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119화
(뉴*토*끼*지*나*가*던*행*인)
똑똑똑. 똑똑똑.
다음 날 이른 새벽. 나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기 무섭게 문 쪽을 향해 말했다.
“앰버지? 의상실 사람들이랑 같이?”
노크 소리가 갑자기 멈추고 문이 열리더니 긴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머리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앰버는 조금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어떻게 아셨어요? 제가 오는 거 보셨어요?”
난 빙그레 웃었다.
‘미래에서 봤지.’
앰버가 문을 활짝 열자 예상했던 의상실 사람 셋이 그 뒤를 따라 우르르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아르비체 님!”
“안녕하세요!”
“특별한 분이니…….”
“특별하게 꾸며 주실 예정이신 거죠?”
뒷말을 내가 받자, 말을 하던 여인은 깜짝 놀라더니 방긋 웃었다.
“정말 대단하고 영민하신 분이라는 얘기는 들었지만, 이렇게 눈치까지 빠르신 줄은 몰랐는데요?”
미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있어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난 간지럽기 짝이 없는 찬사와 수식어에 대해 뭐라 말을 해 볼까 했지만 결국 말할 틈도 없이 저번과 똑같이 욕실로 끌려갔다.
나는 이미 한번 꾸며졌던 것과 꼭 같은 차림새로 꾸며지는 동안 차분히 거울을 바라보았다.
지난번에는 꾸벅꾸벅 조느라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피부부터 시작해서 머리카락 한 올 한 올까지 모두 신경 써서 꾸미는 과정은 정말 섬세했다.
‘너무 많이 적응해 버렸어, 이곳에.’
나는 거울을 통해 정수리에 보석 박힌 꽃 장식을 올린 아르비체를 빤히 바라보았다.
현실을 살던 나는, 보석을 이렇게 온몸에 걸치게 될 거라곤 생각도 못 했거니와 왕궁이니 연회니 하는 것과도 전혀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아주 익숙한 것처럼 남이 해 주는 치장을 받으며,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아름다운 남자의 에스코트를 기다리고 있다.
‘……정말, 돌아가고 싶은 걸까? 정말로?’
그런 의문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임으로 치자면, 지금이야말로 정말 최종장의 최종 파트일 텐데. 이제 곧 최종 보스를 잡고, 스태프 롤을 볼 때가 다가왔는데…… 그런데 게임 속에 남고 싶다는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정말 이상하지.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얕게 뱉었다.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인지 아닌지도 모르는데, 지금 생각할 일은 아니니까.
똑똑똑.
노크 소리가 다시 한번 들리고, 나를 꾸며 주던 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리고 입을 떡 벌리는 게 보였다.
“……와.”
“세상에…….”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문간에 서 있을 레이커스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슬쩍 시선을 옮기자, 청록색 슈트와 턱시도 재킷을 입은 레이커스가 문간에 서 있었다.
이미 한번 본 모습이라 충분히 적응되었을 텐데도, 다시 봐도 그의 모습은 놀랍도록 아름다웠다. 넋을 잃고 그를 바라보는데, 레이커스가 다시 한번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아름다우십니다.”
지난번과 꼭 같은 대사를 하는 건, 그와 나만 아는 작은 장난일 거다.
레이커스와 내 시선이 부딪혔고, 우리는 그만 작게 웃어 버렸다.
“……어머, 두 분 정말 사랑하는 사이신가 봐요.”
“너무 잘 어울리세요.”
“어쩜 저렇게 두 분의 눈에서 사랑이 뚝뚝 묻어나시는지…….”
주변에서 들려오는 감탄사를 들으며, 우리는 팔짱을 끼고 로비를 향해 내려갔다.
왕궁으로 들어가는 기나긴 마차 행렬을 지나는 동안, 지난번과 달리 확연히 강화된 경비가 눈에 들어왔다.
저번에도 왕궁 이벤트라는 거대 사건을 지원하기 위해 파크 내 온 경찰들이 다 나와서 거리를 관리하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경찰청에 남은 예비 인원도 없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제복 경찰들의 모습이 거리를 도배하고 있었다.
‘레이커스가 연락해 둔 모양이야.’
이것저것을 살필 여유는 시간이 지날수록 없어지고, 왕궁 가까이 다가갈수록 심장이 더 빠르게 뛰었다.
난 6연발 권총에 미리 수호자의 총알을 끼워 두면서 가쁜 숨을 진정시켰다. 머릿속이 다 하얗게 변하는 것 같았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괜찮습니까?”
레이커스의 걱정스러운 음성이 들려오고서야 나는 어느새 우리가 연회장 입구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랑비엘이…… 랑비엘이 나타나지 않을까 봐 걱정되어서요.”
그는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제 생각에 랑비엘이 보존할 수 있는 기억은 아주 일부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만약 아르비체처럼 많은 것을 기억할 수 있었다면 오히려 제게 더 빨리 정체를 들켰을 겁니다.”
“……그렇겠죠?”
“그럼요. 그도 항상 연쇄살인 사건에 관심이 있는 것처럼 굴었기 때문에, 매번 짠 것처럼 똑같은 레퍼토리의 대화를 지겹게 해야 했는걸요.”
그 목소리는 정말 넌더리가 난다는 투여서, 난 그만 작게 웃고 말았다.
레이커스가 그의 팔짱을 낀 내 손을 잡아당겨 제 손으로 꼭 쥐었다.
“너무 긴장하실 것 없습니다. 이번에도 저랑 춤이나 추실까요?”
난 기가 막혀서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이 와중에 춤 같은 것을 챙길 거냐고 물으려다가,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아름다운 잿빛 눈동자를 마주하자 말문이 턱 막혔다.
예전이라면 몰랐겠지만, 이젠 알아볼 수 있다.
그의 눈에도 초조함이 서려 있는 것을.
‘레이커스도…… 이 사람도 불안한 거야.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걸, 그도 알고 있으니까.’
그만큼 나를 소중하게 여겨 주는 거다.
내가 아니어도 레이커스는 계속 시간을 되돌릴 수 있을 테지만, 그때는 내가 없을 테니까.
난 눈을 감고서 깊게 심호흡을 하며 그의 손을 꽉 마주 쥐었다.
레이커스의 손은 어느새 내 손과 온도가 똑같아졌기 때문에, 그의 손과 내 손이 긴장으로 차가워져 있는지 따뜻한지조차 알 수 없었지만 괜찮았다.
그의 손을 맞잡았다는 것만으로 괜찮았다.
‘할 수 있어.’
다시 눈을 반짝 떴을 때, 레이커스가 시종에게 신호를 보냈다.
“레이커스 리어먼드 공작님과 아르비체 그린 남작가 영애가 드십니다.”
시종이 소리 높여 레이커스와 내 입장을 알렸고, 우리는 앞으로 몇 발짝 나아갔다.
우리에게 쏟아지는 수십, 수백 개의 시선 같은 건 이제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 눈들이 나를 대단하다고 찬양하는 것이든, 레이커스와의 사이를 질시하는 것이든 상관없었다.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계단 저 아래에 서 있는 은빛 머리카락의 사내였다.
‘……왔군.’
그 순간 내가 얼마나 안도했는지 알 까닭이 없는 랑비엘은 언제나처럼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안도감 다음에 든 감정은 분노였다.
‘……뻔뻔한 자식.’
능글능글 웃으며 나를 덫에 몰아넣으려 하던 그의 모습이 절로 생각났다.
당장이라도 총을 꺼내 쏴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성급하게 굴었다간 다 잡은 먹이도 놓치는 법이다.
난 최대한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으려 애를 썼지만 잘되지 않았다.
레이커스와 내가 계단을 따라 천천히 걸어 내려가자, 랑비엘이 웃으며 나를 맞이했다.
“많이 긴장하신 모양입니다. 이런 곳은 처음이실 테니까요. 절 의지하십시오.”
다행히도 그는 내 표정을 달리 해석한 모양이었다.
“의지라…… 그래요. 꼭 그렇게 할게요.”
영혼 없는 대답을 남기며 계단 아래를 바라보자, 예상대로 눈꽃 같은 정갈한 남자가 나를 기다리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산호로 만든 새하얀 관이 잘 어울리는, 앨라이 쿠스였다.
지난번과는 달리, 바로 옆에 수호 신관을 셋이나 대동한 모습이었다.
‘하여튼, 매번 의지가 된다니까.’
다짜고짜 이번 왕궁 연회에 있을 일들을 말하고 도움을 청한 건데, 이렇게 나를 믿고 사람까지 동원해 주는 그가 고마웠다.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 앨라이 쿠스에게 다가가자, 앨라이가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분부하신 대로 모두 준비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아르비체 님의 안전을 위해 제 곁에 계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남들에게 들리지 않을 크기로 속살거리는 그에게 난 방긋 웃어 주었다.
“내 귀한 아르비체의 안전을 그리 걱정해 주니 고맙네.”
내가 손을 내밀기도 전에 레이커스가 또 눈치 없이 끼어들어 앨라이의 손을 쥐고 악수했다.
‘이 정도는 그냥 둬도 될 텐데. 부지런하다니까.’
난 기가 막혀 웃음을 터뜨리곤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랑비엘은 계단 아래로 내려오자마자 순식간에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저렇게 무해한 척 연기하다가, 갑자기 사라져서 범행을 저지르러 갈 셈이겠지.’
난 침을 꼴깍 삼키고 앨라이에게 연회 홀의 경비를 어떤 식으로 하면 좋을지 다시 자세히 설명하고서 후다닥 자리를 떴다.
다음으로 레이커스와 내가 향한 곳은 테이블이 놓인 미니바 쪽이었다.
이목을 피해 쉬는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 연기를 하며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자니 예상대로 시종 한 명이 내게 다가왔다.
“공…….”
“공주님께서 찾으신다고요? 네, 얼른 모셔와 주세요.”
마음이 급해서 시종의 말을 가로채자, 시종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며 몸을 돌렸다.
오래지 않아 사람들 사이에서 술렁이는 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얼른 몸을 일으켰다.
인형같이 아름다운, 이 연회장의 주인공이 나를 향해 차분한 걸음으로 다가오더니 레이커스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나는 지난번과는 달리, 제법 몸에 익은 인사를 올릴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공주님.”
“안녕?”
“안녕하십니까.”
“레이커스도 있었네.”
나는 공주가 어딘가 그리움을 담은 눈으로 레이커스를 흘끗 바라보고 얼른 시선을 떼는 것을 보다가, 얼른 자리를 권했다.
공주는 그 짧은 사이에 표정을 능숙하게 감추곤 빙그레 웃으며 분홍색 드레스 자락을 우아하게 감아쥐고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레이커스 대신 내 쪽을 바라보며 재밌다는 듯 웃어 보였다.
“내가 갑자기 왔는데, 놀란 얼굴이 아니네? 왜? 예상이라도 하고 있었어?”
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블란테 공주의 눈에 흥미가 흘렀다. 그녀는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말했다.
“어떤 뜻으로? 레이커스와의 염문 때문인가? 말해 두지만, 난 레이커스에겐 관심 없으니까. 내가 관심 있는 건 그대, 아르비체 쪽이야.”
난 아무래도 이 공주가 너무 좋다.
아마 내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도, 국왕의 극심한 반대 때문에라도 레이커스와 공주는 이어지지 못했을 테지만…… 그래도 이렇게 선뜻 물러나는 게 쉬운 일이 아닐 텐데.
나는 이 공주님을 지키고 싶다.
그리고 이 평화로움도.
파크의 내가 아는 모두도.
나는 빙긋 웃으며 그녀의 말을 받았다.
“공주님, 지금부터 제 말 잘 들으세요. 표정은 바꾸지 마시고요.”
“응?”
“왕궁의 모든 비밀 통로에 지금 당장 사람을 풀고, 모리슨 알터와 그 부인을 찾으셔야 해요. 곧 인질극이 벌어질 예정이라서요.”
부드럽게 웃는 낯을 그대로 유지한 공주의 눈이 레이커스를 흘끗 바라보았다가 다시 나를 바라봤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차를 마시는 그녀가 내 눈을 면밀히 살폈다.
“지금 그 말…… 진짜구나?”
담이 커도 어지간히 큰 게 아닌 공주님이 천천히 중얼거리며 더 깊게 웃었다.
“아르비체 당신, 레이커스보다 더 친해질 가치가 있다니까.”
“당사자가 듣고 있는데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레이커스가 눈썹을 늘어뜨리며 투덜거렸다.
[블란테 빅토리아 아레나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Lv.2(72/198)
호감도 이벤트 : 티파티]
블란테 공주의 의미심장한 웃음과 함께 알림창이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