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126화
나는 레이커스의 품에 안긴 채로 한참을 넋을 놓고 있다가, 우리가 완전히 바깥으로 빠져나오고서야 깊은숨을 토했다.
“……와아.”
그냥 흐리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하늘이라는 게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 줄 몰랐다.
“아름답군요.”
‘아, 그래. 레이커스도 아주 오랫동안 흐린 하늘만 봐 왔겠구나.’
흐린 날이 반복되는 시간의 흐름에 갇혀 있었으니까.
나보다 훨씬 더, 맑은 하늘이 그리웠을지도 모른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레이커스의 옆얼굴이 보였다.
보기 좋게 드러난 이마에서부터 수려한 콧날, 도톰한 입술, 남자다운 턱선으로 이어지는 날렵한 라인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그중 유독 내 시선을 사로잡은 곳은, 파란 하늘의 색을 그대로 투영한 눈동자였다.
평소 같은 잿빛이 아니라, 푸른색이 덧입혀진 눈의 색은…… 정말이지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마치 구름이 걷힌 하늘처럼.
“아이고, 공작님! 아르비체 님! 정말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언제까지라도 감상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넋을 놓고 있던 나는, 호들갑스럽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오랫동안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지, 추위에 코끝이 새빨개진 트리버 반장이 골목 어귀에 서 있었다.
“내려 줘요.”
난 어딘가 창피해져서 레이커스의 어깨를 두드렸고, 그는 그제야 나를 내려놓아 주었다.
하지만 레이커스가 날 내려놓고서는 무릎을 굽혀 가며 구겨진 내 치맛자락을 톡톡 털어 주는 바람에 괜히 주목만 더 샀다.
그는 꼭 이렇게 한 번씩 나를 어린애 다루듯 할 때가 있었다.
‘트리버 반장이 또 오해하잖아.’
아니, 오해가 아닌가?
나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레이커스의 얼굴이 생각나서 뜨거워진 양 볼을 손으로 가리는데, 트리버 반장이 레이커스를 향해 말했다.
“왕궁에서 벌어진 큰일에 대해서는 이미 들었습니다. 이제부터 호위는 저희가 맡겠습니다. 따로 더 필요한 일이 있다면 분부만 해 주십시오. 범인도 저희가 색출……!”
새하얀 수염이 더 자라서 볼을 뒤덮고 있는, 산타클로스같이 생긴 반장이 흥분해서 이야기하는 모습은 솔직히 좀 웃겼다.
‘아무리 게임 속 경찰은 무능한 게 도리라고는 하지만, 너무 무능한 거 아냐?’
이제 와서 범인을 잡겠다고 저렇게 다짐까지 하는 모습이라니.
‘뒷북도 정도껏 하지.’
난 쓰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
“범인은 이제 괜찮아요. 파크의 치안에만 신경을 쓰시면 될 것 같네요.”
“네? 아무리 그래도…….”
레이커스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한 반장의 어깨를 짚었다.
“그간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범인은 이미 잡았습니다.”
트리버 반장이 눈이 동그래져서는 나와 레이커스,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경비병들을 바라보았다.
“……네? 범인을 잡았다니…… 모리슨 알터…… 말입니까?”
레이커스가 다시 한번 반장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합시다. 지금은 좀 쉬어야겠습니다.”
“네……?”
“너무 오랫동안 이 사건에만 매몰되어 있었던 것 같아서요.”
레이커스가 길게 한숨을 쉬며 그렇게 속삭이곤 내 손을 꽉 쥐고 천천히 골목을 벗어났다.
“사, 사정 청취…… 공작님?”
“자세한 이야기는 저와 하시죠.”
“전 여길 봉인하는 걸 도와야 해서…… 아르비체 님, 나중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레이커스에게 얼떨떨하게 끌려가는데, 뒤에서 차례로 트리버 반장, 마리나, 앨라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좀…… 좀 더 지켜보다 오지 않아도 괜찮아요?”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닙니다. 아르비체와 좀 걷고 싶습니다. 어디든 가고 싶습니다. 뭐라도 좋으니…….”
난 고개를 옆으로 돌려 묘하게 들뜬 목소리로 말하는 레이커스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도 레이커스가 아름답지 않은 순간이 없었지만, 지긋지긋하게 그를 억눌러 왔던 어둠에서 벗어난 그는 훨씬 더 보기 좋은 모습이었다. 보기만 해도 내 속이 다 후련해질 만큼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의 미소가 옮아서 볼이 폭 파이도록 웃었다.
기분이 먼저인지, 미소가 먼저인지 잘 모르겠다.
일단 웃고 나자, 내 마음속의 안개도 확 걷히는 기분이 들었다.
머릿속을 복잡하게 채우고 있던, 게임에서 나가야 하는지, 레이커스와 내 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그런 문제들에서 조금 멀어진 느낌이었다.
“웃으니까, 보기 좋습니다.”
“……고마워요. 레이커스도요.”
레이커스가 죽은 사람도 홀릴 수 있을 듯한 미소를 흘렸다.
그러곤 분수대가 놓이고 하얀 돌이 깔린 큰 광장의 한복판으로 나아가며 나를 양손으로 번쩍 들어 올리곤 빙글빙글 돌았다.
내가 입은 새하얀 드레스 자락이 허공에 큰 원을 그렸다.
“꺅! 뭐, 뭐 하는 거예요! 레이커스!”
“왜 그럽니까?”
“지, 지금…… 지금…… 꺅! 무서워요.”
“제가 잘 잡고 있질 않습니까?”
레이커스가 보기 좋게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귀엽고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한 웃음은, 내가 보기에도 나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그의 마음을 의심한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는 나를 내려놓으며 나를 제 품에 폭 껴안았다가, 어린아이와 비행기 놀이라도 하듯 나를 다시 번쩍 들어 올렸다가 또다시 껴안았다.
“뭐, 뭐 하는 거예요. 사람들 다 봐요.”
“하하, 좀 보면 어떻습니까. 이렇게 좋은 날인데. 오늘은 저한테 맞춰 주셔야 합니다. 기분이 좀 좋거든요.”
기분이 좋다는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아도 이미 알겠다.
너무 잘 알겠다.
‘……어쩜 좋아.’
솔직히 말해서, 웃는 그가 너무 좋았다.
그의 웃음에 나를 향한 애정이 듬뿍 담긴 것도 좋았다.
아까부터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고, 입꼬리가 치솟지 않도록 애를 써 보고 있지만 이미 나도 모르게 그를 따라 웃고 있을 거다.
“……뭘 그렇게 하고 싶은데요?”
“카넬레도 먹고, 홍차도 마시고요. 새 드레스를 맞추는 것도 좋겠군요. 그리고 약혼반지도요. 음, 돌아가는 길에는 아이들에게 선물할 물건도 사는 게 좋겠군요. 그리고 공연도. 같은 공연만 수십 번을 봐서 지겨운 마당에, 이제 좀 다른 것을 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레이커스는 정말 속에 담아 둔 게 많았는지, 내가 묻기가 무섭게 술술 대답을 늘어놓았다.
어찌나 속사포처럼 늘어놓는지 뭐라고 하는지는 잘 듣지도 못했지만, 길고 남자다운 커다란 손으로 손가락까지 꼽아 가며 평소에 그가 좋아하는 일들을 하나하나 나열하는 그의 모습은 진짜 사랑스러웠다.
‘그래…… 그렇겠지.’
지금까지는 반복되는 시간을 버티기 위해 그런 사소한 즐길 거리에라도 의지해야만 했다면, 이제는 정말로 즐기기 위해 즐겨도 좋았으니까.
“좋아요, 뭐든 해요. 같이.”
레이커스가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능청스레 눈을 가늘게 뜬 채 웃으며 되물었다.
“정말로?”
“그럼요.”
내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자마자, 레이커스가 내 허리를 잡고 다시 들어 올려 제자리에서 한 바퀴 빙 돌더니 나를 내려놓았다.
“생각보다 쉽게 동의하시는군요.”
“……네?”
“분명히 대답하신 겁니다.”
“……제가요? 뭘요?”
레이커스에게 그런 표정이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그는 퍽 장난꾸러기같이 눈썹을 살짝 찌푸려 가며 윙크해 보였다.
“리어먼드가에 안주인이 생긴다고 통보하러 가야겠군요.”
“……네? 그게 무슨…… 아까, 무슨 말 했는데요?”
“이미 대답하셨잖습니까? 설마 제 말을 잘 듣지도 않으신 겁니까?”
“……그런 게 아니라요. 응?”
레이커스가 웃음을 터뜨리며 내게 허리를 숙였다.
아까, 그가 나를 안고 빙글빙글 돌 때부터, 이 광장에 있는 수십 개가 넘는 눈이 우리를 주목하고 있는 것을 이미 알았다.
내가 슬쩍 고개를 돌려 주위를 바라보면 시선들이 우르르 달아나는 게 느껴질 정도로 많은 눈이 우리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런 곳에서 대체 뭘 하는 거야?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를 들자, 내 얼굴 위로 퍽 가까이 기울여진 레이커스의 얼굴에서 입술만 유독 눈에 들어왔다. 딱 보기 좋은, 장미를 닮은 붉은 입술이.
“……자, 잠깐만요.”
“아르비체.”
“레, 레이커스! 이, 이런 곳에서!”
“사랑합니다.”
부드럽고 나지막한 속삭임에 나는 더 이상 반항할 말조차 떠올리지 못했다.
내가 딱딱하게 굳은 사이에, 그는 신이 난 듯 내 볼과 이마, 코, 눈썹에 차례로 키스하고서 내 입술 위에 가볍게 제 입술을 부딪치곤 물러났다.
“정식 청혼은 반지를 맞춘 다음에 다시 하죠.”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종알거리는 말에, 굳어 있던 몸이 간신히 움직였다.
“처, 청혼이라고 했어요? 지금?”
레이커스가 눈을 깊게 접으며 웃었다.
“제가 볼 때 아르비체는 차라리 바쁜 게 잘 맞는 것 같습니다.”
“……네?”
“가만히 두면 쓸데없는 고민을 머리 터지게 할 것 같은데, 그러다가 달아나기라도 하면 그땐 큰일 아닙니까?”
“……그, 그게 무슨 말이에요?”
“생각보다 사치품 쇼핑은 재미가 있습니다. 약혼이라는 명분이 있는 참에 괜찮은 걸로 좀 골라 보죠.”
나는 뒤늦게, 내가 어떤 말에 동의해 버린 건지 눈치챘다.
“그런 게 어딨어요!”
레이커스가 소리 내 웃더니 내 손에 제 손을 꽉 깍지를 꼈다.
그리고 내 눈을 들여다보며 진지하게 속삭였다.
“제가 괴물이라서 싫다면, 미리 말씀하십시오. 기회는 지금 한 번뿐입니다.”
“레이커스, 잠깐만요.”
“아시다시피, 제가 좀 누굴 쫓고, 집착하고 이런 거엔 소질이 있는 파크의 개라서요. 지금이 지나면 앞으론 이 손을 놓을 생각이 없습니다.”
‘……뭐야, 이게 프러포즈야, 아니면 협박이야?’
한꺼번에 폭탄처럼 늘어놓는 이야기들에 심장이 너무 뛰어서 생각을 제대로 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나는 웃을 수도 없고 화를 낼 수도 없어서 그냥 멍하니 저를 괴물이라 부르는 아름다운 남자를 올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