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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괴물 황태자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16/17)

에필로그. 괴물 황태자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나는 슐리아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그녀는 커다란 눈을 더 크게 뜨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어때요?”

나는 빙그레 웃으며 손을 놓았다.

“다 나았어.”

“정말요?”

“그럼, 정말이지. 깨끗하게 나았어. 그동안 잘 이겨내 줘서 고마워. 슐리아.”

나는 슐리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녀는 결국 탄시놀을 이겨냈다. 뒤틀린 마나의 흔적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럼 이제 고아원으로 돌아갈 수 있어요?”

“물론이지.”

“루오 오빠도 만날 수 있을까요?”

“응. 곧 만날 수 있을 거야.”

칼루오는 무사했다. 그의 누나인 카란도 목숨을 건졌다.

리차드가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가 목숨을 바쳐 카란을 구하고 세상을 떠난 것이 되었다.

물론 그녀를 죽인 사람이 리차드였으니 애초에 성립할 수 없는 말이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들은 조사를 받았다.

칼루오는 어린아이인 데다가, 아무것도 모른 채 주변의 상황에 휩쓸린 것뿐이기 때문에 조사가 끝나면 금방 풀려날 거다.

하지만 카란과 코닌스는 너무나도 큰 죄를 저질렀다.

그들은 지난 일들을 후회하며, 모든 죄를 순순히 자백했다.

특히 카란은 리차드가 자신의 부모님을 살해한 원수인 데다가, 자신들을 제물로 바치려 했단 사실에 크나큰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리차드에게 속아서 벌인 일이라 한들 그 죄가 너무 컸다.

성인이 아니니 사형은 피한다고 하더라도 평생을 감옥에서 지내야 할 거다.

“슐리아!”

“선생님!”

슐리아가 완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미셸이 마중을 왔다.

슐리아는 미셸을 보자마자 활짝 웃으며 달려갔다.

“비 전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비 전하, 감사합니다.”

미셸이 감사 인사를 하자, 슐리아도 얼른 선생님을 따라서 고개를 숙였다.

“슐리아, 앞으로 건강해야 해. 식사도 잘하고.”

“네!”

슐리아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큰 병을 앓았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건강해 보였다.

“비 전하, 안녕히 계세요.”

슐리아는 크게 손을 흔들며 고아원으로 돌아갔다.

마지막 환자가 훈련소를 떠났다. 그리고 제국을 뒤흔들었던 탄시놀도 완전히 사라졌다.

리차드가 나를 납치했던 비밀 요새에서 탄시놀을 일으켰던 도구를 찾았다.

그것은 낡고 오래된 상자였다. 하지만 그 안에는 편지만이 덩그러니 들어 있었다.

모든 걸 정화했다는 세르의 편지였다.

이제 다시는 탄시놀이 이 땅에 나타날 일은 없을 거다.

리차드는 물론 켄스웨이 가문이 천 년 동안 탄시놀을 일으켜온 사실도 명명백백히 밝혀졌다.

처음 켄스웨이 가문이 탄시놀을 일으켰다고 말했을 때, 사람들은 모두 그 말을 무시하며 로움족만을 탓했다.

하지만 치료제가 개발되고 병이 진정되자. 사람들은 차츰 진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리차드를 욕했고, 켄스웨이 가문에 분노했다.

하지만 제국민들이 누구보다 경악한 대상은 바로 제국의 초대 황제인 필립이었다.

여신의 선택을 받았다던 위대한 건국 군주의 실체가 밝혀지자 제국은 충격으로 물들었다.

텐스테온은 아스테릭 제국의 황제로서 필립이 저지른 악행을 사과했다. 그 자리에는 나와 블레이크도 함께였다.

우리는 천 년 전에 벌어졌던 모든 진실을 밝히고, 젤칸 제국의 역사서 또한 새롭게 편찬했다.

락슐의 오명 또한 천 년 만에 벗겨지게 되었다.

이는 탄시놀이 발생하기 전부터 준비해 오던 일이었다.

모든 사실이 밝혀지면 아스테릭 제국의 존망과 황실에 위기가 올 수도 있었지만, 계속 숨기기만 해서는 천 년 전부터 엉킨 실타래를 풀 수가 없었다.

최악의 상황을 각오하고 밝힌 일이었다.

하지만 제국민들은 필립의 악행에 경악할 뿐, 지금의 황실에 분노를 보내지는 않았다.

텐스테온은 제국 역사상 최고의 성군이었고, 아스테릭 제국은 유례없는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걷고 있었다.

게다가 종교를 개혁하여 무분별한 마족 재판을 없앴고, 천 년 동안 제국민을 공포에 떨게 했던 탄시놀도 사라졌다.

또한 빛의 여신은 황태자와 황태자비에게 자신의 힘을 나누어 주었다. 이는 곧 여신이 과거를 용서하고 제국의 축복을 빌어주는 것이라고 제국민들은 생각했다.

일련의 일들로 인해 로움족에 대한 인식도 바뀌었다.

천 년 동안 로움족은 노예가 되거나 숨어 사는 선택지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노예 신분에서 벗어난다고 하더라도 언제 다시 잡혀가거나, 억울하게 죽임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텐스테온이 로움족의 무분별한 노예 거래를 단속하고 살인을 막기 위해 노력했으나, 은밀하게 자행되는 일들까지 전부 통제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로움족의 억울함이 밝혀지고, 탄시놀도 사라졌다.

로움족에 대한 시선 역시 변화하고 있었다. 물론 천 년 동안 뿌리 깊게 이어온 멸시가 한순간에 사라지진 않겠지만, 그래도 점차 좋아질 거다.

로움족을 위한 제도들도 새롭게 제정됐다.

국립 아카데미에 있던 로움족 입학 금지 규정을 철폐하고, 관료 시험도 치를 수 있도록 하였다.

이에 대한 반발이 있긴 했지만, 생각만큼 거세지는 않았다.

로움족은 죄인이 아니라 필립의 욕망에 희생당한 피해자라는 사실이 밝혀졌으니, 이를 막을 명분도 없었다.

탄시놀을 수습하고, 천 년 전의 진실을 밝히며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어느덧 한 해가 끝나가고 있었다.

나는 올해가 가기 전에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 바로 어머니의 무덤이었다.

나는 블레이크와 함께 어머니의 묘지로 갔다. 7년 만에 왔지만 묘지는 잘 관리되어 있었다. 블레이크와 텐스테온이 각별히 신경을 써준 덕분이다.

나는 무덤에 꽃을 올려놓은 뒤 말없이 비석을 매만졌다. 블레이크도 꽃을 놓으며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어머님, 저 왔습니다.”

그의 말투가 무척 싹싹했다.

블레이크는 나를 찾기 위해 혼돈의 계곡을 오갈 때마다 이곳에 들렀었다고 한다. 나를 찾은 뒤에도 혼자 와서 인사를 올렸다고도 했다.

하지만 정작 나는 황궁으로 돌아온 뒤에도 이곳에 오는 걸 망설였다.

7년 전에도 일 년에 한 번씩 형식적으로 들렀을 뿐이다.

나는 그녀를 그저 진짜 앤시아의 어머니라고만 생각했다. 진짜로 나를 낳아주신 친어머니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수도로 돌아온 뒤 이곳에 꼭 오고 싶었다. 하지만 원래의 몸이 아니라 망설였다. 몸을 되찾은 뒤에도 상황이 안정되면 오겠다고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어느덧 이렇게 시간이 흘러버렸다.

“저 왔어요. …엄마.”

‘엄마’라는 말이 낯설었다.

천 년 전, 그리고 한국에서도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엄마’라는 말을 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어딘지 어색한 두 음절의 단어를 뱉는 순간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제가 너무 늦었죠. 그동안 못 와서 죄송해요….”

블레이크는 나의 등을 다독이며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의 체온이 닿자 마음이 진정되었다.

“우리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어요.”

나는 블레이크에게 성인이 된 걸 기념하는 무도회를 열라고 했으나, 그는 내가 데뷔탕트를 열지 않는 이상 자신도 성인식 파티를 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결국 우리는 따로 성인식을 치르는 대신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아스테릭 제국에서는 어렸을 때는 간소하게 식을 치르고, 성인이 된 뒤에도 두 사람에게 결혼 의사가 있으면 그때 신전에 보고를 올린 뒤 정식으로 성대한 결혼식을 치른다.

우리는 어린 시절 식을 올렸다. 하지만 간소하다고 해야 할까, 황실의 결혼, 아니 결혼식이라는 말 자체가 어려울 정도로 초라하고 쓸쓸했다.

그래서 이번에 다시 진짜 결혼식을 올리기로 한 것이다.

저주받은 괴물 황태자와 천덕꾸러기 백작 영애가 아니라, 제국의 황태자와 황태자비의 결혼식을 치르는 것이다.

“내년 봄에 올리려고요. 하늘에서 꼭 봐주세요.”

만약 엄마가 십 년 전에 나의 결혼식을 지켜보고 있었다면 무척 속상해하셨을 거다. 하지만 이번에 다시 본다면 분명 기뻐하실 거다.

“네. 꼭 지켜봐 주십시오. 어머님. 최고의 결혼식을 올리겠습니다. 그리고 앤시아를 누구보다 행복하게 해주겠습니다.”

그가 나의 손을 굳게 잡았다. 오늘따라 더 듬직하고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나는 언제나 행복했는데.”

“고생도 안 시킬 거야.”

“고생한 적 없어.”

고생이라고 생각한 적 없다. 그와 함께 걸어온 모든 시간들이 소중했으니까.

블레이크는 말없이 나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나도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

마차를 타고 황궁으로 돌아가는데, 광장을 가득 채운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우리도 구경할까?”

“응. 그러자.”

블레이크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탄시놀이 종식되었기 때문에 평소의 연말 축제보다 훨씬 성대하고 사람들도 활기차 보였다.

우리는 손을 잡고 거리를 걸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다. 그냥 이렇게 사람이 많은 거리를 당당하게 걸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제는 익숙해질 만도 하건만 매번 감격스러웠다.

손을 꼭 잡고 걸음을 옮기던 나는 한 곳에 우뚝 멈춰 섰다.

서점 앞에 새로 나온 책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중에는 ‘축복의 공주님’이라는 동화책도 있었다.

내가 예전에 이 서점에서 봤던 책과 같은 제목이었다. 표지가 달라지긴 했지만, 그림체가 같은 걸 보니 그때와 동일한 책인 듯했다.

그런데 그 책이 새로 나왔다고?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책을 펼쳐보았다.

축복의 공주가 이웃 나라의 괴물 왕자와 결혼을 한다. 공주와 왕자는 서로 사랑했고, 왕자는 결국 저주에서 풀리게 된다. 하지만 그 대가로 공주는 목숨을 잃고 만다.

왕자는 자신 때문에 죽은 공주를 그리워하며 홀로 눈물을 흘린다.

전에 봤을 때와 똑같은 내용이었다.

가슴 한편이 울적해지고, 괜히 봤다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하지만 책의 내용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눈물을 흘리는 왕자 앞에 여신이 나타나서, 축복의 공주를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왕자는 공주를 찾기 위하여 기꺼이 시련을 견디고, 공주 역시 왕자를 다시 만나기 위해 그에게 힘을 전해준다.

결국 왕자와 공주는 다시 만나게 된다.

-축복의 공주와 빛의 왕자님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황궁으로 돌아온 두 사람이 손을 꼭 잡은 채 서로를 바라보는 장면으로 동화는 막을 내렸다.

활짝 웃고 있는 왕자와 공주의 모습을 보니 저절로 미소가 나왔다.

“무슨 책이야?”

블레이크의 물음에 나는 마지막 장면을 보여주었다. 책을 본 블레이크도 나처럼 미소를 머금었다.

우리는 동화책을 산 뒤, 다시 길을 걸었다.

“블레이크.”

“응.”

“우리도 행복하게 살자.”

“당연하지. 내가 매일 웃게 만들어 줄게.”

블레이크가 나의 손을 꼭 잡았다. 나 역시 그의 손을 단단히 잡았다.

그때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눈이야!”

“눈이 왔어.”

고개를 올리자, 하늘에서 쏟아지고 있는 새하얀 눈이 보였다. 올해의 첫눈이었다.

“이게 얼마 만이지….”

나는 멍하니 눈을 감상했다. 7년 만에 보는 눈이었다. 그리고 블레이크와 함께 눈을 보는 것도 7년 만이었다.

“앞으로는 계속 함께 보자.”

“응. 첫눈이 올 때마다 함께 있자.”

나는 블레이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년에도 내후년, 그리고 10년, 20년 뒤에도 블레이크와 함께 첫눈을 맞을 거다. 우리는 평생 함께할 거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첫눈 말고.”

“그럼?”

“두 번째 눈, 세 번째 눈, 네 번째, 다섯 번째 눈도 모두 함께 봐야지.”

“눈이 언제 올 줄 알고?”

“매일 함께 있으면 되잖아.”

“매일?”

“응.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매일.”

그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말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어버렸다. 그러자 블레이크의 표정이 금세 침울해졌다.

“부인, 왜 그래? 나랑 함께 있기 싫어?”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럼 나랑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옆에 꼭 붙어 있을 거지?”

“아니 그건…. 정무도 봐야 하고….”

황태자랑 황태자비로서 해야 할 일이 있다. 어린 시절처럼 하루 종일 함께 있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하지만 나는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비 맞은 토끼처럼 처연해 보이는 블레이크의 얼굴을 보니 도저히 안 된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저 표정에 정말로 약한 것 같다.

“그래. 언제나 함께 있자.”

“정말?”

“응. 정말.”

“약속한 거다.”

“응.”

블레이크가 언제 슬펐냐는 듯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어린 시절처럼 귀여웠던 토끼는 사라지고 한순간에 매혹적인 야수가 되었다.

왠지 당한 것 같은데?

아무래도 나는 평생을 토끼인지 야수인지 모를 남자에게 휘둘리며 살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또한 행복했다.

블레이크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더니 입술이 겹쳐졌다.

새하얀 눈처럼 포근하고 달콤한 입맞춤이었다.

-외전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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