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미남과 괴물
아프다. 전신이 부서질 듯이 아파서 숨을 쉬는 것조차 괴로웠다.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렸다.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가 없었다.
나는 죽은 건가? 정말로 죽어버린 건가?
그때 저벅저벅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무겁게 가라앉은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그 순간 너무나도 밝은 빛이 쏟아졌다. 마나가 아니라 순수한 자연의 빛이었다.
강렬한 태양 빛을 느끼며 생각했다. 나는 죽지 않았구나. 살아남았어…. 그리고 어둠의 문에서 빠져나왔다.
오랜만에 보는 태양이 눈 부셨다. 그리고 밝은 빛 사이로 한 남자의 인영이 보였다. 빛이 반사되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블레이크….’
앞에 서 있는 남자가 블레이크라는 걸 깨닫는 순간 긴장이 풀리며 의식이 멀어졌다.
***
따스한 빛이 몸 안으로 흘러들어 오고 있었다. 그러자 전신이 타들어 갈 것 같은 고통이 점차 옅어졌다.
봄볕이 내리쬐는 초원에 누운 듯 평화로운 기분이었다. 이게 얼마 만이지?
어둠의 문에 떨어진 뒤, 칠흑 같은 암흑 속을 계속 헤맸다. 지치고 괴로웠던 몸이 서서히 치유되는 것 같았다.
나는 따스함에 취해 천천히 눈을 떴다. 그 순간 붉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
누구지? 어둠의 문에서 나왔을 때 보았던 사람이었다. 나는 그가 블레이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은발 머리, 커다란 눈, 붉은 눈동자, 티끌 하나 없는 새하얀 피부, 그림으로 그린 듯이 비현실적이고 아름다운 얼굴. 분명 많이 닮았지만 블레이크는 아니었다.
그는 남자였다. 귀여운 소년이 아니라 키가 훤칠하고 선이 날카로운 성인 남자였다. 그러니 블레이크일 리가 없었다.
“깨어났군.”
목소리도 낮았다. 변성기를 완전히 지난 남자의 목소리가 락슐과 비슷했다.
설마 저 남자가 블레이크인 건 아니겠지? 외모는 분명 블레이크와 닮았다. 하지만 남자는 성인인 데다가 분위기도 완전히 달랐다.
그의 눈동자는 공허함에 사로잡혀 있었다. 게다가 서늘한 허무감 속에 퇴폐적인 분위기가 흘렀다. 마치 원작에서 묘사되었던 블레이크처럼 말이다.
설마…. 머릿속이 혼란스러운데, 천막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갈색 머리카락에 서글서글한 인상의 사내는 바로 에드온이었다.
“전하.”
에드온이 은발 머리 남자에게 말했다.
‘전하라고…?’
에드온이 그를 전하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이 남자가 정말로 블레이크라는 건가?
나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과 손 어디에서도 저주의 문장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정말로 저주가 완전히 풀렸구나. 그럴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저주에서 벗어나 건강한 블레이크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깨어났군요?”
에드온이 나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그가 반가웠다. 하지만 에드온은 무심하게 시선을 돌리며 블레이크에게 말을 건넸다.
“그럼 이만 출발하시죠. 시간을 너무 지체하였습니다.”
왜지? 어째서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거지?
‘에드온!’
나는 그의 이름을 부르려 했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목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손을 올리는데, 왼손에 있는 화상 흉터가 보였다.
흉터? 나는 다급히 머리카락을 확인했다. 금발이 아니다. 머리색이 세르처럼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아니, 색이 변한 게 아니었다. 이건 세르타니아의 몸이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어째서 세르의 몸인 거지? 도대체 왜?
“재촉하지 말 거라.”
“재촉이라니요? 벌써 9월입니다. 혼돈의 계곡에 머무신 지 석 달이 훌쩍 지나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이번에는 어둠의 문이 없어진 걸 확인하기 위해 들른 것이 아닙니까? 하루속히 환궁하여 보고를 올리셔야 합니다.”
세르의 봉인이 풀리며 어둠의 문도 사라진 건가? 그럼 세르도 떠난 걸까?
블레이크나 다른 사람들은 모두 무사했다. 세르는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켜준 모양이다.
“그리 급하면 파발을 보내서 보고해.”
“곧 건국기념일입니다. 제국이 건국된 지 천 년을 맞이하는 중요한 날입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자리를 빛내주셔야죠.”
지금은 제국력 1000년이었구나. 그렇다면 블레이크는 18살, 나는 20살이 되는 해였다. 내가 어둠의 문에 들어간 뒤로 벌써 7년이란 세월이 흐른 건가?
“폐하가 계시는데 나까지 있을 필요 없다.”
블레이크가 무성의하게 답하자 에드온이 야트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
“…전하, 이제는 잊으실 때도 되지 않았습니다. 비 전하께서도 그걸 원하실 겁….”
에드온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날카로운 칼날이 번뜩였다. 블레이크가 검을 꺼내서 에드온의 목에 겨눈 것이다.
“에드온, 아무리 그대라도 해서는 안 될 말이 있다.”
나는 충격을 받았다. 블레이크가 사람을 향해 칼을 뽑아 들다니. 그에게서 살벌한 냉기가 뚝뚝 흘러넘쳤다. 게다가 그 상대가 무려 에드온이었다.
하지만 놀라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다급히 블레이크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자 블레이크의 붉은 눈동자가 나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나는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화가 났다지만 이런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내가 꾸짖듯 다시 고개를 젓자, 검을 든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그 순간 에드온이 버럭 소리쳤다.
“무엄하다! 감히 전하의 몸에 손을 데다니!”
그는 블레이크에게서 나를 떨어트렸다.
“전하, 송구합니다. 이 자는 제가 단단히 교육하도록 하겠습니다.”
에드온은 황급히 머리를 숙였다. 내가 무례를 저질렀다는 것 자체에 화가 난 것이 아니라, 블레이크의 심기를 거슬렀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궁인들이 숱한 무례를 저질러도 모르는 척 넘어갔던 블레이크였다. 그랬던 그가 달라진 걸까?
블레이크를 올려 보는데, 그가 나의 팔을 잡으며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전하!”
“이만 물러가거라.”
“아무것도 모르는 여인입니다.”
“알아. 얘기를 나누려는 것뿐이니 나가봐.”
에드온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결국 고개를 숙였다.
“하면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가 천막을 나가자, 짙은 적막이 찾아왔다.
블레이크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하는데, 그가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너는 누구지?”
붉은 눈동자가 나를 직시했다. 어렸을 때와는 다른 강렬한 눈빛에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너는 나를 알고 있었어. 그리고 에드온도.”
“…….”
내가 바로 앤시아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커다란 돌멩이가 목구멍에 걸린 듯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입도 벌어지지 않았다.
“말을 하지 못하는 건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된 일인지는 모르지만 지금 나의 영혼이 세르의 몸 안으로 들어온 상태였다. 그러면서 말도 할 수 없게 된 것 같았다.
“그럼 네 이름을 써봐.”
블레이크는 자신의 손바닥을 펼쳤다. 하얀 솜뭉치처럼 작고 말랑말랑했던 귀여운 손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손가락이 길고 뼈마디가 굵은 남자의 손이 자리하고 있었다. 신비롭고 아름다운 외모와 달리 손은 다부지고 거칠었다.
블레이크는 나의 손을 자신의 손바닥으로 가져갔다. 손가락으로 글씨를 써보라는 것 같았다.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검지를 뻗어서 그의 손바닥 위에 올렸다.
그 순간 그대로 굳고 말았다.
글자가 떠오르지 않았다. 제국어뿐만이 아니었다. 고대어나 창국의 글자는 물론이고 심지어 한글조차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글도 모르는 건가?”
블레이크의 목소리에 실망감이 느껴졌다.
아니다. 이럴 리가 없다. 쓸 수 있을 거다. 하지만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어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말을 할 수 없게 되었을 뿐 아니라, 언어 능력마저 사라졌다. 여신의 축복이 아니라 내 힘으로 익힌 글자도 쓸 수가 없었다.
패닉에 빠져서 그대로 굳어 있는데, 블레이크가 나의 손을 잡으며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괜찮다. 이제 막 깨어나서 기억이 안 나는 걸 거야. 괜찮아.”
자상한 그의 목소리가 어렸을 적의 블레이크와 같아서 울컥 눈물이 치밀었다. 나는 이를 악물며 떨어지는 눈물을 참았다.
***
블레이크는 놀란 나를 위로해준 뒤 천막을 떠났다. 그를 위로해주는 건 나의 몫이었는데, 정말로 많은 시간이 흘렀구나….
칠흑 같은 어둠 속을 헤매고 또 헤맸다. 그것이 단 하루의 시간이었다고 해도 받아들일 수 있었고, 천 년의 시간이었다고 해도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모호했다. 현실이 아닌 꿈이라고 해도 놀라지 않을 거다.
물통에 담긴 투명한 물에 얼굴을 비춰 보았다. 빛처럼 하얀 머리카락, 푸른 눈동자, 왼쪽 얼굴에 가득한 화상 흉터. 역시 이건 세르의 몸이었다. 육체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발목까지 내려오는 스커트를 바라보았다. 이 역시 세르의 옷이었다. 하지만 조금 달랐다. 그녀의 옷은 불에 타서 너덜너덜했고 팔과 다리가 훤히 드러났다.
하지만 지금 입고 있는 옷에는 어떤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소매도 길었고, 스커드도 멀쩡했다. 아마도 그녀가 고친 거겠지.
어째서 나의 영혼이 세르의 몸에 들어온 걸까? 게다가 말을 할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니.
나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하지만 마나의 흐름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세르의 봉인을 풀며 각성했던 빛의 힘은 물론이고 앤시아가 지니고 있었던 마나조차 완전히 사라졌다.
어떻게 된 걸까? 그리고 세르는 지금 어디 있는 거지?
빛의 눈물과 결혼반지, 백한이 준 팔찌도 사라져서 수중에 아무것도 없었다. 팔찌는 세르의 공격을 받으며 부서졌다지만, 다른 것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세르가 가지고 있는 걸까?
질문이 꼬리의 꼬리를 물고 이어질 뿐 명확한 답이 나오지 않아 답답했다.
그때 눈앞에서 작은 빛이 피어오르더니 손가락만 한 크기의 소녀가 나타났다. 그녀의 등에서 투명한 날개가 반짝거렸다.
‘요정?’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내 생각을 읽은 건가?
소녀는 유영하듯 우아한 몸짓으로 날갯짓을 하며, 나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그녀의 움직임과 몸에서 흐르는 하얀 빛이 어딘지 낯이 익었다.
혹시…?
‘마쿨?’
[어!]
소녀는 깜짝 놀라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녀가 내 생각을 읽었듯 나도 소녀의 소리가 들렸다.
[아아, 모를 줄 알았는데!]
소녀는 다소 풀이 죽어 보였다.
‘정말로 마쿨이야?’
[네. 이렇게 예뻐졌는데, 어떻게 알아본 거죠?]
소녀의 입술이 뾰로통하게 튀어나왔다. 정말로 예뻐지긴 했다. 아니, 아예 달라졌다. 콩나물이 소녀로 변하다니.
‘나는 게 비슷해서.’
[역시 라온텔 님은 예리하네요.]
‘지금은 앤시아지만.’
[라온텔 님은 여신님의 친구죠. 하지만 앤시아는 아직 친구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라온텔 님이에요.]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세르파니아가 보낸 거니?’
[네. 저는 여신님의 빛의 조각이에요! 이름은 ‘쉘’이고요!]
마쿨은 단순한 마물이 아니라, 세르가 지닌 힘의 일부였구나….
‘마쿨은 늪지대에서 태어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에요! 어둠의 문은 너무 더우니까 거기서 휴식을 취한 것뿐이라고요!]
‘그랬구나.’
[여신님의 봉인이 풀리면서 원래 모습을 찾았어요! 감사해요.]
그녀는 활짝 웃으며 다시 날갯짓을 했다. 즐거워 보여서 나까지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마음이 놓였다. 쉘이 저렇게 웃는 걸 보니, 세르도 분명 무사할 거다.
춤을 추듯 주변을 맴돌던 쉘이 갑자기 움찔 떨더니 땅으로 내려왔다. 조금 전과 달리 비장한 표정이었다.
[오늘은 세르파니아 님의 말을 전하려고 왔어요.]
쉘이 빙그르르 돌자,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선이 그어지며 반짝이는 빛의 공간이 생성되었다. 그리고 투명한 공간 너머에서 세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앤시아, 버림받은 기분이 어때? 그렇게 헌신했는데, 사랑하는 황태자님은 너를 알아보지도 못했어.]
‘역시 네가 한 거구나?’
나는 여신의 축복으로 인해 이 세상의 모든 언어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언어 능력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여신의 축복을 다시 거두어 갈 수 있는 건 오직 여신뿐이었다.
[그럼 누가 그랬겠어.]
세르는 ‘큭큭’ 낮은 웃음을 흘렸다. 예전의 그녀에게서는 한 번도 들을 수 없었던 비틀린 웃음소리였다.
[황태자한테 실망했겠네. 얼굴이 바뀌고 말과 글을 쓰지 못하는 것뿐인데도 너를 알아보지 못했잖아. 네가 믿는 사랑이란 건 이렇게 얄팍한 거야!]
‘왜 이런 짓을 했지?’
[라온텔, 뭘 화를 내는 거야? 나는 너를 위해서 그런 거야. 네가 정체를 밝히면, 황태자가 좋아할 거 같아? 얼굴도 흉측하고 말도 못 하고 글자도 모르는 무식한 너를 사랑해줄 것 같냐고? 빛의 힘도 잃고 아무런 이용 가치도 없는 너를 예전처럼 좋아해 줄 리가 없잖아.]
‘…….’
[네가 진짜 앤시아라는 걸 안 순간 버릴걸. 추악하게 변한 너 같은 건 잊고 다른 아름다운 여자를 만나겠지. 종국엔 너라는 존재조차 잊을 거야!]
세르는 재밌다는 듯 깔깔거렸다. 그 웃음소리가 섬뜩했다.
나는 반박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앤시아라는 걸 알면 블레이크가 기뻐할까? 싫어하면 어떡하지?
두렵고 자신이 없었다. 마음속이 점차 불안한 어둠으로 물들어 가는데, 세르가 유혹하듯 속삭였다.
[라온텔, 친구로서 너에게 마지막 기회를 줄게.]
‘기회?’
[그래, 네가 모든 걸 되찾을 기회.]
빛의 공간 너머에서 새하얀 검이 나타났다. 나는 그 검을 받았다. 검 자루는 물론이고 날 부분까지 새하얀 단검이었다. 하지만 하얗다고 해서 깨끗하지는 않았다.
검날에 얼룩처럼 뒤틀린 문양이 새겨져 있어서 마치 악마의 검으로 불리는 다마스커스 같았다.
[이 검으로 블레이크의 심장을 찔러.]
‘뭐?’
나는 깜짝 놀라서 칼을 떨어트렸다.
[황태자의 피로 그 검을 적신다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올 거야. 너의 아름다운 육체, 목소리, 언어 능력, 빛의 힘, 모든 것을 되찾을 수 있어!]
‘…….’
나는 땅에 떨어진 검을 집었다.
[그래, 죽여! 죽이는 거야! 황태자를 없애고 다시 나의 친구로 돌아와, 라온텔!]
세르의 광기에 젖은 웃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하얀 단검을 빛의 공간으로 집어넣었다. 그 순간 그녀의 웃음도 멈췄다.
[뭐야?]
‘필요 없어. 가져가.’
[평생 그 몸으로 살겠다고?]
‘그래.’
몸을 되찾자고 블레이크를 죽일 수는 없었다. 이건 생각할 가치도 없는 문제였다. 하지만 단검은 빛의 공간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흐흐, 그 육체는 얼마 버티지 못할 텐데?]
‘뭐…?’
[아무리 길어도 백 일을 넘기지 못할 거야.]
앞으로 백 일…. 그녀가 한 말의 무게를 미처 깨닫기도 전에 거센 기침이 차올랐다.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목이 타들어 가고 폐부를 쥐어뜯기는 것만 같았다. 똑바로 서 있을 수도 없어서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시간이 지나 겨우 기침이 멎었지만 목이 찢어진 것처럼 아팠다. 나는 손을 바라보았다. 화상 흉터가 가득한 손에 피가 흥건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세르의 말대로 이 몸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라온텔, 다시 한번 기회를 줄게. 황태자를 죽여!]
투명한 공간으로 집어넣었던 단검이 다시 나의 손에 들어왔다. 하얀 검이 나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원하는 건 이게 아니라는 듯 붉은 액을 뱉어냈다.
단검은 투명한 빛을 유지했고, 흡수되었다가 튕겨 나온 피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붉은 피를 바라보는데, 불현듯 백한의 말이 떠올랐다.
“천성이 착하니 수많은 이를 구하겠지. 그러나 스스로를 구할 수는 없겠지.”
“곧 선택의 순간이 오겠군.”
“모두들 미련하다 노래하겠지만 그대는 기쁨 속에 온몸을 태울 걸세.”
“새하얀 불빛 속에 타들어 가는 그대가 보여.”
이것이 바로 백한이 말했던 선택의 순간이구나.
[황태자를 죽이면 너는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어! 당장 그 검으로 황태자의 심장을 찔러!]
나는 광기에 젖어 소리치는 세르의 말을 무시하며 단검을 다시 빛의 공간으로 집어넣었다.
‘필요 없다고 했잖아.’
[황태자 대신 죽겠다는 거야? 너 바보야? 이렇게 미련했어? 황태자는 너를 잊을 거야! 네가 누구인지 알아도 처절하게 버릴 거라고! 그런데도 고작 그까짓 놈 때문에 네 목숨을 버리겠다고? 모든 걸 포기하겠다고!]
세르의 말대로 나는 지금 미련한 선택을 한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말이 설령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나로 인해 블레이크를 구할 수 있다면, 기쁨 속에 전신을 태울 수 있었다.
이번에는 그를 구하고 싶다.
‘응. 그러니까 가져가.’
나는 아직도 빛의 경계에 걸쳐 있는 단검을 그 안으로 다시 밀어 넣었다.
[후회할 거야!]
악에 받친 목소리와 함께 단검이 빛 속으로 사라졌다.
[어? 어…. 저, 저도 가볼게요!]
서늘한 분위기 속에 딱딱하게 굳어 있던 쉘도 빛의 공간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투명한 빛이 점점 줄어들더니 이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선택은 끝났다. 이제는 되돌릴 수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거다.
손과 얼굴에 묻은 피를 깨끗이 닦고, 바닥에 떨어진 피를 모래로 덮었다. 다행히 옷은 깨끗했다. 정리를 마치고 나자 피로가 몰려들며 잠이 쏟아졌다.
몸이 아프니 조금만 움직여도 피곤했다. 나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
다음 날, 나는 일찍 잠에서 깼다. 다행히 아프지는 않았다. 하지만 천막 밖에서 들리는 소리가 신경 쓰였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몸을 일으키는데, 블레이크가 안으로 들어왔다.
“벌써 일어났어?”
그의 목소리가 어제보다 한결 자상했다. 내가 갑자기 울어서 많이 놀랐나 보다. 그래서 배려해주는 거겠지.
“밖이 시끄러워서 깬 건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환궁할 거야. 돌아갈 준비를 하느라 시끄럽겠지만, 조금만 참아.”
어제는 돌아가지 않을 것처럼 말했는데, 하루 만에 마음이 바뀌었다. 에드온이 잘 설득했나 보다.
“글자는 떠올랐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젯밤에 세르의 제안을 거절하고 단검을 돌려주었다. 이제 다시는 말을 하거나 글을 쓸 수 없을 거다.
“집은 어디지?”
“…….”
“집이 없나?”
이 세계에서 나의 집은 황궁이었다. 블레이크와 함께 지내던 아모리아궁이 내 집이었다.
“가족은?”
“…….”
“이름은 뭐지?”
나는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말을 할 수도 글을 쓸 수도 없었지만, 그 때문은 아니었다.
세르는 만약 블레이크가 내가 앤시아라는 사실을 알아도 나를 버릴 거라고 말했다. 어젯밤에는 세뇌라도 당한 듯 그 말에 흔들렸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블레이크는 석 달 넘게 혼돈의 계곡에 머물렀다고 했다.
에드온이 한 말에서 유추해 봤을 때, 그는 여전히 나를 찾고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어둠의 문 안으로 사라진 지 7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블레이크는 많은 상처를 받았을 거다.
이제 와 내가 나타난들 그의 상처만 덧나게 하는 게 아닐까?
나는 얼마 살지 못한다. 올해를 넘기지 못할 거다. 차라리 이대로 사라지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아무것도 모르는군. 기억을 잃었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설프게 거짓말을 하느니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는 편이 나았다.
그 순간 블레이크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거짓말. 나를 기억하고 있었잖아.”
그의 눈동자가 나를 또렷이 응시했다. 마치 내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흔들림 없는 시선이었다.
“정말로 잊어버린 건가? 아니면 말해주기 싫은 거야?”
아름다운 얼굴 위로 야릇하고 거친 분위기가 흘렀다. 너무나도 달라진 그의 모습이 낯설고 어색했다. 그리고 왠지 모르지만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서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시선을 피하자, 그가 낮은 웃음을 흘렸다.
“그럼 내가 이름을 지어야겠네.”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라고?”
재차 고개를 주억거렸다. 몸 상태가 나빠진 건지 얼굴에 점점 열이 올랐다. 게다가 블레이크의 얼굴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어서 이 대화를 끝내고 싶었다. 그의 앞에서 기침이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내가 아픈 걸 그가 몰랐으면 좋겠다.
“그럼 ‘로즈’로 하자.”
로즈….
블레이크가 나에게 주었던 붉은 장미꽃이 떠올랐다. 왜 하필 장미인 거지? 혹시 나를 알아본 건가?
깜짝 놀라서 올려 보았지만 그의 시선은 건조했다. 로즈는 평범하게 쓰이는 이름이었다. 블레이크는 원래 장미를 좋아하였으니 별다른 뜻은 없을 것이다.
“어때?”
고개를 끄덕였다. 흔한 이름이지만, 그가 부르니 애칭처럼 느껴졌다. 물론 이건 나 혼자 생각이지만 그래도 마음에 들었다.
“로즈, 나는 황궁으로 돌아갈 거야. 그리고 너와 함께 가고 싶어.”
나를 데리고 갈 생각이야? 생각지도 않은 말에 깜짝 놀랐다. 신분은커녕 이름조차 모르는 여자를 황궁으로 데려가겠다고?
“나와 함께 갈 거지?”
블레이크가 눈을 사르르 접으면서 웃었다. 어렸을 때랑 똑같다. 그때는 마냥 귀여웠는데 지금은 조금 야릇한 느낌이 든다는 것 말고는 달라진 게 없었다.
그가 저렇게 부탁하면 거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었다. 나는 얼마 살지 못할 거다. 길어봐야 앞으로 백 일이라고 했다. 그를 슬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블레이크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조용히 삶을 마감하고 싶었다.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몰라서 망설이는데, 에드온이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전하, 여기 계셨습니까?”
“무슨 일이지?”
“대신관 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블레이크는 심드렁하게 물었다. 조금 전에 세상을 홀릴 정도로 예쁘게 웃던 사람과 동일인이 맞는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무심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에드온은 늘 있는 일이라는 듯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전하를 뵙기 위해 직접 걸음을 하신 겁니다. 문전 박대하셔서는 안 됩니다.”
“하여튼 그자는 사람을 귀찮게 하는 재주가 있다니까.”
“전하, 대신관입니다. 말을 조심하십시오.”
“조심할 게 뭐 있어. 싫으면 오지 않으면 되지. 로즈, 잠깐만 기다려.”
그는 건성으로 대꾸하더니, 나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에드온과 나를 대하는 온도 차가 너무 커서 조금 민망했다.
“전하, 혹시 그 여인을 황궁으로 데려가실 생각이십니까?”
“그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집에 데려다주는 것이….”
에드온이 난색을 표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기억을 잃어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신전에 맡기는 것이 어떨는지요?”
나는 깜짝 놀라서 블레이크의 옷깃을 잡았다.
혼돈의 계곡에서 발견한 데다가 신원도 알지 못하는 여자를 갑자기 황궁으로 데려간다고 하니, 기사로서 걱정하는 것이 당연했다.
이해는 하지만 블레이크와 떨어진다고 생각하자 덜컥 겁이 났다. 지금 헤어지면 다신 만날 수 없을 거다.
그를 위해 조용히 죽겠다고 생각했으면서 그새 결심이 흔들렸다. 두려움 감정이 퍼지며 몸이 잘게 떨렸다. 그러자 블레이크가 안심하라는 듯 나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나는 로즈와 함께 황궁으로 돌아갈 거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명을 따르겠습니다.”
블레이크가 단호하게 말하자 에드온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였다.
***
블레이크와 에드온이 떠나고 난 뒤, 나도 천막 밖으로 나갔다.
아침 햇살이 따사로웠다. 7년 만이라 그런지 밝은 햇살과 맑은 공기가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쌀쌀한 가을바람마저 시원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걸음을 옮기는데, 남자들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떠나네. 올해도 꼼짝없이 혼돈의 계곡에서 새해를 맞을 줄 알았는데.”
“그러니까 무슨 바람이 부신 거지? 어젯밤만 해도 여기서 계속 살 것 같았잖아?”
젊은 기사 2명이 팔짱을 낀 채 수다를 떨고 있었다.
“에드온 단장님이 밤새 설득했겠지. 건국 천 년을 기념하는 행사에 황태자가 빠지면, 외국 사절단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
에드온은 기사단의 단장이 되었구나.
기사는 다른 직업보다도 실력이 중시된다고 하지만, 그래도 엄연히 신분의 한계가 존재했다. 평민 출신인 그가 기사단장직에 오른 건 유례없는 출세였다.
“어쨌든 올해의 마지막은 수도에서 보내겠구나.”
“폴, 방심하지 마. 올해 가기 전에 또 올지도 모르니까.”
“아휴, 끔찍한 말 하지 마. 내가 황궁 기사단인지, 혼돈의 계곡 경비대인지 알 수가 없다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5기사단에는 안 왔을 거야.”
제5 기사단은 황태자 직속 기사단이었다. 블레이크가 저주의 계승자가 되며 해산되었다가, 다시 선발한 모양이다.
“그러니까 말이야. 이미 죽은 사람을 몇 년 동안 찾는 거야.”
“살아 있을 수도 있죠.”
옆에서 묵묵히 천막을 정리하던 붉은 머리 청년이 말했다. 그의 모습이 어딘지 낯이 익었다.
“그게 말이 되냐? 어둠의 문으로 떨어졌는데 어떻게 살아?”
“매튜 말이 맞아. 게다가 그냥 떨어진 것도 아니고 수십 마리 마쿨이 끌고 갔다던데? 어둠의 문에서 살아남았다고 해도 마쿨한테 잡아 먹혔을걸.”
역시 다들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구나. 하루 이틀도 아니고 7년이나 어둠의 문 안에 있었으니, 저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한 거겠지.
“본 사람은 없으니까요.”
하지만 붉은 머리 기사는 차분히 답하며 천막을 마저 치웠다. 매튜와 폴은 그 모습을 아니꼽다는 듯 바라보았다.
“제이든, 솔직히 말해 봐. 너도 제5 기사단에 들어온 거 후회하지?”
제이든…?
“그러게. 평민이어도 아카데미 수석 졸업이면 원하는 곳에 지원할 수 있지 않아?”
어딘지 낯이 익다 했더니, 저 붉은 머리 기사는 다이애나의 아카데미 동기이자 수석 입학생인 제이든이었다.
평민 출신에 아카데미 수석, 그리고 다홍빛이 도는 붉은 머리카락과 제이든이란 이름까지, 저런 사람이 또 있을 리 없었다.
제이든이 수석이면, 다이애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수석으로 졸업하겠다며 의욕이 넘쳤었는데…. 비록 수석 졸업이 아니더라도 멋진 기사가 되었겠지?
다이애나가 졸업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함께하겠다고 약속했는데, 결국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저는 지원해서 여기 온 겁니다.”
“사서 고생하는 스타일이구나?”
“그러게.”
선배 기사들은 어떻게든 제이든을 자신들의 뒷담화에 끌어들이고 싶어 했지만, 그는 별다른 말 없이 짐을 정리했다.
천막을 철거하고, 짐을 꾸리는 허드렛일은 원래 하인이나 종자들의 몫이지만, 혼돈의 계곡은 금단의 구역으로 외부인의 출입이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니 황실 기사들이 모든 걸 직접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저런 식으로 후배에게 모든 걸 떠맡긴 채 농땡이를 피우는 사람들도 있지만 말이다.
제이든이 정리한 짐들을 말에 실었다. 그 모습을 멀뚱히 지켜보던 폴이 지루한 듯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인사를 하려고 했는데, 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으아악!”
“뭔데?”
폴을 따라 시선을 돌리던 매튜도 나를 보고 흠칫 굳었다.
젊은 기사들의 얼굴에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이런 상황에 기시감이 들었다.
과거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나의 종아리에 있던 흉터를 보던 아이들의 표정이 이와 흡사했다. 다른 게 있다면 그때보다 훨씬 짙은 혐오와 경멸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저 여자는 왜 여기 있는 거야? 신전에서 사람이 왔다며? 신전에 맡길 줄 알았는데?”
매튜가 나를 가리키며 삿대질을 했다.
“설마 데려가려는 건가?”
“저런 괴물을?”
노골적인 경멸을 받자 몸이 움츠러들었다.
세르와 재회하고 화상 흉터를 보았을 때는 가슴이 아팠다. 나의 영혼이 그녀의 몸에 들어온 걸 알았을 때도 흉터에 대한 건 금방 잊었다.
너무나도 혼란스러운 상황이라 흉터에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기도 했고, 무엇보다 블레이크가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나도 특별히 의식하지 못했다. 에드온도 나의 신분이 불확실한 것을 우려했을 뿐, 흉터를 보고 꺼리는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괴물이라는 말을 들으니, 비로소 현실과 마주한 기분이었다.
‘내가 흉측하구나.’
세르의 몸으로 바뀌었어도 괜찮았다. 블레이크와 함께 있을 때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괴물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내가 진짜 괴물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 마차도 없잖아.”
“누가 태워야지.”
“아, 분명히 저런 건 우리한테 시키겠지?”
“그걸 말이라고 하냐? 고참들이 퍽이나 저런 괴물을 태우겠다. 귀찮은 건 전부 우리 몫이지.”
매튜는 오물이라도 떠맡은 것처럼 치를 떨었다.
“나는 짐이 많아서 안 돼.”
“누군 없냐?”
“아, 내 말은 예민하다고. 저런 괴물을 태우면 놀란단 말이야.”
폭탄 돌리기를 하는 것처럼 분위기가 싸하게 가라앉았다. 머리로는 저들이 나쁘다는 걸 알고 있는데, 자꾸만 내가 죄인처럼 느껴졌다.
도망치고 싶은데 발이 땅에 뿌리를 내린 듯 굳어서 움직여지지 않았다. 고개만 푹 숙이는데, 제이든이 말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그는 무심한 투로 뱉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나와 함께 말을 탈 생각인가?
고맙다고 인사를 하려는데, 뒤에서 블레이크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럴 것 없다.”
“전하, 오셨습니까.”
제이든이 절도 있게 고개를 숙였고, 다른 기사들도 서둘러 예를 갖추었다.
“로즈는 나와 함께 갈 거다.”
블레이크는 화상 흉터가 심한 나의 왼손을 꼭 잡았다. 그러자 폴과 매튜는 물론 제이든조차 놀라서 눈이 커졌다.
“그리고 폴과 매튜, 너희들은 오늘부로 황궁 기사직을 박탈한다.”
“네?”
“저희가 왜?”
“몰라서 묻는 건 아니겠지?”
블레이크는 당황하는 폴과 매튜를 향해 차갑게 일갈했다.
그 시선이 너무나도 싸늘했기 때문에 기사들은 변명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얼어붙었다.
블레이크한테 저런 면이 있었나? 깜짝 놀라서 바라보는데, 그가 나의 손을 잡은 채 말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손이 차갑네. 추운데 들어가 있지.”
그는 화상 흉터가 가득한 나의 손을 꼭 잡더니, 녹여주듯 따뜻한 입김을 불었다.
블레이크는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괜찮아요.’
나는 입을 크게 벌려서 말했다.
“괜찮다고?”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그는 내 말을 알아들었다.
“그래도 말을 타면 추울 거야.”
블레이크가 자신의 외투를 벗더니 나에게 걸쳐주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서 손사래를 쳤다.
‘저는 괜찮아요. 추우니까 전하가 입으세요.’
“응?”
이번에는 문장이 복잡했기 때문인지 제대로 소통이 되지 않았다. 나는 블레이크를 가리키고 몸을 떠는 흉내를 내며 열심히 보디랭귀지를 사용했다.
“너보다 내가 더 추울 거라고?”
드디어 뜻이 통했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블레이크는 추위를 많이 탔다.
가을이었지만, 혼돈의 계곡은 기온이 낮은 편인 데다 바람이 거세서 마치 초겨울 날씨 같았다. 말을 타면 더 추울 거다.
그런데 블레이크의 표정이 어딘지 묘해졌다.
“그런 걱정은 오랜만에 받아보네. 내가 어렸을 때 추위를 타긴 했지만, 그걸 아는 사람은 거의 없거든.”
저주가 풀리면서 추위를 타던 체질도 바뀐 건가?
“너는 어떻게 알았지?”
장미처럼 새빨간 눈동자가 나를 뚫어질 듯 응시했다. 의심하는 것과는 다른 집요한 눈빛에 나는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바람 소리가 거셌다.
‘…추워서.’
“그냥 추워서 그런 거라고?”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럴 수도 있겠지….”
그는 나를 향한 시선을 느리게 떼며, 외투를 덮어 주었다. 이번에는 나도 거절하지 못했다.
“말을 탈 수 있어?”
승마를 배우긴 했지만 선뜻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었다. 그건 7년 전의 일이었다. 목소리를 잃고 글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 그때 배웠던 지식이 남아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못 타도 괜찮아. 그냥 뒤에 앉아 있기만 하면 돼.”
우리가 다가가자 하얀 백마가 ‘히이잉’ 낮게 울며 고개를 돌렸다.
내 모습 때문에 말이 놀랄 거라는 말이 신경 쓰였다. 황급히 머리카락으로 흉터를 가리려는데, 그가 그대로 나의 몸을 들어 올리며 말에 태워주었다. 그리고 자신도 안장에 올랐다. 다행히 말은 얌전했다.
“조쉬는 순하니까 겁먹을 거 없어.”
백마의 이름은 조쉬인가 보다. 귀여운 이름이었다. 블레이크가 지어준 걸까?
“잡아야지.”
그의 재킷을 살포시 움켜쥐었다. 그러자 블레이크가 나의 손을 잡으며 자신의 허리를 감도록 하였다.
“위험하니까 꽉 잡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깍지를 꼈다. 그러자 그가 작게 웃었다.
“잘했어.”
마치 걸음마를 뗀 어린아이를 칭찬하는 것 같았다. 언제나 그를 칭찬하는 건 나의 몫이었는데, 이제는 반대가 되어버렸다. 왠지 기분이 묘했다.
“그리고 로즈, 나쁜 말은 잊어버려. 본인들이 추악하니 외모에 연연하는 거야.”
그들이 한 말을 들었던 거구나. 나 때문에 기사들을 파면했던 거였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키가 훌쩍 크고 외모나 분위기, 말투도 전과는 달라졌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블레이크였다. 그의 따뜻한 마음은 지금도 그대로였다.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
혼돈의 계곡은 지형이 험하고 마물도 많았다. 책에서만 보던 그리핀의 무리가 우리의 머리 위를 빙빙 맴돌았다. 굉장히 위협적이었지만 블레이크나 다른 기사들은 비둘기라도 본 것처럼 무시하며 빠르게 말을 몰았다.
“경사가 가파르니까 조심해.”
그리핀에 시선이 팔리느라 집중력을 잃고 말았다. 게다가 화상이 심한 왼손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나는 조금 느슨해진 손을 굳게 맞잡았다.
하지만 집중을 해도 곤란했다. 이렇게 허리를 꽉 잡고 있으니, 그의 단단한 등 근육과 복근이 그대로 느껴졌다.
락슐도 그랬다. 젤칸 제국 최고의 검사였던 그는 언제나 강인했다.
블레이크는 락슐의 환생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똑같은 건 아니었다.
락슐은 강하고 듬직한 남자였다. 그에 비해 블레이크는 전체적인 선이 유려하고 아름다웠다. 그렇다고 해서 여자같이 예쁘장한 건 또 아니었다.
어렸을 때는 아름다웠던 어머니를 꼭 빼다 닮았다면, 지금은 텐스테온의 날카로움이 섞여서 유려하면서도 카리스마가 흘렀다.
몸도 언뜻 보면 길고 호리호리한 체형이었지만, 이렇게 가까이 있으니 숨어 있던 근육들이 느껴졌다.
말랑말랑하던 아기 배가 이렇게 변하다니. 7년 동안 얼마나 노력한 걸까?
그가 힘들게 훈련할 때 곁에 있어 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흘러가 버린 세월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잠시 상념에 젖어 있는데, 콰직 하는 커다란 굉음이 들렸다. 깜짝 놀라서 위를 올려 보니, 산에서 갈라져 나온 거대한 암석이 밑으로 추락하며 우릴 향해 맹렬히 돌진하고 있었다.
“전하!”
뒤에서 따라오던 기사들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눈을 질끈 감았다. 너무 늦었다. 암석을 피할 방법은 없었다.
그때 몸이 부웅 뜨더니 바닥으로 떨어졌다. 블레이크가 나의 몸을 감싸며 말에서 뛰어내린 것이다. 그와 동시에 암석이 땅으로 떨어졌다.
조금만 늦었으면 압사당했을 거다.
“괜찮아?”
블레이크는 곧장 나의 몸 상태를 살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블레이크가 감싸준 데다가 가죽으로 만든 단단한 외투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다치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아니었다.
블레이크의 팔에서 새빨간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내가 그의 팔을 가리키자, 블레이크가 상처를 흘깃 쳐다보며 가볍게 웃었다.
“별거 아니야.”
별거 아닌 게 아니었다. 언뜻 봐도 상처가 심각했다. 이런 곳에서 제대로 치료를 할 수 있을 리도 없다.
나 때문이다. 블레이크 혼자였다면 가볍게 피했을 거다. 나에게 외투를 주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다치지 않았을 거다.
나에게 빛의 힘이 있었다면, 그랬다면 치료해줄 수 있었을 텐데. 스스로가 너무 무력하고 블레이크한테 미안했다.
“울지 마. 실수한 건 난데, 왜 네가 자책을 해?”
그는 나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가볍게 웃으며 위로해주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붉은 피가 계속 흘러 그의 팔을 적셨다.
“별거 아니래도.”
그가 상처가 난 왼쪽 팔을 오른손으로 가볍게 잡았다. 그 순간 오른손에서 투명한 빛이 흘러나오더니 상처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자, 봐봐. 괜찮다니까.”
블레이크가 자신의 팔을 보여주었다. 피가 남아 있긴 했지만 상처는 말끔하게 아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설마 여신의 힘을 사용한 건가?
“눈물이 왜 이렇게 흔해?”
그가 손수건으로 나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팔을 가리켰다. 내 눈물보다는 그의 피를 닦는 것이 우선이었다.
“나는 됐어.”
상처는 아물었으나, 이미 흘린 피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계속 괜찮다고만 했다.
괜찮은 척하는 성격은 성인이 되어서도 변함이 없구나.
나는 그의 손에서 손수건을 뺏었다. 블레이크는 자신의 일이라면 무조건 참는 버릇이 있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챙겨줘야 했다.
나는 손수건으로 그의 팔에 묻은 피를 닦았다.
“황태자의 물건을 강탈하다니, 무례함이 몸에 뱄네.”
그의 목소리에 웃음이 담겨 있었다. 무례하다고 말은 하지만 불쾌한 것 같지는 않았다.
“전하!”
에드온과 제이든이 바위를 뛰어넘으며 이쪽으로 달려왔다. 거대한 암석이 좁은 협곡으로 떨어지며 길이 막혔기 때문에, 말을 놔두고 달려온 것이다.
“소란 피우지 마라. 별거 아니다.”
“지금 그걸 말씀이라고 하십니까! 이렇게 피를 흘리시지 않았습니까!”
걱정돼서 어쩔 줄 모르는 에드온과 달리, 제이든은 블레이크의 상태도 확인하지 않은 채 성큼성큼 달려가서 저 멀리 서 있던 황태자의 백마를 데리고 왔다.
“제이든! 너는 전하께서 다치셨는데, 말부터 챙기는 거냐!”
“어차피 치료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마물이 공격할 리도 없고요. 우리 중에서 가장 안전하신걸요.”
조곤조곤 사실을 나열하는 제이든을 보며 에드온이 발끈했다.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황태자 전하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우리의 임무다!”
“목숨을 바칠 겁니다. 다만 지금은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여튼 요즘 녀석들은!”
에드온이 혀를 끌끌 찼다. 그도 나이를 먹긴 먹었구나. 유유자적 언제나 여유로웠던 말단 기사에서, 세대 차이에 시달리는 직장 상사가 되었다.
“에드온, 그쯤 해.”
블레이크가 어렸을 때처럼 가벼운 투로 말하자, 에드온은 마지 못해 입을 다물었다.
“제이든, 조쉬의 상태는?”
“약간 놀랐지만 특별한 이상은 없습니다.”
“잘했다. 조쉬가 더 멀리 갔으면 찾기 힘들었을 거다.”
“황공하옵니다.”
블레이크는 말의 상태를 확인한 뒤,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다친 데 없어?”
그는 나의 손을 꼼꼼히 살폈다. 화상 흉터 같은 건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괜찮아요.’
나는 입을 크게 벌려서 말했다. 블레이크가 지켜준 덕분에 정말로 조금도 다치지 않았다.
“다행이다.”
그는 환하게 웃었다. 그 눈빛이 너무 자상해서 또다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
길을 막고 있는 암석을 치우고 놀란 말들을 진정시킨 뒤, 우리는 다시 길을 떠났다.
어째서 황태자가 혼자 앞서가는 데도 기사들이 만류하지 않았는지, 머리 위에 그리핀이 날아다녔는데도 태평했는지 그 이유를 알았다.
블레이크에게는 여신의 힘이 있었다. 그 때문에 마물들이 접근하지 않았고, 설령 다치더라도 회복할 수 있었다.
필립은 자신이 가진 힘을 모두 쏟아부어 저주의 계승자를 만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때문에 저주의 계승자는 막강한 빛의 힘을 지니게 되었다. 비록 강력한 저주로 인해 직접 그 힘을 사용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이제 저주는 풀렸다. 블레이크는 저주에서 벗어나 온전한 여신의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남았다.
어째서 세르는 블레이크의 힘을 거둬가지 않았을까? 필립의 후손을 그렇게나 증오했으면서….
게다가 블레이크를 가장 먼저 죽이겠다고 하며, 나에게 검까지 주었었다.
“내리막이야. 꽉 잡아.”
나는 얼른 그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았다.
“전하께서도 조심하십시오. 낙석이 많습니다.”
블레이크에게 빛의 힘이 있다고는 하지만, 바로 직전에 사고가 났기 때문에 아까 전과 달리 에드온이 옆에서 밀착 경호를 했다.
“뒤로 물러나거라. 방해된다.”
블레이크가 직설적으로 말했지만, 에드온은 굴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전하, 어둠의 문이 닫힌 이후로 계곡의 지형이 극히 불안정합니다. 지진과 낙석은 예사고, 마물의 수도 늘었습니다. 지대가 안정될 때까지는 걸음을 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
세르의 봉인이 풀리고 어둠의 문이 닫히면서, 혼돈의 계곡에는 많은 변화가 생긴 모양이다.
에드온의 말은 논리적이고 타당했으나, 블레이크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한없이 부정에 가까운 침묵이었다. 에드온은 낮은 한숨을 내쉬었지만, 더는 권하지 않았다.
“전하, 오늘은 발린 영지에서 쉬시지요.”
발린은 혼돈의 계곡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영지였다.
“아직 날이 밝다. 그런 곳에서 낭비할 시간 없어.”
“그래도 하룻밤만 묵으시지요. 부상을 당하지 않으셨습니까? 게다가 빛의 힘도 사용하셨고요.”
“이미 나았어.”
“로즈 양도 힘드실 겁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블레이크가 우뚝 멈춰서더니,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가?”
“말을 타는 데는 체력이 많이 소모됩니다. 익숙하지도 않은 분께는 특히 힘들지요. 게다가 회복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고요. 그렇죠, 로즈 양?”
에드온이 나를 바라보았다. 제발 그렇다고 말해달라는 애원이 담긴 눈빛이었다.
나 역시도 블레이크가 쉬길 원했기 때문에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발린 영지로 가겠다.”
그 순간 블레이크는 목적지를 바꾸었다.
***
“아스테릭 제국의 빛이신 황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영주성에 당도하자, 발린의 영주인 딕스 자작과 기사, 사용인들이 모두 나와서 우리를 맞이하였다.
원작과 같다. 이제는 이곳이 소설 속의 세계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세부적인 정보에서 틀린 것은 없었다.
아마도 ‘야수와 영애님’은 이미 이 세상을 한 번 겪었던 사람이 지구에 가서 쓴 글이거나, 아니면 이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 누군가가 작성한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이 세계가 소설이 아니라고 해서 원작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물론 모든 것이 같은 건 아니다.
원작에서 딕스 자작이 환대했던 사람은 유력한 황태자 후보였던 리차드였지, 블레이크가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방문인데도 이리 환대해 줘서 고맙네.”
영주를 상대하는 블레이크의 모습에서 당당함이 느껴졌다. 모두에게 멸시를 받았던 때가 떠올라서 괜스레 가슴이 뭉클했다.
“악!”
딕스 자작의 옆에 있던 여인이 돌연 비명을 질렀다.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됐다. 딕스 자작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여인을 소개했다.
“제 여식인 조앤나라고 합니다.”
“제국의 빛이신 황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전하의 상처를 보고 너무 놀라서…. 송구합니다.”
그녀는 능숙하게 변명을 했지만, 나는 알았다. 그녀는 나를 보고 놀라서 소리를 친 거다. 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비명을 지르는 걸 똑똑히 보았다.
“전하, 많이 다치신 겁니까?”
“아니.”
“과연 여신에게 선택받으신 분이십니다.”
딕스 자작이 호탕하게 웃자 조앤나도 동의했다.
“그러게요. 역시 대단하세요.”
조앤나 딕스, 그녀는 야수와 영애님에 등장하는 조연이었다.
그녀는 무척 아름다웠지만, 촌구석 영주의 딸이라는 사실에 짙은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었다.
조앤나는 신분 상승을 위해 리차드에게 접근하고, 리차드 역시 야망에 넘치는 그녀에게서 흥미를 갖는다. 어쩌면 자신과 비슷한 인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욕심만 넘칠 뿐 무능하고 어리석다는 걸 깨닫자마자 금세 흥미가 식어버리고, 결국 그녀는 리차드의 도구로 전락하여 이용당하다가 버림받게 된다.
“전하를 위해 성대한 파티를 열도록 하겠습니다.”
“피곤하군.”
“전하!”
블레이크가 영주의 제의를 단칼에 거절하자, 에드온은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귀찮다는 듯 눈가를 살짝 찡그릴 뿐이었다.
“하하하. 당연히 피곤하시겠죠. 우선 여독을 푸시지요. 조앤나, 황태자 전하를 안내해 드리거라.”
“네, 아버님.”
그녀가 우아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집사는 에드온과 기사들을 안내했다.
“기사님들께서는 저를 따라오시죠.”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블레이크가 내 손을 잡았다.
“가자. 로즈.”
***
발린 영지는 날씨가 춥고 땅이 척박한 데다 혼돈의 계곡의 영향을 받아 마물마저 들끓었다. 인구가 적고 이렇다 할 특산품도 없어서 손에 꼽힐 정도로 가난한 영지 중 하나였지만, 성의 내부는 무척 화려했다.
“로즈, 많이 힘들었어?”
‘아니요. 괜찮아요.’
“어디 아픈 데는 없고?”
그는 어릴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상냥했다. 하지만 기사들한테는 무뚝뚝한 걸 보면 아무한테나 그러는 건 아닌 거 같고, 여자들한테 특히 자상한 걸까?
‘전하께서 힘들지….’
“전하, 실제로 뵈니 초상화보다 훨씬 멋있으세요.”
힘들지 않으냐고 물어보려고 하는데, 조앤나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러자 블레이크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영애, 대화 중인 게 안 보이나?”
“소, 송구합니다.”
조앤나가 입을 다물자, 블레이크가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언제 화를 냈냐는 듯 목소리가 상냥했다.
“응? 뭐라고? 다시 말해줘.”
‘전하께서도 힘드셨죠?’
“힘드냐고?”
고개를 끄덕이자, 블레이크가 눈가를 사르르 접으며 예쁘게 웃었다.
“로즈가 걱정해주니까 기쁘네.”
또 다. 그저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도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왜 이러는 거지. 왠지 부끄러워서 시선을 피하는데, 조앤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 오늘은 이 방에서 머무시지요.”
그녀가 복도 끝에서 두 번째에 있는 방을 가리켰다. 황궁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문의 장식이 제법 화려했다.
“알겠다.”
“그리고 로즈 양의 방은 유모가 안내해 줄 겁니다.”
“로즈도 나와 같은 층이길 원하는데.”
“송구하오나 전하, 이곳은 딕스가의 사람에게만 허락되는 공간입니다.”
조앤나의 말이 맞았다. 블레이크가 황태자이기 때문에 자작가에게만 허락된 장소를 특별히 허락한 것이다. 황실 기사들도 서관에 머무는데, 귀족도 아닌 내가 여기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그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블레이크가 안하무인으로 행동했다는 소문이 나는 건 원치 않는다.
“로즈, 괜찮겠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로즈는 나에게 중요한 사람이다. 귀하게 모시도록.”
“예, 전하. 로즈 양, 오시지요.”
조앤나의 유모는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
나와 유모가 복도를 걸어가자, 사용인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저건 뭐야?”
“황태자 전하께서 데려온 여자야.”
“정말?”
“응. 아까 봤다니까.”
“저렇게 징그러운 걸 왜 데려왔데?”
“그러게나 말이야.”
그들은 노골적으로 쑥덕거렸다. 블레이크와 함께 있으면 흉터 같은 건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들을 만나니 냉혹한 현실이 새삼 와 닿았다.
“이쪽으로 오거라.”
유모도 블레이크와 멀어지자마자, 돌연 태도를 바꾸며 하대를 하였다.
고개를 푹 숙이며 걸어가는데, 뒤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뭐야! 정말! 자기가 황태자면 다야!”
조앤나가 신경질을 부리며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이 복도 끝에서부터 느껴졌다. 쑥덕거리던 사용인들은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사라지거나, 몸을 돌리며 괜히 창문을 닦기 시작했다.
조앤나는 그런 사용인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오직 나를 노려보며 성큼성큼 걸어왔다.
“유모, 어디가?”
“서관 4층의 객실로 가던 중입니다.”
“쟤를 서관에 재우려고?”
“네….”
유모가 조앤나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별관으로 데려가.”
“별관이요?”
“그래.”
“하오나 그곳은….”
“지금 내 말에 토를 다는 거야? 쟤가 병이라도 옮기면 책임질 거냐고!”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에는 혐오감이 가득했다. 조앤나가 마구 짜증을 내자, 유모는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아닙니다. 아가씨. 당장 별관으로 데려가겠습니다.”
***
“여기다.”
유모가 안내해준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잔기침이 나왔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고 방치되었던 곳인지 먼지가 가득했다.
“그럼 쉬거라.”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유모의 옷을 다급히 붙잡았다.
“아악, 깜짝이야!”
흉터가 없는 오른손으로 잡았는데도 그녀는 병균이라도 옮은 것처럼 비명을 질렀다. 나는 황급히 손을 뗀 뒤, 탁자를 닦는 시늉을 했다.
방이 작은 건 상관없었다. 아모리아궁보다는 작았지만, 한국에서 지내던 자취방보다는 훨씬 넓었으니까. 천 년 전처럼 사방이 꽉 막힌 탑에 갇힌 것도 아니고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먼지가 많은 건 참기 힘들었다.
“알겠다.”
걸레를 달라는 나의 마을 알아들은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는 퉁명스럽게 답하며 밖으로 나갔다.
일단 창문을 열어서 환기를 시키려고 하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벌써 걸레를 가져온 걸까?
고개를 돌리는데, 조앤나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너, 뭔가 했더니, 그냥 혼돈의 계곡에서 주워온 거라며?”
그새 나에 대한 뒷조사를 한 모양이었다.
적대감에 가득 찬 시선을 정면으로 받으니, 원작의 이야기가 오버랩됐다.
그녀는 리차드가 다이애나에게 흥미를 보이는 걸 알고 질투심을 불태웠었다. 사사건건 괴롭히는 것도 모자라서 목숨까지 노릴 정도였다.
게다가 리차드는 이를 알면서도 말리기는커녕 그녀의 악행을 다이애나와 가까워질 기회로 삼았다.
천 년 전에 자신의 여자들을 이용하여 나를 괴롭히던 필립의 모습이 떠올라서 다시금 분노가 차올랐다.
“흉측한 데다가 말도 못 하는 천한 괴물 주제에. 착한 전하께서 동정한 거 가지고 착각하지 마! 너 따위 괴물을 누가 받아줄 거 같아?”
도대체 내가 왜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 걸까?
‘무례하시네요.’
“뭐래. 벙어리가.”
조앤나는 피식 비웃으며 나를 조롱했다. 블레이크와 달리 그녀는 나의 입 모양을 읽을 생각이 전혀 없었고, 나의 항의는 허공에 흩어져 사라졌다.
“유모, 이 방에 거울 좀 가져다 놔. 저 괴물이 주제넘게 헛꿈을 꾸지 않도록.”
그녀는 마지막까지 나를 모욕한 뒤 밖으로 나갔다.
***
블레이크는 간단히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로즈가 계속 팔에 묻은 피를 신경 썼기 때문이다.
이제는 걱정하지 않겠지. 그녀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셔츠 단추를 잠그고 로즈의 방으로 가려 하는데, 에드온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 접니다.”
“들어와.”
“집사가 전하를 모시러 왔었는데,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고 하더군요.”
“씻고 있었다.”
“그러셨군요. 딕스 자작이 전하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상대하고 싶지 않군.”
딕스 자작은 블레이크를 남쪽 섬에 유폐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그의 저주가 풀리자마자 태도가 돌변해서 축사와 선물 등을 보내왔다.
블레이크가 혼돈의 계곡에 올 때마다 몇 번이고 초대했지만, 그는 단 한 번도 응한 적이 없었다.
“전하, 어둠의 문이 없어지자, 혼돈의 계곡에서 마물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발린 영지도 피해가 심각하다 합니다. 딕스 자작을 꺼리시는 건 알고 있지만, 영지민들을 생각하셔서 잠시 말씀을 나눠 보시는 게 어떨는지요?”
“…알겠다.”
블레이크에게는 언제나 모든 걸 혼자 정하고 혼자 행동했다. 타인에게 무심했고, 다른 이가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걸 극도로 싫어하였다.
하지만 어린 시절을 함께했던 사람들은 예외였다.
에드온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앤시아가 실종된 이후 성격이 많이 변하였지만, 따뜻한 성품은 예전 그대로였다.
***
“전하,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블레이크가 식당으로 들어가자, 딕스 자작과 조앤나가 활짝 웃으며 그를 맞이하였다.
긴히 할 말이 있다면서 딸은 왜 부른 거지?
에드온의 말처럼 영주로서 영지민의 고난을 토로할 것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올해 발린 영지가 많은 고초를 겪었다고 들었는데.”
블레이크는 커다란 식탁을 가득 채운 음식들을 바라보았다. 하나 같이 호화로운 데다가 족히 10인분은 넘어 보이는 양이었다.
“하하. 전하께서 혼돈의 계곡에 머무시는 동안에는 별일 없이 조용했습니다. 마물들도 여신의 선택을 받으신 전하를 알아본 거겠죠.”
블레이크는 딕스 자작이 썼던 상소를 본 적이 있었다. 자신의 영지에 마물의 피해가 극심한 것은 전부 저주의 계승자인 황태자가 황궁에서 호의호식하기 때문이라며 당장 그를 유폐하거나 아니면 보상금을 달라고 했었다.
그런데 올해는 그때보다 훨씬 피해가 심각함에도 블레이크를 치켜세웠다.
“이건….”
당장 이 자리를 떠나려고 하는데, 샐러드 안에 있는 짙은 초록색 채소가 눈에 들어왔다. 제국에서 잘 먹지 않는 데다가 이 계절에 구하기도 어려운 채소였다.
블레이크가 재료를 알아보자 조앤나가 미소를 지었다.
“전하께서 좋아하신다는 말을 듣고 특별히 구해왔답니다.”
“오늘 내가 올 걸 알고 있었나?”
“전하께서 혼돈의 계곡에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하루도 빠짐없이 만찬 준비를 해두었답니다. 전하를 모실 날을 기다리면서요.”
그는 7년 동안 단 한 번도 발린 영지를 방문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가뜩이나 서쪽 험지에 위치해 교역이 원활하지 않은 곳에서 이런 음식들을 매일 준비했다니.
눈에 뻔히 들여다보기는 아부가 역겨웠다. 하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인간들은 죄다 역겹다. 저자가 특별한 건 아니다.
“블레이크는 앞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날 거예요. 그들 중에는 기회주의자들도 분명 있겠죠. 갑자기 아부를 떠는 사람들도 많고요. 하지만 그중에는 저주와 상관없이 블레이크라는 사람을 좋아하고 지지해주는 사람도 분명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을 무조건 미워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중에는 정말 좋은 사람도 있으니까요.”
블레이크는 낯선 사람을 만날 때마다 앤시아의 말을 떠올렸다. 하지만 언제나 회의감이 들었다.
그런 사람이 정말로 있을까? 모두들 나를 이용하기 위해 눈을 희번덕거릴 뿐이다. 설령 있다고 해도 앤시아가 아니라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
“전하, 음식이 입에 안 맞으세요?”
블레이크가 생각에 잠겨있는데, 조앤나가 물었다.
“피곤해서 식욕이 없군.”
빨리 자리를 파하자는 의미였지만, 딕스 자작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하, 조앤나, 전하께서 식사를 들지 않으시는 것이 그리 걱정되느냐?”
“몰라요.”
조앤나가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전하, 이 아이가 어려서부터 전하를 흠모하였답니다.”
“어려서부터?”
“네. 전하께서 저주에 걸린 것이 불쌍하시다며 자신이 꼭 전하의 신부가 되겠다고 했답니다.”
블레이크는 기가 차서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이런 식의 고백을 들은 것만 수십 번이었다.
어린 시절, 그의 곁에는 오직 앤시아뿐이었다. 그런데 막상 저주에서 풀리고 나니 너 나 할 것 없이 사실은 블레이크에게 연민을 느끼고 좋아했다며, 그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다.
“자네 여식을 남쪽 섬에 유폐시키고 싶었나 보지?”
싸늘한 음성에 딕스 자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 황태자는 자신이 과거에 보냈던 상소 내용을 언급하고 있었다. 그는 과거에 저주의 계승자인 황태자와 황태자비를 남쪽 섬에 유폐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그, 그때는 마물로 인해 영지의 피해가 극심하여 이성을 잃고 말았습니다. 제가 상소를 보낸 걸 알고 딸아이가 얼마나 화를 냈는지 모릅니다.”
“맞아요! 제가 그때 아버지를 얼마나 나무랐는지 몰라요.”
뻔히 보이는 거짓말에 토악질이 차올랐다. 블레이크는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식당을 나와 걸음을 옮기는데, 조앤나가 다급히 블레이크를 쫓아왔다.
“전하! 전하!”
성큼성큼 걸어가던 블레이크가 우뚝 멈춰 서자, 조앤나는 재빨리 그의 앞으로 뛰어갔다.
“전하, 죄송해요. 아버지 때문에 화가 많이 나셨죠.”
그녀는 순한 눈망울을 반짝거리며 블레이크를 올려 보았다.
황태자라는 것만으로도 매력적인데, 여신의 힘까지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멋있었다. 은발과 붉은 눈동자에서는 황족의 고귀함이 느껴졌고, 목소리도 좋았다. 그는 걸음걸이에서마저 기품이 흘렀다.
단순히 잘생긴 것이 아니라 신비롭고 아름다워서 동화 속에나 나올법한 이상적인 왕자님 같았다.
“전하, 정말 멋지세요. 제가 오래도록 전하를 흠모했다는 사실은 진실이랍니다. 오직 전하만을 바라보며 혼례도 올리지 않았죠.”
조앤나는 예뻤다. 화려한 이목구비에 순진한 눈망울로 많은 사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미모 덕분에 수도의 유력 귀족들에게서 혼담이 들어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전부 거절했다.
그녀는 수도의 무도회에 몇 번 참석한 적이 있었다. 아쉽게도 황궁 무도회에는 초대받지 못했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명성이 자자한 앤시아의 얼굴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그녀와 비슷한 또래의 귀족 영애들은 거의 만나 보았다.
하지만 자신과 견줄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앤시아가 신경 쓰이긴 했지만, 어차피 그녀는 어둠의 문에 처박혀서 죽었다.
‘나는 이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워. 그러니 내가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게 당연해.’
조앤나는 자신이 있었다. 블레이크가 혼돈의 계곡을 자주 찾는 것 역시 호재였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발린 영지를 방문하지 않았다. 직접 초대해도 무시했다. 과거 그녀의 아버지가 비난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때는 아버지가 잘한다고 생각했다. 블레이크를 공격하면 카실 일가에 잘 보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다. 카실 공작 가문이 몰락한 데다가 황태자의 저주가 풀린 것이다.
하여튼 아버지는 제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존재였다. 영지라고 해도 실질적으로는 서쪽 끄트머리에 위치한 촌구석 땅이었다. 게다가 혼돈의 계곡 옆이라 유배지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버텼다.
한 번이다. 딱 한 번만 만나면 된다. 그럼 황태자를 사로잡을 수 있다.
자신은 앤시아와 같은 금발이었고, 벽안이긴 하지만 그녀처럼 살짝 초록빛이 돌았다. 게다가 또래 중에선 가장 아름다웠다.
황태자의 마음을 함락시키는 것 정도는 식은 죽 먹기다. 조앤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는 블레이크보다 한 살이 많았다. 이제 19살이었다. 들어오는 혼담의 수나 가문의 수준이 현격히 떨어지고 있었다.
수도의 귀족들은 그녀에게 관심을 끊었고, 영지조차 없는 가난한 몰락 귀족이 주제도 모르고 청혼을 해오기도 했다.
아버지는 20살이 되면 무조건 시집을 보내겠다고 선언했고, 그녀도 마음이 급해졌다.
자신은 아름다웠다. 아무리 못해도 수도의 후작 부인 정도는 되어야 마땅했다.
최대한 양보한다고 해도 백작 부인이었다. 그것도 유서 깊고 부유한 가문에 한정되었다. 이름만 남은 가난한 백작이라면 고려할 가치도 없었다.
과거에 자신에게 청혼했던 수도의 귀족 중 괜찮은 가문에 다시 연락해보았으나, 이미 결혼했다며 정 원하면 정부로 삼아줄 수는 있다고 모욕을 해왔다.
이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자신에게는 오직 블레이크뿐이었다.
“수도의 귀족들이 전하를 핍박했다고 들었어요. 너무 가슴이 아파요. 다들 어쩜 그렇게 못됐는지 몰라요. 만약 저였다면 전하의 저주를 감싸 안아줬을 거예요.”
블레이크의 입가에 조소가 걸렸다. 붉은 눈동자에는 경멸이 담겨 있었다. 그저 경멸일 뿐이라면 희망이 있었다.
이 세상에는 다양한 감정이 있다. 천박하다 욕하면서도 끌리고, 경멸하면서도 빠져들기도 한다.
하지만 블레이크의 눈에는 조앤나에 대한 호기심이나 이성적 끌림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아까도 그랬다. 침실에 함께 들어가서 블레이크를 유혹하려 했지만, 그는 야멸차게 조앤나를 쫓아냈다.
조앤나는 오랫동안 이날만을 기다려왔다. 블레이크와 만나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 여겼다.
‘황태자는 나를 발견한 순간 첫눈에 반할 거다. 왜 이제야 나타난 거냐며, 처음에는 앤시아와 비슷한 머리색과 눈동자를 보고 눈길이 갔지만, 네가 훨씬 더 아름답다고 말해주겠지. 아니, 나를 본 순간 앤시아 같은 건 머릿속에서 지워버릴 거다. 그는 나에게 청혼을 하고 황궁으로 가자고 하겠지. 그리고 나는 황태자비가 되는 거다. 그리되면 나를 조롱했던 놈들을 모두 밟아 줄 테다. 후회하며 무릎을 꿇고 빌어도 이미 늦었다.’
그녀는 매일 머릿속으로 황태자와의 만남을 상상했다. 황태자비가 되어 모두의 부러움을 사는 장면을 떠올렸다.
‘황태자는 앤시아 따위는 까맣게 잊고 오직 나만을 바라볼 거야. 황제도 마찬가지다. 앤시아에게 해줬던 것처럼 나에게 매일 엄청난 선물들을 안겨주겠지. 제국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황태자비라며 모든 대륙 사람들이 나를 칭송할 거고, 제국민들은 내 초상화를 구하느라 경쟁이 붙겠지. 남자라면 모두가 내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날걸?’
하지만 상상과 현실은 너무나도 달랐다. 블레이크는 조앤나의 미모를 감탄하기는커녕,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게 아닌데, 이러면 안 되는데.
어린 시절부터 꿈꿔왔던 미래가 물거품처럼 사라져가고 있었다.
“제가 수도에 살았다면 전하와 결혼해드렸을 거예요!”
조앤나는 절박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블레이크의 반응은 싸늘했다.
“인내심을 실험하는군.”
“전하….”
“결혼을 해주겠다고? 감히 너 따위가 앤시아의 자리를 넘보는 건가?”
그는 분노했다.
앤시아보다 네가 백배는 아름답다며 칭찬해줄 줄 알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된 거지?
“저, 전하…. 저는 그러니까 진심으로….”
일단 그의 화를 풀어야 했다. 하지만 서늘한 눈빛 앞에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가 더듬거리며 변명을 생각하는데, 블레이크가 물었다.
“로즈는 어디 있지?”
“…별관에.”
그녀의 대답을 듣는 순간 블레이크의 얼굴이 거칠게 일그러졌다.
“별관이라고? 로즈는 나의 중요한 손님이라 말했을 텐데. 황태자의 명이 우스운가?”
“저, 전하를 위해서였습니다! 그 여자가 전하께 병이라도 옮기면 어찌합니까!”
“병…?”
블레이크의 목소리 끝이 불쾌하게 꺾였다. 하지만 조앤나는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혼돈의 계곡에서 주워온 계집이라 들었습니다. 흉측한 모습을 보아하니 무슨 병이라도 걸린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런 계집을 가까이하셔서는 안 됩니다.”
“나의 저주는 그보다 훨씬 흉측했지.”
“네?”
“그런 주제에 나를 감싸 안겠다고?”
“그, 그게 아니라 저는 전하가 걱정돼서….”
“꺼져. 다시는 내 눈앞에 얼쩡거리지 마.”
“전하, 저는…!”
조앤나는 다시 변명하려 했다. 하지만 블레이크의 분노에 찬 적안과 눈이 마주친 순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
하인들이 와서 커다란 전신 거울을 방 한가운데에 던져 놓고는 밖으로 나갔다. 부탁했던 걸레는 결국 가져다주지 않았다.
먼지 때문에 계속 잔기침이 터졌다. 밖으로 나가고 싶었지만, 괴물이라며 수군덕거리던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라서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 때문에 소란스러워지는 건 싫었기 때문에 꾹 참고 조용히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방 안을 구석구석 뒤진 끝에 침대 밑에 처박혀 있던 걸레를 하나 찾을 수 있었다.
다행히 욕실이 갖추어져 있었다. 물론 물이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온수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먼지보다는 손이 시린 게 나았다.
걸레를 빨고, 가구를 하나하나 닦으니 처음 자취방에 이사했을 때 생각이 났다. 진짜 먼지가 엄청났었는데.
탁자를 열심히 닦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깜짝 놀라서 시선을 돌리자, 화가 난 듯한 블레이크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나에게 다가오더니 손을 움켜잡았다. 그 기백에 밀려서 걸레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왜 이런 걸 하고 있어?”
‘괜찮아요.’
“손이 차갑잖아.”
‘정말 괜찮아요.’
“나한테 왔어야지! 나한테 말을 했어야지! 왜 참고 가만히 있어!”
‘전하….’
“아니야. 내가 미안해. 같이 있어야 했는데. 너를 보내는 게 아닌데….”
나는 자책하는 블레이크를 꼭 안아주었다. 그가 꼭 울 것처럼 보여서 위로해주고 싶었다.
“미안해.”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에는 한 가지 의문이 피어올랐다.
왜 이렇게 나한테 친절한 걸까? 여자라고 상냥하게 대해주는 건 아니었다.
조앤나는 원작에서 묘사했던 대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그녀에게 싸늘했다.
“당장 이 방에서 나가자.”
블레이크가 나의 손을 꼭 잡고 밖으로 나갔다.
우리가 복도를 지나가자, 사용인들이 깜짝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입이 근질근질해 보였지만, 황태자의 앞인지라 대놓고 떠들지는 못했다.
블레이크는 본관에 있는 자신의 침실로 들어가자마자, 내 손을 꼭 잡으며 몸 상태를 확인했다.
“어디 다친 데는 없지?”
‘괜찮아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저 청소를 조금 했을 뿐이다. 너무 심하게 걱정을 하니 오히려 민망하여 손을 슬쩍 뺐다. 그리고 그의 팔을 가리켰다.
“내 팔?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
그는 가볍게 웃었다. 하지만 걱정이 되었다.
세르가 블레이크의 힘을 그대로 남겨 둔 이유가 뭘까? 혹시 빛의 힘을 비틀기라도 했다면…. 탄시놀에 걸려서 고통스러워하던 락슐이 생각나서 마음이 불안했다.
“보고 싶어?”
‘네.’
“나를 벗기려고 하네.”
“…….”
이분이 사람을 이상하게 몰고 가네! 저 오묘한 화법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상처 확인이라고요! 상처, 확인!’
“알아.”
그가 가볍게 웃더니 소매를 걷어서 상처를 보여주었다. 어디를 다쳤는지 모를 정도로 팔이 깨끗했다. 다른 상처들도 없어 보이고….
“너무 만지면 부끄러운데.”
나는 화들짝 놀라서 손을 뗐다. 상처를 살피느라 너무 집중한 나머지 그의 팔을 너무 꼼꼼히 만지고 말았다.
“도망칠 건 없고.”
블레이크가 낮게 웃으며 뒷걸음질 치던 나의 손을 잡았다.
손도 팔도 참 단단하다. 전에는 밀가루 반죽처럼 몰랑몰랑 부드러웠었는데, 이제는 근육이 단단하게 자리 잡은 남자의 팔이 되었다.
아름답고 매혹적인 얼굴과 달리 팔뚝이 강인한 검사의 그것이라 이질감마저 느껴졌다.
“더 확인하고 싶은 곳이 있어?”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어깨나 다른 팔의 상처도 궁금하긴 했지만, 가장 심했던 곳도 깨끗하게 나았으니 아마 괜찮을 거다.
나는 욕실로 보이는 문을 가리켰다. 그가 걸레질하던 내 손을 계속 만진 것이 신경이 쓰였다. 얼른 손을 씻길 바랐다.
“목욕할래?”
나는 고개를 저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싶었지만, 남의 방에서 목욕할 정도로 염치가 없진 않았다.
“목욕 시중을 들 하녀를 불러줄까?”
깜짝 놀라서 재차 고개를 저었다. 혐오감에 젖어 있던 사용인들의 눈빛이 생생했다. 그들에게 내 몸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
“알았어. 그럼 혼자 할 수 있도록 준비할게.”
“…….”
똑같이 고개를 저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차마 염치가 없어 거절한 것과 진짜로 싫어하는 걸 알아차렸다.
블레이크는 섬세하구나. 어렸을 때도 그랬다. 내가 말하지 않는 속마음을 가장 먼저 알아차렸었지. 역시 보면 볼수록 별로 변하지 않았다.
***
하녀가 와서 목욕할 준비를 해주고는 물러갔다. 옷을 벗자 앙상한 갈빗대와 화상의 흉터가 적나라하게 보였다.
세르는 텐라른궁의 화재로 심한 화상을 입은 데다가, 천 년 동안 뜨거운 불구덩이 속에 갇혀 지냈다. 온전한 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리고 여신의 영혼마저 빠져나간 이 육체는 얼마 버티지 못하겠지.
세르를 원망하진 않는다. 다만 내가 죽고 난 뒤에도 그녀가 약속을 지키길 바랄 뿐이다.
따뜻한 욕조에 몸을 담그자 그동안 쌓인 피로가 녹아 흩어지는 것 같았다.
블레이크는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는 걸까? 상처를 입은 나를 보며 과거의 자신이 떠올라서 연민을 느끼는 걸까?
혹시 내가 앤시아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건 아니겠지? 설마, 그럴 리가 없다. 외모도 다른 데다가 말도 못 하고 글도 못 썼다. 그런데 알아볼 수 있을 리가 없다.
목욕을 마치고 하녀가 두고 간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블레이크가 직접 명을 내렸기 때문인지 품질이 무척 좋았다.
욕실을 나가자 맛있는 냄새가 났다. 보기만 해도 군침이 드는 요리들로 탁자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배고프지? 식사하자.”
‘네.’
“회복한 지 얼마 안 됐으니 가볍게 만들라고 했어.”
언제나 블레이크의 식사를 챙기는 건 내 몫이었는데, 이제는 그가 나를 걱정해주었다. 세월이 흘렀다는 게 실감 나 기분이 참 묘해졌다.
“맛있어?”
고개를 끄덕였다. 맛은 있는데, 너무 뚫어져라 쳐다보는 느낌이다.
블레이크도 먹으라고 손짓을 하자, 그가 싱긋 웃었다.
“알겠어.”
혼돈의 계곡에서 벗어나자 마음의 여유를 다소 찾은 걸까? 표정이 점점 밝아지는 것 같았다. 저렇게 웃으니까 어렸을 때랑 똑같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샐러드를 먹는데, 블레이크가 눈가를 예쁘게 접으며 말했다.
“깻잎을 참 잘 먹네.”
깻잎?
나는 그제야 샐러드의 재료를 확인했다. 싱싱한 채소 사이에 얇게 썰린 깻잎이 있었다. 원래 자주 이렇게 먹었었기 때문에 전혀 깨닫지 못했다.
“특이하네. 보통 깻잎은 먹을 생각도 안 하고, 막상 음식으로 만든다고 해도 향이 독특해서 잘 못 먹는데.”
나는 아모리아궁의 온실에 깻잎을 키웠었다. 블레이크는 깻잎에 밥을 싸 먹는 나를 언제나 신기하게 바라보고는 했다. 아스테릭 제국은 물론이고 서대륙 전체, 심지어 창국에서조차 깻잎을 먹지 않는다고 했다.
지구에서도 깻잎을 즐겨 먹는 나라는 대한민국뿐이라고 했었지….
아모리아궁의 사람들은 내가 만든 요리를 무척 좋아했지만 깻잎만큼은 먹기 힘들어했다.
블레이크도 그랬지만, 어느새 익숙해져서 내가 만드는 깻잎전을 가장 좋아하는 음식으로 꼽기도 했다.
‘깻잎이 있는 줄 몰랐어요.’
“몰랐어?”
‘그러고 보니 별로네요.’
나는 샐러드 그릇을 한편으로 밀었다.
일부러 깻잎이 든 샐러드를 가져와서 나를 시험한 건가? 내가 앤시아라는 걸 눈치채고?
아니야. 그럴 리가 없잖아. 발린 영지는 우연히 들렀을 뿐인걸. 깻잎도 어쩌다 나온 것뿐이겠지.
나는 대충 식사를 마치고, 홍차를 마셨다. 그런데 블레이크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내 부인이랑 닮았네.”
부인이라면 앤시아를 말하는 거겠지….
“그 사람도 홍차를 마실 때면 각설탕에 레몬잼 한 스푼을 넣어서 마셨거든.”
그걸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있었구나. 찻잔을 조심스럽게 내려놓는데, 블레이크가 의자에서 일어나며 나에게 다가왔다.
“로즈, 다시 물어볼게. 나를 알고 있었지?”
“…….”
“나를 보고 블레이크라고 불렀잖아.”
“…….”
“에드온도 알고 있었고.”
“…….”
“내가 다치자 눈물을 터트렸지. 단순히 놀란 게 아니었어.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자책했잖아.”
“…….”
“다시 한번 물을게. 너는 누구지?”
단순히 나란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서 물어보는 게 아니었다. 그는 지금 내가 앤시아냐고 묻고 있었다.
블레이크의 붉은 눈동자가 나를 또렷이 응시했다. 어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따뜻한 눈빛이었다.
그가 나에게 친절한 이유를 알았다. 동정이 아니었다. 내가 앤시아일지 모른다고 생각한 거다.
얼굴도 다르고 언어 능력도 잃고, 빛의 힘도 없지만 그는 나를 알아보았다.
“입으로 말해봐. 소리를 내지 않아도 되니까.”
‘나는….’
내가 이름을 말한다면, 아니 그냥 고개만 끄덕여도 블레이크는 알아들을 거다. 내가 앤시아라는 걸 믿어줄 거다.
대답을 하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사지가 딱딱하게 경직되더니 눈앞이 흐려졌다.
“로즈!”
블레이크가 화들짝 놀라서 나를 붙잡았다.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조차 힘겨웠다.
“누워. 일단 쉬자.”
그가 나를 안더니 침대 위로 올라갔다. 이건 블레이크의 침대다.
여기서 자면 안 되는데….
어지러운 와중에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걱정은 멀어지는 의식과 함께 사라졌다.
***
블레이크는 당장 의사를 불렀다. 하지만 기력이 떨어졌을 뿐 특별한 이상은 없다고 했다. 블레이크가 살피기에도 그랬다.
그는 저주가 풀리고 빛의 힘을 얻었다. 의술과는 다르지만 사람이 아픈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몸에 이상은 없었다. 병은 아니다. 다만 그녀가 지닌 생명의 빛이 너무나도 약했다.
블레이크는 로즈를 처음 만나던 때를 떠올렸다.
그는 완전히 무너져버린 어둠의 문을 석 달 동안 보고 또 보았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블레이크는 어둠의 문을 부수려 했다. 하지만 단단하게 닫힌 문은 무력으로도, 빛의 마법으로도 열리지 않았다.
그래서 문이 열리면 들어가려 했지만, 어둠의 문은 앤시아를 집어삼킨 채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대륙 전체가 어둠의 문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기뻐하는 와중에 오직 블레이크만이 절망에 빠져 있었다.
정처 없이 어둠의 문 주변을 맴도는데, 새하얀 머리의 여인을 발견했다.
‘앤시아?’
블레이크는 여인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었다. 새하얀 머리카락과 외모, 그 어느 것도 앤시아와는 달랐다.
그때 그녀가 눈을 떴다.
바다처럼 새파란 눈동자였다. 실망은 더욱 커졌다. 이 사람은 앤시아가 아니다. 그런데 여인의 동공이 커지더니, 입을 움직였다.
‘블레이크.’
그녀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입 모양뿐이었지만, 블레이크는 정확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블레이크는 그녀를 안고 천막으로 돌아갔다.
여인의 아름다운 오른쪽 얼굴을 본 기사들은 감탄했고 흉측한 왼쪽 얼굴을 먼저 본 기사들은 비명을 질렀다.
블레이크는 그들의 반응을 무시한 채 자신의 천막에 그녀를 눕혔다.
앤시아에게서는 언제나 따스한 빛이 흘렀다. 과거에는 그저 편안하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앤시아는 빛의 힘을 지니고 있었다.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느껴질 정도로 강하면서도 따스한 힘이 있었다. 하지만 이 여자는 달랐다. 아무런 힘도 없었다.
역시 아닌 걸까….
블레이크는 자신이 지닌 빛의 마나를 그녀에게 흘려보냈다.
기력이 약할 뿐, 몸이 아픈 건 아니었다. 화상 흉터는 너무 오래되어서 블레이크의 힘으로도 치료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가 할 수 있는 건 가느다란 생명의 빛에 힘을 불어넣어 주는 것뿐이었다.
그녀는 곧 회복되었다. 하지만 말을 하지 못했다. 글도 쓰지 못했다.
앤시아는 언어 능력자였다. 세상의 모든 언어를 전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자신의 이름조차도 쓸 줄 몰랐다.
앤시아가 아니다….
얼굴도 다르고 머리카락이나 눈동자의 색조차도 달랐다. 빛의 힘도 없다. 글도 모른다. 모든 것이 그녀가 앤시아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녀가 블레이크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고 해도 특별한 건 아니었다. 제국 사람 중에서 그를 모르는 이가 없었으니까.
게다가 그녀가 자신을 이름을 불렀는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목소리를 들은 것도 아니고, 짧은 입 모양을 본 것뿐이다.
앤시아가 아니라면 블레이크의 관심 밖이었다.
지난 7년 동안 블레이크에게 접근하는 여자들이 무수히 많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흥미를 보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앞에 있는 여인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너무나도 애달파서, 당황하며 울먹이는 모습이 앤시아를 똑 닮아서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블레이크는 그녀를 위로해주었다. 그리고 그녀를 자신의 천막에 두고, 다른 천막에서 잠을 청했다.
자는 내내 계속 여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앤시아와 닮은 곳 하나 없는데도 왠지 마음이 이끌렸다.
그는 여인에게 ‘로즈’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앤시아에게만 선물했던 소중한 꽃이었다. 아무에게나 허락할 수 없는 단어였다. 하지만 이 여인이라면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블레이크의 의심은 점차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가 다쳤을 때 지었던 표정, 향이 독특한 깻잎을 자연스럽게 먹는 모습, 홍차에 레몬잼과 각설탕을 넣는 습관까지 모든 것이 앤시아와 비슷했다.
‘왜 이렇게 약한 거야….’
블레이크는 의식을 잃고 쓰러진 로즈에게 빛의 마나를 흘려보냈다.
로즈의 숨이 다소 편안해지더니 얼굴에도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
순간 블레이크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의 눈빛이 앤시아가 자신을 보던 그것과 똑같았다.
정확히 무엇이 똑같으냐고 묻는다면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본능적인 느낌을 받았다.
블레이크는 그녀의 볼을 어루만졌다.
“괜찮아?”
로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블레이크는 그녀의 이마를 만지며 열을 확인했다. 그의 손에 로즈의 화상 흉터가 닿았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때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웠다.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전하의 엄명이 계셨습니다.”
“놔라!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비켜! 전하, 저 조앤나예요. 전하께 드릴 말씀이 있어요!”
“안 됩니다!”
“놔라! 감히 내 몸에 손을 대는 거냐?”
신경질적인 외침과 함께 문이 벌컥 열리더니, 조앤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무례하군. 예법이란 걸 배우지 못했나?”
블레이크의 목소리가 얼음처럼 차가웠다. 조앤나는 흠칫 떨었지만, 이내 자신을 막기 위해 안으로 들어온 제이든에게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전하, 저 기사가 감히 제 앞을 막아섰습니다….”
“감히?”
블레이크의 눈매가 싸늘하게 꺾였다.
“황궁의 기사보다 일개 자작 영애의 신분이 더 높다고 생각하는 건가?”
“저, 저는…!”
자신은 영주의 딸이었다. 이 영지에서 가장 신분이 높은 여인이었다. 지금껏 그녀가 원하는 건 전부 손에 넣었고, 모두들 그녀를 우러러보았다.
수도 귀족들의 청혼을 받았고 그중에는 나이가 많긴 하지만 후작도 있었다. 그러니 자신은 원하기만 한다면 후작 부인이 될 수도 있었다.
그에 비해 저 다홍색 머리카락의 남자는 황궁 기사라고는 하지만 평민 출신이라고 했다.
명예라면 황궁 기사단이 우위일 수도 있지만, 후작 부인도 가능했던 자신과 비교도 되지 않는 신분이었다.
그런데 ‘일개 자작 영애’라니.
‘아니야. 나는 그보다 훨씬 높은 사람이야! 저런 평민 기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고!’
조앤나가 마음의 소리를 애써 씹어 삼키는데, 그런 그녀를 비웃기라도 하듯 블레이크가 제이든에게 말했다.
“제이든, 너는 나의 직속 기사다. 그런데 일개 자작 영애 하나도 막지 못하는 건가? 너에게 처음으로 실망했다.”
“송구합니다.”
제이든은 평민 출신이었다. 하지만 조앤나가 귀족이라서 강경한 태도를 취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여자가 익숙하지 않았다. 특히 저런 식으로 막무가내로 떼를 쓰는 여자는 더더욱 상대하기 힘들었다. 어쨌든 명백한 자신의 실책이었다.
제이든은 고개를 숙인 뒤, 그녀를 방에서 끌어내려 했다. 그러자 조앤나는 다급하게 외쳤다.
“저, 전하, 잠시만요!”
“다시는 그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고 했을 텐데. 그새 잊었나?”
블레이크의 목소리에는 냉기가 뚝뚝 넘쳐흘렀다. 하지만 조앤나는 자신을 향한 서늘한 시선보다도 로즈의 존재가 더 신경 쓰였다.
어째서 저 계집이 침대에 누워 있는 거지?
원래 황태자랑 자신이 함께 쓰려던 침대였다.
블레이크는 분명 자신에게 반할 거다. 뜨거운 하룻밤을 보내면 어린 시절 풋사랑 따위는 까맣게 잊을 거다.
조앤나는 그렇게 생각했고, 모든 것이 시작될 이 침실을 공들여 꾸몄다. 침대와 침구에는 특히나 더 신경을 썼다.
‘그런데 왜 나와 황태자가 있어야 할 침대에 왜 저딴 계집이 누워 있는 거야! 어째서 황태자는 저딴 추악한 계집의 손을 잡고 있는 거냐고!’
하지만 조앤나는 애써 분노를 삭였다.
이번이 진짜 마지막 기회다. 어떻게 해서든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
“전하, 오해를 풀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왔어요.”
“오해?”
“네. 로즈 양의 방은 유모가 멋대로 정한 겁니다. 저는 전혀 알지 못했어요.”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말에 블레이크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어갔다.
블레이크는 별관에 있던 커다란 전신 거울을 보았다.
방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여 있던 그 거울은 디자인이 화려했으며, 소중하게 관리한 듯 반짝반짝 빛이 났다.
먼지를 뒤집어쓴 작은 방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블레이크가 아직 어리던 때, 시종들이 그의 방에 거울을 가져다놓고는 했다. 블레이크가 치우라고 몇 번이나 명령했지만, 실수인 척 계속 가져다 놓았다.
거울을 보고 자신이 얼마나 흉측한 괴물인 줄 깨달으라는 잔혹한 괴롭힘이었다.
그런 괴롭힘은 앤시아와 결혼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별관에 있던 그 거울도 그런 의미일 거다.
금과 보석으로 장식된 화려한 거울이라면 분명 조앤나 소유의 물건일 테지. 유모가 함부로 옮길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그녀의 짓인 게 뻔히 보이는 데다가, 당사자인 로즈가 바로 옆에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말을 하지 못한다고 저런 거짓말을 하는 거다.
조앤나는 블레이크의 표정이 굳어가는 걸 알면서도 다급히 말을 이었다. 일단 저 계집을 여기서 내보내야 했다.
“당장 로즈 양의 방을 서관 객실로 옮기겠습니다.”
“우리 로즈에게 그 머나먼 곳까지 가라는 건 아니겠지?”
우리 로즈라니?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정말로 저런 흉측한 계집과 같이 잘 생각이야?
이건 분명 뭔가 잘못된 거다. 이럴 수는 없다. 외국의 왕녀나 귀족도 아니고, 아름답지도 않은 저런 계집이 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니.
황태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어떻게 내가 아니라 저 흉측한 괴물을 택할 수가 있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한 가지 생각이 그녀의 뇌리를 번뜩 스쳐 지나갔다.
“전하, 조심하셔야 해요!! 저 여자는 마물이에요!”
조앤나가 로즈를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사내를 유혹해서 잡아먹는 괴물이 있어요! 사람 흉내를 내긴 했지만 마물은 결국 마물인지라 그 몸을 완전히 흉내 내지 못하고 아주 흉측하다고 하죠! 전하께서는 지금 저 마물에 홀리신 거예요!”
조앤나의 공격을 받은 로즈, 아니 앤시아의 표정은 담담했다. 그녀는 당황하지 않았다. 다만 소설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야수와 영애님’에서 조앤나는 다이애나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다.
블레이크의 저주를 푼 것을 보니 분명 평범한 사람을 아닐 거라며 괴물이라고 몰아가기도 했다.
물론 원작과 완전히 똑같지는 않았다. 그녀가 차지하려던 남자가 리차드에서 블레이크가 되었고, 공격 대상도 다이애나에서 앤시아로 바뀌었다.
리차드는 그런 그녀를 이용하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손에 얻었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어떨까?
앤시아는 블레이크를 바라보았다. 그는 앤시아를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서늘하게 읊조렸다.
“마물이라….”
“네! 그 여자는 마물이에요! 당장 내쫓아야 해요! 아니, 살려둬서는 안 됩니다!”
“지금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 알고 있나?”
“네! 마물을 죽여야지요!”
조앤나의 눈동자가 아이처럼 순수하게 반짝였다.
“죽인다….”
“마물을 곁에 둘 수는 없잖아요!”
“영애가 말하는 마물이 혹시 세이렌인가?”
“네! 맞아요! 세이렌이에요! 남자들을 유혹하는 흉측한 괴물이죠! 결국은 유혹한 사내를 잡아먹는다고 해요! 당장 없애버려야 합니다!”
조앤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저 괴물을 치워버릴 수 있다. 저 계집만 사라지면 황태자의 옆자리는 자신의 차지가 될 거다!
그런데 희망에 찬 조앤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제이든이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
“뭐죠?”
그녀는 표독하게 쏘았다. 자신이 황태자비가 된다면 저 평민 기사부터 없애버릴 거다!
“세이렌은 바다의 마물입니다.”
“바다 마물이라고 육지에 올라오지 말라는 법은 없잖아요!”
조앤나는 발끈했다.
“아니요. 올라오기 어려울 겁니다. 세이렌은 반인반어니까요.”
“반인반어요…?”
“인어라는 겁니다. 아름다운 노래로 선원들을 유혹해서 잡아먹죠.”
세이렌은 노래를 부르는 인어였다. 인간이며 말도 하지 못하는 앤시아는 어느 쪽도 해당 사항이 없었다.
하지만 조앤나는 여기서 물러날 수 없었다.
마물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흉측한 주제에 황태자의 옆에 있는 저 여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물이 인간으로 변한 걸 거예요!”
그녀는 억지를 썼다.
조앤나는 영주의 딸이었다. 비록 혼돈의 계곡 옆에 처박힌 작은 시골 영지였지만, 이 마을의 유일한 귀족 영애였다.
딕스 자작은 외동딸을 끔찍이 아꼈고, 발린 영지의 어느 누구도 그녀의 말을 거역하지 못했다.
조앤나의 말은 언제나 옳았다. 사실과 다르더라도 맞는 것이 되었다. 그러니 틀릴 수가 없었다.
“당장 가둬야 해요! 괴물이 인간인 척한 걸 수도 있잖아요! 저주받은 걸지도 몰라요!”
그녀가 말을 할수록 블레이크의 눈빛은 싸늘해졌다.
이게 아닌데. 이렇게 돼서는 안 되는데.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하는데….
조앤나는 초조해졌다. 하지만 의견을 굽히고 싶지 않았다. 처음부터 저 계집이 문제였다.
어떻게든 저 계집만 치우면 된다! 그럼 황태자는 내 차지가 될 거다. 나의 꿈도 이루어질 거다.
“혼돈의 계곡에서 있었다면서요! 분명히 어둠의 문을 타고 넘어온 마족일 거예요! 그래요! 아니면 마족에게 영혼을 판 로움족이겠죠! 당장 신전에 고발해야 해요!”
“고발이라…. 각오는 하고 말하는 거겠지?”
마족이나 마족 숭배자로 의심되는 사람은 즉시 신전에서 재판을 받았다.
필립이 여신의 힘을 빼앗았을 때, 이 땅에 내려졌던 빛의 힘도 사라졌다. 여신이 봉인되어 있는 혼돈의 계곡에서 빛의 마나석이 다량으로 나오긴 했지만, 신성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마나석만 가지고 세력을 유지하기는 어려웠다.
신전의 힘은 급속도로 약화되었다. 그리고 마족 재판은 신전에서 주관하는 유일한 재판이었다. 신전은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자신의 힘을 지켰다.
마족이나 마족 추종자로 몰리면 십중팔구 죽임을 당했다. 마족으로 판결받아도 죽고, 결백을 증명한다 하더라도 심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죽음을 맞이했다.
처음에는 마족으로부터 세상을 지키기 위한 숭고한 목적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천 년의 시간 동안 변질할 대로 변질되어, 신전의 힘을 키움과 동시에 정적이나 싫어하는 이들을 제거하는 도구로 이용되었다.
텐스테온은 즉위하자마자 마족 재판을 없애려 하였다. 하지만 신전에서는 강하게 반발하며, 새로운 황제가 마족을 숭배한다는 헛소문을 퍼트리기도 했다. 마족 재판이 사라지면 신전의 힘이 급격하게 약해질 게 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텐스테온은 굴복하지 않았다. 강제로 마족 재판을 철폐하지는 못했지만, 대신 방법을 바꿨다.
마족 재판은 목숨을 거는 일이다. 마족으로 몰리는 순간 죽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마족 재판은 생명의 무게를 지닌다. 그렇다면 고발을 한 자도 그와 동일한 무게를 견뎌라.’
텐스테온은 그리 명했다. 만약 죄 없는 자를 무고했다면, 고발자의 목숨으로 대신 갚으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 번 마족으로 몰린 이상 스스로 결백을 증명해야만 했던 과거의 악습을 철폐하고, 고발자에게도 상대가 마족임이라는 타당한 증거를 제출하도록 했다.
고발자에게 책임을 지우자, 마족 재판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조앤나는 로즈가 마물이라고 한 데 이어서 이번에는 마족이라고 주장했다. 마물, 마족, 마물 추종자, 어느 쪽이든 죽음을 피하지 못한다.
조앤나는 로즈를 고발한다고 했다. 이는 곧 로즈가 마족이 아니라면 자신의 목숨을 걸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블레이크는 각오를 물었다. 하지만 조앤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당장 신전에 연락하겠어요!”
“정말 고발할 텐가?”
“네! 당장 알트 신관님을 부르겠어요!”
알트 신관은 발린 영지에 있는 하나뿐인 신전을 관리하는 중위 신관이었다. 그리고 조앤나의 대부이기도 했다.
알트 신관은 딕스 자작과 결탁하여, 수많은 이들을 마족 재판으로 처리해주었다. 그중에는 조앤나가 고발한 자들도 많았다.
자신이 신고한 이상 알트 신관은 무조건 마족이라 판결을 내릴 거다.
아니, 그게 아니어도 저 괴물은 마족일 거다. 진짜 마족! 아니면 마물이겠지. 절대로 평범한 인간일 리가 없다.
황태자가 자신이 아닌 저 괴물을 택했다는 것부터가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
재판을 받으면 저 흉측한 괴물은 즉각 처리될 거다. 그럼 황태자도 마족의 마수에서 벗어나겠지.
그녀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앤시아를 내려 보았다.
앤시아는 흠칫 몸을 떨었다.
원작에서도 조앤나는 다이애나에게 온갖 비방을 퍼붓다가 결국에는 마족으로 몰았다.
텐스테온의 제위 시절에 잠시 주춤했던 마족 재판은 카실 공작의 등극과 함께 다시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다.
아놀드 카실과 그의 아들들은 텐스테온이 마족 추종자이며 마족을 소환하기 위해 흑마법을 사용하다 죽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텐스테온이 마족 재판을 철폐하기 위해 노력한 것 또한, 마족의 명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몰아갔다.
그들은 그렇게 위대했던 성군의 명예를 짓밟고, 마족 재판을 이용하여 텐스테온을 따르던 무수한 사람들을 죽였다.
조앤나 역시 그런 인물 중 하나였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마족으로 몰아서 죽였다.
텐스테온은 마족 재판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지만, 서쪽 끝에 있는 고립된 영지까지는 그의 눈이 미처 닿지 못한 거다.
그 뒤 리차드의 계략에 의해 텐스테온이 승하하고 마족 재판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자 그녀를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앤나는 그저 자신에게 거슬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신전에 고발을 일삼았다고 한다.
앤시아는 원작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녀가 자신을 마족으로 몰아가는 것 자체는 그리 놀랍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이 너무 섬뜩했다.
마족으로 몰리면 목숨을 잃는다. 하지만 무고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상황에서도 조앤나의 눈에는 일말의 죄책감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거슬리는 벌레를 치워버린 희열과 우월감, 그리고 재미가 섞인 표정이었다.
아무런 거리낌도 없는 순수한 악의와 마주하자 전신에 소름이 끼쳤다. 활자로 보았을 때보다 훨씬 악랄했다.
원작에서 조앤나는 다이애나를 마족이라 고발한다. 신전의 고문실로 끌려간 다이애나는 두려움에 떤다.
하지만 리차드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방조한다. 힘을 써서 고문이 시작되지 않도록 막지만, 그녀를 구해주지는 않는다.
다이애나를 완전히 궁지에 몰아넣고, 그녀의 정신이 무너질 때까지 기다리다가, 아무것도 몰랐던 척 그녀를 구해주고, 쓸모를 다한 조앤나를 처리한다.
다이애나는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자신을 살려준 리차드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두 사람은 한층 가까워진다.
상대를 극한의 상황으로 몰아붙인 뒤 구원자처럼 나타나서 그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필립과 리차드 모두 똑같았다.
영혼이 같으니 하는 짓도 똑같을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블레이크는 어떨까?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나의 손을 굳게 잡고 있었다.
“당장 신전에 연락해서, 저 여자의 정체를 밝혀내겠어요!”
“그럴 필요 없다.”
블레이크는 싸늘하게 조앤나의 주장을 쳐냈다.
“하지만 재판을 받으려면 신관이 있어야….”
“제이든, 대신관을 모셔와라. 서점 근처의 여관에서 책을 보고 있을 거다. 이 밤까지 불이 켜져 있는 곳을 가면 된다.”
“대신관님이요…?”
조앤나는 당황했다. 대신관이라니,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뭐라 말릴 새도 없이 제이든은 밖으로 나갔다.
조앤나뿐 아니라 앤시아도 어리둥절했다.
대신관? 오늘 혼돈의 계곡에 직접 찾아오더니, 발린 영지까지 따라온 걸까?
앤시아는 7년 전, 어둠의 문 앞에서 자신에게 화를 내던 늙은 대신관의 얼굴을 떠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제이든이 돌아왔다. 하지만 그의 곁에는 백발의 노인이 아니라 선해 보이는 20대 남자가 서 있었다.
“전하, 이런 야심한 밤에 대신관을 함부로 끌고 오다니요. 황실에 항의할 겁니다.”
남자의 이름은 마론으로, 7년 전에 새롭게 대신관이 된 인물이었다. 당시 18살의 어린 나이였지만 텐스테온의 적극적인 지지 아래 대신관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블레이크에게 무척 호의적이었다. 황제의 힘으로 대신관이 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블레이크가 지닌 여신의 힘에 매료된 것이다.
“어차피 깨어 있었을 텐데.”
블레이크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렇긴 해도 야심한 시각이죠.”
“부르는 게 싫었으면 여기 머물 거라 말하질 말아야 했지.”
아침에 인사를 나눌 때, 대신관은 발린 영지에 머물 거라 말했다. 그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한밤중에 멋대로 호출하란 뜻이 아니었는데요. 저는 대신관입니다.”
“알아. 알았으니 부른 거잖아.”
블레이크는 귀찮다는 듯 건성으로 툭 뱉었다. 그 모습을 보며 앤시아는 당황했다.
저 순한 얼굴로 투덜거리는 남자가 대신관임은 분명해 보였다. 아마 카실 공작 가문이 몰락하며, 그의 편에 섰던 대신관 역시 교체된 모양이다.
대신관의 나이가 무척 젊어서 의외이기도 했지만, 그 전에 두 사람 사이에 격이 없어 보여서 놀라웠다.
물론 호감을 표하는 건 대신관이고 블레이크는 그저 귀찮아 보일 뿐이었지만, 그래도 편하게 말을 놓고 있었다.
“제가 전하를 좋아한다 하여 너무 막대하시는군요.”
“농담은 그쯤 해둬. 그대를 부른 건, 조앤나 딕스가 마족 재판을 신청했기 때문이다.”
“그렇습니까?”
그는 순한 미소를 지우고 위엄이 서린 얼굴로 조앤나를 바라보았다.
조앤나는 그 시선을 당당히 받아쳤다. 대신관이 나타났다 한들 달라질 건 없었다.
마물로 몰리면 무조건 죽는다. 살아남을 수 없다. 이는 천 년을 이어 내려온 아스테릭의 전통이었다.
“네. 대신관님! 저 로즈라는 여자는 마족입니다!”
“정식으로 재판을 신청하시는 겁니까?”
“네.”
“마족 재판의 법률에 따라 로즈 양이 마족이 아닐 시, 딕스 영애가 사형을 당하게 됩니다. 아십니까?”
“…네! 알고 있어요!”
제도에 갔을 때 그런 이야기를 들은 것도 같았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그럼 고발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네! 당장 저 여자를 신전으로 끌고 가세요! 조사하면 나올 겁니다!”
이제 앤시아가 마족인지 아닌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어차피 고문하면 자백을 할 거다. 자백하지 않더라도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죽는다.
“밤이 늦었으니, 지금 시작하죠. 발린 영애, 로즈 양이 마물이라는 증거가 있습니까?”
“저 흉측한 얼굴을 보십시오! 저것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왜 나한테 증거를 묻는 거야? 그냥 고문해버리라고! 조앤나는 그리 생각하면서도 일단 소리를 질렀다.
“대신관 님, 저 마물을 당장 없애야 해요!”
대신관은 무심한 얼굴로 그녀의 말을 들은 뒤, 이번에는 블레이크에게 물었다.
“전하, 로즈 양은 마물입니까?”
앤시아는 블레이크를 바라보았다. 그의 대답에 따라 앤시아는 목숨을 잃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블레이크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의 손을 굳게 잡아주고 있었다.
“아니. 인간이다.”
블레이크는 앤시아를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대신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인간이 분명하군요.”
대신관이 가볍게 손을 들자, 제이든은 방문을 열었다. 그러자 밖에서 대기하던 성기사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우선 황태자에게 예를 갖추고는, 자신이 모시는 대신관의 명령을 기다렸다.
“조앤나 딕스는 선량한 인간을 마족이라며 무고하였다. 죄인을 끌고 가라.”
“자, 잠깐만요! 이, 이게 뭐예요! 조사는요! 고문은요?!”
당황하는 조앤나를 향해 대신관 마론이 싸늘하게 일갈했다.
“여신의 힘을 지니신 황태자 전하께서 직접 증언해주셨다. 이보다 더 큰 증거가 있느냐?”
블레이크는 이 대륙에서 빛의 힘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었다. 대신관인 마론조차 블레이크의 힘을 인정하고 존경을 표했다.
그러므로 지금 이 땅에서 마물과 마족의 힘을 누구보다도 확실하게 알아챌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블레이크였다. 즉, 그의 말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없었다.
여신의 힘을 지닌 블레이크가 마물을 사람이라 착각할 리도 없고, 속을 가능성은 더더욱 없었다.
조앤나가 고발한 순간부터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그녀는 절대로 고발해서는 안 될 사람은 건든 거다.
그녀도 이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이미 대신관의 명을 받은 성기사들이 그녀를 포박하고 있었다.
“자, 잠깐만요! 나, 나는 발린 영주의 외동딸이에요!”
이 땅에서 가장 높은 여자라고요!
비록 무고하였다고는 하지만, 자신은 귀족이었다. 신분도 모르는 저런 흉측한 괴물을 고발했다고 해서 이리 함부로 대할 수는 없는 거다.
“잠깐만요! 왜 묶는 거예요! 이거 놔! 이거 놓으라니까! 전하! 제가 실수했어요! 고발한 거 취소할게요! 그러니까 풀어줘요! 이거 놔!”
조앤나는 애원했지만 블레이크는 그녀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아름다운 얼굴을 구기며 경멸에 찬 시선을 던졌을 뿐이다.
결국 조앤나는 밖으로 끌려 나갔다. 문이 닫히기 전, 블레이크가 화상 흉터로 얼룩진 괴물의 얼굴을 자상하게 어루만지는 모습이 보였다.
***
조앤나는 발린 영지에 있는 신전의 지하 감옥에 갇혔다. 하지만 겁은 나지 않았다.
단지 황태자의 마지막 표정이 떠올라서 괴로울 뿐이었다.
‘말도 안 돼! 그의 애정 어린 시선을 받아야 하는 사람은 바로 나라고! 그런데 왜 나를 경멸하고, 저 괴물을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는 거지?’
역시 황태자는 마족에게 홀린 것이 틀림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 말고는 이 상황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조앤나는 이를 갈았다. 성기사에게 끌려갈 때는 잠시 겁을 먹기도 했지만, 이제는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자신이 누군가. 발린 영주의 하나뿐인 귀한 딸이었다. 평민 나부랭이를 고발했다고 해서 정말로 처형을 당할 리가 없다. 그저 조금 혼나고 말겠지.
대신관이 떠나면 원래 발린 신전을 책임지던 알토 신관이 이 사건을 담당할 거다. 그럼 곧장 풀려나겠지.
아버지가 나를 이런 곳에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내가 끌려온 걸 알고 지금쯤 노발대발 난리가 났을걸.
무능한 기사 놈들! 내가 성기사한테 끌려가는데 말리지도 않고! 여기서 나가면 모두 잘라버릴 거다!
조앤나는 분노로 바들바들 떨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설마 이 딱딱한 방 안에서 베개도 없이 잠을 자라는 건가?
“이봐! 문 열어! 문을 열라니까!”
그녀는 감옥 문을 세차게 두드렸다. 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조앤나가 목이 터져라 소리를 쳤지만, 결국 아무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녀는 결국 딱딱하고 축축한 돌바닥에서 잠이 들었다.
뒤틀린 문이 삐거덕거리는 기분 나쁜 소리 때문에 조앤나는 잠에서 깼다.
문이 열리며 신관에서 일하는 하녀가 식사를 가져왔다.
지하 감옥에는 시계는커녕 창문조차 없었다. 하지만 식사를 가져온 걸 보면 날이 밝았다는 뜻이겠지.
“지금 이걸 나한테 먹으라는 거야?”
조앤나는 낡은 나무 그릇에 담긴 삶은 감자를 보고는 소리를 질렀다.
“당장 제대로 된 요리를 가져와!”
그녀가 명령을 내렸지만, 하녀는 같잖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야! 너 내가 누군지 몰라? 죽고 싶어? 나한테 잘못 보이면 어떻게 되는지 모르냐고!”
“어떻게 되는데?”
“감히 하녀 주제에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윽박질렀지만, 하녀는 오히려 더 강하게 조앤나를 노려보았다.
평민이면서 감히 주제도 모르고 되바라진 태도를 취하는 여자의 모습이 낯이 익었다.
‘그래, 저 여자의 동생을 마물 재판에 넘겼었지.’
제발 살려달라며 더러운 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붙들기에 기사들을 시켜서 흠씬 두들겨 패줬었다. 그때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너도 네 동생처럼 만들어 주겠어! 내가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지가 아직도 영주 딸인 줄 아나 보네.”
하녀의 말을 듣는 순간 조앤나의 머리가 딱딱하게 굳었다.
“뭐…?”
“네 아버지 잡혔어. 알트 신관도 끌려갔고. 영지 사람들이 새벽부터 줄을 서서 너희들의 악행을 증언하고 있어. 드디어 복수할 수 있어서 모두 기뻐하고 있어.”
“그, 그게 무슨 말이야? 왜? 아버지가 어떻게?”
아버지는 이 땅의 영주였다. 발린 영지에서는 황제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잡혔다고. 아버지는 자신을 감옥에서 꺼내주어야 했다. 자신이 황태자비가 될 때까지 지원해줘야 했다. 그런데 잡혀버리다니. 그럼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너 때문에 죽은 내 동생을 생각하면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지만, 나는 너 같은 쓰레기랑은 다르니까 정당한 판결을 기다리겠어.”
하녀가 조앤나의 멱살을 움켜잡았다가 풀었다. 하지만 화를 낼 정신이 없었다. 아버지가 붙잡혔다는 현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먹지 그래? 이게 마지막 아침이 될지도 모르잖아.”
하녀는 차갑게 뱉고는 감옥 밖으로 나갔다. 다시 삐그덕거리는 기분 나쁜 소리가 들리더니 육중한 감옥 문이 닫혔다.
조앤나는 볼품없는 감자 덩어리를 바라보았다.
이딴 게 내 마지막 아침이라고? 내가 왜?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감히 내 신경을 거스른 놈들이 나쁜 거잖아! 나는 제국의 정점에 서야 할 몸이라고! 가장 아름답단 말이야! 괴물 주제에 내 자리를 뺏으려 한 게 나쁜 거잖아! 그런데 왜! 왜 내가 벌을 받는 거야!
“아악!”
어린 시절부터 그렸던 꿈이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다. 조앤나는 비명을 지르며 감자 바구니를 집어 던져 버렸다.
“나갈 거야! 당장 나를 내보내줘! 싫다고! 이딴 거 싫단 말이야!”
하지만 그녀의 발악에 가까운 투정을 들어줄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었다.
***
마론은 곧은 성품과 청렴결백한 생활, 그리고 신전 개혁에 대한 강한 의지를 인정받아 젊은 나이에 대신관이 되었다.
텐스테온은 수백 년 넘게 이어져 온 마족 재판을 없애기 위해서 새로운 얼굴인 마론을 발탁했으며, 마론 역시 자신이 대신관이 된 이유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황권의 영향이 강하게 미치는 수도와 주요 지방에서는 마족 재판이 거의 사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섬이나 지리적으로 고립되어 있는 작은 영지에서는 여전히 마족 재판이 횡행했고 그 폐단 또한 극심했다.
영주와 신관의 유착이 심하여 중앙에서 명령을 내려도 좀처럼 개선되지도 않았다.
이에 마론은 직접 각지를 돌며 마족 재판의 실태를 조사하고 처벌을 내리기로 하고, 가장 먼저 서쪽 끝에 있는 발린 영지를 찾았다.
발린의 영주와 그의 독녀인 조앤나는 사소한 이유로 마족 재판을 일으켜서 많은 사람을 처형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들 부녀를 두려워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고 아무런 증거도 없이 영주를 무단으로 잡아들일 수도 없었다.
조사가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블레이크 덕분에 상황이 쉽게 풀렸다.
조앤나가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들은 영지민들은 새벽부터 줄을 서서 영주와 조앤나, 그리고 알트 신관의 악행을 고발했다. 덕분에 영주와 신관 모두를 한꺼번에 일망타진할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전하 덕분에 일이 수월하게 풀렸습니다.”
마론은 블레이크에게 감사 인사를 표했다.
그는 블레이크가 혼돈의 계곡에 머문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찾아갔다. 그때 발린 영지에 머물 거라는 말은 했지만, 그 이유까지 밝히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블레이크는 마론을 찾아주었다.
“그 여자가 제 무덤을 팠을 뿐이다.”
“제가 이곳에 머문다는 걸 잊지 않고 기억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그는 자신이 어디에 머물 거라고 말하지 않았다. 애초에 장소도 정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도 블레이크는 마론이 있을 만한 장소를 예측해냈다.
“그대는 스스로에 대한 걸 너무 많이 떠들어.”
“그런 말은 처음 듣습니다.”
마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질렸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만나기만 하면 자기 자신에 대해 떠들어 놓고는 자각이 없는 건가?
“어쨌든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이다.”
저주의 계승자, 로움족 그리고 마족 재판까지. 아스테릭 제국은 혐오가 이어져 왔고, 블레이크는 모든 경멸의 중심에 있었다. 그 역시 무분별한 마족 재판이 없어지길 바라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더 할 말이 있나?”
블레이크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이만 가보라는 축객령이었다.
“제가 가길 바라시는군요.”
“알면 이만 물러나지.”
“그 여인 때문입니까?”
마론은 블레이크를 좋아했다. 그 바탕에는 빛의 여신의 힘을 지닌 자에 대한 순수한 경외심이 깔려 있었다.
그렇기에 블레이크가 자신에게 공대를 할 때마다 극구 사양하며 하대할 것을 청했다. 하지만 단순히 그가 여신의 힘을 지녔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블레이크는 어린 나이에 저주의 고통을 겪었다. 결국은 저주를 이겨내고 모두가 부러워하는 힘을 얻었지만, 그 안은 텅 비어 있었다.
그는 타인에게 관심이 없었다. 남에게 무심한 것이 아니라, 실종된 황태자비에 대한 마음이 너무 커서 다른 사람을 들일 공간이 없었다.
여인은 물론이고 친구를 만들 여유조차 없었다. 마론이 아무리 자신에 대해 설명하고 그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취해도 블레이크의 마음속에 작은 터조차 만들지 못했다.
그런 블레이크가 처음으로 다른 이에게 관심을 보였다.
마론은 블레이크가 손을 꼭 잡고 있었던 여인을 떠올렸다.
아름다웠지만, 미모가 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화상 흉터가 심했다.
“마론, 오래된 화상 흉터나 말을 못 하는 이를 치료할 방법이 있나?”
“신전의 치료술은 모두 마나 석에서 나오지요. 여신의 힘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전하께서 하지 못하시는 건, 저도 하지 못합니다.”
“그렇군.”
절대로 남에게 의지하거나 약한 소리를 하지 않는 분이었다. 그런데 마론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 여인을 무척 아끼고 있구나. 황태자비가 떠난 이후 처음으로 황태자의 마음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왔다.
신분도 불확실한 데다가, 외모도 흉했다.
저 여인과 함께하기 위해서는 험난한 길을 걸어야 할 거다. 걱정이 일었지만, 여신이 내린 저주마저 극복한 블레이크라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대신관으로서 축복을 빌겠습니다.”
“고마워.”
블레이크는 미소를 지었다. 7년 만에 처음 보는 환한 미소였다.
***
조앤나는 원작처럼 죄 없는 사람을 마족이라고 몰았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리차드와 달랐다. 즉시 그녀의 죄를 물으며 나를 지켜주었다.
어젯밤 일을 떠올려보면 이상할 만큼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나는 블레이크를 믿었다. 지금은 앤시아가 아닌데도 그가 나를 지켜줄 거라는 것에 일말의 의심도 들지 않았다.
블레이크는 어젯밤 내내 나의 손을 잡아주었다.
단순히 무고하게 의심받는 나를 위로해주기 위해서였을까?
아닐 거다. 그는 내가 앤시아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렇게 잘해주는 거다.
도대체 어떻게 알아본 걸까? 곰곰이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고작 깻잎과 레몬잼을 가지고?
깻잎은 샐러드 안에 잘게 잘라져 있었다. 모르고 먹었다면 그만이었다. 홍차에 레몬잼을 넣어 먹는 사람은 많았다.
그가 나를 알아봐 주면 기쁠 줄 알았는데, 마음이 오히려 복잡했다.
기사들은 아침부터 출발 준비로 분주했다.
블레이크는 대신관이 찾아와서 잠시 자리를 비웠고, 나는 한편에 앉아서 기사들이 준비하는 걸 바라보았다.
사실 뭐든 돕고 싶었지만 내가 어설프게 껴들어봤자 방해만 될 것 같았다.
화상 흉터가 심한 왼손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오른손도 미세하게 떨렸다.
“아우, 이놈의 유목 생활은 언제쯤에야 끝이 날지.”
“그러게 말이야.”
젊은 기사들이 투덜거렸다. 하지만 폴과 매튜처럼 농땡이를 부리는 사람은 없었다.
“어제 암석 때문에 에드온 경이 엄청나게 놀랐잖아. 이제 절대로 허락 안 할걸.”
“전하께서 어디 남의 말을 들으실 분인가?”
“모르는 소리. 저래 보여도 아모리아궁에서 함께 지내던 사람들한테는 은근히 약하시다고. 게다가 국혼을 치르고 나시면 오고 싶어도 못 오시겠지.”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블레이크가 결혼한다고…?
“결혼을 하면 마음을 좀 다잡으시려나…. 다이애나가 언제 졸업이지?”
갈색 머리의 기사가 제이든에게 물었다.
“지금 6학년입니다.”
“그럼 몇 년 유급한 거지?”
“2년입니다.”
“걔도 입학할 때는 엄청 기대를 많이 받았었는데. 언니 찾겠다고 휴학해버리더니, 2년이나 꿇었구나.”
다이애나가 나 때문에 2년이나 쉬었다고? 자기보다 어린애들을 선배라고 부르기 싫다면서 필사적으로 공부하던 다이애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당연히 지금쯤이면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기사가 되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아직 아카데미를 다니고 있었다니….
“입학하자마자 2년이나 휴학을 할 수 있어? 안 되지 않아?”
“폐하께서 힘을 쓰신 거지. 그때는 비 전하의 여동생이라 그런 줄 알았는데, 결국 며느리를 챙겨준 게 돼버렸네.”
“졸업하면 결혼하는 건가?”
“그렇겠지. 이번 건국제 때 발표할 거라던데.”
“건국제 때 발표하고 졸업하자마자 국혼을 치르려면 시간이 엄청 촉박하겠네.”
“그러니까 이제 혼돈의 계곡에 오려고 해도 올 시간도 없을 거야.”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는데, 머리칼이 유독 짧은 기사가 툭 말을 뱉었다.
“결혼한 김에 전하랑 다이애나가 손잡고 비 전하를 찾아다니는 건 아니겠지?”
“야! 무서운 말 하지 마!”
“맞아. 그게 말이 되냐?”
“왜 말이 안 돼? 두 사람 다 비 전하라면 끔찍하잖아.”
“알렉스, 네가 그러니까 여자한테 인기가 없는 거야.”
“뭐? 내가 뭐 어때서?!”
알렉스라고 불린 기사가 발끈했다.
“이제 다이애나는 황태자비가 되는 거야. 아무리 친언니고 자매간의 우애가 돈독했다고 한들, 남편이 다른 여자를 찾으면 누가 좋아하겠어?”
“그런가…?”
“당연하지.”
“뭐, 그럴지도 모르겠네.”
알렉스는 짧은 머리를 긁적이며 쉽게 순응했다.
“어쨌든 전하도 그렇고 다이애나도 결혼을 계기로 마음을 잡았으면 좋겠다. 언제까지 돌아가신 분을 찾아 헤맬 수는 없잖아. 산 사람은 살아야지.”
“나는 이제 전하께서도 현실을 받아들이신 거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혼인도 하시는 거고.”
“그런가?”
“내 생각은 그래. 이번에 혼돈의 계곡에 온 건 마지막 미련일걸. 결혼하면 전하께서도 마음을 정리하시겠지.”
“어찌 됐든 계곡행은 이게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 이제는 제발 좀 황궁 기사답게 황궁에서 좀 지내보자.”
“제발!”
기사들은 희망에 차 있었다. 블레이크와 다이애나가 결혼하면, 황태자의 방황이 끝나고 다이애나도 마음을 잡을 거라 기대했다.
그리고 희망찬 분위기 속에 충격을 받은 내가 있었다.
나는 내가 앤시아라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말을 해도 되는 건지, 에 대해서만 고민했다.
참으로 얄팍한 생각이었다.
내가 황궁을 떠나고 7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블레이크와 다이애나는 성장해서 어른이 되었다. 단순히 몸만 커진 것이 아니다.
그동안 많은 일을 겪으며, 내가 알지 못 하는 그들만의 삶이 생겨났다.
천 년 전, 나는 라온텔이었고 블레이크는 락슐이었다. 많은 시간이 흘러 우리는 다시 만났고, 또다시 함께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무의식중에 블레이크에게는 나뿐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떠나고 나면 블레이크의 마음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걱정했을 뿐, 그에게 다른 상대가 있을 거라는 걸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원작을 알면서도 깜박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구나, 다이애나랑 결혼하는구나…. 다이애나랑…. 원작에서처럼….
내가 떠난 7년 사이 두 사람은 결혼을 약속한 사이가 되었다.
“폴과 매튜 경이 파직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말을 조심하십시오.”
제이든이 나직하게 말하자, 기사들이 흠칫 떨며 주위를 살폈다. 그들은 블레이크가 없는 걸 확인한 뒤 제이든을 타박했다.
“너는 3기나 후배면서 선배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냐?”
“실력이 좋은 건 알겠으니까 예의도 좀 갖춰.”
“제가 틀린 말을 했습니까?”
“너무 뻣뻣하잖아. 말할 때는 좀 웃으면서 말하고.”
“안 웃긴데요.”
“그냥 웃어! 누군 웃겨서 웃냐?”
“그럼 왜 웃는데요?”
대화 주제가 제이든으로 넘어갔다.
나는 그들의 말을 흘려들으며 블레이크와 다이애나의 모습을 상상했다. 왠지 잘 그려지지 않았다. 다이애나가 성장한 모습을 보지 못했기 때문일까….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해?”
블레이크의 음성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고개를 들자, 그가 부드럽게 웃으며 나의 손을 잡았다.
“가자.”
순간 나도 모르게 그 손을 빼버렸다.
“로즈…?”
나는 반사적으로 근처에 서 있던 제이든의 옷깃을 잡았다.
“저와 함께 타시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이는데, 제이든의 몸이 갑자기 멀어졌다. 블레이크가 제이든을 가볍게 밀치며 나의 손을 잡은 것이다.
“마차를 준비했어. 가자.”
“…….”
“로즈, 어서 가자. 어제도 잘 못 잤잖아.”
그는 허리를 숙이며 나와 눈을 마주쳤다. 걱정이 가득 담긴 다정한 눈빛이 7년 전과 똑같아서 거절할 수가 없었다.
***
손이 계속 저렸다. 아마 말을 탔으면 제대로 허리를 잡지 못하고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그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서 마차에 탄 거긴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 상태는 어때?”
‘좋아요.’
“정말?”
‘네.’
나는 애써 미소 지었다. 그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어젯밤에 많이 놀랐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쁜 말은 지워버려. 자기가 흉측하니까 흉측한 것밖에 보이지 않는 거야.”
‘정말로 괜찮아요.’
조앤나의 말 같은 건 머릿속에서 지운 지 오래였다. 어젯밤을 떠올리면 블레이크가 내 손을 꼭 잡아주었던 감촉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너는 아름다워.”
블레이크가 나의 왼손을 잡으며 화상 흉터가 가득한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 누구보다도 예뻐. 앤시아.”
그리고 나의 이름이 나왔다. 나는 깜짝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붉은 눈동자가 나를 꿰뚫을 것처럼 짙게 응시했다. 블레이크가 나에 대해 알고 있듯, 나도 그를 알고 있다.
아직 100퍼센트 확신을 한 건 아니다. 나를 떠보기 위해 이름을 부른 걸 거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답을 하면 좋을까?
세르는 블레이크가 나를 버릴 거라 했다. 내가 앤시아인 걸 밝힌들 변해버린 외모 때문에 떠날 거라 말했다. 하지만 그 점은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흉터로 가득한 왼손에 아직 블레이크의 입술이 닿았던 감촉이 남아 있었다.
그는 외모 때문에 나를 버리지 않는다. 실망하지도 않을 거다.
하지만 이미 많은 세월이 흘렀고, 나의 빈자리도 채워졌다.
블레이크는 마음을 정리하고, 다이애나와 새로운 삶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직 혼돈의 계곡에 머물며 나를 찾아 헤매곤 있지만, 그래도 마음속으로는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거다. 그러니 다이애나와 결혼할 생각도 했겠지.
원래 그의 첫사랑은 다이애나였으니, 놀랄 일은 아니다.
다이애나 또한 휴학으로 2년 동안 아카데미를 유급할 만큼 방황했다. 이제 겨우 졸업을 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나타나면 어떻게 될까? 내가 건강하다면 이런 걱정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내가 앤시아라고, 보고 싶었다고, 천 년 전에도 어둠의 문 안에서도 많이 그리웠다고 말하며 블레이크에게 매달려 펑펑 울어버렸을 거다.
하지만 나는 올해를 넘기지 못한다. 금방 떠날 사람이다.
지금 내가 앤시아라는 사실을 밝힌다면, 블레이크는 기뻐할 거다. 그리고 가슴 아파하겠지.
몸에 남은 흉터와 언어 능력을 잃어버린 걸 전부 자신의 책임으로 돌릴 거다. 여기에 내가 금방 세상을 떠난다면 그다음은 어떻게 될까?
그는 다시 자책하고, 방황할 거다. 7년보다 더 긴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다이애나와의 결혼이 미뤄지거나 취소될지도 모른다.
겨우 봉합되었던 상처가 뜯어지며 모든 것이 엉망이 되겠지. 그건 안 된다.
길어봐야 백 일이라고 했다. 남은 시간을 블레이크와 함께 보내고 싶다. 그의 곁에 있고 싶다. 하지만 내 욕심 때문에 모두에게 더 큰 상처를 남길 수는 없었다.
7년 만에 변해버린 모습으로 나타나서 모두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상처를 후벼 판 뒤 무책임하게 떠나고 싶지는 않았다.
앤시아는 7년 전에 죽었다. 모두들 그렇게 생각했으면 좋겠다. 그편이 나나 블레이크, 다이애나, 모두에게 좋다.
나는 결심을 굳히고, 블레이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블레이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앤시아.”
그는 다시 한번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잔뜩 긴장하며 얼굴에 힘을 주었다.
연기를 해야 한다. 내가 앤시아라는 걸 결코 들켜서는 안 된다.
‘앤시아? 그게 누구예요?’
“…앤시아가 누군지 모르나?”
‘몰라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정말 몰라?”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호기심 어린 눈을 빛냈다.
‘누군데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남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 철부지 소녀처럼 눈을 반짝이자, 블레이크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내 아내다.”
‘결혼하셨어요?’
“몰랐나?”
‘높으신 분들의 이야기는 잘 몰라요.’
“그런가.”
블레이크는 그 대답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더는 내가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숨이 막힐 듯한 적막이 마차 안을 채웠다.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블레이크를 따라오지 말걸. 갑자기 몸이 바뀌고, 7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나도 모르게 그에게 의지하고 말았다.
그제는 피를 토했고, 어제는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오늘은 손이 저려서 주먹을 쥐기도 힘들었다. 이 몸은 얼마 버티지 못할 거다. 정말로 백 일은 버틸 수 있을까?
어렸을 때, 하얀 백구를 키웠다. 이름은 백돌이었다. 나보다도 나이가 많다던 백돌이는 어느 날 집을 나갔다.
할머니는 말했다. 백돌이가 나이를 먹어서 죽을 때가 되었다고, 하지만 머리가 좋은 녀석이라 주인에게 죽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떠난 거라고 했다.
그때는 할머니의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이제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블레이크를 떠나면 어디로 갈 수 있을까…?
“꼭 떠날 것 같은 표정이네.”
적막이 깨지며 블레이크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내 아내도 언제나 그런 표정을 지었었어. 꼭 돌아오겠다고 말했지만 결국 떠나버렸지.”
“…….”
“떠날 생각하지 마. 다신 놓치지 않으니까.”
그의 눈이 나를 직시했다. 새빨간 눈동자가 거대한 화염처럼 강하게 일렁였다.
아직도 내가 앤시아라고 생각하는 건가?
‘저는 그 여자가 아니….’
부정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전에 블레이크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절대 놓치지 않아. 이번에는 절대로 안 놓쳐.”
***
오늘 밤은 산에서 야영을 하기로 했다. 블레이크와 단둘이 있는 게 불편했던 나는 마차가 멈추자마자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내가 일부러 피하는 걸 알았는지, 블레이크도 굳이 붙잡지는 않았다.
그는 내가 앤시아가 아니라는 말을 믿는 걸까? 믿지 않는 걸까?
얼굴도 바뀌고 말도 하지 못한다. 글자도 모르고 빛의 능력조차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는 내가 앤시아라고 생각하는 걸까?
게다가 진심으로 믿고 있는 건지, 단순한 감으로 떠보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나를 뚫어질 듯 바라보던 블레이크의 눈빛을 떠올리는데, 무언가가 발에 걸렸다.
아!
그대로 몸이 기우는 순간, 제이든이 말뚝에 걸려 넘어질 뻔한 나를 잡아주었다.
“조심하십시오.”
‘감사합니다.’
제이든은 가볍게 묵례를 하고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내 입 모양을 본 건지 안 본 건지 모르겠다. 애초에 본다고 알 수 있는 걸까?
내 말을 곧잘 알아듣는 블레이크가 신기할 뿐이다. 구석에 있는 그루터기에 앉으려고 하는데, 기사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떡하죠? 천막이 하나 부족한 데요?”
“왜? 맞잖아.”
“로즈 양이 있지 않습니까?”
“아….”
기사들은 나를 바라보았다. 기사 2명이 해고되었기 때문인지 그들은 나의 앞에서 예의를 갖췄다. 그러나 흉터에 대한 거부감마저 지울 수는 없는지 눈가가 미세하게 찌푸려지는 것이 보였다.
고개를 숙이며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이미 긴 머리로 흉터를 가리고 있었지만 더 꼼꼼히 덮는데, 누군가가 그러지 말라는 듯 나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럴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다.
“로즈.”
블레이크가 빙그레 웃으며 눈을 맞췄다. 그리고 기사들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냐?”
“작은 실수가 있었습니다.”
“실수?”
“천막이 하나 부족합니다. 금방 인원을 조정하겠습니다.”
상관의 말을 들은 젊은 기사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인원을 조정하면, 천막 하나를 같이 쓰는 인원이 늘어나게 된다. 나 때문에 자신들의 공간이 줄어드니 달가울 리 없었다.
“됐다. 로즈는 나와 있을 거다.”
“네?”
기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 역시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가자, 로즈.”
하지만 블레이크는 남들의 반응은 신경 쓰지 않은 채 부드럽게 나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
나는 블레이크의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블레이크를 떠나겠다고 결심한 지 몇 시간이나 지났다고…. 참 한심하다.
나는 그에게 참 약했다. 과거 락슐을 그렇게 허무하게 잃었기 때문일까? 아니, 락슐과 약혼하기 전이나 블레이크를 처음 만났을 때도 똑같았다.
아무리 굳게 결심해도 그의 앞에서는 결국 무너져 버리고 만다. 블레이크의 영혼에 사로잡혀 버린 것만 같다.
“이리 와.”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블레이크는 옆에 앉으라고 권했다.
역시 같은 천막에서 자는 건 아닌 것 같다. 내가 쭈뼛거리고 서 있자, 블레이크가 눈가를 사르르 접으며 요염하게 웃었다.
“새삼스럽게 왜 그래. 어젯밤도 함께 잤잖아.”
“!”
이 사람이 진짜!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함께 자기는 누가 함께 잤다고 그래!
저 오해받기 딱 좋은 말버릇은 세월이 지나도 여전했다. 게다가 어릴 때와 달리 눈빛마저 묘해서 정말로 이상한 분위기를 풍겼다.
블레이크의 침대에서 잠을 잔 건 맞지만, 조앤나와 영주가 잡혀가는 등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기 때문에 블레이크는 대신관과 함께 밤새 일을 처리했다. 어젯밤은 나 혼자 잔 거나 마찬가지였다.
말을 못 하니까 반박도 할 수 없었다. 내가 한껏 흘겨보자 블레이크가 ‘푸흡’ 가벼운 웃음을 터트렸다.
“편하게 쉬어. 기사들 천막보다 넓으니까, 불편한 건 별로 없을 거야.”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 보았던 기사들의 천막보다 훨씬 넓었다. 처음 눈을 떴을 때도 분명 여기였던 거 같은데, 그럼 그때도 블레이크의 천막을 썼던 건가?
“잠드는 것만 보고, 나갈게.”
나는 결국 그가 이끄는 대로 침대 위에 앉았다. 블레이크가 나의 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더니, 손을 꼭 잡았다.
“왜 이렇게 약해.”
‘괜찮아요.’
“괜찮기는. 이렇게 야위었는데.”
그렇게 말하는 블레이크야말로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해서 피곤해 보였다. 나는 그의 손을 잡아당겼다.
“같이 자자고?”
나는 그의 등짝을 때렸다.
“부부는 함께 자는 거라고 누가 가르쳐 줬었는데.”
‘부부가 아니잖아요!’
그는 가볍게 웃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모르겠다.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내가 앤시아라고 생각하는 건가? 하지만 나도 그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다.
나는 곧 떠날 사람이다. 앤시아인 걸 인정할 수는 없었다.
‘저는 정말로 아니에요. 전하께서 찾는 사람이 아니에요.’
나의 입 모양이 잘 읽히지 않는 걸까? 그는 나를 계속 뚫어질 듯 직시했다.
‘제가 아니에요.’
나는 그가 알아들을 때까지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때 나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던 블레이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만약 그렇다고 해도 네가 누군지 알기 전에는 놔주지 않을 거야.”
“…….”
내가 지금 뭐라고 말한들 의심을 거둘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일단 침대에서 일어났다.
‘여기서 주무세요.’
“너는?”
나는 기사들이 놓고 간 모포를 가리켰다. 아마 다른 기사들도 전부 저기서 잘 거다. 간이침대를 쓸 수 있는 건 황태자나 기사단장 정도겠지. 염치도 없이 그의 침대를 차지할 수는 없었다.
“이리 와.”
하지만 모포를 가리키자마자 다시 침대에 앉고 말았다. 그가 나를 앉힌 것이다.
“쓸데없는 건 신경 쓰지 말고 푹 쉬어.”
그는 나를 눕히고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나는 얼른 그의 손을 잡았다.
“어디 안 가니까 걱정하지 말고.”
블레이크가 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무슨 어린애인가? 목소리만 나왔다면 투덜거렸을 거다.
내가 챙겨줘야 하는데…. 계속 도움만 받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 어서 자자.”
블레이크는 어제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그러니 한 쪽을 택해야 한다면 내가 그를 재워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자연스럽게 나를 침대에 눕힌 뒤 담요를 덮어줬다.
맞잡은 손에서부터 따스한 힘이 흘러들었다. 어지럽고 답답하던 속이 일순 편해지며 스르륵 잠이 들었다.
***
블레이크의 삶은 끝없는 암흑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는 다섯 살 때 여신의 저주에 걸렸고, 황태자궁에서 쫓겨나 남쪽 구석에 있는 낡은 별궁에 유폐되었다. 매일 아팠고, 날카로운 칼로 생살을 후벼 파는 듯한 고통에 시달렸다.
그는 고통 속에서 아버지를 찾아 헤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언젠가 아버지가 자신을 구하러 올 거라는 기대는 사라졌다.
이대로 고통과 저주의 문장에 뒤덮여 결국 죽게 되겠지.
그는 방 안에 틀어박혀 홀로 시간을 보냈다.
궁인들은 블레이크를 경멸하고 무시했다. 상관없었다.
아버지도 나를 버렸다. 이 세상에 나 같은 괴물을 좋아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다.
하지만 그들 중에서도 친절한 사람은 있었다.
“전하, 산책을 하시죠. 날씨가 좋답니다.”
멜리사와 한스, 에드온은 그에게 자주 말을 붙였다. 하지만 그조차도 귀찮고 싫었다. 블레이크는 조용히 혼자 있고 싶었다. 아무도 없는 캄캄함 방에서 홀로 조용히 죽고 싶었다.
하지만 에드온은 가끔 집요할 때가 있었다.
“가만히 책만 읽으시면 저주를 이겨낼 수 없답니다.”
“산책을 해도 저주는 안 풀려.”
“그러지 말고 나가시죠! 오늘은 보름달이 떴습니다. 아주 예쁘답니다.”
블레이크는 결국 에드온의 성화를 이기지 못하고 방을 나섰다. 그러자 다른 사용인들이 그를 벌레 보듯 쳐다보았다. 블레이크는 당장 방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에드온은 눈치도 없이 보름달 타령을 하며 기어이 그를 밖으로 끌고 나갔다.
“달이 아름답죠?”
“몰라.”
“자세히 보십시오. 얼마나 예쁩니까?”
“돌아갈래.”
그저 빨리 방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바깥세상이 싫고 무서웠다. 아무도 없는 곳에 나 혼자만 있고 싶었다.
에드온이 뭐라 하든 무시하고 정말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였다. 블레이크는 깜짝 놀라서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아모리아궁의 출입문 너머에 한 소녀가 서 있었다. 늦은 밤이었지만 밝은 보름달 때문에 그녀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너같이 쓸모없는 걸 황궁 무도회에 데려와 준 이유가 뭐겠냐! 콘웰 백작의 눈에 들라고 비싼 드레스까지 사다 줬더니, 인사도 안 하고 뛰쳐나와!”
“죄송해요. 다신 안 그럴게요.”
“한 번만 더 그러면 내쫓을 줄 알아라! 천한 핏줄인 주제에 결혼이라도 잘해서 가문에 보탬이 될 생각을 해야지!”
아버지로 보이는 남자가 윽박지르며 소녀의 뺨을 때렸다. 소녀는 성인 남자의 힘을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하지만 아프다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계속 잘못했다고 빌었다.
이런 상황이 무척 익숙해 보였다.
“에드온, 저 아이를 도와줘.”
“아, 네.”
블레이크가 타인에게 관심을 보인 건 처음이었다. 에드온은 놀라는 마음을 숨기며 고개를 숙였다.
그날 이후 소녀의 얼굴이 계속 떠올랐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모습이 자신과 겹쳐 보여서였을까? 자신의 잘못이 아닌데도 무조건 비는 모습이 안타까워서일까? 아니, 동질감이나 동정이 아니었다. 그냥 그 아이가 마음에 들어왔다.
그 소녀의 이름은 앤시아라고 했다. 벨라시안 백작의 장녀지만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가 재혼하자, 가문에서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한 모양이었다.
벨라시안 백작은 돈이 많은 귀족에게 그녀를 팔아넘기기 위해서 혈안이 된 상태라고 했다. 그녀가 결혼하기 싫어 인사도 하지 않고 도망쳤다는 콘웰 백작은 부유하지만 여자관계가 복잡하고 나이도 많았다.
딸을 그런 남자에게 보내려고 한 데다가 손찌검까지 하다니…. 블레이크는 분노했다. 어떻게든 그녀를 도와주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블레이크가 고민을 하는데, 황궁에서 전갈이 왔다.
블레이크의 결혼이 결정되었으며, 그 상대가 앤시아 벨라시안이라는 소식이었다.
‘어떻게…? 설마 황제 폐하가 내 마음을 안 건가? 누가 폐하께 내 이야기를 전한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만약 에드온이 그날의 상황을 황궁에 전했다고 해도, 황제가 자신을 위해 나설 리가 없었다.
나는 저주받은 존재고 버려진 자식이었으니까….
결혼 소식을 들었을 때, 블레이크는 솔직히 기뻤다. 앤시아를 구해줄 수 있는 거니까.
하지만 곧 걱정이 됐다. 앤시아도 그렇게 생각할까? 폭력적인 아버지나 돈 때문에 팔리듯 결혼을 하는 것보다도, 괴물인 자신과 결혼을 하는 것이 더 끔찍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오히려 더 큰 지옥으로 떨어졌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우리가 정말로 부부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런 건 꿈도 안 꿔. 알다시피 나는 저주를 받았어. 얼마 살지 못할 거야. 그때까지라도 너를 지켜주고 싶어. 그러니까 여기서 지네. 네가 하고 싶은 건 뭐든 다 해도 좋아. 네가 성인이 될 때까지 이곳이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줄 거야. 내가 죽고 나면 너는 자유야. 자유롭게 살면 돼.”
블레이크는 앤시아가 자신과의 결혼 때문에 좌절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녀에게 할 말을 미리 준비하고, 열심히 연습했다.
하지만 현실은 생각처럼 흘러가지 않았다. 결혼식이 끝나고 방에 돌아와서 가면을 벗는데, 앤시아가 들어왔다.
앤시아는 그의 얼굴을 보더니 그대로 문을 닫고 뛰쳐나갔다. 블레이크가 미리 준비한 말을 할 시간 여유조차 없었다.
그리고 앤시아는 호수에 빠졌다. 블레이크의 얼굴을 보고 충격을 받아서 자살을 기도한 거다.
블레이크는 호수에 빠진 앤시아를 구해냈다.
“내가, 내가 그렇게 싫으면…!”
부부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돼. 아니, 처음부터 그런 꿈은 꿔본 적도 없어. 나는 저주를 받았어. 얼마 살지 못할 거야. 그러니까 그때까지만이라도 너를 지켜주고 싶어….
매일 연습하고 또 연습했던 말들이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의식을 잃었고, 블레이크는 패닉에 빠져서 눈물만 흘렸다.
결혼하는 게 아니었다. 내가 괴물이라는 걸 잊고 있었다. 여신에게 저주받은 영혼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존재다.
‘내 옆에 있는 것보다 더한 지옥은 없을 텐데, 그걸 왜 잊을 걸까? 앤시아가 나 때문에 죽으면 어떡하지?’
블레이크는 혼자 자책했다. 그리고 앤시아가 기운을 차리면 이혼을 해주겠다고 다짐했다.
정말로 헛된 꿈을 꾸었다. 궁인들조차 그를 경멸한다. 형식적인 관계라고 한들 저주받은 괴물과 부부가 되고 싶지는 않을 거다.
‘내가 구해줬다고 원망하면 어떡하지? 나 같은 괴물과 부인이 되느니 죽는 게 나은데 왜 살렸냐고 비난하면 어떡하지….’
그는 두려웠다.
그리고 며칠 뒤, 앤시아가 그의 방으로 찾아왔다.
“오, 오지 마!”
블레이크는 당황하며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또다시 자신의 얼굴을 본다면, 앤시아는 분명 절망할 거다. 하지만 그녀는 블레이크의 이불을 뺏어버렸다. 그리고 가면마저 벗겨냈다.
앤시아는 저주의 문장으로 뒤덮인 블레이크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황태자 전하는 아름다우세요.”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그녀는 블레이크가 아름답다고 했다. 실수로 호수에 빠졌을 뿐이라며 구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저는 황태자 전하가 좋아요.”
그리고 앞으로 평생 들을 일이 없다고 여겼던 말을 해주었다.
“나도, 나도 네가 좋아.”
블레이크는 수줍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다. 미리 준비해두었던 거짓된 멘트가 아니라, 그녀를 본 순간부터 느꼈던 자신의 진심을 말했다.
앤시아는 블레이크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리고 함께 잠이 들었다.
저주에 걸리고 난 뒤부터 블레이크는 언제나 악몽을 꿨다.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건 뜨거운 화염과 여자의 비명뿐이었다.
그는 눈을 뜨면 육체의 고통에 몸부림쳤고, 잠이 들면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단 한시도 편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날은 악몽을 꾸지 않았다. 따스한 빛에 감싸인 듯 포근했다. 그리고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깊은 잠에 빠졌다. 앤시아와 함께한 순간부터 악몽이 사라진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전신을 감싸던 스산한 기운과 통증 또한 많이 약해졌다.
블레이크는 기뻤다. 저주의 영향이 약해졌기 때문이 아니다.
책을 볼 때도, 식사할 때도, 잠을 잘 때도, 잠에서 깰 때도 앤시아와 함께였다.
저주로 가득한 블레이크의 얼굴과 몸을 보고도 그녀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싫어하는 기색도 없었다. 오히려 저주의 문장으로 뒤덮인 손을 꼭 잡아주었다.
블레이크는 검은 어둠 속에 홀로 갇혀 있었다. 그런데 앤시아를 만나면서 그의 세상에도 빛이 찾아왔다.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하지만 행복 속에서도 한 줄기의 불안함이 사라지지를 않았다.
앤시아는 가끔 거짓말을 했다.
“앤시아, 나 떠날 거야?”
그녀는 블레이크를 좋아한다고 했다. 아름답다고 말했다. 그 말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떠날 거냐고 물으면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니요. 토끼 같은 남편을 두고 제가 어딜 가겠어요.”
블레이크가 애원하면, 떠나지 않을 거라며 활짝 웃었지만 진심이 아니었다. 그녀는 진실된 사람이었지만 그것만은 거짓말이었다.
블레이크는 두려웠다.
자신을 좋아하지 않아도 좋고, 괴물이라고 경멸해도 좋으니, 그녀가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블레이크는 두려운 마음에 종종 그녀에게 물었다. 떠나지 말아달라고 애원했다. 그때마다 앤시아는 떠나지 않겠다고 했지만, 여전히 진심은 아니었다.
그녀는 언제든 블레이크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가 싫은 걸까?’
아니다. 앤시아는 나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말이 아니어도 느낄 수 있었다.
앤시아가 블레이크를 바라보는 눈빛, 표정, 말투, 행동, 모든 것이 따뜻했다. 그 어디에서도 가식이나 거짓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이유를 알아냈다.
“황태자 전하의 저주는 반드시 풀릴 거예요! 벨라시안 가문의 빛의 계승자가 전하의 저주를 풀 수 있어요.”
“전하, 그러니까 만약 빛의 계승자가 나타나면, 그 사람과 진짜 결혼하시는….”
앤시아는 그의 저주를 풀어주기 위해서 곁을 떠나려고 했던 거였다. 그 말을 듣자 블레이크는 마음이 놓였다.
‘정말로 내가 싫어서 그런 건 아니었어.’
그리고 안도감이 밀려오는 동시에 화가 났다.
“내가 말했지. 나의 부인은 앤시아뿐이야.”
“하지만 저주를 풀기 위해서는….”
“앤시아랑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저주 같은 건 상관없어.”
저주가 풀리지 않아도 좋다. 그는 앤시아와 함께 있고 싶었다. 저주나 목숨보다는 앤시아와 함께 있는 시간이 훨씬 소중했다.
앤시아와 헤어지는 대가로 저주를 풀 바에야, 그녀의 품에서 죽는 게 나았다.
앤시아는 블레이크의 저주를 풀기 위해 노력했다. 블레이크도 저주가 풀리길 바랐다. 만약 저주가 풀린다면 앤시아와 계속 함께할 수 있을 테니까.
앤시아와 함께한 뒤로 악몽을 꾸지 않고, 저주의 문장도 퍼지지 않았다. 하지만 저주가 풀릴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죽지 않겠다고 약속하긴 했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울 거라는 걸 알았다.
몸이 이상했다. 문장이 퍼지지는 않았지만 갑자기 녹아내릴 것처럼 전신이 뜨거워지거나 여자의 비명이 귓가에 메아리쳤다. 알 수 없는 힘이 넘실거리며 제멋대로 터져나가기도 했다. 아마도 저주의 힘이겠지.
다이애나가 체벌을 당하고 벨라시안 백작이 황태자궁으로 찾아왔던 그날, 이상한 힘이 그의 안에서 폭발했다. 블레이크는 자신의 안에서 일렁거리는 힘을 벨라시안 백작에게 쏟았다.
그리고 길버트 벨라시안은 그대로 미쳐버렸다.
자신의 안에 저주의 힘이 일렁거린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다른 이에게 저주를 옮길 줄은 몰랐다.
물론 길버트 벨라시안의 몸에 저주의 문장이 새겨진 건 아니지만, 정신적으로는 저주를 받은 거나 다름없었다.
여신의 저주가 블레이크를 집어삼킬 만큼 강해지고 있었다. 몸 상태도 점차 나빠졌다.
폐하처럼 멋진 모습을 앤시아에게 보여주고 싶은데, 아직 같이하고 싶은 게 많은데, 주고 싶은 게 많은데….
하지만 몸은 말을 듣지 않았고, 해가 바뀌고 난 뒤에는 미열이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앤시아가 잠시 자리를 비우던 날,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블레이크가 쓰러지자 앤시아는 다시 자책했다. 그리고 또다시 그를 떠나려 했다.
블레이크는 열흘 만에 겨우 깨어났다. 이제 정말로 끝이 가까워져 오고 있다는 걸 느꼈다. 예상했던 일이기 때문에 슬프진 않았다.
‘마지막까지 앤시아와 함께 있고 싶다.’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앤시아가 빛의 계승자라고 했다. 저주를 풀 수 있을 거라고도 했다. 솔직히 반신반의했다.
앤시아의 말이 사실이라면 좋겠지만, 몸 안에 일렁이는 힘이 점차 강해지고 있었다.
‘만약 저주가 풀리지 않더라도 앤시아가 실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걱정과 희망이 교차하는 동안 빛의 축제가 열렸다. 하지만 앤시아는 이번에도 축제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축제에 가자고 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영애나 귀부인 심지어 사내들도 있었다. 그러나 앤시아는 모든 초대를 거절했다.
사교계에서 인기가 높다는 리차드 카실이 직접 아모리아궁까지 찾아왔으나 그 역시도 거절했다.
과거 광장에서 길을 잃어버린 트라우마 때문이라고는 했지만, 사실은 블레이크를 배려해서 하는 말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블레이크는 그녀에게 미안했고, 또 고마웠다.
빛의 축제 마지막 날, 황궁 무도회가 열렸다. 하지만 앤시아는 일찍 돌아왔다. 이번에도 자신을 배려해서 그런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뻐서 웃어버렸다.
블레이크는 그런 스스로가 한심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블레이크와 앤시아는 다락방에서 함께 불꽃놀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검은 하늘을 수놓은 화려한 불꽃도 앤시아의 아름다움을 따라갈 수는 없었다.
블레이크는 용기를 내서 앤시아에게 뽀뽀를 했다.
“앤시아, 사랑해.”
앤시아의 말대로 저주가 풀릴지, 아니면 이대로 거대한 힘에 잡아 먹힐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되든 이 말은 꼭 하고 싶었다. 그래야 후회가 남지 않을 것 같았다.
“저도요. 블레이크를 만나게 돼서 행복해요.”
앤시아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맑게 웃었다.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한 미소에 블레이크도 행복해졌다.
다음 날, 블레이크의 저주가 풀렸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저주의 문장이 새겨졌던 얼굴을 더듬고, 새하얀 손을 보아도 현실감이 없었다.
그저 앞으로도 계속 앤시아와 함께 있을 수 있다. 그 사실만이 명확하게 떠올랐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저주가 풀리자 많은 것들이 바뀌기 시작했다. 무도회 준비를 하고, 별궁을 떠나 중앙에 있는 포렌스궁으로 옮기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블레이크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아우성쳤다.
그는 앤시아와 함께 있고 싶었다. 앤시아만 있으면 충분했다. 저주가 풀리면 앤시아와 평생 함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꾸만 다른 일이 생겼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우리의 세상을 침범하려 들었다.
저주가 풀렸으니 황태자의 책무를 수행해야 한다. 안다. 알고 있다. 하지만 싫었다.
앤시아에게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하지만 참지 못하고 투정을 부리고 말았다.
“나는 앤시아만 있으면 돼. 여기서 계속 앤시아랑 있고 싶어. 다른 곳은 싫어. 여기가 좋아. 떠나기 싫어….”
아모리아궁을 떠나고 싶지 않다. 아무도 찾지 않는 별궁에서 앤시아와 함께 있고 싶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린아이 같았다. 하지만 앤시아는 철부지 같다며 그를 꾸짖지 않았다.
“포렌스궁으로 옮기더라도 아모리아궁이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우리 자주 와요.”
“자주 올 거야?”
“네. 자주 와요. 여긴 우리 둘만의 세상으로 남겨두는 거예요.”
‘둘만의 세상’.
자신만 그렇게 생각하는 줄 알았다.
앤시아는 찬란하게 빛났다. 모두가 그녀를 좋아했다.
블레이크의 세상에는 앤시아뿐이었지만, 그녀의 주변에는 많은 사람이 있다. 자신은 그녀가 좋아하는 수많은 사람 중 한 명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앤시아의 입에서 ‘둘만의 세상’이라는 말이 나왔다. 기뻤다.
그녀도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저주의 문장은 사라졌지만, 몸속을 파고드는 어두운 힘이 사라지지 않았다. 어둠의 문이 열리고 난 뒤로 울렁거림은 더 심해졌다.
불안했다. 다시 저주에 걸릴까 봐 겁이 나는 것이 아니다. 앤시아가 이렇게 좋아하는데, 만약 저주가 살아나면 그녀의 미소가 사라질까 봐 걱정됐다.
하지만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사라졌던 저주의 문장이 다시 나타났다.
의식이 흐려지고 눈을 뜰 수조차 없는 고통이 그를 뒤덮었다.
그때 환한 빛이 보였다. 그리고 앤시아가 그 빛 속으로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앤시아, 안 돼. 가지 마….”
“저주를 풀러 가는 거예요. 이번에야말로 진짜로 저주를 풀어드릴게요.”
“가지 마. 가면 안 돼.”
가면 안 된다. 이대로 사라지면 영영 앤시아를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녀를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주만 풀고 금방 돌아올게요. 그러니까 아프시더라도 조금만 참으세요.”
앤시아는 결국 빛과 함께 사라졌다.
그녀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주가 풀렸다. 열이 내렸고, 몸 안을 일렁거리던 음산한 어둠 또한 완전히 사라졌다.
저주가 풀렸다. 정말로 여신의 저주에서 벗어났다.
블레이크는 느낄 수 있었다. 여신의 저주가 사라졌다. 이번에야말로 완전히 풀렸다. 다시 저주가 재발하는 일은 없을 거다.
하지만 기쁘지 않았다.
저주가 풀렸지만 앤시아는 돌아오지 않았다. 어둠의 문을 봉인하러 간 텐스테온도 귀환하지 않았다.
며칠 뒤, 어둠의 문으로 떠났던 황궁 기사단에게서 파발이 도착했다.
앤시아가 어둠의 문 안으로 떨어졌다는 소식이었다. 마쿨이 날아와서 그녀를 데려갔고, 그 직후 어둠의 문이 닫혔다고 한다.
앤시아를 찾기 위해 대대적인 수색 작업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이미 닫힌 어둠의 문은 열리지 않았으며, 혼돈의 계곡을 샅샅이 뒤져도 그녀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석 달 뒤, 텐스테온이 돌아왔다.
“미안하다. 블레이크. 내가 앤시아를 지켜주지 못했다.”
그는 블레이크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다. 텐스테온의 얼굴에는 앤시아를 잃은 비통함과 아들에 대한 미안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블레이크는 석 달 사이에 부쩍 수척해진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니에요. 폐하의 잘못이 아닙니다.”
폐하의 잘못이 아니다. 이건 전부 내 탓이다. 내가 저주에 걸려서, 내가 앤시아를 말리지 못해서 이렇게 된 거다.
앤시아는 나를 떠나려고 했다. 그럴 때마다 필사적으로 말렸다. 그녀를 잃고 싶지 않아서, 내 욕심 때문에, 지켜주지도 못할 거면서 앤시아를 붙잡았다.
차라리 일찍 떠나보냈다면, 그랬다면 앤시아가 사라지는 일은 없었을 거다.
블레이크는 자책하고 또 자책했다.
앤시아가 실종되었어도 세상은 변함없이 흘러갔고, 여신의 저주가 풀린 것을 축하하는 성대한 황궁 무도회가 개최되었다.
정말로 저주가 풀렸을까? 아스테릭 제국의 귀족은 물론 외국의 사신들까지 황태자를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블레이크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들은 그를 보고 감탄했다.
블레이크는 아름다웠다. 찬란한 은발과 붉은 눈동자에서는 황실의 기품이 느껴졌고, 새하얀 피부에서는 저주의 흔적을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게다가 다섯 살 때부터 남쪽 별궁에 유폐되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에게서는 당당한 빛이 흘렀다. 경멸과 천시 속에 갇혀 지내온 그늘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천 년 만에 여신의 저주가 풀렸다. 게다가 텐스테온의 뒤를 이을 든든한 후계자가 생겼다. 귀족들은 환호했다.
하지만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모두의 사랑을 받았던 황태자비가 사라졌다. 사실 다들 직접적으로 말은 하지 못했지만 속으로는 앤시아가 죽었다고 여겼다.
그녀는 어둠의 문 안으로 들어갔다. 살아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다만 황제가 여전히 필사적으로 찾고 있으니 공식적인 석상에서는 말을 조심을 하는 것뿐이었다.
블레이크는 어느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은 채, 가만히 의자에 앉아 있었다. 텐스테온 역시 침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황태자의 저주가 풀리고, 어둠의 문이 닫혔다. 제국에서 가장 성대하게 치러져야 할 파티가 우울함으로 물들고 있었다.
그때 암전이 찾아왔다.
카실 공작의 무리들이 무도회장을 습격한 것이다.
앤시아를 찾느라 텐스테온은 석 달 동안이나 황궁을 비웠고, 많은 병사들이 혼돈의 계곡에 투입된 상태였다. 카실 공작은 그 틈을 노렸다.
그들은 무도회장의 조명을 끈 뒤, 곧장 황제와 황태자를 노렸다.
하지만 텐스테온은 제국 역사상 가장 완벽한 황제였다. 앤시아 때문에 정신이 없다고 한들, 카실의 잔당에게 무너질 만큼 허술하지는 않았다.
텐스테온과 황궁 기사단은 빠르게 잔당들을 진압했다. 그러자 카실 공작의 잔당들은 마지막 발악을 하듯 폭탄을 터트렸다.
무도회장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귀족이나 시종, 외국의 사절단 할 것 없이 다치고 곳곳에서 비명을 질렀다.
그때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무감한 표정을 짓고 있던 블레이크가 부상자들에게 다가갔다.
블레이크의 손에서 새하얀 빛이 흘렀다. 그 빛이 부상자에 닿자 순식간에 상처가 아물었다.
그는 빛의 마나석이나 약초 등 어떤 도구도 사용하지 않고, 오직 빛의 힘으로 무도회장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치료했다.
“이것은 여신님의 힘입니다!”
블레이크에게 직접 치료를 받은 고위 신관이 소리쳤다. 단순한 치료 마법이 아니었다.
천 년 전의 필립처럼, 지금 블레이크에게서는 빛의 여신이 내린 순수한 빛의 마나가 흘렀다.
사람들은 놀랐다. 저주가 풀렸다고 한들, 빛의 여신이 낙점한 추악한 영혼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며 블레이크를 비난하던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블레이크가 여신의 힘을 지녔다는 사실이 알려진 순간부터 그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은 모두 사라졌다.
오히려 여신의 선택을 받은 자라며 추앙하기 시작했다.
저주가 풀리자 모두들 블레이크를 좋아했다. 귀족들은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블레이크는 갑자기 돌변한 사람들의 태도가 역겨웠다.
블레이크는 앤시아를 잃고, 모든 것을 얻었다. 하지만 그건 전부를 잃는 거나 다름없었다.
***
“언니는 어디 있어요? 언니는 어디 갔냐고요! 언니는 전하를 지켜줬는데, 저주를 풀어줬는데, 전하는 왜 언니를 지켜주지 않았어요!! 전하만 믿었는데! 전하를 믿었는데!!”
앤시아가 실종됐다는 말을 들은 다이애나는 울부짖었다.
“다이애나 영애, 말이 너무 심하십니다.”
“괜찮아. 멜리사.”
블레이크가 얼마나 자책하는지 알고 있던 멜리사가 나섰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그녀를 만류하며 다이애나의 분노를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다이애나는 앤시아를 찾겠다며 홀로 혼돈의 계곡으로 향했다.
하지만 황궁 기사단도 출입이 쉽지 않은 곳을 어린 소녀가 들어갈 수 있을 리 없었다.
다이애나는 계곡의 경비대에게 가로막혀서 수도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뒤로도 몇 번이나 혼돈의 계곡을 찾았다. 아카데미도 돌아가지도 않았다.
그렇게 2년이 흘렀다. 황제와 황태자가 아무리 설득해도 다이애나는 언니를 찾는 걸 멈추지 않았다.
“이번 학기에도 돌아가지 않으면 퇴학이야. 아카데미로 복귀해.”
블레이크는 다시 다이애나를 설득했다. 하지만 그녀는 거부했다.
“싫어요. 제가 아니면 누가 언니를 찾죠?”
다이애나의 눈에는 원망이 가득했다. 블레이크는 그녀에게 미안하면서도 솔직히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2년이 지나자 모두들 앤시아가 죽었다고 떠들기 시작했다.
어둠의 문에 떨어진 순간 죽었다, 마쿨에게 잡아먹혔을 거다, 축복의 소녀가 저주를 풀고 여신의 곁으로 돌아간 거다, 여신의 저주를 푸는 대가로 앤시아가 제물로 바쳐졌다, 다들 입에서 나오는 대로 헛소리를 지껄여댔다.
앤시아는 점차 모두의 기억 속에서 잊혀가고 있었다. 하지만 다이애나는 여전히 앤시아를 기억했다. 자신과 같았다.
“내가 찾을게.”
“…전하께서는 이 제국의 황태자시고, 곧 있으면 새로운 황태자비를 맞이하시겠죠. 그러면 언니의 존재를 잊게 될 거예요.”
“아니. 안 그래.”
“지금은 그렇게 말해도 결국은 그리되겠죠. 그게 현실이니까요. 언니를 잊지 않고 찾을 사람은 가족인 저밖에 없어요.”
“나한테도 가족이야.”
“재혼하기 전에는 그렇겠죠.”
“재혼 안 해. 나의 부인은 오직 앤시아뿐이니까.”
앤시아가 아닌 다른 사람과 결혼할 생각은 없었다.
블레이크의 세상은 오직 앤시아뿐이었다. 모든 것이 앤시아로 가득 차 있어서 다른 사람이 들어올 자리 따위는 없었다.
“처제가 아카데미에 갔을 때 앤시아가 무척 좋아했어. 앤시아가 돌아왔을 때, 처제가 자신 때문에 퇴학당한 걸 알면 슬퍼할 거야.”
“…….”
“나는 앤시아의 슬픈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 그러니 복학해. 부인은 내가 찾을 테니까.”
“정말로 언니를 잊지 않을 거예요?”
“잊어버렸어? 이 세상에서 앤시아를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나야.”
“그건 동의할 수 없는데요.”
다이애나는 엷게 웃었다. 앤시아가 떠나고 처음으로 보이는 미소였다.
다이애나는 아카데미에 복학했다. 그리고 블레이크는 약속대로 계속 앤시아를 찾아 헤맸다.
설령 다이애나랑 약속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는 앤시아를 끝까지 찾았을 거다.
텐스테온은 블레이크가 혼돈의 계곡으로 가는 걸 결사반대했다. 앤시아를 잃은 끔찍한 곳이다. 블레이크까지 위험에 빠트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결국은 블레이크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처음 혼돈의 계곡에 갔을 때는 황제도 함께였다. 텐스테온은 앤시아를 잃었던 것처럼 마물이 블레이크를 공격하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괜한 기우였다.
마물은 블레이크를 공격하지 않았다. 오히려 피했다. 그가 여신의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황태자의 능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의 능력에 대한 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갔고, 블레이크를 추앙하는 사람들을 더욱 늘어났다.
블레이크는 해가 갈수록 멋있고 아름다워졌다. 사람들은 그가 저주에 걸려서 흉측했었다는 사실조차도 점차 잊어갔다.
수많은 여인들이 그를 흠모했고, 결혼하기를 원했다. 외국의 공주나 대륙 최고의 미인, 유서 깊은 가문의 영애 등이 결혼을 청하고 유혹하기도 했지만, 블레이크는 모두 무시했다.
세월이 지나도 블레이크에게는 오직 앤시아뿐이었다. 저주가 풀렸지만, 그는 오히려 더 불행해졌다.
그의 삶은 다시 어둠 속에 처박혔다.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모든 것을 혼자 생각하고 혼자 결정했다. 앤시아를 찾기 위해 혼돈의 계곡에 머물렀고, 가끔 수도에 돌아와서도 앤시아의 흔적만을 찾아 헤맸다.
그러던 중 다이애나가 블레이크를 찾아왔다.
“전하, 오랜만이에요.”
“오랜만이야. 처제.”
다이애나가 아카데미에 복학한 이후 처음 만나는 거였다. 18살이 된 다이애나는 어린 소녀의 티를 완전히 벗고 늠름한 기사가 되어 있었다.
“우리도 이제 성인이네요.”
“그러네.”
“전하께 사죄드리고 싶어요. 예전에 제가 말이 너무 심했죠? 그때는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전하의 잘못이 아닌 걸 알면서도, 누군가를 탓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죠. 너무 늦은 사과인 걸 알지만 꼭 말하고 싶었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야. 내 탓이 맞는걸.”
앤시아가 그렇게 된 건 전부 자신의 잘못이었다. 7년이 지났어도 블레이크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다이애나는 여전히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는 블레이크를 씁쓸하게 응시했다.
과거의 블레이크는 웃는 게 예쁜 소년이었다. 저주에 걸렸지만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질 정도로 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는 빛의 힘을 지녔지만, 눈동자에는 짙은 어둠만이 가득했다. 저주는 풀렸지만 마음은 새까만 감옥에 갇힌 듯했다.
다이애나는 어린 시절과 너무나도 달라진 블레이크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운을 뗐다.
“오늘은 언니의 물건을 가져가려고 왔어요.”
“…뭐?”
“오랜만에 언니의 편지를 봤어요. 그동안은 차마 볼 수가 없었거든요…. 편지에 전하에 대한 내용이 참 많았어요. 언니는 언제나 전하에 대한 걱정뿐이었죠.”
“…….”
“저는 언니의 편지를 볼 때마다 불안했어요. 맨날 전하의 이야기만 했으니 질투가 날 법도 한데, 질투보다는 불안함이 앞섰죠. 그때는 이유를 몰랐는데, 이제 알겠더라고요.”
다이애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이제는 앤시아의 이야기를 해도 울지 않을 만큼 강해졌다. 그리고 세월도 흘렀다.
“언니는 꼭 바람 같았어요. 아무리 잡아도 잡히지 않고 금방 떠나 버릴 사람 같았죠. 전하의 이야기를 할 때는 특히 그랬어요. 자신이 만약 없어도 전하를 부탁한다는 듯이 말하곤 했죠. 어쩌면 언니는 자신이 그렇게 사라질 걸 알았는지도 몰라요.”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블레이크와 눈을 마주쳤다.
“전하, 언니를 계속 기억해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이제는 제가 기억할게요. 추억도 기억도 물건들도 전부 제가 가져갈게요. 그러니까 전하는 이제 행복하게 사세요. 언니도 그걸 바랄 거예요.”
블레이크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모두들 앤시아가 죽었다고 말했다. 텐스테온도 회의적이었다. 아모리아궁에서 함께 지냈던 궁인들도 그녀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제 앤시아가 살아 있다고 믿는 사람은 그와 다이애나밖에 남지 않았다. 그런데 다이애나마저 앤시아를 과거의 사람으로 남기려 하고 있었다.
“처제, 이만 돌아가.”
“전하, 전하는 언니가 선택한 사람이에요. 이제 앞으로 나아가세요. 제가 예전에 했던 말들은 모두 잊어버리세요.”
“나한테는 앤시아뿐이야.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 아무리 처제라도 용서 못 해.”
앤시아는 살아 있다. 살아 있을 거다. 금방 돌아올 거라고 했다. 곁에 있겠다고, 함께 축제에 가겠다고 약속했다.
다이애나는 앤시아의 물건들을 가져가려 했지만 블레이크는 거절했다. 그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은 냉혹했다. 어둠의 문이 완전히 무너져 내린 것이다.
제국민들은 기뻐했다. 제국력 1000년을 맞이하여 어둠의 문이 사라졌다며, 이는 여신의 축복이자 아스테릭 제국의 번영을 상징한다고 했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절망했다. 그에게는 제국의 번영보다도 앤시아가 소중했다.
‘어둠의 문이 무너졌으니 황태자비가 살아 있을 가능성도 완전히 사라졌다.’
사람들은 그렇게 수군거렸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남들의 말을 무시한 채 곧장 혼돈의 계곡으로 향했다. 어둠의 문은 정말로 무너져 있었다.
마지막 남은 실낱같은 희망마저 사라졌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포기할 수 없었다.
“앤시아….”
그는 매일 꿈을 꿨다. 꿈에서는 앤시아를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블레이크의 악몽을 가져갔고, 자신이 꿈으로 남았다.
“블레이크.”
꿈속에서 앤시아는 언제나 활짝 웃고 있었다. 블레이크의 저주를 풀려다가 이렇게 된 것이니 모든 게 너 때문이라고 원망할 법도 하건만, 언제나 그를 향해 웃어주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금방 돌아올게요.”
하지만 그곳에서도 행복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꿈속에서조차 블레이크의 손을 뿌리치고 떠나버렸다.
“가지 마. 앤시아. 가지 마.”
블레이크는 7년 동안 성장했다. 저주도 풀렸고 어엿한 청년이 되었다. 더 이상 나약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앤시아를 잡을 수가 없었다.
“가지 마….”
블레이크가 필사적으로 손을 뻗는데 앤시아의 손이 잡혔다. 그는 깜짝 놀라 눈을 떴다.
그리고 이것이 꿈이었다는 걸 자각하기도 전에 앞에 있는 여자를 끌어안았다.
“앤시아! 어디 갔었어! 내가 얼마나 찾았는데.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드디어 앤시아를 붙잡았다. 7년 만에 처음으로 떠나려는 그녀를 지켜냈다. 그런데 새하얀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앤시아가 아니었다.
블레이크는 순간 정신이 들었다. 현실로 돌아온 그는 다시 앞에 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로즈였다.
“너는 누구지?”
블레이크는 로즈를 앤시아로 착각했다. 아무리 꿈에서 덜 깼다지만, 지금껏 다른 여인을 앤시아로 착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블레이크는 로즈를 바라보았다. 당황하는 표정이 어딘지 낯이 익었다.
블레이크가 떠나지 말라고 애원할 때마다, 앤시아는 늘 저런 표정을 짓고는 했다.
“정말로 앤시아가 아닌가?”
그는 다시 한번 희망을 담아 물어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죄송해요.’
만약 로즈가 정말 앤시아라면 이렇게까지 부정을 할 이유가 없었다.
정말로 앤시아가 아닌 건가? 그녀가 아닌 건가? 블레이크의 손에서 힘이 스르륵 풀렸다.
‘죄송해요.’
그녀는 다시 한번 사과했다. 하지만 그 모습조차도 앤시아를 닮았다.
블레이크는 그녀의 손을 다시 붙잡았다. 화상 흉터로 얼룩진 손이 너무나도 가냘파서, 조금만 힘을 세게 주면 부러질 것 같았다.
어쩌다 이렇게 다친 걸까, 어쩌다 이렇게 마른 걸까….
“괜찮아. 미안해하지 마.”
블레이크는 그녀를 다독였다. 로즈의 정체를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이대로 그녀의 말을 믿고 순순히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번에는 절대로 놓치지 않을 거다.
-4권에서 계속
괴물 황태자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