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블레이크가 작아져 버렸습니다
창문을 열자 한겨울의 맑고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스쳤다.
상쾌한 공기, 따사로운 햇살, 청아한 새소리, 침대에 누워 있는 남편님, 모든 것이 완벽했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으며, 새근새근 잠이 든 블레이크의 볼을 톡 건드렸다.
“블레이크, 아침이야. 일어나야지.”
“흐음. 5분만 더.”
그가 잠에 취한 채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어제 그는 밤늦게까지 정무를 살피다가 새벽에야 잠이 들었으니, 무척 피곤할 거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웅얼거리는 블레이크의 모습을 보니 옛날 생각이 났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부드러운 볼을 문질렀다. 이대로 쉬게 해주고 싶지만, 오늘은 텐스테온과 아침 식사를 하기로 했다.
더 자면 늦을 거다.
“황태자 전하, 얼른 일어나세요.”
나는 이불을 휙 걷어버렸다. 그러자 블레이크는 눈가를 찌푸렸다.
“앤시아, 이렇게 아침마다 벗기면 나 너무 힘들어.”
이 사람이 또 오해받을 말을 하네! 단어를 애매하게 생략하지 말라고!
나는 말없이 그를 흘겨보았다. 그러자 블레이크가 야릇하게 눈웃음을 치며 나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부인이랑 있으니까 따뜻하다.”
토끼가 성장한다고 해서 늑대가 되진 않는다. 그리고 우리 남편 역시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새하얀 토끼였다. 조금, 아니 많이 요염해졌지만 말이다.
아무래도 그는 자기가 얼마나 예쁜지 잘 알고 있는 게 틀림없다. 이대로 넘어가서 그가 원하는 건 전부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울컥 차올랐지만,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일어나. 식사해야지. 아버님께서 기다리셔.”
“괜찮아.”
“안 괜찮아.”
탄시놀이 사라지고 리차드는 봉인되었다. 천 년 전의 진실도 밝혀졌고, 로움족의 차별도 줄어들고 있다. 창과의 교역도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며, 제국은 활기차고 평화로웠다.
그리고 블레이크는 건강하고 멋진 청년으로 성장했고, 우리는 늘 함께 있었다.
더 바랄 것이 없을 정도로 행복한 나날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블레이크와 텐스테온의 사이가 아직까지도 서먹서먹하다는 거다.
블레이크가 이렇게 뭉그적거리는 것도 단지 피곤하기 때문만은 아닐 거다. 그보다도 텐스테온과의 식사를 피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크겠지.
우리는 하루에 한 번씩은 셋이서 식사를 함께했다. 하지만 블레이크와 텐스테온, 두 사람은 친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어색해지고 있었다.
차라리 정무와 관련하여 의견 충돌이 있거나 싸워서 어색해진 거라면 화해 자리를 마련해보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벌어진 두 사람의 사이는 좀처럼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자자, 얼른 일어나!”
나는 블레이크를 억지로 일으켰고, 결국 늦지 않게 필리아궁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시간에 딱 맞춰서 갔음에도 텐스테온은 먼저 도착하여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님, 벌써 오셨어요?”
“앤시아, 오늘도 무척 예쁘구나.”
“아버님도 근사하세요.”
우리는 평소처럼 인사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말없이 고개만 살짝 숙일 뿐이었다. 텐스테온도 별다른 인사말 없이 넘어가려 했다.
이래서는 안 된다.
나는 아버님에게 강렬한 눈빛을 보냈다.
‘블레이크한테도 인사를 하시라고요! 가벼운 칭찬! 칭찬! 어서!’
“흐흠.”
나의 눈빛을 제대로 읽었는지. 텐스테온이 헛기침을 하며 블레이크를 바라보았다.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잠시 망설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음…. 너도 예쁘다.”
“…….”
“…….”
블레이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고, 나도 할 말을 잃었다.
아버님, 그건 아드님께서 원하는 칭찬이 아닐 겁니다….
다른 건 다 뛰어나신 분이 어째서 블레이크와 관련된 문제만 나오면 헛다리를 짚으시는지 모르겠다.
결국 오늘의 아침 식사도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막을 내렸다.
***
두 사람의 거리는 언제쯤이면 가까워질 수 있을까?
사실 내가 고민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블레이크는 어린 시절 상처를 받았다. 물론 텐스테온에게는 사정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한들 용서하는 건 어디까지나 블레이크의 몫이었다.
그의 마음이 준비되기 전까지, 그 누구도 강요할 수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저렇게 된 게 나 때문인 거 같아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내가 그때 사라지지만 않았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사이가 좋았을 텐데….
“앤시아 님.”
한숨을 쉬며 장미꽃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남자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은한 님!”
“죄송합니다. 폐하와 담소를 나누다 보니 조금 늦었습니다.”
“아니에요. 저도 금방 왔는걸요.”
텐스테온에게서 은한이 올 거라는 말을 듣고, 유리 온실에서 기다리던 중이었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네. 덕분에 평안하게 지냈습니다. 앤시아 님께서는 어떠셨나요?”
“저도 별일 없이 잘 지냈죠.”
“다행입니다.”
은한의 입꼬리가 은은한 호선을 그렸다. 그는 언제나 잔잔하면서도 우아한 멋이 흘렀다.
“전에 말씀하셨던 책을 가져왔습니다.”
은한은 비단 보자기에 싼 서책을 건넸다.
택리차로 탄시놀을 치료한 뒤, 창의 약초에 흥미가 생겼다. 전에 만났을 때 지나가는 말로 창의 의학서적이 궁금하다고 말했는데, 잊지 않고 가져와 준 거다.
“정말 감사드려요.”
“아닙니다. 그리고 이걸….”
은한의 손에는 옥으로 만들어진 상자가 들려 있었다.
“이게 뭔가요?”
상자부터 너무 귀해 보였기 때문에 나는 차마 받을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물었다.
“목걸이입니다.”
“목걸이요?”
내가 되묻자, 은한이 갑자기 당황하며 설명을 덧붙였다.
“아, 특별한 의미는 없습니다. 혹시라도 전과 같은 위기 상황이 올지 모르니, 통신을 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할 것 같아서요.”
은한은 탄시놀 사건이 마무리될 때쯤, 황궁을 찾아왔다.
그는 그동안 벌어진 일들을 듣고 깜짝 놀라며, 도움이 되지 못한 것을 자책하였다.
그리고 그 뒤로는 보름에 한 번씩은 꼭 찾아와서 안부를 묻고는 했다.
하지만 창을 다스리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 텐데, 계속 오는 건 아무래도 어려울 거다.
이렇게 통신 도구를 통해 필요할 때만 연락을 하는 편이 좋겠지.
“하지만 이건 너무 귀해 보이는데….”
“아닙니다. 제가 원해서 준비한걸요. 양국의 교류를 위한 것이니 너무 부담 갖지 마십시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귀해 보였다. 받더라도 뭔가 답례를 해야 할 거 같았다.
적당한 선물을 고민하는 사이 누군가가 상자를 낚아챘다.
“참으로 자주 오시는군요. 창국의 황제는 무척 한가로운가 봅니다. ”
블레이크가 옥으로 만든 상자를 보며 눈을 서늘하게 내리깔았다.
“블레이크.”
누가 들어도 비아냥거리는 말투였다. 나는 화들짝 놀라서 나무라듯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블레이크는 차가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고향의 음식이라면 충분히 드실 수 있지 않습니까? 어찌하여 계속 기웃거리는 겁니까?”
“블레이크 그게 무슨 말이야?”
뜬금없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었지만, 은한은 뭔가 알고 있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별거 아니야. 부인, 내가 창의 황제 폐하와 긴히 나눌 말이 있는데, 잠시 자리 좀 비켜줄래?”
블레이크는 날 선 표정을 지우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응. 알았어….”
두 사람의 사이가 서먹하긴 하지만, 아스테릭의 황태자와 창의 황제다. 둘만 있는다고 해서 별일은 없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온실 밖으로 나갔다.
***
텐스테온은 은한과 대화를 마친 뒤에도 집무실에 남아서 귀족들이 보낸 서신을 확인하고 있었다.
텐스테온의 업적을 치하하는 아부성 편지나, 자신들의 경조사 보고, 나라가 안정되었으니 재혼을 생각해 보라는 등 하나같이 쓸데없는 것들이었다.
그중에는 유난히 어린 필체의 편지가 하나 있었다.
-폐하는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입니다. 폐하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쉘드론 후작의 손자가 자신의 결혼을 알리기 위해 직접 쓴 편지였다.
그의 손자가 올해 8살쯤 되었지….
이러한 편지는 부모가 대신 써주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특이하게도 본인이 직접 적었다.
게다가 다른 어른이 봐주지도 않고 순수하게 혼자의 힘으로 쓴 듯 격식도 맞지 않고 전체적인 내용도 엉망이었다.
하지만 텐스테온은 그 편지에 유독 눈길이 갔다.
존경이라….
자신은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뿐인 아들조차 지켜주지 못했다. 블레이크의 저주는 풀렸지만, 두 사람의 사이에는 여전히 매워질 수 없는 커다란 감정의 골이 자리하고 있었다.
블레이크가 다시 자신의 손을 잡아주었던 때도 있었다. 그 아이를 품에 안고 연무장을 오가며, 검술을 가르쳐주기도 했었다.
하지만 앤시아가 사라지며 다시 멀어지고 말았다.
그는 앤시아를 잃어버린 죄책감에 사로잡혀서 블레이크를 제대로 위로해주지 못했다.
그 아이에게 말을 거는 것조차 미안해서, 앤시아를 찾지 못하는 스스로의 무능함에 화가 나서, 그 와중에도 황제로서 정무에 소홀할 수는 없어서….
그 모든 것이 얽히며 결국 블레이크를 제대로 안아주지 못했다.
앤시아를 잃고 슬픔에 젖은 아이를 또 외롭게 만들고 말았다.
‘결국 모든 것이 내 잘못이다.’
사람들은 텐스테온이 제국 역사상 최고의 성군이라 입을 모았다. 전 제국민들의 아버지라고 칭송했다.
하지만 그건 틀린 말이었다. 자신은 못난 아버지였다. 하나뿐인 아들을 어찌 대해야 할지조차 알지 못해서 실수만 하는 어리석은 인간이었다.
그가 착잡한 눈으로 편지를 바라보는데, 문이 벌컥 열리며 블레이크가 안으로 들어왔다.
텐스테온은 야심한 밤에 갑자기 찾아온 아들을 보고 다소 놀랐다. 하지만 어찌 온 거냐고 묻지 않았다.
그 전에 블레이크의 손에 든 검은 고양이에 시선을 빼앗긴 것이다.
“은한아!”
“야옹!”
블레이크에게 목덜미를 잡힌 채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고양이가 텐스테온을 보며 서럽게 울었다. 외양이나 반응을 보았을 때 은한이 변한 게 틀림없었다.
“아끼시는 사람이라 그런지 한눈에 알아보시는군요.”
블레이크가 시니컬하게 뱉으며 고양이를 텐스테온의 품에 던지듯이 내려놓았다.
“이게 무슨 짓이냐!”
“남의 부인에게 수작질하기에 혼을 냈을 뿐입니다.”
“수작질이라니?”
텐스테온이 깜짝 놀라서 무릎 위에 올려진 은한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검은 고양이로 변한 은한은 억울한 듯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야오옹!”
“아니라고 하는구나.”
“그 말을 믿으십니까?”
텐스테온의 말에 블레이크는 콧방귀를 뀌며 옥으로 만든 상자를 책상 앞에 올려놓았다.
“설마 고작 이것 때문에 그러는 것이냐?”
“‘고작 이것’이라니요?”
텐스테온은 서랍에서 같은 상자를 두 개 더 꺼냈다.
“이건 은한이 특별히 만든 통신 도구이다. 너와 내 것도 있다.”
“구색 맞추기군요.”
“야옹!”
은한은 연신 고개를 저었다. 텐스테온이 생각하기에도 이건 괜한 트집이었다.
앤시아는 자신의 며느리였다. 은한이 그런 마음을 품을 리가 없었다.
앤시아는 택리차로 탄시놀을 치료하였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용력과 마나는 서로의 힘을 방해하는 성질이 있다고 했다.
은한은 둔갑술을 써서 고양이로 변했을 거다. 하지만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블레이크가 마나를 이용하여 그의 용술을 방해한 것이 틀림없었다.
“은한을 당장 돌려놓거라.”
텐스테온은 엄하게 말했다.
은한은 창의 황제였다. 텐스테온이 그를 얼마나 아끼는지를 떠나서, 타국의 황제에게 이리 무례하게 구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싫습니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텐스테온의 요구를 단칼에 거절했다.
“블레이크!”
“싫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은한은 창의 황제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정도에서 멈춘 겁니다.”
그는 싸늘하게 말하며 검은 고양이를 노려보았다.
“하룻밤이 지나면 저절로 풀릴 것입니다. 그동안 반성하라고 하십시오.”
텐스테온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블레이크는 몸을 돌려서 집무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텐스테온은 한숨을 쉬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이게 무슨 짓이냐며 화를 내고, 강제로라도 명령을 내렸을 거다. 하지만 블레이크에게는 그럴 수가 없었다.
“은한아, 미안하구나.”
결국 텐스테온은 블레이크 대신 사과하며, 검은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야옹.”
은한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나는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빙그르르 한 바퀴를 돌았다.
“어때?”
“예뻐.”
블레이크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다 예쁘대.”
나는 작게 투덜거렸다.
우리는 5월에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아직 기간이 많이 남았지만 준비할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우선 웨딩드레스를 고르는 것부터 난관이었다.
각각의 의상실에서 보내온 웨딩드레스들이 하나같이 아름다워서 선택하기가 어려웠다.
블레이크에게도 의견을 구했지만, 그는 내가 무엇을 입든 예쁘다고 말할 뿐이었다.
“정말로 다 예쁜걸.”
블레이크가 고개를 비스듬히 꺾으며 예쁘게 웃었다. 살짝 핀잔을 주려고 했지만, 그가 웃는 모습을 보는 순간 그런 마음은 전부 사라져 버렸다.
그래도 기분이 좋아 보여서 다행이다. 은한이 찾아오고 나서부터 계속 저기압이더니.
“그런데 어제 은한 님이랑은 무슨 이야기를 나눈 거야?”
나는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그 순간 블레이크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
“별 얘기 안 했어.”
“…목걸이는 어떻게 했어?”
“폐하께 드렸어. 창과 연락할 일이 있으면 폐하께서 하시면 될 거 같아서. 왜? 필요하면 다시 가져올까?”
“아니야. 잘했어.”
택리차부터 시작해서 은한에게는 많은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그가 텐스테온을 만나러 제국에 온 김에 잠시 시간을 내어서 얼굴을 보는 거라면 모를까, 개인적으로 직접 연락을 주고받는 건 아무래도 조금 부담스러웠다.
필요한 일이 있으면 텐스테온에게 전하는 편이 나았다.
“헤헤.”
블레이크가 눈가를 순하게 접었다.
내가 목걸이를 거절하니까 좋은가 보다. 하여튼 질투쟁이라니까.
하지만 저렇게 맑게 웃어도 어렸을 때처럼 마냥 귀엽기만 하지는 않았다.
붉은 눈동자의 기저에 야릇하면서도 매혹적인 빛이 깔려 있었다.
그가 나의 손을 잡았다. 블레이크의 손에 박인 거친 굳은살이 나의 살갗을 기분 좋게 긁었다.
아름다운 얼굴과 달리 뼈마디가 굵고 거친 손은 묘한 떨림을 주었다.
그의 손을 맞잡으며, 빨려 들어갈 듯한 붉은 눈동자를 직시하는데, 별안간 이상한 파동이 느껴졌다.
“앤시아!”
블레이크 역시 파장을 느끼고는 나를 보호하듯 감싸 안았다.
그 순간 바닥에서 균열이 일더니 온통 새하얀 아이가 나타났다. 그는 백한이었다.
“백한 님!”
나는 반가워서 소리쳤다.
이게 도대체 얼마 만인지. 그동안 은한에게서 소식은 들었지만, 이렇게 만난 건 어릴 때 이후 처음이었다.
백룡의 선택을 받은 백한은 그때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백한은 나의 인사를 받지도 않은 채, 블레이크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네 이놈!”
그는 분노에 차서 소리쳤다.
왜 저렇게 화가 난 거지?
나는 당황했다. 하지만 삿대질을 받은 당사자는 시큰둥하게 팔짱을 꼈다.
“못 본 사이에 화가 많아졌군.”
아니, 은한은 몰라도 백한과는 사이가 꽤 좋았던 거로 기억하는데, 왜 이렇게 분위기가 냉랭한 거지?
“감히 우리 형님을 모욕하다니!”
“그쯤 한 걸 다행으로 여기고, 다음부터는 허튼수작 부리지 말라고 해.”
역시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당황스러웠지만 일단은 두 사람 사이를 중재하는 게 먼저였다.
“저기….”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백한의 외침 아래 나의 목소리는 그대로 파묻히고 말았다.
“뭐라! 허튼수작?! 맑고 순한 녀석이라 생각했는데, 완전히 못된 망나니가 되었구나!”
“너는 여전히 작네.”
“허어! 건방진 놈! 당장 사과하거라!”
“뭐, 기분이 나빴다면 미아….”
“내가 아니라 형님께 사죄하거라!”
백한에게 사과하려던 블레이크는 다시 입을 굳게 다물었다.
“내가 왜 그 인간한테 사과를 해야 하지?”
“뭐라!”
“그럴 생각 없으니까, 계속 헛소리를 하려면 시끄럽게 굴지 말고 꺼져.”
“블레이크!”
나는 그의 옷 소매를 잡아당겼다. 그만하라는 뜻이었지만, 블레이크는 싸늘한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네 이놈, 후회하게 될 거다!”
“그럴 일 없어.”
“마지막으로 경고하겠다. 형님께 사죄하거라!”
“됐으니까 똑같은 말 하게 하지 말고 꺼져.”
블레이크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냉랭하여, 나는 다소 놀라고 말았다.
“그래, 가겠다.”
백한은 이를 악물며 짓씹듯 뱉었다. 작은 손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도대체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어쨌든 이대로 백한을 보낼 수는 없었다.
“저기….”
“오늘의 선택을 후회하게 될 거다!”
그를 달래기 위해서 다가가는데, 백한이 블레이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거대한 용력이 블레이크의 몸을 뒤덮었다.
“블레이크!”
나는 화들짝 놀라서 그에게 뛰어갔지만, 강한 용력 때문에 접근할 수조차 없었다.
용력이 새하얀 빛을 뿜으며 블레이크의 주변을 소용돌이쳤기 때문에 그의 모습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괜탼아. 나는 괜탼아. 걱뎡하디 마.”
안에서 블레이크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척 평온한 말투였기 때문에 일단은 안심이었다.
목소리가 조금 이상한 거 같긴 하지만, 용력의 파장 때문에 그렇게 들리는 걸 거다.
조금 뒤, 빛이 사라지며 블레이크의 모습이 보였다.
“브, 블레이크?”
그를 본 순간 나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앤띠아.”
블레이크는 내가 많이 놀랐다고 생각했는지 의젓하게 웃으며 나를 안심시키려 했다. 하지만 그 역시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이게 오또케 된 꼬야!”
블레이크가 아이로 변해 있었다. 그것도 많아야 네다섯 살 정도로 보이는 아주 작은 아이로 말이다.
그는 자신의 몸을 바라보며 비명을 질렀다. 나 역시도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귀여워! 너무 귀엽잖아!!’
아니, 이게 아니다. 나는 당장 백한을 바라보았다. 블레이크한테 무슨 짓을 한 건지 물어봐야 했다.
“그럼 나는 이만 꺼지도록 하지!”
하지만 백한은 내가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차갑게 말하며 사라져 버렸다.
“무슨 일입니까!”
안에서 벌어진 소란스러운 소리를 듣고는 첼시와 제이든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꺄아!”
첼시는 블레이크를 보자마자 돌고래와 같은 하이톤의 비명을 질렀다.
“비 전하, 이, 이 귀여운 생명체는 뭐죠!!”
언제나 쿨 시크하던 첼시의 눈에 하트가 그려졌다. 첼시는 의외로 어린아이를 좋아했나 보다.
“전하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저 아이의 옷이 전하의 의복과 같은 것 같은데….”
제이든은 소년이, 아니 아기가 입은 옷에 의문을 표했다.
블레이크의 체구가 작아지면서 그가 입던 옷도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기 아냐!”
블레이크가 발끈하며 소리쳤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발을 내딛는 바람에 가뜩이나 큰 옷이 엉키며 몸이 기울었다.
“블레이크!”
나는 화들짝 놀라서 블레이크를 잡아주었다. 다행히 우리 신랑이 넘어지는 걸 막을 수 있었다.
“브, 블레이크요? 그, 그럼 저분이? 히익!”
첼시가 가느다란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그녀는 왠지 모르지만 블레이크를 무서워했다. 제이든도 딱딱하게 굳었다.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혼란스러운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일단 해야 할 일은….
“첼시, 두꺼운 담요를 가져와 줘.”
***
블레이크의 소식을 들은 텐스테온이 황급히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블레이크!”
다른 사람과 달리 텐스테온은 어려진 블레이크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으앙!”
텐스테온이 블레이크를 번쩍 들어 올리자, 그의 입에서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폐하, 그렇게 세게 들면 아가가 놀라요.”
“미, 미안하구나.”
“아가 아냐!”
블레이크가 발끈해서 소리쳤다. 하지만 많이 쳐줘야 다섯 살 정도밖에 안 될 정도로 작은 몸으로 외쳐봤자 설득력이 떨어졌다.
“어쩌다 이리된 것이냐?”
“그게….”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백한이 이리했다는 말을 들은 텐스테온은 낮은 침음을 삼켰다.
“아….”
그는 뭔가 아는 눈치였다.
“아버님께서는 짐작 가는 일이 있으신 거예요?”
“별거 아니다. 원래 사내아이들은 투덕거리면서 크는 거지.”
텐스테온은 말을 얼버무렸다. 어젯밤 블레이크와 은한이 다툰 것은 분명한 거 같은데, 다들 정확한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다.
“자세한 사정을 알아보도록 하마. 하지만 걱정할 일은 아닐 거다.”
텐스테온은 우리를 안심시키며, 블레이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찌 이리 심술이 난 것이냐? 이 담요는 또 뭐고?”
“아, 그게 말이죠.”
원래 그가 입던 옷은 지금의 블레이크한테 너무 컸다. 옷이 맞지 않는 건 둘째치고 바지나 소매가 너무 길어서 넘어질 수도 있으니 위험했다.
나는 일단 그의 옷을 벗기려고 했다.
“싫어! 안 버뜰 꺼야!” (싫어! 안 벗을 거야!)
“안 돼! 위험해!”
“안 위험해!”
“위험하다니까! 콩알만 해가지고 이렇게 큰 옷을 입으면 어떻게 해!”
“허어….”
블레이크는 충격을 받은 듯 바람 빠진 소리를 냈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블레이크의 옷을 벗기고, 커다란 담요로 그의 몸을 칭칭 감아놨다.
지금 황궁에는 네다섯 살짜리 어린아이가 없었고, 당연히 당장 옷을 구하기도 어려웠다.
그렇다고 추운 겨울에 이대로 두면 감기에 걸릴 테니 일단은 담요를 덮어둔 것이다.
나름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생각했지만 김밥처럼 담요에 칭칭 휘감긴 블레이크의 입술은 툭 튀어나와 있었다.
그 모습이 무척 깜찍했다. 블레이크한테 이런 말을 하면 더 화내겠지만 말이다.
“하하. 그게 사정이 있어서.”
나는 멋쩍게 웃었다. 텐스테온도 더 묻지는 않았다.
텐스테온은 은한이 준 목걸이를 통해 황급히 창에 연락을 시도했다. 그리고 그 결과를 우리에게 말해주었다.
“한 달 정도 지나면 풀릴 거라고 한다.”
“한 댤?!”
블레이크가 경악하며 소리쳤다.
“조금 더 일찍 풀고 싶으면 사과를 하라고 한다. 백한과 직접 대화를 나눠봤는데, 그 뜻이 워낙 강경하더구나.”
“따과 안 해. 난 잘모한 거 어떠!” (사과 안 해. 나는 잘못한 거 없어!)
블레이크가 볼을 한껏 부풀리며 분노를 표출했다.
“…….”
텐스테온은 침묵했다.
그는 블레이크를 이리 만든 백한에게 격렬하게 항의하지 않았다. 블레이크의 말에 동의 해주지도 않았다.
텐스테온의 반응으로 미루어 짐작해볼 때, 아무래도 블레이크가 먼저 잘못한 건 확실한 거 같았다.
“사과하거라.”
“시뜹니다.” (싫습니다.)
블레이크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그의 오동통한 볼살이 실룩거렸다.
아, 귀여워.
심각한 분위기도 잊고 그의 볼살을 눌러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처음에는 혹시 몸에 이상이 생기는 건 아닌지 걱정도 됐지만, 그런 문제는 전혀 없다고 한 데다 어쨌든 한 달 뒤면 원래대로 돌아올 거라고 하니, 이제 안심하고 블레이크의 귀여운 모습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럼 이대로 지낼 거냐?”
“절따 타과 안 해요. 잘몬한 거 없터요.” (절대로 사과 안 해요. 잘못한 거 없어요.)
블레이크는 씩씩거렸다.
아이가 된 동안은 육체의 지배를 받아서 모든 것이 진짜 어린아이처럼 변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목소리나 말투뿐만 아니라 고집을 부리는 것도 어린아이 같았다.
하지만 담요를 둘둘 말고 얼굴만 툭 튀어나온 상태로 저리 비장하게 선언해봤자 귀엽기만 할 뿐이었다.
“한 달 동안 이리 지내도 괜찮겠느냐?”
“따과는 안 해요!” (사과는 안 해요!)
“알겠다. 네가 원한다면 그리하거라.”
텐스테온은 사과를 하라며 더 강요하지 않고 블레이크의 뜻을 존중해 주었다.
그리고는 즉시 말을 덧붙였다.
“그럼 한 달 동안 생활할 준비를 해야겠구나.”
“이, 이대로 디내라꼬요?” (이, 이대로 지내라고요?)
블레이크가 당황하며 눈을 크게 떴다.
“사과는 안 할 거라며?”
“안 해요!”
“그럼 하는 수 없지 않느냐?”
텐스테온은 소파에 앉아 있는 블레이크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가 부탁한다면 은한은 어떻게든 백한을 설득해서 블레이크를 원래대로 되돌려 줄 것이다.
하지만 텐스테온은 그럴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당장 옷부터 입혀야겠구나.”
“내려됴요!” (내려줘요!)
블레이크는 담요에 휘감긴 몸을 버둥거리며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텐스테온은 블레이크에게서 한참 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텐스테온의 입가가 미세하게 실룩거렸다. 그 역시도 블레이크를 귀엽다고 생각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
블레이크의 침실이 아이들의 옷으로 가득 찼다. 제국에 있는 아이 옷은 모두 가져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엄청난 양이었다.
아니, 이건 한 달 분량이 아니잖아! 게다가 여름옷들을 또 뭐야? 도대체 이 많은 옷은 어디서 구한 걸까?
나는 감탄했지만, 엄청난 선물을 받은 블레이크는 정작 시무룩했다.
“블레이크, 어떤 옷을 입을래?”
그러자 블레이크는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시뎌. 이건 다 애기들 꼬잖아.” (싫어. 이건 다 아기들 거잖아.)
옷들이 하나같이 깜찍하고 샤랄라 하긴 했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지금 아기인걸.”
“뭐…?”
그는 눈을 크게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이게 그렇게 충격을 받을 말인가?
“사과하지 않고 아기로 지낼 거라고 했잖아.”
“애기 아냐! 댜가진 거뿌냐!” (아기가 아니야! 작아진 것뿐이야!)
“오구구. 댜가진 것뿐이에요?”
내가 그의 말투를 흉내 내자, 블레이크의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육체의 지배를 받는다는 게 저런 뜻이었다. 그는 어렸을 때처럼 다시 눈물이 많아졌다.
“따라 하디 마.” (따라 하지 마.)
콩알만 한 주먹에 힘을 꼭 준 채,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하는 모습이 애처로우면서도 귀여웠다. 나는 웃음을 참으며 그를 꼭 안아주었다.
“오구, 알았어요. 알았어. 안 따라 할게요.”
“우!”
달래줄 생각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유치원 선생님 같은 말투가 나와버리고 말았다. 블레이크도 아이 취급당했다는 걸 느꼈는지 입술을 쭉 내밀며 화를 냈다.
“블레이크, 삐쳤어?”
“아니.”
삐친 거 같은데.
“옷은 어떻게 할래? 내가 골라 줄까?”
“…나 혼댜 할 꼬야!” (나 혼자 할 거야!)
블레이크는 강하게 뱉더니, 바로 눈앞에 있는 양말을 집어 들었다. 화려한 보석과 프릴로 장식된 옷들보다는 심플한 흰색 양말이 저항감이 적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으앙!”
양말을 신는 건 지금의 블레이크에게 너무 고난도의 작업이었다.
블레이크는 결국 조그만 양말 구멍에 발을 집어넣지도 못한 채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침대 위에 올려놓길 잘했다.
“괜찮아?”
푹신한 침대이긴 하지만 넘어진 건 넘어진 거기 때문에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조그마한 손에 양말을 꼭 쥔 채 고개를 들지 않았다.
“블레이크, 왜 그래? 아파?”
나는 웃음기를 거두고 물었다. 워낙 몸이 작아진 탓에 다쳤을 수도 있다.
“말을 해봐. 많이 아파?”
내가 재차 묻자, 블레이크가 기어들어 갈 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턍피해….” (창피해.)
‘푸흡.’
나는 입을 틀어막으며 터져 나오는 웃음을 필사적으로 눌러 참았다.
블레이크의 귀가 잘 익은 홍당무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여기서 웃어버리면 정말로 엉엉 울어버릴지도 모른다.
“괜찮아. 창피하긴 뭐가 창피해. 침대가 너무 푹신푹신해서 중심을 잡기 힘들어서 그런 거잖아.”
“응! 마댜! 바댜게서 할래!” (응. 맞아. 바닥에서 할래.)
블레이크가 벌떡 일어나더니 자신감 있게 외쳤다. 기분이 풀린 건 다행이지만, 대리석 바닥은 지금의 블레이크에게 너무 위험했다.
나는 짧은 다리로 침대에서 내려가려고 하는 블레이크를 다시 들어서 침대 중앙에 올려놨다.
“흐아앗, 왜에!?”
그가 항의하듯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정녕 이유를 몰라서 물어보시는 겁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리석 바닥에서 양말 신는 게 위험하니까 그렇지’라고 하면 아니라고 항변하겠지.
물론 항의하는 모습 또한 귀여울 것 같아서 보고 싶었지만, 겨울이니만큼 옷을 입히는 게 우선이었다.
“내가 입혀줄게.”
“시, 시뎌!” (시, 싫어!)
블레이크가 다시 얼굴이 빨개져서 소리쳤다.
“그럼 다른 사람한테 해달라고 할까?”
“…….”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는 건 더 싫은지, 블레이크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나는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쏙 들었던 하얀 셔츠를 집었다.
“대신 단추는 블레이크가 채워.”
“응!”
그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
“어머머!”
“세상에나.”
“헉!”
“와!”
블레이크에게 옷을 입힌 뒤 밖으로 나가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멜리사와 한스, 에드온, 테리가 모두 할 말을 잃어버린 채 저마다 짧은 감탄사를 뱉었다.
그들의 반응을 충분히 이해한다. 나도 작아진 블레이크를 처음 봤을 때, 귀여워서 말문이 막혔으니까. 게다가 옷까지 예쁘게 입으니 사람이 아니라 인형 같았다.
모두에게는 마법 연습을 하다가 실수를 하여서 어려진 거라고 말해두었다. 몸에 문제는 없고 한 달 뒤면 원래대로 돌아온다고 설명도 해두었기 때문에, 다들 걱정하기보다는 작아진 블레이크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모두의 감탄을 받은 당사자의 표정은 시무룩하기만 했다.
단추를 잠그지 못한 게 꽤나 큰 충격이었나 보다. 그는 열심히 노력했지만, 고사리처럼 작아진 블레이크의 손가락은 단추를 채우는 정교한 작업을 수행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는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계속 실패했고, 결국은 내가 전부 채워주었다.
블레이크는 지금도 미련이 남은 듯 진주로 만든 단추를 계속 만지작거렸다.
나는 그런 블레이크를 번쩍 안아 올렸다.
“흐아!”
“우리 블레이크 귀엽지?”
“네. 너무 귀엽습니다!”
“정말 귀여우십니다.”
에드온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테리도 블레이크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한스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어쩜 이렇게 귀여우신지. 옛날 생각이 나네요.”
멜리사는 눈시울을 적셨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먹먹한 얼굴로 블레이크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단순히 블레이크가 너무 귀여워서 좋아하는 게 아니었다.
블레이크는 다섯 살의 어린 나이에 저주에 걸렸다. 그들이 기억하는 어린 블레이크는 언제나 고통에 시달렸었다.
그런데 이렇게 어리지만 건강한 모습을 보니 기쁜 거다. 텐스테온도 같은 생각이었을 거고, 나 역시도 그랬다.
이렇게 작고 어릴 때부터 그런 고통을 겪었었다니.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막상 어려진 블레이크를 직접 보게 되니 마음이 아팠다.
“내려됴!” (내려줘!)
나는 내려달라며 버둥거리는 블레이크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한 달 동안 즐거운 일만 만들어 줘야지.
***
모두들 블레이크의 충격적인 귀여움 앞에 미소를 짓긴 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황태자의 몸에 이변이 생긴 심각한 사안이었다.
블레이크가 약해진 걸 알고 노리는 세력이 있을 수도 있다.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대외적으로 알려져서 좋을 게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일은 황실 일부만 아는 극비 사항이었고, 나와 블레이크는 한 달 동안 수도에서 조금 떨어진 황실의 별장에서 지내기로 했다.
사용인과 기사들도 믿을 수 있는 최소한의 인원들로만 꾸려서 움직였다.
나는 블레이크와 함께 마차를 타고 별장으로 향했다. 객관적으로 심각한 상황이 맞긴 했지만, 현실적으로 봤을 때 리차드가 사라진 지금 황실을 노릴 사람은 없었다.
그러다 보니 나도 다른 사람들도 여행을 가듯 기분 좋게 움직였다.
“블레이크 저것 좀 봐. 나무 위에 큰 새가 있어.”
“…응.”
하지만 오직 단 한 사람의 기분만은 저조했다.
블레이크는 황궁에 나와서도 계속 시무룩했다.
풀 죽은 얼굴로 단추를 만지작거리는 걸 보니, 옷을 혼자 입지 못한 게 어지간히 충격적이었나 보다.
“진주로 만든 단추라 미끄러워서 그래. 다른 단추였으면 잠글 수 있었을 거야.”
“으응….”
위로를 해주었지만 블레이크의 표정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블레이크 왜 그래?”
“앤띠아….”
“응?”
“나, 나 둄 내려됴.” (나, 나 좀 내려줘.)
그가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나는 지금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허리를 꼭 껴안고 있었다. 그는 이게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하지만 나는 단칼에 거절했다.
“안 돼. 위험해. 넘어지면 큰일나.”
황실 마차는 다른 마차들보다 크고 안정적이었지만, 그래도 자동차에 비하면 많이 흔들리는 편이었다.
그렇다고 마차에 안전벨트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넘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잡아줘야 했다.
“안 너머뎌!” (안 넘어져!)
블레이크는 발끈했다.
“안 돼요. 넘어지면 아야 해요.”
“구로케 말하디 마!” (그렇게 말하지 마!)
그는 화를 내며 나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다. 그 순간 마차가 덜컹거리며, 블레이크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으아!”
나 역시도 깜짝 놀라서 블레이크의 허리를 더욱 단단히 끌어안았다.
“거봐. 안 된다고 했지. 착한 아이는 얌전히 있는 거야.”
“우우….”
블레이크는 작을 손가락을 말아서 주먹을 굳게 쥐였다.
“어구해.”
“응?”
“어구라다고!” (억울하다고!)
“아아.”
나는 그의 말을 겨우 알아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블레이크가 뭐가 그리 억울할까?”
“나눈 하루였는데, 이롤 줄 알았뜬 나됴 한 댤 해뜰 꼬야!” (나는 하루였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한 달 했을 거야!)
그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분통을 터트렸다. 도대체 은한과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
황궁의 별장은 말이 별장이지 작은 성이나 마찬가지였다.
별장을 둘러보고 싶었지만, 밤이 늦었기 때문에 오늘은 일단 잠을 자기로 했다.
이렇게 낯선 곳에서 잠을 자니까 정말로 여행을 온 거 같다.
“블레이크, 잠옷으로 갈아입자.”
“웅.”
그는 아까 전과 달리 순순히 응했다.
“단추는 혼자 잠가 볼래?”
“시뎌.”
블레이크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의기소침해진 거 같아서 안쓰러운 마음과 귀여워서 깨물어 주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공존했다.
“앤띠야.”
“네. 앤띠야, 여기 있어요.”
그가 나를 부르는 말투가 너무 귀여워서 따라 하자, 블레이크가 흘깃 째려보았다.
“따라 하디 마.” (따라 하지 마.)
“하하. 알았어.”
“…….”
그는 뾰로통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내 반디는 오딨어?” (내 반지는 어디 있어?)
몸이 작아지면서 블레이크의 결혼반지도 툭 빠져버렸다.
“보석함에 넣어놨어.”
“둬!” (줘!)
“안 돼. 잃어버려.”
“…….”
그의 어깨가 축 처졌다. 그 모습이 안쓰러웠지만, 지금 주면 정말로 잃어버리고 말 거다.
“오늘 피곤했지. 어서 자자.”
“으웅….”
잠옷을 갈아입은 뒤, 우리 두 사람은 나란히 침대에 누웠다. 황궁의 침대보다는 다소 작았지만, 공간이 많이 남았다.
우리 블레이크 진짜 작아졌네. 그를 위해서 베개도 특별히 작은 걸 준비했다.
그는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갑자기 아기가 되어버린 상황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 모양이다.
블레이크가 지금의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깊은 한숨을 내쉴 때마다 포동포동한 볼살이 잔뜩 부풀었다가 꺼졌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그만 한 손으로 양 볼을 꾸욱 눌러 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블레이크가 경악하며 나를 바라봤다.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냐는 듯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저렇게까지 충격을 받을 일인가?
“미안. 너무 귀여워서.”
“잘 꼬야!” (잘 거야!)
블레이크가 몸을 반대쪽으로 휙 돌렸다. 아무래도 단단히 삐친 모양이다.
내가 오늘 너무 많이 놀리긴 했지.
하지만 그의 뒷모습이 너무 조그마해서 다시 웃음이 나왔다.
‘안 돼. 안 돼. 여기서 더 놀리면 울어버릴지도 몰라.’
나는 치밀어 오르는 장난기를 애써 누르며, 그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잘 자라, 우리 아가.”
자장가를 불러주려고 하는데, 그가 다시 휙하고 몸을 돌렸다.
“아가 아냐!”
아니, 이건 놀리려는 게 아니라 그냥 자장가인데….
나는 해명을 하려다가 웃어버리고 말았다.
어렸을 때도 자장가를 불러주자 발끈했었는데…. 정말로 옛날 생각이 난다.
나는 설명을 하는 대신 블레이크를 꼭 끌어안았다.
“후웅.”
블레이크는 아직 삐친 듯 볼을 부풀렸지만, 이내 내 품에 안겨서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아무런 상처도, 저주의 문장도 없이 깨끗한 블레이크의 볼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
블레이크는 잠에서 깨자마자 우울해하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블레이크, 왜 그래?”
“안 돌아왔뎌.”
“한 달 동안은 이 상태일 거라고 했잖아.”
나는 엄지손가락으로 그의 오동통한 볼살을 문질렀다. 자고 일어나서 살짝 부은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나는 하루였는데. 어구해….” (나는 하루였는데. 억울해….)
그는 또다시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블레이크,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고 싶으면 사과하는 게 어때?”
“시뎌!”
그는 단호하게 외쳤다.
어린아이로 지내는 것보다도 사과하는 게 더 싫은가 보다.
결국 본인의 선택이긴 하지만, 그래도 저렇게 풀이 죽은 모습을 보니 안쓰러웠다.
“블레이크, 우리 밖에 나갈까?”
“바께?” (밖에?)
“응. 우리의 첫 여행이잖아. 즐겁게 놀아야지.”
로즈였을 때 함께 움직이며 야영을 하기도 했지만 그건 여행이라고 할 수 없었다.
“텻 여행….”
첫 여행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었는지 블레이크가 배시시 웃었다.
“응! 가댜! 가댜!” (응! 가자! 가자!)
언제 우울했냐는 듯 금세 신이 난 모습을 보니까, 정말로 어린아이 같았다.
하지만 울적한 모습보다는 이렇게 웃는 게 백 배는 예뻤다.
“응. 가자!”
나는 활짝 웃으며, 블레이크를 안아 올렸다. 일단 외출복으로 갈아입혀야겠다.
***
블레이크가 작아진 것도, 우리가 이곳에 온 것도 비밀이었다.
우리는 간소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별장 근처에 있는 광장으로 내려갔다.
수도의 광장처럼 넓고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활기차고 생동감 넘쳤다.
블레이크는 오늘도 단추를 채우는 것에 실패했다. 이번에는 진주도 아니고, 평범한 단추였는데 말이다.
그는 잠시 울적해 했지만, 광장의 풍경을 보며 다행히 기분이 풀린 것 같았다.
과일 가게에서 과일을 구경하고 있는데, 주인아주머니가 말을 걸었다.
“어머, 아기가 너무 예쁘네요.”
“하하. 감사합니다.”
들어가는 가게마다 블레이크의 칭찬이 쏟아졌다.
길을 걸을 때도 ‘저것 좀 봐, 애가 엄청 귀여워.’ ‘어머 너무 귀엽다’라는 말이 쉴 새 없이 들려왔다.
우리 블레이크가 많이 귀엽긴 하지.
내가 칭찬을 받는 것처럼 어깨가 으쓱했다.
“몇 살이에요. 세 살?”
“아녜요.”
블레이크가 불퉁하게 뱉었다.
“아유, 말을 엄청 잘하네. 네 살인가 보구나.”
“…….”
주인아주머니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칭찬을 해주었으나 블레이크는 침묵했다.
“그런데 무슨 사이예요? 조카?”
“조카 아녜요!”
블레이크가 발끈하더니 말을 덧붙였다.
“우린 부부예….”
나는 그런 블레이크의 입을 황급히 막으며, 얼른 답했다.
“동생이에요.”
“그래요? 어쩜 이렇게 자매가 다 예쁘대. 부모님께서 흐뭇하시겠다.”
“하하. 그런데 자매는 아니에요.”
상황이 이렇다 보니 동생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우리 신랑의 성별까지 바꿀 수는 없었다.
“어머, 그래요? 너무 예뻐서 여자앤 줄 알았어요. 아가야, 미안해.”
“…….”
아주머니가 사과를 했지만, 블레이크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때 가게 안쪽에서 한 아이가 튀어나왔다.
“어! 엄마, 얜 누구야?”
다섯 살 정도로 보이는 남자애가 블레이크를 가리키며 후다닥 뛰어왔다.
엄청 건강하고 씩씩한 아이 같아 보였다.
“손님 동생이래. 예쁘지?”
“응! 예뻐!”
아이가 활짝 웃더니, 블레이크의 볼에 쪽 뽀뽀를 했다.
“…….”
블레이크는 딱딱하게 굳었고, 나도 화들짝 놀랐다.
“어머! 코비, 이게 무슨 짓이니!”
주인아주머니도 깜짝 놀라서 아들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코비는 해맑게 웃었다.
“나, 얘랑 결혼할래!”
우리는 과일 가게에서 나온 뒤, 다시 별장으로 돌아갔다.
블레이크의 표정이 침울했다.
“우리 블레이크, 청혼받았네.”
분위기를 풀기 위해서 농담을 건네자, 그가 눈을 부릅떴다.
“…….”
나는 빙그레 웃으며 그가 뽀뽀를 받은 볼을 손으로 문질러 주었다.
“미안해. 다음에 나갈 때는 블레이크를 꼭 안고 있을게.”
설마하니 아이가 바로 뽀뽀를 할 줄은 몰랐다. 요즘 애들 참 빠르다니까….
“구것 떄문에 화난 꼬 아냐.” (그것 때문에 화난 거 아니야.)
“아니야?”
“응. 걔는 애기댠아.” (응. 걔는 아기잖아.)
블레이크가 손에 든 체리를 빙글빙글 굴리면서 말했다. 과일 가게 아주머니가 미안하다면서 그의 손에 쥐여준 것이었다.
“그럼 왜 화났어?”
내가 물어보자, 그가 잠시 침묵한 뒤, 느리게 입을 열었다.
“내가 둉생이야?” (내가 동생이야?)
내가 동생이라고 말했던 게 속상했구나. 하지만….
“그럼 뭐라고 말해? 부부라고 할 수는 없잖아.”
“왜 말 몬해? 내가 남푠이댜 왜 말 몬해?!” (왜 말 못 해? 내가 남편이라고 왜 말 못 해?!)
블레이크는 흥분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아기랑 결혼했다고 할 수는 없잖아.”
“뭐어…?”
그가 몸을 돌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당연한 말을 했는데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그때 마차가 덜컹거렸다.
“블레이크, 위험하니까 똑바로 앉아야지.”
나는 우선 그의 허리를 단단히 안았다.
“…….”
블레이크는 말없이 커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포동포동한 볼살이 한껏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
“광장에서 산 재료로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줄게.”
“나됴 됴울래!” (나도 도울래!)
블레이크가 눈을 반짝였다. 언제 풀이 죽었냐는 듯 기분이 풀려 있었다.
육체의 지배를 받기 때문일까? 정말로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조그마한 일에도 금세 우울해 했지만, 화가 풀리는 것도 빨랐다.
“안 돼. 위험해.”
“괜탼아! 할뚜 있 떠! 어릴 때됴 많이 됴았댠아!” (괜찮아! 할 수 있어! 어릴 때도 많이 도왔잖아!)
“그때보다도 훨씬 어린걸.”
나이도 키도 혀의 길이도, 결혼했을 때의 절반도 안 되는 것 같다.
그때도 어리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에 비하면 완전 어른이었다.
“오린 게 아냐! 쟈근 고야!” (어린 게 아니라 작은 거야!)
“그래도 안 돼. 금방 맛있는 거 해줄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나는 그의 복슬복슬한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에드온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에드온이 얼른 블레이크의 옆으로 다가왔다.
“전하, 이리 오시죠.”
“으응.”
그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에드온을 따라갔다.
***
블레이크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제5 기사단의 기사들은 잔뜩 풀이 죽은 블레이크의 주변을 감쌌다.
“와아.”
“아구구.”
기사들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다른 작아진 주군의 귀여움이 빠져들고 있었다.
블레이크는 계속 앤시아의 옆에 딱 붙어 있었기 때문에 어려진 주군을 제대로 바라볼 기회가 없었다.
거리를 두고 호위를 하면서 보았을 때도 귀엽다고 생각했지만, 이리 가까이서 보는 건 차원이 달랐다.
“전하, 귀여우십니다.”
“맞습니다. 정말 귀여우세요.”
모두들 블레이크가 귀여워서 어쩔 줄 몰랐지만, 제이든만은 기사단의 무리에서 조금 떨어져 있었다.
덩치가 산만 한 사내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어린아이를 바라보는 모습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아무리 작고 어려졌다고 한들, 제이든의 눈에는 살벌한 주군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귀엽다는 말을 하면 할수록 블레이크의 표정은 싸늘하게 굳고 있었다.
‘이거 불안불안한데.’
제이든이 한 발짝 떨어져서 상황을 지켜보는데 블레이크가 버럭 소리쳤다.
“귀여따고 하디 마!” (귀엽다고 하지 마!)
“하지만 제가 지금까지 본 아이들 중에서 제일 귀여운걸요!”
“아라! 내가 구걸 모르 거 가탸?” (알아! 내가 그걸 모를 거 겉아?)
블레이크가 너무나도 당당하게 말하자, 기사들은 당황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이데뷰터 귀여따는 말 금디야! 댜시 한뻔먄 하면 엄벌에 텨할 듈 아라!” (이제부터 귀엽다는 말은 금지야! 다시 한번 한다면 엄벌에 처할 줄 알아!)
블레이크는 강하게 선언했다. 하지만 기사들은 작은 몸으로 씩씩하게 말하는 어린 주군을 보며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뿐이었다.
“우! 딘땨야!” (진짜야!)
블레이크는 다시 한번 경고했다.
“네네. 알겠습니다.”
“저희랑 같이 노실까요?”
“전하, 무슨 놀이를 하실래요?”
“안 노라! 내가 아가야?!” (안 놀아! 내가 아기야?!)
블레이크는 분통을 터트렸지만, 그럴수록 기사들은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제이든은 창백하게 질린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한 달 뒤면 원래대로 돌아올 텐데, 다들 두렵지 않은 걸까?
그때 블레이크의 옆에 있던 에드온이 제이든에게 다가왔다.
“제이든.”
“네, 단장님.”
“안색이 창백한 거 같은데, 어디 아픈가?”
“아, 아닙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왜 이리 멀찍이 떨어져 있어?”
“아니요. 그냥 조금 신기해서요.”
“신기해?”
“황태자 전하께서는 자기 외모를 정확히 알고 계시네요.”
블레이크는 어릴 때 저주에 걸렸다. 그는 저주로 인해 흉측해진 외모 때문에 모두의 멸시를 받고 별궁에 유폐되었다. 저주에서 풀리고 누구나가 우러러볼 만큼 아름다운 외모로 바뀌었지만, 그래도 과거의 상처는 남아 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의 블레이크에게서는 그런 아픔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자신이 추하다며 자학하지도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객관적으로 자신의 외모를 파악하고 있었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비 전하 덕분이지.”
에드온은 기사들에게 둘러싸인 블레이크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비 전하요?”
“응. 그분께서 매일같이 칭찬해주셨으니까.”
어린 시절 블레이크는 스스로를 괴물이라 여겼다. 하지만 앤시아를 만나고 나서부터는 달라졌다.
앤시아는 매일 블레이크에게 아름답다고, 괴물이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그러자 그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았던 어둠도 사라졌다.
에드온은 그 시절을 떠올리며 아련한 미소를 지었다.
“나 아가 아냐!”
그 와중에도 블레이크는 여전히 기사들에게 항의 중이었다.
***
“블레이크, 버섯볶음도 먹어야지.”
블레이크는 입을 꾹 다물더니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절대로 먹기 싫다는 뜻이었다.
어려지더니 편식이 심해졌다.
“골고루 먹어야지. 안 그러면 키 안 큰다.”
“난 이미 댜 커댜고!” (나는 이미 다 컸다고!)
블레이크가 발끈했다.
어려지더니 화도 많아진 것 같다. 하지만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계속 놀리고 싶었다.
“여기 완두콩 조림도 먹어. 콩알만 해졌으니까 콩을 먹어야지.”
“…….”
블레이크가 울망울망한 얼굴로 수저를 내려놨다. 내가 너무 심했나.
“블레이크….”
“안 머거!” (안 먹어!)
“미안해.”
“안 머글 거야….” (안 먹을 거야.)
“그럼 디저트로 복숭아를 먹을까?”
“나 보뚱아 시러해!” (나 복숭아 싫어해!)
복숭아를 저렇게 싫어했었나? 아, 맞다!
“제가 저주를 풀려면 전하께서 조금 많이 자라셔야 해요.”
“나, 진짜로 많이 컸어!”
“밤톨보다도 훨씬 커야죠.”
“밤톨….”
“아니에요. 취소! 취소! 복숭아 정도는 되는 것 같아요.”
“복숭아….”
어렸을 때, 그가 복숭아 정도는 된다고 말한 이후부터 블레이크는 밤과 복숭아를 잘 먹지 않았다.
이번에는 정말로 달래줄 생각이었는데 본의 아니게 또 놀리는 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나, 갈 꼬야!” (나, 갈 거야!)
블레이크가 의자에서 내려왔다.
“블레이크….”
“혼댜 이뜰 꼬야!” (혼자 있을 거야!)
그는 강하게 뱉으며 밖으로 나갔다.
얼른 블레이크를 따라가려고 하는데, 에드온이 만류했다.
“비 전하, 제가 가보겠습니다.”
“부탁할게.”
나는 짧은 다리를 쿵쿵거리며 걸어가는 블레이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땨라 오디 마! 혼댜 이뜰 꼬야!” (따라 오지 마! 혼자 있을 거야!)
블레이크는 에드온에게 소리치며 홀로 뛰어갔다.
“단장님, 무슨 일입니까?”
황태자의 목소리를 들은 제이든이 에드온에게 다급히 다가가서 물어보았다.
그러자 에드온은 심각한 얼굴로 상황을 설명했다.
“…삐치셨다.”
“…그러셨군요.”
제이든은 할 말을 잃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어쨌든 황태자를 호위하는 게 그들의 임무였다.
감히 황실의 별장을 침입할 간 큰 놈은 없겠지만, 어려진 블레이크를 혼자 둘 수는 없었다.
그들은 몰래 블레이크의 뒤를 따랐다.
평소의 블레이크였다면 금세 기척을 알아차렸겠지만, 지금의 그는 모든 것이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 있었다.
블레이크가 짧은 다리로 향한 곳은 마구간이었다.
“죠띠!” (조쉬!)
그는 자신이 아끼는 백마 조쉬에게 다가갔다.
조쉬는 하루아침에 변해버린 주인이 낯선 듯 빤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블레이크의 몸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빛의 기운을 느끼고는 ‘히잉’ 울며 머리를 비볐다.
블레이크는 그런 조쉬를 꼭 끌어안았다.
“죠띠, 나 오늘 너무 슬포떠.” (조쉬, 나 오늘 너무 슬펐어.)
앤시아가 떠난 뒤, 블레이크는 슬픔과 외로움을 홀로 삼켰다. 하지만 가끔씩 혼자 참아내기 벅찰 정도의 슬픔과 고통이 밀려들 때가 있었다.
그는 그럴 때면 자신의 말에게 속내를 털어놓고는 했다.
그리고 오늘도 그때처럼 조쉬에게 자신의 마음을 말하였다.
“앤띠아가 날 아가 튀급해소.” (앤시아가 날 아기 취급했어.)
“히잉.”
조쉬가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낮게 울었다.
“나보고 둉땡이래.” (나보고 동생이래.)
“히잉.”
“툥알이라고도 해쏘.” (콩알이라고도 했어.)
블레이크는 오늘 있었던 일들을 조쉬에게 하소연했다.
“밤툘도 아니고 툥알이래. 어또케 구롤 듀가 이써?” (밤톨도 아니고 콩알이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조쉬의 앞이라 또박또박 말해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난 블레이크는 편하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았다. 덕분에 발음이 더 짧아졌다.
“내가 뚜치스러워뎌 샬 듀가 없뎌.” (내가 수치스러워서 살 수가 없어.)
그가 짧은 다리를 동동 구르며 한숨을 내쉬는데, 뒤에서 낮은 청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귀엽….”
블레이크는 화들짝 놀라서 소리가 나는 곳을 돌아보았다.
“누규야!”
그러자 숨어서 블레이크를 지켜보던 에드온과 제이든이 걸어 나왔다.
“댜 본 고야?” (다 본 거야?)
블레이크의 물음에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블레이크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
“으아아앙!”
“블레이크!”
나는 블레이크가 울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앤띠아!”
그러자 서럽게 울고 있던 블레이크가 나의 품에 안겼다.
“블레이크, 왜 울어? 무슨 일이야?”
“나를 느며해또.”
“응?”
“듀 따람이 나를 는며해또.” (두 사람이 나를 능멸했어.)
블레이크가 서럽게 울면서 다시 말하였다. 덕분에 나는 겨우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무슨 일이야?”
나는 옆에 서 있는 에드온과 제이든에게 물었다.
“그게….”
두 사람이 블레이크의 눈치를 살폈다. 블레이크의 앞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내용인가?
“블레이크, 일단 방으로 들어가자.”
나는 우선 울고 있는 블레이크를 침실로 보낸 뒤, 두 사람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니까 마구간에서 블레이크를 지켜보다가 귀엽다고 말했다고?”
“네. 이 녀석이 그만.”
에드온이 제이든을 흘겨보았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그게 처음에는 호들갑 떠는 사람들이 잘 이해가 안 됐었는데, 계속 보다 보니까 정말로 귀여우셔서 그만 생각이 말로 나와 버리고 말았습니다.”
“변명하지 마라! 나도 간신히 참고 있었는데, 네 녀석이 그걸 먼저 홀라당 말해버리다니!”
에드온, 지금 화내는 포인트가 조금 이상한 거 같은데….
어쨌든 특별한 일이 있었던 건 아니라 다행이었다.
“그런데 블레이크가 조쉬랑 대화한 걸 둘이서만 본 거야? 그런 일이 있으면 나를 불렀어야지!”
그렇게 화를 내며 가더니 말한테 하소연을 하고 있었을 줄이야. 얼마나 귀여웠을까? 제이든이 참지 못하고 귀엽다고 말할 정도면 진짜로 엄청나게 귀여웠을 거다.
“나도 블레이크의 귀여운 모습을 보고 싶다고!”
“…그게 문제입니까?”
제이든은 다소 황당해 했다. 하지만 이는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앞으로 그런 일이 있으면 꼭 불러!”
***
나는 그들에게 신신당부를 한 뒤, 침실로 돌아갔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블레이크가 엉엉 울고 있는데, 혼자 둘 수는 없었다.
방으로 들어가자 블레이크 대신 볼록하게 솟아 있는 이불이 보였다.
“흐으, 흑, 흐으윽.”
블레이크가 이불을 뒤집어쓴 채 서럽게 울고 있었다.
그가 흐느낄 때마다 이불이 조금씩 오르락내리락했다.
저 작은 몸뚱이가 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짠했다. 비록 그 이유가 말한테 하소연하다가 들킨 게 창피해서 일지라도 말이다.
“블레이크.”
내가 이불을 잡자, 그의 몸이 움찔 떨렸다.
“하디 마.” (하지 마.)
“응?”
“나 혼댜 이뜨래.” (나 혼자 있을래.)
“그럼 나, 나갈까?”
“히잉.”
혼자 있고는 싶지만, 그렇다고 내가 나가는 건 싫은지 블레이크가 낮게 칭얼거렸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이불을 벗기려고 했다. 그러자 블레이크는 하지 말라는 듯 다시 이불을 꾹 잡았다. 하지만 작은 손가락에는 힘이 거의 없는지라 너무나도 쉽게 쑥 벗겨지고 말았다.
“버겨떠! 하디 마라고 했는데 벗겼뎌!” (벗겼어! 하지 말라고 했는데 벗겼어!)
그러자 블레이크는 작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항의했다.
저 단어를 애매하게 생략하는 습관은 아기 때부터 시작된 거였구나….
하지만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걸 보니 입버릇 같은 건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눈물이 그렁그렁한 우리 토깽이를 꼭 안아주고 싶을 뿐이었다.
“블레이크, 왜 울어?”
나는 그를 끌어안으며 물었다.
“나를 능며했떠.” (나를 능멸했어.)
“능멸이 아니라 귀여워서 그런 거지.”
그를 위로해 주려 했지만, 블레이크는 오히려 눈물을 터트렸다.
“으앙.”
“왜 울어?”
“앤띠아한테 귀엽꼬 싶띠 않아.” (앤시아한테 귀엽고 싶지 않아.)
아, ‘뿌앵’ 하고 우는 거 너무 귀여워!
하지만 나는 입가에 실룩거리는 미소를 필사적으로 참았다.
“울보네.”
“울보 아냐.”
“울보잖아요.”
“아냐. 이건 배칸 때문야….” (아니야. 이건 백한 때문이야.)
“그래, 그래, 알았어. 우리 남편 울보 아니야.”
나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블레이크의 등을 다독여 줬다. 그러자 블레이크가 나를 올려 보았다.
“나, 앤땨 남편이디?” (나, 앤시아 남편이지?)
“그럼, 내 남편은 블레이크뿐인걸.”
나는 블레이크의 오동통한 볼살을 톡 건드렸다.
“헤헤헤.”
그러자 언제 울었냐는 듯 배시시 웃었다. 그 모습이 완전 아기 토깽이였다.
“오늘 많이 속상했어?”
“으웅….”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 우리 신랑의 어렸을 때 모습을 보고 너무 신나서, 내가 많이 놀리고 말았네.”
“내가 댜가진 게 됴아? 앤땨는 내가 계똑 따갔음 됴겠어? 큰 꼬 시러?” (내가 작아진 게 좋아? 앤시아는 내가 계속 작았으면 좋겠어? 큰 건 싫어?)
블레이크의 표정이 금세 침울해졌다.
“큰 게 왜 싫어?”
“앤땨는 귀여운 꼬 죠아하자나.” (앤시아는 귀여운 거 좋아하잖아.)
어릴 때 귀여운 사람이 좋다는 말을 하긴 했었지만, 그걸 아직까지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던 건가?
내가 지금의 성장한 블레이크보다 어린 시절의 귀여운 블레이크를 더 좋아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귀엽다고 말할 때마다 더 심하게 발끈했었나 보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블레이크를 꼭 안았다.
“그게 아니라 블레이크를 좋아하는 거지.”
“나, 냐를?”
“그럼, 내가 우리 남편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블레이크가 귀여울 때는 귀여운 게 좋고, 멋있을 때는 멋진 게 좋지.”
“아아….”
그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울어서 눈이 충혈된 데다가 볼까지 빨개지니 잘 익은 사과 같네.
“그리고 나는 블레이크가 이렇게 어릴 때의 모습은 못 봤잖아. 못 보던 모습을 봐서 기뻐. 너에 대한 건 전부 알고, 눈에 담아두고 싶거든.”
블레이크의 모든 걸 알고 싶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긴 하지만, 아주 어렸을 때의 블레이크를 보게 되어 기쁜 마음이었다.
나는 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러자 블레이크도 맑게 웃었다.
이게 기분이 완전히 풀렸나 보다.
“나됴! 나됴 앤띠아가 어릴 때 모듭 보고 시퍼!” (나도! 나도 앤시아가 어릴 때 모습이 보고 싶어!)
음…. 내가 어려진 다라….
“브레쿠! 브레에쿠!”
“하하. 앤시아, 남편 이름도 모르는 거야?”
혀가 짧아져서 ‘블레이크’도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덤으로 신랑에게 놀림을 당하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아, 안 돼. 나는 절대로 싫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나는 도리질을 쳤다.
“나는 안 변할 거야. 백한을 화나게 할 일도 없고, 그렇다 하더라도 바로 사과할 건데?”
“힝.”
나는 금세 뾰로통해진 블레이크의 볼에 뽀뽀하며,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어! 반디!” (반지!)
그는 목걸이 줄에 걸린 결혼반지를 보고 활짝 웃었다.
“나 위해떠 해뚠 거야?” (나를 위해서 해준 거야?)
“응. 우리 남편 결혼반지는 남편님이 가지고 있어야지.”
“고마워. 고마워. 뿌인!”
블레이크가 반지를 보며 아이처럼 기뻐했다. 아니, 정말로 아이구나.
“앤땨, 따랑해!” (앤시아, 사랑해!)
블레이크는 작은 손으로 나를 꼭 껴안았다. 나도 그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눈물과 웃음이 섞인 밤이었다.
***
“전하, 멋있으십니다!”
“걷는 모습이 어쩜 이리 위풍당당하신지 모르겠습니다!”
어젯밤 블레이크가 펑펑 울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기사들은 자신의 어린 주군을 달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들은 아침부터 블레이크의 일거수일투족을 칭찬하기 시작했다.
짧은 다리로 총총거리며 걸어가던 블레이크는 자신의 부하들을 째려보았다.
그러자 기사들이 얼른 다음 칭찬을 발사했다.
“눈빛도 강렬하십니다!”
하지만 말과 달리 표정은 어린 조카가 귀여워서 어쩔 줄 모르는 삼촌 그 자체였다.
“하디 마.” (하지 마.)
“하지 말라니요. 저희는 진심을 담아….”
“구냥 귀여따고 해.” (그냥 귀엽다고 해.)
“아, 아닙니다!”
기사들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귀엽다는 말을 듣고 눈물을 쏟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였다.
에드온이 앞으로 한 달간은 귀엽다는 말은 금지라며 단단히 단속하기도 했다.
“전하께서는 아주 멋지십니다!”
“네! 정말입니다!”
“대떠. 또지키 말해됴 돼. 내가 겨운 걸 어떠겠떠.” (됐어. 솔직히 말해도 돼. 내가 귀여운 걸 어쩌겠어?)
블레이크는 귀찮은 투로 뱉었다.
그는 자신이 어려진 걸 보고 너무나도 좋아하는 앤시아의 모습을 보며 걱정이 되었다.
역시 부인은 귀여운 사람을 좋아하는 걸까? 지금의 나는 싫은 걸까?
성인이 되어서도 귀여운 남자들도 있었지만, 블레이크는 아니었다.
부인은 혹시 너무나도 변해버린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계속 울적했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블레이크는 앤시아가 걸어준 반지 목걸이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부인은 자신이 어떤 모습이든 좋다고 했다. 그저 모르던 모습을 봐서 기쁠 뿐이라고 했다.
만약 앤시아가 어려졌다면 자신도 같은 마음이었을 거다.
그러니 이제는 상관없었다.
어차피 앤시아가 아닌 다른 사람의 시선은 관심 밖이기도 했고.
“정말로 귀엽다고 해도 됩니까?”
“먐대로 해.” (마음대로 해.)
주군의 승낙이 떨어지자 기사들은 환호했다. 그리고 블레이크를 꽉 끌어안았다.
“너무 귀여우십니다!”
“걷는 모습도 어쩜 이리 귀여우신지!”
“말하는 것도 귀여우세요!”
“이꼬 놔! 안으라구는 안 해떠!” (이거 놔! 안으라고는 안 했어!)
기사들에게 안긴 블레이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기사들은 블레이크를 내려 놓았지만, 그 와중에도 귀엽다는 칭찬은 끊이지 않았다.
블레이크는 괜히 허락했다고 후회했지만, 이미 너무 늦은 일이었다.
***
오늘은 수제비를 만들기로 했다.
여분으로 가마솥 하나를 더 만들었는데, 한 달 동안 별장에서 지내는 김에 가져왔다. 아궁이도 만들어서 이제는 가마솥 요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블레이크, 이 반죽을 이렇게 뜯어서 여기 올려놓는 거야. 할 수 있겠어?”
“응! 할 뚜 이떠!” (응! 할 수 있어!)
블레이크가 기분이 많이 풀린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너무 아이 취급을 하는 건 좋지 않으니까 요리를 돕는 걸 허락해 주었다.
하지만 불은 위험하기 때문에 반죽을 뜯어서 직접 탕에 넣는 게 아니라 따로 한곳에 모으도록 했다.
“에헤헤.”
블레이크는 잔뜩 신이 나서 수제비 반죽을 뜯었다.
어설프고 크기도 엉망이었다. 그리고 떼자마자 곧바로 육수에 넣는 것보다는 맛도 부족하겠지.
하지만 맛보다는 우리 블레이크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는 게 더 기쁘니까.
나는 블레이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블레이크, 너무 잘한다.”
“나, 댤해?” (나, 잘해?)
블레이크가 눈을 반짝였다.
“응. 아주 잘해.”
“맞아요. 전하, 훌륭하세요!”
“손끝이 아주 야무지십니다.”
멜리사와 테리가 호들갑을 떨면서 칭찬을 했다.
한스와 첼시는 영상석으로 블레이크의 모습을 담았다. 그들은 만면에 미소를 띤 채, 유치원 학예회를 촬영하는 학부모처럼 집중하고 있었다.
텐스테온은 정무 때문에 오지 못했지만, 사실 누구보다도 지금 블레이크와 함께 있고 싶을 거다. 그래서 블레이크의 영상을 담아서 텐스테온에게 보여줄 생각이었다. 물론 나도 간직하고 말이다.
“와, 벌써 다 했어? 이제 국물에 넣어야겠다.”
나는 블레이크가 뗀 반죽을 육수에 집어넣었다. 추가로 내가 만든 반죽도 섞고 말이다.
가마솥에 끓인 수제비가 완성되었다.
가마솥에 옹기종기 둘러앉아서 먹는 것도 맛있겠지만, 그러다 우리 블레이크가 감기에 걸릴지도 몰랐다.
나와 블레이크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뜨거우니까 조심해서 먹어.”
“응! 아뜨!”
그는 수제비를 혀에 대자마자 깜짝 놀라며 다시 뗐다. 나 역시도 놀랐다.
“뜨거우니까 조심해야지.”
나는 스푼으로 수제비를 떠서 호호 불어줬다.
“자, 아-.”
적당히 식힌 수제비를 주자, 그는 받아먹는 것이 민망한지 조금 머뭇거렸다. 하지만 이내 입을 벌렸다.
“마이따!” (맛있다.)
그는 수제비를 먹자마자 활짝 웃었다.
“맛있어?”
“응! 앤띠아가 만드러서 더 마있떠!” (응! 앤시아가 만들어서 더 맛있어!)
“블레이크가 만들어서 맛있는 거지.”
나는 그의 오동통한 볼살을 가볍게 콕 찔렀다.
“헤헤.”
그러자 블레이크는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아, 웃는 것만 봐도 마음이 치유되는 거 같아.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블레이크가 세상에서 제일 귀엽다. 작든 크든 상관없이 최고다.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블레이크에게 수제비를 먹여주었다.
블레이크가 뗀 수제비 조각이 너무 작은 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다행히 그의 입 크기에 딱 맞았다.
아휴, 어쩜 저렇게 오물오물 잘 씹을까? 그가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른 것 같다.
“앤띠아도 머거야지.” (앤시아도 먹어야지.)
“응.”
“뿌인, 마니마니 머거.” (부인, 많이많이 먹어.)
“응. 알았어.”
나도 빙그레 웃으며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식사를 마치고 후식을 먹으려고 하는데, 멜리사가 다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멜리사,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뭐?”
블레이크와 나는 깜짝 놀라 서로를 바라보았다.
***
나와 블레이크는 서둘러 밖으로 나가보았다.
“아버님….”
“테하….” (폐하….)
정말로 텐스테온이 와 있었다.
“앤시아, 별일 없었니?”
“네. 그런데 여기까진 어쩐 일이세요?”
“오랜만에 휴식을 좀 취하고 싶어서 말이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블레이크를 바라보았다.
텐스테온은 황제로 즉위한 이후 단 한 번도 휴가나 여행을 떠난 적이 없었다. 휴식은 핑계고 블레이크가 걱정되어서 온 거겠지.
“블….”
“…….”
텐스테온과 블레이크,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텐스테온이 뭐라 말을 걸기 전에 블레이크는 땅을 보며 시선을 피해버렸다.
어째 평소보다 더 어색했다. 나까지 어색한 공기에 짓눌려서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때 텐스테온이 블레이크를 번쩍 안아 올렸다. 아들에게 먼저 손을 내민 거다.
잘했어요! 아주 잘하셨어요, 아버님!
‘아버님, 나이스 샷!’을 외치려고 하는데, 텐스테온이 블레이크의 배를 통통 두드렸다.
“배가 아주 빵빵하구나.”
“…….”
세상에나…. 가뜩이나 어릴 때부터 열심히 만든 복근이 사라져서 속상해하고 있는 사람한테 저런 일격을 날리다니.
내가 요즘 블레이크를 놀리고 있지만, 복근과 관련된 부분만은 결코 말하지 않았다.
그건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선이었다. 그런데 텐스테온이 대화를 시작하자마자 그 선을 댕강 잘라버린 것이다.
“식사를 많이 한 것이….”
“놔! 놔 둬요! 내려 둬요!” (놔! 놔 줘요! 내려 줘요!)
텐스테온은 밥을 먹은 거냐며 대화를 시도했지만, 당연히 제대로 이루어질 리가 없었다.
블레이크는 발버둥을 쳤고, 텐스테온은 깜짝 놀라서 그를 내려놓았다.
어째 7년, 아니 8년 전보다도 두 사람의 사이는 더 멀어진 거 같다.
***
텐스테온은 블레이크를 위해 최소한의 정무만 서둘러 처리한 뒤, 별장으로 온 모양이었다.
즉위한 이후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려온 분이다. 분명 엄청난 결심을 하고 왔을 테지.
그러니 이번 일을 계기로 두 사람 사이에 변화가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했다.
하지만 현실은 생각처럼 녹록하지 않았다.
“뿌인, 이거 마이떠. 머거봐.” (부인, 이거 맛있어. 먹어봐.)
“응. 고마워.”
“앤시아, 이것 좀 들어보거라.”
“네, 아버님.”
황궁을 벗어나서 별장에 왔건만, 블레이크와 텐스테온 사이에는 대화가 없었다.
식사 시간에도 두 사람은 나와 이야기를 할 뿐, 서로 대화를 주고받지 않았다.
그나마도 식사 시간이 끝나면, 텐스테온은 정무를 보기 위해 서재에 틀어박혀 있었다.
최근에는 블레이크가 정무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일을 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텐스테온이 처리할 업무는 평소보다 훨씬 늘었을 거다.
“블레이크, 아버님께 다과를 가져다드리는 게 어때?”
블레이크가 차를 가지고 간다면 텐스테온이 무척 좋아할 거다. 하지만 그는 시큰둥하게 뱉었다.
“응? 내가? 시른데….” (응? 내가? 싫은데….)
그는 기본적으로 무척 다정한 사람이지만, 가끔 놀랄 정도로 냉정할 때가 있었다.
어쨌든 블레이크는 나의 옆에만 딱 붙어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텐스테온에게 찾아가거나 먼저 말을 거는 일 역시 없었다.
텐스테온에게 관심을 보이긴커녕, 오히려….
“테하는 언데까디 여기 계뗘? 코린 경 혼댜 이하려면 바쁘디 아나?” (폐하는 언제까지 여기 계실 거래? 콜린 경 혼자 일하려면 바쁘지 않아?)
그는 텐스테온이 떠나길 은근히 바라는 눈치였다. 그래도 평소에는 저렇게 노골적으로 굴지는 않는데, 아이가 되어서 그런지 감정을 숨기질 않았다.
“블레이크, 아버님이랑 같이 있는 게 싫어?”
“응. 뿌인이랑 두리 있는 띠간이 듀러들 댠다.” (응. 부인이랑 둘이 있는 시간이 줄어들잖아.)
“식사 시간만 빼고 계속 같이 있으면서.”
“나는 싯샤할 때도 듈만 이꼬 시픈꼴.” (나는 식사할 때도 둘만 있고 싶은걸.)
그가 쪼르르 달려와서 나의 품에 안겼다. 나는 그를 꼭 안아주었다.
나도 블레이크랑 함께 있고 싶었다. 하지만 부자 사이가 점점 더 벌어지는 걸 알면서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뭔가 대책을 강구해야 했다.
***
“블레이크, 나, 다녀올게.”
“나됴 가티 가.” (나도 같이 가.)
내가 수도에 다녀오겠다고 하자 블레이크가 매달렸다.
“앤띠아 혼댜서는 너무 위헌해.” (앤시아 혼자서는 나무 위험해.)
대체 누가 할 소리를 하는 건지.
나는 블레이크가 텐스테온과 함께할 시간을 마련하기 위해서 잠시 별장을 비우기로 했다.
“잠깐 수도에 다녀오는 건데 뭐. 그동안 아버님이랑 있어.”
“…….”
블레이크는 시무룩해져서 고개를 숙였다. 내가 떠나서 저러는 건지, 아니면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게 싫어서 그러는 건지 모르겠다.
“하룻밤만 자고 올 거라니까.”
“우응.”
나는 그의 오동통한 볼살을 문지르며, 텐스테온을 바라보았다.
“아버님, 저 다녀올게요.”
“조심해서 다녀오거라.”
“네.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우리 블레이크를 잘 부탁드려요.”
“그래.”
“오늘 하루는 푹 쉬시고 블레이크랑 있어 주세요.”
서재에 틀어박혀 계시지 말고요.
나의 우려를 아는지 텐스테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괜탸는데….” (괜찮은데….)
정작 블레이크는 시무룩했지만 말이다. 나는 그의 포동포동한 볼을 가볍게 꼬집었다.
조금 불안하지만 괜찮겠지.
***
앤시아가 떠나자, 블레이크와 텐스테온 사이에는 어색한 기운이 감돌았다.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에드온이 조용히 말을 건넸다.
“전하, 저랑 같이 가실까요?”
“응!”
블레이크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텐스테온보다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있었던 에드온이 훨씬 편했다.
“안아드릴까요?”
“아니.”
“그럼 손을 잡고 가시죠.”
“혼댜 거를 뚜 이는데.” (혼자 걸을 수 있는데.)
“그래도 위험합니다. 혹시 넘어지시기라도 하면, 비 전하께서 걱정하세요.”
“아라떠.” (알았어.)
블레이크는 고개를 끄덕이며 에드온과 손을 잡았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텐스테온이 아니라 에드온이 블레이크의 아버지라고 생각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폐하, 전하는 저희가 모시겠습….”
에드온이 공손하게 말하는데, 텐스테온이 블레이크를 번쩍 안아 올렸다.
“흐앙!”
갑자기 몸이 들린 블레이크가 짧은 비명을 질렀다. 텐스테온은 그런 아들을 단단히 안으며 말했다.
“나도 같이 가겠다.”
연무장에 모여 있던 기사들은 블레이크와 텐스테온이 함께 오자 당황하며 서둘러 인사를 올렸다.
텐스테온에게 안겨 있던 블레이크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이로 변하고 나서 다른 사람의 품에 자주 안겼던 블레이크였지만, 텐스테온과 함께 있는 것만큼은 불편해 보였다.
블레이크는 텐스테온이 그를 내려놓기 무섭게 기사들에게로 달려갔다.
텐스테온은 그런 아들의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어딘지 쓸쓸해 보이는 황제의 모습에 기사들은 눈치를 살폈다.
“짐은 신경 쓰지 말고 평소대로 하거라.”
텐스테온은 연무장에 한편에 있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황제가 지켜보고 있었다. 그것도 천 년 동안 이어져온 제국의 역사를 통틀어서 손에 꼽힐 정도로 강한 황권을 가진 텐스테온이었다.
신경 쓰지 말라고 한들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가댜.” (가자.)
모두들 흘끔흘끔 텐스테온을 쳐다보는데, 블레이크가 에드온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블레이크는 아버지와 최대한 멀리 떨어지고 싶었다.
어려진 주군의 작은 속삭임에 기사들은 눈을 번쩍 떴다.
“네! 알겠습니다.”
“전하, 어디로 갈까요?”
기사들은 황제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블레이크의 귀여움에 마음을 빼앗겼다.
게다가 제5 기사단은 황태자를 섬겼다. 아무리 황제라고 한들 자신들에게는 블레이크가 우선이었다.
기사들이 블레이크를 빙 둘러싸며 눈을 반짝이는데, 텐스테온이 말했다.
“위험하다. 어디 가지 말고 여기 있거라.”
“아, 네. 폐하.”
물론 그렇다고 한들 황제의 명은 무시할 수 없었다. 기사들은 재까닥 텐스테온의 말에 고개를 숙였다.
도망갈 기회를 놓친 블레이크는 시무룩했다. 그러자 기사 알렉스가 슬쩍 다가가서 그에게 선물을 건넸다.
“전하, 이거 받으십시오.”
“와!”
선물을 본 블레이크의 눈이 커졌다. 그것은 작은 목검이었다.
블레이크는 검술 훈련을 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진검은 물론이고 목검조차도 그에게는 너무 크고 무거웠다.
그래서 시무룩해 하던 참이었는데, 알렉스가 블레이크의 몸에 딱 맞는 작고 가벼운 목검을 만들어 준 것이다.
“아레뜨! 꼬마워!” (알렉스! 고마워!)
“별말씀을요.”
“헤헤헤.”
블레이크는 허공에 검을 그어보며 배시시 웃었다. 비 전하가 곁에 있지 않은 이상 보여주지 않는 귀한 미소였다.
알렉스는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다른 기사들은 질투심으로 들끓었다.
‘자기만 황태자 전하의 칭찬을 받다니!’
‘내가 먼저 선물로 드리려고 했는데, 선수를 쳐?’
질투를 넘어 살기까지 느껴지는 시선에 알렉스는 움찔 떨었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다른 사람들의 반응 같은 건 신경 쓰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이게 얼마 만에 잡아보는 검인지.
블레이크는 앤시아가 혼돈의 계곡으로 떠난 뒤 더욱더 검술에 매진했었다.
그날 이후 검을 손에서 떼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몸이 작아지고 나서는 아예 검을 잡지 못했다.
오랜만에 검을 잡으니 어딘지 어색했다. 게다가 걷는 것도 힘든 조그마한 몸은 그의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오기가 생겼다.
블레이크가 작은 손으로 검을 맞잡는데, 목검이 그의 손에서 쓰윽 빠져나갔다.
“어?”
블레이크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자신의 목검을 들고 있는 텐스테온의 모습이 보였다.
“테하….” (폐하….)
혹시 어렸을 때처럼 검술을 가르쳐 주려는 걸까?
비록 짧은 기간이긴 하지만 텐스테온에게 검을 배웠던 기억은 블레이크에게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었다.
블레이크는 기대감을 담아 텐스테온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텐스테온의 입에서는 블레이크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말이 나왔다.
“위험하다.”
텐스테온은 검을 거두어 갔다. 지금 블레이크의 몸은 너무 작고 여렸다. 검을 휘두르는 건 위험했다.
“이건 압수다. 에드온.”
“네, 폐하.”
“황태자와 공놀이를 하도록 해라.”
“네.”
텐스테온은 자신이 준비해온 공을 가지고 오라고 시켰다.
블레이크가 저주에 걸리기 전, 그러니까 정말 5살 때 공놀이를 무척 좋아했었다.
텐스테온은 그 시절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가 다시 자리에 앉는 순간, 잔뜩 뿔이 난 블레이크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뎌! 이거 시뎌! 난 아가가 아니라꼬!” (싫어! 이거 싫어! 난 아기가 아니라고!)
블레이크는 토라져서 공을 던지며 연무장 밖으로 나갔다.
“전하!”
기사들은 당황하며 그를 따랐다. 하지만 누구보다 당황한 사람은 텐스테온이었다.
***
“후우.”
“비 전하, 걱정되는 일이 있으세요?”
내가 한숨을 내쉬자 첼시가 물었다.
“우리 블레이크, 잘 지내고 있겠지?”
블레이크와 텐스테온이 함께 있는 시간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 나오긴 했지만, 막상 블레이크와 떨어지니 걱정이 되었다.
“기사단이 지키고 있는걸요. 폐하께서도 계시고요. 문제없을 겁니다.”
“그렇겠지?”
텐스테온이랑 함께 있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가 블레이크를 돌봐줄 거고, 그럼 조금 가까워질지도 모른다.
“네. 물론이죠. 그러니까 오늘은 푹 쉬세요. 그동안 전하를 돌보시느라 힘드셨잖아요.”
“힘들다니! 엄청 좋았는데!”
우리 블레이크가 얼마나 착하고 귀여운데!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힐링이었다.
“정말 못 말리시겠네요. 전하가 그렇게 좋으세요?”
“응! 당연하잖아! 아, 우리 블레이크 보고 싶다.”
잠깐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벌써 보고 싶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원래대로 돌아올 거다. 물론 멋진 남자가 된 모습도 좋았지만, 작아진 모습은 지금밖에 볼 수 없으니까.
하지만 첼시는 그런 나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안 돼요. 안 돼.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부터 남편을 찾으세요! 오늘은 모든 걸 잊고 저희 호텔에서 푹 쉬세요!”
나는 지금 첼시의 가문에서 운영하는 호텔에 있었다. 오늘은 여기서 하룻밤 자고 갈 계획이었다.
디저트로 나온 복숭아 타르트를 보자 또다시 블레이크 생각이 났다.
“우리 블레이크, 복숭아 정말 싫어하는데….”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싫어하는 걸 봐도 생각나시는 거예요?”
“응.”
우리 블레이크가 이걸 보면 질색을 했을 거다.
그 모습이 또 얼마나 귀여울까?
“보고 싶다.”
내가 또다시 작은 한숨을 내쉬자, 첼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비 전하, 곧 결혼하시죠.”
“결혼은 예전에 했지만….”
“이번에 신전에 보고를 올리시잖아요. 그렇게 되면 이제 끝이에요. 더는 벗어날 수 없다고요.”
첼시가 무척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쓸데없는 고민이었다.
“나는 벗어날 생각이 없는데.”
“…….”
첼시는 잠시 할 말을 잃은 듯했지만, 이내 좀 전보다 비장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번에 정식으로 결혼식을 하시잖아요, 그럼 황태자 전하께서는 비 전하를 절대로 놓아주지 않을 거예요. 아침부터 잘 때까지 하루 종일 쫓아다니실걸요!”
“그럴 리가 없잖아.”
첼시는 도대체 블레이크를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
하지만 나의 대답을 들은 첼시는 흥분했다.
“없기는요! 앞으로는 이렇게 혼자 있으실 수 없어요. 오늘도 전하께서 작아지셨으니까 혼자 나오신 거지, 아니면 어림도 없다고요. 이게 비 전하 인생의 마지막 외박이 되실 수 있으세요. 충분히 즐기셔야 한다고요!”
“그, 그런가?”
애초에 혼자 떠날 생각이 없어서 상상해보진 않았지만, 오늘도 하루만 자리를 비운다고 했을 때도 같이 가면 안 되냐며 엄청나게 매달리긴 했다.
“네! 오늘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거예요! 오늘은 황태자 전하를 잊고, 비 전하의 책임감도 내려놓고 즐기세요!”
“으응.”
나는 첼시의 박력에 이끌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블레이크는 아버님이랑 잘 지내고 있을 거다. 오늘은 다 잊고 쉬어야지.
나는 창밖의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며 달콤한 복숭아 타르트를 입에 넣었다.
블레이크랑 같이 오면 좋았겠다, 라는 스쳤지만 첼시한테는 비밀로 하기로 했다.
***
블레이크의 볼이 사탕을 문 것처럼 툭 튀어 올라왔다.
그는 연무장에서 나온 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텐스테온은 블레이크가 혼자 있는 것이 위험하다며 자신의 서재로 데려갔다.
별장에 마련된 황제의 서재에는 종이를 넘기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텐스테온은 블레이크의 맞은편에 있는 소파에 앉아 서류를 확인하고 있었다.
사실 급한 일은 아니었다.
앤시아는 떠나기 전 텐스테온을 찾아와서 신신당부를 했다. 오늘 하루는 무슨 일이 있어도 블레이크와 함께 있어달라고.
그래서 어제 밤을 새우며 필요한 업무는 마무리해놓았다. 하지만 어색한 적막 속에서 자연스레 서류로 손이 가게 되었다.
“뎌, 가게요.” (저, 갈게요.)
“음? 뭐라고 한 것이냐?”
텐스테온이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서 되물었다. 그러자 블레이크는 다시 대답하는 대신 탁자 위에 놓인 펜을 집어서 종이에 글을 썼다.
-나가보겠습니다.
비록 글씨체는 엉망이었지만, 말투 자체는 원래 블레이크와 같았다.
삐뚤빼뚤한 글씨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텐스테온은 단호하게 말했다.
“안 된다.”
“왜여!” (왜요!)
블레이크가 거세게 항의했다.
“위험하다.”
텐스테온은 블레이크를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없었다. 제5 기사단도 안 된다.
이렇게 어린아이한테 덥석 검을 쥐여준 데다가, 말리는 사람도 하나 없다니.
텐스테온이 단호하게 말하자, 블레이크는 몇 시간 동안 참아오던 마음의 소리를 외쳤다.
“띰띰해요!” (심심해요!)
평소의 블레이크였다면 몇 시간이 아니라 몇 날 며칠을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한다고 해도 텐스테온에게 저런 말은 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어려진 육체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블레이크가 짧은 다리를 동동 구르며 성토하자, 텐스테온은 잠시 당황했다.
‘심심….’
아들이 심심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하지?
텐스테온은 눈앞에 조그마한 블레이크의 모습을 보며, 그가 어렸을 때 좋아하던 동화책을 떠올렸다. 사실 이미 챙겨오기도 했다.
하지만 방금 전 공놀이가 싫다며 화를 내던 블레이크를 생각하며 얼른 생각을 접었다.
정말로 어린 시절에 놀던 건 안 된다. 위험한 것 역시 안 된다. 그렇다면 뭐가 좋을까?
텐스테온은 곰곰이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같이 서류를 확인하겠느냐?”
“네!”
블레이크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갑작스럽게 별장으로 오느라 업무를 그대로 두고 나와서 신경 쓰였던 참이었다.
텐스테온이 왔을 때도 일이 어떻게 되었냐고 묻고 싶었지만, 지금까지 말하지 못했었다.
블레이크가 좋아하자, 텐스테온의 입꼬리도 자연스레 호선을 그렸다. 하지만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댱부를 빼도려뜰 거예요! 본때를 보여 뚸야대여!” (장부를 빼돌렸을 거예요! 본때를 보여 줘야 합니다.)
“뎐부 뜨러버려야 해요!” (전부 쓸어버려야 합니다!)
“이런 넘은 댜기가 한 딧을 그대로 도려 바다야 해요! 따디를 가기간기 띧어서 주겨버디됴!” (이런 놈은 자기가 한 짓을 그대로 돌려받아야 합니다!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서 죽여버리죠!)
각지에서 일어난 귀족들의 범죄와 그 처벌에 관한 서류였다.
블레이크의 말에 틀린 부분은 없었지만,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저런 말을 거침없이 뱉는 모습을 보니, 텐스테온은 자신이 블레이크에게 몹쓸 짓을 시킨 것만 같았다.
“그만하는 게 좋겠다.”
“왜여!”
블레이크가 항의했지만, 텐스테온은 그의 앞에 있는 서류를 치워버렸다.
“그만하자.”
오랜만에 일을 하면서 기뻐하던 블레이크는 갑자기 서류를 빼앗기자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는 더 항의하지 않은 채 조용히 소파에서 내려갔다.
“블레이크, 어딜 가느냐?”
“딴책이요.” (산책이요.)
“같이 가자.”
텐스테온은 블레이크를 따라 일어났다.
“괘탄아요.” (괜찮아요.)
“그래도 위험….”
“저는 딘땨 어린애가 아니에요!” (저는 진짜 어린애가 아니에요!)
“…….”
블레이크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텐스테온은 멈칫했다.
“그땐 뎌 위험해떠요. 그러케 걱뎡이 대뜨면 그때 버리디 마셔떠야죠.” (그땐 더 위험했어요. 그렇게 걱정이 되셨으면 그때 버리지 마셨어야죠.)
어린 목소리에 슬픔이 담겨 있었다. 블레이크가 저주에 걸렸던 시절의 이야기를 직접 꺼낸 것은 처음이었다.
블레이크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밖으로 나갔다. 텐스테온은 그런 아들을 잡을 수가 없었다.
***
블레이크는 기사들과 궁인들을 모두 물리치고 홀로 정원을 걸었다.
‘왜 그랬을까…. 내가 대체 왜 그런 걸까…. 정말 아이도 아니고.’
그는 자신이 했던 말을 후회하며 작은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런데 그때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부인이다!”
부인? 이게 무슨 말이지. 게다가 이 목소리는…!
블레이크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예상했던 대로 코비가 자신을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내가 왜 네 뿌인니야!” (내가 왜 네 부인이야!)
블레이크는 발끈했다. 하지만 코비는 블레이크가 화를 내든 말든 싱글벙글이었다.
“부인 맞잖아! 뽀뽀도 했잖아!”
“나 남댜거든!” (나 남자거든!)
“상관없는데.”
아이는 블레이크가 성별을 밝혀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하긴 과일 가게에서 저 녀석이 뽀뽀를 했을 때 이미 남자라는 말을 했었구나. 그때도 저런 반응이었지….
하지만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었다.
“나 겨론해꺼든!” (나 결혼했거든!)
블레이크가 반박하자, 코비가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꼬맹이 주제에 거짓말을 하는 게 귀엽다는 듯한 미소였다.
“…….”
블레이크는 더 이상 반박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어린아이였다. 기를 쓰고 따질 이유는 없다. 말을 한다고 해도 들을 것 같지도 않고 말이다.
게다가 저 녀석보다 발음이 안 된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그론데 너 여기는 어떠케 드러와써?” (그런데 너 여기는 어떻게 들어왔어?)
블레이크가 묻자 코비는 우쭐해 하며 손짓했다.
“이리 와봐.”
블레이크는 코비를 따라갔다. 그러자 코비가 높다란 담 밑에 있는 무성한 풀을 치우더니 그 밑에 있는 개구멍을 보여줬다.
이곳은 유서 깊은 황궁의 별장이었지만, 텐스테온이 즉위한 이후 한 번도 쓰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제대로 관리되지 못했다.
“네가 차든 거야?” (네가 찾은 거야?)
“응. 나 대단하지?”
뿌듯해하는 코비를 보며 블레이크는 기가 막혔다.
황궁의 별장을 침범해놓고 자랑스러워하는 이 녀석을 어찌해야 할까?
“부모니믄?” (부모님은?)
“몰라!”
코비가 흥하고 고개를 돌렸다. 저 녀석도 부모님이랑 싸운 건가…?
“가댜.” (가자.)
“어딜?”
“바래다주께.” (바래다줄게.)
블레이크는 기사들에게 말하려다가 그냥 직접 데려다주기로 했다.
기사들한테 말한다면 저 녀석은 분명 크게 혼이 날 거다.
물론 자신과 앤시아 둘만 있다면 적당히 훈계만 하고 돌려보냈을 테지만, 텐스테온은 규칙과 법도에 엄격했다. 그러니 벌을 내릴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지 않더라도 이 사실이 알려지면, 영주가 과잉 충성하며 코비의 가족을 엄벌에 처할 수도 있었다.
블레이크는 사건이 커지길 원하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은 기분이 복잡해서 잠시 외출을 하고 싶었다.
잠깐 나갔다 오는 건데 괜찮겠지. 내가 진짜 어린애도 아니고 말이다.
***
블레이크는 개구멍을 통해서 코비와 함께 별장 밖으로 나왔다.
그는 코비에게 길을 안내하라고 했다. 하지만 코비는 광장 근처의 골목을 빙글빙글 돌 뿐이었다. 일부러 저러는 게 분명했다.
블레이크는 참다못해 물었다.
“너희 딥 어댜?” (너희 집은 어디야?)
“몰라.”
“마를 해야 알디.” (말을 해야 할지.)
“싫어.”
코비는 뾰로통하게 뱉었다.
“부모니미 거뎡하뗘.” (부모님이 걱정하셔.)
“엄마는 나 싫어해!”
“무뜬 일 이떠떠?” (무슨 일 있었어?)
블레이크는 걱정이 되어 물었다.
“엄마는 형만 좋아해! 형은 검을 사줬는데, 나는 안된데!”
“네가 어려떠 그러치.” (네가 어려서 그런 거지.)
“안 어려! 난 다 컸다고! 난 기사가 될 거야!”
“…….”
“사탕도 못 먹게 하고! 과일만 먹으래! 나는 딸기가 아니라 사탕을 먹고 싶다고!”
“…….”
혹시 무슨 사정이 있는 건 아닐까, 하고 걱정했지만, 하나같이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일화뿐이었다.
“시름 말하디 마. 구롬 가계로 간댜.” (싫으면 말하지 마. 그럼 가게로 간다.)
블레이크는 코비의 어머니네 과일 가게로 가기로 했다.
골목 깊숙이 들어오긴 했지만, 광장의 중심부로 나가면 금방 찾을 수 있을 거다.
“가기 싫은데. 그냥 우리 같이 놀자.”
“안 대. 너희 부모니미 디금 얼마나 걱뎡하시게또?” (안 돼. 너희 부모님이 지금 얼마나 걱정하시겠어?)
블레이크는 투정을 부리는 코비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치, 나는 너랑 놀고 싶은데.”
코비와 달리 블레이크는 진짜 어린애와 놀고 싶은 마음이 티끌만큼도 없었다.
그나저나 어린애가 체력도 좋았다. 집에서 황궁 별장까지 숨어든 것도 모자라서 골목을 빙빙 돌았는데도 지친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내가 검 듈 테니까, 이만 됼아가.” (내가 검을 줄 테니까, 이만 돌아가.)
“검을 줄 거야?”
눈을 반짝이는 코비에게 블레이크가 말했다.
“응. 모컴.” (응. 목검.)
“치이. 나는 진검이 좋은데.”
코비가 투덜거렸다. 기껏해야 대여섯 살밖에 안 되어 보이는데 진검 타령이라니. 저러니까 부모님이 반대하지.
하여튼 요즘 애들은 참 빨랐다.
“어텰프게 딘거믈 뜨면 안 대. 너만 위헌한 게 아니라 상대까디 위헌하게 만드는 꼬야.” (어설프게 진검을 쓰면 안 돼. 너도 위험한 게 아니라 상대까지 위험하게 만드는 거야.)
“와, 너는 그런 걸 어떻게 알아?”
“…….”
감탄하는 코비의 말을 들으며, 블레이크는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이 상태로는 진검을 잡는 것은 무리다. 연습 상대까지 위험에 빠트릴 수 있다.”
텐스테온은 블레이크에게 검술을 알려줬었다. 그에게 검을 배웠을 때 무척 즐거웠었는데….
저주에 걸렸던 시절, 앤시아와 함께했던 시간을 제외하면 거의 유일한 추억이었다.
“그냥 드러써. 암튼 연뜹을 열띠미하면 딘검도 둘께.” (그냥 들었어. 아무튼 연습을 열심히 하면 진검도 줄게.)
“진짜?”
어쨌든 체력이 좋고, 별장에 숨겨진 개구멍을 파악할 만큼 예리한 구석도 있었다.
기사의 자질이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저 녀석이 진심으로 노력한다면 지원해줄 거다.
“구래.” (그래.)
블레이크가 고개를 끄덕이자, 코비가 환하게 웃으며 그를 덥석 끌어안았다.
“고마워, 부인!”
“…….”
블레이크는 검을 주겠다는 말을 당장 취소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덤으로 꿀밤도 한 대 먹여주고 싶었지만, 상대는 진짜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꾹 참으며 코비의 몸을 밀어내었다.
“이야, 요즘 꼬맹이들은 빠르네.”
그때 비릿한 목소리와 함께 한 무리의 남자들이 나타났다.
블레이크는 그들을 올려보았다. 한눈에 봐도 질이 나빠 보이는 인간들이었다.
“저 꼬맹이 엄청 부잣집 애 같은데?”
얼굴에 커다란 흉터가 있는 남자가 블레이크를 가리키며 말했다.
“머리색이랑 눈동자를 봐. 그냥 부자가 아니라 황족일지도 몰라.”
녹색 머리의 남자가 말하자, 다른 일행들도 탐욕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인신매매범인가? 귀찮게 됐군.
블레이크는 눈을 찡그렸다.
“코비.”
그는 코비의 이름을 낮게 불렀다. 그러자 바들바들 떨고 있던 코비가 얼른 대답했다.
“응.”
“내가 마글 테니까 너는 됴망텨.” (내가 막을 테니까 너는 도망쳐.)
“하, 하지만….”
그는 망설였다. 블레이크를 두고 혼자서만 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거다. 하지만 블레이크의 입장에서는 코비가 남이 있는 편이 훨씬 귀찮았다.
“꼬마야, 우리한테서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인신매매범들이 낄낄거리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블레이크는 망설이고 있는 코비의 등을 떠밀었다.
“네가 이뜸 방해만 대니까 어떠 가.” (네가 있으면 방해만 되니까 어서 가.)
“응.”
블레이크가 강하게 말하자, 코비는 그의 카리스마에 밀려 고개를 끄덕였다.
“야! 잡아!”
코비가 뛰어가자, 인신매매범 중 하나가 그를 잡으려 했지만 그대로 발이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블레이크가 사내의 다리에 마나를 휘감은 것이다.
몸이 작아지는 바람에 검술은 어렵지만, 마법은 사용할 수 있었다. 물론 용력이 마나를 방해하는 바람에 평소만큼 실력을 발휘하는 건 어려웠지만, 이딴 놈들을 처리하기에는 충분했다.
마법 공격이 날아오자, 놈들은 화들짝 놀라며 가까스로 몸을 피했다.
만만하게 보았던 어린아이가 마법을 사용하자, 그들의 표정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거 정체가 뭐지? 마법사였나?”
“저런 꼬맹이가 마법을 써?”
“더 대박이잖아! 얼굴도 예쁜 데다가 마법사라니!”
“그러게. 황족이면 조금 성가실 거 같다고 생각했는데, 부모랑 귀찮게 협상할 필요 없이 바로 경매에 넘기면 되겠네!”
노예 경매까지 손을 대는 건가. 단순한 동네 건달은 아닌가 보군.
블레이크가 그들을 노려보며 다음 마법을 준비하는데, 뒤에서 어떤 놈이 한 여자아이를 안고 나타났다.
“꺄아!”
“아가야, 이 누나가 너 때문에 크게 다칠 수가 있어. 그러니 조용히 따라올래.”
남자는 소녀의 목에 칼을 겨눈 채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블레이크는 마법을 쓰려던 손을 내려놓았다.
***
코비는 정신없이 뛰었다. 어린아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블레이크가 그의 등을 두드릴 때, 빨리 도망칠 수 있도록 마법을 걸어주었기 때문이다.
코비는 이런 정확한 이유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래도 블레이크 덕분에 빨라졌다는 건 느끼고 있었다.
그는 서둘러 달렸다. 코비가 향한 곳은 자신의 집이 아니라, 블레이크를 만났던 황실의 별장이었다.
별장은 블레이크가 사라진 걸 알고는 비상이었다.
“건물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보이지 않습니다.”
“정원에도 없습니다.”
기사들은 서둘러 텐스테온에게 보고했다.
텐스테온은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의 탓이었다. 블레이크가 뭐라 하든 절대로 혼자 둬서는 안 됐다.
그 작은 아이가 대체 어디로 간 건지.
“당장 수색을 시작해라.”
“네, 폐하.”
텐스테온과 기사들이 별장 밖으로 나가는데, 멀리서 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요! 도와주세요!”
아이는 황제를 향해 소리쳤다.
코비는 한눈에 그가 블레이크의 아버지라는 걸 직감했다.
블레이크와 같은 은발과 붉은 눈동자, 그리고 어딘지 신비로운 카리스마까지, 모든 것이 닮았기 때문이다.
코비는 얼른 그에게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기사들은 황급히 그를 가로막았다. 기묘할 정도로 빠른 속도로 뛰는 아이였다. 어딘지 수상했다. 이런 아이가 황제에게 접근하도록 할 수는 없었다.
“잠깐! 괜찮으니 들여보내라.”
하지만 텐스테온은 기사들에게 명했다.
아이는 자신을 똑바로 보며 도움을 청했다. 그가 블레이크에 대해 알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예, 폐하.”
코비는 기사들에게서 벗어나자마자 텐스테온의 앞으로 달려갔다.
아이가 가까이 다가오자 에드온의 눈이 커졌다. 그는 블레이크 볼에 뽀뽀를 했던 과일 가게의 아이였다.
“제발 구해주세요! 부인이 저를 구해주다 나쁜 놈들한테 잡혀갔어요!”
“부인이라니?”
텐스테온은 어리둥절했다. 그러자 에드온이 황급히 말하였다.
“황태자 전하를 말씀하시는 겁니다.”
“뭐라?”
블레이크가 납치당했다. 텐스테온은 손가락이 부러질 듯 주먹을 굳게 쥐었다.
***
텐스테온과 기사들은 코비가 말한 장소로 갔지만, 블레이크는 이미 사라져 있었다.
벽의 곳곳에 블레이크가 마법을 사용했던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그가 마법을 썼는데도 납치를 당한 거다.
텐스테온의 얼굴이 싸늘하게 경직됐다. 에드온과 기사들의 표정도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어떤 놈들이었는지 기억나는 게 있느냐?”
“여러 명이었는데, 한 남자의 얼굴에 큰 상처가 있었어요. 왼쪽 눈 쪽에 이렇게 긴 상처요! 그리고 다른 남자는 머리 색깔이 초록색이었어요! 키가 작았고요.”
텐스테온의 물음에 코비는 나이답지 않게 침착하게 대답했다.
블레이크는 자신을 구하려다 납치당했다. 너무 미안하고 스스로가 한심해서 엉엉 울고 싶었지만, 지금은 블레이크를 구하는 게 먼저였다.
코비가 범인들의 인상착의를 말하자, 상황을 듣고 달려온 경비대장이 소리쳤다.
“아!”
“누군지 아느냐?”
“아랫지방에서 기승을 부리던 노예상입니다. 최근 종적을 감추었다고 들었는데, 이쪽으로 거점을 옮긴 모양입니다. 돈이 되는 일어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잔악하기로 유명합니다.”
경비대장은 그들이 아이들을 유괴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 놈들이라고 덧붙였다.
“블레이크….”
텐스테온의 눈앞이 깜깜해졌다. 블레이크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때도 지켜주지 못했는데, 또 놓쳐버리고 말았다.
“당장 전 병력을 동원하여 황태자를 찾….”
텐스테온이 명령을 내리는 순간, 근처에서 거대한 폭발음이 울렸다.
“설마….”
블레이크….
***
블레이크가 휘말렸을지도 모른다.
텐스테온은 황급히 폭발음이 들린 곳으로 달려갔다. 민가가 밀집한 곳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건물이었다.
건물 안은 폭발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노예상으로 보이는 험상궂은 사내들이 황급히 건물 밖으로 뛰어나오고, 잡아두었던 희귀한 동물들이 탈출하는 등 일대가 온통 아수라장이었다.
블레이크를 납치한 놈들이 분명해 보였다.
텐스테온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자 기사들이 황급히 막아섰다.
“폐하, 위험하십니다!”
“황태자 전하는 저희가 구하겠습니다!”
“비켜라.”
텐스테온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지독한 살기에 눌린 기사들은 더 말하지 못하고 옆으로 물러났다.
텐스테온은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건물 안은 어둡고 음습했다. 단단한 철창으로 이루어진 감옥이 즐비했고, 그 안에는 아이와 여인, 소수민족으로 보이는 남자 등 다양한 사람이 갇혀 있었다. 심지어 동물이나 마물도 있었다.
하지만 블레이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블레이크. 블레이크….’
텐스테온은 블레이크를 찾으며 건물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노예상들이 텐스테온을 막아섰지만, 그의 상대가 되지는 못했다.
텐스테온은 문신으로 도배가 된 남자의 팔을 꺾으며 물었다.
“조금 전 네놈들이 데려온 아이는 어딨느냐?”
“저, 저쪽에….”
남자는 건물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문을 가리켰다. 텐스테온은 곧장 그곳으로 뛰어갔다.
“으아악!!”
방의 안쪽에서 폭발음과 함께 사내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텐스테온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데, 안에서 블레이크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텐스테온은 다급히 문을 열었다.
“아! 딘짜! 질기기눈. 이마나면 불디?” (아, 진짜! 질기기는. 이만하면 불지?)
“으아악!”
텐스테온은 눈 앞에 펼쳐진 풍경에 당황했다.
노예상들은 전부 쓰러져 있었고, 블레이크는 그들의 몸을 발로 툭툭 치며 화를 내는 중이었다.
“블레이크!”
텐스테온의 머릿속에 떠올랐던 최악의 상황과 완전히 정반대의 풍경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다행이었다.
텐스테온은 안도하며, 노예상들을 깔아뭉개고 있는 블레이크를 안아 올렸다.
“어!”
블레이크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텐스테온을 보며 당황했다.
“여긴 어뗜 이리세요?” (여긴 어쩐 일이세요?)
“너야말로 이게 어떻게 된 거냐! 몸은 괜찮은 것이냐? 다친 데는 없고?”
“아, 네.”
블레이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놈들은 위기에 빠지자마자 다른 아이를 데려와서 블레이크를 협박했다.
아이를 납치하는 게 아주 익숙해 보였다. 블레이크는 놈들의 단순한 유괴범이 아닐 거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일부러 본거지를 습격하기 위해서 유괴를 당해준 것이었다.
그리고 블레이크의 짐작이 맞았다.
놈들의 아지트에 와보니 자신 말고도 수많은 사람이 납치를 당해서 감옥에 갇혀 있었다.
블레이크는 각각의 감옥마다 보호 결계를 쳤다. 혹시라도 저놈들이 그들을 인질로 삼으면 곤란하니까.
그리고 결계를 치는 걸 마치자마자 마법을 사용하여 노예상 놈들을 쓸어버리던 중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사람들을 가둬놓은 감옥일 뿐, 노예시장이 열리는 곳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을 취조하며 비밀 노예시장이 열리는 시간과 장소를 캐묻는 중이었다.
“데가 어린앤가요. 걱뎡하실 거 어써요.” (제가 어린앤가요. 걱정하실 거 없어요.)
블레이크가 무심하게 말하자, 텐스테온은 버럭 화를 냈다.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어떻게 걱정을 안 해!”
블레이크는 깜짝 놀랐다.
텐스테온이 그에게 처음으로 고함을 쳤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놀란 것은 아니었다. 자신을 끌어안는 텐스테온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느껴졌다.
“데둉해요.” (죄송해요.)
블레이크는 고개를 숙였다.
창백하게 질린 텐스테온을 보며, 자신이 정말로 어린애도 아닌데, 뭘 그리 걱정하냐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아니다. 무사하면 됐다.”
텐스테온이 블레이크를 꼭 끌어안는데, 바닥에 쓰러져 있던 노예상이 그의 발을 덥석 잡았다.
“사, 살려주세요. 저, 저 아이는 괴물이야!”
노예상이 공포에 질린 채 소리쳤다. 아무리 마법을 쓸 수 있다고는 해도 어린아이였다. 하지만 그는 혈혈단신의 몸으로 노예상 아지트를 초토화시켰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노예상은 자신이 아이를 납치해 왔다는 사실도 잊고 당당하게 구조를 요청했다.
마법에 당해서 정신이 없다지만 기가 막힐 정도로 뻔뻔스러운 행동이었다.
“저놈은 분명 인간이 아니…. 아악!!”
노예상은 말을 맺지 못했다. 텐스테온이 그의 손을 잘라 버린 것이다.
“지금 뭐라 지껄인 것이냐?”
“으악!! 사, 살려 주십….”
“내 아들은 괴물이 아니다.”
텐스테온의 검이 다시 놈의 몸을 꿰뚫었다.
***
텐스테온은 블레이크를 기사들에게 맡긴 뒤, 안에 남아 있는 노예상들을 도륙내었다.
그들에게 유괴당했던 이들은 모두 풀려났고, 비밀 노예시장이 열리는 장소도 알아내었다. 노예시장에 참석하거나 거래를 했던 사람의 명단 또한 확보했다.
텐스테온은 이와 연루된 이들을 모두 잡아들이라 명했다.
노예상을 일망타진한 뒤, 텐스테온은 블레이크를 꼭 안고 별장으로 돌아갔다.
황태자가 사라졌다는 전갈을 받고, 경비대는 물론이고 주변 영지의 기사들까지 모두 모여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황제가 돌아오자, 일렬로 도열하여 인사를 올렸다.
하지만 예를 갖추는 와중에도 기사들의 눈은 텐스테온에게 안긴 황태자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여기에 오면서, 황태자가 마법 연습을 하다가 실수로 어려졌다는 상황은 이미 전해들은 터였다. 하지만 말로 듣는 것과 실제로 보는 건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기사들은 귀엽다는 말이 튀어나오는 걸 힘겹게 참았다. 또한 놀라기도 했다.
차갑고 냉철하기로 유명한 황제 텐스테온이 아들을 너무나도 소중한 보물처럼 꼭 끌어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내려듀떼요.” (내, 내려주세요.)
블레이크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모두의 앞에서 이런 꼴을 보이다니.
블레이크는 내려달라며 간절하게 속삭였지만, 텐스테온은 오히려 그를 안은 손에 힘을 줬다.
‘최악이야. 이럴 수는 없어. 이건 꿈일 거야.’
블레이크는 황제의 침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는 지금의 이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정말로 같이 자려는 거야? 설마, 아니겠지.
하지만 텐스테온의 말은 블레이크의 희망을 산산이 부서트렸다.
“뭐 하는 거냐? 어서 자자.”
정말로 같이 잘 생각이구나. 블레이크는 텐스테온의 눈을 보며 뒷걸음질 쳤다.
어쩌다 보니 오늘 하루 종일 그의 품에 안겨 다니긴 했지만, 다 큰 아들이 아버지랑 같은 침대에서 자는 것만은 사양하고 싶었다.
“나, 나 혼다 댤뚜 이떠요!” (나, 나 혼자 잘 수 있어요!)
“안 된다. 위험해.”
“안 위헌해요!” (안 위험해요!)
“또 어딜 나갈 줄 알고.”
“안 나가여. 안 냐갈께요.” (안 나가요. 안 나갈게요.)
“안 된다.”
“흐앙!”
텐스테온은 쭈뼛거리는 블레이크를 안고 침대 위로 올라갔다.
“시, 시른데…!” (시, 싫은데…!)
어떻게든 그의 품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버둥거리던 블레이크의 눈에 텐스테온의 손목이 난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다쳐뗘요?” (다쳤어요?)
“아, 별거 아니다.”
텐스테온을 블레이크를 안으면서 올라간 소매를 다시 아래로 내렸다. 블레이크를 찾기 위해서 급하게 움직이다가 다친 상처였다.
텐스테온이 직접 말을 하진 않았지만, 블레이크는 그가 다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데가 티료해 드리께요.” (제가 치료해 드릴게요.)
블레이크는 상처 부위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자 빛과 함께 손목에 난 상처가 사라졌다.
“고맙다.”
“아녜요. 그러문 이만.” (아니에요. 그러면 이만.)
블레이크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밖으로 나가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텐스테온은 그를 꼭 안은 채 침대에 누웠다.
“히잉.”
블레이크는 침대에 올라온 뒤에도 포기하지 못하고 내려갈 방법을 찾았다.
그때 텐스테온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랑한다.”
“…….”
텐스테온은 그동안 하지 못했던 진심을 전했다.
“내가 너를 지켜줬어야 했는데, 정말 미안하구나.”
블레이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텐스테온을 바라봤다. 잠깐의 정적이 흐른 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녜여. 나제 데가 한 말은 신경 뜨지 마세여.” (아니에요. 낮에 제가 한 말은 신경 쓰지 마세요.)
솔직히 그 시절에는 텐스테온을 그리워하고, 자신을 찾지 않는 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알고 있었다.
본래 저주의 계승자는 남쪽 섬에 유폐되어야 하지만, 텐스테온은 그를 별궁에 두었다.
이를 위해서 텐스테온은 엄청난 노력을 했다. 블레이크 때문에 수많은 사람의 공격을 받았지만, 무심함을 가장하며 끝까지 아들을 지켰다. 그리고 완전히 버린 것도 아니었다.
저주의 계승자를 경멸하지 않을 만큼 인성이 훌륭한 이들을 발탁하여 아모리아궁에 보냈고, 은한에게 늘 블레이크를 살피도록 했다.
무엇보다도 텐스테온 덕분에 앤시아와 결혼할 수 있었다.
“띠만 말해떠 데똥해요. 데 뗑각이 아니여떠요. 뎡말 아니에요. 데가 왜 그랬는지 모르게쏘여.” (심한 말 해서 죄송해요. 제 생각이 아니었어요. 정말 아니에요. 제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오후에는 울컥 화가 치민 나머지, 어릴 때 했던 생각들이 그대로 말로 나와버리고 말았다.
몸이 작아지면서 생각들도 어려진 모양이다.
“아니다. 내 잘못이다. 너를 계속 이렇게 안아주고 싶었는데…. 안아 줬어야 했는데.”
텐스테온의 얼굴에 짙은 후회가 담겨있었다.
두 사람은 너무나도 오랫동안 떨어져 지냈다. 진심을 터놓고 사과를 할 기회도 시기도 놓친 채,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버렸다.
“블레이크,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아버지’라고 불러 줄 수 있겠니?”
제국을 호령하는 황제답지 않게 너무나도 작고 조심스러운 모습이었다.
블레이크는 그런 텐스테온을 물끄러미 올려보았다.
‘아버지’
저주에 걸린 뒤로 한 번도 입에 담아 본 적이 없던 말이었다.
하지만 불러야 하는 시기를 놓치며 어색한 것일 뿐, 결코 텐스테온이 싫거나 아버지라고 인정할 수 없어서 말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물론 태어나서 줄곧 ‘아버지’라고 불렀던 호칭이 ‘폐하’로 바뀌었을 때는 원망이 있었던 건 사실이었다.
게다가 나같이 저주에 걸린 괴물을 텐스테온이 아들로 인정할 리 없다는 좌절도 섞여 있었다.
그게 아니란 사실을 안 뒤에도 좀처럼 ‘아버지’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블레이크는 잔뜩 긴장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텐스테온에게 말했다.
“아부디.”
…….
블레이크는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말았다.
‘아버지’라는 쉬운 단어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다니. 이게 얼마 만에 하는 말인데….
혹시라도 실수를 할까 봐 목도 가다듬었는데 소용이 없었다.
창피한 나머지 블레이크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텐스테온은 발음 따윈 상관없다는 듯이 기쁜 표정으로 블레이크를 꼭 껴안았다.
“고맙다. 아들아.”
그는 블레이크의 보드라운 뺨에 뽀뽀를 했다.
다 큰 아들한테 뽀뽀를 하다니.!
블레이크는 질색을 했지만, 환하게 미소 짓는 텐스테온을 보니 차마 싫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몸이 작아져서 그런지 몰라도, 어릴 때처럼 자상한 아버지의 뽀뽀가 그렇게 싫지는 않았다.
블레이크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한번 말을 해보았다.
“아바디.”
…….
그리고 또 한 번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말았다.
***
나는 블레이크의 소식을 듣고 황급히 별장으로 돌아갔다.
물론 블레이크를 잃어버렸지만 곧바로 찾았고, 상황도 정리되었으니 천천히 돌아오면 된다는 텐스테온의 편지를 받긴 했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호텔에서 쉴 수는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어쩌다가 잃어버린 거야? 정말로 괜찮을 거겠지? 나를 안심시키려고 거짓말한 건 아니겠지?
마차를 타는 내내 불안한 마음에 심장이 쪼그라들 것만 같았다.
“비 전하, 벌써 오셨습니까?”
내가 왔다는 소식을 들은 멜리사가 깜짝 놀라서 마중을 나왔다.
“블레이크는 지금 어디 있어?”
“폐하의 침실에 계십니다.”
나는 황급히 텐스테온의 침실로 향했다.
복도를 걸으며 멜리사에게 자세한 상황을 전해 들었다.
블레이크와 텐스테온, 두 사람이 노예상을 일망타진했다고 한다. 그리고 무사히 별장으로 돌아온 모양이다.
“모두 무사하십니다. 전혀 걱정하실 것 없으세요.”
멜리사가 저렇게 말하니 안심이 되긴 했지만, 그래도 걱정이 사라지지 않았다.
블레이크는 텐스테온이랑 다퉈서 별장을 나간 거라고 했다. 억지로 붙여놓은 것이 오히려 역효과가 난 걸까?
그렇다면 오늘 밤은 나와 함께 자자고 해야겠다.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자, 침대 위에서 잠이 든 텐스테온과 블레이크의 모습이 보였다.
텐스테온의 품에 안겨서 새근새근 잠이 든 블레이크의 모습이 무척 편안해 보였다. 텐스테온의 입가에도 평온한 미소가 감돌았다.
나 역시도 다정한 두 사람을 보자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아무래도 괜한 걱정을 했나 보다.
나는 조용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
여러 일들이 벌어지긴 했지만, 내가 하루 동안 외출을 한 게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다음날부터 텐스테온을 부르는 블레이크의 호칭이 바뀌었다. 다만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아. 바, 아니아니, 아, 버, 디이.”
그는 텐스테온을 ‘아버지’라고 정확하게 부르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게 쉽지가 않았다.
“아부디!”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말하고, 빨리도 말해보았지만, 블레이크는 좀처럼 ‘아버지’라는 장벽을 넘지 못했다.
“후웅.”
이번에도 실패를 한 블레이크의 볼이 잔뜩 부풀었다. 그런 아들을 바라보는 텐스테온의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걸렸다.
“괜찮다. 지금도 충분해.”
“맞아. 블레이크, 엄청 잘했어.”
나도 텐스테온의 말에 동의했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시무룩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그때 텐스테온은 블레이크를 번쩍 안아서 자신의 무릎에 올려놨다.
“애, 앤탸가 이땬아요!” (애, 앤시아가 있잖아요!)
그러자 블레이크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텐스테온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블레이크, ‘아버지’가 어려우면 ‘아빠’는 어떻니?”
아니 아버님, 이제는 ‘아빠’까지 욕심을 내시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말을 들은 지 며칠이나 지났다고요?
세상에나. 아주 잘하고 계시는군요. 계속 그 기세예요, 아버님!
나는 속으로 박수를 쳤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도리질을 쳤다.
“시러요. 타, 탕피하게….” (싫어요. 차, 창피하게….)
텐스테온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블레이크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나 역시도 입꼬리가 떨어지지 않았다.
“블레이크, 아-”
내가 디저트로 푸딩을 입에 넣어주자, 블레이크가 아기 새처럼 입을 벌리며 쏙 받아먹었다.
어쩜 오물오물 씹는 모습도 저렇게 깜찍할까?
“마이따!” (맛있어!)
블레이크는 금세 배시시 웃었다.
“나됴 앤땨 해듈래!” (나도 앤시아 해줄래!)
그는 텐스테온의 무릎에서 내려온 뒤,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블레이크를 내 옆에 있는 의자에 앉혔다. 그는 작은 손으로 야무지게 스푼을 집더니, 레몬 잼을 떠서 홍차에 넣었다.
그리고 아이치고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스푼을 휘젓기 시작했다.
잼을 모두 저은 뒤 블레이크는 뿌듯한 얼굴로 외쳤다.
“나 앤땨처럼 빠리빠리 져었떠!” (나 앤시아처럼 빨리빨리 저었어!)
“…….”
나는 침묵했다. 하지만 텐스테온은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로 앤시아랑 똑같구나.”
“헤헤. 앤땨, 아가텨럼 빠리빠리 해.” (헤헤. 앤시아는 아기처럼 빨리빨리 해.)
“맞다. 앤시아는 빨리빨리 하지.”
“…….”
그러니까 그건 아이 같은 게 아니라, 한국인의 특징이거든요!
나는 해명도 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회복되고 나서부터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틈만 나면 둘이 합심해서 나를 놀린다는 거다.
나는 그들을 뾰로통하게 째려보다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뭐, 사실 놀림을 받아도 좋다.
블레이크와 텐스테온이 자연스럽게 대화를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날아갈 것처럼 행복했으니까.
***
식사를 마친 뒤, 텐스테온은 블레이크에게 손을 내밀었다.
“블레이크, 필리아궁으로 가자.”
“네. 앤땨, 댜녀오께!” (네. 앤시아, 다녀올게.)
블레이크는 텐스테온의 손을 잡으며,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응. 잘하고 와.”
노예상 사건이 있은 뒤, 우리는 황궁으로 돌아왔다.
그때 블레이크를 찾기 위해서 병력을 소집하면서, 그가 작아졌다는 사실도 공개되었다. 때문에 굳이 별장에서 몸을 숨길 이유가 사라져 버렸다.
게다가 블레이크가 작아진 몸을 이용하여 스스로 미끼가 되어 노예상을 일망타진했다는 소식이 제국 전역에 퍼져나간 뒤였다.
사람들은 황태자를 칭송했고, 걱정했던 것처럼 그가 작아졌다 하여 나쁜 짓을 계획할 사람도 없었다.
이렇게 당당히 궁에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그 사건이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나는 위험한 행동을 한 블레이크를 혼냈다.
“일부러 인질이 되다니, 그런 위험한 짓을 하면 어떻게 해!”
“앤땨, 앤땨 나한테 하나써?” (앤시아, 앤시아 나한테 화났어?)
내가 운을 떼자마자 블레이크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블레이크, 왜 그래?”
“앤땨가 하를 내니까 넘 슬포.” (앤시아가 화를 내니까 너무 슬퍼.)
“미안해. 미안해. 울지 마.”
아니, 정확히 말하면, 혼을 내려고 했으나 결국은 달래기 바빴다.
어쨌든 그 일로 인해 텐스테온과 블레이크 두 사람의 관계가 회복되었으니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이라고 할까.
나는 빙그레 웃으며, 손을 꼭 잡고 걸어가는 텐스테온과 블레이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블레이크는 텐스테온의 무릎 위에 앉아서 서류를 확인했다.
앤시아와 함께 있으면 아이처럼 보인다고 싫어했지만, 텐스테온과 단둘이 있을 때는 아버지가 그를 안든 무릎 위에 올리든 별로 개의치 않았다.
처음에는 어색해 했지만, 그것도 금방 익숙해졌다. 무엇보다도 서류를 확인할 때는 이 자세가 편하고 말이다.
텐스테온은 블레이크가 보기 좋게 서류를 들어주었다.
“이꼰 이대로 텨리하면 댈 꼬 가타요.” (이건 이대로 처리하면 될 거 같아요.)
“그래. 내 생각도 그렇다.”
그렇다고 너무 아이 취급을 하면 토라졌기 때문에, 하루에 두 시간씩은 정무에 참여하도록 했다. 게다가 블레이크의 확인을 거쳐야만 하는 업무도 있었다.
단, 너무 험악한 사안은 블레이크가 접하지 않도록 미리 빼두었다.
이곳은 집무실이 아닌 필리아궁의 최상층에 있는 방이었다.
최근 들어 집무실을 찾는 자들이 너무 많았다. 블레이크의 귀여운 모습을 직접 보기 위해서였다.
무심하고 냉정하기로 유명한 재무대신까지 블레이크가 집무실에 있는 시간을 노려서 뻔질나게 찾아올 정도였다.
블레이크는 신하들이 찾아오든 말든 관심이 없었지만, 텐스테온은 아들과 단둘이 있는 시간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최상층까지 올라온 것이다.
“아우간 떼바거텨 디네사화 오떄여?”
“응? 뭐라고? 했니?”
텐스테온이 묻자, 블레이크는 잔뜩 볼을 부풀렸다.
“왜 모라여?” (왜 몰라요?)
처음 어려졌을 때만 해도 블레이크는 발음이 되지 않는 걸 부끄러워했다.
하지만 작아진 지 한 달이 되어가자, 자신의 발음에 당당한 태도를 보이며 오히려 알아듣지 못하는 텐스테온을 탓하고 있었다.
게다가 앤시아나 아모리아궁 출신의 사람들은 블레이크의 말을 놀라울 정도로 잘 알아들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텐스테온이 부족해 보일 때가 많았다.
하지만 이번 말은 조금 너무하지 않나. 과연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걸까?
텐스테온은 다소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미소를 지었다. 블레이크가 자신에게 막무가내로 투정을 부리는 것 또한 기뻤다.
“미안하구나. 다시 한 번만 말해주렴.”
블레이크는 말을 하는 대신 종이에 필기했다.
-아울강의 제방 건설 진행 상황은 어떤가요?
아, 그 말이었나….
다시 생각해도 어렵다고 느끼면서 텐스테온은 답을 했다.
“다음 달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할 예정이다.”
“후응….”
블레이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입술이 툭 튀어나와 있는 것을 보니 아직 기분이 풀리지 않은 듯했다.
“블레이크, 화났니?”
“…댜 아라 드르면떠.” (다 알아들으면서.)
블레이크는 불퉁하게 뱉었다.
“응?”
“으난이 한 마른 고냥이 마이어도 댜 아라 드러뜨면떠….” (은한이 한 말은 고양이 말이어도 다 알아들었으면서….)
블레이크는 은한이 고양이로 변했을 때의 일을 말하고 있었다.
“섭섭했니?”
“구냥 구래따고요.” (그냥 그랬다고요.)
말은 저래도 섭섭해하는 게 분명했다.
텐스테온은 미소를 지었다. 블레이크가 자신의 속내를 솔직하게 말해주는 게 고마웠다.
“내가 잘못했다.”
“구리고 그 녀뗘기란 앤땨를 만나게 하디 마떼여.” (그리고 그 녀석이랑 앤시아가 만나게 하지 마세요.)
텐스테온은 당황했다. 앤시아가 동방의 문화에 관심이 많으니 은한과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블레이크도 함께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은한을 꺼려하는 걸 알고 배려하여 권하지 않았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오히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 다음부터는 조심하마.”
“꼬기에요!” (꼭이에요!)
블레이크는 신신당부를 했다. 앤시아와 은한이 만나는 게 정말로 싫었나 보다.
“알겠다. 명심하마.”
텐스테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블레이크를 꼭 끌어안았다.
“블레이크.”
“네. 아바디….”
블레이크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결국 이번에도 ‘아버지’라고 발음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텐스테온은 시무룩해하는 블레이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블레이크, 여기서 숨바꼭질했던 거 기억나니?”
블레이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지금 해볼래?”
텐스테온의 질문에 블레이크는 고개를 저었다.
“데가 오린앤가여?” (제가 어린앤가요?)
“그래, 어린애가 아니지….”
몸이 작아졌다고는 하나 어린애는 아니었다. 숨바꼭질만 하면 이 방에 숨고는 했던 아이는 이미 어른이 되었다.
텐스테온은 지나간 시간을 후회하며 블레이크의 볼에 뽀뽀했다.
“우웅!”
다 큰 아들한테 진짜!
블레이크는 질색을 했지만 텐스테온은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내일이면 블레이크가 작아진 지도 한 달이 되는 날이었다.
블레이크의 행동은 완전히 어린 아이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성인일 때와는 조금 다른 면이 있었다.
어려진 육체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겠지.
블레이크는 텐스테온을 용서해 주었다. 하지만 그건 그가 어려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블레이크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다면 어떻게 될까? 그때도 여전히 나를 ‘아버지’라고 불러줄까?
텐스테온은 자신이 없었다.
어쩌면 오늘이 블레이크와 이렇게 따뜻한 시간을 보내는 마지막 날이 될지도 모른다. 앞으로는 영영 이런 순간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
“블레이크, 이거 마셔.”
나는 블레이크에게 따뜻한 우유를 건넸다.
“응. 고마어.” (응. 고마워.)
“아뜨니까 조심하고.”
“구로케 마라디 마!” (그렇게 말하지 마!)
우유를 마시던 블레이크가 발끈했다.
“응?”
“나눈 띤따 아가 아냐!” (나는 진짜 아기가 아니야!)
“하지만 이렇게 귀여운걸.”
우유가 묻는 바람에 블레이크의 입가에 하얀색 수염 자국이 생겼다. 나는 그 자국을 엄지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완전 아기네.”
아이 취급하는 게 싫어서 저러는 거 같은데, 오히려 저럴수록 더 놀리고 싶어졌다.
“흐흠.”
잔뜩 토라질 거라는 예상과 달리 그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블레이크…?”
왜 저러지?
“괜탸나. 내이리면 도라올 거니까.” (괜찮아. 내일이면 돌아올 거니까.)
그렇다. 어느덧 블레이크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올 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이제 이 모습이랑도 작별이구나.
나는 블레이크의 오동통한 볼을 어루만졌다. 그러자 블레이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마냑 안 도라오면 오또카지?” (만약 안 돌아오면 어떡하지?)
“결혼식은 못 하는 거지.”
“뭐…?”
블레이크가 충격을 받은 듯 눈을 크게 떴다. 저렇게까지 놀랄 일인가?
“아가랑 결혼할 수는 없잖아.”
나는 당연하게 말했다. 아기랑 결혼식장에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흐으, 흐으읍.”
그런데 갑자기 울먹이는 소리가 들렸다.
블레이크의 눈에서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어린애 맞네! 울망울망한 블레이크의 얼굴을 보니 웃음이 절로 튀어나왔다.
“으앙!”
“알았어. 알았어. 미안해. 기다릴게. 우리 블레이크가 안 돌아와도 클 때까지 기다릴게. 그러니까 울지 마.”
하지만 막상 진짜로 서럽게 우는 모습을 보니, 더 이상 웃거나 놀릴 수가 없었다. 나는 그를 안고 열심히 달랬다.
결국 나는 마지막 날까지 블레이크를 울리고 말았다.
***
따사로운 햇살이 얼굴 위로 쏟아졌다. 나는 몸을 뒤척이며 남편을 꼭 끌어안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한 품에 쏙 들어오지 않는 데다가, 단단한 근육이 느껴졌다.
나는 깜짝 놀라서 눈을 번쩍 떴다.
그러자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 아름다운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나를 꿰뚫어 보는 듯한 붉은 눈동자, 그림으로 그린 듯한 콧대, 날렵한 턱선. 매혹적인 입술,
새하얀 셔츠 사이로 보이는 단단한 근육, 나를 한 품에 안을 수 있는 긴 팔, 핏줄이 도드라지는 거친 손, 긴 다리.
“부인이 아침부터 빤히 쳐다보니까 너무 부끄러운데….”
야릇한 음성으로 말하는 요망한 말투까지. 이 남자는…!
“블레이크!”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블레이크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부인, 나 돌아왔어.”
그랬다. 블레이크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블레이크와 은한이 다투긴 했지만, 원수가 될 정도로 심각한 일은 아니라고 했다. 그러니 백한도 블레이크에게 심한 용술을 걸지는 않았을 거다.
어차피 시간이 되면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혹시 모를 가능성 때문에 걱정했다.
하지만 용술이 풀린 모습을 보니, 마음속 깊은 곳에 있던 걱정이 풀리며 안도감이 들었다.
동시에 어색하기도 했다.
토끼처럼 작고 귀여웠던 블레이크가 하루아침에 잘생기고 매혹적인 사내로 변해 있었으니까.
“부인은 내가 돌아온 게 싫어? 작은 게 좋아?”
블레이크가 침울해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자 기다란 속눈썹이 그늘을 만들었다.
“아니야!”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싫을 리가 없잖아!”
매일 봐서 잠시 잊고 있었는데, 우리 남편의 아름다움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작아졌을 때는 충격적으로 귀여웠듯이 말이다.
나는 어느 쪽이든 좋았다. 작아도 좋고 커도 좋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블레이크 그 자체이니까, 그라는 영혼에 매료되었으니까, 그가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었다.
“사랑해. 블레이크.”
나는 그를 꼭 안아주었다.
“나도 사랑해.”
블레이크도 환한 미소를 지었다.
***
블레이크가 다시 어른이 된 걸 기뻐하는 것도 잠시, 곧 문제가 발생했다.
“기억이 안 난다고?”
“응. 전혀 안 나.”
그는 지난 한 달 동안의 일이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정말로?”
“응.”
블레이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몸이 어려졌을 때의 일들을 모두 잊어버렸다고….
이는 나와 쌓았던 추억은 물론이고, 텐스테온과 함께 있던 기억들도 사라진다는 걸 의미했다.
겨우 사이가 좋아졌는데,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걸까?
블레이크와 대화를 나눌 때마다 행복함이 뚝뚝 묻어나오던 텐스테온의 표정이 떠올랐다.
블레이크가 그때의 기억을 전혀 하지 못한다고 하면 얼마나 상심할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정말이야?”
“…응. 긴 꿈을 꾼 거 같아.”
내가 재차 묻자 블레이크의 붉은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나는 그의 작은 표정 변화를 알아차렸다.
정말로 기억 안 나는 거 맞아? 아무래도 의심스러운데.
“그럼 이것도 기억 안 나겠네?”
“뭐가?”
블레이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 번 미심쩍은 부분을 캐치해서 그런지 저 표정도 의심스러워 보였다.
“이거 말이야.”
나는 탁자 위에 놓인 편지를 집었다.
편지 봉투 위에는 어설픈 필체로 ‘부인에게’라고 적혀 있었다.
“어제 블레이크한테 온 러브레터인데, 기억 안 나?”
“…….”
이 편지는 코비가 보내온 것이었다. 어제 블레이크는 편지를 보자마자 질색을 했었다.
그리고 지금도 편지 봉투를 보는 것만으로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안 나.”
하지만 그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주장을 꺾지 않았다.
“알았어.”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봉투에 든 편지를 꺼냈다.
“부인, 나 코비야. 오랜만이야. 잘 지내고 있어? 부인이 갑자기 떠나서 많이 놀랐어.”
내가 편지를 읽기 시작하자, 블레이크의 표정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부인, 나를 지켜줘서 정말 고마워. 목검도 고마워. 형이 엄청 부러워해. 형이 가진 검보다도 훨씬 좋아!”
“…….”
필체도 철자도 엉망인 편지였다. 문장도 매끄럽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어색한 부분을 자연스럽게 수정하며 시 낭송을 하듯 읽어 내려갔다.
가면 갈수록 글자가 아니라 발음기호를 읽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글씨를 조금 배우긴 했지만 완벽하게 아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 가족에게 써달라고 했지만, 편지 내용을 듣고는 기겁하며 아무도 써주지 않은 거겠지.
우리가 황궁으로 돌아간 뒤에도 제5 기사단의 기사들 중 일부는 노예상 사건의 뒷수습을 위해 별궁에 남아 있었다.
코비는 혼자 별궁까지 와서 이 편지를 전했다고 한다.
“부인한테 꼭 줘야 해요.”
“알았다. 황태자 전하께 꼭 전해주마.”
기사들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말하는 코비가 귀여워서 편지를 받아주었다고 한다.
나는 잘했다고 칭찬했지만, 블레이크는 조그마한 몸으로 불같이 화를 냈다.
“이꼴 왜 바댜아! 누규야! 누가 바든 꼬야!” (이걸 왜 받아와! 누구야! 누가 받은 거야!)
블레이크가 코비의 편지를 받은 기사가 누구인지 추궁하려고 하는 걸 내가 겨우 말렸었다.
길길이 날뛰는 모습도 귀여웠었지. 그리고 지금 편지를 읽을수록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모습도 무척 귀여웠다.
역시 기억하고 있군.
하지만 인정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나도 끝까지 가는 수밖에.
“부인이 황태자라고 들었어. 하지만 난 상관없어. 부인은 내 부인이야. 우린 뽀뽀도 했잖아. 나는 커서 훌륭한 기사가 될 거야! 그래서 부인을 꼭 만나러 갈게! 그때까지 기다려!”
“…….”
새빨간 사과처럼 변한 블레이크를 보며 나는 미소를 지었다.
“블레이크, 나 몰래 다른 사람을 만났던 거야? 한 달 동안이냐?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내가 새침하게 쏘아붙이자, 블레이크가 다급히 내 손을 잡았다.
“그만….”
“응?”
“제발 그만해. 기, 기억나니까….”
그는 겨우 진실을 실토하였다.
“다 기억나는 거 맞지?”
블레이크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 기억 안 난다고 했어?”
“…창피하잖아.”
그가 고개를 숙이며 작게 뱉었다. 귀랑 목덜미까지 붉게 달아오른 블레이크를 보며 나는 말문을 잃고 말았다.
아아….
뭐라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귀여움이었다! 작든 큰 상관없이 우리 신랑이 이 세상에서 제일 귀여워!
나는 우리 신랑을 와락 껴안았다.
***
“블레이크!”
1층으로 내려가자, 텐스테온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가 원래대로 돌아오는 날인 걸 알고 아침 일찍 오셨나 보다.
텐스테온과 블레이크,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그리고 정적이 찾아왔다.
설마 어른이 되면서 두 사람의 관계도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건 아니겠지?
불안한 긴장감이 밀려들었다. 텐스테온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 좀처럼 입을 떼지 못했다.
숨 막히는 적막 속에서 블레이크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
그는 또렷한 발음으로 텐스테온을 ‘아버지’라고 부른 뒤 싱긋 웃었다.
“저, 이제 잘하죠?”
텐스테온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동안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아버지라고 다시 인정을 받았던 시간들이 물거품처럼 사라질까 봐 걱정을 하고 있었던 거다.
“잘했다. 아주 잘했어. 완벽하구나.”
텐스테온은 블레이크를 한 손으로 와락 끌어안았다. 그리고 다른 손을 활짝 열며 나를 바라보았다.
“아버님.”
나도 그에게 안기려고 하는데, 텐스테온이 고개를 저었다.
“아버님이 아니지.”
맞다, 이제 아버님이 아니다. 예전에 블레이크가 텐스테온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날, 나도 ‘아버지’라고 부르겠다고 했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 약속을 지킬 때가 되었다.
“아버지.”
나는 활짝 웃으며 텐스테온을 불렀다.
아버지도 미소를 지으며 우리 두 사람을 꼭 안아주었다.
***
오늘은 우리가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
블레이크가 갑자기 작아지며 한 달 동안 결혼식 준비가 중단되기도 했지만, 이후에는 아무런 문제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나와 블레이크는 손을 꼭 잡고 결혼식장 안으로 들어갔다.
어렸을 때 형식적으로 이루어졌던 초라한 결혼식과 달리, 하객석이 가득 찼다.
결혼식장도 우아하면서도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우리를 바라보는 텐스테온의 얼굴에는 자상한 미소가 감돌았다.
블레이크가 원래대로 돌아온 뒤에도 두 사람은 변함없이 사이가 좋았다.
다만 어려졌을 때와 같은 스킨십은 금지당했다.
“아들을 무릎 위에 올릴 수도 있지 뭘 그러느냐.”
“절대로 안 됩니다!”
텐스테온이 내심 서운해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블레이크는 아버지의 바람을 완전 차단했다.
요즘은 두 사람이 사소한 일로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는 게 가장 즐거웠다.
신부 측에는 다이애나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기사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정식으로 나의 기사가 되었다.
기사 아카데미 졸업식 날, 블레이크는 자기도 참석하겠다고 했다. 입학식에 가지 못했던 게 마음에 남았었나 보다.
기사 아카데미의 원칙상 가족만 참석할 수 있었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형부도 가족이 아니냐며, 아카데미의 교칙을 바꿔버렸다.
나는 그때 블레이크가 황태자라는 걸 새삼스레 실감했다.
다이애나는 오늘도 멋진 바지 예복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나의 결혼식인 만큼 드레스를 입어야 하나 고민했지만, 나는 다이애나가 편한 옷을 입으면 된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지금 짙은 남색 예복을 차려입은 다이애나는 무척 늠름해 보였다.
멜리사는 하객석에서 정말로 자식을 결혼시키는 것처럼 오열했고, 한스와 첼시가 그녀를 달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멜리사만큼은 아니지만 에드온과 테리도 눈시울을 붉혔다.
두 사람이 저렇게 감동할 줄은 몰랐는데.
콜린 경도 날카로운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우리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은한과 백한도 결혼식에 참석해 주었다.
은한은 우리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면 꼭 참석하기로 텐스테온과 오래전에 약속을 했다고 한다.
블레이크와 백한은 서로를 보자마자 으르렁거렸지만, 나와 은한의 중재로 겨우 화해했다.
블레이크와 은한은 잠시 따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는데, 전에 싸웠던 걸 화해한 건지 아니면 그동안의 오해가 풀린 건지 알 수 없지만, 블레이크의 표정이 한층 누그러져 있었다.
뭐, 그렇다고 한들 여전히 은한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하객 중에는 세르도 있었다.
세르의 모습은 나와 블레이크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결혼 축하 선물로 나와 블레이크에게 언제든 서로 대화할 수 있는 둘만의 통신석을 만들어 주었다. 보호 마법 또한 걸려 있다고 했다.
가족과 아모리아궁의 사람들, 친구, 그 외에도 수많은 사람의 축하 속에서 나와 블레이크는 걸음을 옮겼다.
우리는 대신관인 마론의 앞에 섰다. 그는 엄숙한 음성으로 물었다.
“블레이크 라 르시 제라실리온, 앤시아 라 엘르 제라실리온, 두 사람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사랑을 맹세합니까?”
“네.”
“네.”
우리는 동시에 대답했다.
“영원한 빛의 서약 아래, 두 사람이 진정한 부부가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대신관이 미소를 지으며, 우리의 결혼을 선언했다.
나와 블레이크는 손을 잡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부부였다. 곡절이 있긴 했지만 서로의 마음이 흔들린 적은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신전의 인정을 받고 다시 결혼식을 올리는 것이 새삼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모두의 축하와 축복 속에서 결혼식을 올리니 행복이 차올랐다. 괴물 황태자와 백작가의 천덕꾸러기였던 어린 시절이 떠올라서 가슴이 뭉클하기도 했다.
블레이크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마 그럴 거 같다.
우리는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 입을 맞췄다.
그러자 하객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우리는 많은 길을 걸어왔다. 즐거운 일도 있었고, 슬프고 힘든 일도 겪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함께 걸어가겠지.
그리고 그 길에는 행복만이 펼쳐져 있을 거다. 우리가 함께 손을 잡고 걸어가는 것만으로 행복할 테니까.
<괴물 황태자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完
괴물 황태자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