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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강간당해요?” 

188cm의 장신이 남자의 위에서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하얗고 잘생긴 얼굴에 작은 땀이 맺혀 걸렸다. 두께감 있는 근육보다는 전체적으로 호리호리하면서 균형 잡힌 근육체다. 남자는 그가 처음 탈의했을 때 놀랐다. 그저 마른 줄로만 알았는데 판판하게 광활한 등판이나 얼굴만큼이나 예쁘게 선이 잡힌 복근, 탄탄한 허벅지가 남자를 반겼다. 

그 몸은 빠른 속도로 남자의 옷도 벗겼고, 지금은 그의 위에서 황당하게 웃고 있다. 웃음이 가신 자리에 한숨이 빼곡히 대신한다. 

“너무 떠니까 내가 나쁜 놈 같잖아. 쌍방 합의한 건데, 사람 쓰레기로 만들지 말죠.” 

말하면서도 다시 손가락이 부지런히 구멍을 넓힌다. 손가락도 피아노 치는 사람처럼 길고 단단했다. 며칠 전에 자위 차 썼던 딜도가 구멍을 드나드는 기분이었다. 녹진하게 몸을 감는 침대 시트가 땀으로 젖어 간다. 

“엉덩이 더 들어봐요.”

시키는대로 남자가 허리에 힘을 주고 엉덩이를 좀 더 들었다. 만족스러운 미소가 잘생긴 얼굴에 스쳐 지나간다. 젤을 바른 손가락이 움찔대며 손가락을 삼키는 구멍에 공을 들이고 젤이 녹아 엉덩이 사이로 흘러내린다. 찌걱대는 소리가 야했다. 

‘지금 뭐하는 거지….’

남자는 누워서 호텔 천장의 밝은 조명과 그의 얼굴을 번갈아보면서 숨을 삼켰다. 선이 굵은 얼굴선에 곱상한 이목구비가 조화된 우아한 얼굴이었다. ‘그’ 와도 확실히 닮은 구석이 있다. 집중할 때 짓는 표정이라던가…. ‘그’를 생각하니 미약하게 아래에서 놀던 쾌감이 몇 계단 뛰어오른다.

남자는 움찔거리다 기어이 입 밖으로 흥분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아흑!”

그가 기어이 남자의 약점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남자는 온 몸을 사시나무 떨 듯 떨면서 닿을락말락 다가온 절정의 기운을 참아냈다. 몇 번 더 찌르더니 남자가 거의 넘어갈 때쯤 되자 꽤 진지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구멍에서 빼내었다.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 그가 젖은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까만 눈을 남자에게로 내렸다. 촬영 때문에 염색한 것인지 진한 갈색이었다. 눈썹도 갈색, 긴 속눈썹이 우아하게 차양을 드리운다. 음영이 질 정도로 높은 코가 꼭 외국인 같았다. 

남자는 호텔로 들어와 방 문을 열자마자 키스할 때 저 높은 코 때문에 부딪쳐 애를 먹었던 기억이 났다. 남자의 시선이 그의 입술에 꽂힌다. 문 바로 옆 벽에 밀어서 힘으로 몰아붙이던 키스가 정말 격렬했다. 그러다 능숙하게 리드하며 입 속을 자유자재로 노닐던 혀가 생생했다. 그 입이 예쁘게 열렸다. 

“정말 싫다고 하면 그만둘게.”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남자는 조금 당황한 듯 했다. 열띤 흥분이 얼굴 가득 차 있었고 뜨거운 숨을 뱉고 있었다. 단정하긴 하지만 지극히 평범한 얼굴인데 이 어디에 끌린 걸까. 그가 피식 웃었다. 

“싫어요?”

조금 만 더. 더하면 갈 수 있었는데. 남자가 젖은 눈으로 그를 올려보았다. 눈빛으로 애원했는데 그는 입으로 말해주길 원하는 눈치였다. 남자는 이를 악물고 솔직하게 말했다.

“아, 아니. 계속해. 처음이라 그래.”

그러자 바로 손가락이 진입해 들어온다. 그만둘까 물었던 사람답지 않게 거칠고 강한 힘이 실려 있었다. 미묘한 웃음이 그의 입가에 계속 걸려 있다. 

“처음? 당신 게이라면서. 배 맞춰보고 게이라고 도장 찍은 거 아니었어?” 

“그, 그게 아니…. 으응!”

또 그 곳을 찔렀다. 꼭 남자와 섹스를 해봤어야 게이라고 판정하는 건 아니라 항변하려 했지만 이제 어떻게 되든 좋았다. 

남자가 허리를 뒤틀고 찾아오는 쾌감을 본능적으로 피하며 발버둥 쳤다. 하지만 그는 어림없다는 듯 다른 손으로 남자의 허벅지를 누르고 더욱 세게 찔러 넣었다. 날카롭게 단련된 창끝처럼 견고한 손가락이 구멍을 마구 휘젓는다. 약점이 수차례 닿자 결국 참지 못하고 남자는 파정했다. 머리에 번쩍번쩍 불이 일었다. 다리가, 발가락 끝이 파르르 떨렸다. 눈에 생리적인 물이 괴었다. 죽을 것 같았다. 

그건 그도 마찬가지인지 욕망이 가득한 눈으로 복근 아래에서 흉흉하게 발기해 있는 것을 남자의 질퍽한 엉덩이 사이로 문질렀다. 얼굴과는 다르게 중심은 흉폭하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못 참겠으니까 바로 하죠. 갑니다.”

급한 예고 뒤에 콘돔을 씌운 성기가 밀고 들어왔다. 끄트머리만 들어왔을 뿐인데 벌써부터 숨이 찼다. 

‘말도 안돼….’

너무 컸다. 꾸역꾸역 들어오는 것에 이러다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찾아들었다. 

“아파…! 천천히, 그만, 아아…!”

시트가 남자의 손에서 처참히 구겨졌다. 허리를 가차없이 밀면서 그는 남자의 손 위를 감쌌다. 성기만큼 손도 컸다. 그가 머리를 숙여 남자의 귓가에 달래듯 속삭였다. 

“조절할 테니까 힘 빼요. 안 아프게 해줄게.”

남자의 귓바퀴에서 사탕처럼 그의 저음이 녹아든다. 구멍을 밀치고 들어오던 속도도 조금 느려졌다. 남자는 미친 듯이 고개를 흔들며 엉덩이에 가했던 힘을 줄였다. 성기를 자를 듯이 조이던 것이 이완되자 잘했다며 뺨에 상처럼 키스해준 그가 다시 위로 쳐올렸다. 흥분을 가라앉힌 그가 침착하게 물었다. 

“여기?”

고개가 좌우로 짧게 흔들린다. 힘이 없어 보이는 고갯짓이지만 의사는 명확했다. 귀여워. 속으로 생각한 그가 피식 웃더니 남자의 다리를 더 벌리고 다른 곳을 찔렀다. 

“그럼 여기?”

반응이 솔직하다. 남자의 얼굴이 삽시간에 붉어지며 어깨까지 떨었다. 허리도 위로 튀었다. 

“으, 응.”

그의 잘생긴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그리 예감이 나쁘지 않다. 엉덩이가 들썩이는 것이 마음에 들어서 그는 남자의 허리를 들어 올렸다. 성기를 물고 있는 구멍이 놀란 듯 뻐끔댄다. 무게가 실리자 침대 위로 닿는 무릎이 더욱 깊이 시트에 묻혔다. 그는 남자의 엉덩이를 잡고 아래로 찍어눌렀다. 빛을 받지 않아 창백한 엉덩이에 손모양의 붉은 자욱을 남긴다. 

‘그렇다고 썩 좋지는 않지만.’

더 원하게 될까. 끝나고 나면 계속 생각이 날까. 알 수 없는 자신의 마음에 몸을 맡기고 그는 남자가 반쯤 기절할 때까지 몰아세웠다. 

화려한 인테리어로 가득 찬 스위트룸은 신음과 뜨거운 호흡, 끝내 절정에 치달은 짧은 비명으로 가득 찼다. 

***

지금도 끊임없이 파고드는 깊은 것에 온 몸을 찔리는 기분이었다. 그는 신음하면서, 허리를 감는 시트를 떼어냈다. 대단한 섹스였다. 아직 열이 식지 않는다. 사실 너무 아파서 정신없이 울었고, 제대로 느낀 건지는 모르겠다. 처음 하는 관계인데 당연히 느낄 리가. 

고통과 쾌감이 섞여 마지막에는 정말 느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확신은 없었다. 되돌아가서 제 몸에 대고 다시 물어볼수도 없는 노릇이다. 

‘생각하지마.’

머리를 애써 비우면서 남자는 눈을 떴다. 그런데 다 떠지지 않는다. 안 봐도 붕어처럼 부어있을 게 분명했다. 협탁으로 손을 뻗어 휴대폰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더듬었더니 다른 것이 걸렸다. 종잇조각이다. 어쩐지 소설이나 영화에서 많이 본 장면이 남자의 머릿속을 유성우처럼 스쳤다. 하룻밤 섹스를 하고 나서 쪽지를 남기고 간 정체 불명의 남자 같은.

‘정체 불명은 아니지.’

쪽지에 정갈한 글씨체로 ‘일어나면 연락해요. 일정이 있어서 먼저 가봅니다.’ 라는 예의 바른 문구가 쓰여 있었다. 그리고 남겨진 명함에 그의 직업, 소속사, 개인 휴대폰 번호까지 말끔히 박혀 있다. 

그는 하진기의 동생, 하은기였다. 서울지검 검사 하진기의 친동생이자 잘나가는 모델인 하은기. 매스컴도 탔고 예능에도 고정으로 한두군데 나온다. 입담이 꽤 믿을 만해서 PD들도 최근 주목하고 있는 신인 예능인이었다. 그래도 모델 일은 계속 할 생각인지 꽤 열심히 잡지 화보나 CF에도 얼굴도장을 찍었다. 

최근 그의 소속사로 시놉시스도 꽤 들어온다는 찌라시가 나돌았지만 배우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위의 사항들은 어젯밤 그와 처음 만났을 때 근처 술집에서 나눈 이야기였다. 

‘괜히 얽힌 건가. 이제 진기는….’

그의 한자락이라도 더 보려고 피붙이 동생을 만난 자신이 쓰레기 같았다. 생각만 해도 눈시울이 붉어진다. 가슴이 꽉 조여서 답답하다. 미련을 떨치려고, 모든 것을 정리하기 위해서 갔다가 이런 사단이 났다. 어제 벌어진 일들이 필름처럼 빠르게 지나간다. 

태극기가 펄럭대는 깃대 밑에서 그는 하염없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히는 회색 벽이 웅장한 성처럼 그의 눈 앞을 가리고 있었다.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은 오늘도 빈틈없이 인간미가 없다. 

선선한 가을 날씨라 그리 어려운 기다림은 아니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마음은 더욱 진탕이 되었다. 정리하려고 온 자리였다. 그런데 진기의 퇴근 시간이 다가올수록 마음 속에 폭풍이 몰아치고 매달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진기와 대학 시절 사귀었고, 3년 정도 관계는 지속되었다. 진기는 이렇게 오래가는 관계가 없었다며 사귀던 내내 신기해 했다. 법학도였던 진기와 달리 영문과로 과도 달랐지만 상성이 제법 잘 맞았다. 그러다 각자 길이 달라 활동 영역이 달라지고 자연스럽게 헤어졌다. 

이상하게 다른 사람을 사귀어도 여전히 생각이 나서 그는 종종 진기가 일하는 곳으로 갔다. 우연을 가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진기는 그를 친구 이상으로는 절대 대해주지 않았다. 진기는 관계에 있어서는 몹시 깔끔한 인간이었다. 이미 그는 하진기라는 인간 속에서 연인이 아닌 ‘친구’ 라는 카테고리로 넘어가 있었던 것이다. 

그 카테고리를 넘어서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도 얄짤 없었다. 그렇다고 친구에서 내치지는 않았지만 절대 거리를 좁혀주지는 않는다. 허무한 미련임을 그도 잘 알았기에 정말, 오늘은 기필코 정리하려 온 것이었다. 

한 번만 보면 마음이 정리될 것 같았는데, 보면 더 포기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발길을 돌리려 했다. 이제 끝이다. 다시는 이런 궁상은 떨지 않으리. 잘 있어라, 하진기. 

그리 마음 먹고 회백색 건물을 내려가려던 차였다. 하지만 등을 잡아채는 듣기 좋은 저음에 그는 꼼짝 없이 붙들렸다. 

[우리 형 기다려요?]

우리 형? 이상한 예감에 몸을 휙 돌리니 저 삭막해 보이는 건물 속에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남자가 자켓 주머니에 손을 꽂고 걸어 나온다. 

검은 가죽 자켓에 평범한 청바지인데 완전히 보통 사람과 달라 보인다. 다리가 너무 길고 키도 커서 시선을 어디에 둬야할지 그의 시선이 위아래로 왕복했다. 얼굴은 신기할 정도로 작은데 서양인처럼 이목구비도 큼직큼직하고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칼과 눈썹이 하얀 얼굴 바탕을 그림처럼 장식하고 있었다. 왠지 익숙한 얼굴이다. 

그가 주머니에 꽂았던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청하는 듯 했다. 

[나 하진기 동생 하은기.]

[진…기, 동생?]

잘생긴 얼굴이 시원스럽게 긍정의 미소를 짓는다. 치열도 고르고 하얀 데다 가지런하다. 

[그런 셈이죠. 사정은 대충 들어서 알고 있고. 같은 대학 동창이라면서요.]

순식간에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들어서 알고 있다면, 사귄 것도 알고 있다는 이야기인가. 그에 대한 이야기는 모호하게 흐린 채 은기는 눈치 빠르게 말했다. 

[아, 오해하지 마요. 형 대학교 다닐 때 두어번 들은 게 다니까. 형이랑 허물없는 사이라 이런저런 이야기 평소에 좀 하거든. 아무튼 반갑습니다. 얼굴 본 건 처음이네.]

그가 어색하게 고개를 까딱인다. 

[아, 예. 반갑습니다.]

이게 반가울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은기는 연신 웃으며 뜻밖의 제안을 했다. 

[이것도 인연인데 술이나 한 잔 할까요?]

깜짝 놀란 그가 펄쩍 뛰었다. 그냥 조용히 돌아가고 싶다. 

[아니, 굳이 그럴 필요는….]

하지만 은기는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곱상하게 생긴 외모와 달리 사람을 리드하는 성격인지 속절없이 끌려 갔다. 

[가요. 내가 살게요. 그 쪽 술 마시고 싶은 얼굴이라서, 나도 마침 마시고 싶고. 겸사겸사.]

내키지 않아 망설이는 그에게 은기는 피식 웃으며 다시 손을 제 주머니로 꽂았다. 

[술친구 싫어요? 아님 일 바빠서?]

[그건 아닌데, 그 좀….]

오늘 네 형과의 미련을 끊으러 왔다. 그러다 용기 없는 바보 새끼는 얼굴조차 마주하지 못하고 이만 사라지려 한다. 이 이야기를 어떻게 꺼낸단 말인가. 침묵하는 그에게 은기가 곤란한 듯 물끄러미 시선을 던지다 한숨 지었다. 

[내 입으로 말하긴 뭣하지만, 나 동종 업계 아니면 술 한잔 하기 어려운 사람인데. 빼지 말죠?]

그가 떨떠름하게 은기를 보았다. 이미 네 입으로 다 말했다만. 하긴, 얼굴을 보면 보통 사람은 아니란 게 확실하다. TV에서나 보던 비정상적인 비율에 믿기지 않는 이목구비에 아우라까지 겹쳐진다. 거기다 자신감 있는 태도나 거침없는 말투, 어릴 때부터 모든 걸 쥐고 태어난 사람 특유의 여유로움까지 느껴졌다. 

술자리로 옮긴 후, 은기는 제 형의 성벽도 알고 있고 자연스럽게 그의 성벽까지 알고 있다는 이야기를 매우 가감없이 했다. 사귄 것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는 술에 취하자 정신없이 눈물을 쏟으며 진기와의 추억을 라디오처럼 방송했다. 어디다 풀어놓을 데도 없었던 지라 한 번에 봇물터진 듯 쏟아졌다.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더욱이 은기는 그의 이야기를 아주 잘 들어 주었다. 어떤 편견이나 이견 없이, 그저 들어주기만 했다. 단순히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이해’ 하는 것처럼 보였다. 

일견 진기와 닮은 얼굴선이나 보면 볼수록 빨려드는 눈빛, 그런 것들이 모호한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쏟아지고, 몰아치고, 휘감는 알싸한 감정들을 횡설수설 은기에게 뱉고 나니 홀가분한 것도 같았다. 이제는 정리할 수 있겠다는 근본 없는 용기조차 솟았다. 

술자리 막판에 거의 이성도 잃고 정신도 잃고 몸의 균형도 잃었던 그 때였다. 은기가 불쑥 그 웃는 얼굴로 어울리지 않는 제안을 뱉었다. 

[혹시, 나랑 자 볼 생각 있어요?]

술자리를 처음 권할 때처럼 너무 자연스러워서 그는 잘못 들었나 싶었다. 

[뭐어, 왜?]

[그냥, 궁금해서.]

[뭐어가?]

담백한 대답이 이어졌다. 

[궁금한 데 이유가 필요해요?]

술에 찌든 뇌로 필터를 거쳤을 때 그도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그들은 근처 호텔로 자리를 옮겼다. 짐승처럼 얽히고 서로의 몸에 올라타 미친 듯이 밤을 지내고 나니 이렇게 빈자리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아침이었다. 

그가 밀려드는 기억의 잔상을 몰아내려 제 머리를 마구 쥐어뜯었다. 

“미쳤어. 미쳤어!”

괴로워 해봤자 과거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자괴감을 언어로 다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한참을 지난밤의 실수로 고통스러워하던 그는 우선 쪽지를 다시 읽었다. 

‘연락, 해야 하나.‘

그가 마른침을 삼켰다. 왜 착실하게 그가 하라는대로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시키는대로 명함에 적힌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 몇 번 수신호가 가더니 (대기 음악도 없는 정직한 벨소리였다) 어젯밤까지 줄기차게 들었던 그 목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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