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왜 하필 19금 소설인 건가요?
나는 백한이 준 팔찌를 톡 건드렸다. 백한의 눈동자처럼 신비로운 빛을 띠는 보석들을 엮어서 만든 팔찌가 차르르 맑은 소리를 냈다.
백한은 무사하다고 했다. 은한은 그를 지키기 위해 창으로 돌아갔다. 텐스테온은 그가 황제가 될 수 있도록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을 거라고 했다.
은한은 운명을 바꿨다. 리차드의 손에 죽는 조연이 아니라, 창의 황제가 될 것이다.
그렇게 좋아하는 형이 돌아갔으니 백한도 행복하겠지?
그에게 고맙고, 이렇게 금방 떠날 줄 알았다면 조금 더 잘해주는 건데 하는 후회가 일었다. 다시 또 만날 날이 있을까?
어쨌든 원작이 바뀌고 있었다.
나는 나의 손을 바라보았다. 다이애나가 아니라 내가 빛의 계승자였다. 블레이크의 저주를 풀 열쇠가 바로 나에게 있었다.
날아갈 듯 기쁜 일이었지만, 한 가지 고민이 생겼다.
그러니까 이 빛의 힘으로 저주를 풀려면….
원작에서 블레이크와 다이애나는 뜨거운 하룻밤을 보낸다. 그러자 빛의 힘이 발동하며 블레이크의 저주가 풀리게 된다.
한마디로 저주를 풀기 위해서는 뜨거운 접촉을 해야 한다는 거다.
하아…. 블레이크가 너무 무해한 나머지, 이곳이 19금 피폐 소설 속 세계라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으아아아악!”
내가 빛의 계승자인 건 좋지만, 이건 산 넘어 산이었다. 깊은 한숨을 내쉬는데 문이 열리더니 블레이크가 들어왔다.
“앤시아!”
맑게 웃으며 뛰어오는 모습이 오늘도 참 귀여웠다. 그런데 오늘따라 왜 이리 가슴이 답답하지…?
“블레이크.”
“앤시아, 오늘 슬퍼 보여.”
그가 글썽글썽한 눈으로 나를 올려보았다. 내 표정이 어두우니 금세 걱정이 되나 보다. 이렇게 마음이 여려서 어떡하면 좋지, 우리 신랑?
“혹시 은한 때문이야?”
“네?”
“은한이 떠나서 슬퍼?”
“아니요. 왜 슬프겠어요. 안 좋은 일도 아니고 동생이랑 고국으로 돌아간 거잖아요.”
“야옹이 보고 싶지 않아?”
“야옹이요?”
은한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웬 야옹이지?
“야옹이 좋아했잖아.”
“그러고 보니 요즘 못 본 지 오래됐네요. 우리 블레이크, 야옹이가 보고 싶었구나?”
싫다고 했지만 역시 좋아했던 거다. 내가 배시시 웃자 블레이크가 정색했다.
“아니.”
“에이, 아니긴요.”
“정말 아니야.”
“백한 군이 돌아가니까 외로워서 그러시는 거예요?”
“아니. 앤시아 말대로 좋아하는 형이랑 함께 살게 된 거잖아. 아픈 것도 다 나았다고 하고 정말 잘됐는걸. 축하해줘야지. 게다가 내가 왜 외롭겠어. 부인이 있는데.”
그는 나의 손을 잡더니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평소라면 뒤로 넘어갈 만큼 깜찍한 모습이었지만 오늘은 조금 착잡했다.
“블레이크.”
“응?”
“블레이크는 언제 커요?”
“허엉? 어? 나, 나, 막, 완전, 엄청 컸는데!?”
블레이크가 흥분하며 목소리를 높였지만, 그 모습조차도 귀엽기만 했다.
“블레이크, 제가 말했죠. 저주를 풀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고요.”
은한과 백한이 떠난 뒤 나는 내가 벨라시안 가문의 빛의 계승자이며, 여신의 저주를 풀 수 있다는 사실을 블레이크와 텐스테온에게 말해주었다. (밀접한 접촉과 관련된 이야기는 생략했다.)
그러자 블레이크는 크게 기뻐했다. 지금도 그 이야기가 나오자 활짝 웃었다.
“응. 이제 앤시아는 나를 안 떠날 거고, 나도 앤시아를 떠나지 않을 수 있는 거잖아.”
그는 저주가 풀리는 것보다 내가 떠나지 않는 게 더 기쁜 것 같았다.
이런 아이를 두고 떠날 생각만 했다니, 너무 미안했다.
하지만 미안한 걸 떠나서, 이리 작아서야. 원작에서는 분명 섹시함이 철철 넘쳐흐르는 퇴폐남이었는데….
“제가 저주를 풀려면 전하께서 조금 많이 자라셔야 해요.”
“나, 진짜로 많이 컸어!”
컸나? 자세히 보면 콩알에서 밤톨 정도로 진화한 것 같기도 하다.
“밤톨보다도 훨씬 커야죠.”
“밤톨….”
블레이크가 얼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 나도 모르게 생각이 그대로 입 밖으로 나와버리고 말았다. 요즘 부쩍 어린아이 취급하는 걸 싫어하는데.
“아니에요. 취소! 취소! 복숭아 정도는 되는 것 같아요.”
“복숭아….”
복숭아도 마음에 안 드나? 하지만 정말 많이 봐줘서 복숭아라는 거였다. 아무리 봐도 딱 밤톨이란 말이지.
아휴, 이걸 언제 키워. 아니, 커도 문제야!
나는 그의 새하얀 볼을 잡고 늘렸다. 그의 볼이 분홍색 복숭아처럼 말랑말랑했다.
“블레이크, 복숭아 먹을래요?”
“안 먹어!”
블레이크가 볼을 잔뜩 부풀렸다. 동글동글한 게 진짜 복숭아 같네.
“왜요? 달고 맛있는데.”
“검술 훈련 시간이야! 훈련하러 가야 해!”
그는 서둘러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설마 삐쳤나? 왜지? 복숭아 같다는 건 칭찬인데?
***
나는 블레이크를 쫓아갔다. 하지만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1층으로 내려가 버렸다. 정말로 단단히 삐쳤나 보다.
“블레이크!”
그를 쫓아 건물 밖으로 나가는데, 커다란 보폭으로 걸어오는 텐스테온의 모습이 보였다.
오랜만의 방문이었다. 귀족들의 항의 때문에 다시 발길을 끊는 게 아닌지 걱정했는데 정말 다행이다.
“아버님!”
나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를 향해 달려갔다. 황제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블레이크를 바라봤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어색한 얼굴로 멀뚱히 서 있을 뿐이었다.
보름 가까이 보지 않았더니 전보다도 더 서먹해진 것 같았다. 나는 블레이크의 옆으로 슬쩍 다가가서 등을 쿡 찔렀다. 그러자 그는 마지못해 고개를 숙였다.
“오셨어요.”
“어딜 가는 거냐?”
“…연무장에 가는 길이었습니다.”
“검술 연습을 하려고?”
“네.”
“같이 가자.”
“네?”
블레이크의 눈이 크게 떠졌다. 나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황태자궁에 온다고 해도 저녁 시간 때 와서 식사하거나 잠시 대화를 나눈 뒤 돌아갈 뿐이었다. 그런데 연무장에 가시겠다고?
사방이 탁 트인 공간이었다. 황태자궁 내부에 있던 첩자는 모두 쳐냈지만, 그래도 염탐꾼들의 눈에 띌 위험이 있었다.
하지만 텐스테온은 그런 건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연무장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니, 괜찮아요.”
“블레이크, 그러지 말고 가요.”
내가 등을 떠밀자, 블레이크는 하는 수 없이 걸음을 옮겼다.
다른 궁인들도 우리의 뒤를 쫓아오려 했지만, 나는 조용히 손짓하며 뒤로 물렸다.
비록 황태자궁 내에 있는 연무장이지만 부자가 함께 밖으로 나왔다. 그들만의 시간을 주고 싶었다.
텐스테온은 이미 연무장의 위치를 알고 있는지 성큼성큼 걸어갔다. 블레이크의 걸음은 평소보다도 훨씬 느렸다. 두 사람의 간격이 점점 벌어졌다.
손을 잡고 대화하는 건 바라지도 않지만, 저건 너무 어색하지 않나? 중간에서 어떻게 중재를 해야 할지 고민하는데, 텐스테온이 고개를 돌렸다.
“느리구나.”
“송구합…. 으악!”
고개를 푹 숙이며 중얼거리는 블레이크를 텐스테온이 덥석 안아 올렸다. 한 손으로 엉덩이를 받치고, 다른 손으로 등허리를 감싸는 모습이 마치 어린 아기를 안은 것 같았다.
음…. 아름다운 모습이긴 하지만, 여섯 살만 넘어도 저렇게 안지는 않을 것 같은데….
블레이크가 저주에 걸린 게 다섯 살 때였다.
아이는 자란다. 부모도 그와 함께 성장한다. 하지만 텐스테온의 아버지로서의 지식과 경험은 아직 블레이크가 다섯 살이었을 시절에 머물러 있었다.
부자간의 단절된 시간이 느껴져서 마음이 아팠다. 게다가….
“뭐 하시는 거예요! 내려 주세요!”
아기 취급을 받은 블레이크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아이고, 아버님. 블레이크가 요즘 어른스러워 보이려고 얼마나 노력하는데요. 복숭아 같다는 말만 해도 삐친단 말이에요.
“내려 주세요!”
블레이크가 텐스테온의 가슴을 마구 때렸다. 하지만 그런 솜 주먹으로는 텐스테온에게 아무런 타격도 입힐 수 없었다.
“위험하다. 가만히 있거라.”
텐스테온은 오히려 더 단단하게 블레이크를 끌어안았다.
몇 년 만에 얼굴을 마주한 뒤에도 단답형의 형식적인 대화만 나누던 두 사람이었다.
그래도 블레이크가 예법에서 벗어나 아버지를 편하게 대하는 모습을 보니 괜스레 흐뭇했다.
“아아….”
블레이크는 홍당무처럼 달아오른 얼굴로 중얼거렸다.
“부인이 보고 있는데….”
그러자 텐스테온이 나를 내려보았다.
“앤시아, 안아줄까?”
“아니요! 저는 괜찮아요!”
내 나이가 몇인데요!
도리질을 쳤지만, 텐스테온은 블레이크를 한 손으로 안으며 자세를 고치고, 다른 손으로 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텐스테온에게 안긴 채, 블레이크랑 눈이 마주치는 순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저는 내려 주세요! 저는 아이가 아니에요!”
블레이크가 요즘 맨날 입에 달고 사는 이 말을 내가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나한테는 너나 블레이크나 똑같이 아가란다.”
블레이크보다 고작 2살 많으면서 어른인 척하는 내가 귀엽다는 듯 텐스테온이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나는 진짜로 아이가 아니라고요!
블레이크가 왜 삐쳤는지 알 거 같다. 하지만 나는 정말로 다 컸다고. 억울해!
하지만 우리가 항의해도 텐스테온은 엷은 미소를 띠며 묵묵히 걸어갈 뿐이었다.
부끄러움이 가시자 걱정이 밀려왔다.
“무겁지 않으세요?”
“하하. 실없는 걱정을 하는구나.”
어린아이만이 할 수 있는 엉뚱한 상상이 재밌다는 듯 텐스테온이 호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나는 진심이었다.
보통 무겁지 않나? 아주 어린 아기라도 두 명을 동시에 드는 건 힘이 들 텐데?
그러나 나의 걱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텐스테온은 가볍게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의 어깨를 잡은 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시선이 올라가서 그런지 늘 보던 풍경이 조금 다르게 보인다. 위 공기가 더 맑은 것 같기도 하고.
고개를 돌리자 귀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블레이크의 모습이 보였다. 불만스러운 듯 작은 한숨을 내쉬긴 했지만 더는 내려달라고 떼쓰지 않았다. 그의 작은 손이 텐스테온의 옷깃을 살포시 잡고 있었다. 그 모습이 보기 좋았다.
연무장에 도착하자 텐스테온은 우리를 내려주었다. 블레이크는 텐스테온이 몸을 숙이자마자 후다닥 그의 품에서 떨어져 나갔다.
“이, 이제, 돌아가세요!”
블레이크가 노골적으로 불편한 기색을 비쳤지만 텐스테온은 뚜벅뚜벅 걸어가 한쪽에 놓여 있는 훈련용 목검을 집어 들었다.
“이걸로 훈련하는 거냐?”
“진검도 썼어요! 지, 지금은 잠시 쉬고 있지만….”
블레이크의 목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아직도 목검을 사용하는 것이 창피한가 보다.
그는 올해 들어 수련용 진검을 사용했지만, 열흘 동안 앓고 난 뒤로는 다시 목검 훈련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한번 보자.”
텐스테온은 목검을 블레이크에게 던지며, 자신도 다른 목검을 집었다.
대련을 하려는 건가?
나는 블레이크를 바라보았다. 부담스러워하면 어떡하지? 내가 훈련을 지켜보는 것도 부끄럽다며 싫어했었는데? 하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블레이크의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그는 설레어하고 있었다.
텐스테온은 검술 실력이 뛰어났다. 에드온의 말로는 황궁의 기사들 중 가장 뛰어나다는 제1 기사단장도 텐스테온의 실력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블레이크의 눈빛에서 제국 최고의 실력자와 대련할 수 있다는 순수한 기쁨이 묻어났다.
텐스테온은 연무장 중앙으로 걸어갔다. 블레이크도 그의 맞은편에 섰다.
‘아버님, 잘하고 계십니다! 바로 그거예요!’
나는 마음속으로 응원의 목소리를 높였다. 텐스테온은 차가워 보이지만 사실 다정한 사람이다.
저렇게 대련하는 척하면서 블레이크를 자상하게 지도해주고, 살짝 져주기도 하면 분위기가 훨씬 부드러워지겠지. 부자 관계가 회복되는 시발점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채 1분도 지나지 않아 내 생각은 깨지고 말았다.
“아!”
블레이크가 검을 휘두르려다가 균형을 잃고 바닥에 쓰려졌다. 텐스테온은 그런 아들을 내려보았다.
“보폭을 넓혀라. 급하게 뛰어들어봤자 허점만 노출할 뿐이다.”
“네.”
텐스테온은 블레이크를 조금도 봐주지 않았다. 그가 아들이고, 어리고, 저주에 걸렸다는 걸 감안하지 않고 냉정하게 대련을 이어갔다.
물론 정말로 진심을 다했다면 한 번에 끝나버렸겠지만, 내가 상상하던 따뜻한 부자간의 검술 연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저기….”
조금만 살살해달라고 부탁하려는데, 블레이크가 몸을 일으켰다. 검을 단단히 잡은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어려 있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블레이크는 아버지가 봐주는 걸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넘어지고 뒹구는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제대로 된 대련을 펼치기도 전에 블레이크의 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악력이 약하니 검을 놓치는 것이다. 이 상태로는 진검을 잡는 것은 무리다. 연습 상대까지 위험에 빠트릴 수 있다.”
“더 정진하겠습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목검으로 훈련하는 걸 창피해하던 블레이크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와라.”
“네, 폐하.”
블레이크는 최선을 다했지만 텐스테온의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못했다.
시간이 갈수록 블레이크는 지쳐갔고, 검을 맞부딪치는 것조차 버거워 보였다. 하지만 텐스테온은 철옹성처럼 단단하게 서서 조금의 빈틈도 보여주지 않았다.
정확히 한 시간이 경과하자 텐스테온은 검을 내려놓았다.
“잠깐만요! 더 할 수 있어요!”
블레이크가 비틀거리면서도 검을 단단히 맞잡았다. 하지만 황제는 단호했다.
“내일 하자.”
“내일도 와주실 건가요?”
텐스테온이 오든 말든 관심이 없던 블레이크였다. 하지만 지금 그는 텐스테온을 다시 만나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다.
텐스테온은 엷게 웃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대련을 시작한 뒤로 처음 짓는 미소였다.
“그래. 매일 올 것이다.”
“…….”
“그동안 연습을 열심히 했구나. 아주 잘했다.”
“…노, 놀리지 마세요! 잘하기는요….”
“나는 네 나이 때 검도 제대로 잡지 못했다. 잘한 거다. 에드온이 잘 가르쳤구나. 상을 내려야겠다.”
“정말이요? 에드온한테 상을 주실 거예요?”
“그래.”
블레이크는 자신이 칭찬을 받은 것보다 훨씬 기뻐했다. 텐스테온은 그런 블레이크를 향해 미소를 짓더니 번쩍 안아 올렸다.
“아!”
방심한 사이에 다시 안겨버린 블레이크가 짧은 비명을 질렀다.
“내, 내려 주세요!”
“걸을 힘도 없지 않느냐?”
“걸을 수 있어요!”
“느리다.”
“느려도 상관없어요!”
“업어주랴?”
“그것도 싫어요!”
“목마는?”
“싫다니까요!”
대답을 할수록 블레이크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텐스테온의 입가에 걸린 미소도 짙어졌다.
블레이크를 놀리는 게 재미있긴 하지. 아버님도 이제 그 맛을 알아버리셨군.
두 사람을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는데, 텐스테온이 고개를 돌렸다.
“앤시아. 이리 오렴.”
그는 안기라며 손짓했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에요!”
텐스테온에게 안겼던 건 즐거운 경험이었지만, 두 번이나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정말로 그럴 나이는 지났다고! 하지만 그는 단단한 팔로 나를 안아 올렸다.
결국 우리 두 사람은 연무장에 갈 때와 똑같은 자세로 돌아가게 되었다.
아, 부끄럽다.
***
텐스테온은 대련을 마친 뒤에도 황태자궁에 머물렀고, 저녁 식사도 함께했다.
“검을 휘두르면서 다리를 움직이는 것이 힘이 들어요. 검술에 재능이 없는 걸까요?”
“경험이 쌓여야 한다. 머리나 재능이 아니라 연습을 해서 몸에 익혀야 해.”
공통된 화제가 생겨서 그런지 식사 시간 내내 대화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앤시아, 이것 좀 먹어봐. 아주 맛있어.”
“고마워요. 블레이크.”
“이제 이름을 부르는 것이냐?”
혹시 예법에 맞지 않는다고 꾸짖으시려는 건가?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제야 저 녀석이 제법 남편다워 보였나 보구나.”
“아, 아니, 그런 게….”
“처음부터 계속 남편이었어요!”
내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블레이크가 발끈했다.
“맞아요. 우리 남편이 얼마나 든든한데요.”
내가 편을 들자, 블레이크가 거보라며 우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텐스테온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그래, 내가 실언을 했구나. 사과하마.”
“다음부터는 주의해 주세요.”
블레이크가 새침하게 쏘아붙이자, 황제는 미안하다며 거듭 사과했다. 그 모습이 어느 때보다도 즐거워 보였다.
이런 행복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아니, 계속될 거다.
***
“아버님, 드릴 말씀이 있어요.”
식사를 마치고 난 뒤, 나는 텐스테온에게 조용히 말을 건넸다.
“말해보거라.”
“며칠 전에 제가 했던 말을 기억하세요?”
백한과 은한이 떠난 뒤, 나는 텐스테온에게 백한이 석판을 해독해주었으며, 저주를 풀 방법도 찾았다고 했다. 하지만 백한의 생명이 위독하고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인지라 횡설수설하며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그 때문인지 텐스테온은 그리 기뻐하는 것 같지 않았다.
“기억한다. 네가 벨라시안 가문의 ‘빛의 계승자’이며 저주를 풀 수 있을 거라 했지.”
“네, 맞아요.”
텐스테온은 내 말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앤시아.”
“네. 아버님.”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거라.”
생각지도 못한 말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나는 저주를 풀기 위해 많은 방법을 시도했다. 자신이 여신의 저주를 풀 수 있다고 주장하는 타국의 왕족이나 신관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은 모두 실패였다.”
그는 과거를 떠올리며 말했다. 언제나 당당하고 위엄이 넘치던 그의 얼굴에 짙은 절망이 스쳤다.
“은한의 동생이 뛰어난 능력을 지녔다고는 하나. 용술과 마법은 그 근원이 다르다. 그러니 실수했을 가능성도 있다. 네가 정말로 벨라시안 가문의 빛의 계승자이고, 그것으로 블레이크의 저주를 푼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 하지만 너무 기대하지는 말거라.”
텐스테온은 내가 기대한 만큼 큰 절망에 빠지진 않을지 걱정하고 있었다. 과거 자신이 겪었던 고통을 물려주고 싶지 않기에 더 덤덤한 반응을 보였던 거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었다.
나는 진짜 빛의 계승자이며, 여신의 저주를 풀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아버님, 이번에는 달라요. 저를 믿으세요. 제가 블레이크의 저주를 풀 거예요! 방법도 알고 있어요.”
“방법을 알고 있다고?”
“네. 그, 그러니까.”
머릿속으로 소설 속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19, 19, 19…. 아….
“그게 저기, 빛의 계승자가 힘을 쓰기 위해서는 저주의 계승자와 밀접한 유대 관계가 필요한데….”
말을 할수록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걸 어떻게 설명하냐고!
“유대 관계?”
“네. 그런데 그게 지금은 안 되고 서로가 아주 많이 친해져야 해요. 그래야 제가 힘을 발휘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지금 당장은 어렵지만, 블레이크의 저주는 반드시 풀릴 거예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에요!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텐스테온은 잘 이해가 안 되는지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아우, 이거 확 말을 해버릴 수도 없고!
“블레이크가 클 때까지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반드시 저주는 풀려요! 그러니까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아….”
텐스테온의 목소리가 툭 터졌다. 왠지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제 말뜻 아시겠어요?”
조심스럽게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래. 시간이 필요하다는 거지?”
“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정말로 내 말을 믿어주는 걸까? 괜히 걱정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는데.
“그래, 믿으마.”
“정말이시죠?”
“딸이 아니면 누구를 믿겠니.”
텐스테온의 눈가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그리고 오늘 와주셔서 감사해요.”
“감사하기는. 내가 더 고맙지. 그동안 너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지웠구나.”
“짐이라니요! 블레이크는 제 보물이에요! 아무리 아버님이라도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화낼 거예요!”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구나.”
그는 웃으며 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말로 미안하시면, 내일도 오셔서 블레이크랑 대련을 해주셔야 해요.”
“오지 말라고 해도 매일 올 거다. 귀찮아하지나 말거라.”
그냥 해본 말이 아니었구나…. 텐스테온의 심경에 무슨 변화가 생겼다. 그것도 아주 긍정적인 변화가 인 것이 틀림없었다.
“아모리아궁에 사셔도 되니까 매일 오세요!”
나는 활짝 웃었다.
***
새근새근 잠이 든 블레이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약속대로 텐스테온은 매일 황태자궁에 들러 블레이크의 검술을 지도해주었다.
에드온에게도 그동안 블레이크를 가르친 공을 인정하며 명검을 하사하였고, 다른 궁인들에게도 상을 내렸다.
부자간의 사이도 좋아지고 행복한 나날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내가 빛의 계승자면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정말로 빛의 계승자라고 하니 다른 문제가 머릿속을 지배했다.
나는 왜 하필이면 19금 피폐 소설을 본 걸까? ‘야수와 영애님’을 보더라도 15금 클린 버전을 봤어야 했는데! 클린 버전이라도 스토리는 같으니 차이가 없었으려나? 블레이크는 왜 원작과 같은 퇴폐 늑대남이 아닌 걸까? 블레이크는 언제 크는 걸까? 크면 야릇한 페로몬을 뿜어내는 퇴폐 늑대남이 되긴 하는 걸까? 나이를 먹는다고 토끼가 늑대로 성장할 수 있을까?
토끼는 커도 토끼고, 늑대는 커도 늑대다. 그럼 블레이크가 크면….
나는 새근새근 잠이든 블레이크의 볼을 톡 건드렸다. 참 말랑말랑하다.
‘블레이크는 언제 클까? 아니, 막상 커도 어떡하지?’
아, 머릿속이 복잡하다.
게다가 그때까지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그의 저주를 풀어주고 싶었다.
백한은 내가 지닌 빛의 힘이 블레이크의 저주가 퍼지는 걸 막아주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통도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저주의 문장은 블레이크를 괴롭히고, 한 달 전처럼 크게 앓는 일도 생길 거다. 저주를 풀지 않는 이상 블레이크의 고통은 계속될 거다.
‘왜 하필이면 그런 방법인 거냐고!!’
그렇다고 이렇게 한탄하며 그가 성장할 때까지 손 놓고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나는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보도록 했다.
그건 바로 요리였다.
백한은 내가 만든 요리에 빛의 힘이 깃들어 있다고 말했다. 그럼 내가 만든 요리를 많이 먹으면 저주를 푸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나는 삼시 세끼 요리를 만들며 우리 토깽이를 사육하기 시작했다.
“블레이크, 이것 좀 먹어봐요. 버섯계란말이에요.”
“응! 맛있다.”
“국도 드세요.”
“응!”
“깻잎 전이랑 채소볶음도 골고루 먹어야죠.”
“응.”
“후식은 우유푸딩이에요. 폐하께서 보내주신 우유로 만들었어요.”
왠지 모르겠지만 텐스테온은 요즘 들어 매일 황태자궁에 우유를 보내주었다. 설마 내가 블레이크가 커야 된다고 말한 것 때문은 아니겠지?
“전하, 간식은 뭐 드실래요?”
“앤시아, 나 배가 터질 것 같아.”
블레이크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빵빵해진 자신의 배를 만졌다.
우리 토끼, 저주가 풀리는 것도 좋지만 배가 터지면 안 되지!
“아이구, 우리 블레이크 똥배 됐네.”
“…….”
“그럼 저녁은 뭐 드실래요?”
“안 먹어….”
“왜요? 속이 안 좋으세요?”
“나 똥배 아닌데….”
그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
“지금 많이 먹어서 그런 거고. 많이 단단해졌는데…. 폐하만큼은 아니지만….”
“아!”
난 또 뭐라고.
나는 그의 배를 바라보았다. 많이 먹어서 조금 볼록해지긴 했지만, 확실히 3년 전과는 조금 달라진 것 같기도 했다.
어서 크라고 하긴 했지만, 막상 저렇게 자란 게 보이니까 왠지 서운하네.
할머니가 내가 너무 쑥쑥 자라서 서운하다고 했던 의미를 알 것 같다.
“블레이크가 크면 폐하만큼 멋있어질 거예요.”
“그럴까?”
“당연하죠. 누구 남편인데.”
“헤헤.”
소심하게 중얼거리던 블레이크가 언제 그랬냐는 듯 배시시 웃었다. 나도 자연스레 웃음이 나왔다.
블레이크가 웃을 때 가장 행복하다. 어느새 그렇게 되어버렸다.
***
-빛의 여신이 축복의 소녀를 보내었다. 축복의 소녀가 아스테릭에 빛을 선사하니, 아스테릭 제국이 건국한 지 천 년이 되는 해 여신의 저주가 풀릴 것이다.
리차드는 도미람이 건넨 보고서를 읽다가 결국 구겨버렸다.
황태자와 앤시아가 결혼한 이후부터 황태자의 저주가 풀릴 거라는 소문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텐스테온 황제는 성군이다. 그런 분의 아들이 악한 영혼일 리가 없다. 여신이 실수한 거고, 분명 저주를 풀어주실 거다.’
‘앤시아 황태자비는 여신이 보낸 사람이다.’
‘여신이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저주를 풀어주기 위해 황태자비를 보냈다.’
‘황태자비는 언제나 밝게 웃는다. 황태자가 정말 괴물이라면 황태자비가 저렇게 찬란하게 빛날 수 없다.’
‘황태자는 복이 많다. 훌륭한 아버지와 부인을 얻었다. 분명 저주도 풀릴 거다.’
‘앤시아가 황태자의 저주를 풀어줄 거다.’
‘텐스테온 폐하가 황태자를 남쪽으로 보내지 않은 이유가 있을 거다.’
‘제국이 건국한 지 천 년이 되는 해, 여신의 저주가 풀린다.’
‘저주받은 황태자가 황궁에 사는 데도 신관들이 항의하지 않는다. 황태자의 저주가 풀릴 걸 알기 때문이다.’
성군인 텐스테온의 아들이 저주받을 만큼 악한 영혼을 가졌을 리 없다는 막연한 믿음, 아름답고 유능한 황태자비에 대한 제국민의 애정.
황제의 가족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과 아스테릭 제국이 건국한 지 천 년이 된다는 시기가 맞물리며, 여신의 저주가 풀릴 거라는 소문이 급속도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처음 그런 소문을 들었을 때, 리차드는 가볍게 무시했다. 하나같이 멍청하고 터무니없는 말이었다.
황태자가 황궁에 머물 수 있는 건 텐스테온의 힘이 막강하기 때문이다.
강력한 황제의 권력 앞에서 신관과 귀족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아무리 황권이 강하다 한들 ‘저주의 계승자’와 관련된 문제다.
하지만 텐스테온은 줄타기를 잘했다. 신전과 귀족들이 들고 일어나기 애매한 선만을 밟으며 아들을 지켜냈다.
성군의 아들이니 악한 사람일 리 없다거나, 아버지와 부인을 잘 만났으니 저주도 풀릴 거라는 주장은 생각할 가치도 없었다.
천 년이라는 시간에 집착하는 인간들 또한 멍청하긴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제국력 993년이었다. 블레이크가 18살이 되는 해에는 1000년이 된다. 하지만 900년 대에서 1000년으로 바뀐다고 무슨 큰 변화가 있겠는가? 멍청한 숫자놀음일 뿐이다.
리차드는 그런 이야기를 듣자마자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어버렸다. 하지만 의외로 저게 근거랍시고 진지하게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평민뿐 아니라 귀족들도 그랬다.
리차드는 바보 같은 놈들이나 믿는 소문이라 생각하며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보다도 훨씬 멍청하고 덜떨어진 놈들이란 걸 깨달았을 즈음에는 이미 소문이 너무나도 많이 퍼져 있었다.
하지만 일단은 관망했다. 제국민들의 희망에서 비롯된 소문이었다. 진지한 얼굴로 헛소리를 늘어놓는 바보들을 보면 짜증이 치밀긴 했지만, 어차피 저주는 풀리지 않을 거고 블레이크가 죽으면 자연스레 없어질 이야기였다.
그런데 지난달부터 조짐이 이상했다.
중구난방으로 퍼져 있던 소문이 빠르게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음유시인들은 짜기라도 한 것처럼 황태자의 이야기를 시와 노래로 만들었다.
[태조 필립이 크나큰 죄를 지으니, 이에 빛의 여신은 분노하여 그의 후손에게 저주를 내렸다.
지난 천 년 동안 아스테릭 제국은 번영하였고 유례없는 풍요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대지에는 꽃이 피고, 제국민의 얼굴에는 웃음만이 가득하다.
빛의 여신은 제라실리온 황실에게 내린 저주를 거두기로 결심하고, 축복의 소녀를 블레이크 황태자에게 보냈다.
아스테릭 제국이 건국한 지 천 년이 되는 해, 축복의 소녀인 앤시아가 황태자의 저주를 풀 것이다.
여신의 사랑을 받은 황태자와 황태자비가 아스테릭 제국에 찬란한 영광을 가져다주리라.]
지역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긴 하지만 큰 틀은 위와 같았다.
리차드는 각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퍼진 소문을 모아오라고 도미람에게 명했고, 그 내용을 읽으며 한 가지 사실을 확신했다.
‘텐스테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러 소문들이 단기간에 세련되게 정돈되었다. 누가 봐도 블레이크와 앤시아를 모델로 한 동화나 소설이 유행처럼 퍼져나갔다.
저주에 걸린 황태자를 축복의 소녀가 구해주며, 사실은 괴물이라 손가락질받던 황태자 역시 여신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었다는 내용이었다.
“황제의 짓이다.”
리차드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자 도미람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빛의 축제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원래 이맘때가 되면 새로운 이야기가 유행처럼 번지지 않습니까?”
매년 6월이 되면, 빛의 여신이 필립에게 힘을 나누어 준 날을 기념하여 ‘빛의 축제’가 개최되었다.
건국제 다음으로 큰 행사로 보름 동안 온 나라가 축제 분위기로 활기를 띠었다. 지역 간의 교류도 활발했기 때문에 이 시기만 되면 일부 지역에서 유명하던 음식이나 패션, 문화 등이 전국으로 퍼져나가며 유행을 타기도 했다.
“아니. 텐스테온이다.”
단순히 소문이 퍼진 속도 때문에 의심하는 것이 아니었다.
3년 동안 전국에 퍼져 있던 소문과 이번 소문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필립 황제는 빛의 여신을 배신했고, 그 대가로 저주를 받게 되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대부분의 사람은 빛의 여신이 제국을 위해서 타락한 영혼이나 폭군의 씨앗에게 저주를 내렸다고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난 몇 년간 퍼졌던 소문들 역시 그 사실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소문에 변화가 생겼다.
[태조 필립이 크나큰 죄를 지으니, 이에 빛의 여신은 분노하여 그의 후손에게 저주를 내렸다.]
‘저주의 계승자의 잘못이 아니다. 필립 황제의 죄가 후손에게 내려온 것이다.’
이번 소문은 그 사실을 정확하게 명시하고 있었다.
이 소문을 퍼트린 자는 ‘여신의 저주’에 관한 진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현재 제국에서 저주의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였다.
황제와 대신관, 그리고 카실 공작이다. 리차드 역시 카실 공작의 집무실을 몰래 염탐하며 그 정보를 알게 되었다.
어쨌든 저 세 사람 중에서 아스테릭 제국의 초대 황제 ‘필립’의 명예를 훼손하면서까지 황태자를 지키려고 할 자는 오직 단 한 사람, ‘텐스테온’뿐이었다.
카실 공작은 말할 것도 없고, 신전 역시 여신의 선택을 받은 필립을 신성시해왔다. 저런 소문을 낼 리 없었다.
“황제가 어째서 그런 짓을 벌인 걸까요?”
“아들에 대한 사랑에 미쳐서 이성을 잃은 거지.”
황태자가 열흘 동안 앓은 이후 황제는 변했다.
아모리아궁에 자주 들르며 황태자와 시간을 보내기 시작한 거다. 카실 공작이 귀족들을 풀어 항의하자, 오히려 보란 듯이 매일 황태자궁에 방문했다.
그것도 모자라 황태자에게 선물을 보내고, 그를 가르친 평민 출신 기사에게 명검을 하사하기도 했다.
갑작스러운 황제의 변화에 귀족들은 오히려 입을 다물었다. 카실 공작의 지시에 따라 상소를 쓰던 자들도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언제나 냉철하고 이성적인 텐스테온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자, 황제가 정말로 여신의 저주를 풀 방법을 찾은 것 같다는 소문이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귀족이나 평민 할 것 없이 곧 황태자의 저주가 풀릴 거라며 난리였다. 덜떨어진 놈들.
“혹시 정말로 저주를 풀 방법을 찾은 것이 아닐까요?”
“그럴 리 없다. 그런 방법이 있다면 진작에 풀렸겠지.”
천 년 동안 수많은 황제가 저주를 풀기 노력했다. 하지만 결국 모두 실패했다. 이제 와서 저주가 풀릴 리 없다. 풀려서는 안 된다.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리차드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오히려 그 반대일지도.”
“그게 무슨 뜻이온지?”
“황태자의 여명이 얼마 남지 않은 거다.”
블레이크의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텐스테온은 마지막 순간만이라도 아들과 함께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황태자를 찾는 순간 주변이 반발할 게 뻔했다. 그러니 소문을 이용하여 저주가 곧 풀릴 것 같은 분위기를 조성한 거다.
그래, 그런 걸 거다.
여신의 저주를 푸는 방법을 갑자기 발견했다는 것보다 백배는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서둘러야겠구나.”
리차드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걸렸다.
블레이크가 죽는다면, 앤시아는 공주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남편이 황제가 되겠지. 그러니 하루빨리 앤시아를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
빛의 축제가 시작되었다. 빛의 여신이 필립에게 힘을 나눠준 날을 기념하며 벌어지는 빛의 축제는 장장 보름 동안 계속되었다.
“테리, 칠면조를 준비해줘. 칠면조 구이를 만들 거야.”
사실 나는 치킨파였지만, 축제 분위기를 내려면 역시 칠면조구이가 최고였다.
“오늘도 직접 요리를 만드시게요?”
“응. 애플파이도 만들 거야!”
“비 전하, 저도 일을 할 기회를 좀 주십시오.”
주방장인 테리가 장난스럽게 투덜거렸다.
나는 원래도 자주 요리를 하긴 했지만, 내가 만든 요리에 빛의 힘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안 이후부터는 한 끼도 거르지 않고 직접 식사를 준비했다.
“맞습니다. 비 전하, 요즘 매일 손수 요리를 만드시지 않았습니까? 칠면조구이는 저랑 테리가 만들 테니, 광장에라도 다녀오시는 게 어떠신지요? 볼거리가 아주 많답니다.”
멜리사도 상냥한 목소리로 외출을 권했다. 아무래도 내가 축제 기간 내내 황궁에만 머무니 마음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나는 사람 많은 건 별로야.”
솔직히 축제에 가보고 싶었다. 한국에 살 때도 현생에 치여서 축제 같은 것과 인연이 없기도 했고…. 하지만 블레이크를 놔두고 혼자 다녀올 정도로 궁금한 건 아니었다.
축제는 블레이크의 저주가 풀린 다음에 가도 늦지 않는다.
“멜리사야말로 한스랑 함께 다녀와.”
“네, 네? 한스 님은 왜요?!”
왜긴 왜야. 아모리아궁에서 두 사람이 사귀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하지만 저렇게 당황하는 걸 보면 아직도 자신들이 비밀 연애 중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모양이었다. 뭐, 아직 밝힐 생각이 없다면 지켜줘야지.
“테리도 형이랑 나갔다 와. 일 년에 한 번뿐인 빛의 축제잖아.”
“아휴, 저는 축제라면 지긋지긋합니다. 축제만 했다 하면 레스토랑에 손님들이 어찌나 많은지, 과로로 죽는 줄 알았습니다. 겨우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도 사람이 바글바글해서 옴짝달싹도 못 하고, 아주 끔찍합니다.”
테리는 레스토랑에서 일하던 시절을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자 멜리사가 테리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눈치를 줬다.
왜 저러지?
“끔찍하다니요. 비 전하, 그렇지 않아요. 축제가 얼마나 재밌는데요. 볼거리도 많고, 먹을거리도 많고, 분명히 좋은 추억이 될 거예요.”
“난 음식을 만드는 게 훨씬 재밌어.”
“역시 비 전하십니다! 요리는 하나의 예술이죠! 어린 나이신데도 그 진리를 깨달으시다니, 역시 비 전하는 훌륭하십…!”
“테리.”
멜리사가 다시 눈치를 주더니, 나에게 축제를 가라며 재차 권했다.
“비 전하, 요즘 들어 요리 아니면 업무만 보시잖아요. 황궁 무도회 준비 때문에 많이 바쁘셨고요. 잠시 기분 전환 삼아 나가시는 게 어떠세요?”
뭔가 이상했다. 나는 이 세계에 와서 단 한 번도 축제에 참가한 적이 없었다. 빛의 축제뿐 아니라 건국제나 꽃의 축제도 가지 않았다. 그때도 멜리사가 넌지시 권하기는 했지만, 내가 거절하면 포기했었는데….
“멜리사, 무슨 일 있어?”
“아, 아니요.”
그녀가 양손을 다급히 내저었다. 저러니 오히려 더 수상쩍다.
“솔직히 말해봐!”
***
한 시간 동안 추궁한 끝에 결국 멜리사로부터 진실을 들을 수 있었다.
블레이크가 멜리사를 찾아와서 나를 축제에 데려가 달라고 부탁을 했다고 한다. 내가 자신 때문에 축제도 포기하고 궁에만 머무는 것 같아서 마음이 쓰인 모양이다.
텐스테온도 그랬었다. 축제용 드레스와 구두를 사주겠다고 해서 열심히 거절했었지. 하지만 아버님도 아니고 블레이크까지 그렇게 마음을 쓰고 있는 줄은 몰랐다.
그날 밤, 나는 블레이크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블레이크, 저는 축제 싫어해요.”
“…왜?”
“사람이 너무 많아서 무섭잖아요. 사람으로 만든 장벽에 둘러싸여서 길을 잃어버릴 것 같아요.”
“길을 잃어…?”
블레이크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내가 길을 잃고 사라져버리는 상상을 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네. 아주 어렸을 때 광장에 갔다가 미아가 될 뻔한 적이 있거든요.”
이건 사실이었다. 다만 진짜 내 과거가 아니라 앤시아가 겪었던 일이다.
그녀의 친부인 길버트 벨라시안은 앤시아를 광장 한복판에 버리고 혼자 돌아가버린 적이 있었다. 정확히는 미아가 아니라 유기였지.
“다행히 치안대에서 도와줘서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요.”
앤시아가 집에 돌아가자 짜증스럽게 일그러지던 길버트의 표정이 아직도 생생했다.
내가 직접 겪은 일도 아니고, 앤시아의 기억을 들여다본 것뿐인데도 그날을 떠올리면 가슴이 아팠다.
“그래서 축제는 좀 무서워요.”
물론 가슴이 아픈 것과 무서운 건 다르다. 앤시아의 기억이 마음에 남았지만, 그 때문에 축제에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블레이크를 두고 나가기 싫다. 그를 배려하는 게 아니다. 혼자 나가봤자 블레이크 생각만 나고 재미도 없을 게 뻔하기 때문에 가지 않는 거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블레이크가 속상해할 테니, 다른 핑계를 댔다.
“미안…. 몰랐어.”
나는 빙그레 웃으며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블레이크가 미안할 게 뭐 있어요?”
“그래도….”
“혹시 블레이크는 축제에 가고 싶어요?”
“아니. 싫어.”
진심일까? 하지만 그가 가고 싶다고 해도 나는 보낼 수 없었다.
원작에서 블레이크가 축제를 구경한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블레이크의 목욕을 도와주던 하녀 제인이 같이 가자고 졸랐기 때문이다.
블레이크가 내켜 하지 않자, 그녀는 펑펑 눈물을 쏟는다.
그의 목욕을 도와준다는 이유로 왕따를 당해서 축제에 같이 갈 사람도 없다며 제인이 서럽게 울자, 죄책감을 느낀 블레이크는 결국 같이 축제에 가기로 한다.
그들은 몰래 황궁을 빠져나간다.
블레이크는 얼굴을 모두 덮는 커다란 가면을 쓰고 축제를 구경한다.
축제를 맞아 독특하게 꾸민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가면을 쓴 블레이크를 수상쩍게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블레이크는 자유를 느끼며 축제를 즐긴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않는다.
하녀 제인은 리차드가 심은 첩자였고, 그의 명령으로 블레이크를 축제에 데려온 것이었다.
그녀는 실수인 척 블레이크의 가면을 벗기고, 리차드가 미리 심어놓은 심복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괴물 황태자가 나타났다!’라며 소리를 지른다.
그러자 광장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블레이크를 발견하고, 비명을 지르고 욕설을 퍼붓는다. 심지어 돌을 던지는 사람도 있었다.
블레이크는 이 사건으로 마음에 큰 상처를 입는다.
게다가 저주의 계승자가 멋대로 궁을 빠져나와서 광장을 돌아다닌 일이 발각되며, 텐스테온마저 카실 공작 일파의 공격을 받게 된다.
텐스테온은 상처받은 아들을 위로해주고 싶었지만 그를 지키기 위해서 오히려 더 거리를 두고, 부자간의 오해는 더욱 깊어진다.
그렇게 블레이크는 절망과 외로움 속에 떨며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블레이크에게 상처만을 남겼던 하녀 제인은 진작에 쫓아냈다. 리차드의 계략도 막았다. 하지만 블레이크를 축제에 데려갈 수는 없었다.
만에 하나라도 정체를 들키게 된다면, 소설에서 벌어졌던 비극이 그대로 재현될 거다.
“나도 축제는 싫어. 나는 부인이랑 단둘이 있는 게 제일 좋은걸.”
그는 맑게 웃었다. 다행히 축제에 참가하지 못해서 슬퍼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저도요.”
우리는 손을 꼭 맞잡았다.
“블레이크가 저주에서 풀리고, 제가 미아가 되지 않을 만큼 키가 많이 크면, 우리 함께 축제를 보러 가요.”
“응. 꼭 같이 가는 거야.”
“네.”
나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이야.”
블레이크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그의 저주가 풀리면 함께 축제에 갈 거다.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네, 약속해요.”
하지만 약속하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결국 그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블레이크와 함께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때의 나는 앞으로 벌어질 미래를 알지 못한 채, 달콤한 행복에 젖어 있었다.
***
우리는 축제 기간 내내 함께 시간을 보냈다. 함께 책을 읽고, 공부도 하고, 요리도 하고.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워서 ‘빛의 축제’는 생각도 나지 않았다.
“블레이크, 반죽을 꼭꼭 눌러봐요.”
“응.”
블레이크가 나의 말에 따라 열심히 쿠키 반죽을 만들었다. 집중해서 그런지 빨간 입술이 부리처럼 툭 튀어나왔다.
아유, 귀여워라. 우리 블레이크는 그냥 움직이기만 해도 깜찍하네.
고사리 같은 손으로 반죽을 치대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데, 멜리사가 안으로 들어왔다.
“비 전하, 손님이 오셨습니다.”
“지금? 여기에?”
“네.”
누구지? 황태자비에게 알현을 청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보통 업무를 보는 세피아궁으로 방문했다. 아모리아궁으로 직접 오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누군데?”
멜리사는 블레이크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답했다.
“리차드 영식께서 오셨습니다.”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표정이 저절로 구겨졌다.
리차드가 여긴 왜 온 거지?
그의 어머니 무덤에서 만나고 난 뒤, 리차드는 다시 편지와 선물을 보내오기 시작했다. 뭔가 오해를 한 거 같길래 선물을 거절하고, 리차드가 빨리 좋은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다는 답장을 썼다.
어쨌든 리차드는 원작의 남자 주인공이었고, 그를 진심으로 흠모하는 여자들 또한 많았다. 그가 좋은 사람을 만나서 행복해진다면 나도 나쁠 건 없었다.
이후 편지가 끊겼길래 정신을 차린 줄 알았는데, 황태자궁까지 찾아오다니.
“지금은 바쁘니까 못 만난다고….”
리차드를 돌려보내려 하다가 멈칫했다. 잠깐만, 설마 원작에서처럼 블레이크를 함정에 빠트릴 생각인가?
“알았어.”
일단 무슨 속셈인지 알아야겠다.
“응접실로 모실까요?”
“아니. 밖에서 기다리라고 해.”
나와 블레이크의 공간에 리차드를 들이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뭘 믿고 그놈을 안에 들이겠는가? 도청 장치나 영상석, 흑마법 도구를 설치하면 어쩌려고. 황태자궁의 내부를 파악해서 암살자를 보낼지도 모른다. 괜한 걱정이 아니라,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
황태자궁 밖으로 나가자 리차드가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그러네요.”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오만한 표정이었다. 우울함에 잠겨 있는 것보다는 낫지만, 사람을 깔보는 듯한 특유의 분위기와 마주하니 그다지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황태자궁은 조금 독특한 문화가 있군요.”
“무슨 말씀인지?”
“손님을 밖에 세워두는 건 좋지 않죠.”
그는 자신을 응접실로 모시지 않은 것을 걸고넘어졌다. 저렇게 말하니 더 의심스럽네.
황태자궁에는 왜 들어가려고 하지? 무슨 계략을 꾸미려고?
“초대한 기억이 없는데요.”
“여전히 퉁명스러우시군요. 언제쯤 화가 풀리시려나.”
“네? 그게 무슨 말씀인지…?”
“그때는 제가 사정이 여의치 못해서 당신의 마음을 받아주지 못했지만, 오랜 기간 사과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슬슬 용서해 줄 때도 된 것 같은데요?”
“…….”
기가 막혀서 말문이 막혔다. 설마 아직도 내가 자기를 좋아한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는 건가? 이렇게까지 철벽을 쳤는데도?
“뭔가 착각하시는 거 같은데, 저는 그쪽을 특별하게 여긴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럼 특별해지도록 노력해야 했네요.”
면전에서 거부를 당했는데도 그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리차드는 평생 여자에게 인기가 많았으며, 앞으로도 많을 거라는 걸 알고 있다. 거절당한 적도 없고, 유혹에 실패한 적도 없겠지. 하지만 저 자신만만하고 매력적인 미소가 나에게는 짜증으로 다가왔다.
“제가 누군지 잊으신 거 같네요. 저, 결혼했습니다.”
“결혼이 무슨 장벽이 되는지 모르겠군요. 결혼해도 애인이나 정부 정도는 모두 만들지 않습니까?”
“본인의 사상을 일반화하지 마세요. 황제 폐하만 하셔도 정부나 애인을 두신 적이 없습니다.”
“폐하는 특별하신 분이죠. 저는 그저 평범한 사례를 말한 것뿐이랍니다.”
도무지 말이 안 통하는군.
“그래서 용건이 뭐죠?”
“함께 축제를 보러 가시지 않겠습니까?”
“축제요?”
그는 원작에서 블레이크를 축제로 끌고 간 뒤 함정에 빠트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블레이크가 아니라 나를 데려가려고? 무슨 속셈이지?
“네. 궁에 있는 것보다는 훨씬 즐거울 겁니다. 전에 주신 손수건에 대한 답례도 하고 싶고요.”
“괜찮아요. 답례를 바라고 한 행동이 아닙니다.”
“선물도 거절하셨지 않습니까? 이대로는 제 마음이 너무 무겁습니다. 부탁이니 함께 가주십시오.”
리차드가 능글맞던 표정을 지우고 정중하게 손을 뻗었다. 손수건 이야기를 꺼내자, 그의 과거가 떠오르며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
어쨌든 오늘은 블레이크를 노리고 온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싸늘한 표정을 풀었다. 하지만 경계심은 늦추지 않은 채 단호하게 말했다.
“정 답례를 하고 싶다면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에 대한 충심으로 갚으세요.”
“…….”
그는 침묵했다. 황제가 되겠다는 야심은 버리지 못하겠다는 건가?
“그리고 다시는 찾아오지 마십시오. 또한 앞으로 한 번만 더 오늘과 같이 무례한 발언을 하신다면 그때는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카실 영식.”
나는 딱 잘라 말하고는 궁 안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문 앞에 서 있던 블레이크가 보였다.
“블레이크.”
“반죽 다 해서, 부르러 왔어.”
“벌써 다 했어요?”
“응. 멜리사가 도와줬어.”
“그랬구나. 어서 들어가요.”
그의 어깨를 잡으며 주방으로 몸을 돌렸다.
“그런데 리차드 많이 변했다. 멋있어졌어.”
블레이크는 나와 리차드가 대화하는 걸 본 모양이다. 그가 축제에 가자고 한 것도 들었을까? 그렇지 않아도 내가 축제에 가지 않는 것 때문에 속상해하는 거 같은데, 괜히 신경을 쓸 거 같아서 걱정됐다.
“블레이크가 훨씬 멋있어요.”
“치이.”
“정말이에요. 블레이크가 저 나이쯤 되면 비교도 안 되게 멋있어질걸요.”
그의 눈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그러자 블레이크도 미소를 지었다.
“앤시아.”
“네?”
“고마워.”
나는 대답 대신 그의 손을 잡았다.
***
우리는 함께 만든 따끈한 쿠키를 가지고 방으로 올라갔다.
“블레이크, 아-.”
“아-.”
내가 쿠키를 주자, 블레이크가 입을 앙 벌리며 받아먹었다.
아이구, 우리 토끼 어쩜 저리 잘 먹을까? 그가 먹는 모습만 봐도 웃음이 절로 나왔다.
아침, 점심, 저녁, 간식, 야식까지 꼬박꼬박 챙겨 먹였더니, 볼살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나는 그의 손가락을 매만졌다. 손가락도 조금 통통해진 거 같다.
“어렸을 때 봤던 동화가 생각나네요.”
“무슨 동화?”
“옛날 옛적에 한 오누이가 산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어요. 다리도 아프고 배도 고팠죠. 집으로 돌아갈 방법도 잃어버렸고요. 그런데 그들 앞에 과자집이 나타났어요.”
“과자집?”
“네. 쿠키, 초콜릿, 사탕으로 만든 달콤한 집이요. 맛있겠죠?”
“음…. 벽에 붙어 있는 과자는 별로…. 비랑 눈도 맞고, 오래됐을 거 같아.”
블레이크는 가끔씩 냉철할 때가 있다.
“…하하. 그렇죠? 어쨌든 보기에는 아주 예쁜 과자집에 오누이는 현혹되고 말았죠. 하지만 그건 마녀의 집이었어요.”
“마녀한테 잡힌 거야?”
그의 표정이 돌연 심각해졌다. 역시 귀엽다니까.
“네. 마녀는 오누이의 오빠를 감옥에 가두고 매일매일 맛있는 음식을 먹였어요. 그리고 오빠의 손을 잡으며, 그가 얼마나 살이 통통하게 올랐는지 확인했죠.”
“왜?”
“잡아먹으려고요.”
나는 손톱을 한껏 세우며 최대한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블레이크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후다닥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렇게 무서웠나?
“…블레이크?”
새하얀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가서 오들오들 떠는 블레이크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그가 이불 사이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앤시아, 나 잡아먹을 거야?”
“네?”
“나를 잡아먹으려고 살찌운 거야?”
“하핫. 뭐라고요?”
나는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러자 블레이크가 흠칫 떨면서도 내 품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새초롬한 눈동자로 나를 올려봤다.
“그래서 매일매일 나한테 맛있는 요리를 해준 거야? 나를 잡아먹으려고?”
이상하다. 나는 분명 동화 이야기에 겁먹은 순진한 토끼를 달래주려고 온 건데, 왜 이렇게 요망해 보이지?
“아니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제가 우리 토끼를 왜 잡아먹어요.”
고개를 거세게 저었다. 그러자 블레이크의 눈매가 처연하게 쳐졌다.
“앤시아, 나 안 잡아먹을 거야?”
“네.”
“왜? 나 요즘 포동포동해졌는데.”
붉은 눈동자가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저는 마녀가 아니니까요. 우리 블레이크를 꼭 지켜줄 거예요.”
“…….”
“그러니까 겁먹지 마세요.”
나는 동화 때문에 겁을 먹었을 블레이크를 위로해 주었다. 그러자 잠시 침묵하던 블레이크 환하게 웃었다.
“응. 나도 부인을 지켜줄 거야.”
그가 이불에서 나와 나를 꼭 껴안았다. 우리 블레이크 착하기도 하지.
역시 아까 보았던 요망한 눈빛은 분명 내 착각일 거다.
***
빛의 여신이 필립에게 힘을 하사한 날을 기념하며, 황궁에서 큰 무도회가 열렸다.
신관과 귀족, 아카데미 등 각계의 대표자들이 여신에게 감사하고 필립을 찬양하는 축사를 읽었다.
필립을 칭송하는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괜히 짜증이 났다.
누구 때문에 저주가 내린 건데. 저주의 원흉은 영웅이라 찬양받고 그로 인해 저주를 받게 된 피해자는 경멸받는 이 상황에 분노가 치밀었다.
지루한 축사 시간이 끝나고 본격적인 무도회가 시작됐다.
텐스테온은 카실 공작, 콜린과 함께 무도회장을 떠났고, 나는 댄스홀을 지나 구석으로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사람들이 쉴 새 없이 말을 건네왔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원래 인기가 많은 편이긴 하지만 오늘은 도가 지나쳤다. 특히 남자들이 연신 춤을 청해왔다.
“비 전하, 저에게 영광스러운 첫 춤을 허락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죄송하지만, 오늘은 몸이 좋지 않네요.”
“그래도 한 번만….”
“브론 영식, 비 전하께서 춤을 추지 않는 걸 모르십니까?”
“그래요. 너무 무례하시네요.”
댄스 요청이 쇄도하자, 샤르딘 백작 부인을 비롯해서 나와 친하게 지내던 귀부인이나 영애들이 대신 거절해 주었다.
리차드가 웬일로 가만히 있나 했더니 다른 사람들이 난리네.
어서 가서 블레이크를 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기 시작한 와중, 한 남자가 인파를 거칠게 뚫으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색이 바랜 듯한 은발과 죽은 생선처럼 퀭한 눈동자, 코를 찌르는 지독한 술과 구리구리한 마약 냄새, 그는 바로 리차드의 이복형인 프랭크였다.
“한 곡 추지.”
그는 거만한 자세로 나에게 명령했다. 예법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프랭크는 황제의 조카이자 현시점에서 가장 유력한 차기 황제 후보였기 때문에 아무도 그의 무례를 지적하지 못했다.
모두들 어찌하지 못하고 눈치만 살피는 상황 속에서 나는 프랭크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사양하죠.”
“뭐야!”
프랭크의 얼굴이 와그작 구겨졌다. 먼저 결례를 범한 주제에 단칼에 거절당하자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감히 내 말을 거역하다니! 몰락한 백작 가문 출신이라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건가?”
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아무리 그가 유력한 차기 황제 후보라고는 하나, 현재 신분은 황태자비가 더 위였다. 프랭크의 무례한 발언에 모두들 경악했지만, 그는 입을 멈추지 않았다.
“등신도 아니고, 괴물의 저주가 풀린다는 멍청한 소문을 믿는 건 아니겠지? 멍청이들! 다음 황제는 나라고! 내가 황제야! 이 프랭크 님이 황제라고! 네가 공주가 될 거라고 우쭐한 모양인데, 네 남편이 황제라면, 그건 바로 네가 내 거가 된다는 거야! 어차피 나랑 결혼할 건데, 빼기는!”
그는 횡설수설하며 소리쳤다. 말의 내용이나 발음도 엉망이었고, 제대로 서 있는 것조차 안 돼서 몸이 휘청거렸다.
선을 아득히 뛰어넘는 막말이 연신 쏟아지니,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프랭크는 거만한 인간이었다. 카실 공작은 자신을 쏙 빼닮은 프랭크를 아꼈고, 그가 차기 황제라며 애지중지한다. 프랭크 역시 스스로를 황제라 생각하며 안하무인으로 지냈다. 하지만 고위 신관과 귀족들이 모인 무도회장에서 저런 실수를 할 정도로 경솔하진 않았다.
이 전에도 무도회장에서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지만, 기본적인 예의는 지켰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저렇게 폭주하는 건 아무래도 이상했다.
설마….
나는 리차드를 바라보았다. 모두가 경악으로 물든 상황에서 그는 홀로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저 자식 짓이구나. 일부러 독한 술을 먹여서 프랭크가 난리를 피우도록 유도한 것이다.
“프랭크, 이러지 말아요.”
그때 프랭크의 약혼녀인 웨스틴 후작 영애가 나서서 그를 말렸지만, 프랭크는 거칠게 뿌리쳤다.
“이게 감히 어딜 만져! 못생긴 걸 받아주니까 끝도 없이 기어올라! 후작 가문이 아니면 누가 너 같은 걸 거들떠보기나 했을 줄 알아? 아, 이제는 네 가문도 필요 없으니까 재산만 넘기고 꺼져!”
“프랭크….”
충격을 받은 웨스틴 후작 영애가 그대로 혼절했다. 무도회장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리차드의 입가에 걸린 미소도 더욱더 짙어졌다.
나는 황태자비로서 이 사태를 가만히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카실 영식, 교육은 그쪽이 받아야겠군요. 많이 취한 것 같으니 오늘은 일단 물러가세요. 그대가 범한 무례는 차후에 묻도록 하죠.”
기사를 부르기 위해 손을 드는데, 프랭크가 나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네가 뭔데 내 죄를 물어!”
“무슨 짓입니까! 이거 놓으세요!”
“나는 아스테릭의 황제가 될 몸이야! 내가 황제라고! 내가 이 제국의 황제야! 그 괴물은 어차피 뒤질 거고 너는 내 차지가… 아악!”
프랭크가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프랭크는 고래고래 악을 쓰며, 자신을 쓰러트린 남자를 바라보았다.
“누구야!! 어떤 새끼가 감히 이 몸을…! …폐, 폐하.”
텐스테온이 카실을 내려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서 서늘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아버님….”
“앤시아. 괜찮으냐? 어디 다친 곳은 없니?”
그는 나를 꽉 끌어안으며 다독여주었다.
“저는 괜찮아요.”
그때 프랭크가 다급히 소리쳤다.
“폐하, 그것이 아니라…. 오, 오해입니다!”
그는 비교적 또렷한 발음으로 말했다. 술기운을 빌어서 그렇게나 패악을 떨더니, 진짜 황제를 만나니 제정신이 돌아온 모양이다.
“그러니까 황태자비가 먼저 저를 유혹…!”
프랭크는 말을 맺지 못했다. 그의 몸이 다시 바닥을 나뒹굴었기 때문이다. 텐스테온이 그를 발로 걷어차더니, 검집으로 강하게 찍어 눌렀다.
“자, 잘못…!”
이제 와 잘못을 비는 프랭크의 목에 서슬 퍼런 칼날이 겨눠졌다.
드넓은 무도회장에 적막이 찾아왔다. 하지만 황제의 살기에 압도당하여 아무도 말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프랭크는 모두의 앞에서 황태자를 괴물이라 모욕하며 곧 죽을 거라 하였다. 물론 이는 다른 귀족들도 늘 하는 말이었지만, 어찌 되었든 블레이크는 제국의 황태자였다.
그가 저주의 계승자라고 할지라도 공식적인 자리에서, 그것도 황제와 황태자비 앞에서는 절대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게다가 프랭크는 황태자비를 무시하고 희롱하는 것도 모자라서, 스스로를 제국의 황제라 칭하였다. 이는 역심을 품고 있다고 봐도 무방한 발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프랭크의 편을 들 귀족은 아무도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자신들마저 반역죄로 몰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오직 한 사람이 그의 편을 들고 나섰다.
“폐하, 멈추십시오!”
카실 공작이 텐스테온을 막아섰다.
“프랭크는 폐하의 조카입니다! 어린 조카가 취중에 작은 실수를 했다고 칼을 뽑아 들다니요? 어찌 이리 흉악하십니까?”
“사소한 실수…?”
텐스테온의 말끝이 싸늘하게 튀었다. 모두들 숨을 죽였지만, 카실 공작은 당당했다.
“네! 사내가 술을 마시면 실수를 할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프랭크가 누굴 닮아서 저렇게 거만하고 멍청한지 알 수 있었다.
“각하, 그만하시지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읽은 리차드가 카실 공작을 말렸지만, 그는 오히려 더 크게 소리쳤다.
“게다가 표현이 강해서 그렇지 엄밀히 따지면 틀린 말도 없지 않습니까?”
“그렇군.”
“깨달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아무리 황제 폐하라 하셔도 이 일은 반드시 사과하셔야 합니다.”
카실 공작이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올렸다. 그는 자신이 텐스테온을 이겼다는 승리감에 한껏 고취되어 있었다. 프랭크도 금세 기세등등해졌다.
“마, 맞아요! 사과를 받아야겠습니다!”
텐스테온은 그런 두 사람을 싸늘하게 내려보았다.
“잘 알았다. 이 머저리가 너를 보고 배운 것이구나.”
“머저리요?! 지금 머저리라…!”
카실 공작은 항의하려 했지만, 텐스테온은 그를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카실 공작과 그의 장남을 하옥하라. 반역죄를 물을 것이다.”
“바, 반역이요? 형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카실 공작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는 아직도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를 붙잡고 상황을 설명해 줄 사람은 없었다. 카실 공작과 프랭크는 곧장 기사들에게 끌려 나갔다. 리차드도 이런 상황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그대로 굳어 있었다.
텐스테온은 서늘한 살기를 거두고 나에게 다가왔다.
“많이 놀랐겠구나. 미안하다.”
“아니에요.”
그는 나를 다시 안아주었다. 나도 텐스테온을 꼭 안았다. 나보다도 텐스테온이 더 놀란 것 같아서 위로해주고 싶었다.
***
프랭크가 난동을 피워준 덕분에 좋은 점도 하나 있었다.
밤새도록 이어질 예정이었던 무도회가 일찍 막을 내려 나는 곧장 아모리아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앤시아,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우리 신랑이 보고 싶어서요.”
“무슨 일 있었어?”
블레이크는 눈치가 빠르다. 일부러 더 밝게 말했는데도 금세 알아차렸다.
“실은 블레이크랑 같이 불꽃놀이가 보고 싶어서 일찍 빠져나왔어요.”
“정말?”
“네.”
빛의 축제 마지막 날에는 불꽃놀이가 펼쳐진다. 황태자궁에서도 보일 만큼 큰 행사였다.
물론 광장에서 보는 것보다는 못하겠지만, 블레이크와 함께 구경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좋았다.
“얼른 올라가요.”
“응.”
우리는 아모리아궁의 꼭대기 층에 있는 작은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자주 사용하는 공간은 아니었지만 멜리사가 미리 청소를 해주었기 때문에 무척 깨끗했다.
“멜리사랑 한스는 광장에 있겠지?”
“네. 지금쯤 광장에서 불꽃놀이를 기다리고 있을걸요.”
나는 오늘 멜리사와 한스에게 휴가를 주었다. 괜찮다면서 거듭 사양하는 그들의 등을 억지로 떠밀다시피 하며 밖으로 보냈다.
이쯤 되면 비밀 연애하는 걸 포기하고 함께 데이트를 즐기고 있겠지.
“우리도 그럴 수 있겠지?”
“물론이죠. 광장의 맨 앞에서 구경해요.”
“그러자.”
우리는 서로의 손을 단단히 맞잡았다. 그 순간 커다란 소리와 함께 불꽃이 터졌다.
다락방 창문 너머로 아름다운 불꽃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예뻐.”
“네. 아름다워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불꽃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부드러운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블레이크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의 얼굴과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는 한 박자 늦게 상황을 깨달았다.
“…뽀뽀.”
뽀뽀했다. 블레이크가 나에게 뽀뽀를 한 것이다. 그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앤시아, 사랑해.”
그의 목소리가 커다란 불꽃 소리에 섞여 사라졌다. 하지만 아무리 작더라도 블레이크의 말을 내가 놓칠 리 없었다.
“뭐라고요?”
그러나 나는 못 들은 척 시치미를 뗐다.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놀리고 싶어졌다.
“…한다고.”
“안 들려요.”
“…한다니까.”
“좀 더 크게 말해야죠.”
“아이, 참!”
그의 얼굴은 점점 붉어지더니 새빨간 사과처럼 변해버렸다.
이러다가 우리 신랑 울겠네. 이제 그만 놀려야겠다, 라고 생각하던 그때 다시 입술이 포개졌다.
“사랑해. 앤시아.”
블레이크는 수줍어하면서도 또박또박 진심을 담아서 말을 전했다. 그 모습을 보니 더는 놀릴 수가 없었다.
나도 장난기를 버리고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저도요. 블레이크를 만나게 돼서 행복해요.”
이 세계에 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를 만날 수 있게 되었으니까. 다른 걸 모두 떠나서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우리는 아름다운 불꽃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손을 꼭 잡은 채 잠이 들었다.
***
꿈을 꿨다.
수풀이 우거진 숲에서 블레이크와 내가 함께 걷고 있었다. 달빛에 반짝이는 검은 머리카락, 높은 콧대, 유려하면서도 날카로운 턱선, 새하얀 목덜미, 저주가 완전히 풀린 블레이크는 멋진 남자로 성장해 있었다.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저주에서 벗어난 그의 얼굴을 더 자세히 바라보고 싶은데 왠지 부끄러웠다.
“……나를 봐.”
“…….”
“어서.”
그가 이끄는 대로 고개를 돌렸다.
***
잠에서 깨어났을 때,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꿈속에서 블레이크는 저주에서 벗어나 아름다운 청년이 되어 있었다. 머리색이 검었지만, 그는 분명 블레이크였다.
아직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의 일인데, 아련한 추억에 젖어 든 것처럼 가슴이 먹먹했다.
“앤시아, 울어?”
블레이크가 손을 뻗어서 나의 얼굴을 매만졌다.
“아니에요. 안 울어요. 저 때문에 깼….”
다급히 고개를 숙이며 눈물을 훔치던 나는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그의 손이 매끄러웠다. 저주의 문장이 살갗을 파고들어 늘 거칠었던 블레이크의 왼손이 솜털처럼 부드러웠다.
나는 깜짝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왼쪽 얼굴을 덮고 있던 저주가 사라져 있었다.
“블레이크….”
“응?”
이제 막 잠에서 깬 그는 아직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블레이크, 저주가 풀렸어요.”
“뭐?”
블레이크는 그제야 티끌 하나 없는 자신의 손을 확인했다. 새하얀 손을 보는 것만으로도 실감이 나지 않는지 그가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없어.”
“네. 없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저주가 사라졌어요!”
그는 창가에 얼굴을 비춰보며 저주의 문장이 사라진 걸 재차 확인했다.
“정말로 없는 거지. 내가 잘못 본 거 아니지?”
그는 아무래도 믿기지 않는 것 같았다.
“잠깐만요. 제가 거울을 가져올게요!”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블레이크가 나를 와락 껴안았다.
“블레이크….”
“앤시아, 나…. 나…. 저주가 풀렸, 으아앙. 아앙. 저주가 풀렸어.”
그가 울음을 터트렸다. 블레이크가 자주 울긴 했지만 이렇게 갓난아이처럼 우는 건 처음 보았다.
지금까지 그를 둘러싼 모든 고통에서 해방된 기쁨의 눈물이었다.
나는 블레이크를 안아주었다.
“맞아요. 풀렸어요.”
“으아앙…. 앤시아, 나, 나, 살 수 있어. 허어엉. 흐으.”
블레이크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의 아픔을 조금은 치유해주었을 거라 믿었다. 참으로 오만했다.
블레이크는 초연한 태도와 밝은 미소 뒤에 숨겨두었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겨우 터트렸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미안하고 또 미안해서 나도 눈물이 터져 나왔다.
“나, 앤시아랑 함께 있을 수 있어. 계속…. 계속…. 이제 계속….”
그는 저주와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된 것보다도 나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이런 블레이크를 두고 떠날 생각을 했다니. 참으로 이기적이었다. 나는 힘을 주어 그를 끌어안았다.
“맞아요. 우리는 계속 함께 있을 거예요. 절대 떨어지지 않아요.”
우리는 서로를 얼싸안고 한참이나 목놓아 울었다.
***
다락방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놀란 멜리사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앤시아와 블레이크는 서로를 끌어안은 채 울고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멜리사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젯밤 그녀는 앤시아의 배려 덕분에 어제 한스와 함께 빛의 축제를 보러 갈 수 있었다. 교제를 시작한 지는 1년 정도 지났지만, 황궁 밖에서 데이트하는 건 처음이었다.
“한스, 잠깐만요. 저 노래를 좀 들어보세요.”
“황태자 전하에 관한 노래군요.”
빛의 여신이 보내준 축복의 소녀가 황태자의 오랜 저주를 풀어준다는 가사의 노래였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동화책이나 신문, 광장을 채운 사람들도 모두 황태자의 저주가 풀릴 거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정말로 저주가 풀었으면 좋겠네요.”
“꼭 그렇게 될 겁니다. 비 전하께서는 빛의 계승자시지 않습니까? 분명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
두 사람은 하늘을 수놓은 불꽃을 보며 블레이크가 저주가 풀리길 빌었다. 황궁 밖에서도 그들의 대화는 황태자와 황태자비에 대한 내용으로 가득했다.
궁으로 돌아온 멜리사와 한스는 뒤늦게 프랭크가 소란을 피웠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다. 괜히 외출을 한 것 같아서 후회했지만, 여느 때와 다름없이 손을 꼭 잡고 주무시는 두 분의 모습을 보고 안심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멜리사는 무슨 일인지 확인하려다가, 블레이크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블레이크의 얼굴이 깨끗했다. 새까만 저주의 문장이 사라져 있었다. 저주가 풀렸다.
음유시인의 노래처럼 앤시아가 저주를 푼 것이다.
“전하! 무슨 일이십…!”
“쉿!”
멜리사는 자신처럼 울음소리를 듣고 놀라서 뛰어온 한스에게 조용히 하라고 신호를 보냈다.
어리둥절하던 한스의 눈이 이내 크게 떠졌다.
“전하의 저주가…!”
“네. 풀렸습니다.”
멜리사는 온화하게 웃으며 한스의 손을 잡아당겼다.
“나가요, 한스. 두 분이 오붓하게 기뻐할 시간을 드려야죠.”
***
블레이크의 저주가 풀렸다는 소식을 들은 텐스테온은 한달음에 달려왔다.
“블레이크!”
그는 커다란 손으로 블레이크의 얼굴을 움켜잡았다.
“우웅…!”
밀가루 반죽처럼 볼살이 눌려버린 블레이크가 바둥거렸지만 텐스테온은 다소 투박한 손길로 그의 얼굴을 꼼꼼히 살폈다.
“정말로 풀렸구나. 저주가 풀렸어….”
“네. 푸려어요. 앤띠아가 푸러줘떠요. 그어니까 떼하, 이거 똠…. (풀렸어요. 앤시아가 풀어줬어요. 그러니까 폐하, 이것 좀….)”
양쪽으로 얼굴이 눌려버린 블레이크가 부정확한 발음으로 청했다.
아침에 펑펑 울었을 때와 달리 침착한 어조였다. (발음은 그러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는 아버지의 손길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텐스테온은 오히려 블레이크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됐다. 됐어. 아픈 건 어떠니? 괜찮은 거니?”
“괜찮…. 폐하. 수, 숨 막혀요.”
“아, 미안하구나.”
황제가 화들짝 놀라며 블레이크에게서 떨어졌다. 하지만 이내 다시 그의 얼굴을 쓸어내리며 상태를 확인했다.
블레이크의 한마디에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을 보니, 그도 영락없는 아버지였다.
“앤시아, 네가 블레이크의 저주를 풀어주었구나. 고맙다. 정말 고마워.”
그는 나의 손을 꼭 잡았다.
“아니에요. 제가 뭘요.”
“폐하 말이 맞아. 앤시아가 저주를 푼 거야!”
블레이크도 나의 반대 손을 잡았다.
여신의 저주가 풀렸다. 이게 정말로 현실일까? 혹시 꿈은 아닐까?
하지만 블레이크의 손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와 부드러운 감촉은 이 순간이 현실임을 깨닫게 해주었다.
“부인, 고마워.”
“고맙다. 앤시아.”
블레이크와 텐스테온은 나에게 고맙다고 말해주었다. 하지만 그건 내가 해야 할 말이었다.
“저야말로 고마워요.”
블레이크의 저주가 풀려서, 그가 건강해져서 너무 고마웠다. 나는 여신의 저주가 풀린 것에 감사하며 이 행복을 가슴에 새겼다.
***
리차드는 간수를 매수하여 겨우 감옥 안으로 잠입할 수 있었다.
“다 네놈 때문이다! 프랭크가 술을 마시면 말렸어야지!”
카실 공작은 리차드를 보자마자 소리를 질렀다. 주변에 물건이 있었다면 집어 던졌겠지만, 텅 빈 감옥이라 그럴 수 없었다.
무도회장에서 사고를 친 건 프랭크였다. 하지만 아놀드 카실은 감옥에 갇힌 상황에서조차 리차드 탓을 했다.
리차드는 어떤 변명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설마 형님께서 그렇게까지 분별이 없을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일은 명백히 자신의 실책이었다. 그러니 억울함도 덜했다.
쏟아지는 상소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오히려 보란 듯이 황태자를 찾았다.
거기에 황태자의 저주가 풀릴 거라는 소문이 급속도로 퍼지자, 아놀드 카실은 불안에 떨었다.
하지만 프랭크는 태평했다.
“어차피 죽을 놈을 뭐하러 신경을 쓰나 몰라. 결국 벨라시안의 장녀만 내 걸로 만들면 된다는 거잖아.”
황태자가 죽으면, 앤시아를 공주로 삼고 그녀의 남편이 차기 황제가 될 거라는 소문이 사교계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소문 이후 처음으로 열리는 황실 무도회였다.
귀족가의 자제들은 앤시아의 눈에 들기 위해 안달이 나 있었다. 우습게도 그들은 황태자의 저주가 풀린다는 소문과 앤시아가 공주가 될 거라는 소문을 동시에 믿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프랭크는 자신만만했다.
“평생 괴물한테 시달리던 계집의 마음을 얻는 게 뭐가 어렵다고. 이 프랭크 님이 눈길만 줘도 감격에 겨워할 텐데. 그래도 앤시아 그게 얼굴은 반반해서 다행이야. 드디어 웨스틴 그 못생긴 년과도 작별이군.”
프랭크는 웨스틴 후작 영애와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카실 공작이 고심 끝에 고른 혼처였다.
프랭크는 그녀의 외모에 불만을 품었지만, 웨스틴 후작 가문의 재력은 제국에서도 손에 꼽히는 수준이었고, 권력도 막강했다. 아무런 이유 없이 일방적으로 파혼 선언을 할 만큼 만만한 상대가 결코 아니었다.
약혼이 성사되기 전이라면 모를까, 이미 결혼식 날짜까지 정해진 이상 파혼은 불가능했다.
리차드는 현실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는 이복형을 보며 짜증을 삼켰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달리했다. 프랭크가 멍청하게 날뛰어준다면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었다.
리차드는 프랭크가 약과 술에 취하도록 유도했다. 그렇다고 더러운 술수를 쓴 건 아니다. 다만 말리지 않았을 뿐이다.
프랭크는 도박, 술, 약에 중독되어 있었다. 그런 프랭크를 자제시키고 늦지 않도록 황궁 무도회에 데려가는 것이 리차드의 임무였지만, 그날은 일부러 방조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만취한 프랭크를 무도회에 데려갔다.
마침 황제와 카실 공작은 무도회장을 비운 상태였다. 카실 공작은 황제가 황태자를 자주 찾는 것을 따지겠다며 이를 갈고 있었으니, 지금쯤 항의 중일 거다.
“감히 내 말을 거역하다니! 몰락한 백작 가문 출신이라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건가?”
리차드가 예상한 대로 프랭크는 사고를 치기 시작했다. 원래도 성격이 좋지 않았지만, 술에 취하면 특히 개가 되었다.
프랭크가 모두의 앞에서 자신의 본성을 드러내며 화려하게 자멸하고 나면, 천천히 앤시아를 구해주고 그녀의 환심을 사야지.
모든 것이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프랭크는 모두를 경악에 빠트리며 멍청한 발언을 연신 쏟아냈다. 웨스틴 후작 영애를 내팽개치는 것까지 아주 완벽했다.
‘이쯤 하면 되겠군.’
리차드가 이제 슬슬 상황을 정리하려고 하는데, 엄청난 변수가 등장했다.
텐스테온이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황제는 단숨에 프랭크를 제압했다.
리차드는 잠시 당황했지만, 나쁘지 않은 전개였다. 비록 앤시아에게 점수를 딸 기회는 놓쳤지만, 이번 기회에 프랭크를 차기 황제 후보에서 완전히 탈락시킬 수 있었다.
그가 자칫하면 모반을 꾀한다고 여겨질 수도 있는 발언을 하긴 했지만, 프랭크 혼자만의 생각이라 주장하며 가문에서 축출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두 번째 변수가 등장했다.
“폐하, 멈추십시오!”
카실 공작가에는 프랭크 말고도 바보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아놀드 카실이었다.
그는 황태자비를 희롱하고 황실을 능멸한 데다가 모반까지 의심할 수 있는 아들의 발언을 두둔했다. 그것도 모자라서 황제에게 사과하라 소리치기까지 했다.
카실 공작이 자신을 쏙 빼닮은 프랭크를 애지중지하는 건 알고 있지만 저렇게까지 멍청할 줄이야. 그리고 텐스테온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카실 공작과 그의 장남을 하옥하라. 반역죄를 물을 것이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끔찍한 실수였다. 하지만 카실 공작은 기사들에게 끌려가는 동안에도 자신의 실수를 깨닫지 못했다.
그리고 하루가 지난 지금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분별이 없다니! 아직도 반성하지 못하고 프랭크의 탓을 하는 것이냐!”
카실 공작은 고래고래 소리쳤다. 리차드는 자신이 사람 보는 눈이 없음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그는 프랭크 카실이 이 제국에서 가장 멍청한 인간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의 아비인 아놀드 카실을 따라갈 수는 없었다.
리차드는 분노를 삭이며 상황을 설명했다.
“각하, 지금은 형님을 걱정하실 때가 아닙니다. 각하께서는 지금 반역을 도모한 혐의를 받고 계십니다.”
“소심하기는! 사내놈이 치기 어린 말을 좀 한 거 가지고 반역은 무슨 반역이냐? 그 정도 배짱으로 프랭크를 보좌할 수 있겠느냐?”
카실 공작은 리차드를 한심해하며 혀를 끌끌 찼다. 그는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오나 황제가….”
카실은 리차드의 말을 끊으며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황제가 뭐? 형님이 화가 난들 뭘 어쩌겠느냐? 우리 프랭크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지 않느냐? 그 괴물 놈은 저주에 걸렸고 얼마 살지도 못한다. 나와 프랭크에게 황위를 물려주기 싫으니 괜히 저러는 거다. 망신을 주고 싶어서 트집을 잡은 거야!”
텐스테온은 신중한 인간이었다. 그런 황제의 입에서 ‘반역’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제국의 귀족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보란 듯이 아놀드와 프랭크를 감옥에 가두었다. 단순히 황태자비가 희롱당하는 걸 보고 분노하여 홧김에 저지른 일이 아니었다.
물론 카실 부자의 발언이 경솔하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반역죄를 물을 수 없었다. 지은 죄에 비해 과한 형벌은 오히려 역풍을 불러일으킬 터였다.
황제가 이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텐스테온은 카실 공작이 반역을 모의했다고 말했다.
리차드는 텐스테온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무도회에서의 일은 구실에 불과합니다. 황제는 지금 우리를 노리고 있습니다.”
“그까짓 말실수 가지고.”
“발언이 문제가 아닙니다. 황제는 우리에게 선전 포고를 한 겁니다.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황제는 이제부터 카실 공작가가 저지른 죄를 파헤치기 시작할 거다.
그들은 황궁에 첩자를 심었고, 블레이크를 폐위하지 않는 황제를 비난하고, 황태자를 조롱하는 여론을 조장하기도 했었다.
게다가 아놀드 카실은 과거에 텐스테온의 암살을 모의했던 적이 있었다.
카실 공작은 블레이크가 저주에 걸리며 사교계가 충격에 빠지자, 그 여세를 몰아 텐스테온을 죽이고 자기가 황제가 되길 꿈꿨었다. 하지만 텐스테온은 빠르게 상황을 수습했고, 아놀드 카실은 어쩔 수 없이 계획을 포기했다.
그것 말고도 수면 위로 드러나서는 안 되는 일들이 무수히 많았다. 하지만 리차드가 이렇게까지 말했음에도 카실 공작은 태연했다.
“어차피 증거도 없을 텐데 무슨 상관이냐? 네놈이 책임지고 없애지 않았느냐?”
아놀드 카실은 공작 가문의 모든 뒤처리를 리차드에게 맡겼다.
“없앴죠. 하지만 아주 중요한 증인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텐스테온은 카실 공작을 황궁 서쪽의 감옥에 가두고, 프랭크 카실은 동쪽의 지하 감옥으로 보냈다. 동쪽 감옥은 중죄인을 처벌하는 곳으로, 고문 도구가 즐비하고 시설도 열악했다.
리차드는 프랭크를 만나려고 했지만, 제2 기사단이 감옥을 지키고 있어서 접근할 수 없었다.
프랭크는 겁이 많았다. 동쪽 감옥에 갇혔다는 사실만으로도 지레 겁을 먹고 자신이 아는 모든 사실을 쏟아낼 것이다.
리차드가 한 말의 의미를 알아챈 카실 공작은 분노했다.
“프랭크가 우리를 배신할 거란 말이냐!”
“이미 배신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이라도 그와 선을 그어야 합니다. 모든 일을 프랭크 혼자만의 책임으로 돌리고, 각하께서는 빠져나오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공작가가 멸문….”
리차드는 말을 맺을 수 없었다. 카실 공작이 그의 뺨을 내려친 것이다.
“간악한 놈! 갑자기 호들갑을 떨어대서 수상쩍다 했더니, 프랭크를 없애고 네가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게냐!”
“그런 것이 아니옵니다. 저는 단지 가문을 지키기 위해 충언을 드린 것입니다.”
리차드의 말은 진심이었다. 언젠가는 프랭크를 없앨 계획이긴 했지만, 지금 당장은 공작가가 더 중요했다.
그는 공작과 그 가족을 증오했지만, 카실 공작가의 힘과 권력은 필요했다. 그의 목적은 카실 공작 가문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것이었다. 이대로 몰락해 버리면 곤란했다.
“충언? 프랭크는 장차 황제가 될 아이다! 그 아이보다 귀한 것이 어디 있느냐!”
카실 공작은 윽박을 질러댔다.
“두고 봐라! 어차피 귀족들은 내 편을 들게 되어 있다. 텐스테온의 권력이 강하다 한들 후계자가 없지 않으냐? 지금쯤이면 나와 카실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상소가 산처럼 쌓였을 것이다! 웨스틴 후작이 자기 사위를 지키기 위해서 귀족들을 불러 모았겠지.”
딸이 그 망신을 당했는데, 웨스틴 후작이 과연 움직여줄까? 리차드는 회의적이었지만, 아놀드 카실은 오히려 분통을 터트렸다.
“여기서 나가기만 해 봐라! 감히 이런 망신을 주다니! 텐스테온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후회하게 만들어줄 거다!”
“전하, 냉정하게 보십시오. 프랭크와 선을 그으셔야 합니다.”
리차드는 다시 한번 아놀드 카실을 설득했다. 뺨을 맞을 때 입 안이 터졌는지 말을 할 때마다 피 맛이 느껴졌다. 그리고 다시 뺨에 얼얼한 충격이 전해졌다.
아놀드가 그를 또 때린 것이다.
“배은망덕한 놈! 프랭크가 정말로 위기라면 네놈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구해야 할 것 아니냐! 내가 천것인 너를 왜 거두었는지 잊었느냐? 프랭크를 보필하기 위해서였다! 프랭크 덕분에 호의호식하고 살았으면 은혜를 갚아야지!”
“…….”
“오늘까지 나와 프랭크를 석방시키거라! 그렇지 않으면 네놈을 가문에서 축출할 것이다! 네 어미 꼴이 나고 싶지 않으면 당장 우리 프랭크를 구해내야 할 거다!”
“…….”
리차드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아무 말 없이 감옥을 빠져나갔다.
***
차라리 모두 죽여버릴까? 다 죽이고 내가 카실 공작이 될까?
하지만 이대로 카실 공작가가 무너져버린다면 공작이 된들 무슨 소용이지?
공작저로 돌아온 리차드는 타오르는 분노를 삭이며 이를 악물었다.
텐스테온은 지금 카실 공작가의 숨통을 끊기 위해 날카로운 칼날을 번뜩이고 있었다. 그리고 공작 가문이 멸망하면 리차드 또한 끝이었다.
비록 공작저 내에서는 천대받는 신세였지만, 공식적으로는 카실 공작가의 차남이자 황제의 조카였다. 그런데 공작 가문이 몰락하면 그 모든 힘과 지위 역시 먼지처럼 사라지는 것이다.
‘텐스테온을 죽이자.’
-3권에서 계속
괴물 황태자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