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붉은 동백나무와 검은 맹수
벨라시안 백작이 황제의 조사를 받자 카실 공작은 겁에 질렸다. 그리고 자신이 벨라시안 백작에게 사주한 것이 드러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리차드에게 풀었다.
“한심한 놈! 더러운 로움족 핏줄 따위를 거두는 게 아니었다! 이 일을 어떻게 책임질 거냐!”
리차드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물론 벨라시안 백작을 이용하자고 제안한 것은 리차드였다.
하지만 봉인제에서 벨라시안 백작이 앤시아한테 무시당하는 모습을 보자마자 이용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고, 카실 공작한테도 그와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카실 공작은 리차드의 말을 단칼에 무시했다. 그래놓고 결과가 최악으로 치닫자 리차드에게 모든 책임을 돌렸다.
“노예 주제에 잘난 척하더니 꼴좋다.”
장남 프랭크는 사태의 심각성도 모른 채, 그저 리차드가 혼나는 모습을 보고 낄낄댔다.
“그래도 머리는 좋은 줄 알았는데 실망이야. 역시 노예의 핏줄은 속일 수가 없나 봐.”
막내 네온도 히죽거렸다.
“이제 저 로움족의 잔재주도 끝났나 보군. 아놀드, 이제 저 천것을 버릴 때가 되지 않았나요? 지략이라면 우리 네온도 뒤지지 않습니다.”
리차드를 사람 취급조차 하지 않던 공작 부인은 기다렸다는 듯 그를 쫓아내려 했다.
리차드는 이를 악물었다. 태어난 순간부터 한시도 쉬지 않고 들었던 말이다. 이제 와 새삼스럽게 분노할 것도 없었다. 그보다는 벨라시안 백작의 입을 막는 것이 중요했다.
카실 공작은 자신이 심어놓은 황궁의 첩자조차 눈치채지 못하는 텐스테온을 비웃었다. 프랭크와 네온도 다르지 않았다. 앤시아가 황태자궁의 궁인들을 내쳤을 때 잠시 긴장하기도 했지만, 황제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다시 여유를 부렸다.
하지만 리차드는 알았다. 황제는 모르는 것이 아니라, 눈감아주고 있을 뿐이다. 그는 무심함을 가장하며 괴물이 된 아들을 지켰다.
블레이크가 앤시아와 결혼한 뒤에도 텐스테온은 방관자의 위치를 고수했다.
그런 그가 움직였다. 그것도 황태자비의 친부를 잡아들였다.
상황이 좋지 않게 흐르고 있었다.
벨라시안 백작은 경솔했고, 프랭크가 자신의 딸이 아닌 다른 사람과 약혼한 일로 공작가에 분노하고 있었다. 궁지에 몰린 이상 있는 얘기 없는 얘기까지 지어내며 물고 늘어질 위험이 있었다.
물론 헛소리라고 우기며 권력으로 찍어 누를 수도 있지만, 이번에는 황제가 카실 공작의 편을 들어줄 것 같지 않았다.
리차드는 조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벨라시안 백작의 입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경비가 삼엄했다. 감옥에 잠입하지도 못하고 조사관 매수도 실패하여 초조해하는데, 벨라시안 백작이 어딘가 이상하단 말이 들려왔다.
결국 길버트 벨라시안은 카실 공작에 대해 입도 벙긋하지 않은 채 섬으로 유배됐다. 벨라시안 백작은 완전히 미쳤다고 했다.
카실 공작은 안도했고, 공작저를 휘감던 긴장감도 사라졌다. 하지만 리차드는 오히려 더 불안했다.
‘벨라시안 백작이 미쳤다고? 갑자기 왜?’
카실 공작은 벨라시안 백작이 자신의 명령을 수행하든 그렇지 못하든 프랭크와 다이애나를 혼인시킬 생각이 없었다. 그저 이용할 수 있는 데까지 이용하다가 적당히 쳐낼 계획이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이긴 했지만, 벨라시안 백작은 상상 이상으로 무능했다.
그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성과를 내지 못했으며, 그런 주제에 염치도 없이 프랭크와 약혼 날짜를 잡자고 재촉했다.
오만하기로는 어디서도 뒤지지 않는 카실 공작이었지만 길버트의 뻔뻔함에는 혀를 내둘렀다. 리차드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3년 동안 지켜본 벨라시안 백작은 남을 미치게 할지언정, 본인이 충격을 받고 정신을 놓을 위인은 아니었다.
물론 귀족이라는 자긍심으로 똘똘 뭉친 인간이니, 유배를 당하자 정신을 놓을 정도로 심한 충격을 받았을 수도 있긴 하지만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리차드는 고민 끝에 벨라시안 백작이 유배된 서쪽 섬으로 향했다.
이름조차 없는 이 섬은 귀족들의 유배지로 악명이 높았다.
리차드는 무인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낡은 저택을 바라보았다. 그 앞에는 지루한 얼굴을 한 병사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도미람.”
리차드는 뒤에 있는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도미람은 조용히 고개를 숙인 뒤, 수면 마법을 사용했다.
가뜩이나 지루한 기색이 역력했던 병사들은 그대로 잠이 들었다. 리차드는 흑마법사인 도미람과 함께 유유히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저택 내부는 밖에서 보는 것보다도 훨씬 허름했고, 관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그 크기만은 커서, 복도에 들어서자 수많은 문이 리차드를 맞이했다.
하지만 그는 벨라시안 백작이 유폐된 방을 단번에 찾을 수 있었다.
“으아아악! 살려줘! 살려줘!”
가장 깊숙한 방에서 벨라시안 백작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 미친놈은 또 시작이네.”
“귀 따가워 죽겠어.”
문 앞을 지키고 선 병사들이 투덜거렸다.
‘미쳤다는 소문은 사실인가 보군.’
리차드가 눈짓하자, 도미람은 다시 수면 마법을 걸었다. 병사들은 이내 잠이 들었고, 리차드는 여유롭게 방 안으로 들어갔다.
“뜨거워! 뜨거워! 살려줘! 제발 나 좀 살려줘!”
문을 열자마자 고막이 찢어질 듯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벨라시안 백작은 뜨겁다면서도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있었다.
‘황제의 조사를 받으면서 심한 고문이라도 당한 건가? 아무리 죄를 지었다지만 황태자비의 친부다. 텐스테온 황제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는데….’
하지만 단순히 유배를 당한 충격 때문에 실성했다고 하기에는 상태가 심각해 보였다.
리차드는 길버트의 이불을 거뒀다. 그러자 길버트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웅크렸다.
“안 돼! 안 돼! 저주가! 저주의 문장이! 지워야 해! 저주를 없애지 않으면! 싫어! 으아악!”
그는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몸을 마구 긁었다.
“문장이 퍼지고 있어! 지워야 해! 어서 없애야 해! 뜨거워! 저주를 풀어야! 어서! 징그러워! 괴물이 될 거야! 안 돼! 안 돼!”
벨라시안 백작은 자신의 몸을 점점 잠식해 나가는 저주의 문장을 지우기 위해 발작적으로 손톱을 새웠다. 하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는 리차드는 차갑게 굳었다.
벨라시안 백작은 자신의 몸에 저주의 문장이 있다고 했지만, 그의 몸은 깨끗했다.
아니, 깨끗하다는 표현은 맞지 않았다. 얼굴부터 발끝까지 스스로 긁은 상처로 인해 엉망이었으니까. 하지만 패인 상처와 피가 뒤섞여 끔찍할지언정, 저주의 문장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협탁에는 연고와 깨끗한 새 붕대가 놓여 있었고, 바닥에도 피 묻은 붕대가 널브러져 있었다.
기껏 치료해주어도 멋대로 붕대를 풀어버린 뒤 딱지가 지고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마구 긁어버리는 모양이었다.
상처를 차치해도 그의 모습은 많이 변했다.
벨라시안 백작은 무능하고 뻔뻔했지만, 외모만큼은 제법 출중했다. 하지만 지금은 눈이 퀭하고 피골이 상접했다. 머리마저 새하얗게 세서 임종을 앞둔 백발노인처럼 보였다.
‘중증이군. 자기가 저주에 걸렸다고 믿는 건가? 희한하게도 미쳤군.’
오직 제라실리온 황실의 피를 이은 자에게만 저주가 계승된다. 벨라시안 백작이 저주에 걸릴 일은 없었다.
쥐뿔도 없는 주제에 거만함이 하늘을 찌르더니, 자신이 황족이라는 망상이라도 한 건가? 아니면 설마…!
순간 3년 전의 일이 리차드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리차드가 앤시아를 유혹하기 위해 황태자궁을 찾아갔을 때, 황태자를 만났었다. 그리고 그에게 손이 잡혔던 순간 스산한 감각이 리차드의 몸을 파고들었었다.
리차드는 블레이크가 힘을 썼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곧 의심을 접었다. 저주의 계승자는 마나를 사용하지 못한다고 했다. 저주에 짓눌려서 고통만 받다가 목숨을 잃는 한없이 무가치한 존재다.
‘힘을 쓴 것이 아니라, 저주의 서늘한 기운이 전해진 것뿐이겠지.’
리차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의 몸을 광적으로 긁어대는 벨라시안 백작의 모습을 보자, 다시 그때의 일이 떠올랐다.
벨라시안 백작은 황제에게 조사를 받기 전, 황태자궁에 쳐들어갔다고 한다. 거기서 황태자와 무슨 일이 있었다면…. 어쩌면 황태자가 벨라시안 백작을 저렇게 만든 것이 아닐까?
“으아악! 싫어! 싫어!”
생각의 가지가 뻗어 나가는데, 길버트가 바르작거리며 이불을 잡아당겼다. 자신의 몸을 보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리차드는 손에 쥔 이불을 그에게 던졌다.
그 순간 길버트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리차드에게 달려들었다.
“풀어줘! 당장 나를 풀어줘!”
리차드는 짜증을 내며 그의 손을 치우려 했다. 하지만 예상외로 힘이 강했다. 길버트는 리차드가 자신을 이 지경으로 만든 원수인 것처럼 악을 써댔다.
“풀어! 어서 풀어!!!”
그때 고함을 지르던 길버트의 몸이 풀썩 꺾이더니 바닥으로 쓰러졌다.
“주군, 괜찮으십니까?”
흑마법으로 길버트를 제압한 도미람이 리차드의 상태를 살폈다.
“괜찮다.”
리차드는 구겨진 소매를 대충 펴며, 바닥에 널브러진 길버트를 바라보았다.
“죽었느냐?”
“기절시켰습니다. 숨통을 끊을까요?”
“되었다.”
어차피 이 상태라면 얼마 살지 못할 거다. 정신이 돌아와서 쓸데없는 말을 떠들 가능성도 없어 보이고, 어찌 되었든 황태자비의 친부였다. 굳이 죽여서 소란을 피울 필요는 없었다.
“돌아가자.”
리차드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벨라시안 백작이 미친 이유는 알 수 없다. 혼자 미쳤는지, 특별한 원인이 있는지, 황태자의 힘인지, 어느 것도 확실치 않았다.
하지만 황태자가 힘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1%라도 있다면, 그 싹을 밟아야 한다.
그가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는데, 갑자기 오싹한 감각이 전신을 뒤덮었다.
[가지 마!]
갑작스러운 여인의 목소리에 리차드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도미람이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방금 여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느냐?”
“네?”
언제나 무표정하던 도미람의 얼굴에 당황이 스쳤다.
‘환청이었나? 미친놈을 상대했더니 나까지 이상해진 것 같군.’
리차드는 자신을 잡아당기는 듯한 감각을 무시하며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황제의 말에 따르면 벨라시안 백작의 상태는 점점 심각해져서, 자신이 여신의 저주를 받았다며 비명을 지르고 자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자업자득이기 때문에 불쌍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찌 됐든 벨라시안 백작은 가주직을 수행하기 어려웠다. 백작 부인도 그걸 알고 가주의 반지를 다이애나에게 넘긴 거겠지.
나는 백작 가문의 재산이나 작위에 어떤 흥미도 없었다.
벨라시안 가문의 재산 대부분은 앤시아의 친모가 남긴 것이다. 그러니 내가 함부로 결정할 수 없다.
하지만 가주직은 다이애나에게 양보할 생각이었다. 나는 지금 황태자비이니 백작 가문의 가주가 될 수 없고,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다이애나가 아카데미를 다니는 동안은 내가 벨라시안 백작가를 관리해야 했다.
나는 벨라시안 백작저로 향했다.
천 년 전, 빛의 여신은 필립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에게 빛의 힘을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필립은 아스테릭 제국을 건국한 뒤 여신을 배신했고, 그녀는 분노했다.
빛의 여신은 필립뿐 아니라 대륙에 퍼져 있던 빛의 힘을 거두어 갔다.
빛의 마법사는 마법을 사용하지 못했고, 신전도 힘을 잃었다. 물론 이는 비밀이었다.
빛의 여신은 인간에게 나누어준 힘을 앗아간 대신 대지에 빛의 힘을 뿌렸다.
신전에서는 혼돈의 계곡에 악이 도사리고 있다며 외부인의 출입을 철저히 차단했다.
어둠의 문으로부터 세상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사실은 혼돈의 계곡 근처에서 채굴되는 빛의 마나석을 독점하기 위한 핑계였다.
신전은 빛의 마나석을 독점하고, 마나석에서 나온 힘을 이용하여 신전의 권위를 유지했다. 일개 개인이나 가문이 이 마나석을 쏟아붓는 방법을 사용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빛의 마법을 사용하던 가문들은 빠르게 몰락했다.
벨라시안 가문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은 필립과 함께 아스테릭 제국을 건국한 위대한 빛의 마법사 ‘라온텔 벨라시안’의 후손이었지만, 그 힘은 미약했다.
그나마 빛의 계승자로 인해 가문의 위상을 유지하였으나, 계승자의 힘조차도 점차 약해져서 이제는 누가 ‘빛의 계승자’인지 알아볼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빛의 계승자를 판별하는 ‘빛의 눈물’이라는 보물이 전해져 내려왔으나, 그것도 어느 순간 사라졌다고 한다.
힘을 거의 잃어버렸다고는 해도 벨라시안 가문은 유서 깊은 빛의 가문이었다. 그리고 다이애나의 힘은 여신의 저주를 풀 정도로 강력했다. 비록 아직 힘을 각성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벨라시안 가문의 서재에는 빛의 마법이나 여신의 저주에 관한 다양한 책이 있을 터였다.
백작저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그런지 몰라도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풍겼다. 벨라시안 백작가의 사용인들은 길버트 벨라시안을 따라 앤시아를 박대하던 인간이었다.
다이애나는 기사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 앤시아를 괴롭히던 사용인들을 전부 해고했다고 했다. 그래서 남은 사람이 몇 명 없었다.
“방에 처박혀 있으라니까 왜 나온 거냐! 얼굴만 봐도 재수 없으니 당장 꺼져라!”
“탁한 녹색이라. 어떻게 눈깔마저도 품격이라고는 없는지.”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저택에서 겪었던 일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나는 진짜 앤시아가 아니고, 내가 직접 겪은 일도 아니다. 하지만 기억만으로도 우울함이 노도처럼 밀려왔다.
이제 막 도착했을 뿐인데 블레이크가 있는 아모리아궁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나는 서둘러 벨라시안 백작저의 서고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유서 깊은 백작 가문의 서고치고는 장서의 수준이나 양이 형편없었다. 빛의 마법에 관한 책의 비율이 높은 편이긴 했지만, 이미 전부 본 것들이었다.
벨라시안 백작의 집무실에도 가봤지만, 이곳은 훨씬 더 처참했다.
과시용으로 호화스럽게 꾸며져 있을 뿐, 빛의 힘을 지닌 벨라시안 가문의 가주라는 자각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적당히 두꺼운 빛의 마법서를 몇 권 꽂아두긴 했지만 읽은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제 남은 건 가주의 창고뿐인가? 나는 집사의 안내를 받아 창고로 걸음을 옮겼다.
다이애나에게 받은 열쇠로 자물쇠를 열고 힘을 가하자, 육중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나는 기대를 품고 안으로 들어갔지만 이내 실망하고 말았다.
금과 보석, 미술품 등 돈이 되는 물건들만 가득할 뿐, 빛의 마법이나 가문에서 내려오는 보물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하긴, 계승자를 알려주는 ‘빛의 눈물’까지 팔아 치웠다고 하는데, 다른 가보가 남아 있을 리가 없다.
감정서를 확인해보니 보석이나 미술품들도 대부분 최근에 구입한 거 같았다. 전부 앤시아 친어머니의 돈으로 사들인 거겠지.
물론 경매에 올리면 화제가 될 보석과 그림들이었지만 내가 찾는 물건은 아니었다.
황궁으로 돌아가기 위해 마차에 올랐다. 큰 기대를 한 건 아니었지만 막상 빈손으로 돌아가게 되니 허무함이 밀려왔다.
저주를 푸는 단서까지는 아니더라도 빛의 마법이나 계승자에 대한 자료 같은 건 있을 줄 알았는데….
“너도 그때 네 어미랑 죽었어야 했다! 네년 얼굴을 보기만 해도 속이 뒤틀려!”
백작저를 벗어난 뒤에도 길버트 벨라시안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리며, 앤시아의 기억들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렸다. 마차의 덜컹거림이 더해지니 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비 전하,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어딘가 편찮으십니까?”
맞은편에 앉은 멜리사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속이 좀 안 좋아서.”
“마차를 세울까요?”
나는 입을 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멜리사는 다급히 기사를 불렀고, 마차는 넓은 들판에 멈춰 섰다.
나는 그녀의 부축을 받으며 밖으로 나갔다.
“비 전하, 의원을 부를까요?”
“괜찮아. 가벼운 멀미일 뿐이야. 바람을 쐬니 괜찮아졌어.”
서늘한 바람이 폐부를 훑고 지나가자 울렁거림이 다소 사라졌다. 내가 진짜 앤시아인 것도 아닌데, 그녀의 기억이 흘러들어 올 때마다 왜 이리 버거운지 모르겠다.
어서 우리 귀여운 토끼가 보고 싶다. 블레이크를 보면 우울한 기분이 전부 씻겨 내려갈 것 같았다.
다시 마차에 오르려고 하는데, 저 멀리에서 낯익은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리차드가 들판 한가운데에 있는 작은 동백나무 앞에 서 있었다. 눈을 감은 채 홀로 서 있는 모습에서 짙은 쓸쓸함이 묻어났다.
설마 오늘이 그날인가? 나는 소설 속의 장면을 떠올렸다.
리차드는 ‘야수와 영애님’의 남자 주인공이었다. 또한 자신의 탐욕을 위해서 여주인공까지 이용하는 계략남이기도 했다. 쓰레기 중의 상쓰레기였지만 리차드는 제법 인기가 많았다. 그의 비극적인 과거와 가정환경 때문이었다.
***
리차드의 어머니는 로움족 노예였다.
로움족은 천 년 전까지만 해도 서대륙의 주인이었다. 그들은 젤칸 제국의 황족이자 지배층으로 군림하였고, 지독한 사치와 향락에 빠져 백성들을 탄압했다고 한다.
빛의 여신은 로움족의 잔악한 행태에 분노했고, 필립에게 힘을 주어 그들을 몰아내었다. 결국 젤칸 제국이 무너지고, 아스테릭 제국이 세워졌다.
자신들의 악행으로 인해 나라가 멸망했지만, 로움족은 반성하지 않았다.
그들은 젤칸 제국의 부흥을 꿈꾸며 필립 황제가 기거하는 텐라른궁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 ‘신의 언어’와 지식을 자신들이 독점하기 위하여 책들을 불태웠다.
젤칸 제국에서는 자신들의 글자를 신이 로움족에게 내려준 ‘신의 언어’라고 부르며, 상류층의 전유물로 삼았다.
원래 로움족이 아니면 배우기 힘들었던 데다가, 기존에 있던 책과 자료들까지 모두 사라지자 ‘신의 언어’는 후대로 이어지지 못하고 그대로 명맥이 끊기고 만다.
젤칸 제국 부흥 운동은 결국 실패하고, 로움족은 노예로 전락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백성들을 핍박하고, 신의 언어까지 사라지게 만든 로움족을 용서하지 않았다.
그들은 천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멸시의 대상이었고, 노예 중에서도 가장 천하다고 여겨졌다.
카실 공작은 아내가 임신하자, 아름다운 로움족 노예를 건드려서 리차드를 낳았다.
아놀드 카실은 분노했다. 그저 쾌락을 풀고 싶었을 뿐, 천한 핏줄을 낳아 스스로의 얼굴에 먹칠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리차드를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고, 노예처럼 키웠다. 하지만 어찌 됐든 자신의 혈육이었다. 다른 노예보다는 조금 더 눈이 갈 수밖에 없었다.
카실 공작의 장남인 프랭크는 오만하고 멍청했다. 그에 반해 리차드는 어머니를 빼닮아 외모가 출중했고, 어린 나이지만 총명함이 남달랐다.
카실 공작은 프랭크를 옆에서 보좌해줄 아이가 필요함을 끼고, 리차드를 서자로 인정하기로 한다.
리차드는 하늘을 날 듯 기뻤다.
자신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카실 공작의 마음에 들면 어머니께서도 면천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희망에 부풀었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추운 겨울, 리차드의 어머니가 많이 아팠다. 지독한 독감이었다.
“공작 각하께 의원을 불러 달라고 할게요.”
“별일 아니란다. 어미는 괜찮으니 아무 말도 하지 말렴.”
어머니는 리차드를 만류했다. 하지만 그는 아픈데도 꾹 참으며 일을 하는 어머니가 안타깝고 속상했다.
리차드는 카실 공작을 찾아가서 빌었다.
“각하, 어머니가 아파요. 제발 의원을 불러주세요. 제가 더 열심히 공부할게요. 프랭크 형님도 잘 보필할게요. 그러니 제발 부탁드려요.”
그는 간절히 빌었다. 의원을 부를 수 없다면, 어머니가 쉴 수 있기라도 바랐다. 하지만 리차드의 말을 들은 공작의 눈은 사납게 번뜩였다.
“그 계집이 아프다고? 탄시놀은 아니겠지?”
“네? 탄시놀이요?”
어린 리차드는 어리둥절했다. 그는 ‘탄시놀’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공작은 대답하지 않았고, 상황이 급작스럽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평소 리차드의 어머니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공작 부인과 사용인들은 그녀가 ‘탄시놀’일 거라고 몰고 갔다.
공작은 제대로 된 확인조차 하지 않은 채 리차드의 어머니를 죽이라 명했다.
리차드는 어머니를 살려달라고 빌었지만, 어린 소년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어머니는 공작저 밖으로 끌려가서 살해당한 뒤, 그대로 땅에 파묻혔다. 리차드는 어머니의 시체조차 보지 못했다.
그는 외진 산속에 있는 허름한 창고에 감금되었다. 그리고 ‘탄시놀’에 걸리지 않은 것이 확인된 뒤에야 겨우 공작저로 돌아올 수 있었다.
반년 만에 집에 돌아온 리차드를 반겨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천한 로움족 새끼, 너는 왜 안 뒤졌냐?”
프랭크가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 성질을 냈을 뿐이다.
리차드는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서고로 갔다. 그리고 ‘탄시놀’에 관한 책을 읽었다.
‘탄시놀’은 로움족한테서 처음 시작된 역병이었다. 전염성과 사망률이 높으며, 병에 걸리면 검은 반점이 생기고 외모가 흉측하게 변하며 각혈을 한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그 모습이 ‘저주의 계승자’와 비슷하였기 때문에 빛의 여신이 내린 2대 저주라고 불리기도 했다.
저주의 계승자처럼, 빛의 여신이 사악한 로움족을 벌하기 위해 저주를 내려서 병에 걸리게 했다는 거다.
리차드는 어찌하여 어머니가 아파도 아프다는 내색을 하지 못했는지, 의원을 부르겠다고 했을 때는 왜 만류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로움족이 아프다고 하면, 무조건 ‘탄시놀’에 걸렸을 거라고 의심하며 죽이려 든다. 그렇기 때문에 참을 수밖에 없었던 거다. 공작에게도 말하지 못하게 한 거다.
어린 리차드는 이를 악물고 눈물을 삼켰다.
‘어머니는 나 때문에 죽었어.’
그는 자책했다. 하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리차드는 슬퍼하는 대신 복수를 다짐했다.
리차드는 서고에 있는 ‘탄시놀’에 관한 서책을 모두 탐독했고, 한 가지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탄시놀’이 아니었다.
탄시놀의 증상과 전혀 달랐다. 검은 반점이 생기거나 외모가 변하지도 않았고 피를 토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카실 공작은 최소한의 확인조차 하지 않고 어머니를 죽였다.
카실 공작은 어머니를 묻은 장소를 알려주지 않았다. 리차드도 두 번 묻지 않았다. 그는 공작저의 사용인을 매수하고 협박하여 그 장소를 알아내었다.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들판이었다.
리차드는 어머니가 묻힌 곳에 비석 대신 그녀가 좋아하던 붉은 동백나무를 심었다.
그리고 맹세했다. 반드시 카실 공작과 그 가족들에게 복수하겠다고, 그들의 모든 것을 빼앗으며 고통스럽게 죽여주겠노라고 다짐했다.
카실 공작은 황위를 노렸다. 자신이 아니면 아들이라도 황제로 만들려 했다. 리차드는 그런 공작의 뜻을 따르는 척하며 속으로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황좌는 내 차지가 될 것이다. 제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앉아서, 나를 천하다 멸시했던 모든 놈들을 내 발밑에 무릎 꿇리고 말 것이다.’
그때부터 리차드는 완전히 달라졌다. 오직 어머니의 노예 문서를 없애고 호강시켜주는 것만을 바라던 똘똘하지만 천진한 소년은 사라지고, 야심과 계략으로 얼룩진 남자가 되었다.
***
나는 지금 저 앞에 서 있는 리차드를 바라보았다. 그는 기일 때마다 어머니의 묘를 찾아와서 공작가에 대한 복수를 다짐했다고 한다.
지금도 그도 그럴까? 붉은 동백나무를 바라보며 공작가를 점령하고 황제가 되겠다는 야심을 불태우고 있을까?
리차드의 생각을 알 수는 없지만, 눈을 감은 채 위태롭게 서 있는 모습에서 들끓는 증오나 야심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지독히도 외로워 보였다. 목의 상처도 밖으로 끌려가는 어머니를 구하려다가 생긴 거라고 했지.
그때 리차드가 눈을 뜨며 서로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평소라면 나를 보자마자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느끼한 멘트를 날렸을 리차드였지만, 오늘은 못 본 척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가오지 말라는 듯 벽을 세우는 모습이 오히려 쓸쓸해 보여서 차마 이대로 지나칠 수가 없었다.
“멜리사, 카실 영식께 인사를 하고 올게.”
“함께 가시죠.”
“괜찮아. 잠깐인데 뭐.”
나는 홀로 리차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도 내가 다가오는 걸 느끼고는 다시 몸을 돌렸다.
“오랜만이네요. 카실 영식.”
“이런 곳에서 당신을 만날 줄은 몰랐는데, 운이 좋군요.”
리차드는 나의 시선을 피한 적이 없다는 듯 특유의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부드럽게 올라간 입매와 달리 눈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꽃이 아름답네요.”
“이건 비석입니다. 이 밑에 로움족의 여인이 묻혀 있죠.”
“…….”
나는 깜짝 놀랐다. 리차드가 그 일을 자신의 입으로 말할 줄은 몰랐다.
리차드의 어머니가 로움족이라는 사실은 비밀이었다. 카실 공작은 자신과 가문의 명예를 위해 이 사실을 숨겼고, 리차드도 이를 철저하게 감추며 사랑하는 다이애나에게조차 털어놓지 않았다.
물론 과거를 털어놓은 것은 아니었지만, 간접적으로라도 언급을 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러니 물러나시는 게 좋으실 겁니다.”
나의 침묵을 경멸로 받아들었는지, 리차드가 말을 덧붙였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덤덤한 어조였다.
“아는 분이셨나요?”
“아니요. 들었습니다. 탄시놀에 걸렸다고 하더군요.”
그는 차갑게 선을 그었다. 잠시 놀랐지만 나에게 과거를 밝힐 생각은 없는 듯했다. 그저 나를 쫓아내기 위해 로움족 이야기를 꺼냈을 뿐이다.
하지만 떠나라며 날을 세우는 모습에서 오히려 누군가가 곁에 있어 주길 바라는 외로움이 느껴졌다.
나는 조용히 묵례를 올린 뒤, 하얀 손수건을 동백나무 가지에 묶었다.
“뭐 하시는 겁니까?”
“이렇게 하는 게 로움족의 장례 예절이라고 들었어요.”
로움족은 천 년 동안 세상의 멸시를 받았다. 젤칸 제국이 사용했던 언어는 그대로 사라져 고대어가 되었고, 새로운 제국에는 새로운 언어가 자리 잡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의 분노는 풀리지 않았고, 로움족에게는 글자가 허락되지 않았다. 그들은 죽어도 비석을 세울 수 없었고 대신 나무나 꽃을 심었다. 그리고 묘비에 꽃을 바치는 대신 나무에 손수건을 묶거나 새로운 꽃을 심어준다고 했다.
“…로움족에게 예를 올리는 겁니까?”
“안 되나요?”
리차드의 어머니이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평생을 로움족이라며 핍박받다가 비참하게 죽어간 그녀의 영혼에게 조금이나마 위로를 건네고 싶었다.
“탄시놀이 무엇인지 모릅니까?”
그가 시니컬하게 뱉었다. 언제나 리차드의 목소리에 낮게 깔려 있던 인위적인 젠틀함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알아요.”
“경각심이 부족하군요.”
“진짜 탄시놀인지 아닌지는 모르는 거잖아요. 로움족을 탄시놀이라고 몰아서 죽이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어요. 설령 정말로 탄시놀이라 한들 병균은 남아 있지 않을 거고요.”
“여신의 저주가 옮을 수도 있죠.”
“나는 그런 거 안 믿어요.”
바람이 강하게 불자 손수건이 풀어지려 했다. 느슨해진 손수건을 다시 단단하게 묶으려고 하는데, 리차드가 나의 손을 붙잡았다.
“주변에서 괴물도 감싸 안는 성녀라고 떠받드니 그 달콤함에 단단히 취하신 겁니까, 아니면 진짜 바보처럼 착하신 겁니까?”
그는 냉정을 잃고 소리쳤다.
나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줄곧 억눌러온 분노와 죄책감을 표출한 거겠지. 갈 곳을 잃은 분노가 터졌고, 마침 앞에 있는 나에게 화살이 향한 것뿐이다.
‘야수와 영애님’ 속의 리차드는 갓 성인이 된 블레이크와 다이애나보다 여섯 살이나 많았다. 그는 그만큼 노련하고 성숙했다. 언제나 냉혹하고 냉철하며 절대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지금의 리차드도 비슷한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는 아직 미숙한 데다 많은 상처를 끌어안고 있는 소년에 불과했다.
“글쎄요. 특별히 착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단지 막연한 두려움을 좋아하지 않을 뿐이에요.”
“‘두려움’이요?”
한국에서 살던 시절, 내 종아리에는 커다란 흉터가 있었다. 어렸을 때 교통사고를 당해서 생긴 상처였다. 그 사고로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나는 시골 할머니 댁에서 살게 되었다.
나는 매일 긴바지만 입었기 때문에 흉터를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그러다 중학생이 되고 무릎까지 오는 치마 교복을 입게 되었다.
“뭐야? 징그러워.”
“피부병인가? 옮는 거 아니야?”
중학교 입학식 날, 내 흉터를 본 아이들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고, 나는 갑자기 모두의 주목을 받았다.
당혹스럽고 창피했다. 내가 얼어붙어 있자, 초등학교 때 친구들이 어렸을 때 다친 상처라고 대신 해명해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기를 마칠 때까지 나를 싫어하고 피하는 애들이 있었다.
나는 흉터가 보기 흉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학교에 사정을 말하고 바지 교복을 허락받았다. 하지만 흉터가 보이지 않아도 그들은 나를 피했다.
내가 가까이 있으면 흉측한 상처가 자신에게 옮기라도 할 것처럼 화를 내고 창백하게 질렸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그들은 나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두려워하는 거다. 혹시라도 자신에게 해가 갈까 봐, 그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나를 병균 취급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종아리의 흉터에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징그럽다고 느낄 수는 있지만 어딜 봐도 오래전에 아문 상처이지, 전염성이 있는 피부병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미 생겨버린 막연한 두려움 앞에서 논리적인 설득은 무용지물이었다.
이 세계 사람들은 ‘저주의 계승자’를 괴물이라 욕하고, ‘로움족’을 여신에게 버림받은 민족이라 경멸한다. 나는 그런 감정들이 결국 막연한 두려움에서 파생되었다고 생각한다.
‘저주의 계승자’가 죽으면 황족 중 한 명에게 저주가 계승된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저주의 문장이 옮겨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지난 천 년 동안 저주의 문장이 다른 사람에게 전염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도 말이다.
‘계승자의 시종에게 저주가 옮았대.’
‘계승자와 잠깐 눈이 마주친 귀족 영애가 갑자기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던데?’
이렇게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지며 어느 순간 진실이 되어버렸다.
나의 흉터가 한순간에 전염병으로 둔갑한 것처럼, 저주의 계승자도 저주를 퍼트리는 씨앗이나 병균 취급을 받았다.
사람들은 ‘저주의 계승자’가 괴물처럼 흉측해서 싫다고 한다. 여신에게 저주받을 정도로 타락한 영혼이라 싫다고도 했다. 하지만 결국 그 근원에 도사리는 감정은 두려움이라고 생각한다.
나와 다른 이질적인 존재가 혹여 자신에게 해를 끼칠까 봐 겁이 나서 피하고 욕을 하는 거다.
‘로움족’에 대한 감정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결국 그 밑바탕에는 경멸보다 짙은 공포가 자리 잡고 있는 거다.
여신에게 버림받은 민족이 행여 자신에게 피해를 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자신보다 낮은 자에 대한 무시가 뒤섞이며 잔인한 혐오가 생겨난 거겠지.
하지만 그 원인이 무엇이든, 설령 인간의 본능이라고 할지라도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고 심지어 죽음에 이르게 한 행동이 용납될 수는 없었다.
“경각심은 중요하죠. 하지만 여신의 저주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에 휩쓸려서 피하거나 도망치고 싶지는 않아요. 다른 사람을 무시하거나 상처 주고 싶지도 않고요.”
나를 붙잡던 리차드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나는 손수건을 마저 단단히 묶었다.
“당신은 정말 특이한 여자군.”
그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그려낸 듯한 인위적인 미소가 아니라, 정말로 재밌다는 듯 눈까지 접으며 웃었다.
내가 웃긴 말을 했던가? 아무튼 기분이 조금은 풀린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나는 바람에 흔들리는 동백꽃을 바라보았다. 리차드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웃음을 잃었다고 했다. 그는 소설에서 단 한 번도 진심 어린 미소를 보인 적이 없었다. 어머니의 무덤 앞에서 웃을 일은 더더욱 없었을 거다.
그러니 지금 그의 미소는 돌아가신 리차드의 어머니께 큰 선물이 되었겠지.
하지만 그건 그거고, 나는 리차드에게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카실 영식, 기본 예법을 배워야 할 나이는 지나지 않았나요?”
“저한테서 ‘비 전하’라는 호칭이 듣고 싶으십니까?”
그의 입꼬리가 여유롭게 올라갔다. 완전히 원래 상태로 돌아왔군.
“듣고 싶은 것이 아니라, 마땅히 그리 칭해야 하는 겁니다.”
“명심하죠.”
“그리고 황태자 전하에 대한 무례한 언사를 사과하세요.”
그는 황태자를 괴물이라 칭했다. 아무리 리차드에게 힘든 하루라고 한들 이런 발언을 듣고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리차드도 자신의 실수를 알고 있는지 곧장 한쪽 손을 가슴에 가져가며 허리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잠시 이성을 잃고 실언하였습니다.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주십시오.”
“사과는 제가 아니라 황태자 전하께 하셔야죠.”
“어떻게 용서를 구하면 좋을까요?”
“전하께 충성을 바치세요.”
리차드의 표정이 다시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평생 자신의 본심은 감추며 살아온 사람답게 금세 여유로운 모습으로 돌아갔다.
“기사들처럼 충성 맹세라도 하라는 말씀이신가요?”
“‘블레이크 라 르시 제라실리온’이라는 사람이 이 제국의 황태자란 사실을 명심하라는 뜻입니다.”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리차드의 숨겨진 야심을 향해 경고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를 원래부터 좋아하지 않았다. 리차드의 비극적인 과거와 가정환경은 안타까웠지만, 그걸 면죄부로 삼기엔 이후의 행보가 너무 비열하고 잔인했다.
만약 이야기가 원작대로 흘러갔다면 리차드의 악행은 이미 시작되었을 거다. 블레이크의 목욕을 도와주는 하녀를 이용하여 그의 마음을 병들게 하고, 온갖 저열한 소문을 퍼트려 블레이크와 텐스테온을 괴롭혔겠지.
하지만 지금의 리차드는 아직 미수범이었다. 황태자궁에 자신의 사람을 심고, 벨라시안 백작을 이용해서 황태자궁을 염탐하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원작과는 다른 그의 여린 모습에 마음이 약해진 탓인지, 어쩌면 저 회생 불가능한 계략남이 바뀔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경고를 들은 리차드의 눈매가 날카롭게 빛났다.
“…알고 있습니다. 제국에서 그 사실을 모르는 이가 있습니까?”
“그럼 다행이고요. 카실 영식, 그대는 재능이 많은 사람이에요. 타고난 능력을 올바른 곳에 사용한다면, 찬란한 축복이 함께할 거예요.”
카실 공작 일가는 하나같이 탐욕이 넘쳤다. 게다가 무능하기까지 했다. 리차드가 굳이 비열한 술수를 쓰지 않더라도 그들은 자멸 일로를 걷게 될 거고, 공작가는 리차드의 차지가 될 거다.
리차드는 황제가 되기 위해 수많은 사람을 이용하고 희생시킨다. 그중에는 그를 진심으로 따르고 사랑하던 이들도 있었다.
나는 원작을 떠올렸다. 리차드는 그토록 열망하던 황제가 되고, 다이애나마저 차지하지만 오히려 끝없는 공허함에 파묻힌다.
만약 리차드가 공작의 지위에 만족하고, 헛된 탐욕을 부리지 않는다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도 있을 거다.
“축복이라…. 당신이 제 곁에 있어 주겠다는 겁니까?”
하지만 그는 나의 말을 귀담아듣기는커녕, 황태자비가 ‘제국의 축복’이라고 불린다는 점을 이용하여 말장난을 쳤다.
“역시 예법 공부가 필요하신 분이군요.”
“당신이 알려주신다면 얼마든지 하죠.”
다시 느끼한 멘트를 치기 시작하는 걸 보니, 이제 우울함에서 완벽하게 회복된 모양이네.
“시간을 지체했군요.”
떠나겠다는 의사를 전하자 리차드가 고개를 숙였다.
“다시 뵐 날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그때는 예법을 갖추길 바랍니다.”
나는 동백나무를 보며 짧게 묵례한 뒤 마차로 향했다.
리차드가 나의 경고를 귀담아들었을까?
조금이라도 바뀌면 좋겠지만 그가 보인 반응을 봤을 때 가능성은 낮을 거다.
리차드가 원작대로 악행을 이어간다면 나는 철저하게 막을 것이다. 그와 이렇게 여유로운 대화를 하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 되겠지.
마차로 향하는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외출이 너무 길었다. 한시라도 빨리 우리 꼬마 신랑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
앤시아는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그대로 마차를 타고 떠났다.
리차드는 동백나무에 매인 하얀 손수건을 바라보았다. 청량한 파란색 자수가 놓여 있는 고급스러운 물건이었다.
“처음으로 선물이란 걸 받아보셨네요.”
그의 어머니는 평생 고통 속에 살아왔다.
로움족의 자식으로 태어나 그대로 노예가 되었고, 원치 않는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 결국은 그 아이의 멍청한 실수로 인해 처참하게 목숨을 잃었다.
아들은 멍청했고, 모질었다. 어미의 존재를 철저히 숨겼고, 그녀가 묻힌 자리에 나무를 심는 것조차 망설였다. 그런데 앤시아 그 여자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손수건을 꺼냈다.
리차드가 이곳에 로움족이 묻혀 있다고 하자, 앤시아는 물었다.
“아는 분이셨나요?”
로움족 따위에게 ‘분’이라고 하다니. 본인이야말로 기본적인 상식이 없지 않은가?
리차드는 한참이나 손수건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인사를 건넸다.
“내년에 또 올게요. 어머니.”
***
리차드는 길버트 벨라시안이 유배된 서쪽 섬에 갔다가 한 달여 만에 공작저로 돌아왔다. 어머니의 기일을 맞추기 위해서 잠도 자지 못하고 서둘렀기 때문에 누적된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곧장 자신의 침실로 들어가려 하는데, 집사가 다급히 그를 쫓아왔다.
“도련님, 왜 이제야 오셨습니까? 공작 각하께서 얼마나 찾으셨는지 모릅니다.”
리차드의 미간이 저절로 좁혀졌다. 오늘만큼은 카실 공작의 역겨운 낯짝을 보고 싶지 않았다.
하루만 더 늦게 올 걸 그랬군. 그는 뒤늦은 후회를 하며 집무실로 발걸음을 돌렸다.
“쓸모없는 놈! 어딜 싸돌아다니다 이제야 나타난 것이냐!”
리차드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카실 공작의 분노에 찬 음성이 날아들었다. 그리고 리차드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옆에 있던 프랭크가 빈정거렸다.
“얼굴만 밝히는 멍청한 귀부인이라도 꼬신 거겠죠. 제 어미한테 배운 게 그것밖에 없지 않습니까?”
“천박한 놈, 역시 피는 속일 수가 없구나.”
리차드는 이를 악물었다. 그들이 무슨 말을 하든 꾹 참으며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던 리차드였지만, 오늘은 모욕을 참아내기가 힘들었다.
그들은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지 못했다. 죄 없는 여자를 역병에 걸렸다고 몰아서 잔인하게 죽여놓고, 기억 속에서 지워버렸다.
하지만 아직은 원한을 드러낼 때가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그린 듯한 미소를 지었다.
“서쪽에 있는 공작가의 광산을 시찰하고 오는 길입니다. 각하께서 출타 중이셔서 형님께 말씀드렸습니다만.”
리차드는 길버트 벨라시안에 대한 정보를 공작 일가와 공유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미리 준비해놓은 답을 말했다.
“그, 그랬나?”
프랭크는 작은 눈을 끔벅거렸다. 그러고 보니 무리들과 어울리며 마약에 취해 있을 때, 리차드가 무슨 말을 한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중요한 일을 하고 있을 때 말하면 어떡해! 기억 못 하는 게 당연하잖아!”
“상단을 엉망으로 만들어놓고 한가롭게 여행이나 다녀온 거냐!”
프랭크의 실수로 화살이 돌아가려 하자, 공작이 버럭 호통을 치며 장부를 던졌다.
참 아들에게 애틋한 사람이었다. 프랭크의 흠결이 드러나는 것은 조금도 참지 못한다.
리차드는 바닥에 떨어진 장부를 펼쳤다.
아놀드는 카실 공작가에서 운영하는 상단 경영의 일부를 프랭크에게 맡겼다. 하지만 그는 도박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관리는 리차드의 몫이었다.
리차드는 서쪽으로 떠나기 전, 상단의 거래 목록을 미리 작성해서 부하에게 명령해두었다. 하지만 지금 장부에 적혀 있는 매입, 매출 내역은 엉망진창이었다.
쓸모없는 물건을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에 매입하고, 반대로 시세가 높은 마도구 등은 싸게 팔아 치웠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누구의 짓인지 따로 찾을 필요는 없었다.
“프랭크 형님께서 친우들께 인심을 쓰셨군요.”
비상식적인 거래가 이루어진 가문과 상단의 이름이 하나같이 낯이 익었다. 전부 프랭크와 자주 어울리며 도박을 하는 무리였다.
그들에게 폼을 잡기 위해서 무리한 요구를 들어준 게 뻔했다.
프랭크는 언제나 저런 식으로 공수표를 날렸다.
그리고 다른 귀족들에게 멸시를 받으며 구두 계약을 파기하는 건 리차드의 몫이었다.
“내가 뭐! 네가 상단을 지키고 있었으면 이런 일은 없었어! 나는 천한 피를 타고난 누구와 달리 미래의 황제로서 지켜야 할 체면이 있단 말이야!”
프랭크가 뻔뻔하게 소리쳤다. 그리고 카실 공작은 그런 아들을 나무라기는커녕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프랭크의 말이 맞다. 리차드, 노예였던 너를 거두어준 것은 프랭크를 보좌할 만한 능력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네가 맡은 소임을 제대로 하지 않은 탓에 상단에 막심한 피해가 생겼는데, 프랭크의 탓을 하는 것이냐!”
“송구합니다. 실언하였습니다.”
리차드는 고개를 숙였다. 그가 사과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작과 프랭크는 쉴 새 없이 질책의 말을 쏟아냈다.
다시 지옥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새삼 실감 났다.
앤시아를 만났을 때 잠시 찾아왔던 빛이 사라지며 다시 어둠이 찾아왔다.
“카실 영식, 그대는 재능이 많은 사람이에요. 타고난 능력을 올바른 곳에 사용한다면, 찬란한 축복이 함께할 거예요.”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자신이 착하게 산다고 해서 밝은 날이 찾아올까? 어머니는 누구보다 착했다. 그래서 짓밟혔다. 철저하게 짓밟히다 버림받았고, 죽어서도 조롱당했다.
리차드는 빛의 여신에게 버림받은 로움족의 피를 받아 태어났다. 그의 인생은 어둠 속에서 태어나서 지금껏 단 한 번도 빛을 보지 못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인간이 선하게 살아봤자 이용당할 만큼 이용당하다 모든 걸 빼앗기고 비참하게 버려질 뿐이다.
이용당하지 않으려면 올라가야 한다. 모두를 짓밟는 위치가 돼야 한다. 공작과 프랭크가 그토록 염원하는 황제의 자리는 내 차지가 될 것이다.
리차드는 앤시아의 말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작은 빛마저 사라지고 검게 변한 심연 속에서 한층 짙어진 욕망이 꿈틀거렸다.
‘황제’ 그리고 ‘앤시아’.
앤시아를 원한다. 리차드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처음으로 빛을 보았다.
그는 오랫동안 앤시아를 원했다. 값비싼 보석 같은 그녀를 가지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 소유욕과는 다른 감정이 리차드를 흔들었다. 앤시아는 어둠 속을 헤매던 자신에게 한 줄기 빛이 되어줄 여자였다.
‘황태자비’라고 불러 달라고? 그래. 언제든지 불러줄 것이다. 내가 황궁을 장악한 다음 그녀를 반려로 삼으면 된다. 앤시아는 나의 황태자비, 그리고 나의 황후가 될 것이다.
***
텐스테온은 나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었다.
원하는 건 무엇이든 구해주었고, 공부를 하고 싶다고 하면 즉시 그 분야 최고의 교사를 초빙해 주었다.
나는 열심히 공부했고, 그 내용을 다시 블레이크에게 가르쳐주고는 했다.
그리고 오늘도 내 방에서 역사 공부를 하였다.
“전하, 천 년 전, 젤칸 제국 시대에 글자는 귀족들의 전유물이었어요. 젤칸의 언어는 문자 자체도 복잡하고 어려운 데다가, 그 시대의 책들은 전부 고가의 양피지를 사용했기 때문에 가격이 무척 비쌌죠.”
“그 책들도 전부 타버렸지?”
“맞아요! 젤칸 제국이 멸망하고 아스테릭 제국이 세워지자, 로움족은 젤칸 부흥 운동을 벌이죠. 젤칸의 5황자 락슐이 주축이 된 부흥 운동은 점점 과격해졌고, 필립 황제를 노리며 텐라른궁에 불을 지르기까지 했….”
블레이크에게 제국의 역사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있는데, 갑자기 귓가가 멍해졌다.
[너야? 네가 불을 지른 거야?]
여자의 거친 목소리와 함께 뜨거운 화염이 눈앞에 펼쳐졌다. 기둥마다 황금과 보석이 박힌 공간이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이게 뭐지?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어!]
격앙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여자의 분노가 나에게까지 전달되었다.
[열어! 당장 열라고!]
여자는 울부짖었다. 그녀의 주변은 온통 황금으로 반짝거렸다. 그리고 그 화려함에 어울리지 않는 투박한 석판이 한편에 세워져 있었다.
이게 뭐지? 머리가 어지럽고 혼란스러운데, 블레이크의 목소리가 들렸다.
“앤시아! 앤시아! 왜 그래? 앤시아?”
걱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를 듣는 순간 정신이 맑아지며 붉은 환영이 사라졌다.
“앤시아, 어디 아파?”
“아니요. 잠깐 다른 생각을 했어요.”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괜히 블레이크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정말?”
“네. 자, 다시 공부해요.”
블레이크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일부러 크게 웃으며 다시 수업으로 돌아갔다.
“이 화재로 텐라른궁이 전소했지만 필립 황제는 무사했어요. 이에 부흥 운동이 실패로 돌아갈 것을 예감한 락슐은 책과 석판 등 젤칸 제국의 언어로 쓰여 있는 모든 것들은 없애버려요. 그때 락슐은 자신을 따르는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나는 책에 적힌 문장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블레이크가 그 부분을 읽었다.
“이 땅의 역사와 지식은 모두 위대한 ‘로움’의 것이다. 이대로 젤칸 제국이 소멸한다면 이 세상의 지식도 사라질 것이고, 젤칸 제국이 다시 세상을 지배한다면 지식이 돌아올 것이다.”
“잘 읽으셨어요. 락슐은 로움족이 가진 지식을 무기로 젤칸 부흥 운동을 지속하려 했죠. 기존에 로움족이 보유하던 서책과 석판을 없애는 것도 모자라서, 신전이나 도서관까지 습격했다고 해요.”
블레이크는 나의 설명을 집중해서 들었다. 역사 공부가 지루할 법도 한데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참 예쁘고 기특했다.
“이에 필립 황제는 새로운 언어를 만들었고, 동방의 종이 제작 기술을 들여와서 책의 보급에 힘썼어요. 이 때문에 새로운 언어는 빠르게 정착할 수 있었고, 오랜 시간 이 땅을 지배했던 젤칸 제국의 언어는 그대로 자취를 감추어서 지금은 ‘고대어’라고 불리게 되었죠.”
사람은 다면적이다. 필립은 여신을 배신해서 저주의 계승자를 만든 원흉이었지만, 동시에 평민들도 배우기 쉬운 언어를 만들고 값싼 종이를 보급하여 제국의 문맹률을 크게 낮춘 성군이기도 했다.
“만약 로움족이 책에 불을 지르지 않았다면, 고대어가 지금까지 내려왔겠지?”
“아마도 그렇겠죠. 고대어가 아니라 여전히 제국어로 불리며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거예요.”
열심히 수업을 듣는 데다 질문까지 하는 블레이크를 보니 저절로 미소가 나왔다.
원작에서 블레이크는 결국 리차드에게 패배한다. 그러자 리차드는 오만한 얼굴로 블레이크의 노력이 부족했다고 일갈한다.
자신은 평생을 황제가 되기 위해 정진했지만 블레이크는 타고난 핏줄만을 믿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 저주가 풀렸다고 해도 황제가 될 자격이 없다며 비웃은 것이다.
정말 개소리였다.
황태자라고는 하나 블레이크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귀족과 신관들은 황제가 정말로 저주의 계승자를 버린 것인지, 아니면 미련을 두고 있는지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았다.
그들은 텐스테온이 아들에게 조금의 정이라도 보인다면, 그 즉시 블레이크를 황태자의 자리에서 폐위하고 남쪽 섬에 유폐해야 한다고 주장할 거다.
그걸 알기에 텐스테온은 조심스러웠고, 블레이크는 혼자서 책을 읽을 뿐 제대로 된 수업을 받지 못했다.
게다가….
“전하, 괜찮으세요?”
책장을 넘기는 블레이크의 작은 손이 파르르 떨렸다. 저주는 단순히 몸에 검은 문장을 새기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살을 찌르는 듯한 고통을 수반한다.
저주가 새겨진 왼쪽은 말할 것도 없고 오른쪽까지 그 여파가 전해지기도 했다.
지난 3년 동안 저주의 문장이 퍼지진 않았지만 아픔까지 사라진 건 아니었다.
이 때문에 저주의 계승자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생활하는 것이 훨씬 힘들었다. 공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응. 괜찮아.”
블레이크가 떨리는 오른손을 스르륵 내리며 맑게 웃었다.
언제나 괜찮다고 하지. 그는 힘들어도 좀처럼 힘든 내색을 하지 않는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오늘 공부는 여기까지 해요.”
“응.”
나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서 손을 꼭 잡았다. 손이 차가웠다.
“오늘은 검술 훈련을 쉬시는 게 좋겠어요.”
“어제도 쉬었는걸.”
저주의 계승자라고 하지만 지난 3년 동안 블레이크는 저주의 문장이 퍼지지 않았고, 크게 앓은 적도 없었다. 물론 저주에 따른 통증이 없어진 건 아니었으나 손을 떨 정도로 아픈 적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 들어 증상이 심해지고 있었다. 이대로는 검을 잡는 것도 힘들 것 같았지만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아.”
“하지만 전하의 상태가….”
“앤시아, 나는 말이지. 아프다는 핑계를 대기 시작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
블레이크는 또다시 맑게 웃었다. 내가 걱정할까 봐 최대한 밝게 말하는 그의 마음이 전해졌다.
“어제는 비가 와서 어쩔 수 없이 쉬었지만, 오늘은 날이 밝아. 훈련하기 딱 좋은 날씨인걸.”
하지만 블레이크가 의젓하게 말한다고 해서 무리하는 걸 알면서도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나는 그의 손을 꼭 잡았다.
“하루만 더 쉬면 안 돼요? 전하랑 꼭 하고 싶은 게 있는데….”
“하, 하고 싶은 거? 뭐, 뭔데?”
“이리 와보세요.”
나는 그의 손을 잡아끌며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러자 블레이크가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전하…?”
“치, 침대는 조금….”
왜 새삼스럽게 얼굴이 빨개지고 그러실까?
“머리를 너무 많이 썼더니 피곤해요. 꼭 해야 할 일을 하기 전에 잠깐 낮잠을 자야겠어요.”
“그럼 그동안 나는 훈련을 하고 있을게.”
“어서 오세요. 저는 전하가 없으면 잠 못 자요.”
손이 이렇게 떨리는데, 가긴 어딜 가려고. 내가 손을 단단히 잡고 놓아주지 않자 블레이크의 얼굴이 점점 더 빨갛게 달아올랐다.
“하, 하지만 여긴 앤시아 침대잖아!”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상관있는데….”
블레이크는 입술을 삐죽거렸지만, 내가 손을 잡아끌자 어쩔 수 없이 따라 올라왔다.
그를 침대 위에 눕히고 이마를 짚었다. 다행히 열은 나지 않았다. 나는 이불을 그의 목까지 덮어 주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난방 도구를 가져올게요.”
침대에서 내려가려고 하는데, 블레이크가 나의 손을 잡았다.
“가지 마. 나, 안 추워.”
“하지만….”
“앤시아가 옆에 있어 주면 돼.”
조금 전까지만 해도 훈련을 하겠다고 고집부렸으면서, 막상 침대 위로 오자 어리광을 부렸다. 변덕이 아니라, 그만큼 힘들어서 저런다는 걸 알기 때문에 가슴이 아팠다.
“죄송해요.”
“뭐가?”
“제가 힘이 없어서요.”
내가 빛의 계승자였다면, 여신의 저주를 풀 능력이 있다면, 블레이크가 아프지 않았을 텐데….
“그런 말이 어디 있어. 나는 부인이 있어서 최고로 행복한걸.”
블레이크는 배시시 웃으며 나를 끌어안았다. 그의 품에 안긴 순간 따뜻한 빛이 나를 감싸 안았다.
***
천천히 눈을 떴다. 몽롱하면서도 어딘가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악몽을 꾼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았다.
‘잠을 잔 건가?’
나는 한 템포 느리게 정신을 차렸다. 블레이크를 쉬게 해줄 생각이었는데, 나까지 잠이 들어버렸나 보다. 시계를 보니 벌써 3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블레이크는 나의 왼손을 꼭 잡은 채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그의 손이 따뜻했다. 하얗게 질렸던 얼굴에도 혈색이 돌았다.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이 나옴과 동시에 스스로가 바보같이 느껴졌다. 나는 오른손으로 내 머리를 콩콩 쥐어박았다.
그런 상황에서 같이 잠을 자다니, 앤시아 너 제정신이야? 블레이크가 괜찮아졌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어쩔 뻔했어! 진짜 열세 살도 이러진 않을 거다! 아우, 바보! 이 바보야!
“앤시아, 왜 때려? 그러지 마!”
스스로의 멍청함을 반성하고 있는데, 블레이크가 깜짝 놀라며 나를 말렸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깨셨어요?”
“아니. 일어나려고 했어!”
“몸 상태는 어떠세요?”
“좋아! 당장 훈련을 해도 되겠어!”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괜찮아진 것 같았다. 하지만 오늘 하루는 푹 쉬게 해주고 싶었다.
“안 돼요. 오늘은 저랑 함께 있기로 하셨잖아요.”
“어, 어, 아! 응! 오늘은 앤시아랑 있을 거야!”
블레이크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나는 블레이크의 양 볼을 잡고 쭈욱 잡아당겼다.
“앤띠아, 뭐 햐?”
발음이 살짝 새니까 더 귀엽네.
“우리 신랑이 너무 귀여워서요.”
“우우!”
그가 발끈했다. 요즘 들어서 부쩍 귀엽다는 말을 듣기 싫어하는 느낌이다. 왜 저러지? 벌써 사춘기인가?
하지만 그 모습조차도 귀여웠다.
“오늘 다이애나한테서 편지가 왔어요.”
“동계 훈련은 잘 마쳤대?”
“네. 재미있었나 봐요.”
“다행이네.”
“답장을 쓰려고 하는데, 전하도 같이 써요.”
“나도?”
그는 의외로 별로 내키지 않는 것 같았다. 당연히 활짝 웃으며 ‘나도 다이애나한테 편지 쓰고 싶어!’라고 할 줄 알았던 나는 조금 놀랐다.
“왜요? 쓰기 싫으세요?”
“싫은 건 아니지만, 방학이 되면 볼 거잖아. 굳이 편지까지 쓸 필요는….”
그는 다소 시큰둥했다. 그 모습이 마치 입대한 친구한테 위문편지를 쓰라는 말을 듣고 미적거리는 대학생 같았다.
지극히 현실 친구 같은 모습이었지만, 다소 성숙한 반응에 조금 위화감이 들었다. 상냥함과 다정함으로 똘똘 뭉쳐 있는 우리 토끼한테 저런 면이 있었나?
“전하, 다이애나가 떠나서 적적하지 않으세요?”
“별로. 오히려 좋아.”
“조, 좋으세요?”
“응. 이제 부인이랑 둘만 있을 수 있잖아.”
블레이크가 응석을 부리며 내 품에 안기더니, 작게 속삭였다.
“사실 나, 질투했어.”
“질투요?”
“다이애나가 있으면 앤시아랑 함께하는 시간이 줄어들잖아. 지금은 계속 같이 있어서 좋아.”
친구랑 함께 있어서 즐거워하는 줄 알았는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나는 피식 웃으며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우리 신랑 질투쟁이네.”
“그래서 싫어?”
블레이크가 커다란 눈으로 나를 올려 보았다. 눈빛이 조금 요망한데? 라고 느끼는 것도 잠시, 그가 커다란 눈을 깜박거리며 걱정되는 듯 눈을 살짝 내리깐 순간 나는 즉각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요! 좋아요!”
우리 귀여운 토끼를 어느 누가 싫어하겠어!
“헤헤. 다행이다.”
블레이크는 배시시 웃었다. 천진한 미소를 보자 내 마음도 아이처럼 맑아지는 것 같았다.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