홀쭉해졌다가 자연스럽게 연기를 뿜었다. 윤수는 언젠가 미용실에서 봤던 남성 잡지가 떠올랐다. 딱 저런 포즈로 잘생긴 남자 모델이 수트 차림으로 퇴폐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뭐라 할 말이 없어 윤수는 제 시트 아래로 손을 내리고 꽉 쥐었다.
두어 번 연기를 품고 뱉기를 반복하던 그가 생각할수록 화가 난다는 듯 윤수를 물끄러미 보았다.
”당신이 내 진짜를 언제 봤는데?“
”…….“
”아직 하나도 안 보여 줬어요. 이제 고작 두 번째 만나는 겁니다.“
이런 취급 단 한번도 받아본 적 없을 사람이었다. 어느 자리에 가도 주역이 되고 사람을 이끌고 그 흐름을 주도할 남자였다. 윤수의 고개가 아래로 축축 처졌다. 저런 사람에게 다른 사람과 겹쳐 볼까봐 두려워서 밀어낸다고 선언했으니, 자존심이 상할 만 했다.
하지만 진심은 진심인 것이다. 나중에 후회하느니 지금 미리 선수치는 것이 낫다.
‘무엇을 위해서?’
아마도 관계에 겁쟁이인 피윤수, 그 자신을 위해서.
은기는 담배를 손에 끼운 채 분노를 억누르려는 것처럼 제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그래놓고 벌써부터 나를 형과 겹쳐 볼까봐 미안하다고? 고작 형 그늘에 가려서? 대체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건지.“
윤수가 그의 눈치를 보며 손가락을 아래에서 꼬물거렸다. 뱉을 땐 시원했는데, 역시 끝이 좋지 않다. 생각하고 말했어야 했는데.
”…화났어?“
”이 시점에서 화가 안 나는 게 비정상 아닌가. 나참…. 헛산 기분이네.“
담배 연기가 한숨처럼 짙게 퍼져나간다. 윤수가 급히 사과했다.
”미, 미안.“
”사과하지 마요. 더 화나니까.“
윤수의 머리가 죄인처럼 더더욱 땅으로 꺼진다. 단호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고개 숙이지도 말고.“
”그럼 어떻게 해?“
대체 무슨 말이 떨어질까. 사과하지도 말고 고개 숙이지도 말라면 이 자리에서 당장 꺼지라는 것인가.
쩔쩔매는 윤수를 무서운 얼굴로 내려보던 은기는 갑자기 피식 웃었다. 윤수는 눈길을 연신 피하느라 그의 웃음을 보지 못했다. 은기가 담배를 준비된 재떨이에 비벼 껐다. 그리곤 뜻밖의 제안을 했다.
“나랑 계속 만난다고 약속해요.”
미안하다는 말을 버전별로 여러 개 장전해둔 채 잔뜩 긴장하고 있던 윤수가 펄쩍 고개를 들었다.
“…뭐?”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그의 귓바퀴를 어루만졌다.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표정이라 윤수는 얼떨떨했다.
”말귀 어둡네. 사귀자고요.“
========== 작품 후기 ==========
곧 한편 더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