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어둠 속의 한 줄기 빛을 따라서
마쿨은 나를 어둠의 문으로 끌고 들어갔다. 도대체 나를 어쩌려는 거지? 전신을 휘감는 공포감에 짓눌려서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그때 엄청난 속도로 하강하던 마쿨들의 움직임이 조금씩 느려지더니, 나를 살포시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나의 몸에서 떨어졌다.
“고, 고마워.”
비록 갑자기 납치를 당하긴 했지만, 나를 다치지 않게 하려는 마음이 느껴졌기 때문에 감사를 표했다. 그러자 콩나물 모양의 마물들이 살랑거리며 몸을 좌우로 흔들었다.
고맙다는 말을 듣자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니 긴장이 다소 풀렸다. 아무래도 나를 헤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아아악!!!]
하지만 안도할 새도 없이 다시 여신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마쿨들은 안절부절못하며 몸을 파르르 떨다가 왼쪽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내가 우두커니 서서 그들을 바라보자, 이리로 오라는 듯 꼬리를 흔들었다.
“빛의 여신님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주는 거야?”
마쿨들은 커다란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빛의 여신을 위해서 나를 데려온 거구나. 나 역시 그녀를 구하고 싶었기 때문에 곧장 마쿨의 뒤를 따랐다.
이곳은 온통 칠흑 같은 암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위를 올려봐도 새까만 어둠만 계속될 뿐 빛 한 점 보이지 않았다.
나는 마쿨의 몸에서 나오는 빛에 의지하며 걸음을 옮겼다.
바닥이 질척거려서 걷기 힘들었다. 발이 자꾸만 빠지고 구두 안으로 진흙이 들어왔다. 한쪽 구두는 어느샌가 사라져 있었다.
나는 자꾸만 벗겨지는 나머지 한쪽 구두도 벗어버리고, 기다란 스커트를 높게 들어 올렸다.
[악! 아악!! 라온텔, 구해줘! 뜨거워! 너무 뜨거워!]
여신의 비명에는 눈물이 섞여 있었다. 그녀가 울부짖을 때마다 땅이 흔들리고, 그녀의 슬픔, 분노, 고통, 절망 등 모든 감정들이 독으로 변하여 검은 공간을 잠식했다.
그리고 그 독은 나의 몸까지 흘러들어 왔다. 다리가 무겁고 손이 저렸다. 걸으면 걸을수록 무언가 썩은 듯한 악취가 강해지고 혼탁한 공기 때문에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
얼마나 더 가야 하지? 목이 말라, 숨이 막혀, 다리가 움직이지 않아….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몸이 비명을 질렀다. 여신을 구해야 하는데, 블레이크의 저주를 풀어야 하는데….
***
도대체 얼마나 걸었을까? 한 시간? 하루? 이틀?
끝도 없는 어둠 속에서 오직 마쿨의 빛에만 의존하며 걷고 또 걸었다.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았다. 방향감각 또한 사라졌다.
제대로 가고 있는 걸까? 같은 곳을 계속 빙글빙글 돌고 있는 건 아니겠지?
새하얀 마쿨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간간이 들려오는 여신의 비명과 철퍽철퍽 땅을 밟는 발소리를 제외하고는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몸의 고통보다 마음의 두려움이 더 커졌다. 이대로 어둠 속에 파묻히는 건 아닌지, 블레이크의 저주를 풀지 못한 채 죽는 건 아닌지 무서웠다.
이대로 주저앉아 버리고 싶었다. 블레이크가 아니었다면 모두 던져버렸을지 모른다.
육체도 정신도 한계에 몰렸을 때, 푸른 호수가 눈앞에 나타났다. 다양한 봄꽃들이 가득 피어 있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호수를 향해 뛰어갔다.
그리고 투명한 호숫물에 손을 집어넣는 순간 여자의 음성이 들렸다.
***
“여신님, 와주셨군요!”
“라온텔, 너랑 약속했으니까.”
호수 안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하얘서 포근한 눈송이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 알았다. 바로 빛의 여신이다.
“저를 보러 오신 거예요?”
“응….”
여신은 수줍게 웃었다. 하지만 라온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왜지?
나는 천 년 전의 과거를 통해서 필립과 여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런데 정작 라온텔의 모습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라온텔은 벨라시안 가문의 선조이며 빛의 힘을 지닌 사람이다. 저들 중에서 앤시아와 가장 가까운 사람은 라온텔 벨라시안일 텐데, 어째서 그녀의 모습만 보이지 않는 거지? 그녀의 얼굴을 볼 수는 없는 걸까?
그 순간 라온텔이 호수 안으로 들어갔다. 맑은 호숫물 속에 그녀의 얼굴이 비쳤다. 드디어 라온텔의 얼굴을 보는 건가?
어차피 현실이 아니다. 이건 천 년 전의 과거일 뿐이다. 그걸 알면서도 눈을 크게 뜨고 정신을 집중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금발 머리와 페리도트빛 눈동자를 가진 소녀….
이 사람은… 나잖아…?
지금의 앤시아와 완전히 똑같은 얼굴은 아니었다. 하지만 호숫물에 비친 그녀를 본 순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저 여자는 바로 나였다. 내가 바로 라온텔 벨라시안이었다.
누군가의 힘에 의해 천 년 전의 과거가 영상처럼 펼쳐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건 내 전생의 기억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라온텔의 얼굴만은 계속 보이지 않았던 거다. 그녀의 목소리는 생생하지만, 얼굴이 보이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이거였다.
“여신님, 이리 나오세요.”
라온텔, 아니 나는 호수의 중앙에 서 있는 빛의 여신의 손을 잡아끌었다.
나는 빛의 마법사였다. 빛의 여신은 어리지만 열심히 연습하는 나를 귀엽게 여기며 말을 걸었고, 이후 호수에서 자주 만남을 가졌다.
“라온텔, 언제까지 여신님이라고 부를 거야? 우린 친구잖아.”
“하지만 여신님이신걸요….”
“내 이름은 세르파니아야.“
“세르파니아….”
“라온텔한테만 알려주는 거야. 다른 사람한테는 비밀이야. 알았지?”
“알았어요.”
“친구한테 말을 높인 거야?”
“알았어. 세르파니아.”
그녀는 아이처럼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진짜 친구가 되었네.”
“그렇지 않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친구였는… 어?”
그때 갑자기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누구야?”
나는 경계하며 소리쳤다. 당장이라도 공격 마법을 쓸 수 있도록 영창할 준비를 하는데, 수풀 속에서 한 소년이 나왔다.
은발 머리와 붉은색 눈동자, 쌍꺼풀이 짙은 눈, 얇은 입술, 살짝 각진 턱.
어리지만 벌써 남자다운 분위기를 풍기는 소년을 본 순간 라온텔은 긴장을 풀고 가벼운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지금 과거를 떠올리는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저 소년은 리차드였다. 머리카락 색만 달라졌을 뿐 외모가 비슷했다. 아니, 얼굴뿐만이 아니라 그 영혼까지도 같은 사람이었다….
“필립!”
그리고 라온텔은 그를 필립이라 불렀다.
“네가 여긴 왜 온 거야…?”
필립, 그래 필립. 필립이 바로 리차드다.
나는 리차드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강한 거부감을 느꼈다. 그가 원작에서 비열한 짓을 일삼던 계략남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필립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이었다.
내가 라온텔이었다는 걸 자각하는 순간, 천 년 전의 기억들이 하나하나 떠오르기 시작했다.
“네가 갑자기 없어져서 찾으러 왔어. 백작님께서 걱정하고 계셔. 빨리 돌아가자.”
나는 필립과 함께 자랐다. 그의 어머니는 황제의 정부였다.
젤칸의 황제는 여색을 밝혔고, 수많은 여인들을 건드렸다. 그나마 로움족의 여인은 황비로 맞이하였지만, 대다수는 정부로 남았다.
황제는 정부에게서 낳은 아이들을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리차드 역시 역사 속에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황제의 핏줄 중 하나였다.
필립의 어머니는 그를 임신하자마자 황제에게 버림받았고, 이를 안타깝게 여긴 벨라시안 백작의 배려로 백작저에서 지내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황제에게 버림받은 충격으로 인해 병을 얻어 일찍 세상을 떠났고, 필립과 나는 친남매처럼 자랐다.
“오늘은 늦을 거라고 말했는걸.”
“백작님께?”
“아니, 큰오빠한테.”
나에게는 두 명의 친오빠가 있었다. 그들 역시 필립을 진짜 동생처럼 아껴주었다.
“일단 돌아가자.”
“안 돼. 오늘은 친구랑 놀 거야. 약속했는걸.”
“친구?”
필립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서 세르파니아를 바라보았다.
“아, 안녕.”
그녀가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저는 필립이라고 합니다.”
필립은 세르파니아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녀도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손을 잡는 순간 세르파니아의 얼굴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언제나 무표정하던 필립의 얼굴에도 미소가 감돌았다.
나는 그들이 첫눈에 반했다고 생각했다.
내가 빛의 여신을 만난다는 사실을 알고, 필립이 일부러 접근했다는 사실은 꿈에서도 알지 못했다.
***
과거의 기억 속에 빠져 있는데 손에서 질척질척한 감촉이 느껴졌다. 나는 호수에 담갔던 손을 뺐다. 손에는 진흙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이곳은 호수가 아니었다. 환영이다. 나와 세르가 처음으로 만났고 언제나 함께 놀았던 호수가 환영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건 내가 만든 환상일까? 아니면 나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서 세르가 보여준 걸까?
진실은 알 수 없지만 이대로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호수가 나왔다. 하지만 아까 전과 달리 호수는 완연한 가을 풍경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곳에 발을 딛는 순간 다시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다.
***
“세르의 머리카락은 정말로 부드럽다.”
나는 세르파니아의 머리를 빗겨주었다. 낙엽이 떨어진 호수에 우리 두 사람의 모습이 비쳤다. 세르파니아는 그대로였지만, 나는 훌쩍 커서 어엿한 숙녀가 되어 있었다.
“라온도 아주 예뻐.”
우린 서로의 애칭을 부를 정도로 친한 단짝 친구가 되었다.
“그런가?”
“응. 락슐도 좋아할걸.”
“라, 락슐 이야기는 갑자기 왜 하는 거야!”
나는 당황해서 소리를 버럭 질렀다.
“결혼할 거잖아.”
“아, 아니야. 그런 거….”
“혼담이 오갔다며.”
“누, 누가 그래?”
“필립.”
세르파니아와 필립은 연인 사이가 되었다. 그녀는 우리를 제외한 다른 사람에게는 모습을 숨겼기 때문에, 그들의 관계를 아는 건 오직 나뿐이었다.
“그런 거 아니야. 나 혼자 좋아하는 건걸.”
나는 락슐 황자를 좋아했다. 그를 조금이라도 자주 보고 싶어서 황실 마법사에 지원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나를 친구로 볼 뿐이었다.
“정말로?”
“응. 그냥 짝사랑이야.”
“짝사랑은 힘들지.”
그녀가 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지금 나를 놀리는 거야? 한창 뜨거운 사랑 중인 분께서 왜 이러실까?”
“그러게. 왜 그럴까.”
그녀는 씁쓸하게 웃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세르는 그때 이미 필립의 진심을 알고 있었던 거다.
가을 호수의 환영을 지나치자, 이번에는 푸르른 밀밭이 펼쳐졌다. 이것 또한 환영이겠지.
밀밭에 발을 딛자 다시금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다.
***
작은 낱알을 품고 있는 새파란 밀밭, 하지만 아름답지는 않았다.
북쪽 지방에 마물이 들끓자, 황제는 젤칸 제국 최고의 검사인 락슐 황자에게 명하여 마물을 토벌토록 하였다. 락슐과 그의 휘하인 제5 기사단은 서쪽으로 향했고, 나 역시 빛의 마법사로서 토벌에 참가했다.
마물은 사람만 공격하는 게 아니었다. 거대한 마물들이 지나갔던 밀밭은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나는 마법 주문을 읊었다. 그러자 처참하게 쓰러졌던 밀대들이 다시 똑바로 서며 원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라온텔.”
남자의 목소리를 들리자 나는 고개를 돌렸다.
“락슐….”
라온텔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과거를 떠올리던 나 역시도 놀랐다.
나는 그를 보았었다.
저주가 풀리고 어른이 된 블레이크가 꿈에 나온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그의 머리색이 검게 변한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꿈속에서 보았던 남자는 블레이크가 아니라 락슐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필립에게 리차드가 보였듯, 락슐한테서 블레이크의 영혼이 느껴졌다.
“이런 곳에 치유마법을 쓰는 거야?”
“중요한 식량이잖아. 밀이 없으면 사람들은 배고픔에 허덕일 거야. 세금도 내지 못해. 마물을 모두 물리친다고 해도 또 다른 고통이 찾아오겠지.”
“마을 사람들이랑 기사들을 치료한 지 얼마나 됐다고. 네가 아무리 천재라도 이렇게나 마나를 소모하는 건 위험해.”
“이 정도는 괜찮아.”
세르는 친구인 나에게 빛의 축복을 내려 주었다. 그래서 마나의 제약 없이 빛의 마법을 쓸 수 있었다.
“그래도 혼자서 무리하지 마.”
“정말로 괜찮아.”
“가끔은 나한테 기대줬으면 좋겠는데.”
“응?”
“라온텔 양은 언제쯤 나를 사내로 봐줄까?”
락슐의 붉은 눈동자가 요염하게 빛났다.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 혼자 착각한 걸까 봐,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
“라온텔 님! 이쪽에 부상자가 있습니다!”
“아, 갈게요!”
나는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
***
락슐의 활약으로 북부에 들끓었던 마물들을 소탕하는 데 성공했다. 수도로 돌아가는 동안 제5 기사단을 축제 분위기였다.
“북부의 마물들을 모조리 잡아 족쳤으니, 락슐 전하께서 황태자로 책봉되시겠죠?”
“그걸 말이라고 해? 진작 되셨어야 했어. 이제 더는 핑계 댈 것도 없을걸.”
황제에게는 자식이 많았다. 락슐은 귀족과 백성들이 모두 인정할 만큼 뛰어난 황제의 재목이었지만, 황제는 자신이 총애하는 7황비의 아들에게 후사를 물려주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는 지나치게 아둔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7황비에 대한 총애도 식으며 흐지부지되었다.
북쪽 마물까지 토벌한 지금, 락슐이 황태자가 되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모두 기뻐하고, 나도 그래야 하는데 왠지 기분이 울적했다.
나는 천막을 벗어나 홀로 우거진 숲길을 거닐었다.
“라온텔.”
그런데 지금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내 이름을 불렀다.
“왜 나왔어?”
“바람 좀 쐬려고.”
“혼자 다니는 건 위험해.”
“마물은 모두 소탕했잖아. 게다가 곧 수도인걸. 이 정도는 괜찮아.”
나는 애써 미소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락슐은 떠나지 않고 내 옆에서 함께 걷기 시작했다.
높은 콧대, 유려하면서도 날카로운 턱선, 훤칠한 키, 어릴 때와 달리 그는 멋진 남자로 성장해 있었다.
락슐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를 마주보기가 부끄러웠다.
“라온텔, 나를 봐.”
“…….”
“어서.”
나는 그가 이끄는 대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붉은 눈동자가 나를 또렷이 응시했다.
“왜 나를 피해?”
“내가 언제…. 이제 황태자가 되는 건가? 정말 축하해.”
황제는 향락에 취하여 정사를 등한시했다. 제국민들은 높아지는 세금과 가뭄에 시달리며 비명을 질렀다.
락슐은 이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지만, 열 명이 넘는 황자들 중의 한 명에 불과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현실적으로 많지 않았다.
그는 황태자가 되길 원했고, 나라와 백성을 위해 힘을 길렀다. 그리고 드디어 그 꿈이 이루어지는 때가 온 거다.
“말 돌리지 마. 청혼에 대한 답은 언제 할 거야?”
“아, 그건 신경 쓰지 마. 아버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청혼서를 보낸 건 알고 있어.”
아버지께서는 내가 락슐을 좋아하는 걸 알고, 황제를 찾아가서 혼담을 요청했다. 그러자 황제는 흔쾌히 허락하며 청혼서를 보냈다.
하지만 앞으로는 상황이 달라질 거다. 황태자가 된다면 후작 이상의 고위 귀족이나 순수한 로움족의 혈통과 결혼을 하겠지.
나는 락슐이 꿈을 이루길 원했다. 그래서 제5 기사단의 마법사가 되고, 험한 북부 토벌까지 참가했다. 하지만 막상 그가 황태자가 되고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고 생각하니 울적함이 밀려들었다.
고개를 푹 떨구는데, 낮게 깔린 락슐의 음성이 들렸다.
“라온텔, 나를 화나게 하는구나.”
“어?”
“내가 폐하 때문에 청혼한 줄 알아?”
“그, 그럼…?”
“내가 네 대답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거절당한 줄 알고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데.”
그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다. 반사적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지만, 그는 나의 턱을 들어 올리며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다.
“너를 사랑해.”
“…….”
“처음 본 순간부터 좋아했어.”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미처 깨닫기 전에 입술이 겹쳐졌다. 같은 마음이었구나, 우리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나와 락슐은 그날 처음으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다.
***
락슐, 나는 그를 사랑했다. 락슐을 사랑하고, 천 년이 지나 다시 만난 블레이크를 사랑했다.
나는 다시 암흑 속에 있었다. 입술에 저절로 손이 올라갔다. 부드럽던 입술이 버석하게 말라 있었다.
나는 마쿨을 따라 걸어갔다. 수없이 많았던 마쿨들이 어느새 전부 사라져서 이제는 한 마리밖에 남지 않았다.
마쿨도 힘이 들었던 걸까? 아니면 어둠 속에 잠식된 걸까? 흙바람이 점점 심해져서 눈을 뜨기 힘들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뜨거운 열기 때문에 땀이 후두두 쏟아졌다.
하지만 세르를 구해야 한다. 나는 마쿨을 따라 계속 걸었다. 그런데 마지막 남은 마쿨마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도착한 건가? 하지만 칠흑 같은 어둠만 펼쳐져 있을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마쿨, 어째서 멈춘 거야? 세르는 어디 있어?”
마쿨은 머리를 떨구더니, 나의 머리 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알지 못하는 거야?”
마쿨은 가만히 멈춰 섰다. 하지만 긍정인지 부정인지 알 수 없었다.
“더 들어갈 수 없는 거야?”
마쿨이 몸이 희미하게 반짝였다. 대화가 통하지 않으니, 알지 못하는 건지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더는 마쿨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 이 끝없는 어둠 속에서 홀로 세르를 찾아야 한다.
나는 무작정 앞으로 걸어갔다. 마쿨은 그 자리에 서서 몸을 흔들었다.
이제부터 홀로 나아가야 할 나를 응원하는 것 같았다.
나는 마쿨을 뒤로한 채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마쿨의 몸에서 흐르는 빛이 점점 희미해지더니 완전한 암흑이 찾아왔다.
두려움이 엄습했다. 너무 어두워서 나의 몸조차 보이지 않았다. 무서웠다. 보이지 않는 공포보다 이대로 여신을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 컸다.
내가 이대로 암흑 속에 묻힌다면 세르와 블레이크의 고통은 끝나지 않을 거다.
‘내가 구해야 한다. 내가 해야 해.’
나는 이를 악물었다.
칠흑 같은 속에서 다시 천 년 전의 일들이 떠올랐다.
***
나는 락슐과 약혼하게 되었다.
예상했던 대로 수도로 돌아온 락슐은 황태자로 책봉됐다.
황제는 락슐을 황태자의 신분에 걸맞은 상대와 혼인시키고자 하였다. 하지만 그는 내가 아닌 어느 누구하고도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미 황실의 이름으로 청혼서까지 보냈던 터라, 황제도 더는 반대하지 못하고 우리의 약혼을 허락해주었다.
나는 약혼이 확정되자마자 가장 먼저 세르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
“축하해.”
“고마워. 락슐이 나를 예전부터 좋아했었대.”
“으음.”
하지만 그녀는 왠지 시큰둥했다.
“놀랍지 않아?”
“알고 있었는걸.”
“어떻게? 락슐이랑 말을 해본 적도 없잖아.”
그녀는 락슐이 나타나기만 하면 몸을 감추었다. 물론 제대로 된 대화를 해본 적도 없었다.
“네가 하는 말만 들어도 알지. 락슐은 위계질서를 중시한다며? 그런데 너랑은 서로 말을 놨잖아.”
“그야 어렸을 때부터 친했으니까.”
“어릴 때부터 친한 사람이 너뿐이겠어? 너를 좋아한 거지.”
“그런가?”
“그럼. 나는 처음부터 알았는걸. 라온텔은 은근히 둔하다니까.”
그녀는 싱긋 웃었다.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실제로 키스를 하기 전까지 그의 마음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으니까.
“라온텔.”
그녀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세르는 친해지고 나서부터 줄곧 나를 ‘라온’이라는 애칭으로 불렀었다. 그런데 북부에서 돌아온 이후부터는 다시 ‘라온텔’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왜 그러는 걸까? 나한테 화가 난 걸까? 하지만 호칭이 변한 것 말고는 달라진 것이 전혀 없었다.
“나도 할 말이 있어.”
“응. 말해.”
“나, 인간이 되려고.”
“뭐?”
“필립과 결혼하기로 했어.”
필립과 사귀며 세르는 많은 고민을 했다. 그에게 혼담이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펑펑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녀는 여신이고 필립은 인간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극복할 수 없는 차이가 있었다.
결국 신의 힘을 버리고 사랑을 택하였구나.
“…후회하지 않겠어?”
“필립과 함께하지 못한다면 더 후회하겠지.”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세르는 언제나 아이처럼 천진난만했다. 모두가 성장하고 변화하는 중에도 그녀는 변함없이 똑같아서,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어린 시절의 추억과 마주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세르는 사랑에 빠진 여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수많은 고민 끝에 결정을 내렸다. 아무리 친구라지만 내가 말을 얹거나 참견하는 건 주제넘은 행동이었다. 나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그녀를 축하해 주었다.
“멋있어. 세르.”
“고마워. 라온.”
그녀는 다시 나를 ‘라온’이라 부르며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인간이 되기 전에 내가 지닌 힘을 전부 필립에게 주기로 했어.”
“…필립이 원한 거야?”
“아니. 내가 그러고 싶어서.”
“하지만 모든 힘을 넘긴다면 다시는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을 거야.”
인간의 육체를 얻고 대지에 머물더라도, 여신의 힘을 간직하고 있다면 언제든 자신을 속박하는 육체를 버리고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인간이 되겠다는 세르의 선택을 쉽게 지지했다. 그녀가 진정 후회한다면 다시 돌아가면 되니까.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힘을 필립에게 주겠다고 했다.
“필립도 걱정했어. 하지만 나는 필립과 똑같은 평범한 인간이 되고 싶어! 게다가 내가 원하면 언제든지 돌려주겠다고 했고. 그가 시킨 게 아니라, 내가 주고 싶어서 그래. 그에게 힘이 되고 싶어!”
세르는 필사적으로 해명했다. 그 모습에서 왠지 모를 불안함이 느껴졌다. 그녀의 진심이 아니라, 애인이 욕먹을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세르, 조금 더 신중하게….”
“라온텔, 미안해!”
그녀는 나의 말을 막으며 갑자기 사과를 했다.
“어?”
“라온텔은 나의 하나밖에 없는 친구잖아. 너한테도 힘을 나눠줬어야 했는데.”
“아니야. 이미 나에게 축복을 내려줬잖아. 그것만으로도 고마운걸….”
“하지만 이대로는 내가 너무 미안해. 너에게 두 번째 축복을 내려줄게.”
그녀는 나의 손을 잡았다. 세르의 입에서 노랫소리 같은 신비로운 말이 흘러나오며, 강렬한 빛이 전신을 감쌌다.
“라온은 책을 좋아하니까, 이 세상의 모든 언어를 알 수 있는 힘을 줬어.”
빛이 사라지고 난 뒤 나는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강렬한 빛을 보았기 때문인지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눈이 이상해.”
“금방 괜찮아질 거야. 앞으로는 이 세상의 모든 책을 읽고, 언어의 장벽 없이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과 대화를 할 수 있을걸.”
나는 다시 한번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그러자 시야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괜찮아졌어.”
“그렇지?”
“정말로 언어의 축복을 내려준 거야?”
“내가 거짓말을 하겠어?”
“아니. 그럴 리가 없지. 고마워. 정말 고마워! 나한테까지 힘을 줄 필요는 없었는데….”
“무슨 소리야, 너는 나의 하나뿐인 소중한 친구인걸. 자, 이거 받아.”
세르는 투명한 보석이 달린 목걸이를 나에게 건넸다.
“이게 뭐야?”
“필립에게 모든 힘을 줄 거면서 너한테는 고작 작은 축복밖에 주지 못했잖아. 미안해서 주는 선물이야.”
“미안하기는. 지금까지 받은 것만으로도 너무 과분한걸. 이런 것까지 받을 수는 없어.”
나는 목걸이를 다시 세르에게 돌려주려 했다.
“부담 갖지 마. 이건 우정 선물이니까.”
“우정 선물?”
“결혼해도 나를 잊지 말라고 주는 거야. 내가 어디에 있든, 우리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든 상관하지 않고,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나를 만나러 올 수 있는 마법이 담겨 있어.”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나의 목에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
그래, ‘빛의 눈물’이다.
빛의 눈물은 세르파니아가 나에게 주었던 우정의 증표였다.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빛의 눈물이라 명명했지만, 원래는 빛의 계승자를 판별하는 도구 같은 것이 아니라, 우정이 담긴 선물이었다.
나는 목걸이를 꼭 잡았다.
“세르가 있는 곳을 알려줘. 세르를 만나고 싶어.”
나의 바람을 들은 걸까? 목걸이에서 투명한 빛이 흐르며 두둥실 떠올랐다.
나는 얼른 목걸이를 쥔 손을 놓았다. 그러자 빛의 눈물은 허공 위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반짝이는 빛을 내며 어디론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서둘러 그 빛을 좇았다.
이제 길을 찾았다. 목걸이를 따라가면 세르를 만날 수 있다.
점점 뜨거워지는 열기,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거친 모래바람, 발목까지 쑥쑥 빠지는 진흙 바닥, 숨을 쉬기조차 힘든 썩은 악취.
나아갈수록 모든 상황이 점점 나빠져 갔지만, 빛이 있다는 것만으로 안도감이 들었다.
그때 안심한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시커먼 기억의 조각들이 뇌리를 파고들었다.
***
“필립, 결혼 축하해.”
세르가 돌아간 뒤, 나는 필립을 찾아가 축하 인사를 건넸다.
“어….”
하지만 그는 시큰둥했다. 원래 무뚝뚝한 편이긴 했지만, 내가 북부의 마물 토벌에서 돌아온 이후부터 태도가 더욱 싸늘해졌다.
“표정이 왜 그래?”
“내가 뭐?”
“결혼을 앞둔 새 신랑이잖아. 좀 더 기뻐하라고!”
“너처럼 멍청하게 웃기라도 하라는 건가?”
“내, 내가 언제?!”
갑자기 이야기의 화살이 나에게 돌아왔다. 정곡을 찔린 나는 괜히 발끈했다.
“약혼 확정됐다며?”
“응.”
“드디어 황태자비 전하가 되겠네.”
묘하게 빈정거리는 말투였다. 마치 내가 황태자비가 되고 싶어서 락슐을 택했다는 어조였다. 따지고 싶었지만, 락슐이 황제와 황실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는 걸 알기 때문에 일단은 꾹 참았다.
내가 그였어도 자신을 버리고 어머니마저 죽게 만든 황제를 미워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너도 알잖아. 나는 황태자 전하를 오랫동안 좋아했어. 정말로 좋은 분이셔.”
“…….”
“결혼식에 와줄 거지?”
“…….”
부정을 담은 침묵이었다. 나도 그에게 강요할 수는 없었다.
“너는 언제 결혼할 거야?”
“네가 상관할 바 아니야.”
아무리 화가 났다지만 너무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나한테만 이렇게 퉁명스러울 뿐, 세르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자상한 사람이란 걸 알기에 꾹 참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저기, 세르가 인간이 되기 전에 너에게 모든 힘을 줄 거라고 들었어.”
“그런데?”
“말려주면 안 될까?”
“왜?”
“세르는 완전한 인간이 되어야만 너와 함께할 수 있다고 믿고 있어. 하지만 한순간에 모든 힘이 사라진다면 세르의 육체에 부담이 올 거야.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힘을 남겨두어야….”
“겁나나?”
필립이 나의 말을 끊으며 싸늘하게 물었다.
“뭐가?”
“내가 락슐보다 강해질까 봐 무섭냐고?”
“그게 무슨 뜻이야?”
세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는 뜬금없이 락슐을 들먹였다.
“만약 결혼식을 한다면 가도록 하지.”
필립은 나의 질문에 답하지 않은 채, 싸늘하게 뱉고는 자리를 떠났다.
***
그날 밤, 세르가 나를 찾아왔다.
“너, 필립한테 무슨 말을 한 거야!”
그녀는 다짜고짜 나에게 소리를 질렀다.
“세르, 왜 그래?”
“내가 원한 거야! 내가 필립한테 힘을 주고 싶어서, 내 의지로 선택한 거라고!”
“세르, 조금만 진정해 봐.”
“내가 행복해지는 게 싫어?”
“뭐?”
“라온텔, 나는 너를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힌 눈으로 나를 노려보더니 홀연히 사라졌다.
그날 이후 그녀는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세르가 준 목걸이에 대고 그녀를 보고 싶다고 계속 말하고 소원을 빌어보았지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와 함께 필립도 자취를 감추었다. 두 사람은 결혼을 한 걸까? 그래서 함께 떠난 걸까? 좋은 일인데 왠지 가슴이 불안하게 뛰었다.
나의 결혼식에는 와줄까? 아마 그러겠지. 필립도 올 거다. 약속했으니까.
나는 그들을 다시 만날 날을 기다렸다.
***
하지만 나는 결혼식을 올리지 못했다.
8황녀의 죽음을 시작으로 황실에 끔찍한 역병이 돌기 시작했다.
고열에 시달리며 피를 토하다가 피부가 검게 변하고 마침내 죽음에 이르는 병이었다. 게다가 전염성도 강했다.
황녀와 황비, 궁인, 다른 귀족들까지 병은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지금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병이었다.
10월로 예정되었던 결혼식은 당연히 연기됐다. 나와 락슐은 병을 치료할 방법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어떤 방법도 소용이 없었다.
약초는 전혀 듣지 않았고, 빛의 마법을 사용하면 오히려 증상이 악화되었다.
하지만 빛의 여신인 세르파니아와 그녀에게서 힘을 받은 필립이라면 병을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두 사람을 찾아 헤맸지만, 그들은 역병이 황궁을 뒤덮을 때까지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라온텔, 좀 쉬어.”
“나는 괜찮아. 빛의 마법사잖아.”
여신의 축복을 받은 나는 병에 걸리지 않았다.
“락슐, 너야말로 눈 좀 붙여. 요근래 한숨도 못 잤잖아.”
“아니야. 많이 잤어.”
락슐은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했다. 황궁을 중심으로 병이 퍼지자, 황제는 궁에서 도망쳤다.
때문에 황태자인 락슐이 황제를 대리하여 모든 정무를 관장하고 있었다. 정무만으로도 힘든데, 역병이 퍼지는 것을 막고 치료약까지 개발해야 했다. 락슐은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너도 잠시 황궁을 떠나면 안 돼?”
“나는 황태자잖아.”
“황제 폐하도 떠났는걸. 다들 도망치는데, 너 혼자서 모든 걸 감당하고 있잖아.”
역병이 번진 장소에 가서 상황을 파악하고, 아픈 사람을 직접 만나서 위로하며, 황궁의 장례도 도맡아야 했다. 나는 두려웠다.
“그러다가 너까지….”
락슐마저 병에 걸리면 어떡하지? 하지만 말을 뱉으면 정말로 현실이 될까 두려워서 도중에 입을 다물었다.
“걱정하지 마, 라온텔. 나는 괜찮아.”
끝까지 말하지 않았어도 그는 내 마음을 읽었다. 락술은 불안해하는 나를 다독이며 꼭 끌어안아 주었다.
그리고 다음 날, 락슐의 몸에 검은 반점이 나타났다.
락슐의 병세는 빠르게 악화됐다. 온몸이 검게 변했고, 고열로 인해 의식을 차리지도 못했다. 나는 하루 종일 그의 곁을 지켰다.
살 수 있을 거다. 락슐이 이대로 죽을 리가 없다. 세르를 찾는다면, 그녀를 만날 수만 있다면, 이 병도 고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아무리 목걸이를 잡고 울부짖어도 세르는 나의 말에 응답하지 않았다.
“라온텔….”
오랜만에 의식을 찾은 그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나는 목걸이를 내려놓고,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락슐.”
“…라온텔, 그동안 고마웠어.”
그는 뜨거운 열기 때문에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했지만,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감돌았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락슐은 작별 인사를 하고 있었다. 마지막 인사를 위해서 모든 힘을 짜내며 간신히 웃고 있는 거다.
“그런 말 하지 마. 왜 마지막처럼 말하는 건데!”
“…나는 이제 가야 할 것 같아.”
“가긴 어딜 가!”
검은 반점으로 인해 새까맣게 물든 손이 나의 볼을 쓰다듬었다.
“미안해. 평생 함께 있어 주고 싶었는데. 너는 뭐든 혼자 짊어지려 하니까, 그 짐을 옆에서 나눠주고 싶었어….”
“그럼 계속 함께 있으면 되잖아!”
나는 울부짖었다. 그의 마지막이 온 걸 알면서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일찍 고백할걸…. 사랑한다고, 좋아한다고 말해줄걸…. 만약 다음 생이 있다면, 그래서 너를 또 만난다면, 매일매일 말해줄게.”
“지금부터 말하면 돼! 매일매일 말하면 된다고!”
“행복하게 살아야 해. 언제나 웃고, 즐겁고, 행복하게 지내.”
“네가 없는데 어떻게 행복해! 죽지 마! 내가 행복하길 바라면 죽지 마!”
“…사랑해.”
힘겹게 뱉은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그의 손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안 돼! 락슐! 락슐, 안 돼. 일어나! 눈을 떠. 제발 눈을 떠. 죽지 마, 죽으면 안 돼. 나를 두고 가지 마!”
나는 애원했다. 간절하게 빌고 또 빌었다. 하지만 락슐은 눈을 뜨지 않았다.
***
나는 다시 암흑 속에 있었다. 눈에서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오열했다.
락슐이 죽었다. 심장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는 듯한 슬픔이 다시금 되살아나 전신을 덮쳤다.
천 년 전의 과거인 걸 알면서도 도저히 눈물이 멈춰지지 않았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너무나도 무력하게 락슐을 잃었다. 하지만 이대로 슬픔에 잠겨 있을 수는 없었다.
내가 세르파니아를 구하지 못한다면, 블레이크의 저주는 풀리지 않는다. 이번에도 그를 잃어버릴 수는 없었다.
나는 손으로 눈물을 대충 훔치며 다리에 힘을 주었다.
***
락슐이 세상을 떠났다. 제국의 황태자가 죽었지만 제대로 된 장례식조차 열리지 않았다.
그가 죽은 뒤 수도 전체에 역병이 퍼졌고, 황궁 밖으로 피신했던 황제까지 병을 얻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아팠고 또 죽었다.
황궁과 수도 전체가 혼돈으로 뒤덮여서, 장례식을 치를 겨를조차 없었다. 이해는 하지만 슬펐다.
나와 오빠들은 황실 대신 락슐의 장례를 준비했다.
장례식 내내 울면 어떡하나 고민했다. 락슐을 웃으면서 보내주고 싶었다.
그러나 걱정했던 것과 달리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장례가 끝나는 날까지 나는 단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대신 후회했다.
‘어째서 좀 더 일찍 고백하지 않았을까? 북쪽 토벌에 참여하지 말걸, 그가 마물을 처리하지 못했다면 황태자로 책봉되는 일은 없었을 거다. 황태자가 아니면 황궁에 남아 있지 않아도 되었겠지. 그럼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절망에 사로잡힌 나는 방 안에서 두문불출했다. 그동안 제국에는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황제가 붕어했다. 하지만 황제의 자식들은 물론이고 형제마저 모두 역병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차기 황제를 정하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필립이 나타났다. 그는 빛의 힘을 사용하여 수도를 뒤덮은 역병을 치료했고, 사람들은 환호했다.
비록 젤칸의 황족을 상징하는 검은색 머리카락은 아니었지만, 그는 신하와 백성들의 찬양을 받으며 새로운 황제로 등극했다.
나는 필립의 즉위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음 날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필립….”
반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토록 찾아 헤매던 남자가 지금 내 눈앞에 있었다.
“오랜만이야. 라온텔. 어제 즉위식에서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안 왔더군.”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그는 이제 젤칸 제국의 황제였다. 나는 고개를 숙이며 예를 갖추었다.
“아, 고마워. 하지만 공대할 필요는 없어. 우린 특별한 사이잖아.”
그는 입꼬리를 올렸다. 짐짓 다정한 모습이었지만, 나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은 채 풀리지 않았다.
“이런, 아직도 나를 원망하는 건가?”
“…내가 널 왜 원망하겠어?”
“락슐이 죽었다며.”
그는 망설임 없이 정곡을 찔렀다.
“응.”
“여길 떠나고 서쪽 끝에 있는 혼돈의 계곡으로 갔었어. 그래서 칸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알았다면 일찍 내려왔을 텐데.”
“그랬구나.”
사람이 살지 않는 그 멀고 험한 곳까지 같구나. 그래서 찾지 못했던 거였다.
“내가 밉나?”
“아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필립이 밉지는 않았다. 그는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떠났다가 고향으로 돌아왔을 뿐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병을 치료해주고 당당하게 황제가 되었다.
잘못한 건 없었다.
“그저 나 자신이 원망스러워.”
다만 락슐을 구하지 못한 스스로가 미울 뿐이었다.
“라온의 잘못이 아니야!”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세르가 나의 품에 안겼다.
“세르….”
“미안해. 라온, 미안해. 락슐이 그렇게 된 줄 몰랐어. 미안해. 전부 내 잘못이야.”
그녀는 아이처럼 펑펑 눈물을 터트렸다.
나는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사실 나는 그들을 원망하고 있었다. 락슐과 사람들을 구할 힘이 있으면서도 나타나지 않는 세르와 필립이 내심 미웠다. 물론 그들의 잘못이 아닌 걸 알고 있지만, 마음속으로는 그렇지 못했다.
하지만 내 품에 안겨 눈물을 흘리는 세르를 본 순간 마음속에 쌓였던 원망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아니야, 그런 말 하지 마.”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가 밉지? 많이 밉지? 나라도 그럴 거야. 너한테 너무 미안해.”
“밉지 않아. 네가 돌아와서 기쁜걸.”
“정말?”
“응.”
나는 다시 돌아온 친구를 꼭 안아주었다.
***
젤칸 제국이 ‘아스테릭 제국’으로 바뀌었다. ‘알타르궁’도 ‘텐라른궁’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역병은 완전히 사라졌고, 수도는 점차 안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평화는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필립은 계속해서 새로운 궁을 짓고, 자신의 업적을 기리는 석판과 동상을 만들었으며, 하루도 빠짐없이 황궁 무도회를 개최했다.
그때마다 엄청난 예산이 소모됐고, 백성들은 막대한 세금과 노역에 허덕여야 했다.
나는 필립을 찾아갔다. 락슐이 그토록 사랑하고 지키고자 했던 나라였다. 이름이 바뀌는 건 상관없었지만, 백성들이 고통에 시달리는 걸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만약 락슐이 살아 있었다면 이런 일은 절대로 벌어지지 않았을 거다.
“언제까지 무도회를 열 생각이야?”
“갑자기 찾아와서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만. 아무리 너라지만 제국의 황제를 상대로 주제넘다고 생각하지 않나?”
“올해 거둬들인 세금이 얼마인 줄 알아? 백성들이 일 년 동안 수확한 곡식을 모두 세금으로 빼앗기고 굶어 죽어가고 있어!”
“그게 뭐?”
그는 무엇이 문제냐는 듯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역병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었어. 집집마다 시체가 즐비하지. 칸 전체에 어둠이 깔려 있어. 분위기를 환기하려면 무도회만 한 게 없잖아.”
“귀족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백성들을 굶겨 죽이겠다는 거야?”
“세금조차 못 낼 정도로 가난하다면 그냥 죽는 게 낫지.”
“진심이야?”
“그 정도로 가난하다면 능력이 없는 거야. 나는 제국의 황제야. 그렇게 멍청한 인간까지 일일이 신경 써야 하나?”
너무나도 당당한 태도에 말문이 막혔다.
“너, 변했구나? 아니면 원래 이런 사람이었는데 내가 몰랐던 건가?”
“말조심해. 아무리 너라도 더 이상 무례를 저지르면 용서하지 않아.”
그는 오만한 낯으로 으르렁거렸다. 더 말해봤자 대화가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황후 공표는 언제 할 거야?”
필립은 세르의 존재를 숨겼다. 결혼했다는 사실도 밝히지 않은 채, 그녀를 허름한 별궁에서 머무르게 했다.
나는 이 사실을 여러 번 항의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필립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또 시작인가?”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언제까지 세르를 그런 곳에 둘 생각이야? 요즘은 얼굴도 비추지 않는다며?”
“그렇게 마음이 아프면 백작저로 데려가든가.”
“그걸 말이라고 해? 세르는 너를 위해서 모든 걸 바쳤다고!”
필립은 시끄럽다는 듯 한쪽 귀를 막았다.
“그래. 세르는 모든 걸 바쳤지. 그리고 지금은 아무것도 없어. 빛의 힘도 잃고, 재산도 없고, 귀족도 아니야. 아무것도 없는 무능한 여자일 뿐이라고. 그런 여자가 황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는 거만한 얼굴로 개소리를 지껄였다. 기가 막혀서 말문이 막혔지만, 간신히 이성을 붙잡으며 겨우 말을 내뱉었다.
“…너, 미쳤니?”
“현실을 말하는 거다.”
“세르가 왜 힘을 잃었는데! 어째서 평범한 여자가 됐는데! 전부 너 때문이잖아!”
“과거가 무슨 소용이지? 지금 그녀는 황후에 적합하지 않아.”
“뭐? 적합? 네가 어떻게 그 자리에 올랐는지 잊었어? 역병을 치료한 덕분에 황제가 된 거잖아! 세르의 힘으로 병을 치료했잖아! 세르 덕분에 황제가 되어놓고, 이제 와서 버리겠다고?”
“말조심해. 나는 나의 능력으로 황제가 된 거다.”
필립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깔렸다. 하지만 아무리 분위기를 잡은들 개소리가 이어지니 우스울 뿐이었다.
“진짜로 미쳤구나. 기억 상실증이라도 걸린 거야?”
“라온텔, 예의를 지키라고 했을 텐데.”
“하아.”
나는 코웃음을 쳤다. 그 순간 필립이 나의 손목을 움켜잡더니 허리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놔! 이게 무슨 짓이야!”
나는 화들짝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는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나는 황후가 될 사람을 정했어.”
“세르는 어떡하고?”
“그보다는 어떤 여자인지를 궁금해 해줬으면 하는데?”
“누군데?”
“바로 너야. 라온텔.”
“뭐…?”
나는 귀를 의심했다. 분명히 잘못 들은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필립은 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락슐, 그 자식보다 내가 먼저 너를 원했어!”
“거짓말. 그럼 세르는…?”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했어. 그래서 적당히 비위를 맞춰준 것뿐이야. 모든 게 너를 갖기 위해서였어. 라온텔, 내가 진짜 사랑하는 건 너야.”
그의 눈이 뜨겁게 일렁였다. 자신이 아주 로맨틱한 고백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역겨워서 토기가 치밀었다.
“닥쳐! 사랑? 웃기지 마. 나를 위해 세르를 이용했다고? 그걸 말이라고 해!”
그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하지만 필립은 오히려 허리를 끌어당기며 입을 맞추려고 했다. 나는 그의 얼굴을 피하며 뺨을 때렸다.
필립은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내가 락슐 그놈보다 뭐가 부족하지? 나는 황제야! 빛의 힘도 손에 넣었어! 역병도 잠재웠다고! 그런데도 부족해? 머리색 때문인가? 순혈 로움족의 흑발이 아니라, 천박한 은색이라? 아니면 하인들이나 쓸법한 미천한 이름 때문인가?”
황족이나 귀족은 아이가 태어나면 신전에 기부를 하고 이름을 받는다. 이는 로움족의 전통이었다.
필립의 어머니 역시 황제에게 아이의 이름을 지어달라 부탁했다. 하지만 황제는 정부의 아들을 위해 신전에 기부를 할 생각이 없었다.
황제는 자신의 시중을 드는 하인의 이름을 대충 따서 그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필립은 자신의 이름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이름이나 머리색을 신경 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락슐은 너처럼 비열하지 않아! 너 같은 쓰레기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사람이야. 함부로 입에 담지 마!”
나는 그를 밀치며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곧장 세르가 있는 별궁으로 뛰어갔다.
***
“라온, 왔어?”
침대에 누워 있던 세르가 엷은 미소를 지었다.
“미안, 낮잠을 자고 있었어?”
“아니. 막 일어나려던 참이었어.”
“다행이다. 어서 일어나. 우리 집으로 가자.”
“괜찮아. 나는 여기가 좋아.”
나는 이전에도 몇 번이나 세르에게 황궁을 떠나자고 말했었다. 필립이 그녀를 황후로 공표하기 전까지만이라도 백작저에서 지내자고 권했지만, 세르는 한사코 거절했다. 하지만 오늘은 나도 가만히 물러날 수 없었다.
“세르, 필립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좋은 사람이 아니야. 그 자식은 너를….”
진실을 말해야 하는데 입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세르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상황을 설명할 수 있을까? 단어를 고르는데, 세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알아. 필립은 너를 좋아하잖아.”
“…알고 있었어?”
“응. 필립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알고 있었어.”
그녀는 너무나도 태연하게 답했다.
“…그럼 알고도 사귄 거야? 대체 왜?”
“내가 좋아하니까. 계속 좋아하고 잘해주다 보면 언젠가는 필립도 나에게 진심이 될 줄 알았거든.”
“…….”
“나, 너한테 질투도 많이 했어. 내가 빛의 힘을 필립한테 주려고 했을 때, 네가 말렸잖아. 그때 나를 위한 건 줄 알면서도 화가 났어. 빛의 힘만 주면 필립이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 줄 텐데, 네가 방해하는 것 같았거든.”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어? 내가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러게. 내가 왜 그랬을까? 하지만 필립과 대화를 하다 보면 그런 기분이 들었어. 내가 너무 좋아한 거겠지. 나, 정말 바보인가 봐.”
“네 잘못이 아니야. 빛의 힘을 빼앗기 위해서 우리 사이를 일부러 이간질한 게 분명해.”
세르도 알고 있다면 더는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당장 떠나자. 그 망할 자식은 잊어버리는 거야.”
“안 돼.”
“왜? 설마 아직도 필립을 좋아하는 거야?”
“나는 죄를 지었어. 행복해져서는 안 돼.”
“죄라니? 그게 무슨….”
미처 물어보기도 전에 세르가 거친 기침을 토했다. 그녀는 다급히 입을 막았다. 하지만 손가락 사이로 붉은 피가 뚝뚝 새어 나왔다.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의 팔에 검은색 반점이 보였다.
검은 반점, 기침, 각혈, 이는 락슐과 같은 증상이었다.
“세르, 몸이 왜 이래? 언제부터 아팠어?”
“…….”
“필립도 알아? 설마 그 자식이 치료해주지 않은 거야?”
“이건 내 죄업이야.”
그녀는 또다시 자신이 죄를 저질렀다고 말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녀는 나를 물끄러미 올려보았다. 그리고 나와 연락이 끊겼던 동안 있었던 일들을 조심스럽게 말하기 시작했다.
“나의 힘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죽었어. 그래서 벌을 받는 거야.”
“너 때문이라니? 설마 그 병을 말하는 거야?”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필립은 내가 준 빛의 힘을 비틀어서 병을 퍼트렸어. 세상을 치유해야 할 힘을 그릇된 곳에 사용했지. 그래서 내가 벌을 받게 된 거야. 나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어. 락슐도 내가 죽인 거야. 내가 그에게 힘을 주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 거야. 미안해. 라온텔, 정말 미안해.”
그녀는 눈물을 터트렸다.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어째서 갑자기 황궁을 중심으로 원인불명의 병이 퍼졌는지, 빛의 힘을 쓰면 오히려 병세가 악화됐는지.
세르가 락슐의 죽음을 사과하며 펑펑 눈물을 쏟았던 이유도 이제 알 수 있었다.
필립은 자신이 황제가 되기 위해서 일부러 전염병을 퍼트렸다. 그리고 황위에 오를 가능성이 있는 황족들을 모두 죽였다. 또한 수도 전역으로 병이 퍼지게 해서 자신이 활약할 만한 상황을 조성했다.
필립은 세르에게 받은 빛의 힘을 비틀어서 지금까지 없던 새로운 병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내 마법이 듣질 않았던 거다.
어차피 그 근원에는 빛이 있었으므로 기존의 치유마법은 전혀 차도가 없었다. 하지만 그 원리를 알고 있는 데다가 빛의 마나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필립만은 병을 고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비틀었던 빛의 흐름을 원래대로 돌리는 방법으로 병을 치료했다. 원인불명의 역병에 대한 두려움에 떨던 사람들은 그의 등장에 환호했고, 필립은 계획한 대로 수월하게 황제가 될 수 있었다.
세르는 그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나에게 사과했던 거다.
“나는 너에게 도움을 받을 자격이 없어. 내가 멍청해서, 나 때문에 락슐이 죽었어. 나 때문에….”
세르는 필립이 자신을 이용했다는 걸 알면서도 그의 곁에 남았다. 그런 식으로 스스로에게 벌을 주고 있었던 거다.
모든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진실을 숨긴 세르가 미웠다. 하지만 지금은 우선 아픈 그녀를 치료하는 게 먼저였다.
나는 이미 사랑하는 연인을 잃었다. 친구마저 잃을 수는 없었다.
“세르, 나에게 주었던 축복을 다시 가져가.”
“안 돼. 그럴 순 없어. 그건 이제 네 힘이야.”
“가져가. 그리고 그 힘을 이용해서 필립에게 주었던 힘을 되찾아. 그리고 원래대로 돌아가. 인간의 육체를 버리면 병도 나을 거야.”
그녀는 빛의 여신이다. 조금이라도 힘이 있다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녀가 필립에게 주었던 빛의 힘 역시 원래 주인에게 돌아올 거다.
하지만 모든 것을 해결할 명확한 방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르는 망설였다.
“…하지만 만약 그렇게 되면 필립은 어떻게 되는 거야? 빛의 힘을 잃어버리면 황제 자리에서 쫓겨나는 거 아니야?”
“이런 상황에서까지 그 자식을 걱정하는 거야!”
답답함에 소리를 지르는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필립과 기사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라온텔, 찾았잖아.”
필립은 나를 보며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네가 왜 나를 찾아?”
“짐의 황후가 될 사람인데 당연히 찾아야지.”
“미쳤어? 내가 왜 네 황후야?”
분노에 차서 소리쳤지만, 필립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짐짓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세르한테 우리의 결혼 소식을 알려주고 있었던 거야?”
“뭐? 웬 헛소리야!”
이런 상황에서도 나와 세르의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필립의 태도에 경악했다. 하지만 그는 나의 반응 따위는 무시한 채 기사에게 명했다.
“라온텔 벨라시안 영애를 황후궁에 모셔라.”
“네, 폐하.”
“황후궁이라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내가 왜 거기에 가!”
나는 필립에게 항의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기사들에게 다시 눈짓을 보냈다. 나는 결국 황후궁으로 끌려가고 말았다.
***
필립은 나를 황후궁에 가두었다. 벨라시안 백작 가문이 이에 항의했지만 가볍게 묵살했다고 한다.
가둬진 곳은 황후궁에서 가장 화려한 방이었다. 벽, 기둥, 천장, 가구, 모든 것이 황금과 보석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누구나가 선망하는 최고의 장소였지만, 나에게는 휘황찬란한 감옥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나를 언제까지 여기 가둬 둘 셈이야?”
“네가 내 소유가 될 때까지.”
“너는 락슐을 죽였어! 황제가 되기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했어! 그런데 내가 너를 용서할 거 같아?”
“그러니 더더욱 나를 선택해야지.”
필립의 입꼬리가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라온텔, 너는 쓸데없는 걸 너무 많이 알고 있어. 그런데도 나는 너를 살려두었어. 그것만으로도 감동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그는 진실이 모두 발각되고 나서도 조금도 미안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 뻔뻔해졌다. 자신 때문에 죽은 사람에 대한 죄책감은 찾아볼 수 없었다.
“네놈의 미친 논리는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어.”
“표현이 과격해졌군.”
“1년 동안 침실에만 갇혀 있으면 너도 그렇게 될 거야.”
“뭐, 앙칼진 것도 나쁘지 않지.”
“허.”
기가 막혀서 혀를 찼다. 사람이 아니라 벽을 두고 혼자 말하는 것 같았다.
“황비를 세 명이나 들였다면서, 나를 잡아두는 이유가 뭐야!”
“말했잖아. 너에게는 황후의 자리를 줄 거라고.”
필립은 나를 황후궁에 가둔 뒤 고위 귀족 영애 셋을 황비로 맞이했고, 자식까지 낳았다.
더는 그를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개소리는 관심 없다. 내가 궁금한 건 오직 세르뿐이었다.
“세르는 어때?”
“아주 잘 지내. 내가 너를 버린 줄 알고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지.”
그는 되지도 않는 이간질을 하려 들었다.
“아프진 않고?”
“걱정하지 마. 죽일 생각까진 없으니까. 나도 그렇게 냉혈한은 아니라고.”
“따뜻해서 눈물이 나네.”
“빈정대지 말고 곰곰이 생각해봐. 네가 어떤 길을 선택하는 게 가장 이득일지. 이대로 갇혀서 허송세월하는 것보다는 황후로 지내는 게 나을 텐데?”
그가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나는 필립의 가슴팍을 그대로 밀쳤다.
“꺼져.”
“언제까지 버틸지 기대되네.”
그는 비릿한 미소를 짓고는 떠났다.
차라리 이대로 갇혀서 평생을 보낼지언정 그의 반려가 되는 일은 없을 거다.
입술을 짓씹는데,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라온.”
“세르!”
세르의 목소리였다. 나는 다급히 창문을 열었다. 그러자 허리에 커다란 끈을 감은 세르가 안으로 들어왔다. 휘장으로 엮은 끈을 이용하여 위층에서 내려온 모양이었다.
그녀의 손등에 검은 반점이 가득했다. 여전히 병이 진행되고 있는 거다.
“미안, 내가 너무 늦었지. 계속 오려고 했는데, 번번이 실패해서.”
“아니야, 와 준 것만으로도 고마워. 그런데 몸은 괜찮은 거야?”
“역시 내 걱정해주는 건 라온뿐이네…. 왜 그걸 잊고 있었을까?”
1년 만에 만난 그녀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내가 갇힌 이후에도 많은 일이 있었던 듯했다.
“필립이 너를 황후로 삼겠다고 공표했어.”
“뭐…?”
“이미 결혼식 날도 잡았어. 한 달 뒤야.”
필립은 나를 강제로 취하지는 않겠다고 했다. 1년 동안 건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말만은 진실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차가운 황금 감옥에서 1년을 버텼다. 하지만 모든 것이 끝났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자, 세르가 나를 부축해주었다.
“라온, 나 말이야 결심이 섰어. 네 말대로 할 거야. 나에게 다시 힘을 돌려주겠어?”
“물론이지. 다시 돌려주는 게 당연하잖아.”
우리는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내가 받았던 축복을 세르에게 돌려주었다. 세르는 힘을 돌려받길 원하고, 나는 그녀에게 주고자 하였다. 서로의 뜻이 통했기 때문에 두 개의 축복은 어떤 장애물도 없이 수월하게 세르에게 다시 돌아갔다.
그녀의 몸이 새하얗게 빛났다.
“힘을 되찾아서 다시 돌아올게. 너를 구해줄 거야.”
“응. 기다리고 있을게.”
***
온통 새까만 암흑 속에서 과거의 기억이 계속 밀려들었다.
세르에게 빛의 축복을 돌려주었을 때, 나는 드디어 이 끔찍한 악몽이 끝날 거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더 큰 비극의 시작이라는 것을 꿈에서도 알지 못했다.
앞으로 걸어갈수록 열기가 뜨거워졌다. 땀이 비 오듯이 쏟아지고 몸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
그때도 그랬다.
세르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궁에는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
텐라른궁에 화재가 발생했다. 황제궁에서 시작된 불은 순식간에 황후궁으로 옮겨붙었다. 찬란한 황금마저 녹아내릴 듯한 강한 화염이 궁을 덮치자,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나는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문을 지키던 기사들 또한 뜨거운 불길에 놀라 도망친 모양이다.
불은 순식간에 번졌다. 열기보다도 고통스러운 건 메케한 공기였다. 시커먼 연기 때문에 앞이 보이지도 않고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나는 문을 두드리다 그만두었다.
문득 이런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황궁에 갇히거나 억지로 필립의 아내가 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어서 락슐을 만나고 싶었다.
모든 걸 포기하려던 그때, 문이 열리며 필립이 안으로 들어왔다.
황궁이 불에 타들어 가고 있는데도 그의 표정이 태연했다. 필립의 짓이구나. 나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너야? 네가 불을 지른 거야?”
“위험해. 가자.”
필립은 부정하지 않고 나의 손을 잡아끌었다. 역시 그의 짓이었다. 그가 텐라른궁에 불을 지른 거다.
“왜 불을 지른 거야?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어!”
황궁이 불에 타고 있다. 사람들이 살려달라는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필립의 얼굴에서는 어떤 죄책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무심한 얼굴로 나의 손을 다시 잡아끌었다. 하지만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버텼다.
“세르는?”
“…….”
“세르는 어디 있어?”
그는 입을 꾹 다물며 나를 안아 올렸다.
“놔! 이거 놔! 당장 내려놔! 놔! 놓으라고!”
하지만 필립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황제의 직속 기사들이 뒤를 따랐지만, 그는 나를 직접 안은 채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황궁의 복도를 걷다가 계단을 내려가고 또 내려갔다.
걸으면 걸을수록 뜨거운 화염과 비명이 점점 멀어지다 못해 공기가 서늘해졌다.
그가 도착한 곳은 텐라른궁의 가장 깊숙한 지하에 있는 실록관이었다.
“잠시 여기 있도록 해.”
“세르는 어디 있냐니까!”
필립은 답을 해주지 않은 채 밖으로 나갔다.
***
나는 황금으로 빚어낸 거대한 공간에 갇혔다. 황후궁도 화려했지만, 젤칸의 역사를 보관하는 실록관에는 미치지 못했다.
세르는 어디 있는 걸까? 황궁은 어찌 됐을까? 필립은 왜 불을 지른 거지?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은 그 어떤 답도 주지 않았다. 황후궁과 달리 이곳에는 작은 창문조차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불은 어떻게 됐는지도 알 수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건 오로지 석판뿐이었다.
나는 석판을 바라보았다. 역병이 발병한 뒤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죽음의 기록, 그중에게는 락슐도 있었다.
-510년 2월, 황태자가 승하했다.
나는 그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보지 않으려고 했지만 나도 모르게 시선이 머물렀다.
“락슐, 락슐….”
나는 하염없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락슐이 그리웠다. 그가 보고 싶었다.
“락슐….”
그의 이름을 되뇌는데, 갑자기 손에서 빛이 흘렀다. 세르가 나에게 주었던 빛의 축복이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다른 힘들도 느껴졌다. 여신의 힘이었다.
그녀의 힘 일부가 나에게 흘러들어왔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세르가 힘을 되찾은 건가? 그리고 나에게 자신의 힘을 일부 보내준 걸까?
어떻게 된 건지 고민을 하는데, 불현듯 귓가에 세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라온, 구해줘! 나를 구해줘!]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생각에 잠겨 있을 시간이 없었다.
나는 그녀가 준 빛의 힘을 이용해 문을 열었다. 필립의 명을 받은 기사들이 나를 막아섰다. 하지만 나는 세르가 준 힘으로 그들을 모두 잠재웠다.
기나긴 계단과 복도를 지나 밖으로 나온 나는 우뚝 멈춰 섰다.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상황이 처참했다.
찬란했던 텐라른궁이 잿더미로 변했고, 대지는 강한 독으로 오염되어 있었다.
언뜻 흑마법처럼 보였지만 다시 보니 다른 종류의 마법이었다. 이건 빛의 마법을 비틀어서 흑마법처럼 꾸민 거다. 세르의 힘을 받았기 때문에 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빛의 흐름이 뚜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이건 필립의 짓이다. 나는 필립이 있는 황제궁으로 향했다. 나를 막아서는 사람은 없었다. 애초에 생명체가 보이지 않았다.
사람도 새도 꽃도 모두 죽어 있었다. 수많은 시체들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너무나도 끔찍한 광경이었다.
황제궁에 가까워지자 거대한 석판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자신의 위대함을 칭송하기 위한 석판을 새운 건가?
필립은 황제로 즉위한 이후 자신의 업적을 찬양하는 동상과 석판을 만들어 곳곳에 세웠다. 이것도 그런 거라 생각하며 무시하고 지나치려고 하는데, 석판의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위대한 로움의 황제 락슐이 고하노라.
락슐…?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필립이 감히 황제를 자처하고 알타르궁의 이름을 멋대로 바꾸어 텐라르궁이라 칭하니, 통탄할 일이로다.
하여 나 락슐은 제국력 687년 9월 1일, 무너져버린 기강을 바로잡기 위하여, 천한 것들에게 더럽혀진 알타르궁을 소멸시키고 감히 로움의 자리를 넘보는 필립과 무도한 무리들을 처단하려 한다.
석판에 새겨져 있는 글을 읽을수록 피가 서늘하게 식어 내렸다.
-우매한 백성들이여 로움에게 복종하라. 만약 이를 거역한다면 로움이 내려준 모든 것을 앗아가리라. 칸의 대지가 암흑으로 물들여 영원히 고통 속에 잠식되리라.
로움을 따르라. 이것이 아둔한 백성들에게 베푸는 마지막 온정이니라.
위대한 로움을 따르라. 젤칸의 새로운 황제 락슐에게 충성을 바쳐라. 젤칸의 백성임을 잊지 마라!
이게 뭐야….
석판에는 락슐이 황궁에 불을 질렀으며, 이 모든 것이 그의 소행이라 말하고 있었다.
이건 필립의 짓이다. 필립이 아니고서야 황궁 한가운데 이런 비석을 세울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비석을 세운 이유는 뻔했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모두 락슐에게 뒤집어씌우려는 거다.
“가만히 있으랬더니 기어이 나왔군.”
그때 뒤에서 필립의 목소리가 들렸다.
“필립, 이 석판은 뭐야! 미쳤어? 제정신이야!!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어!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아니, 사람이길 포기한 지 오래인가?”
나는 휘몰아치는 분노를 그에게 쏟아냈다. 그러자 필립의 붉은 눈동자가 사납게 번뜩거렸다.
“함부로 말하지 마라. 나는 제국의 황제야. 더 이상 무례를 범한다면 아무리 너라도 용서하지 않아.”
“맞아, 너는 황제지. 그럼 네가 지은 일에 책임을 져! 락슐의 이름을 더럽히지 말라고!!”
필립은 울부짖는 나를 보며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라온텔, 역시 너는 똑똑하네. 이것만 보고 눈치챌 줄이야.”
“이따위 거짓말이 통할 것 같아! 락슐은 이미 세상을 떠났어! 백성들도 모두 알고 있다고!”
“인간들은 멍청하고, 모든 것에 쉽게 현혹되지. 그리고 높으신 분들과 관련된 음모라면 사족을 못 써. ‘사실 황태자는 살아 있고, 빼앗긴 나라와 황위를 되찾기 위해 텐라른궁에 불을 지르고, 수도의 인간들도 모조리 학살했다.’라고 하면 모두 혹하겠지.”
나는 귀를 의심했다. 역겨운 말들 속에 너무나도 무서운 문장 하나가 툭 불어졌다.
“학살이라고…? 너 설마 수도의 사람들을 모두 죽인 거야?”
“모두는 아니고.”
필립이 별일 아니라는 듯 피식 웃었다.
“아버지랑 오빠들은?”
“내가 그들을 해칠 리가 없잖아. 너의 가족인걸.”
마음이 놓였지만 크나큰 비극 앞에 기뻐할 수조차 없었다.
“어째서 이런 짓을 한 거야?”
“너 때문이잖아.”
“나 때문이라고…?”
“그래 모두 너 때문이야! 네가 그 계집한테 힘을 준 바람에 이렇게 된 거야! 어차피 조금만 있으면 곧 죽을 계집이었는데, 네가 모두 망친 거라고!”
“세르를 살려줄 거라는 말은 역시 거짓말이었구나.”
그는 처음부터 세르를 죽일 생각이었다. 병을 치료해 줄 생각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
“그딴 말을 믿는 쪽이 문제 아닌가?”
필립은 시니컬하게 뱉었다. 그는 지금껏 본성을 숨겨왔다. 친절한 척, 예의 바른 척, 선한 척 가식을 떨었다. 나와 단둘이 있을 때도 최소한의 가면은 벗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역겨운 본모습을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세르는 지금 어디 있어?”
“죽었어.”
“뭐…?”
“꼴에 여신이라고 죽지를 않더군. 칼로 찌르고 불을 질러도 소용이 없어서 결국 제물까지 썼지.”
“제물을 썼다고…?”
“그래! 그 계집을 죽이기 위해 칸의 백성을 바쳤어! 세르파니아는 내 힘을 빼앗아 가려 했어! 하지만 내가 이겼다! 이제 이 힘은 온전히 내 것이야!”
필립의 붉은 눈동자가 광기에 번뜩였다.
“고작 그런 것 때문에 세르를 죽인 거야? 세르를 죽이려고 황궁에 불을 지르고 대지를 더럽히고 그것도 모자라 칸의 백성들을 제물로 바쳤다고…?”
도무지 이 상황이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필립은 당당했다.
“그 계집이 나에게 덤비지만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다. 네가 빛의 축복을 돌려주지만 않았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그렇게 당당하면 모두에게 밝혀! 락슐의 이름을 더럽히지 말고, 네 짓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라고!”
“락슐, 락슐! 그 새끼 타령 좀 집어치워! 그 새끼가 뭐가 억울해! 칸의 백성들이 죽은 건 결국 락슐 그놈 때문이다! 그놈이 너를 빼앗아 가지만 않았다면 나도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어. 그 자식이 모든 걸 망친 거야!”
필립은 악을 썼다. 단순히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게 아니었다. 그는 진심으로 모든 원인이 락슐에게 있다고 믿고 있었다.
“락슐은 이제 천하의 죄인이 될 거다! 황궁을 불태우고 칸의 백성들마저 죽인 그를 모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겠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을 거 같아? 결국 진실은 밝혀지게 되어 있어.”
“나는 황제다! 내가 하는 말이 곧 진실이야.”
“그렇게는 안 될 거야.”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그는 조소를 지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가자, 라온텔. 새로운 수도로 가서 모든 걸 다시 시작하는 거야.”
“가려면 너 혼자 가.”
나는 필립의 손을 뿌리치며 몸을 돌렸다.
필립은 황궁 한복판에 거대한 비석을 세웠다. 이 모든 죄를 락슐에게 뒤집어씌우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 거다.
그는 무고한 사람들마저 모두 죽인 살인마였다. 락슐에 관한 자료를 없애고 고치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겠지.
하지만 거짓된 자료들 속에서도 진실을 밝혀줄 증거가 있었다. 나는 실록관을 향해 뛰어갔다.
필립은 내 뒤를 쫓았다. 그리고 실록관에 도착하는 순간, 그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뭐야, 라온텔, 실은 감금당하는 게 좋았던 거야?”
“개소리 집어치워.”
“아니면 황금을 좋아했나? 새로운 황후궁도 황금으로 꾸며야겠군.”
“…….”
나는 그의 말을 무시하며 정신을 집중했다.
“어차피 잘됐군. 이곳도 정리를 해야지.”
필립은 락슐이 이미 죽었다는 기록이 담긴 석판을 없애기 위해 손을 높이 쳐들었다. 그는 마법을 시전하려 했지만 내가 더 빨랐다.
나는 석판관 전체에 보호 마법을 걸었다.
공간이 변화했음을 감지한 필립의 얼굴이 와그작 구겨졌다.
“그 계집이 악을 쓰고 내 힘을 뺏어가서는 너에게 줬나 보군.”
“네 힘? 웃기지 마! 처음부터 세르의 힘이었어!”
필립은 나를 노려보며, 실록관에 걸린 보호 마법을 파괴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마법이 튕겨 나가며 오히려 시전자인 필립을 공격했다.
마나의 충격으로 인해 필립의 몸이 실록관 밖으로 날아갔다. 나도 밖으로 나간 뒤 마나를 이용해 문을 닫았다. 거대한 황금문이 빛의 마나로 인해 반짝거렸다.
보호 마법이 완벽하게 발동한 것을 확인한 나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필립에게 다가갔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파괴 마법을 사용하려 했다.
“소용없는 짓이야. 이 마법은 오직 나만이 풀 수 있어.”
실록관 전체에 오직 나의 영혼에만 반응하는 보호 마법을 걸어두었다.
“이제 내 허락 없이는 어느 누구도 이곳에 침입하거나 석판을 부술 수 없어. 네가 역병을 이용해서 비열하게 황제가 됐으며, 락슐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기록은 사라지지 않아.”
“락슐 그 새끼가 그렇게 좋은가? 어차피 죽은 놈의 명예를 위해 발악을 하는군!”
필립의 눈에는 일말의 죄책감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뜻대로 상황이 돌아가지 않는 것에 대한 분노만이 가득했다.
“네가 무슨 짓을 해도 거짓으로 진실을 감출 순 없어.”
나는 싸늘하게 일갈했다. 필립의 죄악은 만천하에 드러날 것이다. 내가 모든 진실을 밝힐 테니까. 그가 이미 세상을 떠난 락슐에게 자신의 죄를 뒤집어씌우려 했다는 사실까지도 말이다.
하지만 필립은 오히려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이 땅에 아무도 들이지 않으면 되겠군.”
***
천 년 전의 기억들이 끊임없이 밀려들었다.
락슐을 잃고, 세르도 지키지 못했다. 수많은 사람이 죽는 걸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슬픔과 무력함, 고통, 절망. 이 공간처럼 어두운 감정들이 나의 마음을 갉아먹었다.
끝도 없이 펼쳐진 어둠 속에 그대로 파묻히고 싶었다. 그때 절망에 젖은 나를 일깨우든 세르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으아아악! 라온텔! 라온텔, 어디 있어! 무서워! 나 무서워!]
처음 이곳에 왔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목소리였다. 그녀의 비명이 커진 것이 아니라, 내가 그만큼 세르와 가까워진 거겠지.
나는 끊어질 듯한 의식을 가까스로 붙잡았다.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다. 이번에야말로 세르를 구해야 한다. 블레이크의 저주를 풀어줘야 한다.
“세르, 조금만 기다려. 곧 구해줄게.”
나는 이를 악물며 다리에 힘을 주었다.
끝없는 어둠 속에서, 천 년 전에 갇혀 있었던 서쪽 탑이 떠올랐다.
***
필립은 실록관을 부수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필립은 여러 개의 벽을 만들어서 실록관의 존재 자체를 지워버렸다. 또한 칸의 대지에 걸어두었던 마법을 오히려 더 강화시켜,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죽음의 땅으로 만들었다.
필립은 칸을 완전히 버리고 세니온으로 수도를 옮겼다.
젤칸은 모든 것이 수도와 귀족들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황제는 오직 수도인 칸만을 다스렸고, 다른 지역은 일체 간섭하지 않았다.
그만큼 수도와 다른 지역 간의 교류가 적었고, 발전도 더뎠다.
필립은 세니온에서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려 했다. 그러자 원래 세니온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귀족들이 반발했다.
젤칸은 황권이 수도에 집중되었던 만큼 지방 영주들의 권한이 막강했다.
세니온에서 황제처럼 군림하던 귀족들은 필립과 그를 따라온 수도의 귀족들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또한 수도의 사정에 밝은 귀족들은 락슐의 만행으로 인해 칸이 죽음의 땅이 되었다는 필립의 말을 의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반발은 오래가지 못했다. 세니온 전역에 역병이 퍼진 것이다.
필립은 이번에도 자신에게 방해가 되는 인간들을 제거하기 위해 병을 이용했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힌다. 계속 똑같은 방법을 쓰면 그를 의심하는 자가 생길 터였다.
필립도 이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최악의 방법을 생각해냈다.
‘락슐의 추악한 만행을 본 빛의 여신은 진노했다. 여신은 로움족의 죄를 벌하기 위해 검은 선물인 탄시놀을 보냈다.’
그는 락슐과 세르 때문에 병이 생겨난 거라 하였다. 그리곤 탄시놀의 원인으로 로움족을 지목했다.
젤칸의 귀족은 대부분 로움족이었다. 수도뿐 아니라 지방의 영주들에게도 로움족의 피가 흘렀다. 분노한 백성들은 귀족들을 공격했다.
필립은 자신에게 반기를 든 귀족은 죽이고, 복종하는 이들의 목숨은 구해주었다. 그리고 모든 원망의 화살을 락슐과 로움족에게 돌리고는 자신은 손쉽게 새로운 수도를 장악하였다.
나는 모든 진실을 밝히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필립은 나를 황궁 서쪽에 있는 탑에 유폐시켰다. 탑 전체에 결계를 쳐놔서 간단한 마법조차 사용할 수 없었다.
게다가 가족을 이용해서 나를 협박했다.
“라온텔, 결계가 상했더라. 또 도망치려 했던 거야?”
“…….”
“귀여운 조카들이 탄시놀에 걸려서 죽어도 상관없나 보지?”
“안 돼! 제발 그러지 마.”
“형님은 너 때문에 사랑하는 딸을 잃었어. 그런데 이제 막내아들마저 세상을 떠나겠구나.”
내가 탑에서 도망치려 하자, 필립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탄시놀을 이용하여 오빠의 딸을 죽였다.
그리고 내가 자신의 뜻을 거스를 때마다 가족을 들먹이며 나를 협박했다.
“그러면 얌전히 있어야지. 아니면 순순히 내 것이 되든가?”
“차라리 나를 죽여! 네가 제일 잘하는 짓이잖아! 그냥 나도 죽여!”
“내가 너를 죽이지 못한다는 걸 잘 알잖아. 나는 너를 사랑하는걸.”
그의 붉은 눈동자가 욕망으로 번뜩였다.
“라온텔, 너는 여신의 힘을 가지고 있어. 나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지만, 한낱 인간에 비할 바가 아니지.”
“너도 인간이야.”
“그렇게 앙칼진 면도 좋지.”
그의 손이 나의 얼굴에 닿았다. 벌레가 기어가는 것처럼 소름이 돋았다. 당장 치워내려 했지만, 필립은 오히려 나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황후 자리는 아직 남아 있어. 라온텔. 이곳을 떠나고 싶다면 괜히 힘 빼지 말고 내 아내가 되도록 해.”
“너는 이미 아내가 차고 넘치잖아!”
필립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 위해서 혼맥을 이용했고, 수많은 황비와 후궁을 들였다.
“말했지. 내가 사랑하는 건 너뿐이라고.”
“너랑 결혼하느니 죽는 게 나아.”
“네가 죽는 날, 벨라시안 가문은 멸망하겠지.”
필립은 내가 자살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탑에 갇힌 채 하루하루 죽지 못해 살아갔다. 가족들도 만날 수 없었다.
필립과 그가 붙여준 하녀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탑에 함부로 발을 디딜 수 없었다.
하녀는 수다스러웠고, 그녀로부터 황궁의 사정과 세상이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오늘 황제 폐하께서 탄시놀에 걸린 고아들을 치료해주셨어요. 약초조차 살 수 없는 어린애들까지 보살펴 주시다니요. 정말 우리 황제 폐하가 너무 자랑스러워요.”
어린 하녀는 해맑게 필립을 찬양했고, 그 말을 들은 나는 절망했다.
모든 것이 필립의 뜻대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에게 반발하거나 의문을 품는 귀족들은 병에 걸려 사라졌다. 탄시놀을 치료하는 필립은 경외의 대상이었다. 백성들은 그를 빛의 여신이 보내준 황제라고 여겼다.
필립은 새로운 건국 신화를 만들어 전 제국에 뿌렸다. 여신의 선택을 받은 필립이 추악한 젤칸을 멸망시키고 황제가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황실과 수도의 사정에 해박한 귀족이나 지식인, 정보에 빠삭한 상인들은 이 이야기가 거짓이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이를 입 밖으로 꺼내는 자들은 모두 탄시놀에 걸려 죽었다.
‘여신의 선택을 받은 필립 황제를 비난하는 것은 곧 여신을 의심하는 것이다. 필립 황제를 비방하면 여신이 벌을 내릴 것이다.’
제국에는 그러한 소문이 퍼져나갔고, 진실을 아는 이들조차 입을 다물게 되었다.
로움족의 귀족들은 탄시놀에 걸려 죽거나 숙청을 당했고, 필립은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는 이들에게 작위를 내려 주었다.
그렇게 아스테릭 제국에는 새로운 귀족들이 등장했고, 그들은 모두 필립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했다. 귀족, 신관, 기사, 아카데미의 교수들마저 모두 필립의 사람들로 채워졌다.
그의 영웅담은 널리 퍼졌고, 락슐은 천하의 악인이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로움족 귀족이 또 탄시놀에 걸렸대요. 분명 우리 황제 폐하를 욕한 걸 거예요. 죽어도 싸죠.”
하녀는 천진한 얼굴로 쉴 새 없이 떠들었다. 그녀에게 모든 진실을 말해주고픈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만약 진실을 아는 순간 이 어린 소녀는 필립에게 살해당할 테니까.
***
“세르, 내 말 들려? 세르파니아, 지금 어디 있는 거야? 살아 있는 거지?”
나는 혼자 있을 때면 언제나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세르가 준 목걸이를 꼭 쥐고, 그녀의 흔적을 찾아 헤맸다.
세르는 정말로 죽은 걸까? 나는 그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나는 실록관에서 세르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분명히 나에게 구해달라고 했다. 그와 동시에 세르의 축복이 다시 돌아왔다. 그녀의 힘 일부가 나에게 흘러들었다.
비록 그날 이후 세르의 목소리를 들은 적은 없지만. 나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더니 필립이 쳐들어왔다. 일상적인 일이었다. 고개를 돌리며 무시하려고 하는데, 그가 다짜고짜 나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방법이 뭐야?!”
“뭐?”
“방법이 뭐냐고! 대체 어떻게 해야 없앨 수 있어? 어떻게 해야!”
그는 미친 사람처럼 광분하며 소리를 질렀다. 이렇게 이성을 잃은 모습은 처음이었다. 칸의 백성들을 학살하고도 태연하던 자가 아니었던가?
무언가 큰일이 벌어진 게 분명했다.
“도대체 왜 이렇게 흥분한 거야? 뭐를 없애야 하는데?”
필립은 나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내 멱살을 잡은 손이 스르륵 풀렸다.
“모르는 건가….”
“무슨 일인데?”
“됐다. 모른다면, 됐어….”
그는 비척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다음 날, 하녀가 머리를 빗겨주다 말고 작게 소곤거렸다.
“1황자 전하께서 여신의 저주에 걸렸대요.”
“여신의 저주?”
“네. 며칠 전에 황궁 무도회가 있었거든요. 거기에서 1황자 전하의 얼굴에 갑자기 검은 글자가 나타났대요.”
검은 글자…? 어젯밤에 어떻게 해야 없앨 수 있냐며 광분해 소리치던 필립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떤 내용인데?”
“잘은 몰라요. 글자가 나타나자마자 폐하께서 놀라면서 숨겼대요. 하지만 분명 황제를 향한 빛의 여신의 원망이 담긴 말이라고 했어요.”
“…여신의 말이라고?”
“네. 이상하죠? 여신님께서 왜 폐하를 원망하신 걸까요?”
황자가 여신의 저주에 걸렸다는 말이 온 제국에 파다하게 퍼졌다.
정작 글자를 보았다는 귀족은 소수였다.
필립은 출신에 상관없이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는 자들에게 무조건 작위를 내려주었고, 작위를 받은 자들 중에는 주로 검술이 뛰어난 용병 출신이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황궁 무도회에 참석한 귀족 중에서 글을 읽지 못하는 자들이 대다수였다. 게다가 필립이 워낙 빠르게 황자의 얼굴을 숨겼기 때문에 실제로 본 사람도 거의 없다고 했다.
그럼에도 여신의 저주에 관한 소문은 날게 돋친 듯 퍼져나갔다. 황자와 황녀들에게 연이어 변고가 생겼기 때문이다.
며칠 뒤 1황자가 죽었다. 하지만 다른 황녀에게 저주가 옮았다.
다음 날 황녀가 죽자 다른 황자가 저주에 걸렸다. 이번에는 한 시간도 버티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그러자 다른 황자에게 저주가 옮았다.
자식들이 죽어 나가는 상황 속에서 필립은 가끔씩 나를 찾아왔다.
“너는 알고 있지! 그년이랑 짜고 나를 엿 먹이는 거잖아! 어떻게 해야 없앨 수 있는지 말해! 말하라고!”
필립은 모든 분노를 나에게 쏟아냈다. 평소의 그라면 이런 행동을 하지 않았을 거다. 그는 내가 이 상황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광기에 사로잡혀 악을 써댔다.
필립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성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있었다.
“세르가 살아 있는 거구나? 세르는 어디 있지?”
그의 반응을 보았을 때, 황자와 황녀들이 세르의 저주에 걸린 것은 분명했다. 역시 세르는 죽지 않았던 거다.
“죽었어! 그년은 죽었다고!”
필립은 마구 소리를 질렀다. 그는 공포와 광기에 사로잡혀 있었다.
“미쳤구나.”
빈정거리는 것이 아니었다. 필립은 정말로 미쳤다.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여덟 명의 황자와 황녀들이 연달아 목숨을 잃었다. 아무리 냉혈한이지만 자식은 사랑했나 보다.
소문을 수습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저주를 풀기 위해 미쳐 날뛰는 필립의 모습을 보니 동정심이 일었다.
그가 불쌍하지는 않았다. 다만 아이들은 죄가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정말로 세르가 한 짓일까? 세르가 필립의 아이를 죽인 걸까?
아무리 복수를 위해서라지만 세르가 죄 없는 아이들을 죽일 리가 없는데….
고민하는 사이 3황녀가 죽고, 6황자에게 저주가 옮겨 갔다.
‘6황자면 제5 황비의 아들인가….’
나의 존재는 은밀하면서도 유명했다. 황비들은 나 때문에 자신이 황후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고, 이따금 탑으로 찾아와 행패를 부렸다.
필립은 그런 상황을 알면서도 방관했다. 애초에 그가 막았다면 서쪽 탑 안으로 출입할 수가 없었다.
“라온텔, 황비들에게 수모를 당하는 것이 억울하지 않아? 황후가 돼서 보란 듯이 눌러주지 그래.”
그는 황비들에게 당해 머리가 흐트러지고 옷이 갈기갈기 찢긴 나를 내려다보며 그렇게 말하고는 했다.
5황비는 여러 명의 황비 중에서도 나를 향한 질투가 가장 심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6황자가 저주에 걸린 것이 통쾌하다거나, 그 아이가 죽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5일에서 하루, 한 시간, 저주에 걸린 아이들이 죽음에 이르는 속도가 점차 빨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6황자는 두 달이 지나도록 죽지 않았다.
6황자가 저주에 걸린 뒤, 필립은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하녀의 말에 따르면 저주를 푸는 방법을 찾기 위해 출궁을 했다고 한다.
‘무언가 변화가 있는 건가? 차도가 있다면 좋겠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세르가 주었던 목걸이를 잡고, 그녀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세르, 어떻게 된 거야? 정말로 네가 그런 거야? 너, 살아 있는 거지? 어디 있는 거야? 제발 말 좀 해줘.”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대답해주지 않았다. 힘없이 목걸이를 내려놓으려는데, 탑을 둘러싼 결계가 흔들렸다.
뭐지? 어째서 결계가 깨진 거지?
필립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두려워했다. 나는 진실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필립처럼 여신의 힘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래서 탑의 결계를 만드는 데 온 힘을 쏟아부었다. 내가 마법을 사용해서 결계에 조금이라도 상처가 생기면 그 즉시 알아차리곤 했다.
그런데 결계가 깨져버렸다. 필립에게 문제가 생긴 거다.
나는 일어났다. 이는 기회였다. 탑을 탈출할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탈출하면 가족들이….
차마 움직이지 못하고 멈춰서는데, 문이 열리며 한 여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벨라시안 영애!”
툭하면 나를 괴롭히던 5황비였다. 나는 멈칫했다. 온갖 천박한 단어를 사용하며 나를 모욕하던 그녀가 처음으로 나에게 제대로 된 호칭을 사용했다.
“벨라시안 영애, 제발 도와주세요! 우리 존을 살려주세요!”
존은 이번에 저주에 걸린 6황자이자, 그녀의 아들이었다.
“저주 때문이라면 저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겁니다.”
세르가 남겼다는 문장이 보고 싶기는 했다. 여기서 내가 저주를 풀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녀는 6황자를 만나게 해줄 거다. 하지만 아이의 생명을 두고 절박하게 울부짖는 어머니에게 거짓 희망을 줄 수는 없었다.
필립은 나보다 훨씬 강한 빛의 힘을 지니고 있다. 그런 그도 여신의 저주를 풀지 못했다. 내가 저주를 풀 가능성은 희박했다.
“저주는 상관없습니다! 벨라시안 영애, 제발 도와주세요! 폐하가 우리 존을 죽이지 못하도록 막아주세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필립이 자기 아들을 해친다고요?”
그럴 리가 없다. 필립은 자식들에게 걸린 저주를 풀고 싶어 했다. 자식에 대한 걱정에 하루하루 미쳐가고 있었다.
“폐하께서는 지금까지 저주에 걸린 아이들을 모두 죽였어요! 다음은 우리 존의 차례예요! 폐하께서는 존이 저주에 걸리자마자 지하 감옥에 가뒀어요! 궁의나 신관, 치료사, 어느 누구도 부르지 않고, 어미인 나조차도 만나지 못하게 막고 있어요. 이대로 가면 존은 죽을 거예요!”
아이들은 매일매일 죽어갔다. 죽어가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세르의 저주 때문이 아니었다. 필립이 자신의 손으로 직접 자식들을 죽인 거였다.
다른 아이들에게 옮겨갈수록 저주가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필립이 망설이는 시간이 짧아졌기 때문에 점점 빠르게 죽었던 것이다.
“존을 살려주세요! 폐하께서도 벨라시안 영애의 말이라면 들으실 거예요! 제발 살려주세요!”
“…알겠어요.”
나는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를 구하고 싶었다. 자식을 살려달라 울부짖는 어머니의 부탁을 외면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세르가 남겼다는 문장을 확인하고 싶었다.
***
나는 5황비의 안내를 받으며 6황자가 갇혀 있다는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수많은 기사들이 나를 막아섰다. 하지만 나 역시 여신의 힘을 받은 몸이었다.
필립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나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빛의 마법을 사용하여 기사들을 제압하는데, 불현듯 여인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라온, 구해줘! 무서워. 나 좀 제발 구해줘!]
세르다. 이건 세르의 목소리였다. 역시 세르는 살아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계속해서 나를 부르고 있었다. 구해달라고 처절하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동안 세르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필립이 쳐놓은 결계 때문에 그녀의 목소리가 가로막혔던 거다.
“세르, 어디야? 내가 갈게. 지금 어디 있어? 너 지금 어디 있어?”
그 순간 세르가 주었던 목걸이에서 환한 빛이 흘러나왔다. 이 빛을 따라가면 세르를 만날 수 있는 건가?
“아악!”
그때 옆에 있던 5황비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우리를 발견하고 뛰어오던 기사들의 몸도 풀썩 꺾였다. 지하 감옥 전체에 거대한 힘이 일렁이고 있었다.
뒤틀리고 일그러져 악의만 남은 빛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사람들이 피를 토하며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밝게 빛나던 목걸이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건 필립의 힘이었다. 출궁했다더니 다시 돌아온 건가? 나는 고민할 겨를도 없이 힘이 느껴지는 곳으로 달려갔다.
필립이 또다시 죄를 지으려 하고 있었다.
나는 가장 깊은 지하 감옥의 문을 열었다. 감옥 바닥에는 피로 그린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고, 그 중앙에는 필립과 같은 은발 머리의 어린 소년이 잠들어 있었다.
‘저 아이가 바로 6황자 존이구나.’
나는 한 번에 알아보았다. 소년의 몸에 검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빛의 여신이다.
나는 지금 필립에게 속아 빛의 힘을 빼앗기고 혼돈의 계곡에 갇혀 있다. 그는 수많은 죄를 지었다. 빛의 힘을 이용해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제국에 사악한 병을 퍼트리고, 락슐 황태자의 짓이라 누명을 씌웠….]
지금 이 순간에도 6황자의 몸에는 글씨가 새겨지고 있었다.
필립이 미쳐가던 이유를 깨달았다. 자식이 걱정돼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죄악이 드러날까 봐 두려움에 떨었던 거다.
죄를 감추기 위해 자신의 손으로 자식들을 죽인 거다.
“라온텔, 탑에서 나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마법진 반대편에 서 있던 필립이 음산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6황자한테 무슨 짓을 할 생각이야! 이제 하다 하다 네 자식까지 죽이는 살인귀가 되려는 거야?”
“나도 죽이고 싶지 않아! 이 아이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어! 혼돈의 계곡까지 다녀왔어! 그 계집이 꼴에 여신이라고 몇 년 동안 힘을 모았더군. 나오려고 발악을 하길래 다시 처넣어줬지! 그런데도 망할 저주가 풀리지 않아! 젠장! 젠장!”
필립의 눈이 광기에 젖어 있었다. 소리를 지르다가 혼자 중얼거리더니 머리를 쥐어뜯으며 욕지거리를 날렸다. 그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세르를 또다시 가둔 거야?”
“세르! 세르! 세르! 닥쳐! 제발 그 계집 타령 좀 그만해!”
필립의 외침과 함께 그의 마나가 나를 공격했다. 일그러진 빛의 마나가 몸을 관통하는 순간 사지가 찢어질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나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필립은 그런 나를 뒤틀린 눈으로 내려보았다.
“방해하지 말고, 거기 가만히 있어.”
그는 마법을 써서 나의 사지를 구속했다. 필립은 나를 완전히 결박하고는 6황자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이번에야말로 없앨 거다.”
필립은 마법을 시전했다. 아까보다도 강한 마나가 마법진을 중심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필립은 여신에게서 받은 마나를 모조리 쏟아붓고 있었다. 찬란한 빛의 힘이 마구 뒤틀리더니 거대한 악으로 변했다.
6황자는 비명을 질렀다. 그의 몸에 새겨져 있던 글자가 점차 사라졌다. 아니 다른 문장으로 덧씌워지고 있었다.
나는 필립이 무엇을 하려는지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자식에게 저주를 걸고 있었다. 여신이 보낸 글자를 지울 정도로 강력한 저주가 몸에 퍼져나가자 어린 소년은 괴로움에 떨었다.
저주의 마법이 모두 끝나자, 세르가 보낸 글자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녀가 보낸 메시지 대신, 빛이 일그러진 듯한 형태의 저주의 문장이 소년의 몸을 가득 채웠다.
6황자는 결국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혼절했다. 나는 육체의 고통도 잊고 경악에 젖었다. 적막으로 가득 찬 감옥 안에서 필립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하하하! 됐어! 됐어! 내가 이겼어! 나의 승리다! 세르파니아, 보고 있나? 너는 졌어! 네가 아무리 글자를 남겨봤자 아무도 알지 못할 거다!”
그는 실성한 듯 웃으며 마구 소리를 질렀다. 나는 그의 웃음을 무시하며 바닥을 기었다.
필립은 자신이 지닌 모든 힘을 쏟아냈다. 뒤틀린 빛의 힘은 마법진을 너머 나에게까지 향했다. 이미 다친 상처 안으로 새까맣게 변질된 빛의 마나가 퍼졌다.
나는 울컥울컥 피를 토하면서도 남은 힘을 짜내며 기어갔다.
어린 소년이 걱정되었다. 그리고 겨우 6황자의 옆에 도착했다. 하지만 소년은 숨을 쉬지 않았다.
“죽었어.”
“…뭐?”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던 필립이 나의 말에 한발 늦게 반응했다.
“네 아들이 죽었다고.”
필립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슬퍼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래, 그럴 줄 알았지.”
그는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옆에 있던 감옥 문을 열었다. 그 안에는 필립과 같은 은발 머리를 한 어린 소년과 소녀들이 겁에 질린 채 쪼그려 앉아 있었다.
“어디야! 어디 있어! 죽여도 곧바로 다른 놈에게 옮겨붙었잖아! 누구야! 이번에는 또 누구냐고!”
필립은 악을 쓰며 아이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겁에 질린 아이들이 울음을 터트렸지만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다 한 남자아이를 번쩍 들었다.
“성공이야!”
그는 환희에 차서 소리쳤다. 소년의 얼굴에 시커먼 저주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세르가 보낸 메시지는 완전히 사라지고 필립이 심은 저주의 문장만이 또렷이 보였다.
“됐어! 이제 됐어! 완전한 나의 승리야!”
필립은 전쟁에서 승리한 것처럼 기뻐했다. 환희에 가득 찬 기괴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눈을 감았다.
***
6황자가 죽고 7황자에게 저주가 옮겨 갔다.
필립은 기쁨에 가득 차서 수도의 귀족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저주에 걸린 7황자를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내가 여신을 배신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고 들었다. 하나 그것은 모두 거짓이다. 보아라! 황자의 얼굴에는 어떤 글자도 적혀 있지 않다! 이는 여신이 보낸 저주가 맞다. 그러나 내가 배신했기 때문이 아니다! 여신은 나에게 힘을 주어 아스테릭을 건국하도록 하였다. 그녀는 아스테릭이 영원히 번영하기를 바랐고, 제국을 멸망으로 이끌 폭군의 씨앗을 알려주기 위하여 저주의 문장을 내린 것이다!”
필립은 또다시 상황을 모면했다. 아무 죄 없는 자신의 자식에게 폭군의 씨앗이자 타락한 영혼이라는 낙인을 찍으면서 말이다.
7황자는 매일매일 크게 앓았다.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여신의 힘과 이를 막으려는 필립의 저주가 충돌하여 어린 몸을 괴롭히고 있었다.
이대로는 얼마 살지 못할 거다. 아무리 오래 버틴들 성인이 되기 전에 목숨을 잃겠지.
필립은 젤칸의 문자를 없애려고 했다. 행여 자신의 죄악이나 진실이 밝혀질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신의 저주가 나타난 이후로는 더욱 강박적으로 글자를 없애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든 잘못을 아스테릭 제국에게 불만을 품은 로움족의 소행으로 뒤집어씌웠다.
세르가 보낸 메시지를 저주로 지우고, 젤칸의 문자도 점차 사라져갔다. 자신이 저지른 죄가 발각될 위험이 사라지자, 필립도 다시 안정을 찾았다.
그는 나의 거처를 남쪽의 별궁으로 옮겨 주었다. 결계를 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아니, 나는 결계를 버틸 힘이 없었다.
필립의 공격과 저주의 마나를 그대로 받아내고 난 뒤, 나의 몸은 완전히 망가져버렸다. 걷기는커녕 앉아 있는 것조차 힘에 부쳤다.
빛의 마법을 쓸 수도 없고, 목걸이를 쥐고 있어도 세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결계가 사라졌는데도 말이다.
“라온텔, 미안해. 그때는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어.”
필립은 매일같이 나에게 사죄했다.
“고쳐줄게. 너를 반드시 고쳐줄 거야.”
그는 나를 붙잡고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필립은 방대한 빛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세르와 싸우며 힘을 일부 잃었다. 그는 세르를 봉인하기 위해 사람들을 제물로 바쳤고, 혹여 누군가가 진실을 알까 두려워서 칸의 땅 전체에 풀리지 않은 저주를 걸어두었다. 아무리 필립의 힘이 막강하다지만 마나의 소모가 큰일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세르가 보낸 메시지를 숨기기 위해서 남은 모든 힘을 쏟아부었다.
이제 그도 남아 있는 힘이 얼마 남지 않았다. 예전의 필립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그는 나를 치료할 수 없었다.
“라온텔, 원하는 게 있으면 뭐든지 말해.”
“세르의 봉인을 풀어줘.”
이제는 말을 하는 것조차 힘겨웠다. 내가 간신히 말을 뱉자, 필립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것만은 들어줄 수 없어.”
나는 실망하지 않았다. 어차피 예상했던 반응이었으니까.
“그럼 바위를 구해줘.”
“바위?”
“응. 아주 커다란 바위.”
“바위는 왜?”
“산에 온 기분이 날 거 같아서. 이제는 갈 수 없으니까….”
“내가 고쳐준다고 했잖아! 함께 산에 가면 돼!”
그는 나를 끌어안으며 울부짖었다. 역겨워서 밀치고 싶었지만,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내가 낫는다고 해도 필립과 함께 산에 오를 일은 없을 거다. 필립은 아직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필립은 커다란 바위를 구해주었다. 아주 흡족한 크기였다.
그날 나는 세르에게 받았던 목걸이를 하녀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 목걸이와 편지를 벨라시안 백작에게 전해줘. 황제에게는 비밀로 하고.”
“네? 하지만 저는….”
필립의 명으로 나의 하녀가 된 그녀는 무척 난처해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는 부탁이야. 제발 들어줘. 네가 곤란할 일은 없을 거야.”
“아가씨….”
나는 망설이는 그녀에게 보석상자를 건넸다. 필립이 그동안 내게 주었던 선물이 담긴 상자였다.
“대신 이걸 너에게 줄게.”
“저, 정말요?”
“응. 그러니까 꼭 전해줘야 해.”
“네! 알겠어요!”
내가 죽으면 세르에게 받은 빛의 힘은 벨라시안 가문의 사람에게 계승될 거다. 나는 빛의 힘을 계승한 자에게 이 목걸이를 맡기고 싶었다.
이 목걸이는 세르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 언젠가는 저주를 풀 수 있을 거다.
모든 일들을 편지에 적으면 좋겠지만, 중간에 필립이 가로챌 확률이 높았다.
비밀이라고는 해도 정말로 아무도 모르게 아버지의 손에 전달될 확률은 낮겠지. 만약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를 느낀다면 필립은 편지를 전해주지 않을 거다.
나는 편지에 가족에 대한 감사함과 미안함을 적었다. 그리고 목걸이에 대한 글은 짧게 남겼다.
-고모가 되어서 조카에게 선물 한 번을 제대로 준 적이 없어. 이 목걸이는 아틴에게 전해줘. 고모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는 선물이니 소중히 간직해야 해.
이 정도 내용이라면, 아무리 필립이라도 중간에 가로채지는 않겠지.
나는 조카인 아틴에게 빛의 힘을 넘겨줄 생각이었다. 아틴은 총명한 아이였다. 분명히 이 목걸이가 지닌 의미를 깨달을 거다.
“세르, 미안해.”
목걸이와 편지를 들고 떠나는 하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세르에게 사과했다. 나는 결국 세르를 구하지 못했다.
하녀가 떠나고 바위를 바라보았다. 나는 바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마나를 전부 쏟아부었다.
바위가 부서지고 조각이 나며 석판의 모습을 갖추었다. 나는 그 위에 마나로 글자를 새겼다.
***
정원에 있는 의자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데, 필립이 안으로 들어왔다.
“라온텔, 밖에서 뭐 하고 있어. 날이 추워. 어서 들어가자.”
“너를 기다리고 있었어.”
“나를…?”
필립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이 남자는 도대체 나에게 무엇을 기대하는 걸까?
“너, 나를 사랑하니?”
“그래, 사랑해! 내가 사랑하는 건 오직 너뿐이야! 라온텔!”
“그럼 이걸 황제궁 앞에 세워줘.”
나는 석판을 가리켰다. 나를 따라 고개를 돌린 필립도 뒤늦게 석판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이건….”
-5년 9월, 여신의 저주에 걸렸던 3황녀가 예척했다. 그 직후 6황자에게 여신의 저주가 이어졌다.
-5년 11월, 6황자의 몸에 새겨진 저주의 문장이 바뀌었다. 6황자가 예척했다. 그 직후 7황자에게 여신의 저주가 이어졌다.
석판에 새겨진 글을 본 필립의 얼굴이 서늘하게 굳었다.
“이곳에 와서는 실록관을 만들지 않았다며? 그래서 내가 직접 역사를 새겨봤어.”
“라온텔, 이게 무슨 짓이지?”
“왜? 뭐 틀린 거 있어? 양식도 맞고, 내용도 맞잖아?”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지금 뭘 하자는 거야!”
“나를 사랑한다면서. 이 정도 부탁도 못 들어줘? 진실이 적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저주의 문장이 바뀌었다는 것뿐이잖아.”
“그걸 말이라고 해!”
필립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불쌍해라.”
“뭐…?”
“고작 이런 글에도 겁을 집어먹을 만큼 두려워? 그럴 거면 왜 그런 짓을 했어?”
“내가 원해서 한 게 아니야! 그 계집이 그딴 짓만 하지 않았다면….”
그가 또 남 탓을 했다. 언제나 자신이 잘못한 건 하나도 없다. 나는 그의 변명을 들어주고 싶은 생각도, 시간도 없었다.
“필립, 세르의 봉인을 풀어줘.”
“안 돼.”
“너를 위해서라도 풀어야 해. 세르는 계속 말할 거야. 자신을 구해달라고 계속해서 울부짖을 거야. 너의 자식, 손자, 그 후손들의 몸에도 계속 글씨가 새겨지겠지.”
“이제 글씨는 보이지 않아. 내가 다른 저주로 덮었으니까! 그리고 젤칸의 문자도 완전히 없앨 거다. 세르파니아가 뭐라 떠들든 알아차릴 사람을 아무도 없어!”
“그럼 너의 자식과 후손들이 받을 고통은? 세르의 봉인이 풀릴 때까지 저주는 끝나지 않을 거야.”
“세르가 돌아오고 진실이 드러나면, 내가 쌓아 올린 모든 것이 무너질 거다. 아스테릭 제국도 멸망하겠지. 그것보다는 한두 명이 아픈 게 나아.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야.”
“아니. 너의 이기심을 위한 덧없는 희생일 뿐이야.”
“…들어가자. 춥다.”
필립은 자신의 외투를 나에게 덮어주고는 석판으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석판을 부술 생각이었다.
“부술 수 없어. 내 마지막 힘을 쏟았으니까. 네가 무슨 짓을 해도 부서지지 않을 거야.”
“너는 정말로 나를 애먹이는구나.”
그는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예상한 것과 달리 그리 화를 내지는 않았다.
“부술 수 없으면 지우면 그만이야.”
그는 석판 위에 손을 올렸다. 필립이 힘을 쏟자, 글자들이 형태를 잃고 뭉개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힘을 소진하긴 했구나. 그런 어설픈 눈속임을 하다니.”
힘을 줘서 돌을 마모시키긴 했지만, 내가 새긴 마나의 흔적은 지우지 못했다.
“빛의 힘을 지닌 사람이 보면, 금방 알아차릴 거야.”
“세르파니아는 봉인됐어. 이제 빛의 힘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우리 둘밖에 없어.”
“미래는 모르는 거지.”
“만약 이 돌에 접근하는 자가 있다면 죽이면 된다.”
필립의 손에서 나온 시커먼 마나가 석판을 뒤덮었다. 그는 싸늘한 얼굴로 어둠에 사로잡힌 석판을 옆에 있는 호수에 던져버렸다.
석판은 수면 아래로 사라졌다. 아쉽지는 않았다. 어차피 필립을 설득할 도구로 만든 것일 뿐,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그저 지금 내가 가진 힘으로 할 수 있는 걸 찾다가 석판을 만들었을 뿐이다.
그가 이 석판을 보며 자신이 저지른 죄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깨닫기를 바랐지만, 그조차도 너무 큰 기대였나보다.
“이제 흑마법사가 다 됐구나. 치료하는 법은 다 잊어버렸으면서.”
“너도 고칠 거다.”
“안 될 거….”
입을 여는 순간 붉은 피가 쏟아지더니 몸이 옆으로 기울었다.
“라온텔!”
필립은 바닥에 쓰러진 나를 다급히 끌어안았다.
“라온텔, 안 돼! 조금만 참아! 내가 너를 구할 방법을 찾아낼 테니까, 조금만 더 버티면, 내가 너를…!”
그는 울부짖었다. 마치 내가 락슐을 떠나보낼 때 그랬던 것처럼, 나를 붙잡고 애원했다.
“필립….”
“그래, 라온텔, 말해. 듣고 있어.”
나는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마지막 말을 뱉었다.
“네가 싫어.”
***
그래, 그 석판은 내가 만들었던 거다.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 마나를 그 석판에 쏟아부었다.
내가 눈을 감는 순간 울부짖던 필립의 목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쳤다.
필립은 나를 죽음으로 몰았고, 또한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는 정말로 나를 사랑했을까? 모르겠다.
확실한 건 하나뿐이다. 나는 그가 끔찍했다. 지금까지도 소름이 끼친다.
라온텔의 기억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떠올랐다.
그리고 전생의 기억과 그동안 알아낸 자료들을 통해서 지난 천 년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건지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죽고, 나의 힘은 조카인 아틴에게 넘어갔다. 필립은 내가 부탁한 편지와 목걸이를 순순히 벨라시안 백작가에 전해주었다.
하지만 아틴도 그리고 힘을 이어받은 다른 계승자들도 세르의 봉인을 풀지 못했다.
오히려 계승자들은 점차 빛의 힘을 쓰는 방법을 잊어갔고, 천 년이 지나자 신체를 접촉하며 겨우 미약한 힘을 전달해주는 것에 그치게 되었다.
세월이 지나자 이 목걸이는 ‘빛의 눈물’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빛의 계승자를 알려주는 도구로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필립은 철두철미한 인간이었다. 그는 내가 남긴 목걸이를 벨라시안 가문에 보냈지만 마지막까지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그래서 그 목걸이를 주시하다가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없애라는 유언을 남겼을 거다.
빛의 눈물이 서쪽 탑 아래에 있는 비밀 창고에 봉인돼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겠지.
필립은 자신을 건국 영웅으로 포장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자 그의 바람은 이루어졌다. 진실을 아는 이도, 의심하는 이도 모두 사라지고, 필립의 건국 설화는 자연스럽게 진실이 되었다.
세르는 서쪽 끝에 있는 혼돈의 계곡에 봉인되어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 탈출하기 위해 힘을 끌어모았고, 그때마다 혼돈의 계곡에서는 거대한 문이 열렸다.
필립은 이를 마계와 연결된 ‘어둠의 문’이라 칭하며, 자신의 혈육으로 하여금 문을 계속 봉인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여신을 계속 봉인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힘이 필요했고,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필립은 세르의 메시지를 숨기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힘을 사용했다. 결국 필립이 지닌 빛의 힘을 물려받은 사람은 다름 아닌 ‘저주의 계승자’였다. 이에 필립은 새로운 방법을 떠올렸다.
저주의 계승자가 지닌 힘을 끌어 쓸 수 있도록 ‘빛의 반지’라는 도구를 만든 것이다.
그리고 이 반지를 다음 대 황제에게 물려주며, 어둠의 문을 봉인하거나 빛의 힘이 필요할 때마다 사용토록 하였다.
제국의 황제가 빛의 힘을 쓸수록 저주의 계승자는 고통을 받고 생명이 줄어들었다.
필립은 마지막까지 비열한 인간이었다.
하지만 모든 게 필립의 뜻대로 이루어진 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치부를 감추기 위해 저주의 계승자를 나락으로 처박았다.
여신이 폭군의 씨앗이 될 타락한 영혼에게 저주를 내린 것이라고 하며, 모든 진실을 숨기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자식들은 저주의 문장이 바뀌던 그 날, 바로 옆방에 있었다.
그들은 저주의 계승자에게 잘못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필립의 잘못으로 인해 여신이 노하여 저주가 걸렸다는 것도 짐작했다.
필립이 죽고 그 자식이 황제가 되었다. 그는 진실을 밝혀야 할지 고민했을 거다. 하지만 이 일이 알려지면 제국의 위엄의 땅에 떨어질 것이 자명했다.
아스테릭 제국은 여신의 힘을 내세운 나라였다. 게다가 아직은 불안정한 신생 국가였다.
2대 황제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저주의 계승자에게 모든 비난이 쏠리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자신이 추측한 진실을 다음 황제에게 알려주었다.
그래서 필립이 여신을 배신했기 때문에 저주를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함께 전해진 것이다.
이것이 저주의 계승자에 대한 진실이었다. 천 년 동안 블레이크를 비롯해 수많은 이들이 필립의 욕심으로 인해 희생되었다.
나는 필립에 대한 분노를 억누르며 마지막 발걸음을 옮겼다.
라온텔이던 시절의 기억이 끝나자 앤시아의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진짜 앤시아였다. 그래서 소설에도 나오지 않았던 장면들이 자꾸만 생각이 났던 거다. 모두 직접 겪었던 내 기억이니까.
나는 블레이크와 결혼을 하던 날, 호수에 빠졌다가 석판에 걸린 마법 공격을 받고 죽었다. 그리고 다른 세상에서 환생했다.
나는 모든 걸 잊고 대한민국에서 살아갔다. 그러다 소설이 매개체가 되어서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 거다.
그렇다면 ‘야수와 영애님’이라는 소설은 어떻게 된 걸까? 아마도 나와 마찬가지로 두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 누군가가 쓴 것이 아닐까?
나는 한 번 죽었고, 기적적으로 다시 기회를 얻었다. 세르를 구하고 블레이크의 저주를 풀기 위해서 하늘이 주신 기회라고 생각한다. 이번에는 절대로 실패할 수 없다.
어둠이 이어지고 또 이어졌다. 뜨거운 열기 때문에 몸이 녹아 없어질 것 같았다.
나는 무릎을 붙잡으며 힘겹게 걸어갔다. 숨을 쉬기 힘들었다. 의식마저 멀어졌다. 몸에 감각이 없었다. 하지만 계속 다리를 움직였다.
머릿속에는 오직 블레이크와 세르의 생각뿐이었다.
암흑 속에 유일하게 반짝이는 작은 빛을 따라 걸어가는데, 여명이 밝아오듯 붉은 빛이 눈앞에 펼쳐졌다.
드디어 찾았다. 세르다. 바로 이 앞에 세르가 있다.
“아아아악! 아악!”
세르의 비명이 들렸다. 나는 뛰기 시작했다. 몸에 감각이 없었지만 남아 있는 모든 힘을 짜내서 앞으로 나아갔다.
진흙에 발이 빠지고, 넘어져서 손바닥이 찢어졌다. 하지만 멈추지 않고 뛰고 또 뛰었다.
어둠이 사라지고 검붉은 빛이 점차 강해졌다.
그곳은 온통 붉었다. 텐라른궁의 대화재처럼 뜨거운 화염이 대지를 뒤덮고 있었다.
시뻘겋게 일렁거리는 바닥을 본 순간 다리가 뻣뻣하게 굳었다. 망설이는 찰나의 시간을 가르며 세르의 비명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뜨거워! 구해줘! 라온텔, 구해줘! 무서워! 무서워!”
“갈게. 금방 갈게. 세르.”
세르가 바로 앞에 있는데,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나는 뜨겁게 일렁이는 불길 속을 맨발로 뛰어들었다.
화염에 녹아서 그대로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 너무 아파서 비명조차 지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건 진짜 불이 아니라 마법이었다. 뜨거운 불길 속에 비틀린 빛의 마나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필립의 짓이다. 세르를 봉인하기 위해서 이런 마법을 걸어 놓은 거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뜨거운 빛의 열기 속에 세르를 가둬둔 것이다.
나는 이를 악물고 계속 걸었다. 진짜 불은 아니었지만 고통은 그대로 느껴졌다. 살이 타들어 가고 뼈마저 녹아내릴 것 같은 아픔이었다.
걷고 또 걷고 하염없이 걸어가자, 검은빛으로 감싸인 투명한 구체가 보였다. 그리고 그 안에 세르가 갇혀 있었다.
나는 곧장 그녀에게 달려갔다. 거대한 불기둥이 봉인구를 에워싸고 있었지만 망설일 틈이 없었다.
“으아아악!”
세르는 그 안에서 마구 벽을 두드리며 울부짖고 있었다.
찬란하게 빛났던 새하얀 머리카락은 빛을 잃었다. 드레스에는 화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옷자락이 타고 군데군데 찢겨 가느다란 팔과 다리가 그대로 드러났다.
하지만 천 년 전처럼 검은 반점이 보이진 않았다.
세르는 나에게서 빛의 축복을 돌려받은 뒤, 필립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에게서 신의 힘 일부를 되찾았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을 잠식하던 검은 반점이 사라졌고, 나이도 먹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천 년 만에 만난 세르를 보며 말문이 막혔다. 검은 반점이 있던 자리엔 심한 화상 흉터가 나 있었다.
아마 텐라른궁 대화재 때 심각한 화상을 입었던 거겠지. 그녀는 치료를 하지 못한 채 봉인을 당했고 천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화상의 상처는 지독한 흉터로 남았다.
“세르!”
“라온텔…?”
내가 봉인구 앞으로 다가가자 세르도 나를 알아보았다.
“그래, 나야. 세르, 조금만 기다려. 금방 꺼내줄게.”
나는 봉인구를 열려고 했다. 하지만 손을 대는 순간 음산한 마나가 느껴지며 몸이 뒤로 튕겨 나가고 말았다.
필립이 걸어놓은 봉인이 너무 강했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투명한 구체 안에 수많은 생채기와 작은 균열들이 보였다. 세르가 천 년 동안 겪어온 사투가 눈앞에 그려져서 가슴이 찢어졌다.
천 년 동안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외로웠을까, 얼마나 괴로웠을까, 얼마나 무서웠을까…. 하지만 지금은 슬퍼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세르는 필립의 봉인을 깨려 했다. 하지만 봉인구가 열리려 할 때마다 어둠의 문도 함께 열렸다.
이를 마계와 연결된 통로라 생각한 아스테릭 제국의 황제는 저주의 계승자가 지니고 있는 빛의 힘을 이용하여 문을 봉인했다. 그와 동시에 세르를 가둬둔 봉인구도 다시 닫혔다.
세르는 이곳에 봉인되기 전, 나에게 빛의 힘을 나눠주었다. 그녀의 힘과 내가 지닌 힘을 합친다면 봉인을 풀 수 있을 거다.
나는 라온텔의 기억을 떠올렸다. 빛의 마나를 다루고 마법을 사용하는 방법을 다시 생각해냈다. 정신을 집중하며 세르가 나에게 주었던 힘을 깨웠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그렇게 간단한 일이었다면 라온텔의 기억이 처음 떠올랐을 때 빛의 힘을 사용했을 거다.
어떻게든 힘을 모으며 간신히 봉인구에 손을 가져갔다.
그 순간 봉인구를 감싸고 있던 뒤틀린 빛의 마나가 나의 손을 타고 뼛속까지 흘러들었다. 봉인이 풀리는 걸 막기 위해 필립이 걸어놓은 마법이었다.
과거 필립의 공격을 받았을 때가 떠올랐다. 또다시 그의 마법에 죽는 건가? 나는 또 세르와 블레이크를 구하지 못하는 거야?
죽음보다 더 큰 두려움이 엄습했다. 고통 때문에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그때 나의 몸을 파고들던 검은 마나가 서서히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깜짝 놀라서 눈을 떴다. 그러자 세르의 모습이 보였다. 세르가 투명한 막 너머로 나와 손을 맞대고 있었다.
그녀의 마나가 전해지자, 그동안 내 안에서 잠들어 있던 빛의 힘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그녀의 도움으로 인해 막혀 있었던 마나의 길이 모두 열렸다. 라온텔이던 시절로 다시 되돌아간 것 같았다.
우리가 동시에 힘을 쓰자, 봉인구를 에워싼 필립의 검은 마나가 점차 힘을 잃고 사라져갔다. 봉인구에도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안과 밖, 양쪽에서 생긴 균열이 점점 더 커져갔다. 그리고 마침내 거대한 파열음과 함께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그 순간 다시 암흑이 찾아왔다. 필립이 세르를 봉인하기 위해 걸어놓은 뒤틀린 마나가 사라지며, 거대한 불길 또한 신기루처럼 없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전과는 달랐다. 모든 것이 절망 속에 잡아먹힌 듯한 비극이 아니라, 고요한 밤하늘처럼 평화로웠다.
검은 어둠 속에 나와 세르가 내뿜는 환한 빛이 점점 크게 퍼져나갔다.
“라온텔!”
“세르!”
드디어 봉인에서 풀려난 세르가 쓰러지듯 나에게 안겼다.
“왜 이렇게 늦었어! 너무 늦었잖아! 언제나 내 곁에 있겠다고 했잖아! 친구라고 했잖아!”
그녀는 아이처럼 울부짖었다.
“미안. 세르. 미안해.”
나는 세르를 꼭 끌어안았다. 그러자 화상 흉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세르의 왼쪽 몸을 가득 뒤덮은 화상 흉터를 보자 눈물이 왈칵 치밀었다.
“미워! 미워! 내가 너를 얼마나 불렀는데. 나한테는 너밖에 없는데.”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어.”
미안했다.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세르는 천 년 동안 오직 나만을 찾았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잊고 있었다. 구해주지 못했다.
“나빠! 정말 미워. 내가 얼마나 외쳤는데, 계속 구해달라고 했는데, 너무해. 미워. 미워!”
“미안해. 세르, 다 내 잘못이야. 늦게 와서 정말 미안해.”
나는 계속 세르에게 사과했다. 그녀는 내가 밉다고 말하면서도 야윈 손으로 나를 강하게 붙잡았다.
나는 전생을 기억하지 못했다. 앤시아로 처음 환생했을 때는 10살의 나이에 죽었고, 그다음에는 대한민국이라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다시 이 세계로 돌아왔을 때는 소설 속 세상인 줄만 알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미안했다. 세르는 필립에게 배신당했다. 그녀에게는 나밖에 없었다. 세르를 구할 사람도 오직 나뿐이었다.
“미안해.”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나는 서러운 울음을 토하는 그녀를 안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세르의 울음소리가 점차 잦아들더니,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라온텔 잘못이 아니야.”
그녀는 처음보다는 다소 진정이 된 듯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
고맙다고 말하려는데 세르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퍼졌다.
“필립 때문이지.”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세르는 언제나 소녀 같았다. 외모도 변하지 않았지만, 천진한 눈빛과 맑은 분위기에서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달랐다.
“죽일 거야.”
낮게 중얼거리는 그녀의 눈에 거대한 분노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나는 비척비척 걸음을 떼는 세르를 다급히 붙잡았다.
“세르, 필립은 죽었어! 이미 천 년의 시간이 흘렀….”
“알아.”
그녀는 나의 말을 자르며 싸늘하게 뱉었다.
“필립은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자식을 낳고, 또 낳고, 또 낳았지. 그리고 환생도 했고.”
“필립이 환생할 걸 알고 있었어?”
“응. 이 근처에 왔었어. 아니? 근처인가? 바다 건너 작은 섬. 섬. 섬이지.”
이 근처의 작은 섬?
혼돈의 계곡은 황제와 대신관의 허락을 받지 않은 자의 출입이 철저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니 리차드가 이곳에 왔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그녀가 말하는 작은 섬은 길버트 벨라시안의 유배지를 말하는 건가?
“가지 말라고 했는데, 가버렸어. 또 나를 버리고. 죽일 거야. 다 죽일 거야! 없앨 거야! 필립의 자식들도 그가 세운 나라도 전부. 전부 다….”
그녀는 작게 중얼거리다가 소리를 지르다 다시 중얼거렸다.
바다를 머금은 것처럼 새파란 눈동자가 공허하게 일렁거리다가 이내 분노로 타올랐다.
세르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흉터는 그녀의 몸에만 남은 것이 아니다.
세르는 육체의 고통보다도 더 큰 마음의 상처를 받았고, 천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봉인구에 갇혀 몸부림치며 정신이 완전히 붕괴되었다.
나는 비척거리며 걸음을 옮기는 세르의 손을 다급히 붙잡았다.
“세르, 안 돼!”
그러자 세르가 천진하게 웃으며 나의 손을 맞잡았다.
“모두 죽이고, 우리 둘이 살자. 필립의 핏줄도 나라도 모두 다 없애고, 우리 둘만 남는 거야. 너도 좋지? 라온텔.”
세르는 지금 아스테릭의 황족은 물론이고 제국민들까지 모두 없앨 생각이었다. 전신의 피가 차갑게 식어 내렸다.
“세르, 그러지 마. 복수를 위해 죄 없는 사람을 죽여서는 안 돼.”
그녀의 눈빛이 서늘하게 돌변하더니, 나의 손을 거칠 게 쳐냈다.
“왜 죄가 없어! 나를 봉인했어! 나를 가두고, 천 년 동안 끊임없이 나를 봉인했다고! 나를 가두고 환호했어! 혼자서 겨우겨우 문을 열려고 하면 다시 가두었다고! 필립도 그 후손들도 백성들도 다 똑같아! 나를 이 검은 불구덩이 속에 집어넣고 기뻐했어! 모두 나를 버렸어! 라온텔, 너 말고는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어! 나를 버렸다고! 다 죽일 거야! 모두! 모두!”
이곳까지 오는 내내 죽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그냥 죽고 싶었던 적도 많았다.
그런데 세르는 이 지옥에서 천 년 동안 갇혀 있었다.
거대한 불기둥에 놓인 작은 봉인구에서 갇혀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세르의 고통을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말에 동조할 수도 없었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네가 얼마나 괴로웠을지, 짐작도 가지 않아. 감히 네 고통을 이해한다거나 알겠다는 말을 꺼낼 수조차 없어. 하지만 세르, 그 사람들은 몰랐어. 다들 필립의 말에 속았던 거야.”
“라온텔, 왜 다른 인간의 편을 드는 거야? 너는 나를 구하러 왔잖아! 내 친구잖아! 너는 나를 도와야지! 나랑 같이 복수해야지!”
“세르, 그런 짓을 하면 너도 결국 후회할 거야.”
자신이 필립에게 힘을 주는 바람에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며 슬퍼하던 세르였다.
필립의 잘못을 자신의 책임이라 여기며 죽음마저 각오했었다.
천 년 동안 겪은 고통 때문에 지금은 이성을 잃었지만, 만약 정말로 살육을 저지른다면 그녀는 필시 후회할 거다.
게다가 나에게는 지켜야 할 사람이 있었다.
블레이크가 죽는 걸 두고 볼 수는 없다.
블레이크뿐만이 아니다. 텐스테온, 다이애나, 멜리사, 한스, 에드온, 테리, 콜린….
좋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내가 모르는 사람 중에서도 아무런 죄없이 선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무수히 많을 거다.
그들이 죽는 걸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그리고 세상에는 좋은 사람들이….”
나는 말을 맺지 못했다. 세르가 증오가 가득 담긴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맞다. 너는 필립 편이지?”
“그게 무슨 말이야?”
“필립이 좋아한 건 너였잖아! 그래서 이러는 거잖아! 나를 배신하는 거잖아!”
“그런 게 아니야!”
“친구라고 해놓고! 친구라고 해놓고! 거짓말이었어!! 날 속인 거야!!”
그녀는 광기에 젖어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마나가 거칠게 일렁여서 다가갈 수조차 없었다.
“속인 적 없어. 우린 친구야. 나는 필립의 손에 죽었어. 내가 그 자식을 편들 리가 없잖아?”
“그럼 황태자 때문인가?”
그녀의 입가에 맺힌 비틀린 미소를 본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블레이크를 알고 있었어?”
“당연히 알지. 그 아이는 내 힘을 가졌는걸. 그래서 지켜봤지. 참 행복하더라. 나는 이렇게 괴로운데. 너랑 그 아이는 매일매일 행복했지.”
“행복이라니? 다 봤다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그녀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한 고통을 겪었다는 걸 알기에 무슨 말을 해도 이해하려 했다.
하지만 블레이크가 행복했다는 말은 도저히 참고 넘어갈 수가 없었다.
“블레이크가 얼마나 괴로웠는데! 사람들에게 경멸받고 고통에 시달리면서 언제 죽을지 몰라서 하루하루 두려움에 떨었다고!”
“나보단 편하지! 그렇게 괴로우면 죽어버리면 되잖아! 나는 죽을 수조차 없다고!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왜 내가 준 축복을 돌려줬어? 순수한 인간으로 남았다면 그냥 죽어버렸을 텐데! 왜 힘을 돌려줬어! 그래놓고 오지도 않고! 천 년이나 기다렸어! 너를 계속 불렀다고! 계속 계속 불렀어!”
그녀의 비명과 함께 강한 마나가 방출되었다.
몸이 허공으로 붕 떴다가 그대로 낙하했다.
너무 아파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낮은 신음만 흘리고 있는데, 세르가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래, 맞아. 다 황태자 때문이야. 생각해보면 그 녀석이 나타나면서부터 모든 것이 엉망이었어. 황태자 먼저 죽이자. 그럼 너도 다시 나한테 돌아오겠지?”
“안 돼!”
나는 뒤돌아서는 그녀의 발을 움켜잡았다.
“뭐가 안 돼?”
“블레이크를 건들지 마!”
“그깟 남자 때문에 나를 버리는 거야? 우린 친구잖아?”
“버리는 게 아니야.”
“버리는 거 맞잖아! 필립처럼 너도 나를 버리려는 거잖아! 다 죽일 거야! 그놈을 당장 없애버릴 거야!”
분노에 찬 마나가 거대하게 일렁거렸다. 정말로 블레이크를 죽일지도 모른다.
“안 돼! 세르, 제발 그러지 마! 사랑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제발! 세르!”
나는 그녀에게 애원했다.
나는 락슐을 잃었다. 블레이크마저 잃어버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내가 절박하게 울부짖을수록 세르의 표정은 점점 더 싸늘하게 굳어갔다.
“사랑? 그딴 걸 믿는 거야? 나를 보면서도 그딴 쓰레기 같은 감정에 연연해? 친구인 나를 배신하는 거야!”
“배신하는 게 아니야.”
“맞잖아! 사랑, 웃기지도 않아? 그렇게 황태자가 소중하면 대신 네 목숨이라도 내놓든가!”
“그럼 그렇게 해.”
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천 년 전, 락슐은 나 때문에 죽었다. 그를 또다시 잃느니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낫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못할 줄 알아!”
“빈말도 협박도 아니야. 나를 죽여. 대신 블레이크는 건들지 마.”
세르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거칠게 떨리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세르의 마나가 냉각된 것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분노가 조금 누그러진 건가?
하지만 마음을 놓기도 전에 돌연 폭발했다.
“그럼 죽어!! 네가 대신 죽어버려!! 너만 믿었는데. 천 년 동안 오직 너만 그리워했는데!!!”
세르의 마나가 나를 공격했다.
그녀가 나에게 주었던 빛의 힘을 사용하면 저 공격을 막을 수 있을까?
하지만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그녀의 공격을 받아들였다.
전생에서는 나 때문에 락슐이 죽었다. 이번에는 반드시 내가 그를 지킬 거다.
거대한 빛의 마나가 나를 집어삼켰다. 거친 분노가 그대로 나의 몸을 파고들었다.
“라, 라온텔…?!”
새하얀 빛 속에서 당황하는 듯한 세르의 목소리가 작게 들렸다가 사라졌다.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감각도 없었다.
몸이 그대로 녹아 사라질 것만 같았다.
이제 정말 죽는 건가?
블레이크는 무사하겠지.
그때 손목 쪽에서 따스한 느낌이 들었다.
그건 바로 팔찌였다.
백한이 나에게 주었던 팔찌에서 따스한 빛이 흘러나오더니, 나의 몸을 감쌌다. 그리고 세르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두 개의 빛이 대립할수록 팔찌에서 투둑투둑 균열이 일었다.
팔찌를 이룬 보석들 하나하나에 금이 가더니 마침내 산산이 부서졌다.
그 순간 강렬한 빛이 몸을 덮었다.
나의 의식도 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