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1장. 붉은 장미꽃과 아모리아궁
12장. 아무래도 사기 결혼인 것 같습니다
11장. 붉은 장미꽃과 아모리아궁
결국 황궁까지 오고 말았다. 건국기념일에 맞추기 위해서 계속 야영을 한 데다가, 마을에 들러도 잠만 자고 나왔기 때문에 좀처럼 떠날 타이밍을 잡지 못했다.
그래도 수도에 오면 헤어질 생각이었다.
‘저는 이만 가볼….’
“이대로 가버리려고? 가지 마, 로즈.”
하지만 미처 말을 마치기도 전에 블레이크가 그렁그렁한 눈망울로 애원하자, 결국 또 무너지고 말았다. 차라리 윽박질렀다면 편할 거다. 당당히 따지고 화를 내면 되니까.
하지만 저렇게 비 맞은 토끼처럼 처량하게 바라보면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처음 재회했을 때는 그가 많이 변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보름 동안 함께 하면서 내 생각이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키는 훌쩍 컸지만 성격은 어린 시절과 똑같았다.
마차는 포렌스궁 앞에서 멈춰 섰다. 원래 나와 블레이크가 함께 지내기로 했던 곳이었기 때문에 외관은 익숙했다.
황태자가 도착하자, 수많은 궁인과 기사들이 나와서 예를 갖추었다.
블레이크를 모시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구나. 아모리아궁에서 지낼 때보다 열 배는 많아 보였다. 이 정도 인원이면 황제궁 못지않았다. 블레이크의 달라진 위상이 느껴져서 새삼 뿌듯했다.
그리고 궁인들의 가장 앞에는 멜리사가 서 있었다. 7년 지났다고 해도 20대 초반에서 20대 후반이 되었을 뿐이다. 전보다 성숙하고 의복도 고급스러워졌지만, 에드온처럼 외모가 크게 변하지는 않았다.
“로즈, 내리자.”
블레이크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블레이크가 나를 에스코트하며 마차에서 내리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나의 외모 때문이겠지. 이제 사람들의 반응에 익숙해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이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다.
“흠.”
멜리사가 강하게 헛기침을 했다. 그러자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한순간에 정리되었다. 이제는 온화함에 카리스마까지 갖춘 모습이었다.
“제국의 빛이신 황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멜리사가 인사를 하자, 다른 궁인들도 일제히 예를 갖추었다.
“멜리사, 그간 별일 없었지?”
“네, 전하.”
“궁을 관리하느라 고생이 많았다.”
“아닙니다. 고생은요. 하온데 저분은 누구신지요.”
멜리사가 나를 바라보았다. 블레이크가 데려온 여인이라 궁금해할 뿐, 나의 외모를 꺼려 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로즈다. 나의 특별한 손님이지.”
“처음 뵙겠습니다. 로즈 양. 저는 황태자궁의 수석 시녀인 멜리사 리드입니다.”
‘리드’라면 한스의 성이었다. 두 사람은 결혼했구나. 정말 잘됐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 대신 묵례를 했다. 멜리사가 의아해하자, 블레이크가 대신 설명했다.
“로즈는 말을 하지 못해.”
“아, 그러셨군요….”
“로즈의 방을 준비해줘. 2층으로.”
“2층이요?”
“그래.”
만약 블레이크가 방의 위치를 바꾸지 않았다면, 2층에는 그와 나의 침실이 있었다. 그리고 수석 시종이나 수석 시녀, 황태자비 부부가 특별히 초대한 귀빈이 아니라면, 황태자 부부와 같은 층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블레이크가 나를 2층에 머물도록 하자, 뒤에 있던 궁인들이 다시 술렁거렸다. 나 역시도 놀라서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수군거리는 궁인들에게 서늘한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다시금 적막이 찾아왔다.
“로즈, 들어가자.”
블레이크가 싱긋 웃으며 나의 손을 잡았다.
포렌스궁 안으로 들어간 순간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전등, 가구, 카펫, 커튼, 태피스트리, 하나같이 내가 떠나기 전에 골랐던 물건들이었다.
7년 동안 하나도 바꾸지 않았구나…. 내가 골랐던 것들을 하나도 바꾸지 않고 계속 쓰고 있었어.
예전에 내가 골랐던 소파를 매만지는데, 한스가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제국의 빛이신 황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되었다. 너랑 멜리사는 이리 번거로운 인사를 할 필요가 없대도. 몇 번을 말해야 하나.”
“황실의 예법이 있는데 그럴 수는 없지요.”
한스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 역시 별로 바뀐 것이 없었다. 굳이 찾자면 인상이 더 둥글어진 것도 같다.
“그런데 이분은 누구십니까?”
“로즈다. 나의 특별한 손님이야.”
블레이크는 조금 전처럼 나를 소개했고, 우리는 인사를 나누었다. 한스 역시 나의 흉터에 대해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전하,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알았다.”
그는 시큰둥하게 뱉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로즈, 피곤하지? 쉴래? 아니면 식사부터 할까?”
아니, 지금 폐하께서 몇 달 만에 돌아온 아들을 기다리고 계신다는데, 내 밥이 문제인가?
나는 어서 황제에게 가라고 손짓했다.
“괜찮아. 천천히 가도 돼.”
여전히 사이가 좋지 않은 건가? 혹시 내가 갑자기 사라진 것 때문은 아니겠지? 그렇다면 너무 미안했다.
나는 재차 손을 흔들며 포렌스궁 입구를 가리켰다.
‘폐하께 다녀오세요.’
“괜찮아.”
‘다녀오세요.’
내가 강경하게 말하자 블레이크는 삐쭉 입술을 내밀었다. 그 모습이 7년 전과 똑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어서요.’
“알았어. 금방 다녀올게. 한스, 내 중요한 손님이니 특별히 모셔줘.”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는 한스에게 신신당부한 뒤, 황제궁으로 떠났다.
***
“로즈 양, 이쪽으로 오세요.”
잠시 뒤, 멜리사가 나를 2층 방으로 안내했다. 황태자와 황태자비 방과 조금 떨어져 있는 귀빈실이었다.
“곧 담당 하녀를 보내겠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멜리사가 떠난 뒤, 귀빈실을 둘러보았다. 인테리어가 무척 화려했다. 내가 이곳까지는 미처 신경 쓰지 못한 채로 떠났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실내 장식을 고른 모양이었다.
‘어? 이게 뭐지?’
나는 바닥에서 반짝거리는 물건을 집었다. 작은 루비 브로치였다. 청소를 하다가 누가 떨어트린 걸까?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가는데, 시녀들이 모여 있었다.
“저 여자는 뭔데 황태자 전하랑 같은 층을 쓰는 거야?”
“그러니까 귀족도 아닌 거 같은데. 게다가 저 징그러운 흉터는 또 뭐고?”
그들에게 다가가려다가 멈칫했다. 시녀들은 지금 내 뒷담화를 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중 몇 명은 낯이 익었다.
“다들 말을 조심하는 게 좋아. 폴과 매튜 경이 로즈 양을 욕하다가 기사단에서 잘렸댔어.”
저 여자의 이름은 아마도 첼시일 거다. 어렸을 때에 비해 키가 훌쩍 크긴 했지만, 또박또박 말하는 특유의 말투와 날카로운 눈매가 예전 그대로였다.
그녀는 상단 경영으로 유명한 브룩 백작의 외동딸로, 본인도 머리 회전이 빠르고 정보 수집 능력이 좋았다.
“첼시, 그게 정말이야?”
역시 첼시가 맞았다.
“응. 딕스 자작이랑 조앤나가 처형당한 것도 모두 로즈 양 때문이라고 했어. 조앤나가 로즈 양을 해코지하려다가 되레 당한 모양이야.”
“설마 전하의 마음에 든 건가?”
“말도 안 돼. 너는 돌아가신 비 전하를 뵌 적이 없으니까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앤시아 황태자비는 걸어 다니는 인형이었다고! 비 전하를 못 잊으셔서 내로라하는 미인들도 다 거부하시는 전하께서 저런 징그러운 여자를 골랐다고? 말도 안 돼!”
분홍색 머리카락을 지닌 소녀는 샬롯일 거다. 워낙 머리색이 특이한 데다가 나를 무척 좋아했었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다. 그녀는 7년이나 지났는데도 외모나 분위기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샬롯, 조앤나 영애도 예쁘기로 유명했잖아.”
“걔가 비 전하랑 비교가 돼? 못된 성질이 얼굴에 덕지덕지 붙어 나오는데?”
“그런가?”
“에이, 전하께서 외모를 따지시는 분은 아니잖아.”
첼시가 반박했다.
“세상에 얼굴을 안 보는 남자가 어디 있어?”
하지만 샬롯은 첼시의 주장을 다시 재반박했다.
모두가 설왕설래하는데, 조용히 서 있던 갈색 머리 여자가 입을 열었다.
“동정심이야.”
허리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생머리, 머리카락 색과 똑같은 짙은 갈색 눈동자, 눈가의 눈물점, 단정한 옷차림, 차분하면서도 호소력 있는 목소리, 어딘지 처연한 분위기. 그녀를 처음 보았지만 누군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는 카밀라다. 유서 깊은 벤트릭 후작 가문의 영애이자 원작에서 리차드를 사랑하는 여자 중 한 명이었다.
“카밀라 말이 맞아. 폐하가 저런 여자를 마음에 들어 할 리 없어! 분명 동정심일 거야! 전하께서도 저주를 받아서 못생겼었잖아!”
샬롯이 카밀라의 말에 동조했다. 하지만 카밀라는 차갑게 정색했다.
“샬롯, 말조심해. 블레이크 전하께서는 시련을 받으신 거야. 더 큰 힘을 내리기 위해서 여신께서 잠시 시험하신 거라고. 저거랑 같아?”
“미, 미안. 나는 그런 뜻이 아니라…. 꺄아!”
당황하며 변명을 하던 샬롯이 나를 발견하고 비명을 질렀다. 다른 시녀들도 놀란 눈치였다.
브로치만 돌려주고 얼른 돌아가야겠다. 나는 루비가 박힌 새빨간 브로치를 건넸다. 하지만 다들 아무런 말이 없었다.
“샬롯, 네 브로치 아니야?”
첼시가 말하자, 샬롯의 얼굴이 와그작 구겨졌다.
“필요 없어. 병균이라도 옮으면 어떻게 해?”
“무슨 그런 말을 하니?”
첼시가 핀잔을 주며 나에게 다가왔다.
“로즈 양, 샬롯이 실수로 떨어트린 모양이에요.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가 나에게서 브로치를 받아 갔다.
“그걸 왜 받아! 싫어! 버려!”
“샬롯!”
첼시가 나의 눈치를 보며 샬롯을 나무랐다. 그러자 카밀라가 샬롯의 편을 들었다.
“샬롯의 말이 틀린 건 없잖아. 정말로 병균이 옮을 수도 있어. 첼시, 너도 그냥 버리는 편이 좋아.”
“카밀라, 너까지 왜 그래!”
첼시가 당황하며 소리쳤지만 카밀라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가 여기 있어봤자 분위기만 안 좋아질 뿐이겠지. 나는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
솔직히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나를 보기만 해도 좋아서 어쩔 줄 모르던 샬롯의 태도가 특히 충격적이었다. 그녀가 좋아했던 건 앤시아의 외모뿐이었나 보다.
그래도 시녀들의 신분이 높았다. 다들 내로라하는 가문의 영애들이었다.
역사적으로 봤을 때, 시녀가 황족과 결혼하거나 후궁이 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그녀들도 블레이크와 인연을 맺고 싶어서 시녀가 된 거겠지.
아스테릭 제국은 일찍 혼인하는 편이었지만, 고위 귀족 가문의 자녀 중에선 결혼을 늦게 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아카데미에 입학하거나 가문을 이어받는 등의 이유도 있지만, 황실이나 대귀족과 혼맥을 맺으려다 꼬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특히 이번에는 일등 신랑감이었던 카실 공작 가문이 무너지고 블레이크의 저주가 풀리는 등 변수가 많았다. 게다가 황태자비가 갑자기 사라졌지….
카실 가문의 세 아들과 혼담이 오가던 유력 가문의 귀족들은 급작스럽게 블레이크로 선회했을 거다.
원작에서는 리차드의 시녀였던 카밀라와 첼시가 블레이크의 시녀가 된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녀들의 가문에서는 이미 혼기를 놓친 이상 어떻게 해서든 블레이크와 인연을 맺을 생각일 거다. 그가 다이애나와 결혼을 한다고 해도 황비 자리가 남아 있고, 후궁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인기가 많아졌구나….
조앤나부터 시작해서 소설에서는 리차드를 좋아했던 여자들이 이젠 블레이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카밀라 벤트릭은 다이애나 다음으로 비중이 높은 여자 캐릭터였다.
카밀라는 후작 가문의 서녀였다. 원래는 버림받은 자식이었지만, 벤트릭 후작은 황궁과 혼맥을 맺을 필요성을 느끼고 그녀를 받아들인다.
카밀라는 리차드를 사랑하며, 그의 악행을 눈치채고도 모르는 척 넘어가는 인물이었다.
“오직 저만이 리차드 님을 이해할 수 있어요! 우린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전 리차드 님밖에 없어요.”
그렇게 리차드에게 애원하고 또 애원했었지. 지위나 재산, 외모, 그 모든 것과 상관없이 순수하게 리차드라는 인간에게 반한 거라며,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라고 했다.
그런 그녀가 지금은 블레이크의 시녀가 되었다. 혹시 리차드가 심은 첩자는 아니겠지? 리차드는 어떻게 되었을까?
7년 전의 리차드와 천 년 전 필립의 얼굴이 동시에 떠올랐다. 상상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지는데, 탁자 위에 작은 불빛이 일렁거리더니 쉘이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라온텔 님.]
‘오랜만이야. 쉘.’
혼돈의 계곡에서 만난 이후 처음이었다.
‘무슨 일 있어?’
쉘의 표정이 어딘지 뾰로통해 보였다. 내가 묻자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 말을 쏟아냈다.
[저는 사람을 잡아먹은 적이 없어요!]
‘응?’
[마쿨은 사람을 안 먹는다고요! 우리가 라온텔 님을 먹었다니,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할 수 있죠!]
앤시아가 어둠의 문에서 살아남았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마쿨에게 잡아먹혔을 거라며 기사들이 종종 떠들었었다. 쉘은 그 말을 들은 모양이다.
그렇다면 보이지는 않았어도 계속 내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는 건가?
‘나를 보고 있었던 거야?’
[!!!]
쉘이 화들짝 놀라며 나를 쳐다보다가 얼른 시선을 피했다. 아무래도 정답인 모양이다.
[오, 오늘은 여신님의 말씀을 전하러 왔답니다!]
그녀는 서둘러 날아올랐다. 쉘이 날갯짓을 하며 원을 그리자, 그 움직임이 하나의 선이 되며 투명하게 빛나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빛 너머에서 세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라온텔, 그 모습으로 살아보니 어때? 모두가 경멸하는 추악한 육체를 벗어 던지고 싶지 않아?]
‘추악하다고 생각하진 않아. 흉터가 있을 뿐이야.’
[가식을 떨기는! 너는 원래 그랬어! 이 세상에서 가장 착한 척, 선한 척! 솔직히 말해보라고! 원래의 몸으로 돌아가고 싶잖아? 모두가 아름답다고 찬양하던 그 얼굴을 원하잖아! 내 제안을 포기하고 땅을 치며 후회했을 거야? 안 그래?]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광기에 젖어 있었다. 천 년 동안 고통을 겪었는데, 그 마음이 치유되는 건 불가능에 가깝겠지.
‘후회한 적 없어, 세르.’
솔직히 혐오감에 가득 찬 사람들의 시선을 느낄 때마다 스스로가 작아지는 것 같고 상처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나를 보고 웃어주었다. 흉터가 가득한 손을 꼭 잡으면서도 조금의 꺼려 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에드온, 멜리사 한스, 제이든처럼 흉터를 의식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니 괜찮다.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좋은 사람들만 생각하기에도 모자랐다. 외모만 가지고 흉을 보며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사람들까지 신경 쓰고 싶지는 않았다.
[황태자가 너한테 동정을 좀 베풀었다고 감동한 거야? 네가 이렇게 흉측해진 걸 알면 어떨 거 같아? 잠깐은 미안해하겠지만 얼마나 갈까? 결국은 너를 버리고 다른 여자랑 결혼할 거야. 너는 추억으로도 남지 못하겠지. 너같이 징그러운 여자가 반려였다는 사실에 몸서리를 칠걸!]
‘블레이크는 안 그래.’
블레이크가 외모 때문에 나를 떠날 리는 없다. 처음에는 그런 생각도 했었지만, 이제는 확실히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그럴 사람이 아니다. 외모 때문에 사람을 차별하지 않을 거다.
[하하. 웃기지 마! 사람의 마음은 결국 변해! 필립도 그랬어! 내 몸에 반점이 생기자 결국 나를 버렸지.]
‘뭐…?’
필립은 처음부터 세르를 이용할 생각으로 접근했다. 그리고 여신의 힘을 얻자마자 그녀를 가차 없이 버렸다. 그런데 그 사실을 잊어버린 건가?
자신이 병에 걸리고 외모가 변해서 버림받게 된 거로 기억하는 거야?
[내가 너처럼 아름다웠다면 필립은 나를 버리지 않았을 거야! 반점만 생기지 않았다면 나를 버리지 않았을 거라고!]
‘세르, 너 설마….’
필립을 아직도 좋아하는 거야?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질문만으로도 세르를 모욕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라온텔! 친구로서 마지막 기회를 줄게. 이제 정말 마지막이야! 황태자를 죽여! 이 역겨운 제국을 모조리 없애버리고 우리 둘만 남는 거야? 우리는 친구잖아. 다른 더러운 인간들은 필요 없잖아?]
‘필요해.’
[…뭐라고?]
‘소중한 사람들이 많아. 그들을 죽이고 나만 살아남을 수는 없어.’
[네가 누군지 알아보지도 못하잖아! 그런 인간들을 위해 희생하려는 거야! 누가 알아준다고! 아무도 몰라! 너만 비참하게 개죽음당할 뿐이라고! 흉측해진 너를 누가 좋아하겠어! 네가 죽는다고 해도 동정조차 하지 않을걸!]
‘상관없어.’
정말로 상관없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데도 괜찮다. 천 년 전, 락슐이 죽고 나의 삶은 지옥의 연속이었다. 또다시 그를 먼저 떠나보내느니 내가 죽는 게 나았다.
그리고 나 하나 살겠다고 다른 사람을 죽일 수도 없었다.
[한심해! 멍청해! 너는 버림받을 거야! 결국 비참하게 버림받을 거라고!]
‘그런다고 해도 후회하지 않아.’
[하하하하하. 그 다짐이 언제까지 갈지 궁금한데? 이제 곧 황태자를 죽일 테니 제발 원래대로 돌려달라며 무릎 꿇고 빌게 될걸?]
그녀의 스산한 웃음소리를 듣는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세르에게 다급히 묻는데,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로즈 양,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첼시의 목소리였다. 내가 말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는 특별한 허락을 기다리지 않고 문을 열었다.
나는 깜짝 놀라며 탁자 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쉘도 투명한 공간도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안녕하세요, 로즈 양. 저는 황태자 전하의 시녀인 첼시 브룩이라고 합니다.”
첼시는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나도 가볍게 묵례를 하였다.
“방금 전의 일은 죄송합니다. 제가 모두를 대신해서 사과드리겠습니다.”
‘괜찮아요.’
나는 손사래를 쳤다. 그러자 첼시의 얼굴에 가벼운 물음표가 떠올랐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한 거다.
‘괜. 찬. 아. 요. 저엉말. 괘앤. 차안. 아. 요.’
몇 번이나 또박또박 말하자, 나의 입 모양을 유심히 살피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으시다고 하신 건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과 글을 모두 못하니 간단한 의사소통을 하는 것조차 어렵구나. 블레이크랑 있을 때는 이 정도의 대화는 아무 문제도 없었는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황태자궁의 시녀들은 대부분 전하를 흠모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로즈 양을 보고 경쟁심을 느껴서 더 날카롭게 구는 거죠. 질투하는 거니,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첼시는 내가 상처를 받았을까 봐 걱정돼서 온 모양이다.
그녀는 ‘야수와 영애님’에서 짧게 등장하는 단역이었다.
리차드는 브룩 가문의 재산을 가로채기 위해 그녀를 좋아하는 척하고, 첼시도 가문의 이익을 위해 리차드와 결혼하려 한다.
하지만 첼시는 곧 그의 실체를 간파하고, 리차드의 악행을 세상에 밝힐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그전에 리차드에게 발각되어 살해당하고 만다.
똑똑한 인물이긴 했지만 너무 짧게 나와서 특별히 기억에 남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이렇게 보니 머리가 좋을 뿐 아니라 배려심도 있었다.
‘네. 감사합니다.’
첼시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의 입 모양을 읽기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다시 말을 반복하자, 겨우 알아들었는지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는 제가 로즈 양을 모실 겁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첼시가 나를?
그녀는 백작 영애였다. 내가 황태자의 손님이라고는 하나, 신분이 명확하지 않았다. 어쩌면 평민이 아니라 노예일 가능성도 있었다.
그런데 하녀도 아니고, 황태자의 정식 시녀인 첼시가 나의 시중을 드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어째서 그녀가 내 담당이 된 거지? 하녀 중에서 나의 시중을 들겠다는 사람이 없었나? 아니면, 멜리사의 명일까?
‘괜찮으시겠어요?’
나는 입을 크게 벌리며 또박또박 말했다.
“아, 알았다. 괜찮냐고 물어보신 거죠?”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그 모습이 마치 어려운 문제를 풀고 기뻐하는 고3 수험생 같았다.
“네. 제가 지원한걸요.”
그녀가 원했다고? 눈을 휘둥그레 뜨자, 첼시가 의미심장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저는 시녀가 된 지 2년째거든요. 그런데 황태자 전하께서 웃으시는 모습을 오늘 처음 봤어요. 로즈 양께서 전하를 웃게 만드신 거죠. 그 순간 대단하신 분이라는 걸 직감했습니다. 그래서 모시고 싶었죠.”
그녀의 당찬 미소를 보자, 원작의 대사가 떠올랐다.
“황자 전하의 친어머니께서 로움족이란 사실을 알고 있어요. 로움족의 출신으로 제국을 휘어잡다니, 정말 대단한 거잖아요. 이런 분이라면 결혼해도 좋을 것 같았죠.”
첼시는 원작에서 리차드에게 한 것과 비슷한 말을 나에게 했다.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원작과는 달라졌다지만, 블레이크도 아니고 내가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런데 블레이크가 웃는 걸 처음 봤다니…? 수도로 오는 내내 블레이크는 자주 웃었다. 하지만 황궁에서는 그러지 않았던 건가…. 그는 7년 동안 어떻게 지내온 거지?
잠시 생각에 잠기는데, 문이 열리며 블레이크가 들어왔다.
“누구지?”
그는 첼시를 향해 물었다.
“로즈 양의 시중을 담당하게 된 첼시 브룩입니다.”
“그렇군. 첼시, 로즈를 잘 부탁한다.”
“저야말로 로즈 양을 모시게 돼서 영광입니다.”
그녀는 활짝 웃었다. 첼시의 웃음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정말로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원해서 나의 시녀가 되어준 거구나.
“첼시, 식사를 준비해 주겠나?”
“여기서 드시겠습니까?”
“그래.”
“알겠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뒤 밖으로 나갔다.
잠시 뒤, 화려한 식사가 준비되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황태자를 위해서 공을 들여 만든 요리들이었다.
수프를 입에 대는 순간 미소가 나왔다. 이건 테리의 요리였다. 인사할 때 보이지 않아서 걱정했었는데, 요리를 만들고 있었구나.
“입맛에 맞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리는 하나같이 맛있었다. 다만 동방의 요리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이 다소 의외였다. 테리는 동방의 요리를 좋아했고, 블레이크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한식은커녕 퓨전이라고 할 만한 것조차 보이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자 디저트가 나왔다. 그리고 홍차에 타서 먹을 수 있도록 다양한 재료들이 준비되었다.
블레이크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평소 좋아하던 레몬잼을 일부러 무시하며 각설탕 하나만을 넣었다.
그런데 블레이크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엄청 빨리 젓네.”
무슨 뜻인지 몰라서 그를 바라보자, 블레이크가 빙그레 웃으며 찻잔을 가리켰다.
“앤시아도 그랬거든. 각설탕이 녹는 걸 못 기다리고 마구 휘저었어. 언제나 어른스러운 편이었는데 그럴 때는 꼭 어린아이 같아서 귀여웠지.”
어린아이 같은 게 아니라, 한국인이라서 그런 거거든요….
한국에서는 느긋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지만, 이 세계의 기준으로는 성격이 급한 편이었다. 아무튼 어린애 같은 건 아니다….
하지만 말을 못 하니 설명할 수도 없었고, 해서도 안 됐다.
‘저는 그분이 아니에요….’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블레이크는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레몬잼을 홍차에 넣어줬다.
“먹고 싶으면 먹어. 억지로 참지 말고.”
‘아닌데….’
“매번 아니라는 말만 하네. 내가 잘못 알아듣는 건가?”
‘정말 아닌데….’
블레이크는 엷게 웃더니 나의 손을 잡고 스푼을 저어주었다.
“얼른 저어야지. 빨리빨리 녹게.”
나는 그의 팔을 찰싹 때렸다. 틈만 나면 사람을 놀린다니까. 어렸을 때는 내가 놀리는 입장이었는데, 왠지 분했다.
하지만 그는 그저 재밌어하며 웃을 뿐이었다.
“글을 배우자. 너랑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얼른 글을 배우고 싶었다. 그를 떠나기 전에 최소한 작별 편지 정도는 제대로 쓰고 싶다.
***
다음 날, 날카로운 인상의 여성이 황태자궁을 방문했다.
그녀의 이름은 캔들이며, 국립 아카데미에서 제국어를 가리킨 저명한 교수였다. 7년 전에도 그녀의 수업을 듣고 싶었지만, 그때는 현직 교수였기 때문에 시간이 없었다.
지금은 은퇴하여 수도에서 지낸다고 한다.
수업을 들으면 다시 글을 쓸 수 있을까? 세르는 나의 언어 능력을 가져갔다. 그러니 공부를 하더라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설렘과 걱정 속에 캔들 교수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를 만나는 순간 나의 기대는 산산이 부서졌다.
“리드 부인, 지금 나보고 이 계집을 가르치라는 겁니까?”
캔들은 나를 보자마자 거친 불쾌감을 표하며 멜리사에게 따졌다.
“캔들 교수님, 로즈 양은 황태자 전하의 중요한 손님입니다. 예의를 갖추시죠.”
“중요한 손님이요? 리드 부인께서는 유모가 아니라 황태자 전하의 수석 시녀이십니다. 전하의 신임을 받고 계신 만큼 책임을 지고 보필하셔야죠. 언제까지 전하를 감싸고만 도실 생각이십니까?”
캔들은 멜리사가 자신이 가르치는 아카데미의 학생이라도 되는 것처럼 질책했다. 그러자 멜리사도 언짢은 기색을 비쳤다.
“말씀이 지나치시군요.”
“지나치지 않습니다. 전하께서 평범한 분이십니까? 여신의 저주에서 벗어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저런 불길한 계집을 곁에 두시는 겁니까? 저런 괴물을 가까이했다가 여신의 노여움을 사서 저주가 재발하면 책임질 수 있습니까? 리드 부인께서는 수석 시녀가 되어서 말리지 않고 무얼 하시는 겁니까? 이 일은 도무지 간과할 수 없군요!”
“간과하지 않으면 어쩔 셈이지?”
뒤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리자, 블레이크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저벅저벅 걸어와서 내 옆에 섰다.
“학식은 갖췄을지 몰라도 예의는 없는 인간이군.”
목소리는 차분했다. 하지만 낮게 깔린 분노가 서재를 가득 채울 정도로 일렁거렸다. 캔들도 그것을 느꼈는지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그런 것이 아니오라. 전하를 위해 진언을 드린 것입니다. 저런 추악한 계집을 곁에 두신다면, 전하의 명성에 누가 되실….”
“추악한 건 그대의 영혼이겠지.”
“전하, 어찌 그런 말씀을….”
캔들 교수는 충격을 받은 나머지 말을 잇지 못했다.
“당장 꺼져. 앞으로 마주칠 일이 없길 바라네.”
“저, 전하, 잠시만요! 제 말은 그게 아니라…!”
그녀가 다급히 변명하려 했지만, 그 전에 멜리사와 첼시가 그녀를 데리고 나갔다. 그러자 서재에는 나와 블레이크 둘만 남게 되었다.
“미안. 내가 좀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나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캔들은 명망 높은 학자였다. 블레이크는 나를 생각해서 최고의 스승을 붙여주려 한 거다.
“글은 내가 가르쳐 줄게.”
‘전하가요?’
“응.”
블레이크가 산뜻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바쁘시잖아요.’
블레이크는 이제 어엿한 제국의 황태자였다. 황제를 도와서 정무를 수행하는 등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석 달 만에 황궁에 돌아왔는데, 한가로이 내 글공부나 도와줄 시간은 없을 터였다.
“걱정하지 마. 너랑 함께 있을 시간은 있으니까.”
그는 책꽂이에서 책을 몇 권 꺼내서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오늘은 일단 이걸로 하자. 내일부터는 교재를 쓰고.”
그가 자리에 앉자, 나도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정말로 수업이 시작되었다.
***
“자, 이게 ‘로즈’야. 한번 써볼래?”
블레이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종이에 내 이름을 적었다.
손가락에 힘이 섬세하게 들어가지 않았다. 오른손은 화상 흉터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펜을 잡고 있으면 손이 떨렸다.
-로즈.
그 때문에 다소 삐뚤빼뚤하긴 했지만 그래도 철자는 정확했다. 꼭 초등학생 같은 글씨체이긴 해도 내 이름을 직접 썼다는 데 만족했다.
언어 능력을 잃어버리긴 했지만 다행히 새로 배우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게다가 제국어는 말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이 쉽게 익힐 수 있도록 만든 표음 문자였다. 글자는 잊었지만 말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배우는 속도도 빨랐다.
블레이크는 내가 쓴 글씨에 눈을 떼지 못했다. 앤시아와 달리 삐뚤빼뚤 엉성한 글씨체였기 때문에 실망한 걸까? 하지만 이 기회에 내가 앤시아라는 의심을 완전히 거두는 편이 나았다.
“잘했어. 다음은 인사를 써보자.”
그는 가볍게 웃으며 진도를 나갔다. 요즘은 블레이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
앤시아라는 의심을 거둔 건지, 아니면 아직도 믿고 있는 건지….
“‘안녕’은 이렇게 쓰는 거야. 써볼래?”
확실한 건, 이럴 때마다 기분이 묘하다는 거다. 7년 전에는 내가 그를 가르쳤었는데, 이제는 배우는 입장이 되어버렸다.
-안녕.
“맞아.”
그가 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작은 일에도 칭찬받는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
글을 배우는 건 무척 재미있었다. 이미 알고 있었던 걸 다시 하는 거니까 조금 억울한 기분이 들기도 했었지만, 이제는 그저 좋았다.
예전에 익혔던 감각이 어렴풋이 떠오른 덕분에 익히는 속도도 제법 빨라서, 이제는 쉬운 책 정도는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블레이크가 없어도 혼자 공부를 하기 위해 서재로 가는데, 시녀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건국제 때 입을 드레스를 아직 못 골랐어.”
“너무 많이 맞추니까 그러지.”
“하지만 건국 천 년이 되는 역사적인 날이라고! 어쩌면 블레이크 전하의 에스코트를 받을지도 모르잖아!”
샬롯의 말에 다른 시녀들은 조소를 지었다.
“그럴 리가 있어? 언제나 혼자 입장하시잖아.”
“그래, 만약 함께 입장해도 다이애나 님이 있잖아. 우리랑 가겠냐?”
“말조심해. 우리는 황태자의 시녀야. 확실하지도 않은 소문을 사실처럼 떠들지 마.”
카밀라가 다른 시녀들을 나무랐다.
“나는 사실 같은데. 황태자 전하께서도 이제 성인이시잖아. 결혼을 하시겠지. 저번에 다이애나 님이 약속도 없이 황태자궁에 찾아왔는데도 한마디도 나무라지 않았잖아.”
“맞아. 오히려 방에 들이셨어.”
시녀들이 말을 할수록 카밀라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그런 헛소문이 어디서 시작됐나 했더니, 바로 너희들이었구나!”
“우리가 뭘?”
“어차피 몇 년 동안 이름도 못 외운 우리보다는 다이애나가 훨씬 가능성이 큰 거 아니야?”
“알량한 추측을 사실처럼 말하지 말란 말이야.”
카밀라가 싸늘하게 일갈했다. 블레이크가 다이애나랑 결혼할 거란 이야기는 단순한 소문이었던 건가?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조용히 있던 첼시가 중재에 나섰다.
“다들 진정해. 우리끼리 이런 거로 싸우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헛소문은 바로잡아야지.”
“헛소문이면 어차피 사라져. 건국제 때 발표를 하지 않으면 흐지부지 끝날 이야기야. 어? 로즈 님!”
카밀라를 달래던 첼시가 나를 발견하고는 뛰어왔다.
“무슨 일이세요?”
나는 수첩에 글씨를 썼다.
-책을 보려고요.
서재에 가려면 이 복도를 지나가야 하는데, 시녀들이 막고 있어서 오도 가도 못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 거라면 저한테 말씀하시죠.”
우리가 대화하는 사이 시녀들은 자리를 떠나버렸다. 첼시를 제외하고는 다들 나를 피했다. 이제 저런 반응도 익숙했다.
흉터만으로 모든 걸 판단하는 사람들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만 생각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랐다.
나와 첼시는 함께 서재로 갔다.
“이제 곧 건국제네요. 원래 건국제 축제는 닷새 정도지만, 이번에는 건국한 지 천 년이 되는 해라서 열흘 넘게 열릴 거라고 해요. 로즈 님은 가실 건가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사람이 많은 곳은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가끔씩 어지럽고 거센 기침이 나왔다. 사람이 많은 곳에 갔다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블레이크랑 함께 축제에 가기로 약속했었는데, 결국은 이루어지지 못하겠구나….
“재밌을 텐데. 엄청 성대하게 열릴 거예요.”
내가 재차 고개를 젓자, 그녀도 더는 권하지 않았다.
“그래도 로즈 님이 남아 있으면 전하께서도 밖에 나오실지도 모르겠네요.”
블레이크가 밖에 나온다고? 무슨 뜻인지 몰라 첼시를 바라보자, 그녀가 말을 덧붙였다.
“전하께서는 축제 기간만 되면 아모리아궁에 틀어박혀 계시거든요.”
“…….”
“아, 아모리아궁은 남쪽에 있는 별궁이에요. 전하께서는 어린 시절에 그곳에서 지내셨거든요.”
“…….”
방으로 돌아와서 책을 펼쳤지만, 글자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떠나 있던 7년 동안 블레이크는 단 한 번도 축제에 참석하지 않은 채, 아모리아궁에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블레이크가 저주에서 풀리고, 제가 미아가 되지 않을 만큼 키가 많이 크면, 우리 함께 축제를 보러 가요.”
“응. 꼭 같이 가는 거야.”
그때 그 약속 때문이겠지. 왜 그런 약속을 한 걸까.
나 때문이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런 약속은 절대로 하지 않았을 거다.
첼시의 말에 따르면 블레이크는 황궁 무도회가 열려도 건국제나 신년 무도회처럼 중요한 행사가 아니면 참석하지 않았고, 그마저도 얼굴만 비치고 곧장 빠져나온다고 했다. 다른 여인과 춤을 춘 적도 없었다.
그것도 나 때문이겠지.
첫 춤이나 축제 같은 것에 의미를 부여하지 말걸….
저주가 풀렸으면 즐겁고 행복하게 지냈어야지. 축제도 가고 파티도 즐기며 남부럽지 않게 살았어야지….
눈물이 후두두 떨어지며 눈앞이 흐려졌다. 책에 적힌 글씨가 보이지 않았다. 이는 눈물 때문이 아니었다.
어지러웠다. 이 육체는 앞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는 걸까?
블레이크에게 더 큰 슬픔을 주기 전에 떠나야 하는데, 아직 용기가 나지 않았다.
황궁 밖에서 혼자 살아갈 자신은 있었다. 한국에서도 그랬으니까.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혼자서 살아남아야 했다. 이미 경험이 있었다. 어떻게든 밥을 벌어 먹고살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떠난다면 다시는 블레이크를 볼 수 없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는 아직 그를 떠날 준비가 되지 않았다.
“로즈.”
노크와 함께 블레이크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다급히 눈물을 훔쳤다. 하지만 블레이크에게 들키고 말았다.
“로즈,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눈물 때문에 앞이 흐렸지만, 목소리만으로도 블레이크가 얼마나 걱정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얼른 수첩에 글씨를 휘갈겼다.
-책이 슬퍼서요.
“정말로 그것 때문에 그래?”
고개를 끄덕이며 손으로 계속 눈물을 훔치는데, 블레이크가 손수건을 꺼내 직접 닦아주었다.
“많이 슬펐나 보네.”
나는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 전환하게 밖에 나갈까?”
깜짝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밖에 나가자고? 블레이크는 혼돈의 계곡에 갈 때가 아니면 외출도 거의 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내가 가지 않겠다고 하면 블레이크도 안 나가겠지…. 그가 나와의 약속이나 흔적을 잊고 자유로워졌으면 좋겠다.
고개를 끄덕이자, 블레이크는 환하게 웃었다.
“실은 이걸 준비했어.”
블레이크가 새하얀 상자를 건넸다. 그 안에는 은으로 만든 심플한 가면이 들어 있었다. 과거 블레이크가 쓰던 것과 같은 모양이었다.
“나는 상관없지만, 혹시라도 신경 쓰인다면 이걸 쓰도록 해.”
그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내가 상처받을까 봐 걱정하는 거다.
블레이크는 저주의 문장을 지니고 있었다. 화상 흉터처럼 외모에서 오는 거부감뿐 아니라, 여신이 직접 저주를 내릴 괴물이라는 경멸과 증오를 받았다. 같은 경험을 한 사람으로서 나를 배려해주는 거다.
‘고마워요.’
나는 입 모양으로 감사를 표했다. 블레이크와 함께 있을 때는 괜찮았지만, 다른 사람과 있을 때는 흉터를 가리고 싶었다.
***
아직 건국제가 시작되지 않았음에도 광장은 벌써부터 축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가판에서는 각 지역의 다양한 음식을 팔았고, 음유시인이 천 년이나 이어진 아스테릭 제국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다. 사람들도 평소보다 훨씬 많았다.
아니, ‘평소’보다 많은 건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기억하는 건 7년 전 광장이었으니까. 아무튼 광장은 7년 전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사람이 엄청 많네요.’
“그러게. 아직 축제 시작 전인데도 많네. 괜찮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면을 쓰고 하얀 장갑도 꼈기 때문에 흉터는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축제 때문에 특이한 복식을 한 사람이 많아 가면에 신경을 쓰는 사람도 없었다.
“우리 로즈, 잃어버리지 않게 조심해야겠다.”
그는 내 손을 꼭 잡았다.
“…….”
설마 흉터가 아니라, 내가 예전에 했던 말 때문이었나?
7년 전 빛의 축제 때 미아가 돼서 길을 잃어버릴까 봐 무섭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역시 내가 앤시아가 아니라는 말을 믿지 않는 건가? 아니면 사람이 많으니 평범하게 하는 말일까?
“정말로 괜찮아? 사람이 많아서 무서우면 말해야 해.”
그는 거듭 확인했다. 나를 정말 어린아이로 보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과보호였다.
‘괜찮아요. 사람이 많아서 즐거운걸요.’
“그럼 다행이고.”
그는 눈가를 사르르 접으며 아이같이 천진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광장이 무서웠어. 물론 지금은 아니지만 어렸을 때는 엄청 무서운 곳인 줄 알았어. 나는 저주에 걸려서 궁 밖으로 나가지 못했거든.”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래서 책으로만 세상을 배웠어. 소설을 보면 광장에서 매번 사건이 나는 거야. 그래서 북쪽 설산이나 혼돈의 계곡보다 훨씬 위험해 보였어. 바보 같지?”
‘아니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나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부인이 광장에 가면 혼자 겁에 질려서 안절부절못했어.”
“…….”
“이렇게 함께 나갔다면 좋았을 텐데.”
그가 손깍지를 끼며 나를 바라보았다. 지나가는 듯 가벼운 목소리와 달리 눈동자에 슬픔과 후회가 담겨 있었다. 나는 차마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대로 계속 그를 바라보면 울어버릴 것만 같았다.
우리는 손을 꼭 잡은 채 걸었다.
아직 축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았음에도 볼거리가 풍부했다. 독특한 먹을거리도 많고, 묘기를 부리거나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박수가 저절로 튀어나올 만큼 훌륭한 묘기도 보고, 처음인지 잔뜩 긴장하는 데다 실수를 연발해서 울상이 된 초보 음유시인에게 응원도 해주었다.
이렇게 마음 놓고 웃어본 게 얼마 만이지? 한국에서 살다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 뒤에도 언제나 마음 한편이 불안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블레이크의 저주가 퍼지진 않았는지 확인하고, 열이 나진 않는지, 혹시 아픈 건 아닌지 매일 체크했다.
그의 저주를 푸는 방법을 찾지 못해서 초조하고, 잠을 설친 적도 많았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칠흑 같은 어둠의 문을 헤맬 때, 힘들고 고통스럽긴 해도 불안감만큼은 덜했던 것 같다. 어쨌든 저주를 푸는 방법은 찾은 거니까.
나는 블레이크를 바라보았다. 저주의 문장이 사라지고 건강하게 성장한 모습을 보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비록 내 삶이 얼마 남지 않았더라도, 블레이크가 아프지 않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티끌 하나 없이 아름다운 그의 왼쪽 얼굴을 바라보는데, 블레이크가 고개를 돌렸다.
“그런 표정 짓지 마.”
“……?”
무슨 뜻인지 몰라서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오르는데, 블레이크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꼭 떠날 것 같은 얼굴이잖아.”
“…….”
나는 그냥 미소를 지었다. 떠나고 싶지 않아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하얀 거짓말조차 할 수가 없다.
‘배고파요.’
“…응. 맛있는 거 먹자.”
블레이크는 레스토랑으로 가려고 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으며 가판 음식을 가리켰다. 이렇게 나온 만큼 평소에 먹지 못했던 요리들을 먹고 싶었다.
우리는 가누아 왕국의 전통 음식을 먹었다. 겉모양은 만두 같은데, 속은 피자 같았다. 전체적으로 피자 호빵 같은 맛이었다.
어쨌든 맛있었다. 디저트로 캔디애플을 샀는데 먹기가 은근히 불편했다. 어떻게든 먹기 위해 노력하다가 땅에 떨어트리고 말았다.
아, 아깝게….
흙먼지가 잔뜩 묻은 캔디애플을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는데, 블레이크가 웃음을 터트렸다.
얄미워서 흘겨보았지만, 그는 오히려 더 크게 웃었다.
“미안. 귀여워서.”
‘뭐가 귀여워요?’
“사탕을 떨어뜨리는 게 꼭 어린아이 같잖아. 어렸을 때도 안 그랬으면서.”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제가 어렸을 때 그랬는지 안 그랬는지 전하께서 어떻게 아세요?’
다급하게 부정했지만, 그는 가만히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왜 이렇게 시무룩해?”
‘아깝잖아요.’
“원한다면 천 개도 사줄 수 있어.”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아까운 거예요.’
먹을 걸 떨어뜨리거나 요리를 쏟아서 못 먹게 되면, 금전적인 손해와 별개로 정신적인 충격이 느껴진다.
한국에서 살았을 때, 실수로 수박을 떨어뜨린 적이 있었다. 그때 산산이 조각난 수박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어릴 때라 할머니한테 혼난 것도 아닌데, 아직까지도 그걸 떠올리면 너무 아까웠다.
미련 가득한 눈으로 땅에 떨어진 커다란 사탕을 바라보고 있는데, 블레이크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로즈 귀여워서 어떡하지?”
나는 화들짝 놀라서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는 정말로 귀엽다는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블레이크가 나를 귀여워한다는 사실이 왠지 충격이었다.
듬직한 아내였는데…. 천 년 전에도 당당한 빛의 마법사이자 동료였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또 먹을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 사탕은 됐다. 보기만 예쁘고 먹기도 불편하다.
“사줄게.”
‘안 먹어요.’
“알았어. 그만 놀릴게. 화 풀어.”
‘화 안 났어요.’
“정말이지?”
블레이크가 무릎을 굽히며 나를 올려 보았다. 순진한 고양이처럼 눈을 반짝이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진짜 화가 났더라도 사르르 녹아버릴 것 같았다.
아무래도 자기가 잘생긴 걸 너무 잘 아는 것 같다. 왠지 얄미웠지만, 그 전에 웃음이 먼저 터졌다.
배를 채우고 우린 다시 광장을 구경했다. 축제를 맞이하여 많은 가판들이 새롭게 들어서기도 했지만, 기존의 가게들도 주변을 화려하게 꾸미고 건국제 특별 행사를 마련하는 등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우리는 서점으로 들어갔다.
다른 곳과 달리 서점은 비교적 한산한 편이었다. 아직 글을 읽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스레 동화책으로 시선이 갔다.
나는 눈에 가장 잘 띄는 자리에 놓여 있는 동화책을 집었다.
‘축복의 공주님’이라는 제목의 동화였다.
나는 책을 펼쳤다. 그리고 후회했다.
첫 페이지에는 금발 머리 소녀와 야수의 얼굴에 사람의 몸을 한 소년이 결혼식을 올리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축복의 공주와 이웃 나라 괴물 왕자의 결혼식을 올렸답니다.
이건 나와 블레이크의 이야기를 담은 동화였다. 나는 책을 그대로 덮으려다가 실수로 가장 마지막 장을 보았다.
저주에서 풀린 왕자는 아름다운 미남이 되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축복의 소녀는 목숨을 잃는다. 홀로 남겨진 왕자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끝으로 동화는 막을 내렸다.
홀로 우는 소년의 그림이 마치 블레이크 같아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무슨 책을 보고 있어?”
나는 황급히 책을 덮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우리 나가요.’
다른 동화들도 ‘축복’이나 ‘괴물’ 같은 제목들이 많이 보였다. 전부 우리의 이야기를 쓴 거겠지.
“그래, 나가자.”
우리는 서점을 나왔다. 잠시 말없이 걷는데, 블레이크가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기 가볼까?”
블레이크가 말한 곳은 제도에서 가장 값비싼 보석을 취급하는 유명 보석상이었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처음 궁에 왔을 때도 블레이크는 나에게 옷과 보석들을 잔뜩 선물해주었다.
그때도 거절하려 했지만 이미 값을 전부 치른 상태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받고 말았다.
‘전에도 말했잖아요. 저는 보석 같은 건 필요 없어요.’
어차피 떠날 텐데, 보석 같은 건 괜한 짐이었다. 나는 내 흔적을 많이 남기고 싶지 않았다. 조용히 존재감을 지우다 사라지고 싶었다.
“그냥 구경만 하는 거야.”
“싫어요.”
뻔히 보이는 거짓말이다. 들어가는 순간 뭐든 사주려고 하겠지.
“그럼 선물을 살 테니까 도와줘.”
‘선물이요?’
“응. 여자한테 줄 선물.”
시녀들은 블레이크와 다이애나의 결혼설이 헛소문이라고 말했다.
블레이크는 황궁으로 돌아온 이후 늘 나와 함께 있었다. 황태자로서 황제의 정무를 도와줄 때를 제외하고는 내 곁에 있으려 했다.
아무리 비밀리에 진행된다고 한들 건국제에서 결혼 발표를 하려면 준비할 게 많을 텐데, 그런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시녀의 말을 듣기 전부터, 헛소문일지도 모른다고 어렴풋이 짐작하곤 있었다.
헛소문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광장에도 함께 나온 거다. 하지만 다른 여자에게 선물을 준다고 하니, 내가 잘못 판단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혼녀한테 주시게요?’
“약혼녀는 없고, 부인한테 줄 거야.”
블레이크는 곧장 대답했다.
‘…결혼은 안 하세요?’
“이미 했다니까. 내 아내의 이름은 앤시아야. 앤시아 라 엘르 제라실리온.”
그는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리고 못을 박듯 단호한 음성으로 뱉었다.
“다른 사람은 없어.”
“…….”
블레이크는 나의 손을 잡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부인에게 선물을 줄 필요는 없다, 그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내 앞에는 다양한 반지들이 놓여 있었다.
이미 내 앞에 있는 것만으로도 10개가 넘는 거 같은데, 보석상 직원들이 계속 반지를 가져와서 내 앞에 가져다 놓았다.
백금에 다이아몬드를 박은 디자인의 반지였는데, 언뜻 봐도 결혼반지처럼 보였다.
“로즈, 뭐가 가장 마음에 들어?”
블레이크는 가끔 결혼반지를 낀 나의 손가락을 만지곤 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때처럼 왼손 약지를 매만지며 물었다.
세르의 몸으로 들어오며 결혼반지는 사라졌다. 지금은 아무것도 끼지 않았는데도, 그는 예전처럼 반지가 있었던 자리 위에 원을 그렸다.
그의 손가락이 스치는 자리가 몽글몽글 간지러웠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반지를 사게 둘 수는 없었다. 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없어요.’
“없어?”
‘네. 우리 돌아가요. 너무 늦었어요.’
반지를 앞두고 할 말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게 정말 타인에게 주는 선물이었다면 본인과 함께 고르라고 했겠지만, 그런 말도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정말로 모르는 척 선물을 고르는 건 더 못 할 짓이었다.
“알았어. 그럼 다 사야겠다.”
블레이크가 사장을 보며 말했다.
“전부….”
정말로 전부 다 살 생각이야! 나는 화들짝 놀라서 그를 막았다.
“왜?”
‘안 돼요.’
“못 고르겠다며.”
‘그런다고 전부 사는 게 어디 있어요!’
“그럼 어서 골라. 로즈가 어떤 반지를 고를지 궁금하다.”
그가 눈가를 접으며 예쁘게 웃었다.
뭐야, 예쁘면 다야! 예쁘게 애교를 떨면 다냐고! 나는 블레이크를 저렇게 키운 적이 없….
나는 과거를 곰곰이 떠올리다 생각을 접었다.
내가 좀 그러긴 했지. 블레이크한테 너무 약했어….
그가 원하는 건 뭐든 들어주었던 것 같다. 가끔 편식할 때 한마디 하긴 했지만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그건 나무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블레이크가 얼마나 착하고 귀여웠는데. 저렇게 억지를 쓰지 않았다고!
나는 과거를 떠올리다가, 성인이 된 블레이크를 흘겨보았다. 그러자 그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이며 비 맞은 토끼 같은 표정을 지었다.
“로즈, 어서 골라줘.”
“…….”
“마음에 안 들면 다른 곳으로 갈까?”
‘아니요. 고를게요.’
나는 결국 또 그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
반지는 새로 제작을 한 뒤 황궁으로 보내준다고 하였다. 이래서 애초에 가게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려 한 건데.
블레이크가 다른 것도 사려고 하는 걸 억지로 말리며 가게 밖으로 나왔다.
“선물을 골라줬으니까, 답례하고 싶었는데.”
블레이크는 가게 밖으로 나와서도 나에게 선물을 주고 싶다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괜찮아요. 너무 늦었어요. 어서 가요.’
반지를 산 것만으로도 마음이 무거웠다. 다른 건 필요 없다.
“알았어. 돌아가자.”
블레이크는 다시 내 손을 꼭 잡았다.
***
“멜리사, 전하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한스가 멜리사에게 물었다. 그들은 결혼했지만, 단둘이 있을 때도 서로에게 깍듯이 예의를 갖추었다.
“로즈 양과 광장에 가셨습니다.”
“전하께서 광장에요?”
한스는 깜짝 놀랐다. 블레이크가 광장에 나가는 건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나마도 황실의 행사나 정무, 앤시아의 정보를 찾을 때를 제외하면 개인적인 일로 외출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로즈 양에게 광장 구경을 시켜주기 위해 나가신 걸까?
이유가 어찌 됐든 기쁜 일이었다.
한스는 사실 많이 걱정하고 있었다.
블레이크는 어둠의 문이 사라졌다는 말을 듣고 혼돈의 계곡으로 향했다. 그때 사색이 되어 황궁을 떠나던 블레이크의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7년 전 앤시아가 실종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와 비슷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황태자는 석 달 넘게 환궁하지 않았다.
한스는 그분께서 더욱더 깊은 절망에 빠지는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
그런데 다시 궁으로 돌아온 블레이크는 활짝 웃고 있었다. 물론 그렇게 웃는 건 로즈를 바라볼 때뿐이었지만, 그래도 한스는 기뻤다.
게다가 오늘은 광장에까지 나가시다니. 드디어 전하께서도 마음을 잡으신 건가.
하지만 기뻐하는 한스와 달리 멜리사의 표정은 어두웠다.
“멜리사, 무슨 고민이라도 있습니까?”
“한스, 전하께서는 로즈 양을 마음에 두신 거겠죠?”
“아마 그렇겠죠.”
멜리사는 블레이크와 로즈가 함께 있는 모습을 떠올리다 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오랫동안 저주로 고통받았다. 겨우 저주에서 풀리고 경멸의 시선에서 벗어났지만, 그 기쁨을 제대로 누려보지도 못한 채 지금까지 앤시아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멜리사도 한스처럼 블레이크가 슬픔에서 벗어나길 원했다. 그가 다시 웃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이제는 블레이크가 앤시아를 잊고, 좋은 여인을 만나 행복하게 지내길 바랐다. 하지만 로즈는 아니었다.
“로즈 양은 좋은 사람 같아요. 전하께서 왜 잘해주시는지 알겠어요. 하지만….”
로즈는 신분을 알 수 없고, 말을 하지 못했다. 게다가 화상 흉터가 심했다.
블레이크가 그녀를 택한다면, 사람들은 분명 수군거릴 거다.
학식이 높고, 귀족이나 평민 할 것 없이 공평하게 학생을 대한다던 캔들 교수마저 로즈를 보자마자 막말을 퍼부었었다. 다른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겠지.
괴물이었기 때문에 괴물에게 빠진 거냐며 조롱받을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심지어 로즈와 함께 있다가 저주가 재발하는 것이 아니냐며, 걱정되는 척 험담을 늘어놓겠지.
“저는 전하께서 이제는 힘든 길을 걸어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멜리사는 블레이크가 다시 조롱과 경멸 속에서 힘들어하지 않기를 바랐다.
로즈가 싫은 건 아니었다. 착하고 예쁜 아가씨였다. 과거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을 못 하고 심한 화상 흉터까지 입은 그녀가 안타까웠다.
하지만 전하의 상대라면 싫었다. 로즈를 택했다는 이유만으로, 블레이크는 분명 겪지 않아도 될 많은 일들을 겪게 될 거다.
“한스, 제가 너무 이기적이죠….”
블레이크가 저주에 걸렸을 때는 외모로 차별을 하는 사람들이 못됐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자신이 외모를 이유로 로즈를 꺼리고 있었다.
“멜리사가 무얼 속상해하는지 압니다.”
한스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위로해 주었다.
“비 전하께서 계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랬다면 우리 모두 더 바랄 것이 없었겠죠….”
블레이크의 저주가 풀리자, 그동안 황태자를 보필한 공을 인정받아, 평귀족이던 한스는 자작 작위를 받았다. 자연스레 멜리사도 자작 부인이 되었다.
그리고 에드온 역시 자작 작위를 받았다. 하지만 그들은 기뻐할 수가 없었다.
모두가 사랑했던 황태자비가 그 자리에 없었으니까….
앤시아의 빈자리는 블레이크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큰 상처로 남았다.
앤시아가 사라지지 않았다면, 모두가 부러워하는 한 쌍이 되었을 거다.
멜리사는 성인이 된 앤시아와 블레이크의 모습을 상상하며 눈시울을 적셨다.
어쩌면 로즈의 문제가 아닌지도 모른다.
멜리사는 앤시아가 세상을 떠났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블레이크가 다른 여인을 만나서 새로운 행복을 찾길 바랐다.
하지만 막상 그가 다른 여인에게 잘해주는 모습을 보니, 앤시아가 떠올라서 속이 상했다.
‘사실은 나도 아직 비 전하를 떠나보내지 못했던 거구나.’
멜리사는 스스로의 마음을 깨달으며, 손수건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
우리는 마차를 타고 황궁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마차가 멈춘 곳은 황궁 중앙에 있는 포렌스궁이 아니었다.
“자, 내리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블레이크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아모리아궁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7년 만이구나….
저주를 풀기 위해서 빛의 눈물을 따라갈 때까지만 해도, 이곳으로 돌아오기까지 이리 오랜 시간이 걸릴 줄은 몰랐다.
이곳이 계속 그리웠다. 어둠의 문에서도, 그곳을 나온 뒤에도 계속 와보고 싶었다.
“들어갈까.”
‘네.’
우리는 아모리아궁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시간의 흐름이 멈춘 듯 7년 전과 거의 변하지 않았다.
천 년 전, 나는 여기서 죽었다. 그리고 필립은 내가 떠난 뒤, 이 별궁에 사랑이라는 뜻을 담아 ‘아모리아’라는 이름을 붙였다.
사랑이라니. 웃기지도 않는다. 그가 한 건 사랑이 아니다.
끔찍한 장소였지만, 그래도 이곳이 그리웠던 건 블레이크와 함께했던 시간 때문이었다.
그러니 필립이 지은 ‘아모리아’라는 이름도 고깝지 않게 들을 수 있다.
이곳은 나와 블레이크의 사랑과 추억이 담긴 공간이었으니까.
추억에 사로잡혀 아모리아궁을 둘러보는데, 블레이크가 나의 가면을 벗겼다.
“역시 안 쓴 게 더 예쁘다. 나랑 있을 때는 쓰지 마.”
‘그럴게요.’
나를 배려해주는 그의 마음이 고마워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가장 먼저 유리 온실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아름다운 장미가 가득했다.
그러나 한편에는 우아한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콩, 고추, 깻잎, 호박 등 채소들이 심겨 있었다.
저건 내 작품이었다. 사시사철 싱싱한 채소를 먹기 위해 온실에 채소를 심었었다.
내가 떠난 뒤에도 변함없이 계속 채소를 기르고 있었구나….
나는 무럭무럭 자라서 열매를 맺고 있는 채소들을 바라보다가 얼른 시선을 돌렸다. 저런 것에 관심을 두면 나를 앤시아라고 생각할 것이다. 가뜩이나 의심을 받고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장미꽃이 예뻐요.’
“그렇지? 올해 채소들이 잘 자랐어. 보고 싶으면 가서 봐도 돼.”
‘아니에요. 저는 꽃이 좋아요.’
나는 시선을 꽃에 고정하며 채소 쪽으로 눈도 돌리지 않았다. 게다가 억지로 보는 것도 아니었다.
붉은 장미꽃이 아름다웠다. 내가 ‘앤시아’였을 때 블레이크는 붉은 장미꽃 한 송이를 시작으로 많은 선물을 주었다. 장미꽃으로 만든 화관은 너무 예뻐서 제대로 써보지도 못했었다.
“어떤 꽃을 좋아해?”
‘장미요. 붉은 장미.’
이 정도는 진실을 말해도 되겠지. 빨간 장미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주 많았으니까.
“나도 좋아해.”
그는 빙그레 웃었다.
온실을 나온 뒤, 우리는 함께 아모리아궁을 걸었다. 온실처럼 가마솥과 아궁이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것 같긴 했지만, 그래도 깨끗하게 관리되어 있었다.
“이건 동방의 조리기구야. 부인이 직접 대장장이한테 부탁해서 만든 거야. 앤시아는 동방의 요리를 무척 좋아했거든.”
앤시아에 대해 말하는 블레이크의 표정이 너무 행복해 보여서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고개를 대충 끄덕이다가 몸을 돌렸다. 그러자 커다란 아름드리나무가 보였다.
우리는 저 아름드리나무에 키를 재곤 했었다.
내가 가장 크고 그다음이 다이애나, 블레이크였다. 그리고 그 흔적은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내가 떠난 이후로는 한 번도 재지 않았구나….
아무것도 모르는 척, 몸을 돌리고 시선을 회피해도 또 다른 추억이 나타났다.
우리가 함께 지내던 3년 동안의 추억이 모두 여기 있었으니까.
나무에 새긴 자국을 바라보는데, 블레이크가 다가왔다.
그는 또래에 비해서도 체구가 무척 작은 편이었다. 자신도 키가 크고 싶다면서 한참 동안 나무를 바라본 적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고개를 꺾어서 봐야 할 만큼 커버렸다.
“여긴 나와 앤시아, 둘만의 세상이야. 그런데 너를 왜 데려왔는지 알아?”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정말 모르겠어?”
그는 나를 또렷이 직시했다. 블레이크의 붉은 눈동자에 사로잡힌 듯 몸이 딱딱하게 굳어서 나는 고개를 돌릴 수조차 없었다.
“나는 내가 입술을 읽는 능력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 그런데 다른 사람은 안 되더라. 오직 로즈, 네 입술만 읽을 수 있어.”
블레이크가 나의 입술을 매만졌다. 그의 따뜻한 체온이 입술을 넘어 전신으로 전해졌다.
“왜인 줄 알아?”
나는 고개를 저었다.
“네가 말을 할 때 입 모양이나 습관이 내 부인이랑 똑같거든. 그래서 읽을 수 있어.”
“…….”
“나를 바라보는 눈빛, 표정, 미소, 걷는 자세, 좋아하는 음식, 모든 게 같아. 너를 보면 볼수록, 하루하루 지날수록 더 확신할 수 있어.”
‘…비 전하와 닮았다니, 영광이에요. 하지만 저는 아니에요.’
“거짓말. 내 모든 감각이 네가 앤시아라고 말하고 있어.”
“…….”
“앤시아, 네가 맞잖아.”
“…….”
“제발 솔직히 말해줘.”
그가 애원했다. 제발 말해달라며 나에게 빌 듯이 부탁하고 있었다.
나도 말을 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내가 앤시아라고. 석 달 뒤의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모든 걸 털어놓고 싶었다.
하지만 안 된다. 그를 위해서라도 부정해야 한다. 이성과 감정이 혼란스럽게 뒤엉켜서 스스로도 제어가 안 됐다.
‘저는….’
블레이크의 애처로운 눈빛에 굴복하며 이대로 말해버릴 것만 같은데, 에드온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전하! 전하!”
“무슨 일이냐?”
블레이크가 나를 대할 때와는 다른 차가운 음성으로 물었다.
명백한 불쾌함이 담긴 어조였지만 에드온은 개의치 않고 소리쳤다.
“비 전하를 찾았습니다!”
***
에드온에게서 앤시아를 찾았다는 말을 들은 블레이크는 황제궁으로 향했다.
앤시아가 실종되자, 수많은 사람이 자신이 진짜 황태자비라며 나타났다.
하나같이 상대할 가치도 없는 가짜였다. 금발 머리와 초록색 눈동자를 지녔지만 단지 그뿐.
외모나 분위기가 전혀 닮지 않았거나, 심지어 어설픈 염색이나 마법으로 눈동자의 색을 바꾼 이들도 있었다.
텐스테온은 블레이크에게 보여주지도 않은 채 자신의 선에서 끊었고, 앤시아를 사칭해서 한몫 챙기려던 이들은 모두 죗값을 치렀다.
물론 그 소식마저 막을 수는 없지만, 텐스테온은 블레이크가 이런 일로 상처받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하였다.
그런데 오늘 처음으로 블레이크를 불렀다. 그리고 황제가 있는 알현실 안으로 들어간 순간 블레이크는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앤시아다.’
황제의 옆에 앤시아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앤시아였다. 블레이크는 보는 순간 느낄 수 있었다.
페리도트를 박은 듯한 우아한 초록빛 눈동자, 커다란 눈, 단아한 콧대, 붉은 입술. 붓으로 그려낸 듯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블레이크는 지금의 앤시아가 어떤 얼굴일지 떠올려보고는 했다. 하지만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를 보는 순간 느낄 수 있었다.
앤시아는 어른이 되면 저런 모습이 되었을 거다. 그녀가 바로 앤시아였으니까.
“블레이크, 이리 오거라.”
텐스테온은 미소를 지으며 아들을 불렀다.
그는 7년 동안 앤시아를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오늘 앤시아를 찾았다. 드디어 아들을 볼 면목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자 황제의 옆에 있던 여인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전하!”
여인이 활짝 웃으며 블레이크에게 다가갔다. 텐스테온은 뭉클한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7년 만의 재회였다.
단순히 헤어졌다 만난 것이 아니다. 생사가 불투명했던, 아니 다들 죽었다고 생각했던 앤시아가 돌아왔다.
하지만 블레이크의 반응은 텐스테온이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여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맞은편에 앉아 있는 리차드에게 시선을 던졌다.
“저자는 왜 여기 있는 겁니까?”
“리차드가 앤시아를 데려왔다.”
“저자가요?”
블레이크는 적대적인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블레이크가 여신의 저주에 풀린 것을 축하하던 날, 카실 공작의 잔당이 무도회장을 습격해 왔다.
텐스테온과 황실 기사들은 그들을 제압했고, 블레이크는 부상자를 치료했다. 모두가 마음을 놓았을 때, 황궁 한편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리차드와 프랭크가 갇힌 동쪽 감옥이 화염으로 뒤덮였다. 화재를 진압하는 것은 성공했지만, 카실 공작의 장남인 프랭크는 목숨을 잃고, 리차드도 큰 부상을 당했다.
카실 공작은 죄를 모두 인정했다.
그는 황제와 황태자를 공격함과 동시에 공작가의 치부를 알고 있는 리차드를 살해하기 위해 불을 질렀다고 했다. 하지만 정작 목숨을 잃은 건, 그가 가장 아끼는 아들인 프랭크였다.
사랑하는 아들을 자기 손으로 죽인 아놀드 카실은 패닉에 빠졌다.
텐스테온은 카실 공작의 잔당을 모두 추포했고, 그중에는 흑마법사인 도미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리차드가 아니라 카실 공작의 마법사였으며, 공작의 명으로 감옥에 불을 질렀다고 주장했다.
황태자가 사경을 헤맬 때, 여신의 저주를 옮길 수 있는 흑마법에 대한 소문을 퍼트린 것 역시 카실 공작의 지시라고 하였다.
카실 공작 역시 자신의 모든 죄를 인정했다. 결국 공작은 사형 판결을 받았다. 그를 따르던 귀족들도 대거 숙청당했다.
하지만 리차드의 처분을 두고 의견이 엇갈렸다.
카실 공작 가문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리차드의 어머니가 로움족이며 억울하게 살해당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게다가 리차드는 하인만도 못한 대우를 받았으며, 공작가의 사람들로부터 오랜 멸시와 학대에 시달렸다는 증언과 증거도 쏟아져 나왔다.
화재 이후 한 달 만에 의식을 차린 리차드는 아버지가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는 그동안 자신이 공작저에서 당했던 핍박과 학대에 대해 증언했다. 그의 말은 공작저의 사용인이나 주변 사람들의 증언과 정확히 일치했다.
그는 아버지에게 살해당할 뻔한 피해자인 데다가, 아직 성인도 아니었다.
사소한 죄를 짓긴 했지만 모두 카실 공작의 명이었으며, 그가 거역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게다가 카실 공작이 처형당하는 날, 공작 부인과 막내 네온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제 카실 공작의 핏줄은 리차드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자 동정 여론이 커지기 시작했다.
“카실 공작이 지은 죄가 크다고는 하나, 동생의 하나뿐인 혈육인데 목숨을 끊는 건 너무 가혹하지 않습니까.”
“어린 소년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설령 카실 공작과 그의 아들들이 황위를 노렸다고 한들 서자인 리차드와는 상관없는 일일 겁니다, 폐하.”
“리차드 군은 오히려 학대당한 피해자입니다.”
“전하의 저주도 풀린 경사스러운 때에 자비를 베푸시는 게 어떨는지요. 빛의 여신께서도 그것을 원하실 겁니다.”
사람들은 제각기 떠들며 리차드를 동정했다.
하지만 텐스테온은 리차드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앤시아는 흑마법사인 도미람이 리차드의 마법사라고 하였다.
하지만 도미람 본인은 물론 카실 공작 또한 그가 자신의 수하라고 인정했다. 리차드는 도미람을 알지도 못한다고 하였다.
앤시아가 한 말이 있긴 하지만, 의심만 가지고 열일곱 살의 소년을 처형할 수는 없었다.
결국 텐스테온은 카실 공작 가문의 작위를 박탈하고, 재산을 몰수하는 것으로 상황을 마무리 지었다.
리차드는 평민의 신분으로 추락했다. 하지만 목숨은 건졌다.
텐스테온은 이후에도 계속 리차드를 감시했다. 하지만 그는 성실하게 살아갈 뿐, 법에 위배되는 행동을 결코 하지 않았다.
리차드는 작은 상단과 고아원을 운영하며 조용히 지냈다. 그의 고아원은 제도에서도 시설이 좋기로 유명했고, 리차드는 오히려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리차드는 사교계 생활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에, 블레이크와 리차드가 이렇게 마주한 건 7년 만이었다.
리차드는 무척 화려한 사내였다. 타고난 외모도 잘생겼지만, 의복이나 장신구에 또한 무척 신경을 쓰는 편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옷차림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의복의 재질은 고급스러웠지만, 어떤 장식도 보이지 않았다.
리차드는 선량한 자선 사업가 그 자체로 보였다. 옷차림뿐만이 아니다. 그는 선한 미소를 지으며 블레이크를 향해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제국의 빛이신 황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자네가 이 ‘여인’을 데려왔다고?”
‘여인’이라는 말을 들은 리차드의 눈썹이 미묘하게 꿈틀거렸지만, 이내 순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네, 전하. 제가 작은 고아원을 운영 중인데, 고아원 근처에 한 여인이 쓰러져 있는 걸 아이들이 발견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7년 전 실종되신 비 전하와 닮아서 이렇게 모셔 왔습니다.”
“고아원에서?”
“네.”
블레이크는 여자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7년 만에 찾은 아내를 보며 기뻐하는 모습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블레이크의 표정에는 의심이 가득했다.
알현실에 짙은 적막이 내려앉았다. 그 순간 여인이 블레이크를 와락 껴안았다.
“전하, 보고 싶었어요!”
하지만 블레이크는 그녀의 어깨를 잡으며 자신에게서 떨어지도록 했다.
“폐하께 드릴 말씀이 있다. 모두 물러가라.”
“전하….”
“비 전하, 가시죠.”
여인은 당황하며 블레이크에게 다시 매달리려 했지만, 리차드가 이끌자 마지못해 발걸음을 뗐다.
두 사람이 떠나자, 텐스테온이 입을 열었다.
“너무 야멸찬 것이 아니냐?”
“저 여인이 앤시아라는 증거도 없지 않습니까.”
외모가 놀라울 정도로 닮은 건 인정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앤시아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신분은 확인하신 겁니까?”
“기억을 잃었다고 하더구나.”
블레이크는 실소했다.
“그것참 흔한 말이군요.”
앤시아를 사칭하는 가짜들은 하나같이 기억을 잃었다고 주장했다. 블레이크가 가짜를 직접 대면한 적은 없었지만,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었다.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블레이크를 보며, 텐스테온이 말했다.
“저 아이는 ‘언어 능력자’다.”
“언어 능력이요?”
앤시아가 언어 능력자라는 사실은 황실에서도 극히 일부만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당연히 자신이 황태자비라고 주장하던 사칭범 중에서 앤시아가 언어 능력자라는 걸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언어 능력자는 백 년에 한 명이 나올까 말까 하다는 귀한 능력이었다. 알고 있다고 한들 흉내 낼 수도 없었다.
“확실한 건가요?”
“충분한 확인을 거쳤다.”
텐스테온은 신중한 사람이었다. 그가 저렇게 말한다면 언어 능력이 있다는 건 사실일 거다. 어설픈 사기일 리 없었다.
애초에 앤시아와 얼굴이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별다른 확인 없이 무작정 블레이크를 불렀을 리도 없었다.
“언어 능력뿐만이 아니다. 빛의 힘도 지니고 있었어. 저 아이는 분명 앤시아다.”
“…….”
텐스테온의 주장은 타당했다.
외모, 언어 능력, 빛의 힘, 모든 것이 그녀가 진짜 앤시아라는 걸 말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텐스테온의 말을 들으면서도 로즈의 얼굴이 떠올랐다.
***
“전하!”
블레이크가 황제궁 밖으로 나서자마자,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가만히 여인을 응시했다. 다시 보아도 앤시아와 정말 많이 닮았다.
“기억을 잃었다던데?”
“네….”
“다친 데는 없고?”
“네. 리차드 님께서 너무 잘해주셨어요!”
그녀는 해맑게 웃으며 블레이크에게 팔짱을 꼈다.
“그래도 기억이 안 나서 답답했는데, 이렇게 전하를 다시 만나니까 옛날 일들이 떠오를 것 같아요!”
블레이크는 자신의 팔을 빼며, 에드온을 바라보았다.
“에드온.”
“네, 전하.”
“…이분을 모셔라.”
황태자비라고 불러야 한다. 모든 증거들이 그녀가 진짜 앤시아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그런데 차마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여인이 에드온과 함께 떠나자, 블레이크는 리차드를 노려보았다.
“무슨 수작이지?”
노골적인 적대감에도 불구하고, 리차드는 서글서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전하께서는 아직도 저를 용서하지 못하셨군요. 물론 싫어하시는 마음은 이해합니다. 카실 가문이 전하께 저지른 잘못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죠.”
그는 과거의 잘못을 순순히 인정했다.
“비록 그때 제가 어리고 힘이 없었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이미 지은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죠. 어떻게 해야 전하의 용서를 받을 수 있을지, 언제나 고민하고 있습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그만하지.”
블레이크는 텐스테온에게서 모든 일을 전해 들었다. 그는 앤시아의 말을 믿었다.
흑마법사 도미람은 분명 리차드의 수하일 거다. 하지만 리차드는 이를 부인해서 목숨을 구했다.
7년 전, 감옥에서 출소할 때도 리차드는 저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입으로는 죄송하다고 하지만, 사실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다는 듯이 결백하고 선한 얼굴.
블레이크는 리차드를 믿지 않았다.
지금도 저 선량한 얼굴 안에 비열한 칼날을 숨기고 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대가 내 아내에게 마음이 있었던 건 알고 있어. 도대체 무슨 짓을 꾸미는 거지?”
블레이크가 조금도 비틀지 않은 직구를 던지자, 리차드는 추억을 떠올리듯 아련한 미소를 지었다.
“하하. 참으로 오래전 이야기군요. 과거에 그랬던 적도 있었지요.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결혼을 앞두고 있습니다. 어찌 다른 여인을 마음에 둘 수 있겠습니까?”
리차드는 형의 약혼녀였던 웨스틴 후작 영애와 약혼했다. 평민인 그는 후작 가문의 데릴사위로 들어가게 되었다.
웨스틴 후작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결혼을 하면 리차드가 차기 후작이 될 예정이었다.
욕심 없는 독지가 행세를 했지만, 결국은 7년 만에 후작 가문의 후계자가 되어 화려하게 사교계에 복귀하는 것이다.
“저는 아스테릭 제국의 국민이자 폐하의 충성된 신하입니다. 비 전하를 찾았으면 황궁으로 모시고 오는 것이 당연하지요.”
리차드는 공손하게 답했다. 그의 말은 하나같이 옳고 이치에 맞았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그런 모습이 오히려 더 수상쩍어 보였다.
“그 말이 진심이길 바라네.”
“당연히 진심입니다. 전하의 앞에서 어찌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가보게.”
“하면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비 전하를 찾으신 걸 축하드립니다.”
리차드는 마지막까지 예의를 갖추고는 황제궁을 떠났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블레이크의 눈빛이 싸늘했다.
***
앤시아가 돌아왔다는 소식에 황태자궁이 웅성거렸다.
“정말로 황태자비야? 비 전하께서 돌아오신 게 맞아?”
“몰라. 여기 아는 사람 있니?”
“지금까지는 전부 사기꾼들이었잖아.”
“맞으니까 전부 부른 거겠지.”
멜리사는 황태자비가 돌아왔다며, 궁인들 모두를 1층에 모이도록 하였다.
손님인 나는 그녀의 명령을 따르지 않아도 됐지만, 나를 사칭한 사람이 누군지 궁금했기 때문에 같이 서서 ‘가짜 앤시아’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모두들 기쁨과 호기심에 가득한 얼굴로 7년 만에 돌아온 황태자비를 기다렸지만, 시녀들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황태자비 자리를 노리고 들어온 이들이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진짜 황태자비의 등장이 반가울 수만은 없겠지.
하지만 귀족의 체면상, 다른 사람들도 많은 곳에서 자신의 속내를 밝힐 수는 없었다.
대신 그녀들은 뾰족해진 기분을 옆에 있는 첼시에게 풀었다.
“만약 진짜로 황태자비가 돌아온 거라면, 첼시는 완전히 망했네.”
“그러게.”
“그게 무슨 뜻이야?
느닷없이 공격을 당한 첼시가 얼굴을 찡그렸다.
“몰라서 물어. 로즈 님, 로즈 님, 하고 온갖 아부를 떨었잖아. 진짜 비 전하께서 돌아오시면, 저 여자는 당장 쫓겨날걸!”
시녀들이 나를 향해 조소를 머금었다. 그들이 진짜로 공격하고 싶은 건 나였다. 하지만 황태자의 손님인 나를 건들 수 없으니 첼시에게 빈정대는 것이다.
“다들 말조심해.”
첼시가 경고하자, 카밀라가 우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니잖아. 첼시, 아무리 브룩 가문이 돈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지만 그래도 명색이 귀족인데, 최소한의 체면은 지켜야 하지 않을까?”
“글쎄. 전하의 시녀가 되어서 좋은 분을 모시게 된 게 어째서 귀족의 체면에 어긋나는 행위인 건지 모르겠는데. 그리고 망한 건 카밀라 너겠지.”
“무슨 뜻이야?”
“딴생각하지 말고 시녀의 본분에 충실하라는 거야.”
“뭐야!”
“쉿, 카밀라, 목소리가 너무 높아.”
카밀라와 첼시가 싸우려고 하자, 다른 시녀들이 다급히 두 사람을 말렸다. 하지만 옆에서 싸움이 나든 말든 샬롯은 싱글벙글하였다.
“우리 비 전하께서는 얼마나 아름다워지셨을까! 아, 빨리 오셨으면 좋겠다.”
다만 다른 시녀들과 달리 그녀는 앤시아가 돌아온 걸 순수하게 기뻐하고 있었다. 샬롯은 내 얼굴을 진짜로 좋아했나 보다.
“다들 조용히 하거라!”
문 앞에 서 있던 멜리사가 궁인들을 향해서 엄히 명하자, 궁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나도 문을 주시했다.
지금 내 관심사는 오직 하나였다.
도대체 누구일까? 도대체 누가 나를 사칭한 거지?
사실 시녀들의 빈정거림 같은 건 듣자마자 기억에서 사라진 상태였다.
그녀가 진짜 앤시아일 리는 없다. 나는 바로 여기 있으니까.
그럼, 누구지?
그때 문이 열리며 에드온과 아름다운 여인이 등장했다.
여인을 본 순간 나는 그대로 굳고 말았다.
가짜가 아니다.
그녀는 바로 앤시아였다. 저건 나의 몸이다. 그녀를 본 순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저는 앤시아라고 해요.”
그녀가 인사하자, 사람들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정말 비 전하야?”
“진짜인가?”
“어쨌든 아름다우시다.”
“그러게. 저렇게 아름다우시니 전하께서 잊지 못하신 거지.”
궁인들은 여인의 아름다움에 감탄했다.
“비 전하야! 정말로 앤시아 비 전하라고! 어릴 때랑 똑같으셔!”
샬롯도 폴짝폴짝 뛰며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가장 앞에 서 있던 멜리사와 한스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비 전하….”
“정말로 비 전하이십니까?”
가짜 앤시아는 그들을 향해 빙그레 미소 지었다. 하지만 입꼬리를 올렸을 뿐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무기질적인 눈동자를 보며, 멜리사와 한스는 잠시 멈칫했다.
그들의 당황스러운 표정을 읽은 에드온이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비 전하께서는 기억을 잃어버리셨다고 합니다.”
그 순간 멜리사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그녀는 황급히 눈물을 닦으며 애써 미소 지었다.
“기억은 차차 돌아오실 겁니다.”
“맞습니다. 이제부터 천천히 떠올리시면 됩니다.”
“이렇게 건강하신….”
“나, 여기 처음 오는 거지?”
그녀는 울먹이는 멜리사의 말을 끊으며 물었다. 인형처럼 감정이 없는 목소리였다.
“네? 아, 그게….”
“궁을 구경하고 싶은데.”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저 여자한테 안내받고 싶은데.”
가짜 앤시아가 나를 가리켰다. 그녀는 나를 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나도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보란 듯이 웃는 그녀를 보며 나는 확신했다.
저 여자는 바로 ‘세르파니아’다.
그녀는 나의 몸과 자신의 몸을 바꿨던 거다.
“비 전하, 송구하오나 로즈 양은 시녀가 아닙니다.”
“난 저 애가 좋은걸.”
멜리사가 난처해했지만, 세르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하오나….”
“갑자기 나타났다고 나를 무시하는 거야? 황태자비인데 이 정도도 못 들어줘?”
“로즈 양께서는 전하의 손님이시며,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나보다는 많이 알 거 아니야.”
세르가 억지를 부리자 멜리사는 어찌할 줄을 몰랐다.
나는 그런 세르를 바라보며 손을 들었다. 그러자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됐다.
나는 수첩에 글을 적었다.
-제가 안내할게요.
첼시가 얼른 내 옆으로 다가와서 메모를 확인했다. 그리고 나 대신 말을 전해주었다.
“로즈 님께서 안내하시겠다고 하십니다.”
***
내가 안내한다고 하긴 했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었는지 멜리사와 첼시가 따라왔다.
“여기가 황태자 전하의 침실이야?”
“네. 비 전하.”
멜리사가 대답하자, 세르가 천진한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갈래.”
“…들어가시려면 우선 전하의 허락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럼 내 방은 어디야?”
“이곳입니다.”
“쟤는?”
세르가 나를 가리키자 멜리사는 머뭇거렸다. 그녀는 나를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자 첼시가 얼른 답했다.
“로즈 님은 귀빈실을 사용하고 계십니다.”
“귀빈실이 어딘데?”
“이곳입니다.”
“내 방이랑 가깝네.”
세르는 눈가를 찡그리더니, 성큼성큼 걸어가서 내 방의 방문을 열었다.
“비 전하, 그곳은…!”
첼시가 말리려고 했지만, 세르는 그녀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구경 좀 시켜줄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들은 들어오지 마. 쟤랑 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
“하오나 비 전하, 로즈 양은 말을 하지 못하십니다.”
“지금 내 명령을 거역하는 거야?”
세르가 앙칼지게 말하자, 멜리사와 첼시는 머리를 숙였다.
“…아닙니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나도 그녀와 할 말이 있었다. 우리는 멜리사와 첼시를 밖에 두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
‘세르.’
나는 들어가자마자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으니 입 모양으로 말했을 뿐이지만 말이다.
“벌써 알아차린 거야? 시시하게.”
그녀는 피식 웃었다. 블레이크처럼 나의 입술을 본 건 아닐 거다. 내 생각을 읽은 거겠지.
“방이 아주 좋네. 이런 대우에 홀려서 자신의 육체와 목숨을 버리는 건가? 한심해.”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어째서 몸을 바꾼 거지?’
그녀는 자신의 몸과 내 몸을 바꿨다.
“너한테도 버림받는 고통을 알려주고 싶어서.”
‘뭐라고?’
“이제 너는 버림받을 거야. 진짜 앤시아가 등장했는데, 너 따위를 신경이나 쓰겠어?”
그녀는 큭큭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배를 잡고 허리를 앞으로 숙이며 재밌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웃는 모습이 섬뜩하고 위태로워 보였다.
“내가 그렇게 기회를 줬는데도 무시하더니! 이제 애원해도 소용없어! 이 몸은 내 거야! 돌려주지 않을 거야! 너는 이대로 황태자에게 버림받고 비참하게 죽게 되겠지!”
‘블레이크한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앤시아인 척 블레이크의 옆에 남아서 무슨 짓을 하려는 생각인 걸까?
나는 얼마 살지 못한다. 그래도 그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던 건, 내가 죽는 대신 블레이크를 지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르가 나타났다. 그것도 나인 척 모두를 속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황태자 걱정부터 하는 거야?”
‘내가 죽는 대신, 모두를 건들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지금 다른 사람이 중요해! 이제 너는 끝이라고! 완전히 끝났단 말이야! 나한테 빌어봐. 살려달라고 빌어보라고! 네 걱정이나 하란 말이야!”
광기에 젖어 소리를 지르던 세르가 돌연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문이 열리더니 블레이크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블레이크한테 다가갔다.
“전하, 이제 오셨어요.”
블레이크는 팔짱을 끼려는 세르의 손을 가볍게 쳐냈다.
“왜 여기 있는 거지?”
“그게, 로즈 양이 저를 초대했어요! 아, 전하, 제가 전하의 방을 보고 싶었는데, 시녀가 막았어요!”
세르는 얼른 화제를 바꿨다. 하지만 블레이크의 눈빛은 더욱 싸늘해졌다.
“황태자의 침실은 아무나 들어올 수 없다. 허락하지 않는 게 당연하다.”
세르를 바라보는 블레이크의 눈빛이 싸늘했다. 너무나도 차가운 반응에 세르는 잠시 당황한 듯했지만, 다시 활짝 웃었다.
“전하, 제 방에 가보고 싶어요. 여기보다 훨씬 좋겠죠?”
“그대는 세피아궁으로 가는 게 좋겠군.”
“네? 왜요. 전하랑 떨어지기 싫어요.”
“앤시아는 세피아궁에 자주 머물렀지. 그대가 정말로 기억을 잃었다면 세피아궁에서 지내는 게 기억을 떠올리는 데도 좋을 거다.”
지극히 사무적인 어조였다. 블레이크는 아직 그녀가 앤시아라는 사실을 완전히 믿지 않는 듯했다. 세르도 같은 것을 느꼈는지, 조급해하며 외쳤다.
“하지만 저 여자는 여기 있잖아요. 황태자 전하랑 같은 궁을 쓰잖아요! 그럼 저도 여기 있을래요!”
“세피아궁으로 가시오.”
“…….”
블레이크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건 권유가 아니라 명령이었다.
너무나도 싸늘한 태도에 세르도 더는 고집을 피우지 못했다.
“그럼 세피아궁까지 데려다주세요.”
“호위를 붙여주지.”
그녀가 다시 팔짱을 꼈다.
“전하가 좋아요. 다른 기사들은 싫어요. 너무 무서워요. 무서운 생각이 나요.”
블레이크는 그녀의 손을 떼려 했지만, 세르는 오히려 그의 팔을 강하게 움켜잡았다.
“어둠의 문으로 떨어졌을 때 모든 게 너무 무서웠어요. 세상이 온통 깜깜하고 아무것도 없었어요. 무서워요. 전하, 전하가 아니면 싫어요.”
블레이크는 애원하는 세르의 손을 뗐다.
“전하….”
“데려다주겠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뱉었다.
“고마워요. 전하.”
세르는 블레이크를 향해 아이처럼 천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시선을 살짝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세르의 스산한 눈빛을 본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
세르는 블레이크와 함께 세피아궁으로 갔다.
방은 나서기 전, 세르는 나를 보며 비웃음을 날렸다. 나의 질투심을 유발할 생각인 건가? 하지만 나는 질투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첼시의 말에 따르면 그녀를 황궁으로 데려온 사람은 리차드라고 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걸까?
백번 양보해서 세르가 황궁에 나타난 것까지는 어떻게 이해해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리차드’라니. 그는 세르의 힘을 빼앗고 어둠의 문에 봉인한 필립의 환생이었다.
세르의 원수다.
어째서 그녀가 리차드와 함께 있었던 건지, 황궁에 함께 온 이유가 뭔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그녀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아무리 고민해도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확실한 건 오직 하나, 블레이크가 위험하다는 거다.
그녀는 아스테릭 제국을 멸망시키려 했다. 그리고 지금 나를 사칭하며 모두의 앞에 나타났다.
블레이크와 다른 사람들은 기만하고 우롱하며, 더 나아가 무슨 짓을 벌일지도 모른다. 이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르가 가짜라는 사실을 알려야 한다.
그동안 나는 블레이크를 위해 침묵했다. 내가 떠나고 난 뒤 홀로 남겨질 블레이크의 고통과 슬픔을 생각하면, 도저히 내가 앤시아라는 사실을 밝힐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고민을 할 때가 아니었다.
블레이크가 위험했다. 더는 침묵할 수 없었다.
포렌스궁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저벅저벅 걸어오는 블레이크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나를 보더니 활짝 웃으며 달려왔다.
“추운데 왜 나와 있어.”
그가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주었다.
앤시아의 몸을 가진 여인이 나타났음에도 그는 변함없이 친절했다.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할 말이 있어?”
나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입술을 뗐다.
‘제가….’
제가 바로 앤시아예요, 그렇게 말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입술이 딱 달라붙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마비된 듯 사지가 딱딱하게 굳어서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가 없었다.
“괜찮아. 무슨 말을 해도 다 믿어줄 테니까, 편하게 말해.”
“…….”
말을 하고 싶었다.
내가 진짜다. 내가 진짜 앤시아고 그 여자는 가짜다. 그걸 말해야 하는데, 도저히 입이 벌어지지 않았다.
아파서 그런 건가? 아니, 그것과는 다르다. 마치 누군가가 내 몸을 조종하고 있는 것처럼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설마 금제인가…?’
내가 앤시아라고 말하지 못하도록 금제를 걸어놓은 거야? 도대체 언제부터…?
“로즈, 안 되겠어. 들어가자.”
그는 딱딱하게 얼어붙은 나를 걱정하며,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다.
나는 그의 품에 안긴 채 방으로 돌아갔다. 블레이크는 나를 침대에 눕히고 가면을 벗겨주었다.
“오늘 밖에 나가서 피곤했을 거야. 푹 쉬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세르가 나에게 금제를 걸어놓은 이유가 뭘까? 처음부터 자신이 앤시아인 척할 생각이었던 걸까?
내가 자신의 조건을 받아들이든 그렇지 않든, 나인 척 모두를 속이며 황태자비 행세를 할 계획이었던 거야?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내가 앤시아인 걸 밝히지 못한다고 해도 좋다. 하지만 세르가 앤시아가 아니라는 사실은 알려야 했다.
‘그 여….’
하지만 다시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내가 앤시아인 걸 말하는 것뿐만 아니라, 세르가 가짜라고 말하는 것도 안 되는 건가?
나는 당장 침대 밑으로 내려가려 했다. 하지만 블레이크가 나를 붙잡았다.
“로즈. 무리하지 마. 오늘은 푹 쉬도록 해.”
그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
‘글을 쓰려고요….’
접착제가 묻은 듯 달라붙어 있던 입술이 겨우 떨어졌다.
다행히 내가 앤시아이며, 세르가 가짜라는 사실 외에 다른 말은 평소처럼 할 수 있었다.
“알았어.”
블레이크는 나의 수첩과 펜을 가져다주었다.
말을 하지 못하면 글을 쓰면 된다. 내가 앤시아라고, 그 여자는 진짜 앤시아가 아니라고 밝히면 된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펜을 잡는 순간, 글자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머릿속이 백지가 된 듯이 글자도 쓸 수가 없었다.
설마 나에게서 목소리와 언어 능력을 뺏어갔던 것도 이것 때문이었나…?
나에게 화가 나서 축복을 거둬간 게 아니라, 애초에 앤시아라는 걸 말하지 못하게 하려고 언어 능력을 빼앗은 거야?
충격에 빠져 있는데, 블레이크가 내 손을 살포시 잡았다.
“글씨가 생각이 안 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빙그레 웃었다.
“괜찮아. 괜찮아. 내가 너무 못 가르쳐서 그랬나 보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블레이크 때문이 아니다. 그는 열심히 공부를 가르쳐 주었다.
바쁜 시간에도 틈틈이 시간을 내주고, 나를 위해 어린아이들이 읽을 만한 쉬운 동화책들도 새로 구입했다.
“천천히 배우면 돼.”
“…….”
글자를 배워도 금제는 풀리지 않을 거다. 진실을 밝힐 수 없을 거다….
어떡하지. 세르가 가짜라는 걸 밝혀야 한다.
블레이크는 아직 세르를 의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의 몸을 가졌다. 시간이 지나면 결국 믿게 될 거다.
어서 알려야 하는데, 이대로 있으면 블레이크가 위험한데….
초조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그런데 블레이크가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툭하면 울어. 아기네. 아기야. 아휴, 우리 아기, 울보네.”
블레이크가 나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놀리기나 하고! 얄미워!
‘전하보다 2살 많거든요!’
발끈해서 소리쳤다. 그리고 놀랐다.
어? 말이 나왔다.
내가 앤시아라고 직접 말하는 건 안 되지만, 나이를 밝히는 것까지는 금제가 걸리지 않은 모양이다.
“나보다 2살 많아?”
그가 빙그레 입꼬리를 올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2살 많았구나.”
그러자 블레이크는 활짝 웃으며 나의 눈가에 남은 눈물을 닦아주었다.
***
아침 햇살이 눈부셨다.
어젯밤에는 블레이크의 위로를 받다가 어느 순간 잠들어버리고 말았다.
오랜만에 외출해서 피곤한 데다가 금제가 여러 번 발동되자 몸에 무리가 가서 쓰러질 듯 잠이 들어버린 모양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문을 열자 기분 좋은 새의 지저귐이 들렸다.
나는 욕실에 들어가서 샤워를 한 뒤, 거울 앞에 섰다.
어둠의 문에 나와서, 아니 그 안으로 들어간 순간부터 나는 계속 멍한 상태였다.
천 년 전의 기억을 되찾고 세르를 구했지만, 몸이 바뀌고 시간마저 흘러버렸다.
내가 라온텔인지 앤시아인지도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데다, 갑자기 바뀐 상황들이 혼란스러웠다.
블레이크가 상처받지 않도록 조용히 떠나는 방법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다른 생각을 할 틈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정신을 차려야 했다. 더는 무기력하게 있을 수 없다. 그래서도 안 된다.
앤시아, 이제부터는 나답게 행동하는 거야!
감정이나 연민에 취해서 흔들릴 때가 아니야! 내가 블레이크를 지켜야 해!
나만이 그와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어!
어떻게 해서든 내가 앤시아이며, 세르가 가짜라는 사실을 밝혀야만 했다.
모든 걸 나 혼자 짊어지고 갈 생각이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어둠의 문에서의 시간이 흐름이 뒤틀렸는지, 아니면 정말로 7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내가 걷고 또 걸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갑자기 성인이 된 것도 나쁘진 않잖아? 드디어 외모가 정신 연령을 따라잡았으니,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그리고 나쁜 일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블레이크가 저주에서 벗어났다. 아름답고 멋진 청년으로 자라서 모두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게다가 백 일 남짓이라곤 하지만 블레이크가 건강하게 성장한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나는 거울을 똑바로 바라보며, 내 몸에 난 화상 흉터와 마주했다. 세르가 내 몸을 가져갔다면 이제는 이게 내 몸이었다.
비록 왼쪽 얼굴은 화상 흉터로 얼룩져 있었지만, 오른쪽 얼굴은 무척 예뻤다.
나는 블레이크가 언제나 당당하길 바랐다.
비록 저주의 문장이 있다고 하지만 그의 얼굴은 아름다웠다. 게다가 외모로 왈가왈부하는 사람들이 잘못이니, 블레이크가 의기소침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나는 그렇지 못했다.
나는 가면을 쓰려다가 내려놓았다. 그리고 머리카락을 곱게 빗어서 상처를 자연스럽게 가렸다.
흉터를 완전히 가릴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제법 괜찮았다.
나는 라온텔이 아니다.
락슐을 허무하게 떠나보낸 뒤 세르마저 잃고, 황궁에 갇혀 있다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무력하게 목숨을 잃었던 라온텔 벨라시안이 아니다.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됐지만 정글 같은 대한민국 사회 속에서 꿋꿋이 밥벌이하며 살아온 건실한 사회인이자, 블레이크의 단 하나뿐인 아내였다.
내가 바로 앤시아 라 엘르 제라실리온이다.
다른 사람에게 내 자리를 빼앗길 수는 없었다.
나는 블레이크와 모두를 지킬 거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우리 블레이크에게 행복한 길을 만들어주는 거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옷장 문을 열었다. 옷장 안에는 블레이크가 준 드레스와 장신구가 가득했다.
나는 생활하는 데 꼭 필요한 옷 몇 벌을 제외하고는 그가 준 선물을 전혀 쓰지 않았다.
‘어차피 금방 떠날 건데…. 삶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런 생각들로 마음이 움츠러들었던 탓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을 거다.
드레스를 고르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첼시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나를 보고 살짝 놀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따라 아름다우신 거 같아요.”
‘아니에요.’
나는 손사래를 쳤지만, 그녀는 특유의 시원시원한 미소를 지었다.
“저 거짓말 못 해요. 오늘 정말로 예뻐 보이시는데요?”
이런 몸이 된 뒤로 처음 듣는 칭찬에 얼굴이 붉어졌다. 물론 블레이크가 자주 예쁘다고 해주긴 했지만, 그것과는 또 달랐다.
“로즈 님, 드레스를 고르고 계셨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가장 화려한 디자인의 드레스를 가리켰다. 그러자 첼시가 빙그레 웃었다.
“준비를 도와드리겠습니다.”
***
“정말로 비 전하께서 돌아오신 거지?”
“그렇겠지. 멜리사 님이 우는 거 못 봤어?”
“아아, 잘된 일인데, 정말 잘된 일인데 조금 아쉽다.”
시녀들이 가볍게 투덜거렸다. 그런 그녀들을 보며 카밀라가 불쑥 말을 뱉었다.
“너희는 아무렇지도 않아?”
“뭐가?”
“전하를 좋아한 거 아니었어?”
카밀라는 블레이크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렇기 때문에 진짜 앤시아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부터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하지만 다른 시녀들은 태연했다. 아쉬워하긴 했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절박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좋아하지만 어쩌겠어. 다른 분도 아니고 황태자비 전하신데.”
“맞아. 애초에 상대가 되질 않잖아.”
그녀들은 황태자비가 되길 바랐다. 못해도 황비나 후궁을 꿈꿨다. 시녀가 되었으니, 다른 귀족 영애보다는 조금 더 유리한 입장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앤시아가 죽었다는 걸 전제로 하는 말이었다.
앤시아는 황태자의 저주를 풀어준 축복의 소녀였으며, 블레이크가 7년 동안 잊지 못하는 여자였다. 게다가 이미 결혼까지 했다.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상대다.
그녀들도 황태자가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면, 질투심에 사로잡혀 화를 냈을 거다.
하지만 앤시아라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들은 황태자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가문의 압박 또한 받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면, 아직도 황태자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냐는 부모님의 타박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들의 부모조차도 앤시아가 돌아왔다고 하자, 황태자비 자리는 포기해야겠다고 단번에 체념할 정도였다.
하지만 카밀라는 달랐다. 그녀는 황태자비가 돌아왔다 해도 블레이크를 포기할 수 없었다.
“솔직히 비 전하께서 부족한 건 사실이잖아. 백작 가문이라고는 해도 가세가 많이 기울었고, 나이도 전하보다 2살이나 더 많아.”
그녀는 차가운 음성으로 뱉었다.
“그건 그렇지….”
“하지만 그래도 어쩌겠어. 이미 결혼했는걸.”
시녀들이 아쉬운 마음에 투덜거리자, 샬롯이 발끈했다.
“비 전하께서는 위대한 빛의 마법사인 라온텔 벨라시안 님의 후손이야! 그래서 전하의 저주도 푼 거잖아!”
앤시아의 외모, 능력, 빛의 힘과 여신의 저주를 풀었다는 사실까지.
그녀의 모든 것을 동경하던 샬롯이 쏘아붙이자, 다들 입을 다물었다.
그녀들도 모두 알고 있었다. 블레이크를 차지하려면 10년 전에 결혼해야 했다. 이제 와 후회한들 너무 늦었다.
“그래도 그 괴물 같은 여자보다야 우리 황태자비 전하가 백배 낫잖아. 정말 너무 아름다우시더라, 어렸을 때도 예뻤지만 훨씬 예뻐지셨어.”
시녀들의 화살은 로즈에게로 향했다. 어차피 축복의 소녀인 앤시아를 이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로즈는 여러모로 마음에 들지 않는 여자였다. 전하의 상대가 되기에는 부족했다.
아니, 어느 것 하나 좋은 점이 없었다.
짙은 화상 흉터에 말도 하지 못했다. 신분은 모르지만 글도 배우지 못한 걸 보면 많이 쳐줘 봐야 가난한 평민이었다.
저런 여자에게 황태자를 빼앗겼다면, 두고두고 조롱을 당했을 거다.
“그걸 말이라고 해! 그 여자랑 비 전하가 비교가 되냐?”
“이제 그 여자는 어떻게 되는 거야?”
“쫓겨나겠지. 난 어제 당장 궁에서 나갈 줄 알았는데, 의외로 버티더라.”
“야, 그만해. 첼시가 들으면 화내겠다.”
“그러고 보니 첼시는 어디 갔어? 어?!”
시녀가 두리번거리다가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그 소리를 들은 다른 시녀들도 고개를 돌렸다가 같이 놀랐다.
로즈와 첼시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시녀들은 말문이 막혔다. 뒷말을 하다가 들켰기 때문에 조용해진 것이 아니었다.
로즈의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헤어스타일과 화장으로 흉터를 감추어서, 화상 자국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여리여리한 하늘색 드레스는 그녀의 미모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자신감 넘치는 걸음걸이와 도도한 시선에서 우아한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혼돈의 계곡에서 주워 온 여자가 아니라, 공주처럼 당당했다.
‘로즈가 저렇게 예뻤던가?’
그녀들은 로즈의 외모를 감상하느라 인사를 하는 것조차 잊었다.
로즈는 그런 그녀들은 향해 싱긋 웃으며 가볍게 묵례했다. 시녀들은 깜짝 놀라며 황급히 머리를 숙였다.
***
블레이크는 아침 일찍 세피아궁으로 향했다. 앤시아가 아프다며 호출을 한 것이다.
블레이크는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자신이 앤시아라고 주장하는 여인이 곧장 그의 품에 안겨들었다.
“전하! 보고 싶었어요!”
블레이크는 그녀를 떨어트리며, 건조하게 물었다.
“아프다고 들었는데.”
“무서웠어요. 무서워서 몸이 떨리고 아팠어요. 황궁에 오면 전하랑 함께 잘 줄 알았는데, 그래서 기뻐했는데, 이렇게 혼자 있으니 너무 무서웠어요.”
“함께 자다니?”
블레이크의 눈빛이 싸늘하게 굳었다. 하지만 세르는 앤시아인 척을 하며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언제나 이렇게 손을 꼭 잡고 잤잖아요.”
세르파니아는 어둠의 문에 갇혀 있었지만, 자신이 필립과 라온텔에게 주었던 빛의 힘을 통해 세상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하지만 기억이 온전한 건 아니었다.
천 년간의 기억이 뒤죽박죽 섞인 데다가. 유리를 쾅쾅 부순 것처럼 조각나 있었다.
하지만 마구잡이로 뒤엉킨 기억의 파편 속에서도 블레이크와 앤시아가 손을 꼭 잡고 잠이 들었던 건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
블레이크는 앞에 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자, 여인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과거를 추억하기보다는, 정답을 맞혀서 기뻐하는 표정이었다.
그 묘한 이질감이 섬뜩했다.
블레이크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려다 멈칫했다. 여인의 목에 반지로 만든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그건 분명 자신과 앤시아의 결혼반지였다.
“…다이애나는 조금 늦게 올 거다.”
“다이애나요?”
“앤시아의 여동생.”
“아….”
“기억이 나지 않나?”
“어렴풋이 날 것도 같아요.”
사실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앤시아의 형제라….
뿌옇게 흐려진 기억을 파헤쳐 보아도 앤시아의 오빠들 얼굴이 떠오를 뿐, 동생은 기억나지 않았다.
물론 그건 앤시아가 아니라 라온텔이지만 말이다.
다이애나, 다이애나…. 아, 황태자랑 결혼한다는 그 여자인가?
세르는 다이애나를 겨우 기억해냈다.
“다이애나는 지금 시험 기간이거든.”
“7년 만에 언니가 돌아왔는데, 보고 싶지 않나 봐요?”
“…그게 아니라, 내가 연락을 미뤘다. 다이애나는 2년 동안 유급했어. 다행히 복학한 뒤로 성적이 좋아서, 수석을 노릴 수도 있어. 그래서 시험이 끝나면 연락할 생각이다.”
블레이크는 저 여자가 수상쩍었다. 하지만 객관적인 사실들이 모두 그녀가 앤시아라는 걸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니 그의 생각이 어떻든 다이애나에게는 연락해야 했다.
하지만 블레이크의 말을 들은 여인는 불퉁하게 대답했다.
“그깟 수석이 언니보다 중요하다는 거잖아요.”
“…….”
블레이크는 침묵했다.
앤시아라면 저렇게 말하지 않았을 거다.
그는 다이애나가 어째서 유급했는지 밝히지 않았다. 만에 하나 그녀가 진짜 앤시아라면 가슴 아파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곧장 다이애나를 비난했다.
아무리 기억을 잃었다고 한들 친동생이 유급했다는데, 이유를 묻거나 걱정하지도 않은 채 무작정 헐뜯는 여인을 보며 블레이크의 마음은 싸늘하게 굳어갔다.
단순히 실망을 한 건 아니었다. 그보다는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저 여인이 정말로 앤시아가 맞을까?’
만약 정말 앤시아라면 어떤 말을 해도 상관없었다. 살아돌아온 것만으로 고마웠으니까.
그녀가 성격이 바뀌었다면 오히려 7년 동안 얼마나 힘들었을지를 떠올리며 죄책감을 느꼈을 거다.
얼굴이 바뀌든 성격이 바뀌든, 심지어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녀가 정말로 앤시아라면 말이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그녀를 보면 볼수록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면 질투하는 건지도 몰라요.”
“질투?”
“네. 전하를 차지할 기회였는데, 빼앗겨서 심술을 부리는 거예요. 전하랑 결혼하기로 했었으니까요.”
“헛소문이다.”
블레이크는 불쾌함을 감추지 못했다.
블레이크와 다이애나는 어린 시절 친구였다. 그리고 앤시아가 사라진 후로는, 언니를 지키지 못한 못난 형부와 처제 사이가 되었다.
그런 오해를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화가 났다. 자신은 물론이고 다이애나에 대한 예의도 아니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이 ‘앤시아’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하다니.
단순히 소문을 믿고 물어볼 수는 있었다. 하지만 빼앗겨서 심술을 부린다고?
이는 모욕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요? 하지만 조심하는 게 좋아요. 사심이 없다면 괜히 그런 소문이 났을 리 없으니까요.”
“…다이애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혹시 전하께서도 마음에 두시는 거예요?”
그녀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블레이크는 앤시아의 얼굴을 한 여인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할 말이 없군. 아픈 데가 없다면 이만 가보겠네.”
“저, 전하.”
세르는 다급히 블레이크를 불렀다. 하지만 그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문밖으로 나가버렸다.
***
나는 서재로 가서 책을 읽어 보았다. 혹시라도 금제가 발동하며 다시 제국어를 잊어버린 건 아닌지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특별한 영향을 미치진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책상에 앉아서 종이를 펼치고 펜을 잡았다.
-전하보다 2살이 많습니다.
-20살입니다.
역시 나이는 순조롭게 써졌다.
-저는 로즈입니다.
-내 이름은 ….
하지만 앤시아라고 쓰려고 하자 다시 머릿속이 새하얀 백지가 되며 아무것도 쓸 수가 없었다. 역시 안 되는구나.
-그 여자는….
혹시나 했지만, 그 여자는 가짜라는 것도 쓸 수가 없었다.
말을 할 수 있는 건 글로 쓸 수 있다. 그리고 말을 하지 못하는 건 글로도 쓸 수 없었다.
내가 앤시아가 아니라고 말하는 건 가능한데, 앤시아라고 밝히는 건 안 된다니….
거짓말은 되지만 진실은 말할 수 없는 거다. 왠지 씁쓸하면서도 아이러니한 기분이 들었다.
‘제가 전하의 아내예요.’ 그렇게 써보려고 했지만 역시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구체적인 신분을 밝히는 게 안 된다면, 돌려서 말하는 건 어떨까?
-…….
‘어둠의 문에 빠진 건 나였다.’라고 써보려고 했지만, 한 글자도 쓸 수가 없었다.
아모리아궁에 살았었다, 빛의 계승자다, 내가 라온텔 벨리시안이다. 다른 내용을 써보려고 했지만 이 역시도 실패했다.
그동안의 겪었던 일들은 물론 천 년 전의 일을 말하는 것까지도 금제가 걸려 있었다.
그렇다면 그냥 평범한 내용은 어떨까?
-저는 여자입니다.
-저는 머리카락이 깁니다.
이렇게 기본적인 내용은 아무런 문제도 없는 거구나.
-장미를 좋아해요.
-깻잎을 좋아해요.
-홍차에 레몬잼을 넣어 먹는 게 제일 맛있어요.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막힘없이 술술 써 내려가던 나는 이내 막히고 말았다.
-나는….
‘블레이크를 사랑한다.’
그렇게 쓰려고 했는데,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이것도 안 되는구나.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편지를 쓰려고 했는데, 이 말은 전할 수가 없겠네….
차라리 잘됐다. 이런 건 마음속에 담아두는 게 나을 테니까.
종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블레이크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침부터 공부하고 있었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무리하지 마. 글을 못 써도 내가 입술을 읽으면 되니까.”
그는 내가 쓴 글을 보고는 빙그레 웃었다.
“역시 깻잎이랑 레몬잼을 좋아하는구나?”
나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더는 앤시아라는 사실을 숨길 생각이 없었으니까.
그가 나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매만졌다.
“오늘 왜 이렇게 예뻐?”
‘예뻐요?’
“응. 언제나 예쁘지만.”
내 눈에는 그렇게 말하는 블레이크가 더 아름다워 보였다.
“아모리아궁으로 갈래? 온실에 신선한 채소들이 많이 있어.”
나는 깜짝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가도 되는 건가?
아모리아궁은 앤시아와 블레이크, 두 사람의 공간이었다.
어제 그가 나를 아모리아궁에 데려갔던 건, 내가 앤시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르가 나타났다. 아직 확실하지 않다고 해도 나보다는 진짜 앤시아일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그런데도 나를 그곳에 데려갈 생각이야?
‘제가 가도 돼요?’
“당연하잖아. 언제든지 가도 돼.”
그는 자상하게 말하며 손을 뻗었다.
“가자. 로즈.”
나는 그의 손을 잡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
우리는 함께 아모리아궁으로 갔다.
나는 온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채소밭으로 직행했다.
어제 왔을 때는 보고도 못 본 척 애써 무시했었지만, 오늘은 무럭무럭 자란 채소들을 마음껏 감상했다. 온실에는 온도를 조절하는 마법이 걸려 있어서, 다양한 채소들을 일 년 내내 수확할 수 있었다.
꽃도 예쁘지만 역시 나는 채소가 좋다. 열매가 주렁주렁 열려 있는 걸 보면 왠지 흐뭇해진다.
“좋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는 만큼 따.”
‘따도 돼요?’
“응. 테리한테 요리해달라고 할게.”
나는 얼른 채소들을 따기 시작했다. 다 자란 채소를 직접 따서 먹는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뿌듯함과 재미가 있었다.
“로즈.”
신이 나서 깻잎과 호박, 가지를 따고 있는데, 블레이크가 나를 불렀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가 빨간색 고추를 든 채 예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
그가 새빨간 고추를 나의 입에 넣어주려 했다.
제국 사람들에겐, 아니, 매운 것에 익숙하다는 한국 사람들도 먹으면 생수를 2리터 정도 벌컥벌컥 들이켜 입 속을 진화시켜야 할 만큼 매운 고추였다.
그런 걸 들고 저렇게 예쁘게 웃는 건 반칙이다.
다른 사람한테 한다면 무척이나 사악한 행동이었지만, 나한테는 문제없었다.
한국에서 살았을 때 전국에서 제일 맵기로 유명한 짬뽕집이 회사 앞에 있었는데, 나는 거기 단골이었다. 어쩜 이렇게 잘 먹냐고 사장님도 놀랄 정도였다.
자신감 있게 웃으며 홍고추를 먹으려고 하는데,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니 세르와 에드온이 서 있었다.
세르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블레이크에게 다가왔다. 그러자 블레이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여긴 어떻게 온 거지?”
블레이크가 세르에게 싸늘한 시선을 던지자 에드온이 재빨리 답했다.
“비 전하께서 기억을 찾으시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서, 제가 모시고 왔습니다.”
거짓말일 거다. 에드온은 신중하고 명령에 충실한 사람이다.
그녀가 앤시아일 확률이 높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블레이크의 허락도 없이 무작정 아모리아궁으로 데려오진 않았을 거다.
세르가 추궁을 당할까 봐 변호해 주는 거겠지.
“네. 에드온 경이 데려와 줬어요!”
하지만 세르는 책임을 자연스럽게 에드온에게 떠넘겼다.
“전하랑 제가 함께 지내던 곳이 어떤 곳인지 궁금했는데, 너무 작고 낡아서 놀랐어요. 폐하께서도 너무하세요. 전하가 저주에 걸렸다고 해서 이런 별궁에 처박아 두시다니….”
세르는 한껏 슬픈 표정을 지었다.
“저주가 풀리고 나서야 겨우 받아주신 거겠죠? 정말 너무하세요. 폐하한테 실망이에요.”
블레이크는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지만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은 채, 에드온에게 말했다.
“…내 허락이 없이는 그 누구도 아모리아궁에 들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송구합니다.”
“물러가라.”
그는 싸늘한 목소리로 축객령을 내렸다.
“…네. 비 전하, 가시죠.”
“저 여자는요?”
에드온이 세르를 데려고 서둘러 떠나려고 하는데, 그녀가 나를 가리켰다.
“저 여자는 여기 있는데, 왜 저한테만 돌아가라는 거예요!”
“비 전하.”
에드온이 만류했지만, 세르는 오히려 블레이크의 옷깃을 붙잡으며 애걸했다.
“전하, 제가 마음에 안 드세요? 어렸을 때와 달라져서 실망하셨어요? 기대하는 모습이 아니었어요? 아니면 벌써 제가 싫어지신 거예요? 제가 귀찮아지셨어요?”
“…….”
“저, 앤시아예요. 전하의 저주를 풀어준 사람이라고요. 저한테 잘해주셔야죠.”
“내 부인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마라.”
블레이크의 목소리가 칼날처럼 서늘했다.
“네…?”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서 본인이 앤시아라는 것만은 확신하는군.”
“그건….”
“세피아궁에 가서 천천히 생각해보게. 본인이 정말 앤시아가 맞는지.”
“전하….”
너무나도 차갑게 선을 긋는 블레이크의 태도에 세르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나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세르는 나의 몸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녀를 앤시아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세르를 의심하는 걸 넘어 적의까지 보였다.
“비 전하, 가시죠.”
에드온은 세르를 데리고 서둘러 떠났다. 그녀도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했다.
그들이 떠나자 블레이크는 다시 나에게 다가왔다.
“로즈, 저쪽에는 과일이 있어. 이제 그리 가볼까?”
그는 내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조금 전의 싸늘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평소처럼 자상하고 부드러웠다.
‘네. 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에드온이 수석 시녀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오자, 멜리사가 다급히 물었다.
“에드온 경, 어째서 이렇게 빨리 돌아오신 건가요?”
“전하께서 축객령을 내리셨습니다.”
“전하께서 비 전하께요?”
“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한스는 당황했다.
“전하께서 로즈 양 때문에 비 전하를 외면하셨단 겁니까?”
앤시아는 갑자기 포렌스궁에 나타나서는 블레이크가 어디 있는지 물었다.
아모리아궁에 계신다고 하자, 자신도 가겠다고 했다. 그곳은 전하의 허락 없이 출입할 수 없다고 아무리 설명해도 막무가내였다.
“내가 잘 모른다고 무시하는 거야? 인간들은 모두 똑같아! 너넨 시종이라며! 시키는 것만 똑바로 하면 되잖아! 도대체 누구 편인 거야! 나야, 그 여자야?!”
그들은 자신들을 무시하는 앤시아의 말을 듣고 무척 놀랐다.
앤시아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신분이나 직업, 외모로 상대를 차별하는 법이 결코 없었다.
에드온이나 테리가 평민이라고 무시하지도 않았고, 가마솥을 만든 대장장이를 찾아가서 정말 대단하다고 순수하게 칭찬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하지만 예전과 다르다고 해도 앤시아였다. 7년 내내 그리워했던 황태자비 전하시다.
에드온은 앤시아를 모시고 아모리아궁으로 향했다.
황태자가 로즈와 함께 있긴 했지만, 그녀보다는 앤시아를 더 배려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은 완전히 빗나갔다.
“외면했다기보다는….”
아모리아궁에서의 일을 떠올리던 에드온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외면한 게 아니면 무엇입니까?”
그가 뜸을 들이자, 멜리사가 재촉했다.
“전하께서는 그분을 비 전하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네?”
“뭐라고요?”
멜리사와 한스는 당황했다.
물론 그들도 이상한 점을 느끼긴 했다.
앤시아는 많이 바뀌었다. 얼굴은 그대로였지만 말투나 성격, 행동이 너무 달라서 마치 딴사람이 된 것 같았다.
멜리사는 어젯밤 함께 세피아궁으로 가던 블레이크와 앤시아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들 사이에는 어색한 긴장감이 흘렀다. 어렸을 때와는 전혀 달랐다.
오히려 블레이크와 로즈가 함께 있으면 그 시절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멜리사는 서로를 따스하게 바라보는 블레이크와 로즈의 모습을 떠올리다가 지워버렸다.
진짜 황태자비 전하께서 돌아오셨는데 로즈를 보며 예전의 비 전하를 떠올리다니.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콜린의 말에 따르면, 앤시아에겐 여전히 빛의 능력이 있었다. 똑같은 외모에 빛의 능력까지 있는데, 진짜 비 전하가 아닐 리 없었다.
“그럴 리 없습니다. 폐하께서도 인정하지 않으셨습니까.”
“전하께서 무슨 근거가 있으신 걸까요?”
한스가 묻자, 에드온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모르는 이유가 있겠죠.”
세 사람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앤시아를 찾았다는 소식에 모두들 기뻐했다. 드디어 비 전하께서 돌아오셨으니, 전하께서도 방황을 접고 이제부터는 행복한 날들만 펼쳐질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또 다른 불안감이 포렌스궁을 맴돌고 있었다.
***
블레이크는 리차드에 대해 조사하도록 한스에게 명령을 내렸다.
“리차드가 운영하는 카멜리아 고아원은 다른 고아원에 비해 시설이 좋기로 유명합니다. 의복이나 음식도 잘 나오고, 고아원 내에서 교육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한스는 자신이 조사한 내용을 고했다.
“게다가 로움족이나 장애가 있는 아이들까지도 차별 없이 받아주고 있죠. 이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며 조롱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훌륭하다며 칭찬하는 사람 또한 적지 않습니다.”
나라에서 운영하는 국립 고아원과 달리, 사립 고아원은 원생들을 차별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립 고아원의 가장 큰 목표는 아이들을 부잣집에 입양시켜 후원금을 받는 거였다.
그 때문에 아름다운 외모나 특이한 머리색을 가진 아이들은 환영받았지만, 반대로 천하다고 멸시받는 로움족이나 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받아주는 곳은 거의 없었다.
이는 존경받아 마땅한 일이었지만, 블레이크는 찝찝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웨스틴 후작 가문과의 약혼은 어떻게 이루어진 거지?”
“웨스틴 영애는 프랭크 카실과 파혼한 뒤 오랫동안 우울증을 앓았는데, 카멜리아 고아원에서 봉사 활동을 하면서 부쩍 호전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리차드와 연인 관계로 발전한 모양입니다.”
“웨스틴 후작의 반대가 심했을 텐데?”
카실 공작이 처형당하고, 그의 편에 섰던 귀족들도 힘을 잃었다. 웨스틴 후작 가문도 마찬가지였다.
뒤늦게 프랭크와 파혼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카실 가문과 손을 잡았던 과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힘을 잃었다고 할지언정 후작 가문이었다. 반란에 연루된 데다가 작위도 없고, 그것도 모자라 로움족 출신인 리차드를 순순히 사위로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1년 동안 극심하게 반대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결국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죠.”
정말로 그렇게 간단한 걸까? 블레이크는 웨스틴 후작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웨스틴 후작은 혼맥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프랭크 카실과 파혼하자마자 최고의 혼처를 찾기 위해 저울질을 했다. 그런 그가 딸의 고집을 꺾지 못해서 리차드를 받아들였다는 것이 납득이 가지 않았다.
차라리 평민과 결혼하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딸과 의절하고, 새로운 양녀를 들이는 편이 웨스틴 후작다웠다.
하지만 내부의 사정이 어찌 되었든 리차드는 어엿한 후작 가문의 후계자가 되었다. 그리고 타이밍 좋게 앤시아를 똑 닮은 여인을 데려왔다.
분명히 무슨 계략을 꾸미고 있는 거다.
“전하, 혹시 리차드 그자 때문에 비 전하를 멀리하시는 겁니까?”
“누가 비 전하지?”
한스의 질문에 블레이크는 날카롭게 반응했다.
그는 어제 아모리아궁에 오자마자 황제를 헐뜯던 여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폐하께서도 너무하세요. 전하가 저주에 걸렸다고 해서 이런 별궁에 처박아 두시다니….”
“저주가 풀리고 나서야 겨우 받아주신 거겠죠? 정말 너무하세요. 폐하한테 실망이에요.”
앤시아와 같은 얼굴을 했지만, 하는 말은 정반대였다. 그녀라면 결코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을 거다.
블레이크는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사실에 절망하고 내심 체념했던 자신을 따뜻하게 위로해주던 앤시아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모리아궁은 사랑이라는 뜻이에요. 폐하께서는 전하를 사랑하세요. 그래서 이 별궁을 택하신 걸 거예요.”
“폐하께서는 전하를 사랑하세요. 그러니까 며느리인 저한테도 잘해주시는 거예요.”
아무리 기억을 잃었다고 한들 사람이 이렇게까지 바뀔 수 있을까? 앤시아라면 상대의 사정을 고려할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무작정 비난부터 퍼붓지는 않았을 거다.
“아직 확실하지 않다. 모든 게 밝혀지기 전까지는 ‘비 전하’라는 호칭을 삼가거라.”
블레이크는 단호하게 명했다.
***
리차드는 앤시아가 머문다는 세피아궁으로 향했다. 그가 응접실 안으로 들어가자, 앤시아는 아이처럼 울먹였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저를 좋아하시지 않는 것 같아요.”
“그렇지 않아. 앤시아, 너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아름다워. 황태자가 싫어할 리가 없잖아.”
리차드는 앤시아를 달래주었다.
“하지만 너무 냉랭하신걸요. 제가 리차드 님을 좋아하는 걸 아신 게 아닐까요?”
리차드는 입꼬리를 올리며 그녀의 찬란한 금색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럴 리가 없잖아. 앤시아, 네가 직접 말을 하지 않았다면 말이야.”
“저는 말한 적 없어요!”
앤시아가 화들짝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그래, 그럴 거라 믿어. 앤시아.”
자신의 말을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앤시아를 보며, 리차드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욱더 짙어졌다.
리차드는 7년 전의 일을 떠올렸다.
작위를 박탈당하고 평민으로 추락한 채 공작저에서도 쫓겨났다. 그때는 모든 것이 끝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살아남았다.
생각해보면 이 모든 것이 ‘앤시아’ 그녀 덕분이었다.
앤시아가 갑자기 실종되자, 황궁은 비상이 걸렸다. 카실 가문을 감시하던 기사와 마법사들도 어둠의 문으로 향했다.
아무리 감시할 인력을 남겨두었다지만 전보다는 허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리차드는 이를 노렸다. 그리고 카실 공작 또한 이것이 기회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방법이 틀렸다. 그는 자신의 사병을 동원하여 황궁을 습격하려 했다.
대부분의 가신들이 이미 붙잡히거나 배신했고, 기사들조차 카실 가문을 떠난 상태였다. 남아 있는 소수의 인원으로 황제를 없애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리차드는 무리한 계획이라는 걸 알면서도 아놀드 카실을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부추겼다.
황태자의 저주가 풀린 것을 축하하기 위해 대대적인 황궁 무도회가 개최되던 날, 카실 공작의 사병들은 무도회장을 습격했다. 그리고 리차드는 이에 맞춰서 자신이 갇혀 있는 동쪽 감옥에 불을 지르도록 도미람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는 도박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리차드의 목숨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의 충성스러운 신하인 도미람은 결사반대했다. 하지만 리차드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어차피 이대로 가면 목숨을 부지하지 못한다. 이 정도 도박은 걸어봐야 했다.
무도회 날 당일, 계획한 대로 감옥에 불길이 치솟았다.
리차드는 연기에 질식해 쓰러졌다. 한 달 동안 의식을 잃고 헤매었으나 결국 살아남았다. 오른쪽 다리에 작은 화상을 입긴 했지만, 이 정도면 도박에는 성공한 셈이었다.
게다가 다른 일들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프랭크는 불길에 휩싸여 죽었다. 도미람은 과거 흑마법을 이용해 텐스테온을 암살하려 한 것과 감옥에 불을 지른 것 모두가 카실 공작의 명령이었다고 증언하였다.
도미람의 세뇌 마법에 당한 카실 공작 또한 모든 것이 자신의 짓이라고 자백했다. 도미람도 자신의 마법사라고 했다.
카실 공작은 어차피 사형될 처지였지만, 이로 인해 시기가 조금 앞당겨졌다. 그리고 역할을 마친 도미람은 감옥에서 자진했다.
도미람을 잃은 것은 뼈아팠다.
도미람은 유능한 흑마법사였다. 그만큼 충직하고 유능한 부하를 다시 찾는 건 어려웠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텐스테온은 도미람을 쫓고 있었다. 황제는 다른 이에게 여신의 저주를 옮길 수 있단 소문을 퍼트린 사람이 도미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둔한 녀석, 그런 실책을 저지르다니.
아무리 유능하다 한들 더는 쓸 수 없는 카드였다. 그랬기 때문에 리차드는 가차 없이 그를 버렸다.
카실 공작이 처형당하는 날, 공작 부인과 막내 네온이 자살했다. 도미람의 세뇌 마법이 뒤늦게 발동한 것이다.
예상했던 시기가 돼도 죽지 않아서 초조했는데, 오히려 딱 좋은 시기에 발동되었다.
덕분에 동정 여론이 강해지며 카실 공작의 하나뿐인 혈육인 리차드를 살려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더욱 커졌으니까.
아놀드 카실은 미우나 고우나 황제의 친형제였다. 아무리 그의 죄가 크다고 한들, 아직 성년도 되지 않은 조카마저 모두 죽인다면 부정적인 반응이 커질 터였다.
텐스테온도 그걸 알았을 테니, 가장 어린 네온을 살려둘 생각이었을 거다. 하지만 리차드가 먼저 선수를 쳤다.
결국 리차드를 제외한 카실 가문의 사람들은 모두 죽음을 맞이했고, 황제는 그를 살려줄 수밖에 없었다.
가까스로 목숨은 부지하였지만, 지난 7년은 지옥이었다.
작위를 박탈당하고 재산도 잃었다. 물론 숨겨둔 개인 재산이 있었기 때문에 먹고 사는 데 지장은 없었지만, 황실의 은밀한 감시를 받아야 했다.
리차드는 숨을 죽였다. 그리고 드디어 웨스틴 후작 가문의 데릴사위가 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웨스틴 후작 가문은 과거의 달리 힘이 약했다. 유서 깊은 후작 가문이라고 거들먹거리지만, 실상은 이빨 빠진 호랑이나 마찬가지였다.
리차드는 허울뿐인 후작 자리에서 만족할 수 없었다.
그때 앤시아가 나타났다.
“리차드 님, 고아원 앞에 어떤 여자가 쓰러져 있어요!”
웬 비렁뱅이가 또 온 건가?
그의 고아원 시설이 좋다고 소문이 나자, 온갖 사람들이 몰려왔다.
투자를 바라는 비전 없는 사업가, 후원을 요구하는 주정뱅이 예술가, 순진한 자선 사업가를 등쳐 먹으려는 사기꾼, 공짜로 놀고먹고 싶은 마약 중독자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이번에도 그렇겠지. 그는 별다른 기대 없이 고아원 아이가 이끄는 대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고아원 앞에 쓰러져 있는 여인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앤시아…?”
그녀는 앤시아였다. 7년 전보다 키도 크고 분위기도 바뀌었다. 소녀에서 완벽한 숙녀로 성장했지만 그래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
감겨 있던 여인의 눈이 스르르 떠졌다.
그녀가 눈을 뜬 순간 리차드는 다시 확신했다. 이 여자는 앤시아가 확실하다. 머리카락과 눈동자의 색도 같았고, 외모도 똑 닮았다. 황태자와의 결혼반지도 가지고 있었다.
리차드는 그녀를 곧장 자신의 자택으로 데려갔다.
“당신은 누구신가요?”
앤시아는 리차드를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녀는 아예 기억을 잃어버린 모양이었다. 리차드의 입꼬리가 크게 휘었다.
‘빛의 여신은 아무래도 나의 편인가 보군.’
오랜 시간이 지나서일까, 아니면 앤시아가 기억을 잃은 탓일까?
7년 만에 만난 앤시아는 별로 매력적이지 않았다.
외모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녀는 어렸을 때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하지만 전혀 끌리지 않았다.
동백나무에 손수건을 묶던 앤시아의 모습을 떠올리며 앞에 있는 여인을 바라보아도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아마도 그녀의 문제는 아닐 거다.
블레이크가 죽고 앤시아가 공주가 되면, 자신이 그녀의 남편이 되어서 텐스테온을 아버지처럼 모시는 꿈을 꿨었다.
그때는 스스로가 똑똑하다고 여겼지만, 이제 와 생각해보면 미숙하고 유치했다.
이제 그는 가족이란 환상에 미련을 갖고 사랑 놀음에 취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그러니 앤시아를 만나도 아무런 감정이 동하지 않는 거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끌리지 않는다고 해서 앤시아의 가치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리차드는 그녀에게 세뇌 마법을 걸고, 자신을 좋아하도록 만들었다.
리차드는 도미람이 죽은 뒤 7년 동안 새로운 흑마법사를 키우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 정도로 재능이 있는 자는 구할 수가 없었다.
새로운 흑마법사는 도미람보다 능력이 부족하였지만, 그래도 앤시아를 세뇌시키는 것 정도는 문제없이 해냈다.
그녀는 마치 텅 빈 물병 같아서 리차드가 말하는 걸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대로 받아들였다.
참으로 쉽고 재미없는 여자였다. 그래도 유용한 점이 하나 있다면 그녀가 ‘언어 능력자’라는 것이었다.
텐스테온이 어째서 앤시아를 그렇게 아꼈는지 궁금했다. 그런데 그 이유를 이제야 깨달았다.
언어 능력을 지니고 있었으니 귀하게 여기는 것이 당연했다. 리차드도 그랬으니까.
언어 능력자라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 그저 도구로만 보였던 앤시아가 무척 귀하고 특별한 존재처럼 느껴졌다.
7년 전처럼 소유욕이 들끓지는 않았지만, 남에게 빼앗기기 싫을 정도로 유용해 보였다.
차라리 앤시아를 찾았다는 사실을 숨기고, 평생 자신만의 도구로 이용하는 건 어떨지 고민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명검이라 해도 창고에 처박아 두면 녹이 슬 뿐. 좋은 칼이 있으면 휘둘러야 하는 법이다.
리차드는 앤시아를 가장 잘 써먹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저울질했고, 결국 그녀를 황궁으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했다.
그건 올바른 선택이었다.
앤시아는 마음이 불안하다는 이유로 자신을 구해줬던 리차드를 보고 싶다고 청했고, 리차드는 너무나도 수월하게 황궁에 다시 발을 디딜 수 있게 되었다.
“저는 리차드 님과 함께하고 싶어요.”
리차드는 계속해서 자신에게 매달리는 앤시아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토록 욕심을 냈던 여인이 드디어 자신의 것이 되었다는 성취감은 의외로 적었다.
하지만 세뇌 마법이 아직 풀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매우 만족스러웠다.
단순히 세뇌를 시켜서 몸을 조종하는 건 쉬웠다.
하지만 황궁 마법사들의 검증을 통과할 만큼 은밀한 세뇌 마법을 거는 건, 제아무리 뛰어난 흑마법사라도 하기 어려운 상급 마법이었다.
도미람조차도 카실 공작을 겨우 세뇌시키는 데 성공했을 뿐이다. 공작 부인과 네온에게 걸었던 세뇌 마법은 거의 실패한 거나 다름없었다.
그들이 결국 자살을 하긴 했지만, 예정보다 훨씬 늦게 발동되었으니까.
앤시아의 세뇌도 완벽하지 않았다. 그래서 마법과는 별개로 리차드가 그녀를 구슬리고 유혹하며 세뇌가 풀리지 않도록 보완해줘야 했다.
“앤시아, 나도 너와 함께하고 싶어.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황태자가 사라져야 해.”
“알아요.”
리차드는 사랑스럽다는 듯 앤시아를 바라보며 은밀하게 속삭였다.
“약은 넣었어?”
황궁으로 오기 전, 리차드는 앤시아의 손에 독약이 든 작은 병을 쥐여주며 명령을 내렸다.
“황태자랑 식사할 때마다 이걸 조금씩 넣도록 해. 앤시아, 너라면 할 수 있을 거야.”
앤시아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그렇게 하겠다고 고개를 끄덕였었다. 하지만 지금 리차드가 확인을 하니,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왜 그러지?”
“그게, 아직 전하랑 식사하지 못했어요….”
“뭐라고?”
“전하는 매일 로즈라는 여자랑만 함께 있는걸요.”
로즈. 황태자가 혼돈의 계곡에서 데려온 흉측한 여자를 애지중지한다는 말은 들었다. 하지만 앤시아가 돌아왔는데, 식사 한 번 하지 않았단 건가?
예상치도 못한 변수였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앤시아를 걱정하는 척 가식적인 표정을 지었다.
“역시 쓰레기 같은 인간이구나. 네가 실종되자마자 네 동생을 탐내더니, 이제는 다른 여인에게 한눈이 팔려서 너를 거들떠보지도 않는군.”
“…….”
당장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듯한 앤시아의 모습을 보며 리차드는 속으로 미소 지었다.
“네가 어둠의 문으로 떨어져서 생사를 건 사투를 벌이는 동안, 황태자는 매일 파티를 즐겼지. 저주가 풀린 기쁨에 취해서 너라는 존재는 새까맣게 잊어버렸어.”
“알아요. 알고 있어요. 리차드 님의 가족도 황태자 때문에 억울하게 목숨을 잃으셨다고 했죠?”
리차드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그래. 황태자의 입지를 단단히 하기 위해 우리 가족은 희생되었지.”
사실 카실 공작 일가가 처형을 당했든 사지가 찢겨 죽었든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리차드는 진짜로 가족을 잃어서 슬픈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앤시아, 복수하자. 우리의 복수를 하는 거야.”
“하지만 황태자 전하는 저를 봐주시지도 않으시는걸요.”
“그럼 황제를 찾아가.”
“폐하를요?”
“그래, 황제를 찾아가서 황태자와 가까워지도록 도와달라고 말해. 황제는 너를 지키지 못했어. 그러니 분명 죄책감을 느끼고 있을 거야. 황제의 마음을 얻고, 황태자랑 식사할 때 이걸 타는 거야.”
“폐하는요? 리차드 님의 부모님을 죽인 건 폐하잖아요? 그럼 폐하부터 죽여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녀는 순진한 눈망울을 반짝였다.
“황제는 나중에….”
텐스테온이 죽으면 다음 황위는 블레이크의 차지가 될 거다.
적통인 데다 여신의 힘을 지닌 황태자가 황제가 된다는데 그 누가 막을 수 있을까?
자신이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블레이크부터 처리해야 했다. 황제는 그다음이다.
“왜요?”
“나는 황제 때문에 가족을 잃었어. 그러니 황제에게도 가족을 잃은 슬픔을 알려주고 싶어.”
리차드는 그럴듯한 핑계를 대며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앤시아, 할 수 있지? 이 약을 먹으면 황태자는 고통스럽게 죽어갈 거야. 우리들의 복수를 하자. 우리가 함께할 미래를 위해서 황태자를 처리하는 거야.”
이 약을 먹으면 블레이크는 천천히 죽어갈 거다.
흑마법을 담은 독이다. 중독되었다는 걸 깨달을 때쯤에는 이미 손쓸 수가 없겠지. 그가 아무리 빛의 힘을 지녔다고 한들 살아남지 못할 거다.
블레이크가 죽고 나면, 후계자 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쟁이 펼쳐지겠지.
리차드는 이제 곧 웨스틴 후작 영애와 결혼한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정식 후작이 될 거다.
텐스테온과 가까운 핏줄인 데다가, 후작이며, 7년 동안 선행을 베풀어 제국민에게 명망이 높은 리차드는 단번에 유력한 황태자 후보로 떠오를 터였다.
물론 다른 경쟁자가 있겠지만, 그건 차근차근 처리하면 된다.
리차드가 황태자가 죽은 뒤의 계획을 하나하나 곱씹는데, 앤시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리차드 님, 황태자 전하께서 돌아가시면 저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어떻게 되다니?”
“황태자가 독살당한다면 제가 의심받지 않을까요?”
그녀의 말대로였다. 블레이크가 죽으면 앤시아는 의심을 피하지 못할 거다.
리차드는 블레이크가 죽으면 앤시아에게 걸어놓은 세뇌 마법을 이용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조종할 생각이었다.
물론 들키지 않고 운 좋게 살아남을 수도 있다. 어쩌면 텐스테온의 양녀가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작은 희망을 걸고 모험하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컸다.
게다가 그때까지 세뇌가 유지될는지…. 설령 유지된다고 하더라도 들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그리고 과거의 앤시아라면 모를까, 지금의 앤시아는 기억을 잃은 탓인지 고장 난 오르골처럼 삐거덕거렸다.
계속 살려두면 무슨 사고를 칠지 모른다. 황태자를 죽인 뒤에 적당히 처리하는 편이 옳았다.
그녀가 지닌 언어 능력이 아깝긴 하지만 블레이크를 죽인 값이라고 치면 나쁘지 않은 장사였다.
하지만 리차드는 그런 생각들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은 채, 누구보다도 자상한 표정을 지으며 앤시아를 바라보았다.
“걱정하지 마. 궁의나 황궁 마법사도 알아낼 수 없을 만큼 완벽한 독이야. 절대로 들킬 리 없어.”
“하지만 겁이 나요….”
“겁이 날 것도 많다. 만약에 정말로 위험한 일이라면, 내가 너한테 시킬 리가 없잖아. 나는 앤시아 너를 사랑하는걸.”
“리차드 님, 정말로 저를 사랑하세요?”
“물론이지.”
그의 입술이 짙은 호선을 그렸다.
“앤시아, 우린 어렸을 때부터 서로 사랑했어. 비록 황태자가 너를 욕심내는 바람에 헤어졌지만, 우리는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지. 나는 너밖에 없어.”
“정말이요?”
“그래, 7년 동안 너를 찾아 헤맸는걸.”
물론 이는 거짓말이었다.
어둠의 문 안으로 떨어진 사람이 살아 있을 리가 없다.
리차드는 앤시아가 실종됐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녀가 죽었다고 생각했고,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앤시아를 찾아 헤매는 황제와 황태자를 멍청하다고 여겼다.
어머니의 무덤에 손수건을 묶어주던 앤시아를 떠올리면 아련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평민이라 괄시를 받으며 추락해버린 신분을 뼈저리게 느낄 때마다 연정은 애증으로 바뀌었다.
어쨌든 카실 공작 가문이 망하게 된 데에는 앤시아의 역할이 컸으니까.
하지만 리차드는 뛰어난 거짓말쟁이였고, 정말로 사랑하는 연인을 대하듯 앤시아를 바라보았다.
“앤시아, 나는 오직 너만을 사랑해.”
앤시아는 리차드의 말을 듣고 해사하게 웃었다.
“그런데 왜 다른 여자랑 결혼하세요?”
“…뭐?”
“웨스틴 후작 영애랑 결혼하신 다면서요.”
“그, 그걸 어디서 들었지?”
“시녀들이 말하던데요.”
젠장, 누가 이 멍청이한테 그런 말을 전한 거지!
여긴 황궁이니, 리차드의 자택에 있을 때처럼 앤시아에게 주어지는 정보를 완벽하게 차단할 수가 없었다.
“그건 앤시아, 너와 재회하기 전에 결정된 일이었어.”
“그럼 파혼하시겠네요?”
“그게 쉽지 않아. 상대는 후작 가문이야. 감히 나 같은 평민이 건들 수 있는 상대가 아니지.”
“그래요.”
앤시아의 눈빛이 어딘지 냉랭했다.
이상하다. 내 말을 무조건 믿고 따라야 하는데….
설마 세뇌가 풀린 건가?
리차드는 다급한 마음에 그녀를 재촉했다.
“그러니까 황태자가 어서 사라져야 해. 황태자를 없애고, 내가 그 자리에 오르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어. 원치 않는 결혼을 취소하고 너와 결혼할 수도 있지.”
“정말로 파혼하실 거예요?”
“당연하잖아. 나한테는 너뿐인걸, 내가 황태자가 되면 너를 황태자비로 맞을 거야.”
“와, 기뻐요.”
앤시아는 다시 흐리멍덩한 눈으로 리차드의 품에 안겼다.
잠깐 당황했지만 역시 멍청한 계집이군.
리차드는 안심했다. 그의 품에 안긴 앤시아, 아니 세르파니아의 눈이 공허하게 가라앉아 있다는 사실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도대체 어떤 입 싼 계집이 내 결혼 소식을 주저리주저리 떠들어 댄 거지?’
세피아궁에서 나온 리차드는 분노했다. 하지만 과거처럼 황궁의 첩자를 심을 수도 없었다.
그때는 카실 공작 가문의 힘이 막강했고, 텐스테온에게도 저주에 걸린 황태자라는 크나큰 약점이 있었다.
그런데도 결국 들키고 말았다. 텐스테온은 첩자들을 알면서도 모르는척하다가, 카실 공작을 처벌할 때 동시에 잡아들였다.
그로 인해 카실 공작 가문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었다.
어설프게 첩자를 심었다가 들키면 오히려 처벌을 피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시녀 하나 매수하겠다고 세뇌 마법을 쓰는 모험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카실 공작에게 썼던 마법까지 들통날 수 있었다.
앤시아가 하루라도 빨리 황태자를 처리해야 하는데….
리차드는 이를 악물며 황태자의 포렌스궁을 바라보았다.
세피아궁과 포렌스궁은 인접해 있었다. 황제가 앤시아에게 먼저 세피아궁을 하사한 뒤, 그 옆에 있는 포렌스궁을 황태자에게 준 것이니 당연했다.
‘내가 텐스테온의 자식으로 태어났다면, 저곳이 내 차지가 되었겠지.’
그때 책을 들고 포렌스궁으로 걸어가는 여인이 보였다.
순백색 머리카락에 신비로운 분위기가 풍기는 미인이었다. 리차드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녀에게 머물렀다. 그녀도 고개를 돌려 리차드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리차드의 미간이 좁혀졌다. 머리카락으로 가리긴 했지만 여인의 얼굴에 화상 흉터가 있었다.
‘황태자가 혼돈의 계곡에서 주워왔다는 계집인가 보군.’
본인이 괴물이었다고, 괴물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나 보지?
리차드는 여인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화상 흉터를 발견한 순간, 그것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게다가 흉터가 없는 쪽의 얼굴도 앤시아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어째서 앤시아가 아니라 저런 여자를 곁에 두는 거지? 리차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찌 됐든 황태자가 아끼는 여자였다. 쓸모가 있을지도 모른다.
리차드는 로즈에게 다가갔다.
***
블레이크는 나에게 아모리아궁의 열쇠를 주었고, 황궁 도서관에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아침 일찍 도서실에 가서 금제를 푸는 법에 대한 책을 찾은 뒤 기분 좋게 돌아오는데, 하필이면 리차드와 맞닥뜨리고 말았다.
카실 공작 일가에 대한 소식은 첼시한테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는 흑마법사 도미람이 사실 카실 공작의 수하이며,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미성년자라고 불쌍한 척을 하며 살아남은 모양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도미람의 흑마법을 이용해서 카실 공작을 조종한 거겠지.
만약 그때 내가 여기 남아 있었다면, 리차드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막았을 거다.
게다가 이 황궁에서 리차드와 마주하니, 천 년 전의 기억이 떠올라서 더욱 불쾌해졌다.
그때 리차드가 나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황궁의 하녀인가?”
그는 짐짓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다. 리차드라면 내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을 텐데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는 모습이 가증스러웠다.
나는 리차드를 노려보다가 시선을 피했다. 혹시라도 내가 자기를 좋아한다고 착각하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
천 년 전의 기억과 앤시아였던 시절의 기억들이 모두 떠오르자, 슬프고 고통스러웠다.
특히 앤시아의 삶은 괴로움의 연속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아버지인 벨라시안 백작의 학대에 시달려온 나는 정신적으로 망가져 있었다.
블레이크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정말로 괴로움에 지쳐 강에 몸을 던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많은 기억 중에서 억울한 게 하나 있었다.
리차드는 내가 자기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나도 원작의 리차드가 워낙 인기가 많았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넘어갔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길버트 벨라시안은 파티를 좋아했다.
재혼하기 전엔 가문의 재정이 바닥을 쳤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조용히 지냈지만, 나의 친어머니와 결혼하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지자 계절마다 한 번씩은 백작저에서 성대한 파티를 열었다.
나는 사교계 활동을 하지 않았지만, 집에서 열리는 파티에는 꼭 참석했다.
길버트 벨라시안은 남의 시선을 굉장히 의식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첫째 딸을 학대한다는 소문이 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싫어도 억지로 참석시킨 것이다.
길버트 벨라시안은 감정적이며 그다지 머리가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첫째 딸을 구박한다는 말이 듣기 싫었으면, 최소한의 연기를 해야 했다. 좋은 옷을 입히고, 아끼는 척 가식적인 미소도 지어주며 이미지 관리를 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파티 때마다 나에게 맞지도 않는 낡아빠진 드레스를 입혔으며, 다른 사람에게 소개시켜 주지도 않았다. 단지 파티에 참석만 시켰을 뿐이다.
오랜 학대로 인해 정신적으로 무너졌던 나는 다른 사람에게 인사를 건넬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파티장 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다가 빠져나가곤 했다.
다른 사람들 역시 백작가의 천덕꾸러기에게 굳이 먼저 말을 걸지는 않았다.
그날도 어김없이 구석에 홀로 앉아 있는데, 리차드가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리차드를 본 순간 소름이 끼치고 섬뜩한 감각이 전신을 에워쌌다.
천 년 전의 일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그의 영혼에 나의 몸이 반응한 것이다.
‘도대체 저 애는 누구일까? 왜 이렇게 불길한 느낌이 드는 거지?’
그날 이후, 나는 파티에 참석할 때마다 리차드를 바라보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섬뜩함의 원인을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벨라시안 영애, 나를 좋아하나?”
“네?”
나는 황당했다. 좋아하다니, 누가? 설마 내가 자기를 좋아한다는 거야?
“마음은 고맙지만 그만둬 줘. 부담스럽거든.”
“아, 아니….”
나는 부정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나의 해명도 듣지 않은 채, 자기가 할 말만 하고는 떠나버렸다.
다시금 그때 일을 떠올리니 억울함에 분노가 치밀었다.
대체 누가 누굴 좋아했다는 거야! 섬뜩해서 쳐다본 거라고! 섬뜩해서! 그걸 가지고 내가 자기를 좋아한다고 잘도 떠들었구나!
내가 그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면 강하게 항의했을 거다!
하여튼 사람을 분통 터지게 하는 재주가 있는 놈이다. 과거의 일을 떠올리자 속이 부글부글 끓는데, 리차드가 물었다.
“이름이 뭐지?”
“…….”
알면서 왜 물어보실까?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시간이 될까?”
그는 짐짓 친절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젠틀한 표정 아래 숨길 수 없는 오만함이 깔려 있었다.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유혹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원한다면 황궁 밖에서 만나도 좋고.”
그의 눈빛이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어서 소름이 끼쳤다.
저렇게나 노골적으로 유혹하는 걸 보니, 블레이크가 나를 혼돈의 계곡에서 데려왔다는 걸 알고 이용하려는 게 틀림없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필립과 함께 자랐으며, 그의 가식과 인간으로서의 바닥을 전부 보았다.
천 년이 지났어도 저 녀석은 별로 달라진 게 없었기 때문에, 리차드의 생각이 뻔히 읽혔다.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몸을 돌렸다.
“저기, 잠깐만!”
나에게 무시당할 줄은 몰랐는지, 리차드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포렌스궁으로 들어갔다.
***
텐스테온이 집무실에서 정무를 살피고 있는데, 세르가 안으로 들어왔다.
“폐하….”
그녀는 안으로 돌아오자마자 울먹거렸다. 그러자 텐스테온은 깜짝 놀라서 세르에게 다가갔다.
“앤시아, 어찌 그러느냐?”
“모두들 저를 싫어하는 것 같아요.”
“그게 무슨 말이니?”
그는 당황했다. 누가 앤시아를 싫어한단 말인가?
그녀를 모실 궁인과 호위 기사들도 특별히 엄선하여 뽑았다. 앤시아가 기억을 잃고 예법이 서툴다고 해서 무시할 자는 아무도 없을 터였다.
“황태자 전하께서 저를 미워하세요.”
그녀의 말을 들은 텐스테온은 마음을 놓았다.
“그럴 리가 있니?”
“여동생은 저를 보러 오지도 않는대요.”
“다이애나는 지금 중요한 시험이 있다. 시험이 끝나는 대로 연락할 거다.”
그는 자상하게 설명해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계속 칭얼거렸다.
“시녀랑 시종들도 저를 하나같이 무시하는걸요.”
“누가 너를 무시하느냐?”
“전부 다요! 멜리사라는 수석 시녀도 그렇고, 수석 시종도 똑같아요! 어제 제가 황태자 전하를 만나러 가려고 했는데 방해했다고요!”
“그들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 뭔가 오해가 있을 거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멜리사와 한스가 앤시아를 무시하거나 두 사람 사이에 훼방을 놓을 리는 절대로 없었다.
그들이 얼마나 앤시아를 소중히 여기고, 또 그리워했는지는 텐스테온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텐스테온의 다정한 말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폐하는 왜 다른 사람 편을 드세요?”
“편을 드는 것이 아니다.”
“괜히 왔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돌아오는 게 아니었어요!”
그녀가 막무가내로 떼를 쓰자 텐스테온은 당황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당장 내쳤을 거다. 죄 없는 사람에게 누명을 씌우고 억지를 부리는 그녀를 단단히 혼내거나 벌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대는 앤시아였다. 그녀가 기억을 잃고 저렇게 변한 건 자신의 책임이었다.
“미안하다. 울지 말거라.”
텐스테온은 일단 그녀를 달래주었다.
“지금까지 전하랑 식사도 한 번 못 했어요. 전하께서 저를 미워하세요. 너무 슬퍼요.”
“그렇지 않을 거다. 오랜만이라 오해가 생긴 거겠지. 블레이크에게는 내가 잘 말하겠다.”
“정말이죠?”
그녀는 울먹거림을 겨우 멈추었다.
“그래.”
“감사해요! 폐하.”
텐스테온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언제 울었냐는 듯 활짝 웃었다. 하지만 텐스테온은 웃을 수 없었다. 앤시아에게서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상황을 끌고 가기 위해 멜리사와 한스에게 누명을 씌웠다.
텐스테온이 그들을 잘 알았기에 망정이지, 자칫 죄 없는 사람들이 누명을 쓸 뻔했다.
하지만 그녀에게서는 어떤 죄책감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악의일까? 아니면 그만큼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진심으로 멜리사와 한스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한 걸까?
어느 쪽이든 앤시아가 할 만한 행동은 아니었다.
하지만 7년이 지났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던 거겠지….
자신이 앤시아를 지켜주기만 했다면, 그녀가 이렇게 변했을 리도 없었을 거다.
텐스테온은 마음 한구석에서 피어오르는 의심을 애써 지워버렸다.
***
도서실에서 빌려온 금제에 관한 서적을 읽어 보았다. 하지만 지금 나의 제국어 실력으로는 거의 읽을 수가 없었다.
문장 자체도 어려운 데다가, 마법사들만 쓰는 특수 언어까지 섞여 있었다.
언어 능력이 있었다면 쉽게 읽었을 텐데….
그렇다고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블레이크에게 도움을 받든 황궁 마법사를 찾든 아니면 다른 방법을 마련하든 해야 한다.
나는 금제를 풀고, 그녀가 가짜이며 내가 진짜 앤시아라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세르를 만나서 설득하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일 거라고 생각도 했지만, 그녀는 나를 노골적으로 피했다. 게다가 가끔 마주쳐도 적대적이었다.
억지로 붙잡고 대화를 해보려다가 오히려 그녀를 자극할 수도 있다.
일단 책을 덮는데,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대로 침대에 누워서 한숨 잘까 하다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몸이 힘들다고 계속 누워 있기만 할 수는 없다. 가벼운 산책이라도 해야지.
“안녕하세요.”
홀로 산책을 하고 있는데, 누가 인사를 건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제이든이 서 있었다. 나는 얼른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는 편한 복장을 하고, 손에는 수련용 검을 들고 있었다.
나는 수첩에 글을 적었다.
-연무장에 가시는 거예요?
그는 내가 쓴 글을 보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몸이 찌뿌둥해서요.”
건국제를 앞두고 황궁 기사단에도 작은 휴식이 주어졌다. 물론 근무는 계속되었지만, 건국제가 끝날 때까지 정식 훈련은 진행되지 않았다.
그런데 제이든은 모두들 휴식을 만끽하고 있는 와중에도 훈련을 계속하는 거였다.
-정말 대단하세요!
내가 감탄하자, 제이든이 부끄러운 듯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별거 아닙니다. 실력이 부족하니 더 노력하는 거죠.”
지나친 겸손이었다.
제이든의 무뚝뚝한 태도를 지적하던 기사 선배들조차도 그의 실력은 군말 없이 인정했다. 아카데미 수석 입학에 수석 졸업생인데 실력이 부족할 리도 없고 말이다.
-너무 겸손하신 거 아니에요?
내가 다시 수첩에 글을 적자, 그는 곧장 부정했다.
“아닙니다. 황태자 전하에 비하면 저는 아직 햇병아리에 불과합니다.”
제이든이 저렇게 말할 정도면 블레이크는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거구나. 어려서부터 그렇게 노력했던 게 빛을 발하는 걸 보니, 내가 칭찬받은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뿌듯한 미소를 짓는데, 뒤에서 블레이크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밌게 해.”
그가 자연스럽게 내 옆으로 오더니 손을 꼭 잡았다.
앤시아와 똑같은 외모의 여인이 나타났는데도 그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다행이긴 하지만 의문이 들었다.
어째서 계속 잘해주는 걸까?
그녀가 진짜 앤시아라는 확신이 없다고 하더라도, 객관적으로 봤을 때 나보다는 훨씬 가능성이 높을 텐데….
‘제이든 경이 훈련을 한대요.’
“그래?”
블레이크랑 말할 때는 그냥 입 모양만으로 대화할 수 있어서 훨씬 편했다.
‘쉬는 날인데도 훈련을 하는 게 정말 대단하죠?’
역시 우리 다이애나가 사람 보는 눈이 있었다. 흐뭇하게 제이든을 바라보는데, 블레이크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제이든, 대련을 하자.”
“영광입니다.”
갑작스러운 대련 신청에 당황할 법도 한데, 제이든은 즉시 절도 있게 고개를 숙였다.
그들은 연무장으로 향했다. 황태자와 제이든이 대련한다고 하자 제5 기사단의 기사들도 구경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아, 로즈 양도 계셨군요.”
“안녕하세요. 로즈 양.”
그들은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제는 그들도 나의 흉터에 익숙해졌는지, 나를 보고 눈살을 찌푸리거나 불쾌한 티를 내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었다.
“너무 아름다워지셔서 몰라볼 뻔했습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얼굴에 꽃이 피셨네요.”
오히려 이렇게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기도 했다. 나도 가볍게 웃으며 그들과 인사를 나눈 뒤, 다시 연무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제이든은 5기사단의 기사 중에서도 체격이 큰 편에 속했다. 아카데미에 입학했을 때도 1학년 중에서 가장 크다고 했지.
그에 비해 블레이크는 180이 훌쩍 넘는 장신이었지만, 몸매가 호리호리한 편이었다. 그 때문인지 블레이크가 제이든과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보니 왠지 불안했다.
우리 블레이크, 괜찮은 걸까?
검을 맞대고 선 두 사람을 초조하게 바라보는데, 뒤에서 기사들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와, 전하의 검술을 보는 게 얼마 만이야?”
“그러게나 말이야.”
“그런데 제이든 괜찮은 거야?”
“적당히 하시겠지.”
“맞아. 요즘 기분도 좋으신 거 같고. 설마 신참을 보내기야 하시겠어.”
보낸다니요? 뭘 보낸다는 거죠?
깜짝 놀라서 기사들을 바라보는데,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쾅!
그리고 내가 고개를 돌렸을 때, 제이든은 이미 연무장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응?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잠시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그때 블레이크가 물었다.
“더 하겠나?”
“네! 하겠습니다.”
제이든이 검으로 겨우 몸을 지탱하며 힘겹게 일어났다.
조금 전에 연무장을 나뒹굴었으면서도 그의 표정에는 설렘이 가득했다.
예전에 블레이크도 그랬었다. 텐스테온의 옷자락도 건들지 못하고 계속 넘어지면서도 얼굴은 열정과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지.
옛날 생각이 나네….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블레이크를 바라보았다.
“…….”
하지만 블레이크는 과거의 텐스테온과는 달랐다. 자신보다 실력이 떨어지는 상대를 가르쳐주겠다는 따스한 눈빛 같은 건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저거 살기 아니야?’
그에게서 서늘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아니야. 우리 착한 블레이크가 그럴 리가 없지. 나는 검술은 잘 모르니까 착각한 걸 거다.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얼른 지워 버렸다.
제이든이 검을 고쳐 잡자 다시 대련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는 10초도 버티지 못한 채 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봐도 제이든은 블레이크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블레이크는 가차 없이 제이든을 처박았다. 그리고 또, 또.
너무 일방적인 거 아닌가? 대련이라는 말을 듣고 신나서 구경하던 기사들도 점차 심각해졌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멈출 생각이 없었고, 제이든도 계속 대련을 이어가고 싶어 했다. 감히 황태자를 말릴 사람도 없었다.
이러다 제이든 경이 다치겠어. 우리 다이애나가 좋아하는 친구인데….
제이든이 열 번째로 바닥을 나뒹구는 순간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연무장 위로 올라가고 말았다.
‘제이든 경, 괜찮아요?’
그는 나의 입 모양을 읽지 못했기 때문에, 얼른 수첩에 글을 써서 다시 물었다.
-괜찮아요? 다치지 않았어요?
그는 수첩을 보고는 고개를 힘겹게 끄덕이며 답했다.
“괜찮습니다.”
하지만 대답과 달리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한마디 하는 것조차 힘들어 보이는데….
-그만하시는 게 좋겠어요.
그러나 제이든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전하와 대련할 수 있는 기회를….”
고집을 부리는 제이든을 설득하려 하는데, 뒤에서 블레이크의 낮은 신음이 들렸다.
“아!”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바닥에 주저앉은 블레이크의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그에게 달려갔다.
‘전하,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손목이….”
블레이크가 검을 떨어트리며 자신의 손목을 감쌌다.
대련 중에 다친 걸까? 걱정하며 그의 손목을 살피려는데, 굵직한 기사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 손목을 다치셨습니까!”
“전하께서 다치셨다!”
“전하께서 쓰러지셨다!!”
황태자가 다쳤다는 소식에, 기사들은 다급히 소리치며 이쪽으로 몰려왔다. 제이든이 쓰러졌을 때와는 판이한 반응이었다.
나보다는 기사들이 응급조치 같은 걸 훨씬 잘할 거다. 얼른 옆으로 비키려고 하는데, 블레이크가 나의 손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그 때문에 나는 그의 품에 쏙 안기고 말았다.
“됐어.”
“하오나, 전하…!”
“됐. 다. 고. 했. 다.”
그가 산뜻한 목소리 축객령을 내렸다. 그러자 웅성거리던 분위기가 일순 고요해졌다.
왜 그러지? 상황을 보고 싶지만, 블레이크의 품에 안겨 있어서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고개를 들자 몸을 돌린 채 반대편으로 걸어가는 기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제이든, 이리 와라.”
“저는 괜찮….”
“오라니까!”
“으악!”
기사들은 괜찮다는 제이든을 어깨에 둘러메고는 서둘러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저 커다란 장정을 저리 쉽게 들다니, 역시 기사는 기사다.
“아….”
사라지는 기사들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블레이크의 신음이 들렸다.
나는 다시 그의 손을 살폈다. 하지만 언뜻 봤을 때 다친 건 없어 보였다.
‘전하, 많이 아파요?’
“몰라.”
그의 입술이 불퉁하게 튀어나왔다. 그 모습이 어린 시절과 똑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화났어요?’
“다른 사람만 신경 쓰고. 나한테는 관심도 없고.”
‘제가요?’
“왜 그렇게 제이든한테 잘해줘?”
잘해줬다고? 제이든은 외모와 상관없이 처음부터 나를 공평하게 대해주었다. 그래서 고마웠을 뿐이다.
게다가 다이애나의 친구이니 친근함을 느끼기도 했고. 하지만 특별히 잘해준 적은 없었다.
‘그런 적 없는데…. 그나저나 정말로 아픈 거 맞아요?’
“아….”
내가 의심스럽게 흘겨보자, 블레이크가 다시 손목을 움켜잡았다.
아무리 봐도 엄살 같은데…. 붓지도 않았고.
게다가 제이든은 대련 내내 일방적으로 당했을 뿐, 블레이크의 머리카락 한 올도 건들지 못했다.
“아, 아파.”
하지만 그가 굳이 엄살을 필 이유도 없었다.
‘많이 아파요?’
“응.”
대련하다가 검을 잘못 잡은 걸까?
역시 좀 더 일찍 말렸어야 했다.
아무리 검술 실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체급 차이가 있었다. 대련을 계속하다가 손목에 무리가 온 걸지도 모른다.
‘궁의를 부를까요?’
“아니. 로즈가 ‘호’ 해주면 나을 거 같아.”
그가 요염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홀릴 듯이 아름다운 미소를 짓는 블레이크의 팔을 찰싹 때렸다.
역시 엄살이었잖아!
“아!”
‘그런 장난 치지 말아요! 정말로 놀랐잖아요!’
“걱정했어?”
‘당연하잖아요!’
“미안해.”
블레이크가 내 손을 잡았다.
“그래도 걱정해 주니 기분 좋다.”
‘그런 말 마요. 아파서 걱정받는 게 뭐가 좋아요. 건강한 게 최고예요.’
나는 그의 손을 맞잡았다. 작고 귀엽기만 했던 소년의 손이 이제는 뼈마디가 굵고 굳은살이 잔뜩 박인 남자의 손이 되었다.
이제는 나보다 키도 크고 체격도 크고 힘도 강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가 걱정되었다.
연무장에 주저앉은 블레이크를 보는 순간 너무 놀라서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었다.
“알았어.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
블레이크가 나의 눈가를 쓸었다. 내가 꼭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나 보다.
나는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블레이크한테 울보 소리를 듣고 싶진 않았으니까.
‘정말로 아픈 거 아니죠?’
“응. 하나도 안 아파.”
혹시 몰라서 그의 상처를 재차 확인하는데, 에드온이 다가왔다.
“전하, 여기 계셨습니까.”
“무슨 일이지?”
“다치셨다고 들었는데, 괜찮으십니까.”
“아무렇지도 않아.”
“다행입니다.”
에드온은 처음부터 엄살인 걸 알고 있었는지, 상처 부위를 확인하지도 않은 채 가볍게 넘겼다.
도대체 어떻게 알았지? 누구한테 들었나? 아니, 그럼 그 사람은 또 어떻게 안 거야?
“무슨 일이야?”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지금은 안 된다고 전해. 로즈의 수업 시간이야.”
블레이크가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 나 때문에 폐하를 기다리게 할 생각이야!
‘어서 가세요.’
“수업은?”
‘아침에 도서실에 다녀왔어요. 피곤해서 오늘은 쉬고 싶어요.’
“…알았어.”
블레이크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이 꼭 산책을 나갈 줄 알고 기대했다가 실망한 강아지 같아서 마음이 약해졌다.
‘공부는 밤에 할게요.’
“밤에?”
그가 눈꼬리를 야릇하게 접었다. 쓸데없이 야한 표정이다.
‘…네.’
“알았어. 밤에 공부하자.”
블레이크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긴 뭐 어떻게 해. 우리가 만들어야지.”
궁 안으로 들어갔는데, 분위기가 왠지 어수선했다. 시녀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하는데 첼시가 얼른 나에게 다가왔다.
“로즈 님!”
나는 얼른 무슨 일이냐고 수첩에 적었다.
“부주방장님께서 다치셨어요.”
나는 부주방장을 직접 본 적은 없었지만 걱정이 됐다.
-많이 다치셨나요?
첼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미끄러져서 허리를 조금 삐끗하셨나 봐요. 하지만 며칠은 움직이지 못할 거래요.”
허리가 삐끗한 것도 위험하긴 하지만 그래도 큰 사고가 난 건 아니라 다행이었다.
“테리 주방장님이랑 다른 요리사들은 건국제 준비 때문에 재료를 보러 가셨거든요. 멜리사 님도 오늘은 늦게 오시는 날이고…. 그런데 부주방장님까지 다치시니 전하의 식사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이에요.”
나는 시녀들을 바라보았다. 블레이크의 식사 준비 때문에 다들 비상이었구나.
모두들 곱게 자란 귀족 영애들이었다. 요리 같은 걸 직접 해본 적은 거의 없을 터였다
-제가 만들게요.
필담 수첩을 본 첼시가 화들짝 놀랐다.
“로즈 님이요?”
나는 당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카밀라가 내 앞을 막아섰다.
“뭐죠?”
그녀의 목소리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로즈 님께서 점심 식사를 준비해주시겠대.”
첼시가 나 대신 설명해주었다. 하지만 카밀라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은 채였다.
“그걸 말이라고 해? 전하께서 드실 음식이야. 외부인을 주방에 들일 수는 없어.”
“로즈 님이 어떻게 외부인이야? 전하의 손님인걸.”
“그래, 어차피 다른 방법도 없잖아. 이번에는 로즈 양에게 맡기자. 곧 점심시간이잖아.”
“맞아, 책임도 저 여자가 지면 되잖아.”
다른 시녀들도 동의했지만 카밀라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이대로 전하께서 굶으시는 것보다는 백배 낫잖아.”
하지만 나를 노골적으로 싫어하던 샬롯까지 동의하자 마지못해 옆으로 물러났다.
오랜만에 주방에 들어오니 감회가 새로웠다.
주방을 살펴보니 시녀들이 당황했던 것이 이해가 갔다.
만들다 만 수프 말고는 어떤 요리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다.
처음부터 전부 새로 만들어야겠네.
“로즈 님, 하실 수 있으시겠어요?”
첼시도 다소 불안한 눈치였다. 하지만 나는 싱긋 웃었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두 시간이었다. 그때까지 충분히 만들 수 있다.
나는 주방에 있는 재료들을 가지고 빠르게 요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시간이 촉박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익숙한 요리를 선택하게 됐다.
버섯을 잘게 써는데, 첼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로즈 님, 전하께서는 버섯을 싫어하십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편식쟁이구나.
-걱정하지 마세요. 전하께서 좋아하시는 요리예요.
글을 잊어버린 것처럼 요리도 못하면 어떡하지, 라는 걱정이 뒤늦게 들었지만 다행히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서둘러 국을 끓이고 다른 반찬들도 만드는데, 나에게 주방을 맡긴 채, 밖에 멀뚱히 서 있던 시녀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도대체 이게 뭐야! 이딴 요리를 전하께 드리려는 거야?”
카밀라가 경악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다른 시녀들도 동조했다.
“하도 자신만만하길래 대체 뭘 만드냐 했더니, 이 해괴망측한 건 도대체 뭐야.”
“말조심해. 이건 동방의 요리야.”
첼시가 다른 시녀들을 나무랐다. 그녀는 내가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음에도 이 요리들이 동방의 음식이라는 걸 알아보았다.
“동방의 요리?”
“그래, 전하께서는 어린 시절 동방의 요리를 즐겨 드셨다고 들었어. 그러니까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그런가…?”
첼시는 제국에서도 손에 꼽히는 브룩 상단의 외동딸로 지식이 풍부하고 정보 수집 능력이 뛰어났다. 그녀가 조리 있게 설명하자 다들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카밀라는 꼬투리를 잡았다.
“그건 멋모르던 어린 시절의 일이고, 지금은 동방의 요리를 싫어하시잖아. 시녀로 지내는 동안 전하께서 동방 요리를 드시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블레이크는 내가 떠난 뒤로 동방의 요리를 먹지 않았구나….
그래서 테리도 나에게서 배웠던 동방의 요리들을 만들지 않는 거였어.
“로즈 님께서 만드는 요리잖아. 좋아하실 거야.”
“저 여자가 뭔데?”
카밀라가 날 선 반응을 보였다.
“카밀라, 예의를 지켜. 로즈 님은 전하의 중요한 손님이셔.”
“첼시, 너야말로 예의를 지켜. 너는 시녀 중에서 가장 늦게 들어왔잖아. 평시녀 중에서는 내가 가장 선배라고.”
“갑자기 선배 노릇을 하겠다고?”
첼시는 어이없어했다.
“갑자기가 아니라 원래 선배야. 멜리사 님도 주방장님도 안 계시니, 당연히 내 말을 따라야지.”
그녀는 나를 차갑게 내려 보았다.
“세피아궁으로 가셨던 델 요리사한테 연락을 넣었어. 델 요리사님께서 와주신다고 했으니까, 이만 나가 봐.”
“그걸 말이라고 해! 이미 거의 다 만들었다고! 이럴 거면 처음부터 맡기질 말았어야지!”
“나라고 설마 이딴 걸 만들 줄 알았겠니?”
카밀라가 나의 요리를 내려 보았다. 그 시선에는 명백한 무시가 담겨 있었다.
“거짓말하지 마! 주방에 들어와 보지도 않고 세피아궁에 연락을 넣은 거잖아! 너는 처음부터 로즈 님에게 요리를 맡길 생각이 없었던 거잖아!”
첼시의 말대로 카밀라는 주방에 들어와 보지도 않은 채, 세피아궁에 연락을 했다. 내 요리를 보지도 않고 다른 요리사를 준비한 것이다.
하지만 말의 허점을 간파당했음에도 카밀라는 당당했다.
“당연하잖아. 어떻게 저런 여자가 만든 요리를 전하께 드릴 수 있겠어. 병균이 퍼지면 어쩌라고.”
“그걸 말이라고 해!”
“뭐, 딱히 틀린 말은 아니잖아.”
샬롯이 카밀라의 말에 동조하자, 다른 시녀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혹시 모르는 거잖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게 말이 돼! 병균이란 건 말이야…!”
나는 흥분하는 첼시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괜찮아요.
사람들이 모두 저렇게 생각하는데, 첼시 혼자서 항의한다고 받아들여질 리 없었다. 괜히 첼시의 입장만 더 난처해질 뿐이다.
“하지만 로즈 님, 이미 다 만들었는데….”
나는 다시 수첩에 글을 적었다.
-정말 괜찮아요.
첼시를 향해 애써 웃어 보인 나는 주방을 떠났다.
그녀는 나를 위로해주기 위해 같이 따라오려고 했다. 하지만 주방의 일손이 부족한 상태였다. 요리를 전부 새로 만들어야 하니 시간이 촉박할 거다.
나는 거듭 괜찮다고 말하며 홀로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에드온이 와서 말을 걸었다.
“로즈 양, 어디 가세요?”
-아모리아궁에 가려고요.
아무렇지 않은 척 나오긴 했지만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아모리아궁에서 울적한 기분을 달랠 생각이었다.
-전하께서 허락해주셨어요.
나는 얼른 덧붙였다. 그러자 에드온이 빙그레 웃었다.
“알고 있습니다. 아모리아궁까지 제가 로즈 양을 호위해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나는 고개를 저으며 손사래를 쳤다. 산책을 가는 것뿐인데 기사단장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빙그레 웃었다.
“로즈 양을 호위하라는 전하의 엄명이 있었습니다. 로즈 양께서 혼자 다니시면 제가 혼납니다.”
그는 서글서글하게 웃었다. 나도 미소가 나왔다.
-감사합니다.
나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저야말로 감사하죠.”
그저 호위를 받을 뿐인데도, 그는 나에게 감사하다고 했다. 이유를 몰라서 바라보자, 에드온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실은 비 전하께서 떠나시고 황태자 전하께서 무척 힘들어하셨습니다. 하지만 로즈 양을 만나신 후로 많이 밝아지셨죠.”
“…….”
“전하께서 웃는 걸 얼마 만에 보는지…. 이게 전부 로즈 양 덕분입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의 얼굴에서 블레이크에 대한 따스한 애정이 느껴졌다.
블레이크의 곁에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에드온의 감사 인사를 들으니 주방에서 속상했던 마음도 조금 치유되는 것 같았다.
***
“무슨 일로 찾으셨는지요?”
블레이크는 황제의 집무실에 들어가자마자 용건을 물었다.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긴장감이 흘렀다.
블레이크는 앤시아가 사라진 일로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서서히 좁혀져 가던 부자간의 거리는 다시 벌어졌다.
앤시아를 잃은 블레이크는 어둠 속에 파묻혔다. 그 모든 것이 제 탓이라고 자책한 텐스테온은 아들의 곁에 다가가지 못했다.
그렇게 7년이란 세월 동안 두 사람의 사이는 좀체 좁혀지지 못했다.
“앤시아와 서먹하다고 들었다.”
“아직은 그 여자가 앤시아라고 확신할 수 없습니다.”
블레이크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그 아이가 앤시아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네.”
블레이크는 일말의 주저도 없이 답했다.
그녀는 앤시아가 아니다. 그 생각은 점점 커져서 이제는 의심이 아닌 확신으로 바뀌었다.
“달라진 성격 때문이냐?”
“폐하께서도 느끼고 계셨습니까?”
텐스테온은 블레이크의 말을 듣고 놀라지 않았다. 7년 만에 찾은 앤시아를 의심하는 거냐며 꾸짖지도 않았다. 오히려 예상했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앤시아가 전과 다르다는 건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사람은 변한다. 작은 상처만으로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뀌기도 하지.”
텐스테온은 그녀가 진짜 앤시아라고 생각했다.
외모와 언어 능력은 물론이고 빛의 힘까지. 앤시아 본인이 아니라면 설명되지 않았다.
물론 텐스테온 역시 그녀의 언행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하지만 과거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 오히려 안타깝게 다가왔다.
리차드가 앤시아를 데려왔을 때, 텐스테온은 그녀가 지닌 언어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서 각국의 책 주고 읽어보게 했다. 그중에는 창국의 소설도 있었다.
친자식을 잃고 양자를 입양해서 애지중지 키웠으나, 양자에게 배신당하고 만 노부부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었다.
결국은 친자식을 찾고 양자도 죗값을 치르며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지만, 그 과정에서 온갖 곡절을 겪는다.
앤시아는 그 소설을 읽고는 싸늘한 얼굴로 감상을 뱉었다.
“멍청한 자들이네요. 애초에 인간을 거두질 말았어야 해요. 인간은 믿을 수 없어요.”
그녀의 목소리에 짙게 사무친 원망이 담겨 있었다. 텐스테온은 그녀가 많은 일을 겪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기억을 잃어버린 것도 그것 때문이겠지. 어쩌면 7년 동안 겪었던 일들이 너무 끔찍해서, 그걸 차마 떠올리기도 싫어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걸지도 몰랐다.
텐스테온은 앤시아를 찾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창에 있는 은한에게까지 도움을 청했다.
과거 은한이 그랬던 것처럼 앤시아도 동대륙으로 이동했을지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은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앤시아를 찾을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찾아냈어야 했는데. 그 전에 어둠의 문에서 그녀를 놓쳐서는 안 됐는데….
텐스테온은 변해버린 앤시아를 보며 심하게 자책했다. 그렇기 때문에 의심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는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블레이크를 설득했다.
“블레이크, 네가 그 아이를 잘 보듬어주거라.”
“성격 때문만은 아닙니다. 저는 그 여자가 앤시아인지부터 의심스럽습니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강경했다.
“그 아이는 언어 능력을 가지고 있고, 빛의 힘도 지니고 있다. 다른 사람일 리가 없다.”
객관적으로는 텐스테온의 말이 옳았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도저히 그 여자를 앤시아라고 인정할 수 없었다.
그는 로즈를 떠올렸다.
만약 로즈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녀가 앤시아라는 걸 믿었을까?
아니, 아닐 거다. 로즈를 만나지 않았다고 해도 그는 속지 않았을 거다.
블레이크는 자신이 앤시아라고 주장하는 그 가짜에게서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꼈다.
“리차드가 간계를 부렸을지도 모르죠.”
“리차드에 대한 건 나도 조사 중이다. 하지만 그놈이 가짜 앤시아를 만든다 한들, 언어 능력과 빛의 힘을 구현하지는 못한다. 그건 너도 잘 알고 있지 않으냐?”
“…….”
텐스테온의 말은 지극히 타당했다. 게다가 그 여인에게서 흐르는 빛의 힘은 진짜였다. 마탑주라 해도 흉내 내지 못할 순수한 빛의 마나가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한번 식사라도 해보는 것이 어떠하냐? 편하게 대화를 나누다 보면 앤시아의 기억도 되돌아올 거다. 기억을 찾고 마음이 안정된다면 차차 원래 모습을 되찾을 테지.”
블레이크는 굳은 얼굴로 고민하다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폐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제가 그 여자와 식사하는 대신, 전하께서도 한 여인을 만나주십시오.”
“…혼돈의 계곡에서 발견했다는 여인을 말하는 것이냐?”
“네.”
“알겠다. 그리하마.”
그렇지 않아도 텐스테온은 ‘로즈’라는 여인을 한번 만나보려 했다.
블레이크는 앤시아가 떠난 이후 그 어떤 사람도 자신의 영역 안으로 들이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타인에게 관심을 보였다.
심지어 앤시아도 뒤로한 채 로즈에게 지극정성이라고 들었다.
“감사합니다. 폐하.”
텐스테온이 승낙하자 블레이크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맺혔다.
7년 만에 보는 아들의 웃는 얼굴이었다.
***
블레이크는 텐스테온과의 약속대로 앤시아를 식사에 초대했다.
한껏 차려입은 앤시아는 아름다웠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화사하게 빛나는 그녀를 바라보아도 아무런 감흥이 들지 않았다.
“전하께서 초대해주셔서 너무 기뻐요. 꼭 꿈만 같아.”
“앉지.”
“네.”
앤시아는 활짝 웃으며 블레이크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특이한 모양의 책을 식탁 위에 올렸다. 식사 시간에 그다지 어울리는 소품은 아니었다.
블레이크가 시선을 던지자, 그녀는 활짝 웃었다.
“이건 창국의 책이에요. 내용이 어렵지만 아주 재미있답니다!”
그녀는 책을 펼치더니 소리 내 읽기 시작했다.
“용인은 하늘의 선택을 받은 자이며 이로 인해 만인의 존경을 받는다. 하나 오만함으로 인해 그 힘을 남용한다면 하늘은 능력을 거두어 갈 것이다.”
블레이크는 그녀에게 흘끔 시선을 던졌다.
이는 창국의 책이었으며, 내용이 복잡하고 난해했다.
블레이크는 뜬금없이 이런 책을 읽는 그녀의 의도가 훤히 보였다.
자신이 진짜 언어 능력자라는 걸 보여주려는 거겠지.
블레이크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녀가 가짜라는 확신이 들어서 그런지 이 시간이 더욱 고역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꾹 눌러 참았다.
그녀가 가짜라고 하더라도 그 능력은 진짜였다. 분명 앤시아와 관련이 있을 거다.
그걸 알아내기 위해서라도 최소한의 예의는 지킬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괴로웠다. 로즈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빨리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요리가 좀처럼 준비되질 않았다.
***
“첼시,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왜 말이 안 되는데?”
주방에서는 카밀라와 첼시가 말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진심으로 이딴 요리를 전하께 드리려는 거야?”
“어. 뭐가 문젠데?”
첼시는 로즈가 만든 버섯계란말이를 들고는 당당히 고개를 쳐들었다.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 로즈가 만든 요리를 황태자 전하께 선보일 생각이었다.
그 때문에 로즈를 따라 나가지 않고, 끝까지 남아서 주방을 지켰다.
로즈는 착해서 그냥 넘어갔지만, 첼시는 애써 만든 요리가 쓰레기통에 처박히는 꼴은 절대로 두고 볼 수 없었다.
“델 님도 괜찮다고 하셨잖아.”
첼시는 로즈가 만든 요리를 버리지 못하도록 지키고 있다가, 은근슬쩍 요리사인 델에게 허락을 받았다.
로즈의 요리를 맛본 그는 독특하고 풍미도 좋다고 칭찬하며, 전하께 올려도 된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를 알게 된 카밀라가 반대하고 나섰다. 두 귀족 영애의 싸움에 평민인 요리사는 입을 다물고 뒤로 물러났다.
“전하께서는 버섯을 싫어하셔.”
“알레르기가 있으신 것도 아니고, 지금까지 버섯 요리는 자주 나갔었잖아.”
“첼시, 너는 진심으로 전하께서 그 요리를 드실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로즈 님께서 만드셨다고 하면 좋아하실걸.”
카밀라는 첼시를 노려보았다.
“무엄한 소리 하지 마. 네가 뭔데 전하의 마음을 멋대로 추측해?”
“너야말로 전하가 싫어할 거라 단정하고 있잖아.”
“나는…!”
카밀라는 발끈했다.
‘나는 평시녀 중에서 전하를 가장 오랫동안 모셨다! 그러니 여기 있는 누구보다 전하를 잘 안다!’
게다가 자신은 다른 여자들과 달랐다.
블레이크가 황태자라서, 빛의 힘을 지니고 있다는 이유로 갑자기 태도를 뒤바꾼 속물들과는 다르다.
진심으로 전하를 사랑하고 있다.
하지만 이걸 말한들 카밀라의 말을 순순히 믿어줄 사람은 없었다.
“너보다는 전하를 잘 알아. 오래 모셨으니까….”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흐려졌다. 평시녀 중 가장 오래 모신 것은 사실이지만, 블레이크는 카밀라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
카밀라는 괜히 자신이 없어져서 씁쓸하게 뒷말을 덧붙였다.
“게다가 오늘은 비 전하께서 오셨어. 어설픈 요리로 포렌스궁을 먹칠할 수는 없어.”
카밀라는 블레이크를 사랑했다.
사실 황태자비가 돌아온 게 달갑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녀는 황태자와 어렸을 때 결혼한 여자였으니 거기까지는 참을 수 있다.
하지만 로즈는 싫었다. 저 여자까지는 허락할 수 없었다.
싫다. 모든 게 전부 다 싫다.
그녀의 요리를 블레이크가 먹는 것조차 싫었다. 황태자비의 핑계를 대서라도 로즈와 황태자가 가까워지는 걸 막고 싶었다.
“그럼 그것도 알겠네? 황태자 전하와 비 전하께서는 동방의 요리를 즐겨 드셨어. 그러니 추억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이 요리가 더 좋을걸.”
다른 시녀들은 첼시가 황태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 신분도 모르는 여자한테 아부를 떤다고 비웃었다.
물론 첼시는 그녀들과 입장이 다르긴 했다.
그녀는 황태자의 여자가 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물론 블레이크는 매력적이고 유능한 남자였으니, 솔직히 처음에는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곁에서 그를 지켜보면서 황태자비가 되려는 생각은 깨끗이 단념했다.
블레이크는 한 여인에게 모든 마음을 바쳐버린 남자였다.
이미 모든 걸 다 주어서, 남에게 줄 마음이 터럭만큼도 남아 있지 않았다.
첼시는 열정적인 사랑을 원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부부라면 인생의 동반자로서 손을 맞잡고 함께 인생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여인에게 영혼까지 바친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평생 채워지지 않는 외로움에 시달리고 싶지는 않았다.
첼시는 블레이크에 대한 마음을 깨끗하게 단념했다.
그녀가 로즈의 시녀가 된 건 순수한 호기심에서였다.
7년 동안 굳게 닫혀 있던 황태자의 마음을 연 여인.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을 뿐, 아부하거나 줄을 댈 생각은 없었다.
진짜 황태자비가 돌아왔으니, 로즈의 입지는 점점 좁아질 거다.
하지만 황태자가 결국 누굴 선택하느냐는 첼시의 관심 밖이었다. 일개 시녀인 자신이 왈가왈부할 문제도 아니었다.
첼시는 그저 이 상황이 싫었다. 근거 없는 혐오와 질투 때문에 로즈가 열심히 만든 요리가 이대로 쓰레기통에 처박히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전하께 병균이 옮을 수도 있어.”
“병균 같은 소리 하네.”
첼시가 시니컬하게 뱉었다.
“지금 뭐라고 했어?”
“병균이 뭔지 몰라? 오래전에 화상을 입은 사람한테 병균 타령이라니, 천박하고 무식한 소리라는 거 알고 있지?”
“뭐야!”
카밀라는 유서 깊은 후작 가문 출신이었지만 서녀라는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다. 반면에 첼시는 제국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부유한 브룩 백작의 귀한 외동딸이었다.
물론 첼시는 상대가 누구든 똑같이 말했겠지만, 카밀라는 자신이 서출이라서 무시를 받는다는 생각이 들어 발끈했다.
두 사람의 대립이 심각해지자, 주변 시녀들은 차마 말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서로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그러던 중 초조하게 시계를 바라보던 샬롯이 더는 참지 못하고 말을 꺼냈다.
“요리 다 식겠다! 뭐든 좋으니 어서 가져가자. 전하랑 비 전하께서 기다리신다고!”
“너는 전하께서 이딴 요리를 먹고 탈이 나셔도 괜찮다는 거야?”
카밀라가 샬롯을 쏘아붙였다. 샬롯은 외모에 민감하고 휩쓸리는 성격이었다. 병균 운운을 하며 몰아붙이면, 그녀는 놀라서 자신의 편을 들어줄 거다.
하지만 카밀라의 예상은 빗나갔다.
“만약 탈이 나면 첼시랑 로즈 양이 책임지겠지. 일단 내가자. 우리가 이런 일로 지체한 걸 멜리사 님이 알게 되면 혼쭐이 날걸.”
샬롯은 그 무엇보다도 혼나는 걸 싫어했다. 그녀가 다시 시계를 바라보며 말하자, 다른 시녀들도 동의했다.
“그래, 그렇게 하자. 이러다 다 식겠어.”
“정 싫으면 저 달걀 요리 정도만 올리는 게 어때?”
“…….”
카밀라는 말없이 첼시의 손에 든 버섯계란말이를 바라보았다.
황태자 전하께서 과거 동방의 요리를 즐겼다는 건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버섯이 가득한 저 요리라면 전하께서도 드시지 않을 거다. 오히려 이런 요리를 왜 내왔냐며 화를 낼 수도 있다.
저딴 걸 황태자의 식탁 위에 올리자고 우긴 첼시는 물론 로즈도 단단히 망신을 당하겠지.
“알았어. 대신 저거 하나만이야.”
카밀라는 속으로 미소 지었다.
***
로즈의 요리를 내놓기로 결정했지만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과연 저 작은 달걀 요리를 어느 타이밍에 올려야 하는지 알 수 없었던 거다.
“메인 요리는 안 돼. 이건 나도 양보 못 해.”
카밀라는 강경하게 말하며, 계란말이를 애피타이저로 올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해.”
첼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로즈의 요리를 선보이는 것이 중요하지 타이밍은 어찌 됐든 상관없었다.
다른 시녀들은 로즈의 요리를 만지기조차 싫어했기 때문에, 첼시가 직접 블레이크의 앞에 버섯계란말이를 올려놓았다.
그 순간 메마른 표정으로 앉아 있던 블레이크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이건 누가 만든 거지?”
첼시는 다소 놀랐지만, 침착하게 대답했다.
“로즈 님께서 만드셨습니다.”
“로즈…? 로즈는 지금 어디 있지?”
“아모리아궁에 가셨습니다.”
블레이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세르는 당황하며 그를 붙잡았다.
“저, 전하. 식사하셔야죠.”
하지만 블레이크는 그녀의 손을 거칠게 치우며 궁 밖으로 뛰쳐나갔다.
***
아모리아궁은 언제나처럼 고요했다. 앤시아가 떠난 이후 이곳은 활기를 잃었다.
블레이크는 빠르게 궁 안을 뒤졌다. 하지만 로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서둘러 계단을 오른 블레이크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언제나 굳게 닫혀 있던 앤시아의 방문이 열려 있었다. 블레이크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 로즈가 있었다.
앤시아의 방에는 온갖 진귀한 보물들이 많았다. 세상에서 가장 큰 핑크 다이아몬드, 황금으로 만든 곰 인형, 최상급 마나석으로 만든 목걸이까지.
황제가 준 보물은 물론이고, 블레이크가 그녀를 위해서 새로 산 선물까지 있어서 보물 창고를 방불케 했다.
하지만 로즈는 값비싼 보석이 아니라, 책상 위에 있는 붉은 장미 한 송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애틋한 눈으로 장미꽃을 바라보다가, 꽃잎을 살짝 건드렸다.
마치 이곳에서 가장 귀중한 보물이라는 듯, 그 행동에는 조심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블레이크의 안에 있던 이성의 끈이 툭 하고 끊어졌다.
로즈가 앤시아라고 생각하면서도 1퍼센트의 가능성 때문에 망설였다. 하지만 더는 그럴 이유가 없었다.
저 흔하디흔한 장미 한 송이를 아껴줄 사람은 앤시아 말고는 없었으니까.
“앤시아.”
그는 자신의 하나뿐인 아내의 이름을 불렀다.
***
이 방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었다. 내가 돌아올 걸 믿고 그대로 남겨두었던 거겠지.
나는 책상 위에 놓인 장미를 바라보았다.
블레이크가 나에게 처음으로 주었던 선물이었다.
나는 지금까지도 전혀 변하지 않은 붉은 장미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건드려보았다.
보존 마법을 걸어두었지만, 그래도 많은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행여 상하지는 않을까 걱정되었다.
손가락 끝에 부드러운 꽃잎이 닿는 순간 아련한 기분이 들었다.
“앤시아.”
갑작스러운 음성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문 앞에 블레이크가 서 있었다.
그는 거침없는 걸음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나를 끌어안았다.
“앤시아.”
그는 다시 나의 이름을 불렀다. 블레이크의 시선이 나를 직시하고 있었다.
떠보거나 짐작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나도 내가 앤시아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금제가 발동하며 마비에 걸린 것처럼 전신이 딱딱하게 굳기 시작했다.
블레이크는 나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앤시아, 너지? 그렇지?”
“…….”
“처음 본 순간부터 너에게 끌렸어. 내 심장이 너한테만 반응해. 네가 웃으면 기쁘고, 울면 슬프고, 다른 남자랑 눈만 마주쳐도 질투가 나. 너야. 이런 기분이 드는 사람은 오직 너뿐이야. 네가 앤시아니까, 내 아내니까.”
“…….”
“대답해줘, 앤시아. 부인이잖아. 부인이 맞잖아.”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서 있자, 그는 애원했다. 어린 시절, 나에게 떠나지 말라고 울부짖던 그때처럼 간절했다.
나도 내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나는 딱딱하게 굳은 몸에 힘을 주고 또 주었다. 하지만 접착제로 붙인 것처럼 달라붙은 입술은 도무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좀 더, 좀 더…. 나는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간신히 입술이 벌어졌다.
‘블레이크….’
나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비록 입 모양뿐이었지만 7년 만에 처음으로 그를 바라보며 똑바로 이름을 불렀다.
내가 앤시아라고, 진짜 당신의 아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거기까진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실망할 틈도 없이 입술이 포개졌다.
갑작스러운 키스에 잠시 놀랐지만, 블레이크의 옷깃을 조심스럽게 잡으며 그를 받아들였다. 언제나 그를 감싸고 있던 장미 향이 더욱더 짙게 느껴졌다.
겹쳐졌던 입술이 느리게 떨어지며, 그는 다시 나를 끌어안았다.
“앤시아, 보고 싶었어. 너무 보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어.”
나는 얼굴을 쓰다듬었다.
나도 그랬다고, 그와 같은 마음이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갑자기 목에서부터 뜨거운 열기가 치솟았다.
전신이 타들어 갈 것처럼 끓어오르더니, 목구멍으로 핏덩이가 역류했다. 다급히 입을 틀어막았지만 검은 피가 손가락 사이로 뚝뚝 흘러내렸다.
“앤시아!”
블레이크의 외침이 들렸다.
괜찮다고,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을 해야 하는데, 의식이 멀어지며 눈이 감겼다.
***
블레이크가 식사 도중 갑자기 자리를 떠나자, 세르는 세피아궁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앤시아를 쫓아 아모리아궁으로 갔던 쉘이 자신이 본 내용을 빠르게 전했다.
세르는 공허한 얼굴로 그녀의 말을 듣다가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내 문이 벌컥 열리더니 블레이크가 안으로 들어왔다.
쉴 새 없이 속살거리던 쉘은 깜짝 놀라며 모습을 감추었다.
세르는 텅 빈 얼굴 위로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전하, 갑자기 가시면 어떡해요. 혼자서 엄청 기다렸다고요.”
“연기는 집어치워.”
블레이크는 자신을 붙잡는 세르의 손을 거칠게 쳐냈다. 그러자 세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연기라니요?”
“앤시아한테 무슨 짓을 한 거지?”
거칠게 일렁이는 분노 아래 살기가 깔려 있었다.
앤시아가 쓰러지던 순간, 그녀를 감싸던 빛의 마나에 균열이 일었다. 블레이크가 지금껏 존재조차 느끼지 못했던 은밀한 마나였다.
그와 동시에 어디선가 나타난 작은 빛의 결정이 파르르 떨리며 세피아궁으로 날아갔다.
아니, 새롭게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계속 앤시아의 주변에 머무르고 있었던 거다. 그러다 마나의 막에 균열이 생기며 존재가 드러난 거겠지.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시치미 떼지 마. 앤시아의 주변을 맴돌았던 빛의 결정이 지금 네 옆에 있는 거 아니까.”
블레이크는 처음부터 그녀를 의심했다. 이 여자가 진짜 앤시아라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다만 리차드의 계략에 이용당한 건지, 아니면 이 여자가 주도한 일인지를 두고 고민했을 뿐이다. 하지만 앤시아를 감시하던 빛이 이 여자의 옆으로 온 순간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블레이크가 검집에서 칼을 뽑으며 쉘이 있는 위치를 정확히 가리키자, 세르의 입꼬리가 피식 올라갔다.
“그렇게나 추하고 흉측한데 용케 알아봤네.”
“앤시아니까. 다른 건 중요하지 않아.”
“대단한 사랑이네.”
비아냥거리는 세르의 목에 서슬 퍼런 칼날이 드리워졌다.
“너는 누구지? 앤시아한테 무슨 짓을 한 거냐?”
“조심하는 게 좋을 텐데? 이건 앤시아의 몸이라고.”
세르는 날카로운 칼날을 손으로 치웠다. 그녀의 손가락에 붉은 핏줄기가 생기자, 블레이크는 황급히 검을 거두었다.
정말로 앤시아의 몸이라면 다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나한테 화내지 마.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앤시아가 선택한 거지.”
“무슨 뜻이지?”
“나는 기회를 줬어. 하지만 앤시아가 거절했다고.”
세르는 블레이크의 손을 잡았다. 블레이크는 당장 쳐내려고 했지만, 그 순간 칠흑 같은 어둠이 밀려들었다.
세르가 흘려보낸 기억의 파편들이 블레이크의 눈 앞에 펼쳐진 것이다.
작은 소녀가 마쿨의 희미한 불빛에 의지한 채 깜깜한 어둠 속을 걸어갔다. 그건 바로 앤시아였다.
구두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손과 발도 상처투성이였다. 하지만 그녀는 꿋꿋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마쿨의 빛이 점차 사그라들고 어둠이 짙어졌다. 어린 소녀는 여인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내 저주를 풀기 위해서 7년 동안 어둠의 문을 헤맸던 거야?’
블레이크의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그는 앤시아를 찾아 헤매며, 그녀가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생각하고는 했다.
괜찮을 거라며 희망에 젖기도 하고, 비극적인 상황을 떠올리며 절망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설마 7년 동안 잠시도 쉬지 못한 채 칠흑 같은 어둠을 헤매고 있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슬퍼하긴 일렀다.
“황태자 먼저 죽이자. 그럼 너도 다시 나한테 돌아오겠지?”
봉인이 풀린 여신은 블레이크를 죽이려 했다.
세르에게서 흘러드는 기억은 조각조각 나고 뭉개져 있었기 때문에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빛의 여신은 필립에게 배신당하고 어둠의 문에 봉인됐으니, 그 후손인 자신을 원망하는 게 아닐까 하고 짐작할 뿐이었다.
“안 돼!”
“블레이크를 건들지 마!”
“안 돼! 세르, 제발 그러지 마! 사랑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제발! 세르!”
앤시아는 그런 빛의 여신을 필사적으로 말렸다.
“그렇게 황태자가 소중하면 대신 네 목숨이라도 내놓든가!”
“그럼 그렇게 해.”
“그렇게 말하면 내가 못 할 줄 알아!”
“빈말도 협박도 아니야. 나를 죽여. 대신 블레이크는 건들지 마.”
그리고 블레이크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다.
겨우 목숨은 건졌지만, 자신의 몸을 여신에게 빼앗겼다. 게다가 목소리도 잃어버렸다.
[이 검으로 블레이크의 심장을 찔러.]
[황태자의 피로 그 검을 적신다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올 거야. 너의 아름다운 육체, 목소리, 언어 능력, 빛의 힘, 모든 것을 되찾을 수 있어!]
여신은 앤시아에게 기회를 주었다. 하지만 앤시아는 단칼에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
‘필요 없어. 가져가.’
백 일밖에 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블레이크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것이다.
시야가 밝아지며 다시 세피아궁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앤시아가 ‘세르’라고 불렀던 ‘빛의 여신’은 블레이크를 향해 차가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모든 건 앤시아가 스스로 택한 거야. 나는 계속해서 기회를 줬지만, 앤시아는 끝끝내 거부했지.”
블레이크는 이를 악물었다.
전부 나 때문이었다. 나를 위해서 앤시아는 자신의 모든 걸 바쳤다.
바보같이. 바보같이….
그녀에게 짐만 되는 스스로가 미웠다. 하지만 나약하게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앤시아를 살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세르의 눈매가 묘하게 휘었다.
“살리려고?”
“방법을 말해.”
“살려서 어쩌려고. 그 추악한 여자가 앤시아라는 사실을 밝히기라도 할 건가?”
“당연한 걸 묻는군.”
“황태자여, 나와 함께하지 않겠나?”
“설마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니겠지.”
블레이크는 분노를 애써 억누르며 말했다. 하지만 세르는 진지했다.
“어차피 그 여자가 진짜 앤시아라는 사실을 아는 건 우리 둘뿐이야. 네가 나를 택하기만 한다면 원하는 모든 걸 손에 넣을 수 있도록 해주겠다.”
그녀가 유혹하듯 블레이크의 손을 잡았다.
“강대한 빛의 힘, 제국의 번영과 영광, 끊임없이 쏟아지는 황금과 마나석, 네가 원하는 건 모두 가질 수 있어.”
누구나가 혹할 만한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그녀의 손을 거칠게 쳐냈다.
“필요 없어.”
“앤시아는 돌아오지 못해. 목숨을 부지하더라도 평생 추악한 얼굴을 지닌 채 살게 될 거야.”
“상관없어. 앤시아니까. 다른 건 중요하지 않아.”
블레이크는 여신에게 무릎을 꿇었다.
“앤시아를 살려줘. 부인을 살릴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다.”
“뭐든 하겠다고? 그렇다면 다시 저주에 걸려도 좋나?”
세르의 입가에 시니컬한 미소가 걸렸다.
“저주에 걸리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거야. 손바닥만 한 별궁에 유폐되어서 모두가 너를 경멸하겠지. 다시 지옥이 시작되는 거야. 그래도 좋나? 앤시아를 위해서 다시 그 지옥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겠어?”
사랑이란 건 결국 거짓이고 위선이다.
상대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결국 자기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해가 된다면 참지 못한다.
황태자도 그러겠지.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다.
그녀가 블레이크를 내려 보다 고개를 돌리려는데, 그가 입을 열었다.
“손바닥만 한 곳에서 앤시아만 바라보며 살 수 있다니,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인걸.”
블레이크는 정말로 기쁘다는 듯 웃고 있었다.
“너라는 인간은….”
세르는 말문이 막혔다.
정말로 앤시아를 위해 희생하겠다고?
하지만 경악으로 물든 표정은 이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녀는 투명하게 빛나는 병을 블레이크에게 건넸다.
“이게 뭐지?”
“그걸 앤시아한테 먹여라. 그럼 원래의 육신을 되찾을 거다. 몸도 다시 건강해지겠지.”
“정말인가?”
“그래.”
블레이크는 병에 든 새하얀 액체를 바라보았다. 그는 오직 앤시아의 안위만을 걱정할 뿐, 자신이 다시 저주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블레이크의 아름다운 얼굴이 두려움으로 물드는 것을 상상하며, 세르는 차갑게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앤시아가 그 약을 마시는 순간, 너는 죽을 거야.”
“…….”
“알량한 사랑을 위해 네 목숨을 바칠 수 있겠어?”
그녀의 말을 들은 블레이크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포기하는구나. 자신만만하게 떠들더니 자신의 목숨 앞에서는 약해지는군. 역시 그럴 줄 알았다.
세르의 한쪽 입꼬리가 한껏 올라가는데, 블레이크가 입을 열었다.
“나는 어렸을 때 언제나 악몽을 꿨어. 뜨거운 화염과 비명으로 가득 찬 꿈이었지. 하지만 꿈에서 깨면 모든 것이 흐릿해져서 잘 기억나지 않았어. …그런데 이젠 알겠어. 그때 내 꿈에 나타났던 건 당신이었지?”
“…….”
그랬나? 내가 그랬었나?
세르는 과거의 기억을 더듬었다. 하지만 잘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저주에 걸린 채 죽었다면, 그랬다면 당신의 원한이 풀렸을까?”
블레이크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세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는 그런 세르를 보며 담담히 말을 이었다.
“그랬다면 빨리 죽여주지 그랬어. 앤시아를 아프게 하지 말고.”
“…….”
“당신은 앤시아를 친구라고 생각하는 거지?”
블레이크는 조금 전 보았던 과거를 떠올리며 물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두 사람은 무척 친밀해 보였다.
“…그래.”
세르는 침묵을 깨며 겨우 대답했다.
“당신을 믿겠어. 내가 떠나더라도 앤시아를 지켜줘.”
“…….”
“그리고 미안해.”
“뭐가 미안하지? 필립 대신 사죄라도 하려는 건가?”
세르는 차갑게 쏘아붙였다. 그러자 블레이크는 고개를 저었다.
천 년 전 선조의 일을 자신의 잘못처럼 여기며 사과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진심도 아니면서 입에 발린 말을 뱉을 수는 없었다.
“당신이 그렇게나 고통스럽게 외쳤는데, 잊어버렸어. 당신을 기억하지 못해서,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해.”
세르는 계속 블레이크의 꿈에 나타나서 괴로움에 찬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기억하지 못했다.
만약 자신이 그걸 기억했다면, 그랬다면 빛의 여신은 하루빨리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었을 거다.
앤시아가 이런 고통을 겪을 일도 없었겠지.
“정말로 미안해.”
그는 고개 숙여 사과했다.
***
블레이크는 세르가 준 약병을 들고 아모리아궁으로 향했다.
그는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앤시아의 손을 굳게 움켜잡았다.
곧 끊어질 것처럼 그녀의 심장 박동이 희미했다.
“왜 그랬어. 바보같이….”
어둠 속을 홀로 걷는 앤시아를 봤던 순간부터 참아왔던 눈물이 후두두 흘러내렸다.
“나 같은 건 버리지. 그냥 버리고 떠났어야지. 왜 그렇게 미련한 짓을 해.”
앤시아를 잡지 말았어야 했다. 그녀가 떠날 생각을 할 때 보내줬어야 했다. 애초에 결혼조차 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 때문에 앤시아는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을 겪었다.
“미안해.”
로즈가 앤시아라고 생각하면서도 혹시 모를 작은 가능성 때문에 망설였다. 하지만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그녀에게 끌리는 영혼의 울림을 믿었어야 했다.
“사랑해. 앤시아.”
블레이크는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여신이 준 약을 앤시아의 입 안으로 흘려보냈다.
다시 저주에 걸리든 목숨을 잃든, 그런 건 상관없었다.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앤시아가 없는 세상을 살아갈 이유는 없다. 블레이크에게는 앤시아가 전부였다.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었다.
설령 그것이 자신의 목숨이라 할지라도 상관없었다.
병 안에 있는 액체가 모두 들어간 순간, 블레이크의 눈앞이 흐려졌다.
그는 그대로 쓰러졌다. 텅 빈 병이 블레이크의 옆을 굴렀다.
***
“내가 저주에 걸린 채 죽었다면, 그랬다면 당신의 원한이 풀렸을까?”
블레이크가 질문을 던졌을 때, 세르파니아는 어떤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정말로 몰랐으니까. 세르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라온텔과 친구였다.’
그녀는 부서진 기억의 파편 중에서도 가장 선명한 조각 하나를 떠올렸다.
라온텔은 그녀의 친구였다. 세르가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려준 인간이었다.
그리고 세르는 라온텔과 가족처럼 자란 필립을 알게 되었다.
필립은 세르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언제나 라온텔에게 향해 있었다.
그래도 세르는 필립이 좋았다.
필립의 아버지는 젤칸 제국의 황제였다. 하지만 태어나기도 전에 아들을 버렸고,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필립은 이로 인한 깊은 상처를 안고 있었다.
세르는 그 상처를 위로해 주고 싶었다. 사실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서, 그 마음을 감추기 위해 자신을 이용하는 걸 알았지만 그것조차 안타깝게 느껴졌다.
라온텔은 락슐을 사랑했고, 세르는 두 사람이 맺어지길 간절히 빌었다. 라온텔이 결혼하면 필립도 그녀를 포기할 테니까.
그리고 기대했던 대로 라온텔과 락슐이 맺어지자, 필립은 세르에게 청혼했다.
“세르, 나는 네가 진정한 인간이 되었으면 좋겠어. 그래 줄 수 있어?”
“응. 물론이지!”
세르는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청혼에 성공했음에도 필립의 표정은 어두웠다.
“필립, 왜 그래?”
“불안해서.”
“불안하다니?”
“나는 한심하고 부족한 인간이야. 아버지에게조차 버림받았지. 세르파니아, 결국 너도 나를 떠나지 않을까?”
“떠나지 않아! 내가 너를 떠날 리가 없잖아!”
세르는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필립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하지만 결혼을 한다고 해도, 언제 다시 여신으로 돌아갈지 모르잖아….”
“아니야! 안 그래. 나는 너와 함께할 거야!”
“그럼 진짜 인간이 되어줄 수 있어?”
“진짜 인간…?”
“응. 진짜 인간.”
그건 여신의 힘을 모두 포기하고, 완전한 인간이 되어달라는 뜻이었다.
“…응. 그럴게.”
세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필립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그래서 곧장 그가 원하는 말을 들려줬다.
“모든 힘을 포기할게. 그리고 그 힘을 너에게 줄게.”
“고마워. 세르파니아.”
필립은 애정이 가득한 눈으로 세르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라온텔을 보던 그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봐주었다.
세르는 그것이 기뻤다.
‘내가 라온텔처럼 진짜 인간이 된다면, 필립도 나를 사랑해줄 거야.’
어쩌면 필립이 빛의 힘을 빼앗기 위해서 자신에게 청혼한 것은 아닐까?
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세르는 차오르는 불안과 마음의 소리를 애써 덮었다.
지금 필립의 눈에는 애정이 넘쳤다. 그는 인간이니 강한 힘을 원하는 것은 당연한 거다. 하지만 오직 그것 때문에 청혼한 건 아닐 거다.
‘만약 그랬다면 저런 눈빛으로 나를 바라봐 줄 리 없잖아.’
그녀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세르가 필립과 결혼할 생각으로 한창 들떠 있는데, 필립이 그녀를 찾아와서 소리쳤다.
“라온텔한테 무슨 말을 한 거지?”
“응?”
“진짜 인간이 되기 싫었으면, 나를 가지고 놀다 떠나고 싶었으면 라온텔이 아니라 나한테 말을 했어야지! 어쩜 이렇게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 수 있어!”
“아니야.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어.”
세르는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지만, 필립은 그녀를 서늘하게 내려 보았다.
“나는 너를 믿었는데. 정말 실망이야. 세르파니아.”
“아니야! 나는 정말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그럼 라온텔이 거짓말을 했다는 건가?”
라온텔이 거짓말을 했다고? 아니다. 라온텔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거짓말은 아니고,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게….”
“그럼 내가 거짓말을 했다는 거야? 나보다 라온텔을 더 믿는 건가?”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렇다면 거짓말을 한 건 라온텔이네.”
“으응….”
세르는 필립의 압박에 밀려 고개를 끄덕였다.
“라온텔이 왜 그런 짓을 한 거지? 그 애가 거짓말 같은 걸 할 리가 없는데.”
맞다. 라온텔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역시 필립도 알고 있었구나.
세르가 얼른 동의하려 하는데, 필립이 말을 이었다.
“설마 우리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그런 건가?”
“뭐…?”
라온텔이…?
“맞아. 그런 거야. 그렇지 않다면 네가 힘을 주는 게 아까워서 나와 결혼하기 싫어한다는 말을 지어냈을 리가 없잖아.”
라온텔이 나와 필립의 사이를 이간질하려고 했다고?
그녀는 라온텔이 필립의 마음을 전혀 알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라온텔에게는 오직 락슐뿐이었다. 어려서부터 그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서 다른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게다가 라온텔은 필립을 진짜 가족이라 여겼다. 그래서 그의 마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의 친오빠와 필립이 보여주는 애정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걸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나? 필립의 마음을 알고 있었나?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며 필립을 우롱하고 나를 기만했던 건가?
그녀는 라온텔에 대한 배신감에 떨며, 필립에게 매달렸다.
“맞아. 전부 거짓말이야. 라온텔이 우리 사이를 질투해서 지어낸 거야!”
“그런데 세르파니아, 너는 정말로 아무 말도 안 한 거야?”
“안 했어.”
“네가 뭔가 말을 했으니까 라온텔도 그런 거겠지.”
필립은 그녀의 손을 차갑게 뿌리쳤다.
그가 떠나고, 세르는 분노에 차서 라온텔을 찾아갔다.
“너, 필립한테 무슨 말을 한 거야!”
“내가 원한 거야! 내가 필립한테 힘을 주고 싶어서, 내 의지로 선택한 거라고!”
“라온텔, 나는 너를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라온텔에게 분노를 쏟아낸 뒤, 당장 필립을 찾아가서 사죄했다.
그가 자신을 떠날까 봐 두려웠다.
세르는 필립을 사랑했다. 처음으로 느껴본 감정이었다. 필립을 위해서라면 모든 걸 바칠 수 있었다. 절대로 그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필립, 너에게 모든 힘을 줄게. 그러니까 제발 나를 버리지 마.”
세르는 그에게 빌고, 또 빌었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한 번만 더 나를 배신하면, 그때는 용서하지 않을 거야.”
“알았어. 안 그럴게.”
그녀는 필립을 배신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를 붙잡기 위해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그의 강경한 목소리를 듣다 보니, 자신이 정말로 배신한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세르파니아, 우리 떠나자. 우리 두 사람밖에 없는 곳으로 가서 아무한테도 방해받지 않고 함께 살자. 다른 사람은 믿을 수 없어. 라온텔도 안 돼.”
“응. 그럴게. 그럴게. 네 말대로 할게.”
세르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수도를 떠난다면, 필립도 라온텔을 잊고 자신만을 바라봐주겠지.
그들은 당장 서쪽 끝에 있는 혼돈의 계곡으로 떠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둘만의 결혼식을 올렸다.
그날 밤, 세르파니아는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필립에게 주었다.
그녀는 여신의 힘을 잃고 완전한 인간이 되었다. 하지만 아쉽진 않았다. 오히려 행복했다. 이제 정말 필립의 아내가 된 것이다.
세르는 필립에게 빛의 힘을 쓰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필립은 다정했고, 세르를 소중히 여겨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필립이 물었다.
“세르, 빛의 마나를 뒤트는 방법도 있어?”
“응?”
“사람을 치료하고 작물을 키우는 거 말고 빛 자체를 뒤틀 수는 없냐고?”
“…그건 왜?”
“여긴 마물이 많잖아. 세르, 너는 이제 인간이니까, 너를 지켜줄 마법이 필요해.”
필립은 그윽한 눈으로 세르를 응시했다.
“공격 마법이 있잖아.”
빛의 마나는 본시 치유와 보호의 사명을 지녔다. 그 때문에 다른 마나에 비해 공격력이 낮긴 하지만, 그래도 공격 마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공격 마법은 내가 네 곁에 있을 때만 쓸 수 있잖아. 너를 완벽하게 지켜줄 수 없어.”
“하지만 그런 건….”
빛을 마나를 뒤틀 수는 있다. 하지만 그 힘을 자칫 잘못 사용하면 엄청난 비극을 초래할 수 있었다.
세르가 망설이자 필립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세르, 나를 못 믿는 거야?”
“아, 아니야!”
“내가 하찮은 인간이라 무시하는 거야? 나를 따라온 걸 후회하나 보지?”
“아, 아니, 그런 게 아니야! 알려줄게. 다 알려줄게!”
세르는 화가 난 그를 달래기 위해 빛의 마나를 뒤트는 법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세르가 자신이 아는 모든 마법을 알려준 날, 필립은 그녀의 곁을 홀연히 떠났다.
혼돈의 계곡은 마물들로 득실거렸다. 필립이 떠나기 전 보호 마법을 걸어놓긴 했지만, 마물들은 계속해서 허름한 오두막 주변을 기웃거렸다.
세르는 마물이 무섭지는 않았다. 다만 사무치게 외로웠다.
그녀는 라온텔이 그리워졌다.
세르는 라온텔에게 우정의 목걸이를 주었다. 언제든 그녀의 목소리가 자신에게 닿을 수 있도록, 언제든 그녀가 자신을 찾아올 수 있도록 마법을 걸어두었다.
모든 힘을 필립에게 주었지만, 그 목걸이에 걸린 마법은 풀리지 않았다. 하지만 라온텔은 단 한 번도 그녀를 찾지 않았다.
‘친구라고 했으면서 내가 보고 싶지 않은 거야? 너도 나를 잊었어? 정말로 나와 필립의 사이를 이간질했던 거야?’
원망과 외로움이 쌓여가던 그때 세르의 몸에 검은 반점이 생겼다.
빛의 힘을 어긋나게 사용하자, 그 대가가 독이 되어 세르의 몸을 잠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빛의 힘은 원래 세르의 것이었다.
만약 그녀가 빛의 힘을 잘못 사용하거나, 힘을 나눠 받은 자가 어긋난 길을 걷더라도 그 책임은 세르에게 돌아왔다.
세르는 라온텔에게 빛의 축복을 주었다. 하지만 그녀가 힘을 악용할 리는 없었다.
“세르, 빛의 마나를 뒤트는 방법도 있어?”
불현듯 필립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필립이다. 자신에게서 마나를 뒤트는 방법을 배웠던 필립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세르는 그와 함께 만든 작은 오두막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순간 라온텔의 목소리가 들렸다.
“세르, 황궁에 정체 모를 병이 퍼지고 있어.”
“세르, 어디 있어? 제발 도와줘. 락슐이…. 락슐이….”
“락슐이 떠났어. 떠나버렸어….”
그녀는 세르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었다. 자신이 준 목걸이를 붙잡고 간절하게 울부짖고 있었다. 라온텔은 꽤 오래전부터 세르를 찾은 것 같았다.
라온텔의 말을 통해 세르는 그동안 벌어진 일들을 모두 알 수 있었다.
필립은 자신이 준 힘을 악용해서 황궁에 병을 퍼트렸고, 락슐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오두막에 결계를 쳐서 주변의 마나를 완전히 차단했다. 혹시라도 세르가 다른 사람과 연락이 닿는 것을 막고, 그녀의 존재를 완벽하게 숨기기 위해서였다.
라온텔은 자신을 잊어버린 것이 아니었다. 필립이 가로막은 거다.
이간질을 한 사람은 라온텔이 아니라 필립이었다. 세르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세르, 왜 나와 있어?”
그때 남자의 음성이 들렸다. 고개를 들자 필립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돌아온 것이다.
“필립, 네가 그랬어? 네가 황태자를 죽였어?”
세르의 물음에 필립의 눈매가 싸늘하게 굳었다.
“어떻게 안 거지?”
“필립….”
“나에게 다 주었다는 건 거짓말이었나? 나 몰래 힘을 숨겨뒀어?”
자신의 잘못이 드러났음에도 필립은 용서를 빌지 않았다. 오히려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세르를 추궁했다.
세르는 자신의 소매를 걷었다.
“필립, 이걸 봐.”
“이게 뭐지?”
“네가 빛의 힘을 어긋나게 사용해서 벌을 받게 된 거야.”
그 순간 필립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그런 게 있었으면 진작 말을 했어야지!”
그래도 내가 아프다니까 걱정해주는 건가?
세르는 이 와중에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기대는 곧 산산조각이 났다.
“설마 나한테도 그런 게 생기는 건 아니겠지?”
“…걱정 마. 이건 여신인 나에게만 주어지는 형벌이야.”
“그렇군.”
파리하게 질렸던 필립의 낯빛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의 목소리는 무심했다. 세르에 대한 걱정이나 미안함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세르는 필립의 실체를 깨달았다. 그런데도 그를 놓을 수가 없었다.
황제와 락슐 황태자가 죽자, 필립은 세르를 데리고 수도로 돌아갔다.
그는 병이 든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 세르는 그것만으로도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수도로 돌아온 세르는 펑펑 울며 라온텔에게 사죄했다.
“미안해. 라온, 미안해. 락슐이 그렇게 된 줄 몰랐어. 미안해. 전부 내 잘못이야.”
그리고 그 와중에도 진실을 알면 라온텔이 자신을 싫어할까 봐 겁이 나서 변명을 늘어놓았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가 밉지? 많이 밉지? 나라도 그럴 거야. 너한테 너무 미안해.”
“밉지 않아. 네가 돌아와서 기쁜걸.”
하지만 라온텔은 그런 세르를 꼭 안아주었다. 그녀가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 말이다.
황제로 등극한 필립은 세르를 허름한 별궁에 처박아 두었다.
세르의 몸은 검은 반점으로 뒤덮여 가고 있었다. 하지만 필립은 사과 한마디 하지 않았다.
필립은 사실 라온텔을 좋아했으며, 빛의 힘을 얻기 위해 세르를 이용했을 뿐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라온텔은 세르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려 했다.
세르는 그녀에게 모든 진실을 고백했다. 락슐의 죽음 또한 자신의 탓이란 것까지 전부 말했다.
그럼에도 라온텔은 그녀의 편을 들어주었다.
세르는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을 진심으로 대해주었던 사람은 오직 라온텔밖에 없었다.
필립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을 이용했을 뿐이다. 빛의 여신인 걸 알고 접근했고, 힘을 빼앗기 위해 결혼하자고 했다. 라온텔이 이를 말릴까 봐 이간질한 거다.
라온텔을 차지하고 황제가 되기 위해서, 락슐을 비롯해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비열했다.
사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느끼고 또 느꼈지만, 필립에 대한 사랑을 접지 못해서 애써 덮어두었을 뿐이다.
필립은 추악한 인간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인정했을 때는 이미 늦었고, 라온텔은 황후궁에 갇히게 되었다.
세르는 필립이 저지른 죄업의 대가로 죽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필립은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라온텔을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세르가 인간의 육체를 버리고 여신의 힘을 되찾는다면, 그리고 죄악을 저지른 필립을 벌한다면 그녀는 살아날 수 있었다. 하지만 세르는 망설이고 또 망설였다.
그런 일을 당하면서도 필립을 없앨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필립이 라온텔과 강제로 결혼하려 하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라온텔을 지키기 위한 우정 때문일까? 아니면 질투심 때문이었을까?
어떤 이유인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녀는 황후궁에 갇혀 있는 라온텔을 찾아갔다. 라온텔은 세르를 살리기 위해서 자신이 받았던 빛의 축복을 기꺼이 돌려주었다.
세르의 상처를 치료해주기는커녕, 얼른 죽기를 바라며 싸늘한 눈빛을 던지던 필립과는 달랐다.
라온텔은 나의 친구다. 처음부터 그랬고, 지금도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나의 하나뿐인 친구. 라온.’
필립을 없애고 라온텔을 구해야 한다.
세르는 당장 필립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곧장 필립에게 주었던 힘을 거두었다. 아무리 빛의 힘을 다루는 법을 배웠다고 한들 여신에게는 미치지 못했다.
세르가 그의 숨통을 끊으려던 순간, 필립이 소리쳤다.
“사랑해!”
“…….”
느닷없는 사랑 고백에 세르는 멈칫했다.
“세르, 너를 사랑해. 여신인 너에 비해 내가 한없이 초라해서, 그래서 그랬어. 너에게 당당하고 싶은 마음에 실수를 저질렀다. 그러니까 제발 화 풀어.”
그가 세르의 손을 잡으며 애원했다. 바보 같게도 세르는 다시 필립의 말에 흔들렸다.
그 순간 날카로운 검이 그녀의 복부를 꿰뚫었다.
***
필립은 세르를 죽이려 했다. 칼로 찌르고 그녀의 몸에 불을 질렀다.
그녀는 반격조차 하지 못한 채 그 공격을 그대로 받아냈다. 필립의 힘이 강하기도 했지만, 그 전에 충격을 받았다.
‘필립이 나를 죽이려 했다. 서슴없이 칼을 꽂았다.’
세르가 정신적인 충격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필립은 경멸 어린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 보았다.
필립에게 주었던 빛의 힘의 일부를 되찾고, 그를 공격하면서 세르의 몸에 있던 검은 반점은 사라졌다, 하지만 그 대신 커다란 화상 흉터가 남았다.
“흉측하네. 이렇게 되기 전에 곱게 죽었으면 서로한테 좋잖아?”
필립은 계속 세르의 작은 몸에 칼날을 박아 넣으며 소리쳤다.
“죽어! 당장 죽으라고! 왜 죽이지 않는 거야! 이 괴물아!”
“…….”
“그래, 좋아. 죽지 않는다면 봉인하면 돼. 영원히 어둠 속에 처박혀서 나오지 마! 내 눈앞에서 영영 사라지라고!”
필립은 수도의 백성들을 제물로 바쳐서 세르의 힘을 완전히 빼앗고 혼돈의 계곡에 봉인하려 했다.
거대한 마나가 세르를 구속하고 힘을 빨아들였다. 이대로는 빛의 힘을 전부 필립에게 빼앗겨 버리고 말 거다.
세르는 봉인당하기 직전 자신의 남은 힘을 라온텔에게 보냈다.
“라온, 구해줘! 나를 구해줘!”
라온텔에게 빛의 힘을 나눠주었을 때, 반동이 생기며 마법진에 균열이 생겼다. 덕분에 세르는 빛의 힘을 완전히 빼앗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필립이 건 봉인을 풀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도 포기하기는 일렀다. 세르와 함께라면 이 봉인을 풀 수 있을 것이다.
“라온, 나 여기 있어. 제발 나를 구해줘!”
어둠의 문에 봉인된 그녀는 매일 라온텔에게 도움을 청했다. 불기둥으로 둘러싸인 작은 구체에 갇혀서 하염없이 울부짖었다.
그러나 라온텔은 그녀를 구해주지 않았다.
세르는 자신이 나눠준 빛의 힘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라온텔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다.
필립이 방해를 한 건가? 분명 그렇겠지.
과거 라온텔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막은 것처럼, 이번에는 자신의 목소리가 라온텔에게 닿지 못하게 손을 써뒀을 거다.
‘어떻게든 이곳에서 빠져나가야 해.’
방법을 고민하던 세르는 자신의 남은 힘을 끌어모아 필립의 자식들을 통해 메시지를 남겼다.
아무리 그가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이라지만 혈육에게는 애틋할 거다. 자식의 몸에 새겨진 글씨를 지우기 위해서 스스로 세르의 봉인을 풀지도 모른다.
[나는 빛의 여신이다.
나는 지금 필립에게 속아 빛의 힘을 빼앗기고 혼돈의 계곡에 갇혀 있다. 그는 수많은 죄를 지었다. 빛의 힘을 이용해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하지만 필립은 그녀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인간이었다. 그는 자신의 치부가 드러날 위기에 처하자, 가차 없이 친자식을 죽여버렸다.
‘어떻게 하지?’
그녀는 망설였다, 다시 메시지를 남긴다고 해도, 필립은 또 자식을 죽일 거다. 죄 없는 아이를 희생시킬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필립의 자식이잖아. 그가 죽인 거잖아! 나를 가두고, 라온을 가두고, 자식들을 죽인 건 전부 필립이잖아! 내가 왜 괴로워해야 해! 왜 내가 죄책감을 느껴야 해! 멈춰야 하는 건 필립이잖아! 필립이 멈추면 되는 거잖아!’
세르는 계속해서 필립의 자식들의 몸에 검은 문자를 남겼다. 그 메시지를 본 것일까?
어느 날, 라온텔이 자신에게 말을 걸어왔다.
“세르, 어디야? 내가 갈게. 지금 어디 있어? 너 지금 어디 있어?”
라온텔이 자신을 구하러 오겠다고 했다. 세르는 기대했다. 하지만 거짓말이었다.
라온텔은 결국 그녀를 구하러 오지 않았다.
세르파니아는 버림받았다.
‘라온, 라온, 어디 있어? 라온…?’
세르는 라온텔을 좋아했다. 유일한 친구인 라온텔을 세르는 언제나 ‘라온’이라는 애칭으로 부르곤 했다.
하지만 필립의 마음을 독점하는 그녀가 미워질 때면 애칭이 아닌 원래 이름을 불렀다.
“라온텔, 라온텔, 제발 나를 구해줘!”
세월이 흐르며 라온이라는 애칭은 라온텔로 변해갔다.
세르는 라온텔이 미웠다. 자신을 찾지 않는 그녀가 원망스러웠다. 그래도 그녀뿐이었다.
화염에 뒤덮인 어둠 속에 갇혀 라온텔을 부르고 또 불렀다.
세르가 라온텔과 필립에게 주었던 빛의 힘은 벨라시안 가문의 후손들과 저주의 계승자에게 전해졌다.
세르는 그들에게 호소했다.
하지만 빛의 계승자가 지닌 힘은 너무 미약하여 세르의 목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저주의 계승자도 마찬가지였다. 필립이 걸어놓은 저주 때문인지 그들은 세르의 말을 들어도 금세 잊어버렸다.
세르는 고통 속에 죽어가는 그들을 보며 죄책감과 괴로움을 느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원망과 증오만이 남았다.
‘뭐가 힘들다는 거야? 내가 더 괴롭다고! 나는 죽을 수도 없어. 징징거리지 마! 울지 마. 역겨워. 다 죽어. 전부 죽어버리라고!’
그녀는 혼자 싸워야 했다. 간신히 필립이 만든 봉인구에 구멍을 내도 필립의 후손들은 그녀를 다시 봉인했다.
‘죽일 거야. 죽일 거야! 전부 다 없애버릴 거야! 필립의 후손과 그 나라의 백성 모두를 남김없이 전부 없애버릴 거다!’
천 년 동안 세르의 마음은 악과 분노로 물들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라온텔이 다시 나타났다.
“라온! 나야! 나, 여기 있어!”
라온텔, 나의 친구. 나의 하나뿐인 친구.
그녀의 존재를 느낀 순간 천 년 동안 쌓였던 원망이 눈 녹듯이 사라져 내렸다.
하지만 아무리 외쳐도 라온텔은 세르의 말을 듣지 못했다.
“라온텔, 내 말을 들어줘. 라온텔, 라온텔!!”
천 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세르는 점차 분노했고 또 체념했다.
다시는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으리라, 찬란한 빛을 볼 수 없으리라….
하지만 라온텔이 나타나자 봉인을 깨고 나가야 한다는 의지가 다시금 끓어올랐다.
‘라온텔을 만나야 해. 나의 친구 라온텔을!’
그녀는 필사적으로 힘을 모았다. 그리고 겨우 봉인구에 금을 내는 데 성공했다.
‘이게 열리면 라온텔을 만날 수 있어! 라온텔! 나의 라온텔을!’
하지만 필립의 후손은 그녀를 다시 봉인했다. 겨우 금이 갔던 봉인구는 도로 단단해졌다.
세르파니아는 절망했다. 하지만 라온텔은 기뻐 보였다.
“앤시아, 나를 떠나면 안 돼.”
“떠날 리가 없잖아요.”
황태자는 락슐의 환생이었다. 다시 락슐과 재회한 라온텔은 행복에 젖어 있었다.
그녀는 오직 황태자만을 생각했고, 자신이 지닌 빛의 힘을 황태자를 위해 사용했다.
‘나는 깡그리 잊어버리고, 황태자만을 바라보고 있구나.’
세르는 라온텔이 미웠다. 하지만 친구였다.
그녀는 라온텔이 자신을 기억해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목이 터져라 그녀를 부르고, 과거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마침내 라온텔도 세르를 기억해 냈다. 그리고 봉인을 풀어주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너무 늦었잖아! 언제나 내 곁에 있겠다고 했잖아! 친구라고 했잖아!”
“미안. 세르. 미안해.”
그녀는 세르에게 사과했다.
“나빠! 정말 미워. 내가 얼마나 외쳤는데, 계속 구해달라고 했는데, 너무해. 미워. 미워!”
세르는 천 년 만에 만난 친구에게 서러움을 토해냈다. 하지만 라온텔의 잘못이 아닌 건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구해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이건 전부 필립의 탓이다. 그리고 그의 후손, 그가 세운 나라의 잘못이었다.
전부 없앨 거다. 모두 없애고 라온텔과 둘만 남을 거다. 다른 건 필요 없다.
모두 없애고 복수하는 거다.
“세르, 그러지 마. 복수를 위해 죄 없는 사람을 죽여서는 안 돼.”
하지만 라온텔은 세르를 말렸다. 자신의 편이 되어주기는커녕 필립이 세운 더러운 제국과 제국민의 편을 들었다.
세르파니아는 배신감을 느꼈다.
‘결국 내가 아니라 필립을 택한 건가? 필립의 나라와 후손이 나보다 더 중요한 거야? 아니, 그보다는 황태자 때문인가?’
황태자, 그래, 저 황태자가 문제였다.
락슐이 라온텔을 유혹한 것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필립이 갑자기 변한 것도 황태자 때문이다. 그 락슐만 없었다면, 필립은 그런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을 거다.
락슐을 이기려면 자신이 황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거겠지. 그래서 나를 배신하고 수많은 사람을 무고하게 죽인 거다.
모든 게 저 황태자 때문이다!
천 년 만에 환생한 라온텔이 자신의 말을 듣지 못했던 것도 전부 황태자의 탓이다. 그에게 빠져서 내 말을 듣지 못한 거다.
알량한 사랑에 빠져서 나를 버리려는 거다. 친구인 나를!
필립에게 배신당하고 어둠의 문에 천 년 동안 갇혀 있으면서, 세르파니아의 정신은 완전히 무너졌다.
게다가 유일하게 믿고 있던 라온텔이 제게 동의하지 않자 분노에 휩싸여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황태자가 소중하면 대신 네 목숨이라도 내놓든가!”
악을 쓰는 세르를 향해 라온텔, 아니 앤시아가 말했다.
“나를 죽여. 대신 블레이크는 건들지 마.”
그 순간 화산처럼 거대한 분노가 세르를 휘감았다.
“그럼 죽어!! 네가 대신 죽어버려!! 너만 믿었는데. 천 년 동안 오직 너만 그리워했는데!!!”
화가 났다. 그녀가 자신의 복수를 막는 것보다도, 황태자를 위해서 죽겠다고 하는 말에 화가 났다.
‘황태자 때문에 나를 떠나겠다는 거야? 네가 죽으면 나는 어떻게 되는데? 천 년을 기다렸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내 곁을 떠나겠다고?’
세르는 앤시아를 공격했다. 라온텔의 환생인 앤시아에게는 자신이 준 빛의 힘이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막을 거라고 생각했다.
황태자를 위해서 정말로 죽을 리가 없다. 사랑은 그렇게 하찮은 거다. 자신의 목숨 앞에서 아무런 가치도 지니지 못한다.
앤시아가 그 사실을 깨닫길 바랐다. 자신처럼 멍청한 후회를 하지 않길 바랐다.
하지만 앤시아는 세르의 공격을 막지 않고 그대로 받아내었다.
“라, 라온텔…?!”
세르는 당황하며 공격 마법을 거두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내가 라온텔을 죽인 거야?’
세르가 털썩 주저앉는데, 앤시아가 찬 팔찌에서 하얀빛이 나오기 시작하더니 그녀의 몸을 덮었다.
팔찌가 지닌 힘이 그녀를 지켜준 것이다.
“라온!”
세르는 황급히 앤시아에게 달려갔다.
“라온, 안 돼. 안 돼!”
팔찌의 힘이 그녀를 보호했다고는 하나, 공격을 완벽하게 막은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심장 박동이 희미했다. 아직 숨이 붙어 있었지만 이대로는 얼마 버티지 못할 거다.
세르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자신의 몸과 앤시아의 몸을 바꾸었다.
세르의 몸은 여신의 영혼을 담았던 그릇이었다. 어리석은 주인 때문에 병들고 다치고 상처만 받은 이 가련한 몸뚱이는 그래도 여신의 영혼 덕분에 지금껏 버텨왔다.
세르의 영혼이 빠져나간 이상 이 육체는 얼마 버티지 못할 거다. 길어야 백 일 정도밖에 살지 못하겠지.
하지만 지금 당장 죽어가고 있는 앤시아의 몸보다는 나았다.
아무리 빛의 여신이라 한들 오랜 봉인에서 탈출한 직후였다.
몸도 마나도 회복되지 않았고, 정신 또한 무너져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무리하게 앤시아와 자신의 몸을 바꾸었다.
게다가 인간의 육체를 차지하는 건 금기에 가까운 마법이었다.
의도가 선했기 때문에 영혼은 부서지지 않았지만, 그녀의 정신과 감정, 기억들은 깨진 유리처럼 마구 조각났다.
사랑, 연민, 분노, 증오, 우정, 동정, 그리움, 외로움, 절망, 미안함.
모든 것들이 부서졌다. 과거의 기억 또한 희미해졌다.
가뜩이나 위태로웠던 세르파니아의 정신이 완전히 붕괴되고 있었다.
세르는 자신의 그릇 안으로 들어간 앤시아를 바라보았다.
이대로 가면 그녀에게, 자신의 하나뿐인 친구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조각난 기억과 바스러져 가는 감정이 어떤 식으로 뻗어 나갈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곳은 오직 세르를 봉인하기 위해 필립이 만들어낸 공간이었다.
봉인이 풀림과 동시에 어둠의 문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앤시아를 지키기 위해서는 자신에게서 떨어트려야 했다. 그리고 이곳에서도 빠져나가야 한다.
세르는 간신히 정신을 붙잡으며, 찢기고 망가져서 화상 흉터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옷을 깨끗하게 고쳐주었다.
그리고 앤시아를 어둠의 문밖으로 내보냈다.
어둠의 문은 바깥의 세상과 시간과 흐름이 달랐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고 아예 다르게 비틀린 공간이었다.
지금 내보내도 세상 밖으로 나가는 건 언제가 될지 모른다.
하지만 자신의 옆에 있는 것보다는 안전하겠지.
***
세르는 앤시아를 어둠의 문밖으로 내보낸 뒤, 자신도 떠났다.
여신의 영혼과 마나로 인해 앤시아의 육체는 점차 회복되어 갔다. 하지만 바스러져 버린 세르파니아의 정신과 기억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미워. 미워. 미워!’
앤시아에 대한 원망이 세르를 가득 채웠다.
밉다. 내가 아닌 다른 남자를 택한 라온텔이 밉다. 나를 버리고 죽으려 한 라온텔이 밉다.
그리고 걱정되었다.
라온텔도 자신처럼 될 거다. 처절하게 이용당하다가 버림받을 거다.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 죽느니만 못한 삶을 살지도 모른다.
서늘한 공포가 그녀를 휘감았다.
안 돼. 그건 안 된다.
살아야 해. 살려야 한다. 하나뿐인 친구를 구해야 한다. 라온텔이 깨닫게 도와줘야 한다.
사랑이 얼마나 부질없고 허무한 것인지 알려줘야 한다.
천 년 동안 세르파니아를 담았던 육체는 너덜너덜하게 망가져서 목소리를 잃었다. 하지만 그녀는 고쳐주지 않았다.
앤시아에게 주었던 축복도 돌려주지 않고 빛의 힘도 모조리 거두었다. 앤시아의 육체가 다시 건강을 되찾았지만 일부러 차지하고 있었다.
‘이건 모두 라온텔을 위한 거야. 하나뿐인 친구를 위해서라고. 라온텔도 결국 나를 이해해줄 거야.’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앤시아가 된 라온텔은 세르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의 충고를 무시하고 황태자를 택했다.
황태자 또한 앤시아를 외면하지 않았다. 추하고, 말도 못 하고, 빛의 힘을 잃어버려서 쓸모없어진 그녀를 첫눈에 알아보고선 아껴주었다.
‘왜? 왜? 도대체 왜? 어째서?’
세르는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혼돈 끝에 그녀가 간 곳은 리차드의 곁이었다.
어째서 이곳으로 온 걸까? 스스로도 그 답을 알 수 없었다.
리차드는 필립의 환생일 뿐만 아니라, 얼굴마저 닮았다.
희한하고 천박한 색이라며 그토록 싫어했던 은발 머리가 젤칸 제국의 황족과 같은 검은색 머리로 바뀌었을 뿐, 외모는 천 년 전과 똑같았다.
리차드는 세르에게 친절했다. 하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잘해줄수록 짙은 공허함에 사로잡혔다.
앤시아를 구할 때 붕괴됐던 정신이 회복되기는커녕 오히려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왜지? 내가 왜 어둠 속에 갇혔었지? 필립이 나를 왜 배신했지? 내가 추했기 때문인가? 맞아. 내가 반점이 생겼을 때부터 필립이 변했었어. 라온텔은 예뻤지. 환생한 지금도 아름답고. 그래서 좋아하는 건가? 그런 건가?’
모르겠다. 아무것도 모르겠다. 이제는 과거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조차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슬프고 비참해서, 하나뿐인 친구가 자신과 같은 길을 걸어가는 걸 막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얼마 안 가 리차드는 본색을 드러냈다. 세르에게 어쭙잖은 사술을 건 뒤, 손에 독약을 쥐여준 것이다.
“우리가 함께하기 위해서는 황태자를 죽여야 해.”
그는 또 세르를 이용하려 했다. 자신이 앤시아의 얼굴을 하고 있어도 변하지 않고,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해댔다.
세르는 인간이라는 생명체에 환멸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는 사술에 걸린 척하며, 리차드가 시키는 대로 황궁으로 갔다.
인간은 탐욕스럽고 보이는 것에 집착한다. 황태자도 그러겠지. 진짜 앤시아와 똑같은 외모의 여자가 나타나면, 황태자도 결국 넘어오고 말 거다.
‘자신을 버리고 가짜인 나에게 빠진 황태자를 보면 라온텔은 무슨 생각을 할까?’
절망에 빠질 그녀를 생각하면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처참하게 버림받으면 그녀도 현실을 깨달을 거다.
하지만 황태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왜지?
세르는 필립이 자신에게 했던 대로 했다.
황태자와 주변 사람들을 이간질하고, 오직 그만을 좋아하는 척 어필했다.
앤시아의 몸을 차지한 자신은 무척 아름다웠다. 하지만 황태자는 그녀를 바라봐주지 않았다. 외모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진짜 연인을 정확히 찾아내었다.
심지어 앤시아를 살리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바치겠다고 했다.
세르파니아는 황태자가 했던 질문을 다시 떠올렸다.
“내가 저주에 걸린 채 죽었다면, 그랬다면 당신의 원한이 풀렸을까?”
과거의 일들을 떠올리고, 질문을 계속 되새겨봐도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모른다. 아무것도 모르겠다. 내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블레이크의 목소리가 다시금 그녀의 귓가에 메아리쳤다.
“당신이 그렇게나 고통스럽게 외쳤는데, 잊어버렸어. 당신을 기억하지 못해서,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해.”
“정말로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세르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래, 나는 그 말이 듣고 싶었다.’
필립에게 사과받고 싶었다. 그가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사과하길 원했다.
필립이 이 세상에 없다면 리차드에게라도 그 말이 듣고 싶었다.
세르는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처절하게 무너져 내린 그녀를 위로하듯 작은 빛들이 유영했다.
그것은 한때 마쿨이라 불린 존재, 빛의 조각, 그리고 그녀의 힘이자 기억, 정신의 파편들이었다.
필립에게 봉인당했을 때 빠져나오기 위해 발버둥 치다가 일부가 떨어져 나갔고, 앤시아를 구하기 위해 몸을 바꾸며 또다시 수많은 조각이 흩어졌었다.
세르가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자, 산산이 부서졌던 빛의 조각들이 다시 그녀의 안으로 흘러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 중 가장 큰 조각을 차지하였던 쉘은 그녀에게 흡수되지 않은 채, 날갯짓하며 커다란 원을 그렸다.
그러자 원의 크기만큼 공간이 생성되며 아모리아궁의 모습이 펼쳐졌다.
블레이크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세르가 준 약을 앤시아에게 먹였다. 자신의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두려운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오직 앤시아를 구하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세르파니아의 눈에서 눈물이 후두두 쏟아져 내렸다.
사과받고 싶었다. 용서하고 싶었다. 복수가 아니다. 모두를 죽이고 싶지도 않았다.
세르파니아가 진정으로 원한 것은 용서와 사죄였다.
필립을 용서하고 싶었다. 추악한 인간에게 속아 힘을 넘겨, 그로 인해 무고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게 한 잘못을 빌고 싶었다.
그래서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사실 알고 있었다. 라온텔과 황태자는 자신들과 다르다는 것을.
사랑이 얄팍한 게 아니다. 애초에 필립과 자신의 관계는 사랑이 아니었다. 그러니 같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사랑이고 나는 아니다. 그 차이를 인정할 수 없어서 어린애처럼 떼를 쓰고 우겼을 뿐이다.
하나뿐인 친구를 지키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그녀 역시 나와 같다고, 진실한 사랑 같은 건 없다고 폄하하며 나와 같은 구렁텅이 속으로 끌어내리고 싶었을 뿐이다.
전부 알고 있었다.
잘못한 사람은 필립이다. 그에게 속아서 악인에게 힘을 넘겨준 내 잘못이었다.
죽인다고 말은 했지만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블레이크가 가지고 있는 힘을 다시 거두지도 못했다.
귀찮으니 내버려 둔 것뿐이라며 자기합리화를 했지만, 사실은 저주로 인해 그가 겪은 고통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대로 남겨둔 것이다. 그렇게라도 속죄하고 싶었다.
쉘을 마지막으로 흩어졌던 빛의 조각들이 모두 그녀의 안으로 들어왔다.
세르파니아는 기억을 찾았다. 무너졌던 감정과 정신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녀는 일어나지 못했다.
“미안해. 미안해. 라온. 미안해.”
***
“미안해. 미안해….”
어디선가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건 세르의 목소리였다. 나는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쪼그려 앉은 채 서럽게 울고 있는 세르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에게서 광기나 고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천 년 전의 그때처럼 천진하고 맑았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세르….”
“라온,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그녀는 사과했다. 세르의 왼쪽을 뒤덮었던 화상 흉터가 사라져 있었다. 얼굴도 목소리도 표정도 옛날과 똑같았다.
“괜찮아. 아픈 건 다 나은 거야? 정말 잘됐다. 다행이야.”
“으아앙. 라온. 라온….”
나는 아이처럼 엉엉 우는 세르를 꼭 안아주었다.
“세르, 울지 마.”
“미안해. 미안해.”
그녀는 계속 사과했다. 미안하다는 말밖에 모르는 사람처럼 사과를 멈추지 않았다.
세르는 진심으로 나에게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 그녀의 작은 몸에 고통과 외로움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세르, 나는 언제나 너의 편이야. 우린 영원히 친구야.”
“…고마워. 정말 고마워,”
세르는 울먹이며 나의 품에 안겼다.
“나는, 나는 그런 짓을 했는데…. 미안해. 미안해.”
그리고 다시 사과하고 또 사과했다.
***
나는 세르의 꿈을 꾸었다.
세르는 나에게 미안하다며 계속 사과했다. 꿈에서 깬 지금도 그 목소리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마치 꿈이 아니라 현실 같았다.
천천히 눈을 뜨자 따사로운 아침 햇살과 함께 낯익은 풍경이 보였다.
이곳은 아모리아궁이었다.
내가 왜 이곳에서 자고 있었던 거지…?
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블레이크는 내가 앤시아라는 걸 알아보았다. 우리는 입을 맞추었다. 나는 블레이크에게 많은 말을 하고 싶었다.
그가 보고 싶었다고, 그리웠다고 내 마음을 전하려고 했다. 하지만 갑자기 열이 오르며 의식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블레이크가 걱정을 많이 했을 거다. 그에게 괜찮다고 말해야 한다.
서둘러 몸을 일으키는데, 바닥에 쓰러져 있는 블레이크의 모습이 보였다.
“블레이크!”
나는 화들짝 놀라서 그에게 다가갔다. 목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지금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다급히 그를 끌어안았다.
“블레이크! 블레이크!”
어째서 그가 여기 쓰러져 있는 거지? 블레이크를 깨우려고 하는데, 그의 옆에 있는 약병이 눈에 들어왔다.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공간 속에서 세르는 나에게 사과했었다.
설마 내가 쓰러진 사이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락슐에 이어 블레이크마저 잃어버리는 거야?
“블레이크! 일어나요! 일어나! 제발, 제발 일어나! 눈을 떠!”
나는 간절하게 소리쳤다.
내가 죽는다고 생각했을 때도 솔직히 무서웠다.
하지만 블레이크를 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그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공포가 엄습했다. 숨이 막히고 전신의 피가 타서 녹아버릴 것만 같았다.
절박하게 그의 이름을 부르며 애원하는데, 따뜻한 손이 나의 얼굴을 감쌌다.
“왜 또 울고 있어?”
어느새 깨어난 그가 손으로 나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블레이크, 괜찮아요? 왜 쓰러졌어요. 어디 아파요?”
“울지 마. 아무렇지도 않아. 침대에서 자다가 떨어진 것뿐이야.”
“네?”
침대에서 떨어졌다고? 그럴 리가?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서 그를 가만히 바라보자, 블레이크가 피식 웃으며 나를 끌어안았다.
“오랜만에 부인이랑 잤더니 너무 긴장됐나 봐.”
“그게 정말이에요?”
“응.”
그가 나의 손에 입을 맞췄다. 블레이크의 입술이 닿은 손이 아무런 상처 없이 깨끗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흉터가 어디 갔지?
그러고 보니 쓰러진 블레이크를 보고 너무 놀란 나머지 그냥 지나쳤지만, 목소리도 또렷이 나왔다. 게다가 머리카락도 금색이었다.
나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금발에 페리도트색 눈동자를 지닌 여인이 있었다.
저건 나다. 원래 나의 몸으로 돌아온 것이다.
“블레이크…. 저 돌아왔어요.”
“너무 늦었잖아.”
그는 미소 지었다. 하지만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금방이라며. 금방 돌아온다고 했잖아.”
“미안해요.”
드디어 돌아왔다.
여길 떠난 지 7년 만에 몸도 영혼도 완전히 돌아온 것이다.
그는 나를 다시 끌어안았다.
나도 그의 품에 안겨서 눈물을 터트렸다.
***
우리는 침대 위에서 한참이나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어렸을 때는 그가 나의 품에 쏙 들어왔었는데, 이제는 내가 그의 품에 폭 들어갔다.
“미안해. 좀 더 일찍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는 또다시 사과했다.
“알아봤잖아요.”
블레이크는 나를 곧장 알아보았다. 내가 필사적으로 부정하니 잠시 기다려주었던 것뿐이다.
“그래도 미안해.”
“저야말로 미안해요. 일찍 말했어야 했는데.”
“부인이 뭐가 미안해. 그런 말 하지 마. 전부 나 때문에 그랬던 거잖아.”
그는 세르를 만났고, 내가 그동안 겪은 일들을 보았다고 했다.
내가 7년 동안 어둠의 문을 헤맸으며, 그를 구하기 위해 세르의 제안을 거부한 것도 전부 알고 있었다.
내 마음이 무거울까 봐 가벼운 투로 말하긴 했지만 심하게 자책하고 있을 거다.
“그럼 블레이크도 그런 말 하지 말아요.”
“하지만 나는 부인한테….”
그가 다시 자책을 시작하려 했다. 나는 그의 손을 꼭 잡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 이제부터는 서로한테 미안하다고 말하지 마요. 그런 일도 만들지 말아요.”
나는 그에게 사과받고 싶지 않았다. 블레이크는 어떤 잘못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가 사과할 이유도 없었다.
“그래. 그러자.”
내가 워낙 강하게 말했기 때문인지 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블레이크의 팔이 나의 어깨를 감쌌다. 나도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나는 그의 품에 안긴 채 방 안을 둘러보았다.
책장에 있는 책의 제목을 모두 읽을 수 있었다. 제국어는 물론 고대어도 쓰인 책들도 전부 읽혔다.
몸이 가볍고 숨을 쉬는 것도 편했다. 기침도 나오지 않았다.
눈을 감자 나의 몸에 흐르는 빛의 마나가 느껴졌다. 7년 전보다도 훨씬 강하고 생생한 마나였다.
세르는 나에게 빛의 축복을 돌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힘도 나누어주었다.
이제 나는 살 수 있다. 블레이크의 곁을 떠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블레이크, 정말로 괜찮아요?”
“뭐가?”
“쓰러졌었잖아요.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던 거예요?”
나랑 같이 자다가 굴러떨어졌다는 말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쓰러진 뒤 세르를 만나서 약을 받아왔었다는 말까지 듣자, 계속 마음 한편이 불안했다.
세르가 나에게 사과하긴 했지만, 그게 꿈인지 현실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게다가 우리의 관계와 상관없이 그녀는 블레이크를 좋아하지 않았다.
“실은 꿈을 꿨어.”
“꿈이요?”
“응. 빛의 여신이 나타나서 너를 부탁했어.”
세르가 블레이크한테 나를 부탁했다는 건가? 우리 두 사람의 꿈에 동시에 나온 걸 보면, 역시 단순한 꿈이 아니었던 거다.
“자기 대신 너를 평생 지켜달라고 했어. 혹시라도 한눈팔면 그때는 정말로 죽일 거래.”
“그때는 정말로 죽인다니요? 역시 무슨 말을 했던 거죠?”
블레이크의 목숨을 내놓으라고 한 거 아닐까? 결국은 마음을 바꿨지만, 그 전에 협박했을지도 모른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자세한 상황을 물으려 하는데, 블레이크가 배시시 웃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 부인한테 잘해주라고 신신당부했을 뿐이야.”
“정말이죠?”
“응. 바람피우지 마라, 마음고생시키지 마라, 외롭게 하면 안 된다. 부인을 울리면 빛의 힘을 모조리 뺏어 갈 테니 그리 알아라, 라고 하던데?”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정말로 세르가 할 법한 말이었다.
맑고 밝았던 나의 친구 세르파니아로 돌아왔구나. 그리고 그녀는 우리의 사이를 응원해주고 있었다.
“나한테 잘해야겠네.”
내가 농담을 던지자, 그가 나의 손을 꼭 잡았다.
“귀찮을 정도로 잘할 거야. 이제 이 손을 절대로 놓지 않아. 영원히.”
그의 손가락이 나의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며 굳게 깍지를 끼더니 절대로 풀지 않을 것처럼 단단히 붙잡았다. 나도 힘을 주어 그의 손을 맞잡았다.
나 역시 이 손을 놓지 않을 거다.
“사랑해요.”
로즈로 지내는 동안 꼭 하고 싶었던 말을 수줍게 속삭였다.
목소리를 잃고 금제에 걸리며 영영 할 수 없을 줄 알았던 그 말을 이제 할 수 있게 되었다.
나의 고백에 놀랐는지 블레이크는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내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뭐라고? 잘 못 들었는데.”
“…….”
하지만 예쁜 미소와 달리 입으로 나온 말은 얄미웠다.
이래서 사람이 착하게 살아야 하나 보다. 어렸을 때 그를 놀렸던 말들이 고스란히 나에게 돌아올 줄이야.
“…랑한다고요.”
다시 말하려니 부끄러워서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짧게 말해줘.”
“…….”
“앤시아, 어서.”
그의 손가락이 나의 아랫입술을 느리게 문질렀다. 장난스러운 표정은 어느 순간 사라지고, 매혹적인 야수가 되어 있었다.
나는 그가 이끄는 대로 대답했다.
“사랑해.”
그 순간 입술이 겹쳐졌다. 어제와는 또 다른 달콤한 입맞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