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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129화 (129/130)

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129화

레이커스의 입술이 내 숨결을 훔쳤다.

한참 동안 입술을 내어 준 뒤에야, 그는 아쉬운 듯 물러나며 속삭였다.

“아르비체가 아이들과 함께 있는 동안, 마탑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봉인은 잘 마무리되었다고 하는군요.”

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레이커스는 내 이마에 키스하고 다시 말했다.

“왕궁에서도 연락이 왔습니다. 연회는 흐지부지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만, 이번 건에는 제대로 감사함을 표하겠다고 하더군요. 아르비체에게.”

내가 한 것은 없는데.

하지만 그런 겸양의 말을 할 새도 없이, 레이커스가 내 입술을 그의 검지로 훑어 내리며 속삭였다.

“아르비체에게 관심 있는 사람들의 볼일은 이제 다 끝난 것 같으니, 지금은 제 시간이군요.”

난 그의 아름다운 맹수 같은 눈빛을 바라보며, 한순간이나마 그를 가엾게 생각한 나의 어리석음을 탓했다.

레이커스가 다시 내게 키스를 퍼붓는 사이, 난 어느새 그에게 달랑 들려 안겨 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그에게 안긴 채로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누, 누가 보면 어떻게 해요.”

겨우 입술이 떨어진 틈을 타 황급히 속삭이자, 레이커스는 그런 나를 불만스레 바라보며 입술을 길게 당겨 웃었다.

“제 마음을 못 믿겠다는 거잖습니까, 당신은.”

“……그게,”

레이커스는 아까 마차에서 내린 순간부터, 그 생각만 하고 있었나 보다.

그가 굳이 나를 사랑할 이유는 없지 않겠냐고 물었던 내 말에 대해서.

하지만, 난 아직도 그렇게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지, 지금은…… 좋겠죠. 우리가…… 우리가 좋겠죠. 전우처럼, 우리는 아주 특별한 상황에서 서로밖에 없었으니까요.”

계단을 느리게 한 걸음씩 오르며, 레이커스가 눈썹을 치켰다.

어디, 할 말 있으면 더 해 보라는 듯한 제스쳐에 나는 속에 꾹꾹 눌러 담아 놓았던, 입으로 내뱉고 싶지 않았던 말을 천천히 하나씩 내뱉었다.

“……하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요. 그러면 레이커스도 주변이 보일 거잖아요. 우리는 더 이상 특별하지 않다는 걸. 저는 그냥, 한 명의 여자에 불과하다는 걸.”

레이커스가 생각에 잠긴 듯 나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요즘 내겐 상냥한 얼굴만 보여 준 그라서, 이렇게 불만에 잠긴 듯한 표정은 또 색다른 매력이 있었다.

‘하여튼…… 잘생기고 볼 일이야. 뭐든 이렇게 아름답게만 보이니, 큰일이야.’

“제가 궁금한 건 그게 아닙니다.”

“……네?”

“아르비체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게 궁금합니다.”

“제 생각이요?”

레이커스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내려다봤다.

“저는, 분명히 말했을 겁니다. 제 감정을.”

그랬다. 그랬긴 한데…….

“제가 제 사랑을 입증하길 원한다면, 이 계단 수만큼도 말해 줄 수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를. 그게, 당신이 바라는 바라면.”

저벅.

레이커스는 그렇게 말하더니, 계단을 한 발짝 오르며 입을 열었다.

“결국, 당신이 없었으면 전 시간선에 갇혀 나오지도 못했을 겁니다. 구해 준 영웅에게 반하는 건 뻔한 서사이긴 합니다만.”

저벅.

그리고 레이커스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또 계단을 하나 더 올랐다.

“당신이 내 얼굴을 바라보면서, 너무 솔직하게 넋을 놓는 게 귀엽다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다 들키고 있었잖아.’

저벅.

창피해서 어디로 숨고 싶은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레이커스가 다시 또 하나의 계단을 오르며 말했다.

“유행에 신경도 쓰지 않고 잘 지내는 그 담대함도, 필요하다면 그 누구보다 세련될 줄 아는 센스도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언제까지.’

저벅.

레이커스가 또 한 번 계단을 올랐다.

“당신의 곁에 있으면 자주 웃고, 제가 겪어 봤던 좋은 것들을 모두 당신에게 체험시켜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어떤 여자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한 건 처음입니다.”

저벅.

‘……어, 언제까지 할 건데?’

나는 황급히 손을 뻗어 다음 말을 내뱉으려는 레이커스의 입을 막아 버렸다.

생각보다 훨씬 더 부끄러웠다.

이렇게 눈앞에서, 나를 사랑하는 이유를 나열하는 모습을 보는 건.

머릿속까지 다 새빨갛게 칠해지는 기분이었다. 심장이 제 박자를 모르게 엉망으로 뛰었다.

레이커스가 불만스레 나를 내려다보았다.

“아직 할 말이 많습니다만. 궁금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입이 막히고도 잘만 떠드는 그를 바라보며 난 재빨리 고개를 내저었다.

“돼, 됐어요.”

“왜죠? 정말 괜찮다는 얼굴은 아닌데?”

“……추, 충분해요.”

그가 의심스럽다는 듯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자꾸 내 손바닥에 대고 말하는 게 간지러워서 손을 떼자, 레이커스가 나를 안고 그의 방으로 느리게 다시 걸어가며 말했다.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가, 본디 불안정하다는 건 압니다. 언제 변할지도 모르는 거니까, 아르비체가 불안하게 느낀다는 것도 알고요.”

“네.”

“그리고, 아르비체는 본래 있던 장소가 있을 거니까. 더 불안하게 여길 수도 있겠습니다.”

“……헤아려 줘서 고마워요.”

레이커스는 나를 안은 채로 제 방문을 열고 들어서더니, 나를 테이블 위에 걸터앉을 수 있게 내려 주었다.

레이커스와 모처럼 같은 눈높이가 된 나는, 그의 빠져들 듯 아름다운 눈동자를 원 없이 들여다보았다.

그는 제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나에 대한 사랑이 넘실거리는, 확신을 잃지 않는 눈동자를 보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퍽 행복한 일이었다.

레이커스는 내 머리카락을 당겨 제 손가락 사이에 쥔 채 속삭였다.

“하지만, 당신의 마음을 먼저 생각하세요.”

“무슨…… 말이에요?”

“제가 수십 개의 이유를 댄다 해도 제 감정을 믿지 못하는 게 어쩌면 당연합니다. 논리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레이커스는 내 머리카락에 키스하며 잠깐 말을 고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제겐 샤인과 루나 이외에 이렇게 제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고, 당신이 없는 미래를 상상하기 싫습니다. 당신과 함께 있을 때 가장 행복하고, 전 이게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말은 참 다디달다.

레이커스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조용히 확신을 담아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그러니, 당신의 감정에 확신이 선다면 제게 오면 됩니다.”

나는 넋이 나갈 것 같은 심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내 가슴에 손을 얹었다.

손바닥 아래로, 현실에서조차 이렇게 뛰어 본 적 없던 내 심장이 어지럽게 뛰고 있는 게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내가 어떻게 하고 싶냐고?’

나는 시스템 창 구석에 떠 있는 접속 종료 버튼을 흘끗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 인정해. 난 여기가 좋아. 돌아가고 싶지 않아. 사실은…….’

사실은, 가족이랄 것도 없이 지냈던 나였다.

내가 사라져도 나를 기다릴 이는 많지 않다.

친구나 친척이 없냐고 하면, 그런 것도 아니었지만…… 그들에게 나는 첫 번째가 아니었으니까.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며 지냈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건 모두와 거리감을 두고 지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게임에 들어오고 나서, 현실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엉망으로 했던 말과 행동 덕분에, 나는 나를 온전히 보여 줄 수 있었다.

오히려 그래서였을 거다.

이곳의 사람들과 너무 친해져 버린 건.

다시는 떨어지고 싶지 않을 만큼.

그들의 기억에서 지워지는 게 싫을 만큼.

그것 때문에, 시간을 되돌리기 싫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그래, 난 사실은…… 리어먼드가에 있고 싶어.’

블리에 씨, 샤인, 루나…… 그리고…….

‘레이커스의 곁에서……. 이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남자에게 특별한 사람이고 싶고, 그에게도 사랑받는다는 게 뭔지 알려 주고 싶어. 그가 내게 알려 줬듯이.’

솔직하게 인정하자, 속이 홀가분했다.

물론, 없던 확신이 생겨난 것은 아니었다.

레이커스가 아름답고, 가진 것이 많고, 완벽한 사람이라서 불안했고, 이제는 더 이상 내가 게임 플레이어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불안했고, 미래를 미리 알고 있지 않아서 불안했다.

하지만, 레이커스의 말대로…… 논리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여기서부터는, 서로 신뢰를 쌓아 나가는 수밖에 없어.’

우리가 함께 지낸 시간들이, 우리를 묶어 주었듯이.

또 앞으로 보낼 시간들이, 우리를 서로에게 가장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어 줄 거다.

“……레이커스.”

내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로 웅얼거리듯 말하자, 레이커스가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커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말씀하십시오.”

‘……아.’

말이, 뜻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가 그동안 내게 그렇게 직설적으로 사랑의 말을 속삭여 줄 때만 해도 몰랐다.

상대에 대한 마음을 마음속으로 정리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거였다. 말로 표현한다는 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내 마음을 알리는 거다.

그게 무서웠다.

이렇게까지 나에 대한 사랑을 확신하고 표현해 주는 레이커스가 바로 눈앞에 있는데도 무서웠다.

‘……이런 내가, 무슨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난 적어도 레이커스가 나를 묘사했던 것 중 하나는 틀렸다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레이커스의 반짝거리는 은빛 눈동자를 향해 천천히 입을 뗐다.

“……레이커스, 제 감정에 대해 생각해 보라고 하니까…… 생각해 봤는데요.”

“네.”

“아무래도, 저도…… 같은…… 같은, 감정인 것 같아요.”

레이커스가 눈을 반짝 빛냈다.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해 주면 안 됩니까?”

다 알아들었을 거면서. 전혀 모르겠다는 듯 순진한 척 눈을 반짝거리는 게 귀엽기도 했지만,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짓궂어.’

난 어쩔 수 없이, 움직이지 않으려 하는 혀를 더듬더듬 움직여 그 말을 뱉었다.

“나도 사랑해요…… 꺅!”

내가 말을 마무리 짓기가 무섭게, 내 몸이 다시 번쩍 허공을 날듯이 들렸다.

그에게 안긴 채로 빙글빙글 돌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는 레이커스의 품에 꼭 안겨 있었다.

레이커스의 심장 뛰는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창밖으로 내내 들리던 아련한 캐럴의 소리가 다 묻힐 만큼.

그는 나를 아주 소중한 것 다루듯 꼭 껴안고서 속삭였다.

레이커스는 그답지 않게 조금 망설이듯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말했다.

“그럼…… 계속해서 여기 있을 생각인 게 맞습니까?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돌려보내줄 생각도 없으면서.

난 이미 마음을 정했다. 여기에 남기로.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레이커스가 다시금 나를 꼭 껴안았다.

“전 좋지만, 후회가 남지 않도록 하는 게 좋을 겁니다. 다녀올 수 있다면, 다녀와도 좋습니다.”

어쩐지 알 수 있었다.

이 게임의 강제 종료 버튼이 있지만, 나는 그것을 누르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리고 내가 여기 불려 들어온 게 랑비엘이 저지른 일 때문이었다면, 아마 나갔다간 다시 들어오지 못할 거야.’

나는 그 말을 하는 대신, 그냥 웃으며 고개만 저었다.

레이커스는 내 침묵을 제 나름대로 해석한 모양이었다.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고맙다고 몇 번이나 속삭였다.

“미안하지만, 저는 그 결정이 마음에 쏙 드는군요. 정말로 후회하지 않게 하겠습니다. 정말로.”

“네.”

그는 내 이마에 키스하곤 문득 창밖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서로를 껴안은 채로, 창밖으로 펑펑 내리는 눈을 한참 바라보았다.

“메리 크리스마스군요.”

레이커스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하는 목소리가, 그의 가슴을 통해 들렸다.

띠링.

그 순간 뭔가의 알림음이 들려왔다.

‘레이커스의 호감도를 나타내는 창일까?’

어쩐지 그것을 보고싶지 않아서, 나는 눈을 꼭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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