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8장. 빛의 눈물
9장. 어둠 속의 한 줄기 빛을 따라서
10장. 미남과 괴물
8장. 빛의 눈물
리차드는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고민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
텐스테온을 죽이고 혼란을 틈을 타 프랭크를 없앤다면, 차기 황제는 아놀드 카실의 차지가 될 거다.
텐스테온이 프랭크를 죽였다고 하면 아놀드도 크게 의심하지는 않겠지. 그리고 무능한 아놀드 카실을 뒤에서 조종하다가, 네온마저 처리한다면 수월하게 황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카실 공작의 말대로 텐스테온에게는 크나큰 약점이 있었다. 블레이크의 저주를 풀 방법이 있다고 하면 그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텐스테온은 황태자의 저주가 풀릴 거라는 거짓 소문을 퍼트렸다. 황태자를 당장 남쪽으로 유배 보내라며 항의하던 귀족들은 그 소문을 믿고 주춤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는 양날의 검이었다. 만약 시간이 지나도 황태자의 저주가 풀리지 않는다면 오히려 역풍이 휘몰아칠 거다. 텐스테온이 이를 모를 리가 없다. 알면서도 소문을 퍼트린 거다.
블레이크는 분명 위독하다. 아들과 마지막 시간이라도 함께 보내고자 그런 무리수를 둔 걸 테지.
리차드는 블레이크를 떠올렸다. 비록 저주에 걸렸지만 텐스테온과 앤시아의 진심 어린 사랑을 받는 그가 조금 부러웠다.
어찌 됐든 텐스테온의 마음은 조급할 거다. 이번에야말로 그를 죽여야 한다.
“도미람.”
“네. 주군.”
그의 옆에 서 있던 도미람이 고개를 숙였다.
“그 소문을 다시 흘려야겠다.”
“하오나 전에 실패하지 않았습니까?”
“그때는 너무 은밀하게 움직였다. 황제의 귀에 소문이 들어가지 못했을 수도 있다. 이번에는 광장 전역에 퍼트릴 것이다.”
“그러다 들킬 수도 있습니다.”
도미람은 평소와 다르게 냉정을 잃은 듯한 리차드를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괜찮다. 오히려 저번에는 몸을 너무 사렸다. 게다가 지금은 시기가 좋다. 축제를 즐기기 위해 외지사람들이 많이 방문했으니, 그리 쉽게 들키지는 않을 거다.”
“그렇다고 해도 위험합니다.”
“들켜도 상관없다. 그 전에 황제를 죽이면 되니까.”
텐스테온을 없애야 한다. 리차드는 인간적으로 텐스테온을 존경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앞길에 방해가 된다면 살려둘 수 없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더니, 리차드의 하인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도련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이냐?”
“황태자의 저주가 풀렸다고 합니다!”
“뭐…?”
리차드는 귀를 의심했다. 황태자의 저주가 풀렸다고? 그럴 리가?
황제가 꾸며낸 거짓 소문에서조차 제국력 1000년이 되면 풀릴 것이라며 시간의 여유를 두었다. 그런데 7년 후도 아니고 지금 풀렸다고?
“존으로부터 전갈이 왔습니다. 황태자의 저주가 풀려서 황궁이 지금 축제 분위기라고 합니다.”
존은 리차드가 황궁에 심어놓은 첩자였다. 침착한 성격으로 허튼 말을 할 성격이 아니었다.
정말로 황태자의 저주가 풀렸단 말인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천 년을 이어져 내려온 저주다. 그동안 어느 누구도 저주를 풀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풀렸다고? 설마 소문이 맞았단 말인가? 앤시아가 정말로 여신이 보낸 축복의 소녀라고?
리차드가 혼란에 빠져있는 사이 거친 말발굽 소리가 밀려들었다. 그는 화들짝 놀라서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황궁 제2 기사단이 카실 공작저로 밀려들고 있었다. 게다가 그 선두에는 황제의 보좌인 콜린의 모습도 보였다.
프랭크 그 머저리가 하루도 지나지 않아 모든 사실을 토설했구나!
“주군, 일단 몸을 피하시지요.”
“아니다. 나가 보겠다.”
어차피 여기서 도망치면 모든 것이 끝이다. 공작 가문이 무너지는 순간 리차드의 인생도 막을 내리는 것이었다. 몰락 귀족이나 하찮은 평민, 로움족 노예로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았다.
카실 공작과 장남 프랭크는 감옥에 갇혔고, 공작 부인과 네온은 겁에 질려 침실에 처박혀 있었다.
리차드는 카실 가문의 대표로서 제2 기사단을 홀로 맞이했다.
“공사다망하신 분들께서 여기까진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일단 시간을 벌자. 아무리 황제라 한들 프랭크의 말만으로 공작저를 함부로 수색할 수는 없을 거다. 물론 완전히 막을 수는 없겠지만 공작저에 남아 있는 증거를 숨길 시간 정도는 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제2 기사단의 단장은 리차드에게 인사조차 건네지 않은 채 부하에게 명했다.
“리차드 카실을 추포하라.”
“이게 무슨 짓입니까!”
한순간에 기사들에게 포박당한 리차드가 항의했다. 그러자 기사단장의 옆에 서 있던 콜린이 대신 답했다.
“리차드 영식께서 금일 아침, 간수장을 매수하여 대역 죄인과 접촉했다는 밀고가 들어왔습니다.”
콜린의 입가에 서린 미소를 보며 리차드는 깨달았다. 자신은 텐스테온의 함정에 빠졌다.
프랭크에 비해 카실 공작의 경비는 비교적 허술했다. 황제가 프랭크를 먼저 무너트리기 위해 그러는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카실 공작가의 실질적인 두뇌인 리차드도 잡아넣기 위해서 함정을 판 거다. 자신이 간수를 매수할 것을 알고 일부러 틈을 보인 거다.
하지만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리차드는 붙잡혔고, 제2 기사단은 공작저 안으로 밀려들었다.
카실 공작 가문은 이제 끝이다. 리차드는 눈을 질끈 감았다.
***
나는 블레이크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주의 문장이 완전히 사라졌다. 보고 또 봐도 기뻐서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리고 미안했다.
며칠 동안 갑자기 저주가 풀린 이유를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 결과 한 가지 답을 찾아냈다.
바로 ‘뽀뽀’였다.
우리는 불꽃놀이를 보며 뽀뽀를 했다. 그래서 저주가 풀렸던 거다.
‘야수와 영애님’은 동화 미녀와 야수를 비튼 19금 피폐 소설이었다.
미녀와 야수뿐 아니라 수많은 동화에서 저주받은 왕자와 공주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들의 저주를 풀기 위해서는 십중팔구 진실한 사랑이 담긴 입맞춤이 필요했다.
동화 속 세상에서 야수나 개구리를 미남으로 되돌려주고 잠자는 숲속의 공주도 깨울 수 있는 만능 키가 바로 키스였다.
그래, 답은 ‘키스’다. 나는 왜 그걸 이제야 깨달은 걸까?
원작 소설도 문제다! 키스면 될 걸 가지고 왜 그렇고 그런 은밀한 행위를 한 건데! 하지만 이제 와 원작에 분노한들 무슨 소용일까?
나는 블레이크의 손을 꼭 잡고 손등에 뽀뽀를 해주었다.
“애, 앤시아, 왜, 왜 그래?”
“우리 신랑이 너무 예뻐서요. 왜요? 싫어요?”
“아니! 그냥 조금 부끄러워서….”
블레이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휴, 귀엽기도 해라.
“뭐가 부끄러워요?”
“부인이 나를 너무 뚫어지게 보니까.”
“매일 보잖아요.”
“그러니까 매일 부끄럽지….”
블레이크가 나의 손에 자신의 얼굴을 비비적거리며, 붉은 눈동자로 새초롬하게 올려보았다.
신랑님, 부끄러우시다면서 행동은 정 반대잖아요?
요즘 들어 한 가지 가설이 슬금슬금 떠오르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 신랑은 무척 요망한 성격이 아닐까? 순진무구한 얼굴 뒤로 앙큼한 본능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하웅, 창피해.”
블레이크가 눈을 질끈 감으며 나의 품에 안겨들었다. 정말로 부끄러웠나 보네. 나는 빙그레 웃으며 새빨개진 그의 귓불을 문질렀다.
이렇게 순수한데 요망은 무슨 요망.
나는 잠시 떠올랐던 가설을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렸다.
나는 귓불을 지나서 찰랑거리는 그의 은색 머리카락을 가볍게 헝클어트렸다.
그나저나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었다. 블레이크의 저주가 풀리기 전, 나는 꿈을 꾸었다. 성인이 된 블레이크와 함께 숲을 걷던 꿈. 그때 블레이크의 머리카락은 검은색이었다.
어째서 그런 꿈을 꿨던 걸까? 어차피 꿈일 뿐이니 별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왠지 계속 신경 쓰였다.
블레이크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매만지는데, 멜리사가 노크를 하며 들어왔다.
“비 전하, 페리온 자작 부인께서 오셨습니다.
“알았어. 블레이크, 일어나요. 옷을 맞추러 가야죠.”
페리온 자작 부인은 제도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의상실을 운영하고 있었다.
열흘 뒤, 황태자의 저주가 풀린 것을 축하하는 무도회가 개최될 예정이었다. 블레이크가 정식으로 사교계에 데뷔하는 날이기 때문에 준비할 게 많았다. 그중에서도 그가 무도회에서 입을 예복이 특히 신경 쓰였다.
“제국의 빛이신 황태자 전하와 황태자비 전하를 뵈옵니다.”
페리온 자작 부인이 예를 갖추었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 작은 소녀가 멀뚱히 서 있었다.
마치 황궁 무도회라도 참석한 것처럼 헤어와 드레스가 무척 화려한 소녀였다. 도대체 누구지?
내가 물끄러미 응시하자, 페리온 자작 부인이 기다렸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소녀를 소개했다.
“저의 딸아이 샤론이랍니다. 샤론, 황태자 전하께 인사 올려야지.”
“아, 안녕하세요.”
샤론이 블레이크에게 눈을 떼지 못한 채 짧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페리온 부인이 그녀를 나무랐다.
“샤론! 예의를 갖춰야지!”
“응?”
“하하, 죄송합니다. 샤론이 아직 어리다 보니 예법에 서투르답니다.”
페리온 자작 부인의 늦둥이 딸 샤론. 올해 10살이라고 했지. 분명 어리긴 하지만,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할 나이는 아니었다.
게다가 아스테릭 제국에서 10살이면 한창 혼담이 오갈 때였다. 내가 블레이크랑 결혼한 것도 10살이었고.
“황태자 전하께서 저주가 풀렸다는 말을 듣고, 샤론이 꼭 축하드리고 싶다 해서 이렇게 데려왔답니다.”
아, 역시 그건가.
지금껏 페리온 자작 부인에게 많은 드레스를 맞췄지만 단 한 번도 자신의 딸을 데려온 적은 없었다.
아름다운 외모와 뛰어난 실력, 의상실 운영을 바탕으로 한 재산과 사교계 인맥, 모든 걸 갖춘 그녀였지만 한미한 자작 가문 출신이라는 콤플렉스가 유독 심하였다.
자신의 딸을 카실 공작의 셋째인 네온과 결혼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블레이크의 저주가 풀리고 카실 가문이 위기를 맞자 방향을 선회한 모양이었다.
자신의 딸을 블레이크랑 엮을 생각이구나. 황태자비인 내가 있는 앞에서 자신의 딸을 당당하게 어필하는 모습이 불쾌하기보다는 신기했다.
귀족들은 블레이크를 저주받은 괴물이라며 경멸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에게 잘 보이는 걸 떠나서 혼맥까지 맺고 싶어 한다.
블레이크의 위상이 바뀌었다. 이제 그는 당당한 아스테릭 제국의 황태자였다.
“우리 샤론은 황태자 전하보다 한 살 어리답니다. 전하, 전하보다 어린 소녀는 처음 보시죠? 비 전하께서는 나이가 많으시지 않습니까?”
“…….”
지금 내가 블레이크보다 나이가 많다고 비꼬는 거야?
나와 달리 자신의 딸은 블레이크보다 연하라는 사실을 은근히, 아니 대놓고 어필하는 페리온 부인을 보자 기가 찼다.
내가 13살에 나이 많다는 소리를 듣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네.
기가 막혀서 팔짱을 끼고 페리온 부인을 바라보았다. 어디까지 가는지 한번 보자. 하지만 그녀는 내가 무슨 반응을 보이든 아랑곳하지 않고, 딸의 등을 떠밀었다.
“샤론, 황태자 전하께 축하 인사 올려야지?”
“네!”
샤론이 활짝 웃더니 블레이크를 향해 쪼르르 뛰어가서 그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전하, 축하드려요. 다들 괴물이라고 해서 무서웠는데, 실제로 보니 너무너무 예쁘세요. 샤론이 괜히 겁먹었나 봐요.”
“이봐요. 샤론 영애….”
아무리 어려서 예법을 모른다지만 이건 도를 지나쳤다. 사람을 앞에 두고 괴물이라니, 예쁘게 웃으며 말한다고 말의 내용까지 예뻐지는 건 아니었다.
그녀에게 한마디 하려는데, 그 전에 블레이크가 샤론의 손을 뿌리쳤다.
“놔.”
“전하, 죄송합니다. 아이가 워낙 순수하다 보니 말실수를….”
페리온 부인이 다급히 사과했으나, 블레이크는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으며 손수건으로 자신의 손을 벅벅 닦았다.
“감히 누구의 허락을 받고 내 몸에 손을 대는 거지?”
“그, 그게, 샤론은 전하가 좋아서, 마음에 들어서….”
“지금 유부남한테 고백하는 건가? 가정교육이 형편없군. 꼴도 보기 싫으니 꺼져.”
블레이크는 울먹이는 샤론을 향해 싸늘하게 일갈했다. 서늘한 위압감에 짓눌린 페리온 부인은 한마디 변명도 하지 못한 채, 엉엉 우는 딸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나 역시도 놀랐다. 블레이크가 저렇게 화를 내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블레이크, 화났어요?”
“응. 저들은 부인을 무시했어. 두 번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
그는 나의 손을 꼭 잡았다. 블레이크도 페리온 부인의 의도를 느끼고 있었구나.
“고마워요. 대신 화내줘서.”
“너무 화가 나.”
블레이크의 작은 몸이 파르르 떨렸다. 자신이 괴물이라는 소리를 들을 때조차도 이렇게 화를 낸 적이 없었는데…. 나는 그를 끌어안았다.
“벌써부터 이러면 어떻게 해요? 이제 전하를 좋아하는 여자들이 줄을 설 텐데요.”
“왜 줄을 서? 나는 이미 결혼했잖아.”
“블레이크는 황태자잖아요. 황비나 후궁 자리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을 거예요.”
게다가 황후가 바뀌는 사례도 드물지는 않았다. 아직 신전에 고한 상태도 아니니, 황태자의 마음이나 정치적인 계산에 따라서 황태자비는 언제든 바뀔 수 있었다.
물론 블레이크가 나를 배신할 리는 없지만 말이다.
“그런 거 싫어. 나는 부인밖에 없어.”
“정말요? 저보다 훨씬 아름다운 여자들도 많을 텐데요.”
“앤시아가 제일 예뻐.”
“치이. 나중에 딴말하시면 안 돼요.”
“안 해. 나는 부인뿐이야.”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나 역시도 블레이크를 믿었다.
미소를 지으며 그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리는데, 갑자기 여인의 비명 섞인 외침이 들렸다.
[구해줘! …구해줘! 나, 무서워!]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앤시아, 왜 그래?”
“방금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어요?”
“소리? 아니.”
그는 고개를 저었다. 뭐지? 환청이었나…. 주위를 둘러봤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제가 잘못 들었나 봐요.”
나는 다시 블레이크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새로운 의상실에 연락해야겠다.
***
텐스테온은 카실 공작의 죄상을 밝히고, 그의 편에 선 귀족들을 처단하느라 매일 분주했다. 하지만 격무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황태자궁에 방문해서 블레이크와 대련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오늘은 이만하자.”
텐스테온은 지쳐 쓰러진 블레이크를 안아 올렸다. 블레이크 역시 자연스럽게 텐스테온의 목에 손을 둘렀다.
“이젠 밀어내지 않는구나.”
“싫어해도 안을 거잖아요.”
블레이크가 불퉁하게 뱉었다.
“내려줄까?”
“다리 아파요.”
그는 작게 중얼거렸다. 텐스테온은 어리광을 부리는 아들을 보며 작게 웃어버렸다. 이렇게 폭 안겨 있다가도 앤시아가 나타나면 내려달라고 떼를 쓰겠지. 블레이크는 앤시아 앞에선 성숙해 보이고 싶어 했다.
반대로 앤시아가 없을 때는 텐스테온이 그를 안든 엎든 별로 개의치 않았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황태자의 호위 기사 에드온이 다가왔지만, 블레이크는 텐스테온의 품에 안긴 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훈련을 마치셨습니까?”
“그래. 그대가 잘 가르친 덕에 황태자의 실력이 일취월장했더군.”
“아닙니다. 전하께서 재능이 있으신 거지요. 저는 별로 한 게 없습니다.”
“아니야. 에드온은 좋은 스승이야!”
“전하.”
에드온이 감격에 찬 눈으로 블레이크를 바라보았다. 블레이크도 그를 보며 싱긋 웃었다.
“그런데 폐하, 매일 여기 와도 괜찮아요? 바쁘다고 들었는데….”
블레이크도 카실 공작의 일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에둘러 물었다. 그러자 텐스테온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괜찮다. 콜린이 처리하고 있어.”
“콜린 경은 언제 쉬어요?”
“걱정할 것 없다. 봉급을 많이 주고 있다.”
“돈을 많이 받아도 쓸 시간이 없는 거 아니에요?”
콜린은 가끔씩 황태자궁에 방문했기 때문에 블레이크와 안면이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다크서클이 깊어지던 콜린의 모습을 떠올리며 블레이크가 묻자, 텐스테온이 흐뭇해하며 그의 등을 토닥였다.
“통찰력이 있구나. 훌륭하다.”
“헤헤.”
“…….”
화기애애한 부자간의 대화를 들으며 에드온은 침묵했다.
콜린은 귀족이었고,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봉급을 받았으며 머리도 좋고 잘생겼다. 하지만 지금 에드온은 콜린에 대한 순수한 동정심이 일었다.
아마도 콜린은 평생 저 부자에게 혹사당하겠지…. 너무 능력이 뛰어나도 좋지 않구나. 하지만 안타깝다고 한들 어디까지나 남의 일이었다.
에드온은 격무에 시달리는 콜린에 대한 동정을 뒤로한 채, 서로를 보며 미소 짓는 텐스테온과 블레이크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 사이가 좋아져서 다행이었다. 이게 다 황태자비 전하께서 중간에서 노력해주신 덕분이었다. 앤시아가 아니었다면 저주가 풀렸다고 하더라도 오랜 시간 벌어졌던 부자 사이가 쉽게 회복되지는 못했을 거다.
“무도회를 열기 전에 또래 아이들과 만나보는 건 어떻겠느냐? 미리 친분을 쌓아놓으면 도움이 될 거다.”
“글쎄요….”
좋은 제안이었지만 블레이크는 다소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곧장 에드온에게 물었다.
“에드온 나, 작은 편이지?”
“하하. 제가 뭘 아나요. 다만 제가 아카데미에 다니던 시절을 떠올려 보면 다들 나이에 비해 좀 우락부락했습니다. 아무래도 검을 들고 있다 보니, 전하처럼 귀여우신 분은 없으셨죠. 아, 송구합니다.”
블레이크가 어른스러워 보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에드온은 말실수를 깨닫고는 서둘러 사과했다.
“아니야. 내가 귀여운 걸 어쩌겠어.”
하지만 블레이크는 무심하게 말했다. 앤시아로부터 귀에 못이 박이도록 귀엽다는 말을 들으며 자란 블레이크였다. 스스로를 괴물이라 여기던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이 귀엽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저주가 풀린 사실이 기뻤지만, 외모가 달라진 것에 대해서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텐스테온은 자신의 외모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블레이크를 보며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저주에 걸린 블레이크가 어떤 그늘도 없이 밝게 성장할 수 있었던 건 전부 앤시아 덕분이었다.
“폐하, 귀족 자제들은 황태자궁에 초대하실 건가요?”
“네가 원하는 대로 하렴.”
“음….”
곰곰이 생각하던 블레이크가 갑자기 몸을 비틀었다. 저 멀리 앤시아가 오는 것을 확인한 텐스테온은 피식 웃으며 블레이크를 내려주었다.
블레이크는 발을 땅에 딛자마자 앤시아에게 달려갔다.
“앤시아!”
“블레이크, 오늘 훈련은 재미있었어요?”
“응! 오늘은 검을 한 번도 놓치지 않았어!”
“와, 정말요? 대단하다!”
“헤헤.”
“이러다가 우리 블레이크 소드 마스터가 되는 거 아니에요?”
“앤시아가 원하면 드래곤도 잡아 줄 수 있어!”
“그렇게 위험한 일은 하면 안 되죠!”
“하나도 안 위험한데.”
블레이크는 앤시아의 앞이라고 한껏 허세를 떨었다. 텐스테온은 그런 아들의 모습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표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 곧 의상실에서 사람들이 올 거예요.”
“그냥 예전처럼 치수만 적어서 보내면 안 돼?”
“왜요? 이번 의상실도 마음에 안 드세요?”
“아니, 사람들이 너무 많이 쳐다보니까 부끄러워서….”
“조엘 의상실은 직원들이 좀 많죠. 그래도 구두부터 장신구까지 한 번에 맞출 수 있으니까 편하실 거예요.”
“나는 앤시아랑 단둘이 있고 싶어. 사람들이 너무 많으면 부끄러워.”
한껏 수줍은 척을 하며 앤시아에게 애교를 떠는 블레이크를 보며 텐스테온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에드온.”
“네, 폐하.”
“황태자가 원래 저러느냐?”
“무슨 말씀이시온지?”
에드온이 질문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해했다.
“블레이크는 앤시아에게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한 것이 아니었느냐?”
“그렇죠. 한창 그럴 나이시기도 하고, 비 전하께서 워낙 의젓하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더더욱 성숙해 보이고 싶으신 거지요.”
“그런데 어찌 저러는 것이냐?”
텐스테온은 아직도 앤시아에게 애교를 떨고 있는 블레이크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황제의 말뜻을 파악한 에드온은 껄껄 웃었다.
“그야 비 전하께 잘 보이기 위해서 저러시는 거지요.”
“저래서는 언제까지나 어린애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비 전하께서는 황태자 전하의 귀여운 모습을 좋아하시니까요. 그러니 성숙한 모습을 어필하다가도 가끔씩 저렇게 내숭을 떠시는 겁니다.”
“잘 모르겠구나.”
“하하. 사랑이란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텐스테온은 에드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기사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한 인재였다. 게다가 성품이 착하고, 욕심이 없으며, 저주의 계승자에 대한 편견 또한 없었다.
텐스테온은 에드온에 대해 면밀히 조사했고, 믿을 수 있는 인간이라 판단한 뒤 황태자궁에 배치했다.
에드온은 황제의 기대를 훨씬 웃돌며, 블레이크의 충성스러운 기사이자 스승이 되어주었다.
모든 면에서 훌륭한 인간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이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아직 미혼이었으며 연애 경험조차 전무했다.
“아, 정말 좋을 때입니다. 봄도 지났는데, 어찌 이리 사방에서 사랑이 꽃피는지 모르겠습니다.”
“…….”
사랑에 대해 이미 통달한 듯이 말하는 에드온을 보며, 텐스테온은 침묵했다.
‘경은 경험이 없는 거로 아는데?’라는 말이 입안을 맴돌았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는 은근히 사려 깊은 성격이었다.
텐스테온 조용히 고개를 돌려서 블레이크와 앤시아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뭐가 그리 좋은지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아아! 블레이크는 어쩜 이렇게 귀여워요!”
“그리고 멋있지?”
“귀여워요!!”
멋있으면서 귀여워 보이고 싶은 건가….
텐스테온은 에드온이 말한 의미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정무가 아니다. 일관성이 부족하다고 한들 문제가 될 건 없었다.
블레이크와 앤시아는 서로를 아꼈다. 저주와의 사투를 마치고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텐스테온은 두 사람을 응원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아무런 고통 없는 밝은 미래를 안겨주겠다고 다짐했다.
***
프랑크 카실은 감옥에 갇힌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자신들이 저지른 악행을 모두 토설했다.
카실 공작과 리차드는 입을 다물었지만, 프랑크 혼자서 일당백의 역할을 했기 때문에 증거는 순조롭게 쌓이고 있었다.
원작에서는 나오지 않았던 악행들도 속속들이 드러났다.
블레이크가 태어나자, 카실 공작은 흑마법사를 불러서 매일 사술을 행했다고 한다.
블레이크가 저주의 계승자가 되거나, 텐스테온이 하루속히 죽기를 바라는 더러운 흑마법이었다.
카실 공작저에서 그 증거를 찾고, 관련된 흑마법사들도 모두 잡아들였다. 황궁에 심어놓은 첩자들도 모두 발각됐다.
지금까지 드러난 죄만으로도 카실 공작은 교수형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거기에 블레이크의 저주가 풀리며 카실 공작 가문이 회생할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졌다.
평소 카실 공작에게 불만을 품었던 귀족부터 그에게 줄을 대던 사람들까지 앞다투어 카실 가문의 악행을 고발하기 시작했다.
귀족들을 압박하여 황태자를 비난하는 상소를 쓰게 하고, 불법적으로 재산을 증식하였으며, 평민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등 그 종류도 다양했다.
그들의 언행들도 도마 위에 올랐다.
카실 공작가의 사람들이 황실을 비난하고 조롱했으며, 자신들이 이미 황제라도 된 것처럼 굴었다는 제보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카실 공작과 공작 부인, 프랭크는 물론 어린 네온이 했던 말들까지 신고가 들어왔다.
모두 짐작하던 내용이었지만 막상 직접 들으니 화가 치밀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무서웠다.
카실 공작가 사람들이 오만하다고는 하지만 혼자서 주저리주저리 떠들지는 않았을 거다. 서로 대화를 나누고 맞장구를 쳤겠지. 그런데도 이제 와 돌변하며 카실 공작 가문을 비난했다.
“어떻게 황태자 전하께 그런 말을 할 수 있죠?”
“그러니까 말이에요.”
“주제도 모르는 인간들입니다.”
“저주를 떠나서 어린아이가 아닙니까? 게다가 자기 조카고요. 어쩜 그렇게 악랄하게 괴롭힐 수가 있는지.”
요즘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카실 공작 가문 말고는 전부 블레이크를 좋아했던 거 같다.
계속 괴물이라고 비난하는 것보다는 백배 낫지만, 그래도 조금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쨌든 카실 공작이 20년 전에 했던 발언까지 까발려지는 와중에도 리차드는 깨끗했다.
워낙 철두철미한 성격이었다. 원작에서도 그의 계략이 들통나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부하들도 입이 무거운 자들만을 특별히 선별한 데다가, 못 미더운 이들은 이미 처리했을 거다.
혹시 들키더라도 은밀히 처리하여 자신의 악행이 세상에 드러나지 못하도록 막았다.
하지만 이 세상에 비밀은 없다.
“도미람은 잡았나요?”
“아직이구나.”
“그 흑마법사를 잡으면, 리차드 카실이 지금까지 해온 일들을 전부 파헤칠 수 있을 거예요.”
블레이크의 저주가 풀렸고, 텐스테온은 죽지 않았다. 은한은 고국으로 돌아갔고, 다이애나는 꿈을 찾아 기사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모든 것이 원작과 달라졌다.
리차드는 비극적인 과거를 지니고 있었다. 만약 그가 이제라도 잘못을 반성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했다면 도와줬을 거다.
하지만 리차드는 원작의 행보를 그대로 따랐다.
블레이크가 크게 앓았을 때, 여신의 저주를 다른 사람에게 옮길 수 있는 흑마법에 대한 소문이 은밀히 퍼졌었다고 한다.
소문의 방식이나 출처로 봤을 때, 리차드가 흘린 소문이 분명했다. 그는 원작처럼 흑마법을 써서 텐스테온을 시해하려 한 것이다.
게다가 이번 무도회에서는 프랭크를 이용해서 나를 일부러 곤경에 빠트리기도 했지.
그는 결국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었다. 특히 텐스테온을 살해하려 한 것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나는 내가 아는 모든 것들을 텐스테온에게 알렸다. 그 역시 소문이 돌았을 때부터 리차드를 의심하며 추적해왔다고 한다.
내가 틈만 나면 리차드와 흑마법을 조심해야 한다고 거듭 당부했기 때문에, 그 소문을 듣자마자 리차드부터 의심한 모양이다.
“걱정하지 말거라. 흑마법사의 행적을 추적 중이다. 곧 잡을 수 있을 거다.”
“네. 걱정은 안 해요. 아버님을 믿어요.”
텐스테온은 엷게 웃으며 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앤시아, 너에게 줄 것이 있다.”
그는 금으로 만들어진 상자를 건넸다.
“이게 뭔가요?”
“빛의 눈물이다.”
“빛의 눈물이요?”
‘빛의 눈물’은 벨라시안 가문의 ‘빛의 계승자’를 판별하는 도구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자취를 감추었다.
텐스테온도 나의 부탁을 받고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어디로 갔는지 흔적조차 찾지 못했다.
나는 그가 건넨 금색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유리구슬처럼 투명한 구체 형태의 보석이 달린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이게 바로 빛의 눈물이구나.
“‘빛의 눈물’은 목걸이였군요.”
내가 목걸이를 집는 순간, 투명한 보석이 영롱한 빛을 뿜으며 반짝이기 시작했다.
“빛의 계승자를 알아보는구나.”
“그러게요. 제가 진짜 계승자가 맞나봐요.”
반짝이는 빛의 눈물을 보니, 내가 빛의 계승자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실감 났다.
조금만 더 일찍 찾았으면 좋았을 텐데…. 저주가 풀리자 눈물을 펑펑 쏟아내며 기뻐하던 블레이크의 모습이 떠올라서 가슴이 아팠다.
그때 갑자기 정신이 멍해지더니 여인의 절박한 비명이 귓가에 메아리쳤다.
[구해줘! 라온텔!! 라온텔!! 나, 여기 있어! 구해줘! 제발 구해줘! 뜨거워! 너무 뜨거워!]
빛의 눈물이 붉게 일렁이며 나의 몸을 끌어당겼다. 그대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데, 텐스테온의 목소리가 들렸다.
“앤시아!”
“아? 아, 네….”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빛의 눈물은 나의 손 위에서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붉은빛은 보이지 않았고 여인의 목소리도 사라졌다.
또 이러네…. 블레이크의 저주가 풀린 이후, 가끔씩 여인의 비명이 들릴 때가 있었다.
“왜 그러느냐?”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전에도 이런 식으로 환청이 들리거나 천 년 전 과거의 모습이 눈앞에 환영으로 펼쳐진 적이 있었다.
그 때문에 은한의 도움을 받아 텐라른궁까지 다녀왔지만, 결국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 게다가 블레이크는 크게 앓기까지 했다.
괜히 텐스테온이나 블레이크에게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았다.
“빛의 눈물을 찾아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려요.”
“좀 더 일찍 찾았어야 했는데, 오히려 미안하구나.”
“아니에요. 그런데 어떻게 찾으신 거예요?”
“카실 공작저에서 발견했다.”
“공작저요? 그럼 카실 공작이 가지고 있었던 건가요?”
원작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은 부분이었다.
애초에 원작에서는 빛의 눈물을 찾는 장면도 없었다.
만약 공작저에 빛의 눈물이 있었다면, 리차드가 그걸 빌미로 다이애나를 유혹하는 장면이 나왔을 텐데….
그렇다면 리차드도 모르게 카실 공작이 빛의 눈물을 소유했다는 건가?
의문이 커져가는데, 텐스테온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놀드 카실은 그 존재조차 알지 못했다.”
“그럼 어떻게…?”
“카실 공작저를 수색하면서 그 지하에 숨겨져 있는 비밀 공간을 발견했다. 카실 공작저는 본래 황궁의 일부였단다. 선황후께서는 막내아들을 지극히 아꼈지. 그래서 황궁 서쪽에 있는 탑을 부수고 카실 공작저를 지어주었다. 그곳에 제국의 비밀 창고가 있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그럼 빛의 눈물 말고 다른 보물들도 있었나요?”
“역사서에 기록된 마검이나 흑마법을 담은 서책, 마석에 봉인된 마물 같은 것들이 있었다. 세상에 내놓기에는 위험하지만 그렇다고 없앨 수도 없는 것들을 봉인해 놓은 창고였지. 비밀스럽게 관리되다가 어느 순간 그대로 역사 속에 잊혔는지, 족히 수백 년은 아무도 찾지 않은 듯했다.”
‘빛의 눈물’은 벨라시안 가문의 빛의 계승자를 판별하는 도구일 뿐, 나라에 재앙을 불러일으킬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오히려 여신의 저주를 풀 수 있는 중요한 단서였다.
그런데 어찌하여 마검이나 흑마법, 위험한 마물과 함께 봉인해 두었던 걸까?
“정말로 카실 공작은 그 존재를 알지 못했던 걸까요?”
“여러 개의 벽을 뚫고 들어간 뒤, 황제에게 내려오는 빛의 반지를 이용해야만 열 수 있는 비밀 창고였다. 공작가의 사람들은 그런 창고가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고, 설령 알았다고 하더라도 황제의 반지가 없는 이상 문을 열지 못했을 거다.”
평범한 벽으로 위장하여 비밀 창고의 존재를 숨기고, 마지막까지 보호 장치를 걸어두었다….
이는 텐라른궁에 있던 황금방과 같은 구조였다.
설마 필립이 만든 창고인 걸까?
나는 빛의 눈물을 바라보았다.
천 년 전, 텐라른궁, 황금방, 석판, 필립, 라온텔 그리고 구해달라고 소리치는 여인의 비명과 빛의 눈물.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여신의 저주는 이미 풀렸다. 원작에서 악행을 일삼던 리차드와 카실 공작 가문도 몰락을 앞두고 있었다.
모든 일이 해결됐건만 왠지 마음이 불안하게 일렁였다. 무언가 중요한 것을 놓친 것만 같다.
그때 문이 열리며 콜린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폐하!”
그의 다급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텐스테온도 긴장하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냐?”
“어둠의 문이 열렸습니다!”
***
혼돈의 계곡에는 마계와 이어지는 어둠의 문이 있었다.
어둠의 문이 완전히 열리는 날, 세계는 멸망에 이른다고 한다. 그리고 아스테릭 제국의 황제는 어둠의 문을 닫아야 하는 책임이 있었다.
“무도회를 조금 미뤄야겠구나. 미안하다.”
텐스테온이 사과하자, 블레이크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런 건 신경 쓰지 마세요.”
“맞아요. 늦어진 만큼 더 멋지게 준비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텐스테온은 좀처럼 걸음을 떼지 못했다. 그러자 제1 기사단장이 조심스럽게 재촉했다.
“폐하, 시간이 없습니다.”
시간이 지체될수록 어둠의 문이 커진다. 그만큼 문을 봉인하는 것도 힘들어졌다.
“금방 돌아올 것이다.”
“네. 기다리고 있을게요. 아버님,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너무 서두르지 마세요. 저랑 앤시아는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시고요.”
“그래. 조심하마.”
텐스테온은 우리를 꼭 끌어안아 주고는 서둘러 황궁을 떠났다.
텐스테온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안다. 어둠의 문을 봉인하기 위해서는 빛의 힘이 필요했다. 아스테릭 제국의 황제는 ‘저주의 계승자’가 지닌 빛의 힘을 이용하여 어둠의 문을 봉인했다.
황제가 빛의 힘을 쓰면 쓸수록 저주의 계승자는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저주가 풀렸다. 더 이상 ‘저주의 계승자’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텐스테온이 어둠의 문을 닫기 위해서 빛의 힘을 사용하면 블레이크에게도 그 영향이 미치는 걸까? 아니면 저주가 풀렸으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지나갈까?
텐스테온은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나 역시도 걱정이 되었다. 이건 원작에서도 나오지 않은 부분이었으니까.
하지만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았다. 여신의 저주가 풀렸고, 블레이크는 더 이상 저주의 계승자가 아니다. 별다른 일은 없을 거다.
***
아무 일도 없을 거다. 괜찮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불안한 마음에 황궁 도서관에서 역사책을 뒤적거렸다.
천 년 전, 젤칸 제국 시절에도 어둠의 문은 열렸을 거다. 그렇다면 그때는 어떻게 막았을까?
하지만 젤칸 시대에 쓰였던 책들은 모두 사라졌기 때문에, 어둠의 문에 관한 자료도 찾을 수 없었다.
‘괜찮을 거야. 괜찮겠지.’
나는 마음을 다독이며 도서관을 나섰다. 그때 비척비척 좀비처럼 걸어가는 콜린이 보였다.
“콜린 경!”
“비 전하를 뵈옵니다.”
그는 나를 보고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또 밤을 새우신 거예요?”
콜린의 안경 밑으로 보이는 다크서클이 한층 짙어져 있었다.
“아닙니다.”
“아니긴요. 눈에 피곤이 가득하신걸요?”
“폐하께서는 한숨도 주무시지 못한 채 혼돈의 계곡으로 향하고 계십니다. 이 정도로 엄살을 피울 수는 없죠.”
텐스테온은 황궁을 떠나기 전 모든 권한을 콜린에게 위임했다.
텐스테온이 수도를 비운 틈을 타서, 카실 공작이 마지막 발악을 할지도 몰랐다. 카실 가문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가신 가문들도 살펴야 했다.
황제와 제1 기사단이 수도를 떠난 지금, 콜린의 어깨는 더욱 무거울 거다.
“식사는 하셨어요?”
“영양이 풍부하고 잠을 깨워주는 특제 영양제를 먹었습니다.”
“그걸로는 안 되죠. 제가 만들어 드릴까요?”
“비 전하의 요리를 맛보는 건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지만, 지금은 사양하겠습니다. 음식물이 위장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자버릴 것 같아서요.”
“졸리면 주무셔야죠.”
“아직은 견딜 만합니다. 폐하께서 막중한 소임을 맡겨주셨는데, 믿음에 보답해야죠.”
콜린은 언제나 저랬다. 텐스테온과 함께 있을 때는 이런저런 투정을 부리지만, 남들 앞에서는 언제나 그를 향한 존경을 표했다.
“콜린 경은 정말 좋으신 분이에요.”
“폐하께서 돌아오시면, 한 번 더 말씀해 주십시오. 비 전하의 칭찬은 천 개의 추천장보다도 강한 힘을 발휘하니까요.”
“제가 말하지 않아도 폐하께서는 이미 알고 계신걸요. 폐하가 콜린 경을 얼마나 믿고 의지하는지 잘 아시잖아요?”
“글쎄요….”
콜린의 날카로운 눈매에 잠시 침울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왜요? 무슨 일이 있으세요?”
“카실 공작의 일이 마무리되면 저에게 휴가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잘됐네요!”
“혹시 제가 필요 없어지신 걸까요…?”
“…….”
텐스테온에게 악덕 상사의 기질이 조금 있다고 생각하긴 했다. 그런데 그에 못지않게 콜린도 일중독이었다. 휴가를 받는다고 저리 걱정을 하다니….
“그럴 리가 없잖아요. 콜린 경께서 그동안 고생하셨으니 배려를 해주시는 거죠.”
“휴가를 주신다는 건 처음이라 조금 불안합니다. 쉬고 돌아왔는데 제 자리가 없으면 어떡하죠? 폐하께서 더 이상 저를 찾지 않으시면 어찌해야 할지….”
“그만.”
나는 그의 말을 단호하게 끊었다. 지금 콜린이 걱정해야 하는 건 과로사지 실직이 아니다. 잠에 취해서 제정신이 아니구나.
“쓸데없는 생각을 하시는 거 보니, 아무래도 잠이 부족하신 것 같아요. 당장 쉬세요!”
“아닙니다.”
“이건 황태자비로서 명령이에요!”
나는 당장 요리사에게 명하여 따뜻한 수프와 부드러운 식감의 요리들을 준비했다. 그리고 괜찮다는 콜린을 억지로 먹인 뒤 잠을 재웠다.
나는 콜린 대신 밀린 서류를 살폈다.
그중에는 웨스틴 후작이 보낸 파혼 신청 서류도 있었다. 자신의 딸과 프랭크의 약혼을 취소하기 위하여 카실 가문에 파혼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하자, 황제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서류였다.
아무리 상급 귀족이라고는 하지만 결혼도 아니고 약혼이나 파혼까지 황제에게 보고할 의무는 없었다. 이건 그저 카실 공작 가문과 선을 그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함이겠지.
결국 파혼하는구나. 그래도 원작에서는 결혼까지는 갔었는데. 그 이후에 완전히 꼬여서 그렇지….
애초에 차기 황후 자리를 목표로 한 정략결혼이었다. 카실 가문이 몰락을 앞둔 상황에서 약혼을 지속할 리가 없겠지.
“폐하, 집에 가고 싶습니다…. 보내주세요….”
소파에서 잠을 청하던 콜린이 잠꼬대를 했다.
실직의 공포에서 벗어나서 퇴근을 꿈꾸는 평범한 직장인 모드로 다시 돌아온 걸 보니 안심이 됐다.
역시 잠이 부족해서 헛생각에 빠진 거였어.
***
“블레이크, 가구는 어떻게 할까요? 하얀색? 아니면 조금 차분한 색으로 할까요?”
우리는 요즘 이사 준비에 한창이었다.
블레이크는 여신의 저주에 걸렸기 때문에 남쪽 별궁에 유폐되었다. 하지만 저주가 풀린 이상 더는 이곳에서 지낼 이유가 없었다.
텐스테온은 세피아궁 바로 옆에 있는 포렌스궁을 우리에게 주었고, 블레이크의 축하 무도회를 마친 뒤에 정식으로 거처를 옮길 예정이었다.
그런데 아주 작은 문제가 생겼다.
“앤시아가 좋아하는 거로 해.”
“블레이크는 뭐가 좋은데요?”
“나는 다 좋아.”
블레이크는 해맑게 웃었다.
모든 게 이런 식이었다. 바닥 장식이나 조명, 가구에 이르기까지 블레이크는 특별한 의견을 내지 않았다. 어떤 것을 물어도 내가 원하는 대로 하라고 말할 뿐이었다.
“지금까지 전부 제가 골랐잖아요. 이번엔 블레이크가 선택해요.”
“아니야. 부인이 해.”
“블레이크.”
내가 짐짓 화를 내자, 그가 나의 손을 꼭 잡았다.
“앤시아가 고르는 게 좋아. 앤시아가 좋아하는 거로 가득 채워진 곳에서 살고 싶은걸.”
“…하지만 블레이크도 원하는 게 있을 거 아니에요?”
“앤시아가 원하는 게 내가 원하는 거야.”
붉은 눈동자가 나의 얼굴을 똑바로 직시했다. 그가 저렇게 쳐다보면 사고가 정지한 것처럼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다.
“그래도 같이 골라요. 저도 블레이크가 좋아하는 게 좋으니까.”
“응. 알았어.”
블레이크는 배시시 웃었다.
낮에는 가구를 정하고, 밤에는 함께 춤을 연습했다. 텐스테온이 돌아오고 무도회가 열리면, 블레이크와 함께 첫 춤을 출 거다.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만약 가능하더라도 머나먼 미래일 거라 여겼다. 그런데 그날이 하루하루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블레이크와 나는 자주 함께 춤을 췄다. 3년 동안 함께 연습해서 그런지 호흡이 아주 잘 맞았다.
“앤시아 잘한다.”
“그래요? 스텝이 좀 어색하지 않아요?”
“아니야. 정말로 잘해.”
“블레이크가 잘 리드해 주니까요. 다른 사람이랑 추면 실수할 거 같아서 걱정이에요.”
다음 스텝을 밟으려고 하는데, 블레이크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다른 녀석이랑도 추는 거야?”
“블레이크와 첫 춤을 추고 나면, 다음에는 아버님이랑 출 거예요. 그리고 다른 사람과도 춰야죠.”
같은 사람과 연속해서 춤을 추지 않는다. 그것은 무도회의 기본 매너였다.
“그렇지…. 그랬었지….”
블레이크의 어깨가 처졌다. 풀이 죽은 모습을 보자 웃음이 나왔다.
“설마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
“응.”
조금 놀려줄 생각이었는데, 그는 너무나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다른 사람이랑 춤을 추는 거잖아. 계속 나하고만 췄었는데….”
“블레이크도 다른 영애들과 함께 춤을 추면 되죠.”
“나는 싫어. 앤시아가 아니면 안 출 거야.”
“블레이크는 제국의 황태자잖아요. 그러면 안 돼요.”
“그래도 싫은걸. 다들 나를 싫어했잖아. 이제 와서 왜 그런 녀석들과 손을 잡고 춤을 추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블레이크….”
“나는 앤시아만 있으면 돼. 여기서 계속 앤시아랑 있고 싶어. 다른 곳은 싫어. 여기가 좋아. 떠나기 싫어….”
저주가 풀리고 언제나 생글생글 웃던 그가 처음으로 자신의 진심을 쏟아냈다.
나는 그를 꼭 끌어안았다.
“미안해요. 제 생각이 짧았어요.”
블레이크가 좋아할 줄 알았다. 그는 어둠 속에서 살아왔다. 저주에 걸렸다는 이유만으로 작은 별궁에 갇혀서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래서 좋아할 줄 알았다. 황궁 중앙에 위치한 포렌스궁으로 옮기고, 그를 위해 성대한 파티를 열고, 경멸에서 벗어나 모든 이들이 우러러보는 위치가 되었으니 분명 기뻐할 거라 생각했다.
상처로 가득 찬 그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지 못했다.
“아니야. 앤시아가 미안할 거 없어. 나는 그냥 앤시아랑 있고 싶은 것뿐이야.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아. 어린애 같은 투정인 건 알고 있어. 하지만 모든 게 너무 소중해서….”
“저도 소중해요. 저한테도 너무 많은 추억이 있는걸요.”
하지만 계속 별궁에 머물 수는 없었다. 남의 말을 하길 좋아하는 귀족들이 이걸 빌미로 온갖 말을 지어낼 테니까.
“포렌스궁으로 옮기더라도 아모리아궁이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우리 자주 와요.”
“자주 올 거야?”
“네. 자주 와요. 여긴 우리 둘만의 세상으로 남겨두는 거예요.”
“우리 둘만의…?”
“네.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우리 둘만의 비밀의 성을 만들어요.”
“응! 그렇게 하자.”
블레이크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다행히 울적한 기분이 조금 풀린 모양이었다.
그가 나의 손을 잡았다. 나도 손가락에 힘을 주며 깍지를 꼈다. 우리 손에 끼워진 똑같은 디자인의 결혼반지가 은은한 빛을 냈다.
***
“이제 두 밤만 자면 다이애나가 올 거예요.”
“그러네.”
다이애나는 블레이크의 저주가 풀렸다는 말을 듣고는 곧장 황궁으로 달려오려고 했다. 하지만 1학년부터 3학년까진 외출이 금지인 데다가, 마침 기말고사 기간이었다. 나는 교칙을 어기면서까지 오겠다는 다이애나를 뜯어말렸다.
“시험 잘 봤다던데….”
“어? 다이애나랑 연락했어요?”
“응. 축하한다고 편지를 보냈더라고.”
“다이애나가 뭐라고 해요?”
두 사람만 있으면 무슨 대화를 할지 궁금했다.
“엄청 강해졌으니까 한판 붙자던데.”
“아….”
“그래서 내가 이길 거라고 했어.”
19금 피폐물의 여자 주인공과 서브 남주의 대화라기에는 내용이 무척 쿨했다.
“멋진 승부가 될 것 같네요. 하하…. 그나저나 제이든은 정말로 안 데려올 생각인 걸까요?”
“제이든? 그게 누구야?”
“다이애나의 아카데미 동기요. 다이애나가 라이벌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었잖아요. 그 아이가 바로 제이든이에요. 평민인데 수석으로 입학했어요. 대단하죠?”
“에드온도 수석 입학인걸.”
“그러니까 대단하죠. 에드온 이후 처음이랬어요. 그러고 보니 둘 다 장남이네요.”
“…장남이래?”
“네. 그리고 1학년 중에 가장 키가 크고, 인기도 많대요. 말투가 조금 퉁명스럽긴 한데 성격은 착하고요.”
다이애나의 편지에는 언제나 제이든이 등장했다. 그에 대한 정보를 알다 못해 내적 친밀감까지 생긴 지 오래였다. 하지만 다이애나는 절대로 제이든을 좋아하는 건 아니라고 했다.
“아, 그리고 제이든은 버섯을 싫어한대요. 블레이크랑 똑같죠?”
“아니. 나는 이제 버섯 잘 먹는데.”
“에이, 그건 아니죠. 계란말이로 만들어줄 때만 겨우 먹으면서.”
“아니야! 그건 앤시아가 만든 계란말이가 너무 맛있어서 그래!”
블레이크가 갑자기 발끈했다.
“그럼 내일은 버섯볶음을 할까요?”
“그래!”
“정말요?”
“응! 다 먹을 거야!”
아무래도 무리일 거 같은데. 하지만 본인이 먹겠다는데 말릴 생각은 없었다.
“알겠어요. 내일은 버섯 파티를 해야겠다.”
“…응. 기, 기대된다.”
그는 어색하게 웃었다. 전혀 기대되지 않는 표정이긴 했지만, 뭐 이번 기회에 편식을 줄이면 좋은 일이니까.
“다이애나가 그러는데요, 제이든은 입학했을 때부터 황태자 전하의 기사가 되고 싶다고 했대요. 저주에 대한 헛소문을 믿는 게 바보 같다고도 했고요. 그러니까 블레이크의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몰라요.”
모든 사람이 블레이크를 괴물이라고 욕했던 건 아니다.
나와 아모리아궁의 사람들, 텐스테온, 은한, 백한, 콜린, 샤르딘 부인 말고도 저주에 걸린 블레이크를 순수하게 안타까워하거나 호의를 보낸 사람들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제이든처럼 말이다.
“블레이크는 앞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날 거예요. 그들 중에는 기회주의자들도 분명 있겠죠. 갑자기 아부를 떠는 사람들도 많고요. 하지만 그중에는 저주와 상관없이 블레이크라는 사람을 좋아하고 지지해주는 사람도 분명 있을 거예요.”
“…….”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을 무조건 미워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중에는 정말 좋은 사람도 있으니까요.”
“…….”
블레이크는 낯선 사람들이 자신을 만지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페리온 부인의 딸이 손을 잡았을 때도 그렇고, 다른 의상실 사람들이 왔을 때도 작은 접촉조차 거슬려 하며 표정이 굳어졌다.
오늘도 다른 사람과는 춤을 추기 싫다고 했지.
“블레이크는 아스테릭 제국의 황태자이고, 앞으로는 아주 넓은 세상이 펼쳐질 거예요. 그러니까….”
“내 세상에는 앤시아만 있으면 돼.”
침묵을 지키던 블레이크가 낮은 음성으로 말하며 나의 손을 움켜잡았다.
“다른 사람은 필요 없어.”
“저야 언제든 블레이크의 곁에 있을 거고요.”
빙그레 웃으며 그의 손을 맞잡는데, 갑자기 눈앞에서 새빨간 불기둥이 치솟았다.
[으아아악!!! 라온텔!!]
여인이 찢어질 듯한 비명이 나의 귀를 덮었다. 뜨거운 화염이 퍼질수록 비명도 거세졌다.
“앤시아!”
“아, 네….”
나는 블레이크의 목소리를 들으며 정신을 차렸다.
또다. 또다시 여인의 비명이 들렸다. 게다가 그 불길은 도대체 뭐지?
“왜 그래? 괜찮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조금 졸려서….”
“어서 자자.”
“네.”
침실로 돌아온 블레이크와 나는 잠을 청했다. 저주가 풀렸으니 손을 잡을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하루도 빠짐없이 서로의 손을 꼭 잡은 채 잠이 들었다.
하지만 오늘은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블레이크가 잠이 든 걸 확인한 뒤 나는 몸을 일으켰다.
나는 블레이크의 얼굴을 매만졌다. 지금쯤 텐스테온은 혼돈의 계곡에 도착해서, 어둠의 문을 닫기 위해 빛의 힘을 사용하고 있을 거다.
황제가 빛의 힘을 사용하면 그 여파가 저주의 계승자에게 돌아간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아프지 않았다. 열도 없었다.
원작대로 흘러갔다면, 어둠의 문이 열리기 전 블레이크가 크게 앓았을 거다. 텐스테온은 리차드의 계략에 빠져 목숨을 잃고, 아놀드 카실이 황제가 되었겠지.
하지만 이제 모든 게 끝났다.
원작과 같은 비극은 벌어지지 않을 거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여자의 비명이 점점 또렷해지고 있다. 주변을 에워쌌던 불기둥이 마치 실제로 눈앞에서 벌어진 것처럼 아직까지 생생했다.
도대체 뭘까?
라온텔 벨라시안은 빛의 마법사이자 락슐 황태자의 약혼녀, 그리고 필립 황제의 황후일지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비명을 지르는 여인은 라온텔을 찾았다. 그렇다면 그 여인 또한 천 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라는 거겠지. 그렇다면 오늘 본 불은 ‘텐라른 대화재’ 당시의 상황이었던 걸까?
어째서 천 년 전의 일들이 계속해서 눈 앞에 펼쳐지는 거지?
의문이 꼬리의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나는 서재에 가서 젤칸의 역사에 관한 책들을 다시 읽어보았다. 하지만 이렇다 할 단서는 찾지 못했다.
***
리차드가 황제로 즉위한 지 3년이 되던 해, 어둠의 문이 열렸다.
리차드는 다이애나와 아들 조지의 배웅을 받으며 혼돈의 계곡으로 향했다.
처음으로 마주하는 어둠의 문은 가히 장관이었다. 계곡의 중앙에 괴물의 아가리와 같은 시커먼 구멍이 열려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나올 만큼 음습한 기운이 일렁거렸다.
리차드는 아스테릭 제국의 황제에게 이어져 온 ‘빛의 반지’를 사용하여 찬란한 빛의 힘을 검은 공간 안으로 퍼부었다.
어둠의 문은 격렬하게 저항했다. 어둠의 문을 봉인하기 위해서는 보통 닷새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길어도 일주일을 넘기지 않는다고 했다.
텐스테온은 블레이크에게 영향이 갈까 두려워하며 힘을 아꼈음에도 사흘 만에 어둠의 문을 봉인했다고 한다. 하지만 리차드는 열흘이 넘게 어둠의 문과 대치했다.
‘내가 로움이기 때문인가? 고귀한 제라실리온이 아니라 죄를 지은 로움의 피가 흐르기 때문에 어둠의 문을 닫지 못하는 건가?’
시간이 지날수록 리차드의 내면에 꿈틀거리던 열등감도 커져갔다. 옆에서 지켜보던 신관들도 불안한 기색을 내비쳤다.
“어째서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겁니까?”
“지금의 황제는 순수한 제라실리온의 혈통이 아닙니다. 머리색도 검죠. 그렇기 때문에 여신께서 빛의 힘을 허락하지 않으시는 걸지도 모릅니다.”
“그럼 어찌합니까? 아스테릭의 황제에게는 어둠의 문을 닫아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문을 닫지 못하는 자를 황제의 자리에 둘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지금 그것이 문제인가? 이대로 어둠의 문이 열린다면 세계가 멸망하고 말 걸세.”
신관뿐만이 아니었다. 황궁의 기사들조차도 검은 머리의 황제를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리차드는 그들을 모두 죽여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감히 자신을 무시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리차드가 문을 닫지 못해서 쩔쩔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자신의 치부를 아는 자들을 이대로 살려둘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둠의 문을 닫는 것이 먼저였다.
리차드는 이를 악물었다. 잠도 자지 않고 자신이 쓸 수 있는 빛의 힘을 모조리 퍼부었다. 그리고 한 달간의 혈투 끝에 겨우 어둠의 문을 봉인할 수 있었다.
어둠의 문이 닫히자, 신관과 기사들은 리차드를 찬양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리차드 역시 그들을 처리하겠다는 생각을 잠시 접으며 기쁨을 만끽했다.
리차드는 어둠의 문을 닫았다. 황제의 소임을 완수했다. 그는 이제 아스테릭 제국의 진정한 황제였다. 감히 머리카락 색깔을 트집 잡으며 그의 전통성을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리차드는 황제가 되었다. 빛의 계승자를 아내로 얻고, 자신을 쏙 빼닮은 후계자도 낳았다. 어둠의 문도 봉인했다.
그는 자신의 어깨를 짓누르던 압박감을 조금 내려놓았다.
모든 것이 그의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성공적인 인생이다.
리차드 위풍당당한 발걸음으로 황궁에 돌아갔다. 하지만 성대한 환영식은 열리지 않았다. 오히려 황궁 안은 적만만이 감돌고 있었다.
두 달 만에 남편이자 제국의 황제가 돌아왔는데, 환영식은커녕 얼굴조차 비치지 않다니!
리차드는 분노하며 황후궁으로 향했다. 그 순간 다이애나의 비명이 들렸다.
“아아! 악! 아니야! 아니라고! 그럴 리가 없어! 우리 조지가…! 조지가!”
아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리차드는 다급히 황후의 침실로 뛰어들었다.
다이애나는 조지를 안은 채 울부짖고 있었다. 리차드는 그 모습을 보고 딱딱하게 굳었다.
시커먼 문장들이 조지의 작은 몸을 뒤덮고 있었다. 여신의 저주였다.
리차드와 다이애나의 아들 조지는 저주의 계승자가 되었다.]
***
“아악!”
나는 짧은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깼다.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꿈을 꾸었다. 아니, 단순한 꿈이 아니었다. 과거나 미래의 일도 아니다. 앤시아의 기억도 아니다.
이건 ‘야수와 영애님’의 외전이었다. 그동안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외전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 것이다.
다이애나는 저주를 푼 것이 아니었다. 그저 일시적으로 저주를 약화시킨 것에 불과했다.
블레이크가 죽자, 여신의 저주는 리차드와 다이애나의 아들인 조지에게 계승되었다. 하지만 다이애나가 지닌 빛의 힘 때문에 드러나지 않다가, 리차드가 어둠의 문을 봉인하기 위해 힘을 쓰자 그 반동으로 인해 저주의 문장이 퍼진 것이다.
그렇다면 블레이크는 어떻게 되는 거지?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긴 어디지? 아, 서재구나…. 젤칸의 역사책을 읽다가 그대로 잠이 든 모양이었다.
나는 다급히 몸을 일으키며 블레이크의 침실로 향했다.
“으, 으윽….”
문을 여는 순간 고통이 가득 담긴 신음이 들렸다.
“블레이크!”
검은 문장이 블레이크의 몸을 뒤덮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그를 향해 뛰어갔다. 그리고 새롭게 생겨난 저주의 문장을 확인한 순간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연못의 석판에 새겨져 있던 글자의 의미를 깨달았다.
-6황자의 몸에 새겨진 저주의 문장이 바뀌었다.
석판에는 분명 그렇게 적혀 있었다. 그리고 지금 블레이크도 마찬가지였다.
저주의 문장이 그의 왼쪽 몸을 뒤덮고 있었다. 저주가 풀리기 전과 같았다. 오히려 그때보다 조금 더 퍼졌다. 그리고 ‘저주의 문장’의 모양이 바뀌었다.
아니, 이걸 저주의 문장이라 말할 수 있을까. 블레이크의 손과 얼굴에는 고대어가 적혀 있었다. 검은색 글씨로 몸에 문신을 새긴 것과 같았다.
얼굴과 손만으로는 글씨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다급히 그의 잠옷 셔츠를 벗겼다. 그의 몸에도 고대어로 된 글씨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구해줘! 라온텔! 제발 나를 구해줘! 나는 살아 있어! 언제 와? 언제나 나와 함께 있어 주겠다고 약속했잖아. 라온텔, 미워! 너무 미워!! 어서, 어서 구해줘. 아아악!!! 괴로워 뜨거워! 아파! 라온텔, 나 너무 힘들어. 더는 버틸 수가 없어. 구해줘. 제발 구해줘. 라온텔, 어서 구해줘! 필립이 나를 배신했어. 나한테는 이제 너뿐이야.]
이건 저주가 아니다. 메시지다. 여신이 보낸 메시지였다.
고대어로 적힌 여신의 외침이 블레이크의 몸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여신은 필립의 후손을 저주한 것이 아니다. 그들의 몸을 빌려 살려달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있었던 거다.
[구해줘! 제발 나를 구해줘! 라온텔! 라온텔!]
또다시 여인의 외침이 들렸다. 이제는 이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빛의 여신이다. 그녀는 아직 어둠 속에 갇혀 있었고, 라온텔 벨라시안의 후손인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거다.
빛의 여신을 구해야 한다. 그래야만 천 년 동안 이어져 온 지독한 저주를 완전히 풀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 여신은 어디 있는 거지?
그때 목걸이에서 환한 빛을 뿜어져 나왔다. 나는 빛의 눈물을 바라보았다. 투명한 구체에서 흐르는 강력한 빛이 순식간에 나의 몸을 감쌌다.
나를 여신이 있는 장소로 데려가려는 거구나. 투명한 빛에 몸을 맡기려고 하는데, 블레이크가 내 손을 잡았다.
“앤시아, 안 돼. 가지 마….”
블레이크는 고통 때문에 정신이 혼미한 상황에서조차 나를 붙잡았다.
그의 손이 불처럼 뜨거웠다. 다시 새겨진 문장으로 인해 열이 나고 전신이 떨렸다. 한시라도 빨리 여신을 구하고 저주를 완전히 풀어야 했다.
“저주를 풀러 가는 거예요. 이번에야말로 진짜로 저주를 풀어드릴게요.”
“가지 마. 가면 안 돼.”
블레이크의 곁에 있고 싶었다. 아픈 블레이크를 남겨두고 떠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빛의 눈물은 여신이 있는 장소를 알고 있고, 나를 그곳으로 안내하려 했다. 지금 가지 않으면 언제 다시 이런 기회가 올지 알 수 없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주만 풀고 금방 돌아올게요. 그러니까 아프시더라도 조금만 참으세요.”
나는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빼며, ‘빛의 눈물’이 뿜어내는 빛에 몸을 맡겼다.
***
전신을 휘감은 빛이 사라지자, 황량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여긴 어디지? 풀이나 나무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오직 가파른 언덕과 메마른 땅만이 끝도 없이 펼쳐졌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자 화산 분화구같이 움푹 파여 있는 지형 아래로 새까만 공간이 보였다.
거대한 괴물이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는 듯한 끝도 없는 어둠…. 소설 속의 묘사를 그대로 재현한 듯한 저 검은 공간은 아마도 ‘어둠의 문’일 것이다.
“앤시아!”
어? 나는 귀에 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아버님!”
반대편에 서 있던 텐스테온이 나를 발견하고 뛰어오고 있었다.
역시 이곳은 혼돈의 계곡이었구나. 그리고 저기 검게 일렁이는 공간은 어둠의 문이 확실했다. 그렇다면 어둠에 문에 여신이 갇혀 있다는 건가?
“여긴 어떻게 온 것이냐?”
황궁에 있어야 할 내가 갑자기 나타나자, 텐스테온은 물론이고 기사나 신관들도 크게 놀란 눈치였다.
“아, 그게 말이죠….”
“폐하, 우선은 어둠의 문을 닫으셔야 합니다.”
내가 상황을 설명하려고 하는데, 대신관이 다가와서 정중히 고하였다.
“어둠의 문을 닫는 중이셨나요?”
“그래, 얼마 남지 않았다.”
“닫으면 안 돼요!”
나는 다급히 외쳤다. 그러자 대신관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비 전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어둠의 문을 닫지 않으면 마계가 열리고 온 세상이 어둠으로 뒤덮이게 될 겁니다. 아무리 연치가 어리시다지만 그것도 알지 못하는 겁니까?”
“대신관, 지금 짐의 딸을 무시하는 건가?”
“…….”
황제의 서늘한 음성에 대신관은 흠칫 떨며 입을 다물었다.
블레이크가 저주에 걸리자 대신관은 그를 남쪽 섬에 유폐시킬 것을 주장하며 텐스테온과 대치했고, 최근까지 카실 공작의 편을 들어왔다.
카실 가문이 멸망을 앞둔 지금 그의 자리 또한 위태로웠다. 아무리 전 대륙을 아우르는 대신관이라지만 텐스테온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말해보거라.”
텐스테온은 서늘한 기운을 지운 뒤, 다시 나를 보며 부드럽게 물었다.
“저건 마계와 연결된 문이 아니에요. 저 안에는 빛의 여신이 갇혀 있어요!”
“마계가 아니라 여신이 봉인되어 있다고?”
“네! 블레이크의 저주를 완전히 풀기 위해서는 여신을 구해야 해요!”
“허무맹랑한 소리입니다. 허 참, 여신이 봉인되어 있다니! 누가 그런 짓은 한다는 말입니까! 이는 신에 대한 모욕입니다!”
대신관이 다시 노성을 터트렸다. 그러자 텐스테온은 그에게 나직이 명했다.
“물러나라.”
“폐하!”
“대신관의 명예를 생각하여 끌어내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게.”
“…….”
대신관은 이를 악물고는 뒤로 물러갔다. 이제 말을 가로막을 사람도 없기 때문에 나는 블레이크에게 저주의 문장이 다시 나타났다는 것을 비롯해 내가 알게 된 저주의 진실을 텐스테온에게 말하였다.
그는 나의 말을 유심히 듣더니, 검게 일렁이는 어둠의 문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렇다면 어둠의 문 저편에 갇혀 있는 여신을 구하면, 저주가 완전히 사라지겠구나.”
“제 말을 믿어주시는 건가요?”
“내가 언제 네 말을 믿지 않은 적이 있더냐?”
“맞아요. 언제나 믿어주셨죠.”
“여신은 내가 구하겠다. 우선은 이곳을 떠나거라.”
그는 나의 호위를 맡길 기사를 부르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텐스테온을 만류했다.
“아니에요. 여신은 저를 찾고 있어요. 벨라시안 가문의 빛의 후계자만이 저주를 풀 수 있어요. 그러니 제가 직접 하겠어요.”
지금껏 천 년 전의 일을 보여주고, 텐라른궁에 마쿨을 보내어 석판이 가득한 황금방으로 나를 안내한 것도 모두 빛의 여신이었을 거다.
그녀는 계속해서 내게 신호를 보냈다. 아마도 나에게 여신을 구할 힘이 있기 때문이겠지.
“여긴 위험하다. 여신을 구하더라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어.”
“괜찮아요. 제가 할게요! 할 수 있어요! 블레이크의 저주를 풀어주겠다고 약속했는걸요!”
텐스테온을 설득하는데, 갑자기 뒤에서 기사들이 소리쳤다.
“마쿨이다!!”
“폐하, 비 전하 피하십시오!”
어둠의 문에서 마쿨이 쏟아져 나왔다. 거대한 마쿨의 무리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앤시아!”
텐스테온이 다급히 나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그보다 먼저 마쿨이 긴 몸을 이용해 나의 사지를 휘감았다.
“아…!”
짧은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몸이 수직으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마쿨의 무리들이 나의 몸을 휘감고는 다시 어둠의 문으로 향했다.
“앤시아!!”
“아버….”
텐스테온의 절박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도 그를 부르려고 했지만, 그 전에 시커먼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