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3장. 변한 듯 변하지 않았습니다
14장. 따뜻한 차 한잔 어떠세요?
13장. 변한 듯 변하지 않았습니다
리차드는 오늘 건국제 무도회에 참석해, 사교계에 화려하게 복귀할 예정이었다.
그는 7년 동안 이날만을 기다려 왔다.
카실 가문이 몰락하고, 리차드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아무리 반역자의 자식이라고는 하나, 리차드는 황제의 하나뿐인 조카였다.
만약 프랭크나 네온이 살아남았다면, 그들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기며 도움의 손길을 건네는 귀족들도 분명 있었을 거다.
그러나 황족의 상징인 은발을 갖고 태어난 것도 아니고, 심지어 서출에 로움족인 리차드에게 손을 내밀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직 조롱과 경멸의 시선만이 쏟아질 뿐이었다. 리차드는 이를 악물었다.
‘나는 반드시 황제가 될 거다.’
반드시 제국의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서, 나를 멸시했던 모든 인간들에게 복수하고 말 테다.
그리고 오늘은 그 장대한 역사의 서막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계획은 완벽했다.
그는 고아원의 자선 사업을 통해 선량한 이미지를 구축했고, 웨스틴 후작의 외동딸인 소피아와 결혼하며 차기 후작이 될 예정이었다.
그녀가 이복형인 프랭크 카실의 약혼녀였긴 했지만, 그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스테릭 제국에서는 약혼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형제나 사촌 등 같은 가문의 다른 사람이 혼담을 이어가는 경우가 흔했으니까.
게다가 리차드는 오랫동안 실종됐던 황태자비를 찾으며 큰 공을 세웠다.
그러니 자신이 이번 건국제의 주인공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건국 천 년을 맞이하는 건국제에서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고, 제국의 황제가 되기 위한 첫걸음을 내디디려 했다.
리차드의 세뇌대로 앤시아가 블레이크에게 독을 먹였다면, 황태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음을 맞이할 거다.
앤시아가 범인인 것이 밝혀지면 리차드에게도 의심의 화살이 향하겠지만, 이에 대한 대비책은 이미 마련해 두었다.
리차드는 소피아 웨스틴과 결혼한 뒤, 앤시아와 조금씩 거리를 둘 생각이었다.
그리고 황제의 친척이자 황위 계승 순위 5위인 발론 후작과 앤시아가 만날 기회를 만들고 추문을 퍼트린다.
그러다 블레이크가 죽으면 앤시아가 발론 후작을 차기 황태자로 만들기 위하여 독을 넣었다고 몰고 갈 계획이었다.
그렇게 되면 혐의를 피해 갈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 장차 황위를 두고 싸울 정적도 제거할 수 있었다.
하지만 리차드의 계획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었다.
그 여자는 가짜였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리차드는 다급히 상황을 파악했다.
하지만 로즈란 여자가 진짜 앤시아였으며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고, 가짜 앤시아는 홀연히 사라졌다는 것 말고는 어떤 정보도 알아낼 수 없었다.
황궁 기사들이 쳐들어와서 리차드를 끌고 갔고, 잠도 자지 못한 채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아야 했다.
다시 7년 전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그가 고의로 가짜를 데려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입증되어 무사히 풀려났지만, 문제는 남아 있었다.
‘독은 어떻게 된 거지?’
리차드는 가짜 앤시아에게 블레이크를 독살하라고 명령했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직 모르는 건가?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건가?
후자일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텐스테온이 굳이 리차드의 행각을 눈감아 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그 가짜가 말을 하지 않고 사라진 거겠지.
‘내가 준 독은 어떻게 한 걸까? 가짜가 가져간 건가? 아니면 황궁에 놔뒀는데 아직 발각되지 않은 건가?’
이렇게 고민만 하고 있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황실은 사라진 가짜 앤시아를 찾고 있었다. 그녀가 잡히면 결국 모든 사실이 발각되고 말 거다.
황실보다 먼저 그 여자를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리차드는 건국제 일정을 취소하고, 가짜 앤시아를 찾는 것에 매달렸다.
세뇌 마법에 걸려 있으니, 혼자 멀리 가진 못했을 거다. 하지만 허탕이었다.
하늘로 솟기라도 했는지 그녀의 흔적은커녕 머리카락 한 올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망할 계집.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냐!’
리차드는 이를 갈았다. 그런데 가짜를 찾았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그는 당장 가짜 앤시아가 있다는 광장으로 달려갔다.
광장은 불꽃놀이를 보러 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어디냐! 어디 있는 거냐! 잡히기만 해봐라!’
불꽃이 터지며 검은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았다. 하지만 리차드는 불꽃에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사람들 사이를 거칠게 헤집었다.
“저기 있습니다!”
리차드의 새로운 흑마법사인 코닌스가 외쳤다.
“목소리를 낮춰라.”
리차드는 화들짝 놀라서 싸늘하게 일갈했다.
은밀히 행동해도 모자랄 상황에서 동네방네 소문이라도 내려는 것처럼 소리를 친 것이다.
“죄송합니다.”
코닌스는 자신의 입을 틀어막으며 사과했다.
리차드는 낮게 혀를 찼다. 도미람에 비해 하나부터 열까지 부족했다.
그는 지난 7년 동안 도미람을 대체할 만한 흑마법사를 찾아 헤맸지만, 아직까지도 제대로 된 놈을 구하지 못했다.
코닌스는 개중에 가장 나은 편이었지만, 아직 어려서 그런지 실수가 잦았다.
언제쯤이면 쓸 만한 놈을 찾을 수 있을는지….
하지만 지금은 새로운 흑마법사에 대해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리차드는 코닌스가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금발의 여인이 짙은 녹색 눈동자 반짝이며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여인을 본 그 순간 리차드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앤시아였다.
외모는 닮았지만 고장 난 듯 텅 비어 있던 가짜가 아니라, 어머니의 무덤에 손수건을 묶어주던 그 여인이었다.
리차드는 자신의 감정이 모두 마모되었다고 생각했다.
비참한 현실 속에서, 가족에 대한 환상처럼 쓸모없는 감정들은 모두 버렸고, 난생처음으로 느꼈던 연정도 먼지처럼 흩어졌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가짜 앤시아를 재회했을 때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던 건, 말 그대로 그녀가 가짜였기 때문이었다.
진짜 앤시아를 본 순간 리차드의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짙은 소유욕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잡을까요?”
코닌스가 비장하게 속삭였다. 리차드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멍청한 놈! 네 눈에는 저 여자가 가짜로 보이느냐.”
리차드에게 혼이 난 코닌스는 다시 앤시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여인의 옆에 블레이크 황태자가 서 있었다. 그렇다면 저 여자는 진짜 황태자비라는 건가?
“진짜인 건가요…? 그렇지만 정말로 닮았네요.”
코닌스는 가짜 앤시아에게 세뇌 마법을 걸었기 때문에 그녀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앞에 서 있는 황태자비와 그 가짜의 얼굴은 완전히 똑같았다.
진짜와 가짜의 얼굴이 많이 닮았다는 말은 들었지만, 저 정도일 줄이야…. 일란성 쌍둥이, 아니 동일인인 것처럼 똑 닮은 얼굴이었다.
“진짜 황태자비를 가짜라 착각하여 보고를 올려놓고, 감탄이나 하는 것이냐?”
“송구합니다.”
“한심한 놈.”
리차드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누르며, 앤시아를 바라보았다.
앤시아와 블레이크는 서로를 다정하게 바라보며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입을 맞췄다.
어둠을 밝힐 정도로 환한 불꽃 아래, 키스를 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리차드는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였다.
참을 수 없는 분노로 인해 피가 들끓기 시작했다.
‘저 여자는 내 여자다!’
내 여자였다. 내 여자여야만 한다.
단순히 앤시아를 갖고 싶다는 소유욕을 넘어서, 원래 자신의 것을 블레이크에게 빼앗긴 듯한 분노가 리차드의 전신을 휘감았다.
“네가 싫어.”
그 순간 어떤 여인의 목소리가 리차드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
“네가 싫어.”
리차드는 얼굴을 찡그리며 손으로 한쪽 귀를 막았다. 또다시 여인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어젯밤 광장에서도 갑자기 여인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기 시작했다. 리차드는 결국 코닌스의 부축을 받으며 자택으로 돌아왔다.
‘왜 이러는 거지?’
리차드는 최근 들어 종종 이런 일을 겪었다. 환청이 들릴 뿐만 아니라 꿈도 꾸었다.
꿈속에서는 한 여인이 나왔다. 처음에는 앤시아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그녀의 이름은 ‘라온텔’이었다.
아스테릭 제국을 건국하는 데 공을 세웠다는 빛의 마법사 ‘라온텔 벨라시안’과 같은 이름이었다.
물론 이름이 같을 뿐 라온텔 벨라시안과 동일인일 가능성은 없었다.
그녀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초상화 한 점도 없었다.
얼굴도 모르는 데다가 천 년 전에 살았던 사람의 꿈을 꿀 리가 만무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 여자는 누구일까? ‘네가 싫다.’는 말을 한 사람도 그 여자였다.
환청이 들리는 것도 모자라 꿈에서까지 나타난 여인은 리차드를 보며 너를 싫어한다고 말하였다.
그 여인이 앤시아와 닮았기 때문일까? 한낱 꿈에 불과했지만 리차드는 전신의 피가 타들어 갈 정도의 분노를 느꼈다.
‘도대체 왜 이딴 꿈을…!’
그 가짜다! 생각해보면 그 가짜가 나타나고 나서부터 꿈을 꾸기 시작했다. 환청과 두통에 시달린 것도 그때부터였다.
리차드는 이를 악물었다.
당장 그 여자를 잡아야 한다. 내가 준 독을 어떻게 했는지 묻고, 내 몸에 무슨 짓을 했는지도 알아내야 한다.
분명 평범한 여자는 아닐 거다. 그녀는 앤시아와 똑같은 외양과 언어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앤시아의 결혼반지도 가지고 있었다.
신중한 텐스테온조차 속을 정도였다.
그녀는 기억을 잃었으며 흑마법에 세뇌당한 척했지만, 어쩌면 그것 또한 거짓일 수 있었다.
황제는 가짜 앤시아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황태자비를 사칭한 죄인이 아니라 사라진 황족을 찾는 것처럼 그 태도가 조심스러웠다.
일단은 죄를 저질렀으니 찾는 척을 하긴 하지만, 사실은 진짜로 잡을 생각은 없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지금까지 황태자비 사칭범들을 엄벌에 처했던 것과 전혀 다른 태도였다.
리차드의 조사가 생각보다 싱겁게 끝난 것도 그 여자의 정체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혹시 그 여자가 황실의 약점을 잡고 있는 건 아닐까?
리차드는 그 가짜가 자신의 인생을 망치러 온 악마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
만약에 그 가짜가 황제가 눈치를 볼 정도의 엄청난 비밀을 알고 있는 거라면, 오히려 이번 일이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어쨌든 황실보다 먼저 그 가짜를 찾아야 한다.
사력을 다해 그녀를 찾던 리차드는 어제 가짜를 발견했다는 소식에 광장까지 뛰어갔지만, 그곳에 있던 건 앤시아와 블레이크였다.
불꽃 아래에서 키스하던 앤시아와 황태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순간 다시금 분노가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반드시 황제가 될 거다. 황태자를 없애고 앤시아를 내 여자로 만들고 말 거다!’
진짜 앤시아를 본 순간부터 되살아난 소유욕이 리차드의 전신을 잠식하며 퍼져나갔다.
리차드가 이를 가는데, 집사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주인님, 웨스틴 후작에게서 전갈이 왔습니다.”
그는 리차드에게 편지를 건넸다.
무슨 일이지? 후작이 편지를 보낸 적은 없었는데….
리차드는 왠지 모를 불길함을 느끼며 편지를 확인했다. 그 순간 리차드의 얼굴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그건 파혼 통지서였다.
리차드는 곧장 파혼 통지서를 들고 웨스틴 후작저로 향했다.
후작저에 도착하자, 소피아 웨스틴이 활짝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리차드, 어쩐 일이에요?”
리차드는 대답 대신 웨스틴 후작이 보낸 파혼 통지서를 건넸다.
“이게 뭔가요?”
“파혼 통지서다.”
“저, 저랑 파혼하시려고요?”
리차드의 얼굴이 와그작 구겨졌다.
그가 건넨 편지 봉투의 봉인 씰에는 웨스틴 가문의 문장이 찍혀 있었다.
누가 봐도 웨스틴 후작이 파혼을 통보했고 리차드가 항의하러 온 상황이건만, 소피아는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고 엉뚱한 소리를 했다.
참으로 멍청한 여자다.
리차드의 이복형인 프랭크는 약혼녀였던 소피아의 외모에 불만이 많았다.
새까만 머리카락과 얼굴에 가득한 주근깨를 비웃으며 그녀의 면전에 대고 조롱한 적도 많았다.
리차드 역시 소피아가 미인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외모보다도 눈치 없고 미련한 성격이 더 거슬렸다.
‘한시도 답답하지 않을 때가 없군.’
그래도 소피아의 반응으로 봤을 때, 그녀는 파혼과 관련된 일은 전혀 모르는 듯했다.
“일단 읽어 봐.”
“네.”
소피아는 그제야 편지 봉투 안에 들어 있는 파혼 신청서를 읽었다.
“아, 아니에요! 제가 보낸 게 아니에요.”
겨우 상황을 파악한 소피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리차드가 짐작했던 대로 웨스틴 후작이 독단으로 벌인 일이었다.
하긴 내가 그동안 이 계집한테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
가짜 황태자비의 일로 조금 궁지에 몰렸다고 가차 없이 자신을 배신할 리가 없었다.
리차드는 그가 본래 누려왔던 삶을 되찾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왔다.
상단을 운영하여 돈을 벌고, 고아원 운영으로 바닥까지 추락했던 명예도 끌어올렸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노력한들 신분은 되찾을 수 없었다.
돈을 주고 작위를 사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건 이름 없는 평민이나 가능한 일이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카실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에겐 불가능한 방법이었다.
나라에 공을 세우거나, 마법이나 검술, 학문 등의 분야에서 재능을 인정받아 작위를 받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텐스테온은 개인의 능력을 중시하였고, 아스테릭 제국의 역대 황제 중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작위를 많이 하사하는 편이었다.
이 때문에 작위의 가치가 떨어진다며 불만을 품는 귀족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 역시 리차드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텐스테온은 여전히 리차드를 믿지 못해 그를 감시하고 있었다. 자신이 공을 세운다 한들 순순히 작위를 줄 리가 없었다.
리차드는 고민 끝에 한 가지 방법을 찾았다. 바로 결혼이었다.
귀족 가문의 데릴사위로 들어가면 다시 작위를 얻어서 귀족 사회로 돌아갈 수 있었다.
게다가 귀족들 사이에도 서열이 존재했다.
몰락한 가문의 작위를 사거나, 황제에게 작위를 하사받아 평민의 신분을 벗어났다고 한들 귀족 사회의 가장 말단에 위치할 뿐이었다.
하지만 유력 가문의 데릴사위가 되면 단번에 사교계의 중심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리차드는 자신을 다시 귀족으로 만들어 줄 만한 여인을 물색했고, 그중에서 소피아 웨스틴을 낙점했다.
웨스틴 후작 가문이 카실 공작 사건 이후로 가세가 기울었다지만 어쨌든 정통성 있는 귀족 가문이었고, 재산도 많았다. 게다가 외동딸 하나뿐이었으니 데릴사위가 되기도 쉬웠다.
소피아 카실은 프랭크와 파혼한 이후 심한 우울증을 앓으며 자택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 때문에 결혼하지 못한 채 혼기를 놓쳐버렸다.
웨스틴 후작은 어떻게 해서든 가문에 득이 될 만한 혼처를 찾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혼담이 성사될 뻔하기도 했지만 소피아가 더 이상 정략결혼은 싫다며 거부했다고 한다.
상처받은 여인을 유혹하는 것처럼 쉬운 일이 또 있을까?
리차드는 소피아의 하녀를 매수하여, 그녀가 자신의 고아원에 오도록 하였다.
그의 계획대로 고아원을 방문한 소피아는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들을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리차드는 울먹이는 그녀에게 다가가서 손수건을 건넸다.
“고맙습…. 다, 당신은!”
리차드를 본 소피아의 눈이 크게 떠졌다.
“소피아 영애, 오랜만에 뵙습니다.”
“당신이 여긴 어떻게….”
“이곳은 제가 운영하는 고아원입니다. 모르셨습니까.”
“네. 전혀 몰랐어요. 이, 이만 가보겠습니다.”
전 약혼자의 동생을 만난 그녀는 당황하며 서둘러 몸을 돌렸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리차드는 고아원 원생인 칼루오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칼루오는 재빨리 소피아를 붙잡았다.
“누나, 벌써 가려고요. 가지 말아요. 저랑 같이 놀아요.”
어린아이가 매달리자 소피아는 어찌할 줄 모르고 그 자리에 섰다.
“칼루오, 웨스틴 영애를 난처하게 하지 말 거라.”
“누나아앙!”
칼루오는 영특한 아이였다. 그는 리차드가 보내는 신호를 정확히 이해하고는 주저앉아서 엉엉 울기 시작했다.
“미, 미안. 미안해. 애야. 울지 말렴.”
소피아는 리차드를 피하려던 것도 깜박 잊은 채 칼루오를 달래기 시작했다.
칼루오는 울다 지쳐 잠들었고(사실은 잠든 척을 한 것뿐이었지만), 소피아는 그런 소년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리차드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옆으로 다가가서 말을 건넸다.
“오늘 칼루오를 보살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제가 울렸는걸요.”
소피아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칼루오를 달래며 리차드와 함께 시간을 보내서 그런지, 처음 마주했을 때처럼 노골적으로 피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 아이의 누나는 어디로 갔나요?”
“세상을 떠났습니다.”
“네? 어쩌다가…?”
“이름을 듣고 짐작하셨겠지만 칼루오는 로움족입니다. 그의 누나는 로움족이란 이유로 험한 일을 당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죠. 그리고 칼루오만 저희 고아원으로 오게 되었답니다.”
사실 그의 누나 카란은 멀쩡히 살아 있었지만, 리차드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범인은 잡혔나요?”
“아니요. 로움족은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니까요. 조사할 리가 없죠.”
“그럴 수가…. 너무해요.”
“제가 힘이 있었다면 이 아이를 도왔을 텐데…. 미안할 뿐입니다.”
“아니에요. 이렇게 보살펴주고 계시잖아요.”
그녀는 리차드의 선행에 감동한 눈치였다.
“보통 사립 고아원에서는 로움족을 거부한다고 들었는데, 정말 대단하세요.”
“저도 로움족이니까요.”
리차드는 자신의 약점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어차피 그가 로움족이라는 건 카실 공작 가문의 재판 때 공개된 사실이었다.
소피아도 알고 있을 텐데, 아닌 척 허세를 떨어봤자 역효과만 날 뿐이었다.
“…아, 그렇죠.”
어린 로움족 남매의 비극에 안타까워하던 소피아였지만, 리차드가 로움족이라는 사실을 상기하고는 금세 어색하게 얼어붙었다.
리차드는 속으로 이를 악물었다.
혹시 실수한 건가?
하지만 이런 반응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아스테릭 제국에는 로움족에 대한 혐오가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었다.
로움족이 불쌍하다고 착한 척 위선을 떠는 자들 중에서도, 막상 진짜로 로움족을 만나면 욕을 하며 피하는 이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예전 일은 죄송했습니다.”
“네?”
“제가 형을 말렸어야 했는데….”
리차드가 프랭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소피아는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에요. 리차드 님도 그 사람 때문에 힘들어 한 걸 알고 있어요.”
“아닙니다. 제가 도와드렸어야 합니다. 사실 형님께서 영애를 싫어하셨던 건, 제 탓도 큽니다. 형님은 저를 증오하셨죠. 그래서 저와 머리색이 같은 웨스틴 영애도 싫어했던 겁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건 그냥 제가 못생겨서 그런걸요….”
그녀는 자신의 검은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고개를 푹 숙였다.
프랭크는 소피아와 약혼한 걸 탐탁지 않게 생각하며 막말을 늘어놓고는 했다.
“약혼자인 내 입장도 생각해서 조금 꾸미지 그래. 아니 꾸민 게 그건가?”
소피아는 괴로웠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무조건 참으라고만 했다.
지금이야 어려서 그렇지 성인이 되면 철이 들 거라고, 여신의 저주를 받은 괴물 황태자가 죽고, 프랭크가 정식 황태자가 되면 그도 달라질 거라 했다.
그녀는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괴물 황태자가 죽을 때까지 참아보기로 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이게 감히 어딜 만져! 못생긴 걸 받아주니까 끝도 없이 기어올라! 후작 가문이 아니면 누가 너 같은 걸 거들떠보기나 했을 줄 알아?”
프랭크는 황궁 무도회에서 소피아를 모욕하였다.
그날 이후 소피아는 밖에 나가기가 두려워졌다. 모두가 자신을 비웃고 조롱할 것만 같았다.
프랭크가 죽은 지 몇 년이나 지났지만 그날의 상처는 여전히 그녀의 가슴속에 남아 있었다.
“아닙니다. 저는 단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만약 제가 프랭크 형님이었다면 절대로 당신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을 겁니다. 늦었지만 형님과 가문을 대신하여 사과드립니다.”
리차드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지금껏 어느 누구도 그녀를 위로해주지 않았다.
그녀가 프랭크와 파혼하고, 황후의 자리에서도 멀어지자 친구들은 연을 끊었다.
아버지는 그까짓 일을 언제까지 담아둘 거냐며 소피아에게 윽박질렀다.
처음으로 진심 어린 사과를 받은 소피아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슬쩍 고개를 들어서 소피아의 모습을 확인한 리차드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영애, 울지 마십시오.”
리차드는 소피아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그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리차드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진작에 찾아뵙고 사죄를 드렸어야 했는데, 제가 너무 늦었습니다.”
“아니에요. 지금이라도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괜찮으시다면 자주 찾아와 주세요. 칼루아가 영애를 무척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도 영애를 뵙고 싶고요.”
“…네.”
소피아의 얼굴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리차드도 활짝 웃었다.
‘이제 됐다.’
전 약혼자의 동생이라는 벽을 허물었으니,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그리고 모든 건 리차드의 계획대로 흘러갔다.
소피아는 리차드의 고아원을 자주 찾아왔다.
그녀는 리차드에게 완전히 반해서, 그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들어주었다.
위험을 감수하며 세뇌 마법을 걸 필요도 없었다.
가짜 앤시아의 사건으로 리차드가 궁지에 몰렸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공을 들여온 만큼 갑자기 돌변하여 파혼을 주장할 리가 없었다.
“정말로 제가 보낸 게 아니에요. 믿어주세요.”
리차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소피아가 불안해하며 울먹거렸다.
툭하면 징징 짜는 게 짜증스러웠지만, 지금은 파혼을 막는 것이 더 급했다.
“알고 있어. 네 아버지가 독단적으로 행한 일이겠지.”
“맞아요! 아버지가 멋대로 보내신 거예요! 저는 전혀 몰랐어요.”
리차드는 짐짓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안아주었다.
“그럴 줄 알았어. 소피아, 너는 착한 여자잖아. 내가 억울한 상황에 처한 걸 알면서도 야멸차게 배신을 할 리가 없지.”
“저는 누가 뭐래도 리차드의 편이에요!”
“그래. 너만 믿어.”
“네. 저만 믿으세요!”
믿긴 뭘 믿으라는 거지? 자기 아버지에게 입도 뻥끗 못 해서 파혼서가 도착하도록 만든 주제에!
그는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꾹 눌러 참았다.
“후작 각하와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저택에 계시나?”
“네. 집무실에 계세요.”
“그래.”
리차드가 집무실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소피아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만약 아버지가 파혼하라고 해도 저는 안 헤어질 거예요.”
오랜만에 기특한 말을 하는군, 이라고 리차드가 생각하는 찰나 소피아가 말을 덧붙였다.
“가문을 버릴 거예요. 집을 나가서 리차드와 함께 살겠어요.”
리차드의 얼굴이 와그작 구겨졌다.
뭐? 가문을 버려? 후작 가문이 아니라면 내가 너 같은 미련한 것과 결혼할 이유가 없잖아!
자신만 믿으라고 호언장담을 했으면, 끝까지 파혼하지 않고 버티겠다거나 제 아비를 몰아내고 나를 후작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해야지!
최소한 자기가 아버지를 설득하겠다고 말하란 말이야!
“리차드…?”
생각이 표정에 드러났는지, 소피아가 놀란 눈으로 리차드를 바라보았다.
‘내가 왜 이러는 거지?’
소피아가 눈치 없고 답답한 건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었다. 프랭크와 혼담이 오갈 때부터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동안은 소피아가 멍청한 모습을 보여도 아무렇지 않았다.
답답하긴 해도 그녀가 가져다줄 지위를 생각하면 모두 용납할 수 있었다.
오히려 속이기 쉬워서 편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진짜 앤시아를 보고 나니, 소피아의 일거수일투족이 거슬려서 참기 힘들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앤시아는 황태자와 함께 있을 거다. 한시라도 빨리 블레이크를 없애야 한다.
앤시아는 내 것이다! 다시 되찾아야 한다!
리차드는 화산처럼 타오르는 소유욕에 휩싸였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욕망이 그의 혈관까지 파고들었다.
“네가 싫어.”
라온텔이라는 여자의 목소리가 다시금 리차드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두통이 찾아왔다. 그리고 원인을 알 수 없는 욕망 또한 더욱 강렬하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절대로 놓치지 않아.’
그는 이를 악물며 다짐했다. 그리고 당황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한 거지?’
인정하긴 싫지만 앤시아는 황태자의 여자였다.
어린 시절, 벨라시안 가문에서 주최하는 파티에 갈 때마다 앤시아는 그를 뚫어져라 응시하고는 했다.
리차드는 그녀가 자신을 좋아하는 걸 알았지만, 백작가의 천덕꾸러기와 엮인들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거절했다.
그날 이후 앤시아는 단 한 번도 리차드의 소유가 된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마음속에서는 화가 차올랐다.
오래전부터 앤시아가 내 것이었던 것만 같았다.
원래 내 것이었던 여자를 블레이크에게 빼앗겼다는 생각이 들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환청과 함께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이 찾아왔다.
“리차드, 왜 그래요?”
리차드가 머리를 부여잡으며 휘청거리자, 소피아가 화들짝 놀라며 그에게 다가왔다.
“아무것도 아니야. 파혼 때문에 신경을 썼더니 머리가 좀 아프네. 더 이상 너를 못 만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불안해서 그런가 봐.”
리차드는 본심을 지우며, 한껏 슬픈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찌 되었든 웨스틴 후작 가문이 자신의 차지가 될 때까진 그녀에게 잘 보여야 했다.
“리차드,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저한테는 당신밖에 없어요. 아버지가 반대하시면 우리 함께 떠나요.”
소피아는 오페라 속 비련의 여주인공이라도 되는 듯한 얼굴을 하고 리차드를 끌어안았다.
떠나긴 뭘 떠난다는 거야!
리차드는 다시금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참으며 그린 듯한 미소를 지었다.
“후작 각하를 뵙고 올게.”
***
“뭘 잘했다고 얼굴을 내미는 것이냐! 당장 꺼지거라!”
리차드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웨스틴 후작은 윽박질렀다.
‘옛날 생각이 나는군.’
리차드는 그를 만날 때마다 카실 공작저에서 지내던 시절이 떠올랐다.
참으로 엿같은 시절이었다.
리차드는 그때처럼 미련하게 모욕을 참고 견딜 생각은 없었다.
소피아 웨스틴과 결혼하기만 하면, 저 늙은이는 당장 죽여 버릴 거다.
감히 비명도 지를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럽게 숨통을 끊어주지. 그동안의 수모를 전부 갚아줄 거다!
하지만 그건 나중의 일이었다. 리차드는 일단 정중하게 말했다.
“자택으로 파혼 통지서가 도착했습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인지요?”
“그걸 몰라서 묻는 게야! 가짜 황태자비를 데려와서 이 사달을 만들다니! 낯부끄러워서 건국제에 가지도 못했다! 소피아가 얼마나 속상해한 줄 아느냐!”
“사소한 착오가 있었을 뿐입니다. 황제 폐하께서도 속으실 정도로 닮은 여인이었고, 이미 저에겐 죄가 없음이 명명백백히 밝혀진 사안입니다. 고작 그까짓 일로 파혼을 통보하신 겁니까?”
리차드의 뻔뻔스러울 정도로 당당한 태도에 웨스틴 후작은 격분했다.
“뭐야! 염치가 없는 것도 정도가 있지! 역시 천박한 피는 속일 수가 없군!”
“말씀이 심하시군요.”
“내가 틀린 말 했나? 이래서 더러운 로움 놈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었는데! 내가 미쳤지! 내가 미쳤어!”
리차드는 고래고래 악을 쓰는 웨스틴 후작을 향해 차갑게 뱉었다.
“어쨌든 무혐의로 일단락된 일입니다. 파혼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천한 로움족 주제에 감히 내 뜻을 거역하겠다는 거냐!”
“정 파혼을 하셔야겠다면 재판을 신청하십시오.”
제아무리 웨스틴 후작이 난리를 친다고 한들, 이미 약혼한 이상 리차드가 전적으로 유리했다.
파혼을 위해 재판을 하게 되면 결과가 나올 때까지 아무리 빨라도 1년 정도가 소요되었고, 길면 3~4년이 걸리기도 했다.
게다가 재판 기간보다도 더 큰 문제가 있었다.
파혼 재판은 서로의 약점을 들추는 진흙탕 싸움이었다.
잠자리나 두 사람 은밀한 대화, 편지, 비밀스러운 사생활이 전부 공개되었으며, 특히 여자 쪽의 피해가 막심했다.
남자는 바람을 피워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지만, 여자는 잠자리 중 뱉은 단어 하나만으로도 사교계에서 두고두고 조롱당하거나 신문에 실려서 음탕한 여자라고 손가락질받고는 했다.
“설마 그런 각오도 없이 파혼 신청서를 보낸 건 아니시겠죠?”
리차드는 오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은 어차피 결혼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적당히 비위를 맞춰줬다.
하지만 웨스틴 후작이 기필코 파혼하겠다고 한다면 더는 참을 생각이 없었다.
“이놈이 감히! 그래도 카실 공작의 아들이라 지금껏 대우를 해줬더니, 그 은혜도 모르고!”
리차드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는 단 한 번도 리차드를 예우해 준 적이 없었다.
웨스틴 후작이 카실 공작의 아들이라 여긴 사람은 오직 프랭크와 네온뿐이었다. 노예의 핏줄인 리차드는 하인만도 못한 취급을 받았다.
“각하, 저랑 소피아는 절대로 헤어지지 않습니다. 괜히 망신당하지 마시고 이쯤에서 포기하십시오.”
“아니. 파혼할 거다. 리차드, 네놈이 나에게 수작을 부린 걸 전부 알고 있다!”
웨스틴 후작이 소리친 순간, 여유만만하던 리차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설마 눈치챈 건가?’
웨스틴 후작은 리차드와 소피아의 결혼을 격렬하게 반대했다.
무려 1년 동안이나 승낙하지 않고 버텼으며, 심지어 다른 남자와 결혼을 시키려고 하였다.
한물간 가문 주제에 그래도 후작이라고 콧대가 이만저만 높은 것이 아니었다.
결국 리차드는 최후의 방법을 썼었다.
그는 웨스틴 후작과 술자리를 마련했다. 그리고 만취한 후작에게 세뇌 마법을 걸어서, 약혼 서류에 사인하도록 만들었다.
다음 날, 약혼 서류에 사인이 된 걸 보고는 웨스틴 후작은 경악했다.
하지만 술에 취해서 실수를 저질렀다고 생각할 뿐, 흑마법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취해서 한 거야! 이건 무효네!”
리차드는 길길이 날뛰는 웨스틴 후작에게 은밀하게 속삭였다.
“소피아를 황후로 만들겠습니다.”
“…뭐라?”
웨스틴 후작은 혼맥을 중시했다. 프랭크가 개차반인 걸 알면서도 오직 가문의 이익만을 좇아 약혼했고, 파혼한 뒤에도 가문을 다시 일으킬 만한 최고의 혼처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리차드는 그의 야심을 잘 알았다. 웨스틴 후작은 리차드가 차기 황제가 된다는 확신만 있다면 그의 혈통 같은 건 무시하고 전적으로 밀어줄 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웨스틴 후작에게 자신의 계획을 모두 밝힐 생각은 없었다.
“황태자는 지금 죽은 황태자비를 기다리며, 여인을 멀리하고 있습니다. 그가 결국 혼인하지 않는다면, 다음은 황제의 조카인 제 차례가 될 것입니다.”
“작위도 없는 로움족 주제에 분수도 모르는군.”
잠시 기대했던 웨스틴 후작은 콧방귀를 꼈다.
“만약 제가 웨스틴 후작의 후계자가 되면 황위 계승권이 올라가겠죠.”
“…….”
“후작 각하께서 도와주신다면 가능합니다. 저를 택하시면 반드시 국구가 되실 겁니다.”
내가 황제의 장인이 된다고….
웨스틴 후작은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리차드의 말이 언뜻 허무맹랑한 소리로 들리긴 했지만, 블레이크 황태자가 이대로 결혼하지 않거나 불의의 사고라도 당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웨스틴 후작은 한번 도박을 걸어보기로 했다.
하지만 그의 도박은 처참하게 실패했다.
진짜 황태자비가 돌아온 것이다. 앤시아가 온 이상, 리차드의 황제 자리는 물 건너간 거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리차드는 가짜 황태자비 사건까지 일으켰다.
황제가 될 가능성이 없는 데다가, 로움족이며 작위도 없는 놈을 사위로 삼을 수는 없었다.
“내가 너 같은 놈을 사위로 받아들였을 리가 없다!”
무작정 악을 쓰는 웨스틴 후작의 모습을 보며 리차드는 안도했다.
파혼하고 싶어서 억지를 부리는 것일 뿐, 리차드가 흑마법을 썼다는 사실을 눈치를 챈 건 아니었다.
“억지 부리지 마십시오. 각하께서 직접 서명하시지 않았습니까?”
“네놈이 더러운 짓을 한 게 틀림없다! 흑마법 같은 걸 쓴 거겠지!”
“…….”
“그래, 흑마법이다! 로움족 놈들은 여신을 배반하고 마족을 섬기며 흑마법을 쓴다고 하던데, 네놈도 그런 거겠지!”
“…….”
“카실 공작 부인을 죽인 것도 네놈 짓이지! 그 여자가 자살할 리가 없어! 절대로 그럴 성격이 아니었다. 네온도 마찬가지지. 네가 더러운 사술을 써서 죽인 것이 아니냐!”
웨스틴 후작은 생각이 미치는 대로 마구 내뱉기 시작했다. 이는 어떠한 근거도 없는 망상에 불과했다.
하지만 리차드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웨스틴 후작이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으니까.
“…말씀이 심하시군요.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건 재판으로 가리면 되겠지.”
“파혼 재판을 신청하실 생각이십니까?”
리차드는 정신을 차렸다. 어찌 됐든 웨스틴 후작이 파혼 재판을 신청할 리 없었다.
게다가 딱히 증거를 가지고 하는 말도 아니었다. 자신이 유리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리차드가 다시 여유를 되찾아가는데, 웨스틴 후작이 외쳤다.
“아니. 마족 재판을 열 거다!”
“…….”
“네놈이 마족과 결탁하여 내 딸을 속이고, 나를 조종하여 우리 가문을 집어삼키려 한 사실을 명명백백히 밝히고 말 거다!”
후작은 되는대로 지껄이며 몸을 돌렸다.
“당장 재판을 신청하겠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리차드는 황급히 웨스틴 후작을 붙잡았다.
‘괜히 하는 말이다. 침착하게 대응하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몸이 먼저 움직였다.
만에 하나라도 웨스틴 후작이 정말로 마족 재판을 신청하기라도 하면 모든 게 끝장이었다.
“뭘 그리 벌벌 떠는 것이냐? 혹시 정말로 마족과 손을 잡은 게냐?”
“떨지 않았습니다. 말도 안 되는 모함을 하셔서 당황했을 뿐입니다.”
리차드는 평정을 가장했다. 하지만 웨스틴 후작의 눈매는 가늘게 좁혀졌다.
그는 리차드처럼 머리가 좋지는 않았지만, 오랫동안 웨스틴 후작 가문의 가주직을 맡아온 만큼 노련하며 예리한 눈썰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리차드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간파해냈다.
분명 뭔가가 있다.
웨스틴 후작이 악을 쓰며 흑마법을 운운하기는 했지만, 진짜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정말로 마족 재판을 신청할 생각도 없었다.
시대가 변했다.
예전처럼 거슬리는 놈을 마족 재판에 넘겨서 적당히 처리하던 때가 아니었다.
자칫 잘못하며 오히려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저 로움족이 마족 재판을 당하면 다른 사람들보다 불리하다는 점을 이용하여 적당히 협박하다가 파혼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으려 했다.
하지만 리차드의 반응을 보며 생각이 달라졌다.
‘이놈이 뒤가 구리긴 한가 보군.’
만약 리차드가 흑마법을 쓴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엄청난 기회였다.
그러고 보니 공작 부인과 네온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도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었다.
만에 하나 흑마법을 써서 그들을 죽인 게 사실이라면….
웨스틴 후작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7년 전에 일어났던 카실 공작 사건의 진실을 밝힌다면, 텐스테온의 신임을 얻을 수 있다. 가문의 영광도 되찾을 수 있을 거다.
“진실은 법정에서 가리도록 하지.”
웨스틴 후작은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문으로 향했다.
그가 다시 가문을 재건할 희망에 부풀어 문고리를 잡는 찰나, 뒤에서 충격이 느껴졌다.
카실 후작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쓰러졌다.
흥건한 피가 대리석 바닥을 적시며 점점 퍼져나갔다.
리차드는 서늘한 얼굴로 카실 후작을 내려보았다.
지난 7년 동안 리차드가 후회한 것이 하나 있었다.
프랭크, 그 멍청한 놈을 일찍 처리했다면, 카실 가문이 그토록 허망하게 몰락하지는 않았을 거다.
문제의 싹은 빨리 없애야 한다. 고민하는 순간 늦는다.
리차드는 후작을 공격했던 청동 조각을 내려놓으며,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
숨이 끊어졌다. 당황할 건 없었다. 어차피 결혼하고 난 뒤엔 죽일 생각이었으니까.
그저 시기가 조금 앞당겨진 것뿐이다.
우선 문을 잠그고, 코닌스와 카란을 불러서 처리해야겠군.
리차드가 문을 잠그려고 하는데, 그 전에 먼저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소피아가 안으로 들어왔다.
“소피아….”
“어떻게 됐어요? 걱정이 돼서….”
“이, 일단 나가자.”
리차드는 피가 묻은 손을 뒤로 숨기며 말했다. 그녀는 아직 후작을 보지 못했다.
어서 이 방에서 나가야 한다. 하지만 손을 감추는 동작이 오히려 그녀의 시선을 끌고 말았다.
“리차드 그거 피 아니에요?”
“나가자.”
“어쩌다가 그런… 꺄악!”
리차드의 손을 바라보던 소피아는 시선 너머에 있는 후작의 시체를 발견하고 비명을 질렀다.
리차드는 이를 악물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
건국제를 마치고 다이애나는 아카데미로 돌아갔다.
나도 새로운 시녀를 뽑고, 7년 동안 있었던 일들을 알아가며 일상생활로 돌아오고 있었다.
앤시아로 돌아왔다는 걸 가장 크게 느끼는 순간은 바로 아침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블레이크의 얼굴을 볼 수 있다. 그 사실이 너무 행복했다.
포렌스궁과 세피아궁이 있었지만, 우리는 주로 아모리아궁에 머물렀다.
보고나 관리 등 최소한의 업무를 볼 때를 제외하면, 궁인들은 아모리아궁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곳은 우리 둘만의 공간이었고, 많은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래서 더 편했다.
천 년 전 나는 이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끔찍한 기억이었지만, 여기서 지낸다고 해서 특별히 그때의 일이 떠오르거나 괴롭지는 않았다.
블레이크와 함께 보낸 추억들이 괴로운 기억을 모두 지워준 덕분이겠지.
하루하루 행복한 날들이 이어졌다. 하지만 오늘은 다소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럼 나는 필리아궁에 다녀올게.”
나는 침대에 있는 블레이크에게 말했다.
건국제 이후 나는 블레이크에게 말을 놓았다. 어색할 줄 알았는데, 한번 놓기 시작하니 이쪽이 훨씬 편하고 자연스러웠다.
오늘은 필리아궁에 가서 아버님을 뵙고 콜린 경과 대화도 나눌 생각이었다.
지난 7년 동안 벌어진 일을 알려면 콜린과 첼시한테 물어보는 편이 가장 정확하고 빨랐다.
다른 사람들은 나를 배려하느라 솔직히 말하지 않을 때도 많았으니까.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블레이크가 나의 손을 붙잡았다.
“앤시아, 내가 이렇게 힘든데, 아파서 걷지도 못하는데, 나를 혼자 두고 갈 거야…?”
그가 눈을 내리깔자, 기다란 속눈썹이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처연하고 아름다운 나머지 당장이라도 전 재산을 쥐여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동시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자업자득이잖아.”
텐스테온은 나를 위한 전속 기사단을 창단하려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시기를 내년으로 미뤄달라고 청했다.
다이애나가 졸업할 때까지 기다리고 싶었다.
아버님은 나의 부탁을 들어주었고, 당분간은 제5 기사단이 나의 호위를 담당하기로 했다.
모두들 꺼리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의외로 다들 좋아해 주었다고 한다.
나의 전속 호위가 되기 위해서 경쟁이 붙을 정도로 말이다.
기사들은 자기들끼리 검술 시합을 펼쳐서 우승하는 사람이 나의 전속 호위기사가 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런데 느닷없이 블레이크가 참전했다.
그리고 결과는….
“참으로 참혹했습니다.”
시합을 지켜봤다던 첼시는 희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블레이크 때문에 기사단이 순식간에 초토화됐다고 한다.
나는 그 시합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전에 제5 기사단에서도 손에 꼽힌다는 제이든을 블레이크가 단칼에 제압했던 모습을 떠올려 보면, 그때의 상황이 어땠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자기가 기사들을 때려눕혀 놓고도 오히려 힘들다며 엄살을 피우는 블레이크의 모습을 보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기사들을 때리면 어떻게 해!”
내가 나무라자 블레이크가 작게 중얼거렸다.
“다 치료해 줬는걸.”
그는 진심으로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 본인이 때리고 치료해주면 다냐고!
“병 주고 약 주는 거잖아.”
“그 녀석들이 부인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확인하려면 어쩔 수 없었어.”
나를 살짝 올려 보는 그의 눈빛이 요염하면서도 처연했다. 저렇게 불쌍하게 쳐다보니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
“그렇다고 호위를 뽑는 시합에서 우승하면 어떡해.”
“역시 나밖에 없어.”
“응?”
“내가 부인의 호위 기사가 되겠어!”
“…그걸 말이라고 해?”
세상천지에 황태자비를 호위하는 황태자가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블레이크는 진지했다.
“나 하나도 못 이기는 놈들한테 부인을 맡길 수는 없어.”
“블레이크.”
“알잖아. 나는 싸우는 거 싫어해. 정말로 부인이 걱정돼서 어쩔 수 없이 참가한 거야.”
그 말은 맞았다. 블레이크는 그 흔한 눈싸움조차 하기 싫어서 다이애나한테 당하기만 했었다.
“정말로 부인이 걱정돼서 그래.”
블레이크가 나의 손을 꼭 잡았다. 우리의 손가락에서 같은 반지가 반짝거렸다.
세르는 내 결혼반지를 그대로 놔두고 떠났다.
블레이크가 광장에서 새로 사준 반지가 있긴 했지만 나는 이 반지를 택했다.
7년 동안 고생하면서 반지도 많이 상하긴 했지만, 수리를 하니 새것 같아 보였다.
“블레이크, 정말로 아파?”
“응 다리가 아파서 걸을 수가 없어.”
자기가 때려놓고 엄살을 피우는 모습마저 귀여워 보이는 걸 보니, 내가 어떻게 됐나 보다.
“그럼 치료해줄게.”
“앤시아가 함께 있어 주면 나을 거 같은데.”
어디서 약을 파시려고.
블레이크는 나와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나를 걱정해 주는 마음이 고맙고 또 이해도 하지만 그렇다고 계속 이렇게 있을 수는 없었다.
“블레이크, 내가 마법을 알려줄게.”
“마법?”
“응.”
세르가 봉인되며, 빛의 마나가 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췄다.
빛의 마나가 사라지자 빛의 마법사들은 자연스럽게 힘을 잃었다.
지난 천 년 동안 빛의 마법에 관한 책들은 자취를 감추며 사라졌고, 새로운 연구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물론 빛의 마나석으로 제작하는 마도구와 치료법은 발달했지만, 빛의 마법은 거의 사장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7년 전 카실 가문의 잔당이 무도회장을 습격했을 때, 블레이크는 부상자를 모두 치료했다고 한다.
빛의 마법을 공부한 적도 없으면서 본능적으로 마나의 흐름을 읽고 치료 마법까지 사용한 것이다.
블레이크에게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체계적으로 배운다면 실력이 일취월장할 거다.
“빛의 마법을 어떻게 알아?”
“어둠의 문에 들어갔을 때 배웠어.”
전생의 이야기는 할 수 없기 때문에 적당히 지어서 말했다.
하지만 그때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만으로도 블레이크의 표정은 금세 어두워졌다.
그는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우며, 나의 어깨를 단단히 감쌌다.
“가르쳐줘. 부인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된다면 뭐든 배우고 싶어.”
“알았어.”
나는 그의 손을 단단히 맞잡았다.
“처음으로 알려줄 건, 상대의 마나를 느끼는 거야. 우리가 어디 있든 서로를 알 수 있도록.”
나의 손에서 나온 투명한 빛이 블레이크에게 전달되었다.
“따뜻하다.”
“그래?”
“응. 부인의 손은 언제나 따뜻해. 처음부터 그랬어. 부인의 손을 잡으면 모든 아픔이 사라졌어. 나의 빛이야.”
블레이크가 엷은 미소를 지었다. 나도 웃었다. 이제는 블레이크가 다 나았으니, 이런 말도 웃으면서 할 수 있었다.
“내가 좀 더 빨리 고쳐줬어야 했는데….”
블레이크는 고개를 저었다.
“부인이 내 옆에 있어 준 것만으로도 충분해. 그런 말 하지 마.”
그가 깍지를 낀 손을 자신의 쪽으로 가져가서 얼굴을 문질렀다.
어렸을 때와 똑같은 순진무구한 행동인데도 어쩐지 야릇하게 느껴졌다.
“앤시아, 마나가 흔들려.”
마음의 동요가 마나로 나타났나 보다. 나는 괜스레 창피해서 손을 빼버렸다.
“버, 벌써 마나의 파장을 느끼네. 후, 훌륭해!”
그는 청초하게 웃으며 나의 손을 다시 잡았다.
“내 마나는 어때?”
나는 눈을 감고 그의 몸에 흐르는 마나를 느꼈다. 조금도 혼탁하거나 비틀려지지 않은 순수한 빛의 마나였다.
저주가 풀리면서 한꺼번에 터져 나온 방대한 마나 때문에 몸에 무리가 갈 수도 있었을 텐데, 아주 잘 관리하고 있었다.
역시 우리 남편 천재인가 봐.
하지만 천재성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건 아닐 거다. 어릴 때부터 본능적으로 저주를 억누르면서 제어하는 방법을 터득한 거겠지.
그래서 그런지 블레이크는 마나를 억누르고 제어하는 쪽으로 능력이 발달해 있었다.
“마나가 투명하고, 조절도 잘하고 있어. 하지만 이제는 내보내는 법도 배워야 할 거 같아.”
“응.”
그는 유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 말을 잘 듣는 착한 학생 같다.
“정신을 집중하고, 조금 전에 내가 했던 것처럼 마나를 손끝에 모아서, 내 쪽으로 흘려보내 봐.”
“알았어.”
“처음에는 잘 안 될 거야. 침착하게 마음먹고 천천히 해.”
“응.”
하지만 대답하기 무섭게 그의 마나가 나의 손으로 흘러들어 왔다.
나는 깜짝 놀랐다.
“대단해!”
“잘했어?”
“응. 잘했어. 우리 남편 천재야!”
그는 조금도 헤매지 않고 곧바로 적당한 양의 마나를 흘려보냈다. 이건 숙련된 마법사들만이 할 수 있는 거다.
과거의 경험과 상관없이 블레이크는 진짜로 천재인 게 틀림없다.
“헤헤.”
블레이크는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작은 칭찬에도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지금 느껴지는 마나의 파장과 흐름을 잘 기억해줘. 우리의 마나는 근원이 같으니까, 서로가 허락하고 잊지 않는다면 언제 어디에 있든 찾을 수 있을 거야.”
“절대로 잊지 않아.”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물론 많은 훈련이 필요하긴 하지만, 우리 남편이라면 금방 할 수 있을 거야.”
“응. 열심히 할게.”
블레이크는 활짝 웃었다. 나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언제나 옆에 있을 거니까, 이제 불안해하지 마. 기사들한테도 사과하고. 알았지?”
순수한 대련이라면 모를까, 날 지킬 호위 기사를 뽑는 시합에 난입해서 부상을 입힌 건 잘못한 거다.
내가 다시 나무라자, 그는 입을 꾹 다물었다.
불만이 있는데 말도 못 하고 입술을 삐죽 내미는 모습이 정말 어린아이 같았다.
“나는 착한 사람이 좋더라.”
내가 넌지시 말하자, 블레이크는 언제 부루퉁했냐는 듯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응. 부인 말대로 할게.”
***
블레이크는 연무장을 향해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앤시아와 함께 있을 때 보였던 순진하고 말간 표정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싸늘한 한기만이 감돌았다.
“전하, 오셨습니까.”
훈련을 하던 기사들이 블레이크를 보고 인사했다.
그의 싸늘한 표정을 보며 놀라는 사람은 없었다. 언제나 저런 분이었으니까.
블레이크는 황태자비와 함께 있으면 미소가 떠나지 않았는데, 기사들이 보기에는 오히려 그 모습이 더 낯설었다.
블레이크는 뒤에 서 있는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손이 왜 그러지? 치료해주었을 텐데.”
앤시아의 호위를 뽑기 위한 시합을 마친 뒤, 블레이크는 다친 기사들을 모두를 치료해주었었다.
“아, 좀 전에 훈련하다가 잘못 넘어지는 바람에….”
알렉스가 민망해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벅찬 감동을 느꼈다.
손목이 아파서 살짝 매만졌을 뿐인데도 전하께서는 자신이 부상당한 사실을 눈치채셨다.
황태자비 전하가 돌아오고 나서 마음이 안정되더니 성격마저 세심해지셨나 보다.
“이리 와.”
“네, 전하.”
알렉스는 얼른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블레이크는 알렉스의 상태를 가볍게 살피더니, 부어오른 손목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알렉스는 화들짝 놀라서 손을 뺐다.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전하께서 빛의 힘으로 치료를 해준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부주의함 때문에 다시 몸을 다치고 말았다.
칠칠치 못하다며 나무라지 않고 선뜻 치료를 해주려 하는 주군에게 감사했지만, 그렇다고 또 염치없이 치료를 받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다시 알렉스의 손을 잡아당겼다.
“전하….”
알렉스의 눈에 감동의 눈물이 맺혔다. 이렇게까지 걱정을 해주시다니.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북쪽의 설산보다도 차가웠던 분이 저리도 다정한 모습을 보이자 모두들 감동의 도가니였다.
다 같이 다시 한번 충성 맹세를 할 정도로 감격에 벅차오르는 찰나, 블레이크가 나직하게 뱉었다.
“가만히 닥치고 치료받아. 네가 이렇게 비실거리면, 부인이 내가 그런 줄 오해할 거 아냐?”
서슬 퍼런 눈빛에 알렉스는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정작 분위기를 냉각시킨 당사자는 주변의 반응에 신경 쓰지 않은 채 싸늘한 표정으로 알렉스를 치료할 뿐이었다.
앤시아한테 꾸지람을 들은 것도 들은 거지만, 그녀가 다른 남자를 걱정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블레이크의 기분은 저조하게 가라앉았다.
물론 기사들에게 특별히 관심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싫었다.
“다친 사람은 모두 일렬로 서.”
블레이크는 치료를 마친 알레스의 팔을 거칠게 놓으며 차갑게 외쳤다.
“아, 아닙니다. 저희들은 괜찮습니다.”
기사들은 사양했지만, 블레이크의 눈은 오히려 서늘하게 번뜩였다.
“당장 와.”
***
가을 날씨는 변덕이 심하다. 어제까지는 당장 겨울이 온 것처럼 날씨가 추웠는데, 오늘은 또 여름처럼 더웠다.
그래도 따가운 가을 햇살이 반가웠다. 앞으로는 추워질 일만 남았으니까.
산책도 할 겸 천천히 걸어가는데, 한 무리의 낯익은 사람들이 보였다.
제5 기사단의 기사들이었다.
“비 전하!!!”
그들은 나를 보는 즉시 전투적인 기세로 달려왔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잔뜩 긴장하는데, 그들이 짠 것처럼 외쳤다.
“이런 곳에서 비 전하를 뵙다니! 참으로 우연이네요! 하하!”
“그러게요! 우연입니다!”
우연인가? 나를 만나기 위해서 일부러 달려온 것처럼 보였는데.
“아, 그렇네….”
일단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는데, 기사들이 말을 이었다.
“오늘은 몸이 가뿐합니다! 전하께서 치료해주셨거든요.”
“너무 가벼워서 연무장에서 여기까지 달리는 중입니다!”
“전하께서는 정말 자상하십니다. 제국에서 가장 착하신 분이 아닐까요. 하하하!”
그들은 마치 공익 광고처럼 어색한 멘트를 마구 내뱉고는 껄껄거리며 웃었다. 그 웃음조차 공익 광고 같았다.
“그렇긴 하지.”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맞는 말이긴 한데, 뭔가 이상했다.
그들과 헤어진 뒤에도 제5 기사단의 기사들과 몇 번이나 마주쳤다. 그들은 다 같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블레이크에 대한 칭찬을 속사포처럼 내뱉고는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도대체 뭘까? 하지만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의문은 곧 풀렸다.
블레이크가 오늘 연무장을 찾아와서 다친 기사들을 꼼꼼히 치료해주었다고 한다.
내 말을 듣고는 미안한 마음에 기사들의 상태를 다시 살펴준 모양이다.
사과하라고 했을 때 탐탁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역시 다정하다니까.
흐뭇하게 웃으며 필리아궁 안으로 들어가자, 시종이 고개를 숙였다.
“비 전하, 오늘은 조금 기다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손님이 오셨어?”
“그런 것이 아니오라, 폐하께서는 지금 론스 단장님과 대련 중이십니다.”
제1 기사단의 단장인 론스와 대련을 하고 계신다고?
론스 경은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자로 황궁의 기사 중에서 가장 강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론스조차 텐스테온에게 밀린다는 평가가 많았다.
그런 두 사람이 대련을 펼친다고 하니 호기심이 일었다.
“그곳으로 안내해줘.”
“네. 비 전하.”
대련 장소에 가까워지자, 날카로운 금속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생생하게 전해졌다.
검술은 잘 모르지만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나는 두 사람의 대련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살금살금 걸어갔다.
텐스테온과 론스 단장이 검을 맞부딪치고 있었다.
론스 단장이 텐스테온보다 어린 걸로 알고 있는데, 외모만 보면 한참 연상 같았다.
처음 봤을 때부터 계속 느낀 거지만 우리 아버님은 정말 동안이었다. 혼자서만 세월의 흐름이 비껴간 것 같다.
실제로 두 사람의 대련을 보니 소리로만 들었을 때보다도 훨씬 격렬했다.
지금 제국에서 검술로 손에 꼽히는 사람은 텐스테온과 론스, 그리고 블레이크라고 했다.
무술 대회나 기사들의 대련을 종종 봤지만, 확실히 저 정도의 실력자가 검을 겨루니, 클래스가 다르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론스 단장은 점점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당황하던 론스 단장은 내지르듯 검을 뻗었다.
검의 칼끝이 텐스테온의 가슴을 파고들지만. 그는 여유롭게 뒤로 피했다.
그러나 검이 스쳤는지 단추 하나가 아래로 톡 떨어졌다.
“괜찮으십니까!”
론스 단장이 화들짝 놀라서 텐스테온에게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텐스테온은 손을 뻗어서 그를 제지했다.
“괜찮다.”
텐스테온은 단추가 떨어진 셔츠를 찢듯이 거칠게 벗어버렸다.
헉!
나는 내적 비명이 튀어나오는 걸 겨우 눌러 참았다.
세상에. 세상에나.
10년 전보다도 몸이 더 좋아졌다. 아니, 어떻게 거기서 더 좋아질 수가 있는 거지? 그때도 완벽하다고 생각했는데.
“계속하지.”
“네, 폐하.”
두 사람은 다시 대련을 이어갔다. 조금 전보다도 박진감이 넘쳤지만, 텐스테온에게 시선이 빼앗겨서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때 커다란 손이 나의 눈을 가렸다.
“뭐 하는 거야?”
나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블레이크….”
“뭘 보고 있는 거야?”
“대, 대련을….”
그래 난 대련을 본 거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데, 괜히 혀가 꼬였다.
블레이크는 텐스테온과 론스가 검을 맞부딪히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가자. 멋진 대. 련. 을 방해하면 안 되잖아?”
“으응….”
***
아모리아궁으로 돌아오는 내내 블레이크는 저기압이었다.
“앤시아.”
그는 방 안으로 들어와서야, 침묵을 깨며 나의 이름을 불렀다.
“응. 블레이크.”
“폐하의 복근이 그렇게 좋아?”
“아, 아니야!”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나는 대련을 보러 간 거야!”
나는 정말로 순수하게 제국 최고의 실력자들이 맞붙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뿐이다.
설마 거기서 갑자기 그런 엄청난 광경이 펼쳐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해명했음에도 블레이크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나, 노력했는데…. 아직 부족했나 봐.”
“아니야. 부족하기는!”
블레이크의 복근은 훌륭했다. 다만 텐스테온과 비교하면 그 결이 조금 달랐다.
블레이크는 모델 같은 느낌이었다.
호리호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옷을 벗으면 깜짝 놀랄 정도의 아름다운 근육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림이나 조각상처럼 미학적으로도 완벽했다.
반면 텐스테온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를 보는 느낌이었다.
남녀노소를 떠나서 인간적인 존경심과 감탄이 저절로 터져 나오는 몸매였다.
“블레이크랑 폐하는 달라!”
“뭐가 다른데?”
“그, 그러니까….”
모델과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를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대체할 만한 마땅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어, 폐하는 황금 같지.”
“뭐어?!”
블레이크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아니, 그러니까 황금 같다는 게 무슨 뜻이냐면…!”
앤시아, 너 도대체 왜 그러니!
나는 어째 예나 지금이나 텐스테온의 복근만 보면 헛소리가 나오는 거 같다.
“황금같이 훌륭하다고?”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세계 1등…!”
세계 1등을 하는 운동선수처럼 인간적으로 훌륭하고 존경스러운 몸매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 전에 블레이크에게 말허리가 댕강 잘리고 말았다.
“폐하가 세계 1등이라고?”
“그, 그런 세계 1등이 아니라….”
생각해보면 이 세계에는 아직 ‘운동선수’라는 개념이 없었다.
어째 말을 하면 할수록 수렁으로 빠지는 느낌이다.
“세계 1등 검사 같으신 몸매라고.”
어찌어찌 내 생각을 전달했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랑은 조금 다르지만, 뭐 비슷한 거니까.
겨우 해명하고 한숨 돌릴까 하는데, 블레이크가 벌떡 일어났다.
“블레이크, 어디 가?”
“필리아궁에.”
“왜?”
“폐하를 이기면, 내가 1등이잖아. 황금 같은 1등.”
그가 허리춤에 찬 검을 단단히 움켜잡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말뜻이 잘못 전달된 모양이다. 나는 다급히 그를 붙잡았다.
“블레이크도 1등이야!”
“무슨 1등.”
“…아름다운 걸로 1등!”
모델 같다는 말의 대체어를 찾지 못한 나는 적당한 다른 단어를 말했다.
“…….”
하지만 블레이크는 침묵했다. 아무래도 내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얼른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나한테 1등!”
“…….”
그 순간 검을 쥔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블레이크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의 손등에 입술을 가져간 뒤 힘껏 바람을 불어넣었다.
부르릉.
“…앤시아, 뭐 해?”
“방귀 공격.”
나는 배시시 웃었다. 그러자 블레이크도 피식 웃어버렸다.
“앤시아, 그거 아니잖아.”
“응?”
“여기다 해야지.”
그가 자신의 배를 가리켰다. 내가 배방구를 해줬던 걸 기억하고 있구나.
완만한 곡선을 이루던 아기 배가 지금은 단단한 근육으로 이루어진 남자의 몸으로 변했다.
“…그, 그때는 어렸을 때잖아.”
“그럼 내가 해줄까?”
“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블레이크가 나의 귓가에 바람을 불어 넣었다.
“흣.”
간지러우면서도 야릇한 느낌이 들어서 몸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그가 나의 귓불을 문지르며, 외투를 벗겼다.
블레이크의 입술이 나의 목덜미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리고 어깨를 지나 팔, 손목, 손등으로 내려왔다.
이건 배방구가 아니었다. 하지만 지적할 수는 없었다. 그가 붉은 눈동자를 요요하게 빛내며 나의 손가락에 입술을 가져갔다.
입을 맞추며 슬쩍슬쩍 쳐다볼 때마다 전신이 장미 넝쿨에 칭칭 감기는 듯했다.
블레이크가 손끝을 살짝 깨무는 순간, 덫에 걸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이 남자를 절대로 벗어나지 못할 거다.
***
“아버님.”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자, 서류를 바라보던 텐스테온이 나를 보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앤시아, 왔니.”
“바쁘세요?”
“아니. 쉬려던 참이다.”
그의 말과 달리, 책상 앞에는 서류가 잔뜩 쌓여 있었다.
“바쁘시면 기다릴게요.”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너를 보러 가려던 참이었다.”
“저를요?”
“어제 왔다가 돌아갔다며.”
쿨럭.
어제의 일이 떠오르자, 마신 것도 없는데 갑자기 사레가 들렸다.
“괜찮니?”
“아, 네. 네. 어젠 아무 일도 아니었어요. 그, 그냥 왔다가 바쁘신 거 같아서 돌아갔어요.”
“너보다 중요한 일이 어디 있다고.”
그는 물잔을 건네주었다.
“감사합니다.”
나는 허겁지겁 물을 마셨다. 겨우 사레들린 것이 진정되자 텐스테온이 나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우리는 집무실을 나와 황궁에서 가장 큰 유리 온실에 갔다. 텐스테온이 나를 처음으로 초대했던 곳이기도 했다.
어째 텐스테온의 몸을 보고 난 뒤에는 이곳에 오는 것 같다.
하얀 테이블 위에는 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한 디저트가 펼쳐져 있었다.
“부족하면 말하거라.”
“아니에요. 지금도 너무 많은 걸요.”
나는 새빨간 딸기가 올려져 있는 쇼트케이크를 가장 먼저 먹었다. 역시 기본이 최고다.
“맛있니?”
텐스테온은 나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네. 아버님도 드세요.”
“그래.”
그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홍차 외에 다른 디저트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여전히 단걸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는구나.
그리고 블레이크와의 사이는 더 서먹해졌다. 그 원인이 나라는 걸 알기 때문에 마음이 더 무거웠다.
“조금 전에 블레이크가 다녀갔다.”
“그래요?”
내가 돌아왔으니, 블레이크도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하려고 하는 걸까?
기뻐하려는 찰나, 텐스테온이 말을 덧붙였다.
“대련을 하자고 하더구나.”
잘 넘어간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그건 거절하시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왜 그러니?”
그야 지금은 검을 맞대도 순수한 대련이 되지 않을 테니까.
제5 기사단을 초토화시켰던 블레이크였다.
어제 검을 쥐며 텐스테온과 대련을 하겠다고 했을 때도 그답지 않게 살벌한 분위기가 풍겼다.
만약 지금 대련을 한다면 죽기 살기로 텐스테온을 이기려 들 거다.
순수하게 무예를 겨루고 서로의 실력을 확인하는 자리와는 거리가 멀 게 뻔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이 싸우는 걸 보고 싶지 않아요.”
“싸우는 게 아니라 대련일 뿐이야.”
“그래도 검을 맞대는 거잖아요. 수업도 아니고요.”
“…알았다.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하마.”
어린 블레이크에게 검술을 가르쳤을 때가 떠올랐는지, 텐스테온의 얼굴에 쓸쓸한 기색이 어렸다.
나는 분위기를 풀기 위해 밝게 웃었다.
“대련은 사이가 좋아진 다음에 다시 해주세요.”
“그래.”
두 사람의 사이는 언제쯤 좋아질까?
블레이크가 텐스테온을 ‘아빠’라고 부를 날이 얼른 왔으면 좋겠다. 그럼 텐스테온도 정말 기뻐할 텐데.
“론스 단장님의 결혼식에는 가실 거죠?”
론스 단장은 모레 결혼식을 올린다.
자신은 나라와 결혼했다며 30대 후반이 되도록 독신을 주장했지만, 올해 소꿉친구와 재회하며 느닷없이 결혼을 선언했다고 한다.
그의 결혼으로 기사단은 축제 분위기였다.
“가야지.”
“콜린 경도 오시나요?”
“아니. 업무를 보겠다고 하더구나.”
여전히 일 중독이구나.
기사단은 물론이고 온 사교계가 론스의 결혼으로 떠들썩한 마당에. 하긴 텐스테온이 휴가를 준다고 해도 좋아하기는커녕 오히려 걱정하던 사람이니까.
억지로라도 데려가서 쉬게 해주자고 건의하려던 찰나, 텐스테온이 덧붙였다.
“셰넌과 에드온도 가지 않고 황궁 호위를 맡겠다고 하더군.”
셰년은 황궁 기사단 단장 중에서 유일한 여자로, 다이애나가 존경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녀라면 원래 쿨하고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성격이라 결혼식 같은 걸 싫어할 수도 있지만, 에드온은 의외였다.
“에드온 경도요?”
에드온은 그런 시끌벅적한 자리를 좋아할 것 같은데. 원로 기사들부터 아카데미 학생들까지 모두 모일 거고.
“다음 타깃이 자신들인 걸 아는 거지.”
“타깃이요? 아….”
나는 텐스테온의 말을 이해하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동안 사교계의 관심사 중 하나는 ‘론스 단장의 결혼’이었다.
얼른 결혼해야 한다, 검사로서의 혈통이 아깝다, 정말로 나라를 생각한다면 소드 마스터의 자질을 물려받은 아이를 낳아야 할 텐데 등등.
파티에 참석할 때마다 그를 두고 수다를 떠는 걸 한 번씩은 들었던 것 같다.
제국의 대표적인 비혼주의자였던 론스 단장이 결혼을 했으니, 이제 결혼하라며 들들 볶을 타깃도 바뀌겠지.
특히 콜린과 에드온, 셰넌이 유력한 차기 후보였다.
결혼식 내내 ‘론스 단장님도 결혼했는데, 이제 ○○님도 가셔야죠?’라는 질문이 세 사람에게 동시에 쏟아질 게 뻔했다.
그걸 생각하니 결혼식에 가지 않으려 하는 세 사람의 마음도 이해되었다.
“그럼 콜린 님께서는 남아계시겠네요?”
“아니. 데려갈 거다.”
텐스테온은 단호하게 말했다.
왜지?
이렇게까지 확실한 이유가 있는 이상 안 데려가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하지만 황제의 보좌이니 빠지면 모양새가 좋지 않을 것 같긴 했다.
“그렇군요….”
나름대로 이유를 짐작해보는데, 텐스테온이 결연하게 말했다.
“콜린이 없으면, 건방진 놈들이 나를 두고 떠들어 대겠지. 반드시 셋 다 데려갈 거다.”
“…….”
그러고 보니 그 세 사람이 빠지면, 귀족들의 다음 목표는 텐스테온이겠구나.
황후 자리가 공석이 된 지 오래였다. 그는 황비나 후궁은 물론 정부조차 두지 않았기 때문에, 황제의 재혼을 바라는 사람들이 많았다.
게다가 그를 흠모하는 여인 또한 셀 수 없을 정도였다.
한때는 사교계의 모든 여인들이 텐스테온을 짝사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첼시의 말에 따르면 텐스테온은 지금도 블레이크 다음으로 인기가 많다고 했다.
내일 그 세 사람이 불참한다면, 텐스테온에게 재혼에 관한 질문이 쏟아질 거다.
평소라면 텐스테온의 눈치를 보며 입을 꾹 다물겠지만, 그날은 흥겨운 분위기에 취해 한마디씩 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을 거다.
텐스테온도 화내긴 어려울 거고.
그렇다고 방패를 삼기 위해 부하들을 끌고 가겠다니, 악덕 상사 같잖아!
내가 텐스테온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가 다른 디저트를 나의 앞에 놓아주었다.
“어서 들거라. 체력을 회복하려면 많이 먹어야지.”
“네, 아버님.”
나는 치즈케이크를 한 조각 잘랐다. 치즈케이크가 입 안에 들어가는 순간 사르르 녹으며 혀를 감쌌다.
“너무 맛있어요!”
내가 눈을 크게 뜨자, 텐스테온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아버님도 드세요.”
“나는 네가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
그가 먹고 싶어도 참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단걸 안 좋아해서 손대지 않는 걸 알기 때문에 나도 더 권하지는 않았다.
***
그 많은 디저트를 혼자 다 먹었더니 배가 터질 것 같았다.
아무래도 운동을 해야 할 것 같지만, 하루 만에 날씨가 다시 추워져서 그런지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나는 산책을 하기 위해 조금 걷다가, 얼른 앞에 보이는 도서관 안으로 들어갔다.
“비 전하.”
“콜린 님!”
콜린을 본 나는 반갑게 인사했다.
“책을 보러 오셨습니까?”
“아, 네.”
산책하려다가 너무 추워서 따뜻한 실내로 피신 왔다는 말은 하기 그랬다.
“콜린 님은 계속 도서관에 계셨어요?”
아까 집무실에 갔을 때도 안 보이더니, 책을 읽고 있었나 보다.
“네. 오늘은 이대로 퇴근할 생각입니다.”
“벌써요? 혹시 어디 편찮으세요?”
아직 이른 낮이었다. 게다가 집무실에 쌓여 있는 서류도 엄청 많아 보였는데.
몸 상태가 안 좋은지 걱정이 되어서 콜린의 안색을 살피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프진 않습니다.”
“그럼…?”
“모레 하려고요.”
“아….”
콜린의 마음을 알아차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러 업무를 밀리게 해서, 결혼식에 빠질 속셈이구나.
“론스 단장님의 결혼식에 안 가시려고요?”
“네.”
그는 일말의 주저도 없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서 꼭 같이 가실 거라고 하시던데요.”
“안 갑니다. 절대로 안 갈 겁니다.”
안경 안쪽으로 결연한 눈빛이 번뜩였다.
가끔씩 투정은 부려도 폐하의 명을 어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콜린이었다.
그가 이런 꼼수까지 시도하는 걸 보니 정말로 가기 싫은가보다.
“원하는 바를 쟁취하시길 바랄게요.”
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억지로 회식에 참가하는 것도 싫은 마당에, 직장 상사가 결혼식에 끌고 가서 자신의 방패로 사용하다니.
아무리 아버님이라지만 이번 일은 콜린의 편이었다.
“감사합니다. 비 전하.”
그가 감격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콜린이 저렇게까지 좋아하는 모습은 처음 봤다. 내가 편을 들어준 게 정말로 고마웠나 보다.
“저기, 그녀에 대한 소식은 아직 없죠?”
세르가 빛의 여신이라는 사실은 나와 블레이크, 텐스테온 그리고 콜린만 아는 비밀이었다.
지금 우리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혹시 몰라서 넌지시 물었다.
“네. 아직 없습니다.”
“카멜리아 고아원은요?”
카멜리아는 리차드의 고아원이었다. 그리고 세르가 처음으로 나타난 장소이기도 했다.
“그곳에도 오지 않았습니다.”
텐스테온은 가짜를 데려온 리차드를 조사했으나 금방 풀어줬다.
리차드가 세르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했고, 그녀가 정말 나라고 생각해서 황궁으로 데려왔기 때문에 놓아준 거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이유였다.
세르파니아가 리차드를 찾아갔던 이유가 뭔지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조심하는 거다.
나는 전생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리차드가 필립이라는 사실은 그들에게 알렸다.
지금도 그가 무슨 흉계를 꾸미고 있을지 모른다.
어둠의 문에서 나온 뒤에도 세르는 필립에게 미련이 남은 듯한 말을 했었다.
그녀의 진심이 뭔지 모르는 이상, 그에 대한 처분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단서를 찾는다면 곧장 말씀드리겠습니다.”
“부탁드려요.”
처음에는 세르가 평온을 찾고 내 앞에 나타날 때까지 조용히 기다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계속 마음 한편에 불안감이 일었다.
혹시라도 예전처럼 그녀가 나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는데 못 들으면 어떡하지….
물론 꿈에서 나타났던 세르의 모습으로 봤을 때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꼭 만나고 싶었다.
***
세피아궁은 내일부터 대대적인 수리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아무래도 7년 동안 주인 없이 비워두었기 때문에 여러모로 고칠 곳이 많았다.
원래는 하자 있는 부분만 손보려고도 했지만, 블레이크와 텐스테온의 강력한 주장으로 인해 결국 전부 리모델링하기로 결정됐다.
나는 마지막으로 수리 목록을 체크한 뒤, 첼시에게 건넸다.
“이대로 진행해줘.”
“네. 알겠습니다.”
아직 황태자비의 업무에 들어간 것도 아니지만 은근히 할 일이 많았다.
첼시는 정보력이 좋고 실무 감각이 뛰어났기 때문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세피아궁의 수리를 마치고 본격적인 황태자비의 업무가 시작되면, 첼시를 정식 보좌로 발탁할 생각이었다.
그녀는 시녀보다 보좌관이 어울렸다.
“실은 어제 카멜리아 고아원에 다녀왔습니다.”
어제 하루만 휴가를 달라고 하더니, 리차드의 고아원에 다녀왔나 보다. 내가 계속 신경 쓰는 걸 알고 직접 가본 거다.
“어땠어?”
“명성대로 시설이 좋았습니다. 국립 고아원을 잘못 찾아온 줄 알았죠. 음식이나 의복도 훌륭한 데다가 공부까지 가르치더군요.”
“그래….”
콜린도 같은 말을 했다.
혹시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 계속 감시를 했지만,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고.
오히려 다른 고아원들도 본받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라고 했다.
‘카멜리아’는 동백꽃이라는 뜻이었다. 그의 어머니가 좋아하는 꽃을 이름으로 지은 만큼 정직하게 운영했겠지.
그렇다고 리차드가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고 믿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의 주도면밀한 성격상, 공식적으로 자신의 소유인 시설에서 불법 행위를 저지르지는 않았을 거다.
나쁜 짓을 해도 남들이 모르는 곳에서 하지, 사람들이 주목하고 황실이 감시까지 하는 자신의 고아원에서 굳이 일을 벌일 리가 없었다.
시설이 좋고 아이들에게도 잘해준다는 말은 사실이겠지.
고아원은 대외적인 명성을 쌓기 위해 운영한 것 같으니, 더더욱 신경 썼을 거다.
다만 그가 로움족의 아이들까지 받아준 것은 다소 의외였다.
비록 과거 재판을 통해서 그가 로움족이란 사실이 밝혀졌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선을 그으며 모른 척할 줄 알았는데.
원작에서도 흑마법 실력이 뛰어난 도미람을 제외하고는 로움족을 가까이 두지 않았으니까.
그가 황제로 등극한 뒤에도 로움족을 위한 정책을 펼쳤다는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았었다.
“다만 로움족 아이들이 조금 겉돌더군요.”
“차별이 있다는 거야?”
첼시의 말을 들은 나는 조금 놀랐다.
리차드의 성격상 처음부터 거부했다면 모를까, 기껏 로움족을 받아들여 놓고 차별을 하진 않았을 텐데.
평판을 위한 것 말고 다른 목적이 있나?
왠지 수상쩍다고 생각하던 차에, 첼시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니고, 다른 아이들이 로움족의 아이들을 다소 꺼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노는 무리도 다르고요. 로움족에 대한 차별이 워낙 뿌리 깊으니까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무리 첼시가 똑똑하다지만 잠깐 방문한 것만으로 아이들의 관계까지 파악하기는 어려울 거다.
“싸움이 있었습니다. 한 아이가 더러운 로움족은 꺼졌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욕을 하자, 로움족의 아이들이 화를 내면서 순식간에 몸싸움으로 번지더라고요. 선생님들이 당황하며 말리고 난리도 아니었죠.”
“다친 사람은 없고?”
“네. 사실 금방 끝날 수도 있었는데, 로움족 아이 하나가 끝까지 물러나지 않더라고요. 칼루오라는 아이였는데, 좋은 의미로 독기가 대단했습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정말 아이들끼리의 다툼이었을 뿐 리차드가 무슨 짓을 한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직접 상황을 본 것이 아닌 이상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아이들이 싸울 때, 리차드 카실도 함께 있었어?”
“아니요. 제가 갔을 때는 없었습니다.”
요즘 들어 고아원에 발길을 끊다시피 했다더니, 어제도 오지 않았구나.
세르의 일 때문에 몸을 사리는 건지 아니면 소피와 웨스틴과의 결혼 준비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그는 요즘 웨스틴 후작저에서 나오지 않고 두문불출한다고 했다.
“아, 그리고 리차드 카실의 결혼식이 앞당겨졌다고 합니다.”
첼시의 말을 들은 나는 깜짝 놀랐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그런데 굳이 날짜를 당겼다고?
“언제?”
“내일이요.”
“내일? 그렇게나 빨리? 이유가 뭐지?”
“웨스틴 후작이 위독한 모양입니다.”
나는 원작의 내용을 떠올렸다.
웨스틴 후작은 소설의 후반부까지 등장하는 인물이었다.
건강이 좋지 않다거나 지병을 앓고 있다는 묘사는 단 한 줄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갑자기 위독하다고? 아무래도 수상쩍었다.
***
첼시는 웨스틴 후작이 갑작스러운 낙마 사고를 당해서 위독하다고 했다.
그래서 후작이 죽기 전에 딸이 결혼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급하게 결혼식을 올리는 거라고.
언뜻 들으면 그럴듯해 보이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수상쩍은 점이 많았다.
아무리 예전만 못하다고 해도 웨스틴 후작이다.
오랜 지병이라면 모를까, 낙마 사고로 인한 골절 같은 종류의 부상은 신관이나 치료사들의 전문 분야였다.
고위 신관이나 상급 치료사들을 부를 재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치료도 포기한 채 결혼식 준비부터 한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내일은 론스 단장의 결혼식 날이었다.
이로 인해 사교계 전체가 떠들썩했다. 황제는 물론이고 황궁 기사단과 수도의 귀족들, 그리고 지방의 유력 귀족들까지도 참석할 예정이었다.
당연히 나와 블레이크도 참석했다.
가뜩이나 가짜 황태자비 사건으로 리차드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은 마당에 제1 기사단 단장의 결혼식에 불참하면서까지 그의 결혼식에 갈 사람은 거의 없었다.
설사 진짜로 웨스틴 후작이 위독하고 후작 영애가 아버지 때문에 결혼을 서두른다고 하더라도, 리차드가 내일만은 안 된다며 결사반대했을 거다.
다시 평민에서 귀족으로 신분이 상승하는 중요한 날이었다. 리차드의 성격상 모두의 앞에서 과시하고 싶을 게 분명했다.
모든 사교계의 관심을 론스 단장에게 빼앗기고 하객이 오지 않을 걸 감수하면서까지, 굳이 내일 날을 잡을 이유가 없었다.
분명히 뭔가 있어.
리차드에 대한 생각에 잠겨 있는데, 제이든이 말을 건넸다.
“비 전하,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 아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결국 나의 호위는 제이든이 맡게 되었다.
제5 기사단이 쑥대밭이 된 걸 보고 기함한 에드온은 사태를 수습하며 제이든을 내 호위로 직접 지명했다. 물론 나도 동의했다.
“그나저나 괜찮아?”
“무슨 말씀이신지?”
“황태자 전하를 모시고 싶어서 5기사단에 들어온 걸 텐데, 내 호위를 맡게 되었잖아.”
“아닙니다. 무척 영광입니다. 가끔 등 뒤가 따가운 것 말고는 괜찮습니다….”
“응?”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이든이 말끝을 흐렸다.
“저기 제이든.”
“네, 비 전하.”
“…내가 없는 동안 다이애나는 어떻게 지냈어?”
다이애나는 잘 지냈다는 말만 하고, 다른 사람들도 솔직히 말해주지 않았다.
그 아이가 정말로 어떻게 지냈을지 궁금했다.
제이든이라면 솔직히 말해줄 것 같았다.
“씩씩하고 성실했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근성이 있었죠. 존경스러운 친구입니다.”
제이든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어렸다. 그가 저렇게 웃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제이든의 대답을 들으니 조금 안심이 되었다. 다이애나가 내가 없는 시간을 슬프게만 보낸 건 아닌 것 같다.
“다이애나는 당차고 리더십이 있어서 모두 좋아했습니다. 특히 여자들한테 인기가 많았죠.”
“남자들한테는 인기가 없었어?”
“잘 모르겠네요. 하지만 저는 좋아합니다.”
나는 깜짝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우리 다이애나를 좋아한다고 고백한 거야?
그의 마음을 슬쩍 떠보기 위해서 질문을 한 건 사실이었지만, 이렇게 직구로 답할 줄은 몰랐다.
“우리 다이애나를 좋아해?”
“네.”
제이든은 담백하게 대답했다. 단순히 친구로서 좋아한다는 건가?
지나치게 담담한 모습을 보니, 내가 헛짚었구나 싶었다.
“그래서 비 전하께서 돌아오셨을 때 무척 기뻤습니다. 다이애나가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잘 아니까요. 돌아오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상부의 허락도 없이 다이애나에게 연락하고 말았죠.”
“그전에는 말하지 않았잖아?”
제이든은 세르가 나인 척하고 나타났을 때는 다이애나에게 소식을 전하지 않았었다.
“솔직히 전에 그분은 뭔가 의심스러웠습니다. 진짜 비 전하라고 하기에는 황태자 전하의 반응이 너무 냉랭했거든요. 불확실한 정보로 다이애나를 실망시키고 싶지도 않고요.”
다른 사람들이 내가 죽었을 거라고 떠들었을 때, 제이든만은 부정했었다.
어쩌면 다이애나를 위해서 그런 말을 한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로즈 님이 비 전하라는 말을 듣자, 이번엔 진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기사로서 명령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도 잊고 전부 말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송구합니다.”
“아니야. 덕분에 다이애나를 일찍 만나서 좋았어.”
“그 애가 좋아해서 저도 좋았습니다.”
제이든의 입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우리 다이애나를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오는 거야?
내 일도 아닌데 괜히 설레발 치지 말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쯤 되면 확신이 들었다.
“제이든, 혹시….”
“네?”
“우리 다이애나를 어떻게 생각해…?”
“좋은 친구입니다.”
그는 딱 잘라서 말했다.
“아….”
친구.
사실 약간 다른 느낌이라고 생각했지만, 본인이 우정이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었다. 다이애나도 친구라고 하긴 했었으니까.
“앤시아.”
아모리아궁으로 들어가는데, 블레이크가 기다리고 있었다.
“추운데 왜 나와 있어?”
“부인이 보고 싶어서.”
그는 빙그레 웃으며 나의 손을 잡았다.
“그런데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밌게 해?”
“기사 아카데미에 대해서 물어봤어. 제이든 경은 다이애나랑 친구니까.”
“그렇구나. 다음에는 나도 같이 듣고 싶네.”
블레이크가 환하게 웃으며 제이든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제이든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왜 그러지? 상사라 긴장되나?
“이, 이만 가보겠습니다.”
제이든은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도망치듯 후다닥 몸을 돌렸다.
“혹시 제이든 경한테 무슨 짓 했어?”
내가 블레이크를 흘겨보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나는 부인이 좋아하는 착한 남자인걸.”
블레이크는 눈가를 사르르 접으며 나의 손을 잡았다.
“온실로 가자. 보여줄 게 있어.”
“응.”
나는 그와 함께 온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온실 한편에 활짝 피어 있는 하얀 장미가 눈에 들어왔다.
어제 블레이크와 함께 씨앗을 심었었는데, 하루 만에 자란 거다.
“블레이크가 한 거야?”
“응. 어제 앤시아가 가르쳐준 걸 연습해봤어.”
나는 어제 식물을 키우는 마법을 블레이크한테 알려줬었다.
그런데 단 하루 만에 꽃을 피울 정도로 마법을 완벽하게 마스터한 거다.
“굉장해! 마탑주도 이렇게 빨리 배우진 못할 거야!”
천 년 전, 내가 마법을 처음 배웠을 때를 떠올려 봐도 정말 대단했다.
블레이크가 여신의 마나를 지니고 있는 건 맞았지만, 그렇다 해도 마나에 대한 이해도가 남달랐다.
“앤시아가 잘 가르쳐준 덕분이지.”
“아니야. 천부적인 재능이야! 정말로 천재라고!”
“에이…. 아니야.”
연이은 칭찬에 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고개를 살짝 숙이며 도리도리 젓는 모습을 보니 정말로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저럴 때 보면 토끼가 맞다. 밤만 되면 변해서 그렇지….
“연습하느라 힘들었지?”
혼자 연습하느라 피곤했을 거다. 오늘을 쉬자고 할 생각이었지만, 그는 나의 생각을 알아차리고는 빠르게 답했다.
“아니. 오늘도 배울 수 있어.”
“무리하지 마. 급하게 마음먹을 필요 없어.”
“그런 게 아니야. 그냥 부인한테 배우는 게 좋아서 그래.”
블레이크가 배시시 웃으며 나와 눈을 마주쳤다. 나는 그의 은색 머리카락을 가볍게 헝클어트렸다.
그래도 무리시키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오늘은 어제 배운 걸 복습하기로 했다.
심은 지 얼마 안 된 딸기의 싹을 틔우고, 열매가 맺힐 때까지 마나를 불어 넣었다.
나는 블레이크가 키운 딸기와 내가 키운 딸기를 각각 따서 블레이크의 입에 하나하나 넣어주었다.
입을 벌리고 얌전히 과일을 받아먹는 모습을 보니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역시 귀엽다니까. 그에게는 나이와 상관없는 풋풋한 소년미가 있었다.
“맛이 어때?”
“앤시아가 키운 딸기는 달고 맛있는데, 내 건 좀 심심해.”
“크기를 키우는 것만 신경을 써서 그래. 이 마법은 원래대로라면 오랜 시간 동안 천천히 자라야 할 작물을 단기간에 키우는 거잖아.”
“응.”
“그런 만큼 세심하게 공을 들여야 해. 물만 주는 게 아니라, 햇볕을 쬐고 비료를 주며 보살피는 것처럼 섬세한 마나 컨트롤이 필요해.”
나는 블레이크의 손을 잡고 마나를 흘려보냈다. 마나가 손을 구석구석 휘감는 느낌이 간지러운지, 그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간지러워?”
“살짝.”
“이런 식으로 작물 전체에 꼼꼼하게 마나를 전달해야 해.”
“응. 해볼게.”
블레이크는 이제 막 싹을 틔운 딸기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마법을 공부할 때만큼은 장난도 안 치고 태도가 무척 진지했다.
딸기가 점점 자라기 시작했다. 조금 전보다는 다소 느린 속도였지만 엷은 초록색에 가까웠던 잎이 생명력이 넘치는 짙은 빛깔을 띠고, 열매도 많이 맺혔다.
마나를 쏟는 데 온 정신을 집중하느라, 블레이크의 새하얀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나는 손수건으로 그의 이마를 닦아 주었다.
그러자 그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설마 부끄러워하는 거야?
토끼처럼 깜짝 놀라는 모습이 귀여워서 그의 귓불을 장난스럽게 문질렀다.
이번에는 블레이크도 태연한 반응을 보였지만, 여상한 표정과는 별개로 귀는 점점 빨갛게 달아올랐다.
밤에는 야수 그 자체면서, 이렇게 사소한 스킨십에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하여 그의 귓불을 타고 귓바퀴를 스르륵 문지르자, 블레이크가 참지 못하고 움칠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부, 부인?!”
그는 시뻘게진 얼굴로 소리쳤다.
“우리 신랑 귀가 예뻐서.”
“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만지면…!”
당황하며 속사포처럼 빠르게 말을 뱉는 그의 모습을 보니 어이가 없었다. 자기는….
하지만 내가 뭐라 반박하기도 전에 블레이크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부끄럽잖아….”
으윽…!
얼굴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모습이 귀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열여덟 살 중에서, 아니 전 대륙에서 우리 블레이크가 가장 귀엽다.
나는 자제력을 잃고 그를 꼭 끌어안았다.
“부, 부인…!”
블레이크는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나의 몸이 기울어서 흙밭에 쓰러지지 않도록 단단히 지탱해주었다.
“우리 신랑 귀여워!”
“정말?”
“응.”
“그리고?”
“귀여워!”
“…아직도 멀었네.”
그가 한숨 섞인 목소리를 뱉었다.
“응?”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블레이크는 고개를 저으며, 새빨갛게 열린 딸기를 따서 나의 입에 넣어주었다.
“어때?”
“맛있어.”
“정말?”
“응.”
그는 딸기를 하나 더 따서 직접 먹어보았다.
“부인이 키운 것보다는 못하네.”
아직은 내가 키운 딸기가 훨씬 달긴 했다. 그래도 처음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두 번째에 이 정도면 정말 잘한 거야.”
나는 시무룩해하는 블레이크를 위로해 주었다. 그렇다고 예의상 하는 말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마법 연습을 마치고 나니, 온실 한편이 온통 딸기밭으로 변해 있었다.
“이걸 어떻게 하지?”
“내일 론스 단장의 결혼 선물로 주지 뭐.”
블레이크는 태평하게 말했다. 빛의 마나가 담긴 과일이니 건강에는 좋을 거다.
“저기, 내일 결혼식 말이야….”
“응.”
“조금 늦게 가도 될까?”
“왜? 무슨 일 있어?”
그의 눈동자에 근심이 어렸다.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니냐고 걱정을 쏟아내기 전에 나는 얼른 덧붙였다.
“리차드 카실의 결혼식이 내일로 앞당겨졌다는 말 들었지?”
“응. 그렇다더라.”
“나, 거기 다녀오려고.”
“안 돼.”
그는 딱 잘라서 말했다. 반대할 줄은 알았지만 예상보다 훨씬 단호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야수와 영애님’에서 소피아 웨스틴은 리차드의 덫에 걸린 여인 중 한 명이었다.
웨스틴 후작은 탐욕스러운 인물로 자신의 딸인 소피아를 황후의 자리에 올리기 위해서 프랭크와 결혼시키려고 한다.
하지만 카실 공작은 소피아를 프랭크와 약혼시킬 것처럼 굴면서도 확답을 주지 않는다.
유력한 차기 황제 후보인 프랭크와 결혼하고자 하는 여인들은 많았기 때문에,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수많은 후보들을 두고 저울질을 한 것이다.
하지만 웨스틴 후작의 노력 덕분에 결국 소피아는 프랭크와 약혼하게 된다.
소피아는 아버지의 염원을 이뤄드리게 되어서 기뻤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프랭크는 소피아의 외모를 트집 잡으며 폭언을 일삼았고, 다른 여인들을 만났다.
소피아에게 외도를 들켜도 사과하기는커녕 싫으면 파혼하라며 적반하장으로 소리치고는 했다.
소피아는 힘들어했지만, 웨스틴 후작은 프랭크가 황태자가 되고 철이 들면 달라질 거라는 말만 반복했다.
소피아 역시 아버지의 말을 믿으며, 하루빨리 블레이크가 죽고 프랭크가 진짜 황태자가 되길 기도했다.
“여신님, 어서 그 괴물을 죽여 주세요. 모두가 싫어하는 괴물이잖아요. 여신님도 싫어하시잖아요. 어서 괴물이 죽고 프랭크가 황태자가 되게 해주세요. 이렇게 부탁드릴 테니, 제발 하루빨리 죽여버리세요.”
블레이크는 죽지 않았지만, 원작 속 리차드가 텐스테온을 시해하면서 카실 공작이 황제가 된다.
아놀드 카실은 장남인 프랭크를 몹시 편애했기 때문에 그가 황태자가 되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하지만 소피아는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불행해졌다.
프랭크는 차일피일 결혼을 미룰 뿐만 아니라, 소피아를 만나기만 하면 파혼을 요구하며 욕설을 날렸다.
자신이 황제가 되더라도 소피아가 황후가 되는 날은 절대로 없을 거라며, 험한 꼴 당하기 전에 스스로 포기하라고 협박을 하기도 했다.
소피아는 지쳐갔지만, 웨스틴 후작은 절대로 파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리차드는 우울해하는 그녀에게 접근한다.
아버지와 약혼자 사이에서 힘겨워하던 소피아는 리차드의 다정함에 빠져들고, 결국 그를 사랑하게 된다.
리차드 역시 그녀를 사랑하는 척했지만 당연히 진심은 아니었다.
리차드는 소피아를 이용하여 프랭크의 정보를 빼내고, 함정에 빠트린다. 그리고 프랭크가 죽자, 쓸모를 다한 소피아를 가차 없이 버린다.
원작에선 이렇게 지독한 악연으로 엮였던 두 사람이 정말로 결혼식을 올린다.
물론 원작에서 그랬다고 이번에도 똑같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많은 것이 달라졌으니, 두 사람이 진짜 사랑해서 결혼했을 수도 있지.
사교계에서 들리는 말에 따르면 소피아는 리차드를 만나고 나서부터 눈에 띄게 밝아졌고, 리차드도 그녀에게 지극정성이라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갑자기 결혼식 날짜를 바꾼 것이 마음에 걸렸다.
나는 다시 한번 블레이크에게 부탁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잠깐만 들렀다 올게.”
“앤시아….”
나는 솔직히 소피아를 좋아하지 않았다.
블레이크가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간절하게 기도하는 소피아의 모습은 원작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섬뜩한 장면이었다.
소피아에게 상처를 준 사람은 웨스틴 후작과 프랭크였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은 블레이크에게 화살을 돌리며 죽길 기도했다.
그녀가 유약한 성격이라 그런 거라며 넘길 일이 아니었다.
사람이 위기에 빠졌을지도 모르는데, 무시하고 모르는 척할 수는 없었다.
“꼭 가보고 싶어.”
내가 재차 말하자 블레이크가 낮은 한숨을 쉬었다.
“내가 말려도 갈 거지?”
“응. 미안….”
오랫동안 힘들게 한 만큼 더는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자 블레이크가 고개를 저으며 나의 어깨를 감쌌다.
“미안할 게 뭐 있어. 부인이 원하는 게 있으면 뭐든지 해. 내가 지켜줄게.”
“고마워.”
나는 빙그레 웃으며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
다음 날, 우리는 웨스틴 후작저로 향했다.
나와 블레이크는 마차에서 내려서 결혼식이 열리는 정원 안으로 들어갔다. 예상했던 것보다도 사람이 훨씬 적었다.
웨스틴 후작의 친척들과 가신들은 참석할 줄 알았는데, 그들마저도 론스 단장의 결혼식을 택한 모양이었다.
로움족을 차기 후작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며 내부의 반발도 거셌다고 하니, 항의의 의미로 불참하는 사람들도 많을 거다.
“앤시아, 내가 한 말 기억하지?”
블레이크가 나의 손을 꼭 잡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응. 걱정하지 마.”
여기 오기 전에 그가 했던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나 역시 그에게 조용히 속삭이는데, 분노에 찬 음성이 들렸다.
“동생이 형님을 뵙겠다는데, 어찌하여 막는 것이냐!”
웨스틴 후작의 동생이 윽박지르자, 집사로 보이는 자가 고개를 숙였다.
“각하께서 위독하십니다. 손님을 뵙기 어렵습니다.”
“손님이라니! 내가 어떻게 손님이냐! 우리는 피를 나눈 형제다! 그 로움족 따위보다 훨씬 가깝다!”
“소피아 아가씨의 명령입니다. 예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주십시오.”
“지금 형님이 아프신데 결혼식이 문제냐! 소피아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소피아, 그 애가 뭘 알겠습니까? 천한 놈한테 홀려서 제정신이 아닌 거죠. 분명 백부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결혼을 올려야 한다고 그 로움족이 바람을 넣은 겁니다. 그놈이 웨스틴 가문을 집어삼키기 전에 막으셔야 합니다!”
옆에 서 있던 그의 아들이 흥분해서 소리쳤다.
“비켜라! 당장 형님을 만나야겠다!”
“안 됩니다!”
“고작 집사 주제에 웨스틴 후작의 친동생인 이 몸을 막아서는 것이냐!”
웨스틴 후작의 동생이 고함을 치자, 주변의 공기가 싸늘하게 내려앉았다. 하지만 동생의 편을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벌써 유산 다툼이 시작됐군.”
블레이크가 차갑게 뱉었다. 그의 말대로였다.
웨스틴 후작은 작위를 두고 남동생과 치열하게 싸웠다고 한다.
그리고 작위 다툼에서 패배한 남동생을 땡전 한 푼도 주지 않고 쫓아냈다고 들었다.
지금껏 교류는커녕 원수나 다름없는 사이였는데, 웨스틴 후작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아들과 함께 달려온 모양이다.
만약 웨스틴 후작이 죽기 전에 리차드와 소피아가 결혼식을 올린다면, 차기 후작 자리는 당연히 리차드의 차지가 될 것이다.
하지만 결혼하기 전에 웨스틴 후작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상황이 복잡해진다.
만약 후작의 동생이 권리를 주장하며 가신들을 자신의 쪽으로 끌어들인다면, 가주의 자리는 그의 차지가 될 수도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가신들은 당연히 후작의 딸인 소피아를 지지했을 거다. 하지만 그녀가 반역자의 핏줄인 데다가 로움족인 리차드와 결혼하겠다고 나선 이상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저들은 리차드가 이런 상황을 막기 위해 결혼을 서두르는 거라고 생각했다.
블레이크도 동의했고, 아마 지금 결혼식에 참가한 사람들 역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거다.
아직 후작이 세상을 뜬 것도 아니고, 유산 다툼에 섣부르게 끼어들 수는 없으니 말을 아끼는 거겠지.
웨스틴 후작은 평생 보통 사람은 꿈도 꿀 수 없는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아왔다.
하지만 그가 위독하다는 데도 진심으로 걱정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단순히 작위나 유산 때문에 결혼을 서두르는 건 아닐 거야.”
나는 블레이크에게 말하며 정원을 둘러보았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하객용 의자는 줄도 제대로 맞지 않았고, 장식도 엉망이었다. 게다가 사용인의 수도 부족해서 얼마 되지 않는 하객도 제대로 맞이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말로 후작이 아파서 경황이 없는 걸까? 아니면 경황이 없는 것처럼 보이고 싶은 걸까?
갑자기 날짜를 앞당겼다고 하지만 모든 걸 리차드와 소피아가 직접 준비해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친척이나 사용인에게 부탁하거나, 그도 아니면 외부 인력을 고용하면 될 일이었다.
웨스틴 후작 가문이 재정난에 허덕이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까지 어수선하니 오히려 작위적으로 느껴졌다.
분명 뭔가 있다.
단순한 작위 승계 문제가 아니다. 리차드가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거다.
처음부터 수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더더욱 확신이 들었다.
“어머! 전하!”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서 하객 중 한 명이 소리쳤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깜짝 놀라서 우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황태자 전하와 황태자비 전하시다!”
“세상에 전하께서 오실 줄이야.”
원래대로라면 신랑이 대표로 하객을 맞이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소개해야 했지만, 리차드는 보이지 않았다.
집사는 동생 일가를 막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우리가 온 것도 모르고 있었다.
뒤늦게 황태자비 부부가 도착한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이 부랴부랴 달려와서 인사를 청했다.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던 후작의 동생과 조카도 당황하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이렇게나 소란스러운 상황에서도 리차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
“하객은 거의 오지 않았습니다. 상당수의 가신들도 불참을 통보해 왔습니다.”
하녀복을 입은 여인이 리차드에게 보고를 올렸다.
그녀의 이름은 카란으로, 리차드가 키운 흑마법사 중 한 명이었다.
“론스의 결혼식에 가려는 거겠지. 버러지 같은 놈들.”
리차드는 싸늘하게 뱉었다.
황제가 가장 아끼는 신하 중 한 명인 론스 단장이 결혼식을 올린다고 하니, 주군에 대한 의리도 저버린 채 그곳으로 달려간 거다.
게다가 황제와 황태자 부부까지 참석한다고 했다. 어떻게든 잘 보여서 조금이라도 눈도장을 찍으려는 거겠지.
카실 공작의 일로 황제에게 찍힌 데다가, 로움족을 후계자로 삼으려는 웨스틴 가문을 버리고 배를 갈아탈 요량일지도 모른다.
평소라면 분노했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어차피 예상했던 일이었다. 오히려 하객이 가장 적게 올 날을 예상해서 오늘로 정한 거였다.
하객 수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 결혼식 날짜도 바로 어제 알렸다.
웨스틴 후작은 죽었다.
흑마법과 마석을 사용하여 겨우 시체의 부패를 막아두긴 했지만, 자세히 보면 티가 났다.
코닌스가 흑마법으로 시체를 조종하여 살아 있는 것처럼 위장한다고 한들 완벽하지는 않았다.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들킬 위험도 올라갔다.
리차드는 자신의 맞은편 의자에서 잠들어 있는 소피아 웨스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소피아가 고작 드레스 하나를 가지고 호들갑을 떨며 몇 달 전부터 준비하는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잘되었다.
만약 웨딩드레스를 미리 완성하지 않았다면, 급하게 옷을 준비하느라 골치 아플 뻔했다.
“깨울까요?”
카란의 질문에 리차드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놔두거라.”
리차드는 웨스틴 후작을 죽인 현장을 소피아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는 당황했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웨스틴 후작은 소피아를 가문을 부흥시킬 도구로 여겼고, 그녀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부녀관계가 좋은 편도 아니었으니, 잘 구슬리면 넘어갈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어쩔 수 없었어. 웨스틴 후작이 나에게 누명을 씌우고 마족 재판을 열겠다고 했어. 죽는 건 상관없지만 너와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참을 수가 없었….”
“살인자! 아버지를 죽였어! 이 살인자!!”
하지만 그의 생각은 처참하게 빗나갔다.
소피아는 웨스틴 후작이 죽은 걸 알고 오열하며 악을 썼다.
웨스틴 후작은 진정으로 너를 사랑한 적이 없다, 오직 나만이 너를 사랑한다, 너와 헤어질까 봐 두려웠다, 후작이 나를 먼저 공격해서 막다가 실수로 그런 거다, 리차드는 계속해서 변명을 이어갔지만 무슨 말을 해도 그녀는 듣지 않았다.
“아버지를 살려내! 우리 아버지를 살려내라고!”
그녀가 울부짖을수록 리차드의 표정은 싸늘하게 굳어갔다.
도대체 왜지?
웨스틴 후작에게 있어 소피아는 자식이 아니라 도구였다. 카실 공작이 리차드를 대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왜 저렇게 슬퍼하는 거지?
웨스틴 후작에게 상처받은 소피아의 마음을 위로해준 건 리차드였다.
그러니 당연히 나를 더 우선시해야 하지 않나? 왜 이렇게까지 슬퍼하는 거야?
가족이라서? 고작 그까짓 것 때문에?
리차드는 그녀가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웨스틴 가문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소피아가 필요했다.
어떻게든 그녀를 구슬려서 입을 막고, 결혼을 해야 한다.
“소피아, 너무 흥분했어. 일단 진정해.”
“뭐라고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아버지를 죽여놓고 진정하라고?!”
그녀는 리차드를 악을 쓰며 몸을 돌렸다.
“어디 가는 거지?”
“경비대에. 당신을 고발하겠어!”
리차드는 화들짝 놀라 그녀를 막았다.
웨스틴 후작을 살해한 사실이 발각되면 모든 게 끝장이었다. 황제가 되기는커녕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질 것이다.
리차드는 소피아를 기절시켰다.
다음 날, 깨어난 그녀는 또다시 악을 써댔다. 하지만 리차드는 그녀를 달래지 않았다.
자신을 고발해서 죽이려고 했던 여자다. 온정을 베풀 필요는 없었다.
리차드는 카란을 시켜서 소피아에게 조종 마법을 걸도록 했다.
육체를 지배하여 꼭두각시처럼 조종하는 조종 마법은 정신을 지배하는 세뇌 마법보다 한 단계 수준이 떨어지는 마법이었다.
할 수 있는 행동도 한정적이었고, 무엇보다도 부자연스럽고 어색해서 들킬 위험이 컸다.
카란은 코닌스보다 영리하고 신중한 성격이었으나, 흑마법의 자질은 부족했다.
하지만 코닌스는 웨스틴 후작을 전담해야 했기 때문에 소피아까지 맡을 여력이 없었다.
리차드는 론스 단장이 결혼하는 날에 맞춰서 결혼식을 날짜를 앞당겼다.
그리고 소피아는 조종 마법이 제대로 걸렸는지 연습하는 시간 외에는 수면제를 먹여서 잠을 재워 두었다. 눈을 떠봤자 귀찮을 뿐이었으니까.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웨딩드레스를 입히고 신부 화장을 마치자마자, 도로 잠들게 했다.
“곧 결혼식이 시작할 시간입니다.”
리차드가 소피아를 깨우지 말라고 하자, 카란은 걱정스러워하며 시간을 확인했다.
“됐다. 늦게 나갈 거다.”
하객 중에는 잠시 얼굴만 비친 뒤, 론스 단장의 결혼식에 가려는 사람도 많을 거다.
결혼식이 지연된다면 그들은 결국 참지 못하고 론스에게 갈 거다.
흑마법이 완벽하지 않은 이상 하객은 적으면 적을수록 좋았다.
소피아가 후작의 일을 슬퍼한 나머지 울다 지쳐서 탈진했다고 하면, 항의할 사람도 없을 거다.
오히려 행동이 조금 부자연스러워도 힘들어서 그런가 보다 하며 납득할 거다.
리차드는 결혼식을 마치고 정식으로 웨스틴 후작이 되고 나면, 자살로 위장해서 소피아를 없애버릴 생각이었다.
원래도 우울증이 있는 데다가 결혼식에서도 이상했으니, 아버지를 잃은 슬픔 때문에 죽었다고 하면 의심할 사람이 없을 거다.
오히려 하객이 거의 없는 휑한 결혼식 때문에 우울증이 더 심해졌다고 하면, 동정 여론이 생길 터였다.
권력에 아첨하기 위해 주군을 버리고 론스 단장의 결혼식을 택한 가신들에 대한 비난 여론도 쏟아지겠지.
황제 쪽 인간들은 여론을 의식해서라도 그들을 거부할 거고, 가신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라도 다시 웨스틴 가문에 충성하는 시늉을 할 수밖에 없었다.
웨스틴 후작이 죽고 소피아마저 세상을 떠난다면, 리차드가 웨스틴 가문을 이어받는 걸 반대하는 이들이 많을 거다. 리차드에게 웨스틴 가문을 빼앗겼다고 생각할 테니까.
하지만 죽은 소피아에 대한 동정과 비난 여론 속에서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을 거다.
소피아가 자살한 데는 자신들의 책임도 있으니 말이다.
처음에는 소피아를 설득해서 웨스틴 후작이 죽은 사실을 숨기고, 화려하게 결혼식을 올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소피아가 멍청하게도 제 아비의 편을 들며 이성을 잃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오늘 급하게 식을 치르게 됐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잘되었다.
오히려 이편이 훨씬 깔끔하다.
죽이기 전에 ‘리차드를 너무 사랑해요. 그에게 모든 걸 주고 싶어요.’라는 유서나 쓰게 해야겠군.
리차드는 소피아를 향해 무심한 시선을 던졌다.
“멍청한 것.”
그녀에게 미안하거나 죄책감이 들지는 않았다.
자신은 기회를 줬다. 하지만 소피아는 경비대를 부르겠다고 멍청하게 난리를 치며 자기 명을 스스로 재촉했다.
“그래도 지금 깨워 두는 것이 좋지 않을는지요? 드레스와 머리를 다시 손봐야 할 것 같습니다.”
잠을 자느라 눌리면서 머리와 옷의 장식들이 흐트러져 있었다.
“되었다. 그냥 두어라.”
오히려 적당히 흐트러진 편이 정신없어 보여서 좋았다.
“그리고 카란, 너는 마나를 아껴라.”
“네. 주군.”
결혼식을 마치고 나면 하객들은 웨스틴 후작을 만나겠다고 요구할 거다.
하객들은 대부분 웨스틴 후작 쪽 사람들이었다.
특히 론스 단장의 결혼식에 가지 않고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은 웨스틴 후작과 친밀하거나 충성심이 높은 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관심은 리차드와 소피아의 결혼식이 아니라 웨스틴 후작의 상태였다.
아무리 코닌스의 마법 실력이 뛰어나다고 한들 후작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릴 거다.
그러니 환각향과 환각 마법을 사용하여 사람들의 정신에 혼란을 줘야 했다.
카란은 마나의 양이 부족하니, 지금부터 낭비했다가는 밤에 실수를 할 수도 있었다.
“환각향은 준비됐나?”
“네. 후작의 방에 설치해 두었습니다.”
결혼식이 끝나면, 하객들을 환각향이 가득한 웨스틴 후작의 방으로 데려갈 거다.
코닌스는 웨스틴 후작의 시체를 조종하고 거짓 목소리를 만들어서 살아 있는 것처럼 꾸밀 것이고, 카란은 환각 마법을 쓸 거다.
환각향과 마법에 동시에 당한 사람들은 모두 후작이 아직까지 살아 있다고 믿게 되겠지.
웨스틴 후작은 리차드를 차기 가주로 지명한 뒤 세상을 떠날 거다.
이미 죽은 지 오래이며, 조종 마법을 푼 것뿐이지만 다들 환각에 취해서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다음 날, 미리 준비한 유서까지 공개하면 완벽했다.
내일이면 나는 웨스틴 후작이 될 거다.
다시 귀족이 되는 건 물론이고 웨스틴 가문의 막대한 재산도 전부 내 차지가 되는 것이다.
리차드가 내일부터 펼쳐질 장밋빛 미래를 떠올리며 미소 짓는데, 갑자기 귓가에 여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미쳤어? 제정신이야!!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어!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아니, 사람이길 포기한 지 오래인가?”
이 목소리는 라온텔이었다. 언제나 네가 싫다고 말하는 환청으로 리차드를 괴롭히더니, 이번에는 그를 직접적으로 비난하고 있었다.
환청과 함께 머리가 깨질 듯한 격통이 찾아왔다.
리차드가 비틀거리자, 카란이 깜짝 놀라서 그에게 다가왔다.
“주군!”
“괜찮다. 소란 떨지 말거라.”
그는 이를 악물며 몸을 다시 일으켰다.
‘도대체 뭐지. 대체 뭐냐고!’
갑자기 환청이 시작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가짜 앤시아와 관련이 있다고 짐작할 뿐.
하지만 원인에 대한 궁금증보다도 분노가 치밀었다.
‘왜 나를 비난하는 거야! 왜 나를 거부하는 거냐고!’
누군지도 모르는 여인이건만, 그녀가 자신을 비난하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끓어올랐다.
결혼을 하고 후작이 되는 대로 그 가짜를 찾으러 갈 거다. 반드시 찾아서 이 환청의 정체를 알아내고 말 테다!
리차드가 이를 가는데, 문이 벌컥 열리며 집사가 안으로 들어왔다.
“리차드 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이냐?”
그는 리차드가 소피아와 교제를 시작하면서, 이곳에 심어놓은 사람이었다.
집사는 물론 후작저의 기사와 사용인들도 매수하거나 자신의 사람으로 채워놓았다.
덕분에 후작을 죽이고 나서도 저택을 장악하기가 수월했다.
“웨스틴 후작의 동생이 와서 난동을 피우고 있습니다.”
리차드는 얼굴을 찡그렸다. 후작과 그의 동생은 원수나 다름없었다.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유산을 노리고 나타났군. 버러지 같은 놈.
“당장 내쫓아라.”
“하오나 후작 각하의 친동생이시온데….”
“웨스틴 후작의 명이라고 해라.”
웨스틴 후작이 동생을 쫓아냈다고 하면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황태자 부부가 왔습니다.”
뒤이어 나온 말을 듣는 순간 리차드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앤시아와 블레이크가 왔다고? 당연히 론스 단장의 결혼식에 갔을 줄 알았는데?
도대체 여긴 왜 온 거지?
불길한 예감이 리차드의 전신을 뒤덮었다.
리차드는 결혼식이 열리는 정원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결혼식이 시작될 때까지는 얼굴도 비치지 않은 채 어수선한 분위기를 유지할 생각이었지만, 황태자 부부가 온 이상 그럴 수 없었다.
앤시아는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짙은 살구색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봄의 녹음을 담은 듯한 싱그러운 눈동자가 찬란하게 빛났고, 붉은 입술은 청순하면서 매혹적이었다.
리차드는 앤시아를 원했다.
하지만 그녀의 옆에는 블레이크가 서 있었다.
황족을 상징하는 은발과 붉은 눈동자, 텐스테온을 닮은 외모, 그리고 앤시아까지.
그는 리차드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단지 황제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어떤 고생이나 노력도 하지 않은 채 모든 걸 손에 넣은 것이다.
열등감과 소유욕이 뒤엉키며 내면에서부터 뜨거운 분노가 솟구쳐 올랐지만 리차드는 애써 감추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제국의 빛이신 황태자 전하와 제국의 축복이신 비 전하를 뵈옵니다.”
“오랜만이군.”
블레이크는 리차드를 내려 보며 짤막하게 말했고, 앤시아는 우아한 미소를 머금었다.
“리차드 카실, 결혼을 축하합니다.”
“…….”
결혼식장에 왔으니 결혼을 축하하는 건 당연한 거다. 그런데도 리차드는 화가 치밀었다.
그녀에게서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철모르던 시절 앤시아에게 연정을 품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죽었다고 생각한 뒤에는 잊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원망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녀를 갖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어린 시절 풋사랑이 아니라, 아주 오래전부터 그녀를 원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사사로운 감정에 사로잡힐 때가 아니었다.
황태자 부부가 갑자기 나타난 이유가 뭘까?
그래도 황제의 하나뿐인 조카가 결혼식을 올리니, 황태자를 보내서 형식적이나마 축하를 하려는 걸까?
아니, 그건 절대로 아닐 거다.
만에 하나 텐스테온이 그런 명을 내렸다고 한들 블레이크가 순순히 따를 리 없었다.
리차드가 그들이 온 이유를 고민하는데, 블레이크가 입을 열었다.
“웨스틴 후작이 위독하다고 들었는데.”
“네. 갑작스럽게 낙마 사고를 당하셔서 결혼을 서두르게 되었습니다.”
“후작은 어디 있지? 내가 치료하겠다.”
“…….”
리차드의 등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 그럼 되겠네요!”
“여신의 선택을 받으신 전하라면 반드시 치료하실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하객들은 리차드의 속도 모르고 기뻐하며 떠들어댔다.
막아야 한다. 절대로 황태자가 후작을 만나서는 안 된다.
“…후작 각하께서는 치료를 받고 회복 중이십니다.”
“그래?”
블레이크의 입매가 묘한 곡선을 그렸다. 주변 사람들도 후작이 회복되었다는 말을 듣고 웅성거렸다.
“네. 그러니 의절한 동생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진노하신 거죠.”
리차드는 웨스틴 후작이 살아 있다는 걸 강조하기 위하여 덧붙였다.
물론 이는 거짓말이었지만 상관없었다.
리차드가 황태자를 만나기 전, 집사가 먼저 나와서 동생 일가를 쫓아냈었다. 그러니 그의 말을 의심할 사람은 없을 거다.
어차피 이 상황만 넘기면 된다. 상태가 회복된 줄 알았지만, 밤에 갑자기 위독해져서 숨을 거뒀다고 하면 그만이니까.
“후작을 만나고 싶은데.”
하지만 블레이크는 집요했다.
지난 7년 동안 교류도 없었고, 후작의 알현도 매번 거부했으면서 왜 이제 와서 만나겠다고 하는 거지?
혹시 무언가 알고 있는 건가?
“그러게요. 건국제 때도 뵙지 못했으니, 오늘은 만나고 싶네요.”
“부인께서 원한다면 당연히 그래야지요.”
다른 사람들 앞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기 때문에 블레이크와 앤시아는 예법에 맞춰 서로에게 공대를 사용했다.
다정하게 웃으며 눈을 마주치는 두 사람을 보자, 리차드는 심각한 상황도 잊고 블레이크에 대한 열등감에 사로잡혔다.
리차드는 블레이크를 노려보았다. 그 순간 블레이크의 찬란한 은발이 칠흑 같은 검은색으로 변했다.
리차드는 깜짝 놀라서 눈을 비볐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바라보니 블레이크의 머리색은 다시 은발로 돌아가 있었다.
뭐지? 환청에 이어 환영까지 보이는 건가?
“왜 그러나?”
“아, 아닙니다.”
리차드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밤새 간호하느라 잠을 설쳤더니 조금 피곤해서.”
“저런.”
“후작 각하께서는 동생분의 일로 진노하신 뒤, 다시 잠이 드셨습니다. 송구하오나 오늘은 힘들 것 같습니다.”
“곧 예식이 시작할 시간일 텐데.”
“각하의 건강이 우선이니까요.”
리차드는 공손한 어투로 말했다.
“흠. 그래?”
블레이크의 고개가 비스듬하게 꺾였다.
의심 가득한 시선이었지만 리차드는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그의 눈을 마주 봤다.
당당해야 한다. 여기서 어색하거나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면 죄를 자백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네. 너른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리차드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자, 이번에는 앤시아가 그에게 물었다.
“리차드 카실, 웨스틴 영애는 어디 있지?”
블레이크를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싸늘한 하대였다.
비록 지금은 평민이지만 곧 후작가의 일원이 될 사람이니 존중을 담아서 말할 법도 하건만, 앤시아는 명백하게 리차드를 무시했다.
작위를 박탈당하자, 태도가 돌변하며 그를 무시하던 사람들은 많았다.
그러니 이런 상황도 익숙했다.
하지만 앤시아에게만큼은 이런 취급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
나를 좋아했으면서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소피아는 후작 각하를 간호하느라 몹시 지쳐서 휴식을 취하는 중입니다.”
하지만 돌변해버린 그녀의 태도가 가슴 아프고 화나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
딱 하루다. 오늘 하루만 버티면 웨스틴 후작이 되는 거다.
다시는 이런 모욕을 겪을 일도 없을 것이다.
“웨스틴 영애와 오랜만에 인사를 나누고 싶은데.”
“밤새 간호를 한 데다가 이른 시간부터 준비했던 탓에 굉장히 지쳐 있어서….”
“안타깝군. 만나서 위로해야겠어.”
“그것이, 아무래도 대화하기 힘든 상황인지라….”
“지금 황태자비의 뜻을 거역하겠다는 건가?”
앤시아는 일부러 고압적인 자세를 취했다.
리차드는 웨스틴 후작과 후작 영애가 다른 사람과 만나지 못하도록 숨기고 있었다. 아무래도 수상쩍었다.
황실의 권위를 내세워서라도 소피아 웨스틴을 만나야 할 것 같았다.
“그, 그런 것이 아니오라….”
앤시아의 생각대로 리차드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이런 식으로 나를 무시하는 걸 보면, 지난번의 일도 실수가 아니라 고의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군.”
그녀가 가짜 앤시아 사건을 언급하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리차드는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소피아를 만나지 못하게 막는다면, 가짜 앤시아를 데려온 책임을 묻겠다는 건가?
어느 쪽이든 리차드에게 있어 최악의 선택지였다.
“아, 알겠습니다.”
그래도 가짜 황태자비 사건을 다시 조사받는 것보다는 소피아를 만나게 하는 게 나았다.
가짜를 조사하다가 황태자를 독살하려던 사실이 발각되기라도 하면 극형을 피할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비 전하만 들어오시죠. 새신부를 다른 사내에게 보여드리고 싶지 않군요.”
빛의 여신에게 선택받은 블레이크라면 소피아의 상태를 눈치챌지도 몰랐다.
하지만 리차드의 말을 들은 블레이크의 목소리는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나를 모욕하는 건가?”
결혼식 전까지 새신부는 다른 남자를 만나지 않았다.
물론 요즘은 구시대의 풍습이라며 사라지는 추세였지만, 신랑 쪽에서 거부한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불같이 화를 냈다. 앤시아를 그곳에 혼자 보낼 수 없기 때문에 일부러 화난 척을 한 거다.
“리차드 카실, 그대는 목숨이 몇 개지? 감히 제국의 황태자를 모욕하고도 살아남길 바라나?”
리차드는 블레이크를 내심 자신의 아래로 여겨왔다.
다른 사람들이 태도를 바꾸어 빛의 힘을 지닌 블레이크를 찬양할 때도, 리차드는 속으로 냉소했다.
그에게 있어 블레이크는 저주를 받은 채 시름시름 죽어가는 쓸모없고 추악한 괴물일 뿐이었다
블레이크의 저주가 풀리고 빼어난 외모로 성장하고 검술로 명성이 높아져도, 리차드는 마음 한편에서 그를 무시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했다.
이미 죽었을 게 뻔한 황태자비를 찾아 헤매며 멍청하게 시간을 낭비하는 바보라 여겼다.
가짜 앤시아에게 독약을 건넸을 때도 그런 마음이었다.
황태자가 오매불망 기다리던 여인의 손에 멍청하게 목숨을 잃는 모습을 상상하며 조소를 머금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블레이크에게서는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졌다.
텐스테온에게도 뒤지지 않는 강한 카리스마에 밀려 리차드는 저절로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소, 송구합니다.”
***
“젠장!”
리차드는 욕지거리를 뱉으며 소피아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소피아가 단장을 마치지 못했다고 핑계를 대며 잠시 시간을 벌었지만 서둘러야 했다.
“카란, 모든 마나를 퍼부어도 좋다. 절대로 황태자와 황태자비에게 들켜서는 안 된다.”
“네. 주군.”
카란이 여기서 마나를 전부 소모하면, 계획에 차질이 생길 거다. 하지만 일단은 저들을 속이는 게 중요했다.
앤시아와 블레이크는 어차피 오래 머무르지 않을 거다. 그들은 론스 단장의 결혼식에도 참석해야 할 테니까.
리차드는 서둘러 준비를 마친 뒤, 앤시아와 블레이크를 방으로 안내했다.
그들이 들어오자 소피아는 예법에 맞춰 인사를 올렸다.
“제국의 빛이신 황태자 전하와 제국의 축복이신 황태자비 전하를 뵈옵니다.”
지금 그녀의 몸은 카란의 흑마법에 지배당하고 있었다.
의식은 깨어 있지만 말과 행동은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다행히 인사는 무척 자연스러웠다. 치맛자락을 잡는 동작이 조금 어색하긴 했지만, 이상해 보일 정도는 아니었다.
그때 앤시아가 소피아의 뒤에 서 있는 카란에게 시선을 던졌다.
뭐지? 혹시 흑마법을 쓰고 있는 걸 눈치챈 건가?
리차드는 긴장했지만, 스스로의 마음을 다독였다.
괜찮다. 카란은 누가 봐도 평범한 하녀로 보일 터였다.
그냥 처음 보는 사람이니 바라본 것뿐이겠지.
리차드의 생각대로 앤시아는 이내 시선을 돌리며 소피아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지었다.
“결혼을 축하드립니다. 웨스틴 영애.”
“황공하옵니다.”
“오늘 너무 아름다우세요.”
“감사합니다.”
대화는 매끄럽게 이어졌다.
블레이크는 별다른 말 없이 조용히 서 있었다.
여신의 힘을 받아 마물조차도 피해간다는 블레이크였다. 혹시라도 그에게 들킬까 봐 걱정했지만, 다행히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런데 안색이 안 좋네요. 아버님의 일로 심려가 크셨나 봐요.”
“네. 요즘 들어 잠을 제대로 못 잤습니다.”
카란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코닌스였다면 분명 이상한 데서 오버하며 말실수를 했을 거다.
역시 마법 실력이 부족하더라도 카란이 소피아를 담당한 게 정답이었다.
그런데 앤시아가 갑자기 소피아에게 다가가더니, 손을 꼭 잡았다.
“많이 힘드시죠?”
“아니요. 리차드가 곁을 지켜줘서 괜. 찮. 습니다. 아. 주 행복하. 답. 니다.”
소피아의 말이 갑자기 이상해졌다. 리차드는 화들짝 놀라서 카란을 바라보았다. 그녀도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행복하신가요?”
“네. 너. 무, 행. 복해요.”
소피아의 상태는 점점 심각해졌다. 말이 툭툭 끊길 뿐만 아니라 억양도 부자연스러웠다.
“그렇군요. 다행이에요.”
앤시아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도 그녀는 아직 이상한 걸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결혼식 때문에 긴장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한 거겠지.
하지만 이대로 가면 분명 들키고 말 거다.
“으으윽.”
그 순간 소피아의 입에서 괴로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카란의 조종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낸 목소리였다.
이러다 소피아가 무슨 말이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리차드는 다급히 끼어들었다.
“아무래도 소피아가 많이 긴장한 것 같습니다. 송구하오나, 아직 준비할 게 남았으니 이만 하객석으로 이동해주시겠습니까?”
앤시아는 소피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들킨 건가? 리차드의 심장이 가쁘게 뛰었다. 하지만 앤시아는 우아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럼 이만 가볼게요. 조금 이따 봐요. 소피아 영애.”
앤시아는 소피아의 손을 다시 한번 더 강하게 잡았다가 놓았다.
“블레이크, 가요.”
“그래요. 부인.”
블레이크는 고개를 끄덕이며, 앤시아의 허리를 감쌌다.
서로 눈을 마주치며 다정하게 방을 나서는 두 사람을 보자 질투심이 이는 것과 동시에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문이 닫힌 뒤, 리차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들키지는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이냐!”
리차드는 카란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두 사람이 나가자마자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던 카란이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이유를 말하라고 하였다!”
“갑자기 마나가 흐트러졌습니다.”
그녀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그러게 집중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만약 도미람이 살아 있었다면 결코 이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을 거다.
리차드는 분통을 터트리며 소피아를 바라봤다.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내서 사람을 당황하게 했던 그녀였지만,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잠이 든 것처럼 평온하게 눈을 감고 있었다.
“저렇게 맹한 계집 하나 조종하지 못해서 실수를 하느냐!”
“송구합니다. 갑자기 방해를 받은 것처럼 마나가 뒤엉키는 바람에….”
“방해를 받았다고?”
혹시 블레이크가 힘을 쓴 건가?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리차드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대로 결혼식을 진행해야 하나, 아니면 일단 취소하는 게 좋을까?
하지만 거의 다 왔다.
하루다. 아니, 하루도 아니고 몇 시간만 버티면 그는 웨스틴 후작이 될 수 있었다.
게다가 오늘이 아니면 기회를 잡기 힘들었다.
소피아는 계속 마법을 걸어서 꼭두각시로 쓰면 그만이지만, 웨스틴 후작은 죽은 뒤 시일이 꽤 흘렀다.
시체의 부패를 막고 살아 있는 사람처럼 꾸미는 것도 슬슬 한계였고, 위독하다는 핑계로 다른 사람들의 접근을 막는 것도 더는 어려웠다.
오늘 결혼식을 하지 못하더라도 후작의 사망은 발표해야만 했다.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웨스틴 후작의 죽음이 알려지면, 그의 동생을 비롯하여 친척들이 승냥이 떼처럼 달려들 게 뻔했다.
차후 소피아 웨스틴과 결혼을 하더라도 쉽게 후작이 되진 못할 거다.
오늘뿐이다.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다.
“방해를 받은 것이 확실하냐? 네가 실수를 해놓고 핑계를 대는 것이 아니냐!”
“…잘 모르겠습니다.”
카란은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마나가 흐트러진 건 확실했다. 하지만 그녀는 마법 실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정확한 이유를 간파하긴 어려웠다.
게다가 리차드가 윽박지르니 더더욱 확신이 서지 않았다.
카란이 우물거리자 리차드는 결심을 굳혔다.
“결혼식은 예정대로 진행할 것이다.”
이게 어떻게 만든 기회인데, 확실하지도 않은 이유로 지레 겁을 먹고 모든 것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저 계집을 준비시켜라.”
리차드는 소피아를 가리켰다.
“네. 주군.”
“이번에는 절대로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된다.”
“명심하겠습니다.”
“확실히 해야 한다. 만약 자신이 없다면 코닌스를 부르겠다.”
“아닙니다! 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절대로 실수하지 않겠습니다.”
카란은 코닌스보다 마법 실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에 열등감을 품고 있었다.
리차드가 카란과 코닌스의 실력을 비교하자, 그녀는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한 번만 더 실수하면 용서치 않을 것이다.”
“네. 주군.”
카란은 소피아에게 다시 한번 조종 마법을 걸었다.
신부는 아버지와 함께 입장해야 하지만, 웨스틴 후작의 병환을 핑계로 리차드가 소피아의 손을 잡고 함께 걸어 들어갈 예정이었다.
리차드는 소피아가 제대로 움직이는지 다시 한번 확인한 뒤, 그녀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결혼식만 무사히 치르면 된다. 의심을 산다고 해도 상관없다.
일단 웨스틴 후작 가문의 지위와 재산만 손에 넣으면, 모든 걸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었다.
리차드는 자신이 있었다. 자신에게 부족한 건 오직 작위와 재산뿐이었다.
능력은 충분했다. 귀족들은 전부 머저리들이었다.
겉으로는 똑똑하고 우아한 척하지만 실제로는 얼마나 멍청하고 뒤가 구린 놈들인지, 리차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후작이 되기만 한다면 의회를 장악하고, 블레이크를 내 발밑에 무릎 꿇릴 거다! 앤시아도 나의 것으로 만들고 말 테다!
리차드는 긴장과 희망에 부풀어서 문을 열었다.
그 순간 그의 목에 서슬 퍼런 칼날이 드리워졌다.
리차드는 화들짝 놀랐다.
블레이크가 자신에게 검을 겨누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앤시아와 제5 기사단의 기사들이 서 있었다.
‘당했구나.’
후작이 된다는 장밋빛 미래가 사라지며, 리차드의 머릿속이 절망으로 젖어 들었다.
***
리차드의 결혼식장에 도착하기 전, 블레이크는 나에게 누누이 말했다.
혹시라도 리차드가 정말 무슨 짓을 벌인 걸 눈치채더라도, 그 자리에서 밝히지 말고 일단 물러난 뒤 자신과 같이 해결하자고 말이다.
“앤시아, 내가 한 말 기억하지?”
“응. 걱정하지 마.”
그는 웨스틴 후작저에 도착한 뒤에도 신신당부했다.
나도 무작정 일을 벌일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어둠의 문에 갇혀서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줬었으니까.
물론 그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지만, 앞으로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았다.
우리가 결혼식장에 나타난 걸 알고, 사람들이 몰려와서 인사를 건넸다.
그들은 거의 대부분 웨스틴 후작의 친척이나 가신들이었지만, 후작의 상태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했다.
후작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부랴부랴 왔더니 리차드가 출입을 통제하는 모양이었다.
항의하고 싶지만 결혼식인지라 다들 일단 참고 있는 것 같았다.
어쨌든 후작이 죽으면 차기 후작은 리차드였다.
웨스틴 후작보다는 새로운 권력인 리차드에게 찍히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큰 것 같았다.
위독하다는 데도 진심으로 걱정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니, 웨스틴 후작이 얼마나 인망 없었는지 여실하게 느껴졌다.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데, 집사가 기사들을 대동하며 웨스틴 후작의 동생 일가를 끌고 나갔다.
웨스틴 후작은 의절했던 동생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진노했다고 한다.
위독하다고 하더니, 리차드의 작위 승계에 위협이 될 만한 인물이 나타나자 갑자기 정신이 들어서 쫓아냈다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수상쩍었다.
“후작과 영애를 만나야겠어.”
나는 블레이크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러자 블레이크도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대신 나도 함께 가야 돼.”
“응.”
우리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리차드가 나타났다.
그는 웨스틴 후작이 회복됐다고 말하다가 다시 잠들었다고 하는 등 어설픈 변명을 이어가며, 후작을 만나는 걸 막았다.
하지만 우리가 고압적인 자세를 취하자, 소피아 웨스틴과의 만남까지는 막지 못했다.
소피아가 있는 방으로 들어간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방 안에 검은 마나가 진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마나는 소피아의 뒤에 서 있는 하녀에게서 나오고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에 눈매가 짙고 똑 부러져 보이는 여자였다.
나는 그녀가 흑마법사라는 걸 알았지만 일단은 모르는 척하고 소피아와 대화를 이어갔다.
“결혼을 축하드립니다. 웨스틴 영애.”
“황공하옵니다.”
그녀는 흑마법에 걸려서 몸을 조종당하고 있었다. 평이하게 이어가는 말과 달리 눈동자는 겁에 질려 있었다.
나는 소피아의 손을 꼭 잡았다. 예상했던 대로 흑마법의 검은 마나가 그녀의 몸 안을 잠식하고 있었다.
역시 조종 마법을 걸어두었군.
“많이 힘드시죠?”
나는 그녀의 몸에 빛의 마나를 조금 흘려보냈다.
“아니요. 리차드가 곁을 지켜줘서 괜. 찮. 습니다. 아. 주 행복하. 답. 니다.”
그러자 흑마법이 풀어지며, 그녀의 목소리가 끊기기 시작했다.
소피아가 자신의 의지로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만큼 조종 마법이 풀리자, 리차드는 그녀가 긴장했다는 헛소리를 늘어놓으며 이만 나가라고 했다.
나는 당장 그의 죄를 밝히고 싶지만, 블레이크와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일어났다.
“그럼 이만 가볼게요. 조금 이따 봐요. 소피아 영애.”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빛의 마나를 불어넣어 줬다.
흑마법으로 지친 그녀의 몸이 조금이나마 편안해질 수 있도록 말이다.
방 밖으로 나간 뒤, 나는 우리의 대화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방음 마법을 걸었다.
하녀의 흑마법은 어설픈 편인 데다, 마나 자체도 약했다.
내가 방음 마법을 사용해도 눈치채지 못할 거다.
나는 블레이크에게 상황을 모두 전했고, 그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여 후작저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에드온과 제5 기사단의 기사들을 호출했다.
블레이크는 나를 걱정하며 먼저 돌아가 있으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기사들의 보호 아래 있겠다고 약속하며 자리를 지켰다.
지금 흑마법사를 상대할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블레이크가 빛의 마나를 지니고 있긴 하지만, 아직 그 힘을 구사하는 방법을 완벽하게 익히지는 못했으니까.
기사들은 곧바로 리차드를 추포하려 했지만, 나는 그들을 만류했다.
“지금 들어가면 웨스틴 영애가 휘말릴 거야. 저들이 먼저 나올 때까지 기다려.”
“네. 비 전하.”
“하녀복을 입은 여자는 흑마법사야. 조심해.”
“명심하겠습니다.”
잠시 후, 리차드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문을 열었다. 블레이크는 곧장 그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리차드의 표정이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하지만 이내 당당한 얼굴로 고개를 쳐들었다.
“전하, 이게 무슨 짓입니까? 아무리 제국의 황태자라고는 하지만 도가 지나치신 것 같습니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조차 뻔뻔하게 시치미를 뗐다. 오히려 억울해 보이기까지 했다.
블레이크와 함께 경계태세를 취하던 제5 기사단 중 몇몇이 소피아를 보호하기 위해서 다가갔다.
하지만 그녀는 기사들의 손을 뿌리치며 악을 썼다.
“싫어요! 왜 이러시는 거예요. 리차드를 데려가지 마세요! 이 사람은 아무런 잘못도 없어요!”
이런 상황에서도 흑마법을 쓰는군.
나는 하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기사들에게 제압당한 상태에서도 소피아를 계속 조종하고 있었다.
충성심 하나는 대단했다.
나는 소피아에게 걸어갔다. 그러자 제이든이 깜짝 놀랐다.
“비 전하, 위험하십니다.”
“괜찮아. 다들 지켜주고 있는걸.”
다섯 명의 기사들이 나를 호위하고 있었다.
게다가 흑마법사를 상대로는 빛의 마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내가 가장 안전했다.
물론 기사들의 보호 아래 가만히 있겠다고 블레이크와 약속했지만, 해결할 능력이 있는 데도 멀뚱히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앤시아.”
내가 그녀의 옆으로 다가오자, 블레이크가 놀라며 당장 뒤로 돌아가라고 눈짓을 보냈다.
“괜찮아.”
하지만 나는 소피아의 손을 잡았다.
아까보다 강한 조종 마법이 걸려있긴 하지만, 그래도 어설펐다. 나는 그녀를 속박하는 흑마법을 단칼에 끊어버렸다.
그러자 소피아의 몸이 꺾이며 그대로 풀썩 쓰러졌다.
“소피아 영애, 괜찮아요?”
그녀는 대답 대신 부들거리는 팔을 들어 리차드를 가리키곤 소리쳤다.
“모두 저자의 짓이에요! 저 남자가 아버지를 죽였어요!”
웨스틴 후작은 이미 죽었구나.
솔직히 외부와의 만남을 철저하게 차단하는 걸 보면서 어느 정도 짐작하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참 대범한 짓이었다.
“리차드 카실, 자세한 죄는 황궁에서 묻겠다.”
블레이크는 차갑게 말했다.
웨스틴 후작을 살해하고, 외동딸을 흑마법으로 조종하여 강제로 결혼한 뒤 후작저를 집어삼키려 했다.
이것만으로도 리차드는 사형을 피할 수 없었다.
모든 죄가 드러난 상황에서도 리차드는 블레이크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끝까지 죄를 뉘우치는 기색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어쨌든 리차드의 악행도 여기서 끝이다.
더는 빠져나가지 못하겠지.
그때, 갑자기 자욱한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복도 안을 순식간에 덮었다.
마법인가? 아니다. 마나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럼 이게 뭔가 싶어 당황하는데, 기사가 소리쳤다.
“환각향이다! 입을 막아!”
하지만 이미 늦었다. 환각향에 취한 기사들이 몸을 비틀거리더니, 갑자기 블레이크를 향해서 일제히 검을 뻗었다.
“블레이크!”
블레이크는 그들의 공격을 가볍게 피했지만, 리차드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연기 속으로 몸을 숨겨 버렸다.
기사들이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환각향에 취한 다른 기사들의 공격을 당해서 저지당하고 말았다.
블레이크는 리차드를 쫓아가지 않고 우선 나의 곁으로 다가왔다.
“앤시아, 괜찮아?”
“응. 블레이크야말로 다치지 않았어?”
“나도 괜찮아.”
다행히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기뻐하긴 일렀다.
복도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미친놈아! 누구한테 검을 들이대는 거야!”
“전하랑 비 전하를 지켜라!”
“으악!”
검이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이 마구 뒤섞이고, 사람들이 서로 부딪혔다.
단순히 환각향 때문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이상했다.
게다가 중독된 기사들이 가장 처음 노린 사람은 블레이크였다.
나는 정신을 집중했다. 희뿌연 안개 속에 검은 마나가 일렁거렸다.
흑마법이었구나.
환각향으로 먼저 사람을 취하게 한 뒤, 흑마법을 써서 조종한 거다.
아까 그 하녀인가? 아니다. 그 하녀보다 훨씬 마나도 강하고 실력이 뛰어났다.
“조심해! 흑마법사가 한 명 더 있어!”
나는 기사들의 몸에 연결된 검은 마나를 빠르게 끊어냈다.
흑마법이 끊어지자 대부분의 기사들은 그대로 쓰러졌다.
계속 검을 휘두르는 기사들도 얼마 안 가 제압당했다.
“창문을 모두 깨라!”
“네.”
블레이크의 명에 따라, 아직 중독되지 않은 기사들은 주변에 있는 창문들을 모두 깼다.
공기가 통하며 환각향의 자욱한 연기가 밖으로 빠져나갔다.
리차드와 하녀는 이미 자취를 감춘 채였다.
환각향과 흑마법으로 기사들을 조종했던 다른 흑마법사 또한 보이지 않았다.
***
소피아의 말대로 웨스틴 후작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리차드는 파혼 통보를 받고 격분하여 웨스틴 후작을 살해했으며, 이를 소피아에게 들켰다고 한다.
그는 소피아를 구슬려서 이 일이 새어나가는 걸 막고 더 나아가 공범으로 만들려고 시도했지만 그녀가 거부하고 경비대를 부르려고 하자, 이를 막기 위해 기절시켰다.
소피아는 그 이후의 일은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약과 흑마법의 영향이었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기억 못 하는 게 좋을 만큼 고통의 시간이었을 거다.
리차드는 웨스틴 후작이 되기 위해서, 흑마법까지 써가며 소피아와 강제로 결혼식을 올리려고 했다.
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쓰레기 같은 인간이었다.
소피아는 흐릿한 기억 속에서도 몇 가지 사실만은 또렷이 기억했다.
리차드의 흑마법사는 두 명이었으며 앳되어 보이는 남녀라고 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리차드와 같은 검은색 머리라고 했었다.
환각향과 흑마법을 써서 리차드를 도주하게 한 자는 분명 남자 흑마법사였을 거다.
하지만 리차드와 흑마법사 2명만으로는 이렇게 단시간에 후작저를 장악하기 어려웠다.
집사와 후작저의 기사단장을 추궁하자 리차드에게 매수당했음을 시인했다.
가장 직위가 높은 두 사람도 그런데 다른 사용인들은 말할 것도 없겠지.
리차드가 잡히기 전까지는 안전을 위해서 황궁 기사들이 소피아 웨스틴을 보호하기로 했다.
***
‘야수와 영애님’에서 리차드의 계략에 이용당해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는 여인은 모두 4명이었다.
조앤나, 카밀라, 첼시, 그리고 소피아 웨스틴.
다른 세 사람은 원작과 달리 리차드와 어떤 접점도 없었다. 하지만 소피아는 그의 마수를 피하지 못했다.
과거의 소피아는 블레이크가 죽기를 빌고, 또 빌었었다.
그때 그녀의 나이가 17살이었다.
결코 어린 나이가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녀를 용서할 수 없었지만,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서럽게 눈물을 흘리던 그녀의 모습이 떠오르자 마음이 좋지는 않았다.
“또 그런 얼굴이네.”
“응?”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블레이크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자책하지 마. 네 잘못이 아니야.”
그가 나의 손을 꼭 잡았다. 아무래도 생각이 표정으로 드러났나 보다. 또 걱정을 끼쳐버렸다.
나는 일부러 활짝 웃어 보였다.
“딸기는 못 주겠네.”
상황을 수습하고, 후작저를 조사하다 보니 어느새 늦은 저녁이 되어있었다. 론스 단장의 결혼식은 전부 끝났을 거다.
“우리가 다 먹자.”
“그럴까?”
“응.”
“그럼 하루 종일 딸기만 먹어야겠다.”
“그것도 좋지.”
블레이크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나의 옆자리에 와서 앉았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앤시아.”
“응.”
“앞으로는 그렇게 위험한 행동은 하지 마.”
블레이크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까 전, 나는 기사들의 보호 아래 있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직접 앞에 나서고 말았다.
“별로 위험하진 않았어. 내가 훨씬 강한걸.”
남자 흑마법사의 실력이 제법 뛰어난 편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나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나는 천 년 전에도 꽤 이름 있는 빛의 마법사였으니까.
굉장히 논리적인 대답이었건만, 그는 당황이 섞인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야. 조금이라도 위험했다면 절대로 나서지 않았을 거야.”
마음만 앞서서 주변 사람에게 걱정을 끼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알아. 부인은 나의 저주를 풀고, 마법도 가르쳐 주는 스승님인걸.”
블레이크가 나의 어깨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하지만 알면서도 걱정이 돼. 그러니까 이제는 나를 믿고 편하게 쉬어. 나도 제법 강하니까.”
나를 배려하며 부드럽게 말했지만, 그가 오늘 하루 종일 얼마나 걱정하며 마음 졸였을지 짐작이 되었다.
“이미 믿고 있는걸.”
나는 그의 손에 깍지를 꼈다.
블레이크를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걱정 없이 흑마법사만 신경 쓸 수 있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그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면, 그렇게 빠르게 판단하지는 못했을 거다.
“그래도 다음부터는 더 조심할게.”
“약속이다.”
“응.”
블레이크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이제 위험할 일도 없을 거다.
리차드만 잡히면 모든 게 끝날 테니까.
나와 블레이크는 곧 포렌스궁에 도착했다.
우선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내 방으로 들어가는데, 노크와 함께 첼시가 안으로 들어왔다.
“첼시, 아직 궁에 남아 있었어? 오늘은 일찍 들어가라고 했잖아.”
수도의 귀족들은 대부분 론스 단장의 결혼식에 참석했지만, 그녀는 세피아궁의 보수를 감독한다며 황궁에 남아 있었다.
나는 그럴 필요 없다고 했지만 그녀는 오늘부터 수리를 시작해야 한다고, 하루도 미룰 수 없다며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
실은 일정보다도 결혼식에 참석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첼시는 아직 약혼도 하지 않았으니, 결혼식에 갔다면 이곳저곳에서 잔소리를 꽤나 많이 들었을 거다.
하지만 결혼식은 이미 끝날 시간이니 돌아가도 됐을 텐데.
론스 단장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서 지방에 사는 친척과 친구들도 많이 올라왔다고 들었다.
오랜만에 만나서 회포를 풀 기회인데…. 잔소리의 연장일 것 같아 피한 걸까?
“아니요. 오늘은 퇴궁할 생각이 없습니다.”
나의 짐작이 맞는지,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보다 비 전하께서는 괜찮으세요? 웨스틴가에서 큰일이 있었다면서요.”
“응. 나는 괜찮아.”
“다행이에요.”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걱정을 끼친 것 같아 미안해졌다.
“걱정해줘서 고마워.”
“당연한 말씀을요.”
“그런데 그건 뭐야?”
나는 그녀의 손에 든 작은 병을 보며 물었다. 그 안에는 검은색 가루가 들어있었다.
“아, 세피아궁을 정리하다가, 비 전하의 집무실에서 발견했습니다. 아무래도 수상해서 가져왔습니다.”
아직 황태자비의 업무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피아궁의 집무실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몇 번 들어갔을 때도 이런 건 보지 못했었는데….
누군가가 몰래 숨겨놓았던 건가?
나는 일단 첼시에게서 병을 받았다.
그 순간 시야가 검게 변하더니 수많은 기억과 장면, 목소리들이 흘러들어 오기 시작했다.
“리차드 님! 여기요! 여기예요!”
고아원 아이들이 리차드에게 소리쳤다. 아이들의 성화에 못 이겨 뚜벅뚜벅 걸음을 옮기던 리차드가 나로 변한 세르를 바라보았다.
“앤시아…?”
그는 세르를 나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자택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세뇌마법을 걸었다.
“앤시아, 우리가 함께하기 위해서는 황태자를 죽여야 해.”
리차드는 세르에게 독약이 든 작은 병을 쥐여주었다.
“걱정하지 마. 궁의나 황궁 마법사도 알아낼 수 없을 만큼 완벽한 독이야. 절대로 들킬 리 없어.”
“하지만 겁이 나요….”
“겁이 날 것도 많다. 만약에 정말로 위험한 일이라면, 내가 너한테 시킬 리가 없잖아. 나는 앤시아 너를 사랑하는걸.”
그는 진심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가식적인 얼굴로 사랑을 속삭였다.
리차드가 떠나고 세르는 약병을 꼭 쥔 채 서러운 눈물을 터트렸다.
그녀의 울음을 들으며 나는 눈을 떴다. 그리고 검은색 가루가 든 병을 바라보았다.
이건 리차드가 블레이크를 죽이기 위해 세르에게 건넨 독이었다.
세르는 자신이 겪은 기억들을 이 병에 담아 놓았다.
‘필립, 나한테 왜 그랬어? 그런 짓까지 할 필요는 없었잖아.’
‘내가 미웠어? 네 사랑을 바란 게 그렇게 죽을죄였어?’
‘미안하다고 말해줘. 제발. 그 한마디면 되니까.’
그녀의 진심이 끊임없이 흘러들어 왔다.
세르는 리차드에게 사과받고 또한 그를 용서해주고 싶어서 찾아간 거였다. 미련 같은 게 남아서가 아니었다.
하지만 리차드는 끝까지 세르를 이용하고, 비열하게도 그녀의 손으로 블레이크를 죽이려고 했다.
‘절대로 용서하지 않아.’
병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용서할 수 없다. 그는 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전생의 기억이 없어도 똑같다.
반드시 리차드를 잡을 거다. 잡아서 모든 죗값을 치르게 할 거다.
***
제국 전체에 리차드의 몽타주가 그려진 수배서가 나붙었다.
그는 수많은 죄를 저질렀지만 그중에도 가장 큰 죄명은 ‘황태자의 독살 미수’였다.
리차드는 분노했다.
후작의 자리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작위를 발판삼아 귀족 사회를 장악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를 꿈을 꾸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이제는 도망자 신세가 되고 말았다.
설마 앤시아가 빛의 마나를 지니고 있었을 줄이야.
단순히 마나만 소유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천 년 전에 자취를 감추었다는 빛의 마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였다.
블레이크의 저주를 푼 사람은 정말로 앤시아였다.
멍청한 인간들이 지어낸 망상이 아니라, 앤시아는 정말로 축복의 소녀였고 그녀의 힘으로 천 년 동안 이어져 오던 여신의 저주를 풀어낸 것이다.
리차드는 도망치는 내내 끝없는 후회에 빠졌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무엇이 문제였을까?
이렇게 노력했는데, 한시도 쉬지 않고 황좌만을 보며 달려왔는데, 어째서 한낱 도망자 신세로 전락한 걸까?
그는 이유를 찾아 헤맸다. 그리고 하나의 답을 찾았다.
앤시아를 놓치면서부터 제 인생이 어긋나기 시작한 거라고.
‘앤시아가 처음 좋아한 사람은 나였다.’
어린 시절 벨라시안 백작저에 가면, 그녀는 언제나 리차드를 흘끔흘끔 쳐다보고는 했다. 그에게서 좀처럼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때 그녀의 마음을 받아줬더라면 모든 것이 달라졌을 거다.
리차드가 원한다면, 벨라시안 백작은 천덕꾸러기였던 딸을 당장 내놓았을 거다.
앤시아가 지닌 빛의 마법과 언어 능력도 자신의 것이 되었겠지. 여신의 저주가 풀릴 일도 없었을 거다.
황태자는 저주를 괴로워하다 비참하게 죽었을 거고, 카실 공작 가문이 몰락하는 일도 없었겠지.
그래, 그때부터 모든 게 꼬였던 거다.
하지만 원인을 찾은들 소용없었다.
앤시아는 이미 블레이크의 아내였고, 리차드는 반역죄를 저질러 쫓겨 다니는 도망자 신세였다.
“주군, 이 길은 안 되겠습니다. 앞에 병사들이 있습니다.”
주변의 상황을 파악하고 돌아온 코닌스가 조용히 보고를 올렸다.
리차드와 카란의 얼굴은 전국에 수배서가 나붙었기 때문에, 코닌스만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럼 어디로 가야 하느냐?”
“그것이…. 사방으로 병사들이 쫙 깔려 있어서….”
코닌스가 우물쭈물하며 뱉었다.
“그걸 누가 모르느냐! 길을 찾는 것이 너의 임무 아니냐!”
리차드는 답답해하며 소리쳤다. 일단 제도에서 벗어나는 게 급선무였지만, 경비가 삼엄한 탓에 짧은 거리를 이동하기조차 쉽지 않았다.
“송구합니다.”
“한심한 놈.”
리차드는 혀를 찼다. 하지만 코닌스를 비난한다고 해서 자신도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저기다! 저기 죄인과 닮은 놈이 있다!”
“옆에 여자도 있어!”
그때 코닌스의 어깨 너머로 병사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젠장!
제도를 벗어나기는커녕 경비대에 들키고 말았다.
리차드는 도망쳤다. 카란과 코닌스도 흑마법을 사용하며 그가 도망칠 길을 만들었다.
“이쪽입니다. 주군.”
리차드는 이를 악물며 뛰었다. 하지만 병사들은 오히려 그를 바짝 추격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병사들을 따돌리기는커녕 황궁의 기사단들까지 합세하며 그의 숨통을 옥죄였다.
리차드는 정신없이 뛰었다.
카란의 비명 같은 것이 들리기도 했지만, 무시하고 달렸다.
하지만 이내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앞에는 커다란 강물이 넘실대고 있었다.
그는 다른 길을 찾으려고 했지만, 눈을 돌릴 새도 없이 병사들이 리차드를 포위했다.
“리차드 카실, 더 이상 도망쳐도 소용없다. 죄를 늘리지 말고 순순히 포박에 응해라!”
한눈에 봐도 계급이 높아 보이는 기사가 고압적으로 소리쳤다.
리차드의 입가에 시니컬한 조소가 스쳤다.
죄를 늘리지 말라니.
황태자의 독살 시도가 발각된 시점에서 리차드는 극형을 피할 수 없었다. 여기서 죄를 늘린들 그렇지 않든 그 앞에 있는 건 죽음뿐이었다. 빠져나갈 방법 같은 건 없었다.
리차드는 넘실거리는 강물로 시선을 던졌다.
며칠 동안 내린 폭우 때문인지 수위가 높고 물살도 거칠었다.
이대로 기사들에게 끌려가면 재판을 받고 극형에 처해질 거다. 하지만 저 강에 빠지면 희박하지만 목숨을 건질지도 모른다. 물론 당장 죽을 확률이 훨씬 컸다.
리차드가 고민하는 사이, 병사들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리차드는 몸을 돌렸다.
하지만 거친 물살을 보자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때 물길 속에서 한 여인의 모습이 환영처럼 비췄다.
모든 것이 새하얀 여자였다.
‘저 여자다! 모든 게 저 가짜 때문이다!’
가짜 앤시아와는 어느 것 하나 닮은 구석이 없는 여인이었다. 하지만 리차드의 눈에는 그 여자가 자신을 속인 가짜 앤시아로 보였다.
리차드는 지금의 상황이나 거센 물살에 대한 공포도 잊고, 그녀를 잡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가 돌발행동을 하자 병사들이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리차드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의 오감과 온 정신은 하얀 여인의 환영에 사로잡혀 있었다.
차가운 강물에 빠지는 순간, 리차드의 머릿속에 하나의 이름이 떠올랐다.
‘세르파니아.’
저 여자는 세르파니아다. 빛의 여신이며 나에게 힘을 주었었다.
차가운 물길 속에서 리차드의 기억이 하나둘 깨어나기 시작했다.
“세르 덕분에 황제가 되어놓고, 이제 와서 버리겠다고?”
“말조심해. 나는 나의 능력으로 황제가 된 거다.”
“필립, 이 석판은 뭐야! 미쳤어? 제정신이야!!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어!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아니, 사람이길 포기한 지 오래인가?”
나는 필립이다.
빛의 힘을 이용해서 락슐을 죽이고 젤칸의 황실을 뒤엎으며, 스스로의 힘으로 제국을 세웠다.
내가 이 아스테릭 제국을 세운 황제였다.
“하하하하! 됐어! 됐어! 내가 이겼어! 나의 승리다! 세르파니아, 보고 있나? 너는 졌어! 네가 아무리 글자를 남겨봤자 아무도 알지 못할 거다!”
여신을 봉인하고, 후손들에게 저주를 건 사람도 바로 나였다.
“황후 자리는 아직 남아 있어. 라온텔. 이곳을 떠나고 싶다면 괜히 힘 빼지 말고 내 아내가 되도록 해.”
그리고 라온텔은 내 여자였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아니, 태어난 순간부터 언제나 함께하고, 같이 자라왔으며, 오랫동안 사랑했던 나만의 여자였다.
“라온텔, 안 돼! 조금만 참아! 내가 너를 구할 방법을 찾아낼 테니까, 조금만 더 버티면, 내가 너를…!”
“필립….”
“그래, 라온텔, 말해. 듣고 있어.”
“네가 싫어.”
“…라온텔? 라온텔…? 라온텔! 라온텔! 라온텔!!”
라온텔이 죽자, 필립은 오열했다. 그의 찢어질 듯한 절규와 비통함이 리차드의 전신을 울렸다.
필립이 아무리 소리쳐도 라온텔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리차드는 싸늘하게 식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그녀의 얼굴은 점점 생기를 찾았다.
아니, 그녀는 라온텔이 아니었다.
황금처럼 눈부신 금발과 녹색 눈동자, 부드러우면서 아름다운 얼굴은 분명 앤시아였다.
라온텔이 앤시아였다. 그러니 앤시아도 내 여자였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리차드의 눈이 번쩍 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