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 아무래도 사기 결혼인 것 같습니다
텐스테온은 블레이크가 오길 기다리며 서류를 확인했다.
7년 동안 아무리 뒤져도 흔적조차 찾지 못했던 앤시아를 리차드가 발견했다.
리차드는 그녀가 앤시아인 걸 확인하자마자 곧장 황궁으로 데려왔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무척 친밀한 관계처럼 보였다. 앤시아는 리차드에게 의존했으며, 그를 세피아궁에 초대하기도 했다.
블레이크 앞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텐스테온 역시 처음부터 리차드가 수상하다고 생각하며 면밀히 조사 중이었다.
그가 한참 리차드에 대한 자료를 살피고 있는데, 문이 열렸다. 그리고 블레이크와 앤시아가 안으로 들어왔다.
텐스테온은 다소 놀랐다.
블레이크는 오늘 로즈를 데려오겠다고 했었다. 그녀와 함께 식사해달라고 텐스테온에게 부탁까지 했다.
그런데 서쪽 계곡에서 데려온 여인이 아니라 앤시아와 함께 나타난 것이다.
텐스테온은 이게 어찌 된 일이냐고 묻지 않았다. 아니, 물어볼 수 없었다.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여인에게 시선이 빼앗겨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무언가 다르다. 외모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어제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님, 저 왔어요.”
앤시아는 활짝 웃었다. 하지만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리고 있었다.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텐스테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성큼성큼 걸어가 앤시아를 안아주었다.
“돌아왔구나.”
드디어 사랑하는 내 딸 앤시아가 돌아왔구나. 텐스테온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 아이가 바로 진짜 앤시아다.
***
“미안하다. 너를 지켜줬어야 했는데.”
텐스테온은 나에게 사과했다. 오늘 하루 종일 미안하다는 말만 듣는 것 같다.
그는 언제나 당당하고 위엄이 넘치는 제국의 황제였다. 그런 텐스테온의 얼굴에 짙은 회한이 담겨 있었다.
마쿨에게 끌려갔을 때 내 이름을 부르던 텐스테온의 절규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했다.
그동안 그가 얼마나 많이 자책하고 후회했을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요. 저는 아주 잘 지냈어요. 마쿨은 여신이 보낸 안내자였는걸요. 그들이 저를 여신에게 안내해줬어요.”
나는 일부러 더 밝게 말했다.
“어둠의 문 안은 검고 고요했어요. 마물도 없었고, 별로 힘들지도 않았어요. 이렇게 시간이 흘렀는지도 몰랐고요. 금방 돌아올 생각이었는데, 너무 늦어서 죄송해요.”
“…고맙다. 이렇게 건강히 돌아와 줘서.”
그가 내 말을 완전히 믿는 것 같지는 않았다. 텐스테온의 붉은 눈동자에 걱정과 미안함이 가득했다.
나는 또다시 사과를 받기 전에 얼른 말했다.
“아버님, 저 배고픈데.”
“최고의 만찬을 준비하마.”
텐스테온은 미소를 지었다. 내가 기억하던 그대로 멋지고 당당한 표정이었다.
식사가 준비되는 동안, 나는 천 년 전에 있었던 일들을 텐스테온과 블레이크에게 말했다.
하지만 내가 라온텔이며, 블레이크가 락슐이었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블레이크는 지금 이 순간을 살면 된다. 굳이 전생의 일을 알 필요는 없었다.
“빛의 여신이 네 행세를 했던 거구나.”
“여신은 천 년 동안 끔찍한 고통을 겪었어요. 진심으로 모두를 속일 마음은 없었을 거예요.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는 말아주세요.”
나는 이번 일로 세르를 비난하거나 미워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이제라도 원래대로 돌아온 친구가 고맙고 반가울 뿐이었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탓할 생각은 없다. 다만 너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 미안하고 나 스스로가 한심하구나.”
“알아보셨어요. 그건 제 몸이었는걸요.”
“그래도 면목이 없다.”
“아버님께서 자꾸 그러면 제가 너무 죄송하잖아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를 곧바로 알아본 블레이크가 신기한 거지, 다른 사람들이 자책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앤시아….”
아무리 밝게 말해보아도 그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나는 배시시 웃으며 농담을 건넸다.
“그나저나 아버님은 왜 이렇게 욕심쟁이예요?”
“내가?”
“네. 아직도 제국 최고의 미남 자리에서 내려오실 생각이 없으시잖아요.”
7년 만에 만난 그는 변한 것이 거의 없었다.
오히려 야성적인 분위기가 더욱 강해져서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강인한 아우라가 흘렀다.
“실없기는.”
그가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부끄러워하시기는. 칭찬에 면역이 없는 것까지도 똑같았다.
“흠흠.”
그때 옆에 앉아 있던 블레이크가 헛기침을 했다.
“식사가 늦네.”
그는 다소 불퉁한 투로 말했다. 갑자기 왜 그러지? 배가 많이 고팠나?
갑자기 딱딱하게 표정이 굳은 블레이크를 바라보는데, 문이 열리며 시종들이 음식을 가져왔다.
식탁 위에 올라온 한식을 보는 순간 입가에 미소가 저절로 나왔다.
이건 내가 자주 만들고, 또 좋아했던 요리들이었다. 아버님이 나를 위해 특별히 준비하셨구나.
“아버님, 감사해요.”
“더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뭐든지 말하거라.”
“아니에요. 이것만 먹어도 배가 터지겠는걸요. 그런데 블레이크는 먹을 수 있겠어요? 많이 매울 텐데.”
철저하게 내 취향에 맞췄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매운 요리들이 많았다. 블레이크가 먹기에는 아무래도 고역일 거다.
“부인.”
그가 낮게 말하더니, 자신의 앞에 있는 고추장찌개를 호로록 마셨다.
“블레이크!”
나는 화들짝 놀라서 소리쳤다. 그 매운 걸 먹으면 어떻게 해!
당장 물잔을 건네주려고 하는데, 그가 가볍게 웃었다.
“이 정도는 얼마든지 마실 수 있어.”
“정말로 괜찮아요?”
“나를 뭐로 보는 거야. 어린애가 아니라고.”
나는 블레이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매운데 억지로 꾹 참거나 허세를 부리는 거로는 보이지 않았다.
우리 블레이크, 이제 정말로 다 컸구나.
“뭘 그렇게 뿌듯해해. 이 정도는 당연한 거라고.”
그의 미간이 좁혀졌다. 여전히 어린애 취급 받는 걸 싫어하는구나.
“옛날에는 고춧가루가 조금만 묻어도 매워서 난리가 났잖아요.”
“내가 언제.”
“기억 안 나요?”
“안 나.”
블레이크가 시치미를 뗐다. 기억이 나는 게 확실한데 모르는 체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오랜만에 우리 신랑 좀 놀려볼까?’
입꼬리를 씨익 올리는데, 그가 나의 손을 꼭 잡았다.
“앤시아가 해준 건 다 잘 먹었는걸. 나 아주 착한 남편이잖아.”
그가 새초롬하게 말하며 커다란 눈을 깜박였다. 7년 만에 보는 블레이크의 격한 애교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역시 우리 토깽이는 귀엽구나. 옛날이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이대로 블레이크를 꼭 끌어안고, 북슬북슬한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싶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반대쪽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흠흠.”
나는 깜짝 놀라서 텐스테온을 바라보았다.
“배고플 텐데, 어서 들자.”
“네, 아버님.”
신랑님의 애교에 홀려서 아버님이 옆에 있다는 걸 그만 깜박 잊고 말았다.
나는 얼른 스푼을 들었다. 음식을 하나하나 맛볼 때마다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먹는 순간 테리의 솜씨라는 것이 느껴졌다.
환궁하고 그의 요리를 자주 먹었지만, 한식은 또 색달랐다. 내가 떠난 뒤에는 한식을 만들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실력이 전혀 녹슬지 않았다.
하지만 미소가 나오는 건, 음식의 맛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 옆자리에 블레이크가 있고, 앞에는 아버님이 있다. 이렇게 우리 세 사람이 함께 식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블레이크의 저주를 풀기 위해 아모리아궁을 떠날 때는 정말로 금방 돌아올 줄 알았다.
설마 이렇게 오래 걸릴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버님, 너무 짜게 드시지 마세요. 건강에 안 좋아요.”
“알았다.”
예전 같았으면 잔소리라느니, 실없다느니, 하며 가볍게 넘겼을 텐데, 이제는 내가 말을 하자마자 얼른 간이 약한 다른 요리를 집으셨다.
“블레이크도 너무 매운 것만 먹지 말아요. 속 쓰려요.”
“응.”
블레이크도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을 따랐다. 그리고 짧은 정적이 찾아왔다.
‘예전으로 돌아갔네….’
내가 말을 하지 않으니, 식당 안에 적막이 찾아왔다. 두 사람은 식사하는 내내 거의 말을 섞지 않았다.
텐스테온은 블레이크를 쳐다보았지만 주저하며 말을 걸지 못했고, 블레이크는 오직 나만을 바라보았다.
텐스테온이 검술을 가르쳐주며 부쩍 가까워졌던 부자 관계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 버렸구나….
전부 내 책임 같아서 마음이 무거워졌다.
“부인, 왜 그래?”
“앤시아, 어찌 그러느냐?”
씁쓸한 마음이 표정으로 드러났는지, 블레이크와 텐스테온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저 때문에 두 분의 사이가 서먹해진 거 같아서요….”
“아, 아니야! 그렇지 않아!”
“그래,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니다.”
두 사람은 황급히 부정했다.
“정말요?”
“그럼. 폐, 폐하. 이, 이, 것 좀 드셔 보세요.”
블레이크가 새우 요리를 권하자, 텐스테온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아, 아주 맛있구나.”
그저 음식을 권하고 고맙다고 답하는 짧은 순간에도 어색한 분위기는 가시지 않았다.
내가 신경을 쓸까 봐 걱정돼서 친한 척 연기를 하는 게 뻔히 보였다.
그래도 아직 서먹하고 어색할 뿐, 싫어하거나 앙금이 남아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조금만 노력하면 금방 좋아질 거다.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애틋한지만 깨닫는다면 둘도 없는 부자가 되겠지.
“부인도 어서 먹어.”
“앤시아, 너도 많이 먹거라.”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말했다.
은근히 비슷한 점도 많고 마음도 통할 텐데, 본인들만 모르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하지만 오늘 당장 부자 관계를 회복시킬 수도 없고, 억지로 요구한들 어색한 연기만 이어갈 뿐이겠지.
앤시아, 마음의 여유를 갖자.
앞으로는 평생 함께할 거다. 나도 블레이크도 떠나지 않는다.
시간은 많다. 모두 함께 천천히 걸어가면 된다.
“네. 알겠어요.”
대부분 한식이었지만, 스테이크나 랍스터 같은 요리도 있었다.
원래 준비했던 요리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음식은 남겨 놓고, 급하게 한식을 추가한 듯했다.
나는 스테이크를 먹으려고 했다. 하지만 제대로 썰리지 않았다.
스테이크의 문제가 아니었다.
세르의 몸을 차지했을 때, 손이 떨리고 손가락 마디마디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손에 힘을 강하게 주고는 했다.
원래 몸으로 돌아온 지금도 그 습관이 남아 있어서, 나이프를 사용하는 게 어려웠다.
“앤시아, 자.”
블레이크가 내 스테이크와 자신의 것을 바꾸었다. 스테이크는 이미 먹기 좋게 썰려 있었다.
나를 위해서 미리 썰어둔 거구나. 그의 음식을 챙기는 건 언제나 내 몫이었는데….
“고마워요.”
아련한 추억에 젖으며 블레이크를 바라보는데, 텐스테온의 음성이 들렸다.
“앤시아.”
텐스테온이 새우 요리를 먹기 좋게 손질해서 나의 접시에 올려주었다.
“고맙습니다.”
스테이크와 새우를 다 먹기도 전에, 또 다른 음식들이 접시 위에 올라왔다.
“이거 맛있어.”
“이것도 들어보거라.”
“너무 많아요.”
끊임없이 쌓이는 음식을 보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입을 열었다.
“부인, 어디 아파? 이것도 못 먹으면 어떻게 해.”
“당장 궁의를 부르겠다!”
왜 이럴 때만 마음이 맞는 건데요!
“아니에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냥 배부른 것뿐이라고요!”
나는 당황하며 소리쳤다. 그리고 당장 궁의와 신관을 모두 소집할 기세인 두 사람을 한참 동안 말려야 했다.
***
식사를 마친 나와 블레이크는 마차를 타고 포렌스궁으로 돌아갔다.
블레이크는 마차에서 내릴 준비를 하는 나를 에스코트했다.
마차에서 내리자 입구까지 깔려 있는 붉은 카펫이 보였다. 그리고 기사들이 양쪽으로 도열해 있었다.
내가 로즈였으며, 이제 앤시아로 완전히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제5 기사단이 준비한 모양이다.
“제국의 축복이신 비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기사들이 절도 있게 인사를 올렸고, 뒤에 서 있던 궁인들도 일제히 예를 갖췄다.
우리는 손을 잡고 카펫 위를 걸었다. 문 앞에는 에드온과 한스, 테리, 그리고 멜리사가 서 있었다.
이미 매일 얼굴을 마주쳤으니 새로울 건 없었다. 다만 이번에는 로즈가 아닌 앤시아로서 그들과 재회하는 거다.
“에드온 경, 환영식을 열어줘서 고마워요.”
“말씀을 낮추십시오. 비 전하.”
에드온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하지만 계속 로즈로 지냈기 때문인지 말을 낮추는 것이 오히려 더 어색했다.
내가 망설이자, 한스가 거들었다.
“그렇습니다. 말을 편히 하십시오.”
“알았어…. 한스.”
나는 경어가 나오려는 걸 애써 억눌렀다. 그리고 옆에서 펑펑 눈물을 쏟는 멜리사를 바라보았다.
“멜리사, 좋은 날인데 왜 이렇게 울어.”
“저는 비 전하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비 전하를 뵐 낯이 없습니다.”
“내가 말을 안 했으니 모르는 게 당연한 거잖아.”
“그래도 면목이 없습니다.”
“그런 말 하지 마. 말하지 못한 내가 미안해지잖아.”
나는 멜리사와 한스의 손을 꼭 잡으며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멜리사, 한스, 너무 늦었지만 결혼 축하해.”
나는 여기 와서부터 꼭 하고 싶던 말을 전했다. 그러자 멜리사는 더욱 오열했다.
나는 그런 그녀를 안고, 한참이나 등을 토닥여 주었다.
***
블레이크와 나는 황태자비의 침실로 들어갔다. 그동안 포렌스궁에서 지냈지만, 이곳을 찾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방은 내가 7년 전에 꾸몄던 그대로였다.
“어때?”
“귀엽지만 조금 부끄러워요.”
동화책에서나 나올 법한 공주님의 침실처럼 무척 아기자기하고 귀여웠다.
당시 어린 척을 하려고 무던히도 노력했었구나, 싶어서 새삼스럽게 창피했다.
‘내가 이런 걸 골랐었구나….’
그러고 보니 기억이 난다.
나는 사람들이 오가는 응접실을 먼저 꾸몄었다. 그러자 내 취향이 어린아이답지 않게 성숙하고 세련됐다며 멜리사와 가구 상인이 깜짝 놀랐었다.
그리고 그 말에 되레 찔린 나는 내 방을 한껏 귀엽게 꾸며버리고 말았다.
침실 안을 채운 가구도 가구지만, ‘사실 내 취향은 이거거든! 나 진짜 어리거든!’ 하고 어필하는 듯한 분위기가 물씬 풍겨서 더욱 부끄러웠다.
“블레이크의 방도 그때 그대로예요?”
“응. 앤시아가 골라준 그대로야. 가볼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바로 옆에 있는 황태자의 침실로 갔다.
다행히 이곳은 괜찮았다. 그래도 블레이크의 방을 꾸밀 때는 이성을 놓지 않았었구나.
과거의 나, 잘했다.
스스로를 칭찬하려던 찰나, 침대 옆에 생뚱맞게 놓여 있는 작은 토끼 인형이 눈에 들어왔다.
아, 맞다. 저것도 골랐었지. 블레이크랑 너무 똑같이 생겨서 충동구매를 했었다.
그때 블레이크가 안고 있었다면 무척 귀여웠겠지만, 위엄 있게 성장한 황태자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저 인형을 아직도 가지고 있었던 거예요?”
“응.”
“저건 버리지 그랬어요.”
“부인이 골라준 건데 어떻게 버려.”
“그래도요….”
나는 토끼 인형의 귀를 만지작거렸다. 소중하게 관리된 듯 여전히 털이 뽀송뽀송했다. 그런데 블레이크의 엷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닮았다.”
“네?”
“인형이랑 앤시아랑 닮았어.”
“내가 아니라 블레이크랑 닮은 거죠.”
나는 토끼 인형을 그의 품에 안겼다. 그러자 블레이크의 표정이 굳었다.
“안 닮았어.”
“왜요? 똑같은데.”
다 큰 성인 남자인데도 인형을 안고 있는 모습이 놀랍도록 위화감이 없었다.
저 정도라면 방에 인형을 놔둬도 되겠어.
흐뭇한 미소를 짓는데, 블레이크의 표정은 더욱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고 보니 식사를 할 때도 그랬지. 갑자기 얼굴이 경직됐었다.
“블레이크 왜 그래요?”
“폐하가 그렇게 잘생겼어?”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아버님은 제국 최고의 미남이죠. 7년이 지났는데도 하나도 변한 게 없으셔서 깜짝 놀랐어요.”
오히려 텐스테온은 그때보다도 더 멋있어졌다. 외모도 외모지만 무서울 정도로 동안이었다.
“나는?”
“블레이크는 제국 최고의 미인이죠.”
텐스테온이 천하를 호령하는 야수라면 블레이크는 요요하게 빛나는 보석처럼 신비롭고 아름다운 분위기가 흘렀다.
원작에서 그렇게나 블레이크 외모를 칭찬한 이유를 알 것 같다.
“…….”
나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그의 입술이 조금 튀어나왔다. 살짝 토라진 모습마저 한 폭의 그림처럼 예뻤다.
“저는 미인이 좋아요.”
굳어 있던 표정이 풀리며 그의 눈매가 요염하게 휘었다.
“내가 좋아?”
“그걸 말이라고 해요?”
한순간도 좋아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천 년 전 락슐은 텐스테온처럼 맹수의 느낌이 강한 남자였다. 지금의 블레이크는 돌아가신 선황후를 닮아서 선이 고왔다.
하지만 외모나 분위기는 상관없었다.
오직 그가 블레이크라는 것만이 중요했다.
“사랑해. 앤시아.”
“저도 사랑해요.”
계속 이 말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평생 후회하지 않을 만큼, 질리도록 말하고 싶다.
저주의 문장이 완전히 사라진 그의 왼쪽 뺨을 어루만지자, 그가 엷게 웃으며 나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오늘은 누구 방에서 잘까?”
“네?”
누구 방에서 자다니? 블레이크는 여기서 자고, 나는 황태자비 방에서 자면 된다. 달리 정할 게 있나?
“각자 자기 방에서 자면 되죠.”
내가 명료하게 답하자, 그가 한껏 서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부부는 함께 자는 거라고 했잖아.”
“아, 아니, 그때는… ”
그때는 블레이크의 저주를 풀기 위해서 그랬던 거다.
게다가 우리 둘 다 어린아이였고, 블레이크는 인형같이 작은 토끼였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고개를 꺾어서 바라봐야 할 정도로 키가 컸다. 게다가 다소 헐렁한 셔츠를 입었음에도 단단하게 자리 잡은 잔근육들이 느껴질 정도로 다부진 몸이었다.
물론 우락부락한 황궁 기사들과 함께 있으면 비교적 호리호리한 체형으로 보이긴 했지만, 그 자체로만 보면 180이 넘는 훤칠한 성인 남자였다.
저주가 예정보다 일찍 풀린 데다가 어려서부터 검술 연습을 열심히 해서 그런지, 원작의 묘사보다 키도 훨씬 크고 몸매도 다부졌다.
“지금은…? 내가 싫어졌어?”
그가 처량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잔뜩 풀이 죽은 모습을 보니 가슴이 아렸다.
블레이크는 마음이 여렸다. 게다가 상처받아도 티를 내지 않고 속으로만 담아둘 때가 많았기 때문에 그의 마음이 더 신경 쓰였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럼 나랑 함께 있을 거지? 떠나지 않을 거지?”
아름다운 붉은 눈동자에 물기가 차올랐다.
“당연하죠! 절대로 안 떠나요.”
“정말이지?”
“네. 이제 계속 블레이크랑 함께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울지 말아요.”
나는 그를 꼭 안으며 달래주었다.
***
눈을 뜨자 아름다운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혹시라도 상처를 받았을 그를 위로해주고 이젠 떠나지 않을 거라며 안심시켜 주고 싶었다.
그래서 달래주다 보니 어느새 그와 같은 침대에 누워서 잠이 들어버리고 말았다.
물론 잔다고 해도 특별할 건 없었지만 말이다. 그저 어렸을 때처럼 같은 침대에서 손을 꼭 잡고 있었을 뿐이다.
새근새근 잠이 든 블레이크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눈을 감으니 기다란 속눈썹이 더욱 도드라졌다.
이렇게 보면 어릴 때랑 똑같네.
귀엽고 무해해서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평화가 찾아오는 것 같았다.
뭐, 이런 것도 나쁘진 않네.
잠에서 깨자마자 블레이크의 얼굴을 볼 수 있다니. 정말로 돌아온 것이 실감 났다.
사라락 흘러내린 블레이크의 머리카락을 다시 넘겨주려고 하는데, 손이 무거웠다.
확인해 보니 그가 나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정말 옛날이랑 똑같네.
입가에 미소가 걸리는데, 눈꺼풀이 떨리며 블레이크가 눈을 떴다.
“…….”
그 순간 순백의 보석처럼 맑았던 분위기가 일순 묘하게 변했다.
나는 7년 전과 달리 요염한 색을 풍기는 남자를 바라보다 시선을 피했다.
“앤시아, 왜 그래?”
“너, 너무 늦었어요! 어서 일어나요!”
“싫은데.”
그가 앙탈을 부리며, 나의 손에 자신의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일어나자마자 부인 얼굴을 보니까 너무 좋다.”
저렇게 대놓고 애교를 떠니 어릴 때와는 다른 의미로 심장이 위험했다.
“어, 어서 일어나요!”
나는 붉어지는 얼굴을 감추기 위해 얼른 침대 밑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의 이불도 확 잡아 내렸다.
“너무해.”
“뭐가 너무해요. 벌써 10시라고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너무 늦어서 서둘러 일어나야 했다.
“아침부터 벗기다니….”
이 남자가 진짜! 누가 들으면 큰일 날 말을 하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더니 저 애매하게 단어를 생략하는 버릇은 커서도 여전했다.
“이불을 벗긴다고 말해야죠!”
“벗. 겼. 어….”
그는 이불 끝자락을 잡은 채 나를 새초롬하게 올려 보았다. 하지만 천진한 눈빛과 달리 목소리는 나른하게 깔렸다.
나를 놀리는 건지 정말 부끄러워서 저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지금 어물쩍 넘어간다면, 저 요사스러워진 토끼한테 계속해서 휘둘릴 거 같았다.
나는 이불자락을 마저 빼앗았다.
“어서 일어나라니까요!”
***
“정말로 로즈 님이세요?”
첼시가 나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렇다니까요.”
나는 거듭 묻는 첼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녀는 당황했다.
“비 전하. 말씀을 편하게 하셔야죠.”
“아, 응….”
로즈로 지냈던 시간 때문인지 말을 놓는 것이 영 어색했다.
“솔직하게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 첼시.”
“아니에요. 사정이 있으셨겠죠.”
그녀는 특유의 시원시원한 어조로 답한 뒤,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역시 그랬군요.”
“응?”
“저는 황태자 전하께서 절대로 비 전하가 아닌 다른 여인에게 관심을 둘 리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로즈 님을 대하시는 모습을 보고 제 생각이 틀린 줄 알았죠. 하지만 역시 전하께는 비 전하뿐이었네요.”
그녀는 치맛자락을 잡으며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로즈 님, 원래대로 돌아오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제국의 축복이신 비 전하를 모시게 돼서 영광입니다.”
첼시는 황태자비의 시녀로서 다시 인사를 건넸다. 나는 그런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첼시. 나야말로 그동안 잘해줘서 정말 고마워.”
“고맙다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시녀로서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걸요.”
“내가 만든 요리를 전하께 드린 것도 첼시라고 들었어.”
“저는 그저 비 전하께서 정성스럽게 만드신 요리가 버려지는 게 싫었던 것뿐입니다. 게다가 요리가 아니어도 전하께서는 비 전하를 알아보셨을 거예요. 아니, 이미 짐작하고 계셨죠.”
“그래도 정말 고마워.”
첼시는 신분이나 외모로 차별하지 않고 로즈였던 나를 도와주었다.
이 은혜는 평생 잊지 못할 거다.
***
첼시를 제외한 다른 시녀들은 일을 그만두었다.
시녀뿐만이 아니다. 기사나 궁인 중에서 로즈의 외모를 트집 잡고 조롱했던 사람들은 포렌스궁을 떠나게 되었다.
자발적인 것은 아니었다.
내가 앤시아로 돌아오기 전, 블레이크는 나에게 함부로 구는 이들을 모두 해고하라고 명령했었다고 한다.
내가 요리를 했었던 그날, 멜리사의 출근이 늦었던 것도 해고할 사람들의 명단을 추리느라 바빴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그동안은 사람들이 나를 멸시해도 꾹 참았다. 어차피 곧 떠날 사람인데 괜히 나 때문에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와 생각해보면 블레이크를 위해서라도 내가 먼저 말을 해야 했다.
블레이크는 저주의 문장으로 뒤덮인 외모 때문에 어린 시절 많은 상처를 받았다.
오직 외모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인간들이 주변에 있다면, 그를 위해서도 좋지 않았다.
그런데 그냥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니.
곧 떠날 거라는 생각 때문에 깊게 생각해보지 못했었던 것 같다.
해고당한 사람들은 황궁을 떠나기 전에 나를 찾아와서 그동안의 일들을 사과했다.
“비 전하인 줄 알았으면 절대로 그러지 않았을 거예요. 정말 죄송합니다.”
“흉터를 보고 놀랐던 거지, 진심은 아니었어요.”
“제가 처음에 그만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계속 사과드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과가 진정성 있게 들리지는 않았다.
만약 정말 실수였고 나에게 미안했다면 그 전에 사과했겠지.
황태자비라는 걸 안 이후에야 부랴부랴 찾아와서 하는 사과가 진심이라 생각할 수는 없었다.
내가 진짜 황태자비였으니 행여 나중에 불이익을 당할까 봐 저러는 거겠지.
해고하는 것 말고 달리 벌을 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모든 걸 없었던 일로 한 채 하하 호호 웃으며 지낼 마음도 들지 않았다.
물론 그중에서도 진짜 진심을 담아 말하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같은 곳에서 자문이라도 받은 것처럼 획일적인 사과 멘트를 늘어놓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샬롯은 나를 찾아와서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쏟아냈다.
“비 전하, 정말 정말 죄송해요. 비 전하께서 그런 모습으로 변하셨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비 전하를 알아보지 못한 제가 정말 너무 싫어요.”
그래서 그런지 사과의 내용이 좀 묘했다.
그녀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 것을 자책할 뿐, 로즈에게 함부로 굴었던 것이 잘못이었다는 건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비 전하, 저는 비 전하를 정말 정말 좋아해요. 비 전하를 모시게 해주세요. 첼시보다도 제가 훨씬 비 전하를 잘 모실 수 있어요.”
나를 좋아한다는 그녀의 말에 거짓은 없었다. 세르가 나인 척하며 돌아왔을 때도 순수하게 기뻐했었으니까.
하지만 샬롯이 좋아하는 건 앤시아란 사람이 아니라, 예쁜 외모라는 걸 알기 때문에 곁에 둘 수 없었다.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이유로 영애를 해고한 것이 아닙니다.”
샬롯은 이제 포렌스궁의 시녀가 아니라 귀족 영애였다.
나는 그 선을 명확히 그으려고 일부러 그녀에게 공대했다.
“그럼 왜죠? 제가 못생겨서 그런가요?”
“네?”
샬롯은 내가 생각지도 못한 반응을 보였다.
나는 황당해했지만 그녀는 꿋꿋이 말을 이었다.
“어렸을 때 모두가 저를 놀렸는데, 비 전하만은 공평하게 대해주셨어요. 저, 비 전하를 닮으려고 노력했어요! 그런데도 부족한가요? 그럼 더 노력할게요! 비 전하의 옆에 있어도 부끄럽지 않을 사람이 될게요!”
나는 과거 샬롯의 모습을 떠올렸다. 젖살이 있어서 무척 귀여운 외모였다. 결코 못생기지 않았다.
어린 시절, 주변 사람들이 던진 말 때문에 받은 상처가 아직까지 남아 있는 건가.
“그런 게 아니에요. 샬롯 영애는 옛날도 지금도 아주 예뻐요.”
“그렇게 말해주시는 분은 오직 비 전하뿐이에요.”
나는 훌쩍거리는 그녀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절대로 그러지 않아요. 다른 사람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할 거예요. 만약 영애에게 악담을 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이상한 거예요. 귀담아들을 필요 없어요.”
나는 울먹이는 그녀를 다독였다.
“세상에는 보여지는 것보다 중요한 게 많아요. 영애가 그걸 꼭 알았으면 좋겠어요.”
“제가 부족한 게 있으면 비 전하께서 가르쳐 주시면 되잖아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영애는 시녀 생활을 오래 했죠? 이제는 황궁 밖으로 나가서 넓은 세상을 바라봐요. 그럼 금방 깨달을 거예요. 영애가 해고당한 이유도 알 수 있을 거고요.”
그녀는 외모에 집착하고, 외모만으로 사람을 판단했다.
하지만 아직 나이가 어렸다. 게다가 자신이 놀림을 당하면서 외모에 집착하게 된 거지, 천성이 악한 사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녀에게 다시 한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다.
“만약 이유를 깨달은 뒤에도 내 옆에 있고 싶은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다시 나의 시녀로 부르도록 할게요.”
“정말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반드시 비 전하께 어울리는 사람이 될게요! 열심히 노력해서, 멋진 사람이 돼서 돌아올게요!”
그녀는 거듭 감사 인사를 한 뒤, 포렌스궁을 떠났다.
***
나는 황태자비로서 업무를 시작하려 했지만, 텐스테온과 블레이크가 깜짝 놀라며 아무것도 하지 말고 푹 쉬라고 했다.
“앤시아, 당분간은 편히 쉴 생각만 하거라.”
“맞아. 힘든 일은 안 돼. 휴식이 필요해.”
그들은 식사하는 내내 어색했지만, 나와 관련된 화제가 나오면 놀라울 정도로 의견이 잘 맞았다.
내가 나이프만 잡아도 위험할까 봐 조마조마해하며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고, 입이 매워서 물을 마시기만 해도 어디 아픈 거냐며 당장 궁의를 부르려고 했다.
어렸을 때도 겪어보지 못했던 과보호를 받으니 조금 민망했지만, 그들의 마음도 이해가 갔다.
나도 블레이크가 사라진 지 7년 만에 돌아온다면, 기쁘면서도 걱정돼서 어쩔 줄 몰랐을 거다.
무조건 푹 쉬라는 말만 반복했겠지.
그 마음을 알기 때문에 나는 결국 그러겠다고 대답하고 말았다.
게다가 나는 오랜 시간 동안 긴장 속에 있었다.
솔직히 지친 건 사실이었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조금은 어리광을 피워보기로 했다.
내가 떠나고 많은 시간이 흘렀다.
대한민국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빠르게 변하는 사회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바뀐 것이 많을 거다.
광장에 나갔을 때나 시녀들의 복식만 봐도 드레스의 유행이 변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블레이크의 저주가 풀리고 카실 공작 가문이 몰락하면서 사교계의 구도도 많이 변했겠지.
당분간은 공부하며 편하게 지낼 생각이었다. 게다가 확인해 보고 싶은 것도 있었다.
나는 아모리아궁으로 향했다.
첼시와 에드온이 따라오겠다고 했지만 극구 사양했다.
이건 혼자서 확인해 보고 싶었다.
아모리아궁에 도착한 나는 유리 온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이제 막 심은 듯한 작은 꽃나무 앞에 섰다.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자 몸 안에 흐르는 빛의 마나가 느껴졌다.
라온텔이었던 시절의 기억을 되살리며 마법 주문을 영창하자 작은 나무가 자라더니 금세 꽃봉오리가 맺혔다.
‘성공이다.’
몸만 원래대로 돌아온 것이 아니다.
라온텔이었던 시절처럼 빛의 마나 역시 충만했다. 아니, 그때보다도 훨씬 마나가 풍부했다.
게다가 빛의 마법에 관한 지식도 그대로였다.
물론 기억하는 것과 실제 구현하는 것은 차이가 있었다. 아직은 마나를 운용하고 마법을 사용하는 것이 다소 어색했지만, 금방 익숙해질 거다.
세르는 나에게 사과를 한 뒤, 축복과 힘을 돌려주었다.
그렇다면 지금 그녀는 어디에 있는 걸까?
꿈에서 봤던 세르는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화상 흉터나 검은 반점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상처받은 육신을 버리고 다시 빛의 여신으로 되돌아간 걸까?
그랬으면 좋겠다. 그녀가 다시 평온을 되찾길 바란다.
그리고 언젠가는 꼭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
***
빛의 마법을 몇 개 더 확인한 뒤 황태자 궁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아모리아궁의 입구 앞에 서 있는 카밀라의 모습이 보였다.
해고된 궁인들이 앞다투어 사과하는 와중에도 그녀는 보이지 않았었다.
그래서 이미 떠났을 거라 짐작했는데, 아직 남아 있었구나.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카밀라 역시 나를 또렷이 응시했다.
시녀로서 황태자비를 바라보는 표정은 결코 아니었다.
그렇다고 시녀를 그만두었으니 이제는 후작 영애라며 자신의 신분을 내세우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의 눈에는 연적을 향한 날 선 질투가 담겨 있었다.
“…제국의 축복이신 비 전하를 뵈옵니다.”
그녀가 한 박자 느리게 인사를 올렸다.
“벤트릭 영애, 지금 떠나려는 건가요?”
나는 그녀의 손에 들린 커다란 가죽 가방을 보며 물었다.
“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아모리아궁을 둘러볼 수 있을까요?”
“그건 어렵겠네요. 여긴 저만의 공간이 아니라서요.”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카밀라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었다.
“그럼 잠시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요?”
“그러죠.”
우리는 아모리아궁에서 가까운 정원으로 갔다. 가제보 안에 놓인 의자에 앉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저에게 아모리아궁은 꿈이었어요. 언젠가는 꼭 저곳에 발을 딛고 싶었죠.”
그녀는 아모리아궁의 전경을 미련스럽게 바라보았다.
***
“하지만 결국 영원한 꿈으로 남았네요.”
카밀라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녀는 후작가의 서녀로 온갖 괄시를 받으며 자랐다.
그러던 어느 날, 황태자의 저주가 풀리고 황태자비마저 실종되자, 벤트릭 후작은 황실과 혼맥을 맺기 위해 카밀라를 자신의 딸로 인정했다.
그리고 황태자비에 걸맞은 완벽한 예법 교육을 시킨 뒤, 황태자 궁의 시녀로 보냈다.
‘지금껏 내팽개쳐놓고 이제 와서 가문을 위해 결혼하라고?’
카밀라는 정략결혼의 도구로 이용당하는 이 상황이 끔찍이도 싫었다.
하지만 포렌스궁에서 블레이크 황태자를 만난 순간 생각이 바뀌었다.
세간에서는 황태자를 두고 많은 이들이 입방아를 찧었다.
카밀라의 귀에도 자연스레 여러 이야기가 들어왔다. 장차 자신의 남편이 될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신경 쓰였다.
하지만 실제로 만난 황태자는 소문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괴물도 아니고, 여신의 선택을 받은 빛의 사자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상처받은 소년일 뿐이었다. 자신과 같았다.
주변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후작 영애가 된 카밀라를 멋대로 떠받들고, 한편으론 조롱했다.
모두가 카밀라를 부러워했지만, 정작 그녀는 홀로 고독함에 떨었다.
‘저분도 분명 그렇겠지. 분명 나처럼 외로울 거야. 나랑 똑같아.’
카밀라는 그렇게 생각했다.
블레이크는 모시기 쉬운 상전이었다.
그는 영혼을 잃은 사람처럼 고요했지만, 가끔은 활화산 같은 분노를 터트렸다.
“누구야! 누가 내 침실을 멋대로 헤집었지?”
황태자의 시녀로 뽑힌 이들 중에는 카밀라와 같은 목적을 지닌 이들이 많았다.
그녀들은 블레이크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황태자의 방에 종종 선물을 가져다 놓고는 했다.
그중에는 포렌스궁의 물건을 멋대로 없애고 자신의 선물로 바꿔치기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단순히 자신의 선물이 돋보이길 바란 건 아니었다.
블레이크는 황태자비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를 좋아하는 시녀들은 죽은 황태자비를 질투했고, 앤시아의 흔적을 지우려고 일부러 그녀의 물건들을 치워버린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아무리 질투가 난다고 하더라도 감히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태어나서 지금껏 단 한 번의 곡절도 없이 귀하게 자란 귀족 영애들은 곧잘 저런 실수를 저질렀다.
‘고작 낡은 물건 하나 치운다고 무슨 일이 생기겠어? 게다가 내 선물이 훨씬 훌륭하고, 황태자 전하한테도 어울리는걸!’
이런 안이한 생각의 발로였다.
그럴 때마다 블레이크는 불같이 화를 냈고, 시녀들은 즉시 해고되었다. 한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한 화는 그녀들의 가문에까지 미쳤다.
수석 시녀인 멜리사는 시녀들을 철저하게 단속했다. 하지만 사고는 끊이지 않았다.
어쩜 저렇게 하나같이 멍청한지. 너무 덜떨어져서 신기할 정도였다.
시녀들은 자주 그만두었다.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지만,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지는 경우가 더 많았다.
블레이크는 시녀들을 상대해주기는커녕 이름조차 외우지 않았다. 그와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길 기대하며 시녀가 되었던 이들은 곧 그만두었다.
하지만 카밀라만은 버텼다.
계속 그분의 곁을 지키다 보면 언젠가는 알아주실 거라 여겼다.
어느덧 카밀라는 멜리사에 이어 두 번째로 황태자를 오래 모신 시녀가 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서출이라며 은근히 무시당하던 카밀라였지만, 점차 시녀 사이에서 영향력이 생겼다.
하지만 황태자는 여전히 그녀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거였다.
황태자는 일 년 중 대부분의 시간을 혼돈의 계곡에서 보냈고, 황궁에 돌아와서도 아모리아궁에 머물 때가 많았다.
그러니 황태자궁의 시녀라고 해도 블레이크를 그리 자주 만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카밀라는 언젠가 자신이 그의 옆자리에 설 거라고 생각했다.
만약 내가 블레이크라도 그랬을 테니까.
그분이라면 자신의 곁을 묵묵히 지켜주던 여인의 존재를 반드시 알아차릴 거다.
자신과 비슷한 아픔이 있다는 걸 알면 굳게 걸어 잠갔던 마음의 문도 열어주겠지.
하지만 카밀라가 5년 동안 꾸었던 꿈은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그녀는 결국 시녀 자리에서 쫓겨났다. 황태자는 마지막까지 카밀라의 이름을 외우지 못했다.
카밀라는 자신의 앞에 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로즈, 아니 앤시아 라 엘르 제라실리온.
그녀는 이 제국의 황태자비이자, 블레이크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여인이었다.
“저는 황태자 전하를 연모했습니다.”
카밀라는 5년 동안 가슴 속에 담아두었던 사랑을 고백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마음을 눈치챈 지 오래였지만, 카밀라가 자신의 입으로 말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 세상 누구보다도 사랑했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블레이크를 좋아한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건 가짜 사랑이었다.
블레이크의 아름다운 외모, 황태자라는 신분, 뛰어난 검술 실력, 여신의 힘을 받았다는 상징성에 이끌린 것일 뿐, 사람 자체에 매료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은 달랐다.
“신분이나 능력에 이끌린 것이 아니라, 블레이크라는 사람을 사랑했습니다. 그분이 계속 저주에 걸렸다고 해도 이 마음은 변하지 않았을 거예요.”
“…….”
앤시아는 절절하게 외치는 카밀라를 메마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야수와 영애님’을 읽었다.
원작, 아니 이미 한 번 지나갔던 미래를 그린 예언서라고도 할 수 있는 그 책을 통해서, 앤시아는 다른 길을 보았다.
카밀라는 원작에서도 절절한 사랑을 고백했었다.
블레이크가 아니라 리차드를 향해서 말이다.
그녀는 리차드를 사랑했고, 그의 정적인 블레이크를 끔찍이도 싫어하며 폭언을 퍼부었었다.
“도대체 저런 괴물을 왜 풀어주는 거죠? 여신이 직접 저주를 내릴 만큼 타락한 영혼이잖아요! 이제 와서 저주가 풀린 게 무슨 상관이죠? 과거가 바뀌기라도 하나요? 당장 다시 남쪽 섬에 유폐를 시켜야 해요!”
물론 그건 벌어지지 않은 일이었다. 지금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은 리차드가 아니라 블레이크니까.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카밀라의 말을 순순히 받아들이긴 어려웠다.
“저는 로즈, 당신을 무척 미워했습니다. 왜인 줄 아세요?”
카밀라는 황태자비가 아닌 로즈에게 말을 걸었다.
무례한 어투였지만 앤시아는 지적하지 않았다.
“모르겠네요.”
“당신이 왔던 날, 전하께서 그러시더군요. ‘첼시, 로즈를 잘 부탁해.’라고요. 그분은 5년 동안 제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셨어요. 그런데 당신을 모신다는 이유만으로 첼시의 이름을 외운 거예요.”
혼돈의 계곡에서 돌아온 황태자가 웬 추악한 여인을 데려왔다. 솔직히 불쾌했지만 어떻게든 무시하려 했다.
그저 동정심이겠지.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지만 브레이크가 첼시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카밀라는 무너져 내렸다.
“저는 전하께서 무심한 분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단지 제게 흥미가 없었던 것뿐이었어요. 제가 그때 느꼈을 비참함을 당신은 절대 알 수 없을 거예요.”
말을 하면 할수록 그동안 참아왔던 설움이 복받쳤다.
카밀라는 앤시아를 부러워했다. 하지만 미워하지는 않았다.
이미 죽은 사람이었으니까.
그녀는 다시는 황태자의 옆에 설 수 없는 과거의 사람이지만, 자신은 언젠가 황태자의 반려가 될 거라는 희망이 있었다.
가짜 앤시아가 나타났을 때도 의외로 괜찮았다. 황태자는 그녀에게 냉정했다.
막상 황태자비를 대면하니, 어린 시절부터 품었던 환상이 깨져버린 걸까? 그럼 자신에게도 기회가 올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조금 떨리기도 했다.
하지만 진짜 앤시아가 나타나고, 황태자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포렌스궁에 도착한 순간 부러움은 질투와 미움으로 변했다.
“당신은 참 운이 좋은 사람이에요. 유서 깊은 벨라시안 가문의 장녀로 태어나서 황태자비로 책봉되었죠. 전하보다 나이가 많은데도 말이죠.”
“…….”
“부럽네요. 아무런 흠결도 없는 백작가의 적녀라.”
만약 자신이 서녀가 아니었다면 분명 황태자비가 될 기회가 있었을 거다.
만약 그랬다면 지금 블레이크가 사랑하는 건 자신이었겠지.
사람들은 저주에 걸린 황태자를 보살피고 저주까지 풀어준 황태자비를 칭송했다.
하지만 카밀라는 동의할 수 없었다.
“만약 제가 축복의 소녀였다면 당연히 전하의 저주를 풀어드렸겠죠. 힘이 있는데도 전하를 외면하는 거야말로 반역 아닌가요?”
앤시아가 대단한 게 아니다. 단지 운이 좋아서 여신의 저주를 풀 수 있는 빛의 힘을 지녔을 뿐이다.
자신에게도 힘이 있었다면 똑같이 했을 거다. 아니, 그녀보다도 훨씬 더 전하를 사랑할 자신이 있었다.
“벤트릭 영애, 더 이상의 무례한 언사는 용납지 않겠습니다.”
앤시아가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카밀라의 말은 언뜻 그럴듯해 보였지만, 사실 모순투성이인 데다가 지극히 결과론적이었다.
그 당시 황태자비는 모두가 꺼리는 자리였으며, 어느 누구도 황태자의 저주가 풀릴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앤시아는 블레이크의 저주를 풀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매일 그의 상태를 살피느라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하지만 앤시아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카밀라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저는 당신보다 오랫동안 전하의 곁을 지켰어요. 하지만 당신이 오자마자 쫓겨나는 처지가 되었죠. 세상은 불공평해요. 아무리 노력하고 진심을 다해도, 타고난 운은 이길 수가 없네요.”
그녀는 앤시아의 마음과 노력을 ‘운’이라는 단어로 폄하했다.
앤시아가 한마디 하려 했지만, 그 전에 싸늘한 음성이 들렸다.
“입으로 배설을 하는군.”
카밀라는 화들짝 놀라서 몸을 돌렸다.
“전하….”
뒤에 블레이크가 서 있었다.
카밀라는 애틋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지만, 블레이크는 그녀를 그대로 지나쳐서 앤시아에게 다가갔다.
“아모리아궁에 갔다가 안 보여서 놀랐잖아.”
“잠깐 대화할 게 있어서요.”
그는 그제야 카밀라에게 시선을 던졌다.
“첼시를 제외한 시녀는 모두 해고했을 텐데, 왜 아직까지 남아 있는 거냐?”
“제가 시녀라는 걸 알고 계셨어요?”
블레이크의 눈빛은 지독히도 싸늘했지만, 카밀라는 그가 자신을 알아보았다는 것만으로도 감동했다.
그래도 자신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거다. 그동안의 시간이 헛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기대는 곧 산산이 부서졌다.
“앤시아의 요리를 버리려고 했던 시녀지.”
블레이크는 카밀라가 옆을 지켰던 5년간의 시간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로즈를 괴롭힌 여인으로 자신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었다. 카밀라는 큰 충격을 받았다.
“부인이 괜히 마음 쓰는 게 싫어서 해고로 끝내려고 했는데, 역시 없애버렸어야 했나.”
“블레이크.”
앤시아가 깜짝 놀라서 블레이크를 말렸다. 그러자 블레이크는 그녀를 향해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 분이셨구나….’
카밀라는 슬퍼졌다. 5년 동안 그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 서글픈 건지, 아니면 저 다정한 눈빛이 향하는 상대가 자신이 아니라 절망스러운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분한 감정이 치솟았다.
“저는 포렌스궁에서 전하를 가장 오랫동안 모신 시녀입니다.”
“그것이 지금 그대가 저지른 무례에 대한 답이 되나?”
“저는 전하를 사랑합니다! 그 누구보다 사랑했어요.”
블레이크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는 순간이 오면 그때 고백하려 했다.
그래서 해고 통보를 받은 순간까지도 전하지 못하고 꾹 참았던 말을 충동적으로 터트렸다.
“설령 저주가 풀리지 않았다 해도 사랑했을 거예요! 아무런 조건 없이 전하를 사랑해줄 사람은 저뿐이라고요.
“진부하군.”
블레이크는 시니컬하게 뱉었다.
“네?”
“그런 말, 백 번은 넘게 들었어.”
카밀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다른 여인들이 그런 말을 쉽게 한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저는 그 사람들과 다릅니다! 저는 진심이에요! 빛의 힘만 있었다면, 저도 전하를 지켜드릴 수 있었을 거예요! 전하를 구원하는 건 제가 됐겠죠!”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는군.”
“네?”
“네가 한 일은 처절한 노력이고, 다른 사람은 그저 운으로 보이나?”
카밀라를 바라보는 블레이크의 눈에서 냉기가 뚝뚝 떨어졌다.
“힘만 있으면 지켰다고? 그런 얄팍한 생각으로 나를 구원한다고 잘도 떠벌리는군.”
“저, 저는….”
“저주의 문장으로 뒤덮였던 나를 알지도 못하고, 그 시절을 제대로 마주할 생각도 없는 주제에.”
카밀라는 전신에 흐르는 피가 차갑게 식어 내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이 누구보다 블레이크를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블레이크는 나와 같으니까, 비슷한 아픔을 겪었으니까, 오직 자신만이 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그는 카밀라가 자신을 제대로 마주한 적조차 없다고 말했다.
“당장 꺼져. 또다시 앤시아에게 무례를 저지른다면, 그때는 용서하지 않겠다.”
블레이크는 서늘하게 경고한 뒤, 앤시아와 함께 떠났다.
홀로 남겨진 카밀라는 그대로 주저앉아서 오열했다. 그녀의 짝사랑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
블레이크와 나는 함께 포렌스궁으로 돌아갔다. 카밀라는 우리가 떠나는 그 순간까지 펑펑 눈물을 쏟았다. 하지만 안타까운 마음은 들지 않았다.
원작을 읽었을 때도 그렇고,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카밀라가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그녀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원작에서 그녀는 리차드에게 자신을 투영하며 동일시했고, 이번에는 블레이크에게 자신을 대입했다.
소설 속에서 카밀라는 리차드의 죄를 뒤집어쓰고 처형당할 위기에 처한다.
하지만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기 직전까지도 그녀는 리차드가 자신을 구하러 올 거라 기대한다.
“리차드 님은 분명 나를 구하러 와주실 거야. 만약 내가 리차드 님이라도 그럴 테니까. 자신을 진짜 사랑하는 여인을 버릴 리가 없잖아.”
그러나 그녀의 기대는 결국 처참하게 부서지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고 만다.
소설과 달리 이번에 카밀라가 선택한 남자는 블레이크였다. 그리고 그녀는 억울하게 처형당하지 않았다. 시녀직을 그만두었을 뿐이다.
물론 그녀의 진짜 마음이 어땠는지, 블레이크를 정말 사랑했는지 아니면 자신과 동일시한 것뿐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저 짐작할 뿐이다.
어쨌든 소설에 나왔던 많은 사람들이 원작과는 다른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씻어야겠다.”
생각에 빠져 있는데, 블레이크가 나의 귓불을 문지르며 속삭였다.
“뭐, 뭘 씻어요?”
나는 화들짝 놀라서 소리쳤다.
“더러운 말을 들었잖아. 귀를 씻어야겠어.”
아, 난 또 뭐라고. 괜히 놀랐네….
“괜찮아요.”
“앞으로는 그런 말 들어주지 마. 상대할 필요도 없으니까 무시해.”
“알았어요. 다음부터는 안 그럴게요.”
“후회돼. 역시 없애버렸어야 했는데.”
아름다운 목소리에 살기가 느껴졌다.
“농담이죠?”
“…당연히 농담이지.”
블레이크가 해사하게 웃었다. 대답하기 전에 잠시 침묵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예전보다 말투가 조금 험해진 거 같아요.”
“내가?”
“혹시 저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나는 언제나 순하고 예쁜 말만 하던 블레이크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런 그가 변했다면, 원인은 나에게 있을 거다. 내가 사라져서 상처를 받은 거겠지.
하지만 블레이크는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그런 말 처음 듣는데. 물론 앤시아를 찾느라 조금 예민하게 지내기는 했지만, 이상한 말은 써본 적도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는 예전처럼 말간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여자가 한 말은 신경 쓸 거 없어.”
“걱정 말아요. 듣자마자 잊어버린걸요. 건국제가 코앞이잖아요. 다른 데 신경 쓸 틈도 없어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사흘 뒤에 있을 건국제에서 나의 귀환을 공식적으로 발표할 예정이었다.
7년 만에, 그리고 성인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참석하는 파티였다.
물론 황태자비로서 건국제를 직접 지휘하는 건 아니었지만, 단순히 참석만 하는 데도 준비할 것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걱정하지 마. 그냥 파티일 뿐인걸. 축하하는 자리니까, 즐기고 오면 돼.”
그는 나의 걱정을 아는 듯 다정하게 말하며 손을 잡았다.
“그리고 부탁할 게 하나 있는데.”
“말해봐요.”
블레이크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내가 무슨 부탁을 할 줄 알고 무조건 말하래?”
“뭐든 상관없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면 들어줄게요.”
블레이크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가 나에게 해가 되는 걸 요구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도 있었다.
“그러지 마. 나는 부인이 언제나 자기 자신을 가장 우선으로 생각했으면 좋겠어.”
그의 표정이 슬퍼 보였다. 내가 자기를 위해서 희생했다며 자책하는 거겠지.
내가 아무리 괜찮다고 말한들, 지금 당장은 그 상처가 사라지지 않을 거다.
나는 위로하는 대신 밝게 웃었다.
“블레이크도 내가 부탁하면 뭐든 들어줄 거잖아요.”
“물론이지.”
“그런데 무슨 부탁인데요?”
“옷을 골라줘.”
“옷이요?”
파티에 입을 예복을 고르려는 걸까?
그가 이끄는 대로 3층의 홀에 들어가자, 아름다운 드레스들이 보였다.
“드레스를 골라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의상실에 연락할게.”
“아니, 아니에요. 전부 마음에 들어요.”
사실 가장 고민되었던 것이 바로 드레스였다.
건국 천 년을 축하하는 성대한 파티였다. 동시에 나의 귀환을 알리는 자리이기도 했다.
하지만 새로운 드레스를 제작하기에는 물리적인 시간이 부족했다.
의상실에 연락해서 이미 완성된 드레스를 구한 뒤 리폼을 하는 것이 최선이었지만, 그래도 기성품의 한계가 있었다.
아무리 수정을 한들 그 자리에 어울리는 드레스를 만들어 내긴 어려울 터였다.
하지만 홀을 채운 드레스를 본 순간, 걱정들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서 드레스를 확인했다. 각 의상실에서 공을 들여 준비한 듯 원단부터 장식까지 하나같이 섬세하고 아름다웠다. 며칠 만에 급하게 만든 옷이 결코 아니었다.
“이걸 언제부터 준비한 거예요?”
“우리가 환궁한 날.”
로즈였던 나와 함께 건국제에 참석할 생각이었구나.
드레스를 준비했다는 걸 알면 내가 거절할 게 뻔하니 비밀리에 진행했던 거다.
“고마워요.”
“내가 고맙지. 이렇게 돌아와 줬잖아.”
블레이크가 나의 어깨를 감쌌다. 나도 그에게 기대며 잠시 서로의 체온을 확인했다.
***
드레스를 준비하는 문제가 해결되자 또 다른 고민이 찾아왔다.
드레스들이 하나같이 예뻐서 어떤 걸 선택해야 할지 도저히 고를 수가 없었다.
고민 끝에 겨우 한 벌을 선택한 뒤, 아래층으로 내려가는데, 커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언니!”
검은색 아카데미 교복을 입고 머리를 하나로 높게 묶은 여인이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보자마자 소리쳤다.
“다이애나!”
다이애나는 그사이 젖살이 빠졌는지 얼굴이 갸름했다.
순하게 내려갔던 눈매가 다소 날카로워지고, 키도 훌쩍 커서 늠름한 분위기가 풍겼다.
어렸을 때와 많이 바뀌었지만 그래도 한눈에 내 동생 다이애나라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언니!”
다이애나는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나도 오랜만에 만난 동생을 안아주려 했지만, 그녀의 박력에 밀려서 품에 쏙 안기고 말았다.
“언니! 정말 언니야? 내 언니 맞아?”
“그래. 나야. 나, 돌아왔어. 다이애나.”
“으아앙! 어, 어, 어, 으아앙, 언니. 아아아앙! 언니!”
그녀는 내가 진짜 앤시아라는 걸 확인하자마자 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렸다.
서러운 눈물 속에서 그동안 다이애나가 겪었을 슬픔과 외로움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미안해. 울지 마. 울지 마. 다이애나.”
“응. 안 울, 아, 으앙! 언니. 앙! 어, 으아앙!”
하지만 참으려 할수록 다이애나의 울음은 더욱 격해졌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
다이애나는 한참 동안 눈물을 쏟아낸 뒤 겨우 진정됐다.
나는 텐스테온에게 했던 것처럼, 지난 7년간의 일을 가볍게 말해주었다.
어둠의 문 안에서 있었으며, 별로 힘들지도 않았고, 시간이 이렇게 지났는지도 몰랐다고 밝게 말하자,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 말을 완전히 믿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무슨 일이 있었냐며 캐묻지도 않았다.
많이 궁금할 텐데도 꾹 참는 그녀의 배려가 고마웠다.
우리 다이애나, 정말로 어른이 됐구나.
늠름하게 성장한 다이애나를 흐뭇하게 바라보는데, 그녀가 나의 손을 꼭 잡았다.
“언니, 왜 이렇게 약해졌어. 손목 가느다란 것 좀 봐.”
조금 마르긴 했지만, 심각할 정도로 야윈 건 아니었다.
혹시 몰라서 궁의에게 진찰을 받았는데, 건강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했다.
스스로 느끼기에도 괜찮았다. 방대한 빛의 마나가 몸을 감돌고 있어, 오히려 전보다 더 건강하고 몸이 가벼워진 느낌도 들었다.
그러니 내가 약한 게 아니라 다이애나가 강해졌다는 표현이 옳을 거다.
“볼살이 쏙 들어갔네. 손가락도 뼈만 남고.”
다이애나는 다시 울먹이기 시작했다. 몸은 성장했는데, 우는 모습은 어릴 때와 똑같았다.
“나는 괜찮아. 그보다도 시험 기간이라며. 시험은 어쩌고 왔어? 내일까지 보는 거 아니야?”
졸업 성적을 결정하는 중요한 시험이라고 했다.
그래서 시험이 끝나기 전까지는 내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는데, 그녀의 귀에 들어간 모양이다.
“제이든이 알려줬어. 형부한테도 연락이 왔고. 언니가 신경 쓰니까 시험이 끝나고 나서 오라고 하더라. 그런데 그게 말이 되냐고! 언니가 왔는데, 지금 시험 나부랭이가 문제야!”
그녀는 격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여전히 제이든이랑 친하게 지내고 있구나. 2년이나 휴학하게 되면서 친구들이랑도 멀어졌을까 봐 걱정했는데, 조금 마음이 놓였다.
“시험도 중요하지. 지금껏 고생한 결실을 보는 거잖아.”
“미안해….”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나는 그녀를 안고 다독이며 물었다.
“뭐가 미안해?”
“나, 솔직히 포기했었어…. 졸업하면 언니를 찾으러 떠나려고 했지만, 진짜로 찾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했어.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계속 언니를 찾았어야 했는데…. 정말 미안해.”
“그런 말이 어디 있어? 네가 이렇게 잘 지내서 얼마나 기쁜데. 네가 지금까지 나를 찾아 헤맸다면, 미안해서 네 얼굴도 제대로 못 봤을 거야.”
다이애나가 계속 아카데미를 다녀줘서 기뻤다. 미안하다는 말은 당치도 않다.
“그래도….”
나는 다이애나의 눈물을 닦아주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다이애나, 학교생활은 어땠어? 혹시 불편한 건 없었어?”
“불편하다니? 뭐가?”
“2년이나 휴학했다며….”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다이애나는 자신보다 어린 애들한테 선배라고 부르기 싫다며, 한 해라도 빨리 입학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었다.
그런데 2년이나 휴학을 했으니, 같은 학년 중에서 나이가 많은 편에 속했을 거다.
“휴학이 뭐 별건가.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데. 오히려 나이대가 중간 정도라 편하게 지냈어.”
그녀는 내가 무엇을 염려하는지 눈치채고는 밝게 말했다.
“친구는 많이 사귀었고?”
“응. 당연하지. 나는 잘 지냈어. 저번 시험도 수석이었는걸.”
“잘했어. 정말 자랑스럽다. 내 동생.”
이전 생의 나는 받아쓰기로 100점만 받아도 신이 나서 할머니한테 뛰어가고는 했다. 성적 그 자체보다도 할머니가 칭찬해주시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다이애나는 혼자였을 거다. 친구가 있다고 해도, 가족이 함께 기뻐해주는 것과는 다르다.
“아버지 이야기는 들었어.”
내가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길버트 벨라시안은 유배지에서 숨을 거뒀다고 한다.
“혼자서 장례를 치르느라 힘들었지?”
나는 사라졌고, 길버트는 죽었다. 게다가 다이애나의 친모는 재혼을 이유로 장례식장에도 참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른이라도 힘들었을 상황을 다이애나 홀로 견딘 것이다.
“아니야. 폐하께서 도와주셨는걸. 나는 별로 한 것도 없었어. 게다가 죽어도 싼 인간이었잖아. 날 위해서 아버지라고 부를 필요 없어.”
그녀의 얼굴에서는 아버지를 잃은 슬픔이나 그리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후회의 감정이 떠올랐다.
“사실 내가 그 인간을 욕할 입장도 아니지.”
“응?”
“나 진짜 나쁜 애였잖아. 나만 좋은 방에서 좋은 옷 입고, 좋은 거 먹고, 좋은 교육을 받고. 사실 이렇게 마주 보고 언니라고 부를 자격도 없는데. 너무 뻔뻔하고 염치없어.”
“괜찮아. 그건 네 잘못이 아니었잖아.”
다이애나가 내 편을 들거나 자신의 물건을 주려고 하면, 길버트는 화를 내며 나를 때리고 윽박질렀다.
그런 상황에서 어린 다이애나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야. 내 잘못 맞아. 그딴 인간이 뭐가 무서워서 그렇게 두려워했을까.”
“무서운 게 당연한 거야. 우리는 그때 어렸잖아.”
“어리다고 해서 과거가 바뀌는 건 아닌걸. 그때의 나는 진짜 못됐어. 나쁘고 못돼먹었어.”
다이애나가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굳게 깨물었다. 7년 동안 그녀는 계속 자책했을 거다. 아니, 그전부터 계속 나에 대한 죄책감을 안고 있었다.
나는 다이애나의 손을 잡았다.
예전에는 그녀가 나에게 미안해하는 걸 알면서도 제대로 위로해주지 못했다.
나는 진짜 앤시아가 아니니까, 그녀의 생각을 멋대로 입에 담을 수는 없다고 여겼었다.
“…앤시아 벨라시안은 너를 싫어하지 않아.”
그래서 울면서 미안해하는 어린 다이애나에게도 이런 말밖에 해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고 있다. 나는 진짜 앤시아다. 그러니 확실하게 내 생각을 전할 수 있었다.
“다이애나, 나는 너를 싫어하지 않아.”
“…….”
“너를 원망한 적도 없어. 너는 내 하나뿐인 동생인걸. 나는 언제나 너를 좋아했어.”
“언니…. 흐으읍, 으앙!”
다이애나는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나는 사랑스러운 내 동생을 꼭 안아주었다.
***
“가는 거야?”
다이애나가 포렌스궁을 나서는 데 블레이크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마지막 시험이 남아서요.”
“시험 잘 봐.”
“잘 봐야죠. 반드시 수석으로 졸업해서, 당당하게 언니의 기사가 될 거예요.”
다이애나는 잔뜩 운 탓에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하지만 표정은 언니를 찾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기대할게. 나도 다른 놈들한테 앤시아를 맡기고 싶지 않거든.”
다이애나는 블레이크를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봤던 몇 개월 전에 비해 표정이 한결 밝아져 있었다. 그를 뒤덮고 있던 어둠도 사라져서, 어렸을 때처럼 맑은 분위기가 흘렀다.
“전하, 예전에 했던 말 기억해요? 제가 수석으로 졸업하면 누가 언니를 더 좋아하는지 토론하자고 했잖아요.”
“그랬었지.”
“이제 인정할게요. 저의 패배예요. 저는 언니를 끝까지 지켜주지 못했어요.”
오직 가족인 자신만이 앤시아를 기억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오만한 생각에 젖어서 블레이크에게 심한 말도 했었다.
하지만 결국 포기하지 않고 앤시아를 끝까지 찾은 사람은 블레이크였다.
“그걸 이제 안 거야? 7년 전에 결론이 난 이야긴 줄 알았는데.”
그는 농담조로 받아쳤다.
“아니거든요.”
다이애나 역시 가볍게 응수했다.
“처제가 얼마나 부인을 아꼈는지 알아. 부인도 알고 있고. 그러니까 2번째로 인정해 줄게.”
“두고 보세요. 언젠가 역전할 테니까.”
“불가능한 꿈을 꾸네.”
다이애나는 웃어버렸다. 어렸을 때 저 말을 들었다면, 끝까지 말싸움을 하며 이기려고 들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앤시아를 사랑한다고 단호하게 말해주는 블레이크가 고마웠다.
“우리 언니랑 결혼하다니, 전하는 복 받은 사람이에요.”
“언제나 감사하고 있어.”
블레이크는 앤시아와 함께하게 된 이후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감사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녀를 만나지 않았다면 평생 절망 속을 헤매다 죽었을 거다. 아무런 의미 없는 삶을 살았겠지.
“그리고 우리 언니도 결혼을 참 잘했어요.”
다이애나는 싱긋 웃었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슬픈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부인은 나 때문에 고생만 했는걸.”
블레이크는 끊임없는 어둠 속을 하염없이 걸어가던 앤시아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는 텐스테온이나 다른 사람에게 그 사실을 숨기려 했다. 더 이상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은 거다.
앤시아의 마음을 알기에 블레이크도 입을 다물었지만, 그녀가 자신의 저주를 풀기 위해 그 긴 시간 동안 고생한 걸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다이애나는 자책하는 블레이크에게 따스하게 격려의 말을 건넸다.
“언니는 그렇게 생각 안 할 거예요. 그리고 고생시킨 만큼 좋은 남편이 되면 되죠.”
“그래야지. 그럴 거야.”
앞으로는 계속 웃게 해줄 거다. 행복한 날만 계속되도록 그녀를 지켜줄 거다.
“그리고 전하께 꼭 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요.”
다이애나가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뭔데? 말해 봐.”
“늦었지만 저주가 풀린 걸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블레이크의 저주가 풀렸을 때, 앤시아가 실종되었다는 사실에 놀라서 제대로 축하해 주지 못했다. 오히려 원망을 늘어놓았다.
물론 나중에 그 일을 사과하긴 했지만, 축하는 하지 못한 채 시간이 흘러버렸다.
다이애나는 이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고마워.”
블레이크는 가볍게 웃었다.
앤시아가 돌아오면서 두 사람 사이에 남아 있던 상처와 슬픔도 모두 사라졌다.
“너무 늦었네요. 이만 가볼게요.”
“응. 조심히 가.”
“내일 시험만 보고 다시 올 거예요!”
“잘 봐. 안 그러면 앤시아가 속상해하니까.”
“걱정 마세요.”
다이애나는 당차게 대답했다. 실력에 자신이 있기에 나올 수 있는 당당한 미소였다.
***
드디어 건국제 날이 밝았다.
“황태자 전하께서 드십니다! 황태자비 전하께서 드십니다!”
나는 블레이크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무도회장에 입장했다.
그 순간 모든 사람의 시선이 우리에게 쏟아졌다.
오랜만에 참석하는 파티였지만 의외로 떨리지 않았다. 그저 가슴이 벅차올랐다.
블레이크와 함께 무도회에 참석했다.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블레이크의 저주를 풀기 위해서 내가 떠나야 한다고만 여겼으니까.
그러니 블레이크가 모두의 앞에 당당히 서는 날이 오더라도 그 옆에 있는 사람이 나일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함께 있었다.
귀족들이 양쪽으로 물러서며 길을 만들었다.
우리는 홀을 가로지르며 함께 걸어갔다.
예복을 갖춰 입은 블레이크는 당당하면서도 위엄이 넘쳤다.
평소의 귀엽고 다정한 모습과는 다른 일면에 묘하게 가슴이 뛰었다.
단상 위에 앉아 있던 텐스테온도 일어나서 흐뭇한 얼굴로 우리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가 단상 위로 올라가자, 텐스테온은 나를 가볍게 안아주었다.
“아주 예쁘구나.”
“감사합니다. 아버님.”
그는 따뜻한 미소를 지은 뒤, 몸을 돌려 귀족들을 바라보았다.
“아스테릭 제국의 축복이자 황태자비, 그리고 나의 소중한 딸 앤시아가 돌아왔다.”
텐스테온이 황태자비가 돌아왔음을 선언하자, 귀족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제국의 축복이신 황태자비 전하의 귀환을 축하드립니다.”
귀족들 사이에서 다이애나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기사 아카데미의 붉은색 예복을 입고 있었다.
원래 아카데미 예복은 짙은 남색이지만 한 번이라도 수석을 차지한 학생에게는 붉은색 예복이 주어진다고 한다.
다이애나는 내가 사라지고 난 이후 아카데미의 행사 외의 다른 파티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했다. 데뷔탕트도 치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다이애나가 드레스를 입었으면 했다.
블레이크가 준비해준 아름다운 드레스들도 많았기 때문에 그중에서 골라보라고 권했지만 다이애나는 질색하며 거절했다.
“아우, 나는 이제 저런 거 못 입겠어. 답답해.”
나한테 신세 지는 게 부담스러워서 그러는 게 아니라, 진짜로 싫어하는 모습이었기 때문에 나도 더 권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조금 아쉬웠는데, 막상 아카데미 예복을 갖춰 입은 모습을 보니 무척 멋있고, 자랑스러웠다.
수석을 차지한 학생만 입을 수 있는 옷이라 그런지 더 멋져 보인다.
여자 중에서 바지를 입은 사람은 다이애나뿐이었다.
나는 다이애나에게 뿌듯한 시선을 던진 뒤, 모두에게 말했다.
“환영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모두 일어나세요.”
“황공하옵니다. 비 전하.”
내가 명하자 귀족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샤르딘 부인은 눈시울이 붉어졌고, 친하게 지내던 다른 영애들도 나를 바라보며 울먹거렸다.
아니, 이제는 귀족 영애가 아니었다.
그녀들의 옆에 남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서 있었다. 다들 결혼해서 귀부인이 된 거다.
세월이 흘렀다는 것이 새삼스레 느껴졌다.
처음 보는 얼굴들도 무척 많았다. 카실 공작 가문의 세력이 축출되고 그 자리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제국의 거의 모든 귀족들이 초청된 자리였지만 리차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리차드는 가짜 앤시아를 데려왔다. 황태자비를 사칭했으니 원래대로라면 중형을 피하지 못했을 거다.
하지만 그건 단순한 가짜가 아니라 빛의 여신 세르파니아였다.
세르가 사라지고 리차드에 대한 조사가 진행됐지만, 그는 그녀가 정말로 나라고 생각했으며, 빛의 여신과 엮인 일이었다는 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세르가 리차드를 완전히 속인 모양이다.
그녀는 무슨 의도로 리차드를 찾았던 걸까?
어쨌든 리차드가 가짜인 걸 알면서도 모두를 속이기 위해 그녀를 황궁으로 데려온 건 아니었다. 그러니 이 일로 그를 처벌할 수는 없었다.
리차드는 평민이었지만, 후작가의 데릴사위가 될 예정이었으니 웨스틴 영애와 함께라면 무도회에 참석할 자격이 주어졌다.
하지만 리차드도 웨스틴 가문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다.
어째서 오지 않은 거지?
아스테릭 제국이 건국된 지 천 년을 기념하는 성대한 파티다. 사교계 복귀를 선언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자리는 없을 거다.
가짜를 데려온 일로 책임감을 통감하여 불참한 건 아니었다. 그럴 인간이 아니다.
자신의 당당함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오히려 더 악착같이 참석했겠지.
여론이 걱정됐다면 웨스틴 후작 영애만이라도 보내서라도 자신의 결백함을 어필하도록 시켰을 거다.
어째서 참석하지 않은 걸까?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
아스테릭 제국의 건국제는 초대 황제인 필립에 대한 찬양을 시작으로 행사가 진행되는 것이 오랜 전통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여신의 은혜와 역대 성군들을 칭송할 뿐, 필립 황제에 대한 이야기는 처음부터 없던 사람인 것처럼 생략되어 있었다.
하지만 귀족들은 7년 만에 돌아온 황태자비를 보느라 정신이 팔려서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비 전하께서는 여전히 아름다우시네요.”
“그러게요. 첫눈에 알아봤습니다.”
“건강해 보이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웃고 계세요!”
“전하께서 저렇게 좋아하시는 모습은 정말로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폐하께서도 얼마 만에 웃으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모두들 무사히 귀환한 황태자비와 행복해 보이는 황제, 황태자를 보며 감격하고 있는 동안, 첼시는 잔뜩 긴장하며 아버지인 브룩 백작에게 은밀히 속삭였다.
“아버지, 제 말은 모두 전하셨겠죠.”
“그래. 걱정하지 마라.”
“절대로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녀는 비장하게 말하며 오늘 아침의 일을 떠올렸다.
첼시는 황태자비의 전속 시녀로서 새벽부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하늘색 드레스를 입은 앤시아는 세상의 모든 빛을 뿌려놓은 듯 찬란하고 아름다웠다.
“어때요? 블레이크.”
“예뻐. 너무 예뻐.”
단장을 마친 앤시아를 바라보는 블레이크의 눈에서 사랑이 뚝뚝 흘러내렸다.
북쪽 설산보다도 차갑다던 블레이크 황태자랑 동일인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나쁘지 않은 변화였다.
첼시는 수줍어하는 앤시아와 그런 그녀가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블레이크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나도 결혼할까.’
결혼할 나이가 되었으니까, 가문의 이득을 위해서, 이러한 이유가 아니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난 생각이었다.
난생처음으로 몽글몽글한 기분을 느끼며 무도회 준비를 마무리하기 위해 움직이는데, 황궁 복도에 싸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에드온, 모두 앤시아를 쳐다볼 텐데 어떡하지. 눈깔을 파버리고 싶을 거야.”
첼시는 너무나도 섬뜩한 내용에 화들짝 놀라며, 자신도 모르게 몸을 숨겼다.
블레이크와 에드온이 복도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조금 전, 앤시아와 함께 있었을 때 다정했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블레이크에게서 서늘한 한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황태자의 말에 놀란 것은 첼시뿐만이 아닌 듯, 에드온은 사색이 되어서 그를 만류했다.
“전하, 자제하십시오.”
“감히 춤을 신청하는 놈이 있다면 손목을 잘라버릴래.”
“절대로 안 됩니다!”
“그럼 그냥 없애버릴까?”
“전하!”
블레이크는 진심이었다. 에드온은 그런 주군을 필사적으로 말렸다.
그리고 그 말을 듣고 있던 첼시의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사실 아스테릭 제국에는 ‘황태자비 괴담’이란 것이 알음알음 퍼져 있었다.
앤시아에게 해를 입히면 저주가 내린다는 괴소문이었다.
황태자비에게 함부로 굴었던 카실 공작가와 하멜 후작가가 몰락했다. 제국의 3대 의상실 중 하나였던 페리온 의상실도 하루아침에 망해버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앤시아가 사라지고 난 뒤, 그녀의 험담을 일삼았던 이들도 화를 입었다고 한다.
첼시는 이러한 괴담을 믿지 않았다.
카실 공작 가문의 사람들은 자신이 황제라도 된 것처럼 굴며 선을 넘는 행동을 일삼았다.
프랭크 카실이 앤시아를 희롱하는 사건이 아니었어도 결국 숙청당했을 거다.
페리온 자작 부인이 황태자비의 자리를 노리며, 앤시아를 무시하는 발언을 하여 빈축을 샀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내실을 다지지 않은 채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다가 부도를 맞았을 뿐, 의상실이 망한 것과 황태자비 사이에는 어떠한 상관관계도 없었다.
앤시아를 험담했다가 화를 입었다고 거론되는 사람 중에는 황태자의 시녀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녀들은 황태자비의 물건을 멋대로 버렸다가 벌을 받은 거다. 이는 당연한 조치였다.
결국 ‘황태자비 괴담’이라는 건 여러 가지 사건들을 그럴듯하게 엮은 음모설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서 연신 무시무시한 말을 뱉는 블레이크의 모습을 보니, 어쩌면 단순한 헛소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딕스 자작 가문도 로즈를 멸시하다 몰락했다고 했지.
어제 카밀라의 집안인 벤트릭 후작 가문의 비리 조사가 시작되었다고도 했다.
‘단순한 저주가 아니라, 앤시아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을 황태자가 처리한 거라면….’
카실 공작이나 하멜 후작의 일은 아니더라도, 황태자의 저주가 풀린 이후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첼시의 머릿속에서 퍼즐이 하나하나 짜 맞춰지고 있는데, 블레이크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국외 추방은?”
“절대로 안 된다니까요!”
“전부 다 안 된다고 하니, 그냥 앤시아한테 추근거리는 놈들의 손목을 잘라버리는 게 제일 낫겠어.”
“전하!”
첼시는 진지하게 말을 뱉는 블레이크를 보며 희게 질렸다.
사랑하는 이를 잃고 절망에 빠진 남자라고 생각했다.
그는 차갑고 냉정했지만, 황태자비 말고는 다른 사람을 품을 여유가 없어서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단순히 외롭고 고독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세상에나….’
황태자는 무서운 사람이었다.
‘황태자비 괴담’이 진짜로 황태자의 짓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오늘 무도회에서 조금이라도 앤시아에게 접근하는 자가 있다면, 블레이크가 가만두지 않을 거라는 건 확실했다.
첼시는 무도회장에 도착하자마자, 아버지인 브룩 백작을 찾아가서 신신당부했다.
“절대로 비 전하께 춤을 권해서는 안 됩니다. 눈빛도 주의하세요. 공손함을 잃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가문의 사내들한테도 모두 전하세요!”
첼시가 너무나도 강경하게 말하자, 브룩 백작은 이유도 묻지 않고 자신의 조카와 가신 가문에게 그 말을 전했다.
건국제의 행사가 시작됐지만, 첼시의 긴장은 풀리지 않았다.
“제 말 기억하시죠? 절대로 비 전하께 춤을 신청해서는 안 됩니다.”
그녀는 거듭 당부했다. 황태자는 어떤 의미에서 보면 텐스테온보다 훨씬 무서운 사람이었다.
앤시아라면 눈에 보이는 게 없으니 조심해야 한다.
그때 사촌 동생인 토마스가 끼어들었다.
“춤을 권하지 말라니. 그건 예법에 어긋나는 거 아니야?”
토마스는 앤시아에게 눈을 떼지 못한 채 투덜거렸다.
그저 예쁜 여자랑 춤을 추고 싶은 거면서 예법 운운하기는!
첼시는 사촌 동생의 등짝에 사정없이 스매싱을 날렸다.
“아! 아파!”
“이 자식아, 언제 철들래!”
“내가 뭘!”
“오늘 헛짓거리하면 가문 명부에서 파버릴 줄 알아!”
그녀는 토마스에게 단단히 경고했다. 행여라도 아둔한 사촌 때문에 가문이 피해를 입는 건 절대 사양이었다.
황태자가 무서워서만이 아니다. 행여 가문의 남자들이 헛짓하면 비 전하를 뵐 면목이 없었다.
첼시는 행사가 끝나기 전에 다시 한번 집안 남자들을 단속했다.
***
처음으로 황궁 무도회에 참석했을 때는 엄청 긴장했었다.
내가 입고 싶은 옷이 뭔지, 어떤 게 어울릴지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무조건 황실의 위엄을 보일 수 있는 드레스를 고르고, 귀족 명부를 외웠다.
그러고 난 뒤에도 행여 작은 실수라도 할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내 명예와 입지를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나의 실책이 블레이크에 대한 평판으로 이어질까 봐 두려워서였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오늘은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내가 실수를 한다고 한들, 아스테릭 제국의 당당한 황태자인 블레이크를 얕잡아 볼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런 생각으로 마음을 놓은 것도 잠시, 건국제 행사가 끝나고 본격적인 파티의 시작이 다가오자 점점 긴장감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오른발이 먼저다. 잊지 말자, 앤시아. 오른발이야!
스텝을 밟느라 정신 팔리지 말고, 무게 중심 똑바로 잡고. 파트너와 적당한 간격도 유지해야 돼. 제발 갑자기 빨라지지 말자!
안 되겠다. 다시 한번 복습해야지. 오른발, 왼발, 앞으로 옆으로 뒤로, 턴….
그리고 아, 뭐였더라?
무도회가 시작하기 전전까지 줄줄 외우고 있던 스텝이 갑자기 하나도 떠오르지 않고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러다 실수하면 어떡하지. 넘어지면 안 되는데. 발을 밟기라도 하면….
물론 내가 실수한다고 해서 블레이크의 위엄에 흠이 생기진 않을 거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망신당하고 싶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블레이크가 다정하게 말해주었다.
“하지만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데….”
“모두 고개를 숙이라고 할까?”
“…네?”
“앤시아가 싫은 건 다 막아줄게.”
“그러지 말아요. 두고두고 역사에 남을 거예요.”
춤을 못 춰서 귀족들의 고개를 전부 숙이게 했다는 어느 황태자비의 일화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밟아도 상관없어. 앤시아는 요정이라 가벼운걸.”
어렸을 때와 변함없는 말이었다.
“정말요?”
“응. 게다가 다들 앤시아를 보느라 정신이 없어서 스텝 같은 건 신경도 안 쓸걸. 모두 부인한테 반했을까 봐 걱정이야.”
다른 사람이 했다면 질색했을 말이었지만, 블레이크가 하니 달콤하게 느껴졌다.
티 없이 맑고 순수한 외모 때문일까, 아니면 내 남편의 말이라 뭐든 좋게 느껴지는 걸까?
우아한 왈츠의 선율이 울려 퍼졌다.
우리는 손을 맞잡았다. 나는 한번 심호흡을 한 뒤, 실수하지 않고 오른발로 스텝을 밟았다.
드디어 우리의 첫 춤이었다.
막상 댄스가 시작되니, 블레이크와 함께 춤을 추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라서 스텝이나 동작은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게다가 우리는 지금껏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춤을 췄다.
함께 무도회에 참석할 날을 꿈꾸며, 별궁의 홀에서 달을 보며 연습했었지.
진짜 앤시아로 돌아오고 나서도 이번 무도회를 준비하며 매일 연습했다.
그래서 그런지 굳이 머리로 스텝의 순서를 되새기지 않아도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긴장을 풀고 음악의 흐름에 몸을 맡겼다.
블레이크와 무도회에서 첫 춤을 추고 싶었다. 하지만 불가능한 꿈일 거라 생각했다.
그가 허름한 별궁을 벗어나 무도회에 참석하려면 저주가 풀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이애나의 빛의 힘이 필요했다.
그러니 블레이크가 무도회에 참석하는 날이 오더라도 그 옆자리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함께 있었다.
가장 어려웠던 턴 동작을 물 흐르듯 부드럽게 마쳤다. 춤은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이제 실수할 부분도 없지만, 심장의 떨림은 빨라졌다.
블레이크와 함께 있다는 사실이 벅차고 또 행복해서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꿈 같아요.”
“나도 그래.”
“만약 정말로 꿈이면 어떡하죠?”
나는 아직도 칠흑 같은 어둠 속을 헤매고 있고, 그 안에서 환영을 보고 있는 거면 어떡하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서 두려워졌다.
“꿈이 아니야.”
블레이크는 나를 꼭 안아주었다. 그의 따뜻한 체온을 느끼니, 불안하게 뛰던 심장도 조금씩 진정되었다.
“맞아요. 이건 꿈이 아니에요.”
우리는 잠시 서로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아름다운 왈츠의 선율이 점차 작아지며 막을 내렸다.
첫 곡이 끝나고 다음 춤이 시작될 차례였다.
“이제 괜찮아요.”
나는 블레이크를 안심시키기 위해 밝게 웃었지만, 그는 나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무도회에서 한 파트너와 두 번 이상 춤을 추는 건 매너가 아니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텐스테온의 목소리가 들렸다.
“블레이크, 예법을 지키거라.”
아무리 제국의 황태자라도 황제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블레이크는 고개를 돌려서 텐스테온을 바라보았다.
“폐하께서도 춤을 추시려고요?”
그가 마뜩잖은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묻자, 텐스테온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 너한테 양보하느라 10년을 기다렸다.”
나는 원래 처음 참석한 무도회에서 텐스테온과 춤을 출 예정이었다.
하지만 텐스테온은 내가 블레이크와 첫 춤을 추고 싶어 하는 걸 알고는 양보해주었었다.
그게 벌써 10년 전이구나….
텐스테온이 춤을 신청하려 했지만, 블레이크는 가만히 서서 양보하지 않았다.
나는 블레이크의 손을 슬쩍 빼며 텐스테온을 바라보았다.
“부인….”
내가 다른 사람을 택하자 블레이크는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나는 블레이크의 저런 모습에 참 약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쩔 수 없었다.
“아버님이랑 오래전에 약속했었던 거라….”
“블레이크, 비키거라.”
아들에게 은근히 약한 텐스테온이었지만, 이번에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가차 없이 그를 밀어냈다.
“앤시아, 나와 춤을 춰주겠니?”
그는 손을 내밀며 정중하게 춤을 신청했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물론이죠.”
나는 텐스테온과 함께 두 번째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의 춤은 절도가 있으면서도 완벽했다.
샤르딘 부인이 왈츠의 교본이라며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나는 블레이크가 아닌 다른 사람과는 춤을 춰본 적이 없었다. 연습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니 나의 춤동작은 오직 블레이크에게 맞춰져 있었다. 블레이크도 마찬가지일 거다.
하지만 텐스테온은 나를 완벽하게 리드했다.
그가 이끄는 대로 춤을 추다 보니, ‘내가 이렇게 춤을 잘 췄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본인만 잘하는 게 아니라, 파트너의 능력까지 올려 줄 만큼 대단한 실력이었다.
춤이란 걸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와 함께라면 잘하는 사람처럼 보일 거다.
“앤시아, 왜 그러니?”
“너무 잘 추셔서 놀랐어요.”
“실없기는.”
텐스테온이 피식 웃으며 부드럽게 턴을 했다.
“네가 돌아와서 정말 기쁘다.”
“저도 아버님이랑 춤을 출 수 있게 돼서 기뻐요.”
“내가 영광이지.”
텐스테온의 리드 덕분에 나는 두 번째 춤도 실수하지 않고 마무리할 수 있었다.
두 번째 곡이 끝나자 텐스테온은 목을 살짝 숙이며 인사했다. 마무리까지 완벽했다.
우리가 춤을 마치자, 다음에는 자신의 차례이길 기대하는 여인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텐스테온은 더는 춤을 추지 않고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다음 곡이 시작되었다. 그러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이 나에게 다가왔다.
“비 전하와 함께 춤출 수 있는 영광을 저에게 주시겠습니까?”
“다이애나.”
나는 깜짝 놀랐다. 설마 다이애나가 춤을 신청할 줄이야.
그녀가 오늘 드레스가 아닌 바지를 입고 오긴 했지만, 동성에게 춤을 권하는 건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주변 사람들도 웅성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다이애나는 당당했다.
“언니, 내 인생의 첫 춤이야. 거절하지 마.”
모두가 보고 있는데 거절하면, 그녀가 곤란해질 거다.
나는 일단 다이애나의 손을 잡으며, 댄스 신청을 수락했다. 하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첫 춤을 나랑 추면 어떻게 해!”
나는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뭐가 어때서?”
“소중한 사람이랑 춰야지.”
제이든도 있고 기사 아카데미에 멋진 남자들도 많을 거다. 다이애나를 좋아하는 사람도 분명 있겠지.
누가 되었든 나랑 추는 것보다는 나았다.
하지만 다이애나는 내 걱정을 쿨하게 받아쳤다.
“나한테 가장 소중한 사람은 언니야.”
“다이애나….”
“음악이 시작됐는데 계속 이렇게 서 있을 거야?”
스텝을 밟지 않으면 다른 사람과 부딪힐 거다.
나는 한숨을 쉬며 왈츠를 추기 위해 손을 고쳐 잡았다.
다이애나는 나를 자연스럽게 리드했다. 물론 텐스테온이나 블레이크에게 비할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정도면 훌륭한 실력이었다.
“언제 연습했어?”
다이애나가 어렸을 때 댄스 수업을 받은 적이 있긴 했지만, 그건 여자 포지션이었다. 남자 포지션을 배운 적은 없었을 것이다.
“어제 맹훈련했지.”
“어제?”
“응. 언니랑 춤을 추려고.”
단 하루 만에 이 정도 수준까지 올라오다니. 나는 기본적인 스텝도 안 돼서 한참을 헤맸었는데.
이게 바로 재능의 차이라는 건가?
이번이 세 번째 춤이라 그런지, 아니면 상대가 여동생이라 그런지 몰라도 마음도 여유로웠다. 나는 다이애나를 바라보았다.
“다이애나, 너 키 엄청 크다.”
재회했을 때도 느꼈지만, 이렇게 가까이 서니 그녀의 키가 큰 것이 더욱 실감 났다. 아무리 못해도 170은 가볍게 넘어 보였다.
“우리 학년 여자애들 중에서 내가 제일 크긴 해.”
원작에서는 특별히 그녀의 키가 크다는 묘사가 없었다. 하지만 원작과 달리 어려서부터 훈련을 하고 기사 아카데미에 다니면서 키가 훌쩍 자란 모양이다.
어렸을 때는 세 명 중 내가 가장 컸는데, 이제는 제일 작았다.
“부럽다.”
“언니는 작아서 귀여운걸.”
“…….”
동생한테 귀엽단 말을 들어봤자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아, 미안!”
나는 깜짝 놀라서 사과했다. 시무룩해진 나머지 집중력을 잃어버리며 다이애나의 발을 밟고 말았다.
“괜찮아.”
다이애나는 싱긋 웃으며 나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하지만 조금은 더 집중해줘. 내 첫 춤이라고.”
“알았어.”
다이애나의 첫 춤을 망치면 안 되지. 나는 동생에게 귀엽다는 말을 들은 충격을 이겨내며, 다시 정신을 다잡았다.
춤을 마치자 다이애나가 고개를 숙이며 절도 있게 인사했다.
“영광이었습니다. 비 전하.”
“저야말로 영광이었습니다. 벨라시안 백작.”
나도 치맛자락을 잡으며 예의를 갖췄다.
다이애나가 떠나자 다른 남자들이 다가왔다. 이름과 가문 외에는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저들 중 누구를 선택해야 하지? 마냥 행복했던 시간이 지나고, 사교계의 지형이 머릿속에 복잡하게 펼쳐지기 시작했다.
누구랑 춰야 하는지 고민되는 데다, 잘 출 수 있을지도 걱정되고, 또 어색했다. 그때 블레이크가 나의 손을 잡았다.
“앤시아. 나와 춤을 춰주겠어?”
“같은 사람이랑 추는 건 예법에 어긋나잖아요.”
“두 번이나 참았잖아.”
블레이크는 귀엽게 투정을 부렸다.
솔직히 그가 손을 잡아준 순간 복잡한 생각들이 사라지며 마음이 편해졌다. 하지만 예법은 예법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블레이크가 고개를 돌리며 춤을 신청하기 위해 서 있던 남자들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남자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도망치듯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표정을 지었길래 사람들이 저러는 거지?
“블레이크, 뭐 했어요?”
“아무것도 안 했는데.”
그가 순하게 웃었다. 표정만 보면 정말로 무해해 보인다. 하지만 그의 어깨 뒤로 사색이 된 남자들의 표정을 보면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뭐, 상관없나.
다른 사람들의 댄스 신청을 일일이 거절해야 하는 귀찮음도 사라졌고, 블레이크처럼 나도 그와 춤을 추고 싶었다.
7년 만에 찾아온 꿈같은 순간이었다. 예법은 잠시 잊어도 되겠지.
결국 우리 두 사람은 한참 동안 함께 춤을 췄다.
곡이 끝나도 파트너를 바꾸지 않고, 서로만을 바라보면서.
***
춤을 마치고 휴식을 취하러 자리로 돌아오자 기다렸다는 듯 사람들이 다가왔다.
“비 전하, 이렇게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축하드립니다.”
“비 전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운 사람들도 있었고, 처음 보는 이들도 있었다.
7년 만에 나타난 나를 환영해줘서 너무 고마웠고, 또 새로운 만남이 즐겁기도 했다. 하지만 너무 많은 사람과 대화를 하다 보니 조금 지쳤다.
휴식을 취하기 위해 테라스로 들어가려는데, 블레이크가 다가와서 귓가에 속삭였다.
“앤시아, 가자.”
“네? 어디를요?”
무도회가 한창인데 어디를 가자는 거지?
“약속했잖아.”
“약속이요?”
“불꽃놀이를 봐야지.”
불꽃놀이….
“멜리사랑 한스는 광장에 있겠지?”
“네. 지금쯤 광장에서 불꽃놀이를 기다리고 있을걸요.”
“우리도 그럴 수 있겠지?”
“물론이죠. 광장의 맨 앞에서 구경해요.”
어렸을 때, 함께 축제에 가기로 약속했었다. 그리고 광장의 가장 첫 번째 줄에서 불꽃놀이를 구경하자고 했지.
그 약속을 잊은 적이 없었다. 오늘도 그 생각을 했으니까.
“하지만 우리가 빠지면….”
지금은 무도회 중이었다. 다른 귀족이라면 모를까, 황태자와 황태자비가 도중에 나갈 수는 없었다.
“제국 역사상 가장 성대한 불꽃 축제가 될 거야. 부인을 위해서 내가 특별히 준비했는데, 같이 봐주지 않을 거야?”
그가 잔뜩 풀죽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비 맞은 토끼처럼 처연한 눈빛을 보니 도무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나도 불꽃놀이가 보고 싶기도 했고.
물론 황궁에서도 불꽃이 보이기는 하지만 광장에서 보는 것과는 다를 거다.
나는 텐스테온을 바라보았다. 나의 시선을 느꼈는지, 콜린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텐스테온도 고개를 돌려 나를 응시했다.
그는 엷게 입꼬리를 올리며 다녀오라는 듯 짧게 손짓했다.
아버님도 알고 계셨구나….
“알았어요. 가요.”
나는 활짝 웃으며 블레이크의 손을 맞잡았다.
***
우리는 몰래 무도회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화려한 드레스와 예복을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뒤 광장으로 향했다.
광장은 이미 수많은 사람으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블레이크는 나의 손을 단단히 잡았다. 내가 올려 보자 그가 빙그레 웃었다.
“우리 부인 잃어버리면 안 되잖아.”
“내가 어린애예요?”
“그럼, 내 눈에는 아직도 아기인걸.”
그가 나의 볼을 톡 하고 건드렸다.
“…….”
“귀여워.”
내가 귀엽다니….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 다이애나도 그랬었지. 모두 귀여운 꼬맹이들이었는데…. 어쩌다 꼬맹이들한테 귀엽다는 소리를 듣는 처지가 된 걸까.
분명 듬직한 아내이자 언니였는데….
갑자기 자괴감이 밀려드는 차에, 블레이크가 나의 손을 잡아끌었다.
“가자.”
“어디를요?”
“가장 앞에서 보기로 했잖아.”
광장은 사람들로 붐볐지만, 우리의 신분을 밝힌다면 가장 앞에 설 수 있을 거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봐요.”
앞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은 불꽃놀이를 조금이라도 가까이 보기 위해서 아침부터 기다렸을 거다. 그들의 자리를 뺏고 싶지는 않았다.
“앞에 귀빈석이 있어.”
나의 마음을 아는지, 블레이크가 오른쪽 앞자리를 가리켰다.
그의 말대로 귀족들을 위해서 고급스럽게 꾸며진 공간이 준비되어 있었다.
아스테릭 제국은 신분제 국가였기 때문에 어떤 행사를 하든 귀족들을 위한 특별석을 따로 마련해놓고는 했다.
저곳에서 본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나는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여기가 더 좋아요.”
푹신한 의자에 앉아서 하인들의 시중을 받으며 우아하게 관람한다면 몸이야 편하겠지만, 황궁에서 보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어진다.
나는 축제 분위기를 만끽하고 싶었다.
광장은 온통 가족과 연인, 친구들끼리 온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지금도 사방에서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 즐겁게 대화할 뿐 우리를 신경 쓰지 않았다.
7년 전, 아니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블레이크에겐 여신의 저주가, 나에게는 깊은 화상 흉터가 있었으니까.
가면으로 가리지 않으면 사람들의 앞에 서는 것조차 불안했고, 경멸 어린 시선을 감당해야 했다.
오늘은 사람들 사이에 파묻혀서, 축제를 즐기고 싶었다.
광장의 가장 앞에서 보는 것보다도, 사람들 사이에서 당당하게 서 있는 블레이크를 보는 것이 훨씬 기뻤다.
“알았어. 부인이 원하는 대로 할게.”
우리는 손을 꼭 잡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폭죽이 터졌다. 새까만 하늘 위로 형형색색 아름다운 불꽃들이 반짝였다.
“와!”
“우와, 정말 대단하다.”
“엄마, 저것 봐!”
폭죽이 터지는 소리와 사람들의 감탄사가 넓은 광장을 가득 채웠다.
황궁에서도 불꽃놀이를 보긴 했었지만, 이렇게 광장에서 보니 엄청난 차이가 느껴졌다.
불꽃이 터지는 소리, 압도적인 크기, 별빛이 쏟아질 듯 화려한 반짝거림, 모든 것이 생생하게 다가왔다.
게다가 건국 천 년을 축하하는 행사답게 평소보다 몇 배는 웅장하고 화려했다.
“와…. 예쁘다. 그렇죠?”
고개를 돌리자,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블레이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응. 예쁘다.”
“뭐 해요? 불꽃을 봐야죠.”
“부인이 더 예뻐.”
그가 나의 어깨를 감쌌다. 그의 손끝에서 가느다란 떨림이 느껴졌다.
예쁘다는 건 분위기를 망치지 않기 위해서 그냥 한 말이고, 사실은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거구나.
혹시라도 내가 또 사라질까 봐, 그게 두려워서.
“불꽃을 봐요. 나는 언제든지 볼 수 있지만, 이렇게 화려한 불꽃은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못 본다고요.”
축제 때마다 불꽃놀이를 하긴 하지만, 이토록 성대한 불꽃은 당분간은 보기 어려울 거다.
“이렇게 화려한 불꽃을 보는 부인도 이 순간이 아니면 볼 수 없는걸.”
“…블레이크, 나 이제 안 떠나요.”
“알아. 만약 떠난다 해도 절대로 놓치지 않을 거야.”
나의 손을 잡은 그의 손에 힘이 실렸다. 나는 엷게 웃으며 그의 품에 머리를 기댔다.
“떠날 생각도 없는걸요.”
“정말?”
“네.”
“약속한 거야.”
“약속.”
그의 새끼손가락에 나의 손을 걸었다.
하얀 거짓말이 아니다. 사실은 어려울 걸 알면서도 애써 희망을 담아 하는 말도 아니었다.
우리는 계속 함께할 거다. 이제는 절대로 헤어지지 않을 거다.
새끼손가락을 걸고 도장까지 찍은 뒤 배시시 웃는데, 블레이크가 입을 맞췄다.
겨우 입술만 부딪히는 뽀뽀가 아니라, 나의 안을 농밀하게 파고드는 어른의 입맞춤이었다.
우리는 한참 동안 서로의 체온을 나누었다. 그리고 겨우 입술이 떨어지는 순간, 커다란 굉음과 함께 엄청나게 큰 폭죽이 터졌다.
컴컴했던 하늘이 눈이 부실 정도로 찬란하게 빛났다.
너무 밝아서 마치 동이 튼 것 같았다. 건국제의 피날레에 걸맞은 화려한 불꽃이었다.
반짝이던 불빛들이 서서히 사라지자, 고요한 밤하늘이 찾아왔다.
“끝났네.”
키스하는 사이 불꽃놀이가 끝나 버렸다. 도대체 얼마나 오래 했다는 거야!
“제대로 못 봤는데….”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서 물기가 남아 있는 입술을 매만지며 괜히 투덜거렸다.
“더 터트릴까?”
블레이크는 다정하게 물었다.
“괜찮아요.”
“보고 싶으면 말해. 부인이 원하는 건 뭐든지 해줄 수 있어.”
당당하게 말하는 모습을 보니 새삼스럽게 감격이 밀려왔다.
허름한 별궁의 다락방에서 겨우 불꽃놀이를 보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축제를 지휘할 수 있을 만큼 지위가 높아졌다.
모두가 인정하는 제국의 황태자인 것이다.
“정말 괜찮아요. 다음 불꽃은 내년에 봐요.”
다시 불꽃이 피어오른다고 해도 가슴이 떨려서 제대로 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불꽃놀이가 끝나자 사람들은 하나둘 자리를 떴다. 하지만 모두가 떠난 뒤에도 우리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벅찬 여운이 남아서 좀처럼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7년 전의 약속이 이루어졌다.
나는 그의 품에 안긴 채 칠흑같이 새까만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불꽃놀이를 할 때는 몰랐지만 구름이 많아서 별도 달도 보이지 않았다.
어둠의 문에서 헤매던 때가 떠올랐지만 외롭거나 두렵지는 않았다. 옆에 블레이크가 있기 때문이겠지.
“블레이크, 저랑 결혼했을 때, 조금 아쉽진 않았어요?”
“아쉽다니?”
“결혼 상대가 저였잖아요.”
“그게 무슨 말이야?”
“다이애나가 첫사랑이었던 거 알고 있어요.”
그동안은 알고 있었어도 모르는 척하며 굳이 내색하지 않았던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어째서 갑자기 이 이야기를 꺼냈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이제는 블레이크가 완전히 내 남자라는 생각이 들어서? 아니면, 전생의 기억이 없다지만 잠시라도 다른 여자에게 한눈을 팔았던 그가 야속해서?
“다이애나라고?”
블레이크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화가 난 듯한 말투에 깜짝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블레이크…?”
“내 첫사랑이 다이애나라고?”
“…아니에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야?”
언제부터냐니….
그야 처음부터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원작에 그렇게 나와 있었으니까.
블레이크는 다이애나를 좋아했다. 그걸 알고 텐스테온이 벨라시안 가문에 혼담을 넣었던 거다.
길버트 벨라시안은 애지중지하던 다이애나를 저주받은 황태자에게 보내고 싶진 않았지만, 막대한 결혼 예물은 탐이 났다.
그래서 천덕꾸러기였던 앤시아를 대신 황궁으로 보냈던 거였다.
“다이애나한테 혼담을 넣었다가 실패해서 나랑 결혼하게 된 거 아니에요?”
“아니야. 처음부터 너였어. 앤시아, 너였기 때문에 결혼한 거야. 다른 사람이었다면 거부했을 거야.”
“다이애나가 아니라 나였다고요…?”
생각해 보면 황제가 벨라시안 가문에 혼담을 넣었다고 했을 뿐, 그게 누구였는지는 원작에서도 정확하게 나오지 않았었다.
단지 종합적인 상황으로 볼 때 당연히 블레이크와 나이도 같고, 벨라시안 백작이 아끼며, 사교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다이애나일 거라고 예상했던 거다.
게다가 이를 전제로 소설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조금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단 말이야…?
“처음부터 너를 좋아한다고 말했잖아. 나한테는 너뿐이라고 했잖아. 내 말을 믿지 못했던 거야? 내가 다이애나를 좋아하는 줄 알고, 그래서 떠나려고 했었던 거야?”
블레이크가 이렇게 화난 모습은 처음 보았다. 내가 커다란 착각을 하고 있었나 보다.
그에게 사과하려는 찰나, 차가운 물방울이 얼굴에 닿았다.
어? 비?
비가 오는 것을 자각하자마자, 한 방울씩 톡톡 내리던 빗방울이 굵어지더니 무섭게 퍼붓기 시작했다.
갑자기 굵어진 빗줄기 때문에 순식간에 옷이 전부 젖어버리고 말았다.
가을바람이 쌀쌀한 데다가 비가 오면서 기온이 뚝 떨어졌다. 이 상태로는 황궁에 도착하기도 전에 감기에 걸리고 말 거다.
“저기로 가자.”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는데, 블레이크가 광장 옆에 있는 호텔을 가리켰다.
저곳은 제도에서 가장 큰 호텔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망설임 없이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
호텔 안으로 들어가자, 지배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를 가장 꼭대기 층에 있는 특실로 안내했다.
“예약했어요?”
건국제를 맞이하여 숙박 시설이 모두 만실이었다. 이렇게 좋은 방이 아직까지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응.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귀빈석도 불편해하면 여기서 보려고 했지.”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수도 최고의 호텔답게 야경이 아름다웠다.
비록 지금은 굵은 빗줄기에 가려지긴 했지만, 그래도 광장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블레이크는 광장에 도착하자마자 나의 손을 단단히 붙잡았었다.
사람이 많은 곳은 무섭다는 내 말을 기억하고, 혹시 몰라서 광장 바로 옆에 있는 호텔까지 예약해 놓은 거겠지.
“여기서 볼 걸 그랬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여기도 좋지만 광장에서 보는 게 더 좋아요.”
호텔에서 보면 편하게 불꽃놀이를 즐길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오늘처럼 생생한 축제의 분위기는 느끼지 못했겠지.
“그럼 다행이고.”
“…블레이크, 아직 화났어요?”
내가 다이애나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부터 블레이크의 표정은 계속 굳어 있었다.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다만 내 첫사랑은 너야. 마지막 사랑도 너고. 그걸 잊지 마.”
“알았어요. 안 잊을게요.”
블레이크가 굳은 얼굴을 풀며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감기 걸리겠다. 어서 씻어.”
“블레이크가 먼저 씻어요.”
이제는 저주에서 완전히 벗어났다지만, 나는 여전히 그가 걱정되었다.
습관적으로 블레이크의 얼굴을 쓰다듬는 척하며 열이 난 건 아닌지 확인하려고 하는데, 그가 나의 손을 잡았다.
“차갑잖아. 어서 들어가.”
어릴 때와 달리 그의 손은 단단하고 따뜻했다. 오히려 몸이 떨리는 건 나였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연약했던 어린 소년이 아니었다.
“알았어요.”
나는 먼저 욕실에 들어갔다. 그리고 서둘러 샤워를 마친 뒤, 얼른 들어가라며 블레이크의 등을 떠밀었다.
블레이크가 욕실로 들어가자, 넓은 호텔 방에 나 혼자 남았다.
나는 가운을 입은 채 창가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밖의 경치를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보다도 빗줄기가 거세서, 새까만 어둠과 창을 때리는 빗물, 희미한 거리의 불빛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빛들도 하나둘 꺼져갔다. 가판과 가게는 문을 닫고 사람들도 광장을 떠났다.
갑작스럽게 내린 비에 놀라긴 했지만, 그래도 불꽃놀이가 끝나고 와서 다행이었다.
투둑투둑.
비가 유리창을 때리는 소리 사이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검은 가운을 걸친 블레이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
나는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었다.
블레이크를 둘러싼 모든 것이 묘했다.
여긴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던 아모리아궁이 아니다.
내가 어렸을 때 고른 물건들로 가득한 포렌스궁도 아니고, 우리가 꼬마였던 시절부터 지켜보았던 사람들도 없었다.
추억과 완전히 단절된 공간이기 때문일까?
나는 어렸을 때 목욕을 도와주며 그의 벗은 몸을 자주 봤었다.
저주가 퍼지진 않았을지 불안해하며 매일 문장을 확인하고는 했었지.
그런데 지금 가운만 걸치고 있는 블레이크의 모습이 지독히도 낯설게 느껴졌다.
기억과도 단절된 듯 어린 시절의 일들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은발의 남자가 우뚝 서서 짙은 눈길로 나를 직시하고 있었다. 그를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왜 나를 피해?”
“…….”
그가 가까이 다가와서 나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젖었네.”
원래는 욕실에서 말리고 나왔어야 했다.
하지만 블레이크도 비에 흠뻑 젖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가 조금이라도 빨리 따뜻한 물에 몸을 녹였으면 해서 서둘러 나와버렸다.
“아, 말리고 올게요.”
얼른 의자에서 일어나려는 찰나, 그가 나의 어깨를 잡으며 다시 앉도록 했다.
“말려줄게.”
“괜찮은데….”
“해주고 싶어.”
나는 결국 의자에 앉았다. 그는 뒤에 서서 나의 머리카락을 말려주었다.
블레이크의 긴 손가락이 나의 머리카락 사이를 헤집었다가 느리게 떨어져 나갔다.
“오늘 힘들었지?”
“아니요. 꿈 같았어요.”
새벽부터 일어나서 분주하게 무도회 준비를 했고, 굵은 장대비도 맞았지만 전혀 힘들지 않았다.
단지 몸이 조금 이상했다.
블레이크가 옆에 있는 걸 의식할 때마다 머릿속이 백지가 되고, 그의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스쳐 내 목덜미에 닿을 때마다 그 자리에 열꽃이 피어오르는 듯했다.
이런 나의 상태를 들키지 않기 위해서 짧게 대답한 뒤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정적이 내려앉으며, 빗줄기가 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이번에도 침묵을 깬 건 블레이크였다.
“앤시아, 내가 얼마나 더 기다려야 돼?”
“기다리다니요?”
“말을 편하게 하기로 했었잖아. 앤시아가 어색하다고 해서 지금까지 계속 기다렸는데.”
어둠의 문으로 떠나기 전, 말을 놓으라는 블레이크에게 아직은 어색하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했었다.
그때는 정말로 조금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말을 하고 벌써 7년이란 시간이 흘러버렸다.
“조금만 더요….”
하지만 나는 또다시 과거와 같은 말을 뱉었다.
천 년 전에는 락슐과 친구로 지냈었다. 하지만 환생한 뒤에는 계속 경어를 사용했기 때문인지 말을 놓는 것이 어색했다.
로즈로 지내면서 극존칭을 사용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런 것 같다.
“나 염색할까?”
그가 갑자기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염색이요?”
“응. 며칠 전에 이상한 꿈을 꾸었거든.”
“무슨 꿈이었는데요?”
“우리가 숲속을 걷고 있었는데, 앤시아가 나한테 무척 편하게 말을 했어. 친구처럼 말이야.”
“…….”
“그런데 이상한 건, 그때 내 머리카락이 검은색이었어.”
전생의 꿈을 꾼 건가? 나는 깜짝 놀라서 몸을 돌렸다. 블레이크는 그런 나를 지그시 응시했다.
“내 머리색이 검게 변하면 부인이 편하게 말을 해 줄까?”
“…내가 말을 놨으면 좋겠어요?”
“응. 나는 부인과 대등해지고 싶어.”
그의 손이 나의 손가락 사이를 하나하나 파고들더니, 손등에 입을 맞췄다.
나는 블레이크의 붉은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목욕을 마친 그를 보았을 때는 왠지 부끄러워서 무작정 고개를 돌렸었지만, 이제 더는 피하고 싶지 않았다.
“…알았어.”
나는 말을 놓으며, 그의 얼굴을 매만졌다. 검은 문장이 살갗을 파고들어서 거칠었던 피부가 진주처럼 매끄러웠다.
이마, 볼, 입술, 턱, 목을 타고 점점 내려가던 손이 가슴으로 향했다.
“…블레이크, 확인해도 돼?”
문득 검은 가운에 가려진 그의 몸을 확인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무슨 말 하는 줄 아는 거야?”
“정말로 저주가 풀린 게 맞는지 보고 싶어.”
정말로 여신의 저주가 풀린 게 맞는지, 몸의 절반을 가득 채웠던 저주의 문장이 완전히 사라졌는지 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잠시 동안 아무 말 없이 침묵했다.
“안 돼…?”
“나는 더 이상 부인이 씻겨주던 어린애가 아니야.”
그가 자신의 가슴 위에 올려진 나의 손을 움켜잡았다.
“지금도 필사적으로 누르는 중이라고. 그래도 보고 싶어?”
“응. 보고 싶어.”
블레이크의 말에 담긴 뜻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나의 손을 놓으며 가운을 벗었다.
옷을 입었을 때 호리호리하던 인상과 달리, 단단히 자리 잡은 근육들이 조화를 이루며 고대의 조각상처럼 아름다우면서도 강인해 보였다.
하지만 단단한 근육들보다도 저주의 문장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사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정말로 저주가 풀렸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직접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블레이크의 몸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나의 손이 그의 몸에 닿는 순간, 블레이크가 내 허리를 잡아당기며 입을 맞췄다. 나도 그의 목에 손을 두르며 키스를 받아들였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강렬한 감각이 몸을 뜨겁게 달궜다.
블레이크는 거칠게 탐닉하는 듯 나의 입 안을 헤집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갑작스러운 자극에 놀라서 움찔 떨었지만, 그는 멈추지 않고 나의 턱과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그의 입술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나의 몸을 감싸던 가운의 끈이 풀렸다.
***
“읏.”
나는 얕은 신음을 지르며 일어났다. 왜 이렇게 전신이 쑤시지…. 아!
옆에 누워 있는 미남을 본 순간 정신이 번쩍 들며 어젯밤의 일이 떠올랐다.
아, 아, 아, 아, 아…!
첫 경험이었다.
천 년 전은 물론이고 대한민국에서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앤시아가 되어서도 당연히 없었고.
창피해…. 어색해….
이제 블레이크의 얼굴을 어떻게 보지?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나 어떻게 해야 되지?
얼굴을 물론 머릿속까지 새빨갛게 물들어서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이, 일단 옷부터 입자!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내 몸을 감싸고 있는 새하얀 슈미즈가 눈에 들어왔다.
언제 입은 거지? 몸도 보송보송하고 깨끗했다. 블레이크가 입혀준 걸까?
“부인, 잘 잤어?”
“악!”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왜 그렇게 놀라?”
블레이크는 그런 나를 바라보며 청초한 미소를 지었다.
어젯밤에 그 야수 같은 남자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청순한 미남이 자리하고 있었다.
‘꿈이었던 건가?’
그래, 우리 남편은 이 세상에서 가장 귀엽고 순수한 토깽이다. 그런 야수였을 리가 없…긴 뭐가 없어!
어젯밤의 일이 현실이라는 걸 허리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이불을 확 끌어당기며 내 몸을 가렸다.
“일어나자마자 벗기는 거야?”
그가 커다란 눈을 순진하게 깜박이며 나를 올려 보았다.
“이불을 벗긴 거잖아요! 단어를 애매하게 생략하지 말라고요!”
어릴 때는 아무것도 몰랐다지만, 지금은 진짜로 요망해 보인다. 게다가 어젯밤 일까지 겹쳐져서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앤시아가 이렇게 막 벗기니까 부끄러운걸.”
“…….”
그러나 신랑의 본성은 둘째치고 지금 이불로 몸을 가려야 할 사람은 블레이크 쪽이긴 했다.
“자요.”
다시 이불을 덮어주려 하는데, 그가 나의 손을 잡아당겼다.
“이렇게 같이 손을 꼭 잡고 있으면 안 부끄러울 것 같아.”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부끄러운 듯 눈을 살며시 내리깔았다. 얼굴도 발그레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예전 같았다면 수줍어하는 남편님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당장 끌어안았겠지.
하지만 지금도 그러기에는 어젯밤의 일이 너무나도 생생했다.
“앤시아, 어서 원하는 걸 말해.”
“블레이….”
“말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잖아.”
그때의 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예쁘게 웃다가 강하게 몰아치고, 야수처럼 탐하고, 색스러운 목소리로 속삭이며 내가 애원하도록 만들었다.
어젯밤 내내 정신도 차릴 수 없도록 나를 마구 휘저어놓았으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 순진무구한 토끼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블레이크를 보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제 순진한 척해도 소용없어요.’
나는 남편님의 실체를 알고 말았다.
토끼는 무슨. 토끼 탈을 뒤집어쓴 퇴폐 여우다!
지금껏 토끼랑 결혼한 줄 알았는데, 속았어…! 이건 사기 결혼이라고!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째려보자, 그가 슬금슬금 이불을 올리며 자신의 몸을 덮었다.
“부인이 그렇게 쳐다보니까 너무 부끄럽다.”
“…….”
그러니까 다 알아버렸다고! 순진한 척해도 이제는 안 속는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바라보는데, 그가 나의 손을 잡으며 침대 위로 이끌었다.
다시 그의 옆에 눕자, 블레이크가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혹시 나한테 화났어?”
그가 잘못한 건 없었다. 어젯밤에도 부끄럽긴 했지만 솔직히 좋았다.
다만 나의 신랑이 순백색 순수한 토끼인 줄 알았는데, 그냥 여우도 아니고 천 년 묵은 구미호였다는 데서 소소한 배신감이 밀려왔을 뿐이다.
“여우.”
“이젠 여우가 좋아? 여우를 키우고 싶어? 나, 여우 할까?”
“이미 여우잖아요.”
“그게 무슨 말이야?”
그가 순진한 눈망울을 크게 떴다. 어렸을 때랑 표정이 똑같았다.
어제 그렇게 쏟아져 나오던 색기와 페로몬을 어디에다 숨긴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소용없다고요. 어젯밤에 그렇고 그렇고 그런 걸 통해서 난 다 알아버렸던 말이야!
난 이제 안다고. 저거 토끼 아냐!
“그런데 왜 또 말을 높여? 어젯밤에는 놨잖아.”
“…….”
어젯밤….
“블레이크, …해줘요.”
“말이 너무 길잖아. 앤시아.”
“해, 해줘!”
블레이크의 입에서 그 이야기가 나오자 얼굴이 터질 것처럼 달아올랐다.
그래, 놨었다. 말을 놓긴 했지. 하지만…!
“그, 그, 그, 그, 그건…!”
“이리 와.”
그가 당황하는 나를 끌어안았다. 순진무구한 표정은 사라지고 완연한 수컷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있자.”
“궁으로 돌아가야죠.”
“짧게 하라니까.”
“…너무 늦었어. 어서 가야지.”
여전히 말을 놓는 것이 어색하긴 했지만, 그래도 전보다는 한결 나아졌다.
“조금만 더 이렇게 있자.”
하지만 블레이크가 원하는 대로 말을 놨음에도, 그는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비가 그쳤나 봐.”
닫힌 커튼 사이로 밝은 햇빛이 새어 들어왔다. 어젯밤 내내 유리창을 때리던 빗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네.”
“황궁까지 걸어갈까?”
“다리 아플걸.”
“그럼 광장만이라도.”
어제 비가 오지 않았다면 불꽃놀이가 끝나고 가판과 가게를 구경하며 축제를 즐겼을 거다.
물론 그 대신 다른 추억이 생겼지만, 그래도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하자.”
블레이크가 나의 볼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캔디애플을 먹을래?”
“그건 이제 됐어.”
바닥을 뒹굴던 캔디애플이 다시금 떠올랐다. 먹을 걸 떨어뜨리는 건 사건의 소소함에 비해서 잔상이 오래 남는 것 같다.
“안 떨어지도록 내가 먹여줄게.”
내가 어린애냐고 불퉁하게 뱉으려는데, 블레이크가 나의 입술을 느리게 문질렀다. 그 손길이 묘해서 왠지 야릇한 느낌이 들었다.
“가, 가자.”
갑자기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는데, 블레이크가 나를 꼭 끌어안았다.
“하지만 역시 떠나기 싫다.”
“나도 그래.”
광장을 구경하는 것도 좋지만 지금은 단둘이 있고 싶었다.
나는 긴장을 풀고 그의 품에 안겼다.
블레이크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자, 부끄러움이 점점 사라지며 왠지 모를 설렘에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블레이크가 정말로 내 남자가 된 것 같다. 그리고 나도 그의 여자가 된 것 같았다.
결혼과는 다른 의미로 서로 연결되었다는 감각이 가슴을 채웠다.
-5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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