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127화
“좀 더…… 시간을 줘요.”
깊게 생각하고 한 말은 아니었다.
그냥 심장이 정말로 가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아서, 반사적으로 나도 모르게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 말에 레이커스의 기쁘기만 하던 얼굴에는 한 점의 그늘이 드리웠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굳이 그 표정에 이름을 붙이자면 불안이라고 할 수 있을 거다.
‘레이커스도 참 이상하지. 내가 뭐라고…….’
입술을 버릇처럼 깨무는데, 레이커스가 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부드럽게 쓸었다.
“입술에 상처 납니다.”
“……네.”
“제 입술이라면 깨물어도 괜찮습니다만.”
‘지,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레이커스는 농담이었다는 듯 작게 웃었다.
또 낯이 뜨거운 건 나뿐이지 싶어서, 그를 작게 흘기는데 레이커스가 나직하게 나를 달래듯 말했다.
“고민은 좋죠. 시간은 필요한 만큼 쓰십시오. 하지만 제 곁에서 고민하세요. 고민은 고민대로 하시되, 일단 오늘은 저와 함께 즐기죠.”
“……응. 알았어요.”
왜, 내가 미안한지 모르겠다.
되풀이되는 시간선 속에서도 항상 당당하기만 했던 그가, 보잘것없는 내 앞에서 저렇게 눈치 보듯 말하는 게…… 너무 이상하고, 신기하고…… 그리고, 미안했다.
‘……그가 하는 말들 하나하나가 너무 사랑스럽고 든든해서, 가슴이 아파.’
안절부절못하며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레이커스가 고개를 들고 위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다시 어두워진 하늘이 보였다.
파크에서 매일 봐야 했던 그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이었다.
심장 뛰는 말도 다 잊을 만큼 놀라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이…….”
레이커스가 하늘을 향해 손을 들었다.
그가 한참 손을 높이 들고 있기에 뭘 하나 했는데, 잘 보이지 않는 새하얀 솜털 같은 것 하나가 그의 손바닥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드디어, 다음 계절을 만났군요.”
달리 할 불평이 많을 텐데, 레이커스는 고작 그 한마디를 한 게 전부였다.
내가 어떻게 이 사랑스러운 사람의 사랑을 거절할 수가 있을까?
다만…… 내가 정말 공작가의 안주인 같은 자리를 감당할 수 있을지는, 좀 더 생각해 볼 문제다. 샤인과 루나의 문제도 있고.
나는 그와 함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에겐 보이지 않는 시스템 창에는 여전히 접속 종료 버튼이 떠 있었다.
레이커스도 나도 당장 하고 싶은 일이 많았지만, 그중에서 무엇보다 먼저 하고 싶은 일은 역시 리어먼드가로 돌아가는 일이었다.
광장에서 마차를 잡아타고 리어먼드가로 돌아가는 와중에, 눈은 점점 더 펑펑 내려 쌓일 지경이 되었다.
그건, 정말 한 폭의 엽서 같은 광경이었다.
전나무가 양옆으로 빼곡하게 돋아난 사냥터를 지나 마차를 달리는 내내, 창밖으로 함박눈이 쏟아지는 것은.
그리고 그렇게 바깥 풍경이 아름다운 것은 내게도 잘된 일이었다.
레이커스와 이렇게 가까이에서, 좁은 공간에 단둘이 있는 게 어딘가 숨이 막힐 정도로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으니까.
흘끗.
‘……으악.’
그를 돌아보았다가, 시선이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줄곧 나를 보고 있었을까?
그 시선은 포근하기도 했지만, 그 안에 농밀한 무언가가 숨어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키곤 더듬듯 말했다.
“……우와. 정말, 겨울이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아주 오랜만의 겨울입니다.”
레이커스가 대답하며 제 코트 자락을 펼쳐 보였다.
늦가을에 어울리는 드레스 차림의 나는 아까부터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발가락이 얼어붙을 것 같던 차였다. 그 품을 거절하기란 쉽지 않았다.
“……고마워요.”
슬쩍 그에게 다가가 기댄 순간, 레이커스가 웃으며 내 이마에 키스했다.
“왜 그렇게 경계하는 겁니까?”
‘경계하는 게 아니라…… 긴장되는 것뿐이야…… 심장이 너무 뛰어서.’
내 이마에 대고 속삭이듯 말하는 바람에, 숨결이 이마 위를 살랑살랑 간질였다.
‘……간지러워.’
“큰일들은 다 끝났으니까, 이제 돌아가서 쉬기만 하면 되잖아요. 긴장 풀어요.”
“……그건, 맞아요.”
당장, 엉망진창이 되었을 왕궁 연회나 경찰과 마리나가 밝혀내고 있을 범인에 대한 진상 같은 것들을 전부 다 뒤로 미뤄 버리고 우리 둘만 이렇게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는 거다.
모처럼 얻어 낸 진엔딩 뒤의 휴식 시간이다.
‘이렇게 달콤한 휴식 내내 신경이 곤두서 있어서야 보람이 없긴 해.’
어깨의 힘을 풀려고 애를 쓰며 길게 숨을 내쉬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레이커스가 내게 고개를 숙였다.
입술과 입술 사이가 빈틈없이 맞물렸다.
레이커스는 나와 줄곧 함께 있었으면서, 뭐가 그렇게 갈급했는지 급히도 내 숨결을 삼켰다.
‘……치사해.’
긴장을 풀라고 하고서 이렇게 갑자기.
미리 마음의 대비라도 하고 있었더라면, 좀 덜 놀랬을 텐데.
그의 향긋한 체향과 부드러운 입술 때문에 머리가 핑 돌았고, 겨우 박동을 늦춰 가던 심장은 다시 정신없이 뛰었다, 입 안 가득 도수가 센 과일 술이라도 머금은 듯, 달콤하면서도 취할 듯했다.
얼마나 오래 키스가 이어졌는지도 몰랐다.
머리끝까지 깊은 호수에 풍덩 빠져든 것 같은, 정신을 차릴 수 없는 깊은 키스 때문에.
나는 그에게 침잠하며, 천천히 인정했다.
키스가 이렇게 달콤한 것은, 내가 이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 때문임을. 이 사람이 내 가슴을 가득 메우고 있기 때문임을.
돌아가야 할지, 말지의 고민 같은 건 생각도 나지 않을 정도로.
덜컹.
큰 돌부리를 지나기라도 한 듯, 마차가 크게 요동치는 순간에야 나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레이…… 커스.”
맞닿은 입술 사이로 웅얼웅얼 중얼거리자, 그의 긴 속눈썹이 사르르 올라가며 잿빛 눈동자가 나를 마주했다.
그는 내게서 입술을 떼지 않은 채로 시선으로만 말했다. ‘그것 봐. 너도 내가 좋잖아.’
‘……치사해.’
이런 식으로 매력적으로 구는 그를, 이렇게 치명적인 그를, 도대체 누가 거절할 수 있을까.
나는 입술이 맞닿은 채로 오가는 숨이 너무 야하게 느껴져서, 정말 뒤늦은 줄 알면서도 후다닥 뒤로 물러앉았다.
“나, 나중에요.”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맥락 없는 말에, 레이커스가 부드럽게 웃더니 엄지손가락으로 내 아랫입술을 천천히 쓸어 주었다.
그러곤 제가 매력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아는 사람 특유의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기다리죠.”
‘……무슨 뜻인데.’
그가 보고 있지 않았다면, 나중이라느니 하는 말을 종알거린 내 입을 손으로 때리기라도 했을 거다.
입술을 꼭 깨물며 그를 흘끗거리다가, 창밖의 풍경에 깜짝 놀라 창밖으로 상체를 불쑥 내밀었다.
“……세상에.”
온통 눈으로 새하얗게 덮여 있는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리어먼드 고저택 앞은 온갖 반짝거리는 조명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일꾼들이 정원을 오가며 눈을 쓸거나 커다란 전나무마다 동그랗고 매끄러운 색색의 장식품을 달아 장식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스킨이야.’
고정되어 있던 시간이 똑바로 흘러간다고 해도 그렇지, 핼러윈이 지난 지가 언제라고. 게임 속 시간으로 치면 며칠 되지도 않는다.
스킨이 반영되는 건 게임 속 시간과는 관계없이 현실 시간에 따라 바뀌긴 한다.
‘내가 이 게임에 들어온 지 오래된 걸까?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흘렀다는 걸까?’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당연히 현실의 시간과 게임 속 시간이 똑같이 흐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돌아갈 거라면, 빨리 결정해야 해.’
“그렇게 계속 있으면 위험합니다.”
레이커스는 멍하니 창밖으로 몸을 빼고 있는 나를 안듯이 들어서 제 품으로 당겼다. 그러곤 차갑게 얼어 있는 양 볼을 손으로 감싸고 녹여 주었다.
나는 레이커스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나는, 마차가 곧 멈출 거라는 생각이 들고서야 어렵사리 입술을 뗐다.
“레이커스…… 있잖아요.”
“네.”
“……있잖아요.”
“네.”
나는 그의 잿빛 눈동자를 보며 크게 심호흡했다.
‘……괜히 물었다가, 레이커스도 이 관계가 얼마나 근거 없이 쌓아 올린 모래탑인지 깨달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꼭 물어야겠어.’
“저기…… 그러니까. 이제, 레이커스에게 전 유일한 존재가 아니잖아요.”
내 말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그는 미간을 구겼다.
‘이 말을 내 입으로 물어야 한다니…….’
찡그린 표정마저 아름다운 그를 보며 난 천천히 말을 골라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젠, 레이커스도 막 변하거나 하지 않는 거 아녜요……? 공포 게임에서 벗어났…… 아니, 랑비엘이 죽었으니까요. 그러면 공주님과 만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잖아요.”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내게 쉽게 내보이지 않던 불쾌감을 닮은 감정이 그의 목소리에 실렸다.
처음 만났을 때의 그는 이랬다.
나와 무슨 특별한 사이도 아니었고, 그저 고용주와 가정교사에 불과했다.
‘그때로 돌아가게 된다면…… 난 정말 여기에 남고 싶지 않아. 그를 보는 게 너무 힘들 거야.’
난 침을 삼키고 최대한 내 뜻을 잘 전달하려 애를 쓰며 다시 말했다.
“그러니까…… 전, 그냥 일개 가정교사에 불과하고…….”
레이커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신은, 아르비체지만 아르비체도 아니잖습니까?”
‘……그건.’
내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레이커스가 내 양손을 꼭 마주 잡으며 말을 이었다.
“그게 문제가 됩니까? 신분? 신경 쓰는 게 고작 그겁니까?”
‘고작…… 이 아니잖아.’
내가 대답을 못하고 입술만 깨물자, 그는 내가 재밌는 말을 한다는 듯 눈썹을 슬쩍 밀어 올렸다.
“그렇게 생각할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진즉 알았어야 했는데.”
레이커스가 내 허리를 단단히 껴안았다.
얼결에 다시 가까워진 얼굴의 거리에 깜짝 놀라 몸을 뒤로 물리려 했지만, 그가 내 숨결을 훔치는 게 먼저였다.
마차가 멈출 때가 다 되어서야 간신히 나를 놓아준 그는, 숨을 헐떡이는 내게 속삭였다.
“짓궂은 구석이 있군요, 당신도. 내 입으로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를 설명하라니. 여기서는 부끄러우니, 좀 더 은밀한 곳에서 해 보죠.”
‘……그런, 그런 말이 아니었어!’
하지만 그는, 내가 그의 마음을 의심했다는 것 자체가 불만스러운지 내게 벌이라도 주듯 다시 한번 더 농밀하게 키스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