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128화
똑똑똑.
마차로 다가온 이가 정중하게 노크를 하고서야, 레이커스는 나를 놓아주었다. 나는 가쁜 숨을 헐떡이며 바삐 물러나 앉았다.
‘틀림없이 얼굴이 새빨개졌을 거야.’
레이커스와 떨어졌는데도, 입술에 그의 입술이 닿았던 감촉이 생생하게 남아서 정말이지 어쩔 줄은 모르겠다.
어쩔 줄 몰라 문만 바라보고 있는데, 레이커스가 부드럽게 웃었다.
“조금 후에 설명해 보죠.”
“……아뇨, 괜찮아요.”
그렇게 대답하다가, 얼굴에 짙은 아쉬움이 서려 있는 레이커스와 시선이 맞닥뜨렸다.
그의 눈은, 마치 야수의 그것과 같았다. 아름답고, 눈을 뗄 수 없으면서도 위험해 보였다.
저절로 ‘좀 더 은밀한 곳에서……’ 어쩌고 하는 레이커스의 말이 생각나서, 난 소스라치게 놀라서 반사적으로 문을 열어젖혔다.
“일찍 돌아오셨군요.”
문을 두드린 건 발받침을 놔주는 시종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문 바로 앞에 서 있던 건 블리에 씨였다.
난 화끈거리는 얼굴에 손부채질하며 블리에 씨 옆으로 내려섰다.
블리에 씨의 크리스마스 코스튬은 트리인 모양이었다. 머리에는 금색 별 모양의 핀을 꽂고 있었고, 언제나 입고 있던 집사복 대신 녹색 슈트를 차려입고 있었다.
블리에 씨의 크리스마스 테마 옷차림은 처음 보는 거라서, 나는 그만 다른 생각은 다 잊고 숨 막히는 귀여움에 흠뻑 빠져들었다.
‘하여튼 뭘 해도 귀엽다니까.’
“정말 잘 어울리네요.”
“……네?”
“옷이요.”
“아, 감사합니다.”
블리에 씨는 눈을 사르르 접으며 우아하게 웃어 보이곤 나를 살피며 되물었다.
“저에게 신경 쓸 여유까지 있으신 걸 보니 안심입니다만, 아르비체 님은 괜찮으신 거죠?”
“괜찮냐고요?”
“조금 전에 경찰이 다녀갔습니다. 자세한 설명은 없이 변고가 좀 있었다고만 해서…… 혹시 몰라 마음을 졸이고 있었습니다만, 생각보다 훨씬 빨리 돌아오셨군요.”
다른 곳에 들르지 않고 곧장 돌아온 게 잘한 일일지도 모른다.
난 그제야 그녀가 나와 레이커스를 걱정해서 마차까지 손수 마중 나온 것을 깨닫고, 고마운 마음에 블리에를 와락 껴안았다.
“걱정을 끼쳐서 미안해요. 벌써 소식을 들었을 줄 알았다면, 기별을 보내 둘 걸 그랬어요.”
“아뇨…… 주인님의 일을 걱정하는 게 제가 해야 할 일이니 당연한 도리를 한 것뿐입니다. 마음 쓰지 마십시오.”
“그야…….”
난 대답을 하려다가 블리에 씨의 말이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이커스도 아니고 나를 빤히 바라보며 주인님이니 뭐니 하는 말을 하는 게, 마치…….
‘……마치, 내가 내정된 안주인이라도 된 것 같잖아.’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말문이 턱 막혀 앞을 바라보는데, 등 뒤에서 다가온 따뜻한 손이 내게 망토를 둘러 주며 속삭였다.
“눈이 꽤 많이 내려서 춥습니다. 이야기는 들어가서 나누시죠.”
레이커스의 에스코트를 받아 현관으로 다가가다가, 난 주위를 한번 흘끗 둘러보았다.
고작해야 가정교사가 공작님의 망토를 두르고 있는 데다, 레이커스가 눈을 맞지 않도록 거의 껴안듯이 해서 나를 에스코트해 주고 있는데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난 아직 마음의 결론을 못 내렸는데, 그거랑 상관없이 사람들은 이미 날 안주인으로 생각하는 거 아냐?’
그게 더 이상하다.
‘이곳의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나야 그렇다 쳐도, 이 사람들은 보잘것없는 신분의 내가 안주인이 되는 걸 반대하고 텃세 부려야 하는 게 맞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하며 막 쌓이기 시작하는 눈길을 걷는데, 문득 크리스마스 장식을 꾸미는 일꾼들 사이로 현관 앞 계단에 앉아 있는 아이 둘이 보였다. 저번에 왕궁 연회장에서 돌아왔을 때는 너무 늦은 시간이라 마주치지 못했던 샤인과 루나였다.
제법 도톰해 보이는 붉은 망토 하나를 나눠 두른 아이들은, 각기 루돌프와 산타 분장을 하고 있었다.
금발 머리 위로 루돌프 머리띠를 쓴 게 샤인이었고, 뾰족한 빨간 모자를 쓴 쪽이 루나였다.
난 길게 생각할 새도 없이 달려가 둘을 꼭 끌어안았다.
“알비 선생님!”
“선생님? 무슨 일 있었어?”
“알비 선생님, 이 드레스 요정님 같다!”
“무슨 일 있었지? 시녀들이 조금 전부터 엄청 수선스럽게 굴면서 걱정이니 뭐니 하던데.”
샤인과 루나가 내 품 안에서 뭔가를 자꾸 종알거려 대는 게 간지러웠지만, 나는 두 아이를 품에 가득 안고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너무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서.
이 아이들을 영영 보지 못하게 될 수도 있었다. 자칫, 모든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지지 않았더라면.
내가, 혹은 오늘 우리를 도와준 이들 중 누군가가 조금이라도 실수를 했더라면 나는 여기 없었을 테니까.
다시 시간이 돌아가 버리고, 나는 이 게임 속에서 사라져 버렸을 테니까.
나는 기분이 풀릴 때까지 둘의 볼에 내 얼굴을 비비고서야 고개를 들었다.
차가운 공기 때문에 코끝과 볼이 발그레하게 붉어져 있는 두 요정 같은 아이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눈이 오는데…… 따뜻한 안에 있지 그랬어요.”
내 말에 샤인이 거만하게 턱을 들며 어른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귀족은 본래 경치를 감상하길 좋아하는 법이야.”
‘……너무 귀여워.’
눈을 구경하는 게 신났다는 말을 어쩜 저렇게 귀엽게 표현할까?
“루나는, 알비 선생님 기다리고 있었는걸!”
“……어머, 그랬어요?”
“네! 루나는, 선생님이랑 같이 사진 찍을 거야! 핼러윈 사진 때처럼!”
나는 푸스스 웃으며 둘을 껴안아 줬다.
“좋아요, 사진 찍어요.”
“응! 너무 좋아요!”
[루나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Lv3(139/297)]
[샤인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Lv.3(138/297)]
자리에서 일어나 두 아이의 머리를 털어 주며 함께 들어가자고 일으켜 세우다가, 난 문득 옆에 떠 있는 알림창이 묘하다고 생각했다.
‘……착각일 수도 있긴 한데, 두 번째 하트를 잃어버리기 전에 올랐던 호감도에서 이어진 것 같지 않아?’
고개를 갸웃하던 난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루나의 은색 눈동자와 시선이 맞닥뜨리고서야 깨달았다.
‘……방금 루나가 말했지. 핼러윈 때처럼, 이라고. ……세상에.’
난 뒤늦은 깨달음에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세이브 데이터로 시간을 되돌린 후에는 아이들과 사진을 찍은 적이 없어. 그러니까, 기억이 없다면 오랜만에 사진을 찍는다고 해야 맞지.’
지금까지 너무 많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리어먼드 가문에 흐르는 피에 대해서.
리어먼드 가문에 드래곤의 피가 섞여 있다고 한다면, 샤인과 루나도 그 피에서 완전히 독립된 존재는 아닐 거다.
심지어 레이커스의 형도 그 피 때문에 미쳤던 적이 있었으니까.
‘……이 아이들도, 기억을 완전히 잃어버리지 않았던 거야.’
뒤늦게, 샤인이 그렸던 고저택의 그림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당시에는 그게 뭔지 몰랐는데, 그림 속에서 고저택을 휘감고 있던 검은 그림자는 바로 드래곤의 형상이었다.
‘이 아이들조차 계속 힌트를 줬었는데, 내가 몰랐어.’
나는 루나를 번쩍 들어 올려서 품에 안고서 볼에 쪽 뽀뽀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억이지만 나와 아이들이 함께 나눈 시간을 이 아이들이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모른다.
“고마워, 루나.”
“뭘요, 선생님.”
“샤인도 고마워.”
샤인이 내가 내민 손을 빤히 바라보다가, ‘아직도 내가 어린애인 줄 알아.’라며 투덜거리면서 어쩔 수 없다는 듯 손을 꼭 쥐어 왔다.
두 아이와 함께 대저택의 로비로 들어가자,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장식들이 눈에 들어왔다.
묘하게 정말로 집으로 돌아왔다는 느낌이 가슴을 꽉 채웠다.
실내의 큰 트리 앞에 가서 서자, 루나가 발을 동동 구르며 내려 달라고 조르더니 내게 물었다.
“여기서 찍을까요?”
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자.”
대답을 한 건 내가 아니라 레이커스였다.
조금 놀라서 뒤를 돌자, 레이커스가 아무렇지도 않게 내 볼에 키스하곤 트리 앞에 가서 섰다.
“뽀뽀했다! 뽀뽀!”
루나가 혼자 호들갑 떨며 속삭이는 소리에 얼굴이 다시 새빨개질 것 같았다.
‘……아이들도 보는데!’
예전에는 이렇게 남들 보는 곳에서 노골적으로 굴지 않았는데, 도대체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마치, 내가 공인된 그의 연인이기라도 한 것처럼.
멍하니 카메라를 블리에 씨에게 넘겨주면서도, 트리 앞에 가서 포즈를 취하면서도, 나는 내 낯빛이 새빨개지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뿐이었다.
“찍습니다, 여길 보세요.”
블리에 씨가 어느새 카메라를 들고 나섰고, 우리는 환하게 웃었다.
아이들은 한참 동안 1층 거실에서 사진을 보며 나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게 그렇게나 마음에 들었던지, 샤인과 루나는 잘 시간이 다 되어서도 내 곁에서 떠나지 않고 한참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사진 여러 장이니까 내가 한 장 가져갈게.”
“샤인이 원하면 다 가져가도 돼요.”
“선생님도 가져야지. 뭐야, 선생님은 우리 사진 싫어?”
“후후, 아니에요. 그럼 하나만 골라요.”
샤인이 사진을 고르는 사이에, 루나도 신이 나서 나를 올려다보며 종알거렸다.
“역시 루나가 마법을 쓰는 게 틀림없어요. 그렇죠? 이것 봐, 이번에도 루나가 그린 그림대로 사진 또 찍었잖아요.”
“바보. 그게 무슨 소리야.”
“루나가 빈 다른 소원도 이뤄지려나? 응? 어떻게 생각해요, 선생님?”
루나가 빈 다른 소원이 뭐였더라?
‘선생님하고, 우리 삼촌하고 결혼하는 거요.’
루나가 했던 말을 뒤늦게 떠올린 나는 황급히 손사레를 쳤다.
“자, 어린아이는 잘 시간이에요.”
난 어른만 할 수 있는 비겁한 변명으로 둘러대며, 두 아이를 옆에서 기다리던 유모에게 데려다 주었다.
평소 같으면 자기 싫다고 징징거렸을 아이들은, 손에 꼭 쥔 사진이 마음에 드는지 별 다른 말을 하지 않고 얌전히 물러갔다.
‘휴. 하여튼, 못 말려.’
결혼이라니,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단어였다.
‘레이커스가 얼토당토않게 갑자기 약혼반지 이야기를 꺼내긴 했지만…….’
심장이 콩콩 뛰는 것을 이길 수가 없어서 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방으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로비를 지나다가 열려 있는 현관문에 시선이 가 닿았다.
펑펑 내리는 눈 사이에 레이커스가 멍하니 서 있는 뒷모습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어쩐지 알 것 같아.’
방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석상처럼 가만히 눈을 맞고 있는 그 심정을.
얼토당토않은 생각이 불쑥 들었다.
‘……너무 외로워 보여서…….’
내가 없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
가진 게 너무 많은 그라는 걸 분명히 알고 있는데도, 모든 사건을 끝낸 뒤의 그가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이 행복이라는 것도 알고 있는데도…….
그런데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 모를 일이었다.
레이커스가 나를 돌아보았다.
온 저택을 휘감듯 장식된 크리스마스 조명 때문에, 그의 잿빛 눈빛이 밝은 은색처럼 보였다.
나는 반짝이는 그의 아름다운 눈동자를 하염없이 들여다보느라, 그가 또 내게 키스하려 고개를 숙인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