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장. 따뜻한 차 한잔 어떠세요? (14/17)

14장. 따뜻한 차 한잔 어떠세요?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첼시가 안으로 들어왔다.

“비 전하,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아버님이?”

이렇게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시지? 원래 저녁 시간에는 잘 부르시지 않는데.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어쩌면 리차드를 잡았을지도 모른다.

리차드는 황태자의 독살 미수와 웨스틴 후작의 살해 혐의로 전국에 수배령이 내려졌다.

현장에서 도주했던 리차드는 땅으로 꺼진 것처럼 종적이 묘연했으나, 황실의 엄중한 수색을 피하지 못하고 결국 발각되고 말았다.

기사들은 리차드를 포위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체포 직전에 강물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리차드가 죽었을 거라 추측했다.

첸티온강의 거센 물길 속에서 살아남긴 힘들다고, 이미 죽었기 때문에 그날 이후 리차드를 찾을 수 없는 거라고 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리차드는 그렇게 간단히 죽을 인간이 아니었다. 아직 그의 시체도 발견되지 않았고, 두 명의 흑마법사도 찾지 못했다.

분명 어딘가에 살아 있을 거다.

텐스테온과 블레이크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고, 계속해서 리차드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리차드를 잡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곧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텐스테온은 나를 온실로 불렀다.

만약 리차드가 있는 곳을 알아냈다면 직접 찾아오거나 집무실로 오라고 했겠지.

이런 저녁에 온실이라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궁금했지만 이유가 전혀 짐작되지 않았다.

뭐, 가보면 알겠지. 나는 일단 온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하지만 텐스테온은 아니었다.

흑단같이 검고 긴 머리카락, 쌍꺼풀이 없는 기다란 눈매, 단정하면서도 우아한 검은색 도포를 입은 남자를 본 순간 눈이 크게 떠졌다.

“은한 님!”

예전보다 키가 크고 늠름해졌지만,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외모는 성숙해졌지만, 한 폭의 수묵화처럼 우아한 멋스러움이 풍기면서도 강인한 분위기는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였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은한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제국의 축복이신 황태자비 전하를 뵈옵니다.”

나는 깜짝 놀라서 손을 내저었다.

“말씀 낮추세요. 창의 황제 폐하시잖아요.”

은한은 창의 황제가 되었다.

수많은 황자들이 그를 노렸으나 전부 실패하고, 무사히 황제로 등극했다고 한다.

원작의 창국은 이때쯤 내전에 휩싸여서 혼돈에 빠지고, 그 여파가 아스테릭 제국까지 미쳤었다.

하지만 지금은 천룡의 선택을 받은 은한이 무사히 황제 자리에 올랐고, 나라도 평화롭다고 했다.

콜린의 말에 따르면 텐스테온 또한 그가 즉위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주군의 며느님이신걸요.”

은한은 황제가 된 지금도 텐스테온을 존경하며 따른다고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까지 대접을 받을 수는 없었다.

“제가 더 불편해서 그래요. 그냥 앤시아라고 불러주세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앤시아 님.”

거듭 청하자, 은한도 나의 말을 따라 주었다.

“주군을 뵈러 왔다가, 앤시아 님께서 돌아오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좀 더 일찍 뵙고 축하해드렸어야 했는데, 송구합니다.”

“아니에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실 텐데, 이렇게 축하해주셔서 감사해요.”

“힘드실 때 도움을 드리지 못해서 면목 없습니다.”

“그런 말 마세요. 저를 찾기 위해서 노력하셨단 거 알고 있어요. 정말 고맙습니다.”

내가 실종되자 텐스테온은 은한에게 도움을 청했고, 그는 동대륙을 수소문했다고 한다.

황제가 되기 위해 이복형제들과 치열한 다툼을 벌였고, 즉위한 뒤에도 정신이 없었을 텐데 나를 위해 고생한 거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인걸요.”

그는 조금도 생색내지 않고 정중하게 답했다.

“백한 님은 잘 지내세요?”

“네. 앤시아 님이 귀환하셨다고 전해주니 무척 기뻐하더군요.”

“벌써 소식을 전하신 거예요?”

오늘 들었을 텐데, 벌써 창에 있는 백한에게 알린 건가?

“네. 너무 기뻐서 얼른 다녀왔습니다.”

그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백한이랑 잘 지내고 있구나.

“백한 님 덕분에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어요. 정말 고맙다고 전해주세요.”

백한이 준 팔찌가 아니었다면 어둠의 문에서 목숨을 잃었을 거다. 이렇게 다시 돌아오지도 못했겠지.

“위험에 처하셨던 겁니까?”

은한의 눈에 근심이 어렸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이미 지난 일인데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아니요.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도움을 받았어요. 그래서 고맙다는 말을 꼭 하고 싶어요.”

“네. 꼭 전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기회가 되면 함께 오도록 하겠습니다.”

은한이 즉위한 뒤에도 야심을 버리지 못하고 그의 자리를 노리는 이복형제들이 많다고 했다.

아직은 은한과 백한이 동시에 창을 떠나는 건 위험할 거다.

“네. 그날을 기대하고 있을게요.”

나는 활짝 웃었다.

“그리고 이걸 받아주십시오.”

은한은 검은 나무 상자를 건넸다.

“이게 뭔가요?”

“야명주입니다.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보석이죠.”

나는 상자를 열어보았다. 빛의 눈물과 닮은 보석이었다. 보석은 신비로우면서도 은은한 빛을 품고 있었다.

“너무 아름다워요.”

“무사히 돌아오신 걸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소중히 간직할게요.”

나는 거절하지 않고 선물을 받았다. 아마도 은한은 내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선물을 준비하기 위해서 창에 다시 갔다 왔을 거다.

아무리 천룡의 힘을 지녔다지만 서대륙부터 동대륙까지 머나먼 먼 거리를 연속해서 오가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거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귀한 선물이었지만, 그의 정성을 알면서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건 백한의 선물입니다.”

그가 비단 주머니를 건넸다. 나는 주머니를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2개의 도자기가 들어 있었다.

“열어보시죠.”

“네.”

나는 은한의 말대로 도자기를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각각 잘 말린 찻잎과 씨앗이 담겨 있었다.

한국에서 보았던 보이차랑 비슷하면서도 조금 달랐다. 이게 무엇인지 궁금증을 담아서 쳐다보자, 은한이 답했다.

“‘택리차’입니다.”

택리차. 그 이름이 무척 익숙했다. 뭐였지?

아, 기억났다!

“허어, 택리차의 맛을 모르다니 안타깝군. 은한 형님께서 황제가 된다면 특별히 보내주도록 하겠네.”

이건 창의 황실에서 매일 마신다는 택리차였다. 은한이 황제가 되면 주겠다며 백한이 약속했었는데, 그 말을 지켜준 거구나.

“감사합니다. 백한 님께서 그렇게 자랑하시던 택리차를 드디어 맛볼 수 있겠네요.”

“좋아하시니까 기쁘네요.”

“당연히 좋죠. 누가 준 선물인데요. 백한 님께도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는 미소를 지었다. 눈에서 자상함이 뚝뚝 떨어졌다. 백한을 생각만 해도 그렇게 좋은 걸까?

형제의 우애에 괜히 내 마음이 흐뭇해졌다.

그나저나 이건 어떻게 마시는 걸까?

내가 도자기를 매만지는데, 은한이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제가 끓이는 법을 알려드릴까요?”

“정말요? 창국의 황제 폐하께 배울 수 있다니, 영광이에요.”

나는 함박 미소를 지으며 얼른 다기를 준비했다.

***

“부인, 나 왔어요.”

블레이크는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하며 나를 꼭 끌어안았다.

몇 시간 떨어져 있지도 않았는데, 꼭 하루 종일 일하다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을 맞이하는 기분이다.

“다녀왔어요.”

나는 평소처럼 그를 안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그런데 블레이크의 표정이 돌연 딱딱하게 굳었다.

“왜 그래?”

“그놈이 왔었어?”

“응?”

“은한 말이야.”

“어떻게 알았어?”

나는 깜짝 놀랐다. 도대체 그걸 어떻게 알았지?

“물비린내가 나서.”

그는 시니컬하게 뱉었다.

은한에게서는 늘 안개 낀 날에 느껴지는 물 내음이 났다. 천룡의 선택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비린내는 절대로 아니었다.

“그거랑은 조금 다르지 않아? 좀 더 운치가 있는 느낌인데.”

“글쎄. 그런데 이게 무슨 향이야?”

블레이크의 목소리가 삐딱하게 꺾이더니, 노골적으로 화제를 돌렸다. 두 사람은 아직도 친해지지 않았나 보다.

분명히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저렇게 날을 세우는지 모르겠다.

“‘택리차’의 향이야.”

“택…?”

생소한 단어라 그런지 블레이크는 한 번에 인식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택. 리. 차.’ 백한 님이 선물로 보내주셨어.”

“백한의 선물이었구나.”

백한의 이야기가 나오자 블레이크의 표정이 다소 누그러졌다. 다행히도 은한과 달리 백한에 대한 감정은 여전히 좋은 것 같았다.

“창에서는 매일 택리차를 마신대. 원래는 황실과 귀족들만 누리는 전유물이었는데, 은한 님이 즉위한 뒤에는 백성들도 접할 수 있도록 보급하고 있나 봐. 향만 좋은 게 아니라 건강에도 좋대.”

“음. 그렇구나.”

“은한 님이 차를 끓이는 방법도 알려주셨어.”

“직접…?”

“응! 마셔봐. 정말 향이 좋아.”

나는 주전자에 든 차를 따라서 블레이크에게 건넸다. 그가 오면 주려고 미리 끓여두었던 거다.

블레이크는 찻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생소한 음식이라 그런지 내키지 않나 보다.

“맛있어. 살짝 쌉쌀하긴 한데, 풍미가 있어.”

내가 재차 권하자, 그는 마지못해 차를 들이켰다.

“어때?”

“나쁘진 않네.”

그는 여전히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차가 입맛에 안 맞았나? 분명히 블레이크의 취향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백한 님이 씨앗도 선물로 주셨어. 그래서 온실에 심어보려고. 내일 같이 심을까?”

“응. 그러자.”

블레이크의 표정이 그제야 조금 풀렸다.

“그런데 야옹이는 어디로 간 걸까?”

“야옹이는 왜?”

“그냥 갑자기 생각이 나네.”

처음 아모리아궁으로 돌아왔을 때도 궁금했었다. 멜리사의 말로는 내가 어둠의 문으로 떠난 이후, 야옹이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원래 주인이 있던 고양이였으니까 주인에게 갔나 싶어 잊고 있었는데, 은한을 만나고 오니 갑자기 다시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야옹이 말이야, 은한 님이랑 조금 닮지 않았어?”

“글쎄. 전혀 안 닮은 것 같은데.”

블레이크가 강하게 부정했다.

“그런가?”

“그리고 야옹이는 주인이 데려갔어.”

“그래? 주인을 찾았어?”

“응. 황궁 마법사였는데, 퇴직하면서 함께 데리고 갔어. 고향이 엄청 멀더라.”

“다행이다.”

주인에게 갔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혹시 안 좋은 일을 겪었을까 봐 내심 걱정했었다. 정말로 주인이 데리고 간 거라면 한시름 덜었다.

“야옹.”

야옹이를 떠올리며 안심하던 찰나, 블레이크가 갑자기 고양이 소리를 냈다.

“블레이크, 뭐 해요?”

깜짝 놀란 나머지, 예전처럼 경어가 튀어나와 버렸다.

“고양이는 왜 찾아? 내가 여기 있는데.”

“…….”

“야. 옹.”

그는 나른한 음성으로 귓가에 속삭였다.

옛날에는 마냥 귀여웠는데, 지금은 묘한 색기가 돌아서 몸이 반사적으로 굳고 말았다.

“여, 여우라더니.”

“앤시아가 원하는 건 뭐든 할 수 있어.”

“변덕스러운 고양이네.”

부끄러운 감정을 숨기려고 일부러 불퉁하게 뱉는데, 블레이크가 나의 귓불을 깨물었다.

“흐읏. 뭐, 뭐예요!”

“주인님을 깨물었어.”

그가 요요하게 웃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을 정도로 매혹적인 눈빛이었다.

뭔지 몰라도 이 집사가 전부 잘못했어요, 하고 절로 고개를 숙일 만큼 파괴력이 있었다.

이 고양이는 자기가 얼마나 예쁜지 잘 알고 있는 게 틀림없다.

아주 예쁘다 예쁘다 하니까 점점 더 예뻐지네. 이 요사스러운 남자를 어떻게 하지?

황홀한 고민에 사로잡혀 있는데, 그가 돌연 눈을 처연하게 내리깔았다.

“부인은 나 하나만으로는 만족이 안 돼?”

“그걸 말이라고 해?”

블레이크 하나만으로도 심장이 버겁다. 다른 남자는 아예 관심 밖이었다.

“다른 놈한테 잘해주지 마.”

“은한 님을 말하는 거야? 그건 그냥 오랜만에 만나서 인사를 한 거잖아.”

“차 끓이는 법도 알려줬잖아.”

“내가 몰랐으니까 가르쳐준 거지.”

“그래도 싫어. 필요하면 내가 배울게. 내가 배워서 부인한테 가르쳐주면 되잖아.”

“그런 억지가 어디 있어?”

황당해서 웃음이 나왔다. 그냥 은한한테 배우면 되는데 중간에 배워서 가르쳐 주겠다니.

“나한테 배우기 싫어?”

“그런 게 아니라, 그럴 이유가 없잖아.”

“왜 없어?”

블레이크가 눈을 크게 떴다. 황당한 논리를 펼쳐놓고 되레 상처받은 표정이었다.

“만약에 내가 제이든 경한테 오카리나를 배우고 싶다고 하면, 먼저 배워서 알려주려고?”

“그 전에 제이든을 없애버리면 안 될까?”

“뭐?”

싸늘한 음성에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설마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니겠지.

“농담이지?”

“응. 그런데 부인, 오카리나를 배우고 싶어?”

“그냥 예를 든 거야.”

“왜 하필 제이든이야.”

“제이든 경이 오카리나를 연주할 줄 안대.”

“그걸 자기 입으로 말해?”

“어? 응.”

제이든은 나의 전속 호위 기사였기 때문에 늘 같이 다녔고, 다양한 대화가 오고 갔다.

나는 아무런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가, 블레이크의 눈빛이 살벌해지는 걸 보고는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아무튼 생각해봐. 내가 제이든 경한테 배우면 금방인데, 굳이 다른 사람을 거칠 필요는 없잖아. 안 그래?”

“역시 제이든은 없애는 게 좋겠어. 부인한테는 다른 선생을 구해줄게.”

“왜 결론이 그렇게 되는데?”

“농담이지, 당연히.”

블레이크는 눈가를 사르르 접으며 웃더니, 돌연 숨이 막힐 정도로 강하게 끌어안았다.

“왜 그래?”

“다른 놈 냄새를 지우려고.”

“뭐?”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어버리고 말았다.

은한의 용력은 마나와 비슷했다. 그저 나란히 서 있기만 한 거라, 잔향이 아직까지 남아 있을 리 없었다.

블레이크가 그의 흔적을 느꼈다는 것이 오히려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 게 느껴질 리가 없잖아.”

“있어. 그러니까 다른 놈 냄새 묻히고 다니지 마.”

블레이크는 나를 꼭 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우리 남편 질투쟁이네.”

“그걸 이제 알았어?”

그가 나의 볼에 입을 맞췄다. 나도 웃으며 블레이크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

“비 전하, 정말 고우세요.”

내가 노란색 드레스를 입자, 멜리사가 눈시울을 적셨다. 그러자 옆에 있던 첼시가 자연스럽게 손수건을 건넸다.

7년 사이에 멜리사는 눈물이 많아졌다. 내가 뭐만 해도 눈물을 흘린다.

새로운 드레스를 입고, 요리를 하고, 머리 장식만 바꿔도 감격하며 눈물을 펑펑 쏟아낼 정도였다.

그녀를 보면 꼭 돌아가신 할머니가 떠올랐다.

“멜리사, 왜 또 울어.”

“너무 좋아서요. 이게 꿈인지 생신지 모르겠어요.”

“꿈 아니야.”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죄송해요. 너무 주책이죠.”

“주책은 무슨. 오히려 고맙지. 그래도 너무 울지 마. 멜리사를 계속 울리면 한스한테 내가 너무 미안하잖아.”

“그 사람은 괜찮아요. 비 전하가 중요하죠.”

그, 그런 말을 해도 괜찮은 거야? 한스가 섭섭해하지 않을까?

내가 고민하는 사이 의상실 직원이 다음 드레스를 가져왔다.

“이게 마지막 드레스인가?”

“네. 오늘 준비한 드레스 중 마지막입니다.”

첼시가 대답했다.

“오늘?”

이상한 단어가 귀에 걸렸다.

“네. 내일은 엘런 의상실과 달리아 의상실에서 스무 벌의 드레스가 도착할 예정입니다.”

“뭐?!”

아니, 티 파티에서 간단하게 입을 옷을 고르는데, 무슨 후보가 이렇게 많아?

세피아궁의 보수를 마치면 본격적으로 황태자비 업무를 시작할 예정이었다.

모두들 더 쉬라고 하긴 했지만, 이만하면 충분했다.

게다가 매일 야근하며 달렸던 한국인의 정신이 남아 있기 때문인지 빈둥거리는 게 영 적성에 맞지 않았다.

지난 7년 동안 벌어진 일들과 사교계 지형, 유행, 새롭게 지정된 법률, 외국의 상황 등도 모두 파악했다.

황태자비의 업무를 다시 시작하기에 부족한 건 없었다.

블레이크와 텐스테온은 나의 귀환을 축하하는 성대한 환영식을 열어주려고 했지만, 내가 거절했다.

이미 건국제 때 귀환 파티를 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굳이 파티를 다시 열 이유는 없었다.

나는 세피아궁을 보수한 기념으로 작은 티 파티만 열기로 했다. 그러자 두 사람은 아쉬워하며, 대신 파티 준비를 자신들에게 맡기라고 하였다.

“아직 업무에 들어가기 전이잖아. 그러니까 파티 준비도 하면 안 되지.”

“블레이크의 말이 맞는다. 우리가 알아서 하마.”

그들은 합심해서 입을 모았다.

이것까지 사양하면 섭섭해할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두 사람이 ‘우리’라고 서로를 칭하며 함께하는 모습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째 상황이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의상실 직원들이 모두 떠나고 난 뒤, 나는 첼시에게 물었다.

“첼시, 드레스는 내일 오는 게 끝이지?”

“아니요. 앞으로 백 벌은 더 보셔야 합니다.”

“뭐? 그렇게나 많이?”

가벼운 티 파티였다. 파티 중에 옷을 갈아입을 것도 아닌데, 과해도 너무 과했다. 내가 경악하자, 멜리사가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그동안 못 해드린 것까지 해주고 싶어서 그러신 거예요. 부담 갖지 말고 받으세요.”

“그래도 너무 많은걸.”

지난번 건국제 때 만들었던 것과 건국제 파티가 끝나고 받은 드레스만 해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이것까지 합치면 매일 갈아입어도 다 못 입을 거다.

“이 정도로 놀라시면 안 되죠. 폐하께서 대륙에서 이름난 요리사는 모두 부르시는 것 같던데요.”

“뭐? 그게 정말이야?”

첼시의 말을 들은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네. 황태자 전하께서도 각지에서 유명한 오카리나 연주자들을 모두 불러모으라고 명령하셨더라고요.”

“뭐?!”

오카리나라니, 설마 어젯밤에 내가 한 말 때문은 아니겠지?

“왜 그러세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이래서야 말이 티 파티지 건국제보다도 화려할 가능성이 컸다.

“저기 멜리사, 첼시.”

“네, 비 전하.”

두 사람이 동시에 말했다.

“티 파티 때, 동방의 요리를 내놓는 건 어떨까?”

“동방의 요리요?”

“응. 교역선이 창에 도착할 때가 됐잖아.”

은한이 황제로 즉위한 뒤 텐스테온은 창과 동맹을 맺을 것을 선언했다.

그리고 몇 개월 전에는 두 나라 간의 공식적인 교역을 위한 배가 처음으로 출항했다.

물론 그전에도 창과의 교류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창에서 아스테릭으로 물건이 오려면 가누아 왕국을 비롯해 여러 나라를 거쳐야 했다.

그랬기에 이렇게 아스테릭과 창, 두 나라가 직항으로 교역하는 건 역사상 처음이었다.

공식적인 바닷길이 열리고, 교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양국 모두에게 긍정적인 영향이 미칠 거다.

“어떻게 생각해? 양국의 교역을 축하하는 의미도 있고 시기적으로도 괜찮을 거 같은데.”

귀부인들에게 낯선 동방의 문화를 소개할 기회도 되니 여러모로 좋은 방법 같았다.

제법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지만 멜리사와 첼시의 표정이 의외로 어두웠다.

“왜 그래?”

“물론 좋은 뜻이긴 하지만, 요즘 창국과 관련된 흉흉한 소문이 많다 보니 걱정이네요.”

“흉흉한 소문?”

창에 안 좋은 여론이 있다는 건가?

7년 동안 제국에서 벌어진 일들은 모두 공부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금시초문이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거냐고 물었지만 멜리사는 대답을 망설였다. 첼시까지 아무 말 하지 못하는 걸 보면, 나나 블레이크와 관련된 이야기인 게 분명했다.

“첼시, 솔직히 말해봐.”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첼시가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그게, 창국과 교류를 시작하면, 다시 여신의 진노를 사서 제국 전역에 큰 재앙이 닥칠 거라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황당무계한 말이었다. 창과 교류를 한다고 해서 세르가 화를 낼 리가 없다.

도대체 왜 이런 헛소문이 퍼진 거지?

창을 비롯한 동방의 나라들은 어디까지나 미지의 영역이었다. 교류가 없고 잘 모르기 때문에 알려진 것이 없었을 뿐 전체적으로 호의적이었다.

동방의 신비로움을 찬양하는 음유시인의 노래가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그런데 갑자기 적대적인 여론이 형성된 거다.

“언제부터?”

“최근 몇 달 사이에 갑자기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요 몇 달 사이 벌어진 일들이 많았다. 그중 가장 큰일이라면….

여러 가지 일들이 떠올랐지만 하나를 꼽자면 아무래도 그거였다.

“나와도 연관되어 있겠네.”

모두가 죽었다고 생각했던 내가 돌아왔다. 그리고 창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시작되었다.

그 소문에 나도 엮여 있겠지. 그러니 다들 지금껏 말하지 않은 거다.

내가 상처받을까 봐 걱정한 거겠지.

“송구합니다.”

멜리사와 첼시가 고개를 숙였다. 내 짐작이 맞은 모양이다.

누군가가 나를 노리고 있다. 그리고 그게 누구일지 대충 짐작이 갔다.

하워드 켄스웨이는 아스테릭 제국의 부대신관이었다.

이는 대신관 다음으로 높은 자리였지만, 하워드는 이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대신관이 될 사람이었다.

하워드가 오만하고 망상에 빠져 있는 자라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지난 천 년 동안 대신관은 켄스웨이의 가문과 그 방계 가문이 차지했다.

본가에서 한 번, 다섯 계의 방계 중 한 가문에서 한 번, 그리고 또 본가에서 한 번.

이건 천 년을 지켜온 규칙이었다.

물론 가문이나 정치적인 상황에 따라 본가나 방계가 각각 연속해서 대신관직을 역임한 적이 있긴 하지만 큰 틀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하워드가 대신관의 자리에 오를 차례였다.

하지만 텐스테온은 느닷없이 마론이라는 몰락 귀족을 대신관으로 지명했다.

마론은 각 지역을 대표하는 10대 신관은커녕 고위 신관조차도 아닌 남부의 촌뜨기였다.

너무 하잘것없어서 경계조차 하지 않았던, 아니 존재조차 몰랐던 놈이 하루아침에 대신관이 된 것이다.

하지만 마론이 지명된 당시는, 전 대신관이 카실 공작에게 줄을 댔다가 반역 혐의로 조사를 받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 때문에 하워드를 비롯한 고위 신관들은 변변한 항의조차 해보지 못하고 텐스테온의 명을 받들어야 했다.

천 년 동안 지켜오던 규칙이 깨졌다.

하지만 하워드는 처음으로 대신관 자리를 빼앗긴 가문의 수치로서 켄스웨이 가문의 역사에 기록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 남부 촌뜨기 놈의 방자함이 극에 달했습니다.”

“대신관이 되자마자 콘웰 백작 가문을 박살 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켄스웨이의 방계 출신인 신관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마론 대신관에 대한 불만을 성토했다.

콘웰 백작은 신전과 결탁하여 수많은 마족 재판을 일으켰다. 경쟁 상단을 없애거나 부인, 혹은 정부를 제거할 때도 이를 이용하곤 했다.

그로 인해 콘웰 백작은 막대한 부를 쌓았으며, 나이 든 부인을 내치고 어린 여자와 결혼하기를 반복했다.

단순히 신전과 결탁한 걸 넘어서 켄스웨이 가문의 비호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콘웰 백작은 켄스웨이 가문에 막대한 뇌물을 바쳤고, 하워드와도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마론은 대신관으로 즉위하자마자, 콘웰 백작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콘웰 백작은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하워드는 그의 청을 완전히 무시했다.

그 역시 자신과 관련된 증거를 없애기 급급했기 때문이다.

콘웰 백작은 사형에 처해졌고, 그와 결탁한 신관들도 줄줄이 단두대로 끌려갔다.

간신히 자신과 켄스웨이 가문에게까지 화가 미치는 건 막았으나, 하워드는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켄스웨이 가문에게 줄을 대면 보호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끊어지며, 수많은 이들이 등을 돌린 것이다.

켄스웨이 가문의 영향력 때문에 출셋길이 막혀 있던 다른 신관들은 새로운 대신관을 환영하며 그의 밑으로 들어갔다.

천 년을 이어져 온 켄스웨이 가문의 위상이 빠르게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게다가 마론은 마족 재판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서 직접 지방을 순회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수도에 비해 그나마 견고했던 지방마저 켄스웨이 가문의 힘이 줄어들고 있었다.

“부대신관님, 제발 저희를 살려 주십시오.”

“이대로 가면 서부의 고위 신관들은 모두 죽은 목숨입니다.”

마론이 쓸고 간 서쪽 지역의 고위 신관들은 연일 찾아와서 하워드를 귀찮게 했다.

“마족 재판으로 벌어드린 수입을 꼬박꼬박 바치지 않았습니까? 갑자기 처벌한다고 하시면….”

“닥치거라!”

짜증스러운 얼굴로 신관들의 말을 듣고 있던 하워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건 너희들이 여신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스스로 바친 정성이 아니었더냐! 추악하게 대가를 바란 것이냐! 참으로 실망스럽구나!”

“아, 아니옵니다. 실언하였습니다.”

“송구합니다.”

하워드의 노성에 고위 신관들은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앞에서는 저렇게 벌벌 떨면서도 속으로 욕을 뱉고 있을 거라는 건, 하워드도 잘 알고 있었다.

모두들 켄스웨이 가문의 힘을 믿고 뇌물을 바쳐왔다.

가뜩이나 중앙에서 힘을 잃고 지방의 세력으로 버티는 중이었는데, 이마저도 무너지면 켄스웨이 가문이 몰락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꼴도 보기 싫다! 모두 물러가라!”

하워드는 지방에서 온 신관들을 모두 쫓아냈다. 그러자 넓은 홀 안에는 하워드와 방계 출신의 신관들만 남았다.

“부대신관님, 저들의 말이 무엄하기는 하나, 남부 촌뜨기가 설쳐대는 꼴을 이대로 두고만 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고위 신관 한 명이 정적을 깨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하지만 하워드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런 피라미 하나가 뭐가 대수겠느냐.”

“하오나….”

“황제다. 마론은 황제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다.”

마론을 없앤다고 한들 황제는 다른 꼭두각시를 앉혀서 조종할 거다.

결국 모든 건 황제의 계략이었다.

텐스테온은 원래부터 신전에 적대적이었다.

아들이 여신의 저주에 걸리자 잠시 움츠러들었지만, 저주가 풀리기 무섭게 신전을 개혁하려 들었다.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마론이 아니라 황제를 노려야 했다.

“내 시킨 것은 제대로 수행하고 있느냐?”

“네. 부대신관님.”

10대 신관인 게일이 대답했다.

신전은 사람들의 두려움과 경외감을 양분으로 성장해왔다.

사람들은 여신의 저주를 두려워했고, 어둠의 문에 공포감을 느꼈다.

마족 재판에 끌려가지는 않을까 겁을 내며 신관들이 보이기만 해도 땅에 닿도록 머리를 조아렸다.

그런데 모든 것이 한순간에 끝나 버렸다.

황태자의 저주는 풀렸고, 어둠의 문도 사라졌다. 마족 재판마저 힘을 잃고 있었다.

텐스테온은 켄스웨이 가문뿐 아니라 신전 전체의 힘을 약화시킬 생각이었다.

모든 권력을 황권에 집중하기 위해 아무것도 모르는 촌뜨기를 꼭두각시 삼아 신전을 쥐락펴락하고 있었다.

하지만 더는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백성들의 두려움이 사라졌다면 새로운 두려움을 만들어내고, 황제의 약점이 사라졌다면 다시 만들어주면 그만이다.

하워드는 창국과 앤시아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을 퍼트리라는 지시를 내렸다.

‘동방은 이단의 나라다. 그런 나라와 교역을 하면 다시 재앙이 닥칠 거다. 천 년 만에 노여움을 푼 여신께서 다시 진노하시어, 이번에는 절대로 풀리지 않는 저주를 내릴 것이다.’

‘황태자비는 가짜다. 진짜 황태자비는 이미 죽고, 마족이 그녀의 인두겁을 뒤집어쓴 채 황제와 황태자를 홀리고 있는 거다. 당장 황태자비를 내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엄청난 재앙이 찾아올 것이다.’

‘가짜 황태자비는 창에서 보낸 마족이다. 황제가 갑자기 창과 교역을 하려는 건 모두 마족에게 홀렸기 때문이다.’

텐스테온이 창과의 교역을 선포하고 무역선을 보낸 건, 황태자비가 돌아오기 전의 일이었다. 사실만을 따지면 모순이 있었지만 그건 중요치 않았다.

그저 많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심기만 하면 된다.

겁에 질리면 이성이 마비되고, 객관적인 사실을 판단하는 능력도 사라지기 마련이었다.

하워드의 입꼬리가 오만하게 올라갔다. 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신관들의 표정은 그리 편치 않았다.

“하오나 이것만으로 충분할는지요….”

소문으로 인해 민심이 흔들리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소문은 결국 소문일 뿐이었다.

아무 일도 없이 평화로운 나날이 이어진다면, 결국 소문을 믿는 사람은 점차 줄어들 거다.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걱정하는 다른 신관들과 달리 하워드의 입가에는 여유로운 미소가 맺혔다.

“걱정할 것 없다. 곧 여신께서 대재앙을 내릴 테니까.”

***

“콜린 경,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해요.”

“비 전하의 초대를 받다니, 저야말로 영광이죠.”

콜린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나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이 영광된 순간을 영원히 간직할 것입니다.”

“하하. 정말요?”

평소와는 너무나도 다른 진중한 모습에 참지 못하고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진지한 고백을 웃음으로 받아치시다니요. 이 콜린, 상처받았습니다.”

그는 끝까지 능청을 떨었다.

“죄송해요. 사과드릴게요.”

“받아드리도록 하죠.”

“그나저나 오늘 기분이 무척 좋아 보이시네요.”

“비 전하께 초대를 받았으니까요.”

하여튼 능글맞았다.

원작에서는 오직 텐스테온을 잃은 슬픔과 복수심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유쾌한 사람인 줄 전혀 몰랐다.

“그거 말고, 다른 이유도 있어 보이는데요.”

“황태자 전하께서 후계자 수업을 시작하시면서 제가 할 일이 부쩍 줄었습니다. 덕분에 조금은 여유로워졌습니다.”

블레이크는 그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혼돈의 계곡에서 보내느라 황태자로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제도를 떠날 이유가 없었으므로, 텐스테온의 밑에서 정식으로 후계자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텐스테온은 블레이크에게 처음부터 많은 임무를 맡기며 엄격하게 교육했고, 그로 인해 콜린의 근무시간은 대폭 줄어들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봐야 매일 이어지던 야근이 사라졌을 뿐이고 여전히 업무 강도가 강했지만, 콜린은 만족스러워 보였다.

“모두 비 전하 덕분입니다.”

“제가 뭘요. 오히려 저 때문에 고생이 많으셨죠.”

7년 전부터 해야 했을 황태자 수업을 이제야 시작한 거다. 전혀 감사 인사를 받을 일이 아니었다.

“자, 어서 앉으세요. 콜린 경을 위해 특별한 디저트를 준비했어요.”

“네. 비 전하.”

자리에 앉은 콜린은 앞에 놓인 디저트를 보고는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냈다.

“처음 보는 요리군요.”

“이건 약과라고 해요. 동방의 요리죠.”

“그렇군요. 모양이 아주 예쁘네요. 비 전하께서 직접 만드신 겁니까?”

“네. 그러니까 많이 드세요. 이제 막 완성해서 더 맛있을 거예요.”

어렸을 때 이웃집에서 만드는 걸 한 번 보고, 어른이 되고 나서는 유튜브에서 봤을 뿐, 직접 약과를 만들어본 적은 없었기 때문에 많이 헤맸다.

하지만 결국은 한국에서 먹었던 것과 같은 약과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아직 폐하와 전하께서도 드시지 않으신 겁니까?”

“네. 콜린 경한테 처음으로 드리는 거예요.”

“이걸 먹으면 두 분이 저를 죽이려 들겠지만, 비 전하께서 만들어주신 음식이니 목숨을 걸고 먹어보겠습니다.”

그는 비장한 표정으로 약과를 바라보더니,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어떠세요?”

“맛있습니다. 모양만큼 맛도 좋군요.”

콜린은 약과가 입맛에 맞는지 쉬지 않고 계속 입으로 가져갔다.

최근 들어 사교계를 넘어 제국민 전체에 동방에 대한 적대감이 퍼져 있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아 보였다.

“이것도 드셔보세요. 창국의 택리차예요.”

내가 주전자에서 차를 따르자, 콜린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

“영광이지만, 저는 사양하겠습니다.”

“한번 드셔보세요. 조금 쌉쌀하지만 향이 무척 좋아요.”

“송구합니다. 차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요.”

차를 못 마시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그는 아스테릭의 국민이라면 모두가 사랑하는 홍차조차도 잘 마시지 않았다.

그의 식성을 알기 때문에 나는 더 권하지 않고, 하녀를 불렀다. 하녀는 내가 미리 준비해 두었던 음료를 가져왔다.

“그럼 이걸 드셔보세요.”

내가 딸기주스를 건네자 콜린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감사합니다.”

콜린은 핑크빛이 도는 딸기주스를 쭉쭉 들이켰다. 그는 달콤한 과일주스를 정말 좋아했다.

외모만 보면 블랙커피만 마실 것처럼 생겼는데, 정말 의외였다.

그래도 원작에서처럼 술에 절어서 지내는 것보다는 훨씬 보기 좋았다.

사실 콜린의 취향은 무척 특이한 편이었다.

아스테릭의 귀족들은 과일과 채소를 잘 먹지 않고, 육식을 즐겼다.

특히 남자들은 고기를 먹어야 정력에 좋고, 달콤한 과일은 여자와 아이들이나 좋아하는 음식이라며 먹기를 꺼렸다.

음식과 영양소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도 신분에 따라 몸의 구조가 다르다고 믿는 사람도 많았다.

심지어 아카데미까지 수료한 귀족 중에도 그런 말을 당당히 하는 사람도 있었다.

“콜린 경께서는 과일을 무척 좋아하시네요.”

“네. 어렸을 때 가난해서 과일을 먹고 싶어도 먹을 수가 없었거든요. 원래는 아카데미를 졸업하면 상인이 되려고 했습니다. 식료품 무역을 하면 원하는 건 얼마든지 먹을 수 있을 테니까요.”

콜린의 집안이 부유하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로 어려웠는 줄은 몰랐다.

조심스러울 수도 있는 이야기였지만, 콜린은 소탈하게 말했다.

그는 스스로에게 자신이 있고 자존감도 무척 강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어려웠던 시절의 이야기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는 거다.

“그런데 왜 상인이 아니라 아버님의 보좌관이 되셨어요?”

“폐하께서 직접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아버님께서요?”

“네. 어째서 보좌관직을 거부했냐고 물으시더군요.”

텐스테온이 먼저 보좌관직을 제안했는데, 상인이 되겠다면서 거절한 거였구나.

가벼운 투로 말을 하긴 했지만 그 당시에는 정말로 진지하게 상인이 될 생각이었나 보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하셨어요?”

“상인이 돼서 과일을 원 없이 먹고 싶다고 했죠.”

“솔직하시네요.”

솔직함을 넘어서 대담했다.

텐스테온은 즉위한 순간부터 강력한 황권으로 제국을 장악했다. 그런데 일개 평귀족이 감히 황제의 제안을 거부한 데다가 음식 타령까지 한 거다.

“폐하께 혼나지는 않으셨어요?”

“혼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원하는 건 얼마든지 먹을 수 있게 해줄 테니 보좌가 되라고 하셨죠. 과일주스도 원 없이 마시게 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보좌직을 수락하신 거예요?”

“네. 매일 맛있는 걸 먹을 수 있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랬었구나.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과일로 맺어진 군신 관계였다니.

“굶주려 죽는 사람이 없는 나라를 만들고 싶다고 하시더군요. 그 말을 듣고 그제 인생을 바쳐도 좋은 분이라고 생각했죠.”

콜린이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우고 진지하게 말했다.

맨날 투덜거려도 사실은 누구보다 텐스테온을 존경하고 좋아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이 딸기주스는 특별히 맛있네요.”

“전하가 직접 키운 딸기예요.”

“마법으로 키우신 거죠?”

“네. 정말 천재예요.”

블레이크는 식물을 키우는 마법을 완벽하게 익혔고, 이제 다른 마법을 배우는 중이었다.

더 어려운 마법이었지만 오히려 배우는 속도는 이전 마법보다 훨씬 빨라져 있었다.

“폐하께서 마법을 배우라고 하셔도 거부하셨었는데, 정말로 많이 달라지셨습니다.”

“블레이크가요?”

“네. 마탑주께서 황태자 전하의 스승이 되고 싶다고 찾아온 적도 있었지만 단번에 거절하셨었죠.”

빛의 마법에 대한 자료는 사라졌지만, 다른 마법 연구는 여전히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마나마다 각기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지만, 마법의 기초라면 다른 마법사에게 배워도 되었을 거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그러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요. 이렇게나 재능이 있는데.”

다들 블레이크가 검술의 천재라고 말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마법 재능도 절대 뒤처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뛰어나면 뛰어났지.

“아마도 비 전하를 보내고 얻은 힘이니 달갑지 않으셨던 게 아닐까요?”

“…….”

그런 거라면 정말 바보 같았다. 내가 어떻게 됐을 줄 알고.

고통과 경멸 속에서 살다가 저주에서 벗어났으면 행복하게 즐기고 살았어야지.

“물론 제가 전하의 마음을 알 수는 없죠. 그저 추측일 뿐이니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콜린은 나를 위로하며, 약과를 입에 넣었다.

“비 전하가 계시면 주변이 밝아집니다. 저는 그 포근함을 무척 좋아합니다. 긴장이 풀리거든요.”

“따뜻한 차를 마시면 더 편안해지실 거예요.”

“저는 딸기를 배신할 수가 없네요.”

그가 능청스럽게 답하며 딸기주스를 마셨다.

그 모습을 보니 자연스럽게 웃음이 나왔다. 콜린과 함께 있으면 오래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마음이 편했다.

“콜린 경.”

“네, 비 전하.”

“요즘 창국에 관한 근거 없는 헛소문들이 퍼지고 있다고 들었어요.”

나의 말을 들은 콜린은 살짝 당황한 듯했지만 이내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갔다.

“새로운 것에 대한 걱정은 언제나 있는 법이니까요.”

“제가 창에서 보낸 마족이라서, 폐하와 전하의 눈을 흐리고 제국을 수렁에 빠트린다는 말도 들리더군요.”

첼시를 통해서 나와 창에 대한 소문을 모두 들었다.

몇 달 사이 갑자기 시작된 괴소문은 사교계를 중심으로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도 아버님과 블레이크의 지시였겠지. 내가 알면 속상해할까 봐 나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입단속을 시킨 거다.

콜린도 이번에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지 못했다.

“비 전하, 그것은 금방 사라질….”

그는 어떻게든 나를 안심시키려 했다. 하지만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신전 측의 소행인가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지금 제국에서 공공의 적과 두려움을 만들어야 할 집단은 그곳뿐이니까요.”

소문이란 건 크게 두 가지였다.

자연스레 퍼지는 이야기, 또는 누군가가 분명한 의도를 갖고 악의적으로 만들어내는 소문.

그리고 후자의 경우 이해관계가 엮여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한국에서도 경쟁사에서 역바이럴 업체를 고용했다거나, 라이벌에 대한 악소문을 퍼트리고 다닌다는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었다.

만약 나만 음해했다면, 사교계 쪽의 누군가가 퍼트린 소문이라고 생각했을 거다.

황태자비가 되길 꿈꾸다 좌절했거나, 나로 인해 사교계의 입지가 줄어드는 게 싫어서 악담을 퍼트렸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나뿐만이 아니라 창을 함께 노렸다.

여신의 저주와 마족을 운운하며 제국민들의 두려움을 자극했고, 소문이 퍼지는 속도도 이상할 만큼 빨랐다.

수도뿐만이 아니라 지방에서도 이런 말이 돌고 있다고 했다.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며 자연스럽게 퍼지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퍼트리고 있는 거다.

이 정도로 계획적이고 빠르게 움직이는 걸 보면, 분명 커다란 세력임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지금 이러한 소문을 계획적으로 퍼트릴 능력이 있으며, 제국민들을 공포에 몰아넣어야 할 이유가 있는 곳은 오직 신전뿐이었다.

신전은 ‘여신의 저주, 어둠의 문, 마족 재판’에 대한 사람들의 두려움을 바탕으로 힘을 유지해왔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그 세 가지가 동시에 무너졌다.

그러니 새롭게 공포를 심어줄 만한 대상이 필요했을 거다.

미지의 세계인 ‘창’, 그리고 어둠의 문이 사라짐과 동시에 살아 돌아온 나는 그들에게 있어 아주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으로 보였을 거다.

“역시 비 전하십니다.”

콜린은 더 이상 숨기지 않고 순순히 인정했다.

“누가 주도하고 있죠? 부대신관인 하워드 켄스웨이인가요?”

“그것까지 알고 계셨습니까?”

“지금 가장 타격을 많이 받았으며, 또 초조해할 사람이니까요.”

하워드 켄스웨이는 차기 대신관으로 내정된 인물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마론이 대신관으로 발탁되며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었다.

켄스웨이 가문 자체의 영향력도 예전만 못하다고 들었다.

“역시 비 전하께는 숨길 수가 없네요. 하지만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폐하께서 곧 처결하실 겁니다.”

“신경 안 써요. 어차피 거짓말이니까요. 다만 소문에서 그치지 않고, 또 다른 일을 벌이진 않을지 걱정이네요.”

켄스웨이. 예전에는 그저 신전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가문으로만 여겼다.

하지만 천 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고 난 뒤,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천 년 전 필립은 지독히도 이기적인 데다 고독한 인간이었다. 자기 자신 말고는 아무도 믿지 못했다.

그런 필립이 유일하게 신뢰하는 충복이 한 명 있었다. 그자의 이름은 ‘로건 켄스웨이’였다.

지금 켄스웨이는 젤칸 제국 시절부터 빛의 여신을 섬겨온 유서 깊은 신관 가문으로서 만인의 존경을 받았다. 하지만 그건 거짓이었다.

로건 켄스웨이는 평민 출신의 용병이었다. 켄스웨이라는 성도 필립이 하사한 거다.

나는 라온텔이었던 시절의 기억을 더듬었다.

내가 살아 있을 때까지만 해도 로건 켄스웨이는 장군이었고 신전과 아무런 관련도 없었다. 그런데 내가 죽고 나서 갑자기 대신관에 된 거다.

필립은 어째서 로건 켄스웨이를 대신관에 임명하고, 천 년 동안 신전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을 준 걸까?

필립은 자신이 여신의 선택을 받은 척했지만, 사실은 세르의 힘을 빼앗고 어둠의 문에 봉인했다.

여신의 저주도 자기가 만들어 낸 거다.

이런 사실을 감추려면 대신관을 자기 사람으로 심는 게 당연할 거다.

물론 켄스웨이 가문이 지금껏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은 단순히 그들의 수완이 뛰어났을 뿐, 필립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걸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단순히 소문만 퍼트리는 거라면, 소문이 거짓이라는 게 확인되는 순간 차차 잠잠해지겠지만…. 만약 다른 일을 벌인다면 어떡하지?

심장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

“하워드, 그놈이 설치는 꼴을 언제까지 참아야 합니까!”

블레이크는 분통을 터트렸다.

앤시아에 관한 악의적인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하지만 범인이 누군지 알고 있음에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블레이크는 당장이라도 가서 하워드와 그 세력들의 숨통을 끊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텐스테온은 그를 만류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언제까지 기다리란 말씀이십니까!”

블레이크는 앤시아를 위해서 뭐든지 해주고 싶었다.

과거 그녀가 자신을 지켜주었듯, 이번에는 자신이 앤시아를 지켜주고 싶었다.

그녀가 매일 행복 속에 살아가길 원했다. 아무런 걱정도 없는 밝은 빛의 길을 걸어가길 바랐다.

앤시아를 위해서라면 블레이크는 뭐든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앤시아가 돌아오자마자 온갖 비열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괴물이라는 낙인을 찍었던 놈들이 이제는 앤시아를 두고 마족이라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블레이크는 소문의 근원인 켄스웨이 가문은 물론이고 함부로 입을 놀리는 놈들도 용서할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고통을 준 건 참을 수 있지만, 앤시아에게 티끌만 한 생채기라도 남기는 건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조금만 더 기다리거라. 곧 놈들의 덜미를 잡을 것이다. 앤시아를 위해서라도 참아야 한다.”

하워드의 목을 베는 건 간단했다. 하지만 그런 방법으로는 소문을 없앨 수가 없었다.

텐스테온은 소문의 속성을 잘 알았다.

블레이크가 저주에 걸렸을 때, 칼을 품은 말들이 어떻게 퍼져 나가는지 똑똑히 지켜보았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조심스러웠다. 특히 이번 일은 더 신중히 움직여야 했다.

켄스웨이 가문은 천 년 동안 신전을 지배해왔다.

아스테릭 제국에선 켄스웨이 가문이 곧 신전이었다. 그들을 여신처럼 믿고 따르는 이들도 많았다.

신전에서 앤시아와 창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을 퍼트린 증거는 찾았지만, 이것만으로는 움직일 수 없었다.

설령 재판장에 세운다고 한들 그들이 자신들은 진실을 말했을 뿐이며 모든 소문은 사실이라고 주장한다면, 오히려 이쪽이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마족인 앤시아가 여신을 수호하는 켄스웨이 가문을 없애기 위해서 황제와 황태자의 눈과 귀를 흐렸다고 생각할 게 뻔했다.

아직까지는 뒤에서 은밀하게 수군거리는 가십에 불과했지만, 하워드를 잡아들이면 그것을 기점으로 악랄한 소문들이 수면 위로 올라올 가능성도 높았다.

“천 년 동안 쌓은 탑이다. 어설프게 건들었다가는 역효과가 날 거다. 한 번에 제대로 부숴야 한다.”

기회는 한 번뿐이다. 켄스웨이 가문과 소문을 전부 무너뜨릴 준비가 되었을 때, 그때 움직여야 한다.

말은 검보다 독하고 질기다. 어설프게 건드렸다가 실수를 하게 되면 걷잡을 수가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켄스웨이 가문과 그 방계까지 모두 몰락한 뒤에도 앤시아가 마족이라는 소문만은 살아남아서 그녀를 끈질기게 괴롭힐 수도 있었다.

“알겠습니다.”

블레이크 역시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치미는 분노를 애써 억눌렀다.

“하지만 때가 되면, 놈들의 처분은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물론이다. 우리 앤사아를 건들면 어찌 되는지, 전 대륙에 똑똑히 알려주거라.”

“네. 태어난 걸 후회하게 만들어주겠습니다.”

텐스테온과 블레이크의 목소리에 서늘한 살기가 뚝뚝 흘러내렸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거라.”

안으로 들어온 시종은 집무실에 가득 차 있는 살기에 화들짝 놀라서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언제나 무서운 두 사람이었지만, 오늘은 특히 더 분위기가 살벌했다.

“무슨 일이냐?”

“비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시종은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

“비 전하, 들어가시죠.”

나는 시종의 안내를 받으며.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아버님, 블레이크, 저 왔어요.”

“부인.”

블레이크가 소파에서 얼른 일어나며 나에게 다가왔다.

“어서 오거라.”

텐스테온도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반겼다.

“정무를 보고 계시는데 제가 방해한 거 아니에요?”

내가 오기 전까지 두 사람은 함께 소파에 앉아서 대화 중이었던 것 같았다.

“아니야. 그냥 쉬던 중이었어.”

“그래. 가볍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두 사람이 마주 앉아서 수다를 떨었다니.

황태자 수업을 하며 계속 함께 있었더니 조금씩 사이가 좋아지는 모양이다.

“무슨 이야기를 하셨어요?”

“은한에게 받은 씨앗으로 택리차를 키웠다면서.”

“네. 블레이크랑 함께 심었어요. 오늘은 차도 끓여 왔어요.”

“어서 마셔보고 싶구나.”

“얼른 식사하러 가요.”

나는 환하게 웃었다.

우리는 하루에 한 번씩은 함께 모여서 식사를 했다.

옛날에는 블레이크가 밖으로 나갈 수 없었기 때문에 함께 모이더라도 아모리아궁에서만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요즘은 주로 필리아궁에서 식사할 때가 많았다.

블레이크가 후계자 수업 때문에 필리아궁에 머무는 시간이 많았고, 나도 하루에 한 번은 아버님을 뵈러 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필리아궁이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아버님, 어떠세요?”

“향이 무척 좋구나.”

텐스테온은 택리차를 천천히 음미했다.

“그렇죠? 저도 요즘 매일 마시고 있어요.”

“네가 끓어서 더 맛있는 거 같다.”

“아니에요. 블레이크가 실력이 뛰어난 거죠. 마법으로 찻잎을 키웠는걸요.”

“앤시아랑 함께 키운 거지.”

블레이크가 싱긋 웃으며, 먹기 좋게 썰린 스테이크를 내 앞에 가져다 놓았다.

이제는 나의 몸에도 익숙해져서 일상생활을 하는 데 아무런 지장도 없었지만, 블레이크는 여전히 음식을 썰어주고는 했다.

“나는 신경 쓰지 말고, 블레이크야말로 많이 먹어.”

“많이 먹고 있어. 그리고 부인이 먹는 모습을 보는 게 더 좋아.”

블레이크는 눈가를 접으며 예쁘게 웃었다. 텐스테온도 거들었다.

“그래, 많이 들거라. 아직도 이리 약해서 쓰겠니.”

“저 많이 쪘어요.”

“그걸로는 안 된다.”

“맞아. 부족해. 더 먹어야지.”

두 사람은 나를 살찌우지 못해서 안달이었다.

나도 블레이크가 조금이라도 야위면 걱정하면서 매일 식사를 챙기던 때가 있었으니 그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두 분은 저한테 할 말 없어요?”

“응?”

“무슨 말이니?”

“저와 창국에 대한 소문 말이에요.”

내가 그 일을 말하자 두 사람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

“앤시아….”

“그, 그게 말이지….”

“숨기려고 하지 마세요. 이미 다 알고 있는걸요.”

“…미안하구나.”

“부인의 귓가에 머물 가치도 없는 쓰레기 같은 말이었어. 전부 치워버린 다음에 알려줄 생각이었는데….”

그들은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콜린한테 말했을 때보다도 훨씬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미안해하실 것 없어요. 전부 저를 위해서 그러신 거잖아요.”

나도 블레이크에 대한 안 좋은 소문들이 그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했었다. 그들이 무슨 마음으로 그랬는지 이해한다.

그때 블레이크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블레이크…?”

“당장 가서 그놈들을 쓸어버리고 올게.”

블레이크의 눈동자에 살기가 가득했다.

나는 깜짝 놀라서 그를 붙잡았다.

“아, 아니야! 그러지 마! 그러라고 말한 게 아닌걸.”

상대는 부대신관이다. 카실 공작 때보다도 조심스럽게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그때는 황실의 문제였지만 이번에는 신전과 엮여 있었으니까.

나는 블레이크를 다시 의자에 앉힌 뒤, 두 사람에게 말했다.

“두 사람이 저를 얼마나 걱정하는지 잘 알아요. 하지만 다음부터는 이러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저, 그렇게 약하지 않아요. 그리고 우리는 가족이잖아요. 고민이 있으면 함께 해결해야죠.”

“미안해. 다시는 안 그럴게.”

블레이크가 나의 손을 꼭 잡았다.

“앞으로는 반드시 말하마. 절대로 숨기는 일은 없을 거다.”

텐스테온도 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소문에 대해 아는 사실을 모두 말해주었다. 다행히 말을 퍼트리는 것 말고 다른 움직임은 없는 것 같았다.

“조금 이상하네요. 그런 소문들은 교역이 시작되면 저절로 힘을 잃을 텐데.”

어차피 거짓된 소문이다.

창과의 교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동방의 도자기나 비단 등 다양한 물건들이 들어올 거다. 후추 같은 향신료의 가격도 많이 내려갈 터였다.

처음에는 소문 때문에 막연한 경계심을 보일 수도 있지만 얼마 가지 못할 거다.

사람은 자신의 이득에 약한 법이니까.

금값과 맞먹을 정도로 고가품인 후추의 가격이 내려가는데, 헛소문만 믿고 거부할 사람이 있을까?

사람들은 결국 창의 물건을 받아들일 거고, 그리되면 자연스럽게 교역에 대한 시선도 긍정적으로 바뀔 터였다.

“우리도 그 점이 수상해서 조사했지만, 특별한 움직임은 없었어.”

블레이크가 말했다.

“소문만으로 여론을 끌고 갈 생각이거나, 아니면 정말로 은밀히 움직이고 있는 거겠네.”

“대신관이 곧 제도에 도착할 것이다. 켄스웨이 가문의 악행과 비리에 관한 증거들도 가지고 온다고 했으니 조금 더 기다려 보도록 하자.”

“네. 아버님.”

고개를 끄덕이는데, 콜린이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폐하, 창으로 떠났던 교역선이 돌아왔습니다.”

“뭐라?”

텐스테온의 미간이 좁혀졌다. 나와 블레이크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쯤이면 교역선이 창에 당도할 시기였다. 설령 예상보다 일찍 창에 도착했다고 한들 벌써 아스테릭으로 돌아올 리가 없었다.

분명 무언가 문제가 생긴 거다.

심각한 상황임을 말해주듯 콜린의 안색도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이냐?”

“교역선에서 탄시놀이 발병했다고 합니다.”

“탄시놀이요?”

나는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탄시놀은 과거 필립이 여신의 힘을 비틀어서 만들어냈던 병이다.

그로 인해 젤칸 제국이 멸망했고, 나는 락슐을 잃었다. 아직까지도 로움족이 핍박을 받는 원인이기도 했다.

천 년 전의 과거가 떠오르며 나도 모르게 블레이크의 손을 강하게 붙잡았다.

“괜찮아. 걱정하지 마.”

내가 탄시놀 때문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했는지, 블레이크가 나의 손을 맞잡으며 안심시켜주었다.

그의 체온을 느끼니 조금은 마음이 진정되었다.

교역선에 탄시놀이 퍼지고 선원들이 하나둘 쓰러지자, 선장은 결국 창으로 가는 걸 포기하고 회항했다고 한다.

블레이크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가겠다고 했다.

그는 여신의 힘을 지녔고, 탄시놀에 전염될 일도 없었다. 그러니 블레이크가 가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나는 항구로 떠나려는 그를 다급히 붙잡았다.

“안 돼! 블레이크, 가지 마!”

“앤시아….”

“내가 갈 테니까, 여기 있어!”

탄시놀에 걸렸던 락슐의 모습이 계속 떠올랐다.

물론 지금의 블레이크는 병에 걸릴 일이 없지만 그래도 걱정되었다.

블레이크는 커다란 손으로 나의 얼굴을 꼭 감쌌다.

“걱정하지 마. 나는 괜찮아. 저주가 풀린 뒤로 감기에 걸린 적도 없는걸.”

“알아. 하지만 나도 여신의 힘을 받았어. 나도 병에 걸릴 리가 없어. 그러니까 내가 갈게.”

“그건 안 돼.”

그는 고개를 저었다.

“탄시놀이라면 내가 잘 알아. 어둠의 문에서 탄시놀에 대한 것도 봤었어. 그러니까 내가 가는 게 훨씬 나아!”

“안 돼. 위험해.”

“나는 안 위험해! 빛의 마법사인걸. 지금 전 대륙에서 치료 마법을 나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어.”

나는 블레이크를 설득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슬프게 가라앉았다.

“부인은 아직도 내가 못 미더워?”

“그런 게 아니라 걱정이 돼서 그래. 그냥 내가 불안해서 그런 거야….”

나는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러니까 내가 가게 해줘. 정말로 탄시놀이라면 내가 가는 게 맞아.”

내가 고집을 꺾지 않자 블레이크는 커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그럼 함께 가자.”

“나 혼자 가면….”

“그건 절대 안 돼.”

블레이크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 이상은 절대로 양보할 것 같지 않았다.

“응. 알았어.”

나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나와 블레이크, 그리고 제5 기사단은 항구로 향했다.

항구에 도착하자, 수많은 신전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탄시놀은 여신이 내린 병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예로부터 신전에서 관리하였다.

그러니 신관들이 온 것 자체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분위기가 이상했다. 항구가 구경꾼들로 인해 시끌벅적했다.

신관과 성기사들이 제대로 통제를 하지 않은 탓이었다.

전염병이 발생하면 피해를 막기 위해서 사람의 출입을 철저하게 차단해야 한다. 그런데 신전 사람들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신관과 성기사의 목에는 빛의 마나석으로 만든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하지만 구경꾼들에겐 전염병을 막을 어떤 예방 장치도 없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설마 이번 일을 이용할 생각인 건가?

항구 안쪽으로 들어가자, 짐작이 맞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바다 위에서 탄시놀이 퍼졌다! 바다 건너 이단과 교류를 하려 하자, 여신님께서 진노하신 거다!”

10대 신관인 게일이 연설을 하듯 우렁차게 외쳤다.

그 옆에는 다른 고위 신관들을 비롯해 부대신관인 하워드 켄스웨이의 모습도 보였다.

부대신관 쪽 사람들은 모두 모였군.

단순히 탄시놀이 발병했다고 해서 고위 신관들이 우르르 몰려오지는 않는다.

이번 기회에 자신들이 퍼트린 헛소문을 사실인 것처럼 공고히 할 목적이겠지.

블레이크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걸 느끼고는 나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앤시아, 먼저 돌아가.”

“나는 괜찮으니까 걱정할 것 없어.”

사람이 아픈 걸 이용해서 자신의 잇속을 챙기려 들다니.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제국의 빛이신 황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우리를 발견한 부대신관과 신관들이 블레이크에게 인사를 올렸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그들은 나를 무시했다.

“부대신관, 이게 무슨 수작질입니까?”

블레이크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깔렸다.

주변의 공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지만, 부대신관은 오히려 교활한 미소를 머금었다.

“저 여인이 진짜 황태자비 전하인지 알 수 없지요.”

부대신관의 말에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그 소문이 사실이었어?”

“정말로 마족인 거야?”

구경꾼들이 웅성거리자, 에드온이 고함을 쳤다.

“닥치거라! 감히 무슨 망발이냐!”

“황족을 모욕한 죄가 얼마나 큰지 모르느냐!”

다른 기사들도 단속에 나서자,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다.

넓은 항구가 적막으로 가득 찼다.

나에게 인사를 올리는 문제를 두고 블레이크와 부대신관은 한 치의 물러남도 없이 대치했다.

“환자들은 어디 있죠?”

나는 적막을 깨며 질문을 던졌다. 지금은 나에 대한 소문보다도 환자들이 중요했다.

탄시놀은 전염성이 강하다. 한시라도 빨리 막아야 했다.

하지만 부대신관은 나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무시했다.

블레이크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검을 뽑으려 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게일이 얼른 대답했다.

“교역선 안에 있습니다.”

“치료는 아직 시작하지 않았나요?”

내가 물어보자, 하워드 부대신관이 오만한 비소를 머금었다.

“탄시놀이 뭔지 모르는 겁니까? 이미 여신의 저주를 받은 배입니다. 교역선째 불에 태울 것입니다.”

“뭐라고요?”

아직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치료는커녕 멀쩡한 사람까지도 태워서 죽이겠다고?

전염병이 퍼졌다는 소식이 들려도 자신들은 안전한 곳에서 몸을 보신한 채, 하위 신관들만 보내던 고위 신관들이 모조리 집합한 이유를 알았다.

처음부터 선원들을 모두 죽일 생각이었구나. 애초에 환자들과 접촉할 생각이 없었으니 안심하고 이곳에 나타난 거였다.

“탄시놀인 건 확실한가요?”

저들은 환자들을 보지도 않았으면서 선원들이 탄시놀에 걸렸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신관들이 확인했습니다. 여신님의 저주를 받은 자들이니 살려둘 수 없습니다.”

“제대로 본 건 맞나요?”

리차드의 어머니는 독감에 걸렸다가 탄시놀로 몰려서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다.

특히나 탄시놀의 초기 증상은 감기와 비슷하기 때문에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웠고, 증세가 나타난 뒤에도 다른 병과 착각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어떻게든 저들을 보호하고 싶으신가 봅니다.”

하워드가 빈정거렸다. 나를 어떻게든 마족으로 엮으려는 의도가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부대신관은 저들을 어떻게든 없애고 싶으신가 봅니다.”

“그럴 리가요. 저는 빛의 여신을 섬기는 자입니다. 어찌 살생을 원하겠습니까. 하지만 마족으로부터 제국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지요.”

“사리사욕을 위해 여신의 이름을 팔지 마세요.”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감히 신전을 모욕한 겁니까!”

하워드가 발끈했다. 그러자 블레이크가 서늘하게 뱉었다.

“황태자비의 말에 틀린 것이 있나?”

아무리 황태자라도 부대신관에게는 예의를 지켜야 한다.

블레이크가 대신관인 마론과 격의 없이 지내긴 했지만, 그건 마론의 허락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말은 급격히 짧아졌다.

“황실을 능멸하고 나의 비를 모욕한 죄는 어찌 물어야 할까?”

블레이크가 검집에서 검을 꺼냈다. 그러자 제5 기사단과 성기사들도 동시에 검을 뽑아 들었다.

두 세력이 팽팽하게 대치하며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았다.

그때 선박에서 남자의 외침이 들렸다.

“살려 주십시오! 제발 살려 주십시오!!”

선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배에서 뛰쳐나오자, 하워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교역선의 선장을 맡은 건 발리 자작이라고 했지.

그러자 게일이 다급히 명했다.

“뭐 하는 게냐! 여신의 저주를 받은 죄인이다! 당장 막아라!”

성기사들이 그를 붙잡았다. 하지만 선장은 끌려가면서도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살려주십시오! 병에 걸리지 않은 선원들도 있습니다! 제발 목숨만은 구해주십시오!”

하지만 사람들은 동정보다는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의 피부는 창백했고, 각질이 두껍게 일었다.

멍인지 반점인지 모를 것들이 전신에 퍼져 있었고, 눈은 푹 꺼졌으며, 그가 소리를 지를 때마다 이가 빠지고 피가 흐르는 잇몸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탄시놀이다!”

“꺄악!”

“당장 죽여라!”

탄시놀이라는 걸 알고도 몰려든 구경꾼들은 막상 환자를 보자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신관과 성기사들조차도 겁을 먹을 표정이 역력했다. 제5 기사단도 마찬가지였다.

“당장 멈추거라. 선장을 풀어줘.”

하지만 나는 성기사를 향해 냉정하게 명을 내렸다.

“아, 네….”

성기사들은 잠시 하워드의 눈치를 보았지만, 이내 기다렸다는 듯 손을 놓고 선장에게서 떨어졌다.

그들 역시 탄시놀에 걸린 환자와 접촉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던 거다.

나는 선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블레이크가 깜짝 놀라며 나의 손을 붙잡았다.

“앤시아!”

“걱정 마. 괜찮으니까.”

나는 그의 손을 힘주어 잡은 뒤, 다시 선장에게 다가갔다.

내가 걱정됐는지, 블레이크도 함께 걸어왔다. 나는 그의 행동을 말리지 않았다.

에드온을 비롯한 5기사단의 기사들도 우리의 뒤를 따랐다.

“제국의 빛이신 황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그, 그리고….”

선장인 발리 자작은 아픈 와중에도 블레이크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나를 보며 잠시 눈치를 살폈다.

내가 누군지 모르는 거다. 몇 달 전에 떠났으니, 황태자비가 귀환했다는 소식도 듣지 못했을 거고.

“앤시아 비 전하시다.”

에드온이 알려주자, 선장이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제국의 축복이신 황태자비 전하를 뵈옵니다.”

“괜찮으니 일어나세요.”

“비 전하, 제발 저희를 살려주십시오!”

선장은 오히려 더 머리를 조아리며 간절하게 빌었다. 나는 그를 일으켰다.

내가 환자를 직접 만지자 주변이 술렁거렸다. 하지만 나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발리 자작, 걱정하지 마시고, 우선 어떻게 된 건지 말씀해 주세요.”

“처음에는 순조로웠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 두 사람씩 몸에 이상이 나타났습니다.”

“어지럽고, 치아에 문제가 생겼나요?”

“네.”

“잇몸에 출혈이 있고, 혈뇨와 혈변을 보기도 하고요?”

“네! 맞습니다!”

그가 거세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걱정이 되는지 얼른 덧붙였다.

“하지만 탄시놀은 아닐 겁니다. 기침은 하지 않았습니다.”

“헛소리입니다! 저자는 탄시놀에 걸린 것이 분명합니다! 마족의 나라와 손을 잡으려 하니 여신님께서 진노하여 벌을 내린 겁니다! 여신에게 버림받은 자들입니다. 이미 마족이나 다름없습니다!”

하워드는 노기가 성성한 목소리로 외쳤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지금 화내야 할 사람이 누구인데.

“아니요. 저들은 탄시놀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나는 부대신관의 말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같은 마족이라고 편을 드시는 겁니까?”

그는 이제 조금의 눈치도 보지 않은 채 나를 마족이라 칭하였다.

자신이 소문을 퍼트렸다는 사실을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부대신관, 정말로 내가 마족이라고 생각하면 재판을 신청하세요. 아, 물론 무고한 자를 마족으로 몰았을 때 어떤 처벌이 내리는지는 알고 계시죠?”

“…….”

부대신관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역시 내가 마족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 소문을 퍼트렸을 뿐, 마족 재판까지 일으키고 싶은 생각은 없겠지.

“…지금 협박하는 겁니까?”

“제가 마족이라며 의문을 제기한 건 부대신관 아닌가요? 어째서 협박이라고 느끼시는지 모르겠네요.”

“말을 돌리지 마십시오! 저들은 탄시놀에 걸렸습니다. 당장 없애야 합니다.”

“아니요. 다시 말하지만 저건 탄시놀이 아닙니다.”

탄시놀에 걸리면 피를 토하고 피부가 검게 변하며, 결국 신체의 골격이 문드러진다.

지금 발리 선장의 잇몸에서는 피가 흘렀고, 이가 빠져서 외모가 변했다. 멍이 들어서 피부가 검게 보이기도 했다.

언뜻 보면 탄시놀과 비슷했지만, 이건 전혀 다른 병이었다.

“그럼 무엇이란 말입니까!”

하워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당한 척하지만 사실은 불안해하는 게 느껴졌다.

저들은 사실 선원들을 제대로 진찰하지도 않았을 거다.

대충 탄시놀과 비슷하니, 이를 이용해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여론을 만들 생각만 했겠지.

수십 명이 넘는 선원들의 목숨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을 거다.

그러니 혹시라도 자신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초조해하는 거다.

“괴혈병입니다.”

“괴혈이요?”

순간 하워드의 얼굴에 서렸던 긴장감이 사라졌다.

“처음 듣는 병이군요. 설마 지금 지어내신 겁니까?”

“아니요. 책에서 봤습니다.”

이 세계가 아니라 한국에서 본 거긴 하지만.

괴혈병은 대항해시대 때 유럽의 선원들을 괴롭혔던 질병이었다.

이 병에 걸리면 빈혈이 생기고, 출혈로 인해 쉽게 멍이 들며, 잇몸에 피가 나고 이가 빠지기도 한다. 혈뇨와 혈변 또한 괴혈병의 증세였다.

또한 피부가 창백하고 눈이 퀭하며, 각질이 두꺼워지는 것 역시 괴혈병에 걸렸다는 증거였다.

이는 지금 발리 선장의 증상과 똑같았다. 다른 선원들 역시 같은 병일 거다.

“무슨 책인지요?”

“봐도 모르실 텐데.”

“나를 무시하는 겁니까?”

하워드가 발끈했다. 하지만 나는 태연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오해하지 마세요.”

“오해요?”

“저는 언어능력자거든요. 전 세계의 모든 책을 읽을 수 있죠.”

내가 언어능력자라는 사실을 밝히자 주변이 다시 술렁였다.

하워드도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지만, 노회한 인간답게 금방 표정을 숨겼다.

“금시초문이군요. 그것도 지금 지어내신 건 아니겠죠.”

블레이크에게서 북풍한설 같은 살기가 느껴졌다.

그는 당장이라도 하워드에게 검을 휘두를 기세였다. 하지만 나는 그의 손을 꼭 잡았다.

굳이 그가 손을 더럽힐 이유는 없었다. 나는 진실을 말하고 있고, 어설픈 거짓은 결국 들통나게 되어 있으니까.

“제가 저들을 치료한다면, 증명이 되겠습니까?”

“탄시놀을 치료제가 없습니다. 한번 걸리면 나을 수가 없죠. 천 년 동안 아무도 고치지 못했습니다. 언어능력자라면서 그 사실도 모르는 겁니까?”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선원들은 탄시놀에 걸린 게 아니니까요.”

“금단의 능력이라도 쓰시려는 겁니까?”

마족의 힘을 쓰겠냐는 뜻이었다. 설사 내가 치료에 성공하더라도 마족의 힘으로 몰아가겠다는 건가. 비열한 잔머리를 굴리는군.

“아니요. 마법이나 마나석은 사용하지 않을 겁니다.”

“그럼 어떻게 고친단 말입니까?”

“딸기요.”

괴혈병의 증상이 심해지면 결국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

실제로 이 병으로 인해 무수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심각한 증상에 비해서 치료 방법은 간단했다. 약도 필요 없다.

그저 비타민 C를 섭취하기만 하면 된다.

괴혈병은 비타민 C 부족으로 생기는 병이었다.

선원들은 장거리 항해를 하며 오랫동안 바다에 머무는 동안, 비타민 C가 들어간 음식을 제대로 섭취하지 못했다. 그래서 병에 걸린 거다.

특히나 아스테릭의 남자들은 과일을 잘 먹지 않는다.

과일을 먹으면 정력이 약해진다는 속설이 퍼진 데다가 고기만이 남자의 음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평소에는 다른 요리들과 곁들여서 조금이라도 먹게 되지만, 배에서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항해를 위해서 준비하는 음식들은 주로 말린 고기와 빵, 치즈 등이었다. 과일은 아예 빠져 있었다.

원작에서는 창국의 사람들이 아스테릭으로 건너오는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저들처럼 넓은 바다를 건너왔음에도 괴혈병을 호소하는 사람은 없었다.

창은 육식보다는 과일과 채소 위주의 식문화가 발달했다.

항해를 떠날 때도 과일이나 채소를 위주로 음식을 준비했을 테니, 괴혈병이 발생하지 않은 거다.

“딸기라니. 농담하시는 겁니까?”

“그럼 라임이나 레몬으로 할까요?”

“뭐라고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겁니까! 도대체 무슨 수작입니까? 과일에 마족의 힘이라도 심어놓을 생각입니까?”

내가 거짓말을 지어낸다고 생각했는지, 하워드는 완전히 긴장을 풀며 막말을 쏟아냈다.

“만약 제가 정말로 병을 치료한다면 어쩌실 겁니까? 지금 그 발언을 책임질 수 있습니까?”

“물론이죠.”

“부대신관 자리에서 물러날 수도 있습니까?”

“그, 그건….”

“왜요? 자신 없습니까? 그렇다면 확실하지도 않은 내용으로 감히 나와 황실을 모욕한 겁니까?”

내가 강경하게 말하자, 구경꾼들도 나의 말에 동의하며 저마다 말을 쏟아냈다.

“뭐야, 거짓말이었어?”

“탄시놀도 아니었던 거야?”

“비 전하께서는 언어능력자시래잖아. 다 알고 계시겠지.”

“그럼 전부 거짓부렁인 거야?”

“여신의 저주도 푸신 분이라고. 신전이 천 년 동안 하지 못했던 일을 해내셨는데, 당연히 더 잘 아시겠지.”

참으로 쉽게 휩쓸리는 사람들이었다. 어찌 됐든 자신들을 비난하는 말들이 쏟아지자, 하워드는 다급히 말했다.

“좋습니다. 물러나겠습니다. 대신 정말로 탄시놀이 맞는다면 이에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 할 겁니다.”

“무얼 원하죠?”

“스스로 마족 재판을 받으시죠.”

마족 재판을 신청했다가 무고로 밝혀질 경우, 신고자는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하지만 내가 스스로 마족 재판을 신청한다면, 결과에 대한 책임도 전부 내가 지게 된다.

마족 재판이 시작되는 순간, 하워드는 자신의 모든 권력을 동원해서라도 나를 진짜 마족으로 몰아갈 거다.

하지만 만약 실패하더라도 책임은 지지 않기 위해서 나에게 마족 재판을 신청하라는 거다.

참으로 비열한 인간이었다.

자기는 직위에서만 내려오고, 나한테는 목숨을 걸라고?

“알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승낙했다.

“앤시아!”

“비 전하!”

블레이크와 제5 기사단의 기사들이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나에게 불리한 조건이었으니 걱정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나는 자신이 있었다.

괴혈병은 반드시 나을 거다. 그리고….

“부대신관직에서 내려온 뒤에는 황실 능멸죄로 재판을 받으셔야 할 겁니다.”

“탄시놀을 고치신 뒤에 다시 말씀하시죠.”

“괴혈병이라니까요.”

나는 싱긋 웃으며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하워드는 오만하게 고개를 쳐들며 악수에 응했다.

“부대신관, 똑똑히 기억해 두세요.”

“무엇을 말입니까?”

“나는 앤시아 라 엘르 제라실리온입니다. 아스테릭 제국의 유일한 황태자비죠.”

나는 빛의 마나를 그에게 흘려보내면서 말했다.

아무리 가문의 힘으로 오른 자리라고는 하나 명색이 부대신관이다.

이게 빛의 마나라는 것 정도는 알겠지.

내가 블레이크와 마찬가지로 여신의 힘을 지녔다는 것도 말이다.

“다, 당신은…!”

나의 마나를 정확히 읽었는지 하워드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나는 그런 하워드를 향해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주었다.

***

“정말로 다 나았단 말이냐?”

게일의 보고를 받은 하워드는 경악했다.

“네, 그렇습니다.”

“황태자비가 술수를 쓴 것이 아니냐?!”

“아닙니다. 혹시 몰라서 확인해 봤지만, 전부 평범한 과일이었습니다. 정말로 ‘괴혈병’이라는 병이었던 모양입니다.”

앤시아의 말이 맞았다. 그녀의 말대로 과일만 먹었을 뿐인데도 선원들의 병이 낫고 있었다.

정말로 언어능력자였나?

“게다가 오늘 황실에서 황태자비가 언어능력자이며 빛의 마나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공표했다고 합니다.”

“뭐라고?”

그렇다면 그때 느꼈던 마나가 착각이 아니란 말인가? 정말로 그 여자가 빛의 마나를 지니고 있다는 거야?

황태자비는 황태자의 저주를 풀고, 빛의 마나를 쓸 수 있으며, 언어 능력까지 있었다.

정말로 여신의 선택을 받은 여자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젠장, 왜 하필 지금 밝힌 거지!’

차라리 황실이 이 사실을 먼저 밝혔다면, 그에 맞춰서 소문을 지어낼 수 있었을 거다.

빛의 마나는 가짜이고, 언어 능력 또한 마족과 계약으로 얻은 것이라고 몰아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하워드가 퍼트린 소문은 이미 힘을 잃었다. 이제 와서 주섬주섬 소문을 고친들 아무도 믿지 않을 거다.

“부대신관님, 이제 어찌해야 합니까?”

엉뚱한 병을 탄시놀로 우기며 여신의 저주를 운운한 데다가, 여신의 선택을 받은 황태자비를 마족으로 몰았다.

부대신관으로서 치명적인 실책이었다.

선원들의 병이 나으면, 부대신관 직을 사임하기로 황태자비와 약속했다.

하지만 그전에 쫓겨나게 생겼다.

게다가 지방의 신관들이 하워드를 배신하고 그동안 바쳤던 뇌물 장부와 비리를 모두 토설했다는 이야기가 들리고 있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하워드는 물론이고 켄스웨이 가문까지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하지만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 속에서도 하워드는 금세 평온을 되찾았다.

“걱정하지 말거라. 아직 방법이 있다.”

켄스웨이 가문이 천 년 동안 아무런 굴곡 없이 승승장구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세력이 커지는 것에 위협을 느낀 황제가 가문을 노린 적도 있었고, 방계 가문이 주제도 모르고 기어오르는 경우도 드물지는 않았다.

하지만 숱한 위기 속에서도 켄스웨이 가문은 굳건하게 권력을 지켜왔다. 바로 그 보물 덕분이었다.

‘필립의 선물’.

초대 황제 필립이 켄스웨이 가문에 남긴 보물을 다시 쓸 때가 되었다.

하워드는 창문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게일이 탄 마차가 저택을 떠난 것을 확인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워드가 위기에 몰리자, 사람들은 슬금슬금 그와 선을 긋기 시작했다.

켄스웨이 가문의 원로회에서도 가주를 바꾸고 황실에 사죄를 올리자는 의견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배은망덕한 놈들! 지금껏 가문을 지킨 게 누군데! 가문과 신전을 위해 평생을 바쳤더니, 이렇게 배신을 해!’

하워드는 분노했다.

모두가 그를 배신하는 상황에서도 게일만은 끝까지 충성을 지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필립의 선물’은 알려줄 수는 없었다.

이는 켄스웨이 가문의 가주에게만 전해져오는 비밀이었으니까.

천 년 전, 필립 황제가 자신의 충직한 신하인 로건 켄스웨이에게 남긴 선물.

이것만 있으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나를 배반한 놈들과 황태자비라며 오만하게 굴던 계집, 여신의 저주를 받은 괴물 황태자, 남부의 촌뜨기, 그리고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인 황제까지 모두를 없애버릴 것이다!

하워드는 처음부터 승리할 수 있는 패를 쥐고 있었다. 하지만 이걸 쓰면 상황을 완전히 뒤집을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물론 황태자비와 창에 대한 소문을 퍼트릴 때, ‘필립의 선물’을 쓰겠다고 결심하긴 했다. 하지만 그것만은 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마음 한편에서 사라지질 않았다.

그래서 교역선에서 전염병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기뻤다.

이를 이용하면 ‘선물’을 사용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하지만 그건 최악의 선택이었다.

민중은 하워드가 무고한 선원들을 탄시놀로 몰아서 학살하려 했다며 비난을 퍼부었다.

그러나 같은 시간, 하워드는 다른 이유로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었다.

‘내가 너무 유약했다. 모질지가 못했어.’

신관으로서의 자비심 때문에 끝까지 망설이고 말았다. 그 때문에 이 사달이 난 것이다.

예정대로 소문이 퍼진 뒤에, 아니 황제가 마론을 대신관에 임명했을 때 ‘그것’을 썼어야 했다.

하워드는 스스로가 선하고 여린 것을 자책하며 가주의 집무실에 숨어 있는 비밀 통로를 열었다.

어둡고 좁은 통로를 지나자 작지만 우아하게 꾸며진 방이 나왔다.

켄스웨이의 저택은 천 년 전에 지어진 유서 깊은 대저택이었다.

긴 역사를 가진 만큼 오가는 사람도 많았고, 극소수이긴 하지만 가주의 집무실에 위급한 상황을 대비한 비밀 통로가 있다는 걸 아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비밀 은신처 아래 더 깊은 공간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은 오직 켄스웨이 가문의 가주만이 알고 있는 기밀이었다.

하워드는 비슷비슷해 보이는 벽돌 중 하나에 가주의 반지를 가져갔다.

그러자 두두둑 하는 육중한 소리와 함께 바닥이 움직이며 숨겨진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워드는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가주가 되던 날, 하워드의 아버지는 그를 이곳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필립의 선물’과 켄스웨이 가문의 비밀을 모두 말해주었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하워드는 두려움에 떨었었다. 자신은 ‘필립의 선물’을 사용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하기도 했다.

선물을 쓰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자신이 있었다.

하워드는 자신이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대신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대신관의 자리도 오르지 못한 채 가문에서 축출당할 위기에 몰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후회한들 이미 지난 일이었다.

하워드는 가주가 된 이후 두 번째로 이 계단을 밟았다.

빛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암흑이었다. 그는 작은 램프에 의존한 채 혹시 발을 잘못 디디진 않을까 조심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긴 계단 끝에는 다시 벽이 나타났다.

그때와 똑같았다.

하워드는 당황하지 않고, 자신이 기억하는 위치에 가주의 반지를 가져다 댔다.

그러자 벽면이 느리게 움직이며, 겨우 두 사람이 서 있을 만한 좁은 공간이 나타났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복도를 만들다가 만 것처럼 보일 정도로 깜깜하기만 할 뿐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하워드는 알고 있었다. 저 안에 ‘필립의 선물’이 있다.

그는 차마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마른침을 삼켰다.

이런 상황에 몰려서도 아직 망설이는 거냐!

그는 나약한 스스로를 질책했다. 그리고 깊은 한숨을 내쉰 뒤 마침내 검은 공간 안으로 발을 디뎠다.

그는 다시 한번 가주의 반지를 정해진 위치로 가져갔다. 그러자 벽이 움직이며 숨겨져 있던 작은 공간이 나타났다.

거기엔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오래된 상자가 놓여 있었다.

저것이 바로 ‘필립의 선물’이었다.

하워드는 다시 머뭇거렸다. 아직도 결심이 서지 않아서가 아니다.

오래된 상자 안에서 새어 나오는 음산한 어둠에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이걸 사용한다면 수도가 죽음으로 물들 것이다. 엄청난 대재앙이 시작되는 거다.

그때였다.

투욱. 투욱.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하워드는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누구냐!”

누가 들어온 거지? 분명히 안으로 들어올 때마다 문을 닫았었다.

설령 자신을 노린 침입자라고 한들 이곳까지 올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장소를 아는 사람은 오직 자신과 돌아가신 선대 가주들뿐이었다.

아, 또 한 사람이 있긴 했다.

아스테릭 제국의 초대 황제인 필립 제라실리온.

그는 선물을 숨기기 위한 비밀 장치를 직접 고안해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선대 가주든 필립이든 모두 죽은 사람들이었다.

지금 현재 ‘필립의 선물’과 이 장소를 아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다.

“누구냐! 대답해라!”

하워드는 오래된 나무 상자를 꼭 끌어안은 채 소리쳤다.

하지만 상대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뚜벅뚜벅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가 가까워질 뿐이었다.

도대체 누구지?

켄스웨이 가문의 놈들인가? 나를 기어이 축출하려고? 아니면 방계에서 보낸 암살자? 혹시 황실은 아니겠지?

하워드는 숨소리마저 죽인 채, 점점 가까워지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램프의 불빛에 남자의 얼굴이 비쳤다. 그는 하워드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리차드 카실…!”

하워드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리차드는 황태자의 독살을 시도하고 웨스틴 후작을 암살하려다가 실패하여 전국에 수배령이 내려진 죄인이었다.

결국 강물에 빠져서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었는데, 사실이 아니었던 건가?

“천한 로움족 따위가 여긴 어떻게…!?”

리차드는 대답 대신 조소를 머금었다.

“로건이 후손들 교육을 엉망으로 시켰군.”

“뭐라! 감히 로움족 주제에 그런 망발을 하다니!”

살인자와 단둘이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하워드는 두려움도 잊고 분노했다.

로건은 켄스웨이 가문의 초대 가주이자 지금까지도 만인의 존경을 받는 대신관이었다.

천한 로움족 따위가 함부로 입에 올릴 분이 아니었다.

하지만 로움족이라고 멸시를 당해도 리차드의 입가에는 가소롭다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천한 용병의 핏줄 주제에 시끄럽구나.”

하워드는 화들짝 놀랐다.

로건 켄스웨이는 젤칸 제국 때부터 내려오던 유서 깊은 신관 집안 출신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로건은 사실 성조차 없는 천한 용병이었며, 원래 신전과는 관련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오직 켄스웨이의 가주들만이 아는 비밀이었다.

“네, 네놈이 그걸 어떻게….”

리차드는 아무도 모르는 로건 켄스웨이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필립의 선물’이 숨겨진 장소 또한 알았다.

가주의 열쇠가 없이도 이곳으로 들어오는 방법을 아는 사람은 오직 필립 황제뿐이라고 했다.

‘설마 저 녀석이 필립 황제의….’

말도 안 된다. 그럴 리가 없다.

그가 떠오르는 생각을 지우려는 찰나 리차드가 말했다.

“짐이 천 년 전 로건에게 주었던 선물을 돌려받으러 왔다.”

***

“비 전하께서는 저희들의 은인이십니다.”

“맞습니다. 비 전하가 아니면 전부 죽었을 겁니다.”

발리 선장과 선원들이 나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그들은 지금껏 계속 배 안에서 치료를 받다가, 오늘 모두 완치되었다는 진단을 받고 하선하게 되었다.

치료라고 해도 과일을 먹는 것뿐이었지만 말이다.

“이 발린과 선원들은 비 전하의 은혜를 평생 가슴에 새기고 충성을 바칠 것입니다.”

“네.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발리 자작이 말하자, 다른 선원들도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어서 일어나세요.”

나는 황급히 그들을 일으켰다. 다들 완전히 건강해져 혈색을 되찾은 모습을 보니 괜스레 뿌듯했다.

“앞으로 장거리 항해를 하게 되면 과일을 꼭 준비하도록 하세요. 과일에는 몸에 좋은 성분이 많이 있으니까, 평소에도 챙겨 드시고요.”

“명심하겠습니다.”

나는 선원들에게 거듭 당부한 뒤, 항구를 떠났다.

“비 전하, 만세!”

“역시 축복의 소녀야.”

“여신의 선택을 받으신 분이잖아. 황태자 전하처럼 빛의 마나를 지니셨다고!”

“비 전하!!!”

마차로 가는 동안 항구에 모인 사람들의 엄청난 환호가 쏟아졌다.

원래는 리차드를 잡고 나서 내 능력을 공표할 생각이었다.

리차드가 어떤 계략을 꾸밀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그를 단죄하기 전까지는 내가 가진 패를 모두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적절한 타이밍이었던 것 같다.

내가 빛의 마나를 지니고 있다는 게 밝혀지자마자 부대신관이 뿌린 소문이 한순간에 잠잠해졌으니 말이다.

게다가 리차드는 정말로 죽었을지도 모르고 말이다.

그런데 모두가 환호하는 와중에도 블레이크의 표정이 어두웠다.

요즘 계속 저랬지. 그 이유는 짐작이 갔다.

“블레이크, 미안해.”

나는 사과했다.

“잘못한 거 알아?”

“응.”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블레이크에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부대신관과 내기를 했다.

나는 선원들이 탄시놀에 걸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있었지만, 블레이크는 계속 걱정했을 거다.

내 걱정이 되어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걸 알고 있었다.

“정말 미안해.”

“앞으로는 그러지 마.”

“응. 안 그럴게.”

블레이크는 더 나무라지 않고, 엷게 웃으며 나의 어깨를 감쌌다. 나도 어깨에 올려진 그의 손을 꼭 잡는데, 갑자기 서늘한 시선이 느껴졌다.

‘리차드…?’

나는 화들짝 놀라서 시선이 느껴지는 쪽을 바라보았다.

순간적으로 리차드를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자세히 보니 머리색만 같을 뿐 전혀 다른 남자였다.

“왜 그래?”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뭔가 착각했나 보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블레이크와 함께 마차에 올랐다.

리차드는 수많은 구경꾼들 사이에 섞여서 앤시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리차드가 수배범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리차드가 빛의 마법을 사용하여 자신의 모습을 완전히 감췄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눈에는 그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비칠 것이다.

물론 그는 빛의 마나를 전혀 지니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마법을 쓰기 위해서는 켄스웨이 가문에서 가져온 빛의 마나석을 써야 했다.

첸티온강에 빠졌을 때, 리차드는 전생의 기억을 모두 되찾았다.

‘나는 필립이다.’

자신은 천한 노예의 자식이 아니었다.

아스테릭 제국을 건설한 초대 황제이자, 여신의 힘을 손에 넣은 인간이었다.

하지만 다시 태어난 지금의 상황은 처참했다.

리차드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처절한 사투를 치른 끝에 세운 제국은 락슐의 차지가 되어 있었다.

그가 황제가 되면서까지 얻고 싶어 했던 여인 역시 락슐의 옆에 있었다.

여신을 배신하면서까지 손에 넣었던 힘 역시 락슐, 아니 블레이크가 전부 차지했다.

‘라온텔, 앤시아…. 너는 언제나 나를 버리고 그놈을 택하는구나.’

리차드는 다정하게 어깨를 감싸는 블레이크와 앤시아의 모습을 노려보다가 몸을 돌렸다.

“이만 돌아가시겠습니까?”

“그래.”

옆에 있던 코닌스의 물음에 리차드는 짧게 답했다.

“슬슬 준비를 해야지.”

리차드는 ‘필립의 선물’을 손에 넣었다.

이는 과거 필립이 마지막 남은 빛의 마나를 짜내어서 만든 뒤 로건에게 건넨 물건이었다.

원래는 차기 황제에게 맡겼어야 했다. 하지만 필립의 자식들은 하나같이 나약하고, 그를 두려워했다.

형제들을 죽이고 저주를 건 악마라고 생각하는 녀석도 있었다. 건국 이후 줄기차게 이어진 살육에 반감을 가지기도 했다.

필립이 ‘그것’을 준들 자신의 유언을 제대로 따를 리가 없었다.

필립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가장 충성스러운 신하였던 로건에게 ‘그 일’을 맡겼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고민해도 마땅한 답이 나오지 않아서 마지못해 내린 결정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잘되었다.

리차드가 잃어버린 모든 것들을 되찾을 수 있는 보물이 지금 그의 수중에 있었다.

이것만 있으면, 그가 세웠던 제국, 빛의 힘, 그리고 앤시아까지. 모든 걸 손에 넣을 수 있었다.

***

황궁에 도착하자 반가운 얼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신관인 마론이었다. 그는 활짝 웃었지만, 무척 초췌해 보였다.

서쪽 지방에서부터 수도까지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한 채 달려왔을 테니, 몹시 피곤할 거다.

“전하, 비 전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대신관님.”

나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대신관과 같은 인사를 건넸다.

“왔나.”

블레이크는 짧게 뱉었다. 그는 가끔씩 깜짝 놀랄 만큼 무뚝뚝해 보일 때가 있었다.

실은 엄청 다정한 사람인데 말이다.

“비 전하께서 로즈 양이라는 말을 듣고 당장 뵙고 싶었는데, 이제야 오게 되었습니다.”

“바쁘셨잖아요.”

그는 지방에서 벌어지는 마족 재판의 병폐를 밝히고, 부대신관과 켄스웨이 가문의 비리를 파헤치기 위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을 것이다.

“하지만 한발 늦고 말았습니다.”

어젯밤 켄스웨이 가문에서는 하워드를 가문에서 축출하고 새로운 가주를 뽑았다.

하워드는 부대신관직에서도 물러났으며, 이번 일에 대한 조사를 받겠다며 제 발로 황궁을 찾아왔다.

가문에서 완전히 버림받은 것이다.

“아니에요. 대신관님이 아니었으면 저들은 끝까지 버텼을 거예요.”

마론은 켄스웨이 가문을 비롯해 고위 신관들의 비리와 신전의 폐단을 밝힐 증거들을 가지고 있었다.

켄스웨이 가문과 신관들은 자신들에게 화가 미칠까 걱정하며, 하워드를 내친 것이다.

“하워드 켄스웨이로 꼬리 자르기를 할 생각이겠죠.”

“앤시아, 걱정하지 마.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맞습니다. 반드시 신전의 폐단을 없앨 것입니다.”

확신에 찬 두 사람의 말을 들으니 안심이 되었다.

천 년 동안 신전 깊숙한 곳에 박혀 있던 썩은 뿌리를 뽑을 날이 마침내 온 것이다.

***

“비 전하를 찾으신 걸 축하드립니다.”

마론이 축하 인사를 건네자, 블레이크의 얼굴에는 미소가 그려졌다.

“고마워.”

“전하께서 웃으시는 모습을 두 번째로 뵙네요.”

로즈를 만났을 때도 블레이크는 웃었었다. 마론으로선 처음 본 미소였다. 그리고 오늘 블레이크가 웃는 모습을 두 번째로 본 것이다.

“역시 전하를 웃게 해주실 분은 비 전하뿐이신가 봅니다.”

“앤시아는 나의 전부야.”

담담히 뱉은 말을 들으며 마론은 다소 놀랐다.

블레이크가 저토록 순수하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은 적은 처음이었으니까.

“비 전하께서는 듣던 대로 훌륭한 분이시더군요.”

하워드를 비롯해 고위 신관들이 이런 일을 벌인 것에는, 대신관으로서 신전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마론의 책임도 있었다.

그는 앤시아에게 사과했지만, 그녀는 조금도 마론을 탓하지 않았다.

앤시아는 마음이 넓으며 이해심이 깊어 결코 남을 책망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마냥 선하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현명하며 강단이 있었다.

“응. 나에게 과분한 사람이야.”

“하지만 걱정도 많으시겠습니다.”

앤시아는 모든 걸 혼자 짊어지려 했다.

로즈로 변했을 때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았던 것도 그렇고, 이번에도 선원들을 살리기 위해 부대신관과 위험한 내기를 했다.

앤시아는 저주받은 괴물 황태자의 부인임에도 어려서부터 사교계와 제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녀의 지혜와 따뜻한 성품이 모두에게 전해진 거다.

마론 역시 그녀에게 매료되었다.

이는 황태자비로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자질이었지만, 남편의 입장에서는 걱정이 될 터였다.

“힘들어. 나만 봐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블레이크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아. 내가 지켜주면 되니까.”

지난 7년 동안보다 블레이크의 속내를 더 많이 들은 것 같다.

마론은 조금 용기를 내어보기로 했다.

“전하, 이번 일이 마무리되면, 친구로서 함께 식사를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마론은 그와 친구가 되기 위해 끈질기게 노력했지만, 블레이크는 번번이 거절하였다. 그래도 이번에는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

“안 돼. 바빠.”

하지만 블레이크는 단칼에 거절했다.

“리차드 카실 때문입니까?”

“응. 그놈을 잡아야지.”

아직까지도 리차드의 행적이 묘연했다.

아무리 첸티온강의 물살이 거세다지만 시체조차 발견하지 못하는 건 이상했다.

리차드는 분명 살아 있을 거다. 어쩌면 혼돈의 계곡이나 북쪽 설산처럼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곳에는 마물이 넘쳐났다. 병사들로 찾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니 빛의 힘을 지닌 블레이크가 직접 가야 했다.

하지만 부대신관이 앤시아를 노리고 있는 상황에서 그녀를 두고 홀로 떠날 수 없기 때문에 미루고 있었다.

“켄스웨이 가문의 조사가 끝나면, 신전도 수색을 돕겠습니다.”

“응. 고마워.”

“정말로 고마우시면, 리차드를 잡은 다음에 식사를 해주시죠.”

“안 돼.”

하지만 이번에도 돌아오는 것은 거절이었다.

“전하와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전하께서도 친구가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그는 저주에서 벗어나자마자 부인을 찾아 헤매느라 인생을 제대로 즐겨본 적이 없었다.

부하는 있지만 친구를 사귄 적은 없을 터였다.

이제 앤시아도 돌아왔으니, 새로운 삶을 즐길 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블레이크의 생각은 달라 보였다.

“필요 없어. 부인이랑 함께 있을 시간도 부족해.”

블레이크는 1분 1초라도 더 앤시아와 함께 있고 싶었다.

가뜩이나 정무 때문에 바쁜데, 다른 놈들과 어울리며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마론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황태자비를 찾았지만, 블레이크를 둘러싼 철벽은 오히려 더 견고해진 것 같았다.

“하는 수 없군요. 저는 친구가 필요하니 비 전하와 친구가 되어야겠….”

“대신관, 죽고 싶나?”

마론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블레이크가 엄청난 살기를 뿜어냈다.

비 전하는 블레이크가 저렇게 소유욕이 강한 남자라는 걸 알고 있을까?

마론은 문뜩 궁금증이 일었다.

***

오늘은 세피아궁에서 나의 귀환을 축하하기 위한 티 파티가 열리는 날이었다.

성대한 황궁 무도회가 부담스러워서 소박한 티 파티를 열 생각이었지만, 본래의 취지는 어느 순간 퇴색되어 있었다.

세피아궁의 입구로 들어선 순간부터 귀부인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마나석으로 이루어진 작은 조명들이 세피아궁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었다.

나 역시도 오늘 처음 보는 풍경이었다.

텐스테온과 블레이크가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티 파티를 밤에 열자고 주장하길래, 아무 생각 없이 따랐었는데 설마 세피아궁 전체를 마나석으로 장식했을 줄은 몰랐다.

그 두 사람에게 파티를 맡겼을 때부터 이미 소박함은 물 건너간 건지도 모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쌀쌀한 늦가을 밤이었지만 티 파티가 열리는 정원에는 보온 도구가 곳곳에 놓여 있어서, 따뜻하면서도 신선한 공기를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정원 한편에서는 황실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했고(블레이크가 전 대륙에서 유명한 오카리나 연주자들을 모두 불러 모으려 했지만 내가 필사적으로 말렸다), 디저트들도 하나하나가 예술품같이 아름다웠으며, 테이블이나 의자를 비롯해 사소한 장식까지 모두 고급스러웠다.

귀부인들은 연신 감탄을 쏟아냈다.

“이렇게 아름다운 티 파티는 처음이에요.”

“한 달 동안 드레스를 맞추질 못했어요. 수도의 의상실들이 전부 비 전하의 드레스만 제작하고 있었는걸요. 정말로 부럽습니다.”

“폐하와 전하께서 비 전하를 얼마나 아끼시는지 소문이 자자합니다.”

“비 전하께서 돌아오신 게 기쁘신 거지요. 저도 소식을 듣는 순간 눈물을 펑펑 쏟았답니다.”

샤르딘 백작 부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샤르딘 부인, 울지 마세요.”

샤르딘 부인은 돌아가신 황후와 친구 사이로 나와 블레이크를 아껴주었다. 나에게 춤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그때 정말 못 췄었는데도 화 한 번 내지 않으셨지…. 내가 사라져서 걱정을 많이 하셨을 거다.

나를 아껴주고 걱정해 준 사람이 너무 많았다.

샤르딘 부인은 좋은 날 주책이라며 눈물을 닦으며 활짝 웃었고, 나도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본격적인 티파티가 시작되었다.

“비 전하께서는 빛의 여신님의 선택을 받으셨다면서요?”

“감사하게도 빛의 마나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와, 대단하세요.”

“저는 처음부터 그럴 줄 알았습니다. 특별하신 분이니 전하의 저주를 푼 거겠죠.”

“언어 능력이 있으시면, 다른 나라의 책도 읽으실 수 있으신가요?”

“네.”

“그럼 동방의 책들도 보실 수 있으시겠네요.”

“물론이죠.”

귀부인들은 내가 지닌 빛의 마법과 언어 능력에 관심을 보였다.

“비 전하를 음해하려 들다니, 하워드 님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셨던 걸까요?”

“부대신관이 하옥됐다면서요?”

“이젠 부대신관도 아니죠. 게다가 자업자득입니다. 비 전하에 대한 근거 없는 비방을 퍼트리지 않았습니까?”

“그뿐입니까? 과일만 먹어도 나을 병을 탄시놀로 몰다니요.”

“발리 자작이 얼마나 좋으신 분인데, 억울한 일을 당하실 뻔했습니다.”

대화의 주제는 자연스럽게 부대신관과 괴혈병에 대한 주제로 넘어갔다.

너나 할 것 없이 부대신관을 비난했지만 그중에는 입을 꾹 다무는 사람들도 있었다.

켄스웨이 가문은 일종의 성역이었고, 그들을 여신처럼 따르던 귀족들도 많았다.

이번 일은 하워드 켄스웨이의 잘못이라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마음으로는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을 거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그들의 죄가 낱낱이 드러나면 결국은 생각이 바뀌게 되겠지.

“그래도 이번 사건으로 좋은 일도 생겼습니다. 남편과 아들 녀석이 과일을 먹기 시작했어요.”

“그게 좋은 일인가요? 제가 먹던 것까지 죄다 뺏어 먹어서 꼴 보기 싫어 죽겠습니다.”

“하하하. 맞습니다.”

“그래도 자기가 먹으면 다행이죠. 정부에게 주면 얼마나 더 꼴 보기 싫은지 말도 못 한다니까요?”

여자들만 있어서 그런지 대화에 거침이 없었다. 하지만 이야기의 주제가 남편의 바람과 정부 쪽으로 흐르자, 샤르딘 부인이 나의 눈치를 보며 헛기침을 했다.

내 앞에서 이야기하기에는 적절치 못하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샤르딘 부인이 신호를 보내자 다른 부인들도 얼른 입을 다물었다.

“비 전하께서는 평생 신경 쓰실 일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맞아요. 전하께서는 폐하를 닮으셨으니 절대로 바람 같은 건 안 피실 겁니다.”

“물론이죠. 7년 동안 그렇게나 많은 여인이 달려들었는데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으셨는…!”

“마르셀 부인!”

그동안 블레이크를 노렸던 여인들의 이야기가 나오자, 다른 부인들이 화들짝 놀라서 소리쳤다.

마르셀 부인도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얼른 손으로 입을 가렸다.

“송구합니다.”

“괜찮아요.”

모르던 이야기도 아니고, 상관없었다. 게다가 마르셀 부인의 말대로 블레이크가 흔들린 적도 없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나는 괜찮았지만 다른 부인들은 눈치가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중 한 부인이 적막을 깨며 말했다.

“그나저나 비 전하, 오늘 너무 아름다우세요.”

“맞아요.”

“드레스도 너무 잘 어울리시고요.”

분위기를 다시 살리기 위해서인지, 부인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칭찬을 쏟아냈다.

“세피아궁에 들어선 순간부터 놀랐답니다. 건국제에서도 물론 아름다우셨지만, 오늘은 한층 더 눈이 부신 것 같아요.”

요즘 텐스테온과 블레이크는 물론이고 멜리사와 테리까지 나만 보면 뭔가를 먹이려고 드는 바람에 살이 조금 찌긴 했다.

전에는 내가 봐도 너무 마른 편이었기 때문에, 지금이 더 건강하고 몸도 가벼워서 만족스러웠다. 혈색도 좋아진 거 같다. 하지만 눈이 부실 정도는 아닌 거 같은데….

“맞아요. 피부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아요. 뭔가 비법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비법이 있으시면 알려주세요.”

단순히 분위기를 풀기 위해서 칭찬을 한 건 아닌지, 귀부인들은 내가 쓰는 화장품이나 비법에 호기심을 보였다.

평소라면 달라진 게 없다며 손사래를 쳤겠지만, 오늘은 싱긋 미소를 머금었다.

“실은 요즘 동방의 차를 마시고 있거든요.”

“동방의 차요?”

“네. ‘택리차’라는 차입니다.”

“그런 차가 있나요?”

“원래 창국의 황실에서만 마시던 차라고 해요.”

나에 대한 소문은 빠르게 사라졌지만, 창국에 대한 근거 없는 악소문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전혀 모르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안이 겹쳐진 탓이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용에 좋은 데다, 황실에서만 마시던 차라고 하자 귀부인들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그건 어떻게 구할 수 있나요?”

“창국과의 교역이 시작하면 택리차도 들어올 겁니다.”

“시간이 엄청 오래 걸리겠네요.”

“그러게나 말이에요.”

나는 낙담하는 그녀들을 바라보며 넌지시 물었다.

“드시고 싶으신가요?”

“당연하죠.”

“비 전하, 혹시 저희에게도 주실 수 있으신가요?”

다들 창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도 잊고, 택리차를 마셔보고 싶어서 아우성을 쳤다.

나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실은 창에서 보낸 차는 이미 다 마셨답니다.”

내가 말을 하는 순간 이곳저곳에서 아쉬움을 담은 탄식이 터졌다.

“하지만 실망하지 마세요. 제가 정원에 택리차 씨앗을 심어두었으니까요.”

“어디에 심으셨나요?”

귀부인들이 꽃과 마나석들로 꾸며진 정원을 두리번거렸다.

“여기요.”

하지만 나는 내 옆에 있는 흙바닥을 가리켰다. 잎이 자라기는커녕 아직 새싹조차 나오지 않은 걸 본 귀부인들은 다시 실망했다.

“비 전하, 너무하세요.”

“맞아요. 저희를 놀리시는 건가요?”

아쉬움으로 가득 찬 투정 섞인 불만이 터져 나왔다.

“그럴 리가 있나요.”

나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바닥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나의 손에서 흘러나온 빛의 마나가 땅을 덮자, 초록색 싹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작은 싹들은 순식간에 무럭무럭 성장했다. 나는 찻잎을 수확할 수 있을 정도로 키운 뒤, 손을 뗐다.

“와….”

그 순간 뒤늦은 감탄이 튀어나왔다.

“이런 건 난생처음 봐요!”

“빛의 마법인 건가요?”

“네. 빛의 마법이죠. 황태자 전하께서도 하실 수 있답니다.”

나는 가볍게 웃으며, 하인들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하인들이 얼른 와서 찻잎을 떼갔다. 그리고 불의 마나석으로 빠르게 찻잎을 말리기 시작했다.

하녀들은 건조된 찻잎을 가져가서 차를 우렸다.

사실 택리차의 찻잎은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일부러 찻잎을 키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내가 빛의 마나를 지닌 사실을 공표하긴 했지만, 아직까지도 헛소문을 믿으며 나에 대한 의심의 시선을 거두지 않은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도 말이다.

하지만 빛의 마법을 직접 본 이상 더는 의심하지 못하겠지. 그뿐만 아니라 내가 진짜 빛의 마법사라는 사실이 사교계 전체에 퍼져나갈 거다.

하워드가 냈던 소문보다도 훨씬 빠르게 말이다.

귀부인들의 테이블마다 택리차가 놓여졌다.

나는 가장 먼저 차를 마셨다. 나의 신분이 가장 높은 것도 있지만, 처음 보는 음식에 대한 경계심을 지워주기 위해서였다.

“다들 마셔보세요.”

내가 먼저 마신 뒤 귀부인들에게 권하자, 다들 안심하고 찻잔을 들었다.

“맛있네요.”

“네. 풍미가 좋아요.”

“황실에서 마시는 차라 그런지 특히 더 고급스러운 맛이 나는 것 같습니다.”

다행히도 택리차에 대한 호평이 쏟아졌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나는 질문을 던졌다.

“여러분 홍차가 어디서 왔는지 아시나요?”

“가누아 왕국 아닌가요? 가누아 왕국 출신인 로잔 황비의 영향으로 홍차가 유행하면서 널리 퍼졌다고 알고 있습니다.”

마르쉘 부인이 아까 전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서 얼른 대답했다.

“절반은 맞아요. 로잔 황비가 홍차를 가져왔죠. 하지만 홍차는 사실 가누아 왕국에서 처음 유래된 것이 아니랍니다.”

“그럼 어디인가요?”

“창국입니다.”

“창국이요?”

“네. 창에서 마시던 차가 가누아 왕국으로 전해진 거죠.”

홍차가 사실 창에서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귀부인들은 꽤나 놀라운 눈치였다.

이러한 사실은 가누아 왕국의 역사책을 봐야 알 수 있는 정보였으니 당연한 거다.

지구에서도 홍차는 중국에서 시작되었다고 했었지. 이 세계와 지구는 다른 듯하면서도 비슷한 점이 많았다.

“종이 또한 창의 기술을 많이 받아들였답니다. 아스테릭 제국과 창이 정식으로 수교를 맺은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그전부터 알게 모르게 많은 문화들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쳐온 거죠.”

오늘 밤을 계기로 내가 빛의 마법사란 이야기와 함께 홍차의 유래도 퍼져 나갈 거다.

이미 우리에게 친숙한 창의 문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면, 앞으로 있을 교역에 대한 불안함과 거부감도 조금은 줄어들겠지.

미소를 지으며 택리차를 다시 마시는데, 입구 쪽이 소란스러웠다.

키가 크고 늠름하면서도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청년이 성큼성큼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제국의 빛이신 황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블레이크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귀부인들은 서둘러 일어나며 예를 갖추었다.

“블레이크, 아니 전하, 여긴 어쩐 일이세요?”

다른 사람의 앞이었기 때문에 나는 얼른 말을 높였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이제는 공대를 하는 것이 더 어색했다.

“부인이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그가 나와 눈을 마주치며 다정하게 말했다. 블레이크의 존댓말을 들으니 왠지 낯이 간지러웠다.

“어머.”

“자상하시기도 하셔라.”

귀부인들이 부러움을 담아서 말했다. 나는 조금 민망했지만, 블레이크는 전혀 그런 기색이 없어 보였다.

“티 파티는 즐거우십니까?”

“아, 네. 전하!”

“즐겁습니다!”

블레이크가 말은 건네자 사람들은 화들짝 놀라며 서둘러 대답했다. 나 역시도 놀랐다.

그가 여인들과 이렇게 사교적인 대화를 나누는 건 처음 보았다.

“폐하와 내가 황태자비를 위해 준비한 겁니다.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군요.”

“네. 물론이죠.”

“지금껏 참여했던 어떤 파티보다도 아름답습니다.”

위엄 있으면서도 부드럽게 대화를 이끌어가는 블레이크를 보자 저절로 미소가 나왔다. 나의 면을 세워주려고 일부러 왔다는 게 느껴졌다.

“오늘은 내가 비를 위해서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응? 선물? 나는 깜짝 놀라서 블레이크를 바라보았다.

“다른 분들도 같이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그는 말을 마친 뒤 나에게 다가왔다. 블레이크가 나의 손을 꼭 잡는 순간 하늘 위로 불꽃이 터졌다.

그 순간 귀부인들의 입에서 감탄사가 나왔다. 나도 놀라서 블레이크를 바라보았다.

“그때 제대로 못 봤잖아.”

그는 나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그러자 건국제 때 광장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르며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건국제를 방불케 하는 화려한 불꽃이 검은 하늘 위를 연신 수놓았다.

나는 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도 잊고, 블레이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아름다운 불꽃을 바라보았다.

-6권에서 계속

괴물 황태자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5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