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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울의 방 --> (3/59)

<-- 거울의 방 --> 

”이래도 되나?“

퇴근과 동시에 약속 장소로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떠나며 윤수가 중얼거렸다. 애초에 은기가 말했던 시간은 너무 새벽 시간대였고, 오늘은 못 볼 줄 알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빨리 촬영이 끝났다는 메시지를 보내 온 것이다. 

‘정말 가도 될까. 이 관계, 이대로 괜찮은 걸까.’

윤수는 그와 오전에 했던 통화 내용을 다시 떠올렸다. 회사 특성상 늦은 출근도 가능하고 탄력적이어서 호텔 침대에 더 뒹굴 거리던 그는 쪽지와 명함을 보고 그에게 분명 전화를 걸었다. 

오래 기다렸던 발신음이 끊기더니 곧 낮은 웃음소리가 건너왔다. 

-일어났나 보네. 잘 잤어요?

이게 뭐라고. 평범한 아침 인사가 순식간에 뜨거워진다. 은기의 목소리를 들으니 어젯밤의 엄청났던 관계가 꼬리를 물었다.

윤수는 가슴 언저리가 간질간질했다. 전화는 짧게 주고 받았다. 먼저 가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오늘 촬영 말고도 방송 일정도 있기에 늦어진다는 말이 뒤따랐다. 

‘그 이야기를 왜 하지?’

침대에 녹진녹진 녹아 붙어 멍한 머리로 윤수는 생각했다. 스케줄을 읊어대는 그가 이상했다. 마치 자신의 일상을 알리려는 것처럼, 알려서 그와 시간을 맞추고 또 다른 만남을 이어가려는 의도처럼 느껴져서. 

하룻밤이 끝이고, 알 수 없는 호기심과 궁금증도 이대로 끝일 줄 알았는데. 하지만 건너오는 전화상 목소리는 여전히 밝았다. 

-밤 늦게 끝나더라도 만날 수 있으면 잠깐이라도 보죠. 이대로는 좀 미안해서. 

”뭐? 오늘 밤?“

-바쁘면 됐고요. 오늘 밤 안되면… 

스케줄러를 확인하는 듯 듣기 좋은 목소리가 띄엄띄엄 멀어졌다. 

-이틀 뒤? 나도 오늘 촬영 있어서 늦게 끝날 수도 있으니까. 아무튼 생각해보고 연락주세요. 그럼! 

뭐라 말하기 전에 통화는 뚝 끊겼다. 윤수는 휴대폰을 들고 한참을 고민했다. 

처음에는 하룻밤의 몹쓸 인연으로 끝내기로 작정했다. 친구인 진기에게 미안하기도 했고, 은기에게도 미안했다. 그래서 더 이상 만나지 말자고 이야기할 작정이었고,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어제는 미안했다 네 잘못이 아냐 내가 잠시 미쳤던 거지 안 보는 게 서로에게 좋을 것 같아 정말미안]

마지막 ‘미안’ 에는 가슴을 후벼 파는 통증도 뒤따랐다. 통증의 뿌리에는 후회가 있을까, 죄책감일까, 아니면 약간의 미련일까. 

그는 메시지를 보내고 난 뒤 은기와 뒹굴었던 침대에서 한참 멍하게 앉아 있었다.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회사에서 내내 그를 괴롭힌 것은 다름아닌 ‘하은기’ 였다. 

이대로 끝내? 정말? 한편으론 위안 같은 생각도 슬금슬금 든다. 한 번만 더 만날까? 만나보고 나서 정말 기다 아니다 판단하면 되잖아. 

온통 그 생각에 시달리다 보니 일도 제대로 못하고 ‘하은기’ 이름 하나만 들려도 가슴이 땅으로 꺼졌다가 솟기를 반복했다. 

은기는 윤수의 생각보다 더 유명한 사람이었다. 연예인에 관심이 없던 그였기에 몰랐을 뿐이지, 은기의 대중적 인지도는 밥 먹을 때나 커피를 마실 때 종종 사람들 입에 심심찮게 오르내릴 정도였다. 공연히 어깨가 움츠러든다. 그런 사람과 간밤에 섹스를 했다. 그것도 호텔 스윗룸에서!

휴대폰을 확인하지 않는 사이 메시지가 엇갈렸고, 은기에게서 답장이 와 있었다. 

[정말미안하면 만나요]

짧은 메시지였다. 분명 부탁조인데 명령같은 느낌도 섞여 있다. 교묘한 청유였다. 윤수는 얼떨떨한 것을 떠나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혹시 꿈을 꾼 것은 아닐까. 아무래도 그를 직접 봐야 이 현실과 공상의 괴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지하철과 택시의 루트를 거친 윤수는 제법 쌀쌀해진 가을 날씨를 만끽하며 그와 약속한 술집으로 들어갔다. 첫 만남 때 들어갔던 술집과 비슷한 구조였다. 룸 형식에, 사생활 존중이 철저히 지켜질 것 같은 고풍스러운 외관, 본채에서 멀리 떨어진 별채도 있고 옛스러운 분수대나 심지어 기와도 보였다. 

‘취향이 참….’

정치인들이나 돈 많은 작자들이 들락거리는 곳 같은데 서울 시내에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다. 중심부에서 많이 떨어진 외곽 지대기는 하지만 복작대는 서울과는 다른 세상인 것 같다. 

윤수가 가게를 둘러보며 은기의 취향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커다란 손이 그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힘이 세게 들어가 있지도 않고 나른하지도 않은 담백한 손짓이었다. 

”방금 내 취향 올드하다고 속으로 깠죠.“

독심술도 하냐. 눈치가 백단이다. 윤수가 흠칫 놀라며 돌아보았다. 역시 하은기다. 단추 하나 푼 하얀 와이 셔츠에 은색 목걸이, 찢어진 곳 없이 깔끔한 진한 청바지가 탄탄한 다리를 감싸고 있었다. 키도 처음에 그가 생각했던 것처럼 한참 위로 고개를 치켜들어야 하는 높이다. 항상 웃던 눈은 장난스럽게 투덜대느라 모나게 휘어 있었다. 

“어쩔 수 없었어요. 우리 삼촌이 운영하는 체인점인데, 여기만큼 보안 잘 되는 곳도 없어서.”

“그런 거 아냐. 좋은 곳이라고 생각했어.”

윤수가 시치미를 뗐지만 역시나 씨알도 안 먹혔다. 은기는 피식 웃더니 가게를 눈으로 휙 훑고, 다시 윤수의 눈을 정면으로 들여다 보았다. 

“거짓말.”

윤수는 그도 모르게 넋을 놓고 은기의 얼굴을 올려 보았다. 메이크업을 지우지 않고 온 모양인지 화장기 없는 맨 얼굴과 다른 아우라가 느껴졌다. 맨얼굴 쪽은 자유분방하고 활달한 매력이 있는 반면, 이 쪽은 좀 더 차갑고 윤곽과 선이 뚜렷해 타인과 선명히 구분된다. 옅은 색소의 눈망울이 인조적인 까만 베이스 메이크업으로 한층 건조해졌다. 

어젯밤, 저 눈 속에 피윤수, 그 자신이 들어갔다. 펼쳐진 까만 밤 속에서 그는 은기에게 먹히고, 삼켜지고, 절정을 맞았다. 마치 거울의 방에 갇혀 헐떡대는 제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은기의 눈이 거울이고, 옅은 갈색 표면의 거울은 더없이 투명한 그를 담아냈다. 

저것은 은기가 가진 여러 얼굴 중 하나인가. 동시에 타인에게 관심 없는 사람이라도 누구나 한번쯤 시선이 가는 등대이자 별, 스타성. 이래서 모델을 하나 보다. 윤수는 이를 타고난 것이라 생각했다. 

그 시선을 이상한 것으로 해석했는지 은기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물러나서 제 얼굴을 더듬는다. 

“메이크업도 못 지우고 바로 왔는데, 괜찮아요? 이상하면 지울까? 클렌징 티슈가 있었나….”

“아, 아니. 괜찮아. 너무 잘생겨서 놀랐어.”

홀린 듯이 본심을 말하다가 윤수는 제 입을 틀어막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당사자 앞에서 뭐라는 거람. 

은기가 웃음을 짧게 흘리고는 그를 안으로 잡아 끌었다. 

“솔직해서 좋네요. 들어가죠.”

은기는 가게 매니저와 몇 번 이야기하더니 2층 방으로 올라갔다. 가장 구석자리지만 문을 열자 가장 고즈넉하고 잘 꾸며진 룸이 보였다. 신선놀음이라도 할 요량인지 물고기가 노니는 방 안에 작은 연못도 있었다. 전면 유리라서 윤수가 불안하게 두리번대자 은기는 그를 끌어당겨 넓디 넓은 소파에 앉았다.

“안에서는 보이는데 밖에서는 안보이는 특수 유립니다. 걱정 말고 있어요.”

윤수의 불안을 꿰뚫고 바로 안심시켜 주는 것이 어른스러웠다. 일찍부터 일을 시작한 사람 특유의 넉넉함도 느껴졌다. 그는 언제부터 일을 시작한 걸까. 윤수는 작은 호기심이 생겼다. 

‘말이나 행동도 자리에 맞게 적당히 잘 하는 것 같고.’

오다가 그가 출연하는 예능을 좀 봤는데, 정말 여직원들의 말대로 잘 뛰고 예능감도 좋았다. 청산유수에 투머치 보다는 적재적소에 필요한 말을 잘 꽂는 타입이었다. 예능의 대부라 불리는 정혜석이 아끼는 수제자라고 하더니 틀린 말은 아닌가 싶었다. 

기와 딸린 가게 답게 나오는 음식도 퓨전 한식이었다. 색깔별로 다채롭게 차려진 요리를 덤덤하게 보다가 은기가 불쑥 말을 꺼냈다. 

“수정 누나 메이크업 끝내주는데 한 번 받아보든가요. 촬영장 놀러 오면 잠깐 해줄 수 있을 걸요.”

갑자기 왜? 윤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까부터 긴장하느라 양 손을 공손하게 무릎 위에 올려둔 것도 잊고 있었다. 

“내가? 네 촬영장에?”

연예인도 아닌데 메이크업 받을 일이 어딨겠냐는 말은 어깨를 추어올리며 뱉는 은기의 눈짓에 가라앉는다. 

“그럼 여기 윤수 형 말고 누가 있어요.”

“민폐 같은데….”

은기는 곁들여 나온 과일 한 점을 입에 넣더니 우물거렸다. 부드럽게 넘어가는 달콤한 과실을 맛보며 전혀 어색하지 않게 분위기를 리드해 나간다. 

본격적으로 먹방을 할 생각인지 셔츠까지 걷었다. 윤수의 눈이 멋대로 그 곳에 꽂힌다. 걷은 셔츠 안에 감춰졌던 단단하고 슬림한 팔이 드러났다. 

“전혀. 수정 누나 평범한 사람 꾸미는 거 좋아하거든요. 자기도 모르던 모습을 끄집어 내는 게 제일 좋다고. 그 사람,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천직이예요.” 

자신도 모르는 모습을 끄집어 내는 것. 윤수는 충동적으로 말했다. 

“지금 한 것도 그 분이 해준 거야?”

과일을 집던 손이 허공에서 잠깐 멈췄다. 

“어, 맞아요. 어떻게 알았어요?”

“그럴 것 같아서.”

윤수는 수정이라는 사람이 해준 이 메이크업이 그의 본질과도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다. 

그에게는 사람들과 넘치지 않게 어울리다가도 빠질 때는 냉정하게 뺄 수 있는 칼같음이 있었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이끌리게 되는 아득한 향이었다. 

생각하는 사이 은기의 얼굴이 코 앞으로 다가와 있어서 윤수는 흠칫 놀랐다. 언제 이렇게 가까워진 거지. 

“이제 긴장 좀 풀렸어요?”

“뭐, 뭐가?”

“만날 때부터 계속 어려워 하길래. 풀어주려고 노력한 거라구요.”

“그랬어?”

은기의 옅은 눈이 짙어지더니 더욱 근접했다. 그가 손을 올려 윤수의 뺨을 꼬집듯 쓰다듬었다. 은기는 확신했다. 역시 촬영 내내 상상했던, 어젯밤의 촉감이 맞았다. 부드럽고 말랑말랑하다.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잔잔하고 담백하던 분위기가 휙 농밀하게 변한다. 

“솔직히 볼 때부터 이러고 싶었는데.”

은기가 뺨을 만질 때마다 윤수는 그 곳에서 작은 스파크가 일었다. 어제의 열기가 기습적으로 찾아들었다. 작은 인공 연못 속의 고기가 붉은 입을 내밀어 수면 위로 뻐끔댄다.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은기는 윤수의 입술로 키스를 할듯말 듯 제 입술을 가까이 대었다. 그의 손은 어느 새 윤수의 머리 뒤로 가있고 닿은 입술의 촉감이 각질 하나 없이 매끈하고, 간지러웠다. 도자기로 구운 조명 속에 휘감긴 주홍빛 불이 은기의 실루엣을 비췄다. 그가 연신 속삭였다. 

“사람들 눈도 있고. 긴장도 안 풀린 것 같아서 참은 거예요.”

접촉하기 1초 전 거리다. 하은기가 사람들에게 취하는 인위적인 거리가 아닌, 사적인 공간으로 끌어들이는 은밀한 지름길, 그리고 초대. 윤수는 제 앞에 있는 사람이 TV에서나 볼 수 있는 사람이란 것도 잊었다. 그래서 평소라면 할 수 없을 대범한 말도 뱉을 수 있었다. 

“이거 하려고 만나자고 한 거야?”

입술에 제 입술을 대고 은기가 입을 달싹였다. 

“왜, 안 되나?”

입술끼리 부대껴도 소리가 난다는 것을, 윤수는 처음 알았다. 온 몸의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서고, ‘하은기’ 라는 사람에게 집중된다. 그의 하나하나가 몸 속으로 파고들었다. 

잠깐 하진기가 떠올랐지만 윤수는 그에게서 멀리 도망쳐 지금 눈 앞에 있는 맹렬한 포식자에게로 안착했다. 

윤수가 작게 도리질 쳤고 은기는 작게 웃었다. 윤수의 뒤통수를 누르는 손에 힘이 들어간 순간, 은기는 얼굴을 옆으로 틀어 깊게 키스했다. 

입이 위아래로 크게 벌어졌다가 삼키듯 다시 닫히고, 또 몰아친다. 혀가 뜨거운 용암처럼 윤수의 속으로 말려들었다. 

전에 코가 부딪쳐 애먹었던 경험 때문인지 윤수도 그에 맞춰 제 입술을 밀치고 들어오는 혀에 각을 맞췄다. 과일향이 옮아온다. 

질척대는 혀가 섹스마냥 얽히고, 윤수의 귀에 이명이 크게 울렸다. 아래로 폭발적으로 내리 뻗는 열에 묵직해졌다. 윤수는 은기가 입을 떼자 아쉬운 생각까지 들었다. 

“섰네요. 뭐, 나도 마찬가지지만.”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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