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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120화 (120/130)

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120화

“그게 끝이야?”

공주는 태연한 얼굴로 내가 가지고 있는 정보를 더 털어놓으라고 종용했다.

오늘이 오기 전에 미리 도움을 청할 수도 있었다. 어제 사람을 보내 범인이 랑비엘이라는 것을 알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이 사건을 숨겨 온 것은 누굴 믿고 누굴 믿지 말아야 할지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경찰 중 누구를 믿으면 좋을지, 심부름꾼 중 누구를 믿으면 좋을지 확실히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랑비엘 맥레이를 믿었던 실책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으니까.’

나는 숨을 가다듬었다.

그러곤 천천히 내가 알고 있는 정보를 털어놓았다.

범인은 랑비엘이며, 그를 일반적인 인간이라 생각하고 상대했다간 큰코다친다는 사실. 그가 계획하고 있는 인질극의 상대가 바로 공주이며, 인질극을 통해 모리슨 알터에게 범인의 누명을 씌우려 한다는 것까지.

블란테 공주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차분히 웃으며 내 말을 들었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시시각각 놀라움으로 커졌고 때로는 손이 떨리기도 했다.

그녀는 길게 숨을 들이켠 후 레이커스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레이커스는 단정한 얼굴로 블란테 공주를 마주 보았다.

“레이커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사실인가?”

“공주님, 이건…….”

“전부, 다, 라는 거군.”

내가 레이커스의 표정을 쉽게 읽어 낼 수 있게 된 것처럼, 아주 오랫동안 레이커스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고 하는 공주도 그런 걸까?

블란테 공주는 레이커스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그의 표정을 살피곤 작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그 이후로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찻잔만 내려다보았다.

이제는 다 식어 빠진 차를 마실 생각도 않고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던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그 무거운 이야기들을 다 받아들이고 마음을 정리한 듯 한결 가벼운 얼굴이 되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공주의 눈에는 날카로운 결단이 서 있었다.

“알았어, 알겠어. 이제…… 이렇게까지 정보를 물어다 줬으니, 뒷일은 내 몫인 거군.”

공주는 손을 들어 제 경호를 맡은 여기사 한 명을 불러내더니, 그녀에게 뭔가를 속삭이곤 태연하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제 와서 보안에 신경 쓰라는 말을 할 필요는 없겠지. 블란테 공주도, 사건 직전에야 이 말을 전한 이유를 알 테니까.’

그녀의 말을 들은 여기사는 아무런 내색도 없이 아주 일상적인 태도로 물러났다.

나는 그 여기사의 행적을 보지 않으려 무진 애를 썼지만, 자꾸 시선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여기사가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기사 한 명에게 말을 거는 모습까지는 보였으나 그 뒤의 일은 보이지 않았다.

‘잘…… 처리되겠지?’

초조함이 몰려와서, 숨을 어떻게 쉬는 건지도 잊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 지경이었다.

레이커스가 내 손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감각에 퍼뜩 정신이 들어 앞을 바라보자, 블란테 공주가 태연자약하게 홍차를 홀짝이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반짝이는 눈으로 한참 나를 응시하더니, 도톰하고 매끄러운 입술을 열어 말했다.

“아르비체 그린, 그대는 내가 공주라는 것도 알고, 내게 한 말의 무게도 알고 있을 거야. 그렇다는 건, 지금 한 말이 진심이라는 건데…….”

“진정을 담아 말씀드린 겁니다.”

블란테 공주의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이것 봐. 그대는, 굉장히 담대하군.”

“……네?”

“왕궁에서 일어나는 인질극이라니. 어지간해선 상상도 못 할 사건을 내게 말하면서 낯빛 하나 변하지 않았잖아?”

그건…….

그건, 담대해서가 아니다.

공주는 앞에 놓인 찻잔을 쥐지도 못하고 있는 내 손을 꽉 쥐며 제 쪽으로 당겼다.

내 손은 긴장으로 얼어 있었다. 표정은 숨길 수 있지만, 손 온도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곧, 내 미래를 결정지을지도 모를 중요한 순간이 찾아올 텐데 어떻게 긴장하지 않을 수 있을까?

“걱정돼?”

물결치며 흘러내리는 블란테 공주의 까만 흑발 사이로, 그녀의 눈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떻게 경찰도 우리 경비대도 전혀 모르는 정보를 알고 가지고 온 건지…… 상세한 건 나중에 들을게.”

“……네.”

“공작으로부터 왕궁 경비를 강화하라는 이야기를 미리 들어서 어느 정도 짐작하긴 했지만…… 정말 그 일이 일어나는 모양이군.”

공주가 꽤 태평하게 군다고 생각했는데, 경비를 강화하면서 조금쯤은 마음의 준비를 한 모양이었다.

나와 레이커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블란테 공주는 슬쩍 연회 홀을 한 바퀴 둘러보곤 나를 향해 다시 속삭였다.

“이렇게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구체적인 정보를 더 가져왔는데 못 막으면 그건 왕궁의 수치 아냐?”

“네?”

“랑비엘 맥레이…… 공작가의 자재나 되는 자가 범인이라니…… 솔직히, 짐작조차 못 한 이야기니까. 이렇게 정보에 무지한 왕궁 경비대의 수준을 못 믿을 만하지.”

그건, 아니다.

‘왕궁 경비대가 수준이 낮아서 알아내지 못한 게 아니야. 그건…… 그자가 이 게임의 메인 흑막이라서일 뿐이야.’

어떻게 따지고 보면, 흑막을 알아내는 건 NPC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다.

플레이어가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생각해 보면, 내가 여기 들어온 것도 다 이유가있는지도 몰라.’

갑자기 다른 곳으로 생각이 흘러가는 내게, 블란테 공주가 다시 말을 꺼냈다.

“이런 정보를 미리 알아내지 못했으니 신뢰를 잃는 것도 당연해. 하지만 왕궁 경비대야말로 파크의 인재를 거르고 걸러 뽑아낸 정예야. 한번 믿어 봐.”

“……네.”

꽤 고분고분히 대답한다고 생각했지만, 내 대답은 내가 생각해도 기운이 빠진 것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랑비엘이 그 검은 가면을 쓰면…… 정말 상대하기 까다로워져. 사람 같지 않은 움직임에 총알을 맞추는 것조차 불가능했어. 그런 그를 어떻게 대적해야 좋을까?’

내가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자, 공주가 또다시 살짝 웃었다.

“역시, 아르비체. 당신, 마음에 들어.”

“……네?”

‘……갑자기?’

그녀는 내 눈을 들여다보더니 몸을 천천히 뒤로 물렸다. 받침 위에 잔을 두고 손을 완전히 떼자, 그제야 시녀가 다가와 그녀의 찻잔을 비우고 스트레이너를 얹어 따뜻한 홍차를 새로 따라 주었다.

시녀가 물러가자, 블란테 공주가 내게 윙크해 보였다.

동시에 알림음과 함께 창이 떴다.

[블란테 빅토리아 아레나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Lv.2(108/198)]

‘왕궁 경비대를 못 믿었다는 이유로 호감도가 오른 거야? ……아니, 이거 지난 왕궁 연회보다도 더 잘 오르는데?’

내가 당황한 얼굴을 감추지 못하자, 그녀가 홍차를 한 모금 마시고선 재밌다는 듯 말했다.

“거짓말을 못 하는 성격이군?”

“……네?”

“그렇습니다.”

대답은 뜻밖의 곳에서 나왔다.

왜 그런 걸 대신 대답하냐는 뜻으로 레이커스를 쏘아봤지만, 그는 태연히 웃어 보일 뿐이었다.

우리는 왕궁 경비병들이 성과를 올리기를 기다리며 최대한 표정을 숨겨 가며 환담을 하는 척 이런저런 말을 나누었다.

하지만 공주와 한 테이블에 오래도록 머문 탓에, 다른 귀족들이 점점 우리 테이블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쓸데없는 주목을 사는 건 좋지 않은데…….’

괜히 랑비엘의 시선까지 끄는 건 아닌가 걱정하고 있던 찰나, 블란테 공주의 곁에 있다 사라졌던 여기사 한 명이 슬쩍 다시 돌아와 그녀의 귀에 뭔가를 속삭였다.

블란테 공주의 얼굴에 자신감 있는 미소가 드리워졌고, 그녀는 우리를 향해 다시 한번 윙크해 보였다.

“거봐, 괜찮을 거라고 했잖아.”

“그렇다는 것은…….”

“응. 모리슨 알터와 그를 이송하던 여자의 위치를 파악했대. 내가 명령하면 바로 잡아들일 수 있는 모양이야.”

“……정말 다행이네요.”

“신전에서 파견 나온 신성 기사단들이 자원해서 도와준 덕분에 일이 수월해졌다고 하더군. 아무래도 왕궁 경비대가 직접 움직이면 더 눈에 띄니까.”

난 작게 웃었다.

앨라이 쿠스에게 부탁한 것보다 훨씬, 그가 잘해 주고 있는 것이 고마워서.

“왕궁 비밀 통로에 있다고 하던가요?”

내 질문에 공주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응. 그 여자가 왕궁의 내부 인력이더군. 시녀였어.”

어째서 왕궁의 시녀쯤 되는 자가 랑비엘을 돕는단 말인가?

‘랑비엘도 대단한 위치에 있는 잘난 귀족가의 자제인데 범죄를 저지르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어쨌든 사건의 진척이 생각보다 훨씬 빠르다.

나는 당장에라도 가슴을 쓸어내리고 싶은 것을 참으며 얼른 되물었다.

“모리슨 알터의 부인은요? 아리아 알터는?”

블란테 공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위치도 파악된 상태야. 그런데 바로 곁에 랑비엘이 있다기에 자극하지 말고 그냥 두라고 했어.”

레이커스와 나는 시선을 마주했다.

왕궁에서 벌어졌던 사건은 표면적으로 봐서는 공주님을 인질로 한 인질극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아리아 알터를 인질로 한 인질극이었다.

그녀의 신병을 확보하는 게 우선이었다.

레이커스가 내 눈빛을 읽었는지 공주님에게 고개를 돌리고 말을 꺼냈다.

“제가 지켜 드린다는 조건으로, 공주님께 잠깐 협조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블란테 공주가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나보고 미끼가 되라는 말인가?”

“아주 잠깐만 협조해 주신다면, 다른 귀족들이 이 사건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도록 범인을 다른 곳으로 꾀어낼 수 있을 듯하여 드리는 말씀입니다.”

공주는 잠깐 생각하는 눈치였지만 오래지 않아 고개를 끄덕였다.

‘일국의 공주인 나에게, 귀족 여인 한 명을 구하기 위해 미끼 노릇을 하라는 거야?’라고 화를 낼 수도 있었을 텐데.

나는 정치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저 공주는 영민하고 너그러운 성군으로 자라날 게 틀림없다.

내가 경외의 뜻을 담아 작게 인사를 올리자, 공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분홍색의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그녀가 우아하게 웃었다.

“어디 한번 해 보지. 오랜만의 왕궁 연회에서, 연쇄살인범 사건의 화려한 대단원의 막을 내려 보자고.”

나와 레이커스, 블란테 공주가 함께 천천히 연회 홀을 가로질러 이동하기 시작하자, 온 귀족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쏠렸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밌게 나누십니까?”

우리가 테라스 가까이 이동했을 무렵, 유들유들한 목소리 하나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아주 온화하게 웃고 있는 그 사람은 은발의 미남자, 랑비엘 맥레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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