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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125화 (125/130)

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125화

나는 눈앞에서 반짝이는 메시지를 바라보았다.

선뜻, ‘네’라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게임 안에서 눈을 뜨고 day 1이라고 적힌 시스템 창을 보면서부터, 이 지긋지긋한 공포 게임 속에서 나가는 것만이 나의 목표였는데.

저걸 선택하면 내가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하는데도, 서슴없이 그걸 선택할 수가 없었다.

‘……이젠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

어물쩍 망설이다가 창을 그냥 닫아 버리자, 또 하나의 메시지 창이 떴다.

[True End의 클리어 보상으로, 원할 때 언제든 접속을 해제할 수 있습니다.]

‘다행이야. 지금 당장 선택해야 하는 건 아니라서.’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괜찮습니까?”

부드러운 음성과 함께, 큼직하고 익숙한 손이 내 이마를 살포시 짚었다.

“괜찮아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부작용은 없는 겁니까?”

“아까 빛난 거요? 그런 것 같아요. 이렇게 멀쩡한걸요.”

“그럼 그 표정은, 뭡니까?”

레이커스가 물어보고서야 나는 멍하니 빠져 있던 상념에서 벗어나 퍼뜩 고개를 들었다. 달콤해 보이는 잿빛 눈동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그보다 한층 더 달콤해 보이는 도톰한 입술이 내 머리 바로 위에 살짝 벌어진 채 있었고…….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레이커스의 눈썹이 의아함을 표하며 꿈틀 움직이고서야, 나는 한 번 더 정신이 들었다.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위를 휙휙 둘러보자 내가 움직이기만을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는 경비병들이 보였다. 마리나는 앞장서서 계단을 오르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고, 앨라이도 멀지 않은 곳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게 보였다.

‘어후…… 정신 차리자.’

난 내 볼을 두어 번 두드리고서 크게 숨을 쉬었다.

내가 천천히 계단 쪽으로 걸어 올라가기 시작하자 일행들이 나와 레이커스의 뒤를 따랐다.

“제가 안아 드리죠.”

몇 계단 걷기도 전에, 레이커스가 내게 제안했지만 난 이 많은 사람 앞에서 그에게 달랑달랑 안겨 갈 자신이 없었다. 생각만 해도 부끄러웠다.

“괜찮…… 으악!”

나는 길디긴 치맛자락을 밟고 발을 헛디뎠다. 양손으로 치맛자락을 붙들고 있었기 때문에 볼썽사납게 이마로 넘어지기 직전, 레이커스가 내 몸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워낙 안톤이 장인 정신을 발휘해서 만든 드레스라, 이 많은 계단을 오르기엔 좀 불편할 겁니다. 구두도 신었지 않습니까.”

“……하지만.”

지켜보는 눈이 이렇게 많은데……?

특히 레이커스에게 안기자 눈높이가 더 잘 맞아서 자꾸 앨라이와 시선이 부딪치는 게 어딘가 너무 창피했다.

“넘어질 때마다 안는 것도 방법이긴 합니다. 그것도 괜찮겠군요.”

레이커스가 장난치는 목소리를 듣다가 문득, 그가 장난치는 것을 들은 게 언제 적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뭔가 여유 있어진 것 같아.’

나는 그의 목에 팔을 감고 슬쩍 고개를 들어 레이커스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안도와 편안함이 깃들어 있었다.

‘나도 이 게임에 들어와서 오래 고생했지만…… 레이커스는 나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오래 고생했으니까…….’

드디어 이 게임이 끝났다는 것에 대한 감상이 남다를 거다.

아주 소중한 것을 안고 있듯, 나를 양팔로 꼭 안아 들고 있는 감각이 새삼스레 느껴졌다.

‘그리고…… 이번이 내 마지막 기회라고 말했으니까. 무사히 잘 끝난 게 그도 기쁘겠지.’

안겨 있는 것이 창피해서 슬쩍 얼굴이 뜨거워진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생각이 들자 얼굴이 아주 전자레인지에 1분 30초 돌린 호빵처럼 따끈따끈해졌다.

난 그가 내게서 고개 돌리는 것을 보곤 얼른 레이커스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어 버렸다.

이렇게 폭 안겨 있는 걸 남들에게 보이는 것도 창피한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 레이커스와 이렇게 가까이에서 얼굴을 마주하는 건 더 자신 없었으니까.

뚜벅. 뚜벅.

레이커스 특유의 발을 끌지 않는 또렷한 발자국 소리를 멍하니 들으며 흔들흔들 몸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고 있자니, 최면에라도 걸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직 커다란 고민이 남아 있는데도, 마음이 점점 편안하게 가라앉았다.

절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 거니까 한결 개운한 덕분이겠지.

‘그래도 성인인데, 이렇게 번쩍 들려서 안겨 다니니까 어린애라도 된 것 같아.’

콩콩, 빠르게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난 멍하니 상황을 정리해 보았다.

랑비엘은 이렇게 없어지고, 랑비엘의 협력자도 잡았고…… 그러면 이제 그 이상한 거미 크리쳐도 나오지 않게 되는 거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나는 묘한 결론에 도달했다.

‘근데, 그러면 범인이 사라진 공포 게임은 어떻게 되는 거지?’

더 이상 공포 게임이 아닌 것 아닐까?

‘만약 그러면…… 그러면 시간이 다시 루프 되는 것도 없을 테고…… 레이커스도 저주처럼 혼자 기억을 간직해야 하는 일도 없게 될 테고…….’

난 묘한 결론에 도달해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러면…… 레이커스가 굳이 나를 좋아할 이유가 뭐가 있어?’

그런 생각이 들자, 그가 나를 안고 있는 게 괜히 불편하게 느껴졌다.

나는 축 늘어진 판다처럼 그의 품에 나를 온전히 맡기고 있던 자세를 슬쩍 고쳐 상체를 일으키며 생각했다.

‘그렇잖아. 지금이야 내가 유일하게 기억을 공유할 수 있는 소중한 사람이라서…… 내가 아니면 안 되는 거잖아.’

그런데 만약 공포 게임의 비틀린 고리가 해결되고, 시간이 순조롭게 순리대로 흘러가게 된다면?

‘그러면 난 그냥 일개 가정교사일 뿐인데.’

지금까진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내가 레이커스에게 부족한 존재라는 생각 같은 건.

그도 그럴 게, 상대는 공작님이고 나는 한낱 가정교사라는 생각 같은 걸 하기에는 당장 눈앞에 놓인 다른 문제가 너무 컸으니까.

당장 살아남는 문제가 훨씬 시급했고, 레이커스는 내게 그냥 아주 잘생기고 반반한 살인마 후보 공작님에 불과했으니까…….

그래서 리베아 제논과 그 패거리가 내게 레이커스의 부인 자리를 노린다느니, 분수도 모른다느니 하고 떠들 때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은 거다.

‘그런데 이 세계에서 계속 살아갈 거라고 생각하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조합이긴 하지.’

갑자기 기가 죽었다.

아무도 내게 뭐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을 탐내기라도 한 것처럼 마음이 쪼그라들었다.

‘이 게임에서 나가 버리면 그만이야. 그러면 그냥, 레이커스는 내게 한 명의 캐릭터에 지나지 않고…… 그러면 이런 생각도 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시스템 창으로는 시선도 가지 않았다.

‘……나, 사실은 돌아가고 싶지 않은 거구나.’

아까는 몰랐던 내 본심을 이제야 알겠다.

‘……현실에서 나는, 이 게임을 아주 좋아하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지만, 여기에서의 나는 하루하루가 다르게 재밌었고…… 매일이 특별했어. 잊지 못할 정도로.’

그리고, 레이커스도.

레이커스의 생각을 떠올리자, 점점 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게 되면서 가슴 한쪽이 찌르르 울렸다.

그가 내게 뭐라고 한 적도 없는데도, 어쩐지 레이커스가 나를 안고 있다는 사실이 점점 더 거북하게 느껴졌다.

입술을 깨물며 잠깐 가만히 있다가, 난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내려 달라고 졸랐다.

“내려 줘요.”

“지금 말입니까? 거의 다 오긴 했습니다만…….”

“내려 줘요.”

“아르비체? 고개를 들어 보세요.”

내려 달라는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평소엔 내가 밀어내는 척만 해도 손을 물리는 주제에 지금은 걱정스럽게 내 얼굴을 더 들여다보았다.

난 시선을 피하려 했지만, 레이커스의 어깨에 고개만 더 파묻는 꼴이 되어서 어쩔 수 없이 천천히 고개를 들고 그를 마주 보았다.

부드러운 잿빛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했습니까?”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런 것치고는, 꽤 우울해 보입니다만.”

그는 나를 달래려는 듯했지만, 내가 그에게 뭐라고 할까?

그저 완벽하기만 한 그가 내 마음의 한 톨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까?

레이커스가 나를 꽤 지그시 들여다보곤 천천히 다시 입을 뗐다.

“제가 말했죠. 참 읽기 쉬운 편이라고.”

“……그래서요?”

“도망갈 생각입니까?”

‘헉.’

난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듯해서 그를 다시 올려다보았다.

“……무, 무슨 말이에요?”

“아까부터 생각했습니다. 아르비체는 이제, 어떻게 할까? 그런 생각이요.”

“……그게, 무슨…….”

“저번에 아르비체가 말했죠. 이곳이 그대에게는 소설 같은 곳이라고. 그러면 이제 최종장을 덮은 것 아닙니까?”

‘정말로, 내 표정에서 다 보이나 봐.’

나는 뭐라고 대답도 못 하고 얼떨떨하게 그의 얼굴을 마주보기만 했다.

레이커스가 나를 더 꽉 감싸 안았다.

남들이 보기에는 모르겠지만, 나만은 느낄 수 있었다.

절박함마저 느껴지는, 포근한 손짓을.

“가지 마십시오.”

“……레이커스.”

“당신이 누구인지는 묻지 않겠습니다. 그냥, 당신이 당신이면 됩니다. 제겐 그냥 당신이 아르비체이고, 샤인과 루나에게도…… 아니, 그냥 제게 필요합니다.”

“레이커스, 그게…….”

“아니면, 제가 따라가겠습니다. 어디로 가든, 저와 함께 가시죠.”

확신 어린 어조의 그의 목소리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레이커스, 왜요?”

머리로는 이런 말을 하면 내게 불리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나도 모르게 말이 입으로 튀어나왔다.

“저를 그렇게 잡을 이유가 뭐가 있어요?”

레이커스가 뭐라고 대답하려는 순간, 대열의 앞쪽에서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나와 그는 동시에 말을 잃고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네모나게 뚫려 있는 지하도의 입구를 통해 새파란 하늘의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구름이라곤 한 점도 없는, 파란 하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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