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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하얀 용은 변덕쟁이입니다 (6/17)

6장. 하얀 용은 변덕쟁이입니다

“어! 죄송해요!”

감정이 격한 나머지 너무 강하게 끌어안고 말았다. 얼른 몸을 떼려고 하는데, 블레이크가 팔을 잡아당기며 일어나지 못하게 하였다.

“가지는 말고.”

“전하….”

블레이크는 손을 뻗어 내 눈가를 문질렀다. 그의 손이 평소처럼 조금 차가웠다. 잠깐 사이에 열이 내린 것이다.

“앤시아, 왜 울어?”

“그냥, 그냥 전하를 보니까 좋아서요. 몸은 괜찮으세요?”

“응. 오래 자서 편해.”

“다행이다. 궁의를 불러올게요.”

“싫어. 가지 마. 내 옆에 있어.”

“전하….”

“흠흠.”

뒤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리더니, 텐스테온이 가까이 다가왔다.

“블레이크.”

“폐하….”

부자지간의 3년 만의 재회였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내가 낑겨 있었다. 얼른 옆으로 비키려고 했지만 블레이크가 나의 팔을 붙잡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괜찮으냐?”

“네.”

텐스테온은 블레이크의 이마를 짚었다.

“열은 없구나.”

“네.”

오랜만에 만났지만 부자의 대화는 건조하기만 했다. 불청객이 빠지고 두 사람만 남으면 지금보다는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겠지?

“저는 궁의를 불러올게요.”

“싫어. 앤시아, 가지 마.”

하지만 블레이크는 나를 놔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내가 불러오마.”

그사이 텐스테온은 문을 열고 나갔다. 결국은 우리 두 사람만 남게 되자, 블레이크는 다시 나를 꼭 껴안았다.

“앤시아, 보고 싶었어. 너무 오랜만에 부인의 얼굴을 본 거 같아.”

“저도요. 전하가 저를 이렇게 바라봐주길 계속 기다렸어요.”

“앤시아가 나를 불러서, 나를 찾아줘서, 그래서 힘을 냈어.”

그는 나의 손에 깍지를 끼며 환하게 웃었다.

“고마워, 앤시아.”

나도 웃어야 하는데, 툭 하고 눈물이 떨어졌다.

“전하, 깨어나 주셔서 고마워요! 정말 감사해요.”

열흘 동안 불안했던 감정이 한꺼번에 폭발하며 눈물이 터졌다. 블레이크는 그런 나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여주었다.

***

블레이크가 열흘 만에 깨어난 이후 황태자궁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텐스테온은 사나흘에 한 번씩 황태자궁에 들렀다. 가끔은 시간을 내서 저녁을 먹고 가기도 했다.

“아버님, 이것도 드셔보세요. 버섯계란말이에요.”

나는 버섯을 잘게 썰어 넣은 계란말이를 텐스테온의 쪽으로 밀었다.

텐스테온에 대한 호칭은 다시 ‘아버님’으로 돌아갔다. 블레이크가 그를 ‘폐하’라고 부르는데, 나만 아버지라고 하는 건 왠지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는 섭섭해했지만, 블레이크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날 나도 같이 부르겠다고 말하자, 내 마음을 이해해주었다.

“고맙다. 맛있구나.”

“황태자 전하께서 버섯을 싫어하시거든요. 그래도 이렇게 만들면 맛있게 드셔요. 전하, 그렇죠?”

“응….”

블레이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님, 전하께서 요즘 깻잎을 드시기 시작했어요.”

“그래?”

“네. 향이 강하다고 싫어하시더니 드디어 매력을 깨달으셨나 봐요. 그렇죠?”

“응.”

블레이크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두 사람은 여전히 서먹해서, 서로 마주하기만 해도 표정이 굳고 말수가 줄었다.

식사할 때도 나와 블레이크, 나와 텐스테온이 번갈아 가며 이야기할 뿐, 두 사람이 직접 대화를 주고받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저주에 걸린 이후 얼굴조차 몇 번 보지 못한 사이였다. 단시간에 관계가 회복되길 바라는 건 욕심이겠지.

그래도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하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아버님, 우리 황태자 전하, 너무 귀여우시죠?”

“응. 귀엽지….”

“전하, 고개를 좀 들어보세요. 우리 황제 폐하 멋있죠?”

“응.”

“조금 자세히 보세요. 너무너무 멋있으시죠?”

“…‘너무’를 두 번이나 말할 필요 있어?”

“네?”

“…….”

블레이크는 말없이 식사를 했다. 오늘도 별다른 진전 없이 부자간의 식사 시간은 막을 내렸다.

***

“전하, 아버님께서 자주 오셔서 좋으시죠?”

텐스테온이 떠난 뒤, 나는 블레이크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블레이크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별로.”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텐스테온을 많이 원망하는 건가?

“안 좋으세요?”

“응. 부인이랑 함께 있는 시간이 줄어들잖아.”

“네? 그, 그래서 싫으셨던 거예요?”

그동안 쌓아온 오해와 감정의 골 때문이 아니었어?

“폐하랑 있으면 앤시아는 폐하만 신경 쓰고, 폐하만 칭찬하고….”

블레이크의 입술이 툭 튀어나왔다.

“제가 언제요?”

“오늘도 폐하만 멋있다고 하고….”

“전하도 귀엽다고 했잖아요.”

“폐하는 복근도 완벽하고….”

“그건 옛날 일이잖아요!”

왜 뜬금없이 흑역사 중의 흑역사인 ‘복근 사건’을 들추고 그러실까! 애써 기억에서 지웠는데!

“나는 앤시아랑 있고 싶어. 다른 사람이 끼어드는 거 싫어.”

나는 투정 부리는 그를 안아 꼭 주었다. 어쨌든 아버지를 원망하는 건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우리 신랑, 질투쟁이었네?”

“응. 나는 질투쟁이야.”

블레이크는 눈가를 요염하게 접었다. 우리 토깽이가 언제 이렇게 컸지? 살짝 놀란 사이 블레이크가 나의 품을 파고들었다.

“앤시아가 다른 남자 보는 거 싫어.”

“아버님이잖아요.”

“그래도 싫어. 나만 봐. 나는 앤시아밖에 안 보이는걸.”

그가 나의 허리를 꼭 껴안은 채 커다란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그 모습이 너무 예뻐서 순간 말문이 막혔다.

언제 이렇게 예뻐졌지? 나는 그의 볼을 매만졌다. 토실토실하던 볼살이 빠져서 선이 가늘어졌다.

“우리 신랑 많이 먹어야겠다. 귀여운 볼살이 다 사라졌네.”

열흘 동안 앓으면서 살이 쪽 빠져버렸다. 내가 우리 토깽이를 찌우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하지만 이제는 열도 없었고, 무엇보다 열흘 동안 앓았음에도 저주의 문장이 퍼지지 않았다.

다시 건강을 회복한 거 같아서 다행이었다. 살이야 다시 찌우면 되지!

“싫어. 나 이제 귀여운 거 안 할 거야.”

벌써 사춘기인가? 하지만 강아지처럼 품에 꼭 안겨서 그런 말을 해도 설득력이 떨어지는데요.

사실 그가 사춘기든 귀엽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었다. 우리 토끼, 아프지 않고 건강하기만 해라.

부쩍 야윈 그의 몸을 꼭 끌어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전하, 은한입니다.”

은한은 그림자의 삶을 그만두었다.

기사 작위를 받지 않은 자는 황실 호위 임무를 맡을 수 없는 데다가 동양인인 은한이 갑자기 호위가 되면 너무 눈에 띄기 때문에, 일단은 동방 문화에 관심이 많은 내가 특별히 모셔온 손님으로서 황태자궁에 머물고 있었다.

서대륙에서 가장 동쪽에 위치한 가누아 왕국은 동양인들이 제법 거주하였기 때문에, 황태자궁의 궁인들에게는 은한을 가누아 왕국 출신이라고 설명하였다.

은한은 제국어가 유창하고 서대륙의 예법을 완벽히 숙지했기 때문에 아무도 그가 창국 출신인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텐스테온은 은한이 원한다면 언제든 양지로 나올 수 있도록 서류상의 준비를 미리 해두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문제는 완벽했다.

다만 한 가지 사소한 문제가 있었다.

“…들어와.”

블레이크가 불퉁하게 대답하자, 은한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왜 왔어?”

“전하….”

나는 퉁명스럽게 묻는 블레이크를 짐짓 나무랐지만, 그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몸은 어떠신지요?”

은한은 매일 블레이크의 상태를 확인했다.

“말 안 해도 알잖아.”

은한은 블레이크의 마나를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직접 물어보거나 열을 재지 않아도 블레이크의 몸 상태를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러니 맞는 말이긴 한데, 아무리 그래도 태도가 너무 차가웠다. 하지만 은한은 개의치 않고 빙그레 웃었다.

“오늘도 건강하셔서 기쁩니다.”

“피곤해. 이만 나가줘.”

“네. 가보겠습니다. 전하, 비 전하, 편안한 밤 보내십시오.”

“은한 님도 안녕히 주무세요.”

은한은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은 도무지 친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블레이크와 텐스테온은 떨어져 지낸 시간이 있는 만큼 관계를 회복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게 당연하지만, 은한은 다르다.

비슷한 아픔이 있으니 마음을 터놓으면 누구보다 친한 친구가 될 텐데 이렇게 서먹한 모습을 보니 너무 아쉬웠다.

“전하, 은한 님한테 왜 그렇게 쌀쌀맞으세요?”

“별로.”

“그분은 오래전부터 전하를 지켜주셨어요.”

“…….”

“은한 님은 좋은 사람인 것 같아요. 그러니 아버지께서 전하를 맡기신 거겠죠. 앞으로 두 분이 친구가 되면 좋겠다.”

블레이크는 언제나 외로웠다. 나는 그가 좀 더 많은 사람과 어울리길 바랐다.

“나, 친구 있어. 다이애나 있잖아.”

허구한 날 싸우더니 드디어 친구라고 인정하는구나. 물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완벽한 친구였지만, 본인들은 절대로 인정 안 할 줄 알았는데….

“그래도 친구는 많으면 좋죠.”

“그 자식은 싫어.”

블레이크가 딱 잘라 말했다. 그가 저렇게 선을 그은 건 처음이었기 때문에 나도 더는 강요하지는 않았다.

아직 한 달도 안 됐으니까…. 자주 만나다 보면 곧 친해지겠지. 너무 조바심 내지는 말자.

그래도 내가 떠나기 전에는 친해졌으면 좋겠는데….

“그리고 블레이크야.”

“네?”

“내 이름은 블레이크야.”

“알아요. 설마 우리 남편 이름도 모르겠어요?”

나는 새삼스럽게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는 블레이크가 귀여워서 웃어버렸다. 하지만 그는 진지했다.

“다른 사람은 모두 이름을 부르면서 나는 왜 계속 ‘전하’야?”

“그게 예법이잖아요.”

“폐하도 편하게 부르잖아.”

“그건….”

“부인, 나를 정말로 남편이라고 생각해?”

“…….”

“언제쯤이면 내 옆에 있어 줄 거야?”

나는 블레이크에게 공대를 했다. 예법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블레이크와 거리를 두려고 일부러 말을 높였다.

나는 떠날 사람이니까, 블레이크의 저주를 풀지 못하면 결국 떠나야 할 사람이니까. 그래서 공대와 존칭이라는 최후의 선을 그어놓고 넘지 않으려 했다.

혼자만의 다짐이라 생각했었는데, 블레이크는 이미 내 생각을 눈치채고 있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언제나 전하 곁에 있는데.”

“시치미 떼지 마. 다 들었으니까.”

“…….”

그가 쓰러졌을 때, 잠깐 깨어나서 나에게 떠나지 말라고 말한 적이 있었었다. 잊어버렸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앤시아, 나를 불안하게 만들지 마.”

블레이크는 예전처럼 울면서 애원하지 않았다. 나의 손을 잡고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명령하듯 단호하게 말했다. 그 시선에 사로잡혀서 눈을 깜박일 수조차 없었다.

“도망칠 생각도 하지 마.”

“전하….”

“내가 아픈 건 부인 때문이 아니야. 오히려 부인이 내게서 멀어질 때마다 아파. 그걸 모르겠어?”

나는 작년에 블레이크가 장미꽃을 주었던 날을 떠올렸다. 처음으로 그가 아닌 다이애나와 잠을 잤을 때, 그는 아팠었다. 내가 텐라른궁에 가느라 자리를 비우자, 블레이크는 쓰러졌다.

하지만 나는 빛의 계승자가 아니다. 그에게 영향을 줄 리가 없는데….

희망과 체념 속에서 블레이크의 음성이 들렸다.

“앤시아, 블레이크라고 불러줘.”

“전하….”

“이미 불렀잖아. 내가 아플 때 ‘블레이크’라고 했잖아. 그렇게 나를 깨웠잖아.”

블레이크의 양손이 나의 얼굴을 감쌌다. 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단순히 볼살이 빠진 게 아니구나. 많이 컸어…. 나는 블레이크가 3년 전보다 많이 자랐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달았다.

“앤시아, 어서.”

“…블레이크.”

나는 결국 그의 이름을 불렀다.

블레이크의 곁을 떠날 때를 대비하여 쌓아놓았던 최후의 보루가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이제는 떠나려야 떠날 수도 없겠구나. 나는 그에게 사로잡혀 버리고 말았다.

***

나는 황태자궁의 연못에서 건졌던 석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필립은 라온텔 벨라시안을 황후로 맞이하며 빛의 여신을 배신했다. 분노한 빛의 여신은 그의 후손에게 저주를 내렸다.

그리고 다이애나는 벨라시안 가문에서 내려온 빛의 힘으로 블레이크의 저주를 풀었다.

즉, 남자가 자신을 배신하고 다른 여자를 택했는데, 그 여자에게 저주를 풀 힘을 줬다는 거다.

뭔가 이상했다. 또 다른 숨겨진 진실이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찾을 수 없었다.

어쨌든 텐라른궁에 다녀온 덕분에 이 석판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이건 젤칸에서 역사를 기록할 때 사용하는 석판이었다. 돌의 모양도 비슷하고, 글자를 새기는 방식도 닮아 보였다.

필립은 수도를 천도한 뒤에도 계속 역사를 기록했을 거다. 하지만 어느 순간 석판을 모두 없앴고, 이것만 남은 거겠지.

-여… 주… 6… 직… 문장… 었다.

알아볼 수 있는 글자는 이것뿐이었다. 도대체 뭐라고 쓰여 있었던 걸까? 수도를 천도한 뒤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나는 마모되어 반질반질해진 석판을 매만졌다.

애초에 이 석판에 새겨진 글자를 알아낸들 의미가 있는 걸까? 결국 저주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료의 한 조각일지도 모른다.

“비 전하, 여기 계셨습니까?”

문이 열리더니 은한이 안으로 들어왔다.

“네. 석판을 좀 보고 있었어요. 젤칸의 역사책을 다시 읽어봤는데, 당시 젤칸 제국의 황실에 퍼졌던 탄시놀이나 필립의 진짜 행적이 쓰인 책은 한 권도 없었어요. 어떻게 이렇게 감쪽같이 세상을 속일 수 있었던 건지. 참 여러모로 대단한 인간이에요.”

“이 책들을 전부 읽으신 겁니까?”

그가 책상에 쌓여 있는 책을 보며 물었다.

“네.”

“…비 전하께서는 정말 대단한 분이십니다.”

“전에 읽었던 걸 다시 확인한 것뿐인걸요.”

갑작스러운 칭찬을 받은 나는 다급히 손사래를 쳤다.

“텐라른궁에서도 많이 놀랐습니다. 용기 있고, 현명하셨죠.”

“언어 능력자라 고대어를 읽을 수 있었던 것뿐이에요.”

“단순히 글만 읽으신 게 아니죠.”

은한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곳에는 단순한 역사적 사실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비 전하께서는 그걸 보시고 당시 상황을 빠르게 유추하셨죠. 게다가 텐라른궁 중앙에 있는 석판을 세운 자가 사실은 필립이라는 것도 알아차리셨습니다. 그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연치도 아직 어리신데 정말 대단하십니다.”

사실은 그렇게 어리지 않아서요. 가슴이 뜨끔했지만 대충 웃어넘겼다.

“하하하하. 내가 좀 애늙은이 같죠? 그런 말 많이 들어요.”

“아, 아니요! 그런 뜻이 아닙니다. 나이를 떠나서 훌륭하십니다. 제가 말주변이 없다 보니…. 송구합니다.”

은한은 즉각 고개를 숙였다. 다행히 나의 실체를 파악하거나 의심한 건 아니었나 보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오래 하면 안 될 것 같았기에 얼른 화제를 돌렸다.

“옷이 잘 어울리세요.”

그는 평소와 달리 밝은 베이지색 의복을 입고 있었다.

“폐하께서 선물해 주셨습니다. 조금 어색하네요.”

그는 민망한지 보석으로 만든 단추를 계속 만지작거렸다.

당장이라도 이걸 벗고 원래 입던 새까만 옷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어색하긴요! 훨씬 멋지신데요.”

“그, 그런가요?”

“네.”

“다행이네요.”

그는 수줍게 웃었다.

은한은 사실 올해 죽는 인물이었다.

원작에서 텐스테온이 블레이크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려 하자, 은한은 필사적으로 말린다.

하지만 텐스테온은 콜린과 은한에게 블레이크를 부탁한 뒤, 흑마법을 사용하고 결국 목숨을 잃는다.

그러자 은한은 혈혈단신의 몸으로 리차드를 죽이기 위해 공작저로 쳐들어간다.

수많은 병사들에 둘러싸여 결국 죽음을 맞게 되지만, 리차드의 몸에 치명상을 남겼던 유일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 그림자의 삶을 접고 밝은 양지로 나왔다.

아직 소설 속의 사건이 벌어지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았지만, 텐스테온과 은한 모두 원작의 길을 걸어가지는 않을 거라 생각한다.

원작이 이렇게 좋은 쪽으로만 바뀐다면 얼마나 좋을까?

“은한 님, 한 가지 여쭈어봐도 될까요?”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어째서 세상에 나오기로 결심하신 건가요? 그동안은 폐하께서 권하셔도 계속 거절하셨다고 들었어요.”

그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비 전하를 보며 결심했습니다.”

“저요?”

“네. 황태자 전하를 위해 최선을 다하시는 비 전하를 보니 스스로가 부끄럽게 느껴지더군요.”

은한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저는 그동안 숨어 있기 급급했죠. 말로는 폐하께 충성을 바친다고 하면서 결국 그분께 의지하기만 했습니다. 이번에 전하께서 쓰러지셨을 때는 용술조차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죠. 그러자 문득 두렵더군요. 용술이 없다면 나는 무가치한 존재겠구나, 폐하께 어떤 도움도 되지 않겠구나, 하고요.”

“폐하는 술법 때문에 은한 님을 곁에 두시는 게 아니에요. 그런 생각은 하지 마세요.”

“그렇죠. 폐하는 사실 따뜻하신 분이니 제가 술법을 쓰지 못한다고 해도 내치지 않으시겠죠.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주군께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앞으로는 당당하게 폐하의 곁에 서서 그분을 지켜드릴 겁니다. 또한 황태자 전하와 비 전하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겠습니다.”

그의 눈에서 당당한 빛이 흘렸다. 음울한 아픔에 사로잡혔던 사내는 사라지고 미래를 위해 달려가는 멋진 청년이 눈앞에 서 있었다.

“지금도 든든한걸요.”

“아닙니다. 아직 부족합니다.”

카실 공작 가문의 기사들을 혼자서 모두 쓰러트리고 리차드에게 칼을 꽂았던 엄청난 무력의 소유자면서 지나친 겸손이었다.

그때 쑥스러워하던 은한의 눈빛이 갑자기 매섭게 돌변하더니 나의 팔을 잡아당겼다.

“은한 님…?”

“비 전하, 위험합니다.”

그는 나를 자신의 뒤로 오게 하더니 검을 뽑았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 내가 서 있던 자리에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저게 뭔가요?”

“용의 힘이 느껴집니다. 창에서 저를 없애기 위해 보낸 자일 겁니다. 비 전하께서는 어서 도망치십시오.”

벌써 암살자를 보냈다고?

은한은 아직 공식적으로 사교계에 데뷔하지 않았다. 주로 황태자궁에 머물렀고, 황제궁에 올 때는 몸을 감추며 조심히 이동했다. 황태자궁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그의 존재 자체를 아는 사람이 아직 많지 않았다.

그런데 창에서 벌써 은한이 살아 있다는 사실은 물론 그가 있는 위치까지 파악한 것이다.

“은한 님도 위험하잖아요! 같이 가요.”

“저를 노리고 온 자들입니다. 제가 처리해야 합니다.”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에도 빛은 빠르게 커지며 거대한 구체가 되어갔다. 그리고 강렬한 빛이 번져 공간을 가득 채우더니 일순간에 사라졌다.

“비 전하, 어서 몸을 피하십…!”

“드디어 찾았습니다!”

다급한 은한의 외침과 동시에 맑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국어와는 완전히 다른 이국적인 언어였다.

빛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한 소녀가 서 있었다.

새하얀 피부에 새하얀 머리카락, 그리고 보석처럼 아름답게 빛나지만 초점이 없는 눈동자, 순백색 비단 의복. 사람이 아니라 설화 속에 나오는 공주처럼 신비로운 분위기가 풍기는 작은 소녀였다.

도대체 누구지? 아무리 생각해도 원작에서는 나오지 않는 사람이었다.

“은한 형님!”

…형님이라고? 여자가 아니었어?!

그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은한의 이름을 불렀다. 반가움이 가득 담긴 환한 미소는 무해함의 극치였다.

나는 긴장을 풀었다. 은한 역시 칼을 든 손을 내렸다. 하지만 표정은 어두웠다.

“백한, 네가 왜…?”

은한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묻자, ‘백한’이라 불린 소년은 활짝 웃었다.

“제 이름을 아직 기억해주셨군요. 기뻐요.”

그는 손을 앞으로 뻗으며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설마 앞이 보이지 않는 건가? 하지만 은한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데…?

백한은 은한만을 주시한 채 위태롭게 걸어갔다. 그러다 의자 다리에 걸려 몸이 앞으로 쏠렸다.

백한을 가만히 바라보던 은한은 빠르게 다가가 그를 잡아주었다.

“이런, 칠칠치 못한 모습을 보여드렸네요. 송구합니다.”

“…네 몸이 왜 이러는 것이냐? 맹 상궁이 네게 무슨 짓을 한 거냐?”

창의 언어로 말하는 은한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는 백한을 보자마자 얼어붙었다.

백한이 머나먼 땅에서 자신을 찾아왔기 때문에 놀란 게 아니라, 몸 상태를 보고 충격을 받은 것이었다.

하지만 백한은 기쁘게 웃었다.

“백룡의 선택을 받았습니다.”

“백룡이라고…?”

“네.”

그가 백룡의 선택을 받았다는 사실을 안 순간 은한의 눈이 경계심으로 번뜩였다.

원작에서는 은한의 사정이 짧게 묘사된다. 텐스테온의 복수를 위해 리차드와 맞서는 장면에서 과거를 잠시 회상하는 게 전부다. 그렇기 때문에 창이나 용술에 관한 정보는 자세히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백룡을 경계하는 이유는 짐작이 갔다.

그는 불길한 흑룡의 선택을 받았다. 창에서는 그 이유만으로 어린 은한을 죽이려 했다. 백룡이라면 필시 흑룡과는 대립되는 존재일 거다.

“신궁에서 지내야 할 백룡이 여긴 웬일이냐? 나를 죽이러 온 것이냐?”

내 생각이 맞는지 은한은 다시 검을 세우며 그를 추궁했다. 그러자 백한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럼 어찌 온 것이냐?”

“저는 형님을 모시러 왔습니다.”

“나를 압송하려는 거냐?”

“그럴 리가요! 저는 형님을 모시러 온 겁니다.”

백한는 강하게 부정하더니, 은한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백룡의 그릇이 주인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이게 무슨 짓이냐?”

“백룡 모백한은 모은한을 주인으로 선택하였습니다. 부디 창의 황제가 되어주십시오.”

백한은 은한의 발치에 입을 맞추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나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백한을 내려다보는 은한의 표정은 오히려 싸늘하게 굳었다.

“거절한다. 네놈들의 수작질은 통하지 않는다.”

그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수작질이 아닙니다! 저 혼자 온 것입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당장 꺼지거라. 그리고 평생 입을 다물어.”

은한은 차갑게 뱉었다. 언제나 정중하던 그의 싸늘한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형님, 제가 형님을 얼마나 애타게 찾아 헤맸는지 아십니까? 그리웠습니다. 보고 싶었습니다.”

“꺼져라.”

“형님 저의 이야기를 들어주십시오. 제가 모든 걸 설명하겠습니다. 제발 저를 외면하지 말아 주세요.”

무릎을 꿇은 채 애원하는 소년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나는 은한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은한 님, 이야기라도 들어보시는 게 어떨까요? 제가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위험한 사람 같지는 않은데요.”

“아닙니다. 비 전하, 창의 인간은 신뢰할 수 없습니다.”

은한은 단호했다. 그 순간 순하던 백한의 표정이 돌변하더니 나를 향해 삿대질했다.

“…형님, 설마 제가 아닌 저 계집을 택하신 겁니까?”

“저요?”

나는 창의 말로 말했다. 언어 능력은 글을 읽는 것뿐만이 아니라 대화를 하는 것도 가능했기 때문에, 처음 사용하는 언어였지만 자연스럽게 말을 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왜 갑자기 나한테 불똥이 튀는 거야?

“백한! 감히 비 전하께 무슨 무례냐!”

은한이 당황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백한의 손에서는 이미 새하얀 빛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형님을 모실 수 있는 자는 오직 저뿐입니다. 다른 빛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잠깐만요. 저는…!”

내가 미처 해명하기도 전에 그의 손에 있던 새하얀 빛이 날아들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백한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의 옆에 있던 은한이 곧장 내게 달려왔다.

“비 전하, 괜찮으십니까? 어디 다치신 데는 없으신지요?”

“아, 저는 괜찮아요. 그런데 저분은….”

“잠시 기절한 것뿐입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는 착잡한 표정으로 쓰러진 백한을 안아 올렸다.

“잠시 자택에 다녀오겠습니다.”

은한은 거의 황궁에서 지냈지만, 황궁 밖에 집이 있었다. 따로 저택을 구입한 건 아니고, 콜린의 집에서 함께 생활한다고 하였다.

“네, 그러세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은한은 백한과 함께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다.

***

은한은 사흘 넘게 황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텐스테온은 은한의 동생이 왔길래 오랜만에 휴가를 주었으니 마음 쓰지 말라고 하였다.

백한과 함께 지내게 된 콜린은 의외로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아주 깜찍한 꼬마 도련님이더군요. 물론 황태자 전하의 귀여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요.”

블레이크의 귀여움을 알다니. 역시 콜린은 배운 사람이었다. 아무리 백한의 외모가 출중하다지만 우리 신랑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블레이크의 귀여움은 세계 최강이니까.

“역시 남자 맞죠?”

“아마도요.”

“‘아마도’라니요? 며칠 동안 같이 지내신 거 아닌가요?”

“글쎄요. 저를 워낙 피해 다녀서 잘 모르겠군요.”

“피해요?”

“네. 하지만 은한 군의 태도를 봤을 때 분명 사내일 겁니다.”

그는 아리송한 말을 했다.

“…설마 은한 님이 동생을 구박하는 건가요?”

“하하. 창의 말을 알지 못하니 잘은 모르겠군요. 하지만 모름지기 형제들은 거친 법이죠.”

콜린은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의젓하고 정중한 은한이 동생을 구박하는 모습은 도저히 상상이 되질 않았다.

콜린의 입가에도 장난스러운 웃음이 걸려 있는 거로 봐서 분명 과장 섞인 농담이겠지.

어쨌든 은한과 백한은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았다. 백한이 했던 말처럼 은한을 고발하거나 해치려는 것도 아닌 거 같고.

나는 일단 안도하며 황태자궁으로 돌아갔다.

“앤시아!”

궁에 도착하자마자 블레이크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달려왔다.

“전하. 저 왔어요.”

“…흥.”

“…전하?”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입술을 툭 내밀었다. 노골적으로 삐쳤음을 어필하는 표정에 웃음이 나왔다.

“블레이크.”

“그리고.”

“나 왔어.”

내가 이름을 부르고 말까지 놓자, 그는 만족스러운 듯 눈꼬리를 접으며 웃었다.

“보고 싶었어.”

“외출한 지 한 시간도 안 지났는걸요.”

“한 시간이나 기다렸는걸.”

“정말요?”

“‘요’는 빼야지.”

“아직은 어색해요.”

“그럼 조금만 더 기다릴 거야.”

블레이크가 나의 손을 잡더니 깍지를 꼈다. 표정은 태연했지만 귓가가 붉어졌다. 자기가 먼저 손을 잡아놓고도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몰랐다.

그런 블레이크를 보며 빙그레 웃는데,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은한이 서 있었다.

“전하, 비 전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런 말을 쓸 정도로 오래된 거 같진 않은데.”

블레이크가 나의 손을 꽉 잡으며 불퉁하게 뱉었다.

또 저러네. 언제쯤에야 사이가 좋아질는지. 하지만 은한 역시 블레이크의 쌀쌀맞은 태도에 그다지 개의치는 않는 듯, “그렇긴 하군요.”라고 평이하게 대답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비 전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백한의 일을 말하려는 거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응접실로 가시죠.”

은한과 함께 응접실로 가려고 하는데, 블레이크가 손을 꼭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블레이크…?”

“빨리 와야 해.”

“알겠어요.”

그제야 블레이크는 손을 놓아 주었다.

***

“그날은 정말 죄송했습니다. 저 때문에 비 전하를 위험에 빠트릴 뻔하였습니다.”

은한은 응접실에 들어오자마자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아니에요. 아무 일도 없었는걸요. 그보다 은한 님은 괜찮으신 건가요?”

“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대답과 달리 얼굴이 무척 수척했다.

“혹시 무슨 일인지 여쭈어봐도 되나요?”

“…….”

“말씀하기 어려우시면 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닙니다.”

은한은 잠시 침묵하다가 느리게 말을 뱉었다.

“아시다시피 저는 창의 황자입니다. 그렇다고 대단할 건 없죠. 부황은 색을 밝혔고, 수많은 여인과 동침을 하였습니다. 신분이 높은 여인은 후궁 작위를 받았지만, 미천한 신분의 여인은 변변한 전각조차 받기 힘들었죠.”

젤칸 제국의 마지막 황제는 수많은 황비와 자식을 두었다. 은한은 이에 대해 다소 격앙된 반응을 보였었는데, 이제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자신의 상황에 대입했던 거다.

“자식은 백 명이 넘었고, 궁인들조차 그들의 이름을 외우지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당연히 어지간한 귀족 자제보다 형편이 어려웠죠. 하지만 부황은 이를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아스테릭 제국이 빛의 여신의 힘으로 세워진 나라라면, 창은 용의 힘으로 건국한 나라였다.

그리고 황족의 피가 흐르는 자 중 일부는 용의 선택을 받았다. 그들은 용인(龍人)이라 불렀다.

창의 황제는 자신의 대에 최대한 많은 용인이 탄생하길 원하며 백 명이 넘는 아이를 낳았다. 하지만 그는 자식의 이름은커녕 몇 명인지조차 알지 못했다고 한다.

원작에서는 나오지 않았던 이야기였다.

“저의 어머니는 황궁의 신녀였습니다. 원래는 천민이었지만 힘을 인정받아 수도로 올라오게 되었죠. 그러던 중 황제의 눈에 띄어 저를 가졌습니다. 그것이 비극의 시작이었죠.”

은한의 검은 눈동자에 잠시 슬픔이 스쳤다.

“황제는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어머니의 존재를 잊었습니다. 어머니는 출신 때문에 후궁 첩지도 받지 못한 채 궁녀들과 함께 지내다가, 아들을 낳은 공을 인정받고 가장 낮은 8품 후궁으로 책봉되셨죠. 황궁 구석에 있는 작은 전각도 하사받으셨습니다. 낡고 허름했지만 그래도, 바로 옆에 후원이 있어서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꽃향기가 가득했겠네요.”

“네. 언제나 좋은 향기가 가득했죠. 어렸을 때는 행복했습니다. 백한과도 곧잘 어울려 놀았죠.”

백한과 놀았다고? 백한은 기껏해야 블레이크의 또래로 보였다. 은한과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날 텐데? 백한의 나이가 궁금해졌지만, 입을 떼기 전에 은한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용의 선택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필이면 나라를 멸망시킬 징조이자 불길함의 상징인 흑룡이었죠.”

은한의 어머니는 이 사실을 알고 철저하게 숨겼다고 한다. 당연했다. 흑룡의 선택을 받은 것이 밝혀지면 목숨을 장담할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용의 선택을 받으면 신궁에서 계약을 맺고 용을 받아들여야 한다. 선택받은 자가 용을 거부하고 힘을 개화시키지 못하면 오히려 몸에 해가 미친다고 하였다. 은한도 예외는 아니었다.

“계약을 맺지 못했기 때문인지 몸이 자주 아팠습니다. 어머니께서는 그런 저를 위해 매일 손수 요리를 만들어주시곤 했습니다.”

은한은 담담히 상황을 설명했다. 암울한 이야기인데도 말을 할수록 그의 목소리는 오히려 더욱 차분해졌다.

“하지만 결국 발각되고 말았습니다. 부황은 격분하여 저와 어머니를 죽이라 명하더군요. 결국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불행의 씨앗인 저만 도망쳐 나왔습니다.”

“은한 님의 잘못이 아니에요.”

“비 전하라면 그리 말씀해 주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사실인걸요.”

그는 말없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도 자책하고 있는 거다.

“그렇다면 백한 황자는 어찌하여 은한 님을 찾아온 건가요?”

“제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백한은 백룡의 선택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백한과 나눈 이야기를 내게 말해주었다.

“백룡은 가장 성스러운 용입니다. 백룡의 선택을 받는 자는 대신관이 되어 모두의 존경을 받습니다. 용인들 중 유일하게 황제를 선택하는 권한도 가지고 있죠.”

백한은 은한을 주인으로 선택한다고 했다. 그리고 창의 황제가 되어달라고도 말하였다.

“그렇다면 은한 님께서 황제가 되시는 건가요?”

“아닙니다. 저의 주군은 오직 텐스테온 폐하뿐이십니다. 황제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백한 황자는 은한 님을 선택했잖아요.”

“정이 많은 아이입니다. 제 처지를 안타깝게 여기고 도움을 주려다 무리수를 둔 거겠죠.”

어린 시절 친하게 지내던 이복형을 위해서 여기까지 찾아온 건가…. 비록 나를 공격하려 하긴 했지만 나쁜 아이는 아닌 거 같다.

“그분은 어떻게 은한 님을 찾은 걸까요?”

원작에서 백한은 등장하지 않았다. 창은 은한을 찾지도 못했다.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이렇게 빨리 찾아낼 수 있었을까?

“대신관이 되고 나서 계속 저를 찾았다고 합니다. 서대륙에 있다는 건 어렴풋이 느꼈지만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해 고민하던 중, 텐라른궁에 갔던 날 제 힘을 감지한 모양입니다.”

그는 거리가 먼 텐라른궁까지 이동술을 쓰고 마쿨을 피하느라 거듭 용술을 사용했다. 평소보다 훨씬 방대한 용력을 사용하는 바람에 위치를 들켰고, 그래서 원작과 달리 백한이 찾아온 것이다.

“죄송해요. 제가 무리한 부탁을 하는 바람에….”

“아닙니다. 이건 제 실책입니다. 선대 대신관은 저를 앞에 두고도 용인인지조차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무능했습니다. 설마 몇 년 사이 대신관이 바뀌었을 줄은 몰랐습니다.”

“백한 황자는 능력이 출중하신가 봐요.”

“지나치게 뛰어나더군요….”

그의 표정에서 안타까움이 배어 있었다. 동생을 걱정하는 거다. 하지만 그는 곧 무심한 얼굴로 돌아갔다.

“단단히 혼을 냈으니 오늘 중에 창으로 돌아갈 겁니다.”

“오랜만에 만난 동생인데 이대로 보내시려고요?”

“창에서 황제보다 중요한 자가 대신관입니다. 백한이 사라졌으니 지금쯤 난리가 났겠죠. 게다가 그 녀석을 위해서라도 어서 돌려보내야 합….”

차분하게 대답하던 은한의 표정이 갑자기 차갑게 굳었다.

“이 자식이….”

“은한 님, 왜 그러세요?”

“송구합니다. 백한이 저를 쫓아온 모양입니다.”

“백한 황자가요?”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백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바로 위층에서 블레이크의 비명이 들렸다.

나와 은한은 다급히 블레이크의 방으로 달려갔다.

***

방문을 여는 순간 블레이크의 비명이 크게 울렸다.

“너 뭐야!”

블레이크는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백한은 그의 허리 위에 올라타 있었다.

“호오, 신기한 인간이군.”

백한은 창의 언어로 말하며 블레이크의 얼굴을 조몰락거렸다.

“블레이크!”

이 자식이 내 신랑한테 무슨 짓이야!

나는 당장 블레이크한테 달려갔다. 은한도 경악하며 백한을 블레이크한테서 떼어냈다.

“블레이크, 괜찮아요?”

“으응….”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사람이 나타나서 처음 듣는 언어로 말을 하자 당황했을 뿐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았다.

내가 그의 몸을 살피는 사이 은한은 백한에게 호통을 쳤다. 물론 창의 언어였다.

“백한, 이게 감히 무슨 짓이냐!”

“형님을 따라왔는데, 작은 실수를 하는 바람에 이곳으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당장 황태자 전하께 사죄하거라!”

“이 몸은 창의 대신관입니다. 창의 황제가 아닌 자에게는 고개를 숙이지 않습니다.”

“내가 모시는 분이시다!”

“형님은 창의 황제가 되실 뿐입니다. 그런 말은 당치 않습니다.”

“백한!”

은한이 소리를 버럭 질렀지만, 백한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냐는 듯 당당한 표정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사흘 동안 저 상태였던 건가…. 콜린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겠다.

“그나저나 참으로 신기한 인간과 함께 계셨군요. 제가 형님을 찾으려 할 때마다 묘한 힘이 방해한다 했더니 바로 저자 때문이었습니다.”

백한은 초점 없는 눈으로 블레이크를 바라보았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신비로운 눈동자에 이채가 띠었다.

그는 블레이크에게 흥미를 보였다. 저주를 받았다며 꺼리는 기색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백룡은 창에서 가장 성스러운 존재라고 했다. 그렇다면 서대륙의 빛의 여신과 비슷하지 않을까? 어쩌면 블레이크의 저주를 푸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게 무슨 뜻인가요?”

나는 창의 말로 물었다.

“뒤섞였어.”

백한은 가벼운 투로 뱉었다.

“네? 무엇이 섞였다는 건가요?”

3년 동안 여신의 저주에 대한 자료는 모두 찾았지만, ‘뒤섞였다’라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이 소년은 블레이크의 저주에 대해 뭔가 알고 있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알고 싶은가?”

“네. 알고 싶어요.”

나는 절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온통 새하얀 소년의 입꼬리가 묘하게 꺾였다.

“비밀이네.”

“백한, 무례는 거기까지다. 아는 사실이 있다면 모두 말하거라!”

은한이 엄하게 꾸짖었지만 백한은 미소를 머금은 채 나를 바라보았다.

“아스테릭의 황태자비여, 나와 거래를 하지 않겠나?”

***

블레이크와 은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나는 백한과 단둘이 남았다.

“거래 조건을 말해보세요.”

“형님께서 황태자의 치료를 위하여 이곳에 머문다고 들었네.”

“네. 요즘은 주로 이곳에서 지내세요.”

“그렇다면 나도 여기 있겠다. 형님과 함께 지내고 싶어.”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의외로 상식적인 제안이었다. 그가 황태자궁에 머문다면 블레이크에게도 도움이 될지 모른다.

“알겠어요. 방을 준비하죠.”

“그리고 형님이 창으로 돌아오도록 설득해주게. 그대라면 형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안심하기 무섭게 그는 무리한 조건을 내세웠다.

“그건 어려워요. 제게 그럴 능력도 없을뿐더러, 창으로 돌아가는 건 은한 님이 선택할 문제예요. 타인이 왈가왈부할 수 없어요.”

“만약 황태자비가 도움을 준다면, 나도 그대가 찾는 걸 알려주지.”

“그게 뭐죠?”

내가 무엇을 찾고 있는 줄 알고 저렇게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걸까? 너무 거침없이 말하니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가느다란 의심의 불꽃이 피어오르기도 전에 백한의 입술이 여유롭게 움직였다.

“석판을 해독해 주지.”

나는 깜짝 놀라서 백한을 바라보았다.

“해독할 수 있나요? 아니, 제가 석판을 해독하고 싶어 하는 건 어떻게 안 거죠?”

“해독하고 싶으니 그리 만져댄 거겠지.”

“그걸 어떻게….”

내가 석판을 자주 만진 건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알기는. 보이니까 아는 것이지.”

백한은 여유롭게 웃으며 다시 조건을 제시했다.

“형님을 설득해주게. 만약 형님께서 창으로 돌아가신다면, 황태자에 대한 것을 알려주고 그 석판도 해독해 주지.”

“…정말인가요?”

“그래. 대신 거래 내용은 비밀이네. 나는 형님한테 미움받기 싫거든.”

자신이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다는 자각은 있구나. 어처구니가 없는데, 백한이 말을 덧붙였다.

“만약 이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말한다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을 걸세.”

***

나는 백한을 황태자궁에 머무르도록 하였다.

백한은 분명히 무언가 알고 있었다. 솔직히 백한을 붙잡고 당장 석판을 해독해서 전부 알려달라고 소리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랬다가 그가 아예 입을 다물게 되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그렇다고 블레이크를 위해 은한에게 창으로 돌아가 달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10여 년 뒤, 창은 엄청난 혼돈 속에 빠질 거다. 나라가 사분오열되며 내전이 극에 달하고, 권력 다툼에서 패배한 귀족들과 백성들이 서대륙까지 밀려든다.

이때 리차드는 창의 패잔병들을 이용하여 이복형인 프랭크를 제거하는 데 성공한다.

창은 곧 멸망할 거다.

블레이크를 위해 다른 사람을 사지로 밀어 넣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는 흑룡이었다. 아무리 대신관의 선택을 받았다고는 하나, 나라를 멸망시킨다는 흑룡이 황제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나한테만 툭툭거리는 새하얀 고양이를 꼬셔보기로 했다. 백룡의 선택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새하얗고 도도하며 앙칼진 모습이 영락없는 고양이였다.

“백한 님, 이것 좀 먹어보세요.”

나는 아침부터 열심히 만든 만두와 말리화차를 쟁반에 담아 백한의 방으로 들어갔다.

“무엇인가?”

“만두예요. 백한 님을 위해서 아침부터 열심히 만들었어요.”

은한에게서 백룡의 선택을 받은 대신관은 육식을 하지 못한다는 말을 듣고 특별히 만든 채소 만두였다.

아기 고양이를 유혹하려면 먹을 게 최고 아니겠나?

“어허! 새신부가 어찌 낭군님을 두고 다른 사람에게 음식을 만들어준단 말인가!”

백한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요리를 좀 했을 뿐인데 뭘 저렇게 당황하는 거야.

얄미운 꼬맹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귀여운 구석이 있네.

“블레이크 전하가 드실 고기만두는 따로 만들었어요.”

“황태자에게 주었나?”

“전하께서는 지금 검술 훈련을 하는 중이셔서요. 끝나면 드릴 거예요.”

블레이크는 의식을 차린 이후, 전보다 더 열심히 검술 훈련에 매진했다.

“이것도 황태자에게 주게. 나는 먹지 않겠네.”

그는 젓가락을 집을 생각도 하지 않으며, 나의 요리를 거절했다.

“…만두 싫어하세요?”

“그런 건 아니네….”

“드시고 싶은 요리가 있다면 말해주세요. 뭐든 만들어 드릴게요. 제가 이래 봬도 요리 실력이 제법 있어요.”

“되었네. 나는 그대가 만든 요리를 먹을 수 없어.”

요리의 문제가 아니라 나라는 사람 자체를 거부한다는 뜻이었다. 솔직히 조금 충격이었다.

“…제가 그렇게까지 싫으세요?”

“아, 아닐세! 그런 게 아니야!”

그는 당황하며 도리질을 쳤다. 그러자 새하얀 머리카락이 유려하게 흔들렸다.

“그럼 뭔데요?”

“…그대는 전혀 알지 못하는군.”

백한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엇을요?”

“…백룡께서는 질투가 심하시네.”

“질투요?”

그가 갑자기 나의 어깨를 잡았다. 투명하면서 다채로운 빛을 지닌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대는 맑고 아름답네.”

“…가,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그대가 만든 음식을 먹으면 백룡께서 필시 서운해하실 거야. 그래서 먹을 수가 없네. 그대가 싫어서가 아니야. 오해하지 말게.”

백한은 조곤조곤 사정을 설명했다. 먹기 싫어서 억지로 지어낸 이야기 같지는 않았다.

“아, 알겠어요. 믿을게요. 만두가 싫은 게 아니라 제가 만든 요리는 안 된다는 거죠? 그럼 주방장에게 부탁할게요.”

“그래 주겠나?”

“차는 시녀인 멜리사가 탄 거니까 드실 수 있죠?”

백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의 손에 찻잔을 쥐여주었다.

“고맙네.”

그는 양손으로 찻잔을 감싸며 차를 호로록 들이켰다.

“말리화차에요. 혹시 입맛에 맞지 않으면 다른 차를 준비할게요.”

“아니네. 택리차보다는 못하지만 먹을 만하네.”

“택리차가 뭔가요?”

이 세계에 와서 창의 요리 서적을 많이 찾아보았지만 ‘택리차’는 처음 들었다.

“모르는가? 창의 황실에서는 매일 택리차를 마신다네.”

“처음 들어요.”

“허어, 택리차의 맛을 모르다니 안타깝군. 은한 형님께서 황제가 된다면 특별히 보내주도록 하겠네.”

결국 은한이 창으로 가야만 해결해주겠다는 뜻이었다. 블레이크의 저주, 석판, 하다못해 차까지도.

“어째서 은한 님을 택하신 건가요? 어린 시절 친분 때문인가요?”

“무엄한 말을 하는군.”

그가 찻잔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 황제를 택했다는 말이 불쾌한 걸까?

“형님께서는 하늘이 내린 천룡이시네! 감히 누가 선택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천룡이요? 흑룡이 아니라요?”

“흑룡이라니! 형님은 천룡이셨어! 창을 위해 하늘이 내려주신 황제였네!”

은한의 말과는 정반대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가 거짓말을 했을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창은 어째서 은한 님을 죽이려고 한 거죠.”

“천룡과 흑룡은 얼핏 보아선 그 결이 비슷하네. 이를 이용하여 전 대신관이 거짓말을 했지. 자신의 조카를 황태자로 만들기 위해 천룡이던 형님을 재액이 내리는 흑룡이라 속여 없애려 한 거야.”

신녀였던 은한의 어머니조차 아들이 흑룡이라 생각하고 있었으니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을 거다.

“전 대신관은 어떻게 됐나요?”

“죽었네. 백룡께서는 천룡을 창의 땅에서 쫓아낸 그를 용서하지 않았지. 그리고 내가 새로이 선택되었네. 아무런 자질조차 없던 내가 백룡의 선택을 받자 모두들 눈이 휘둥그레졌지. 하지만 나는 백룡의 뜻을 알았네. 백룡께서는 천룡의 귀환을 바라고 계셔. 그 임무를 맡기기 위해 나를 택한 거네.”

백한의 얼굴에 비장함이 맴돌았다.

“그러니 내가 형님을 선택했단 말은 틀렸네. 형님 때문에 내가 선택을 받은 거야.”

“죄송해요. 몰랐어요.”

“그것이 그대의 잘못이겠는가? 형님께서 말씀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그는 한숨을 쉬며 다시 찻잔을 들었다.

“다른 사람들도 은한 님이 천룡인 걸 알고 있나요?”

“황실은 알고 있지. 알 수밖에 없어. 천룡은 검은 비구름을 품고 있네. 자신이 선택한 자에게 권능을 주어 비를 다루고 대지를 적시게 하지.”

은한은 불길한 흑룡이 아니었다. 그를 둘러싼 비구름 때문에 검은빛이 흘렀던 것뿐이다.

나는 은한이 이동술을 썼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검은 공간 속에서 물안개처럼 촉촉한 기운이 나를 감싸고 있었다.

“형님이 떠나고 창에는 극심한 가뭄이 찾아왔네. 백성들은 원망으로 가득 찼고, 황실은 붕괴되기 직전이야. 이대로 가면 머지않아 멸망하겠지.”

“…….”

창의 멸망….

나는 황제가 낳은 백 명이 넘는 자식들 때문에 후계자 다툼이 일어나서 창이 멸망한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원작에서 은한은 텐스테온의 복수를 하려다 리차드에게 죽임을 당한다.

천룡이었던 은한이 목숨을 잃자, 창은 하늘이 내린 후계자를 잃고 멸망의 길을 걷게 된 거다.

멸망이 예정된 나라에 은한을 보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반대였다.

은한이 돌아가지 않으면 창이 멸망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백성들이 죽어가고 있네. 오직 은한 형님만이 창을 구할 수 있어. 황태자비여, 제발 창을 도와주게. 창의 백성들을 살려주게.”

“저는 은한 님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 제가 말한다 해도 듣지 않으실 거예요.”

은한이 천룡이며 창의 멸망을 막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나에게는 그를 설득할 힘이 없었다.

“아니. 그대의 말이라면 들으실 거야.”

하지만 백한은 확신했다. 도대체 어째서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는 건지 답답할 정도였다.

다시 제대로 말해보려 하는데, 백한의 몸이 휘청거렸다.

“백한 님!”

“괜찮아.”

그는 나의 부축을 거부하며 허리를 똑바로 세웠다.

“나에게는 시간이 얼마 없네. 그대에게 열흘의 시간을 주겠네. 그때까지 은한 형님께서 창으로 돌아오시지 않는다면, 우리의 거래는 없던 거로 하겠네.”

***

시간이 없다는 게 무슨 뜻일까?

방에서 다이애나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데, 백한이 휘청거리던 모습이 계속 아른거렸다.

설마 몸이 아픈 건 아니겠지?

툭하면 협박을 일삼는 얄미운 꼬맹이였지만 그래도 걱정됐다.

그때 밖에서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당장 돌아가거라!”

“싫습니다! 절대로 혼자 돌아가진 않을 겁니다.”

은한과 백한이 다투고 있었다.

“정녕 죽고 싶은 게냐!”

“제가 걱정되면 형님도 함께 돌아가시면 되지 않습니까? 형님, 언제까지 하늘의 뜻을 거역하실 생각이십니까?”

“죽는 게 소원이면 네 마음대로 하거라!”

나는 문을 열고 나갔다. 그러자 백한의 방에서 나오는 은한의 모습이 보였다.

은한은 나를 보자마자 고개를 숙이고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려 했다. 나는 그런 은한을 다급히 붙잡았다.

“저기, 은한 님, 잠시 대화를 할 수 있을까요?”

“네. 비 전하.”

나는 그와 함께 온실로 향했다. 온실 안에는 블레이크가 좋아하는 붉은 장미가 만발해 있었다.

“비 전하,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실은 두 분이 하시는 말씀을 들었거든요.”

“소란을 피워서 송구합니다.”

“아니요, 화를 내는 게 아니에요. 그냥 조금 궁금한 게 있어서요.”

“하문하시죠.”

“혹시 백한 님께 지병이 있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은한은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분명히 목숨이 위험하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용인은 창의 땅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특히 백룡은 강한 구속을 받고 있죠. 이대로 가면 몸이 점차 쇠약해질 겁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창으로 돌아간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겁니다.”

은한이 백한을 서둘러 돌려보내려 한 이유를 깨달았다. 그래서 시간이 없다고 말한 거였구나.아픈 건 아니니 일단 안심이었다.

어린아이가 아픈 건 싫다.

“그런데 은한 님은 창의 땅을 벗어나도 괜찮으신 건가요?”

“저는 괜찮습니다…. 어차피 버림받은 존재니까요.”

“하늘이 내린 천룡이라서가 아니라요?”

그의 얼굴이 일순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들으셨습니까?”

“네. 백한 님께 들었어요. 은한 님께서 돌아가시지 않으면 창이 멸망할 수도 있다는 말도요.”

“참으로 역겨운 말입니다.”

은한은 거칠게 뱉었다.

“창을 위해서 죽으라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 전부 착각이었으니 창을 위해 돌아오랍니다. 불길한 자식을 낳은 죄로 어머니를 죽여놓고, 이제 와서 황후로 추존해 주겠답니다. 그런다고 돌아가신 어머니가 살아온답니까? 역겨워서 토기가 치밉니다.”

옆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그의 울분과 분노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흑룡이든 천룡이든 관심 없습니다. 창의 운명 따위는 제 알 바 아닙니다. 차라리 멸망하면 속이 시원할 겁니다. 저는 돌아가지 않습니다. 절대로 창의 땅에 발을 딛지 않을 겁니다.”

언제나 정중하고 조용하던 은한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이를 악물며 참을 수 없는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오랜 원망을 토해내는 그를 향해 차마 창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은한의 원한은 내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깊었고, 황제가 될 기회와 창의 상황을 알고도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며 이를 갈았다.

그가 열흘 안에 마음을 바꿀 일은 없을 것 같았다.

***

백한은 앞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혼자 지내기 어려웠다. 게다가 어른들을 이상하게 경계했다. 콜린을 피해 다닌 것도 그 때문일 거다.

나랑 있는 것조차 묘하게 불편해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블레이크와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블레이크, 이거 뭐지?”

“크라바트.”

“…크라바트.”

백한이 블레이크의 말을 따라 하며 자신의 크라바트를 매만졌다.

그는 엄청난 속도로 제국어를 습득했다. 블레이크한테 하나하나 물어보며 열심히 배우기도 했지만, 그전에 보통 사람과는 다른 능력이 있었다.

“백한 군, 이제 제국어를 잘하네요.”

내가 말을 걸자 백한이 찌릿 째려보았다. 그는 ‘대신관님’으로 불리길 원했다. 하지만 은한의 동생 자격으로 황태자궁에 머무는 상황에서 ‘대신관’이나 ‘황자’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공식적으로는 평민의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님’이나 ‘경’이라 칭하는 것도 맞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다른 사람과 있을 때는 ‘백한 군’이라고 불렀지만, 그는 아무래도 호칭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나는 백룡의 그릇이다. 그대에게 뒤지지 않는다.”

“알고 있어요. 저는 평범한 사람인걸요.”

“흐음. 그래?”

그가 턱을 문지르며 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아는데도 그와 눈이 마주치면 모든 것이 꿰뚫리는 듯한 이상한 느낌이 든다.

“그런데 백한은 몇 살이야?”

블레이크의 질문에 백한은 건조하게 답했다.

“나는 백룡의 그릇이다. 그런 건 의미가 없다.”

“남자인 건 맞지?”

“그릇에게 그런 것은 무의미하다.”

백한은 비밀이 많았고 자신의 성별이나 나이를 말해주지 않았다. 은한도 ‘이미 백룡의 그릇이 되었으니 그런 것들은 중요치 않다’라고 하며 입을 다물었다.

다른 용인과 달리 백룡의 선택을 받은 자는 ‘용’ 그 자체로 대하는 문화인 듯했다.

“백한 군, 눈은 언제부터 안 보였던 건가요?”

“안 보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걸 보게 된 거다.”

“새로운 거라면 어떤…?”

“형님이 지금 어디 계신지 알 수 있지.”

그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예쁘지만 스토커 같다.

“그럼 사람들의 위치를 전부 파악하는 거예요?”

“이 몸이 어찌하여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해야 하지? 다른 인간은 관심 없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스토킹 대상은 은한으로 한정되는 것 같았다. 정작 은한은 백한의 인사조차 제대로 받아주지 않고 있지만 말이다.

“나랑 형님은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 방해하지 마라.”

어째 대화가 잘 이루어진다고 했더니 그는 대뜸 나에게 날을 세웠다.

“내가 언제 방해를 했다고 그래요.”

“그대는 그대의 빛에 충실해.”

백한은 불퉁하게 뱉었다. 그는 가끔 아리송한 말을 했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형님을 모실 수 있는 자는 오직 저뿐입니다. 다른 빛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나를 공격하려 들었지.

“저기 빛이라는 게 뭔가요?”

“형님을 설득하게. 그럼 알려주지.”

그는 창의 말로 새침하게 뱉고는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매번 저런 식이다. 뭔가 알려줄 것처럼 굴면서도 결국 입을 다물어버린다.

나와 은한의 사이를 의심하며 경계하면서도 얼른 그를 설득하라고 재촉한다. 어느 쪽이든 하나만 해줬으면 좋겠는데….

“백한,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창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블레이크가 궁금해하자, 백한이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자네가 귀엽다는 말을 했네.”

“나 이제 안 귀여워.”

“하하. 정말로 귀여울 때로군.”

그가 껄껄 웃었다. 그래도 블레이크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때 외모와 어울리지 않게 껄껄 웃던 백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밖으로 뛰어갔다. 아무리 이곳의 지리에 익숙해졌다고는 하지만 앞이 보이지 않는데 저렇게 뛰는 건 위험했다.

나와 블레이크는 서둘러 그를 쫓았다.

백한에게서 아이같이 천진한 미소를 끌어낼 사람은 오직 한 명뿐이었다.

“형님!”

백한이 반갑게 웃으며 달려갔지만, 은한은 이복동생에게 눈길조차 건네지 않은 채 우리에게 예를 갖추었다.

“황태자 전하와 황태자비 전하를 뵙습니다.”

“형님, 오늘도 제국어를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아스테릭의 옷도 입어 보았습니다. 이것을 크라바트라고 한답니다.”

며칠 동안 은한에게 무시당한 백한은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은한이 방으로 들어가버리기 전에 한마디라도 더 해보려는 절박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은한은 그의 유창한 제국어를 듣고도 싸늘하게 반응했다.

“시끄럽다. 전하께 인사를 올리고 있는데, 이게 무슨 결례이냐.”

“…죄송합니다.”

“은한 님, 그렇게까지 말씀하실 필요는 없잖아요.”

“너무하잖아! 백한이 하루 종일 너를 얼마나 애타게 기다린 줄 알아?”

“황태자 전하를 귀찮게 해드렸나 보군요. 송구합니다. 하루속히 돌려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말이 아니잖아!”

블레이크가 화를 내자, 백한이 다급히 그를 말렸다.

“블레이크, 화내지 말게. 내가 잘못하였어. 형님,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하였습니다.”

은한은 사과하는 백한을 무시한 채, 평소와 같이 정중한 태도로 블레이크에게 물었다.

“전하, 몸은 어떠신지요?”

“좋아.”

“다행입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끝까지 백한에게는 다정한 말 한마디조차 해주지 않았다.

백한을 고개를 푹 떨구었다. 너무 슬퍼 보여서 위로의 말을 건넬 수조차 없었다.

***

블레이크는 침대에 누워서도 분을 삭이지 못했다.

“너무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그렇게 매정한 녀석인 줄은 몰랐어!”

“은한 님도 사정이 있으실 거예요.”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든 백한의 잘못은 아니잖아! 백한이 얼마나 그 녀석을 좋아하는데! 제국어를 배우고 이곳의 옷을 입어보는 것도 전부 그 녀석한테 말 한마디라도 붙이고 칭찬받고 싶어서 그런 거라고. 그런데 시끄럽다니. 너무하잖아.”

블레이크가 이렇게 흥분한 모습은 처음 보았다. 그는 초연하고 침착한 편인 데다가, 내가 아닌 타인에게는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았다. 다이애나도 내 여동생이라 신경을 썼던 것 같고.

어딘지 색이 옅었던 그의 마음이 조금은 더 다채롭게 변한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이런 게 성장이란 거겠지.

나는 그의 은빛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속상하셨어요?”

“하루 종일 기다렸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앤시아가 그랬다면 나는 너무 슬퍼서 견딜 수 없을 거야.”

블레이크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블레이크, 왜 갑자기 울려고 그래요.”

나는 당황하며 그의 양 볼을 감쌌다.

“앤시아가 나한테 시끄럽다고 말하는 상상을 했더니, 슬퍼졌어.”

…성장했다는 말은 취소다. 아직 어린애라니까.

“제가 왜 그런 말을 하겠어요?”

“앤시아는 나를 귀찮아하면 안 돼? 알았지?”

“제가 우리 블레이크를 귀찮아할 리 없잖아요.”

“우응, 그래도 슬퍼.”

그의 커다란 눈동자에서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우리 토끼 또 왜 슬퍼요?”

“그냥 앤시아가 나한테 화내는 생각을 했더니 계속 슬퍼.”

나는 엷게 웃으며 그를 꼭 끌어안았다.

“예쁘다. 우리 블레이크 멋있다. 귀엽다.”

그리고 자장가를 부르듯 계속 블레이크의 칭찬을 해주었다.

블레이크가 잠이 들자, 나는 일어나서 그의 양손을 잡아보았다. 여전히 오른손보다 왼손이 더 차가웠다. 저주의 문장이 새겨진 곳은 체온이 낮았다.

조금이라도 혈액 순환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 그의 왼쪽 몸을 꾹꾹 누르며 안마를 해주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에 누구지?

“나네. 들어가도 되겠는가?”

가느다란 미성에 어울리지 않는 노숙한 말투의 주인공은 바로 백한이었다.

“들어오세요.”

“그럼 실례하겠네. 아!”

안으로 들어온 백한이 갑자기 짧은 비명을 질렀다.

“쉿!”

나는 깜짝 놀라서 검지를 입술에 가져갔다. 우리 블레이크 겨우 잠들었는데 다시 깨겠네.

그러자 백한은 자신의 입을 얼른 손으로 막았다. 하지만 그 뒤에도 계속 안절부절못하며 창의 언어로 중얼거렸다.

“낭군과 한 침대에 있는데 사람을 들이다니. 어허! 이래서 요즘 아이들은!”

백한의 나이는 정확히 모르지만 아무리 많아도 은한보단 어릴 거다. 맥시멈으로 잡아도 미자인 녀석이 요즘 애들 타령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안마를 하는 것뿐이라고요.”

“안마?”

“저주가 퍼진 곳은 체온이 낮거든요. 그래서 조금이라도 따뜻해지라고 안마를 해주는 거예요.”

왼손이 차갑기 때문에 책을 넘길 때 손을 떨거나 식기를 떨어뜨리기도 하고, 훈련 중에 검을 놓치는 경우도 있었다.

내 앞에서는 필사적으로 참아서 그런 모습은 별로 보이지 않았지만, 다른 궁인들은 블레이크가 물건을 떨어트리거나 넘어지는 모습을 어렸을 때부터 자주 봐 왔다고 했다.

“블레이크는 복이 많구나. 좋은 부인을 맞이했어.”

“…저는 고작 이런 것밖에 못 해주는걸요.”

“진심 어린 마음보다 소중한 건 없지. 마음의 허기짐은 산해진미와 억만 냥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법이야.”

“위로해주셔서 감사해요.”

“위로가 아니네. 자네들을 보니 옛 생각이 나는군. 나는 못난 인간이었네. 비루한 나를 오직 은한 형님만이 아껴주셨지.”

백한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감돌았다.

“저기 백한 님, 오늘 일은 말이죠….”

“형님께서는 내가 걱정돼서 그러신 거야. 나를 창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애써 모진 말씀을 하시는 거지. 원래는 정말로 따뜻하신 분이야.”

내가 위로하기 위해 준비했던 말을 그가 먼저 뱉었다. 저 말을 하려고 온 거구나. 우리가 혹여 은한을 나쁘게 볼까 봐 걱정이 된 거다.

“알아요. 은한 님은 좋은 분이시죠.”

“맞아. 훌륭한 분이시지.”

그는 침대 가까이 다가와 블레이크를 바라보았다. 분명 눈이 보이지 않는데도 그를 또렷하게 응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눈에는 무엇이 보이는 걸까?

백한의 손이 블레이크의 이마 중앙을 꾸욱 누르더니, 저주의 문장이 퍼진 경계를 따라 밑으로 내려갔다.

“여기 선이 있네.”

“선이요?”

“새하얀 빛의 선이 저주가 퍼지는 걸 막고 있지.”

블레이크의 저주는 3년 동안 그대로였다. 원작과 다른 어떤 힘이 작용하여 블레이크의 저주를 풀었던 걸까? 그 방법을 알아내면 저주를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하면 그 선을 더 크게 만들 수 있죠?”

“그걸 왜 나한테 묻나? 자네가 만든 것을.”

“제가 만들었다고요? 그게 무슨 뜻인가요?”

내가 빛의 선을 만들었고, 그로 인해 저주가 퍼지지 않았다는 건가?

“알고 싶다면 형님을 설득하게.”

백한은 돌연 차갑게 뱉으며 몸을 돌렸다. 나는 밖으로 나가는 그를 다급히 붙잡았다.

“잠깐만요!”

“뭔가?”

“제발 알려주시면 안 돼요?”

나는 간곡하게 부탁했다. 이제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닷새 뒤면 백한은 창으로 돌아간다.

그가 블레이크에게 마음을 열었다고 생각했다. 블레이크를 좋아하는 백한의 모습을 보며 그가 저주에 대해 알려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백한은 처음과 똑같이 냉정했다.

“거래를 잊은 건가?”

“은한 님은 돌아가시지 않을 거예요. 그건 백한 님께서 더 잘 아시잖아요.”

“그걸 설득하는 게 그대의 일이지.”

“블레이크랑 함께 있으셨잖아요. 우리 블레이크가 얼마나 착한 사람인지 아시잖아요. 저주 때문에 많이 힘들었어요. 평생 아무런 잘못도 없이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았고, 하루도 아프지 않은 날이 없어요. 저주가 살을 파고드는 고통에 시달리고 아파하다 이제 아픔조차 면역이 된 아이예요. 그런데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하지만 백한 님은 다르잖아요. 제발 알려주세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게요.”

나는 그에게 무릎을 꿇고 빌었다.

“뭐든 하겠다고?”

“네.”

“그럼 그를 대신해서 죽을 수도 있나?”

“네.”

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백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흐름에 휩쓸려 대답한 것도 아니었다. 순수한 진심이었다.

백한의 질문을 듣는 순간,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블레이크를 위해서라면 내 목숨도 바칠 수 있다.

내가 그를 이렇게까지 사랑하고 있었던가? 스스로도 알지 못했던 진심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정정할 생각은 없었다.

“제 눈이든 목숨이든 뭐든 가져가세요. 그리고 블레이크의 저주를 풀어주세요.”

하지만 백한은 간절하게 잡은 나의 손을 뿌리쳤다.

“…내가 원하는 건 형님뿐이야. 남은 시간이 얼마 없어. 자네의 낭군을 구하고 싶다면 서두르게.”

***

“도대체 왜 너 같은 게 태어난 것이냐!”

백한의 어미인 맹 상궁은 늘 술에 취해 있었다. 황제의 승은을 받고 아이를 낳았으나, 기녀 출신인 그녀는 후궁 첩지조차 받지 못하여 상궁에 머물렀다.

황궁 구석에 있는 낡은 전각은 그녀가 몸담았던 기루보다 초라했다.

맹 상궁은 술에 취해 백한을 때렸고, 술에 취하지 않을 때도 폭력을 가하였다. 욕을 듣는 날이 듣지 않는 날보다 많았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황제의 자식만 백 명이 넘었다. 정식 후궁의 자식이 아닌 데다 용의 선택을 받지 못한 아이. 그런 어린아이는 이곳에서 무가치한 존재였다.

아무도 저지하는 사람이 없자 맹 상궁의 행동은 점점 더 심해졌고, 급기야는 용인을 만든다는 사술을 쓰기에 이르렀다.

그때 이웃 전각에서 지내던 은한이 백한을 구해주었다. 그날 이후 백한은 어머니를 피해 자주 은한에게 도망쳤다.

은한의 어머니는 천민이었다. 게다가 은한은 몸이 약하여 자주 앓았다. 그들 역시 힘들었을 텐데도 백한을 귀찮아하거나 꺼리는 기색이 없었다.

백한은 은한을 가족으로 여겼다. 백 명이 넘는 이복형제가 있었지만, 그가 진짜 형제라고 느낀 사람은 은한이 유일했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나라를 멸망시킬 흑룡의 선택을 받았다며 은한이 옥사로 끌려갔다.

그의 처형 소식을 듣고 백한은 심장이 끊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은한은 도망쳤다.

은한이 사라지자 그와 친했던 백한은 추궁을 받았다. 하지만 옥에 갇혀도 두렵지 않았다. 그는 오직 은한이 무사하기만을 빌었다.

그러던 중 백한의 몸에 변화가 생겼다. 백룡이 그를 선택한 것이다.

백룡과 계약을 맺으려면 자신의 육신을 대가로 바쳐야 했다. 시력을 잃고, 육체의 성장도 멈추게 된다. 평생 아이의 모습으로 살아야 하지만 은한은 기꺼이 백룡을 받아들였다.

백룡은 천하 만물을 바라보고 빛을 내리는 존재였다. 만약 자신이 백룡이 된다면 은한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백룡과 계약을 맺는 순간에도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은한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그는 천박하고 쓸모없는 기녀의 자식에서 당당한 창의 대신관이 되었다.

매일 수많은 궁녀들이 그를 단장해주었다. 값비싼 비단옷을 입고 옥으로 만든 비녀를 꽂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슬프지는 않았다.

‘은한 형님은 살아계신다.’

그는 은한의 존재를 느꼈다. 그리고 은한이 실은 흑룡이 아니라 하늘이 선택한 천룡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백한이 그 사실을 밝히자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황태자의 자리를 노리는 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백한을 협박했다. 은한은 이미 죽었으니 자신을 차기 황제로 지목하라며 어린 백한에게 윽박질렀고, 협박이 통하지 않자 죽이려고 했다.

그의 모친인 맹 상궁은 백한 덕분에 귀비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백한을 찾아와 행패를 부렸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들 백한을 이용하기 위해 거짓된 미소를 지으며 접근해왔다. 백한에게는 사람의 마음이 보였다. 거짓과 탐욕으로 가득 찬 사람들의 마음은 악취로 가득했다.

협박, 가식, 조종, 괴롭힘, 폭력….

백한은 매일매일 고통을 견뎠다. 날이 갈수록 은한에 대한 그리움은 커져만 갔다.

그리고 마침내 은한을 찾아냈다. 아직도 꼬맹이인 자신에 비해 은한은 멋진 청년이 되어 있었다.

‘형님, 저를 구해주세요. 그 지옥 속에서 저를 구해주세요.’

백한은 그를 붙잡고 엉엉 울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짐만 되었던 이복동생의 눈물 따위는 부담스럽기만 할 거다. 그는 이복동생이 아니라 창의 대신관으로서 은한에게 청했다.

“백룡 모백한은 모은한을 주인으로 선택하였습니다. 부디 창의 황제가 되어주십시오.”

하지만 은한은 야멸차게 백한의 부탁을 거절했다. 백한은 깨달았다. 자신은 형님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

고민 끝에 백한은 앤시아를 택했다. 이토록 찬란하게 빛나는 사람이라면 분명 형님을 설득할 수 있을 거다.

백한은 앤시아에게 거래를 제안했다. 아스테릭의 황태자는 저주에 걸렸다. 이를 이용하면 형님과 함께 창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에게는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황태자의 저주를 풀 수 있게 도와달라며 애원하는 앤시아를 보자 가슴이 무거워졌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어린아이의 생명을 빌미로 간절한 마음을 이용하고 있지 않은가?

나를 협박하던 인간들과 다를 게 뭐지?

“백한, 이 꽃향기 좀 맡아봐.”

블레이크가 꽃을 꺾어서 백한의 손에 쥐여주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백한은 얼른 엷은 미소를 지으며 향기를 맡았다.

“향기롭구나.”

“그렇지? 꽃도 아주 예뻐. 너처럼 새하얀색이야.”

블레이크는 어제 일로 우울해할 백한을 위로해 주기 위해 그를 온실로 데려왔다.

‘내가 자신의 생명을 두고 반려를 협박하는 흉악한 인간이라는 걸 알면 이 아이의 마음은 어떻게 변할까? 분노로 물들까? 아니면 슬퍼할까?’

어느 쪽이든 싫었다.

“나보다는 그대를 닮은 것 같군.”

“아닌데.”

“맞네. 그대가 나보다 훨씬 투명해. 나에게는 보이네.”

“진짜 나를 보면 실망하겠다. 나는 괴물인데.”

“그렇지 않네!”

괴물이 아니다. 백한에게는 보였다. 은한이 결국 흑룡이 아니라 천룡이었듯, 이 소년도…!

하지만 말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지금 보이는 걸 전부 말해버린다면 형님은 누가 설득하지? 비겁한 마음이 그의 몸을 짓눌렀다.

그가 입술을 달싹거리는데, 블레이크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화관을 만들 건데, 도와줄래?”

“…알겠네.”

블레이크는 온실의 꽃을 따서 한곳에 모았다. 도와달라고 했지만 백한이 딱히 할 일은 없었다.

그는 사부작사부작 블레이크가 화관을 만드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째서 이런 걸 직접 만드는 건가? 아랫것을 시키지 않고.”

“부인한테 선물할 거야. 다른 사람이 만들면 의미가 없잖아.”

“…생일인가?”

“아니.”

“그럼 무슨 날인가?”

블레이크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 날도 아니야. 그냥 주고 싶어서 만드는 거야.”

“선물을 자주 주나?”

“아니. 원래는 안 줬어. 필요한 건 폐하께서 전부 주시고, 내가 선물로 준다고 해도 어차피 폐하의 돈이니까. 게다가 나는 얼마 안 가서 죽을 거고.”

“…….”

어린 소년의 담담한 말에 백한은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정작 블레이크는 태연했다.

“은한한테 들었지? 내가 성인이 되기 전에 죽는다는 거?”

“…그렇네.”

“그래서 괜히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았어. 그럼 앤시아가 슬퍼할 테니까. 그런데 작년에 몸이 갑자기 아팠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니까 엄청 후회가 들더라고. 그래서 온실에서 장미꽃을 꺾어서 앤시아한테 줬어. 꽃은 어차피 금방 시들잖아? 나처럼.”

“…….”

“그런데 앤시아가 너무 좋아했어. 장미꽃에 보존 마법까지 걸어서 보관하고, 매일 바라봤어. 시들면 버리라고 준 거였는데 말이야…. 그 모습을 보면서 진작 줄 걸 하고, 또 후회했어. 그래서 앞으로는 선물을 많이 해주기로 했어.”

블레이크는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백한의 눈에 그 모습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빛이 움직이는 흐름을 보며 블레이크가 화관을 엮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앤시아를 위해 선물을 만드는 블레이크는 즐거워 보였다.

“죽지 않을지도 모르네….”

“…노력해보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힘들 거 같아.”

“…죽을 거라 생각하면서 어찌하여 매일 검술 훈련을 하는 건가?”

“복근을 만들려고.”

“복근?”

“응. 죽기 전에는 만들어 보고 싶거든. 부인한테 멋있다는 말을 들을 거야. 실은 나, 이번에 조금 많이 아팠거든. 저주의 문장은 그대로지만 몸이 이상해지고 있어. 아마 한계일지도 몰라. 그 전에 만들려면 시간이 없어.”

“…….”

블레이크를 감싼 빛이 맑게 반짝였다. 어린아이에게 어울리지 않는 초연함에 백한은 말문이 막혔다.

“이건 비밀이야! 앤시아가 알면 속상해할 거야.”

“…알겠네.”

“고마워.”

블레이크는 화사하게 웃었다. 티 없이 맑은 목소리를 듣자 백한은 왠지 울고 싶어졌다.

***

“제 고국은 아스테릭이고, 저의 주군은 오직 텐스테온 폐하 한 분뿐이십니다. 다시는 이런 말씀은 하지 않아 주셨으면 합니다.”

나는 백한의 말대로 은한을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단칼에 거절당했다. 그토록 싸늘한 은한의 표정은 처음 보았다.

내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역시 텐스테온에게 말해볼까? 그의 명이라면 은한은 반드시 따를 거다.

하지만 내키지 않았다.

텐스테온은 최근 들어 황태자궁에 걸음을 하지 않았다. 그가 블레이크를 자주 찾자 이를 항의하는 귀족들의 상소가 빗발치고 있다고 했다. 가뜩이나 마음이 무거울 텐데, 그를 더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백한과의 거래 조건을 떠나서, 은한을 강제로 복종시키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은한이 돌아가지 않으면 창은 무너지고 동대륙이 전란에 휩싸일 거다. 수많은 백성이 죽고 그 혼란이 아스테릭까지 미치겠지.

하지만 대승적인 차원에서 떠나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창은 은한의 원수였다. 은한 역시 저런 상황을 알고 있으면서도 창으로 돌아가길 거부하는 거였으니, 그렇게 말한다고 해도 듣지도 않을 거다.

똑똑

머리를 쥐어뜯는데, 노크 소리와 함께 백한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네.”

“들어오세요.”

방으로 들어온 백한은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였다.

“고민이 많아 보이는군.”

“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블레이크요.”

수많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오직 하나였다. 블레이크, 그를 구하고 싶다. 모든 걸 다 떠나서 그의 저주를 풀고 싶다.

“내가 밉겠군.”

“아니요. 다만 무력한 나 자신이 싫을 뿐이에요.”

“그대는 참 선한 사람이야.”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백한은 빙그레 웃더니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네의 신랑은 오늘도 열심히 하는군.”

“여기서 보이세요?”

블레이크는 지금 연무장에서 검술 훈련 중이었다.

“저리 선명한데 보이지 않을 리가 있나?”

내 방에서는 연무장이 안 보이는데….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창밖을 바라봤지만 역시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안 보이는데요.”

“인간이라면 그러겠지.”

백룡의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건가? 나는 묘한 빛을 띠는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은 어떤 모습인 걸까?

“황태자 전하가 마음에 드세요?”

“형님과 나의 어린 시절을 보는 것 같아.”

“보기보다 나이가 있으신가 봐요?”

얼굴만 보면 열 살 남짓으로 보였지만, 그의 행동이나 말투, 그리고 어린 시절 은한과 자주 함께 놀았다는 말에서 유추해 봤을 때 그보다는 확실히 나이가 많을 거다.

내가 넌지시 묻자, 백한은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아무렴 자네만 할까?”

“…저요?”

“어린 척하느라 힘들겠어.”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내가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걸 어떻게?”

“나는 인간이 보지 못하는 본질을 보지. 영혼, 흐름, 힘….”

백한은 나를 향해 손을 뻗더니 무언가 확인하듯 얼굴을 매만졌다.

“그대는 많은 고난을 겪었겠군. 하지만 맑고 찬란하지. 앞으로도 그 고결함이 무너질 일은 없을 걸세.”

그의 눈동자에 이채가 돌며 얼굴에 맴돌던 미소가 천천히 사라졌다.

“천성이 착하니 수많은 이를 구하겠지. 그러나 스스로를 구할 수는 없겠지.”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곧 선택의 순간이 오겠군.”

“선택이요?”

“모두들 미련하다 노래하겠지만 그대는 기쁨 속에 온몸을 태울 걸세.”

“…….”

“새하얀 불빛 속에 타들어 가는 그대가 보여.”

백한의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머릿속이 혼란스럽게 뒤엉킨 와중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제가 블레이크의 저주를 풀 수 있다는 말인가요?”

“낭군님 생각부터 하는 건가? 역시 자네는 미련하군.”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나에게 보이는 건 그게 전부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도 아리송한 힌트만을 남기고 떠나려는 건가?

“저기….”

백한을 붙잡으려는 순간 그가 몸을 돌렸다.

“석판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게.”

“아, 네! 네!”

어쩌면 석판에 대해 알려줄지도 모른다. 나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

나는 백한과 함께 필리온궁 3층에 있는 비밀방으로 향했다.

“여긴 왜…?”

“왜긴 왜겠나, 석판에 대해 알고 싶은 게 아니었나?”

“하지만 저는….”

목소리가 작아졌다. 나는 결국 은한을 설득하지 못했다. 하지만 백한은 엷게 웃으며 석판으로 다가갔다. 마치 앞이 보이는 것처럼 거침없는 발걸음이었다.

“백한 님, 정말로 석판을 해석해 주실 건가요?”

“아니.”

그는 고개를 저었다. 설마 나를 놀린 건가? 이번에는 정말로 화를 내려고 하는데, 백한이 덧붙였다.

“나는 이 석판 뒤에 가려진 글씨를 복원할 뿐이네. 해석은 그대의 몫이야.”

“복원해주신다고요?”

“그래.”

천년의 시간 속에 마모되어 버린 석판을 어떻게 복원한다는 걸까?

백룡의 힘이 있으니 가능할 거라고 막연히 생각해왔지만, 막상 이 순간이 닥치니 궁금해졌다. 백한은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자상하게 설명해 주었다.

“석판에 걸린 빛의 힘을 되살릴 걸세.”

“이 석판에 마법이 걸려 있나요?”

“몰랐는가? 새긴 것도 지운 것도 모두 마법이지.”

“그럼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석판의 글씨를 지웠다는 건가요?”

제국의 역사를 기록한 중요한 석판이니 마법을 써서 글자를 새긴 건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지운 것도 마법이었다고? 오랜 시간을 거치며 자연스럽게 침식된 것이 아니라 일부러 지운 거였어?

“그렇네. 황태자비여, 술법을 써야 하니 잠시 뒤로 물러가 있게나.”

“네. 알겠어요.”

나는 뒤에 서서 백한을 바라보았다.

그는 비장한 표정으로 석판 위에 손을 올렸다. 새하얀 빛이 그의 손에서 흘러나와 석판으로 퍼져나가며 빛의 막을 형성했다.

백한의 새하얀 머리카락과 의복이 거칠게 휘날렸다. 나 역시도 거친 파장 속에 제대로 서 있기 힘들었다.

석판을 중심으로 빛의 불꽃이 튀었다. 숨기는 힘과 그것을 깨부수는 힘이 맞부딪치며 거친 싸움이 이어졌다.

그리고 힘의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백한에게서 나오는 빛의 힘과 석판 안쪽에서부터 흐르는 빛이 동시에 쏟아지며, 석판에서부터 튀어나온 검은 불꽃이 점차 사그라들었다.

그와 동시에 아무것도 없는 석판에 글씨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아니, 원래 새겨져 있던 글자가 백한의 도움을 받아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거다.

-5년 9월, 여신의 저주에 걸렸던 3황녀가 예척했다. 그 직후 6황자에게 여신의 저주가 이어졌다.

제국년 5년이면 필립이 황제였을 시절이었다. 그런데 3황녀와 6황자라니? 필립은 세 명의 아들만 낳았을 텐데?

의문을 품기도 전에 다음 글씨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5년 11월, 6황자의 몸에 새겨진 저주의 문장이 바뀌었다.

6황자가 예척했다. 그 직후 7황자에게 여신의 저주가 이어졌다.

저주의 문장이 바뀌었다고? 그럼 여신이 처음 걸었던 저주가 바뀌었다는 건가?

의문이 꼬리의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석판에 새겨진 글자가 모두 나타나고, 새하얀 빛도 점차 줄어들었다. 그때 석판 밑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검은 빛줄기가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 순간 눈앞이 하얗게 점멸하더니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

[앤시아, 이게 무슨 짓이야! 얼굴을 보자마자 뛰쳐나오면 어떻게 해! 아무리 놀랐다고 해도 이러면 안 되잖아!]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앤시아였다.

결혼식 첫날, 블레이크의 얼굴을 보고 놀라서 도망쳐버린 앤시아가 호숫가에 앉아서 자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의 소리가 흘러들어왔다.

[돌아가서 황태자 전하께 사과하자. 내가 백작저에서 나오도록 나올 수 있었던 것도 전부 전하 덕이잖아. 고마워해야 해.]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그때 호수 안에 반짝이는 무언가가 앤시아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저게 뭐지?]

앤시아는 호수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 순간 빛이 번쩍이며 그녀는 균형을 잃고 호수 아래로 빠지고 말았다. 앤시아는 빠져나가려 했다.

하지만 호수 아래 있는 석판에서 검은빛이 쏟아져 나오더니 뱀처럼 길게 늘어지며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앤시아는 점점 호수 깊은 곳으로 빠져들어 갔다. 괴로웠다. 숨이 막히고 눈앞이 흐려졌다.

죽음의 입구에서 신비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빛의 계승자여, 그대가 지닌 힘을 누구에게 전할 텐가?]

앤시아는 괴로웠다. 그 질문이 무슨 뜻인지 이해되지 않았고, 답이 생각나지도 않았다. 그저 주마등처럼 스치는 과거의 기억 속에서 자신에게 유일하게 잘해주었던 이복동생 다이애나를 떠올렸을 뿐이다.

[앤시아 벨라시안, 그대의 뜻에 따라 다이애나 벨리시안이 새로운 빛의 계승자로 선택되었네.]

앤시아는 그 목소리를 끝으로 눈을 감았다.

석판의 검은 빛이 앤시아를 뒤덮었다. 석판은 앤시아의 빛을 먹어 치우려 했다. 하지만 앤시아의 몸에서 새하얀 빛이 솟아나며 검은 빛을 지워버렸다. 석판마저 산산조각이 났다.

앤시아는 숨을 거두었다. 그녀가 죽자 앤시아의 빛은 슬퍼하며 작은 몸의 주변을 맴돌았다. 하지만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앤시아는 빛을 담을 수 없었다.

빛은 슬퍼하며 다음 계승자에게로 향했다. 앤시아가 지목한 후계자, 바로 다이애나였다.

“하아!”

정신이 들자마자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숨이 쉬어졌다. 여긴 호수가 아니다.

꿈을 꾼 건가? 아니다.

그건 원작이었다. 원작에서 벌어졌던 일이지만 소설에 나오지 않은 숨겨진 내용이었다.

원래 벨라시안 가문의 빛의 계승자는 앤시아였다. 하지만 호수 속 석판에 담겨 있던 검은 빛이 앤시아를 공격하며 그녀는 숨을 거두었고, 다이애나에게 빛의 힘이 계승되었던 거다.

하지만 내가 이 세계에 오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앤시아는 살아남았다. 석판도 부서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빛의 힘 역시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지 않고 아직 내 안에 그대로 있을 것이다.

“정신이 드는가?”

백한의 목소리와 함께 상념에서 깨어났다.

이곳은 3층의 비밀방이었다. 석판을 해독하다가 검은빛의 공격을 당해 잠시 의식을 잃었던 모양이다.

“미안하네. 내가 실수를 하는 바람에 자네가 다칠 뻔했어.”

꿈속에서 보았던 것처럼 석판은 산산이 부서져 있었다.

“저를 구해주신 건가요?”

“석판에 사악한 힘이 담겨 있었어. 완벽히 막았어야 했는데, 미안하네.”

꿈에서처럼 석판은 나를 공격하려 했다. 하지만 백한이 이를 막았고, 모든 힘을 쏟아낸 석판은 그대로 산산 조각난 모양이었다.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백한 님은 제 목숨을 구해주신걸요. 석판도 복원해주셨고요.”

비록 석판이 부서지긴 했지만, 그 내용은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게다가 방금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된걸요.”

“무엇을 말인가?”

“아무래도 제가 빛의 힘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아요.”

나의 대답을 들은 백한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걸 이제 알았는가?”

“백한 님께서는 알고 계셨어요?”

“처음 본 순간 알았지. 이렇게 아름답게 빛나는데 어찌 모를 수가 있겠나?”

백한의 말을 듣자 비로소 마음이 놓였고, 곧 벅차올랐다.

정말로 나다. 내가 바로 벨라시안 가문의 빛의 계승자였다.

“그대가 만든 음식에도 미약하지만, 빛의 힘이 깃들어 있었지. 마나와 용력은 그 힘의 근원이 다르지. 백룡은 다른 빛을 허락하지 않고, 그래서 자네가 만든 음식을 먹을 수 없었던 거네. 열심히 만든 요리를 먹어주지 못해 미안했네.”

“아니에요. 그렇다면 당연히 드시면 안 되죠!”

“이해해 줘서 고맙네.”

“그나저나 놀라워요. 제가 만든 음식에 빛의 힘이 있었다니….”

나는 나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에게 빛의 힘이 있다니.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대의 힘은 강하네. 낭군의 저주가 퍼지지 않은 것도 모두 자네 덕분이지. 그대의 빛이 경계를 만들고 벽을 세우며 저주가 퍼지는 걸 막고 있다네. 자네에게서 나오는 빛이 너무 밝아 새로운 어둠이 힘을 쓰지 못하고 있지.”

“제가 블레이크한테 도움이 되었던 거네요.”

“그의 몸에서는 수많은 싸움이 벌어지고 있네. 같은 힘이 뒤엉켜 전쟁을 벌이고 있지. 그리고 그대에게서 블레이크와 같은 힘이 느껴져. 자네의 의지가 있다면 뒤엉킨 실타래를 풀고 저주를 파훼할 수 있을 걸세.”

내가 빛의 계승자다. 블레이크의 저주를 풀 수 있다.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아도 된다.

꿈만 같은 상황에 가슴이 벅차고 눈물이 맺혔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백한 님!”

“고마워할 일은 아니지. 꼭꼭 숨기고 있다가 이제야 알려준 못된 사람인데.”

“아니에요. 저는 결국 백한 님이 원하는 걸 들어드리지 못했잖아요. 그런데도 전부 알려주셨잖아요.”

“그리 말해주니 고맙군.”

그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순간 그의 몸이 휘청거리며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나는 깜짝 놀라서 그를 부축했다.

“백한 님, 괜찮으세요?”

“하하. 오랜만에 힘을 썼더니 어지럽구먼. 이만 돌아가세.”

“네. 어서 돌아가요.”

***

황태자궁으로 돌아왔지만, 백한의 상태는 더욱 나빠졌다.

원래도 하얀 피부가 새하얗게 질리고, 체온도 급격하게 떨어졌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궁의를 불러올게요.”

“되었네. 오랜만에 용력을 써서 좀 피곤한 거야. 한숨 자면 되네. 이만 나가주게.”

“하지만….”

“피곤하대도. 어서 물러가게.”

그가 엄하게 축객령을 내렸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단순히 한숨 자는 걸로 해결될 것 같지 않았다.

백한이 말한 시간까지는 아직 사흘이나 남았지만, 힘을 사용하면서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아무래도 은한을 만나야겠다. 지금 황궁에서 용력에 대해 아는 사람은 은한뿐이었다.

그를 찾으러 가려는데, 때마침 별궁 안으로 들어오는 은한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다급히 1층으로 내려갔다.

“은한 님!”

“…비 전하.”

언제나 나를 보면 반갑게 인사하던 은한이었지만 오늘은 그 자리에서 딱딱하게 굳었다. 내가 또다시 창으로 가라고 설득할까 봐 그러는 거겠지.

“은한 님, 백한 님이…!”

“실례지만 그 이야기라면 하고 싶지 않습니다.”

역시나 백한의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차갑게 말을 끊으며 거부의 뜻을 밝혔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지금 백한 님이 많이 아파요! 힘을 쓰고 나서부터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고, 체온도 떨어졌어요.”

“힘을 쓰다니요?”

나는 다급히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그러자 은한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기 시작하더니 곧장 백한의 방으로 뛰어갔다.

***

백한은 침대에 누워서 마지막을 준비했다.

용인은 창을 떠나는 순간부터 힘이 약해지기 시작한다. 특히나 백룡은 그 구속력이 강했다. 오직 하늘이 내린 천룡과 창을 배반하는 흑룡만이 이 구속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백한에게는 아직 이곳에서 버틸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석판에 새겨진 강력한 마법을 파훼하려면 많은 용력이 필요했다.

내일이 되고 힘이 더 떨어진다면 석판의 마법을 풀 수 없을 것이다.

백한은 앤시아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음을 알았다. 며칠만 지나면 그녀는 무너질 거다. 무릎이라도 꿇으며 은한에게 제발 창으로 돌아 가달라고 부탁하겠지. 그리고 은한은 절대로 그녀의 청을 거절하지 못할 거다.

하지만 백한은 결국 앤시아와 블레이크를 도와주었다.

용력을 소진한 그의 몸은 죽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가 눈을 감는데, 문이 열리더니 은한이 뛰어 들어왔다.

“백한아!”

“형님….”

“너, 왜! 도대체 어찌 그런 것이냐!”

백한의 몸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은 은한도 알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더욱 모질게 대하며 그를 창으로 돌려보내려 했다.

그런데 백한이 용력을 사용했다. 용력을 모두 소진하면 목숨을 잃는다. 그는 스스로 목숨을 버린 것이다.

은한은 그 의미를 알고 죽어가는 동생을 끌어안았다.

“형님한테 안겨서 죽을 수 있다니, 착한 일을 해서 복을 받았나 봅니다.

백한은 힘없이 웃었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것이냐! 아직 늦지 않았다. 당장 돌아가거라!”

은한은 말을 하면서도 그것이 무리한 요구라는 걸 알았다. 백한은 모든 힘을 쏟아부었다. 창으로 돌아갈 용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어째서 그런 것이냐?”

“형님께서 원하시는 일이지 않습니까?”

앤시아와 블레이크에게 정이 들었다. 그들이 안타까웠고 도와주고 싶었다.

그리고 은한이 원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는 황태자의 저주가 풀리기를 원했다. 사랑하는 형님의 바람이었기 때문에 백한은 결국 그들을 도와주었다.

“미련한 것. 그냥 혼자 돌아갈 것이지, 대신관으로 떵떵거리며 살 것이지, 내가 뭐라고 이리 미련한 짓을 해!”

“저의 전부입니다.”

백한은 마지막 순간이 되어서야 자신의 진심을 털어놓았다.

“형님을 보고 싶었습니다. 형님이 그리웠습니다. 대신관이 되고 수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였으나, 저라는 인간을 진심으로 위해준 건 오직 형님뿐이셨죠. 창과 백성은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가 외로워서, 제가 그리워서 형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

“창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형님이 없는 창은 싫습니다. 정말 싫어요. 무서워요. 싫어요. 가고 싶지 않아…. 다시 그 지옥 속으로 가고 싶지 않습니다. 혼자서 견딜 자신이 없어요. 그래서 황태자비를 도왔습니다.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요….”

삶에 대한 미련이 있었다면 앤시아에게 거래를 제안하지 않았을 거다. 석판에 대한 말을 꺼내지도 않았을 거다.

창이 아닌 타지에서 강력한 용력을 사용하는 순간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백한은 이곳에 왔을 때부터 이미 마음을 정했다.

이제 더는 견딜 수 없다. 은한을 만나자 그 생각이 더욱 강해졌다.

모두들 백한을 손쉬운 도구로 여겼다. 이용당하는 것도 자신들이 원하는 자를 황제로 택하라며 협박당하는 것도 이젠 지쳤다.

은한과 함께 돌아갈 수 없다면 이곳에서 그대로 죽을 생각이었고, 그래서 용술을 사용했다.

“…그걸 왜 이제야 말하는 것이냐.”

은한은 백한이 달갑지 않았다. 새하얗게 변한 머리색과 초점이 없어진 투명한 눈동자가 낯설었다.

자신이 어떻게 창에서 도망쳤는지, 어머니가 왜 돌아가셨는지 알면서도, 대신관의 논리를 내세우며 창의 미래만을 이야기하는 백한이 야속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창의 대신관이나 용의 그릇이 아니었다. 자신이 아끼고 사랑했던 동생 백한이었다.

“아직도 어린애 같은 모습을 보이면 형님이 싫어하실까 봐 두려웠습니다.”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형님한테 의젓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이리되었네요. 아스테릭에는 좋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부디 창에서의 일은 모두 잊고 행복하십시오.”

백한은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미소를 지었다.

“안 된다! 백한아, 안 돼!”

은한은 그를 안고 울부짖었다. 피가 차갑게 식어 내렸다.

백 명이 넘는 이복형제 중 그가 진짜 형제라 여겼던 사람을 백한 한 명뿐이었다.

그는 가족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지만 백한이 있었다.

이 아이가 남아 있었다. 그런데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백한아, 일어나라! 눈을 떠라!”

밖에서 기다리던 앤시아가 그의 절규를 듣고 황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백한 님께서 위독하신 건가요?”

“아무 일도 아닙니다. 백한이는 무사합니다.”

은한은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백한을 살릴 거다. 가족을 지킬 거다.

그는 백한을 안아 올렸다. 아직 숨이 붙어 있다. 지금 창으로 돌아가면 살 수 있다.

“비 전하, 저는 이만 창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비장한 그의 표정과 축 늘어진 백한을 보며 앤시아는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백한 님 때문인가요?”

“네.”

“알겠어요. 어서 가보세요.”

은한은 절도 있게 고개를 숙였다. 검은 안개가 그들의 주변을 에워싸더니,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은한은 돌아오지 않았다.

***

텐스테온은 책상에 가득 쌓여 있는 상소문을 바라보았다.

황태자가 병석에서 일어났음에도 텐스테온이 계속 황태자궁을 찾자 이를 항의하는 내용이었다.

텐스테온은 3년 동안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이어오고 있었다.

앤시아를 아꼈지만 황태자에게는 관심 없는 모습을 보이며, 저주의 계승자에게 냉정하게 선을 그었다.

하지만 이번 일로 그 균형이 깨지자, 황태자는 물론이고 앤시아마저 남쪽 섬으로 유배를 보내라는 상소가 이어졌다.

텐스테온은 황태자궁에 가는 것을 잠시 중단하고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황태자궁의 출입에 대한 항의로 시작해서 앤시아에 대한 불만 제기, 오늘은 유배 요구까지. 신이 났구나. 아놀드.’

카실 공작은 아직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상소를 올리는 귀족들의 명단만 봐도 배후에 카실 공작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직은 카실 공작의 세력만 문제 제기를 하는 수준이었지만, 이대로 가면 여론이 확대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어쨌든 블레이크가 저주의 계승자인 이상 명분은 저들에게 있었다.

텐스테온이 턱을 괸 채 상소들을 내려보는데, 앞에서 검은 기운이 느껴졌다. 그리고 은한의 모습이 나타났다.

“은한아!”

“소신 은한이 제국의 위대한 빛이신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예의를 갖추었다. 불과 며칠 사이에 한층 늠름해진 모습이었다.

“일어나거라.”

“말도 없이 자리를 비워 송구합니다.”

“앤시아에게 사정은 들었다. 동생은 어떠하냐?”

“걱정해주신 덕에 무탈합니다.”

은한은 백한을 안고 창으로 돌아갔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하루 종일 깨어나지 못했다. 은한은 한시도 자리를 비우지 않고 동생의 곁을 지켰다.

그의 정성스러운 간호 덕분인지 백한의 용력은 차츰 회복되었고, 의식도 차렸다. 잘 먹고 충분히 요양한다면 금방 기력을 회복할 터였다.

“다행이구나. 모두들 걱정했는데 한시름 놓았다.”

“그리고….”

은한은 텐스테온의 얼굴을 직시했다. 이미 결심한 일인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텐스테온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은한이 할 말을 대신 해주었다.

“오늘은 하직 인사를 올리러 온 것이냐?”

“그러하옵니다.”

그는 무겁게 고개를 숙였다.

은한이 창으로 돌아가자 먹구름이 몰려오고 비가 쏟아졌다. 오랜 가뭄의 끝을 알리는 비였다.

사람들은 그를 반기며 천룡의 자식이라 떠들었다. 황제도 자신의 자식 중에 천룡이 탄생했다며 기꺼워했다.

지난날을 반성하고 사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역겨웠다. 당장 아스테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백한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은한은 자신이 떠난 이후 백한이 겪었던 처참한 상황을 알게 되었다.

자신과 친했다는 이유만으로 감옥에 갇히고, 백룡의 선택을 받은 뒤에도 황자들의 협박에 시달려야 했다.

백한은 오직 은한만을 기다리며 황태자를 선택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다른 황족들의 미움을 받았고, 기녀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신궁에서도 무시당하는 처지였다.

백한의 처소는 처참했다. 그가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을 악용하여 보물들을 빼돌리고, 은밀히 학대하였다.

은한은 창에 남기로 결심했다.

“저는 오만했습니다. 폐하의 곁을 지킬 사람이 저밖에 없다고 생각했죠.”

텐스테온은 강인한 황제였다. 하지만 외로웠다. 아들을 그리워했지만 얼굴을 볼 수조차 없었다.

은한은 텐스테온에게 힘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더욱 주군께 충성하며 곁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폐하께는 황태자 전하와 황태자비 전하가 계시죠. 제가 아니어도 외롭지 않으실 겁니다.”

“제법 건방진 말을 하는구나.”

텐스테온은 불퉁하게 말했지만, 입가는 웃고 있었다.

“동생을 지켜주고 싶습니다. 그 아이에게는 저뿐이니까요. 제게도 가족이 있었는데, 너무 오래 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만 주군의 곁을 떠나려 합니다. 지켜드리지 못해 송구합니다.”

은한은 허리를 깊게 숙였다. 텐스테온은 가까이 다가가 그를 일으켜 세웠다.

“지금까지 지켜준 것만으로 충분하다.”

“주군의 은혜는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은혜라고 생각한다면 훌륭한 황제가 되거라. 이 먼 서쪽 땅까지 너의 명성이 전해지도록 뛰어난 성군이 되는 거다.”

“네. 폐하.”

텐스테온은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뒤, 하얀 봉투를 건넸다.

“받거라.”

“이게 무엇인지요…?”

은한은 봉투를 열었다. 하얀 봉투 안에는 동대륙에서 사용하는 한지가 들어 있었다.

한지를 펼쳐본 순간 그는 화들짝 놀랐다. 그것은 황금 광산의 권리증이었다.

“창은 광산을 모두 나라에서 관리한다더구나. 그래서 인접해 있는 주나라의 광산을 매입하였다. 너는 이동술을 사용할 수 있으니, 지리적인 문제는 없을 것이다.”

은한은 광산의 거래 날짜를 확인했다. 이미 몇 년 전에 구입한 것이었다.

혹시라도 은한이 돌아갈 때를 대비해서 텐스테온이 미리 준비해놨음을 알 수 있었다.

은한은 눈물이 울컥 차올랐지만, 꾹 눌러 참으며 권리증을 돌려주려 했다.

“아닙니다. 갑자기 떠나는 것도 면목이 없는데, 이리 값진 것을 받을 수 없습니다.”

“받거라. 동생을 지킨다고 하지 않았느냐? 이를 위해서는 힘이 필요할 거다. 네가 나라를 떠난 동안 수많은 황자들이 황제가 되기 위해 치열한 혈투를 벌였을 것이다. 네가 하늘의 선택을 받았다고 해서 순순히 물러나진 않을 거다.”

그의 말대로였다.

다른 황자들은 오랫동안 황태자의 자리를 노리며 치열하게 경쟁해왔다. 가문을 등에 업고 세력을 키우고 막대한 자금을 들여 사병을 양성하였다.

은한이 천룡의 선택을 받았다고 하나, 지독히 불리한 싸움이었다.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돈이 필요할 거다. 정치가 그런 것이지. 그러니 받거라.”

“하오나….”

“퇴직금일 뿐이다. 부담 가질 필요 없다.”

텐스테온은 황금 광산의 권리증을 다시 은한의 손에 꼭 쥐여주었다.

“…감사합니다. 주군.”

“이젠 너의 주군이 아니다.”

“아닙니다. 폐하께서는 저의 단 하나뿐인 주군이십니다.”

은한은 결국 눈물을 떨어트렸다. 텐스테온은 그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고생만 시켜서 미안하구나. 돌아가서도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거라.”

“아닙니다. 고생한 적 없습니다. 소신 은한, 이 은혜는 반드시 갚을 것입니다.”

“든든한 우방국이 생기겠구나.”

은한은 눈물을 참느라 대답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창으로 돌아간 이상 기필코 황제가 될 것이다. 황제가 되어 백한을 지키고, 조금이라도 폐하께 은혜를 갚을 것이다. 그는 다짐했다.

“인사만 드리려고 했는데, 자리를 너무 오래 비운 것 같습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백한은 몸이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그를 홀로 남겨두는 것이 불안했다.

“그래, 어서 가보거라.”

은한은 떠나기 전에 품에서 팔찌를 꺼냈다.

“이것은 백한이 비 전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재액을 막아줄 거라 하였습니다.”

“직접 전해주는 것이 어떻겠느냐? 아이들이 걱정을 많이 했다. 인사라도 하지 그러느냐?”

“그러고 싶지만, 너무 늦었습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은한은 앤시아를 좋아했다. 주군의 며느리라는 걸 알면서도 그 감정을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여전히 그녀를 마음에 두었다.

첫사랑이었다.

그녀와 헤어지기 싫어서, 창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 마음을 모두 버려야 할 때였다.

“황태자 전하 내외분의 결혼식에 꼭 초대하여주십시오. 반드시 참석하겠습니다.”

아스테릭 제국에서는 어릴 때 약식으로 혼인을 한 뒤, 성인이 되면 신전에 고하고 정식 결혼식을 치른다. 황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정식 결혼식을 치른다는 건 곧 블레이크가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 있을 것이며, 저주가 풀릴 거라는 걸 의미했다.

은한은 황태자 부부의 미래를 축복했다. 그 뜻을 안 텐스테온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초대하마.”

“기다리겠습니다. 주군.”

은한은 허리를 깊이 숙였다. 그리고 검은 물결이 일더니 그의 모습이 일순간에 사라졌다.

그가 떠난 뒤, 텐스테온은 책상 위에 쌓인 상소들을 바라보았다.

‘저 어린아이도 가족을 지키기 위해 혈혈단신의 몸으로 고국에 돌아갔다. 그런데 나는 무엇을 걱정한단 말인가?’

블레이크와 앤시아가 너무 소중했다. 그래서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이대로는 자식들을 구할 수 없다.

블레이크가 쓰러졌을 때 얼마나 많은 후회를 했던가? 더는 같은 후회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지 않았던가?

그는 상소 뭉치를 집어서 벽난로 속에 던져버렸다.

자신은 제국에서 가장 강한 황제 텐스테온 라 로디스 제라실리온이었다. 더는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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