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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118화 (118/130)

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118화

레이커스가 범인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차라리 나을지도 몰랐다.

나는 이제 거북하지도 않고 무섭지도 않고, 오로지 아름답고 사랑스럽기만 한 이 남자를…… 오만하면서도 지독히 상냥하게 구는 이 남자를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모르겠으니까.

언제든 거절의 말 한마디라도 내뱉으면 레이커스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물러날 줄 알면서도, 나는 한참을 달콤한 키스에 넋을 놓았다. 어린아이가 커다란 막대 사탕을 입에 물고 있는 듯한 충족감 때문에.

“……음.”

우리가 얼마나 오래 입을 맞대고 있었는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을 뻔할 때였으니까.

나는 레이커스에게서 물러나 천천히 눈을 떴다.

바로 코앞에서 레이커스의 금빛 속눈썹이 나와 박자를 맞춰 깜박깜박 팔랑였고, 나만을 담고 있는 잿빛 눈동자 속에 아주 부드러운 감정들이 둥둥 떠다녔다.

그가 손을 들어 엄지로 내 입술을 부드럽게 훔치듯 눌러 주었다.

“조금 부었군요.”

‘뻔뻔하게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어째서 키스할 때보다 지금이 더 부끄러운 걸까.

나는 기가 막혔지만, 얼굴은 돌릴 수 없었다.

항상 지독히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레이커스의 눈동자가 오롯이 나를 담고 있는 광경은 숨 막히게 매혹적이었으니까.

‘피그말리온의 신화를 읽을 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레이커스라는 인물 자체의 매력은 둘째 치고, 조각 같은 아름다움 때문에 자꾸 넋이 빠진다.

‘눈을 감고 키스할 때가 더 나을지도 몰라…… 아니, 그건 아닌가…… 아냐. 지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난 눈을 질끈 감고 도리질을 쳤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재밌다는 얼굴로 나를 응시하고 있는 레이커스의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내 생각을 뭐든 읽어 낼 것 같은 눈동자로 나를 주시하고 있는 것을 보고서야, 나는 화들짝 정신이 들었다.

레이커스의 몸 옆으로 슬쩍 고개를 빼어 창을 바라봤지만, 어두울 대로 어둡기만 한 풍경이라 밖이 보이는 대신 내가 보였다. 머리카락이 제법 흐트러지고, 얼굴이 붉어 보이는 내가.

‘이런 얼굴을 보이고 있었다니.’

내 속내를 쉽게 읽어 낸다고 자부하는 레이커스가 아니라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너무 빤히 보일 것 같았다.

‘진짜 대책 없어. 지금 당장…… 이런 감정 같은 건 미뤄 두기로 했잖아. 레이커스에게도 못 할 짓이라는 거 알잖아.’

내 몸은 레이커스와 문 사이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그의 곁을 빠져나가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순식간에 돌아온 현실 감각과 우울감에 풍덩 빠지자 심장 박동이 겨우 진정되었다.

레이커스에게서 겨우 몇 발짝 떨어지고서야 높이까지 솟아 있는 서재가 눈에 들어왔다.

‘……맞다. 책 찾으러 왔었지.’

이 방에 왜 왔는지도 까먹고 있었다니.

“아르비체.”

천천히 책장으로 가까이 다가가는 나를, 레이커스가 등 뒤쪽에서 불렀다.

나는 몸을 돌리지 않고 웅얼거리듯 대답했다.

“……왜요.”

“사랑한다고 했던 말 기억합니까?”

겨우 진정되었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을 듯 뛰었다.

‘어쩜 저 사람은, 그런 말을 저렇게 쉽게 할까? 나 같으면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을 테고, 가슴이 너무 뛰어서 그 단어를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조차 힘들 텐데.’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자, 레이커스가 나를 등 뒤에서 천천히 껴안았다.

단단한 가슴팍에 등이 안긴 채로, 나는 동굴 속 소리처럼 울리는 낮고 부드러운 저음이 속살거리는 말을 들었다.

“아르비체도 저도 파크에 발붙이고 살기에 너무 독특하고 묘한 존재라는 건 이제 저도 압니다만…… 그래도 그 말, 아직 유효합니다. 이렇게까지 누군가를 애타게 좋아해 본 적이 없고, 곁에 있어도 그리워해 본 적도 없습니다.”

‘……어떡해.’

레이커스가 나를 안고 있지 않았더라면, 나는 정말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을 거다.

내가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에게, 이런 절절한 사랑 고백을 받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우연이며 대단히 행복한 일인지 절실히 느꼈다.

가슴이 아플 정도로 찌르르 울렸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짜릿한 행복감이 맴돌았다.

“아르비체가 고민하는 이유를 어렴풋하게는 짐작합니다만, 제가 생각하는 게 전부는 아니겠지요.”

그는 내 머리카락에 부드럽게 키스하며 속삭였다.

“뭐든 좋습니다. 내일이 지나든 모레가 지나든, 전 당신과 미래를 함께하고 싶다는 것만 알아주십시오. 아주, 오래도록.”

진정한 그의 고백에, 마음속에 한껏 부풀어 올랐던 달콤한 솜사탕은 물에 젖은 듯 한 번에 허물어졌다.

나와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까지 그리는 그의 마음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를 알게 되는 게 너무 행복해서. 정말 고마워서.

그리고 어쩐지 너무 두렵고, 허무맹랑하게 느껴져서.

금방이라도 ‘저도 그래요. 저도, 레이커스와 함께하고 싶어요.’ 하고 말하고 싶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것만으로 힘에 부쳤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대답해 주셔도 괜찮습니다.”

레이커스는 그런 내 마음마저 다 짐작한다는 듯 내 귀에 속살거리곤 나를 품에서 놓아주었다.

“……응. 고마워요.”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그렇게 절절한 사랑 고백에 되돌려줄 말치곤 참으로 소박하고 못난 말이라 면목이 없었다.

레이커스를 돌아보기가 미안해서 굳어 버린 비누 인형처럼 한참을 그대로 서 있다가, 습관처럼 눈앞의 책들을 손으로 훑었다.

손가락에 닿는 감각들을 천천히 느끼다가 내 기억에 남아 있는 책들을 찾아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보자, 오래지 않아 붉은 장정의 책들이 주르륵 꽂혀 있는 것을 찾아낼 수 있었다.

레이커스가 랑비엘과 대화할 때, 나를 쫓아내다시피 하며 제 방에 갖다 꽂아 달라고 했던 그 백과사전이 있는 곳이었다. 권총을 찾아냈던, 바로 그곳.

‘백과사전이라니.’

평소에 볼 일이라곤 없는 책이다.

단어를 찾는 것조차 어색해서, 나는 한참을 더듬거려 그 책들을 순서대로 열어 보고서야 원하던 단어를 찾아냈다.

[파크 : 공원, 유원지, 양식장, 수렵원.]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숨을 크게 들이켰다.

‘양식장, 수렵원.’

“뭔가 찾아낸 게 있습니까?”

마리나가 파크의 뜻을 찾아보라고 한 게, 이게 맞나?

마탑주끼리 전해 내려오는 말이니만큼, 허튼소리는 아닐 거다.

나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그저 멍한 표정으로 천천히 뒤돌아 백과사전의 펼친 페이지를 보여 주었다.

“……너무 과장된 생각이겠지만…… 파크 자체가 크리쳐들을 생산하고 먹잇감을 주기 위한 공간은 아니었을까요?”

내가 펼친 부분을 본 레이커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점점 영문을 모르겠긴 합니다만, 갈수록 정도가 심하군요.”

우리는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백과사전만 내려다보았다.

먼저 입을 뗀 것은 레이커스였다.

그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백과사전의 파크라는 글자를 더듬듯 만지며 중얼거렸다.

“가끔 기묘하다는 생각을 한 적은 있습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크리쳐가 도심에 출몰하게 된 건지…… 시간이 되돌아갈수록 점점 상황이 악화되었으니까요.”

“……그 말은…….”

“어쩌면 파크라는 곳 자체가 정말로 거미를 만들기 위해서…… 혹은, 랑비엘에게 잡아먹히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일지도 모르죠.”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잡아먹히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라는 말이 순간적으로 너무 그럴싸하게 느껴졌다.

‘그래, 그럴지도 몰라.’

애초에 이곳은 게임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잖아.

살인마가 있고, 그 살인마가 제멋대로 누비고 다니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

플레이어들은 그것을 제지하는 것이 아니라 범인을 찾고 진엔딩을 보려고 할 뿐이다.

‘애초에…… 처음부터 이곳은 정말로 사냥을 위한 수렵원이었어.’

나와 친해진 그 모두가, 웃고 떠들며 나와 이야기를 나눈 그 모두가 사냥의 대상으로 분류되어 있었다고 생각하면 등골에 소름이 오싹 끼쳤다.

샤인과 루나를…… 누가 그런 눈으로 본다고 생각하니까, 도저히 견딜 수 없이 화가 치밀었다.

“……레이커스. 내일, 우린 반드시 성공해야 해요.”

앞뒤 맥락 없이 갑자기 던진 말에, 레이커스는 의문을 붙이지 않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랑비엘을 잡겠습니다.”

하지만 그는 드물게 확신이 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덧붙였다.

“솔직히 그 마탑주 할멈의 협력으로 발견한 마법진을 사용한다는 것에 백 퍼센트 신뢰가 가진 않습니다만…… 평범한 방법으로는 죽일 수 없는 놈이니 시도해 보는 수밖에 없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실은 그렇다.

현실은 궁금증이 남아도 그것이 제대로 해소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고, 물음이 그대로 질문으로 남아 있기도 한다. 잡히지 않는 범인도 당연히 있고, 미제 사건이라는 것도 존재한다.

하지만 이건 게임이다.

노력하기만 한다면, 이 공간이 가지고 있는 어떤 물음에 대해 해답을 찾는 게 가능할 거다. 범인은 잡히는 게 당연한 거고, 사건도 어떤 식으로든 풀려야 마땅하다.

그러니까, 랑비엘은 그 마법진으로 죽을 거다.

‘범인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을 믿어야 해. 내가 먼저 믿어야, 그들도 나를 믿어.’

난 책을 내려놓고 레이커스의 손을 꼭 쥐었다.

“해 봐요. 할 수 있어요.”

“네. 다만, 그자가 실체가 없는지라 거기까지 붙들고 갈 수 있을 만큼 타격을 줄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렇게 자신 없는 말을 하다니.

믿을 수 없는 실력을 갖춘 레이커스답지 않았다.

나는 그제야 내가 가진 비장의 아주 비싼 무기를 그에게 공개하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렸다.

아이템 창에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수호자의 총알’을 바라보며, 난 레이커스에게 씩 웃어 주었다.

“제게 다 수가 있어요.”

지난번 그 총알을 쓸 때는 랑비엘을 상대로 그를 맞추는 흉내조차 낼 수 없었다.

‘하지만 레이커스가 있다면, 그리고 왕궁의 시간선을 다시 한번 반복하는 거라면 할 수 있어.’

이번에야말로 틀림없이 그 총알을 아주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내가 너무 자신 있게 굴었던지, 레이커스가 조금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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