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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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빅-팡!

구도를 잡고 플래시가 터진다. 

단독 의류 화보였고 밝은 이미지가 중요한 곳이라 표정이 환해야 했다. 

반사광 앞에 서 있는 모델은 자켓을 자유자재로 날개처럼 펼치거나 다리를 양 옆으로 펴거나, 악동스러운 미소를 짓기도 했다. 그 어떤 포즈를 해도 우스꽝스러워 보이지 않고 하이패션 특유의 멋이 있었다. 그 멋을 살려주는 이국적인 외모도 한 몫을 했다. 

하지만 그 중심에 서 있는 훤칠한 모델은 오늘따라 도통 사진사의 의도를 따라주지 않았다. 갈아입기도 하고 컨셉도 바꾸고 옷을 어깨에 반쯤 걸쳤다가 내리기도 한참, 결국 사진사는 촬영을 중단시키고 그를 불렀다. 

“하독종. 오늘따라 왜 이렇게 집중을 못 해? 무슨 일 있어?”

지각, 무단 결근 같은 것은 곧 죽어도 하지 않았던 독종이다. 신인 시절부터 촬영도 그만큼 철두철미하게 해내 왔다. 그래서 사진사들끼리 독종으로 통했다. 이 바닥 독종은 널렸지만 그 중에서도 아주 최고 독종이었다. 그런 그가 집중을 못한다니, 놀랄 노 자였다. 

“정말 일 있어서 이런 거야? 너 할머니 돌아가셨을 때도 이러지 않았잖아.”

“하하, 뭐…. 근데 제가 그렇게 독종이었던가요? 그때 정말 슬펐는데.”

색소가 옅은 눈이 물결처럼 조금 일그러진다. 우울한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사진사는 그런 그를 보며 코웃음쳤다. 

“슬픈 놈 치고는 너무 잘 웃었어. 뒤에서 몇몇 놈들이 네가 사이코패스 인 건 아닌가 수군댔다니까. 나중에 촬영 끝나고 나서 대성통곡 하지 않았으면 나도 믿었을 거다. 쯧쯧.”

“실망입니다, 조 선생님. 저를 몇 년이나 보셨으면서.”

메이크업한 피부가 더욱 하얗게 빛을 내고 말끔한 얼굴이 장난스럽게 웃는다. 반쯤 어깨 아래로 내려온 붉은 자켓이 들썩였다. 자켓 카라 위로 매끄러운 피부와 단단한 골격이 보였다. 그가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호통을 치는 사진사에게 애교와 정중한 사과를 섞는다. 

“아무튼 죄송합니다. 다시 할게요.”

“메이크업 수정도 다시 해야겠네. 수정아! 은기 좀 다시 고쳐 봐라.”

“갑니다~!”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쪼르르 달려온다. 어차피 메이크업 수정을 다시 할 거니 은기는 이마에 난 땀을 손등으로 훔쳤다. 갈색 눈썹에 땀 하나가 또르르 흘러내려 높은 콧잔등을 스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분명 형과 3년이나 사귀었다고 했다. 그런데 섹스가 처음이라니? 

’거짓말 이겠지.‘

형한테 물어볼 수도 없다. 형 전애인이랑 잤는데 섹스가 처음이래, 어떻게 된 일이야? 이렇게 물어본단 말인가? 

은기가 차갑게 웃었다. 

’미쳤지. 죽어도 말 못 해.‘

처음의 의도와는 완전히 다르게 되었다. 그저 확인만 해보려고 했는데. 

은기는 간지러운 붓의 질감이 얼굴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고 파우더 가루가 날리는 것을 보면서 눈을 감았다. 

’직접 물어볼 수 밖에 없나. 옛 일 들추는 거 별론데.‘

누군가를 사귀어도 예전 일은 예전으로 묻는 게 제일 좋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였다. 그렇다고 어제의 섹스가 미친 듯이 좋지만도 않았는데, 왜 이렇게 생각이 끈끈하게 떨어지지 않는 것인가. 

은기의 상상 속에서 ’그‘ 는 재탄생하고 있었다.

그는 평범한 듯 잘 손질된 까만 눈썹 아래 동그란 눈이 인상적이었다. 머리는 투블럭에 양 옆으로 부드럽게 흐르는 듯한 짙은 블랙. 

옷은? 그가 뭘 입고 있었지. 푸른 계열 체크무늬 티셔츠에 어두운 회색 면바지였다. 그 옷을 벗기고 만졌을 때 촉감에 놀랐다. 

피부가 생각보다 정말 좋았다. 말랑말랑하고, 그렇다고 너무 늘어지지도 않았고. 

체격은 많이 말랐다. 

코는 아주 높지는 않았지만 동양적으로 모양이 예뻤다. 입술도…. 

은기의 목울대가 한차례 크게 일렁였다. 입술을 생각하자 자연스럽게 키스가 기억의 수면 위로 올라온다. 키스할 때 반응이 좋아서 자신도 모르게 휩쓸렸던 것도 생각났다. 

섹스할 때는 덤덤할 것 같던 동그란 눈이 마구 일그러지면서 아프다며 울었다. 나중에는 조금 느끼는가 했지만 확실히 뒤만으로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술과 섹스의 잔향으로 그가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앞도 열심히 풀어줬으니까. 

’눈 많이 부었겠지? 엄청 울던데. 아, 또 생각했다.‘

그를 생각하자 아래에 반응이 오려고 한다. 

은기는 재빨리 생각의 채널을 돌렸다.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귀요미 1, 2를 떠올렸다. 귀요미들은 러시안 블루 종으로 그가 키우는 고양이였다. 꼬리가 살랑살랑 자신을 반기며 흔들리고 다리 위로 풀쩍 뛰어 올라와서 그 귀여운 분홍 혓바닥으로 뺨을 핥고…. 

그런데 순식간에 귀요미 1이 ’그 사람‘으로 변하더니 야한 얼굴로 그의 뺨을 핥고 있다. 

은기는 감은 눈에 더욱 압력을 가해 질끈 짓눌렀다. 미간에도 주름이 패어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잔소리를 하는 것이 따갑게 들린다. 

’제발.‘

일터에서 발기라니. 절대 사양하고 싶다. 

그 순간, 은기의 휴대폰에 불이 번쩍번쩍 울렸다. 촬영 중이라 무음 모드로 해놓아 그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

한편, 그도 이상한 호기심에 빠져들어 있었다. 작은 번역 회사에 나름 수석 보조로 앉아 있었고, 공문서 번역에 한창이던 때였다. 주변에서 책 넘기는 소리와 간간이 전화하는 소리, 번역 문제로 찾아온 사람과 응대하는 소리도 들렸다. 

그런데 그가 보고 있는 영어 철자가 하얀 종이 위에서 살아있는 지렁이처럼 꼬부랑 꼬부랑 산을 넘는다. 이미 그의 시선은 종이 그 너머를 보고 있는 듯 했다. 

은기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계속 메아리를 울리고, 메아리는 여러 번 에코로 그의 귀를 두들겼다.

[아무튼 반갑습니다. 얼굴 본 건 처음이네.]

분명 은기는 첫만남 때, 그렇게 이야기했다. 급기야 그의 펜이 손 위에서 원을 그리며 돌아간다.

’처음 봤다고 했는데 어떻게 바로 얼굴을 알아봤지?’

분명 그를 보자마자 아는 사람처럼 반응했다. 사진이라도 본 것일까? 그 하진기가 동생한테 사진까지 보여주면서 미주알고주알 애인임을 밝혔다고? 

‘진기가 그런 성격은 아닌데.’

진기는 가족 이야기를 극도로 아꼈다. 얼핏 동생이 있다고 들은 것 같기는 한데, 이름조차 모를 정도면 말 다 했다. 

‘평소에 형제끼리 친하다고 했고 사귀는 것도 알 정도인데…. 보여 줬을 수도. 그런데 우리끼리 찍은 사진은 한 장도 없을 텐데.’

진기가 자신과 사진 찍는 것을 극도로 싫어해서 그와 남아 있는 사진은 없었다. 하다 못해 먼 곳으로 여행을 간 적도 없었다. 심지어 섹스도….

타다닥!

원을 그리며 그의 손 위에서 돌아가던 펜이 원심력을 잃고 날아가 바닥에 추락했다. 떨어진 펜 소리가 꽤 요란했는지 몇몇 사람의 시선이 이 쪽으로 향한다. 그는 멋쩍게 턱짓으로 사과의 인사를 하고 허리를 굽혀 펜을 주웠다. 

‘정신 차리자, 피윤수.’

그는 제 이름을 주문처럼 읊으면서 멘탈 정비를 하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제 정신차리고 일할 시간이다. 

하지만 얼마 못가 그는 제 귀를 귀신같이 잡아채는 이름에 또다시 공문서의 글씨를 지렁이로 변모시켰다. 회사 여직원 둘이 휴대폰을 켜놓고 휴식을 취하는 공용 소파에서 키득대고 있었고, 말소리 사이로 그의 이름이 들려왔다. 

“하은기 쩐다. 뛰는 거 봐. 체대 출신이야?”

“아닐걸? 모델 출신 예능인이라고 소개하던데. 아, ‘선샤인’ 노래 알지. 그 노래 부른 아이돌 그룹 리더기도 했을걸.”

”아, 그 노래! 이미 해체된 그룹 아냐? 대박. 거기 있었구나. 지금은 모델이라면서.“

모르던 정보가 그, 피윤수에게 입력되었다. 술자리에서 차마 다 이야기하지 못한 하은기 인생의 뒷페이지가 존재했다. 지금은 해체된 아이돌 그룹의 리더 출신, 그리고 예능에서 몸을 쓰는 것도 아주 잘한다. 체대 출신이냐고 의심될 만큼. 

윤수는 바로 납득했다. 그 몸은 운동을 잘 할 몸이다. 단순히 헬스장에서 기구로 다져진 조각같은 몸보다는 여러 활동으로 자연스럽게 새겨진 활력있는 근육이었다. 그런 주제에 얼굴은 이목구비가 너무 선명하고 색소가 옅은 느낌이 만연하다. 단순히 염색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그 몸에 깔려서 허우적대던 지난 밤이 떠올라 윤수는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누가 볼까 종이 위를 기어다니는 지렁이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 와중에도 이야기는 끊이지 않는다. 

”잘생긴 애들 다 거쳐가는 루트지. 아이돌, 모델, 예능, 그러다가 배우도 하려나?“

”배우는 할 생각 진짜 없다고 하던데. 자기는 자신 있는 것만 한다면서.“

”너 팬이었어? 자세히도 안다.“

”그냥 쟤가 고정으로 출연하는 예능 몇 개 보다보면 다 알아.“

”거짓말, 팬이구만?“

아니라며 손을 휘젓는 여직원의 말을 마지막으로 윤수는 지렁이를 글씨로 간신히 되돌렸다. 그리고 퇴근하면서 그가 출연하는 고정 예능을 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진기의 동생이라는 점이 그를 공격했지만 윤수는 오기가 생겼다. 

진기와 사귀는 것도 아니고, 그에게 매달린 것도 아니고, 단지 그의 동생과 만나고 있을 뿐이다. 그게 뭐 어때서. 그런데 마음 한 구석에서 빨간 꼬리를 단 놈이 양심이라는 창을 들고 윤수를 다시 찔렀다. 

너 진기 동생이라서 만나는 거 아니야? 졸렬하고 치사한 새끼. 조금이라도 닮은 모습 찾고 싶었어? 그래서 이용하는 거냐? 

깊게 생각하면 자괴감이 들 것 같아 윤수는 일에 몰두했다. 아까부터 휴대폰에 계속 눈을 고정하느라 일도 제대로 안 되었다. 

‘보지 말자.’

아예 보이지 않도록 멀리 치워 두었다. 그의 마음을 어지럽히던 은기도 마음 속에서 밀어내고 그는 공문서 번역에 힘썼다. 그래서 얼마 뒤, 그는 휴대폰의 작고 짧은 진동을 놓쳤다. 

-지금 어디예요? 

은기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 작품 후기 ==========

한편 더 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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