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권-15장. 우리가 꿈꾸는 빛 속으로 (15/17)

목차

15장. 우리가 꿈꾸는 빛 속으로

에필로그. 괴물 황태자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외전. 블레이크가 작아져 버렸습니다

15장. 우리가 꿈꾸는 빛 속으로

“언니랑 이렇게 단둘이 나온 거 처음이다. 꼭 데이트하는 거 같아.”

다이애나의 입꼬리가 시원스럽게 올라갔다.

그녀는 오늘 아카데미 교복을 벗고 사복을 입었다.

헐렁한 셔츠와 타이트한 바지를 입은 다이애나의 모습이 제법 근사했다.

건국제 이후로 다이애나를 향한 데이트 신청과 무도회의 에스코트 요청이 줄을 잇는다고 한다.

남자가 아니라 여자들한테서 말이다.

건국제에서 나와 함께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다이애나에게 반한 영애들이 많은 것 같다.

혹시라도 안 좋게 보며 뒷말이 나오면 어쩌나 걱정을 많이 했는데, 어쨌든 다행이었다.

우리가 지금 가는 곳은 리차드가 운영했던 카멜리아 고아원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단둘이 외출하는 건 아니었다. 제5 기사단도 함께였으니까.

리차드가 자취를 감춘 뒤, 그의 고아원은 나라에서 운영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그동안 나는 카멜리아 고아원에 가보고 싶었지만 블레이크가 걱정을 너무 많이 해서 지금껏 미뤄두었다.

그러다 오늘은 블레이크가 절대로 빠질 수 없는 행사가 있는 날이라 기습적으로 고아원에 가겠다고 통보했더니, 재빨리 다이애나에게 연락해서 같이 가도록 하였다.

“너까지 올 필요는 없는데. 블레이크도 참, 공부하는 애를 부르고….”

“그러니까 잘한 거지. 만약 언니 혼자 보냈으면 내가 엄청 화냈을 거야.”

다이애나는 흥분해서 목청을 높였다.

“게다가 아카데미는 걱정하지 마. 필기시험은 모두 끝났고, 북쪽 설산에서 마지막 테스트만 남았으니까. 공부할 것도 없어.”

“무슨 테스트인데?”

국립 아카데미에서 치르는 시험이니 당연히 안전장치는 마련되어 있겠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별거 아니야. 그냥 평범한 혹한기 훈련이야. 마물이나 몇 마리 때려잡는 거지 뭐.”

“마물?! 네가 마물을 잡는다고?”

“뭘 그렇게 놀라. 그 정도야 당연한 거지.”

다이애나는 지금까지 자신이 마물을 잡았던 경험을 말해주었다. 나는 제대로 된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입을 벌리며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 다이애나 정말로 어른이 되었구나.

물론 나도 천 년 전에는 마물 토벌에 나선 적이 있긴 하지만, 다이애나가 마물을 잡는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게다가 원작의 내용도 떠올랐다. 리차드의 계략에 넘어가서 번번이 휘둘리기만 했던 가녀린 여인이 씩씩한 기사로 성장한 것이다.

잠시 후, 우리는 카멜리아 고아원에 도착했다.

혹시라도 리차드가 나타날 것을 대비해 경비대가 보초를 서고 있었기 때문에 겉에서 보이는 분위기는 다소 삭막했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자 아이들의 밝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시설이 꽤 좋네.”

“그러게.”

다이애나는 고아원을 둘러보며 감탄했다.

나도 놀라웠다. 좋다는 말은 들었지만 꽤나 세세하게 신경 쓴 것이 느껴졌다.

“고아원에 공을 많이 들이셨습니다. 설마 그분이 그런 짓을 저지르실 줄이야…. 솔직히 아직도 믿기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고아원을 안내해주던 미셸이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미셸은 남작가의 영애로 로움족을 차별하지 않는 리차드의 철학에 반해서 카멜리아 고아원의 교사가 되었다고 한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고아원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른 모양이다.

리차드가 어떤 마음으로 카멜리아 고아원을 세웠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훌륭하게 운영해온 건 사실이었다.

어찌 됐든 리차드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의 목숨과 재산을 빼앗고, 마음을 조종하는 비열한 방법을 쓰지 않았더라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었을 거다.

이대로 계속 고아원을 운영해 나갔다면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되었겠지.

하지만 그는 결국 제 손으로 모든 것을 무너트려 버렸다.

착잡한 마음으로 고아원을 둘러보는데, 거친 욕설이 들렸다.

“더러운 로움족! 당장 꺼져!”

열세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덩치가 큰 남자아이가 작은 소녀를 향해 윽박질렀다.

검은 머리의 소녀는 고작해야 여섯 살 정도밖에 보이지 않았다.

“로움족이라고 다 나쁜 건 아니야.”

소녀는 겁을 먹은 표정이었지만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말했다.

“로움족은 모두 나빠. 리차드 그 인간도 살인자거든. 범죄자라고!”

“아니야.”

“맞아! 아니면 경비대가 왜 지키고 있겠냐! 너희 로움족은 모두 더러운 해충이야! 전부 없애버려야 한다고!”

“아니라고!”

“로움족 주제에 감히 누구한테 소리를 빽빽 질러!”

소녀가 참다못해 소리치자, 남자아이는 그대로 손을 쳐들었다.

우리는 화들짝 놀랐고, 다이애나는 분노하며 아이들한테 달려갔다. 나도 얼른 뒤를 따랐다.

“당장 멈추지 못해!”

“젠장!”

소년은 욕을 하더니, 소녀를 강하게 밀치고는 건물 안으로 도망쳤다.

“야! 거기 서!”

다이애나는 남자아이를 쫓아갔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에 미셸은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톰, 쟤가 진짜! 비 전하, 송구합니다.”

“아니에요. 아이야, 괜찮니?”

나는 우선 소녀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다.

“흐으, 흐….”

하지만 몸은 괜찮아도 마음은 큰 상처를 받은 것 같았다.

나는 울먹이는 소녀를 꼭 안아주었다.

“괜찮아. 괜찮아. 네가 잘못한 거 없어. 괜찮으니까 참지 않아도 돼.”

“으앙. 으아앙.”

아이는 나의 품에 안기자마자 서러운 눈물을 쏟아냈다.

그때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내가 왜 사과해요! 뭘 잘못했다고요!”

“뭐야? 그걸 말이라고 해!”

다이애나가 소녀를 밀친 ‘톰’이라는 아이를 끌고 왔다.

하지만 소년에게서는 반성의 기색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내가 뭐 틀린 말 했어요? 로움족은 해충이에요! 여신한테도 버림받고 탄시놀을 옮기는 병균이라고요! 더러운 로움족 놈들을 당장 이 땅에서 쓸어버려야… 악!”

톰은 비명을 질렀다. 다이애나가 혼낸 것이 아니었다.

물론 다이애나가 톰을 단단히 혼낼 기세이긴 했지만, 그 전에 작은 돌멩이가 그의 이마에 날아들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돌이 날아온 곳을 바라보았다.

그 자리에는 소녀와 똑같은 검은 머리카락을 지닌 소년이 서 있었다.

“칼루오!”

미셸은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칼루오? 칼루오라면 첼시가 말했던 아이인가?

고아원에서 다른 아이들과 로움족 사이에 다툼이 벌어졌을 때, 끝까지 물러나지 않고 싸웠던 아이라고 했다.

칼루오를 바라보는데, 그가 씩씩거리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소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슐리아! 가자!”

“으응.”

소녀의 이름이 ‘슐리아’였구나.

슐리아가 일어나자, 칼루오는 그녀를 보호하듯 꼭 끌어안으며 나를 노려보았다.

마치 내가 슐리아에게 해코지라도 하려 했다는 듯이 말이다.

***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난 뒤, 미셸은 고아원의 접대실로 우리를 안내했다.

“비 전하, 불미스러운 모습을 보여드려서 송구합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아니에요. 그보다도 아이들 간의 감정의 골이 깊어 보이던데….”

미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는 이러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은 모두 사이가 좋았죠. 바깥세상과 달리 이 고아원 안에서는 로움족에 대한 어떤 차별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톰이 오면서부터 분위기가 험악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카멜리아 고아원은 세워진 지 5년도 채 되지 않은 신생 고아원으로, 원생들의 나이가 대부분 어린 편이었다.

톰은 11살로 원생 중에서는 나이가 많은 편에 속한 데다가 또래의 아이들에 비해서 덩치가 무척 큰 편이었다.

그런 애가 분위기를 주도하면 다른 아이들은 쉽게 휩쓸릴 터였다.

“그 아이는 처음부터 로움족에 대한 적대감이 강했나요?”

“네. 부모님이 탄시놀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정말 탄시놀이었나요?”

독감이나 폐렴을 탄시놀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이번 괴혈병 사건처럼 전혀 다른 병을 탄시놀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신전의 신관들조차도 제대로 된 진찰을 하지 못하는데, 보통 사람들이 탄시놀을 판별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톰은 그렇게 믿고 있죠. 로움족이 병을 퍼트려서 자신의 부모를 죽였다고요. 그러다 보니 문제를 일으킬 때마다 혼을 내고 설득을 해도 전혀 듣지 않습니다.”

그동안 고민이 많았는지 미셸은 참담한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톰이 매일같이 로움족의 욕을 하니 다른 아이들도 금방 따라 하더군요. 로움족의 아이들이 상처를 많이 받았습니다. 칼루오는 아주 순하고 착한 아이였는데, 톰과 싸우면서 성격이 많이 거칠어졌죠.”

“차라리 그 애를 다른 고아원으로 보내는 건 어떨까요?”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다이애나가 말했다. 나 역시도 그녀의 의견에 동의했다.

톰은 로움족을 부모의 원수로 생각했다.

아무리 가르치고 설득을 한다고 한들, 당장은 귀에 들어오지 않을 거다.

차라리 로움족이 없는 다른 고아원으로 보내는 게 톰과 로움족 아이들 모두에게 좋을 거다.

수도에 있는 사설 고아원 중에서 로움족이 있는 곳은 오직 카멜리아뿐이었다.

옮길 곳을 찾는 것도 어렵지 않을 터였다.

“사실은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이대로는 모두에게 상처만 남길 뿐이니까요. 하지만 그분께서 반대하셨습니다.”

“리차드 카실이요?”

“네. 그분은 로움족의 아이들을 무척 아끼셨는데, 이상하게 톰의 문제만큼은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직접 데려온 아이라 애정이 있으셨던 거 같습니다.”

“그자가 톰을 직접 데려왔다고요?”

“네.”

로움족에게 원한을 가진 아이를 직접 데려왔다고?

톰은 원생들은 물론 리차드에게조차도 적대적이었다. 어째서 그런 아이를 곁에 둔 거지?

리차드는 자신을 무시하거나 적의를 보이는 자를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아이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어쩌면 그분께서는 톰 같은 아이가 로움족을 이해하고 서로 화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으셨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그건 절대로 아닐 거다.

리차드는 그런 이상적인 꿈에 젖어 있는 인간이 절대로 아니었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게 분명했다.

탄시놀.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필립이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위해 만들어낸 병이 수많은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상했다. 어째서 탄시놀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걸까?

탄시놀은 빛의 마나를 인위적으로 비틀어서 만들어낸 거다.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병이 아니었다.

물론 오랜 시간이 흐르며 탄시놀이라는 병 자체가 변형되었을 수도 있다.

천 년 전과는 전혀 다른 병이 어느 순간부터 ‘탄시놀’이라는 이름을 달고 전역으로 퍼져나갔을 수도 있고, 아니면 빛의 마나석에 담겨 있는 마나가 어떠한 형태로 비틀린 채 사람에게 퍼지면서 병이 발생했을 확률도 있었다.

그리 생각하면 이상하다고 볼 수만도 없나….

“언니,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카멜리아 고아원에서 나온 뒤 황궁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나는 괜찮다고 하였으나, 다이애나는 나를 궁까지 바래다주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모두들 내가 걱정되는 모양이다.

“그보다도 다이애나, 내가 한 말은 생각해봤어?”

“뭐?”

“데뷔탕트 말이야.”

다이애나는 올해 성인이 되었지만 데뷔탕트를 치르지 않았다.

길버트 벨라시안이 죽고, 어머니와도 절연한 상태이니 자신이 직접 데뷔탕트를 준비했어야 했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만약 내가 있었으면 꼭 해줬을 텐데….

하지만 후회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지금이라도 그녀의 데뷔탕트를 열어줄 생각이었다.

“됐어. 이미 생일도 지났는걸.”

“생일이 지나서 하는 사람도 많아.”

“언니도 안 했잖아.”

“나는 대신 다른 파티를 많이 했잖아.”

건국제도 내가 주인공인 거나 마찬가지였고, 얼마 전에는 성대한 티 파티도 열었다.

“황태자 전하도 안 했는걸.”

블레이크 역시 성인식 무도회를 열지 않았다. 아마 나 때문에 그런 거겠지….

“전하도 곧 할 거야.”

블레이크도 다이애나처럼 거절했지만, 나는 어떻게 해서든 그의 성인식을 치러주고 싶었다.

“그럼 전하만 해줘. 드레스를 차려입고, 남자들이랑 돌아가면서 춤추고 그러는 거 질색이야.”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렇게 싫어하니 나도 더 권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다이애나를 위한 파티를 꼭 열어주고 싶은데….

내가 고민하는 사이 마차는 포렌스궁에 도착했다.

“다이애나, 오늘 같이 가줘서 정말 고마워.”

“아니야. 언제든지 불러.”

그녀는 차 한잔할 시간도 없이 다시 아카데미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마차를 타고 가.”

“그냥 말 타고 가면 돼. 그게 편하고. 그럼 이만 가볼게.”

다이애나가 손을 흔들었다. 나는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다가 얼른 제이든에게 명했다.

“제이든, 다이애나 좀 바래다줘.”

“네. 비 전하.”

제이든은 성큼성큼 뛰어서 다이애나의 곁으로 갔다. 하지만 다이애나는 손을 내저었다.

“됐어. 돌아가.”

“같이 가.”

“내 실력 몰라? 호위 같은 건 필요 없어.”

“누가 호위한다고 했냐? 너랑 좀 걷고 싶어서 그러지.”

제이든이 무심한 투로 뱉자 다이애나가 당황했다.

“아, 뭐, 뭐, 그래라….”

두 사람은 나란히 걸어갔다.

정말로 단순한 친구인 거야?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히 흐뭇한 미소가 입에 걸렸다.

“왜 그렇게 웃어?”

익숙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블레이크의 붉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응?”

“다른 놈을 보고 웃었잖아.”

“내가 언제?”

“지금.”

그가 뾰로통하게 뱉으며 나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다이애나를 보고 웃은 거야.”

“정말이지?”

“응.”

“다른 놈한테 웃어주지 마.”

애교 섞인 목소리와 달리 눈빛은 단호했다.

“알았어.”

나는 피식 웃으며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뾰로통하던 표정이 유순하게 풀어졌다.

오늘따라 강아지 같네.

“오늘 행사는 어땠어?”

“행사 내내 부인한테 달려가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어.”

말하는 것도 강아지 같고.

하지만 말은 저렇게 해도 사실은 잘했을 거라는 걸 알고 있다.

정무와 관련해서 블레이크의 평판은 엄청 좋은 편이었으니까.

칭찬에 박하기로 소문난 재무대신이 블레이크를 보며 텐스테온을 이을 성군이 될 거라고 호언장담했다고도 하고, 다른 곳에서도 칭찬들이 연이어 쏟아졌다.

“부인은 잘 다녀왔어?”

“응. 그런데 조금 아쉬워.”

“왜?”

“한 아이가 계속 마음에 남아. 조금 더 꼭 안아주고 올 걸 그랬어….”

서럽게 울던 슐리아의 모습이 계속 떠올랐다. 마치 블레이크와 결혼하기 전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더욱 마음이 쓰였다.

“다음에는 나랑 같이 가자.”

“가도 돼?”

절대로 안 된다고 할 줄 알았는데….

“원하는 곳이 있으면 어디든 가. 대신 나랑 꼭 함께 가야 해. 이번처럼 혼자 가려고 하면 화낼 거야.”

오늘 내가 갑자기 통보하는 바람에 블레이크가 많이 놀란 모양이다.

“알았어. 다음엔 꼭 같이 가자.”

나는 걱정이 많은 신랑을 꼭 껴안으며 말했다.

***

칼루오가 공부를 하고 있는데, 문이 열리더니 슐리아가 안으로 들어왔다.

“오빠, 공부해?”

“응.”

“무슨 공부해?”

“너는 봐도 몰라.”

칼루오는 고아원에서 가장 성적이 좋았다. 그는 아홉 살이었지만 열한 살인 톰이 풀지 못하는 문제들도 가볍게 풀곤 했다.

“헤헤헤.”

“뭐가 좋다고 웃어.”

칼루오가 퉁명스럽게 뱉었다.

하여튼 순해 빠졌다. 저러니까 다른 녀석들이 만만하게 보고 계속 시비를 거는 거다.

그래도 울고 있는 것보다는 낫긴 했다. 톰 때문에 우울해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오빠, 이거 먹어.”

슐리아가 손을 내밀었다. 고사리 같은 손 위에는 샛노란 사탕이 두 개 놓여 있었다.

“이게 뭐야? 어디서 났어?”

“아까 간식 시간에 비 전하께서 주신 거야. 오빠는 안 왔잖아. 그래서 내가 오빠 거까지 챙겨 왔어. 우리 같이 먹자.”

그녀는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칼루오는 그녀의 손에 든 사탕을 바닥에 던져버렸다.

“이런 걸 왜 받아! 너도 먹지 마!”

“오빠!”

“그 여자는 황태자비야!”

“알아. 하지만 좋은 분인 거 같았어.”

앤시아는 톰에게 괴롭힘을 당한 슐리아를 꼭 안아주었다.

자신이 로움족인 걸 알면서도 잘못한 것이 없다고 해주었다.

슐리아는 황태자비가 마음에 들었다.

“좋긴 뭐가 좋아! 리차드 님을 죽이려고 하는 황실 사람이라고! 그런데 그 여자가 준 걸 먹겠다는 거야!”

“하지만 그건 리차드 님이 잘못한 거라며….”

“거짓말이야! 리차드 님이 황제가 될까 봐 누명을 씌운 거라고! 옛날에도 그랬어! 황제는 리차드 님의 가족들을 억울하게 죽였잖아! 이번에도 그런 거라고!”

리차드가 말했다. 지금 황태자는 괴물이라고.

황제는 황태자보다 리차드가 더 뛰어난 걸 알고 극도로 경계한다고 말이다.

다른 귀족들도 로움족이 차기 황제가 되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합심하여 리차드의 가문에 역모 혐의를 씌우고, 리차드의 작위마저 빼앗았다고 했다.

행여 로움족이 황제가 될까 봐 싹을 자른 것이다.

“제국 놈들은 전부 다 똑같아! 우리 로움족의 적이라고!”

칼루오는 과거의 일을 떠올렸다.

칼루오는 로움족의 마을에 살았다.

마을이라고는 해도 칼루오와 코닌스 형, 그리고 슐리아의 가족뿐이었지만 말이다.

로움족은 어딜 가든 천대를 받았고, 노예 상인의 표적이 되었다.

세 가족은 서로를 의지하며 깊은 숲속에 숨어 살았다. 힘들지만 행복했다. 그곳에는 어떤 차별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행복했던 나날은 하루아침에 끝나버렸다. 저 멀리 영지에 사는 사람들이 몰려온 것이다.

사람들은 탄시놀을 퍼트린 로움족을 없애야 한다며, 그들의 부모와 형제를 죽이고 집에 불을 질렀다.

모두 죽고 칼루오와 누나 카란, 코닌스, 슐리아, 이 네 사람만 겨우 살아남았다.

그들은 슬픔과 복수심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영주나 신전에 고발한들, 로움족의 편을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절망에 빠진 네 사람의 앞에 리차드가 나타났다.

리차드는 그들을 구원해주었다. 카란과 코닌스에게 흑마법을 가르쳐주고, 가족의 복수를 할 수 있도록 도왔다.

칼루오와 슐리아는 카멜리아 고아원으로 가게 되었다.

“누나, 나도 누나랑 함께 있을래.”

칼루오는 누나와 함께 있고 싶었지만, 그녀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위험해. 나는 리차드 님이 황제가 되도록 도울 거야. 그분이 황제가 되면 로움족은 차별받지 않는 세상이 올 거야.”

“나도 함께 도울래!”

“너는 공부를 하도록 해. 리차드 님이 황제가 되면 훌륭한 보좌가 필요할 거야. 네가 그 역할을 수행해야지. 그분과 함께 로움족을 위한 나라를 만드는 거야.”

누나의 말이 맞았다. 칼루오는 그녀의 말대로 고아원에 남게 되었다. 게다가 어린 슐리아를 지켜줄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다.

“황제가 리차드 님께 누명을 씌운 거야. 절대로 다른 사람 말에 넘어가면 안 돼! 다른 애들은 몰라도 우리는 리차드 님을 믿어야지!”

리차드는 자신들을 구해주었다. 로움족의 나라를 만든다는 계획에도 동참시켜 주었다.

“리차드 님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위한 세상을 만들어주실 거야….”

리차드는 우리 로움족을 위한 세상을 만들어줄 거다. 하지만 칼루오는 말을 하려다 멈칫했다.

아직 어린 슐리아에게는 너무 어려운 말이었다. 게다가 이건 리차드와 자신들만이 알고 있는 비밀 계획이었다.

슐리아는 착하지만 비밀을 지키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아직은 말을 해줄 때가 아니었다.

“나는 리차드 님이 싫어.”

칼루오가 말하는 내내 바닥에 떨어져 있는 사탕을 바라보던 슐리아가 소심하게 말을 뱉었다.

“슐리아!”

“카란 언니랑 코닌스 오빠랑도 못 만나게 하고….”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했잖아.”

칼루오는 답답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리차드 님의 계획을 알려주며 카란과 코닌스가 흑마법사가 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줄 수는 없었다.

“톰도 안 쫓아내잖아.”

슐리아는 단순히 카란과 코닌스가 보고 싶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슐리아는 고아원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었다.

친구들도 많았고, 로움족이라고 차별받지도 않았다. 오히려 행복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톰이 오면서 행복도 막을 내렸다.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야. 한 번 고아원에 들어온 이상 내보낼 수 없다고. 그게 규칙이야. 리차드 님의 잘못이 아니야.”

과연 그럴까?

슐리아는 제가 본 것을 여전히 잊을 수 없었다.

톰이 같이 다니는 무리와 함께 칼루오를 심하게 괴롭힌 적이 있었다.

평소에도 늘 있는 일이긴 했지만 그날은 정도가 무척 심했다.

슐리아는 다급히 선생님들을 찾았다.

그리고 리차드를 발견했다. 하지만 그녀는 리차드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리차드는 칼루오가 얻어맞는 걸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도와줄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오히려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의 모습에서 본능적인 공포를 느낀 슐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자 리차드는 고개를 돌렸다. 그는 슐리아를 잠시 동안 내려본 뒤, 칼루오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평소처럼 온화한 표정으로 싸움을 말렸다.

슐리아는 이 일을 칼루오에게 말했지만, 그는 잘못 보았을 거라고 일축했다.

“슐리아, 네가 아직은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리차드 님은 정말로 좋으신 분이야. 누구보다 훌륭하시다고. 그런 말 하면 안 돼.”

칼루오는 리차드의 이야기가 나오기만 하면 저랬다.

그가 리차드를 얼마나 좋아하는 지 알았기 때문에 슐리아도 다른 사람 앞에서는 리차드의 편을 들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부터 생긴 두려움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슐리아가 대답하지 않은 채 바닥에 떨어진 사탕만 바라보고 있자, 칼루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사탕을 지근지근 밟아버렸다.

“오빠!”

“그 여자 때문이야! 그 여자 때문에 네가 이상한 생각을 하는 거야! 다시는 이런 거 받지 마!”

“오빠, 하지 마!”

슐리아가 울면서 말렸지만, 칼루오는 사탕이 가루가 될 때까지 밟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

슐리아는 울다 지쳐서 잠이 들었다. 고작 사탕 때문에 울다니. 정말로 어린애다.

그러니 내가 지켜주어야 한다. 카란 누나와 코닌스 형이 나를 지켜줬듯이 말이다.

칼루오가 슐리아의 검은색 머리카락을 쓸어주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그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검은색 로브로 몸을 가린 여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칼루오의 누나인 카란이었다.

“누나!”

칼루오는 반가움에 소리쳤다.

리차드가 수배범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누나까지 연루되었을까 봐 걱정했는데, 건강해 보여서 안심이었다.

“쉿!”

하지만 카란은 인사를 하기도 전에 재빨리 검지를 자신의 입술 위로 올렸다.

칼루오는 황급히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가자. 얼른 여기서 나가야 해.”

카란이 작지만 빠른 목소리로 말했다.

고아원을 떠나는 거구나. 누나가 우리를 데려가기 위해서 온 거다.

황실에 쫓기고 있으니 몰래 온 거겠지.

칼루오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슐리아, 일어나.”

그는 슐리아의 몸을 흔들었다. 하지만 카란은 화들짝 놀라며 칼루오의 손을 붙잡았다.

“무슨 짓이야!”

“왜?”

“너만 가는 거야. 쟤는 깨울 필요 없어.”

‘쟤’라니. 칼루오는 날카롭게 선을 긋는 누나의 모습이 낯설었다.

그녀는 슐리아를 무척 귀여워 했다.

두 사람이 고아원에 갈 때도, 칼루오에게 슐리아를 지켜줘야 한다며 거듭 당부하기도 했었다.

“뭐? 그럼 슐리아는?”

“나중에.”

“나중에 언제?”

“시간 없어. 빨리 가야 돼.”

“슐리아는 언제 가냐니까?”

“누나 말 안 들을래!”

카란이 낮게 소리쳤다.

누나가 저렇게 화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칼루오는 깜짝 놀라서 카란을 올려 보았다.

“슐리아는 다음에 데려갈 거야. 그러니까 오늘은 너만 가는 거야.”

“응.”

그녀는 이번에도 확실하게 대답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칼루오는 누나가 또 화를 낼까 봐 겁이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나가 있어.”

“나 혼자?”

“나도 네 짐만 챙기고 금방 나갈 테니까, 너 먼저 나가 있어.”

“내가 할게.”

“빨리 나가라고 했지!”

“응….”

카란이 화를 내자, 칼루오는 분위기에 밀려서 밖으로 나가고 말았다.

‘내 짐이니까 내가 더 잘 쌀 수 있는데. 게다가 누나는 내 방에 와본 적도 없잖아….’

그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짐에 대한 생각은 금방 잊혔다.

그보다도 슐리아가 걱정이었다.

‘내가 떠나면, 톰 그 자식이 슐리아를 괴롭힐 텐데.’

지금도 어리고 만만하다며 툭하면 시비를 거는데, 칼루오가 사라지고 나면 어찌할지 안 봐도 뻔했다.

아무래도 이건 아니야. 나 혼자만 갈 수는 없어. 슐리아도 함께 가야 돼. 다시 한번 누나를 설득해 봐야겠어.

칼루오는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카란이 화들짝 놀라서 칼루오를 바라보았다.

카란은 짐을 꾸리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슐리아의 옆에 있었다.

카란의 로브 안쪽에서는 검은 연기가 뱀처럼 스멀스멀 기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연기는 슐리아의 작은 몸을 뒤덮었다.

“칼루오….”

“누나, 지금 뭐 하는 거야?”

***

나는 새벽 일찍 황궁 도서관으로 갔다.

오늘은 한 달에 한 번 있는 휴관일이었기 때문에 도서관 전체를 통째로 전세 낼 수 있었다.

나는 족히 15명은 앉을 수 있는 넓은 책상에 책들을 쌓아놓고, 탄시놀에 관한 기록을 살피기 시작했다.

“앤시아.”

종이에 글을 써 내려가던 나는 블레이크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블레이크, 여긴 웬일이야? 책 보러 왔어?”

“아니. 부인 보러.”

블레이크가 말간 얼굴로 말했다. 그는 능글맞은 말을 해도 순수해 보이는 재주가 있었다.

“그런데 뭐 하고 있었어? 전부 탄시놀에 관한 책들이네.”

그가 책상 위에 놓인 책들을 바라보았다.

“탄시놀이 발생한 시기를 순서대로 적어보고 있었어.”

“새벽부터 이걸 혼자서 다 정리한 거야?”

“응.”

“나를 부르지 그랬어.”

“별거 아니야. 그냥 공부한 거야.”

“봐도 돼?”

그가 나의 노트를 가리켰고,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몇 개 빠진 거 같은데, 일부러 뺀 거야?”

블레이크가 가볍게 노트를 훑어보며 말했다.

그는 잠깐 본 것만으로도 탄시놀의 발병 기록들이 누락되어 있다는 걸 눈치챘다.

어렸을 때는 내가 역사를 가르쳐줬었는데, 이제는 나보다 그가 아는 게 더 많은 것 같다.

“응. 그건 탄시놀이 아니었거든.”

지난 천 년 동안 탄시놀에 걸렸다는 사람은 수없이 많았다.

탄시놀은 여신이 내린 병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병에 걸렸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쉬쉬하고 넘어가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역사에 기록된 사례들이 굉장히 많았다.

하지만 기록들을 면밀히 살핀 결과, 증상이나 진행 상황으로 봤을 때 탄시놀이라고 했지만 전혀 다른 병이었던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라온텔이었던 시절, 탄시놀이라면 이골이 날 정도로 조사를 했었다.

결국 나의 힘으로는 아무도 구하지 못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때의 경험이 자료를 분석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기록들만 보고 파악한 거야?”

“완벽하진 않아.”

하지만 내가 아무리 탄시놀에 대한 지식이 많다고 한들, 과거의 기록만으로 판단하는 건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표시해 놨어.”

나는 노트에 적어놓은 기호를 가리켰다.

탄시놀의 가능성이 확실한 건 별표, 80퍼센트 정도인 건 동그라미, 50퍼센트인 건 세모 표시를 해놨다.

나의 설명을 들은 블레이크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앤시아, 여기에 동그라미를 쳐놓은 건 100퍼센트 탄시놀이 확실하다는 거지?”

“응. 왜?”

“전부 신전 쪽에 사건이 있었을 때야.”

“뭐?”

“685년에는 신전 내에 쿠데타가 있었어. 켄스웨이 본가 출신인 대신관의 만행이 극에 달하자, 방계가문들이 들고 일어났었지. 하지만 탄시놀이 발생하면서 흐지부지되었어.”

그는 노트를 넘긴 후, 내가 동그라미 표시를 해둔 다른 부분을 가리켰다.

“711년이면, 윌리엄 황제가 종교개혁을 하겠다고 나섰을 때야. 이것도 탄시놀 때문에 실패였지. 그리고 762년에는….”

“오팔 전쟁!”

“맞아. 762년은 오팔 전쟁이 일어났었어.”

오팔 전쟁. 그건 진짜 전쟁은 아니었다.

당시 아스테릭 제국의 황제는 로움족의 여인 오팔라와 사랑에 빠져서 그녀를 황후로 맞이하려 했고, 켄스웨이 대신관은 이를 격렬히 반대했다.

황제는 그녀를 황비로 맞이하는 것으로 타협을 보려 했지만, 대신관은 이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황제도 분노해서 대신관을 끌어내리려 했다.

결국 황권과 신권의 전쟁이 본격적으로 발발하고 만다.

전쟁이 이어지는 동안 신전 측은 내내 열세였지만 오팔라가 탄시놀에 걸리면서 상황은 역전된다.

결국 오팔라는 탄시놀로 인해 죽고, 황제는 폐위되고 만다.

우리는 서둘러 다른 기록들도 살펴보았다. 그리고 역시 같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켄스웨이 가문이 위기에 빠졌을 때, 탄시놀이 발생했다.

그들이 의도적으로 탄시놀을 일으킨 것이다.

켄스웨이 가문에 탄시놀을 발생시킬 수 있는 힘을 준 사람은 분명 필립이겠지.

필립은 완전무결한 초대 황제로 기록되길 원했다. 그래서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지우는 데 광적으로 집착했다.

그는 아마도 걱정했을 거다.

자신이 죽고 나서 탄시놀이 사라진다면, 사람들이 의심하지는 않을까?

자신이 탄시놀을 일으켰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라도 할까 봐 초조했겠지.

또한 로움족을 계속 공공의 적으로 만드는 게, 자신이 저지른 죄를 덮기에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거다.

그래서 탄시놀을 일으킬 수 있는 도구를 만든 뒤, 유일하게 신뢰하는 신하인 로건 켄스웨이에게 맡기고 대신관직을 역임토록 한 거다.

켄스웨이 가문은 필립의 명령대로 주기적으로 탄시놀을 일으켰다. 그것도 자신들이 위기에 봉착했을 때 말이다.

이게 바로 천 년 동안이나 켄스웨이 가문이 신전을 장악할 수 있었던 힘이었다.

그리고 만약 이 가설이 사실이라면….

“큰일이야!”

“큰일이라니? 뭐가?”

“하워드가 탄시놀을 일으킬지도 몰라!”

켄스웨이 가문은 자신들이 위기일 때마다 탄시놀을 일으켜서 상황을 반전시켰다.

그러니 이번에도 분명 같은 방법을 쓸 거다.

***

앤시아의 말을 들은 블레이크는 곧장 하워드가 갇혀 있는 동쪽의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감옥 안에서는 텐스테온과 콜린이 하워드를 신문 중이었다.

하워드는 조사를 받겠다며 제 발로 직접 황궁에 왔지만, 지금까지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블레이크는 텐스테온에게 인사조차 올리지 않은 채, 성큼성큼 걸어가서 하워드의 멱살을 잡았다.

“말해라. 탄시놀을 일으킬 생각인가?”

“…….”

그 순간 생기 없던 하워드의 눈이 번쩍 빛났다. 블레이크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계략이 발각되어서 당황한 것이 아니다. 그는 오히려 기뻐 보였다.

누군가가 이 사실을 알아차려 주길 바란 것처럼 말이다.

“무슨 짓을 꾸민 거냐!”

“전하, 그만하십시오. 이러다 정말로 죽겠습니다.”

블레이크가 숨이 막힐 정도로 멱살을 강하게 움켜잡자, 콜린이 다가와서 다급히 말렸다.

“탄시놀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텐스테온도 블레이크의 말뜻을 궁금해했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하워드를 주시했다.

무언가 이상하다. 도대체 뭐지?

그 순간 하워드의 몸에서 기묘한 마나가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빛의 마나도 그렇다고 흑마법의 검은 마나도 아닌 그 무언가….

설마 이것은…!

“탄시놀은 빛의 마나를 뒤틀어서 만든 거야. 그리고 켄스웨이 가문은 탄시놀을 일으킬 힘을 가지고 있는 게 분명해.”

블레이크는 아까 전 도서관에서 앤시아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소리쳤다.

“탄시놀이다! 모두 나가야…!”

그 순간 하워드의 몸 안에 잠들어 있던 마나가 한꺼번에 폭발하더니, 그의 입에서 피가 왈칵 쏟아졌다.

“리차드느 피립….”

하워드는 갈라지는 숨소리와 함께 짧은 말을 토해냈다.

그가 동쪽 감옥에 갇힌 이후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제대로 맺지 못한 채, 하워드 켄스웨이는 눈을 감았다.

***

나는 하워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동쪽 감옥으로 달려갔다.

하워드가 갇혀 있던 감옥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소름이 끼쳤다. 뒤틀린 빛의 마나가 감옥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건 탄시놀이다. 천 년 전에 젤칸을 멸망시켰던 그 병이 다시 퍼진 것이다.

“앤시아, 여긴 왜 왔어!”

블레이크가 나를 보자마자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에 걱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걱정 마. 나는 괜찮으니까. 그보다, 정말 탄시놀이네.”

하워드의 시체에서는 뒤틀린 마나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옮거나 마나석의 에너지가 자연스럽게 비틀리며 탄시놀에 걸린 거라면, 이렇게까지 강한 마나를 쏟아낼 수는 없었다.

나의 짐작대로 어떤 도구를 사용해서 일부러 탄시놀을 만들어 낸 것이다.

“역시 이게 탄시놀이었구나.”

“응.”

나는 피부가 시커멓게 변한 채 얼굴이 처참하게 뭉개진 하워드의 시체를 바라보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방심했다.

가문의 번영을 위해서 무고한 생명을 희생시키는 이기적인 족속들이니, 탄시놀을 퍼트리더라도 자신은 안전한 곳으로 몸을 피할 줄 알았다.

설마 스스로가 희생양이 되면서까지 황궁에 탄시놀을 퍼트리려 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갑자기 죽은 거야?”

“응. 놈의 안에서 무언가 마나가 일렁거리더니 갑자기 폭발했어.”

이러려고 지금까지 말을 하지 않고 버텼던 건가?

“블레이크.”

나는 우선 그의 손을 잡았다. 순백의 빛의 마나가 일렁일 뿐 탄시놀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탄시놀에 걸리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직접 확인하니 마음이 놓였다.

“나는 걱정할 거 없어.”

블레이크가 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응….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어디 있어?”

지금 감옥에는 하워드의 시체와 블레이크 둘뿐이었다.

“폐하와 콜린 경은 위층에 있어.”

“폐하도 계셨어?”

“응. 기사들은 밖에서 지키고 있었고, 안에는 우리 세 사람과 하워드가 있었어.”

폐하랑 블레이크를 동시에 노리기 위해서 지금까지 참다가, 탄시놀을 퍼트린 거구나.

이렇게까지 할 정도로 황실에 대한 원한이 깊었던 건가?

“그리고 하워드가 죽기 전에 묘한 말을 했어.”

“어떤…?”

“리차드가 필립이라고.”

“리차드가 필립?”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하워드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지? 설마 리차드가 기억을 되찾은 건가?

리차드가 필립의 기억을 찾았다면, 이 상황도 설명이 된다.

그는 전생의 기억을 찾음과 동시에, 자신이 켄스웨이 가문에 ‘탄시놀을 일으킬 수 있는 마도구’를 주었다는 사실도 떠올렸을 것이다.

그 뒤 마도구를 되찾고, 하워드에게 탄시놀을 건 뒤 황궁에 자수토록 하였다.

천 년 전 그때처럼, 자신이 황제가 되기 위해서 황궁에 죽음을 퍼트릴 계획인 거다.

“당장 아버님을 봬야겠어.”

***

“아버님!”

나와 블레이크가 안으로 들어가자, 방에 있던 텐스테온과 콜린이 우리를 바라보았다.

“앤시아, 위험한데 여기까지 온 것이냐?”

“저는 괜찮아요. 그러니 일단 손부터 줘보세요.”

나는 다급히 외쳤다.

탄시놀과 켄스웨이 가문의 비밀, 그리고 리차드까지 설명할 것들이 많았지만 우선은 텐스테온의 안위가 중요했다.

“정말로 탄시놀이었던 거구나.”

“네….”

고작 위층으로 올라오는 짧은 시간 동안 오만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만약 텐스테온이 탄시놀에 걸리면 어떡하지?

그렇게 되면 젤칸 제국처럼 아스테릭 제국도 엄청난 혼란에 휩싸일 거다.

하지만 그보다도 소중한 가족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나는 텐스테온의 손을 잡고,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

작은 흐름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정신을 집중하고 몸의 구석구석을 세밀하게 살폈다.

천 년 전에는 탄시놀의 증상이 나타나고 나서야 치료에 들어갔다. 필립이 쳐놓은 덫에 걸려서 처음부터 끝까지 허우적거리기만 했지.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다.

병의 원인을 알고 있으니 진찰하기도 쉬웠다.

나는 텐스테온의 손을 놓으며 빙그레 웃었다.

“다행이에요. 아무런 이상도 없으세요.”

그의 몸 어디에도 탄시놀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구나.”

“정말 다행입니다. 폐하.”

담담한 텐스테온과 달리 콜린은 크게 기뻐했다.

“다행이군요.”

블레이크도 무뚝뚝하게 말하기는 했지만 눈에는 안도의 빛이 서려 있었다.

“이제 콜린 경의 손을 주세요.”

“네, 비 전하.”

나는 그의 손을 잡는 순간 이를 악물었다.

뒤틀린 마나의 씨앗이 콜린의 몸 안에서 느껴졌다.

‘탄시놀’이었다.

***

리차드는 텐스테온과 블레이크를 노렸을 거다. 하지만 정작 탄시놀에 걸린 사람은 콜린이었다.

한 시간 정도 지나자 탄시놀의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기침과 함께 고열이 찾아왔고, 의식마저 잃었다.

하워드가 죽자, 블레이크는 기사와 간수들을 밖으로 내보내고 한 곳에 두는 등 빠르게 조치했다.

덕분에 콜린을 제외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병이 퍼지지 않았다.

나는 텐스테온에게 필리아궁으로 돌아갈 것을 권했지만, 그는 감옥 밖으로 나간 뒤에도 좀처럼 걸음을 떼지 못했다.

“콜린이 정말로 탄시놀인 것이냐?”

텐스테온이 참담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의 얼굴을 보니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단순한 감기에 걸렸을 뿐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네….”

텐스테온이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숙였다. 절망에 젖은 모습을 보니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콜린 경은 쾌차하실 거예요. 제가 반드시 치료할 테니까요.”

“원하지도 않는 녀석을 억지로 데려다가 고생만 시켰다. 이대로 보낼 수는 없다…. 부탁하마, 앤시아.”

그가 나의 손을 꼭 잡았다.

“네. 저만 믿으세요.”

이번에는 당하지 않는다.

또다시 리차드의 계략과 탄시놀로 인해 소중한 사람들을 잃어버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

만약 리차드가 천 년 전에 젤칸 제국을 멸망시켰던 역사를 반복할 생각이라면, 분명 황실을 노릴 터였다.

하워드 말고도 다른 장치를 심어놨을지도 모른다.

나는 황궁을 구석구석 살폈고, 블레이크는 서쪽 감옥에 갇혀 있는 하워드의 측근들을 추궁했다.

“하워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다른 놈들이 입을 열기 시작했어. 그 녀석들의 말에 따르면, 하워드는 곧 여신이 대재앙을 내릴 거라고 호언장담했다고 해.”

“역시 그걸 사용할 생각이었구나.”

하워드는 나에 대한 악소문을 퍼트린 뒤, 탄시놀을 일으킬 생각이었다.

하지만 리차드에게 빼앗겼고 결국 이용당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그는 비참하게 목숨을 잃었지만 작은 동정조차 생기지 않았다.

“응. 제2 기사단이 켄스웨이 가문으로 향했어. 마론한테도 전했으니, 신전 내부의 조사도 들어갈 거야.”

켄스웨이 가문이 천 년 동안 일부러 탄시놀을 일으켰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엄청난 후폭풍이 몰아칠 거다.

켄스웨이 가문은 물론 그 방계도 모두 힘을 잃을 것이 분명했다.

“황궁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었어.”

내가 말하자, 블레이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도 경비를 강화하라고 할게.”

“특히 아버님의 호위를 철저히 해야 해. 아버님께서 탄시놀에 걸리지 않았다는 걸 알면 분명 다시 노릴 테니까.”

“그래야지.”

콜린이 탄시놀에 걸렸을 때부터 블레이크의 표정이 시종 어두웠다.

콜린은 단순한 텐스테온의 부하가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낸 데다가, 저주와 상관없이 블레이크를 아꼈었다. 분명 마음이 아프겠지.

“블레이크, 너무 걱정하지 마. 콜린 경은 반드시 나을 거야.”

“응….”

그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다른 고민 있어?”

“아니야.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

“옛날 생각?”

“어렸을 때…. 별궁에 갇히기 전에 폐하께서 내 손을 잡고 펑펑 우셨었어.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갑자기 떠올랐어. 그때 무척 슬퍼하셨던 거 같아….”

“당연하잖아. 사랑하는 아들인걸.”

“그런가….”

그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없었다. 이제는 전부 잊은 것처럼 보여도 아직 어린 시절의 상처가 남아 있는 거다.

그래도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들일 준비가 조금은 된 거 같다.

나는 블레이크의 손을 꼭 잡았다.

“전하!”

그때 에드온이 다급히 뛰어왔다.

“무슨 일이냐?”

“카멜리아 고아원에서 탄시놀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

나와 블레이크는 당장 고아원으로 향했다.

카멜리아 고아원에서 탄시놀이 발생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천 년 전 필립은 황실을 노렸다. 황실을 중심으로 병을 퍼트려 황태자였던 락슐과 황제마저 없앤 뒤, 황위 계승권자가 없어서 혼란에 빠진 젤칸 제국을 손쉽게 차지했다.

그러니 이번에도 같은 방법을 쓸 줄 알았다.

그런데 설마하니 고아원을, 그것도 자신이 돌보던 아이들에게 탄시놀을 퍼트릴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카멜리아 고아원에 도착하자, 앞을 지키던 경비대 대장이 상황을 설명했다.

“고아원에 있던 로움족 아이가 탄시놀에 걸렸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경비대의 보고를 듣고 있는데, 옆에 있던 미셸이 단호하게 부정했다.

“단순한 감기일 뿐이에요. 탄시놀이라니요. 말도 안 됩니다. 톰이 뭔가 오해를 한 겁니다.”

“아니에요! 탄시놀이 맞아요!”

멀찍이 떨어져 있던 톰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는 다른 선생님들에게 막혀서 이쪽으로 오지는 못했다.

아마 선생님들에게 혼나고 있는 상황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고래고래 목청을 높였다.

“그 녀석은 분명 탄시놀이라고요! 로움족이니 뻔한 거 아니에요?”

“어떻게 된 일이지?”

두 사람의 말이 확연하게 갈리자, 블레이크가 경비대 대장에게 물었다.

“그것이….”

경비대 대장은 상황을 설명했다.

로움족의 아이 한 명이 감기에 걸렸는데, 톰이 그걸 알고는 탄시놀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선생님들은 감기라고 설명했지만, 톰은 듣지 않고 고아원을 지키고 있는 경비대에 알린 모양이다.

미셸은 화들짝 놀라서 해명했고, 경비대 대장도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하지만 탄시놀이라는 신고가 들어온 이상 상부에 보고하는 것이 원칙이었기 때문에 일단 규칙대로 한 모양이었다.

어쨌든 다행이었다. 확실한 건 확인해 봐야 알겠지만, 이야기만 들었을 때는 단순한 감기일 확률이 훨씬 높아 보였다.

“환자는 격리시켰나?”

“네. 전하.”

“아닙니다. 절대로 아닐 거예요. 슐리아가 그런 무서운 병에 걸렸을 리가 없습니다.”

미셸은 강력하게 부정했다.

“병에 걸린 아이가 슐리아인가요?”

나는 깜짝 놀라서 미셸에게 물었다.

“네. 하지만 정말로 감기예요. 칼루오가 사라져서 충격을 받은 거예요.”

“칼루오가 사라지다니요?”

“어젯밤에 갑자기 없어졌습니다. 아무래도 고아원을 떠난 모양입니다.”

“혼자서요?”

“네.”

“그럴 수가 있나요? 경비대가 지키고 있는데.”

혹시라도 리차드가 나타날 걸 대비해서 경비대가 고아원을 감시하고 있었다. 내가 의문을 표하자 경비대 대장이 황급히 변명했다.

“그게 경비원들이 깜박 잠이 든 모양입니다.”

단순한 경비 소홀일까? 아니면 흑마법일까?

리차드의 옆에는 흑마법사가 있으니, 그들을 시켜서 칼루오를 데려갔을지도 모른다.

“일단 가보도록 하죠.”

나와 블레이크는 슐리아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그 작은 아이가 탄시놀이라니…. 단순한 감기여라. 제발 단순한 감기여라….’

나는 속으로 빌면서 빠른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방문을 여는 순간 희망은 사라졌다.

하워드가 죽었던 지하 감옥만큼이나 뒤틀리고 강력한 빛의 마나가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길한 마나는 침대에 누워 있는 작은 소녀에게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탄시놀이야.”

슐리아는 탄시놀에 걸렸다.

리차드가 자신이 돌보던 어린 소녀에게 병을 퍼트린 것이다.

***

탄시놀은 급속도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황제와 황태자는 무사했지만, 수도에 사는 다른 황위 계승권자들은 하나둘 탄시놀에 걸려 쓰러졌다.

뿐만 아니라 귀족이나, 평민, 노예 등 신분 고하를 가리지 않고 무서운 기세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수도 전역이 공포에 휩싸였는데도, 정작 이 사태를 일으킨 리차드는 한가롭게 홍차를 마시며 신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문은 탄시놀에 대한 이야기로 도배되어 있었다. 대다수의 기자들은 갑자기 벌어진 탄시놀의 원인으로 로움족을 지목했다.

황실에서는 켄스웨이 가문에서 탄시놀을 일으켜 왔다고 설명했지만, 이미 패닉에 빠진 민중들에게는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로움족인 리차드가 세운 고아원에서 로움족의 아이가 탄시놀에 걸렸고, 이를 시작으로 전염병이 퍼졌다.’

사람들은 모두 이 이야기를 믿었다. 시기적으로도 맞아떨어진 데다가, 원래 멸시하던 로움족이 병을 퍼트렸다는 이야기가 더 받아들이기 쉬웠기 때문이다.

[하워드 부대신관, 카멜리아 고아원에 방문 뒤 탄시놀 전염!]

리차드는 기사의 제목을 보며 조소를 날렸다.

하워드는 리차드의 고아원에 온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기자들은 사실을 확인하지도 않은 채 그저 자극적인 기사를 쓰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요즘은 로움족을 비난하면 비난할수록 신문이 더 많이 팔린다고 했다.

원래도 멸시의 대상이자 삼류 신문들의 단골 소재였던 로움족은 이제 완벽한 공공의 적이 되어 있었다.

로움족을 섬멸하기는커녕 다른 사람들과 동등하게 치료해주고 있는 황실을 비난하는 기사들도 수두룩했다.

텐스테온이 즉위한 이후 처음으로 욕을 먹는 것이 아닐까?

“무엇을 그리 즐겁게 보고 계십니까?”

옆에 있던 코닌스가 질문을 던졌다.

“진실이 뭔지도 모르면서 멍청하게 휩쓸리는 꼴들이 우습지 않으냐?”

지금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건 오직 황실뿐이었다. 아마 앤시아 덕분이겠지.

앤시아가 지닌 능력과 그 동안 벌어진 일들로 미루어봤을 때, 그녀 역시도 전생의 기억을 찾은 것이 분명했다.

“주군, 카멜리아 고아원을 이리 두실 겁니까? 아이들이 고통받고 있습니다.”

카멜리아 고아원이 탄시놀의 원흉으로 지목되며, 아이들은 엄청난 비난을 받고 있었다. 심지어 여론만 나쁜 것이 아니라 실제로 탄시놀에 걸린 상태였다.

“어린아이들입니다. 얼마 버티지 못할 겁니다. 언제쯤 치료해주실 생각이신지요?”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리차드는 신경질적으로 뱉으며 신문을 내려놨다. 언짢은 기색이 역력했기 때문에 코닌스는 더 말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는데,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카란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왼손으로 반대쪽 손목을 꼭 잡고 있었다. 손목에서는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리차드는 카란의 상처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메마른 목소리로 물었다.

“어찌 됐느냐?”

“송구합니다. 경비가 워낙 삼엄하여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리차드는 어떻게든 텐스테온에게 탄시놀을 전염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황궁의 경계가 워낙 삼엄한 탓에 아직까지 제대로 된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언제까지 실패만 할 셈이냐! 코닌스의 반의반에도 미치지 못하는군!”

싸늘한 질책이 쏟아지자 카란은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자신도 코닌스처럼 황제의 친척들이나 귀족에게 탄시놀을 퍼트리는 임무를 맡았다면 훨씬 수월했을 거다.

“아무래도 황궁의 경비가 삼엄….”

“듣기 싫다. 요즘 들어 제대로 하는 일이 없구나. 물러가라!”

“네. 주군.”

카란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

카란이 밖으로 나오자, 코닌스도 그녀를 따라왔다.

“상처 좀 봐. 많이 다쳤어?”

“됐어. 신경 쓰지 마.”

카란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주군께 치료해달라고 부탁해볼게.”

“네가 뭔데 주군께 부탁을 해? 요즘 리차드 님께서 조금 총애하신다고 건방지게 굴지 마.”

원래 리차드 님은 자신을 더 아꼈다.

성격이 신중하고 똑똑하다며 늘 칭찬하고, 코닌스의 마법 자질이 뛰어나긴 하지만, 그것 말고는 모두 카란이 낫다고 말해주었다.

그녀가 코닌스 정도의 마나를 지녔다면 분명 훨씬 더 뛰어난 마법사가 되었을 거라며 아쉬워하시기도 하셨다.

하지만 소피아 웨스틴과의 결혼식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모든 것이 변했다.

리차드는 코닌스를 신뢰하며 카란을 홀대했고, 그럴수록 그녀는 점점 초조해져 갔다.

“카란,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두 사람은 소꿉친구였다. 어렸을 때부터 모든 걸 함께해온 가족 같은 사이였지만, 리차드의 밑으로 들어온 이후 카란은 변했다.

카란은 코닌스가 지닌 마법 자질에 열등감을 느꼈고, 그를 친구가 아닌 경쟁자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이러지 않았다.

코닌스가 마법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것 같다며 순수하게 칭찬해주던 그녀였다.

하지만 이제는 사소한 일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며 날을 세웠다.

“내가 뭘?”

“아니야. 됐어. 그보다도 너는 요즘 리차드 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무슨 말이야?”

“조금 달라지신 것 같지 않아?”

코닌스와 카란은 강물에 빠진 리차드를 어렵게 구했다. 다행히 몸에는 이상이 없었다. 하지만 그때부터 리차드는 달라졌다.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한 것 같았다.

전에도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기는 했다. 하지만 모든 건 핍박받는 로움족을 구하고 차별을 없애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번 탄시놀 사태로 인해 로움족에 대한 증오가 극에 달했음에도 리차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달라졌지. 전보다 훨씬 훌륭해지셨잖아.”

강물에 빠진 이후 리차드는 빛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타고난 마나가 없기 때문에 마법을 쓰기 위해서는 빛의 마나석이 필요하긴 했지만, 천 년 전에 사라졌다는 빛의 마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그 대단하다는 황태자나 황태자비도 리차드 님만큼 많은 마법을 알고 있지 못할 거다.

카란은 리차드를 도망치게 돕다가 상처를 입었었는데, 그것도 쉽게 치료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지금 리차드 님이 너보다 더 뛰어나다고 질투하는 거야?”

“질투는 무슨 질투야!”

코닌스는 버럭 화를 냈다. 그는 언제나 카란을 믿고 의지했다.

비록 마법의 자질은 자신이 더 뛰어나지만, 머리는 그녀가 더 좋았고 성격도 침착했으니까.

하지만 최근 들어 그녀는 오직 리차드에게 인정받는 것만이 삶의 목표인 사람 같았다.

“카란, 너는 아무렇지도 않아?”

“뭐가?”

“그런 짓을 하고도 아무렇지도 않냐고!”

“무슨 짓? 내가 무슨 짓을 했는데?”

“슐리아에게 탄시놀을 걸었잖아! 다른 로움족 아이들도 전염됐다고!”

리차드는 켄스웨이 저택에서 가져온 물건을 슐리아에게 사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코닌스는 주저했지만, 카란은 즉시 명령을 따랐다.

게다가 그런 짓을 하고도 조금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로움족을 위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지금 이게 로움족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해? 온 세상이 로움족을 비난하고 있어!”

“대의를 위해서는 희생이 따를 수밖에 없어.”

카란은 리차드와 같은 말을 했다. 하지만 이는 그녀의 생각이 아니라, 리차드의 말을 똑같이 따라 하는 것에 불과했다.

코닌스는 그런 그녀가 답답하여 소리쳤다.

“슐리아가 죽어가고 있어! 우리가 그렇게 만든 거야! 이게 대의야? 어린 애들한테 탄시놀을 거는 게 대의냐고!”

“그건…!”

카란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날 밤, 리차드는 카란에게 말했다.

슐리아를 탄시놀에 걸리게 하는 대신, 그녀의 동생인 칼루오는 이곳으로 데려와도 좋다고.

카란은 자신의 동생까지 생각해주는 리차드에게 감사함을 느끼며 카멜리아 고아원으로 향했다.

하지만 슐리아에게 ‘필립의 선물’을 쓰는 모습을 칼루오에게 들켜버리고 말았다.

칼루오는 그게 뭐냐고 물었지만, 카란은 네가 잘못 본 거라며 얼버무린 뒤 동생을 데리고 황급히 고아원을 빠져나왔다.

카멜리아 고아원은 곧 죽음으로 뒤덮일 테니까.

하지만 이곳으로 돌아온 뒤에도 칼루오는 끊임없이 슐리아를 걱정하며 언제 그녀를 데려올 거냐고 묻고는 했다.

대의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카란은 그때마다 크나큰 죄책감을 느꼈다.

그녀가 코닌스의 말에 대답하지 못한 채 입술만 지근지근 짓씹는데, 뒤에서 칼루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카란과 코닌스는 화들짝 놀라서 뒤를 바라봤다.

칼루오는 그런 두 사람을 향해 소리쳤다.

“슐리아가 죽어간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고!”

***

탄시놀은 수도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

황실을 중심으로 노릴 거라는 나의 예상은 빗나갔다.

그렇다고 이대로 당할 수만은 없었다.

나는 탄시놀에 걸렸는지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마도구를 제작했다.

마탑이나 마법사 아카데미에서 사용하는 마나 측정용 마도구를 조금 변형해서 만든 것이었다.

물론 100퍼센트 완벽한 건 아니기 때문에 나와 블레이크가 최종적으로 확인해야 했지만, 그래도 정확도가 제법 높았다.

나는 블레이크에게 탄시놀을 판별하는 법을 알려주었는데, 그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금방 습득했다.

또한 신전에서는 병을 막기 위해서 빛의 마나석으로 만든 마도구를 사용했는데, 나는 이것을 탄시놀에 맞도록 개조한 뒤 방역 활동을 하는 이들에게 착용하도록 하였다.

“콜린 경, 오늘은 어떠세요?”

“괜찮습니다.”

말과 달리 콜린은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며칠 사이에 부쩍 야위었다.

탄시놀에 걸린 환자를 찾고 병을 예방하는 방법은 찾았지만, 아직 가장 중요한 치료법을 발견하지 못했다.

우선은 체내에서 탄시놀이 퍼지는 속도를 최대한 늦추는 방법으로 치료를 하고 있긴 하지만, 느리다고 해서 병이 퍼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콜린의 상태 역시 점점 심각해져서, 어제는 고열로 인해 의식을 잃고, 각혈까지 했다.

콜린의 병을 반드시 고치겠다고 아버님과 약속을 했는데, 점점 병세가 심해지니 면목이 없었다.

또 나날이 말라가는 그를 보니 가슴이 아팠다.

“비 전하,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들어주실 수 있으십니까?”

“네. 말씀하세요.”

“이걸 폐하께 전해주십시오.”

그가 건넨 것은 편지 봉투였다.

“알겠어요. 지금 당장 황궁으로 보내라고 할게요.”

이곳은 수도 외곽에 위치한 황궁 기사단의 훈련소였다.

원래는 황궁 기사들이 모여서 주기적으로 훈련을 받고 합동 연습을 하는 용도로 이용되었지만, 지금은 탄시놀에 걸린 환자들의 격리 장소가 되었다.

탄시놀에 걸린 환자를 파악하고, 병이 퍼지는 속도를 늦추는 등의 치료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나와 블레이크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환자들을 한곳에 모아놓고 치료를 해야만 했다.

방역 차원에서도 이편이 나았다.

이곳은 수도에서도 외진 곳이긴 하지만, 황궁 기사들의 훈련소인 만큼 곧장 황궁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있어서 연락도 편했다.

콜린에게서 편지를 건네받으려고 하는데, 그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 당장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요?”

“제가 세상을 떠나거든 건네주십시오.”

그는 담담히 말했지만, 나의 손은 차갑게 식어 내렸다.

이건 편지가 아니라 유서였다.

나는 편지를 당장 콜린에게 돌려주었다.

“다시 돌려드릴게요. 어차피 아버님께 전달될 일이 없는 편지니까요.”

“비 전하, 아무래도 저는….”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세요. 콜린 경께서는 반드시 나으실 거예요. 제가 꼭 치료법을 찾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푹 쉬세요.”

나는 콜린을 눕히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의 방을 나서는데 마음이 무거웠다.

아무리 병이 퍼지는 속도를 늦췄다지만 처음에 걸린 만큼 콜린의 상태는 심각했다.

어떻게든 확실한 치료법을 찾아야 했다.

비틀려 있는 마나를 푸는 방법을 찾고 있지만, 아직까지 이렇다 할 소득이 없었다.

탄시놀은 평범한 병이 아니라 마법이었다.

시전자가 건 마법을 파훼하려면, 그가 정해놓은 규칙을 찾아야 했다.

필립이 지정해놓은 암호를 실수하지 않고 한 번에 정확히 눌러야만 탄시놀을 없앨 수 있는 것이다.

빛의 마나를 탄시놀의 핵까지 흘려보내서 스스로 이겨내게 하는 방법도 있지만, 탄시놀은 외부에서 빛의 마나가 들어오면 오히려 체내에 있는 뒤틀린 마나가 폭발하는 성질이 있었다.

이것 또한 필립의 설계였다. 탄시놀을 절대로 치료할 수 없는 불치의 병으로 만들기 위해서 이런 장치를 만든 거다.

‘빛의 마나를 어떻게든 체내에 주입할 수만 있다면 탄시놀을 고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두 가지 방법 모두 해결하기 어려웠다.

역시 리차드를 잡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그를 잡으면 병의 치료법을 알 수 있는 건 물론이고, 탄시놀을 퍼트리는 행위도 막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행적이 묘연했다.

“나는 이딴 곳에 있을 수 없으니 당장 로움족 놈들을 내치거라!”

고민에 빠져 있는데, 건너편에서 거센 항의 소리가 들렸다. 나는 깜짝 놀라서 그쪽으로 달려갔다.

“무슨 일이냐?”

내가 나타나자 기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발론 후작께서 탄시놀로 의심되어 모시고 왔사온데….”

기사들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기사들도 대부분 귀족 출신이기는 하지만 발론 후작은 텐스테온의 친척으로, 현재 황위 계승 순위 5위였기 때문에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나이도 20대 중반밖에 안 되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황위 계승 확률이 더 높았다.

물론 블레이크가 굳건한 상황에서 이런 확률을 따진 들 아무런 의미도 없지만 말이다.

어쨌든 리차드가 그를 노릴 확률이 높았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건만, 결국 탄시놀에 걸리고만 모양이었다.

모든 일의 원흉은 리차드였으니 환자를 탓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발론 후작은 우리 쪽에서도 각별히 신경을 쓰며 탄시놀을 예방하는 마도구까지 전해주었던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솔직히 허탈하고 화도 났다.

기사들이 탄시놀을 예방하는 마도구를 건넸을 때도 모양을 트집 잡으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었다고 했지.

지금 그에게서는 예방 도구를 찾아볼 수 없었다.

수량이 부족했음에도 예방 차원에서 특별히 지급했는데, 제대로 착용하지도 않은 게 분명했다.

“비 전하, 저는 천한 로움족 놈들과 한시도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없습니다!”

발론 후작은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기는커녕 목소리를 높였다.

탄시놀에 걸린 환자는 신분에 상관없이 모두 이곳에 격리당했다.

이건 탄시놀이 발생한 이후 세운 규칙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론 후작은 로움족과 같은 공간에 머무는 것을 격렬히 항의하고 있었다.

그가 특이한 건 아니었다. 이런 항의는 매일같이 들어왔다.

귀족뿐 아니라 평범한 제국민들도 로움족과 함께 있기 싫으니 쫓아내 달라고 다짜고짜 억지를 쓰고는 했다.

“후작 각하, 신분과 성별에 따라 다른 건물을 쓰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른 기사가 후작을 달래려 했지만 그는 표정을 풀지 않았다.

“탄시놀을 일으킨 로움족을 살려두는 것도 모자라서 치료까지 해주다니! 그놈들을 모두 없애지 않는 한 나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럼 꺼져.”

주변의 공기를 냉각시키는 싸늘한 목소리에 우리는 뒤를 돌아봤다.

블레이크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전하,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십니까? 저는 제국을 생각하여 정당한 의견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발론 후작이 섭섭함을 표했지만, 블레이크는 듣지 않고 기사들에게 명했다.

“치료받을 생각이 없나 보군. 여봐라, 하멜 후작을 당장 창고에 가둬라.”

“네, 전하.”

기사들은 고개를 숙이며 그의 명을 따랐다.

“놔라! 전하, 고작 로움족 때문에 저를 이리 대하실 수는 없습니다!”

발론 후작이 항의했지만 블레이크는 무시하며, 다른 기사들에게 명했다.

“앞으로 신분 고하에 관계 없이 명을 불복하고, 탄시놀과 관련된 규정을 따르지 않는 자는 모두 처벌해라.”

“네. 전하.”

블레이크는 나의 손을 잡았다.

“저런 놈들까지 부인이 치료해줄 필요 없어. 내가 처리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마.”

탄시놀이 발생하고 매일 같이 고군분투했지만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게다가 훈련소 내부에서도 끊임없이 문제가 발생했다.

로움족과 같은 공간에 있기 싫다고 반발하는 사람, 자택에 있겠다고 우기는 사람, 나의 말을 무시한 채 멋대로 빛의 마나석을 사용했다가 증상이 악화되는 사람 등 하루에도 매번 사고가 터지고 있었다.

더는 환자라고 해서 용납해 주기가 힘들었다.

“알았어. 맡길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지켜주어야 했던 작은 소년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누구보다도 든든한 의지가 되었다.

***

나는 착잡한 마음을 안고 슐리아의 방으로 향했다.

탄시놀의 증상이 나타나면 즉시 알리라고 엄명을 내린 덕분에, 리차드가 병을 일으키는 것에 비해서는 환자가 적은 편이었다.

하지만 카멜리아 고아원은 유독 피해가 컸다.

미셸이 슐리아의 병을 가벼운 감기라고 판단하여 서둘러 조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로선 선의로 한 행동이었다.

로움족이 탄시놀에 걸릴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으니, 더욱 조심스러웠을 거다.

하지만 로움족에 대한 적의로 똘똘 뭉친 톰의 제보 덕분에 더 큰 재앙이 일어나는 걸 막았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결과적으로 슐리아를 비롯해 그날 그녀와 대화를 나눈 로움족의 아이들과 선생님들도 대부분 탄시놀에 감염되었고, 사람들은 카멜리아 고아원과 로움족을 병의 원인으로 지목하며 증오를 불태우고 있었다.

천 년 전에 필립이 만들어낸 혐오의 굴레가 언제쯤 사라질는지….

나는 결계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슐리아의 방으로 들어갔다.

훈련소에 있는 환자들 중에서도 슐리아의 상태는 가장 심각했다.

게다가 아직도 그녀의 몸에서는 뒤틀린 마나가 흘러나왔기 때문에 다른 곳보다도 결계를 철저하게 쳐야 했다.

또한 나와 블레이크를 제외하고 다른 사람의 출입도 금했다.

슐리아의 증상이 너무 심각해서 예방 도구를 착용해도 전염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최대한 많은 시간을 그녀와 함께 있어 주고 싶었다.

환자들이 워낙 많은 데다가 치료법까지 연구하느라 바빴지만, 조금이라도 시간이 나면 슐리아의 방을 찾았다.

“슐리아, 미안, 빨리 오려고 했는데 조금 늦었네.”

슐리아는 침대에 누운 채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이제 제대로 앉아 있는 것도 힘들 정도였다.

“비 전하, 제가 나가야 하나요?”

발론 후작이 항의하는 소리를 들었구나….

아무래도 결계에 방음 마법을 추가해야 할 듯했다.

“아니야. 이상한 사람이 하는 말이야. 신경 쓸 거 없어. 황태자 전하께서 혼내 주셨어.”

“비 전하는 황태자 전하랑 결혼했죠?”

“응.”

“언제 했어요?”

“전하가 8살이고 내가 10살 때.”

“루오 오빠도 이제 10살인데.”

“루오?”

“칼루오 오빠요. 저는 루오 오빠랑 결혼할 거예요.”

슐리아가 배시시 웃었다.

나는 그녀의 작은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랬구나.”

“그런데 오빠는 싫대요.”

“왜 그랬을까? 우리 슐리아가 이렇게 예쁜데.”

“제가 친동생 같대요. 그래서 싫대요.”

슐리아의 입술이 뾰로통하게 튀어나왔다.

“싫은 게 아니야. 가족처럼 사랑한다는 뜻이겠지.”

“그런데 왜 날 죽이려고 했을까요?”

“뭐…?”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리차드 때문에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슐리아도 알고 있었던 건가?

“우리는 함께였어요. 행복했어요. 코닌스 오빠가 마탑으로 갈 거라고 했어요. 카란 언니도 함께 간다고요. 마탑은 로움족을 차별하지 않는대요. 언니랑 오빠가 성공하면 우리도 데려가겠다고 했어요.”

코닌스와 카란…. 설마 그들이 리차드의 옆에 있던 흑마법사들인가?

“정말 행복했는데, 사람들이 우릴 죽였어요. 우리가 탄시놀을 일으켰다고 했어요. 우린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들어주지 않았어요.”

슐리아는 눈을 감은 채 말을 이어갔다.

나에게 말을 거는 것이 아니라 혼자서 잠꼬대를 하는 것도 같았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죽었어요. 리차드 님은 우릴 도와줬어요. 그래서 우리는 리차드 님을 따라갔어요.”

“…….”

역시 그 두 사람이 코닌스와 카란이었나….

“루오 오빠랑 나는 고아원에 갔어요. 하지만 꼭 데리러 올 거라고 했어요. 그런데 왜 카란 언니는 나를 죽이려 한 걸까요?”

“카란이 너에게 무슨 짓을 한 거니?”

내가 물어보았지만, 그녀는 대답 대신 허공 위로 손을 뻗었다.

“카란 언니, 왜 그런 거야? 나한테 왜 그랬어? 오빠는 왜 나를 두고 떠났어? 왜? 나 다 알아. 눈을 감고 자는 척했지만 다 안다고.”

슐리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어린 소녀를 위로해줄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 내가 말을 해도 슐리아는 듣지 못할 거다.

***

슐리아의 상태는 심각해져서 전혀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밤새 치료법을 연구했지만,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않았다.

당장 리차드를 잡을 수 없다면, 어떻게든 빛의 마나를 체내에 안전하게 주입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섣불리 빛의 마법을 사용했다가는 오히려 상태가 악화될 것이다. 그렇다고 마나석을 쓰는 것은 더 위험했고, 약초 역시 전혀 듣지를 않았다.

“앤시아, 아직 여기 있었어?”

책 속에 파묻혀 있던 나는 블레이크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조금 볼 게 남아서. 그런데 이제 온 거야?”

“응.”

그는 가볍게 대답하며, 나의 얼굴을 감쌌다.

“쉬어 가면서 해. 계속 무리하고 있잖아.”

“누가 할 소리인데.”

블레이크는 리차드를 찾느라 밤새 수도를 수색하고 있었다.

하루가 멀다고 탄시놀이 발생하고 있었다.

리차드와 함께 수배된 여자 흑마법사나, 앳된 얼굴의 검은 머리 남자를 보았다는 증언도 이어졌다.

리차드가 그들을 통해 탄시놀을 퍼트리고 있는 거다.

그는 빛의 마나를 지니지 못한 데다가 수배자의 신분이니 천 년 전처럼 대범하게 움직일 수는 없을 거다.

아마도 수도 어딘가에 숨어서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겠지.

“내 걱정은 할 필요 없어.”

블레이크의 얼굴에 자신감이 흘러넘쳤다.

나를 안심시키려고 하는 말이나 오만한 치기가 아니었다. 순수한 실력을 바탕으로 한 자신감이 그를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리차드의 흑마법사에 대한 단서를 찾았어.”

“슐리아의 말대로였어?”

“응. 그런데 좀 이상한 게 있었어.”

“이상하다니? 뭐가?”

“슐리아는 숲속에 숨어 살았어. 그리고 주변 영지에서는 그곳에 로움족이 있다는 사실조차도 몰랐다고 했어.”

“그런데 어떻게 탄시놀이라며 습격을 한 거지?”

“그때 마을 사람 한 명이 죽었나 봐. 다들 이유를 몰라서 설왕설래하는데, 한 남자가 나타나서는 탄시놀에 걸린 거라고 말했대.”

“…….”

“숲속에 숨어 사는 로움족이 병을 옮긴 거니 당장 처리해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마을 전체에 탄시놀이 퍼질 거라고 했나 봐. 그래서 그 남자가 알려준 곳으로 갔더니 진짜로 로움족이 나온 거지.”

“설마 그 남자가…?”

“얼굴은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했어. 게다가 반년 뒤에 마음 사람들이 단체로 죽는 바람에 생존자도 얼마 남지 않았고. 하지만 거의 확실하다고 생각해.”

코닌스는 마탑에 들어갈 만큼 마법의 재능이 뛰어났다. 카란도 마찬가지였다.

리차드는 이들의 능력을 탐냈고, 일부러 다른 사람들을 이용하여 그들의 부모가 살해당하도록 만들었다.

그래야 코닌스와 카란이 마탑에 가는 걸 포기하고 자신에게 충성을 바칠 테니까.

그리고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어린 칼루오와 슐리아를 고아원에 보내서 보살피는 척한 거다.

만약 그들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언제든 인질로 써먹을 의도도 있었겠지.

톰을 데려와서 고아원에 분란을 일으킨 것도 이런 이유였을 거다.

칼루오와 다른 로움족 아이들이 끊임없이 차별과 소외감을 느끼도록 유도하며 세상에 대한 증오를 심어줄 목적이었겠지.

그래야 자신의 입맛대로 다룰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고아원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기 때문에 안심했다.

그가 순수한 마음으로 고아원을 운영하진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런 비열한 짓을 꾸미고 있었을 줄이야.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이용하고 절망을 안긴 건지.

“그 마을 사람들은 왜 죽은 거야?”

“본인들은 로움족을 죽인 일 때문에 마족에게 습격을 당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하지만 실제 원인은 흑마법이었던 모양이야.”

“카란과 코닌스가 범인일까?”

“그럴 확률이 높지.”

그들은 복수를 한 걸까? 아니면 자신이 한 짓을 숨기고 증인을 죽이려던 리차드의 계략에 다시 한번 이용당한 걸까?

어느 쪽이든 리차드는 최악의 인간이었다.

행복하게 살 수 있었던 아이들의 미래를 짓밟고 결국 살인자로 만들었다.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이번에는 기필코 그의 악행을 모두 끝내고 말 것이다.

***

일어나자마자 서재에 틀어박혀서 탄시놀의 치료법을 연구하는데, 노크와 함께 첼시가 안으로 들어왔다.

“비 전하, 귀족들의 병실 위치를 변경하는 게 어떨까요?”

“왜? 또 누가 항의해?”

“그런 게 아니라, 새로운 환자가 들어왔는데 남성 귀족들이 머무는 건물은 이미 포화 상태라서요.”

첼시는 업무 능력이 뛰어나서 많은 의지가 되었다.

만약 첼시가 아니었다면 환자의 치료에만 온전히 집중하기 어려웠을 거다.

“또 남자야?”

평민들은 남녀의 비율이 비슷했지만, 귀족 환자 중에선 남자들의 비중이 월등히 높은 편이었다.

“네. 남자 세 명과 여자 한 명입니다. 이번에는 상태가 꽤 심각합니다. 가족 전체가 걸렸습니다. 물론 정확한 진단은 비 전하께서 내려주셔야 하지만요.”

“어딘데?”

“샤르딘 백작 가문입니다.”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샤르딘 부인께서 탄시놀이 걸린 거야?”

첼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다만 샤르딘 부인을 제외한 다른 가족분들은 모두 탄시놀에 걸리셨습니다. 샤르딘 백작과 두 명의 아드님, 그리고 따님까지도요.”

샤르딘 부인이 걸리지 않았다고 해서 안심할 상황은 아니었다. 지금쯤 그녀는 자신이 걸린 것보다 훨씬 고통스러울 거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귀족과 평민 할 것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탄시놀에 걸렸지만, 나와 친했던 사람들은 병의 마수를 피해갔다.

콜린을 제외하고는 걸린 사람이 아예 없다고 해도 무방할 수준이었다.

리차드가 나를 배려하면서 탄시놀을 퍼트렸을 리도 없는데 말이다.

잠깐…!

“첼시, 세피아궁의 티 파티에 참석했던 명부를 가져와 봐!”

“네. 비 전하.”

나는 첼시가 가져온 명부를 빠르게 확인했다.

역시나 적었다.

마르셀 부인을 비롯한 몇 명을 제외하면, 티 파티의 참석자들은 거의 탄시놀에 걸리지 않았다.

물론 집안 자체에 탄시놀이 퍼지지 않은 사람도 많았지만, 샤르딘 부인처럼 가족 중에 환자가 나왔음에도 자신만 비켜 간 경우도 제법 있었다.

그리고 탄시놀을 피해 간 사람이 또 한 명 있었다.

바로 텐스테온이다.

하워드 켄스웨이는 창문 하나 없는 좁은 지하 감옥에서 탄시놀의 마나를 터트렸다.

여신의 힘을 지닌 블레이크가 걸리지 않은 건 당연했지만, 텐스테온 역시 병을 피해갔다.

티 파티, 텐스테온….

그리고 텐스테온은 있지만 콜린은 해당하지 않았던 것….

“그거야!”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뒤, 밖으로 뛰쳐나갔다.

“비 전하, 어딜 가십니까!”

“마르쉘 부인을 만나야겠어!”

나는 마르셀 부인의 방으로 빠르게 뛰어갔다.

“비 전하, 저 좀 살려 주십시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울부짖었다.

마르쉘 부인은 탄시놀의 증상은 미약한 편이었지만, 병에 대한 공포가 극심했다.

“마르셀 부인 진정하십시오.”

첼시가 냉정한 목소리로 말하자, 마르셀 부인은 당황하며 고개를 숙였다.

“부,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송구합니다.”

“아니에요. 두려우신 게 당연하죠.”

나는 일단 그녀를 달랬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인께 중요한 질문을 드리려고 하는데, 솔직히 답변해주실 수 있나요?”

“네. 물론이죠.”

그녀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세피아궁에서 티 파티가 있던 날, 택리차를 드셨나요?”

나의 질문을 받자마자, 마르셀 부인의 동공이 급격하게 흔들렸다.

“책망하려는 게 아닙니다. 중요한 질문이니 솔직히 말씀해 주세요.”

“그, 그게…. 아니오.”

마르셀 부인은 주저하다가 결국 고개를 저었다.

“마시는 척은 했지만, 진짜로 먹지는 않았습니다. 그게 왠지 꺼려져서…. 죄송합니다. 비 전하께서 직접 키우시기까지 하셨는데…. 정말로 송구합니다.”

그녀는 거듭 사과했다.

“아니에요. 오히려 솔직히 말해줘서 고마워요.”

나는 그날 티 파티에 참석했음에도 탄시놀에 걸린 다른 부인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그녀들은 모두 택리차를 마시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추측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답은 ‘택리차’였다.

텐스테온과 티 파티에 참석한 귀부인들은 모두 택리차를 마셨고, 탄시놀에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택리차를 마시지 않았던 콜린과 다른 귀부인들은 병에 걸렸다.

택리차가 탄시놀을 막아준 것이다.

탄시놀이 발생하고 처음으로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드디어 탄시놀을 치료할 방법을 찾은 것이다.

나는 당장 황궁에서 택리차를 가지고 와서 환자들에게 처방했다.

하지만 반응은 두 가지로 갈렸다.

“차도가 있습니다!”

“송구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습니다.”

어째서 이런 차이가 생기는지, 그 해답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은한이 나에게 주었던 택리차를 마신 사람은 아무런 차도가 보이지 않았고, 나와 블레이크가 빛의 마나로 키운 택리차를 마신 사람은 탄시놀이 진정되기 시작했다.

택리차에는 기본적으로 용력이 담겨 있었을 거다.

그리고 나와 블레이크가 마법으로 택리차의 찻잎을 키우면서, 그 안에 용력과 빛의 마나가 함께 공존하게 된 것이다.

어둠의 문에서 세르가 나를 공격했을 때, 백한의 팔찌가 공격을 막아주었었다.

그가 백룡의 선택을 받은 창의 대신관이라고는 하나 직접 나선 것도 아니고, 팔찌만으로 그 힘을 막아낸 것이다.

마나보다 용력이 더 강해서가 아니다.

용력과 마나는 그 본질이 다르며, 서로를 방해하는 성질이 있는 거다.

필립은 빛의 마나를 비틀어서 탄시놀을 만들었으며, 혹여 치료를 위해 빛의 마법을 사용하면 오히려 반동이 일면서 병이 악화되도록 장치해 놨다.

하지만 택리차의 용력이 그 시스템을 망가트렸다.

그리고 빛의 마나가 체내에 진입할 수 있도록 도왔다.

용력 덕분에 빛의 마나는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탄시놀의 핵으로 진입할 수 있었고, 비틀림을 약화시키며 병에 차도가 나타난 것이다.

아마 평범한 빛의 마나나, 빛의 마나석에서 추출한 마나였다면 이런 극적인 효과는 나타나지 않았을 거다. 탄시놀까지 도달하더라도 오히려 악영향을 끼칠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이건 탄시놀을 만든 것과 같은 여신의 힘이었기 때문에 확실한 효과가 나타났다.

필립의 마법으로 인해 한껏 뒤틀려 있던 빛의 마나들이 본래의 맑았던 여신의 마나에 닿자, 자신들도 원래의 모습을 찾으며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해냈구나. 정말 축하해.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

블레이크가 나의 어깨를 다정하게 감쌌다.

“고마워. 하지만 조금 더 일찍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유독 귀족 출신 환자들만 성비가 맞지 않았다. 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왜냐면 천 년 전에도 그랬으니까.

필립은 자신의 경쟁자나 위협이 되는 정적들을 우선적으로 제거했고, 결과적으로 남자들이 탄시놀이 더 많이 걸렸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리차드는 황위 계승 순위가 높거나, 차후 자신이 황제가 되는 데 걸림돌이 될 만한 인물들을 미리 제거할 생각일 테니, 귀족들 중에서 유독 남자 환자가 많은 것을 많은 것을 알면서도 당연하게 생각하며 의심하지 못했던 거다.

필립과 리차드는 같은 영혼을 가졌지만 엄연히 다른 사람이다.

과거를 교훈 삼는 건 중요하지만, 천 년 전의 기억에 얽매이는 것은 좋지 않았다.

“충분히 잘했어. 부인은 스스로한테 너무 박해. 천 년 동안 아무도 하지 못한 일을 해낸 거야. 나의 저주를 풀고, 탄시놀의 치료법까지 찾았잖아. 좀 더 칭찬하고 기뻐해도 돼.”

“응.”

블레이크의 말대로다.

그리고 지금은 후회보다는 탄시놀의 치료에 전념할 때였다. 치료법을 찾았다고 끝이 아니다.

지금 당장 환자들을 모두 치료할 정도로 많은 택리차를 만들어야 했다.

***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한 끝에 찻잎을 차로 우리는 것보다는 생으로 직접 먹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그리고 나는 즉시 환자 모두에게 찻잎을 생으로 먹도록 처방을 내렸다.

하지만 콜린은 쓰디쓴 택리차 찻잎에 기겁을 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조금 늦게 낫더라도 차로 마시도록 하겠습니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애들도 다 먹는데 엄살 피우지 마세요.”

유서까지 남길 정도로 심각했으면서, 이제 나을 수 있다고 하니 맛까지 따질 정도로 여유가 생겼다.

사람이란 게 참 간사하다니까.

하지만 그의 엄살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의 소식을 들은 텐스테온은 크게 화를 내며 서신을 보내왔고, 콜린은 희게 질린 얼굴로 찻잎을 우걱우걱 입에 넣기 시작했다.

도대체 편지에 뭐라고 쓰여 있었길래 저러지….

어쨌든 결과적으로 택리차 찻잎을 가장 열심히 복용한 사람은 콜린이었고, 덕분에 회복도 빨랐다.

나는 콜린의 손을 잡고 몸 상태를 확인했다. 뒤틀려 있는 탄시놀의 마나는 완벽하게 사라진 상태이었다.

“축하드려요. 이제 다 나으셨어요.”

“감사합니다. 비 전하.”

“아니에요. 그동안 쓴 찻잎 드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이제 그 지독한 맛과도 해방이군요.”

“생명을 구한 맛인데, 평가가 너무 박하신 거 아니에요?”

“아무리 생명의 은인이라 한들 그걸 맛있다고 할 수는 없군요.”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로 끔찍했나 보다.

“이제 자택으로 돌아가셔서 좋아하시는 음식을 마음껏 드세요.”

“아닙니다. 너무 많이 쉬었으니, 황궁으로 돌아가 봐야죠.”

“아버님께서 쉬라고 하셨어요. 당분간은 푹 쉬세요.”

“네.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콜린은 그사이 조금 야위었긴 하지만 혈색도 돌아왔고, 탄시놀의 후유증도 남지 않았다.

완전히 건강해진 모습을 보자 저절로 미소가 나왔다.

“그 편지는 버리셨죠?”

나는 전에 콜린이 썼던 유서에 대해서 물었다. 그러자 그는 단호하게 답했다.

“네. 흔적도 없이 찢어버렸습니다.”

콜린이 싱긋 웃었나. 나 역시도 미소를 지었다.

하나둘 완치자가 나오고 있었다. 수도 전역에 드리웠던 죽음의 그림자 역시 사라져 가고 있었다.

***

며칠 전만 해도 죽음의 공포로 아우성을 치던 수도가 이제는 축제 분위기였다.

로움족은 물론 로움족을 감싸는 황실까지 무차별적인 비난을 가하던 신문들도 하루아침에 태도를 바꾸었다.

그들은 이제 탄시놀의 치료법을 찾은 황태자비를 찬양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리차드는 아무 말 없이 신문 기사를 보고 있었다.

카란과 코닌스는 그의 눈치를 살폈다.

“치료법을 찾았다고 한들 상관없습니다. 더 많은 사람에게 퍼트리면 그만입니다. 제가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카란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

제국을 탄시놀로 뒤덮겠다는 리차드의 계획이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리차드 님께서 황제가 되어야 한다.’

카란의 머릿속에는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조급한 카란과 달리 코닌스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리차드도 마찬가지였다.

계획이 실패한 상황에서도 그의 표정은 여유로웠다. 오히려 기뻐 보이기까지 했다.

“그럴 필요 없다.”

리차드는 신문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이제는 쓸모없는 일이다.”

탄시놀은 치료할 수 없는 불치병이었다.

걸리는 순간 오직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천 년 동안 제국을 공포로 몰아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치료법과 예방법이 나왔다. 이제 탄시놀은 감기와 다를 바가 없었다.

완전히 효용 가치를 다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를 쓰고 탄시놀을 일으킨들 무의미한 발악일 뿐이었다.

“대단하군.”

리차드는 신문에 있는 앤시아의 초상화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천 년 전부터 그렇게 노력하더니, 결국은 탄시놀의 치료법을 찾아내었다.

정말로 대단한 여자였다.

앤시아의 옆에 나란히 있는 블레이크의 초상화가 무척 거슬렸지만, 뭐 이제는 상관없었다.

리차드는 코닌스를 바라보았다.

“코닌스.”

“네, 주군.”

“너에게 중요한 명령을 내리겠다. 반드시 성공하여야 한다.”

이것이 코닌스에게 내리는 마지막 명령이 될 것이다.

탄시놀의 치료법이 나온 것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아직 마지막 계획이 남아 있다.

천 년 전 직접 세운 제국을 다시 차지하고, 앤시아를 내 여자로 만들 순간이 온 것이다.

***

블레이크와 나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전과는 정반대의 이유 때문이었다.

이제 탄시놀에 걸리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혹여 의심되는 사람이 있어도 결국 아닌 것으로 판명 났다.

대신 완치자들이 줄을 이었다.

병에 걸린 것을 확인할 때처럼, 완치된 것을 확인하는 것도 나와 블레이크의 몫이었다.

우리는 사람들의 상태를 체크하고, 완치된 환자를 퇴소시키느라 매일매일 분주했다.

“도와줄게.”

나는 블레이크에게 다가갔다.

여성 환자는 내가, 그리고 남성 환자는 블레이크가 담당하기로 했는데, 아무래도 여성 환자의 수가 적다 보니 내 업무가 훨씬 일찍 끝나곤 했다.

“괜찮아.”

“도와준다니까.”

“괜찮대도. 끝났으면 어서 가서 쉬어. 요즘 못 쉬었잖아.”

그건 내가 할 말이었다. 블레이크야말로 택리차 찻잎을 키우고 환자를 돌보는 것도 모자라, 리차드를 수색하는 일까지 도맡고 있어 몸이 열 개여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남편 님이야말로 쉬셔야죠.”

나는 장난스럽게 말하며, 그가 앞으로 돌아야 할 환자 명단을 뺏었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내 손에 든 명단을 도로 가져갔다.

“정말 괜찮으니까, 내가 할게.”

“힘들잖아. 나눠서 해.”

“네가 다른 놈이랑 손잡는 거 싫어.”

“뭐? 환자잖아.”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싫어. 처음부터 싫었는데 참았어. 하지만 더는 안 돼.”

그는 단호하게 말하면서 명단을 가리켰다.

“앞으로 3명밖에 안 남았어. 그러니까 돌아가서 쉬어. 안 그러면 나 신경 쓰여서 아무것도 못 해.”

그가 비 맞은 토끼처럼 처량한 눈으로 부탁하자 나도 더는 고집 피울 수가 없었다.

“알았어. 대신 힘들면 말해.”

“걱정하지 마.”

나는 거듭 당부한 뒤, 훈련소 뒤편에 있는 정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훈련소의 정원은 온통 택리차밭이 되어 있었다. 지금 남아 있는 환자들을 치료할 정도의 양은 이미 충분했다.

치료법이 나온 이상 리차드는 더 이상 탄시놀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계속 탄시놀이 발생한다 한들 그가 원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었다. 상대는 리차드 카실이다. 또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른다.

나는 새로 씨앗을 심어놓은 자리에 빛의 마나를 흘려보냈다. 그러자 곧 싹이 트며 푸른 잎이 쑥쑥 자라기 시작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리차드는 어째서 이런 방법을 썼던 걸까?

천 년 전과는 상황이 전혀 달랐다.

그때는 락슐과 황제, 황족들이 모두 목숨을 잃었기 때문에 황위를 계승할 사람이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블레이크가 있었다.

여신의 힘을 지닌 블레이크는 탄시놀에 걸리지 않는다. 텐스테온과 다른 황족들이 목숨을 잃은들 블레이크가 건재하게 있는 한 리차드가 황제가 될 가능성은 없었다.

게다가 필립은 어찌 되었든 황제의 아들이었고, 표면적으로는 어떤 죄도 저지르지 않았다. 하지만 리차드는 황태자의 독살을 시도하고 귀족을 살해한 중죄인이었다.

리차드는 탄시놀이 발생한 원인을 로움족에게 돌리며 비난의 화살을 그들에게 겨누려고 했다. 하지만 그건 곧 자기 자신을 찌르는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이번 사태로 인해 카멜리아 고아원을 없애고, 고아원을 설립한 리차드 역시 단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드높았다.

처음에는 단순히 그가 천 년 전의 일을 반복한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탄시놀이 진정되고 난 뒤 천천히 되짚어보니,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리차드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설마 탄시놀을 일으킨 진짜 목적이 따로 있는 걸까?

“앤시아.”

나는 블레이크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왔어.”

“쉬라니까.”

“쉬는 중이었어.”

나는 미소를 지으며 블레이크를 바라보았다. 탄시놀이 발생한 이후 한시도 쉬질 못했기 때인지, 볼살이 쏙 들어갔다.

가뜩이나 호리호리한 편이었는데 더 마른 모습을 보니 가슴이 아팠다.

“이번 일이 끝나면 많이 먹자. 내가 맛있는 거 해줄게.”

“부인이 해주는 거야?”

블레이크가 눈가를 접으며 웃었다.

“응. 삼시 세끼 만들어 줄게.”

우리 남편 가둬놓고 매일 맛있는 밥만 먹이고 싶다.

치료제가 나와서 그런지 환자들도 한결 여유가 생겼다.

귀부인들은 요즘 들어 블레이크가 더 잘생겨진 것 같다며, 나에게 부럽다는 말을 쏟아냈다.

하지만 나는 덜 잘생겨도 좋으니까 블레이크가 조금 포동포동해졌으면 좋겠다. 볼살도 찌고 말이다.

건강한 게 최고다. 그리고 난 통통한 편이 좋다.

어렸을 때 한창 많이 먹고 오동통해졌을 때 무척 귀여웠었는데….

“부인, 나를 살찌우려고?”

“응. 찌울 거야. 아주 많이.”

“왜? 잡아먹으려고?”

그의 붉은 눈동자가 새초롬하게 빛났다. 한낮의 푸른 차밭과 어울리지 않게 눈빛이 요염했다.

“응.”

“정말?”

블레이크가 나를 또렷이 직시했다. 오늘은 그의 농담을 당당히 받아칠 생각이었지만 결국은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몰라.”

“모르면 내가 알려줄까?”

“어…?”

“어떻게 잡아먹어야 하는지 알려줄게. 오랜만이니까.”

그의 손이 나의 얼굴을 부드럽게 스치며 귓바퀴를 문질렀다.

목소리에 꿀을 발라놓은 듯 말을 한마디 한마디 할 때마다 끈적한 감각이 전신을 휘감았다.

“이, 이번 일이 끝나면…. 끝나면 잡아먹을 거야!”

내가 앙칼지게 뱉자, 블레이크가 낮게 웃으며 느릿하게 손을 뗐다.

“어서 끝내야겠네.”

그의 손이 떨어져 나갔음에도 귓가에는 열기가 남아 있었다.

나는 왠지 민망해져서 고개를 돌렸다. 그와 눈을 마주치는 것이 갑자기 부끄러웠다.

하지만 할 말은 해야 했다.

“너무 서두르진 마. 리차드가 또 무슨 짓을 벌일지도 몰라. 조심해야 해.”

나는 조금 전에 떠올린 의문점을 블레이크에게 말하려 했다.

그때 에드온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이냐?”

“리차드 카실이 신전의 마나석 창고를 습격했다고 합니다!”

“뭐?”

블레이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나 역시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리차드 카실이 노리는 건 분명 ‘빛의 마나석’일 거다.

전생의 기억을 찾았다면 리차드는 빛의 마법을 쓰는 방법 역시 알아냈을 거다. 하지만 기본적인 마나가 없으니 사용할 수는 없었겠지.

도망치면서 마나석을 구했다고 한들, 마나석에서 뽑아낼 수 있는 마나에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신전을 습격해서 다량의 마나석을 얻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막아야 해.”

“응.”

블레이크 역시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곧장 에드온과 함께 신전으로 가려고 했다.

“나도 같이 가.”

“아니야. 부인은 여기 있어.”

“하지만….”

“여기서 환자들을 지켜줘.”

블레이크가 내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내가 위험할까 봐 저러는 거다. 하지만 그의 말도 맞았다.

“조심해야 해.”

“걱정하지 마.”

블레이크는 나의 손을 힘주어 잡은 뒤, 훈련소 밖으로 나갔다.

***

신전을 습격한 건 리차드의 마지막 발악일 거다. 성기사와 황궁 기사단, 그리고 블레이크까지 있는데 리차드 한 명을 잡지 못할 리가 없다.

그래, 걱정할 거 없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심장이 왠지 불안하게 뛰었다.

“비 전하, 왜 그러세요?”

“아니야. 아무것도.”

나는 빙그레 웃으며 슐리아를 바라보았다. 의식을 제대로 차리지도 못했던 아이가, 이제는 앉고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다른 사람보다 치료 속도는 늦었지만, 그래도 점점 좋아지고 있었다.

“비 전하, 저 정말로 나을 수 있겠죠?”

“그럼. 곧 다른 친구들이랑 함께 놀 수 있을 거야.”

“루오 오빠도요?”

“…….”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런데 슐리아가 나의 손을 치우더니 갑자기 침대 아래로 내려갔다.

“슐리아…?”

나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슐리아는 오히려 방 밖으로 뛰어갔다.

“슐리아!”

나는 화들짝 놀라서 슐리아를 쫓았다.

슐리아는 아직 완치되지 않았다. 치유되는 중이라고는 해도 다른 사람보다 강한 탄시놀이 남아 있었다.

결계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

“슐리아!”

착하고 얌전한 아이였다. 지금껏 그녀가 방 밖으로 나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리 불러도 내 말을 듣지 않았다.

목청이 터져라 외쳐도 그녀는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게다가 걷는 속도가 무척 빨랐다. 내가 달려가도 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이는 뛰지 않았다. 오히려 천천히 걷고 있었다.

슐리아가 빠른 것이 아니다. 공간이 뒤틀려 있는 거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긴 어디지?’

훈련소였지만 훈련소가 아니었다. 복도의 공간이 완전히 뒤틀려 있었다.

그리고 균열이 인 공간에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칠흑같이 검은 머리카락, 욕망을 담은 붉은 눈동자, 그리고 목에 남은 오래된 상처.

“리차드….”

“오랜만이야. 라온텔.”

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역시 전생의 기억을 찾았구나.”

“새삼스럽게. 이미 알고 있었잖아. 그렇지 않나?”

그는 뻔뻔하게 답했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숨길 생각이 꿈에도 없어 보였다.

나 역시 리차드와 한가롭게 대화 따위를 나눌 생각은 없었다.

빛의 마나석으로 짜낸 마나를 이용하여 공간을 비튼 건가? 게다가 내가 없는 사이 슐리아에게 마법을 걸어서 이쪽으로 오도록 유인을 했구나.

나는 매일 슐리아를 찾았다. 하지만 어제까지도 그런 조짐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신전의 창고가 습격당했다고 난리가 난 사이 모든 일을 꾸민 거겠지.

하지만 헛된 발악이었다. 천 년 전과 달리 지금은 나의 실력이 리차드보다 훨씬 강했다.

“물론이지. 이런 역겨운 짓을 할 인간이 너 말고 또 누가 있겠어?”

나는 그의 말을 적당히 응수하며, 오른손에 빛의 마나를 응축시켰다. 이대로 리차드의 심장을 꿰뚫어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리차드는 내 생각을 짐작하고 있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공간이 다시 한번 뒤틀리더니, 순식간에 슐리아가 그의 옆으로 이동했다.

리차드는 어린아이의 목에 칼을 들이댔다.

“허튼짓하지 않는 게 좋아. 내가 어떤 인간인지는 네가 가장 잘 알잖아. 안 그래, 라온텔?”

“…….”

그의 말대로였다. 리차드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라면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어린아이의 생명을 앗아갈 인간이었다.

나는 이를 악물며 손을 내려놓았다. 응축되었던 마나가 뿔뿔이 흩어져 내렸다.

***

나는 눈을 떴다.

하지만 눈을 떴는데도 눈앞이 흐렸다. 전신이 답답하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섬뜩할 정도로 낯익은 감각이었다.

기억났다. 천 년 전, 나의 전신을 구속하던 그 결계와 같다.

설마…!

나는 아직 그 탑 안에 갇혀 있는 건가? 세르의 봉인을 풀고, 블레이크를 만나서 행복하게 지냈던 건 모두 꿈이었나?

나는 화들짝 놀라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도 이곳은 내가 천 년 전에 갇혀 있던 서쪽 탑이 아니었다. 결계는 같았지만, 전혀 다른 장소였다.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방 전체가 빛의 마나석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쏟아지는 마나가 강력한 결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나는 천천히 기억을 더듬었다.

그래, 리차드가 훈련소까지 쳐들어왔었다. 그리고 슐리아를 이용해 나를 협박했다.

나는 그를 공격하는 걸 포기했고, 곧 의식을 잃었다. 그리고 이곳으로 끌려온 것이다.

“정신이 들었나?”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니, 리차드가 문에 기댄 채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슐리아는 어쨌지?”

“걱정하지 마.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그곳에 그대로 놔뒀으니까.”

나는 그의 눈초리를 살폈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상대는 리차드였다. 어떤 짓을 할지 알 수 없었다.

“여긴 어디지?”

“말해도 모를 텐데.”

그는 뚜벅뚜벅 걸음을 옮기며 나에게 다가왔다. 당장 빛의 마나로 그의 심장을 꿰뚫고 싶었지만 강력한 결계 때문에 마법을 쓸 수가 없었다.

게다가 손과 발에도 구속구가 채워져 있었다.

“당장 이거 풀어!”

나는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리차드 카실은 나의 턱을 움켜잡았다.

“너는 언제나 나를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군. 왜지? 락슐 그놈과 내가 다른 게 도대체 뭐냐고!”

“몰라서 물어?”

나는 고개를 거칠게 돌렸다. 그러자 반동으로 인해 리차드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그는 전보다 나를 더 강하게 움켜잡으며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보게 했다.

“나의 머리색 때문인가? 내가 락슐 같은 검은색 머리가 아니라 희한하고 천박한 은발이어서? 그렇다면 이번엔 왜 또 그놈을 택한 거지! 봐! 보라고! 이 검은색 머리카락을 봐! 네가 사랑해 마지않았던 락슐 그놈과 똑같잖아! 그런데도 왜 내가 아니라 황태자 그놈을 택한 거지? 대체 왜!”

리차드가 악을 써댈수록 나의 마음은 차갑게 식어내렸다.

“너는 아직도 그딴 하잘것없는 것에 집착하는 건가?”

“뭐…?”

“애초에 머리색 같은 건 관심 밖이었어. 머리색이든 신분이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내가 백번 천번을 다시 태어나고, 네가 황제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간다 해도 너를 사랑하게 될 일은 없어!”

“…….”

“나는 네가 싫어.”

리차드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화를 내지도 분노하지도 않았다. 그저 핏방울처럼 새빨간 눈동자로 나를 직시할 뿐이었다.

잠시 후 그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 말은 천 년이 지나도 변하질 않는군. 네가 나를 사랑할 가능성은 없는 건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오직 블레이크뿐이야.”

“그래, 그렇군….”

그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어딘지 체념한 듯한 모습이 오히려 더 불안하게 다가왔다.

***

리차드 카실이 신전의 마나석 창고를 습격했다.

신전 사람들은 물론이고, 보고를 받고 온 황궁 기사들까지도 창고를 습격한 남자가 리차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신전에 도착하자마자 그가 가짜임을 알아차렸다.

리차드로 착각하도록 외모를 바꾸는 마법을 걸었을 뿐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블레이크는 사내를 단번에 제압했고, 그에게 걸려 있는 마법도 풀어버렸다. 그러자 사내의 진짜 모습이 드러났다.

아직은 남자라기보다 소년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정도로 앳된 얼굴이었다.

블레이크는 그의 정체가 짐작이 갔다. 소년은 리차드의 흑마법사인 코닌스였다.

코닌스가 리차드인 척 위장한 채 신전을 습격하며, 모든 병력과 시선을 이쪽으로 돌린 것이다.

그렇다면…!

“앤시아가 위험하다!”

블레이크는 황급히 훈련소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앤시아는 사라져 있었다.

“리차드 님이 비 전하를 데려갔어요. 제가, 제 몸이 갑자기 멋대로 움직여서, 비 전하가 저를 불렀는데, 멈추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리차드 님이 나타났어요. 리차드 님은 제 목에 칼을 들이댔어요. 비 전하께서는 저를 구하시려다가….”

슐리아는 계속 울먹였다. 하지만 충격을 받은 상황 속에서도 최선을 다해서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블레이크는 분노하고 자책했다.

‘앤시아를 혼자 두는 게 아니었는데. 앤시아가 같이 가자고 했을 때 말리는 게 아니었는데…. 어떻게든 내 곁에 두었어야 했어.’

7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후회했다. 앤시아가 돌아오고 나서도 절대로 떨어지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런데 또다시 그녀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후회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었다.

당장 앤시아를 찾아야 했다.

블레이크는 리차드가 훈련소를 습격한 방법을 알아냈다. 마법을 통해 공간 자체를 비튼 것이다. 앤시아가 사라진 곳에 마나의 흔적이 역력했다.

빛의 마나가 없는 리차드가 어떻게 이런 상급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을까?

답은 쉽게 나왔다.

코닌스가 아무것도 훔치지 못했음에도 신전 창고에 있는 빛의 마나석의 양이 턱없이 부족했다.

켄스웨이 가문이 다량의 마나석을 횡령한 것이다.

하지만 하워드가 죽고 켄스웨이 가문을 조사했을 때 마나석은 발견되지 않았다. 리차드가 켄스웨이 가문이 착복해두었던 마나석을 훔친 것이다.

그러나 애초에 당당하지 못한 물건이었다. 켄스웨이 가문에서는 마나석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고도 쉬쉬하며 입을 다물었다고 한다.

리차드는 필립의 환생이었다. 여신에게서 빛의 마법을 직접 배웠다.

하지만 마법을 알고 있다고 해도 마나가 없으니 사용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완전히 잘못된 판단이었다.

리차드는 이미 방대한 마나석을 소유하고 있었다.

앤시아가 위험했다. 한시라도 빨리 그녀를 찾아야 한다.

***

감옥에 갇힌 코닌스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두꺼운 철문이 끼익하고 열리며 블레이크가 안으로 들어왔다.

코닌스의 얇은 입술에 힘이 들어갔다. 그에게서 절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느껴졌다.

블레이크는 그의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붉은 눈동자가 코닌스를 또렷이 직시했다. 코닌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사지가 묶이고,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외모가 눈에 들어올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고운 입술에서 나오는 말은 결코 아름답지 못했다.

“당장 그 입을 찢고 뼈를 잘게 부수고 싶지만 참겠다. 그럴 시간조차 아까우니까.”

블레이크의 검이 코닌스의 목을 겨눴다.

“앤시아는 어디 있지?”

“…….”

코닌스는 황태자의 외모에 대한 감상을 지우고 다시 입에 힘을 주었다.

날카로운 칼끝으로 서늘한 살기가 전해졌다.

이대로 목이 꿰뚫릴 것만 같았다.

코닌스가 죽음을 각오하며 눈을 감는 순간, 검이 그대로 바닥에 꽂히며 그의 발을 파고들었다.

“으윽!”

코닌스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은 채 싸늘한 얼굴로 질문을 이어갔다.

“리차드 카실은 지금 어디 있지?”

“…주군을 배반할 순 없다.”

“주군이라.”

블레이크의 입매가 서늘하게 휘었다.

“어째서 그런 역겨운 놈을 따르는 거지?”

“우리 로움족을 위한 세상을 만들어 주실 분이니까!”

리차드에 대한 욕이 나오자, 코닌스는 발끈하여 소리쳤다.

“로움족을 위한 세상이라…. 그래서 탄시놀을 일으켰나? 고아원의 어린아이들에게?”

“…….”

코닌스는 입을 다물었다. 리차드를 위해서 침묵을 지키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할 말이 없었다.

스스로도 이해되지 않았던 일이다. 리차드의 뜻을 따르면서도 머릿속에 계속 의문이 남았다. 그리고 그 의문은 아직도 해소되지 않았다.

“이번에 탄시놀로 인해 사망한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수많은 로움족이 다치고 목숨마저 잃었어. 그 이유는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겠지?”

“…….”

알고 있었다. 카멜리아 고아원과 로움족이 탄시놀의 원흉으로 지목되자 수도는 물론이고 각지에서 무차별적으로 로움족을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심지어 검은색 머리카락처럼 로움족과 외양이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습격을 당하기도 했다.

“이것이 너희가 추구하는 로움족을 위한 세상인가? 너희 가족이 겪은 상처를 남들에게도 똑같이 안겨주는 것을 원하는 건가?”

가족의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코닌스의 머릿속을 뒤덮던 의문들이 한순간에 사라지며 증오가 피어올랐다.

“당신이 뭘 알아! 아무런 죄 없는 가족들을 억울하게 잃는 슬픔을 아느냐고!”

“그래서 가족을 살해한 자에게 충성을 바쳤나?”

“뭐? 그게 무슨…?”

블레이크는 코닌스의 수갑을 풀고, 서류를 던져주었다.

이것은 도망칠 수 있는 기회였다. 아무리 황태자의 검술과 마법 실력이 출중하다고 한들, 맞서 싸우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도망치는 거라면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종이에 쓰여 있는 글을 보는 순간, 코닌스는 도망갈 의지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는 서류를 움켜잡았다. 그리고 빠르게 글자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서류에는 자신들을 습격한 마을 사람들의 증언이 담겨 있었다.

그들은 원래 로움족이 그곳에 사는지도 몰랐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사람 한 명이 갑자기 죽었다.

다들 이유를 몰라서 혼란에 빠져 있을 때였다. 한 남자가 찾아와서 그 사람은 탄시놀 때문에 죽은 거라 하며, 숲속에 숨어 있는 로움족이 탄시놀을 퍼트렸으니 서둘러 처리해야 한다고 부추겼다 한다.

“그 남자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

코닌스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설마 리차드 님이 우리 가족을…?

그는 떠오르는 생각을 지우기 위해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이는 자백을 유도하기 위한 황태자의 거짓말일 수도 있다.

그렇다. 거짓이다. 리차드 님을 음해하기 위해 꾸며낸 거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슐리아에게 탄시놀을 걸고, 고아원 아이들에게도 병을 퍼트리라며 냉혹하게 명령하던 리차드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했다.

로움족이 탄시놀의 원인으로 지목되어 공격을 받는 상황에서도 리차드는 그저 즐거워 보였다.

코닌스의 마음속에 의문이 피어올랐다.

아니, 계속 부정했었지만 알고 있었던 진실이 눈앞에 나타났다.

“마탑에 갈 거라고, 약초 상단에 말했다지?”

“…네.”

코닌스와 마을 사람들은 약초를 팔아서 생활했다.

조금 떨어진 마을에 위치한 약초 상단의 주인은 로움족인 자신들을 차별하지 않고 후한 값을 쳐주며 거래해주고는 했다.

“그 상단이 리차드 카실의 상단과 거래한 걸 알고 있나?”

“뭐라고요…?”

“상단주가 너와 카란의 이야기를 리차드 카실에게 했다고 증언했다.”

“그렇다면….”

“너희 둘의 능력을 탐해서, 가족들을 죽인 거다.”

“…….”

그래, 그때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모든 걸 잃고 절망에 빠졌을 때, 리차드는 기다렸다는 듯 자신들의 앞에 나타났다.

너무나도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게다가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상황을 완벽하게 수습하고, 그들이 필요한 것들을 모두 지원해주었다.

하지만 자신들에게 손을 뻗어준 리차드가 너무 고마워서, 로움족을 위한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그의 말이 절박하게 와닿아서 의구심을 애써 지웠었다.

블레이크는 혼란에 빠진 코닌스를 서늘한 눈으로 내려보며, 그의 발에 꽂혀 있는 검을 뽑았다.

“으윽…!”

날카로운 칼날이 빠져나가자 코닌스는 신음을 삼켰다.

블레이크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날을 다시 코닌스에게 겨눴다.

“이리 알려줘도 제 가족을 살해한 원수에게 충성을 바칠 머저리라면, 더 이상 말로 설득한들 무의미하겠지. 앞으로 셋을 세겠다. 그 안에 황태자비가 있는 곳을 말해라. 하나.”

블레이크는 곧장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코닌스의 머릿속은 마구 뒤엉켰다.

“둘.”

황태자의 말이 거짓일 거 같진 않았다. 하지만 온전히 믿기도 어려웠다. 그의 말이 사실일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리차드가 부모를 죽인 원수라면, 내가 지금까지 한 일은 도대체 뭐지? 나는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리차드 카실은 로움족을 위한 고아원을 만들었다. 그래서 더 믿었다. 하지만 그것 말고 그가 로움족을 위해서 한 일이 대체 뭐지?

오히려 로움족을 위해 나서준 건 황태자비였다. 그녀는 로움족을 차별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치료해 주었고, 결국 치료제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탄시놀 때문에 로움족은 천 년 동안 증오의 대상이 되어왔다. 하지만 이제 드디어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카멜리아 고아원의 아이들이 완치되어 하나둘 고아원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황실에서는 고아원의 안전을 위해서 경비대를 대폭 늘렸다고 한다.

리차드는 그 소식을 듣고 언짢은 듯 미간을 찌푸렸었다.

진정 로움족을 위하는 게 누구지? 로움족을 위해서 지켜야 할 사람이 누구지?

“셋.”

숫자를 모두 셈과 동시에 검을 든 블레이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 순간 코닌스가 입을 열었다.

“비 전하께서 계신 곳을 알려드리겠습니다.”

***

블레이크는 제5 기사단과 함께 코닌스가 말해준 장소로 향했다.

그곳은 노인이 혼자 사는 저택으로, 광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리차드의 무리는 자신을 순수하게 도와주었던 노인을 살해하고 그의 저택을 차지했다고 했다.

가끔 이웃이 찾아와도 리차드가 마법을 써서 노인이 살아 있는 것처럼 꾸민 모양이었다.

코닌스는 사실 노인을 죽였을 때부터 커다란 죄책감을 느꼈다고 증언했다.

그는 자신들의 은신처를 밝힌 것을 시작으로 봇물이 터진 것처럼 마음속의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말을 하면 할수록 자신이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후회의 눈물을 쏟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블레이크의 관심 밖이었다.

“여기 노인의 시체를 찾았습니다!”

기사가 소리쳤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앤시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리차드와 카란의 모습 역시 찾을 수가 없었다.

‘벌써 도망친 건가?’

블레이크는 초조한 마음을 억누르며 황급히 저택을 살폈다. 젊은 시절 커다란 상단을 운영했다는 노인의 집은 제법 큰 편이었다.

그는 저택을 뒤지다가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책들이 갑자기 휘어지더니 공간에 균열이 나타났다.

리차드가 훈련소를 급습했을 때와 같은 마법이었다.

블레이크는 그 공간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균열 속에서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웨스틴 후작저에서 하녀로 위장했던 흑마법사였다.

“너는…!”

“역시 리차드 님의 말이 맞았네. 코닌스 그 자식, 정말로 배신을 하다니.”

카란은 이를 갈았다.

코닌스가 배신했을 거라는 리차드의 말을 듣고 그래도 설마 하는 마음을 가졌었는데, 그 말이 사실이었을 줄이야.

역시 주군의 말은 틀린 적이 없었다.

배은망덕한 놈 같으니라고.

리차드 님이 그렇게 총애해주었는데. 하여튼 마나가 조금 쓸 만한 것 말고는 쓸모없는 놈이다.

카란이 분노를 삭이고 있는데, 서늘한 칼날이 그녀의 목에 닿았다.

카란은 화들짝 놀랐다. 블레이크가 공간의 균열을 뚫고 단번에 자신을 공격한 것이다.

“칼을 치우는 게 좋을 겁니다. 나를 죽이면 황태자비를 영영 찾을 수 없을 테니까요.”

“허튼수작 부리지 마라.”

블레이크에게서 질식할 것처럼 서늘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웨스틴 후작가에서 봤을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카란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녀는 최대한 태연한 척 말했다.

“황태자 전하를 모셔오라는 리차드 님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비 전하도 그곳에 계십니다.”

“리차드가 너를 보냈다고?”

“네. 하지만 황태자 전하 혼자만 오셔야 합니다. 아니면 황태자비의 목숨은 없을 겁니다.”

“감히 협박을 하는 것이냐?”

카란의 목에 칼날이 닿으며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서늘한 공포 속에서 그녀는 겨우 말을 뱉었다.

“사실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블레이크는 카란을 노려보았다. 이는 리차드가 설치한 함정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함정인 걸 알면서도 블레이크는 검을 거두었다.

앤시아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함정 정도는 기꺼이 밟아줄 수 있었다.

***

여긴 도대체 어디일까? 도대체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거지?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렸다.

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빛의 마나석에서 나오는 마나가 아까 전보다 더 강해진 것 같다. 게다가 천장까지 채운 뾰족한 마나석들은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도대체 어디서 이렇게 많은 마나석을 구한 거지?

어쨌든 당장 여기서 나가야 한다. 리차드가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른다. 절대로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마나석에서 내뿜는 강렬한 마나와 결계 때문에 의식을 유지하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어떻게든 수갑을 풀어보려고 했지만, 마법을 사용하려는 순간 오히려 마나가 역류하며 헛구역질이 차올랐다.

그때 문이 빼꼼히 열리며 소년이 들어왔다.

“너는….”

그는 카란과 함께 떠났다던 칼루오였다.

“물어볼 게 있어요.”

칼루오는 고아원에서 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적대적인 눈으로 나를 노려보더니 질문을 던졌다.

“탄시놀의 치료법을 찾으셨다면서요. 그게 사실인가요?”

“그래. 맞아. 그런데 그건 어떻게 알았니?”

“신문에서 봤어요. 누나는 말을 해주지 않으니까.”

“누나랑 다퉜니?”

“…….”

그는 입을 꾹 다물었다. 긍정이 담긴 침묵이었다. 탄시놀과 관련된 일로 카란과 다툰 거구나.

“슐리아는 어때요? 슐리아도 다 나았나요.”

“슐리아는 아직. 그 아이는 상태가 심각한 편이었거든.”

칼루오는 이를 악물었다. 소년의 얼굴에 걱정이 역력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 곧 나을 거야. 다른 아이들도 이미 다 나아서 고아원에 돌아갔어.”

칼루오는 말없이 주먹을 굳게 쥐더니 돌연 나를 노려봤다.

“어째서 로움족을 구해준 거죠?”

“환자인데 치료해주는 게 당연하잖아.”

“맞아요. 구해주는 당연하죠. 하지만 지금까지 아무도 우릴 구해주지 않았어요.”

“이제 달라질 거야. 마족 재판도 탄시놀도 사라졌어. 이 땅의 뿌리 깊은 차별도 점차 없어질 거야.”

“비 전하는 로움족을 미워하지 않으세요?”

“미워할 이유가 없잖아. 똑같은 사람인걸.”

칼루오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느리게 입을 열었다.

“…구해드릴게요.”

그가 나의 수갑을 풀려고 했다. 하지만 의자 손잡이 양쪽에 고정돼 있던 수갑 위로 그의 손이 닿는 순간, 마나가 흐르더니 그 충격으로 인해 칼루오의 몸이 그대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칼루오!”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칼루오는 바닥에 쓰러진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때 저벅저벅 울리는 발소리와 함께 리차드가 안으로 들어왔다.

“가만히 있으라니까, 쥐새끼같이 싸돌아다니는군.”

리차드가 칼루오의 목덜미를 잡아 올리자, 소년은 낮은 신음을 흘렸다.

다행히 살아 있었다. 하지만 안심할 때는 아니었다.

“놔! 이거 놔! 이 나쁜 놈아!”

“칼루오, 버릇이 없어졌구나.”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슐리아가 탄시놀에 걸렸어! 누나가 이상해졌어! 다 너 때문이라고! 놔! 놓으라고!”

정신을 차린 칼루오가 소리를 지르며 리차드의 가슴팍을 때렸다. 그러자 리차드는 칼루오를 가차 없이 바닥으로 집어 던졌다.

“리차드! 무슨 짓이야!”

나는 화들짝 놀라서 소리쳤다. 하지만 리차드는 당당했다.

“지금껏 돌봐준 은혜도 모르고 내 걸 빼돌리려 했다. 도둑놈을 혼낸 게 뭐가 문제지?”

“내가 왜 네 거야! 그리고 저 아이는 아끼던 동생이 탄시놀에 걸려서 괴로워하고 있어! 너도 같은 슬픔을 겪었으면서, 로움족의 아픔을 알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어떻게 이런 일을 꾸밀 수가 있냐고!”

리차드는 어머니의 일로 크나큰 고통을 겪었으며, 탄시놀로 인한 비극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같은 비극이 벌어지는 걸 막기 위해 노력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를 이용하며 카란과 코닌스를 자신의 부하로 삼고, 지금도 수많은 로움족을 고통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닥쳐! 나는 천한 로움족 따위가 아니다! 나는 이 제국을 세운 황제다!”

“천하다고? 천하게 만든 게 누군데! 그리고 황제. 그래, 맞아. 천 년 전에는 황제였지. 셀 수 없는 사람의 피를 묻히고 황좌에 올랐어. 하지만 그건 필립이야. 리차드 카실, 너는 한낱 도망자일 뿐이야.”

“닥쳐!”

그가 나의 턱을 바스러질 듯 움켜쥐었다.

“내가 만든 내 것이야. 이 제국도! 너도! 그리고 이제 모든 걸 되찾을 거다!”

리차드의 입꼬리가 묘하게 올라갔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분명 무슨 계략을 꾸민 것이 분명했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나는 다급히 물었지만,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만을 지은 채 대답하지 않았다.

“리차드, 말해!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고!”

그때 밖에서 끼이익 문이 열리는 육중한 소리가 들렸다.

“황태자가 왔나 보군.”

리차드의 입에 걸린 미소가 더욱더 짙어졌다.

블레이크가 왔다. 그리고 리차드는 블레이크를 노리고 있었다.

“리차드, 너 블레이크를…!”

“잠시 조용히 있어. 곧 모든 게 끝날 테니까.”

그의 말과 동시에 마나석에서 흐르는 마나가 강해지더니 숨이 막히며 눈이 감겼다.

***

카란과 블레이크는 동굴처럼 어둡고 습한 지하의 비밀 통로를 걸었다.

블레이크의 손에는 빛의 마나석으로 만든 두꺼운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수갑에는 빛의 마법을 사용할 수 없도록 억제하는 장치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 수갑의 중심에는 기다란 사슬이 연결되었는데, 카란은 그것을 잡고 블레이크를 끌고 갔다.

마치 노예를 대하는 듯한 모욕적인 상황이었지만 블레이크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앤시아만 찾으면 된다. 다른 건 중요치 않다. 그렇기 때문에 카란의 요구대로 양손에 기꺼이 수갑을 찬 것이다.

카란은 이런 상황에서도 고고한 블레이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 봤자 여신의 저주를 받은 괴물인 주제에. 우리 로움족보다 훨씬 천하면서 황태자라고 오만하게 굴기는!

리차드 님이야말로 그 자리에 어울리는 분이었다.

그분은 모든 능력이 뛰어나고, 박학다식하여 모르는 것이 없었다.

비밀 통로의 끝에는 요새가 연결되어 있었다. 이 비밀 요새는 천 년 전 필립 황제가 만약의 상황을 대비하여 만들어 둔 곳으로 존재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했다.

리차드 님께서는 황제조차도 모르는 정보를 알고 계신 거다. 게다가 공간을 비트는 마법까지 할 줄 아셨다.

주군께서 말씀하셨다. 황태자만 데려온다면 자신이 제국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이제 카란의 꿈이 이루어질 순간이 머지않았다.

리차드 님은 황제가 되실 거다. 그리고 나면, 주군이 황제가 되고 나면….

로움족을 위한 세상이 올까…?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진 듯 하나의 의문이 점점 거대한 파장을 일으키며 카란의 머릿속을 휘저었다.

“리차드 님은 변했어.”

파장 속에서 코닌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칼루오의 외침이 겹쳐졌다.

“그 사람 때문에 슐리아한테 그런 짓을 했다고! 누나, 제정신이야?”

칼루오는 화를 냈다. 카란이 아무리 설명을 해도 듣지 않고, 그녀가 하는 말도 믿지 못해서 몰래 신문을 훔쳐보고는 했다.

“누나가 원하는 건 로움족이 아니야! 리차드 그 자식한테 잘 보이고 싶은 것뿐이잖아!”

아니다. 그렇지 않다. 모든 건 로움족을 위한 거였다.

물론 그분을 사모했다. 하지만 감히 꿈도 꾸지 않았다. 만약 로움족을 위한 세상이 열린다면 여인이 아니라 마법사의 자격으로나마 그분의 옆자리에 당당히 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기대를 했을 뿐이다.

“진짜 괴물은 황태자가 아니라 리차드야! 그 자식은 우리가 창피한 거야! 자기가 로움족인 게 부끄러운 거라고! 그놈은 구원자가 아니야! 우리 로움족을 다 죽이려는 괴물이라고! 누나, 제발 정신 차려!”

칼루오는 어려서 잘 모르는 거다.

리차드 님은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가족들의 시체를 정성스럽게 묻어주고, 흑마법을 가르쳐서 원수에게 복수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로움족을 위해 고아원도 만드신 분이다.

그분이 황제가 되기만 하면 모든 것이 달라질 거다.

카란은 리차드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코닌스와 칼루오의 목소리가 점차 작아지고, 마음속의 파문도 잦아드는 찰나, 그녀의 뒤를 조용히 따라오던 블레이크가 질문을 던졌다.

“너의 목적은 뭐지?”

“리차드 님을 황제로 만드는 것입니다.”

카란은 솔직히 말했다. 황태자는 살아 돌아가지 못할 거다. 어차피 죽을 사람이니 자신의 생각을 숨길 필요도 없었다.

“너희 부모와 마을 사람을 살해한 원수를 황제로 만들려는 건가?”

리차드 님께서 우리 부모를 살해했다고…?

잔잔해졌던 호수에 커다란 바위가 투척되었다.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지? 하지만 카란은 진실을 파악하는 대신 자신의 마음에 피어오른 의문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리차드 님은 훌륭하신 분이다. 그래야 한다. 그분을 황제로 만들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런데 만약 아니라면 어떻게 되는 거지? 내가 해온 일은 전부 뭐가 되는 거냐고?

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허튼수작 부리지 마십시오! 나는 코닌스처럼 속지 않습니다!”

그녀는 싸늘하게 소리치며, 요새의 문을 열었다.

요새 안으로 들어가자 리차드의 모습이 보였다.

“주군, 황태자를 끌고 왔습니다!”

“잘했다.”

카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게 얼마 만에 받는 칭찬이지?

리차드에게 인정을 받는 순간 모든 의문은 사라지며 기쁨이 찾아왔다.

그런데 바닥에 무언가가 그려져 있었다.

그건 마법진이었다.

언제 저런 걸 그리신 거지? 또 새로운 마법을 보여주시는 건가? 정말로 대단하신 분이다.

리차드 님은 황태자만 데려오면 자신이 황제가 될 거라 하셨다. 어쩌면 황제가 되기 위한 궁극의 마법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존경심을 담은 눈으로 마법진을 바라보았다.

리차드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마법진에는 커다란 원이 4개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원의 위에는 한 소년이 놓여 있었다.

그 소년은 칼루오였다.

“칼루오!”

그녀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동생이 왜 저기 있는 거지? 어째서 마법진의 위에 놓여 있는 거야?

그녀는 리차드에게 물어보려 했다. 하지만 카란이 미처 입을 떼기도 전에 복부에서 서늘한 격통이 느껴졌다.

날카로운 칼이 그녀의 배를 꿰뚫은 것이다.

“그동안 수고했다.”

리차드는 그녀의 배에 칼은 꽂을 채, 메마른 얼굴로 말했다.

“주, 주군. 대체 왜…?”

리차드 님이 나를 공격하다니 그럴 리 없다.

카란은 믿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반격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망연히 중얼거렸다.

그러자 리차드가 그녀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마지막으로 나를 위해 훌륭한 제물이 되어주길 바란다.”

제물? 제물이라고? 나랑 칼루오를 제물로 쓴다고? 황제가 되기 위해서?

탄시놀을 퍼트리던 날, 리차드는 카란에게 칼루오는 데리고 나와도 좋다고 허락해 주었다.

카란은 감동했다. 주군께서 자신을 배려해서 동생을 지켜주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리차드는 처음부터 칼루오를 제물로 쓸 생각이었다. 그래서 누나인 카란의 손을 빌려서 칼루오를 데리고 온 거다.

이게 리차드의 실체였나? 이렇게 잔악한 자였나?

그녀는 리차드를 맹목적으로 따랐다. 자신의 주변에 단단한 벽을 세우고 다른 사람의 말도 전혀 듣지 않았다.

하지만 서늘한 칼날이 그녀의 복부를 관통하는 순간 벽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비로소 진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

리차드가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인간이며 로움족마저 이용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어쩌면 황태자의 말도 사실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진실을 깨닫는 순간 칼날이 그녀의 몸을 빠져나갔다가 다시 파고들었다.

그녀의 입에서 붉은 피가 왈칵 쏟아졌다. 동시에 카란의 숨도 끊어졌다.

리차드는 동정의 시선조차 보내지 않은 채 그녀의 시체를 네 번째 마법진 위로 던지며,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블레이크에게 겨누었다.

“허튼수작 부리지 마라.”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블레이크는 양손을 들어 보였다. 그의 손에는 여전히 굵은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그딴 마도구 따위는 금방 벗을 수 있을 텐데.”

블레이크는 필립이 지녔던 여신의 힘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저런 마도구로는 그를 완전히 구속할 수 없었다. 지금쯤이면 이미 풀어내는 법을 간파했을 거다.

애초에 풀어버릴 자신이 있기 때문에 순순히 수갑을 차고 따라온 걸 거다.

“하지만 허튼짓하지 마라.”

리차드는 바닥을 강하게 밟았다. 그러자 드르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의자에 구속된 앤시아의 모습이 보였다.

“앤시아!”

블레이크는 당장 앤시아를 구하러 가려 했다. 하지만 리차드는 검을 겨누며 비열하게 외쳤다.

“지금 거기서 한 발짝이라도 움직인다면, 저 방을 가득 채운 마나석이 폭발할 거다. 그리되면 앤시아의 몸은 산산이 조각날 거다. 아무리 네가 여신의 힘을 지녔다고 한들 구할 수 없겠지.”

블레이크는 그 자리에 우뚝 섰다. 리차드의 말대로였다. 저 안에 있는 마나석이 터진다면 앤시아는 무사하지 못했다.

“원하는 게 뭐냐?”

“상황 판단이 빨라서 좋군.”

리차드는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복잡하게 그려진 마법진 중 두 번째 원을 가리켰다.

“저 위로 올라가라. 그리하면 앤시아도 무사할 거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일단 올라가라.”

블레이크는 리차드를 노려보며 두 번째 마법진으로 걸어갔다.

블레이크가 원의 중앙에 선 순간 강력한 마나가 그의 육체를 뒤덮으며 사지를 구속했다.

그는 그대로 마법진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마나의 압력이 몸을 짓눌러서 일어날 수조차 없었다.

리차드는 마법진 위에 쓰러져 있는 블레이크의 턱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와 똑바로 눈을 마주쳤다.

“목적이 뭐냐?”

블레이크가 리차드를 노려보며 힘겹게 뱉었다. 그런 블레이크의 모습을 보며 리차드는 짙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네가 될 거다.”

리차드는 천 년 전 필립이었을 때 세르파니아에게 다양한 마법을 배웠다. 그중에는 인간의 영혼을 바꾸는 법도 있었다.

“빛을 비틀기 위해서는 이렇게 해야 해.”

“응. 알았어.”

빛을 비트는 법을 가르쳐주고 난 뒤, 세르파니아는 말했다.

“이게 마지막이야. 내가 아는 건 전부 너에게 가르쳐줬어.”

“정말로 이게 다야?”

필립이 시큰둥하게 뱉자 세르의 눈빛이 불안하게 일렁였다. 하지만 무엇이 더 필요한 거냐며, 전부 가르쳐 주겠다고 매달리진 않았다.

눈치 없기는.

필립은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걸 참으며, 자신이 원하는 걸 직접 물어보았다.

“인간의 영혼을 바꾸는 법은 없어?”

“그런 건 왜?”

“혹시 네가 다치기라도 하면 내 몸을 바꿔주려고.”

“그럴 필요 없어. 나는 그런 걸 원하지 않아.”

“그런 말 하지 마. 네가 없으면 내가 어떻게 살겠어.”

필립은 본심을 숨기고 자상한 척 연기했다.

그러나 세르파니아는 의외로 쉽게 말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필립이 몇 날 며칠을 조르자 그녀는 마지못해 대답해주었다.

“영혼을 바꾸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필요해. 마법진 위에 영혼을 바꿀 두 사람이 서고 그 옆에 죽은 지 한 시간이 지나지 않은 시체와 살아 있는 어린아이를 제물로 바쳐야 해.”

“복잡하군.”

“복잡하기만 해?”

“잔인하고.”

“맞아. 그러니까, 절대로 쓰면 안 돼.”

“사용할 생각 없어. 그냥 호기심이라니까.”

세르파니아는 필립을 빤히 바라보았다.

“약속이야.”

“그래, 약속.”

필립은 그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세르와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쓰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런 약속 같은 건 말하는 순간 잊었으니까.

그는 빛을 뒤틀어서 병을 퍼트리는 것과 락슐과 몸을 바꾸는 방법을 두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고민했다.

전자보다 후자가 훨씬 손쉬운 방법이었다.

락슐이 되면 라온텔과 제국이 자연스럽게 손에 들어올 것이다.

하지만 필립은 결국 빛의 마나를 이용한 전염병을 퍼트리는 방법을 택했다.

그는 필립으로서 라온텔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나라는 인간을 그녀에게 각인시키길 원했다.

하지만 여신의 힘을 갖고 황제가 되고 새로운 제국을 건국해도 라온텔의 마음은 결국 가질 수 없었다.

라온텔은 앤시아로 환생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번에도 황태자를 택했다. 그가 모두에게 멸시받는 흉측한 괴물이 되었어도 그녀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천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리차드는 인정할 수 있었다.

‘나는 결코 앤시아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

앤시아는 셀 수 없이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도 리차드를 보며 그를 싫어한다고 말했다.

앤시아에게는 오직 블레이크뿐이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였다.

‘내가 블레이크가 되면 된다.’

리차드는 천 년 전에 택하지 않았던 방법을 쓰기로 했다.

아스테릭 제국을 탄시놀로 물들이고, 블레이크의 몸을 차지할 것이다.

그리고 황태자가 된 뒤 탄시놀을 치료하여 모두의 존경을 받을 것이다.

앤시아 또한 나의 능력에 감탄하겠지. 탄시놀에 걸린 텐스테온을 치료해주면 그는 나를 아들로 인정할 거다.

블레이크의 몸뚱이가 아니라 나의 능력으로 텐스테온과 앤시아에게 인정받는 거다. 앤시아의 연인이자 진정한 가족이 될 수 있었다.

리차드의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이미 훌륭한 제물은 갖추어져 있었다. 카란과 칼루오는 피가 같은 남매이니 제물로서 가치는 더욱 높았다.

그리고 일부러 카멜리아 고아원에 탄시놀을 일으켰다.

슐리아는 감이 좋은 아이였다. 리차드를 피하고 칼루오에게 그의 실체를 알려주려 했다. 계속 거슬렸고, 살려둬봤자 좋을 것도 없었다. 게다가 카란의 충성심을 시험하기에도 좋았다.

탄시놀에 대한 비난이 리차드와 로움족에게 쏟아지겠지만 상관없었다.

이제 자신은 리차드가 아니었다. 마법이 성공하면 블레이크가 리차드가 될 거다. 그러니 리차드와 로움족에게 욕설과 경멸이 쏟아져도 자신이 알 바 아니었다. 오히려 좋았다. 게다가 황궁에 쏟아질 책임론까지 모두 로움이 떠안게 되는 거니, 나쁠 것이 없었다.

그런데 앤시아가 탄시놀의 치료제를 찾아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영웅이 될 기회를 놓친 것이 아쉽긴 하지만, 리차드의 진짜 계획은 아직 남아 있었다.

리차드는 앤시아를 이용하여 블레이크를 유인했다. 그는 마법을 통해 서로의 몸을 바꾼 뒤, 리차드가 된 블레이크를 없앨 생각이었다.

블레이크는 여신의 마나를 지니고 있고, 리차드는 여신의 마법을 알고 있었다. 블레이크의 육체와 자신의 영혼이 합쳐진다면 그 누구도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

티끌만 한 마나도 없는 리차드의 몸뚱어리를 쓸어버리는 것쯤은 간단했다.

그러고 나서 강한 결계 때문에 의식을 잃은 앤시아를 깨우면 된다. 그럼 앤시아는 블레이크가 리차드를 물리치고 자신을 구해줬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 뒤에는 빛처럼 찬란한 미래만이 펼쳐질 터였다. 자신은 블레이크로, 앤시아의 남편이자 이 제국의 황태자로 살아가면 된다.

리차드는 자신의 계획을 곱씹었다. 그리고 블레이크의 아름다운 얼굴을 천천히 음미했다.

이제 곧 나의 몸이 될 육체였다.

지나치게 예쁘장하긴 하지만, 앤시아가 사랑하는 얼굴이라고 생각하면 이것 또한 나쁘진 않았다.

“나는 네가 될 거다. 네가 되어, 내가 원하는 모든 걸 손에 얻을 거다.”

***

나는 마나의 파동을 느끼며 눈을 떴다. 방에 처진 결계와는 다른 기묘한 마나가 지면을 울리고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역겨운 마나가 전신을 짓눌렀다. 머리가 아프고 내장까지 비틀리는 것 같았지만, 지금은 나의 고통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열린 문 너머로 블레이크와 리차드의 모습이 보였다.

블레이크의 손에는 나와 같은 수갑이 채워져 있고, 마법진의 마법 때문에 몸을 일으키지도 못하고 있었다. 리차드는 블레이크의 턱을 움켜잡으며 말했다.

“나는 네가 될 거다. 네가 되어, 내가 원하는 모든 걸 손에 얻을 거다.”

설마…!

리차드의 목표는 천 년 전처럼 황족을 모두를 죽이고 자신이 황제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블레이크와 자신의 몸을 바꿀 생각이었다.

그래서 천 년 전과 방법이 달랐던 거다.

탄시놀은 그저 혼란을 일으키는 수단에 불과했다. 아마 블레이크의 몸을 차지하고 난 뒤, 탄시놀을 해결할 생각이었겠지.

제국을 구한 영웅으로서, 자신의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려 한 거다. 블레이크의 육체를 빼앗아서 말이다.

세르는 나와 자신의 몸을 바꿨었다. 설마 그 방법을 리차드에게도 알려줬던 건가?

바닥을 뒤덮은 거대한 마법진 위에는 블레이크뿐만이 아니라 칼루오와 카란도 있었다.

저들을 제물로 바치려는 건가? 자신을 따르던 부하와 어린아이를 바쳐서, 블레이크와 몸을 바꾸려는 거야?

안 된다. 막아야 한다.

하지만 아까 전보다도 훨씬 강해진 결계 때문에 손가락 하나도 까닥하기 힘들었다. 목소리조차도 나오지 않았다.

안 돼. 블레이크를 지켜야 한다. 여기서 그를 잃어버릴 수는 없었다.

내가 온 힘을 다해 발버둥을 치는 사이 리차드는 유유히 중앙에 있는 마법진 위로 걸어갔다.

커다란 마법진 안에 있는 네 개의 원 위에 각각 사람이 올라와 있었다.

‘안 돼! 안 돼! 막아야 해!”

하지만 너무 늦었다. 리차드의 입에서 주문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인간의 말이 아닌 신의 언어. 세르가 가르쳐준 마법이 틀림없었다.

그 주문을 듣는 순간 나의 눈이 크게 떠졌다.

주문을 마치자, 마법진에서 빛이 흐르기 시작했다. 리차드는 미소를 지었다. 모든 걸 손에 넣은 승리자의 미소였다.

그런데 그 순간, 잔잔하던 빛이 강해지더니 마법진에서 빛의 화염이 솟아오르며 리차드를 집어삼켰다.

“으아악!”

불길에 휩싸인 리차드는 비명을 질렀다.

동시에 내가 갇힌 방의 결계도 흐트러졌다. 갑자기 시전자의 마법이 사라지자 방을 가득 채운 빛의 마나석들에 툭툭, 균열이 일며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천장에 달려 있던 뾰족한 마나석들이 나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이렇게 죽는 건가?

눈을 질끈 감는데, 거대한 빛의 마나가 나의 몸을 감쌌다.

“앤시아!”

블레이크가 황급히 다가와서 나를 끌어안았다.

그는 리차드가 빛의 화염에 휩싸이자마자, 수갑을 풀고 나에게 보호 마법을 걸어준 것이다.

“앤시아, 괜찮아? 다친 데 없어?”

“응. 나는 괜찮아.”

블레이크는 나의 상태를 확인하며 구속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나를 안아 올리며 그 방에서 빠르게 탈출했다.

우리가 나오는 순간 보호막 때문에 잠시 멈추어 있던 빛의 마나석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밖으로 나오자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리차드를 감싼 빛의 화염은 더욱 거세졌고, 그의 비명 역시 커졌다.

“으아아아악! 아악!!”

블레이크에게 내려달라고 했지만, 그는 오히려 나를 보호하듯 꼭 끌어안으며 리차드를 바라봤다.

“어떻게 된 거지?”

“리차드 카실은 생명을 교환하는 마법을 시전했어.”

“생명 교환?”

“응. 죽은 사람을 살리는 대신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마법이야.”

나는 과거에 세르에게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마법을 물어본 적이 있었다.

“죽을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엄청난 대가가 따라. 남을 살리는 대신 자신의 목숨을 바쳐야 해. 그래도 알고 싶어?”

“응. 알려줘.”

세르는 나에게 죽은 사람을 살리는 마법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했다. 하지만 나는 마법사로서의 순수한 호기심 때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세르는 나에게 마법진을 그리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하지만 마법 주문을 알려주는 도중 고개를 저었다.

“역시 안 되겠어. 이 마법은 너무 위험해. 라온은 너무 착해서,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이 마법을 써버리고 말 거야. 난 소중한 친구를 잃고 싶지 않아.”

세르는 결국 마법을 끝까지 알려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말이 옳았다.

락슐이 죽었을 때 나는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내 생명을 바쳐도 좋으니 그를 살리고 싶었다. 하지만 주문의 마지막 부분을 몰랐기 때문에 결국 마법을 쓸 수 없었다.

그리고 방금 전 리차드가 주문을 외웠을 때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여 죽은 사람을 살리는 마법이었다.

락슐의 장례식에서 되뇌고 또 되었던 주문이었다. 착각할 리 없다.

“그럼 이 마법진과 제물은 뭐지?”

커다란 원 안에 네 개의 원이 그려져 있으며, 마법진은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세르에게 마법을 배웠던 나는 이 마법진의 진실을 한 번에 간파할 수 있었다.

“나머지는 속임수야. 오직 저 두 개의 마법진만 서로 연결되어 있어.”

나는 리차드와 카란이 올라와 있는 원을 가리켰다. 생명을 교환하기 위해 필요한 마법진은 오직 저 두 개였다.

블레이크와 칼루오가 올라와 있었던 원은 그럴듯하게 그려졌지만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 속임수였다.

리차드가 실수를 했을 리는 없다. 그는 세르에게 배웠던 대로 마법진을 그리고 주문을 외웠을 거다.

아마도 세르가 가짜 마법을 알려준 거겠지.

리차드가 마지막 선을 넘으려 한다면 스스로 자멸하도록, 그가 목숨으로 속죄하도록 장치를 마련해 둔 거다.

“으아악! 세르파니아! 나를 속이다니! 으아악!”

리차드도 진실을 깨닫고 세르를 향해 분노의 외침을 쏟아냈다.

하지만 빛의 불길은 더욱 커졌다. 그리고 리차드의 생명 에너지는 마법진을 타고 카란의 몸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

투명한 빛이 리차드의 전신을 태우고 있었다. 살갗이 녹아내리고 생명력이 뽑혀 나가는 고통 속에서 리차드는 비명처럼 여신의 이름을 불렀다.

“으아악! 세르파니아! 세르파니아!!”

그때 리차드의 외침에 답하기라도 한 듯 눈앞에 더 큰 빛이 쏟아지더니 세르파니아가 나타났다.

그녀는 리차드를 물끄러미 내려보았다. 마치 일이 이리될 줄 알았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나를 속였구나! 처음부터 나를 속였어!”

“나에게 할 말이 그것뿐인가?”

그녀의 목소리에 슬픔이 묻어났다.

“당장 이 불을 꺼! 지금 당장!”

세르는 자신에게 윽박지르는 리차드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앤시아에게 몸을 돌려주고 사과를 한 뒤, 세르는 젤칸의 수도였던 칸으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천 년이 지나도 오염되어 있는 대지를 정화하고, 땅에 묶여 있던 힘을 되찾고, 자신의 실수 때문에 고통을 겪었던 모든 이들에게 사죄했다.

더는 인간의 세상에 관심을 두지 않으리라, 아무것도 하지 않으리라, 그녀는 자신의 죄와 함께 칸의 땅에서 깊은 잠에 빠졌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여 ‘쉘’만을 이 세상에 남겨둔 채 말이다.

그런데 쉘이 자신의 몸을 톡톡, 두드리며 잠을 깨웠다.

“세르파니아 님, 큰일 났어요! 다시 그 병이 일어났어요.”

쉘은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세르에게 말해주었다.

세르와 함께 지냈던 영향으로 필립이던 시절의 기억이 돌아온 그가 다시 천 년 전의 병을 퍼트렸다고 했다.

세르는 황급히 수도로 돌아가려 했다. 그런데 쉘이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앤시아 님께서 치료법을 찾으셨어요.”

신과 인간의 시간은 다르다. 그녀가 잠을 잤던 잠깐의 시간 동안 인간계에서는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사이 리차드는 병을 퍼트렸고, 앤시아는 치료제를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나의 친구 앤시아가….

그때 리차드가 금기의 마법 주문을 읊는 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전해졌다.

‘아, 결국 그 마법을 쓰고 만 것인가….’

세르파니아는 필립을 사랑했다. 그래서 그가 원하는 것은 모두 들어주었지만, 마음속 한구석에서는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필립이 빛을 뒤트는 마법에 이어 영혼을 바꾸는 법을 알려달라 했을 때, 그녀의 의심은 더욱더 짙어졌다.

세르는 사랑하는 연인에게 처음으로 거짓말을 했다.

필립이 무고한 사람과 어린아이를 죽이면서까지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 하지는 않을 거다, 그렇게 나쁜 사람을 아닐 거다.

세르는 그를 믿었고, 마지막 선을 그었었다. 하지만 천 년이 지난 지금 그는 기어이 그 금기마저 깨트리고 말았다.

세르는 당장 리차드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는 빛의 화염 속에서 발버둥 치면서도 세르를 노려보았다.

“당장 끄라고! 감히 나를 속이다니!”

전생의 기억을 되찾았지만, 그는 사과하지 않았다. 세르를 속이고 천 년 동안 봉인한 죄책감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세르가 했던 단 하나의 거짓말에 분노할 뿐이었다.

세르의 눈이 차갑게 식어 내렸다.

무감한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리차드는 그제야 사과하기 시작했다.

“자, 잘못했어. 그러니까 제발, 제발 이것 좀 꺼줘!”

세르는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내가 고작 이딴 말을 들으려고 지금껏 깊은 미련 속을 허우적거렸던 건가…?

사과를 들으면 천 년 동안 맺힌 응어리가 풀릴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오히려 허탈한 분노가 밀려왔다.

“세, 세르파니아, 우린 부부잖아. 너는 나를 사랑하잖아!”

세르는 애원하는 리차드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낮게 뱉었다.

“여기서 꺼내주지.”

“그래. 그래. 어서!”

리차드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그의 주변이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몸이 가볍게 떠오르며 육체가 녹아내릴 듯한 열기도 사라졌다.

됐다. 이제 됐다.

리차드는 속으로 미소 지었다.

천 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멍청한 여자군. 아직까지도 나에 대한 미련이 남은 거다. 그러니 구해줬겠지.

마법이 실패했을 때, 이젠 정말로 모든 것이 끝난 줄 알았다.

하지만 하늘은 나의 편이었다. 아직은 기회가 있다.

세르파니아를 이용하면 된다.

블레이크의 힘을 거두어서 나에게 달라고 해야지. 잘 구슬린다면, 결국 저 여자는 또 내 말을 들어줄 거다.

리차드는 속으로 미소 지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눈을 떠도 주변이 온통 어두웠다.

여긴 어디지? 자신이 있던 지하 요새는 아니었다.

리차드는 일단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벽에 가로막혔다. 앞, 뒤, 왼쪽, 오른쪽, 천당도 모두 막혀서 나갈 수가 없었다.

리차드는 자신이 투명한 구체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열어! 당장 열라고!”

리차드는 거칠게 벽을 두드렸다. 하지만 뼈가 으스러질 듯 내리쳐도 소용없었다.

“세르파니아, 이게 무슨 짓이야!”

그가 강하게 소리치는데, 바닥에서 화르르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러자 화상으로 일그러진 자신의 손이 보였다.

리차드는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천 년 전 세르파니아를 봉인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그가 어둠의 문에 갇혔다는 사실을 말이다.

“세르파니아, 잠깐, 잠깐만! 내 이야기 좀 들어봐!”

리차드는 다급히 외쳤다. 하지만 아무리 외쳐도 그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금기된 마법을 사용하며 리차드의 육체에 있던 생명력은 모두 빠져나갔다. 세르파니아는 리차드의 영혼을 빼내어 그를 혼돈의 계곡 깊숙한 지하에 봉인했다.

천 년 전 그가 세르파니아를 봉인했듯 말이다. 하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리차드에게는 세르파니아와 같은 힘이 없었다.

봉인을 풀 방법 또한 당연히 없었다. 그를 위해 나서줄 연인이나 친구 또한 없었다.

리차드는 영원히 봉인을 풀지 못한 채, 뜨거운 구체 안에 갇혀 있을 것이다.

뒤늦게 현실을 깨달은 리차드가 비명을 질렀다.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는 곳에서 리차드는 울부짖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리차드는 세르에 대한 원망을 터트리며 비명을 질렀다. 그 순간 커다란 빛이 그를 덮쳤다. 그리고 빛이 사라졌을 때, 마법진에서 튀어나온 화염 또한 사라졌다.

리차드의 숨도 끊어져 있었다.

빛의 화염에 녹아내린 그의 시체는 무척 처참했다.

블레이크가 나의 손을 잡았다. 나 역시 그의 손을 맞잡았다.

끝났다.

리차드와의 질긴 악연이 드디어 끝난 것이다.

***

그날 밤, 나는 세르를 만났다.

“리차드가 죽었어.”

나의 말에 세르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 내가 그의 영혼을 거두었어. 그는 영원한 어둠 속에서 죗값을 치르게 될 거야.”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

“진작에 이렇게 해야 했었어. 그는 절대로 달라질 인간이 아니었고, 내 손으로 마무리 지었어야 했어. 하지만 나는 또 망설이고 말았어. 그는 환생했으니까. 필립이 아니니까, 어떻게든 면죄부를 주며 처벌을 미뤘어. 미안해.”

“아니야. 나에게 증거를 남겼잖아.”

세르는 리차드가 블레이크를 독살하려 했다는 사실을 내게 알려주고는 홀연히 떠났다.

리차드는 전생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니 그를 벌하는 건 자신의 몫이 아니라고 생각한 거겠지.

어쨌든 그녀가 남긴 증거 덕분에 리차드의 악행을 낱낱이 밝혀낼 수 있었다.

하지만 세르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를 괴물로 만든 건 나야. 내가 처리했어야 했어. 그리고 이번에도 도움이 되지 못해서 미안해.”

그녀는 거듭 사과하더니, 조심스럽게 무언가를 건넸다.

“라온, 아니 앤시아, 괜찮다면 이 선물을 받아줄래?”

그것은 빛의 결정으로 만든 듯한 아름다운 팔찌였다.

“나는 인간 세계와 인연을 끊으려 했어. 하지만 그사이 많은 혼란이 벌어졌지. 이제 리차드는 봉인됐고 더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겠지만, 그래도 내가 필요하다면 불러줄래?”

“그냥 얼굴이 보고 싶을 때 불러도 돼?”

“응. 물론이지.”

세르의 눈에서 빛처럼 맑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

밝은 햇살이 느끼며 잠에서 깼다.

이곳은 아모리아궁의 침실이었다. 세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뭐지? 꿈이었던 건가?

비몽사몽 하여 눈을 비비는데, 손목에서 세르가 주었던 팔찌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꿈이 아니구나. 꿈이 아니었어.

나는 왼손에 찬 팔찌를 만져보려고 했다. 하지만 오른손이 묵직했다.

블레이크가 나의 오른손을 꼭 잡은 채 잠이 들어 있었다.

이제는 십 년 전과 달리 완전한 어른이 되었지만, 자는 모습만은 아직도 어린아이 같았다.

미소를 지으며 그의 모습을 바라보는데, 블레이크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붉은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았다.

“미안, 내가 깨웠어?”

“아니.”

그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젓더니, 나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하지만 피곤하잖아. 우리 조금 더 자자.”

블레이크의 품에 안기자 다시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따뜻하고 아늑했다. 그와 함께라면 모든 게 다 좋았다.

그리고 이제 이런 평화로운 날들만이 계속 이어질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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