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장. 노란 멍멍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3/17)

3장. 노란 멍멍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두 사람은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저주의 계승자인 블레이크, 그리고 저주를 풀 힘을 지닌 빛의 계승자 다이애나. 원작에서처럼 두 사람은 운명적인 끌림을 느꼈을까?

비록 나와 다이애나가 자매지간이긴 하지만 이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리는 결혼을 했지만, 아직 신전에 보고를 올리지는 않았다.

부부가 될 두 사람이 모두 성인이 되어야만 신전에 혼인을 고할 수 있었다.

어릴 때 정략결혼을 했더라도, 신전에 보고를 올리기 전이라면 언제든지 혼인을 무효화하는 것이 가능했다.

만약 어릴 때 정략결혼을 한 두 사람이 도저히 맞지 않아서 헤어진다면, 새로운 짝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매, 형제에게 혼인을 물려주는 것도 드물지는 않았다.

개인보다는 가문의 결합이 훨씬 중요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 나라의 문화나 전통을 떠나서, 블레이크가 다른 여자랑 만날 테니 이혼하자고 하면 조금 괘씸할 거 같다. 내가 좋다고 노래를 불러놓고…!

앤시아, 이러지 말자. 정말로 열 살처럼 굴지 말자. 블레이크는 다이애나랑 맺어져야 해. 그게 최선이야.

나는 마음을 다잡으며 빛의 마법에 대한 책들을 뒤적였다.

정말로 블레이크를 고칠 사람은 다이애나뿐인 걸까? 나는 안 되는 걸까? 내가 빛의 마법을 배워도 안 될까?

2시간 뒤, 나는 빛의 마법에 관한 책들을 잔뜩 빌려서 황태자궁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어딘지 소란스러웠다.

“아니야!”

“전하야말로 우기지 마세요!”

이건 블레이크와 다이애나의 목소리였다.

아니, 서로 운명의 사랑을 느끼라고 했더니, 왜 싸우고 있는 거야!

나는 화들짝 놀라서 뛰어갔다.

“무슨 일이에요?”

“처제가 자꾸 말도 안 되는 말을 하잖아!”

블레이크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씩씩거렸다. 다이애나 역시 잔뜩 화가 나 있었다. 도대체 2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전하야말로 억지 쓰지 마세요! 제가 언니를 더 좋아하거든요!”

“앤시아는 내가 더 좋아해!”

“저랑 언니는 피를 나눈 자매지간이에요!”

“앤시아는 내 부인이야! 내가 더 사랑한다고!”

“저는 8년이나 언니를 좋아했다고요! 전하는 고작 몇 달이잖아요! 저를 이길 수는 없어요!”

“우! 기간이 문제가 아니잖아! 나는 앤시아를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한다고!”

“…….”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내용을 듣고 보니 싸움을 말릴 의지조차 사라졌다.

원래 아이들은 이런 거로 싸우나? 아니, 여주인공이랑 서브 남주가 만나서 왜 이상한 걸로 다투고 있는 거야?

***

“이 세상에서 나보다 앤시아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어!”

“왜 없어요? 제가 있는데! 지금 핏줄을 무시하시는 거예요?”

내가 이 세계에 들어온 지도 어느덧 2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블레이크와 다이애나는 여전히 치열하게 싸우는 중이었다.

부먹찍먹 논쟁도 아니고, 이런 주제로 2년 동안 싸울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우린 부부라고!”

“아직 뽀뽀도 못 했으면서.”

다이애나가 가소롭다는 비웃음을 날리자, 블레이크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 그, 그건…!”

우리 신랑 울겠네. 나는 이쯤에서 싸움을 중단시켰다.

“자자, 그만해. 훈련 시간이잖아. 전하도 연습 준비하셔야죠.”

다이애나의 꿈은 기사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원작에서도 짧게 언급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 가볍게 스쳐 지나가는 꿈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그녀는 진지했다.

그녀는 기사 아카데미에도 가고 싶었지만, 벨라시안 백작이 결사반대했다고 한다. 여자가 그런 일을 하면 사교계와 결혼 시장에서 가치가 떨어진다는 이유였다.

한마디로 개소리였다.

나는 에드온에게 부탁해서 다이애나도 검술을 배울 수 있도록 말해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블레이크의 대련 상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에드온은 흔쾌히 승낙했고, 그녀의 스승이 되어주었다.

“전하, 우리 연무장까지 누가 먼저 가나 내기해요! 시작!”

“가, 갑자기 그러는 게 어딨어! 비겁해!”

다이애나가 말을 꺼내는 것과 거의 동시에 연무장으로 달려가자, 블레이크가 억울해하며 그 뒤를 쫓아갔다.

다이애나는 강아지 같았다. 그것도 비글.

맨날 비글 여동생한테 당하는 토끼 남편이 귀여우면서도 안쓰러웠다.

지난 2년 동안 다이애나는 황태자궁에 자주 놀러 왔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애정 비슷한 감정도 싹트지 않았다.

그저 허구한 날 싸워댈 뿐이었다.

“거기 서! 다시 시작해!”

“다시 시작하긴 뭘 다시 시작해요? 전하는 정말 순발력이 떨어지시네요.”

“네가 비겁한 거야!”

연무장으로 가는 이 짧은 순간에도 싸워대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데, 멜리사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도 두 분은 사이가 좋으시네요.”

“그런가…?”

저게 좋은 거야?

“네. 전하께 좋은 친구가 생겨서 다행이에요.”

친구….

멜리사의 말대로 그들은 그저 친구로 보였다. 연인으로 진화할 가능성이 제로에 수렴하는 친구 말이다.

두 사람은 운명적 사랑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안도하는 내가 있었다.

나는 내 마음을 솔직히 인정하기로 했다.

떠나고 싶지 않다.

블레이크의 곁에 있고 싶다. 토끼 같은 신랑, 멋진 아버님, 비글 같은 동생과 함께 지내고 싶다.

멜리사, 한스, 에드온, 따뜻한 사람들과의 시간도 소중했다.

하지만 무작정 욕심을 부릴 수는 없었다. 내가 버티고 있다고 한들, 블레이크의 저주가 풀리지 않는다면 지금의 이 행복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 것이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기준을 세웠다.

원작에서 다이애나는 어렸을 때 빛의 힘을 전혀 사용하지 못했다고 쓰여 있었다.

벨라시안 백작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신관들을 불러서 확인을 해봤지만, 그녀에게서는 티끌만 한 빛의 마나도 느껴지지 않았다고 했다.

소설에서도 정확하게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녀가 빛의 힘을 각성한 건 성인이 되고 블레이크를 만날 무렵일 거다.

블레이크는 다이애나를 만나는 순간 따스한 빛의 힘을 느끼고 두 사람은 뜨거운 관계를 갖는다.

하지만 원작과 달리 블레이크는 다이애나에게서 어떤 힘도 감지하지 못했다. 몇 번이나 확인했지만 빛의 힘 같은 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원작에서처럼 다이애나는 아직 빛의 힘을 각성하지 못했고, 두 사람이 성인이 될 때쯤에야 계승자의 힘을 발휘하는 걸까.

두 사람이 일찍 만나든 늦게 만나든 다이애나가 블레이크의 저주를 풀 수 있는 건 성인이 되는 시점이라는 거다.

어째서 이런 복잡한 설정이 붙은 걸까? 사실 이유야 뻔했다.

이 소설은 활화산처럼 뜨거운 19금 소설이었다. 그러니 성인이 된 시점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하여 작가가 집어넣은 장치일 거다.

어쨌든 다이애나가 빛의 힘을 각성하려면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그때까지 최선을 다해서 블레이크의 저주를 풀 방법을 찾을 생각이었다. 원작에 나와 있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블레이크가 성인이 될 때까지도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그때는 깨끗이 포기하고 떠나야지.’

나는 그렇게 결심했다.

그리고 내 결심을 블레이크와 황제에게도 전했다.

“황태자 전하의 저주는 반드시 풀릴 거예요! 벨라시안 가문의 빛의 계승자가 전하의 저주를 풀 수 있어요.”

나는 원작에 나온 방법을 (19금 요소를 빼고) 설명했지만, 그들은 알겠다고 말하면서도 그다지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래도 나는 꿋꿋이 말했다.

블레이크에게 저주가 반드시 풀릴 거라는 희망을 주고 싶었다. 게다가 만약 내가 떠나더라도 그가 상처받는 건 원치 않았기 때문에 미리 설명을 해주고 싶었다.

“전하, 그러니까 만약 빛의 계승자가 나타나면, 그 사람과 진짜 결혼하시는….”

“내가 말했지. 나의 부인은 앤시아뿐이야.”

“하지만 저주를 풀기 위해서는….”

“앤시아랑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저주 같은 건 상관없어.”

그러나 블레이크는 단호했다. 그는 저주가 풀리는 것보다는 나와 함께 하는 것만을 신경 썼다. 그렇게 2년의 시간이 흘렀다.

2년 동안 황태자궁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호수를 메꾼 뒤 그 위에 온실을 지었고, 연무장과 작은 밭도 만들었다.

많지는 않지만 궁인들도 새로 들였고, 요리사도 뽑았다. 다들 믿을 만한 사람들이었다.

나는 수확을 마친 밭을 한번 둘러본 뒤, 황제궁으로 향했다.

나는 제국에서 가장 높은 여인으로서, 황실의 업무를 살폈다. 원래라면 황후가 해야 할 일이지만 텐스테온은 재혼을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나에게 세피아궁을 하사했고, 황제궁 3층에도 따로 집무실을 만들어주었다.

모두들 며느리 사랑이 지극하다며 부러워했다.

하지만 황제궁 3층은 단순한 집무실이 아니었다.

나는 3층의 집무실로 들어간 뒤, 액자에 있는 숨겨져 있는 비밀 장치를 눌렀다. 그러자 책꽂이가 움직이며 비밀 공간이 나타났다.

그 안에는 고대어로 적힌 석판을 비롯하여 저주와 빛의 마법에 관한 책들이 가득했다.

그뿐 아니라 아스테릭 제국의 역사나 ‘창’의 용술 등 저주를 푸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만한 자료는 모두 모아서 이곳에 두었다.

나는 내가 전 세계의 언어를 모두 읽을 수 있는 ‘언어 능력자’라는 사실을 공표하지 않았다.

천 년 전, 이 땅에는 원래 ‘젤칸’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하지만 필립에 의해 멸망하고 ‘아스테릭 제국’이 건설되었다.

당시 젤칸에서 사용했다는 고대어는 여러 곡절 끝에 사라졌고, 이제는 미지의 영역으로 남았다. 신관들조차 완벽하게 해독하지 못한다.

원작에서 리차드는 이를 이용하여 황제를 속인다. 그는 고대의 흑마법 중에서 여신의 저주를 다른 사람에게 옮길 수 있는 사술이 있다며 거짓 정보를 흘린다.

리차드에게 속은 텐스테온은 블레이크를 구하기 위해 자신이 대신 저주를 받으려고 하고, 결국 죽임을 당하고 만다.

카실 공작과 리차드가 지금은 잠잠하지만, 때가 되면 원작처럼 비열한 수를 쓸 거다.

그렇다면 이쪽에서도 비밀 병기 하나쯤은 보유해야 했다. 내가 언어 능력자라는 걸 안다면 리차드는 방법을 바꿀 테니까.

나는 언어 능력자라는 사실을 숨기고, 동시에 황태자의 저주를 풀 방법을 찾기 위하여 황제궁 깊숙한 곳에 밀실을 만들었다.

황제가 기거하는 필리온궁만큼 보안이 확실한 곳은 없으니까 말이다.

현재 내가 언어 능력자라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은 블레이크와 황제, 그리고 그의 보좌인 콜린뿐이었다.

나는 장치를 눌러서 문을 닫은 뒤, 가장 안쪽에 있는 석판을 바라보았다.

이 석판은 황태자궁의 호수를 메우고 온실을 만들 때 발견한 물건이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오랫동안 호수의 깊숙한 바닥에 파묻혀 있었던 석판은 상태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여… 주… 6… 직… 문장… 었다.

석판에 새겨진 문자들이 대부분 마모돼서 읽을 수 있는 건 이게 전부였다.

빛의 여신이 복수를 위해 저주를 걸었다는 내용이겠지. 이미 아는 내용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아마 그게 맞을 거다.

하지만 원작에서는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던 물건이라 그런지 이 석판이 계속 신경 쓰였다. 이 안에 무언가 중요한 단서가 있을 것만 같았다.

석판을 유심히 바라보는데, 갑자기 닫아놓았던 문이 열렸다.

순간 긴장했지만, 문 앞에 서 있는 미남을 보자 자연스럽게 웃음이 나왔다.

“아버님.”

“앤시아.”

텐스테온이 부드럽게 웃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나와 블레이크가 쑥쑥 클 동안, 텐스테온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살짝 고개를 숙이는 동작에서도 길들여지지 않은 맹수의 오라가 느껴졌다.

“아버님, 오늘도 멋있으세요.”

“실없기는.”

“실없는 말이 아니라 사실이죠. 아버님께서는 모든 사교계 여인들의 첫사랑이라던데요?”

“누가 너한테 그런 헛소리를 한 거냐?”

“다들 그랬어요.”

“믿지 말아라. 헛소리다.”

텐스테온이 미간을 찌푸렸다. 언짢은 사자처럼 무서워 보였지만 이제는 알 수 있다. 그저 부끄러워하고 계실 뿐이라는 걸.

칭찬을 들으면 당황하는 모습이 블레이크와 많이 닮았다.

“석판을 보고 있었니?”

그는 칭찬이 민망한지 화제를 돌렸다.

“네. 아버님도 석판을 보러 오셨어요?”

“네 얼굴을 보러 왔다. 왔으면 말을 하지.”

“중요한 손님이 오셨다고 해서요.”

“너보다 중요한 사람은 없다.”

진심이 담긴 목소리였다. 그가 이럴 때마다 진짜 내 친아버지인 것 같았다.

“그러니 저주를 푸는 것도 좋지만, 쉬엄쉬엄하거라.”

“쉬엄쉬엄하고 있어요.”

“하루도 안 쉬는 거 다 안다.”

“제가 좋아서 하는걸요. 좋아하는 일은 안 힘들어요.”

“쉴 때는 쉬어야지.”

“아버님이야말로 쉬셔야죠! 어제도 집무실에서 밤을 새우셨죠? 그렇게 과로하시면 큰일 나요!”

“잔소리는 되었다.”

그가 나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헝클어트렸다. 하여튼 꼭 필요한 말만 하면 잔소리라고 한다.

***

블레이크와 다이애나는 목검을 가지고 대련을 벌였다. 하지만 오늘도 무승부였다.

수업을 마친 뒤에도 끝까지 싸웠지만 결판을 내지 못했다. 두 사람은 결국 거친 숨을 몰아쉬며 연무장에 나란히 드러누웠다.

“전하, 왜 전하는 끝까지 찌르지 않으세요? 제가 여자라고 봐주시는 거예요?”

다이애나가 분한 듯 말했다. 오늘은 기필코 승부를 낼 생각이었기 때문에 더 화가 났다. 차라리 완전히 패배했다면 이렇게 분하지는 않았을 거다.

“다이애나는 앤시아의 동생이잖아…. 처제야말로 왜 검을 멈췄어? 그때 휘둘렀으면 이길 수 있었을 텐데. 내가 황태자라 봐준 거야?”

“전하는 언니 남편이잖아요. 어떻게 다치게 할 수 있겠어요.”

다이애나는 다소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처제는 왜 기사가 되려고 해?”

“강해지려고요.”

“왜 강해지고 싶은데?”

“힘이 세져서 언니를 지켜주고 싶어서요.”

다이애나는 아버지에게 학대당하는 언니를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언니를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에 울고 또 울면서, 그녀는 기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도 함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부인한테 너 같은 동생이 있어서 다행이야.”

“저는 언니한테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걸요.”

“그래도 계속 지켜줄 수 있잖아. 다이애나, 만약 내가 죽으면 앤시아를 부탁할게.”

그는 여상하게 말했다.

저주에 걸린 자는 성인이 되기 전에 죽는다. 앤시아가 자신을 위해 노력을 하는 건 알지만, 결국 지독한 저주를 풀지는 못할 터였다.

블레이크가 말갛게 웃으며 부탁을 하자, 다이애나는 벌떡 일어났다.

잠시 누그러졌던 그녀의 눈동자에 분노가 번뜩거렸다. 다이애나는 화를 내며 그에게 목검을 겨누었다.

“말 같지도 않은 말씀 하지 마세요! 죽긴 누가 죽어요! 우리 언니를 과부로 만들 셈이에요!”

“다이애나….”

그녀가 너무 화를 내자 블레이크는 당황했다.

“우리 언니가 전하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면서 죽겠다는 말을 함부로 하는 거예요! 전하가 죽으면 언니가 얼마나 슬퍼하겠어요!”

“하지만 저주는….”

“저주를 풀면 되잖아요! 다시 그런 말 하면 가만 안 둘 거예요! 황태자라고 해도 용서 안 할 거야! 우리가 같이 힘을 합쳐서 언니를 지키는 거예요! 아셨어요?”

“응….”

블레이크는 다이애나의 기백에 밀려 고개를 끄덕였다.

“자! 기사로서 약속해요!”

다이애나는 하늘을 향해 목검을 치켜들었다. 블레이크도 일어나서 그녀의 목검과 자신의 목검을 겹쳤다.

“약속할게.”

블레이크는 웃었다. 어딘지 체념 섞인 미소가 아니라, 희망을 담은 얼굴이었다.

***

몸에 새겨진 저주의 문장은 점점 퍼져 나가고, 종국에는 ‘저주의 계승자’를 잡아먹는다고 한다.

하지만 블레이크의 문장은 2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대로였다. 문장이 줄어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더 퍼지지도 않았다.

나는 그의 저주를 풀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 방법들이 효과를 봤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이애나를 일찍 만난 덕분인지, 그것도 아니라 전혀 다른 이유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다행이었다.

블레이크는 오늘도 나의 손을 꼭 잡은 채 잠이 들었다. 나는 그의 손에 새겨진 문장을 바라보았다.

왜 하필 문장일까?

나는 지난 2년 동안 이 세계의 저주에 관한 책들을 탐독했다.

마법이 있는 나라인 만큼 저주의 종류도 다양했다.

신체의 일부가 흉측하게 일그러지는 저주, 몸이 썩어들어 가는 저주, 육체나 영혼을 속박하는 저주, 동물이나 괴물처럼 인간이 아닌 다른 것으로 바꾸는 저주, 고통 속에서 죽지 못하도록 숨만 붙여놓는 저주 등등 그 종류는 무수히 많았다.

그중에서 문장을 새기는 저주는 상대적으로 피해가 약한 편에 속했다.

물론 전신에 퍼지면 결국 죽고 말지만, 그래도 신체의 형태가 바뀌거나 마물이 되는 것보다는 비교적 온건한 저주였다.

빛의 여신은 초대 황제 필립에게 배신당했다. 그래서 저주를 내렸다. 하지만 왜 하필 이런 형태였을까?

그렇게 증오했다면 필립을 죽이거나, 더 심한 방법을 쓸 수도 있지 않았을까? 굳이 문장이어야 하는 이유는 없다. 여신이 저주를 내릴 능력이 부족했을 리도 없고, 마음만 먹는다면 원하는 방법은 뭐든 쓸 수 있었을 거다.

그리고 오직 한 명에게만 저주를 내리고, 그 저주가 계승되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

자꾸만 무언가 중요한 걸 놓치고 있는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나는 원작 소설을 떠올려 보았다. ‘야수와 영애님’은 ‘미녀와 야수’를 비튼 19금 피폐 소설이었다.

저주에 걸린 황태자와 빛의 힘을 지닌 미녀, 그리고 그녀를 차지하려는 매력적인 남자의 삼각관계를 그렸다.

다이애나는 빛의 힘으로 블레이크의 저주를 풀어준다. 이 소식을 들은 리차드는 여신의 저주를 푼 다이애나에게 흥미를 느끼고, 그녀를 차지하기 위해 지독한 계략을 펼치기 시작한다.

결국 다이애나는 저주에 걸린 야수 블레이크가 아니라, 집착과 계략을 일삼는 리차드를 택한다.

비틀어도 너무 비틀었다. 주인공을 바뀌어 버리다니. 나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편이 19금 피폐 소설답긴 했다.

하지만 마지막은 다이애나와 리차드가 결혼을 하고 임신을 했다는 지극히 평범한 결말이었지. 지독한 피폐함과 집착으로 일그러졌던 소설치고는 마지막 장면에서 조금 맥이 빠졌다.

하지만 특별한 건 없었던 것 같은데….

나는 블레이크의 얼굴에 새겨진 문장을 바라보았다. 잉크가 번진 듯 뭉쳐진 부분과 퍼지는 잔상이 장미 꽃잎과 가시를 표현한 것 같기도 하고….

“후음.”

블레이크가 몸을 뒤척였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내 손은 꼭 잡고 놓지 않았다. 그 모습이 무척 귀여웠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단순히 로맨스 소설이라 저주를 문장으로 한 걸지도….

서브남이 진짜로 동물 같은 반인반수의 괴물이라면 호불호가 극심하게 갈렸을 테니까 말이다.

흐트러진 블레이크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데, 그가 스르륵 눈을 떴다. 아름다운 붉은 눈동자에 내 얼굴이 고스란히 비쳤다.

“죄송해요. 깨셨어요?”

“아니. 기분 좋아.”

그는 배시시 웃으며 나의 손에 얼굴을 비볐다.

“앤시아 손은 따뜻해. 앤시아가 있으면 좋은 꿈을 꿔.”

“나쁜 꿈을 많이 꾸셨어요?”

“응. 아주 무서운 꿈을 꿨어.”

“어떤 꿈이었는데요?”

“몰라. 깨면 잊어버려. 하지만 무섭고 슬픈 꿈이야.”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블레이크에 대해 뭐든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이 어린아이가 혼자 끙끙 앓았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그런 일이 있었으면 말씀해 주셨어야죠.”

“이젠 앤시아가 있어서 괜찮은걸.”

그는 말갛게 웃었다. 맑은 눈에 졸음이 담겨 있었다. 내일도 훈련을 한다는데, 어서 재워야겠다.

나는 그의 등을 토닥였다.

“잘 자라, 우리 아가. 앞들과 뒷동산에….”

“아가 아냐!”

블레이크가 발끈하며 벌떡 일어났다. 자장가를 불러주려고 했는데 오히려 잠을 깨운 것 같다.

“제 눈엔 언제나 귀여운 아기인데요?”

“뭐…?”

그의 붉은 눈동자가 거칠게 요동쳤다. 아기가 아기 소리 듣기 싫어하는 건 전 세계 공통이구나.

“우리 꼬마 신랑님. 어서 주무세요.”

“꼬마도 아니야!”

나름대로 배려를 해서 정정해 주었건만 블레이크는 오히려 더 발끈했다.

백번 양보해서 아기는 아니어도 꼬마는 맞잖아!

하지만 꼬마가 꼬마 소리를 싫어하는 것 역시 만국 공통인 듯했다. 무슨 말을 듣고 싶어 하는지 대충 짐작되지만, 그래도 너무 오냐오냐 키우면 안 되지.

“꼬마는 맞죠.”

“허어….”

블레이크는 충격을 받은 듯 바람 빠진 소리를 냈다.

아니, 이게 그렇게 놀랄 말인가?

***

놀랄 말이었나보다.

블레이크는 아침부터 황태자궁에서 가장 큰 아름드리나무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름드리나무에는 나와 블레이크, 다이애나의 키가 표시되어 있었다. 작년이랑 올해 초에 쟀었는데, 내가 가장 크고 그다음이 다이애나, 블레이크 순이었다.

“전하, 식사하세요.”

“입맛이 없어….”

그는 잔뜩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왜요? 속이 안 좋으세요?”

“먹어봤자 키도 안 크고….”

“밥을 먹어야 키가 크죠.”

“먹어도 안 크는걸….”

“늦게 크시는 거예요.”

원작에서 블레이크의 키가 작다는 묘사는 특별히 없었다. 리차드가 185 정도이고, 블레이크는 그보다는 조금 작다고 했으니 못해도 170대 후반까지는 클 거다.

“그리고 오늘은 제가 요리를 했는데 안 드실 거예요?”

“앤시아가 만들었어?”

블레이크가 눈을 반짝였다. 나는 요리를 하는 걸 좋아했다. 그리고 블레이크가 내 요리를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는 건 더 좋았다.

“네. 어서 오세요.”

“응!”

그는 언제 우울했냐는 듯 곧장 식당으로 달려갔다.

“자, 드셔보세요.”

“어. 이게 뭐야?”

블레이크가 앞에 놓인 말간 국물을 보고 멈칫했다.

“콩나물로 만든 콩나물국이에요.”

내가 만든 요리라면 무엇이든 잘 먹었던 블레이크가 주저하며 콩나물국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거, ‘마쿨’같아….”

‘마쿨’은 혼돈의 계곡에 서식한다는 외눈박이 마물이었다.

텐스테온이 동방의 ‘창’국에서 백태를 구해주셔서 밭에 심고, 얼마 전에 수확을 했다. 그래서 기념으로 콩나물을 키워보았다.

콩나물국을 만들 때까지는 전혀 몰랐는데, 블레이크의 말을 들어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특히 백태로 재배해서 콩나물 대가리가 컸기 때문에 더 비슷해 보였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안 먹으려고 하겠지.

“‘마쿨’이라니요! 이건 우리가 수확한 콩으로 만든 거예요.”

“콩으로?”

“네. 동글동글한 콩이 이렇게 길어진 거예요. 이걸 먹으면 콩나물처럼 키가 쑥쑥 클걸요.”

“정말?”

“네. 정말이죠.”

블레이크는 젓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콩나물 하나를 집었다. 이제 그는 젓가락질도 능숙했다.

“마쿨….”

책에서 보았던 마쿨의 삽화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지 그가 약간 질린 듯한 표정을 짓다가, 마침내 눈을 질끈 감고 콩나물을 입 안에 넣었다.

“어떠세요?”

“끄, 끝에 털 같아. 혀를 간질여….”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된장국같이 맛이 강한 것도 잘 먹었기 때문에, 이런 곳에서 난관에 봉착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으으.”

하지만 블레이크는 뱉지 않고 끝까지 꼭꼭 씹어 먹었다.

“어떠세요?”

“으음…. 무슨 맛인지 모르겠어. 달지도 않고 짜지도 않고, 시지도 않아.”

“콩나물은 원래 그렇게 네 맛도 내 맛도 안 나는 게 매력이에요.”

“아아….”

블레이크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내 말을 정확히 이해한 거 같지는 않았다.

그는 스푼으로 조심스럽게 국물을 떴다. 표정으로 보아하니 ‘마쿨’이 서식한다는 늪지대라도 떠올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블레이크는 이번에도 눈을 질끈 감으며 투명한 국물을 호록 마셨다. 그리고 이내 눈을 번쩍 떴다.

“오! 맛있어!”

“그렇죠? 맛있죠?”

“응!”

블레이크는 콩나물국을 다시 한번 떠먹었다.

“국물만 드시면 안 돼요. 콩나물에는 영양분이 많으니까, 같이 드세요.”

“응….”

블레이크는 내 말대로 콩나물을 먹었다. 처음에는 꺼리는 것 같더니 밥을 다 먹을 때쯤에는 거리낌 없이 먹기 시작했다.

그가 잘 먹는 모습을 보내 내 배가 다 불렀다. 그때 우당탕 소리가 나며 다이애나가 달려왔다.

“언니!!”

“오늘은 일찍 왔네.”

“언니가 보고 싶어서! 언니, 지금 입은 옷은 누가 만든 거야?”

“응? 왜? 마음에 들면 줄까?”

“아니, 그게 아니라, 이 드레스를 만든 의상실을 향해 인사를 올리려고! 페리도트 색이라니! 언니한테 딱이잖아! 어떻게 이렇게 예쁠 수가 있어? 언니를 향해 빛이 쏟아지는 것 같아.”

얘가 또 시작이네.

“부인은 뭘 입어도 예뻐!”

조용히 식사하던 블레이크까지 칭찬에 가세했다. 듣기 싫진 않지만 조금 민망했다. 나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다이애나, 식사했어? 안 했으면 같이 먹자.”

쉴 새 없이 주접을 떨던 다이애나가 식탁 위로 시선을 던졌다.

“저게 뭐야? 마쿨이야?”

마물의 존재를 잊고 맛있게 식사하던 블레이크가 흠칫 떨었다. 어째 도로 원점이었다.

***

“하나, 둘!”

다이애나는 목검을 힘껏 휘두르며, 오늘 에드온에게 배웠던 동작을 연습했다.

벨라시안 백작은 그녀에게 많은 것을 가르쳤다. 하지만 예법, 사교댄스, 발레, 피아노, 자수 등 하나같이 결혼 시장에서 가치를 높이기 위한 것일 뿐, 다이애나가 원하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앤시아 덕분에 검술을 배웠다. 아직 진검을 잡아본 적이 없는 풋내기 검사에 불과했지만 이렇게 검을 휘두를 때 가장 큰 행복을 느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베는 동작이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았다.

다이애나는 다시 목검을 단단히 쥐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아버지인 길버트가 들어왔다. 다이애나는 화들짝 놀라서 반사적으로 목검을 뒤로 숨겼다.

“뭘 감추는 거냐?”

길버트의 눈이 서슬 퍼렇게 번뜩였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다이애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길버트는 그녀의 손을 우악스럽게 잡아당겼다.

“아!”

다이애나가 아픔에 소리를 질렀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과거의 길버트라면 이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2년 동안 길버트의 마음은 변했다.

그는 자신의 첫 번째 결혼을 수치스럽게 여겼다. 돈 때문에 별 볼 일 없는 남작가의 여식과 결혼한 사실을 자신의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어 했다.

앤시아를 볼 때마다 치욕스러운 과거가 떠올라서 괴로웠고,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그는 자신과 같은 백작 가문인 두 번째 부인을 자랑스럽게 여겼고, 그 결실인 다이애나도 사랑했다.

하지만 앤시아가 황제의 총애를 받은 이후, 그 감정이 조금씩 변해갔다.

어쩌면 자신의 진짜 보석은 ‘앤시아’가 아니었을까?

아직 열두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앤시아의 명성은 제국 전체에 자자할 정도였다. 다이애나도 예뻤지만, 앤시아에 견줄 수는 없었다.

그는 분명 고귀한 핏줄을 지닌 다이애나가 자신과 닮았다고 생각했지만, 보면 볼수록 자신을 빼닮은 건 앤시아라는 생각이 들었다.

외모뿐만이 아니다.

앤시아는 열두 살밖에 안 됐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힘 있고 온화한 카리스마로 사교계의 중심이 되었고, 인간이 먹는 작물과 가축의 사료를 번갈아 가며 농사를 짓는 ‘사포제’ 농법을 제안하기도 했다.

황제는 그녀의 의견을 참고하여 남부에서 이 방식을 시험했고, 그 결과 수확량이 증가하고 가축도 많아지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보았다.

사포제는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올해 제국은 유례없는 풍년을 맞았다. 제국민들 사이에서 황태자비의 인기는 하늘로 치솟았다.

귀족들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저주받은 황태자의 반려라며 꺼림칙하게 여기고, 그런 여자를 싸고도는 황제를 이해할 수 없다며 수군거리던 이들은 점차 사라지고, 이제는 모두들 앤시아를 진정한 제국의 축복이라고 칭송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처음 귀족들은 황태자비를 아끼는 황제의 속내를 의심하고, 혹시 앤시아를 빌미로 황태자에게 힘을 실어주려는 건 아닌지 우려했다.

하지만 앤시아가 다방면에서 두각을 드러내자, 그런 의심은 자연스레 사라졌다.

텐스테온은 신분이나 배경보다는 능력을 중시하는 군주였다. 앤시아같이 뛰어난 인재를 아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앤시아의 입지가 단단해질수록 그녀의 아버지인 길버트의 인기도 치솟았다. 귀족이나 상인 할 것 없이 모두 그에게 잘 보이려고 안달이었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했다.

사람들은 앤시아와 길버트의 사이가 나쁘다는 사실을 금방 눈치챘다. 텐스테온 황제도 그를 사돈으로서 예우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교계에서 길버트의 위상은 단기간에 추락했다.

길버트는 부랴부랴 앤시아에게 선물을 보내고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앤시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길버트는 이를 악물었다. 감히 자신을 무시한 앤시아와 귀족들에게 복수하리라 다짐했다.

다이애나가 카실 공작의 장남과 결혼을 해서 진짜 황후가 된다면, 이 모든 치욕을 단번에 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다이애나를 황태자궁으로 보냈다. 앤시아는 배은망덕하게도 자신을 낳아준 친아버지를 외면했지만, 그래도 한 가닥 양심은 남았는지 동생을 자주 찾았다.

길버트는 카실 공작이 은밀히 시킨 일들을 다이애나에게 명령했다.

“다이애나, 황태자궁에 가서 영상석을 숨겨 놓고 오거라.”

“앤시아한테 베스라는 시녀를 뽑아달라고 부탁해.”

“오늘 황태자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보거라.”

다이애나가 이 일을 잘 수행하기만 한다면, 카실 공작에게 눈도장을 단단히 찍을 수 있었다. 장기적으로 보면 괴물 황태자의 반려 자리보다 백배는 나았다.

하지만 상황은 길버트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영상석을 왜 다시 가져온 거냐?”

“망가져서요.”

“베스란 계집이 어째서 시녀로 뽑히지 않았지?”

“글쎄요.”

“혹시 황태자궁에 수상한 움직임은 없느냐?”

“없어요.”

“황태자의 저주는 얼마나 진행됐느냐?”

“잘 모르겠는데요.”

다이애나는 길버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황태자궁의 소식을 캐물어도 건성으로 대답하며 질문을 회피했다.

결과적으로 길버트는 카실 공작의 은밀한 명령을 단 한 번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벨라시안 백작은 자식 교육에 신경 쓰는 게 좋겠군. 이리 아비를 무시해서야 쓰나?”

카실 공작은 길버트를 짐짓 비난했다. 급기야는 오늘 장남 프랭크와 웨스틴 후작 가문 여식과의 혼인을 발표했다. 다이애나를 프랭크와 결혼시키겠다는 약속을 저버린 것이다.

길버트는 분노하여 공작저로 향했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한 채 문전박대당하고 말았다.

‘다이애나, 이 멍청한 년! 아둔한 년! 한심한 년!’

길버트의 분노는 다이애나에게 향했다. 그는 백작저로 돌아오는 내내 다이애나를 향해 욕을 퍼부었다.

다이애나가 자신의 말을 들었다면 모든 게 순조로웠을 거다. 그런데 그년이 멍청하고 게을러서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은 바람에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앤시아처럼 예쁘고 똑똑한 것도 아닌 주제에! 황제의 눈에 들지도 못하고, 사교계의 중심에 설만큼 능력도 없으면, 아비의 말이라도 제대로 들었어야지!

프랭크와 혼인도 파투 나고, 황후의 자리도 영영 물 건너가 버렸다. 황제의 장인이 돼서 자신을 무시한 귀족들에게 복수하겠다는 길버트의 꿈도 사라졌다.

이게 다 다이애나 그 멍청한 년 때문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앤시아를 아꼈을 거다. 다이애나 이 아둔한 것 때문에 앤시아에게 소홀히 했고, 그 때문에 아버지로서 존경받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다이애나가 모든 일의 원흉이었다.

길버트는 다이애나를 아꼈던 시간들조차 너무 후회스러웠다.

“목검? 네가 왜 이딴 걸 가지고 있는 게냐!”

분노에 차서 다이애나의 방으로 쳐들어온 길버트는 그녀가 숨긴 목검을 발견하자마자 소리를 버럭 질렀다. 거친 고함에 다이애나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게….”

그녀가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사이, 길버트는 다이애나가 든 목검을 억지로 빼앗았다.

“돌려주세요!”

언니에게 선물 받은 소중한 목검이었다. 그녀는 다급히 손을 뻗었다. 다이애나의 손이 길버트에게 닿는 순간, 그의 표정이 무섭게 돌변했다.

길버트는 다이애나의 손을 움켜잡았다. 그녀의 손가락과 손바닥에 딱딱한 굳은살이 잡혀 있었다.

“손이 왜 이래! 계집애 손이 이게 뭐야!!”

“아, 아파요!”

“지금 아픈 게 문제야! 이걸 누가 귀족 영애의 손이라고 생각하겠어! 황태자궁에 가서 아비가 시키는 건 안 하고, 무슨 쓸데없는 짓을 하고 돌아다녔길래 손이 이 지경이 돼! 천한 하녀처럼 거칠어져서, 손 관리도 제대로 못 하는 계집을 어느 누가 데려가겠어! 제 몸 하나 관리 못 해서 아비 얼굴에 먹칠을 해!”

그는 길길이 날뛰었다. 다이애나의 굳은살을 안쓰러워하거나 부모로서 걱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길버트는 다이애나가 결혼 시장에서가 떨어질까 봐 화를 냈다. 더 정확히는 그녀 때문에 자신의 체면이 떨어질까 봐 분노했다.

길버트가 이성을 잃고 화를 낼수록 다이애나의 마음은 차갑게 식어갔다.

그녀는 그래도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현숙한 모습을 강요하긴 했지만, 세대와 가치관이 다를 뿐 자신을 아끼는 마음에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길버트에게 있어 자신은 그저 번듯한 장신구에 불과했다. 출신이 좋아서 어디서든 자랑할 수 있고, 또 적당한 시기가 되면 비싼 값으로 팔아치울 수 있는 고급 액세서리였을 뿐이다.

그녀는 길버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버지, 저, 결혼 안 할 거예요.”

“뭐?”

“저는 기사가 될 거예요. 내년에 기사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싶어요.”

다이애나가 자신의 꿈을 밝히자, 길버트의 표정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기사? 계집이 무슨 기사야? 지금 되바라진 하급 귀족이나 평민 나부랭이가 하는 일을 하겠다는 거냐?”

“그건 편견이에요. 제3 기사단장인 셰넌 백작님도 여자시잖아요.”

“노처녀지.”

“제가 존경하는 분이세요.”

“존경? 그럼 그 되바라진 여자처럼 되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네. 황실 기사가 돼서, 언니를 지켜줄 거예요! 그러니까 아버지도 더 이상 저한테 이상한 일 시키지 마세요!”

그녀가 참아왔던 말을 내뱉는 순간 고개가 거칠게 꺾였다. 길버트가 다이애나의 뺨을 때린 것이다.

“아버지….”

요즘 들어 부쩍 쌀쌀맞은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폭력을 휘두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다이애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길버트는 딸의 반응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은 채 분을 이기지 못하고 씨근덕거렸다.

“다시 한번만 그딴 소리를 하면 혼쭐이 날 줄 알아!”

***

“아!”

다이애나는 침대에서 내려오자마자 풀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기사가 되고 싶다는 고집을 꺾지 않았고, 이에 분노한 길버트는 회초리가 부러질 정도로 다이애나의 종아리를 때렸다.

다행히 얼굴은 멀쩡했지만, 다리가 아파서 걷기 힘들 정도였다.

하녀는 그녀의 다리에 연고를 발라준 뒤, 길버트가 찾는다는 말을 전했다.

“약은 발랐느냐?”

길버트는 다이애나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

“결혼도 안 한 계집애한테 상처가 있으면 안 되지.”

“…….”

그래도 걱정을 해줬다고 생각했지만, 뒤이어 이어지는 아버지의 말에 다이애나의 마음은 차갑게 얼어붙었다.

“반성은 했느냐?”

“아니요. 저는 기사가 될 거예요.”

어차피 올해가 가기 전에 말할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험악한 분위기에서 이야기하려던 건 아니었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고집을 꺾을 생각은 없었다.

길버트의 손이 움찔거렸다. 또다시 손찌검을 할 거라고 생각한 다이애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곧 ‘탁’ 하고 거칠게 물건을 내려놓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눈을 다시 떴다. 길버트의 책상 위에는 영상석이 놓여 있었다.

“이걸 황태자궁에 설치하거라.”

“아버지! 저는 그런 일을 하기 싫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철없는 소리 하지 마! 이게 다 너랑 가문을 위한 일이다!”

카실 공작의 장남과 웨스틴 후작 영애가 약혼했지만, 아직 결혼을 한 건 아니었다. 게다가 카실 공작에게는 아들이 둘이나 더 있었다.

물론 노예의 피를 받은 리차드야 고려할 가치도 없지만, 막내 네온과 결혼한다면 공작 부인은 될 수 있을 거다. 황후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나쁘지는 않았다.

아직 기회는 있다. 다이애나가 공을 세운다면 카실 공작의 화도 풀릴 거다.

“싫어요! 저는 그런 일은 하고 싶지 않아요!”

“그렇다면 콘웰 백작과 결혼하거라.”

“콘웰 백작이요?”

다이애나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콘웰 백작은 제국에서 손꼽히는 부자였지만 여성 편력으로 유명했다. 게다가 나이도 많았다.

“아비 말을 듣지 않는 자식은 필요 없다. 영상석을 설치하지 못하겠다면, 콘웰 백작과 결혼해서 가문의 보탬이 되거라!”

“아버지, 저는 기사가…!”

“오늘도 영상석을 설치하지 않는다면, 당장 내일 콘웰 백작에게 보낼 테니 그리 알 거라!”

길버트는 그녀의 말을 끊으며 싸늘하게 뱉었다.

***

다이애나는 황태자궁으로 가는 마차 안에서 아버지가 억지로 쥐여준 영상석을 바라보았다.

‘언니한테 솔직하게 털어놓을까? 아니야. 그럴 수는 없어.’

다이애나는 어제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맞고 큰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앤시아에게는 그런 일들이 일상이었다. 언니는 감히 자신의 꿈을 가질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저주받은 황태자와 억지로 결혼까지 했다.

다행히 두 사람이 잘 지내고 있긴 하지만, 그것은 결과일 뿐 분명 원치 않았던 결혼이었다.

‘이 정도 가지고 힘들다고, 도와달라고 할 수는 없어. 나는 벌을 받는 거야. 언니가 힘들 때 도와주지 못했으니까, 그래서 지금 벌을 받는 거야. 전부 내 잘못이야.’

마차가 황태자궁에 다다랐다. 다이애나는 영상석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어쩌면 오늘이 언니를 만나는 마지막 날이 될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정말로 자신을 콘웰 백작과 결혼시키려 한다면, 그녀는 집을 떠날 생각이었다.

***

밤새 첫눈이 내렸다. 아직 11월 중순인데 참 빠르기도 하다.

결국 블레이크의 저주를 풀 방법을 찾지 못하고 한 해가 지나가는 건가…. 복잡한 마음으로 쌓여 있는 눈을 바라보고 있는데, 옆에서 울적한 얼굴로 앉아 있는 다이애나의 모습이 시선에 걸렸다.

“다이애나, 무슨 일 있어?”

“아니, 아무 일도 없어!”

다이애나가 거세가 고개를 저었다. 너무 강하게 부정하니 오히려 더 수상했다. 그러고 보니 볼이 조금 부은 것도 같았다.

“다이애나, 너….”

내가 그녀의 볼을 만지려고 하는 순간, 다이애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눈싸움하고 싶다! 황태자 전하! 우리 눈싸움해요!”

“어? 나는 싸움은 조금….”

블레이크가 고개를 저었지만, 말을 마치기도 전에 다이애나가 던진 눈덩이가 그의 가슴을 때렸다.

“처. 제!”

블레이크가 발끈했지만, 이번에는 그의 입으로 눈이 날아들었다.

“하하! 얼굴이 눈사람처럼 됐어요!”

다이애나가 까르르 웃으며 도망쳤다. 그러자 블레이크도 발끈해서 쫓아갔다.

결국 두 사람은 치열하게 눈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이 추운 날 맨손으로 눈을 만지다니, 나도 저럴 때가 있었는데….

전생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며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는데, 멜리사가 부드럽게 권했다.

“비 전하께서도 함께하시지요.”

“나는 됐어.”

“품위를 지키시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늘은 첫눈이니까요. 어깨 위에 올린 짐을 잠시 내려놓으시죠.”

내가 동심을 애써 억누르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멜리사가 안타까워했다. 그런 거 아닌데….

“나는 눈 별로 안 좋아해.”

“그러세요?”

“응. 치우기 힘들잖아. 그리고 손 시려.”

“푸흡.”

멜리사가 갑자기 입을 막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왜?”

“비 전하를 보면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요.”

“무슨 생각?”

“열두 살 소녀가 아니라, 꼭 제 동년배 같아요.”

쿨럭.

물도 안 마셨는데 갑자기 사레가 들렸다. 멜리사는 가끔씩 저렇게 예리할 때가 있다.

“도, 동년배라니. 무, 무슨 그런 심한 말을 해. 와! 눈이다! 온 세상이 하얀 눈이야!”

나는 주섬주섬 뛰어가서 눈싸움에 참전했다. 오랜만에 눈싸움을 하니 생각보다 즐겁고 재미도 있었지만, 그걸 떠나서 손이 엄청 시렸다.

이래서 하지 않으려고 했던 건데….

***

“다이애나, 목욕하자.”

눈싸움 때문에 다들 엉망이었다. 특히 몇 번이나 넘어져서 눈밭을 구른 다이애나는 전신이 흠뻑 젖어 있었다. 나는 그녀를 내 방으로 데려왔다.

“아, 아니야! 집에 가서 하면 돼.”

다이애나가 당황하며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냥 목욕을 하자고 했을 뿐인데 왜 저렇게 놀라는 거지?

“감기 걸려. 눈길 때문에 마차도 미끄러워서 빨리 못 갈 텐데.”

“괜찮아! 나는 튼튼해서 감기 안 걸려! 언니가 걱정이지.”

눈매가 저절로 가늘어졌다. 아무래도 무언가 수상하다.

다이애나의 볼은 살짝 부풀어 있었고, 눈싸움을 하는 도중에도 계속 넘어졌다.

“혹시 다리를 다쳤니?”

“아니!”

분명히 다리가 아픈 것 같은데, 그녀는 단호하게 부정했다.

“솔직히 말해.”

“나,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아!”

“다이애나. 계속 그렇게 거짓말을 하면 언니가 속상해.”

“언니….”

다이애나는 말을 하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러다 이내 펑펑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는 그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모두 털어놨다.

지난 2년 동안 벨라시안 백작은 다이애나에게 황태자궁을 염탐할 것을 강요했으며, 급기야 어제는 회초리질을 했다고 했다.

다이애나의 말을 듣고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길버트 벨라시안은 다이애나를 아꼈다. 비록 앤시아한테는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인간이었지만, 다이애나한테는 지극정성이었다.

다이애나 역시 그런 아버지를 사랑했다.

원작에서 그녀는 언니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아버지를 미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사랑하는 스스로의 마음을 어쩌지 못하여 괴로워했다.

리차드가 벨라시안 백작을 인질로 계략을 펼치자, 아버지를 택하며 블레이크를 떠나기도 했지.

나는 어린 다이애나가 그런 고뇌를 겪는 것을 원치 않았다.

2년 동안 종종 앤시아의 꿈을 꾸며, 그녀가 얼마나 괴로웠는지 알게 됐다. 나는 벨라시안 백작을 용서할 수 없었지만, 이런 마음을 다이애나에게 강요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내가 너무 복잡하게 생각했다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설마 어린 다이애나에게 첩자 짓을 시켰을 줄이야. 쓰레기는 곧장 쓰레기통에 버렸어야 했는데.

“왜 말을 안 했어? 그런 일이 있으면 나한테 말했어야지.”

“그럼 언니가 오지 말라고 할까 봐. 무서워서. 언니가 나를 보기 싫다고 하면 어떡해.”

나는 펑펑 눈물을 쏟는 다이애나를 다독였다.

“내가 너를 왜 안 봐. 네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다이애나는 단 한 번도 벨라시안 백작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황태자궁에 영상석을 설치하거나, 내가 궁인을 뽑을 때 의견을 낸 적도 없었다. 2년 동안 다이애나가 얼마나 압박감을 느꼈을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나, 또 여기 와도 돼?”

“당연하지. 맞은 건 왜 숨겼어?”

“언니는 맨날 아버지한테 혼났잖아. 그런데 내가 겨우 한 번 맞은 걸 어떻게 말해…. 염치도 없이.”

“염치가 없기는! 그런 말이 어디 있어!”

“…언니는 내가 싫지 않아?”

다이애나가 눈물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천진한 말괄량이인 줄 알았는데, 저런 생각을 속으로 품으며 끙끙 앓았던 건가?

나는 다이애나가 좋았다. 내가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어린아이가 귀여운 건 당연했다. 하지만 지금 다이애나는 내가 아닌 진짜 자신의 언니에게 묻고 있었다.

그것을 알기에 나는 원작의 내용을 떠올리며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앤시아 벨라시안은 너를 싫어하지 않아.”

나의 대답에서 위화감을 느꼈는지 앤시아가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이내 눈물을 닦으며 미소 지었다.

“…응. 고마워.”

***

나는 다이애나를 황태자궁에서 재웠다.

그녀는 기사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싶어 했지만, 벨라시안 백작의 반대 때문에 망설였다. 나는 다이애나가 아카데미에 진학하길 바랐다. 하지만 기사 아카데미는 보통 10살에서 12살 사이에 입학하기 때문에 아직 시간이 있었고, 내 생각을 종용하기보다는 다이애나가 결심이 설 때까지 조금 기다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배려가 오히려 독이 되어 버렸다. 나는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버려야 한다는 교훈을 다시 한번 되새겼다.

잠이든 다이애나의 종아리를 바라보았다. 연고와 포션을 발랐지만 아직도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연고를 다시 덧바르려고 하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앤시아.”

블레이크의 목소리였다.

“들어오세요.”

그는 문은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다이애나는 자?”

“네. 이제 막 잠들었어요. 전하, 오늘은 다이애나와 함께 자야 할 것 같아요.”

이 세계에 온 이후 언제나 블레이크와 함께 잠을 청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언니로서 다이애나의 곁을 지켜주고 싶었다.

“응. 그래야지. 나는 신경 쓰지 마.”

블레이크는 나의 손을 꼭 잡았다. 그에게서 단단한 힘이 느껴졌다.

“앤시아의 잘못이 아니야.”

“…….”

그는 나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자책하지 마.”

“…네. 그럴게요.”

작은 소년의 말이 든든한 위로가 되었다. 나는 그의 손을 굳게 맞잡았다.

***

다이애나가 돌아오지 않자, 길버트는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설마 다이애나가 아비를 배신한 건 아니겠지? 자신은 다이애나를 그런 배은망덕한 자식으로 키우지 않았다. 하지만 요즘 들어 자꾸 엇나가는 다이애나를 떠올려 봤을 때 멍청한 실수를 저질렀을 가능성도 있었다.

길버트는 불안감을 참지 못하고 황태자궁으로 달려갔다.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하지만 궁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가로막히고 말았다.

“나는 황태자비의 부친이다.”

길버트는 불쾌함을 내비쳤지만, 수석 시종 한스는 단호했다.

“벨라시안 백작의 출입을 막으시라는 황태자 전하의 엄명이 있었습니다.”

“황태자가?”

앤시아도 아니고 황태자가 나를 막았다고? 여신에게도 버림받은 괴물 주제에?

길버트는 블레이크를 인간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여신이 저주를 내릴 정도로 영혼이 타락한 괴물이다. 차라리 인간보다는 마물에 더 가까울 것이다.

“예를 갖추십시오.”

길버트가 블레이크를 ‘전하’라 칭하지 않는 것도 모자라 짐짓 무시하는 투로 말하자, 한스와 에드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길버트는 개의치 않았다.

작위도 없는 평귀족과 평민이 화를 내든 말든 그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오히려 주제넘게 자신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태도에 화가 치밀었다.

“내 자식을 데리러 왔다. 비켜라.”

벨라시온 백작의 만행을 전해 들은 한스와 에드온은 그의 뻔뻔스러운 태도에 기가 찼다.

“불가합니다.”

“나는 황제 폐하의 사돈이다. 당장 비키거라!”

길버트가 으름장을 놓으며 한스의 어깨를 밀치려 했지만 오히려 에드온에게 가로막혔다.

“더 이상의 무례는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뭐야? 감히 평민 주제에 이 몸에게 손을 대는 것이냐!”

어찌 됐든 그는 황태자비의 친부이자 벨라시안 가문의 가주였다. 에드온이 기사라고는 하나 신분의 차이가 컸다. 그가 잠시 머뭇거리는데, 뒤에서 블레이크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란이지?”

“벨라시안 백작께서 아모리아궁에 출입하시겠다며 고집을 피우고 계십니다.”

“뭐? 고집?”

길버트는 한스의 건방진 단어 선택에 분노했다. 하지만 블레이크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움찔 떨며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백작을 온실로 모셔라.”

“네, 전하.”

***

다양한 꽃과 나무, 채소들이 어우러진 온실 안에 길버트와 블레이크 두 사람만이 남았다.

막상 황태자궁 안으로 들어오긴 했지만, 길버트는 이 자리를 당장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황태자의 피처럼 붉은 눈동자가 길버트를 직시했다.

사위라고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블레이크를 만난 건, 마지못해 참석한 결혼식 때뿐이었다.

그때는 그저 음침한 꼬맹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2년 만에 만난 황태자는 무언가가 달라져 있었다.

작은 소년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서늘한 기운이 길버트의 뼛속을 파고들며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인간도 아닌 괴물이라며 무시했던 감정은 어느 순간 사라지고, 두려움으로 전신이 떨렸다.

“제가 선약이 있어서…. 다이애나만 데리고 돌아가겠습니다.”

“다이애나는 자고 있어.”

“그럼 내일 아침에….”

“올 것 없어. 다이애나는 앞으로 황태자궁에서 지낼 테니까.”

황태자는 싸늘하게 그의 말허리를 잘랐다. 길버트는 자신의 예감이 맞았음을 확신했다.

다이애나 이 배은망덕한 것이 아버지를 배신하고, 앤시아에게 고자질을 한 것이다.

“전하, 혹시 제 여식에게서 헛말을 들으신 겁니까?”

“헛말이라? 나에겐 그렇게 들리지 않았는데.”

정말로 그동안의 일을 전부 말했구나. 혹시 몰라서 카실 공작과의 밀약까지는 다이애나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그저 황태자궁의 정보를 빼내면 너와 가문에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달랬을 뿐이다. 하지만 그건 어린아이가 혹시라도 말실수를 할까 봐 조심했던 거였다.

다이애나가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 비수를 꽂을지는 몰랐다.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다이애나에게 투자한 반의반만 앤시아에게 베풀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거다.

황태자와 결혼하기 전까지, 앤시아는 주제 파악을 제법 잘하는 아이였다. 그때 자신이 조금만 애정을 주었다면 지금도 그 은혜를 깊게 새기고 아버지와 가문에 충성을 바쳤을 거다.

다이애나도 이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녀는 당연히 아버지와 가문에 죄책감을 느끼고, 앤시아보다 가치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마땅했다.

그런데 은혜를 갚고 좋은 곳에 시집가기 위해 노력하기는커녕, 가볍게 입을 놀려 아비를 위험에 빠트리다니!

길버트는 치미는 분노를 누르며 이를 악물었다.

“그 애가 뭐라 하든 신경 쓰지 마십시오.”

“백작이 다이애나를 무척 아끼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하하. 그럴 리가요. 어디서 헛소문을 들으셨나 봅니다. 제가 그 애를 아꼈다면, 폐하께서 혼담을 보내셨을 때, 다이애나를 보내서 황태자비로 삼았겠죠.”

얼마 살지 못할 괴물 황태자의 반려 자리 따위는 아무도 원하지 않았다. 길버트가 재물에 눈이 멀어 천덕꾸러기였던 앤시아를 보냈다는 사실을 제국에서 모르는 자가 없건만 그는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게다가 성격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앤시아가 요즘 사교계의 주목을 받는다고 어찌나 질투가 심하던지.”

길버트는 2년 동안 마음속으로 수많은 저울질을 했다.

앤시아와 다이애나 중 누가 더 가치 있을까? 그리고 다이애나의 잘못으로 카실 가문과의 혼인이 물 건너간 데다가 기사가 되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것도 모자라 아비를 배신한 순간, 저울은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었다.

그는 이번 기회에 다이애나를 버리고 앤시아와의 관계를 개선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어제는 자기가 황태자비가 되고 싶으니, 언니를 내쫓아 달라고 떼를 쓰더군요. 아무리 어린애라고 해도 이번에는 도를 지나치기에 단단히 혼쭐을 냈습니다. 그래도 반성은 안 하고 씨근거리더니, 전하께 거짓말을 한 모양입니다.”

“그런가?”

자신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는 황태자를 보며 길버트는 속으로 미소 지었다. 저주받은 괴물이라서 잠시 겁먹었지만 결국은 어린애다. 조금만 구슬리면 쉽게 넘어갈 것이다.

“네. 거짓말이 너무 심해서 걱정이 많습니다. 제가 앤시아와 사이가 멀어진 것도 전부 다이애나 때문이죠. 어찌나 이간질을 잘하는지. 여하튼 전하께서는 그 애의 말은 귀담아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황태자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 길버트는 금세 오만하게 고개를 쳐들며 명령조로 말했다. 그러자 블레이크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부인도 자주 혼냈나?”

길버트는 앤시아를 다이애나보다 백배 천배는 귀하게 키웠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앤시아를 구박했다는 사실을 제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앤시아도 거짓말쟁이로 몰아버릴까? 아니, 그랬다가는 오히려 역효과가 날 거다. 게다가 앤시아는 황태자는 물론 황제의 신뢰까지 받고 있으니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장녀다 보니 엄하게 교육했죠. 자식을 아끼는 마음에서 그런 건데, 사정을 모르는 자들은 제가 그 아이를 홀대한다는 둥 헛소리를 늘어놓더군요. 앤시아도 아직 어려서 그런지 주변 사람들의 말에 휩쓸려 아비를 오해하는 듯합니다. 하지만 그 아이도 크면 부모의 마음을 알게 되겠죠.”

“오해라….”

“네. 오해입니다. 이번 기회에 전하께서 부녀 사이를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죠.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황태자 전하께서는 남은 날이 얼마 안 되시지 않습니까?”

“…….”

귀족들은 틈만 나면 황태자가 앞으로 얼마나 더 살 것인지, 그가 죽으면 차기 황태자는 누가 될지를 토론하곤 했다.

너무나도 일상적인 화제였기 때문에 길버트는 블레이크의 남은 시간을 가볍게 화두로 올렸다.

블레이크를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면, 아무리 길버트라도 어린 소년에게 이런 말을 하진 않았을 거다.

하지만 그는 황태자를 인간 이하의 괴물이라 여겼기 때문에 자신이 실언했다는 자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솔직한 발언이라 여겼을 뿐이다.

“전하께서 떠나시면 앤시아 곁에 누가 남겠습니까? 폐하께서 아끼신다고 하나, 가족만 하겠습니까? 앤시아가 지금과 같은 호사를 계속 누리려면 결국은 벨라시안 가문이 힘을 얻어야 합니다. 지금 보석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죠. 전하께서도 앤시아를 위한다면, 그 아이가 가문에 보탬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주도록 하세요.”

길버트는 그동안 하고 싶었던 말을 쉴 새 없이 토해냈다. 앤시아에게 직접 말하려고 하였으나 편지조차 거부하여 전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제가 잘되고 가문이 번영해야 그 아이도 좋지 않습니까? 게다가 친부를 이리 계속 박대한다면, 은혜도 모르는 아이라 욕을 먹을 겁니다. 사교계의 위치도 낮아지겠죠. 어차피 벨라시안으로 돌아올 애가 아닙….”

“역겹군.”

블레이크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퍼졌다. 쉴 새 없이 입을 나불거리던 길버트는 흠칫 놀랐다.

‘저주를 받았어도 사자의 새끼는 사자라는 건가?’

텐스테온 황제가 지닌 지배자의 카리스마가 이 소년에게서도 흘러나왔다. 카실 공작 일가에게서는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압도적인 기운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저주받은 존재일 뿐이다. 아무리 오래 버틴들 성년을 넘기지 못할 거다.

블레이크의 한쪽 손을 뒤덮은 검은 문장을 보며 길버트는 눈을 찡그렸다. 가면과 옷의 안쪽도 저런 흉측한 문장으로 뒤덮여 있겠지.

“전하,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저주를 받으신 건 현실 아닙니까? 저주의 계승자는 성년을 넘기지 못합니다. 이제 열 살이나 되셨으니 현실은 인정하시고, 떠나신 뒤의 미래를 생각하셔야죠. 언제까지 어린애처럼 진실에 눈을 돌리실 겁니까?”

“나는 죽지 않아.”

“뭐라고요?”

길버트의 눈이 커졌다. 설마 저주를 푸는 방법이라도 찾은 건가?

요즘 제국민들 사이에서 황태자의 저주가 풀릴 거라는 소문이 돌기는 했다.

하지만 천한 평민들이 지어낸 헛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사실이었던 건가? 만약 그렇다면 앤시아가 진짜 황후가 된다는 말인가?

“앤시아와 죽지 않겠다고 약속했어.”

길버트는 실소했다. 혹시나 했지만 어린아이의 철없는 소리에 불과했다.

“현실을 생각하셔야죠.”

“만약 내가 죽더라도 앤시아가 그 집에 돌아갈 일은 없어.”

“하하. 돌아오지 않으면요?”

괴물 주제에 황태자라고 건방 떨기는.

길버트가 뒷말을 꾹 삼키는데, 블레이크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내가 지금 괴물 주제에 건방을 떤다고 생각해?”

“…네?”

길버트의 목덜미가 서늘하게 식어 내렸다. 설마 내 생각을 읽은 건가?

“벨라시안 백작은 저주에 관심이 많나 봐.”

“그, 그런 것이 아니오라….”

길버트가 다급히 손을 내젓는데, 블레이크가 그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럼 이런 말도 들었겠네. 여신의 저주는 전염병과 같아서 다른 이에게 옮길 수 있다는 소문 말이야.”

“…하, 한심한 헛소문이지요.”

그는 식을 땀을 흘리며 손을 빼기 위해 힘을 주었다. 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단순한 힘의 차이가 아니었다. 무언가에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손이 단단하게 붙어서 떨어지질 않았다.

“헛소문이 아닌데.”

블레이크의 입꼬리가 서늘하게 올라갔다. 그 순간 블레이크의 손에서 흘러나온 빛의 줄기가 순식간에 길버트를 덮쳤다.

[무서워! 뜨거워! 아파! 아파!!]

빛과 함께 소름 끼치는 비명이 길버트를 덮쳤다.

빛에서 나오는 감정에 동화되며 길버트는 전신이 타들어 갈 것 같은 고통에 몸부림쳤다.

그는 입을 벌렸다. 하지만 심각한 고통 앞에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블레이크가 집어 던지듯 그의 손을 놓았다. 길버트는 그대로 넘어져서 바닥을 뒹굴었다. 그는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새까만 저주의 문장이 길버트의 손을 뒤덮고 있었다.

블레이크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는 길버트를 싸늘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앤시아한테서 사라져. 평생 숨소리도 내지 말고, 머리카락조차 비치지 말고 꺼져.”

***

아침 일찍 일어나서 다이애나의 다리에 연고를 발라주었다. 낯선 잠자리라 불편했을 텐데, 다행히 다이애나는 깊게 잠이 들었다.

오히려 잠을 뒤척인 건 내 쪽이었다.

앤시아로 빙의한 이후 처음 며칠을 제외하고는 하루도 빠짐없이 블레이크와 함께 잠을 청했다. 고작 하룻밤 떨어졌을 뿐이지만 그가 걱정되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블레이크의 방으로 들어갔다.

“앤시아.”

침대 위에 앉아 있던 블레이크가 나를 보며 말갛게 웃었다.

“벌써 일어나셨어요?”

“응.”

나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가까이서 보니 안색이 창백했다.

“왜 이렇게 피곤해 보여요? 설마 안 잔 거예요?”

“아니.”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안 잔 거 맞죠?”

그는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잠을 자고 일어난 표정이 아니었다. 블레이크는 더 부정하지 않고 배시시 입꼬리를 올렸다.

“그냥 잠이 잘 안 와서.”

“전하….”

“자, 이거 받아. 온실에 갔는데 장미꽃이 너무 예쁘더라.”

블레이크가 붉은 장미 한 송이를 나에게 건넸다. 온실에 많은 장미가 있었지만, 그가 직접 꺾어 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의 첫 선물이 기쁘면서도 왠지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고마워요. 예뻐요.”

장미꽃 향을 맡는데, 블레이크의 몸이 옆으로 풀썩 기울었다.

“전하!”

나는 깜짝 놀라서 그에게 다가갔다.

“괜찮아…. 조금 어지러울 뿐이야.”

“궁의를 부를게요!”

몸을 돌리는데 그가 나의 손을 잡았다.

“필요 없어. 그냥 내 옆에 있어 줘.”

“하지만…!”

“가지 마.”

블레이크는 나의 품에 쓰러지듯 기대었다. 그리고 이내 잠이 들었다.

블레이크는 긴 잠에 빠져서 깨지 않았다. 나도 그와 함께 잠이 들었다. 그의 손에서 나온 하얀 빛이 나를 감싸며 환한 잠의 세계로 인도했다.

우리는 온종일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깼을 때, 어딘지 스산한 기분이 들었다. 심한 악몽을 꾼 것 같았다. 하지만 꿈의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앤시아.”

주변을 둘러쌌던 빛이 사라지며 블레이크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손을 뻗어서 옆에 있는 작은 소년의 볼을 어루만졌다.

그러자 그의 새하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열은 없었다. 혈색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저주의 문장도 그대로였다. 더 번지지도 그렇다고 사라지지도 않았다.

“잘 잤어요?”

“응. 잘 잤어.”

“열도 없는데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요?”

“그야 앤시아가 나를 막 만지니까….”

“…….”

이분이 또 사람을 이상하게 몰아가시네. 여기가 19금 소설 속 세계임을 상기하며 손을 떼려고 하는데, 그가 내 품을 파고들었다.

“부인….”

“만져서 싫은 거 아니었어요?”

“싫다고 한 적은 없는데.”

그가 배시시 웃음을 흘렸다. 우리 꼬마 신랑이 약간 요망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기분 탓이겠지?

***

황제는 길버트 벨라시안을 혼돈의 계곡 근처의 서쪽의 작은 섬으로 보냈다. 명목상으로는 섬을 지키는 임무를 맡겼지만, 실질적으로는 유배나 다름없었다.

다만 벨라시안 백작이 공식적으로 처벌을 받으면, 나나 다이애나가 피해를 입을 수도 있기 때문에 벌을 내린다는 표현을 쓰지 않았을 뿐이다.

벨라시안 백작은 별다른 반발 없이 서쪽으로 떠났다. 소문에는 그가 미쳤다고 한다.

다시 제도로 돌아오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건지 진짜로 정신이 나간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만약 정말이라고 해도 동정심은 생기지 않았다.

자업자득이다.

다이애나도 벨라시안 백작의 소식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날 이후 다이애나는 황태자궁에 머물며 기사 아카데미 입학시험을 준비했다.

보통 귀족들은 시험을 치르지 않고 추천서를 받아서 입학했다. 하지만 다이애나는 정정당당하게 시험을 치르고 싶다고 했고, 나도 그녀의 뜻을 존중했다.

입학시험은 기본적인 체력 테스트와 검술, 거기에 필기시험까지 치러야 했기 때문에 다이애나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기사 아카데미 선배인 에드온도 일타강사처럼 다이애나를 전담 마크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인데도 그녀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다이애나, 좀 쉬엄쉬엄해.”

나는 간식과 로즈메리차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와, 그렇지 않아도 출출하던 참이었는데. 언니가 주는 차를 마시면서 공부를 할 수 있다니, 나는 정말 행운아야.”

그녀는 호호 불며 로즈메리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시험이 코앞이잖아. 이 정도는 기본이지.”

다이애나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원작의 다이애나와 다른 사람 같았다.

‘야수와 영애님’의 다이애나는 아름답지만 우울하고 우유부단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블레이크와 리차드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끌려다니기만 했지. 마지막에 리차드를 선택한 것도 자신의 의지라기보다는 덫에 걸린 느낌이었다.

하지만 지금 다이애나는 당당하고 빛이 났다.

“그래도 너무 부담 갖지는 마. 올해 안 돼도 내년이 있잖아.”

다이애나는 10살이니 혹시 떨어져도 한두 번은 더 기회가 있었다.

“안 돼! 나보다 나이 어린 애들한테 선배라고 부르기 싫어.”

아니, 그런 중요한 이유가…!

“이번에 무조건 합격해야 돼!”

다이애나는 상상만으로도 몸서리쳐진다는 듯 책으로 눈을 돌렸다.

***

다이애나는 전체 9등, 여자들 중에서는 2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아카데미 입학시험에 합격했다. 2년 동안 검술 연습을 꾸준히 한 보람이 있었다.

“축하해. 다이애나.”

하지만 다이애나는 별로 기뻐 보이지 않았다.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은 걸까?

“다이애나, 9등이면 엄청 잘한 거야.”

“응. 생각보다 잘 나와서 놀랐어.”

“그런데 왜 이렇게 표정이 어두워?”

“아카데미에 들어가면 언니랑 떨어져야 하잖아.”

다이애나가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싱긋 웃으며 그녀의 볼을 가볍게 꼬집었다.

“입학식은 내년 2월인걸. 그때까지 함께 있으면 되지.”

“그래도….”

“그럼 아카데미 가지 말고 언니랑 함께 살까?”

“…그건 안 돼. 나는 기사가 되어야 해. 그러니까 6년만 기다려줘.”

6년…. 다이애나는 내년에 입학하여 17살이 되는 해에 졸업을 할 거다. 블레이크도 17살이 되겠지.

그때쯤이면 나는 블레이크의 저주를 풀 수 있을까? 아니면 모든 걸 포기하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까?

“언니…?”

내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자, 다이애나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일렁였다.

“응. 그래야지.”

저주가 풀린 블레이크와 함께 너를 기다릴 수 있도록 노력할게.

나는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약속을 할 수는 없었다.

“입학 준비는….”

대화 주제를 바꾸려고 하는데, 갑자기 다이애나가 나의 손을 덥석 잡더니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약속이야.”

“다이애나.”

당황해서 손을 빼려고 했지만, 그녀는 오히려 새끼손가락에 힘을 주며 싱긋 웃었다.

“약속한 거다.”

억지로 손가락을 걸어놓고는 약속이라니,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었다. 하지만 서로 얽혀 있는 새끼손가락을 보니 왠지 웃음이 나왔다.

“그래. 약속할게.”

나는 결국 불확실한 약속을 하고 말았다.

***

새해가 밝았다. 원작에서 텐스테온이 리차드의 계략에 빠져서 목숨을 잃는 해이기도 했다.

해가 넘어가기 전에 블레이크의 저주를 풀 방법을 찾고 싶었는데, 결국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한 채 한 해가 지나고 말았다.

오늘은 신년 무도회가 있었다. 나는 언제나처럼 텐스테온과 함께 입장했다.

나는 황실에서 가장 높은 여성으로서 귀족과 사절단에게 차례차례 신년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본격적인 댄스가 시작되자 자연스레 테라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언니!”

미리 테라스를 맡아 둔 다이애나가 폴짝폴짝 뛰며 손을 흔들었다. 오늘은 참석자가 많은 만큼 테라스 경쟁도 치열했다. 그런데 가장 명당자리를 차지하다니. 장하다, 내 동생.

다이애나 쪽으로 걸어가는데, 리차드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올해 17살이 되는 리차드는 소년의 티를 벗고 완전한 남자로 성장했다. 내가 그를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미남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오늘도 아름다우시군요.”

그는 당당하게 인사를 건넸다.

참 뻔뻔하기도 하다. 벨라시안 백작은 다이애나에게 황태자궁을 염탐하도록 시켰고, 카실 공작의 장남이 결혼 발표를 한 날 느닷없이 폭발하여 폭력을 휘둘렀다.

그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배후에 카실 공작이 버티고 있음이 자명했다.

아마 장남 프랭크와 다이애나의 혼인을 미끼 삼아 벨라시안 백작을 조종했겠지. 그리고 그런 계략을 꾸민 사람은 바로 리차드일 거다.

‘야수와 영애님’에서도 자신과 형제들의 혼인을 빌미로 계략을 꾸며대곤 했었으니까.

그런 짓을 하고 벨라시안 백작은 유배를 떠난 이 마당에 어쩜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인사를 건네는 걸까? 게다가 오늘도 ‘비 전하’라고 부르지 않는군.

리차드가 나에게 진심으로 관심이 있는 건 아닐 거다. 그저 황제가 아끼니 이용 가치가 있는 인물이라고 판단한 거겠지.

못 본 척 무시하고 싶었지만, 황태자비로서 최소한의 예법은 갖춰야 했다.

“감사합니다. 카실 영식.”

“오늘도 춤을 추지 않으십니까?”

“네.”

“경험을 쌓지 않으면 실력이 늘지 않을 텐데요.”

원작의 주인공님께서는 끈기가 넘치셨고, 3년 내내 거절당하면서도 나에게 춤을 권했다.

“쓸데없는 걱정이군요.”

“우리 언니 춤 잘 추거든요!”

다이애나가 달려와서 나의 편을 들었다. 리차드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나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혼자 연습하신 겁니까? 귀여우신 면이 있으시네요.”

“그쪽한테 귀여우려고 연습한 거 아니에요!”

다이애나가 다시 끼어들었다. 그러자 그녀를 없는 사람 취급하던 리차드가 미간을 찌푸렸다.

“벨라시안 영애, 아무리 어리다지만 무례….”

“언니, 가자.”

다이애나가 리차드의 말을 못 들은 척 고개를 휙 돌리며 내 팔짱을 꼈다. 아무래도 두 사람은 서로를 무시하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응. 가자.”

나는 다이애나와 함께 테라스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테라스의 커튼을 닫자마자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메리제인 구두를 벗어 던졌다.

“아우, 다리 아파. 이제 이런 구두는 못 신겠어.”

다이애나가 인생 2회차 같은 소리를 하며 발바닥을 주먹으로 팡팡 두드렸다. 가녀렸던 여주인공 다이애나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괄량이 소녀만 남았다. 하지만 나는 이 모습이 더 보기 좋았다.

게다가 원작과 달라진 건 이뿐만이 아니었다.

“다이애나, 리차드 카실 영식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싫어. 짜증 나. 재수 없….”

다이애나가 욕을 하려다가 내 눈치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그녀는 기사 아카데미 오리엔테이션에 다녀온 직후부터 말투가 다소 거칠어졌다.

“아무튼 싫어. 정말 싫어.”

다이애나는 리차드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난다는 듯 몸서리를 쳤다. 정말로 리차드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그 역시 다이애나를 소 닭 보듯 무시하고 있었고.

“다이애나, 너는 ‘칼의 비밀’에서 누가 좋아?”

‘칼의 비밀’은 몰락한 귀족 영애와 두 남자 간의 삼각관계를 그린 유명 오페라였다.

특히 야심이 강한 계략집착남인 마탑주와 여주인공의 생각을 존중하는 다정하고 따뜻한 백작, 두 남자 주인공의 상반된 캐릭터가 인상 깊었다.

이 오페라는 자신이 여주인공이라면 누구를 택할 건지에 대한 논쟁이 몇백 년째 이루어지고 있는 대작이었다.

“당연히 백작이지. 마탑주 같은 남자는 도대체 왜 좋아하는 거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계략집착남이라면 진저리를 치는 걸 보니, 아무래도 다이애나의 취향은 원작에서 180도 달라진 모양이다.

리차드는 다이애나를 가지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쓰레기였다.

혹시라도 그녀가 원작대로 리차드에게 빠지며 자기 팔자를 자기가 꼬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한시름 놓았다.

***

신년 무도회는 자정이 넘어서까지 계속 이어졌다. 다이애나를 먼저 황태자궁으로 돌아갔다. 텐스테온은 나도 함께 가라고 하였지만, 나는 끝까지 남아서 자리를 지켰다.

“할 말이 있느냐?”

“아버님이랑 와인 한잔하고 싶어서요.”

“실없기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텐스테온은 나를 필리온궁의 최상층으로 데려가주었다.

“와, 황궁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네요.”

“블레이크가 이 방을 무척 좋아했지. 숨바꼭질하면 꼭 이 방에 숨고는 했다.”

텐스테온은 와인잔을 느리게 흔들었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레드와인이 아름다운 선을 그렸다. 나의 잔에 들어 있는 포도 주스와는 전혀 다른 색이었다.

“새해 선물로 아모리아궁에 와주시면 안 돼요? 전하께서 무척 기뻐하실 텐데.”

“자칫 잘못하면 그 아이에게 더 큰 상처를 줄 수도 있다.”

“너무 신중하세요. 전하의 저주는 반드시 풀리실 거예요. 아버님께서 건재하신 한 어느 누구도 황태자 전하를 해하지 못할 거고요.”

“…….”

그는 말없이 와인을 머금었다. 오늘따라 그 침묵이 불안하게 다가왔다.

“아버님, 여신의 저주를 다른 이에게 옮기는 흑마법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요. 혹시 그런 말을 듣더라도 절대로 현혹되시면 안 돼요. 카실 가문, 특히 리차드를 조심하셔야 해요.”

“내가 그런 애송이한테 당할 것 같으냐?”

그는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가볍게 입꼬리를 올렸다.

원작에서 텐스테온이 리차드의 함정에 빠졌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블레이크의 상태가 심각해지고, 설상가상으로 어둠의 문이 열린다.

텐스테온은 황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문을 봉인하려 하지만, 그가 빛의 힘을 사용하면 블레이크의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다.

극단적인 상황에 몰린 텐스테온은 위험한 도박인 걸 알면서도 흑마법을 사용하고, 결국 목숨을 잃는다.

“저는 ‘언어 능력자’잖아요. 황태자 전하의 저주는 제가 반드시 풀 테니까, 폐하께서는 저만 믿어주세요.”

“또 잔소리를 시작하는구나.”

“잔소리가 아니라 필요한 조언이에요.”

“걱정하지 말거라. 지켜야 할 자식이 둘이나 있는데, 경솔하게 행동하지 않는다.”

그가 나의 머리를 가볍게 헝클어트렸다.

지켜야 할 자식…. 한 명은 블레이크 다른 한 명은 나를 말하는 거겠지.

원작대로라면 황제는 올해 목숨을 잃는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다.

내가 그를 반드시 지킬 테니까.

***

기사 아카데미는 다른 곳보다 입학이 빠른 편이었다. 겨울 혹한기 훈련을 통해서 기사의 각오를 다진다는 끔찍한 이유 때문이었다.

겨울 훈련을 해야 하기 때문에 꽃피는 봄이 아니라 2월에 입학을 한다니, 다이애나가 기사의 꿈을 이루길 바랐지만 막상 그렇게 무시무시한 곳에 들어간다고 하자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당사자인 다이애나는 그저 눈 만난 강아지처럼 신이 나 있었다.

“전하, 제가 전하만 믿는 거 알죠? 전하가 없었으면 언니가 걱정돼서 아카데미에 못 갔을 거예요. 우리 예쁜 언니를 홀로 두고 떠나려니 마음이 놓이지 않지만 잘 지켜주셔야 해요!”

“응. 처제, 걱정하지 말고,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만 다치지 않도록 조심해.”

“저는 걱정하지 마세요. 꼭 수석으로 졸업해서 언니의 기사가 될 거예요!”

서로를 챙기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6년 뒤에 누가 언니를 더 좋아하는지 토론해요.”

“그건 이미 결론이 난 거 아니야?”

“아, 저의 승리였죠.”

“무슨 말이야. 내가 이겼지!”

잘 나가다가 왜 또 삼천포로 빠지는 거지?

“자자, 어서 출발하자. 더 지체하면 입학식에 늦겠어.”

“응! 전하, 여름 방학 때 봬요!”

“기다릴게.”

“전하, 저도 다녀올게요.”

“응. 앤시아, 조심히 다녀와.”

기사 아카데미 입학식은 학생과 직계 가족 그리고 친 형제 자매만이 참석할 수 있었다.

나는 다이애나와 함께 마차를 타고 기사 아카데미로 향했다.

기사 아카데미의 검은색 바지 교복을 차려입고, 머리를 하나로 높게 묶은 다이애나의 모습이 제법 멋있었다.

“…다이애나, 백작 부인께서는 바쁜 일이 있어서 못 오신대.”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나는 벨라시안 백작 부인에게 여러 번 편지를 보냈다. 유배지에 있는 벨라시안 백작은 입학식에 참석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지만, 백작 부인은 새로운 길을 걸어가는 딸을 축하해주었으면 했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거절했다.

“알아. 오늘 신전에 이혼 신청을 하러 간다고 했거든.”

다이애나는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이혼?”

애초에 사랑 없는 가문과 가문의 결합이었다. 원작에서도 벨라시안 부부는 서로의 허영심을 채워주는 존재일 뿐 특별한 애정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혼까지 하진 않았었는데….

“어머니 말로는 아버지가 완전히 미쳤고, 내가 모든 일의 원흉이래. 기어이 기사가 된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고, 우리 부녀라면 지긋지긋하대.”

“네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신경 쓰지 마.”

“신경 안 써. 나한텐 언니가 있는걸.”

다이애나는 내 옆자리로 와서 팔짱을 꼈다. 나도 그녀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언니. 이거 받아.”

그녀가 대뜸 작은 보석함을 건넸다.

“이게 뭐야?”

“벨라시안 가문의 가주 반지와 저택 열쇠야. 아버지가 떠나면서 어머니가 가지고 있었나 봐. 이제 이혼할 거라면서 다시 나한테 보냈어. 그러니까 받아. 이건 언니 거야.”

“다이애나, 이런 건 받을 수 없어.”

나는 거절하려 했다. 하지만 다이애나는 보석함을 다시 나의 손에 올렸다.

“벨라시안 가문은 원래 망하기 직전이었대. 그런데 언니의 친어머니 덕분에 파산하지 않았고, 지금 가진 재산도 대부분 언니 어머니 거라고 했어. 다른 보물들도 언니의 결혼 예물로 받은 거고. 그러니까 원래 언니 거야.”

그녀의 말대로 벨라시안 가문의 재산은 앤시아의 어머니가 진짜 앤시아에게 남긴 유산이었다. 내 마음대로 받아들이거나 거절할 문제가 아니다.

“…고마워.”

“이제야 돌려주는 건데 뭐가 고마워.”

그녀는 나에게 모든 걸 넘기고는 기쁘게 웃었다.

그때 마차가 천천히 멈추었다.

“어! 도착했나 봐!”

다이애나는 마차의 커튼을 열었다. 그러자 웅장한 기사 아카데미의 전경이 펼쳐졌다.

아카데미는 입학식에 참가한 사람들로 붐볐다. 그중에는 내로라하는 귀족들도 많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우리에게 꽂혀 있었다.

텐스테온은 내가 입학식에 간다는 말을 듣고 황제의 마차와 제1 기사단을 호위로 보내주셨다. 시선이 쏠리는 게 당연했다.

다이애나는 진짜 기사처럼 살짝 고개를 숙이며 나에게 손을 뻗었다.

“비 전하, 가실까요?”

“고맙습니다. 다이애나 경.”

나는 다이애나의 손 위에 살포시 손을 올렸다. 다이애나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서 내리자, 웅장한 나팔소리가 울렸다.

아이고, 아버님. 뭘 이런 것까지 준비하셨어요.

마차 앞에 깔린 붉은 융단을 밟으며 걸어가자, 아카데미 학생들과 귀족들은 황태자비인 나를 향해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아카데미의 학장이 대표로 나를 맞이하였다.

“제국의 축복이신 황태자비 전하를 뵈옵니다.”

그냥 신입생의 언니로서 조용히 축하를 해주고 가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너무 스케일이 커져버렸다.

나는 단상 위에 있는 학장의 옆자리에서 입학식을 지켜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다소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입학시험 수석부터 10등까지 가장 앞줄에 서 있었기 때문에 다이애나의 모습이 잘 보이는 명당이기도 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아버님께 감사 인사를 올리며 입학식을 지켜보았다.

기사 아카데미의 입학식은 엄숙하면서도 절도가 넘쳤다. 반대로 말하면 다소 지루할 수도 있었지만, 다이애나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로 꼿꼿이 서 있었다. 그녀는 오늘따라 한층 의젓해 보였다.

수석 입학자가 대표로 단상에 올라와서 기사의 맹세를 외치는 것으로 입학식은 마무리되었다.

신입생들은 곧장 기숙사로 입소해야 했기 때문에 가족들과 짧은 인사 시간이 주어졌다.

“언니, 졸업식 때는 내가 1등 단상에 설 거야.”

다이애나가 수석으로 입학한 붉은 머리 소년에게 흘깃 시선을 던졌다. 그녀의 눈에서 라이벌을 향한 승부욕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무리하지 말고. 등수보다는 건강이 중요해.”

“등수도 중요하지.”

“내일부터 동계훈련인데 날씨가 이렇게 추워서 어떻게 해. 불의 마나석도 못 쓴다며?”

“괜찮아. 나만 못 쓰는 것도 아닌데 뭐.”

다이애나는 덤덤하게 말했다. 확실히 몇 달 사이에 부쩍 성장한 것 같다.

그때 멀리서 입소를 알리는 나팔소리가 울렸다.

“언니, 나 갈게.”

“그래, 어서 가.”

“에휴, 우리 예쁜 언니를 두고 가려니까 발이 안 떨어지네. 이상한 날파리가 붙으면 말해. 당장 쫓아가서 혼쭐을 내줄게.”

“내 걱정은 하지 마. 그리고 편지 자주 쓰고.”

“응! 편지 엄청 많이 쓸게!”

다이애나는 손을 흔들며 기숙사로 뛰어갔다.

***

“다이애나가 얼마나 멋졌는지 몰라요.”

나는 오늘 입학식을 찍은 영상석을 블레이크에게 보여주었다.

“멋있네.”

“그렇죠?”

열심히 공부해서 기사 아카데미에 입학한 건 다이애나인데 괜히 내가 뿌듯했다.

“영애께서 이렇게 의젓하셨나요?”

옆에서 함께 영상석을 지켜보던 멜리사와 한스도 허리를 똑바로 세운 채 의젓하게 서 있는 다이애나를 보며 감탄했다.

“그러게요. 몰라보겠군요.”

“옛날 생각나네요. 제가 입학할 때는 눈바람이 엄청 불었거든요. 당당하게 서 있어야 하는데 어찌나 재채기가 나는지. 그걸 참느라 죽는 줄 알았습니다.”

“에드온 님께서는 수석 입학하셨잖아요? 그럼 단상에도 서셨겠네요?”

“네. 마지막까지 재채기를 참느라고 정신이 없었어요. 그때 저는 완전 어린애였죠. 하지만 다이애나 영애는 벌써 기사다우시네요.”

그들이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는데, 블레이크가 불쑥 말을 꺼냈다.

“그런데 앤시아는 안 찍었어?”

“네. 제 입학식도 아닌걸요.”

“아닙니다. 찍었습니다.”

한스가 대답과 동시에 커다란 상자를 가져왔다. 상자 안에는 영상석이 가득했다.

“제1 기사단에서 비 전하의 모습을 영상석에 담았습니다.”

영상석에는 작은 글씨가 각인되어 있었다. ‘입학식 입장’ ‘신입생 선서’ ‘검술 시범’ 등등 무려 20개나 되었다.

제목만 봐서는 순수하게 입학식을 찍은 것 같았지만, 막상 영상석을 재생해보니 입학식을 바라보는 내 모습만 잔뜩 담겨 있었다.

“이걸 왜 찍었어?”

“폐하께서 명령하셨다고 합니다.”

아이고, 아버님. 이 비싼 영상석을 이런 식으로 낭비하시다니.

“폐하께선 어째서 이런 명령을 하신 거지?”

이걸 어디다 치워야 하나 고민하는데, 멜리사가 빙그레 웃었다.

“선물이시겠죠.”

“선물?”

“네. 폐하께서 황태자 전하께 드리는 선물이요.”

설마. 이런 선물을 받고 좋아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거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블레이크의 목소리가 들렸다.

“와아! 앤시아 웃었다!”

블레이크가 영상석에 나오는 내 모습을 보며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우리 토끼 신랑은 이 지루한 영상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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