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5장. 야옹이는 뭘 좋아하나요? (5/17)

목차

5장. 야옹이는 뭘 좋아하나요?

6장. 하얀 용은 변덕쟁이입니다

7장. 왜 하필 19금 소설인 건가요?

5장. 야옹이는 뭘 좋아하나요?

다이애나는 아카데미에 잘 적응한 것 같았다. 특히 수석을 차지한 붉은 머리 소년 제이든과 같은 반이 되어서 라이벌 의식을 불태우고 있었는데, 편지의 절반이 그 아이에 대한 내용이었다.

-제이든은 벌써 진검을 허락받은 거 있지.

-제이든의 고향은 엄청 먼가 봐. 방학 때도 기숙사에서 지낼 거래.

-제이든이 오늘 밥을 조금밖에 안 먹었어. 평소에는 소처럼 많이도 먹는 애가 말이야.

제이든, 제이든, 제이든…. 하도 많이 들었더니 제이든과 내적 친밀감까지 생겨버렸다. 입학식에서 한 번 본 게 다인데도 말이다.

하도 제이든 타령을 하길래 혹시 좋아하는 건가 싶어서 방학이 되면 데리고 오라고 했더니 ‘걔를 왜? 학교에서 보는 것도 지긋지긋해!’라며 질색을 했다.

내가 잘못 짚은 건가? 하지만 밥을 안 먹어서 걱정되면 말 다 한 거 아니야? 호감이 없는데 식사량 체크까지 하나?

이 세계는 그런가? 아니, 요즘 애들은 그런가? 고민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제이든을 만나고 싶었는데, 아쉽네.

편지를 쓰고, 봉투에 넣었다.

블레이크는 동계 훈련을 하느라 고생이 많았다는 형식적인 내용의 편지를 한 통 쓴 뒤로는 다이애나에게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 다이애나도 딱히 블레이크의 편지를 원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서로를 생각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블레이크는 가끔씩 ‘다이애나는 잘 지내?’라고 궁금해했고, 다이애나도 황태자 전하는 어떠시냐고 안부를 물었다. 하지만 두 사람 다 굳이 편지까지 교환할 마음은 없는 듯했다.

원작의 여주인공과 서브 남주님 사이가 어쩌다가 이리된 건지….

봉투를 봉하려고 하는데, 책상 한편에 있는 장미꽃에 자연스럽게 시선이 머물렀다. 블레이크가 나에게 처음으로 준 선물이었다. 꽃은 금방 시들기 때문에 보존 마법을 걸어서 화병에 꽂아두었다.

이 붉은 장미는 나의 가장 소중한 보물이다. 세상의 어떤 보물을 줘도 바꿀 수 없다.

부드러운 꽃잎은 톡 건드리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꼭 껴안았다. 그에게서 장미꽃 향기가 났다. 나는 싱긋 웃으며 우리 신랑의 손을 잡았다.

“앤시아, 뭐 해?”

“장미가 예뻐서요.”

“앤시아가 훨씬 더 예뻐.”

그 말을 듣는 순간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왜 웃어?”

“자연스럽게 칭찬할 줄도 아시고, 우리 신랑도 다 컸구나 싶어서요.”

“나 11살이야. 다 컸어.”

그는 올해 들어서 부쩍 자신의 나이를 강조했다. 그러고 보니 몇 달 사이에 젖살도 조금 빠지고 키도 큰 것 같다. 그래도 아직 나보다는 작았지만….

“에이, 다 큰 건 아니죠.”

“부인이랑 2살밖에 차이 안 나.”

블레이크가 갑자기 발끈했다. 그 모습조차도 귀여웠다.

“2살이나 차이 나는 거죠.”

“…….”

그는 입을 일자로 꾹 다물었다. 혹시 삐쳤나? 이제 그만 놀려야겠다.

나는 그의 손을 잡으며 가볍게 이마를 짚었다. 요즘 들어 몸 상태가 안 좋아질 때가 많다 보니, 틈만 나면 확인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열은 없고, 컨디션도 좋아 보인다.

열을 체크하는 것처럼 보이면 블레이크가 우울해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이마에 얹은 손을 재빨리 내려서 그의 볼을 매만졌다. 그러자 블레이크는 부끄러운 듯 몸을 웅크리면서도 내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치며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앤시아 손 따뜻하다.”

윽. 그렇게 어리광을 피우면 심장에 무리가 가는데. 나는 벅차는 감동을 참지 못하고 블레이크를 꼭 끌어안았다.

“우리 토끼가 이 세상에서 제일 귀여워요!”

“그리고 멋있지?”

“아, 귀여워.”

“멋있….”

“너무 귀여워!!!”

“…….”

“…전하?”

블레이크가 말없이 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고개를 돌렸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왜 그러세요?”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는 맑게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다행히 삐친 건 풀렸나 보다.

“전하, 우리 내려가요. 어제 준비한 콩이 다 불었겠어요.”

“응. 알았어.”

우리는 함께 손을 잡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

오늘은 두부를 만들 생각이었다. 원래 좀 더 일찍 만들고 싶었지만 맷돌을 구하고 두부 틀을 제작하는 데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소요됐다.

나는 블레이크와 함께 주방으로 내려가서 어젯밤에 미리 불려놓은 백태(콩)의 상태를 확인했다.

“아주 잘 불었네. 이제 껍질을 까야겠다.”

“네! 비 전하!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주방장 테리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는 에드온의 친동생이었는데, 동방의 요리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테리, 멜리사와 함께 콩을 까려고 하는데, 블레이크가 다가왔다.

“나도 까볼래.”

“그러실래요?”

“응!”

한국에서 살던 시절 종종 두부를 만들어 먹고는 했다. 할머니랑 둘이서 콩을 까려니 시간이 엄청 오래 걸려서, 껍질째로 그냥 만들면 안 되냐고 칭얼거렸었지. 그때 내 나이가 9살 정도였을 거다.

그때에 비해 얼마 차이도 나지 않는데, 블레이크는 투덜거리지도 않고 야무진 손길로 껍질을 깠다.

여럿이서 함께하니 작업 속도가 훨씬 빨랐다.

껍질을 깐 콩을 맷돌에 넣고 돌리자 새하얀 콩물이 흘러나왔다.

“와아. 신기하다.”

블레이크가 감탄했다. 제국에서 쓰이는 풍차 방앗간과는 다른 형태였기 때문에 테리와 멜리사도 신기해했다.

솔직히 나도 새로웠다. 할머니 댁에 맷돌이 있긴 했지만 손잡이가 삭았기 때문에 실제로 쓰지는 않고, 대신 오래된 믹서기를 이용했었다.

물론 영상으로 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콩이 갈리는 걸 직접 보니 눈이 저절로 커졌다.

그다음은 가마솥에 물을 넣고 끓인 뒤, 잘 갈린 콩물을 집어넣고 천천히 저었다.

“비 전하, 위험합니다! 이건 제가 하겠습니다.”

“응. 테리, 부탁할게.”

어린아이가 하기에는 힘든 일이었기 때문에 나와 블레이크는 뒤로 물러났다.

충분히 끓은 콩물을 면으로 만든 커다란 주머니에 넣고 짜내는 것도 어른들의 몫이었다. 업무를 마친 한스와 에드온도 가세하여 힘을 주었다.

“너무 세게 할 필요는 없어. 천천히 해. 뜨거우니까 조심하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비 전하.”

그들은 가볍게 웃으며 주걱으로 면포를 눌렀다. 생각보다 속도가 느려서 답답했는지 에드온이 칼로 누르려고 해서 다급히 말린 것 말고는 작업은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면포에서 짜낸 맑은 콩물은 다시 가마솥 안으로 들어갔다.

“전하, 이것 좀 드셔 보세요. 두유라는 거예요.”

나는 콩물을 컵에 따라서 블레이크에게 건넸다.

“응.”

“뜨거우니까 조심해서 드세요.”

“응. 아, 맛있다.”

“맛있으세요?”

“응. 처음 먹어보는 맛이야.”

조금 텁텁할 거 같아서 설탕을 넣을까 고민했는데, 다행히 맛있게 잘 먹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콩 100%로 만든 두유를 권했다.

“와, 정말 고소하네요! 비 전하는 천재십니다.”

“동방에 있는 요리야. 그리고 힘든 건 테리랑 다른 사람들이 다 했잖아.”

“아닙니다. 저는 이런 걸 만들 생각도 못 한걸요. 정말 대단하세요.”

주방장인 테리는 쉴 새 없이 감탄을 늘어놓았고, 에드온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비 전하는 특별하신 분이지.”

그들의 말을 시작으로 칭찬 세례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또 칭찬 감옥에 갇히겠네. 민망함에 얼굴을 긁적이는데, 고양이 소리가 들렸다.

“야옹.”

“야옹아!”

나는 반가운 마음에 검은 고양이를 번쩍 안아 올렸다.

“야옹아, 이게 얼마 만이야! 그동안 어디 갔었어?”

“야옹.”

고양이가 낮게 울며 가마솥을 바라보았다.

“우리 야옹이도 두유 먹고 싶어?”

“야옹!”

“고양이가 이걸 먹어도 되나?”

고민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이 세계에는 고양이가 먹는 음식에 대한 책도 없었고, 동물이 먹어서는 안 되는 음식을 구분하지도 않았으니 정보를 찾을 방법도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국에서 살 때 공부하는 건데. 동물을 좋아하긴 했지만, 작은 원룸에서 자취하는 처지라 키울 엄두조차 내지 못했었다.

“야옹!”

야옹이는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콩은 소화기관에 좋은 음식이니 특별히 나쁠 건 없겠지.

“멜리사, 야옹이가 먹게 작은 접시 좀 부탁할게.”

“네. 비 전하.”

“야옹!”

야옹이가 눈을 반짝였다. 귀엽기도 하지.

나는 야옹이를 내려놓고, 다시 두부를 만들기 시작했다.

뜨거운 콩물에 간수를 넣으며 천천히 젓자 조금씩 응고되며 순두부가 만들어졌다. 정말로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기 때문에 여럿이서 번갈아 가며 저어줘야 했다.

예전에는 이 힘든 걸 어떻게 할머니와 단둘이서 했는지 모르겠다.

순두부가 완성되자, 일부를 남겨놓고 나머지는 미리 준비해놓은 두부 틀에 넣어서 적당히 굳을 때까지 꾹 눌러놓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뒤, 두부 틀의 뚜껑을 열자 단단하게 굳은 하얀 두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드디어 두부 완성이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고생해서 만들었는데 결과가 엉망이면 어떡하나, 솔직히 걱정을 많이 했는데, 다행히 비주얼은 합격이었다.

“전하, 이게 바로 ‘두부’예요.”

블레이크는 하얀 두부를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다.

“아, 푸딩 같아.”

“맛은 전혀 다를 거예요. 어서 식당으로 가요.”

두부가 굳기를 기다리는 동안 끓인 맑은 순두부찌개와 따끈한 두부, 그리고 하얀 쌀밥을 본 블레이크의 눈가가 사르르 접혔다.

“눈같이 모두 새하얘. 앤시아 같아.”

“제가 보기엔 전하 같은걸요.”

그의 새하얀 피부와 투명한 은발은 눈처럼 아름다웠다.

따뜻한 두부를 입에 넣은 블레이크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우우음!”

그는 맛있다고 말하는 것도 잊은 채 오물오물 씹더니, 포크로 두부를 콕 찍어서 연신 입에 넣었다.

“천천히 드세요.”

“응. 앤시아, 최고야! 정말 맛있어!”

따끈한 모두부에 이어 조개를 넣고 맑게 끓인 순두부찌개를 먹은 블레이크는 다시 감탄사를 뱉었다.

“부드러워! 입에서 녹아버렸어!”

우리 신랑이 좋아하는 걸 보니 마음이 뿌듯했다. 힘들게 맷돌을 구하고 두부 틀을 제작한 보람이 있었다. 블레이크가 좋은 음식을 많이 먹고 조금이라도 건강해졌으면 좋겠다.

“많이 많이 드세요.”

“응. 앤시아도 어서 먹어.”

“네. 저도 먹을게요.”

오랜만에 먹은 두부는 따뜻하고 포근했다.

오래된 시골집, 자상한 할머니, 그리고 따끈한 두부와 함께 싸 먹었던 김치 생각도 났다. 그때가 그립긴 했지만 다시 대한민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지금 내 삶은 여기 있다. 우리 신랑, 아버님, 다이애나. 멜리사, 한스, 에드온, 테리, 소중한 사람들이 점점 쌓여간다.

이 행복이 계속 유지되려면 저주가 풀려야겠지….

***

모처럼 두부를 만들었는데 우리끼리만 먹을 수는 없었다.

두부와 순두부찌개를 들고 황제궁으로 가려고 하는데, 야옹이가 처연하게 울어댔다.

“야아옹.”

“찌개는 안 된다니까.”

야옹이는 모두부도 모자라서 순두부찌개까지 먹고 싶다고 고집을 피웠다. 하지만 아무리 간을 약하게 했다고 해도 고양이한테 찌개를 줄 수는 없었다.

“야옹.”

“안 돼.”

야옹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달래는데, 블레이크가 내 품에 있는 야옹이를 번쩍 안아 올렸다.

“어, 웬일로 야옹이를 안으세요? 전하도 야옹이를 오랜만에 봐서 반가우셨구나?”

내가 한 번만 안아보라고 해도 그렇게 싫다고 하더니, 사실은 보고 싶었던 거다. 블레이크가 야옹이를 안고 있는 모습을 보니 흐뭇한 미소가 저절로 나았다.

“식겠다. 앤시아, 어서 가봐.”

“아! 네!”

기껏 다시 데운 국이 식어버리겠다. 나는 블레이크와 야옹이한테 손을 흔들고 서둘러 황제궁으로 향했다.

***

은한은 저주를 받은 황태자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는 앤시아가 자꾸 눈에 밟혔다.

동방의 요리를 만들어내는 그녀가 신기하기도 하고, 자신의 곁에도 저런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며 부러워하기도 했다. 그렇게 보고 또 보며, 그녀를 위해 동방의 식재료나 도구들을 구하고는 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그분을 연모한다.’

은한은 앤시아를 마음에 품게 되었다. 허락될 수 없는 마음이었다.

그는 마음을 접었다. 처음에는 먹을 것 때문에 고양이로 변하였지만, 점점 사소한 일에도 고양이로 변해 앤시아의 곁에 머물렀다. 결국 연정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앤시아는 주군의 며느리였다. 이는 은인과 은인의 아들에 대한 배신이다. 여기서 끝내야 한다.

은한은 스스로의 마음을 깨달은 순간 고이 접었다. 고양이로 변신해서 주위를 맴도는 것도 그만두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오랜만에 본 두부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둔갑술을 쓰고 말았다.

나의 인내심이 고작 이 정도였단 말인가!

은한은 자괴감을 느꼈지만 몸은 솔직해서, 결국 두유와 두부도 모자라서 순두부찌개까지 달라고 앤시아에게 조르고 말았다. 하지만 결국 거절당하고 이대로 떠나야겠다고 생각하는데, 황태자에게 붙잡혀버렸다.

블레이크는 검은 고양이를 안고 자신의 침실로 향했다.

고양이로 변신한 은한은 당장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황태자에게서 나오는 힘이 그의 술법을 방해하였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황태자에게 이런 힘이 있었나?

원래도 저주의 잔상이 있긴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저주의 문장이 아니라, 블레이크의 안에서 어떤 힘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은한이 당황한 사이 둘은 황태자의 침실에 도착했다. 블레이크는 문을 닫고 은한을 내려놓았다.

겨우 황태자의 품에서 벗어난 은한은 재빨리 창가를 향해 달렸다. 어서 여기서 도망쳐야겠다.

“너 누구야?”

그때 블레이크의 나직한 음성이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은한은 그대로 굳어서 황태자를 올려 보았다.

설마 눈치챈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변신하는 모습을 들킨 적도 없는데, 어떻게 알았겠는가?

“…야옹?”

은한은 일단 진짜 고양이처럼 울었다. 그러자 블레이크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잡아뗄 생각은 하지 마. 네가 평범한 고양이가 아니라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앤시아는 황태자가 토끼 같다고 말했다.

그녀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한다. 저주의 문장이 퍼지지 않은 황태자의 오른쪽 얼굴은 돌아가신 황후를 닮아서 선이 부드러웠고, 또래 소년보다 체구도 작아서 무척 귀여웠다.

하지만 은한은 블레이크를 어릴 때부터 지켜봐 왔다. 외모와 달리 황태자의 성격은 황제를 닮았다. 토끼보다는 맹수에 가까웠다. 물론 아직은 어렸지만, 새끼 호랑이도 맹수는 맹수다. 게다가 3년 동안 많이 자라서 더는 마냥 귀여운 새끼 호랑이도 아니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차분히 퍼지는 음성에 위압감이 실려 있었다.

“네가 누굴까, 정체가 뭘까, 계속 고민했는데 이제 알았어. 너, 조금 전에 앤시아의 방에 있었지?”

“…….”

“나와 앤시아를 지켜보고 있었어. 그렇지?”

“…….”

은한은 황제의 그림자로서 여러 명령을 수행했다. 그리고 그중 가장 중요한 건 황태자 부부를 지키는 일이었다.

특히 요즘은 황태자의 상태가 불안정했기 때문에 옆에서 밀착 보호를 하고 있었다.

황태자를 따라 앤시아의 방으로 들어갔을 때,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으나 착각이라 여겼다. 은한은 용술을 사용했다. 그가 다루는 힘은 용의 힘을 빌리는 것이기 때문에 서대륙의 마나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어 제국의 내로라하는 마법사들도 은한의 술법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런데 용술은 물론이고 마법을 배운 적조차 없는 황태자가 자신의 은신술을 간파했단 말인가? 게다가 고양이로 변한 것까지 단번에 알아차렸다고?

은한은 깜짝 놀라서 블레이크를 올려 보았다. 블레이크는 뚜벅뚜벅 걸어오더니 은한을 다시 안아 올렸다.

“어렸을 때 말이야, 내가 아플 때면 나타나서 치료해주던 사람이 있었어. 새까만 옷을 입은 사람이었지.”

블레이크는 저주에 걸린 뒤로 하루도 잠을 편히 잔 적이 없었다.

하루아침에 황태자의 프란시안궁에서 남쪽 별궁으로 쫓겨났다. 저주의 문장이 여린 살갗을 파고드는 고통과 악몽이 뒤섞여서 밤마다 아버지를 찾았다.

하지만 텐스테온은 한 번도 와주지 않았다. 그러다 꿈에서조차 아버지를 부르지 않을 만큼 체념하며 아픔을 혼자 견디는 것이 익숙해질 무렵, 검은 옷의 남자가 나타났다. 그가 나타나면 몸이 조금 편해졌다.

블레이크는 꿈이라고 생각했다. 외로움에 만들어낸 환영일지 모른다고 여겼다.

앤시아와 결혼하고 나서 저주가 퍼지지 않았다. 악몽도 사라졌다. 그리고 검을 옷을 입은 남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더더욱 꿈이라고 확신했었다.

블레이크는 검은 고양이의 등을 천천히 쓸었다.

“그 남자는 새까맸어. 온통 새까만 데다가 옅은 물 냄새가 났지. 안개 같은 사람이었어.”

은한은 움찔했다. 그는 은한의 ‘용술’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너에게서 그 남자와 같은 힘이 느껴져. 검은 물 냄새가 나.”

황태자는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고양이인 척 우긴다고 모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은한은 모든 걸 솔직히 인정하기로 했다.

“야옹.”

검은 고양이가 작게 울자, 블레이크는 그를 놓아주었다.

은한은 블레이크의 품에서 폴짝 뛰어 내려온 뒤, 둔갑술을 풀고 인간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제국의 희망이신 황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소신은 은한이라 하옵니다.”

고양이가 갑자기 사람으로 변했는데도 블레이크는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은한의 턱을 들어 올리더니 그이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역시 그때 그 사람이었구나.”

고통과 외로움에 지쳐서 만들어낸 허상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진짜 사람이었다.

“소신은 황제 폐하의 권속이며, 폐하의 명을 받아 비밀리에 황태자 전하를 호위하였습니다.”

“폐하께서 보내신 거였군….”

블레이크는 여신의 저주를 받고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했다. 앤시아에게 황제가 자신을 아낀다는 말을 계속 듣긴 했지만, 그저 위로해주는 말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황제는 블레이크를 완전히 버리지 않았다.

“동방의 사람인가?”

어렸을 때는 검은 힘에 이끌려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몇 년 만에 다시 마주한 은한은 검은 머리카락에 새까만 눈동자를 지닌 이국적인 외모였다. 이런 생김새였기 때문에 더욱더 환상이라고 생각했던 걸지도 몰랐다.

“네. 창에서 왔습니다.”

“너는 맑구나….”

블레이크의 입에서 부러움이 담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은한은 당황한 나머지 그대로 되묻고 말았다.

아스테릭 제국이 빛의 여신의 도움을 받아 건국되었다면, 창은 용의 힘으로 세워진 나라였다.

창의 황족 중에서 일부는 용의 선택을 받았고, 그들은 ‘선택받은 자’라 불리며 만인에게 존경받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은한에게도 용이 내려왔다. 하지만 축복이 아니었다.

그를 선택한 건 흑룡이었다. 나라를 암흑으로 뒤덮고 결국은 멸망으로 이끈다는 불길한 힘이었다.

황제는 친아들인 은한을 죽이려고 했다. 모두가 그를 불길하다고 손가락질했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은한이 맑다고 말했다. 처음 듣는 말이었다.

“어둡지만 너의 힘은 맑고 깨끗해.”

나와 달라….

블레이크는 뒷말을 삼키며,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한 은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비밀 임무라면서 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거지?”

붉은 눈동자에 어렸던 부러운 감정이 사라지며 다시 경계의 빛이 드러났다.

“고향의 음식이 그리워서….”

“음식…?”

“네. 비 전하께서 만드시는 음식을 보니 옛날 추억이 떠올라서 그만 참지 못하고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블레이크는 기억을 떠올렸다. 검은 고양이가 나타난 건 처음으로 가마솥 요리를 만들었던 날이었다. 오늘도 두부를 만들자 오랜만에 나타났지. 하지만 은한의 말을 온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검은 고양이는 음식과 상관없이 앤시아가 왈츠 연습을 하거나 책을 읽을 때도 나타나서 주변을 맴돌았었으니까.

블레이크의 날카로운 시선을 느낀 은한은 고개를 숙였다.

“사사로운 이유로 주군의 명을 어기고 말았습니다. 폐하께 모든 사실을 말씀드리고 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비 전하께도 용서를 구하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 너는 나를 오랫동안 지켜줬잖아. 네가 벌을 받는 건 원하지 않아.”

“하오나….”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나도 말하지 않을 테니까.”

“황공하옵니다.”

단호한 음성에 은한은 고개를 더욱더 깊게 숙였다. 그동안 고양이인 척 모두를 속여왔다. 그런데 한마디도 나무라지 않고 오히려 비밀을 지켜주겠다고 하셨다.

감격에 겨워하는 은한의 귓가에 싸늘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그러니까 다시는 앤시아 주변을 얼쩡거리지 마.”

“…….”

뼛속까지 얼어붙을 듯한 차가운 기운이 은한을 급습했다. 은한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주변의 한기보다도 더욱 서늘하게 가라앉은 붉은 눈동자와 시선이 맞부딪혔다.

“다시 한번만 더 내 부인한테 헛된 수작을 부린다면 용서하지 않아.”

“…….”

블레이크는 싸늘하게 경고했다.

앤시아는 블레이크의 전부였다. 그녀를 넘보는 자는 어느 누구도 용서할 수 없었다. 자신을 도와줬던 자라고 하여도 예외는 아니다.

또한 블레이크는 불안했다. 이제는 소년보다 청년이란 표현이 어울릴 듯한 사내의 몸에서는 신비로운 검은 힘이 흘렀다. 얼굴도 힘도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였다. 자신과는 달랐다.

게다가 쌍꺼풀이 없는 길고 커다란 눈에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선이 조화를 이룬 외모에서는 앤시아가 좋아하는 동방의 멋이 느껴졌다.

블레이크의 눈에 은한은 자신보다 모든 면에서 나은 사내로 보였다. 그렇기에 더더욱 은한과 앤시아를 만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

“아버님, 저 왔어요.”

집무실로 들어가자 황제의 보좌관인 콜린이 벌떡 일어나서 나를 환영했다.

“비 전하, 이제 오셨습니까?”

“나를 기다렸어요?”

“당연하죠. 저는 매일 비 전하가 오시기만을 목이 빠져라 기다린답니다.”

“내가 아니라 ‘퇴궁’을 기다린 것 같은데요.”

“저에게 있어 비 전하는 퇴궁의 여신이시니까요.”

콜린은 날카로운 외모와 달리 유머 있고 능청스러운 성격이었다.

원작에서는 텐스테온에 대한 복수심에 사로잡혀서 시종 어두운 모습만 보였기 때문에 저런 면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저를 끝없이 밀려드는 업무에서 해방시켜 주실 분은 오직 비 전하뿐입니다.”

그는 농담처럼 말했지만, 순도 100% 진실이었다. 제국에서 가장 바쁜 사람은 텐스테온이고 그다음은 콜린일 거다.

정시퇴근하는 걸 본 적이 거의 없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이만 가보거라.”

“네, 폐하.”

텐스테온이 미간을 찌푸렸다. 드디어 상사로부터 퇴근 허락이 떨어지자 콜린은 반색하며 서류를 정리했다.

저기 상사 황제님의 기분이 언짢아 보이는데 괜찮은 건가요?

“비 전하께서 오시지 않았다면 저는 오늘 이곳에서 밤을 지새웠을 겁니다.”

하지만 콜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깐족거렸다. 은근히 담이 크다.

“콜린, 평생 황궁에서 살고 싶으냐?”

황궁에 거처를 마련해 주고 평생 퇴근도 없이 부려먹겠다는 무시무시한 황제의 말에 콜린이 흠칫 떨었다. 옆에서 지켜보는 나까지 지독히도 흉악한 악덕 상사의 멘트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비 전하, 소신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콜린은 서둘러 예를 갖추며 집무실을 떠났다. 그의 뒷모습에서 업무에 지친 직장인의 애환이 느껴졌다. 괜히 측은하네.

그렇다고 우리 아버님이 악덕 상사인 건 결코 아니다. 평귀족이던 콜린의 능력을 높이 사서 자작 작위도 내려주었고, 봉급도 상당했다. 다만 돈을 쓸 시간을 주지 않을 뿐이다….

“아버님,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니에요? 정무를 보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계시잖아요.”

“오자마자 잔소리를 하는 거냐?”

“잔소리가 아닌데.”

“아직 추운데 옷이 너무 얇구나. 외투를 사야겠다.”

황제는 은근슬쩍 말을 돌렸다. 그가 바쁜 이유는 짐작이 갔다. 그 역시 블레이크의 저주를 푸는 방법을 찾고 있는 거다.

요즘 들어 블레이크의 몸 상태가 좋지 않으니 마음이 더 조급할 거다.

“아니에요. 아직 한 번도 입지 않은 옷도 많은걸요. 그보다도 이것 좀 드셔보세요.”

나는 오늘 만든 두부 요리들을 꺼내서 탁자 위에 올렸다.

“눈 같은 요리구나.”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웃음이 나왔다.

“왜 그러느냐?”

“블레이크 전하랑 같은 말씀을 하시네요.”

그들은 성격도 외모도 부자지간이라기엔 무척 달랐지만 가끔 빼고 박도 못하게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싶을 때가 있었다.

“…그 아이가 그렇게 말했니?”

3년 동안 텐스테온은 많이 변했다. 처음에는 블레이크에 대한 화제를 노골적으로 피했지만, 이제는 자신의 감정에 조금 더 솔직해져서 아들에 대한 애정을 억지로 숨기지는 않았다.

“네. 푸딩 같다고도 했고요.”

“푸딩이라…. 그런 것도 같구나. 이건 무슨 요리지?”

“두부예요. 폐하께서 전에 구해주신 콩으로 만들었어요.”

“콩으로 이런 요리를 만들었단 말이냐?”

“네. 전하께서 직접 콩도 까셨어요.”

“블레이크가 그런 것도 할 줄 아느냐?”

그는 감개무량한 얼굴로 하얀 두부를 바라보았다.

“네. 얼마나 야무진지 몰라요. 별궁에 오셨으면 전하께서 콩을 까시는 모습을 직접 보셨을 텐데.”

“…….”

그는 말없이 새하얀 두부를 입에 넣었다.

“어떠세요?”

“새로운 맛이구나. 만들기 어렵진 않았니?”

“모두 힘을 합쳐서 만들었어요. 주방장인 테리가 특히 고생이 많았죠. 막 만들었을 때는 정말 따끈따끈해서 맛있었는데. 아버님께서 별궁에 오셨으면 정말 정말 좋았을 텐데….”

“지금도 맛있다.”

아직도 황태자궁에 올 생각은 없는 건가….

3년 전에 나와 블레이크가 함께 텐스테온의 침실에 들이닥친 이후, 두 사람은 한 번도 직접 얼굴을 마주한 적이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억지로라도 붙여놓고 싶었지만, 자칫 잘못하면 카실 공작에게 공격의 빌미를 줄 수도 있었다.

황제도 그걸 알기 때문에 블레이크가 보고 싶어도 꾹 참고 있는 거겠지.

“오늘은 어땠니?”

그는 블레이크의 상태를 넌지시 물었다. 만나러 올 수는 없지만 걱정이 되는 거다.

“괜찮아요. 열도 없고, 기분도 좋아 보였어요.”

“다행이구나. 앤시아, 너는 어떠냐?”

“저는 블레이크랑 아버님이 제 요리를 맛있게 먹어주셔서 너무 행복하죠.”

“실없기는.”

그는 무뚝뚝하게 말했지만,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진짜예요. 아버님, 이것도 좀 드셔보세요. 아버님을 위해서 칼칼하게 끓였어요.”

“너는?”

“저는 전하랑 같이 먹었죠.”

“매운 걸 좋아하지 않느냐? 블레이크랑 함께 있을 때는 먹지 못했을 텐데 한술 들거라.”

“그럴까요?”

많이 먹었다고 생각했는데, 칼칼한 찌개를 보자 다시 식욕이 일었다.

찌개만 조금 먹어볼까? 나는 식욕을 이기지 못하고 스푼을 잡았다.

“아, 얼큰하다.”

순두부찌개에 김치가 들어가지 않아서 조금 아쉬웠지만, 두부가 워낙 고소해서 그런지 그 나름대로 맛이 있었다.

“너무 맛있다. 그렇죠?”

말을 뱉고 나니 조금 부끄러웠다. 내가 만들어놓고 너무 자화자찬했나?

조금 뻔뻔해 보이진 않을까 걱정했지만 텐스테온은 은은한 미소를 머금었다.

“내 며느리가 만들었는데 맛이 없을 리가 없지.”

“헤헤.”

“갖고 싶은 것이 있느냐? 이리 귀한 음식을 대접해주었으니 선물을 줘야겠다.”

평소라면 그가 저렇게 물어도 거절했을 거다. 텐스테온은 하루가 멀다 하고 나에게 선물을 보내주었다.

내가 욕심이 없는 게 아니라 물건들이 너무 넘쳐서 더 갖고 싶은 것도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실은 가고 싶은 곳이 있어요.”

“어디냐? 어디든 말만 하거라.”

“텐라른궁이요.”

나의 말을 들은 텐스테온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텐라른궁?”

‘텐라른궁’은 젤칸 제국의 마지막 황궁이며, 동시에 아스테릭 제국의 첫 번째 황궁이었다.

초대 황제 필립은 사치와 향락에 빠져 백성들을 핍박하는 젤칸 제국을 무너트리고, 아스테릭 제국을 세웠다.

새로운 나라가 건국되면 새로운 황궁을 짓는 것이 당연하였지만, 필립은 전대 황실의 궁을 그대로 사용했다.

황궁을 새로 짓기 위해서는 막대한 재물과 노역이 필요했다. 필립은 젤칸의 폭정으로 고통받은 백성들에게 그런 짐을 지워주고 싶지 않았기에 젤칸의 황궁인 ‘알타르궁’을 ‘텐라른궁’이라고 이름만 바꾼 뒤 그대로 사용했다고 한다.

하지만 선한 의도가 비극을 불러왔다.

젤칸 부흥 운동의 수장이자 젤칸의 마지막 황자인 락슐은 ‘텐라른궁’의 구조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는 텐라른궁의 비밀 통로를 통해 황궁을 습격하고 불을 질렀다.

거대하게 솟은 불길은 한 달 넘게 꺼질 줄을 몰랐고, 텐라른궁은 물론 젤칸의 수도였던 ‘칸’ 지역이 모두 불길 속으로 사라졌다.

그뿐만이 아니라 로움족이 흑마법으로 대지와 물을 오염시키는 바람에 ‘칸’ 전체가 생명이 살 수 없는 땅이 되어버렸다.

필립 황제는 어쩔 수 없이 ‘세니온’으로 수도를 천도하고, 새롭게 ‘세니온드궁’을 지었다. 그리고 세니온은 지난 천 년 동안 아스테릭의 수도가 되었다.

그리고 ‘텐라른궁’과 ‘칸’ 지역은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금단의 땅’이 되었다.

“갑자기 텐라른궁에는 왜 가려는 것이냐?”

“텐라른궁에 가면 석판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별궁의 연못에서 발견된 석판에는 고대어가 새겨져 있었다.

그동안 비석의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노력했지만 아무런 성과도 찾지 못한 채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었다.

하지만 며칠 전, 블레이크와의 수업 도중 짧은 환영을 보았다.

여자의 비명, 뜨겁게 타오르던 불길, 보석으로 장식된 화려한 공간. 그리고 한편에 세워져 있던 석판들….

지금까지도 그 장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환영에서 본 곳은 실내 장식이 호화로우면서도 독특했다. 선명하게 떠오른 기억을 바탕으로 자료를 찾아본 결과, 그것은 젤칸 제국 시절 유행하던 건축 양식이었다.

게다가 보석으로 장식된 황금 기둥은 사치와 향락으로 얼룩진 텐라른궁의 상징이라 하였다.

아마 그곳은 텐라른궁일 거다. 내가 본 것은 ‘텐라른 대화재’ 사건이 발생했을 당시의 환영이겠지. 아니, 그건 단순한 환영이 아니다, 그때 상황이 생생하게 나타난 거다.

어째서 천여 년 전의 일이 갑자기 내 눈앞에 펼쳐졌는지는 모르겠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게 정말로 실제 과거의 장면이라면 나는 텐라른궁에 가야 했다. 연못에서 발견된 것과 똑같은 석판이 그곳에 있었다.

“거대한 화염이 모든 걸 앗아간 데다가 흑마법에 의해 오염된 땅이다. 그런 위험한 곳에 너를 보낼 수는 없다.”

“텐라른궁에만 다녀올게요. 아주 잠깐이면 돼요.”

“전부 타버려서 아무것도 남지 않은 곳이야.”

내가 하는 말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었던 텐스테온이지만 이번만큼은 강경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요. 작은 단서라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금단의 땅이다. 초대 황제의 유언 때문이라도, 황족은 그곳에 갈 수 없어.”

필립은 죽기 직전, ‘칸’의 땅에는 절대로 발을 딛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누구든지 ‘칸’의 땅을 밟는다면 여신의 진노를 사서 불행이 닥치고, 그자가 황제라면 제국 전체에 거대한 재앙이 몰아칠 거라 하였다.

그 때문에 개인은 물론이고 황족들은 절대로 가지 못하는 금단의 땅이 되어버렸다.

“혹시 필립 황제의 유언을 믿으시는 건가요?”

필립은 여신을 배신했고, 그 때문에 저주의 계승자가 생겨났다. 그런 자가 여신의 진노를 운운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었다.

저주의 계승자에 대한 진실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텐스테온이 그런 유언을 믿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유언은 믿지 않는다. 그 말 자체가 사실인지도 알 수 없고,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젤칸의 잔당을 겨냥한 정치적인 발언이었겠지.”

역시 텐스테온은 그런 헛된 말에 현혹되지 않았다. 빙그레 미소를 짓는데, 그가 덧붙였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믿겠지. 평범한 제국민들조차 걸음을 하지 않는 곳에 황족이 간다고 하면 필시 반발이 거셀 거다.”

“몰래 다녀오면 되죠.”

“앤시아.”

텐스테온이 짐짓 나무라듯 이름을 불렀지만, 나는 의견을 굽힐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텐스테온도 필립의 말을 신경 쓰는 건 아닐 거다. 당장 여신을 배신해서 진노를 산 사람이 필립 본인이 아니던가? 내가 걱정이 되니 필립의 유언까지 언급하는 거다.

“저는 폐하보다는 보는 눈이 적잖아요. 그러니 조용히 다녀올 수 있어요.”

“정 그렇다면 다른 이에게 명하마.”

“아니에요. 텐라른궁에서 단서를 찾으려면 고대어를 해독하는 능력이 필요해요. 제가 직접 가야 해요.”

불에 타버린 파편 속에서 혹시 모를 단서를 찾아야 하는 일이다. 고대어를 모른다면 어떤 것이 단서인지 구별하는 것조차 불가능할 터였다.

내가 고집을 꺾지 않자, 텐스테온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언제나 당당하던 황제였다. 그가 저렇게 고심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하지만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전하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요. 오늘은 괜찮지만 언제 다시 아프실지 모르고요. 텐라른궁에 가면 전하의 저주를 풀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아니, 반드시 찾을 수 있어요! 그러니까…!”

텐스테온이 쉴 새 없이 말을 쏟아내는 나의 손을 꼭 잡았다.

“앤시아, 너도 내 자식이다. 블레이크를 위해서 너를 위험한 곳에 보낼 수는 없어.”

“…….”

흉포하던 맹수가 언제부터 이렇게 따스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게 되었을까?

“위험하지 않아요. 그냥 옛 유적지에 나들이를 가는 거예요.”

“평범한 유적이 아니지 않느냐.”

“빛의 마법석으로 몸을 보호하면 돼요. 블레이크는 저에게도 소중한 가족이에요. 그의 저주를 풀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어요.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앤시아.”

“정말로 잠깐만 다녀올게요. 아버지.”

“…….”

아버지라고 부르는 순간 텐스테온의 붉은 동공이 떨렸다. 나는 흔들리는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제발 부탁드려요. 아버지, 이번 한 번만 허락해 주세요.”

“…딱 한 번만이다.”

텐스테온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나는 활짝 웃으며 그를 끌어안았다.

“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아버지!”

***

은한은 고민했다. 고양이로 변해서 앤시아의 주변을 맴돌았던 사실을 황태자에게 들켜버렸다.

황태자는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다. 은한도 솔직히 그러고 싶었지만, 주군을 속이는 것 같아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는 필리온궁 주변을 배회하다가 느릿느릿 황제의 침실로 들어갔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불이 켜져 있었다.

“은한이냐?”

소파에 앉아 있던 텐스테온이 천천히 눈을 떴다.

“송구합니다. 저 때문에 잠에서 깨신 겁니까?”

“아니다. 생각 중이었어. 그리고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말에 은한은 즉시 자세를 바로 하고 고개를 숙였다.

“하명하십시오.”

“명령이 아니라 부탁을 하려 한다.”

텐스테온은 무뚝뚝하지만 자상한 주군이었다.

하지만 그가 ‘부탁’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은한은 심상치 않은 상황임을 깨달았다.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폐하를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바치겠습니다.”

“아무렴 내가 너의 목숨을 원하겠느냐?”

텐스테온은 달빛처럼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소를 보자 은한도 다소 긴장이 풀렸다.

“하면 무슨 일이시온지?”

“너에게 황태자비의 호위를 맡기고 싶다”

다소 의외였다. 은한은 황제의 명을 받아 황태자궁을 수시로 지켰다. 당연히 황태자비를 지키는 것 또한 그의 임무였다.

은한이 의아해하는데 텐스테온이 말을 덧붙였다.

“그 아이를 곁에서 지켜주었으면 한다.”

모습을 숨기지 않고 직접 호위를 하라는 의미였다. 은한은 당황했다.

“하오나 신은 그림자입니다.”

그는 황제의 그림자였다. 텐스테온의 명령이 아니라 은한이 원해서 그림자가 되었다.

은한은 ‘창’의 대역 죄인이었다. 그가 역모를 꾀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흑룡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죽어 마땅한 존재였다.

만약 은한이 살아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처리하려 할 터였다.

그가 서대륙에서 살든 산골의 촌로로 조용히 늙어가든 상관치 않고 평생 그의 뒤를 쫓을 자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은한은 그림자가 되기를 자처했다. 처음 그를 구한 텐스테온과 콜린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은한아, 너의 사정은 잘 안다. 하지만 앤시아를 믿고 부탁할 사람이 너밖에 없구나.”

텐스테온은 자주 은한을 설득했었다. 자신이 지켜줄 것이니 걱정하지 말고 자유롭게 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은한은 그때마다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오늘은 평소와 달랐다. 주군이 자신에게 의지하려 했다. 그 간절함이 느껴졌다.

“…알겠습니다.”

“고맙다.”

“하오나 부탁이라는 말씀은 거두어 주십시오.”

은한은 고개를 숙였다. 텐스테온에게 거두어진 그 순간부터 자신의 목숨은 그의 것이었다. 부탁이라는 말은 당치도 않았다. 그리고….

“황태자비 전하를 지키는 것은 신의 소임이며, 신이 기꺼이 바라는 일입니다.”

오늘 황태자에게 정체를 들켰다. 게다가 그림자로 지내던 평온한 삶을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건만 은한의 마음 한편에서는 소박한 설렘이 일었다.

그분과 마주할 수 있다. 인간 대 인간으로 얼굴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소신은 기쁘게 명을 따를 것입니다.”

***

오늘은 텐라른궁에 가는 날이었다. 하지만 블레이크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저주를 풀기 위해서 텐라른궁에 간다고 하면 반대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전하, 곧 황궁 무도회가 있어요. 준비할 게 많아서 오늘은 좀 늦을 거예요.”

“쉬엄쉬엄해. 무리하지 말고.”

“걱정하지 마세요. 전하야말로 검술 훈련할 때 조심하셔야 해요.”

솔직한 마음 같아서는 블레이크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었으면 좋겠지만, 그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에드온에게 훈련 강도를 낮추라고도 해보았지만, 그럴수록 블레이크는 오히려 더 강하게 하겠다고 고집을 피운다고 했다.

“내가 어린앤가.”

그는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못마땅해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만 가볼게요.”

“응. 다녀와.”

블레이크는 나의 손을 한 번 꼭 잡은 뒤, 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나도 함께 손을 흔들고는 황제궁으로 향했다.

석판이 있는 3층 비밀방으로 가자, 텐스테온은 먼저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 처음 보는 남자가 보였다. 얼굴은 앳되지만, 키가 크고 훤칠하여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있는 남자였다.

나는 인사를 하는 것도 잊고 한 폭의 수묵화처럼 우아한 멋이 풍기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누구지?

이 세계에 와서 처음 보는 동양인이었다. 어째서 텐스테온이 동양인 소년과 함께 있는 걸까? 더군다나 이곳은 비밀 공간이었다. 저자가 누구길래 황제가 출입을 허락한 걸까?

원작에서 저런 소년은 나온 적이 없었는데….

“앤시아.”

텐스테온의 부드러운 음성을 듣자 정신이 돌아왔다.

“죄송해요. 제가 늦었죠.”

“아니. 늦지 않았다.”

“그런데 저분은…?”

“이 아이는 은한이다. 텐라른궁까지 너를 호위해줄 거다.”

은한….

그 이름이 왠지 무척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왜지? 얼굴도 이름도 처음 듣는 사람인데….

“제국의 축복이신 비 전하를 뵈옵니다. 소신, 은한이라 하옵니다.”

은한은 절도 있게 허리를 숙이며 예를 갖추었다. 그러자 그의 기다란 머리카락이 사라락 내려가며 어깨를 덮었다.

“아!”

생각났다!!!

‘창의 황자, 은한.’

그는 동방의 대제국 ‘창’의 황자였지만 불길한 ‘흑룡’의 선택을 받았다는 이유로 처형당할 위기에 처한다.

은한은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흑룡의 힘이 개화하며 아스테릭 제국까지 이동하게 된다.

텐스테온은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은한을 발견하고 치료해준다.

그는 블레이크와 비슷한 처지인 은한을 거두고 진심으로 아껴준다. 은한 역시 황제에게 충성을 다한다.

은한은 흑룡의 힘을 빌린 ‘용술’을 사용했는데, 몸을 숨기고, 치료를 하는 등 그 능력이 무궁무진하였다.

은한은 황제의 명을 받아 블레이크를 보호하고, 그가 아프면 치료해주기도 했다. 또한 블레이크의 소식을 황제에게 알리고, 궁인 중 정도를 넘어서는 이가 있으면 직접 처리하기도 하였다.

은한에 관한 기억들이 빠르게 떠올랐다. 황제가 블레이크를 지키기 위해 심어놓은 그림자. 그게 바로 은한이었다.

황제가 블레이크에게 건강에 좋은 동방의 식재료를 보냈던 것도 전부 은한의 영향이었다.

이걸 왜 잊고 있었지? 텐스테온이 블레이크를 사랑한다는 걸 보여주는 중요한 캐릭터였는데?

“비 전하…?”

내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자, 은한은 당황했다.

“아, 죄송해요. 왠지 낯이 익어서.”

“네?!?”

그러자 침착하던 은한의 눈이 빠르게 깜박거렸다. 수습한다면서 오히려 이상한 말을 뱉고 말았구나. 황제의 그림자로 몸을 숨기며 살아온 은한에게 낯이 익다고 하다니.

“콜린 경이랑 눈매가 닮으신 것 같아요.”

“아, 네…. 그렇군요.”

그는 어딘지 안심하면서도 씁쓸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콜린과 닮았다고 해서 기분이 나빴나? 둘 다 인물이 출중하니 어느 한쪽이 불쾌해할 말은 아닌 것 같았는데.

인사를 마치자, 텐스테온이 은한에 대해 자세히 소개해 주었다.

“실은 그동안 은한에게 황태자궁의 호위를 맡겨왔단다.”

그는 은한에게 황태자궁을 지키도록 명했으며, 저주를 푸는 방법을 찾거나 동방의 식재료를 구할 때도 도움을 받았다는 걸 말해주었다.

이는 내가 알고 있던 내용과 일치했다.

텐스테온의 말을 듣는 내내 나의 머릿속은 혼란으로 가득 찼다.

어떻게 은한을 잊어버릴 수 있었을까? 비록 등장은 짧지만 꽤나 강렬한 인물이었다.

내가 그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얼마나 안타까워했었는데, 지금껏 깡그리 잊어버렸었다니.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그의 존재를 잊어버렸다는 사실보다는 다른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동안 나는 원작의 모든 걸 전부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엑스트라였던 귀족들이나 시녀, 시종들도 모두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중요한 내용 역시 빠짐없이 알고 있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어쩌면 내가 떠올리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게 만약 블레이크의 저주를 푸는 데 중요한 단서라면 어떡하지?

심장이 불안하게 요동치는데, 텐스테온이 지금까지 은한의 존재를 숨겨온 걸 사과했다.

“그동안 말하지 못해서 미안하구나.”

“폐하의 잘못이 아닙니다. 제가 말씀하지 말아달라고 부탁드린 겁니다. 전부 제 탓입니다.”

은한 역시 고개를 숙이며 용서를 구했다. 나는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아, 아니에요.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잖아요. 저는 괜찮아요. 그러니 어서 고개를 드세요.”

“황공하옵니다.”

“이해해주어서 고맙다. 앤시아.”

“아니에요. 저와 전하를 지켜주셨으니 오히려 감사할 일이죠.”

은한은 창의 대역 죄인이었다. 만약 그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창에서는 분명 그를 죽이려 할 거다. 숨기는 게 당연했다.

내가 미소 짓자 텐스테온도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흑단 나무 상자를 건넸다.

“이게 뭔가요?”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투명한 마석으로 이루어진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신전에서 만든 정화 도구다. 흑마법을 막는 데 도움을 줄 거다.”

마법석으로 만든 정화 도구는 처음 보았다.

빛의 마법석은 정화와 치료의 힘이 깃들어 있었지만, 저주의 계승자에게는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오히려 빛의 마법석을 사용하면 독이 되어 저주를 더 악화시켰다.

빛의 여신이 직접 내린 저주이기 때문에 빛의 마법석이 오히려 역효과가 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황태자궁에서는 빛의 마나석을 사용하지 않았고, 나도 자연스레 멀리했었다.

혹시라도 내가 빛의 마나석을 사용했다가 블레이크에게 악영향이 미칠까 봐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오늘은 꼭 필요했다.

“감사합니다.”

텐스테온은 목걸이를 꺼내서 내 목에 걸어주었다. 그 순간 어딘가 찌릿한 느낌이 전신을 울렸다.

“왜 그러느냐?”

“보석이 차가워서요.”

나는 반사적으로 배시시 웃었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정화 목걸이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하면 텐라른궁에 가지 못하도록 말릴 거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텐라른궁에 가고 싶었다. 이런 일로 지체할 수는 없다.

“예쁘구나. 잘 어울린다.”

“고맙습니다. 아버지.”

그는 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은한이 술법을 사용하여 텐라른궁까지 데려다줄 거다.”

“네.”

“나도 같이 가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구나.”

은한의 이동술에는 거리의 제한이 없었다. 하지만 옮길 수 있는 인원은 한정적이어서, 본인을 제외하고 오직 한 사람만 함께 이동할 수 있었다.

“그냥 유적일 뿐인걸요. 걱정하지 마세요.”

“조금이라도 위험한 일이 생기면 곧장 돌아와야 한다.”

“제가 얼마나 겁이 많은데요! 말씀하지 않으셔도 위험하다 싶으면 도망쳐 올 거예요. 그러니까 표정 좀 푸세요. 잘생긴 얼굴이 다 구겨졌잖아요.”

“또 실없는 말을 하는구나.”

“실없다니요! 우리 아버지 얼굴은 국보급 보물인데. 소중히 여기셔야죠. 안 그래요, 은한 님?”

“아, 물론입니다! 폐하께서는 제국 최고의 미남이시죠.”

“흠흠.”

은한까지 칭찬에 가세하자, 텐스테온이 민망한지 헛기침을 했다.

잘생겼다는 소리를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왔을 텐데도 이상할 만치 칭찬에 면역이 없었다.

저런 면이 블레이크와 참 닮았다. 그래서 둘 다 놀리는 맛이 있었다.

“쓸데없는 말은 그쯤 하거라.”

“네. 아버지. 이만 출발할게요.”

“늦지 않게 돌아오거라.”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싱긋 웃고는 은한을 바라보았다.

“이제 가요.”

“네.”

그는 절도 있게 대답한 뒤, 잠시 머뭇거렸다. 이유를 몰라서 빤히 쳐다보자 은한이 주저하며 말을 덧붙였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이동술을 쓰기 위해서는 손을 맞잡아야 합니다.”

난 또 뭐라고. 그의 말을 듣는 순간 피식 웃음이 나왔다. 보수적인 ‘창’국 출신이라 그런지 이성 간에 손을 잡는 것이 부끄러운가 보다.

명색이 19금 피폐물의 주요 인물들인데 왜 이렇게 하나같이 순한 건지.

“알겠어요. 그럼 은한 님, 텐라른궁까지 저를 에스코트해 주시겠어요?”

“네. 명을 받들겠습니다.”

은한은 내 앞으로 다가오더니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나도 그의 손을 맞잡았다.

“눈을 감고 몸에 힘을 빼주십시오.”

그가 시키는 대로 눈을 감았다. 그러자 안개에 휩싸인 것처럼 촉촉한 감촉이 전신을 휘감았다. 시원하며 따스했다.

***

“눈을 떠주십시오. 비 전하.”

은한의 목소리에 따라 눈을 떴다. 촉촉한 물방울 막이 사라지며, 강한 바람이 느껴졌다.

“…여기가 텐라른궁인가요?”

“네. 비 전하.”

나는 모래 먼지가 가득한 황량한 황궁을 둘러보았다. 사치와 향락으로 물들었다던 텐라른궁의 화려함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황폐하네요.”

이곳은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텐라른궁 대화재 이후 천여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풀 한 포기 나지 않은 모랫바닥 위에 성의 잔재들이 처참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성의 일부가 남아 있긴 했다. 하지만 거대한 화염을 견뎠어도 천 년의 시간까지 버티기는 힘들었는지 오랜 바람과 세월 속에서 바스러져 가고 있었다.

“왠지 허무하네요.”

은한은 말없이 손수건을 건넸다. 나는 영문을 몰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울 것 같으셔서….”

“울지 않아요. 조금 울적하긴 하네요.”

대륙은 호령하던 젤칸 제국의 심장이었으나 멸망하여 새로운 주인의 차지가 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주인과 함께 영광의 시간을 달리기도 전에 불에 타서 결국 이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저 오래된 유적일 뿐인데도 적나라하게 펼쳐진 몰락과 화염의 흔적에 압도되어 나까지 허무한 감정에 휩싸였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요? 원래 이렇게 감정적이지 않은데….”

“대지가 오염되어 있습니다. 흑마법의 어두운 힘이 마음을 파고든 걸 수도 있습니다. 비 전하, 이만 돌아가시는 게 어떨는지요?”

“아니에요. 이제 왔는데 벌써 돌아갈 수는 없죠. 궁을 둘러볼게요.”

내가 보았던 과거 속의 텐라른궁은 온통 황금과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아무리 사치스러운 젤칸 제국이었다고 해도 모든 궁을 그렇게 꾸밀 수는 없을 거다.

아마도 높은 신분이나 특수한 목적으로 사용되는 곳이었겠지.

걸어가다 보니 대화재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남아 있는 궁들이 몇 개 보였다.

어쩌면 그 방도 화마에 휩쓸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곳은 텐라른궁의 입구였기 때문에 우리는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황제와 황후가 기거하는 내궁으로 들어갈수록 펼쳐지는 광경은 더욱 처참해졌다.

손잡이가 불타 없어진 칼날과 불길에 반쯤 녹아버린 방어구, 그리고 유해가 점점 늘어났다. 건물도 완전히 전소되어 터만 남은 곳도 많았다.

“비 전하, 발밑을 조심하십시오.”

“네….”

나는 힘없이 대답했다.

로움족은 새로운 황제 필립을 노리고 텐라른궁을 습격했다. 아마 불이 시작된 곳도 황제궁이 었겠지.

황금으로 둘러싸였던 방은 필시 내궁의 어딘가에 있을 거다.

그래도 제법 형태가 남아 있던 건물들을 보며, 과거에서 보았던 장소도 아직 있을 거란 희망을 품었었는데, 점점 처참해지는 황궁의 풍경을 보자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비 전하, 안으로 들어갈수록 어두운 힘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이만 돌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조금만 더 살펴볼게요.”

은한의 말처럼 흑마법의 독기가 점차 강해지는 탓인지 숨이 답답하게 막혀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황금방은 불에 타서 사라졌더라도 석판은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며 걸음을 옮기는데, 원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서진 건물 너머에 우뚝 솟아오른 거대한 석판이 눈에 들어왔다.

“은한님, 저걸 봐요!”

“석판이군요.”

“저쪽으로 가봐요!”

“비 전하, 잠깐 기다리십시오!”

내가 뛰어가자, 은한이 다급히 말렸다. 하지만 나는 곧장 석판으로 뛰어갔다.

석판은 멀리서 보는 것보다 훨씬 컸다. 족히 2.5미터는 훌쩍 넘는 거대한 석판이 잿더미와 모래로 뒤엉킨 황궁 한가운데에 우뚝 솟아 있었다.

“크기는 다르지만 호수에서 꺼낸 석판과 비슷하군요. 문자도 새겨져 있고요.”

그의 말대로 거대한 석판에는 수많은 글씨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네. 이건 고대어예요. 로움족의 글자죠.”

“무어라 적혀 있습니까?”

나는 고개를 들었다. 목이 아플 정도로 고개를 꺾으니 겨우 비석의 최상단에 새겨진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위에서부터 글자를 읽어 내려갔다.

“…위대한 로움의 황제 락슐이 고하노라.”

-위대한 로움의 황제 락슐이 고하노라.

하늘은 위대한 로움을 선택하였고, 로움은 하늘의 뜻에 따라 젤칸 제국을 개창하였다.

하늘은 로움의 혈족에게 찬란한 황금과 비옥한 토지를 허락하였다. 또한 신의 언어를 내려서 우매한 백성을 돌보라 명하셨다.

로움은 하늘의 뜻에 따라 젤칸을 대제국으로 성장시키고 어리석은 백성을 보살폈다.

하나 백성들은 은혜를 몰랐고, 감히 주제도 알지 못하고 로움의 힘을 탐냈다.

그들 중 빛의 여신의 힘을 받은 필립이 젤칸 제국을 무너트리고, 새로운 제국을 건국하였다.

알타르궁은 젤칸 제국의 심장이며, 위대한 로움의 소유물이다.

필립이 감히 황제를 자처하고 알타르궁의 이름을 멋대로 바꾸어 텐라르궁이라 칭하니, 통탄할 일이로다.

하여 나 락슐은 제국력 687년 9월 1일, 무너져버린 기강을 바로잡기 위하여 천한 것들에게 더럽혀진 알타르궁을 소멸시키고 감히 로움의 자리를 넘보는 필립과 무도한 무리들을 처단하려 한다.

이 대륙의 통치권은 오직 위대한 로움의 손에 있으며, 황금과 대지, 신의 언어와 지식, 마법과 힘 그 모든 것이 로움의 위대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우매한 백성들이여 로움에게 복종하라. 만약 이를 거역한다면 로움이 내려준 모든 것을 앗아가리라. 칸의 대지가 암흑으로 물들여 영원히 고통 속에 잠식되리라.

로움을 따르라. 이것이 아둔한 백성들에게 베푸는 마지막 온정이니라.

위대한 로움을 따르라. 젤칸의 새로운 황제 락슐에게 충성을 바쳐라. 젤칸의 백성임을 잊지 마라.

“…….”

석판에 새겨진 글자를 끝까지 읽어 내려가자, 은한은 감탄했다.

“역시 ‘언어 능력자’시네요.”

“별거 아니에요.”

“아니긴요. 비 전하께서는 특별하신 분입니다. 언어 능력자는 무척 희귀하여, 신의 선택을 받은 자로 불린다고 들었습니다.”

“그 정도는 아니고요.”

빛의 계승자인 다이애나라면 모를까, 나는 그저 다른 세계에서 온 덕분에 우연히 능력을 얻은 것뿐이다. 그런 칭찬은 다소 민망했다.

“그보다도 은한 님께서는 이 석판의 내용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분노가 치미는군요. 폭정으로 나라를 멸망시킨 주제에 반성은 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백성을 탓하고 있지 않습니까? 한심하고 악독합니다.”

“역시 그렇게 느껴지시죠?”

“비 전하께서는 아니십니까?”

“뭔가 좀 이상해요. 이건 마치 제발 락슐과 로움을 욕해달라는 글 같지 않나요?“

한껏 폼을 잡으며 장황하게 썼지만 짧게 요약하면 이랬다.

‘만약 너희들이 락슐과 로움에게 복종하지 않는다면 성이든 글자든 할 것 없이 모조리 불태우고 없애버리겠다. 하지만 이건 우리 잘못이 아니다. 전부 로움을 따르지 않는 멍청한 너희 탓이다.’

어째 지능적 안티의 냄새가 났다. 팬인 척하면서 싫어하는 연예인이 욕먹을 만한 글을 일부러 쓰는 악질 어그로 같은 느낌이 오래된 석판에서 흘러나왔다.

“언제나 위에서 군림하던 자들이니까요. 오만함으로 똘똘 뭉쳐 있어서 자신들이 어떻게 비칠지조차 모르고, 신경을 쓰지도 않은 거겠죠.”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로움의 오만함이 표출된 글이라고 해도 이상했다.

“단지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당시 로움족은 멸망한 젤칸 제국을 다시 세우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어요. 필립 황제를 암살하기 위해 황궁을 습격하고 불을 질렀죠. 그들의 가장 큰 적은 필립이에요. 그런데 이 석판에서는 필립을 비난한 구절이 없어요.”

“하지만 아까 빛의 여신의 힘을 받은 필립이…. 아!”

은한도 이상한 점을 깨달았는지 눈을 크게 떴다.

“그렇군요. 이 석판에는 필립 황제가 타격을 입을 문장이 전혀 없네요.”

석판에 필립에 대한 이야기가 있긴 했다.

-그들 중 빛의 여신의 힘을 받은 필립이 젤칸 제국을 무너트리고, 새로운 제국을 건국하였다.

필립이 감히 황제를 자처하고 알타르궁의 이름을 멋대로 바꾸어 텐라르궁이라 칭하니, 통탄할 일이로다.

이 두 문장이다. 하지만 이 문장들은 어디까지나 사실을 적시했을 뿐이지, 필립을 비난한 건 아니었다.

“그렇죠? 만약 이 석판을 통해 백성들의 불안을 자극하고 젤칸 제국에 대한 복종을 받아내려 했다면, 필립을 비난했어야 해요. 최소한 필립이 여신의 선택을 받았다는 사실은 부정했어야죠.”

나는 석판에 적힌 글자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하늘의 선택을 받은 건 오직 우리 로움뿐이고, 필립은 사기꾼이다. 여신의 선택을 받았다는 거짓말로 어리석은 백성을 현혹시키고 있다.’ 이런 식으로 적어야 하지 않나요? 그런데 이 석판은 필립이 여신에게 선택당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인정해주고 있죠.”

“…설마 비 전하께서는 이 석판을 필립 황제가 직접 세웠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은한은 머리가 좋았다. 이 대화만으로 내 생각을 곧장 간파해냈다.

“맞아요. 아마도 이 석판을 세운 사람은 락슐이나 로움족이 아니라 필립 황제였을 거예요.”

의심을 하기 시작하니 모든 것이 이상했다.

“이 석판은 백성들을 향한 경고를 담고 있어요. 그런데 이곳은 텐라른궁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황제궁 앞이에요. 광장도 아니고 귀족들조차 쉬이 오기 어려운 곳에 석판을 세우는 건 이상해요.”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요?”

“그렇다 하더라도 필립이 이 석판을 치우지 않은 것은 납득이 가지 않아요. 당시 젤칸 부흥 운동이 거셌지만, 결국에는 반역 세력을 모두 소탕하고 락슐도 처형했다고 들었어요.”

필립은 칸과 텐라른궁의 피해가 워낙 막심한 데다가 흑마법으로 대지가 오염되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수도를 옮긴 것이다. 도망치듯 텐라른궁을 떠난 게 아니다.

“필립은 승자였고, 여유가 있었죠. 그런데 굳이 락슐이 세운 석판을 놔둘 이유가 있었을까요?”

생각을 하면 할수록 석판을 필립이 세웠다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불에 탄 흔적 하나 없이 깨끗한 석판을 만져보았다.

그 순간 마나석 목걸이가 빛나며 감전된 듯 전신이 찌릿하게 울렸다. 그리고 새까만 어둠이 찾아왔다.

그리고 다시 거대한 석판이 보였다. 하지만 잠깐 사이에 석판은 무언가 달라져 있었다.

석판이 깨끗했다. 만든 지 얼마 안 되었는지 세월의 흔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 뒤에 펼쳐지는 황궁의 모습은 더욱 처참해, 검게 타버린 흔적과 아직 남아 있는 작은 불씨마저 고스란히 느껴졌다.

[필립, 이 석판은 뭐야! 미쳤어? 제정신이야!!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어!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인간이면 이럴 수 없어! 어떻게,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어!]

석판 앞에서 소리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피를 토하듯 분노를 쏟아냈다. 그러자 맞은 편에 서 있던 남자의 붉은 눈동자가 사납게 번뜩거렸다.

[함부로 말하지 마라. 나는 제국의 황제다. 더 이상 무례를 범한다면 아무리 너라도 용서하지 않아.]

그렇다면 저 남자가 바로 필립인가?

아스테릭 제국의 초대 황제이자 여신을 배신하여 ‘저주의 계승자’를 만들어낸 사람?

은발에 붉은 눈동자를 지닌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의 모습을 자세히 확인하려는 순간 눈앞이 흐려지더니 다급한 은한의 목소리가 들렸다.

“비 전하! 비 전하!”

그의 외침을 듣는 순간 환영이 사라졌다. 느리게 눈을 깜박이자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석판과 놀란 듯한 은한의 모습이 보였다.

“은한 님.”

“괜찮으십니까?”

“네. 잠깐 어지러운 것뿐이에요.”

또다시 천 년 전의 일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계속되는 걸까? 내가 빙의자이기 때문인 걸까?

“아무래도 흑마법의 영향인 듯합니다. 이만 돌아가시죠.”

“아니요, 조금만 더 찾아볼게요.”

두 번이나 천 년 전의 과거가 나타났다.

이건 어쩌면 빛의 여신이 보내준 선물이 아닐까? 내가 블레이크를 고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걸 안타깝게 여겨서 저주를 풀 힌트를 보여주는 걸지도 모른다.

이곳에 블레이크의 저주를 풀 단서가 있다. 빛의 여신이 나를 이끌고 있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안 됩니다. 비 전하께서 위험하시면 즉각 환궁하라는 폐하의 엄명이 계셨습니다.”

은한은 정중하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괜찮아요.”

“안색이 창백하십니다.”

“잠깐, 아주 잠깐이면 돼요.”

무언가 변화가 있다. 저주를 풀 방법을 찾을지도 모른다. 단서를 앞에 두고 이대로 떠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은한은 난처해하면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비 전하의 안위가 우선입니다. 일단 환궁하셨다가 다음에 다시 오시….”

부드러운 어투로 나를 설득하던 은한의 눈빛이 갑자기 번뜩이더니, 하늘을 노려보았다.

“은한 님…?”

“마물입니다.”

“마물이요? 텐라른궁은 대지의 오염이 너무 심해서 마물조차 살지 못한다고 들었는데….”

의아해하며 은한의 시선을 따라 하늘을 바라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비 전하, 실례하겠습니다.”

“네? 앗!”

은한이 갑자기 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전형적인 ‘공주님 안기’ 자세가 된 나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놀라기는 일렀다. 내가 떨어지지 않기 위하여 반사적으로 그의 목을 끌어안는 순간, 하늘에서 새하얀 마물들이 나타났다.

환하게 빛나는 커다란 머리에 굵은 실이 삐져 내려온 듯한 모양새, 마치 거대한 콩나물을 연상시키는 저 마물은 바로….

“마쿨이에요!”

혼돈의 계곡에서만 서식한다는 마물이 어째서 이곳에 나타난 거지?

“저를 꽉 붙잡으십시오.”

은한이 나를 안고 뛰자, 마쿨은 처음부터 우리를 노렸다는 듯 빠르게 쫓아왔다.

수십 마리의 마쿨이 기다란 몸을 흔들며 빠르게 날아왔다. 은한도 바람에 몸을 실으며 커다란 보폭으로 뛰었다. 평범한 인간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은 속도였다.

그러나 마쿨은 수가 많았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마쿨의 추격에 은한은 점점 궁지로 몰렸다.

“은한 님, 저를 내려주세요.”

은한 혼자라면 마쿨들을 가볍게 따돌릴 수 있을 거다. 그의 발목을 잡고 싶지 않았다.

“단단히 잡으십시오.”

하지만 그는 오히려 나를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제가 있겠다고 고집 피운 거잖아요. 은한 님만이라도 도망치는 게….”

“궁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먼지가 많을 겁니다.”

마쿨들로 인해 사방이 막힌 은한은 앞에 보이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마쿨은 곧장 우리를 쫓았다.

좁은 복도 안으로 거대한 마물들이 밀려들자, 가뜩이나 위태롭게 지탱되고 있던 건물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앞은 벽으로 가로막히고, 뒤에는 마물들 천지였다. 더 이상 도망칠 방법이 없었다. 결국 은한은 나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소신이 길을 만들겠습니다. 비 전하께서는 우리가 처음 왔던 그곳으로 도망치십시오.”

그는 비장한 얼굴로 검을 뽑았다. 아무리 은한이 용술을 쓴다고 한들 수많은 마물을 처리하는 건 어려울 거다. 그때 마쿨 한 마리가 엄청난 속도로 우리에게 날아들었다.

은한은 나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기며 마쿨을 향해 검을 뻗었다. 하지만 마쿨은 우리를 지나치더니 그대로 벽에 부딪혔다.

쾅!

다른 마쿨도 벽을 향해 몸을 날릴 뿐, 우리를 공격하지는 않았다.

“우리가 목적이 아니었나 봐요…?”

“안심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검을 단단히 쥔 채 마쿨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쾅쾅!

마쿨들이 연이어 몸을 부딪치자 단단한 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쪽 벽면이 완전히 무너졌다.

“……!”

너머에는 새로운 공간이 있었다. 마쿨은 그 안으로 들어갔다.

은한과 나는 딱딱하게 굳어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자 앞서가던 마쿨이 몸을 돌려서 우리를 바라보더니 하얀 줄기를 곰살맞게 흔들었다.

“따라오라는 건가 봐요.”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마물이 공격을 멈추었으니, 이 틈을 타서 환궁해야 합니다.”

“아니에요. 들어가는 게 좋겠어요.”

“비 전하, 위험합니다.”

“위험하지 않아요. 생각해보면 마쿨들은 단 한 번도 공격하지 않았어요.”

마쿨은 우리를 쫓아올 뿐 공격하지는 않았다. 아니, 쫓은 게 아니다.

“처음부터 우리를 이곳으로 이끌기 위해서 나타났던 거예요.”

“그렇다면 더더욱 도망쳐야죠. 저 안에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지 않습니까?”

“혼돈의 계곡에서만 서식하는 마물이에요. 굳이 이곳에 나타난 데는 이유가 있을 거예요.”

나의 말이 맞는다는 듯 마쿨들은 하얀 빛을 뿜었다. 그와 동시에 목걸이의 빛의 마나석도 반짝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 빛에 이끌려 홀린 듯 걸음을 옮겼다. 은한도 더는 말리지 못했다.

이 복도에는 불에 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대화재가 벌어진 이후에 벽을 세워서 입구를 막은 듯했다.

창문 하나 없는 복도였지만, 마쿨의 빛 때문에 어둡지는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막다른 벽이 가로막았다. 그러자 마쿨은 바닥을 쿵쿵 내리쳤다.

아프지 않을까?

우리를 공격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생겨서인지 그들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닥이 부서지더니 숨겨져 있던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계단을 내려가려 하자 은한이 다시 나를 만류했다.

“위험합니다.”

“여기까지 와서 포기할 수는 없잖아요.”

“함정일지도 모릅니다. 제가 가보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문제가 있으려면 진작 있었을 거예요.”

복도를 채운 빛이 동시에 흔들렸다. 마쿨들이 내 말에 동의하며 머리를 주억거린 것이다. 처음에는 콩나물을 확대한 것 같은 생김새가 징그러웠는데, 이제는 귀여워 보였다.

“봐봐요. 괜찮다잖아요.”

“저들은 마물입니다. 믿을 수 없습니다. 돌아가시죠.”

하지만 은한은 강경했다. 그가 걱정하는 건 이해하지만, 나도 물러설 수는 없었다.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은한 님. 저는 전하의 저주를 꼭 풀어드리고 싶어요. 저주를 풀 수만 있다면 어떤 위험도 감수할 수 있어요. 그런데 정말로 위험한 것도 아니고,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어요. 그럼 평생 후회로 남을 거예요.”

“하오나 비 전하….”

“억지를 부려서 죄송해요. 하지만 이번에는 제 뜻을 따라주세요. 부탁드립니다.”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은한에게 부탁했다. 그러자 그는 당황하며 어쩔 줄을 몰랐다.

“이러지 마십시오. 비 전하.”

“정말로 위험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만약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곧장 돌아가겠습니다. 그러니 막지 말아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러니 고개를 드세요.”

“감사합니다.”

나는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올린 뒤, 허리를 폈다. 마지못해 알겠다고 말은 했지만, 은한의 눈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조금이라도 위험한 낌새가 보이면 즉시 황궁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알겠어요. 약속할게요.”

우리는 성큼성큼 계단을 밟았다. 무섭지는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쿨이 이렇게까지 복잡한 함정을 팠을 거 같지는 않았다.

한참 동안 계단을 내려가자 다시 벽이 나왔다. 마쿨은 알고 있었다는 듯 벽을 부수었다.

대화재가 난 직후 이러한 벽을 세울 수 있던 사람은 필립뿐일 거다. 그는 도대체 무엇을 감추려고 한 걸까? 여신의 저주와 관련된 걸까?

콰르릉!

생각에 잠긴 사이 벽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

무너진 벽 너머의 광경을 본 순간, 저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지하 깊숙한 곳에 거대한 황금문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문양이 새겨져 있는 황금문은 하나의 예술작품이자 호화로움을 극대화한 사치품이었다. 황태자비로 지내며 화려한 보물들에 익숙해진 나조차도 이런 건 처음 보았다.

마쿨들은 황금문의 주변을 빙빙 맴돌았다. 마쿨이 뿜어내는 하얀 빛 때문에 황금이 반짝거리며 화려함을 더해주었다.

“저 안으로 들어가라는 건가 봐요.”

“제가 가겠습니다.”

은한은 성큼성큼 걸어가 문을 밀었다. 하지만 황금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잠긴 것 같군요.”

“열쇠를 찾아야 할까요? 하지만 자물쇠나 열쇠를 넣는 구멍은 보이지 않는데….”

“문 자체에서 강한 힘이 느껴집니다. 누군가가 마법으로 봉인해 놓은 듯합니다.”

“봉인을 풀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마법 시전자가 걸어놓은 암호를 알아내거나, 본인이 직접 풀어야 합니다. 저도 마법사가 아니기 때문에 정확한 건 알 수 없으나, 이 정도 힘이라면 외부에서 강제로 푸는 건 어려워 보입니다.”

필립은 수많은 벽을 세워서 이곳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렇다면 봉인 마법이 걸린 건 그보다 전일 거다.

천 년 전에 걸린 마법. 그때의 마법사가 아직까지 살아 있을 리가 없었다. 암호가 있다 한들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숨겨놓은 마당에 필립이 남겨두었을 리도 없을 거고, 이제 와 찾을 수도 없었다.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송구합니다.”

은한은 고개를 숙였다. 방법이 없다는 뜻이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이 문 앞에 블레이크의 저주를 풀 단서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저주의 고통 때문에 힘없이 웃던 블레이크의 얼굴이 떠오르자 왈칵 눈물이 맺혔다.

“비 전하….”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어요.”

나는 황금문을 살폈다. 어쩌면 문에 새겨진 장식 속에 암호가 숨어 있을지 모른다. 문을 자세히 보기 위해 가까이 다가가 손을 대는데, 그 순간 황금문에서 빛이 흘러나오더니 투명한 막이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나는 화들짝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은한은 오히려 문에 가까이 다가갔다.

“봉인이 풀렸습니다.”

“봉인이 풀렸다고요…?”

“네.”

“어떻게 갑자기 풀릴 수가 있죠? 시간이 오래 지나서 봉인이 약해졌나?”

“아니요. 저의 용력을 모두 흐트러트릴 정도로 강한 힘이었습니다. 비 전하께서 해제하신 겁니다.”

“제가요? 하지만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나는 단지 문을 만졌을 뿐이다.

“저도 어떻게 된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둘이 머리를 맞댄다고 해서 마땅한 답이 나오는 건 아니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요.”

“네. 비 전하.”

은한은 황금문을 밀었다. 나도 옆에 서서 힘을 실었다. 그러자 육중한 문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문이 모두 열리고 비밀스럽게 감추어져 있던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운동장처럼 드넓은 방이 온통 황금과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천 년 전의 과거에서 보았던 바로 그 방이었다. 그때도 화려하다고 느꼈지만 실제로 보니 감탄사조차 뱉기 어려울 정도로 휘황찬란했다.

갑자기 천 년 전의 과거가 눈앞에 펼쳐졌고, 마쿨이 나타나 같은 장소로 나를 안내했다.

정말로 빛의 여신이 나를 이곳까지 이끈 것 같았다. 블레이크의 저주를 풀 기회를 준 것이다.

“들어가요.”

“네. 비 전하.”

은한도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마쿨은 들어오지 않고 밖에 서서 황금문의 주변을 천천히 유영했다. 정답을 찾았다며 칭찬해주는 것 같았다.

이곳에는 젤칸 시대 양식이 그대로 반영된 진귀한 보물들이 많았지만 그건 관심 밖이었다.

황금방 한쪽 구석에 수많은 석판이 세워져 있었다. 황태자궁의 호수에서 건진 석판과 크기와 형태가 거의 같았다.

“3층 방에 있던 석판과 똑같군요.”

은한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다.

“네. 게다가 이곳의 석판은 글씨도 선명해요.”

“드디어 원하던 걸 찾으셨네요. 감축드립니다.”

“아직 기뻐하기는 일러요.”

나는 차오르는 흥분과 기대를 애써 누르며 석판을 해석하기 시작했다.

-504년 6월, 건국기념제가 열리니, 대륙의 모든 국가가 사신을 보내 위대한 젤칸 제국과 로움을 칭송하였다.

-504년 7월, 사냥대회에서 제5 황자가 우승하였다.

젤칸의 5황자면 락슐이었다. 그는 출중한 무예로 젤칸에서 주목받는 황자였나 보다. 하긴, 그러니까 부흥 운동을 이끌었겠지.

-504년 8월, 제9 황비가 열다섯 번째 황녀를 낳았다.

홍수로 인해 민가 100채가 물에 잠겼다.

“뭐라 적혀 있습니까?”

“젤칸 제국의 역사요. 건국제나 황녀의 출생, 자연재해 등이 간략하게 적혀 있어요.”

“중요한 역사만 따로 석판에 새겼나 보네요. ‘창’도 그럽니다. 모든 역사는 사관이 종이에 기록하고, 그중 특별한 일들은 석판에 남기죠.”

“그렇다면 양피지에 적은 기록은 전부 불에 타고 이것만 남은 모양이네요.”

자세히 살펴보니 이곳에는 젤칸 제국이 건국된 지 500년이 지난 이후의 기록들이 모여 있었다.

아마 이런 공간이 또 있었을 거다. 석판이다 보니 부피가 꽤 될 거고, 기존에 있던 곳이 가득 차자 새로운 석판을 보관하기 위해 이 황금방을 만든 거겠지.

하지만 젤칸은 510년에 멸망했다. 아마도 그들은 자신들이 이토록 빨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줄은 몰랐을 거다.

나는 석판을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멸망을 앞둔 나라치고는 평화로운 기록이었다.

-505년 10월, 제11 황비가 열일곱 번째 황자를 출산했다.

“11황비가 열일곱 번째 황자를 낳았대요. 도대체 황비가 몇 명인지 모르겠어요. 정부나 숨겨진 자식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요?”

“셀 수도 없겠죠. 나라를 멸망으로 이끈 폭군답습니다.”

이후에도 또 새로운 황비를 들였다거나, 출산했고, 궁을 축조했다는 기록이 이어졌다.

여신의 저주를 풀 만한 단서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 낯익은 이름이 역사 속에서 활약하기 시작했다.

-508년 3월, 북부가 마물로 큰 피해를 입자, 황제는 마물을 토벌하라 명하였다.

-508년 5월, 제5 황자의 활약으로 마물을 소탕하였다.

-508년 6월 제5 황자 락슐이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락슐 황자는 사실 황태자였나 보네요.”

“텐라른궁에 불을 지른 사람 말입니까?”

“네. 젤칸 부흥 운동의 수장이요. 텐라른궁뿐만 아니라. 책을 모두 불태워서 로움의 언어가 아무도 쓰지 않는 사어가 되는데 일조했죠. 젤칸의 수도였던 땅을 오염시켜서 사람이 살 수 없게 만들었고요.”

“참으로 잔악무도한 자입니다. 천 년 전에는 지금보다 오염이 심했을 겁니다. 아마 정화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전부 죽었겠죠.”

석판을 세운 자가 필립이라 하더라도, 락슐이 저지른 악행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는 결국 황군에게 붙잡혀서 처형당했다고 한다. 저지른 죄악에 비해 너무나도 편안한 결말이었다.

나는 다음 석판으로 향했다. 그리고 기록을 읽어 내려가던 중 하나의 문장을 보고 눈이 크게 떠졌다.

-508년 7월, 황태자가 벨리시안 백작의 여식, 라온텔 벨라시안과 약혼하였다.

라온텔 벨라시안…?

라온텔 벨라시안은 필립과 함께 젤칸을 무너트리고 아스테릭 제국을 건국한 빛의 마법사였다.

아스테릭을 세우는 데 일등 공신이었던 라온텔이 젤칸 제국의 황태자비였다고?

나는 서둘러 다음 기록을 읽어 내려갔다. 라온텔의 기록을 찾고 싶었지만, 황태자나 황태자비에 관한 내용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다른 내용이 눈에 띄었다.

-508년 8월, 제8 황녀가 예척(*세상을 뜨다)하였다.

제8 황녀의 죽음을 시작으로, 젤칸의 제국에 암운이 들기 시작했다.

-508년 9월, 제7 황비가 기침을 심하게 하더니 피를 토하고 종국에는 피부가 검게 물들었다. 8황녀와 같은 병이었다. 황제는 제7 황비를 유폐시켰다.

-508년 제8 황자가 예척했다.

-508년 제4 황비가 예척했다.

-508년 제11 황녀가 예척했다.

-508년 10월, 황제는 역병을 퍼트린 7황비에 진노하여 자진을 명했다. 하지만 황명을 받들기 전에 이미 숨을 거두었다. 7황비의 얼굴이 흉측하게 변하고 몸에는 검은 반점이 뒤덮여 살아생전의 아름다움을 찾아볼 수 없었다.

피부가 검게 변하고 신체의 골격이 문드러지는 병…. 이 병은 분명 ‘탄시놀’일 거다.

다른 황족들의 증상은 기록되지 않았지만, 7황비가 역병을 퍼트렸다는 것을 보니 모두들 같은 병을 앓았다는 거다.

탄시놀에 걸리면 외모가 변했기 때문에 다른 황족들은 체면을 고려하여 병에 대한 증상을 적지 않았지만, 7황비는 역병을 불러온 죄인이기 때문에 거리낌 없이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왜 그러십니까?”

내 표정이 많이 심각했는지, 은한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508년 중순부터 ‘탄시놀’이 퍼지기 시작했어요.”

“네? 하지만 ‘탄시놀’은 젤칸이 멸망한 이후에 발생한 질병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렇게 전해지고 있죠. 하지만 이건 ‘탄시놀’이 분명해요.”

나는 석판에 새겨진 문자를 계속 읽어 내려갔다. 수많은 황비와 황자, 황녀가 계속해서 목숨을 잃었다. 해가 바뀌었지만 전염병은 더욱 심해졌고 신년 무도회조차 열리지 않았다.

-509년 1월, 황후가 붕어했다.

제2 황녀 일가가 목숨을 잃었다.

제7 황자가 예척했다.

제2 기사단에 역병이 퍼져 호위에 차질이 생겼다.

역병은 점점 심해져서 황족의 가족과 기사단에게까지 퍼지고 있었다.

더욱더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다. 석판 하나가 부고로 가득 차기도 하였다.

그리고 죽음의 소용돌이 속에서 점차 젤칸 제국이 멸망하는 ‘510년’이 다가오고 있었다.

죽음이 계속 이어지자 읽는 나도 지쳐갔다. 그리고 다음 석판으로 넘어가자마자 충격적인 문장이 보였다. 나는 숨을 삼켰다.

-510년 2월, 황태자가 승하했다.

락슐이 죽었다고?

“비 전하…?”

내가 너무 놀라자 은한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락슐이 죽었대요.”

“네? 젤칸 제국이 멸망하기 전에요?”

“네.”

“그럼 젤칸 부흥 운동의 수장은 누구였던 거죠? 황태자를 사칭한 걸까요?”

“…….”

은한의 말대로 누군가가 멸망한 제국의 황태자를 사칭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거다. 하지만 왠지 아닐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510년 2월, 수도 전체에 역병이 퍼져 집마다 시체가 즐비했다.

510년 3월, 황제의 몸에 검은 반점이 나타났다. 대신관이 치료하였으나 차도가 없었다.

-510년 4월, 황제가 붕어했다.

황태자도 황제도 모두 죽었다. 필립은 아직도 역사의 페이지를 장식하지 않았다.

필립과 라온텔 벨리시안이 빛의 힘으로 타락한 젤칸 제국을 무너트리고 만백성들의 환호 속에서 아스테릭 제국을 세웠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젤칸 제국은 이미 스스로 무너졌다. 수도 전체에 전염병이 퍼졌고, 백성들은 황제가 누구인지 신경을 쓸 겨를조차 없었다.

나는 다음 석판으로 갔다.

-510년 5월, 선황의 혈육인 필립이 홀연히 나타났다. 그가 빛의 여신에게 받은 힘으로 축복을 행하자, 검은 반점이 사라지고 열이 내렸다.

-510년 6월, 필립이 황제로 즉위했다. 역병이 사라지자 만백성이 그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드디어 필립이 등장했다. 하지만 아스테릭 제국의 역사서와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그는 젤칸 제국을 무너트리고 새로운 제국을 세운 것이 아니었다.

역병으로 인해 황제와 황태자, 다른 황족들마저 모두 죽자, 그 빈자리를 차지했을 뿐이다. 여신에게 받은 빛의 힘으로 전염병을 치료하며 너무나도 손쉽게 황제가 된 거였다.

아스테릭 제국의 건국 신화와 필립의 영웅담은 모두 거짓이었다. 빛의 여신은 이걸 알려주기 위해 나를 이곳으로 이끈 걸까?

필립이 즉위한 뒤에도 기록은 계속 이어졌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새로운 제국을 건국한 황제가 아니다. 젤칸 제국 황제의 아들로서 황위를 물려받았다.

그가 진짜 황제의 아들인지, 아니면 핏줄을 사칭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역사 속에 기록된 정식 황자는 아니었다.

-510년 7월, 황제는 여신의 명에 따라 국명을 ‘아스테릭’으로 바꾸었다. 또한 역병의 기운이 묻은 ‘알타르’의 이름을 버리고 황궁을 새로이 ‘텐라르’라 칭하였다.

나라와 황궁의 이름을 바꾼 것도 역병으로 엉망이 된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한 것일 뿐이었다.

백성들을 위해 썩어빠진 황실을 무너트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운 영웅이자 초대 건국 군주 ‘필립’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내가 이와 같은 사실을 말하자 은한도 동의했다.

“나라가 세워지면 온갖 미사여구로 자신을 포장하죠.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인 건 아무래도 수상하네요.”

나는 석판을 계속 읽었다. 필립이 역병을 치료하고, 그를 찬양하는 노래와 동상이 만들어지는 등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젤칸 부흥 운동이나 로움족이 반발했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젤칸은 멸망한 게 아니라 이름만 바뀐 것이었으니, 부흥 운동이 벌어지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됐다.

그리고 마지막 석판으로 갔다. 아마도 불이 나기 직전 마지막 기록일 거다.

-513년 10월, 황제가 빛의 여신이 선택한 라온텔 벨라시안을 황후로 책봉하였다.

마지막에 가서 라온텔 벨라시안의 이름이 다시 등장했다.

필립이 락슐 황태자의 약혼녀였던 라온텔 벨라시안과 결혼을 했다고? 그럼 그녀 때문에 여신을 배신했고, 저주가 시작된 건가?

필립은 여신을 배신하고 다른 여자를 택했다. 하지만 그 여자에 관한 기록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필립 황제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중 한 명은 차기 황제가 되었고, 막내아들은 저주에 걸렸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여인에 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황후가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일각에서는 그가 평생 황후를 맞이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여자가 ‘라온텔 벨라시안’이었다고?

필립이 빛의 여신을 배신하면서까지 라온텔 벨라시안을 황후로 맞이했고, 텐라른궁에 화재가 일어났다. 황궁과 수도의 대지도 오염되어 결국 천도를 감행해야 했다.

필립은 락슐이 모든 일을 저지른 것처럼 거대한 석판을 세웠다.

하지만 젤칸 부흥 운동은 존재하지 않았고, 모든 비극의 원흉으로 지목되었던 락슐 황태자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젤칸 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로움족이 반성하지 않고 계속해서 많은 죄를 짓는 바람에 빛의 여신이 노하여 ‘탄시놀’이라는 병을 내렸다고 했지만, 그 병은 이전부터 퍼져 있었다.

역사의 기록과 실제 벌어진 일은 판이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석판은 이것으로 끝이었다. 다른 자료는 보이지 않았다. 호화로운 보물들이 있긴 했지만, 특별히 저주와 관련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게 끝이야?’

실제 사실과 역사의 기록이 다르다는 건 흥미로웠지만, 나는 역사 공부를 하기 위해 머나먼 텐라른궁까지 온 게 아니었다.

게다가 필립이 나쁜 놈이라는 사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가 기록된 것보다 훨씬 의뭉스럽고 나쁜 짓을 행했다고 한들 천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나는 블레이크의 저주를 풀기 위해서 이곳에 왔다. 하지만 이 많은 석판 중 블레이크의 저주를 풀 수 있는 단서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과거의 기억이 나타난 거지? 마쿨은 왜 나를 이곳으로 이끈 거지?

나는 문밖을 보았다. 하지만 마쿨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어디로 간 거지?

나는 마쿨이 있던 문밖으로 나가보았다. 그 순간 목걸이에서 우두둑 소리가 났다. 대지에 있는 강한 독기를 이기지 못하고 빛의 마나석이 부서진 거다.

은한은 다급히 자신이 찼던 빛의 마나석 팔찌를 건넸다.

“비 전하, 받으십시오.”

“은한 님도 하셔야죠.”

“저는 괜찮습니다. 그리고 잠깐입니다. 황궁으로 돌아갈 때까지만 착용해주십시오.”

은한은 팔찌를 내 손목에 끼워준 뒤, 곧장 손을 맞잡았다. 상황이 급박해서인지 처음과 같은 머뭇거림은 없었다.

그는 이대로 황궁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나도 더는 고집부리지 않았다. 마쿨도 사라졌고, 과거의 장면도 펼쳐지지 않았다. 더 이상 이곳에서 더 알아낼 정보는 없을 거다.

“비 전하, 눈을 감으십시오.”

나는 그의 말을 따랐다. 촉촉한 안개가 전신을 휘감더니 하늘로 날아오르듯 몸이 가벼워졌다.

***

눈을 뜨자 익숙한 석판이 보였다. 필리온궁 3층의 비밀방으로 돌아온 거다.

“앤시아!”

“아버님….”

걱정이 가득 담긴 텐스테온의 얼굴을 보는 순간 고개가 저절로 숙어졌다.

“죄송해요.”

“왜 그러느냐?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아버님이 주신 목걸이가 망가졌어요.”

그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안아주었다.

“그게 뭐라고. 다친 데는 없느냐?”

“없어요. 은한 님께서 지켜주셨어요. 팔찌도 주셨고요. 하지만, 하지만….”

크고 단단한 텐스테온의 품에 안기니 정말로 어린아이가 된 것 같았다.

따뜻하게 등을 쓸어주는 손길을 느끼는 순간, 텐라른궁에서 느꼈던 실망과 허무함, 그리고 미안함이 한순간에 터져 나왔다.

“죄송해요. 결국 아무것도 찾지 못했어요.”

“괜찮아. 죄송할 거 없다.”

“그렇게 고집을 부려서 거기까지 갔는데….”

텐스테온은 울먹이는 나를 꽉 끌어안았다.

“미안하다. 내가 너에게 너무 많은 부담을 줬나 보구나. 울지 마라. 울 거 없어. 괜찮아. 괜찮다. 앤시아.”

기대했다. 천 년 전의 과거가 연달아 펼쳐지고, 마쿨이 나를 안내했다. 그 방에 갔을 때, 드디어 블레이크의 저주를 풀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 텐스테온이 괜찮다고 다독여줄수록 오히려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지금 힘든 사람은 블레이크와 텐스테온일 거다. 내가 위로받아서는 안 된다. 눈물을 멈추려고 했는데 잘되지 않았다.

그때 비밀 공간의 문이 열렸다.

“폐하!”

콜린이 다급히 소리치며 안으로 들어왔다. 언제나 냉철하던 콜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며 피가 차갑게 식었다. 텐스테온 역시 딱딱하게 굳었다.

“무슨 일이냐?”

“황태자 전하께서 쓰러지셨습니다!”

***

블레이크는 사흘째 의식을 찾지 못했다.

“비 전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를 오랫동안 모신 멜리사와 한스는 오히려 침착했다. 나와 결혼하기 전에는 자주 있었던 일이라고 했다.

원래 블레이크는 주기적으로 열이 끓고 저주의 문장이 퍼지며, 다시 열이 끓고 저주의 문장이 퍼지길 반복했으니 이번에도 그런 것이라 설명했다.

그리고 이는 ‘저주의 계승자’인 이상 피할 수 없는 숙명이며, 3년 동안 저주가 퍼지지 않은 것이 오히려 기적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그들은 최근 들어 블레이크에게 미열이 계속되자 이리될 것을 예상했다고 하며 나를 위로해 주었다.

하지만 나는 담담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물론 그들도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태연한 척하는 것일 뿐 속은 썩어들어 가고 있을 거다.

나 때문이다. 전부 나 때문이야.

생각해보면 다이애나가 입학한 이후부터다. 다이애나가 떠나고부터 블레이크의 상태가 나빠지기 시작했다.

소설에서도 블레이크는 11살이 되는 해 크게 앓았다. 하지만 빛의 축제 이후였다. 이렇게 이르지 않았다.

나 때문이다. 역시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

나는 블레이크의 손을 꼭 잡았다. 그의 왼손은 언제나 차가웠다. 저주의 문장이 몸을 파고든 탓인지, 차가운 데다 자주 저리고 쥐가 났다.

나는 블레이크가 잠이 들고 나면 그의 몸을 주물러 주곤 했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저주가 퍼진 곳은 따뜻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사흘째 열이 펄펄 끓으며, 그렇게 노력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던 왼손마저 뜨거웠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전하. 제가 욕심을 부렸어요.”

블레이크의 저주를 풀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다이애나뿐이다. 그걸 알면서도 그의 곁에 남고 싶은 마음에 욕심을 부렸다.

나에게 과거를 보여주고 텐라른궁까지 이끈 자가 정말로 여신인지 아니면 이 세계를 관장하는 다른 존재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마쿨까지 이용하며 저주를 푸는 것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황금방을 보여준 이유를 이제는 알 것 같았다.

필립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나쁜 놈이고, 빛의 여신은 그를 용서하지 않을 거다. 그러니 이제 그만 헛된 희망을 접으라는 거다.

“헛된 욕심을 부리지 않을게요. 그러니까 제발, 제발 블레이크가 아프지 않게 해주세요….”

나는 빌었다. 그에게 저주를 건 빛의 여신에게 비는 건지, 이 소설 속 세계를 관장하는 신에게 비는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무작정 애원했다.

그를 아프게 하지 않는다면 악마에게라도 무릎 꿇고 사정할 수 있었다.

원작에서 텐스테온이 리차드의 흑마법에 속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제가 잘못했어요. 블레이크가 깨어나기만 하면 당장 떠날게요. 그러니까 제발….”

“…가지 마.”

나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블레이크의 붉은 눈동자가 나를 또렷이 직시하고 있었다.

“전하, 깨어나셨어요? 몸은 괜찮으세요? 당장 궁의를 부를게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는데, 블레이크가 내 손을 강하게 붙잡았다.

“앤시아, 가지 마.”

“전하….”

“가면 안 돼…. 떠나지 마….”

“아, 안 가요. 제가 가긴 어딜 가요.”

그의 간절한 눈동자 앞에서 차마 떠날 거라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약속이야….”

그의 목소리가 힘없이 흩어졌다. 그리고 다시 눈을 감았다.

***

블레이크는 그다음 날도 깨어나지 못했다. 어젯밤에 잠깐 눈을 뜨긴 했지만, 가지 말라는 말만 하고는 다시 의식을 잃었다.

숨소리는 가늘고 몸은 불덩이 같았다. 작은 몸이 이대로 타버릴 것만 같아서 무서웠다.

“아무리 3년 만이라고 해도 너무 깁니다. 나흘 동안 의식을 찾지 못하시다니요?”

“쉿. 비 전하께서 들으십니다.”

문밖에서 한스와 멜리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는 그들도 더는 침착을 가장하지 못했다.

나는 블레이크의 손을 꼭 잡았다. 내가 다이애나였다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블레이크가 아프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빛의 계승자다. 아직 각성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나보다는 훨씬 도움이 되었을 거다.

“전하, 죄송해요.”

그에게 다시 사과하는데, 밖이 소란스럽다 싶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텐스테온이었다.

블레이크가 저주에 걸린 이후 처음으로 황제가 그를 만나러 왔다. 그토록 고대하던 일이었건만 텐스테온을 보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황제에게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블레이크를 만나 달라고 거듭 청했다.

하지만 텐스테온은 그 부탁만큼은 들어주지 않았다. 그것이 블레이크를 지키는 길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블레이크를 황궁에서 내쫓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자들에게 먹잇감을 제공하지 않기 위해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그런 텐스테온이 직접 발걸음을 옮겼다. 그만큼 블레이크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뜻이었다.

“아버님….”

그는 위로하듯 나의 등을 두드려준 뒤, 블레이크가 누워 있는 침대로 다가갔다. 그리고 3년 만에 보는 아들의 얼굴을 매만졌다.

“미안하다. 이 아비가 너무 늦었구나….”

텐스테온은 아들에게 사죄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왔어도 블레이크는 눈을 뜨지 못했다.

나는 황제의 옆으로 다가갔다.

“늦지 않았어요. 이제부터 시작이죠.”

“앤시아….”

“전하는 무사하실 거예요. 금방 훌훌 털고 일어나실걸요. 그러니까 지금부터 잘해주시면 돼요.”

나는 마음속에 일렁이는 불안을 지우며 애써 씩씩하게 대답했다.

원작에서 텐스테온이 블레이크를 찾아온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그는 아들을 대신하여 저주를 받기로 결심하고, 흑마법을 시전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블레이크를 찾아온다.

혹시 이번에도 그런 것이 아닐까 걱정이 밀려왔다.

“그러니까 이상한 생각하시면 안 돼요. 전하를 오래오래 지켜주셔야죠.”

“지켜야 할 자식이 둘이나 있다. 이상할 생각을 할 리가 없지 않으냐?”

“혹시라도 흑마법 같은 건 믿으시면 안 돼요.”

“또 그 소리냐?”

“왠지 불안해서요.”

“너한테 혼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런 사술에는 관심도 두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 거라.”

텐스테온은 안심하라는 듯 나의 손을 단단히 붙잡았다.

그래, 3년 동안 귀에 못이 박이도록 말했으니 원작처럼 흑마법에 현혹되지는 않을 거다.

나는 텐스테온을 믿었다. 그가 블레이크의 곁을 허무하게 떠날 리가 없다.

“네. 믿을게요.”

***

텐스테온이 황태자의 별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블레이크가 저주에 걸린 뒤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귀족들은 아무런 반발도 하지 못했다.

블레이크가 위독하다는 소식이 빠르게 퍼졌다.

아무리 저주의 계승자라고는 하나, 위대한 성군이 아들의 마지막을 지키겠다고 하는데 그조차 용납하지 못하고 원칙을 따지는 귀족은 없었다.

하지만 카실 공작의 장남이자, 가장 유력한 차기 황태자 후보인 프랭크는 불만이 가득했다.

“황제가 그 괴물을 찾아갔다면서? 이게 말이 되냐? 이번 기회에 그 괴물을 남쪽 섬에 보내버려야 해! 다른 귀족들은 대체 뭘 꾸물거리는 거야? 어서 상소든 뭐든 올리지 않고!”

프랭크는 흥분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리차드가 그런 이복형을 보고 혀를 차자, 프랭크는 눈을 치켜떴다.

“노예, 너 지금 나를 비웃었냐?”

“그럴 리가요. 다만 당장 오늘 죽을지도 모르는 놈을 유폐시켜서 무얼 하실 생각인지 궁금했을 뿐입니다.”

“무얼 하기는! 죽어도 남쪽 섬에서 죽으라고 해야지! 그 괴물이 황궁에 남아 있는 것 자체가 거슬린다고!”

프랭크는 멍청하고 단순한 데다가 무엇이든 자기 뜻대로 해야 직성이 풀렸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을수록 저런 유아적인 성격은 오히려 더 심해졌다.

블레이크의 존재를 참지 못하는 프랭크는 그를 황궁에서 내쫓는 데 집착했다.

황태자가 죽는다는데 그까짓 장소가 문제일까? 리차드는 프랭크를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황태자가 정말로 죽는 거야?”

블레이크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부터 부쩍 말수가 적어진 셋째 네온이 하얗게 질린 채 물었다.

“바보야. 그걸 몰라서 물어? 그러니까 저 난리잖아. 빨리 좀 뒤졌으면 좋겠다. 어차피 죽을 거 시간 겁나게 끄네. 아, 그 전에 황궁에서 쫓아내고. 앞으로 내가 지내야 될 곳인데, 괴물이 죽으면 재수가 없잖아.”

프랭크는 황태자가 될 생각에 들떠 있었다. 블레이크가 죽으면 새로운 황태자를 책봉할 거다. 아버지인 카실 공작이 있긴 하지만, 텐스테온보다 고작 한 살 어렸다. 그보다는 자신이 더 유력했다.

하지만 네온은 프랭크와 생각이 달랐다.

“치료약 같은 거 없을까? 아버지께 귀한 약재가 많이 있잖아. 그걸 보내는 게 어때?”

“치료약은 무슨 치료약이야! 빛의 마나석도 듣지 않는 괴물한테 약이 통하겠어! 네온, 너 도대체 왜 그래? 내가 황태자가 되는 게 질투 나냐? 몇 년 지난다고 너한테 기회가 올 거 같아? 아니면 황제한테 잘 보여서 내 자리를 뺏으려는 거냐?!”

자신의 자리를 노린다면 친동생이라도 용서할 수 없었다. 프랭크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네온은 오히려 더 크게 소리쳤다.

“당연히 살려야지! 그 자식이 죽으면 다음에는 우리 차례일지도 모르잖아!”

“우리 차례라고…?”

프랭크가 작은 눈을 느리게 끔벅거렸다. 우습게도 그는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리차드는 그런 이복형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저 녀석은 도대체 얼마나 바보인 거지? 9살짜리 어린애만도 못하군.

“네온의 말대로 황태자가 죽으면 황족들 중 한 명에게 저주가 계승되겠죠. 누가 저주를 이어받을지는 알 수 없지만 그동안의 전례를 봤을 때 황실의 피가 진하고,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자가 저주에 걸릴 확률이 높습니다.”

황태자가 될 생각에 들떴던 프랭크의 표정이 금세 두려움으로 뒤덮였다.

“뭐야? 그럼 지금 죽으면 안 되지! 내가 성인이 되려면 1년은 남았다고! 그동안은 더 살라고 해!”

“형, 그럼 나는! 내가 저주를 받으면 어떻게 해!”

“아씨, 그걸 왜 나한테 물어!”

프랭크는 짜증을 냈다. 그는 자신이 저주에 걸리지 않고 무사히 황태자가 되면 그만이었다. 친형제라 해도 다른 사람의 일은 관심 없었다.

친형의 매몰찬 태도에 네온은 크게 실망했다.

“괴물이 죽는다고 형이 황태자가 될 수 있을 거 같아?”

“뭐야?”

“블레이크가 죽으면, 황제가 황태자비를 입양해서 공주로 삼을 거랬어.”

“바보냐? 그딴 헛소문을 믿어? 황족의 피 한 방울 안 섞인 애가 어떻게 공주가 돼!”

“왜 말이 안 돼? 황제는 황태자비를 친자식보다도 아낀다고. 그리고 앤시아를 공주로 삼고 황족과 혼인을 시키면 되잖아. 그럼 결국 황족이 황제가 되는 거니까 똑같지.”

“야, 노예! 이게 정말이야?!”

프랭크는 리차드를 바라보았다. 그는 언제나 이복동생을 무시했지만, 막상 중요한 일이 생기면 그에게 확인하고는 했다.

“그런 이야기가 있긴 합니다. 공작 각하께서도 그 소문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재상을 만나러 가셨습니다.”

“노예! 그걸 왜 지금 얘기해!”

“아침에 전했습니다.”

리차드는 말했다. 단지 프랭크가 하녀와의 밀회에 빠져서 귓등으로 들었을 뿐이다.

“그렇게 중요한 건 제대로 말했어야지!”

하지만 프랭크는 오히려 역정을 냈다. 언제나 있었던 일이기 때문에 리차드는 입을 다물었다. 게다가 굳이 리차드가 말하지 않아도 형에게 분노한 네온이 그 대신 프랭크의 속을 긁어주었다.

“만약 앤시아가 공주가 되면, 형의 황태자 자리는 물 건너간 거야.”

“무슨 개소리야!”

“형, 바보야? 그걸 몰라서 물어? 형은 이미 약혼했잖아. 그런데 어떻게 앤시아랑 결혼할 수 있겠어?”

“아….”

이제야 상황 파악이 된 프랭크가 얼빠진 소리를 내자, 네온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아무래도 차기 황제는 내 차지가 될 거 같네. 덤으로 예쁜 신부도 얻고. 이왕 이렇게 된 거 블레이크가 빨리 죽어서 저주는 형한테 갔으면 좋겠네.”

“이 자식이!”

프랭크는 네온에게 주먹을 날렸다.

“왜 때려! 형도 내가 저주에 걸리든 말든 신경 안 쓴다며!”

“이 새끼야, 형이라고 부르지도 마! 너 언제부터 내 자리를 노린 거야!”

프랭크는 계속해서 주먹을 휘둘렀고, 네온도 지지 않고 그의 팔을 물었다. 리차드는 그들의 모습에 잠시 무심한 시선을 던지다가 밖으로 나갔다.

***

이복형제의 싸움은 관심 밖이었다. 리차드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는 발코니에 서서 황궁을 바라보았다. 원래 공작저는 황궁의 일부였다. 선대 황후는 아들인 아놀드 카실을 무척 아꼈다고 한다.

황태자가 아닌 이상, 황자는 성인이 되면 궁을 떠나야 한다. 하지만 그녀는 아들을 가까이 두고 싶은 마음에 서쪽 구석에 있는 탑을 허물고, 그곳에 카실 공작저를 지어주었다.

원래는 담장조차 없어서 황궁에서 지내는 거나 마찬가지였다고 했다. 하지만 텐스테온이 등극하자 공작저와 황궁 사이에는 탑처럼 높은 담이 세워졌다. 이제는 공작저 꼭대기에 올라가도 황궁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지금도 그저 삭막한 담장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리차드는 가만히 시선을 던졌다. 저곳에 앤시아가 있겠지.

지금쯤 그녀는 어떤 기분일까? 황태자가 죽으면 공주가 될 테니 기쁠까? 아니면 슬플까? 드디어 괴물에게서 벗어났으니 속이 후련할까?

앤시아가 빛이면 자신은 어둠이었다.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에 그녀의 마음이 어떨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10시 정각이 되자, 검은 로브를 입은 사내가 나타났다. 리차드의 흑마법사인 도미람이었다.

리차드는 그에게 어제와 같은 질문을 던졌다.

“어땠지?”

“아무런 반응도 없었습니다.”

텐스테온은 위대한 황제였다. 모두들 그의 친동생인 카실 공작 가문에서 차기 황태자가 나올 거라 예상했지만 리차드의 생각은 달랐다.

블레이크가 죽더라도 텐스테온은 탐욕스러운 카실 공작이나 멍청한 프랭크, 나약한 네온을 황태자로 삼지 않을 거다.

리차드에게 있어 카실 공작가는 어머니를 죽인 원수였지만 동시에 자신을 황제로 만들어줄 발판이기도 했다.

만약 다른 황족이 황태자가 된다면 카실 공작 가문의 권위는 한없이 추락한다. 리차드가 황제가 될 가능성 또한 멀어진다.

블레이크가 위독하다는 말을 들은 리차드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텐스테온을 없애자.’

텐스테온을 죽이고, 카실 공작을 황제로 만들자.

텐스테온이 황족 중에 출중한 자를 선택해서 친히 제왕학을 가르치고 힘을 실어준다면, 아무리 리차드의 능력이 뛰어나다고 한들 무너트리기 어려웠다. 하지만 카실 공작이 황제가 된다면 그다음은 쉬웠다.

프랭크의 오만함은 극에 달해서 아버지인 공작조차도 은근히 무시할 지경에 이르렀다.

장남이라고 애지중지하던 카실 공작도 점차 실망하며 네온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프랭크를 자극해 그가 자멸하게 만들고 기회를 봐서 네온도 없앤다면 손쉽게 황제가 될 수 있을 거다.

아무리 리차드를 싫어하는 카실 공작이라도 피가 섞이지 않은 남보다는 친자식에게 보위를 물려주고 싶어 할 테니까.

리차드는 그렇게 결심하고 도미람과 수하들을 시켜서 은밀히 소문을 퍼트렸다.

‘로움족 중에서 천 년 전에 사장된 고대의 마법을 구사하는 흑마법사가 있다. 그는 저주를 자유자재로 다루며 여신의 저주조차 옮길 수 있다.’

블레이크의 저주를 옮겨주는 척하며, 텐스테온의 숨통을 끊을 계획이었다.

분명히 황제가 관심을 보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텐스테온은 리차드가 던진 미끼를 물지 않았다.

오히려 재상을 불러 앤시아를 공주로 책봉하는 일을 의논했다고 한다. 그 소식을 들은 카실 공작은 다급히 재상을 만나러 갔다. 아직까지 오지 않는 것 보면 사실일 확률이 높은 거겠지.

텐스테온은 친동생이나 다른 황족이 아닌 앤시아를 자신의 후계자로 택한 거다.

“미끼를 더 던질까요?”

도미람의 질문에 리차드는 고개를 저었다.

“됐다. 그 계획은 중단해라.”

앤시아가 공주가 되면 그녀의 남편이 황제가 될 것이다.

그녀를 내 것으로 만들고, 텐스테온에게 가르침을 받을 기회가 생겼다. 그들과 한 가족이 되고 황제의 꿈도 이룰 수 있다. 이보다 완벽한 결말이 있을까?

텐스테온은 리차드가 유일하게 인정하는 사람이었다. 이번에는 상황이 어쩔 수 없어서 그를 죽이려 하였지만, 가능하면 살려두고 싶었다. 게다가 그가 다른 황족이 아닌 앤시아를 후계자로 삼는다면 더더욱 죽일 이유가 없었다.

“그보다는 앤시아에게 줄 선물을 구해야겠다. 아주 귀해서 거절하기 힘든 걸로.”

리차드의 붉은 눈동자가 욕망으로 번뜩였다.

***

블레이크는 열흘째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궁의는 오늘도 깨어나지 못하면 살기 힘들 거라 하였다.

황태자궁에는 암운이 감돌았다.

은한이 용술을 쓰려 했지만, 블레이크의 몸에 흐르는 강한 힘에 가로막혀서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블레이크의 안에서 거대한 힘이 소용돌이처럼 뒤섞이며 폭발하고 있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억지로 이질적인 힘을 불어넣으면 오히려 블레이크에게 독이 될 수 있었다.

기사 아카데미에 급히 연락을 넣어 다이애나를 부르려 했지만, 혼돈의 계곡 근처로 전 학년이 훈련을 떠났기 때문에 연락이 닿지 않았다.

모든 것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원작에서보다 그의 상태가 훨씬 심각했다.

나 때문이다. 차라리 원작을 건들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면 이리되진 않았을 텐데.

만약 블레이크가 정말로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를 위한다며 원작을 바꿔버린 것이 나비효과가 되어 블레이크에게 고통을 주었다.

‘일어나세요. 전하, 제발 깨어나세요. 빛의 여신님, 블레이크를 아프게 하지 말아주세요. 블레이크는 아무 잘못이 없잖아요! 태어나고 싶어서 필립의 후손으로 태어난 게 아니잖아요! 제발 저주를 풀어주세요. 블레이크를 아프게 하지 마세요.’

그의 손을 잡고 간절하게 비는데, 텐스테온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를 위로해 주었다.

“앤시아, 네 잘못이 아니다.”

“네?”

“네 탓이 아니니까 자책하지 말거라.”

“자책 안 해요.”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서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도 아버님, 식사하셔야죠. 오늘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드셨잖아요.”

“다시 아버님이냐? 부탁할 때만 아버지라고 부르는 거야? 섭섭하구나.”

말의 내용과는 다르게 조금도 나무라지 않는 자상한 어조였다.

“결국 전하의 저주를 풀지도 못했는걸요. 아버지라고 부르면 너무 염치없잖아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냐?”

“하지만….”

“앤시아, 네가 이렇게 부담을 갖고 있다는 걸 알았다면 텐라른궁에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거다. 아니, 저주를 푸는 방법을 찾고 싶다고 했을 때 말렸을 거야. 블레이크의 저주는 제라실리온 황실의 죄업에서 비롯된 거고, 내가 무능한 탓이다. 너에겐 어떤 책임도 없어.”

“하지만 제게 블레이크의 저주를 풀 힘이 있었다면…!”

“너는 우리 부자에게 내려온 선물이다. 존재만으로도 소중해. 다시는 그런 생각을 하지 말거라.”

텐스테온은 나의 손을 꽉 잡았다.

“만약 이 아이가 세상을 뜬다면, 너를 공주로 책봉할 거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나는 깜짝 놀라서 텐스테온을 바라보았다.

“나는 아이를 낳지 않을 생각이었다. 여신의 저주를 내 대에서 끊으려 했어. 하지만 사랑하는 여인을 만났고 그만 욕심을 부리고 말았다. 블레이크가 저주를 받은 건 전부 내 책임이다.”

“아버님의 잘못이 아니에요.”

“아니. 내 탓이다. 그리고 이제는 정말로 저주의 고리를 끊고 싶구나. 다른 이에게 블레이크와 같은 고통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아.”

“…….”

“빛의 여신은 자신을 이용하여 황제가 된 필립 제라실리온을 원망하며 저주를 내렸다. 만약 그의 자손이 황위를 버린다면, 여신도 분노를 풀지 모르지. 블레이크가 떠나면 너를 공주로 책봉할 거다. 그리고 너에게 황위를 물려줄 것이다.”

텐스테온은 한 음절 한 음절에 힘주어 말했다. 아들의 죽음 이후를 준비하는 그의 표정에서 힘겨운 고통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리고 나에 대한 애정도.

텐스테온은 진심으로 나를 아끼고 친자식처럼 여기고 있었다. 감사해야 할 일이지만 그보다는 울컥 화가 치밀었다.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전하는 반드시 이겨낼 거예요! 저주도 풀릴 거고요!”

“그래, 그래야지. 하지만 만약에….”

“‘만약’은 필요 없어요! 그런 가정하지 마세요. 어차피 일어나지 않을 일이에요. 생각하실 필요도 없어요!”

나는 텐스테온의 손을 뿌리치며 불덩이처럼 뜨거운 블레이크를 끌어안았다.

무서웠다. 텐스테온마저 블레이크에 대한 희망을 버렸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블레이크는 깨어날 거예요! 이겨낼 거예요! 반드시 이겨낼 거예요!”

나는 발악하듯 소리를 질렀다. 나마저 약한 말을 하면 블레이크가 정말로 죽어버릴 것만 같아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순간 버석하게 갈라지는 작은 음성이 들렸다.

“…앤시아.”

블레이크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깜짝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새빨간 눈동자가 나를 또렷이 응시하고 있었다. 며칠 전에 잠깐 눈을 떴을 때와 다르게 눈동자에 생기가 있었다.

“전하!”

“앤시아, 나 조금 부끄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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