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121화
랑비엘의 곁에는 얼굴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챙 모자를 푹 눌러 쓴 여인이 함께 서 있었다.
화려하기 짝이 없는 드레스를 걸친 이들만 가득한 왕궁에는 어울리지 않는, 비교적 남루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그냥 보기에는 그뿐이었다.
수상할 점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난 이제 알아.’
파리하게 변해 있는 입술만이 보이는 저 여인이 모리슨 알터의 부인, 아리아 알터라는 것을.
그리고 에스코트하고 있는 게 아니라, 인질이라는 것을.
‘그래…… 지난번에도 분명 파트너가 있다는 것은 알았는데, 그 파트너가 누군지는 관심을 두지 않았어.’
모든 일이, 내가 그를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일처럼 느껴졌다.
“이거, 이번 연회의 주역들께서 한자리에 모여 계시는군요. 저도 한자리 끼워 주십시오.”
랑비엘이 빙긋빙긋 웃으며 우리를 향해 말했다.
블란테 공주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뻔뻔하게 응수하며 랑비엘에게 따라오라는 듯 턱짓을 했다.
“뭇 여인들의 가슴을 흔들고 있는 사내가 아닌가. 함께 이야기를 나눠 준다면 나야 눈이 즐겁겠군.”
랑비엘이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연회장을 슬쩍 돌아보고 우리를 다시 바라보았다.
나는 그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왕궁 경비병이 빼곡하게 배치가 되어 있는 것에 그가 뭔가를 눈치챘을까 봐 어깨를 움츠렸다.
하지만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봤을 뿐이었다.
“이렇게 귀한 분들과 함께할 수 있다면 영광이죠.”
그의 둥글게 웃는 눈동자 안에 까만 구름 같은 것이 보인다면 착각일까?
절로 도끼를 바닥에 끄는 소리가 연상되었고, 까만 가면을 쓰고 있던 납치범에게 갇혀 있던 시간이 생각났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키메라.’
나는 등골을 타고 오싹 타오르는 소름을 떨치려 노력하며 그 단어를 중얼거렸다.
키메라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 속성일지도 모른다.
랑비엘도 그 오망성 진을 통해 피를 흡수했다면, 키메라라고 부를 수 있는 거니까.
천천히 정원을 향해 걸어가는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경비대들이 차례로 따라붙었다.
공주의 행렬이니 당연히 호위가 붙는 것이기도 했지만, 그 경비대들은 나와 앨라이 쿠스, 그리고 공주님의 합작이기도 했다.
스무 명이 넘는 기사들이 우리를 멀고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우리는 연회 홀을 빠져나가 정원에 나가 섰다.
아름다움만을 위해 치장한 차림새에, 정원의 차가운 공기는 썩 춥게 느껴졌다.
나는 정원의 너른 공터를 향해 걸으며 계속 랑비엘을 곁눈질했다.
이젠 랑비엘의 협력자도 모두 포획한 상태다. 아리아 알터와 랑비엘이 잠깐이라도 떨어진다면, 랑비엘을 덮칠 일만 남았다.
‘딱 한순간, 한순간의 틈만 있다면.’
공주님이 슬쩍 레이커스의 뒤쪽으로 빠져 걸었고, 어느새 랑비엘을 포위하는 형세가 되었다.
“킥.”
우리가 공터에 막 도착한 순간, 랑비엘의 입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뭐가 그렇게 재밌지?”
레이커스가 다그치자, 랑비엘이 킬킬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창백한 볼의 한가운데까지 입꼬리가 올라와 보이는, 입이 이상하게 길어 보이는 웃음이었다.
“큭큭, 그럼 재미가 없겠습니까? 다들, 이렇게까지 절 위해 무대를 준비해 주셨는데.”
‘눈치챘다.’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께를 누르며 등 뒤로 권총의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무슨 말이죠?”
내 물음에 랑비엘이 픽픽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슬쩍 내게로 비틀었다.
인간이 고개를 틀 수 있는 각도가 아닌, 그보다 더 깊게 고개를 돌린 기묘한 각도였다.
“절 멍청이로 아시는군요. 저도 깜박깜박, 기억이 이어지곤 한답니다. 크크크크크, 크크크. 다 됐는데…… 다 됐는데, 말입니다.”
랑비엘의 중얼거림이 들림과 동시에, 주위가 검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공포 게임을 플레이할 때, 결정적인 장면에서 시계가 더 어두워지는 것처럼.
‘……저게 뭐야?’
랑비엘의 얼굴이 마치 촛농처럼 군데군데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는데도, 워낙 기괴한 모습 때문에 그 순간이 아주 길게 느껴졌다.
얼굴 가죽이 녹아내리고 그 아래에 있는 근육이 다 드러난 뒤 랑비엘이라는 인간 자체가 녹아서 사라지듯 바닥으로 흘러내리는 과정은 끔찍하기 그지없었으니까.
“히이익!”
“고, 공주님, 뒤로 물러나십시오!”
“괴, 괴물이다!”
경비병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거나 창을 치켜들어 랑비엘을 겨누었다.
하지만 그를 향해 달려들지는 않았다.
랑비엘이 인질을 데리고 있으니까. 그를 지금 당장 위협할 수는 없다는 계산인 거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닐 거야.’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순식간에 사라진 랑비엘의 형체 때문에, 아리아 알터는 자유의 몸이 되어 있었다.
‘아냐, 아리아 알터를 인질로 삼은 게 아니야. 그보다 더한 것. 더한 걸 노리고 있는 거야.’
주위를 살피는 내 눈에, 바닥에 드리워진 긴 그림자가 보였다. 워낙 사위가 어두웠기 때문에 금방 잘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여러 개의 다리를 가진 그 그림자는 마치…….
‘거미 모양처럼 보여…….’
랑비엘이 달아났던 경로의 왕궁 정원에서 경비병이 거미가 되었던 것이 절로 떠올랐다.
그리고 내가 납치당했을 때, 레이커스에게 당한 랑비엘이 달아날 때의 모습도 떠올랐다. 창문을 넘어 달아나는 그의 그림자는 한순간이지만 마치 거미의 모습처럼 보였다.
그리고 랑비엘이 출현할 때마다 근처에 거미 크리쳐가 등장했었다.
내가 두 번째 하트를 잃어버린 날도 그랬지.
‘그가 모체인 거야……!’
나는 뒤늦은 깨달음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랑비엘이 인간을 무는 거다.
다른 거미 크리쳐를 만드는 존재가, 바로 그다.
“……모두, 물러나요!”
나도 모르게 고함을 쳤다.
그림자가 재빠르게 움직여 경비병을 포획하려는 순간이었다.
깡!
경비병의 검에 가로막힌 순간에야, 너무 빨리 움직여 제대로 보이지 않던 거미의 형체가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어느새 그림자에서 솟아난 거미 크리쳐는, 그동안 봤던 다른 거미들보다도 열 배는 더 거대해 보였다. 다리에 숭숭 솟아난 가시 같은 털이나 추악할 정도로 거대한 입은 지독히 위협적으로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거미의 머리통이 있어야 할 곳에 놓여 있는 검은 가면을 쓴 인간의 얼굴 때문에…… 너무나도 기괴한 모습이었다.
‘……끔찍해.’
인간도 아니고 크리쳐도 아닌 모습을 눈앞에서 목도하자, 정말로 전신에 소름이 끼치고 본능적인 공포가 몰려와서 뭘 어찌해야 할지 모를 정도였다.
‘대체 뭐를 위해서 자처해서 저런 꼴이 된 거야?’
“왜…… 왜, 막힌 거지?”
거미 위에 올려진 랑비엘의 입에서,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마치 목소리를 변조한 것 같은, 누구의 목소리인지도 알 수 없는 무기질적인 음성이.
경비병은 당황한 랑비엘을 내버려 두지 않고 재빠르게 덤벼들었다. 랑비엘의 공격 탓에 찢어진 옷깃 사이로 새하얀 의복이 비쳤다.
‘앨라이 쿠스에게 신성 기사단을 미리 차출해 달라고 부탁하길 잘했어.’
왕궁에 신성 기사단이 뻔히 서 있으면 너무 눈에 띄니까, 미리 왕궁 경비병의 옷을 입혀 둔 것도.
완력과 기술로는 왕궁 경비대가 우위였지만, 인간이 아닌 존재를 상대하기에는 신성 기사단이 우위였다.
왕궁 경비대와 신성 기사단이 함께 거미를 몰아붙이자, 랑비엘은 당황한 듯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맴돌았다.
나는 그 틈을 타 총을 어떻게 겨눠 보려 애를 썼지만 쉽지 않았다.
‘잘못하면…… 아군을 맞춰 버릴 거야.’
워낙 치열한 공방이었기 때문에 내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 게다가 그조차도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다.
실체가 없는 자를 상대로 경비대의 공격은 오래 버티질 못했다.
랑비엘의 형체가 다시 아래로 허물어진다는 생각이 들기가 무섭게, 그의 다리가 바닥 그림자 여기저기에서 마구 튀어나왔다.
경비병들은 제 등을 노리고 여기저기서 휘둘러지는 거대한 다리를 막기 위해 2인 1조로 애를 썼지만, 그마저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커헉……!”
“윽……!”
여기저기서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이들이 속출했다.
레이커스가 검을 휘두르며 방어를 도왔기 때문에 당장 사망자는 나오지 않았고, 랑비엘에게 물린 이도 아직 없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공주님을 데리고 얼른 도망쳐요!”
나는 아직 몸이 성한 경비병들을 향해 얼른 외쳤다.
어느새 다시 나를 쳐다보고 있던 랑비엘이 가면 아래로 웃음을 흘렸다.
“크크크크.”
“크크크.”
“크크크크.”
랑비엘의 웃음소리는 한 사람처럼 들리지 않았다.
마치, 여러 명의 소리처럼 들렸다.
여자의 목소리도, 남자의 목소리도, 노인의 목소리도, 아이의 것도 섞여 있는 것처럼.
머리카락이 쭈뼛쭈뼛해서 그를 노려보고 있는 사이에, 랑비엘이 나와 레이커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크크크, 그래, 상관없어. 잔챙이 같은 건. 내가 원하는 건 어차피 너희 둘이니까.”
레이커스가 금색 눈썹을 있는 대로 구기며 랑비엘을 노려보았다.
“그런 것치곤 꽤 많은 사람을 끌어들이지 않았나?”
“하하하, 하. 그러면 어때서? 너는, 내 마음을 몰라.”
“마음? 이딴 짓을 벌이는 마음을 이해하고 싶지도 않군.”
“영생을 이미 손에 넣은 네가, 내 마음을 어떻게 알지?”
레이커스의 눈에 저렇게 살의가 넘치는데 당장 달려들지 않은 것은, 오로지 공주가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해서일 거다.
레이커스는 당장이라도 랑비엘을 죽일 듯 바라보며 짓씹듯 말했다.
“영생? 개 같은 소리 하지 마. 난 그딴 거 손에 넣은 적 없어.”
나는 흘끗 주위를 돌아보았다.
랑비엘이 그림자를 통해 공격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안 이상, 경비병들은 몸이 성치 않은 동료들을 꽤 멀찍이 옮겨 두었다.
공주와 아리아 알터도 건물 쪽으로 피신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우리의 말을 들을 사람은 우리밖에 없게 된 셈이다.
“아니? 기억이야말로 영생이다. 기억이야말로, 영생을 손에 넣는 방법이지.”
“……네가 바란 게, 그것인가? 시간 속에 갇혀 반복해서 사는 것?”
“크크, 역시. 역시, 그것 봐. 너를 흡수해야 했어. 처음부터, 너를 흡수했어야.”
나는 뒤늦게 아르비체의 일기장에서 봤던 문구가 다시 떠올랐다.
[누군가, 내가 봤다는 사실만 모르게 해 달라고.]
‘역시.’
랑비엘이 흡수하려 했던 건, 기억을 잊지 못하는 자들이었다.
그가 원하는 게 바로 기억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고작 그걸 위해서 사람을 죽인 건가?”
랑비엘이 입술을 기묘하게 뒤틀었다.
“고작 그거라니. 넌 이해할 수 없어. 나는, 신이 될 거다. 파크를 집어삼키는 시간의 신이.”
랑비엘이 가면을 벗으며 숨을 들이쉬었다.
가면이 사라진 자리에는, 삼십 개는 되어 보이는 각기 다른 색의 눈이 얼굴에 빼곡하게 자라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