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117화
“할멈, 똑바로 알아듣게 말해. 빙빙 돌려서 말하지 말고.”
레이커스가 차갑게 추궁하자, 마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이곳의 열쇠를 관리하는 것은 맞습니다만…… 마탑은 전전대 마탑주님 이후로 다시는 키메라와 관련된 것에 손대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관련 기록도 모두 불태워 버렸고요. 미처 소각 못한 자료가 있다면 발견되는 대로 모두 불에 태우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저희 청에 있는 자료 창고에 불만 나지 않았더라도 이렇게까지 부탁드릴 일은 없었을 텐데요. 오래 묵은 자료들이 싹 불에 타는 바람에…….’
나는 갑자기 이 공간과는 전혀 관계도 없는 기억을 떠올렸다.
‘트리버 반장이 그 말을 했을 때만 해도, 나는 틀림없이 레이커스가 저지른 짓일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면, 레이커스를 범인이라고 오해하기 딱 좋은 그 일도 레이커스가 한 일은 아니었구나.
혼자 고개를 끄덕이는데, 마리나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제가 알고 있는 것은 정말로 이게 전부입니다. 오망성의 마법진은, 불균형을 상징한다는 것.”
“랑비엘의 시체가 저기 있는 건?”
레이커스의 질문에 마리나가 생각을 정리하듯 눈알을 굴리더니 더듬더듬 대답했다.
“남아 있는 기록에는 상세한 설명은 없습니다만…… 그래도 보존이 승인된 아주 일부의 기록에 따르면, 각 꼭짓점에 놓인 재료가 가진 속성을 가운데 있는 존재가 그대로 흡수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속성을?”
“가령, 날개가 있는 존재의 피를 각 꼭짓점에 두고, 가운데에 고양이를 두면…….”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받았다.
“날개 달린 고양이가 된다는 건가요?”
마리나가 나와 레이커스의 눈치를 보듯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참…… 불유쾌한 이야기로군.”
레이커스가 분노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동공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레이커스의 시선을 쫓아 동공을 함께 둘러보았다.
쉽사리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오망성들이 그려져 있다. 작은 오망성들마다 인간의 손자국이 남아 있고.
‘……속성을 흡수한다.’
마리나의 말을 되새기며 오망성들을 둘러보던 나는 나도 모르게 이상한 생각을 떠올렸다.
‘……마치, 게임 같지 않아?’
한번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이 으스스하기 짝이 없는 공간의 모든 일이 어쩐지 이해가 될 것도 같았다.
‘왜, 게임에서는 높은 단계의 보석을 하나 만들기 위해서는 1단계의 보석들을 합성해 2단계로 만들고, 그런 일들을 수없이 많이 반복해야 하잖아.’
그러니까.
‘드래곤과 같은 고차원의 존재가 있는 게 아니고서야, 일반적인 인간들의 피로 어떤 고차원의 속성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인간의 피를 합성해야 한다.
나는 내가 내린 결론에 소름이 끼쳐 양 팔뚝을 내 손으로 감쌌다.
나만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닌지, 동공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난 더듬듯 말을 꺼냈다.
“랑비엘은, 이미 인간 외의 존재가 됐어요. 그는…… 실체가 없어요.”
마리나는 주변을 살피며 웅얼거렸다.
“……그건, 이상한 일이군요. 무엇을 흡수했기에 그런 존재가 된 건지…….”
레이커스가 금방이라도 여기서 나가고 싶다는 듯 주변을 쏘아보더니 문득 말했다.
“할멈.”
마리나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네, 공작님.”
“리어먼드 공작가의 지하에 있는 이 공간도, 처음에는 키메라를 가두기 위한 거였군.”
마리나의 얼굴은 횃불의 노란 빛 아래에서도 눈에 띄게 새하얗게 변했다.
‘아까부터도 새파랗게 질려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질릴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난 묘한 부분에 감탄하며 바닥을 가리켰다.
“……아무튼, 랑비엘을 죽여야 해요. 여기 이 마법진을 파훼하거나 랑비엘의 시체를 다른 곳으로 치우면 죽일 수 있게 되는 건가요?”
마리나는 눈을 깜박이더니 깜짝 놀란 듯 고개를 저었다.
“큰일 날 말씀이십니다. 이게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도 아직 완벽히 모르는데, 잘못 손을 댔다가는 더 큰 일이 날 수도 있어요.”
레이커스가 눈을 찌푸렸다.
“기름을 붓고 불이라도 지피면 되는 거 아닌가?”
마리나는 희끗희끗한 제 머리를 헝클어 놓으며 생각에 잠기더니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키메라의 실험실이 이렇게 깊은 곳에 있는 것은…… 키메라를 쉽사리 죽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외부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거지요.”
“그래서?”
“제가 얼핏 기억하기로는 키메라는 그 존재를 만들어 낸 오망성에 데려와야 소멸시킬 수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레이커스가 입술을 비딱하게 비틀고 웃었다.
“얼핏 기억한다고? 키메라에 대해 자료가 소멸되어 잘 모른다는 것치곤 꽤 상세히 아는군.”
“무,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왜? 나를 죽일 방법을 조사라도 했었나? 국왕이 그리 시켰나?”
마리나가 사시나무 떨듯 떨며 고개를 저었지만, 내가 보기에도 마리나의 부정이 신뢰가 가진 않았다.
난 입술을 깨물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럼, 내일 랑비엘을 어떻게든 포획해서 여기로 데려오면 돼. 그러면 모든 게 끝나는 거야.’
하지만 아직 뭔가, 뭔가의 실마리가 부족한 기분이 들었다.
랑비엘이 손에 넣으려 했던 힘이 뭔지를 모르겠다.
‘역시, 돌고 돌아 같은 질문이네. 랑비엘이 죽이려고 했던 자들의 공통된 속성을 알아내야 해. 랑비엘이 얻으려고 하는 건, 바로 그 점이니까.’
마지막으로 알아냈던 건, 아르비체도 모니카도 안톤도 모두 뭔가의 진실을 알아낸 자라는 거다. 봤다는 것조차 괴로워하는 어떤 진실을.
내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심장이 뛰지 않는 랑비엘을 노려보고만 있자, 레이커스가 내게 천천히 다가와 어깨를 감싸 주었다. 그리고 내 뺨을 제 손등으로 만져 보더니 외투를 벗어 내 몸에 걸쳐 주었다.
“이제 여기서 나가죠. 알아낼 건 다 알아낸 것 같으니.”
나는 뺨에 전해져 온 따뜻한 온기에서 내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를 뒤늦게 알아챘다.
내려오는 계단에서 레이커스가 계속 내 손을 쥐었던 것도, 어쩌면 내가 괜찮은지 체크해 보려 했던 걸까?
어쩐지 얼굴이 붉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난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나도 그 말이 반가운 눈치로 대답했다.
“너무 오래 여기서 머물면 랑비엘이 저희의 방문을 눈치챌 겁니다.”
흔적을 지우기 위해 횃불을 끄는 마리나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내 머릿속에 그녀가 흘렸던 말 중 하나가 계속 맴돌았다.
‘전전대 마탑주님의 기록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파크의 이름을 다시 되새겨 보라고.’
사람의 피를 바쳐서 얻는 게, 자각이라는 말도 이상했는데 그 말은 정말 이상했다.
이름을 되새겨 보라니.
나는 다시 천천히 어둠에 잠기기 시작하는 동공을 한 번 크게 둘러보며 머릿속으로 ‘파크’라는 단어를 한참 동안 웅얼거렸다.
계단을 내려오는 것도 지루하고 힘들었지만, 올라가는 길은 더 지쳤다.
레이커스가 몇 번이고 안아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마리나의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는 건 어쩐지 부끄러웠다. 게다가 동방예의지국 출신이라 그런지, 꽤 나이가 지긋한 마리나가 허리를 꼿꼿이 펴고 계단을 걷고 있는데 내가 안겨 가는 것도 모양새가 영 이상할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간부터는 여기 있었던 일들을 되새겨 보느라 생각에 잠겨 있었기 때문에…… 안아 달라고 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결국 마지막 계단까지 쌕쌕거리는 숨을 몰아쉬며 겨우겨우 올라온 나는, 어스름한 골목에 대자로 드러누워 버렸다.
마리나는 나보다도 더 힘들어 보였는데도 예의 있게 레이커스와 내게 인사했다.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남겨진 기록들을 토대로 알아낼 수 있는 게 더 있는지 조사해 보겠습니다.”
나는 드러누워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마리나의 태도는 정중했다.
“협조가 필요한 것에 대해서는 따로 요청하지.”
“……아, 알겠습니다. 내일과 모레는 본래 마탑을 닫아걸고 수련에 전념하는 기념일입니다만, 특별히 열어 두도록 하겠습니다. 언제든 필요한 것이 있다면 요청해 주십시오.”
“그러지.”
마리나가 절뚝이듯 걸어 골목 너머로 사라지는 뒷모습은 어딘가 가엾었다.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다가 뒤늦게 뻐근한 다리를 주물렀다.
“……어후, 너무 힘드네요.”
레이커스는 부드럽게 웃으며 나를 안아 올렸다.
그러게 왜 그렇게 고집을 부렸냐고 타박하지도 않고, 그냥 날 안아 올려 내 이마에 부드럽게 키스했다.
“이제, 돌아갑시다.”
레이커스는 이 말을 자주 했다. 내가 이 게임 속의 존재가 아니라고 이미 밝혔는데도, 그는 여전히 내게 돌아가자고 말한다.
나는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될지, 내일이 지나도 내가 여기에 ‘아르비체’로 남아 있을지…… 수많은 생각을 미뤄 둔 채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가 리어먼드가의 입구에 도착한 것은 달이 머리 위까지 떠오른 시각이었다.
늦은 시각에도 마중 나와 준 블리에 씨에게 웃으며 인사한 나는 내 방으로 곧장 향하는 대신 레이커스의 방으로 갔다.
레이커스는 가주의 방 앞에서 멈춰서더니, 내가 여기까지 따라온 것이 의아한지 날 흘끗 돌아보았다.
“제 방에 볼일이 있으십니까?”
“아, 네.”
내가 뒷말을 덧붙이기도 전에 레이커스가 부드럽게 웃었다.
“저와 단둘이 좀 더 시간을 보내고 싶으시다면 언제든 환영입니다. 제가 먼저 초대할 것을 그랬군요.”
그 별것 아닌 말이, 왜 이렇게 이상하게 들리지?
그런 게 아니라, 찾아볼 책이 있다고 변명을 하려는 순간 문이 열리고 내 몸이 그 안으로 끌리듯 들어갔다.
어느새 문을 등지고 기대선 자세가 된 내 앞으로, 레이커스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백과사…… 흡.”
최고급 실크보다도 훨씬 더 부드러운 입술이 내 입술을 가볍게 간질였다. 나도 모르게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키스를 되돌리자, 마치 이 순간을 오래 기다려 왔다는 듯 레이커스가 내 입술을 더 깊게 탐닉했다.
숨결에도 색이 있다면, 지금 그의 숨결은 분홍색이 아닐까?
지독히 달콤한 숨결에 숨이 절로 가빠졌다.